내 차 뒤에 있는 차들을 흩어보니 바로 뒤에 있는 승용차 그 뒤에 있는 차에 누군가 타고 있었다.
승용차에 가려 있어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척 하며 그 차의 운전석이 보일 수 있는 곳으로 몇 발자국 걸어 이동했다. 뒤편 골목이 갈라지는 곳에 가로등이 서 있었지만 주변은 어두웠고 차유리가 썬팅이 되어 있는 데다가 실내등이 꺼져 있어서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체격이 작아서 여자처럼 보였고 허리를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식별이 가능 했는데 단발머리 일지도 모르다는 생각이 불현 듯 머리를 스친다.
만약 단발머리라면... 차 번호 정도는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그 차 앞까지 가서 차 번호를 보고 오는 건 좀 어색해서 난 내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고 담배를 피우며 기다렸다. 단발머리가 탄 차량은 기아차 아이보리색 소울처럼 보였는데 차가 서 있는 방향과 시동을 걸고 있었다는 점에서 곧 내 차 옆으로 지나갈 것이고 그 때 운전자가 누군지와 차량번호를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단발머리가 아닐 수도 있으니...
5분 쯤 시간이 흘렀을까? 소울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오피스텔에서 김유미가 나오더니 내가 있는 반대쪽 골목길을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오늘 김유미와 시간을 보내면서 든 느낌으로는 그녀가 이유성에게 나와의 정사에 대해 말하지 않은 듯 했는데 그건 내게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녀와의 첫 정사가 억지스러운 면이 많았고 아직까지 내가 일방적으로 그녀를 원하는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섹스를 나눌 때 그녀의 몸짓과 나와 이야기 할 때 절제된 언어 선택, 방해받지 않는 시간에 약속을 정한 것 등 여러가지 면으로 판단해 볼때 김유미는 나에게 자신의 공간을 내주고 싶은 지도, 아니 내 연락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남편도 있고 젊은 애인마저 있는 그녀가 왜 나에게 까지 마음을 허용하는 걸까? 상냥한 목소리와 청순해보이는 얼굴때문에 가려진, 터질것 같은 젖가슴과 엉덩이를 흔들며 다리를 벌리고 쾌락을 참지 못해 교성을 뱉어내는 김유미... 그녀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알아버린 나에게 더 이상의 블라인드는 의미가 없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그녀가 자신에게로 향한 남자의 어긋난 욕망마저도 안을 수 있을 만큼 따뜻한 여자라고 해석하는 게
옳은 방향이라고 하더라도, 당분간 그녀에게 기대어, 비워내도 며칠이면 다시 가득 차서 날 자극하는 내 정액들의 명령을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행운아다.
길거리에서 10만원 짜리 자기앞 수표를 100장 주운 것보다 더 큰 행운이다. 김유미와 난 앞으로 몇 번이나 알몸을 부벼댈 수 있을까? 그녀와의 정사는 한 번에 얼마로 계산하면 적당할까? 10만원.. 아니 20만원..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에 의해서 가치를 점점 적게 계산해야 합리적인가?
백미러로 소울의 운전석 쪽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누가 내리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담배를 한 대 더 피워 물었다. 막연한 시간을 보내야 할 때 담배는 큰 위안이 된다. 수명을 깎아 먹는다고 하더라도...
김유미가 종종 걸음으로 사라진 지도 20분은 지난 것 같은 데 왜 안 움직이지? 내가 잘못 봤을까? 자동차 시동이 걸려 있는 소리도 잘못 들었나?
다시 한번 가볼까? 아무도 없으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는데...
난 담배를 문 채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골목길 가운데로 걸어나가서 천천히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차 바로 곁으로 지나가면서 운전석 쪽을 보기 위해 고개를 슬쩍 돌렸을 때 차 시동이 꺼지더니 누군가 내렸다.
단발머리의 여자...
난 걸음을 멈췄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 역시 나를 보았다. 우리는 4~5미터 쯤 떨어져서 서로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녀가 너무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난 계속 해서 쳐다보는 게 머쓱해져서 살짝 시선을 돌리면서 담배를 빨고 연기를 내 뱉었다. 뭐라고 아는 체 하기도 이상한 관계여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단발머리가 창문으로 훔쳐 보고 있었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척 해야하는 지 전혀 모르는 일처럼 해야 하는 지 역시 감이 없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단발머리가 가지 않고 있는 이유는 뭘까? 저 여자가 뭐라고 나에게 멘트를 던지면 그것에 맞춰서 반응을 할 수 밖에 없을 듯 한데...
10초 정도 지나서 단발머리가 따지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왜 저기서 나온 거지?"
"응?.. 그게 우리 아이 은물 수업을 저기서 받아. 뭘 두고 온 게 있어서..."
일단 시치미를 뗐다. 대충 넘어갈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내가 묻는 말은 그게 아니야. 그 여자와 언제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 였냐는 거지..
다 알고 있으니까 시치미 떼지 말고..."
단발머리는 자신이 훔쳐봤다는 이야기는 쏙 빼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악한 년...
"응? 아니.. 그게... "
난 말꼬리를 흐리면서 소울의 번호판을 쳐다 보았다. 67주 0000. 적을 수는 없으니 암기... 67주 0000
머리 속으로 몇 번 되뇌이고 있는데 단발머리가 목소리를 높힌다.
"조석훈씨..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상습범이야? 어떻게 된거지 말하지 않으면 성폭행범으로 신고하겠어.
강간은 3년 이상의 징역, 주거침입 강간은 5년 이상의 징역이거든.. 순순히 말 하시지."
침이 꿀꺽 넘어간다.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이냐? 내가 김유미랑 잠을 자는 게 이녁이랑 무슨 상관이길래...
그럼 저번에 나랑 모텔가서 두번 한걸 성폭행범으로 신고한다는 건가? 그리고 내 이름을 어떻게 안거야? 난 이름
알려준 기억이 없는데.. 김유미가 나 같은 놈이랑 그 짓 할리가 없는 데 그러는 걸 보고 미루어 짐작컨대 내가
강간했을 것이다. 뭐 이런건가?
"뭐?..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날 이후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하고 그 일은 끝났잖아?
지금 와서 그걸 신고하겠다는 건 좀 억지 아냐? 벌써 2주도 더 지난 것 같은데..."
"아저씨. 옛날 일 꺼내들지 말고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하셔.. 그 여자와 언제부터 그렇게 된거냐고?"
"그게.. 아 춥다.. 담배가 어디 갔지? 차에 있나?"
난 뒤로 돌아 내 차쪽으로 가서 운전석에 탄 후 보조석 가시방을 열고 이리 저리 뒤지는 척 하면서 내리지 않았다.
담배는 내 주머니 속에 있으니 찾아도 나올리가 없고 단발머리 차 번호는 알아 두었으니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대충 둘러 대고 들어온 것이다. 머리 속에서 잔머리를 굴리다 차를 출발시키려고 할 때 단발머리가 뒷 자석 문을 열고 타더니 다시 한번 기세 좋게 멘트를 날린다.
"아저씨. 이대로 내빼시려고? 조석훈. 73년생. 경기도 성남시 판교동 00아파트 거주... 도망간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 말로 할 때 털어놓으시지?"
뒷 조사 제대로 하셨네.. 이 기집애 정체가 뭐지? 내가 이 년한테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는데다가 주소까지 알고 있는 걸로 봐서는 내 차 번호로 조회 뜬 것 같은데... 구청이나 동사무소에서는 업무가 끝난 시간이고 검찰이나 경찰쪽과 관련이 있나?
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내빼려는 게 아니고 담배가 떨어져서 사러 가려고 했던 거야. 이 앞에 담배가게가 있는데..."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잠깐 내려서 기다릴래? 금방 다시 올께. 5분이면 돼.."
"그렇게 담배가 필요하면 걸어서 갔다와. 난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걸어가면 꽤 멀어. 날씨가 추워서... 잠깐만 내려줘."
"좋아. 그럼 나랑 같이 가. 그리고 다시 이리와야 돼. 내 차가 여기 있으니까."
단발머리의 최대 실수는 날 너무 우습게 보고 있는 거였다. 성폭행 운운하며 날 다그치면 내가 순순히 꼬리를 내리고 이야기를 할 것이다라는 자신 만의 착각... 어쨌든 이 기집애와 그냥 헤어지기가 애매해졌다. 왜 그렇게 김유미와 나와의 관계에 집착하는 지 알아볼 수 밖에...
천천히 차를 이동시켜서 담배를 살 수 있는 슈퍼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들이 수업을 받는 동안 별로 할일이 없는 터라 근처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보게 된, 두달 전쯤 화재가 나서 문을 닫은 카페테리어 건물 옆쪽 반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건물이 거의 전부 타버린 터라 원래는 3대 정도 들어가는 주차장 왼쪽에 타버린 집기류과 자재들이 있어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정도이고 주차시킬 때 오른 쪽 벽에 바싹 붙여서 단발머리는 문을 열고 내릴 수가 없다. 반대쪽으로 내릴 수는 있지만 그 쪽 역시 너무 좁아서 차 문을 열려면 억지로 불에 타버린 목재들을 밀고 나가야 하는 상황...
난 차안에서 시동을 켜둔 채 뒷자석으로 넘어 들어가서 단발머리 옆에 앉아 퇴로를 차단했다. 그리고 창문을 약간 내린 후에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천천히 불을 붙여 입에 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담배가 없었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야. 자리를 옮기고 싶었거든.
니가 왜 자꾸 날 몰아 세우는 건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아서 생각할 시간도 필요했고...
느낌이라는 게 있어. 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 날 술집에서 취한 너를 부축해서 모텔로 들어갈 때 넌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잠이 든 척 눈을 뜨지 않았잖아.
여자들도 가끔 그럴 때가 있다고... 하지만 그 때 니 판단은, 아니 니가 느낀 감은 내가 너에게 나쁜 짓이나 피해가 될 일은 안할 거라고 생각했을거야. 그렇지 않다면 너 정도 되는 여자가 순순히 내 수작을 놔둘 리가 없었겠지..
니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여자인지는 난 잘 모르지만 나하고는 격이 다른 삶을 사는 여자라는 생각을 했어. 하지만 누구나 누군가의 몸을 만지고 싶고 누군가 날 만져주었으면 하는 때가 있으니 그 날 난 운이 좋았던 거지.
나... 난... 뭐라고 해야 하나..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몰라. 일종의 병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 하지만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는 일은 되도록 안하고 싶어. 예전에 안 좋은 기억도 있고...
자. 그럼 이야기를 해볼까? 나와 김유미가 언제부터 그런 관계 였는지 알고 싶은 거야? 어떻게 그렇게 된거지 알고 싶은 거야?"
"둘.. 다.. 말해봐."
단발머리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작아졌다. 차안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갇혀 버려서 자신이 쥐고 있던 주도권이 내게 넘어간 것이다. 아마 이런 상황이 익숙치 않을 것이다.
"말해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걸 내가 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지 이유가 명확치 않아. 그런 건 사생활 아닌가?
니가 내 부인이나 애인이라면 모르겠지만... 혹시 너 김유미 선생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아까 나에게 성폭행 이야기 했었지? 그게 말이 안되잖아. 너와 내가 잤을 때는 그냥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인정하더니 내가 김유미 선생과 잔 것에 왜 이리 민감한거지? 혹시 질투가 난 거야?"
"미친 거 아냐? 내가 왜 아저씨에게 질투를..."
단발머리의 언성이 높아졌다. 강한 부정. 솔직히 나도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면 넌 김유미 선생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어. 그걸 말해봐. 그럼 나도 김유미와 내가 언제부터 어떻게 관계가 된거지 이야기 해줄께."
"그.. 그건.. 말할 수 없어."
"말할 게 있긴 있나보군. 그럼 너도 알고 싶은 걸 포기해. 성폭행이니 강간이니 그런 말로 겁주는 건 통하지 않아.
아 그리고 한가지 더... 너... 내가 이야기 한 일이 없는데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데... 내 이름도. 주소까지...
내 정보를 어떻게 알았을까? 저번에 나와 잠깐 밤을 보냈을 때는 우리에게 별 일은 없었어. 넌 나에게 인연을 이어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까지 했었고... 그렇다면 오늘 나에 대해서 알아낸 것 같은 데..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그럼 니가 뭘 하는 여자인지 대충 감이 잡히긴 하는데..."
"... "
검찰. 경찰.. 혹시 구청일지도.. 아니면 법원 같은 곳에서도 연줄이 있다면 가능할 것이고... 기자들도 아는 경찰이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단발머리의 머리 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이야기 하지는 않았다.
"니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들지 않아. 하지만..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을 수도 있고 또 만약이라는 게 있을 수도 있단 말이야..."
난 말 끝을 흐리며 그녀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흩어 보았다. 목 주위로 약간의 털이 붙어 있는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아래는 몸에 붙는 스타일의 하얀색 바지, 그리고 부츠...
단발머리는 갑자기 벙어리가 된 것처럼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난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내려두었던 창문을 올리고
자동차 운전석 옆으로 손을 뻗어 CD를 틀었다. 내가 평소 즐겨 듣는 팝송이 흐른다. westlife의 "You Raise Me Up"...
"그렇다면 나도 대비책이 있어야 할 것 같아. 별로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니지만..."
난 눈 깜짝 할 사이에 단발머리의 다리를 잡고 뒷 자석에 그녀를 눕힌 후에 허리 위로 올라타서 앉았다.
"뭐.. 뭐하는 거야? 빨리 안내려와.. 싫어.. 내려와.. 싫어.."
"..."
한 시간 정도 전에 김유미와 정사를 치룬 터라 그녀를 범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덮친 건 어떤 가능성 때문 이었다. 아주 희미하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단발머리를 처음 만난 그날 이호성을 찾아 이곳에 왔다가 섹스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했다. 그 분노엔 자신의 욕구를 풀 수 없다는 좌절감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오늘은 왜 이 곳에 왔을까?
이호성이 간 곳을 찾다가 오게 되었다면.. 이호성을 그녀가 찾는 이유가 그녀의 욕구를 풀고 싶어서 였다면...
그래서 그 녀석을 찾지도 못하고 이호성과 내연 관계인 김유미와 내가 자는 것을 보게 되었다면...
내가 강하게 밀어 붙이면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 잘 될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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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좀 빨리 한편 올릴 수 있었습니다. 5일 주기를 4일로 단축... ㅋㅋ
글을 쓴다는 건 머리 속에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맞춰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연말이라 좀 산만해서.. 하지만 걱정되는 건 새해가 되면 더 바빠질 것 같은데
4~5일에 한편 쓸 수 있을 런지 모르겠습니다.
옛날 이야기는 따분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소설도 영화처럼 아니 인생처럼 항상 재미있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잔잔하고 따분하게 흘러갈때도 있어야 절정이나 클라이막스도
있고.. ㅋㅋ .. ㅋㅋ.. ㅋㅋ.. 이상 넋두리 였습니다.
승용차에 가려 있어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척 하며 그 차의 운전석이 보일 수 있는 곳으로 몇 발자국 걸어 이동했다. 뒤편 골목이 갈라지는 곳에 가로등이 서 있었지만 주변은 어두웠고 차유리가 썬팅이 되어 있는 데다가 실내등이 꺼져 있어서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체격이 작아서 여자처럼 보였고 허리를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식별이 가능 했는데 단발머리 일지도 모르다는 생각이 불현 듯 머리를 스친다.
만약 단발머리라면... 차 번호 정도는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그 차 앞까지 가서 차 번호를 보고 오는 건 좀 어색해서 난 내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고 담배를 피우며 기다렸다. 단발머리가 탄 차량은 기아차 아이보리색 소울처럼 보였는데 차가 서 있는 방향과 시동을 걸고 있었다는 점에서 곧 내 차 옆으로 지나갈 것이고 그 때 운전자가 누군지와 차량번호를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단발머리가 아닐 수도 있으니...
5분 쯤 시간이 흘렀을까? 소울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오피스텔에서 김유미가 나오더니 내가 있는 반대쪽 골목길을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오늘 김유미와 시간을 보내면서 든 느낌으로는 그녀가 이유성에게 나와의 정사에 대해 말하지 않은 듯 했는데 그건 내게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녀와의 첫 정사가 억지스러운 면이 많았고 아직까지 내가 일방적으로 그녀를 원하는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섹스를 나눌 때 그녀의 몸짓과 나와 이야기 할 때 절제된 언어 선택, 방해받지 않는 시간에 약속을 정한 것 등 여러가지 면으로 판단해 볼때 김유미는 나에게 자신의 공간을 내주고 싶은 지도, 아니 내 연락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남편도 있고 젊은 애인마저 있는 그녀가 왜 나에게 까지 마음을 허용하는 걸까? 상냥한 목소리와 청순해보이는 얼굴때문에 가려진, 터질것 같은 젖가슴과 엉덩이를 흔들며 다리를 벌리고 쾌락을 참지 못해 교성을 뱉어내는 김유미... 그녀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알아버린 나에게 더 이상의 블라인드는 의미가 없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그녀가 자신에게로 향한 남자의 어긋난 욕망마저도 안을 수 있을 만큼 따뜻한 여자라고 해석하는 게
옳은 방향이라고 하더라도, 당분간 그녀에게 기대어, 비워내도 며칠이면 다시 가득 차서 날 자극하는 내 정액들의 명령을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행운아다.
길거리에서 10만원 짜리 자기앞 수표를 100장 주운 것보다 더 큰 행운이다. 김유미와 난 앞으로 몇 번이나 알몸을 부벼댈 수 있을까? 그녀와의 정사는 한 번에 얼마로 계산하면 적당할까? 10만원.. 아니 20만원..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에 의해서 가치를 점점 적게 계산해야 합리적인가?
백미러로 소울의 운전석 쪽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누가 내리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담배를 한 대 더 피워 물었다. 막연한 시간을 보내야 할 때 담배는 큰 위안이 된다. 수명을 깎아 먹는다고 하더라도...
김유미가 종종 걸음으로 사라진 지도 20분은 지난 것 같은 데 왜 안 움직이지? 내가 잘못 봤을까? 자동차 시동이 걸려 있는 소리도 잘못 들었나?
다시 한번 가볼까? 아무도 없으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는데...
난 담배를 문 채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골목길 가운데로 걸어나가서 천천히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차 바로 곁으로 지나가면서 운전석 쪽을 보기 위해 고개를 슬쩍 돌렸을 때 차 시동이 꺼지더니 누군가 내렸다.
단발머리의 여자...
난 걸음을 멈췄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 역시 나를 보았다. 우리는 4~5미터 쯤 떨어져서 서로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녀가 너무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난 계속 해서 쳐다보는 게 머쓱해져서 살짝 시선을 돌리면서 담배를 빨고 연기를 내 뱉었다. 뭐라고 아는 체 하기도 이상한 관계여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단발머리가 창문으로 훔쳐 보고 있었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척 해야하는 지 전혀 모르는 일처럼 해야 하는 지 역시 감이 없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단발머리가 가지 않고 있는 이유는 뭘까? 저 여자가 뭐라고 나에게 멘트를 던지면 그것에 맞춰서 반응을 할 수 밖에 없을 듯 한데...
10초 정도 지나서 단발머리가 따지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왜 저기서 나온 거지?"
"응?.. 그게 우리 아이 은물 수업을 저기서 받아. 뭘 두고 온 게 있어서..."
일단 시치미를 뗐다. 대충 넘어갈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내가 묻는 말은 그게 아니야. 그 여자와 언제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 였냐는 거지..
다 알고 있으니까 시치미 떼지 말고..."
단발머리는 자신이 훔쳐봤다는 이야기는 쏙 빼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악한 년...
"응? 아니.. 그게... "
난 말꼬리를 흐리면서 소울의 번호판을 쳐다 보았다. 67주 0000. 적을 수는 없으니 암기... 67주 0000
머리 속으로 몇 번 되뇌이고 있는데 단발머리가 목소리를 높힌다.
"조석훈씨..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상습범이야? 어떻게 된거지 말하지 않으면 성폭행범으로 신고하겠어.
강간은 3년 이상의 징역, 주거침입 강간은 5년 이상의 징역이거든.. 순순히 말 하시지."
침이 꿀꺽 넘어간다.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이냐? 내가 김유미랑 잠을 자는 게 이녁이랑 무슨 상관이길래...
그럼 저번에 나랑 모텔가서 두번 한걸 성폭행범으로 신고한다는 건가? 그리고 내 이름을 어떻게 안거야? 난 이름
알려준 기억이 없는데.. 김유미가 나 같은 놈이랑 그 짓 할리가 없는 데 그러는 걸 보고 미루어 짐작컨대 내가
강간했을 것이다. 뭐 이런건가?
"뭐?..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날 이후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하고 그 일은 끝났잖아?
지금 와서 그걸 신고하겠다는 건 좀 억지 아냐? 벌써 2주도 더 지난 것 같은데..."
"아저씨. 옛날 일 꺼내들지 말고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하셔.. 그 여자와 언제부터 그렇게 된거냐고?"
"그게.. 아 춥다.. 담배가 어디 갔지? 차에 있나?"
난 뒤로 돌아 내 차쪽으로 가서 운전석에 탄 후 보조석 가시방을 열고 이리 저리 뒤지는 척 하면서 내리지 않았다.
담배는 내 주머니 속에 있으니 찾아도 나올리가 없고 단발머리 차 번호는 알아 두었으니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대충 둘러 대고 들어온 것이다. 머리 속에서 잔머리를 굴리다 차를 출발시키려고 할 때 단발머리가 뒷 자석 문을 열고 타더니 다시 한번 기세 좋게 멘트를 날린다.
"아저씨. 이대로 내빼시려고? 조석훈. 73년생. 경기도 성남시 판교동 00아파트 거주... 도망간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 말로 할 때 털어놓으시지?"
뒷 조사 제대로 하셨네.. 이 기집애 정체가 뭐지? 내가 이 년한테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는데다가 주소까지 알고 있는 걸로 봐서는 내 차 번호로 조회 뜬 것 같은데... 구청이나 동사무소에서는 업무가 끝난 시간이고 검찰이나 경찰쪽과 관련이 있나?
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내빼려는 게 아니고 담배가 떨어져서 사러 가려고 했던 거야. 이 앞에 담배가게가 있는데..."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잠깐 내려서 기다릴래? 금방 다시 올께. 5분이면 돼.."
"그렇게 담배가 필요하면 걸어서 갔다와. 난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걸어가면 꽤 멀어. 날씨가 추워서... 잠깐만 내려줘."
"좋아. 그럼 나랑 같이 가. 그리고 다시 이리와야 돼. 내 차가 여기 있으니까."
단발머리의 최대 실수는 날 너무 우습게 보고 있는 거였다. 성폭행 운운하며 날 다그치면 내가 순순히 꼬리를 내리고 이야기를 할 것이다라는 자신 만의 착각... 어쨌든 이 기집애와 그냥 헤어지기가 애매해졌다. 왜 그렇게 김유미와 나와의 관계에 집착하는 지 알아볼 수 밖에...
천천히 차를 이동시켜서 담배를 살 수 있는 슈퍼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들이 수업을 받는 동안 별로 할일이 없는 터라 근처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보게 된, 두달 전쯤 화재가 나서 문을 닫은 카페테리어 건물 옆쪽 반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건물이 거의 전부 타버린 터라 원래는 3대 정도 들어가는 주차장 왼쪽에 타버린 집기류과 자재들이 있어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정도이고 주차시킬 때 오른 쪽 벽에 바싹 붙여서 단발머리는 문을 열고 내릴 수가 없다. 반대쪽으로 내릴 수는 있지만 그 쪽 역시 너무 좁아서 차 문을 열려면 억지로 불에 타버린 목재들을 밀고 나가야 하는 상황...
난 차안에서 시동을 켜둔 채 뒷자석으로 넘어 들어가서 단발머리 옆에 앉아 퇴로를 차단했다. 그리고 창문을 약간 내린 후에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천천히 불을 붙여 입에 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담배가 없었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야. 자리를 옮기고 싶었거든.
니가 왜 자꾸 날 몰아 세우는 건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아서 생각할 시간도 필요했고...
느낌이라는 게 있어. 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 날 술집에서 취한 너를 부축해서 모텔로 들어갈 때 넌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잠이 든 척 눈을 뜨지 않았잖아.
여자들도 가끔 그럴 때가 있다고... 하지만 그 때 니 판단은, 아니 니가 느낀 감은 내가 너에게 나쁜 짓이나 피해가 될 일은 안할 거라고 생각했을거야. 그렇지 않다면 너 정도 되는 여자가 순순히 내 수작을 놔둘 리가 없었겠지..
니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여자인지는 난 잘 모르지만 나하고는 격이 다른 삶을 사는 여자라는 생각을 했어. 하지만 누구나 누군가의 몸을 만지고 싶고 누군가 날 만져주었으면 하는 때가 있으니 그 날 난 운이 좋았던 거지.
나... 난... 뭐라고 해야 하나..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몰라. 일종의 병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 하지만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는 일은 되도록 안하고 싶어. 예전에 안 좋은 기억도 있고...
자. 그럼 이야기를 해볼까? 나와 김유미가 언제부터 그런 관계 였는지 알고 싶은 거야? 어떻게 그렇게 된거지 알고 싶은 거야?"
"둘.. 다.. 말해봐."
단발머리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작아졌다. 차안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갇혀 버려서 자신이 쥐고 있던 주도권이 내게 넘어간 것이다. 아마 이런 상황이 익숙치 않을 것이다.
"말해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걸 내가 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지 이유가 명확치 않아. 그런 건 사생활 아닌가?
니가 내 부인이나 애인이라면 모르겠지만... 혹시 너 김유미 선생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아까 나에게 성폭행 이야기 했었지? 그게 말이 안되잖아. 너와 내가 잤을 때는 그냥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인정하더니 내가 김유미 선생과 잔 것에 왜 이리 민감한거지? 혹시 질투가 난 거야?"
"미친 거 아냐? 내가 왜 아저씨에게 질투를..."
단발머리의 언성이 높아졌다. 강한 부정. 솔직히 나도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면 넌 김유미 선생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어. 그걸 말해봐. 그럼 나도 김유미와 내가 언제부터 어떻게 관계가 된거지 이야기 해줄께."
"그.. 그건.. 말할 수 없어."
"말할 게 있긴 있나보군. 그럼 너도 알고 싶은 걸 포기해. 성폭행이니 강간이니 그런 말로 겁주는 건 통하지 않아.
아 그리고 한가지 더... 너... 내가 이야기 한 일이 없는데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데... 내 이름도. 주소까지...
내 정보를 어떻게 알았을까? 저번에 나와 잠깐 밤을 보냈을 때는 우리에게 별 일은 없었어. 넌 나에게 인연을 이어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까지 했었고... 그렇다면 오늘 나에 대해서 알아낸 것 같은 데..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그럼 니가 뭘 하는 여자인지 대충 감이 잡히긴 하는데..."
"... "
검찰. 경찰.. 혹시 구청일지도.. 아니면 법원 같은 곳에서도 연줄이 있다면 가능할 것이고... 기자들도 아는 경찰이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단발머리의 머리 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이야기 하지는 않았다.
"니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들지 않아. 하지만..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을 수도 있고 또 만약이라는 게 있을 수도 있단 말이야..."
난 말 끝을 흐리며 그녀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흩어 보았다. 목 주위로 약간의 털이 붙어 있는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아래는 몸에 붙는 스타일의 하얀색 바지, 그리고 부츠...
단발머리는 갑자기 벙어리가 된 것처럼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난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내려두었던 창문을 올리고
자동차 운전석 옆으로 손을 뻗어 CD를 틀었다. 내가 평소 즐겨 듣는 팝송이 흐른다. westlife의 "You Raise Me Up"...
"그렇다면 나도 대비책이 있어야 할 것 같아. 별로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니지만..."
난 눈 깜짝 할 사이에 단발머리의 다리를 잡고 뒷 자석에 그녀를 눕힌 후에 허리 위로 올라타서 앉았다.
"뭐.. 뭐하는 거야? 빨리 안내려와.. 싫어.. 내려와.. 싫어.."
"..."
한 시간 정도 전에 김유미와 정사를 치룬 터라 그녀를 범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덮친 건 어떤 가능성 때문 이었다. 아주 희미하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단발머리를 처음 만난 그날 이호성을 찾아 이곳에 왔다가 섹스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했다. 그 분노엔 자신의 욕구를 풀 수 없다는 좌절감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오늘은 왜 이 곳에 왔을까?
이호성이 간 곳을 찾다가 오게 되었다면.. 이호성을 그녀가 찾는 이유가 그녀의 욕구를 풀고 싶어서 였다면...
그래서 그 녀석을 찾지도 못하고 이호성과 내연 관계인 김유미와 내가 자는 것을 보게 되었다면...
내가 강하게 밀어 붙이면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 잘 될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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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좀 빨리 한편 올릴 수 있었습니다. 5일 주기를 4일로 단축... ㅋㅋ
글을 쓴다는 건 머리 속에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맞춰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연말이라 좀 산만해서.. 하지만 걱정되는 건 새해가 되면 더 바빠질 것 같은데
4~5일에 한편 쓸 수 있을 런지 모르겠습니다.
옛날 이야기는 따분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소설도 영화처럼 아니 인생처럼 항상 재미있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잔잔하고 따분하게 흘러갈때도 있어야 절정이나 클라이막스도
있고.. ㅋㅋ .. ㅋㅋ.. ㅋㅋ.. 이상 넋두리 였습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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