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를 만나고 나오는 미란은 자신의 의도대로 되는 것 같지 않고 도리어 뭔가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결코 남편의 마음을 되찾고 싶은 심정은 포기 할 수 없었다. 아니 결국은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바랄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녀는 다음날 자신 스스로 의지를 굳히는 마음으로 유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연은 유미에게 다른 코치에게 지도를 받던지 아니면 체조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던 그녀는 자신감이 생겼다. 저녁에 집으로 들어온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유미에게 무슨 말이라도 듣지 않았는지 궁금하기 때문이었다. 남편과 무주해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했다.
다음날 아침부터 내리던 가랑비가 오후 늦게까지 거리를 질척거리게 만들었다. 지연은 어둠이 내리고 있는 시간에 이 은주가 살고 있는 빌라 근처를 서성거렸다. 흰색 승용차가 빌라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이 은주가 내려섰다. 빌라 입구로 들어가는 그녀 모습을 확인한 지연은 대로변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한적한 커피숍의 외진 창가에 자리 잡은 그녀는 차분한 마음으로 휴대폰ㅇ,f 꺼내들었다. 그리고 이미 저장해둔 이 은주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한동안 칸소네 음율의 신호음이 흐르고 의지와달리 긴장이 됐다. 신호음이 끊기고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나, 신 성민 감독의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네.......!? 누구시라고요?”
“신 성민씨 아내 되는 민 지연인데, 예의가 아닌줄 알지만 긴히 전할말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신데요?”
이 은주는 전혀 예기치 않은 전화를 받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주는 성민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아서 성민의 아내를 만난 적이 없었다. 다만 사진과 언론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녀가 찾아왔는지,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은주는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혼란스러웠다.
전화기를 들고 거실을 배회하는 은주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단순했다. 그녀는 지연이 찾아올 이유가 없기에 당연히 성민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연의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나보면 알아요. 아! 여기가......!? 길가에 있는 모던 커피숍이네요. 아니면 제가 찾아 뵐 가요?”
“아. 아니요. 무슨 일 때문에 오셨는지 모르지만, 제가 나갈게요.”
전화를 내려놓은 이 은주는 갈피를 잡을 수 없어 허둥거렸다. 벗어놓은 외출복을 다시 걸쳤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이 자꾸만 허공을 짚고 뒤뚱거렸다. 커피숍을 향해 가면서 지연은 어떤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할 가,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는지, 오락가락했다. 커피숍으로 들어간 은주는 두리번거렸다.
손님도 많지 않았지만 은주는 창가에 다소곳이 앉은 여자를 보고 이내 성민의 아내인 것을 인수. 은주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안녕하세요!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네. 늦은 시간에 만나자고 해서 죄송합니다오. 민 지연예요.”
“이 은주입니다. 사진에서만 뵈었는데, 실제 보니 아름다우시네요.”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은주를 빤히 쳐다보는 지연의 눈썹이 흔들렸다. 지연은 은주의 반가워하는 표정이 가증스러웠으나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고 꼿꼿하게 자세를 바로 잡았다. 어쩌면 회장의 며느리이고 남편의 부인이라는 우아하고 정숙함을 잃지 않고 싶어서였다. 그녀들은 다가서는 종업원이 반갑지 않아 냉커피를 주문했다. 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남편과 같이 일하는 체조 코치라고 들었어요.”
“네. 인문계를 나왔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선수 생활을 해서요.”
“우리 남편하고 같은 대학을 다닌 후배라고 하던데......?”
“네. 같이 선수 생활도 했고요.”
지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싶었다. 물론 은주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고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두려웠다. 종업원이 주문한 커피를 내려놓고 갔다. 은주가 설탕 한 수저를 넣고 저으며 지연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사모님! 설탕 넣으시나요?”
“아뇨~!”
고개를 흔든 지연은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급 마셨다. 그녀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잇는 은주가 뻔뻔스러웠다. 은주가 먼저 찾아온 목적을 묻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니 이미 짐작하고 있을 그녀의 새침을 떠는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그녀에게 커피 잔을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찾아온 이유를 아세요?”
“아뇨!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요.”
은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지연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꿀꺽 삼키며 손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사진을 꺼내 은주 앞에 밀어 놓았다. 은주는 사진을 보고 올라서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이내 겹쳐있는 사진들을 하나씩 펴보고는 의외로 웃음을 흘렸다.
“호호호.......! 어떻게 이런 사진들을 사모님이.......!?”
“........!?”
지연은 자존심이 상했다. 은주가 두려워하기는커녕 놀라지도 않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드리는데 지연 혼자 화를 참고 있기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녀는 다른 사진 한 장을 다시 은주 앞에 내밀었다. 승용차 안에서 남편의 목에 매달린 은주가 키스를 하는 장면의 사진이었다. 지연은 비로소 얼굴색이 변하는 은주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남편 좋아하니?”
“........!?”
“난 JS 그룹을 이어받을 내 남편이 잠시 외도를 한 것이라고 믿어. 그러니 내 남편의 얼굴에 먹칠 하지 말고 다른 남자 찾아가기 바라.”
“왜......!? 신 감독님 뺏길까봐 두려우세요?”
“뭐라고.......!?”
사진을 들여다보며 묵묵히 있던 은주가 지연을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당돌한 말을 들은 지연은 머리를 맞은 것처럼 아찔했다. 어떻게 은주가 당당할 수 있는지 지연은 뭔가 잘못 판단했다고 생각했다. 은주는 도리어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감독님을 잘 지켜야지요. 누가 모함했는지 모르지만.......”
“모함이라고!? 어쩌면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있어.....!? 난 남편을 믿어! 송 유미만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어.......”
“유미가 말했던가요....!? 그래서 남의 사생활까지 캐고 다니고.......”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하지 않아. 사실이 중요한 거지. 변명하려고도 하지 마~! 그렇게 남자가 없어서, 유부남에게 달라붙었어? 세상이 아무리 험악해도 여자가 그러면 되겠어!”
“세상이라고요!?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은주로서는 차마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지만 비굴해지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란 변하는 것이고 남녀 관계는 어찌될지 모르는 것이었다. 또한 성민과 아내 관계가 원만치 않다는 것을 주변 사람은 알고 있었다. 다만 은주는 친척 간인 유미를 통해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짐작했다.
지연은 적반하장 격으로 당당하게 나오는 은주를 가볍게 상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얗게 질려 노려보던 지연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탁자 위의 사진을 챙겨 넣은 그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흘렀다.
“참 대단하네. 같은 여자 입장에서 좋게 말하려고 했더니 안 되겠구나! 너, 우리 시아버님이 누구신지 잘 알잖아. 너 같은 건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요즘 세상에 그렇게는 안 될걸요.......”
“그래! 넌 아직 세상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네가 측은해서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내 남편 옆에서 사라져~! 돈이 필요한 것이라면 연락해. 그만한 보상은 해줄게.”
경고하는 목소리를 내뱉은 지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찬바람을 일으키며 커피숍을 나간 지연은 분노가 치밀면서도 왠지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남편이 은주에게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녀는 우선 유미나 은주를 통해서 자신의 말을 전해들은 남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흡족했다.
은주는 지연에게 맞서서 대응했으나 마음은 괴로웠다, 단순하게 그녀는 오랫동안 간직했던 사랑이었다. 다른 목적 의도로 성민에게 접근했다는 지연의 말투에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녀 자신이 성민의 아내라고 해도 지연과 다를 바 없이 분노했을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었다.
평상시보다 늦게 체육관에 도착해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는 은주는 한창 연습 중인 유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연의 경고가 두렵지만 성민의 곁을 떠날 수는 없었다. 은주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지만 성민의 아내에게 사실을 알려주었을 유미가 밉살스러웠다. 유미를 시폰하고 있는 성민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은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고 있던 유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유미는 전국 체조에서 연기할 난도 높은 피봇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미 또한 신 감독의 부인이 했던 말이 떠올라 던져 올렸던 후프를 리턴하려다가 놓치고 말았다. 후프를 집어 들고 다시 연습을 하려던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유미야! 잠간 얘기 좀 하자~!”
“.........!?”
유미는 주춤거리다가 양팔을 끼고 쳐다보고 있는 이 은주 코치 앞으로 다가갔다. 유미는 평상시도 예민하게 대하는 이 코치의 부름이 탐탁지 않았다. 또한 자신을 직접 지도하는 코치가 아니기에 의아스럽기도 했다. 머뭇거리던 은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유미에게 물었다.
“너, 신 감독 집에 자주 찾아가니?”
“........아뇨!”
“그럼, 신 감독 부인을 자주 만나니?”
“아닌데요. 왜 그런 말을.......”
은주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한다는 표정인 유미가 앙큼하게 시치미를 떼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미는 정말 그녀가 무슨 의도로 물어보는지 전혀 인수가 없었다. 신 감독의 집을 한번 찾아간 것은 우연이었다. 더욱이나 감독의 아내가 했던 말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은주가 다시 물었다.
“너, 신 감독 아내 만났잖아! 그리고 내 얘기 한갓 아냐!?”
“무슨 얘기를요......!?”
“신 감독 집에 자주 갔으면서도 거짓말하는데, 그럼 신 감독 아내가 나를 어떻게 알아!?”
“저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너, 참 앙큼하다.”
“.........!?”
유미는 독살스러운 표정의 은주에게 변명하기도 난처했다. 이미 주위사람들이 그녀가 신 감독의 친척이라고 알려져 있기에 이 코치가 다그치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바짝 다가선 은주는 화풀이 하듯이 유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 체조 선수로 살아남으려면 똑바로 해. 내가 두려워 할 줄 알아. 네가 인척의 배경을 빌미로 체조를 하려면 차라리 선수 생활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는 게 너한테도 좋을 거야.”
“........!?”
“무슨 말인지 알아!? 차라리 너의 배경을 더 좋은 길로 이용하라는 말이야. 괜히 다른 선수들 앞길을 막지 말고. 앞으로 내 암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
은주가 어깨를 밀치는 손에 의해 유미는 한걸음씩 뒷걸음쳤다. 유미는 좌절감마저 들었다. 신 감독의 부인이나 이 은주 코치가 어째서 자신을 미워하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유미는 다른 것은 몰라도 체조를 그만 두라는 말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유미가 알고 있기로는 그녀들이 도리어 신 감독을 역경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었다.
체육관으로 들어오던 성민이 유미와 은주를 빤히 바라보며 서서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성민은 화가 난 표정으로 다그치는 은주의 손에 밀려 뒷걸음질 치는 유미의 모습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게 보였다. 고개를 숙인 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상이 되어 있었다.
유미에게 역정을 내던 은주가 성민이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돌아섰다. 성민은 무슨 일로 은주가 화를 내는지 궁금했다. 그는 천천히 은주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미안하지만, 화가 나서 야단 좀 쳤어요.”
“왜.......!?”
“........”
은주가 대답 없이 창가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녀는 어차피 모두 알게 되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옆에 와서 앉는 성민을 쳐다보고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성민씨 아내가 집으로 찾아왔었어요.”
“집 사람이.......!?”
“아마, 유미가 고자질한 거 같아.”
“유미가.......!?”
“어떻게 나를 알겠어요. 내 뒷조사를 하고 사진들까지 찍어서 보여주던데.......”
성민은 무엇보다도 아내가 은주와 자신의 관계를 알고 찾아갔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유미가 아내에게 고자질했을 것이라는 은주의 잘못된 판단을 이해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충격을 받았을 은주의 마음과 또한 아내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감정 표현이 서툰 아내의 일시적인 충동이라고 판단하기에 시간이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마. 현실적인 감정보다는 원칙에 갇혀 사는 사람이니까.”
“........!?”
며칠간 지연의 협박성 전화에 시달리는 은주는 성민의 담담한 표정이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은주를 안심시키고 돌아선 성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아내가 은주와의 관계를 알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유미가 아내와 준태를 봤다는 골목의 모텔과 여관 간판들이었다.
유미는 자신의 심정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수시로 걸려오는 감독의 아내 전화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였다. 그렇다고 신 감독에게 하소연할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감독이 알게 되면 결국 그 피해는 그녀에게 돌아오고 체조를 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것 같았다. 그녀는 다만 신 감독만 믿고 악착같이 자신의 꿈을 달성하고 싶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유미는 거실에 있는 가족들을 의식하면서도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안정이 되지 않는 마음과 연습으로 정신과 육체, 모두가 지친 상태였다. 그녀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운동복 차림으로 침대에 누웠다. 부모를 실망시킬 수 없어 하소연도 못하는 그녀는 공연히 눈물이 나왔다.
“유미야! 저녁 먹어라.”
“........”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도 유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 같고 귀찮은 그녀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어머니 숙희가 방안을 들여다봤다.
“얘가 잠들었나.......!?”
“.........”
유미는 어머니가 침대로 다가오는 것을 알았지만 쥐 죽은 듯이 벽을 향해 누워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다가 잡아 당겼다.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 불이 뺨을 적시고 있었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던 딸의 모습에 그녀의 어머니는 당황했다.
“유미야! 너 우는 거니!? 왜, 무슨 일 있었니........!?”
“........”
주방 식탁 앞에 앉아있던 유미의 아버지 송 찬욱이 유미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그도 당황한 것이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숙희가 남편을 바라보면서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맡기고 슬그머니 방을 나갔다. 딸을 잠시 내려다보던 찬욱이 말했다.
“유미야! 너 힘들어서 그러니?”
“.........”
“아빠는 오직 네 생각뿐이라는 걸 알잖니! 아빠한테는 말해야지. 누가 뭐라고 그러던......!?”
“..........”
유미는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찬욱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죽은 듯이 누워있던 유미가 일어나 앉았다. 유일하게 그녀가 속마음을 털어 놓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목숨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왈칵 아버지 가슴을 파고들었다. 또한 딸의 심정을 잘 알고 있는 찬욱이었다. 그는 흐느끼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속상한 일이 있나보구나.......!”
“.........!”
흐느끼는 딸의 모습에 찬욱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그가 어렵고 힘든 생활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그가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며 어쩌면 딸이 이루려는 꿈은 바로 그 자신의 꿈이기도 했다. 그는 딸이 서러워하는 이유가 무척 궁금했으나 흐느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딸의 얼굴을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무슨 일이니? 말해 봐!”
“나, 체조 그만 둘까봐.......”
“왜......!? 힘들어서 그래.....!? 아니면 신 감독이 그만두라고 그러니.....? 야단맞았니?”
“아니......”
유미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흔들었다. 찬욱은 이토록 힘들어하는 딸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되어 더욱 안타까웠다. 유미는 아버지에게 하소연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에 입을 열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빤히 쳐다보는 아버지의 눈빛에 그녀는 하소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더러 체조를 그만 두래.”
“누가!? 신 감독이.......!”
“아니! 감독님 부인이 얼마 전에 학교로 나, 찾아왔어.”
“왜, 본인도 아니고 신 감독 부인이 너한테 그런 말을 하지!?”
“감독님은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나더러 체조 그만두고 감독님 곁에서 사라지래. 며칠 동안 전화로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러면서........”
“.........!?”
“그리고 기계체조 담당 이 은주 코치도 똑같은 말로 협박하는데, 왜들 그러는지 미치겠어. 아빠! 나 어떻게 해야 돼?”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러니......!? 신 감독은 뭐라고 그러는데?”
“감독님은 몰라. 감독님은 부인하고 사이가 안 좋아. 그 부인이 속 썩이는 모양이야. 나쁜 여자야. 그리고 감독님은 이 코치와 보통 사이가 아니야! 사실은 감독님은 이 코치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코치에게 당한 것 같아........!”
유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신 감독과 그의 부인, 그리고 이 은주 코치에 대해 두서없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하소연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찬욱은 딸의 말을 듣는 내내 신경을 곤두세웠다. 딸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를 알았지만 그로서는 해결해줄 능력이 없었다.
“우리 유미가 힘들겠구나! 어쩌지......!?”
“........!?”
“하여튼 아빠는 유미가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조금 기다려봐.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는지 모르지만.......”
찬욱은 딸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딸을 시폰하고 있는 신 감독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막연하게 딸을 격려하지만 그가 당장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는 딸의 장래를 위해 한 푼이라도 밀린 인건비를 받아내려고 양 춘식을 찾아갔던 상황을 떠올렸다. 언론의 기사가 되었던 양재동 카페 살인 사건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막바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다. 바캉스 계절이면 누구나 계곡과 바닷가를 떠올린다. 바캉스라는 단어의 의미 자체가 주로 여름에, 피서나 휴양을 위해 떠나는 휴가이다. 그중에도 파도와 수평선을 바라보는 바다를 찾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작 감상적인 피서지인 바다는 뜨겁고 열기로 가득하다.
강원도 속초 북쪽에 위치한 교양리 해안은 해수욕장으로 개발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예전의 한적한 정취와 다르게 많은 피서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민 지연은 가족, 그리고 시댁 친척들과 같이 바닷가를 찾아와 있었다. 텐트 밑에 모여 앉은 여자들은 모래사장 위를 뒹굴며 배구를 하는 남자들을 바라보며 웃고 떠들었다.
지연은 수다를 떨고 있는 여자들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 앉아 있었다. 오픈하고 있는 백화점 매장이 걱정도 되지만 시댁 친척들과 어울려 있는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별장이 가까운 곳에 있었고, 아침 식탁에 모이듯이 연례행사이기에 그녀는 의무적으로 참여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 호호호.......”
“호호호.....”
“회장님 봐! 호호호.......”
여자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체격에 비해 불쑥 나온 뱃살로 신 회장이 모래사장을 뒹구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리고 신 회장이 잘못 쳐올린 공을 성민이 날렵하게 몸을 날려 받아 올렸다.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는 그의 표정에는 카리스마가 풍겼다. 보기 좋게 들어난 근육과 균형 잡힌 체격, 훤칠한 외모는 남자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다.
“큰 도련님이 역시 멋져!”
“아무렴, 누구 아들인데.......”
여자들의 찬사를 받는 성민 못지않게 상대편의 준태도 재빠르게 볼을 받아넘겼다. 곱상한 외모이지만 고등학생답지 않은 우람한 체격을 가진 준태였다. 지연은 남편을 치켜세우는 여자 친척들이 모두 이 은주나 유미로 연상되었다. 한바탕 모래 위를 뒹굴던 남자들이 텐트 그늘로 들어오고 여자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지연은 여자들과 같이 음료수와 맥주, 그리고 과일과 안주를 남자들에게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여자들도 따로 자리를 마련하고 모여 앉았다. 수박을 쪼개서 나누어 먹던 사촌 시누이가 뒤에 앉은 지연을 힐끗 돌아봤다.
“올캐도 바짝 다가앉아. 새댁같이 그러고 있지말고.”
“.........”
“더웁지 않아!?”
“.........!”
모든 남자들이 수영복이나 반바지 차림만으로 상체를 들어내고 있었고, 여자들은 다양한 체격에 원피스 수영복이나 비키니 차림인 반면에 지연은 수영복을 걸친 몸매를 원피스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연은 대답 없이 옅은 미소를 흘렸다.
가족들의 시선이 지연을 스쳐 지나갔다. 성민은 아내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이 은주의 푸념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내의 표정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준태만큼은 가족이나 친척들과 달리 형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는 원피스로 감싸고 있는 형수가 알몸으로 가슴에 안겨있던 순간을 떠올렸다.
성민에게 열등감을 느꼈던 준태였다. 그러나 요즘은 형의 아내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었다는 뿌듯함에 자신감마저 생겼다. 슬그머니 일어난 그는 가족과 친척들의 눈치를 살피며 텐트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준태는 젖가슴과 뱃살이 늘어진 여자들과 달리 단연코 형수에게서 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백화점 매장 오픈에 전념하던 그녀를 가까이하지 못했던 준태는 묘한 충동을 받았다. 바닷가에서 젊은 여자들이 젖가슴과 둔부의 윤곽을 들어낸 비키니를 걸치고 다니는 광경은 그의 젊은 혈기를 더욱 부추겼다. 그는 슬그머니 지연의 옆에 다가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에 팔을 뻗었다.
“.......!?”
넋을 놓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지연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빤히 쳐다보는 준태의 눈빛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친척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돌발적인 그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렸다. 주위 시선을 두려워하는 그녀의 허리를 당기며 그가 귓속말을 했다.
“형수! 할 말이 있어. 차에서 기다릴게........”
“........!?”
준태의 말을 듣는 순간 지연은 남편에게 시선을 향했다. 성민은 텐트 앞쪽에서 침낭을 베고 비스듬히 누워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들은 여전히 수다를 떨고 있었고 그녀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없기에 그녀는 다소 안심이 되었다. 준태가 강조하듯이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올 때까지 기다릴게~!”
“.........”
잠시 긴장했던 지연은 텐트 밖으로 벗어나는 준태를 의식하고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녀는 그를 따라 일어설 마음은 없었다. 단지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혹시 준태가 남편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 은주와 유미를 만난후에도 남편은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연은 선뜻 일어서기도 난감했다. 준태에게 휘말리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것만 같아서였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은 원천적인 감정의 욕구이다. 욕망은 때때로 인간의 생리적 욕구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욕망과 욕구는 정신적인 차이가 있지만 충족해도 또 다른 공복을 느끼게 된다..-----------------------------
지연은 유미에게 다른 코치에게 지도를 받던지 아니면 체조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던 그녀는 자신감이 생겼다. 저녁에 집으로 들어온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유미에게 무슨 말이라도 듣지 않았는지 궁금하기 때문이었다. 남편과 무주해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했다.
다음날 아침부터 내리던 가랑비가 오후 늦게까지 거리를 질척거리게 만들었다. 지연은 어둠이 내리고 있는 시간에 이 은주가 살고 있는 빌라 근처를 서성거렸다. 흰색 승용차가 빌라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이 은주가 내려섰다. 빌라 입구로 들어가는 그녀 모습을 확인한 지연은 대로변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한적한 커피숍의 외진 창가에 자리 잡은 그녀는 차분한 마음으로 휴대폰ㅇ,f 꺼내들었다. 그리고 이미 저장해둔 이 은주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한동안 칸소네 음율의 신호음이 흐르고 의지와달리 긴장이 됐다. 신호음이 끊기고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나, 신 성민 감독의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네.......!? 누구시라고요?”
“신 성민씨 아내 되는 민 지연인데, 예의가 아닌줄 알지만 긴히 전할말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신데요?”
이 은주는 전혀 예기치 않은 전화를 받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주는 성민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아서 성민의 아내를 만난 적이 없었다. 다만 사진과 언론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녀가 찾아왔는지,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은주는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혼란스러웠다.
전화기를 들고 거실을 배회하는 은주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단순했다. 그녀는 지연이 찾아올 이유가 없기에 당연히 성민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연의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나보면 알아요. 아! 여기가......!? 길가에 있는 모던 커피숍이네요. 아니면 제가 찾아 뵐 가요?”
“아. 아니요. 무슨 일 때문에 오셨는지 모르지만, 제가 나갈게요.”
전화를 내려놓은 이 은주는 갈피를 잡을 수 없어 허둥거렸다. 벗어놓은 외출복을 다시 걸쳤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이 자꾸만 허공을 짚고 뒤뚱거렸다. 커피숍을 향해 가면서 지연은 어떤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할 가,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는지, 오락가락했다. 커피숍으로 들어간 은주는 두리번거렸다.
손님도 많지 않았지만 은주는 창가에 다소곳이 앉은 여자를 보고 이내 성민의 아내인 것을 인수. 은주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안녕하세요!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네. 늦은 시간에 만나자고 해서 죄송합니다오. 민 지연예요.”
“이 은주입니다. 사진에서만 뵈었는데, 실제 보니 아름다우시네요.”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은주를 빤히 쳐다보는 지연의 눈썹이 흔들렸다. 지연은 은주의 반가워하는 표정이 가증스러웠으나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고 꼿꼿하게 자세를 바로 잡았다. 어쩌면 회장의 며느리이고 남편의 부인이라는 우아하고 정숙함을 잃지 않고 싶어서였다. 그녀들은 다가서는 종업원이 반갑지 않아 냉커피를 주문했다. 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남편과 같이 일하는 체조 코치라고 들었어요.”
“네. 인문계를 나왔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선수 생활을 해서요.”
“우리 남편하고 같은 대학을 다닌 후배라고 하던데......?”
“네. 같이 선수 생활도 했고요.”
지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싶었다. 물론 은주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고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두려웠다. 종업원이 주문한 커피를 내려놓고 갔다. 은주가 설탕 한 수저를 넣고 저으며 지연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사모님! 설탕 넣으시나요?”
“아뇨~!”
고개를 흔든 지연은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급 마셨다. 그녀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잇는 은주가 뻔뻔스러웠다. 은주가 먼저 찾아온 목적을 묻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니 이미 짐작하고 있을 그녀의 새침을 떠는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그녀에게 커피 잔을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찾아온 이유를 아세요?”
“아뇨!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요.”
은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지연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꿀꺽 삼키며 손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사진을 꺼내 은주 앞에 밀어 놓았다. 은주는 사진을 보고 올라서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이내 겹쳐있는 사진들을 하나씩 펴보고는 의외로 웃음을 흘렸다.
“호호호.......! 어떻게 이런 사진들을 사모님이.......!?”
“........!?”
지연은 자존심이 상했다. 은주가 두려워하기는커녕 놀라지도 않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드리는데 지연 혼자 화를 참고 있기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녀는 다른 사진 한 장을 다시 은주 앞에 내밀었다. 승용차 안에서 남편의 목에 매달린 은주가 키스를 하는 장면의 사진이었다. 지연은 비로소 얼굴색이 변하는 은주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남편 좋아하니?”
“........!?”
“난 JS 그룹을 이어받을 내 남편이 잠시 외도를 한 것이라고 믿어. 그러니 내 남편의 얼굴에 먹칠 하지 말고 다른 남자 찾아가기 바라.”
“왜......!? 신 감독님 뺏길까봐 두려우세요?”
“뭐라고.......!?”
사진을 들여다보며 묵묵히 있던 은주가 지연을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당돌한 말을 들은 지연은 머리를 맞은 것처럼 아찔했다. 어떻게 은주가 당당할 수 있는지 지연은 뭔가 잘못 판단했다고 생각했다. 은주는 도리어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감독님을 잘 지켜야지요. 누가 모함했는지 모르지만.......”
“모함이라고!? 어쩌면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있어.....!? 난 남편을 믿어! 송 유미만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어.......”
“유미가 말했던가요....!? 그래서 남의 사생활까지 캐고 다니고.......”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하지 않아. 사실이 중요한 거지. 변명하려고도 하지 마~! 그렇게 남자가 없어서, 유부남에게 달라붙었어? 세상이 아무리 험악해도 여자가 그러면 되겠어!”
“세상이라고요!?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은주로서는 차마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지만 비굴해지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란 변하는 것이고 남녀 관계는 어찌될지 모르는 것이었다. 또한 성민과 아내 관계가 원만치 않다는 것을 주변 사람은 알고 있었다. 다만 은주는 친척 간인 유미를 통해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짐작했다.
지연은 적반하장 격으로 당당하게 나오는 은주를 가볍게 상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얗게 질려 노려보던 지연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탁자 위의 사진을 챙겨 넣은 그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흘렀다.
“참 대단하네. 같은 여자 입장에서 좋게 말하려고 했더니 안 되겠구나! 너, 우리 시아버님이 누구신지 잘 알잖아. 너 같은 건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요즘 세상에 그렇게는 안 될걸요.......”
“그래! 넌 아직 세상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네가 측은해서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내 남편 옆에서 사라져~! 돈이 필요한 것이라면 연락해. 그만한 보상은 해줄게.”
경고하는 목소리를 내뱉은 지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찬바람을 일으키며 커피숍을 나간 지연은 분노가 치밀면서도 왠지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남편이 은주에게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녀는 우선 유미나 은주를 통해서 자신의 말을 전해들은 남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흡족했다.
은주는 지연에게 맞서서 대응했으나 마음은 괴로웠다, 단순하게 그녀는 오랫동안 간직했던 사랑이었다. 다른 목적 의도로 성민에게 접근했다는 지연의 말투에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녀 자신이 성민의 아내라고 해도 지연과 다를 바 없이 분노했을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었다.
평상시보다 늦게 체육관에 도착해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는 은주는 한창 연습 중인 유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연의 경고가 두렵지만 성민의 곁을 떠날 수는 없었다. 은주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지만 성민의 아내에게 사실을 알려주었을 유미가 밉살스러웠다. 유미를 시폰하고 있는 성민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은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고 있던 유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유미는 전국 체조에서 연기할 난도 높은 피봇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미 또한 신 감독의 부인이 했던 말이 떠올라 던져 올렸던 후프를 리턴하려다가 놓치고 말았다. 후프를 집어 들고 다시 연습을 하려던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유미야! 잠간 얘기 좀 하자~!”
“.........!?”
유미는 주춤거리다가 양팔을 끼고 쳐다보고 있는 이 은주 코치 앞으로 다가갔다. 유미는 평상시도 예민하게 대하는 이 코치의 부름이 탐탁지 않았다. 또한 자신을 직접 지도하는 코치가 아니기에 의아스럽기도 했다. 머뭇거리던 은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유미에게 물었다.
“너, 신 감독 집에 자주 찾아가니?”
“........아뇨!”
“그럼, 신 감독 부인을 자주 만나니?”
“아닌데요. 왜 그런 말을.......”
은주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한다는 표정인 유미가 앙큼하게 시치미를 떼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미는 정말 그녀가 무슨 의도로 물어보는지 전혀 인수가 없었다. 신 감독의 집을 한번 찾아간 것은 우연이었다. 더욱이나 감독의 아내가 했던 말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은주가 다시 물었다.
“너, 신 감독 아내 만났잖아! 그리고 내 얘기 한갓 아냐!?”
“무슨 얘기를요......!?”
“신 감독 집에 자주 갔으면서도 거짓말하는데, 그럼 신 감독 아내가 나를 어떻게 알아!?”
“저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너, 참 앙큼하다.”
“.........!?”
유미는 독살스러운 표정의 은주에게 변명하기도 난처했다. 이미 주위사람들이 그녀가 신 감독의 친척이라고 알려져 있기에 이 코치가 다그치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바짝 다가선 은주는 화풀이 하듯이 유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 체조 선수로 살아남으려면 똑바로 해. 내가 두려워 할 줄 알아. 네가 인척의 배경을 빌미로 체조를 하려면 차라리 선수 생활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는 게 너한테도 좋을 거야.”
“........!?”
“무슨 말인지 알아!? 차라리 너의 배경을 더 좋은 길로 이용하라는 말이야. 괜히 다른 선수들 앞길을 막지 말고. 앞으로 내 암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
은주가 어깨를 밀치는 손에 의해 유미는 한걸음씩 뒷걸음쳤다. 유미는 좌절감마저 들었다. 신 감독의 부인이나 이 은주 코치가 어째서 자신을 미워하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유미는 다른 것은 몰라도 체조를 그만 두라는 말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유미가 알고 있기로는 그녀들이 도리어 신 감독을 역경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었다.
체육관으로 들어오던 성민이 유미와 은주를 빤히 바라보며 서서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성민은 화가 난 표정으로 다그치는 은주의 손에 밀려 뒷걸음질 치는 유미의 모습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게 보였다. 고개를 숙인 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상이 되어 있었다.
유미에게 역정을 내던 은주가 성민이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돌아섰다. 성민은 무슨 일로 은주가 화를 내는지 궁금했다. 그는 천천히 은주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미안하지만, 화가 나서 야단 좀 쳤어요.”
“왜.......!?”
“........”
은주가 대답 없이 창가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녀는 어차피 모두 알게 되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옆에 와서 앉는 성민을 쳐다보고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성민씨 아내가 집으로 찾아왔었어요.”
“집 사람이.......!?”
“아마, 유미가 고자질한 거 같아.”
“유미가.......!?”
“어떻게 나를 알겠어요. 내 뒷조사를 하고 사진들까지 찍어서 보여주던데.......”
성민은 무엇보다도 아내가 은주와 자신의 관계를 알고 찾아갔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유미가 아내에게 고자질했을 것이라는 은주의 잘못된 판단을 이해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충격을 받았을 은주의 마음과 또한 아내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감정 표현이 서툰 아내의 일시적인 충동이라고 판단하기에 시간이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마. 현실적인 감정보다는 원칙에 갇혀 사는 사람이니까.”
“........!?”
며칠간 지연의 협박성 전화에 시달리는 은주는 성민의 담담한 표정이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은주를 안심시키고 돌아선 성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아내가 은주와의 관계를 알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유미가 아내와 준태를 봤다는 골목의 모텔과 여관 간판들이었다.
유미는 자신의 심정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수시로 걸려오는 감독의 아내 전화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였다. 그렇다고 신 감독에게 하소연할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감독이 알게 되면 결국 그 피해는 그녀에게 돌아오고 체조를 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것 같았다. 그녀는 다만 신 감독만 믿고 악착같이 자신의 꿈을 달성하고 싶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유미는 거실에 있는 가족들을 의식하면서도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안정이 되지 않는 마음과 연습으로 정신과 육체, 모두가 지친 상태였다. 그녀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운동복 차림으로 침대에 누웠다. 부모를 실망시킬 수 없어 하소연도 못하는 그녀는 공연히 눈물이 나왔다.
“유미야! 저녁 먹어라.”
“........”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도 유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 같고 귀찮은 그녀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어머니 숙희가 방안을 들여다봤다.
“얘가 잠들었나.......!?”
“.........”
유미는 어머니가 침대로 다가오는 것을 알았지만 쥐 죽은 듯이 벽을 향해 누워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다가 잡아 당겼다.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 불이 뺨을 적시고 있었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던 딸의 모습에 그녀의 어머니는 당황했다.
“유미야! 너 우는 거니!? 왜, 무슨 일 있었니........!?”
“........”
주방 식탁 앞에 앉아있던 유미의 아버지 송 찬욱이 유미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그도 당황한 것이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숙희가 남편을 바라보면서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맡기고 슬그머니 방을 나갔다. 딸을 잠시 내려다보던 찬욱이 말했다.
“유미야! 너 힘들어서 그러니?”
“.........”
“아빠는 오직 네 생각뿐이라는 걸 알잖니! 아빠한테는 말해야지. 누가 뭐라고 그러던......!?”
“..........”
유미는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찬욱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죽은 듯이 누워있던 유미가 일어나 앉았다. 유일하게 그녀가 속마음을 털어 놓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목숨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왈칵 아버지 가슴을 파고들었다. 또한 딸의 심정을 잘 알고 있는 찬욱이었다. 그는 흐느끼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속상한 일이 있나보구나.......!”
“.........!”
흐느끼는 딸의 모습에 찬욱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그가 어렵고 힘든 생활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그가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며 어쩌면 딸이 이루려는 꿈은 바로 그 자신의 꿈이기도 했다. 그는 딸이 서러워하는 이유가 무척 궁금했으나 흐느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딸의 얼굴을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무슨 일이니? 말해 봐!”
“나, 체조 그만 둘까봐.......”
“왜......!? 힘들어서 그래.....!? 아니면 신 감독이 그만두라고 그러니.....? 야단맞았니?”
“아니......”
유미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흔들었다. 찬욱은 이토록 힘들어하는 딸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되어 더욱 안타까웠다. 유미는 아버지에게 하소연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에 입을 열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빤히 쳐다보는 아버지의 눈빛에 그녀는 하소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더러 체조를 그만 두래.”
“누가!? 신 감독이.......!”
“아니! 감독님 부인이 얼마 전에 학교로 나, 찾아왔어.”
“왜, 본인도 아니고 신 감독 부인이 너한테 그런 말을 하지!?”
“감독님은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나더러 체조 그만두고 감독님 곁에서 사라지래. 며칠 동안 전화로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러면서........”
“.........!?”
“그리고 기계체조 담당 이 은주 코치도 똑같은 말로 협박하는데, 왜들 그러는지 미치겠어. 아빠! 나 어떻게 해야 돼?”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러니......!? 신 감독은 뭐라고 그러는데?”
“감독님은 몰라. 감독님은 부인하고 사이가 안 좋아. 그 부인이 속 썩이는 모양이야. 나쁜 여자야. 그리고 감독님은 이 코치와 보통 사이가 아니야! 사실은 감독님은 이 코치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코치에게 당한 것 같아........!”
유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신 감독과 그의 부인, 그리고 이 은주 코치에 대해 두서없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하소연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찬욱은 딸의 말을 듣는 내내 신경을 곤두세웠다. 딸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를 알았지만 그로서는 해결해줄 능력이 없었다.
“우리 유미가 힘들겠구나! 어쩌지......!?”
“........!?”
“하여튼 아빠는 유미가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조금 기다려봐.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는지 모르지만.......”
찬욱은 딸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딸을 시폰하고 있는 신 감독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막연하게 딸을 격려하지만 그가 당장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는 딸의 장래를 위해 한 푼이라도 밀린 인건비를 받아내려고 양 춘식을 찾아갔던 상황을 떠올렸다. 언론의 기사가 되었던 양재동 카페 살인 사건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막바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다. 바캉스 계절이면 누구나 계곡과 바닷가를 떠올린다. 바캉스라는 단어의 의미 자체가 주로 여름에, 피서나 휴양을 위해 떠나는 휴가이다. 그중에도 파도와 수평선을 바라보는 바다를 찾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작 감상적인 피서지인 바다는 뜨겁고 열기로 가득하다.
강원도 속초 북쪽에 위치한 교양리 해안은 해수욕장으로 개발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예전의 한적한 정취와 다르게 많은 피서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민 지연은 가족, 그리고 시댁 친척들과 같이 바닷가를 찾아와 있었다. 텐트 밑에 모여 앉은 여자들은 모래사장 위를 뒹굴며 배구를 하는 남자들을 바라보며 웃고 떠들었다.
지연은 수다를 떨고 있는 여자들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 앉아 있었다. 오픈하고 있는 백화점 매장이 걱정도 되지만 시댁 친척들과 어울려 있는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별장이 가까운 곳에 있었고, 아침 식탁에 모이듯이 연례행사이기에 그녀는 의무적으로 참여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 호호호.......”
“호호호.....”
“회장님 봐! 호호호.......”
여자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체격에 비해 불쑥 나온 뱃살로 신 회장이 모래사장을 뒹구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리고 신 회장이 잘못 쳐올린 공을 성민이 날렵하게 몸을 날려 받아 올렸다.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는 그의 표정에는 카리스마가 풍겼다. 보기 좋게 들어난 근육과 균형 잡힌 체격, 훤칠한 외모는 남자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다.
“큰 도련님이 역시 멋져!”
“아무렴, 누구 아들인데.......”
여자들의 찬사를 받는 성민 못지않게 상대편의 준태도 재빠르게 볼을 받아넘겼다. 곱상한 외모이지만 고등학생답지 않은 우람한 체격을 가진 준태였다. 지연은 남편을 치켜세우는 여자 친척들이 모두 이 은주나 유미로 연상되었다. 한바탕 모래 위를 뒹굴던 남자들이 텐트 그늘로 들어오고 여자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지연은 여자들과 같이 음료수와 맥주, 그리고 과일과 안주를 남자들에게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여자들도 따로 자리를 마련하고 모여 앉았다. 수박을 쪼개서 나누어 먹던 사촌 시누이가 뒤에 앉은 지연을 힐끗 돌아봤다.
“올캐도 바짝 다가앉아. 새댁같이 그러고 있지말고.”
“.........”
“더웁지 않아!?”
“.........!”
모든 남자들이 수영복이나 반바지 차림만으로 상체를 들어내고 있었고, 여자들은 다양한 체격에 원피스 수영복이나 비키니 차림인 반면에 지연은 수영복을 걸친 몸매를 원피스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연은 대답 없이 옅은 미소를 흘렸다.
가족들의 시선이 지연을 스쳐 지나갔다. 성민은 아내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이 은주의 푸념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내의 표정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준태만큼은 가족이나 친척들과 달리 형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는 원피스로 감싸고 있는 형수가 알몸으로 가슴에 안겨있던 순간을 떠올렸다.
성민에게 열등감을 느꼈던 준태였다. 그러나 요즘은 형의 아내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었다는 뿌듯함에 자신감마저 생겼다. 슬그머니 일어난 그는 가족과 친척들의 눈치를 살피며 텐트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준태는 젖가슴과 뱃살이 늘어진 여자들과 달리 단연코 형수에게서 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백화점 매장 오픈에 전념하던 그녀를 가까이하지 못했던 준태는 묘한 충동을 받았다. 바닷가에서 젊은 여자들이 젖가슴과 둔부의 윤곽을 들어낸 비키니를 걸치고 다니는 광경은 그의 젊은 혈기를 더욱 부추겼다. 그는 슬그머니 지연의 옆에 다가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에 팔을 뻗었다.
“.......!?”
넋을 놓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지연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빤히 쳐다보는 준태의 눈빛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친척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돌발적인 그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렸다. 주위 시선을 두려워하는 그녀의 허리를 당기며 그가 귓속말을 했다.
“형수! 할 말이 있어. 차에서 기다릴게........”
“........!?”
준태의 말을 듣는 순간 지연은 남편에게 시선을 향했다. 성민은 텐트 앞쪽에서 침낭을 베고 비스듬히 누워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들은 여전히 수다를 떨고 있었고 그녀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없기에 그녀는 다소 안심이 되었다. 준태가 강조하듯이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올 때까지 기다릴게~!”
“.........”
잠시 긴장했던 지연은 텐트 밖으로 벗어나는 준태를 의식하고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녀는 그를 따라 일어설 마음은 없었다. 단지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혹시 준태가 남편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 은주와 유미를 만난후에도 남편은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연은 선뜻 일어서기도 난감했다. 준태에게 휘말리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것만 같아서였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은 원천적인 감정의 욕구이다. 욕망은 때때로 인간의 생리적 욕구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욕망과 욕구는 정신적인 차이가 있지만 충족해도 또 다른 공복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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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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