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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1 23:50 1,450회 0건






95. 최은희에게로





내게 안긴 최은희에게서 향기가 난다. 이 향긋한 냄새는 상큼한 초가을 저녁에 꽃집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 꽃집 안에 있는 모든 꽃들이 한꺼번에 뿜어내는 모든 향기들이 한데 어우러진 냄새이다. 최은희라는 한 여인의 몸과 마음 그리고 향기와 아름다움까지, 이 모든 것들이 성숙이라는 과일 속에서 한데 어우러진 채로, 가을 햇살에 익어가며 스며나오는 과일향 에틸렌 같기도 하다. 빛 바랜 나뭇잎들이 떨어져 쌓인 낙엽 더미에서 올라오는 매캐한 냄새이다.




"왜 밖에 나와서 기다려요?"
"자기가 온다고 생각하니까 방안에 갖혀 있는 내 가슴이 너무 답답했어."

"누나는 이제 어른이야. 그런데 하는 짓은 꼭 어린애처럼 왜 그래요?"
"구박 고만하고, 밥 먹으러 가자."



최은희는 앞장서서 걷고, 나는 그녀의 뒤를 따른다. 최은희는 하루 종일 집 안에 답답하게 갇혀있다가 밖으로 나온 강아지 같다. 그녀의 경쾌한 걸음걸이에 맞춰 짧은 스커트 자락이 허벅지에서 찰랑거린다. 나는 최은희의 뒤태를 보면서 5월의 봄날에 하늘거리는 날갯짓으로 꽃을 찾는 한 마리의 나비를 연상하기도 한다. 최은희는 마치 흐르는 물 위를 떠가는 꽃잎이 바위에 부딪칠 듯 말 듯 하늘거리며 흘러가는 것 같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최은희는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서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자기 배고파? 걸을 힘이 없는 거야?"

"아니야. 나는 아까 저녁 먹었어.
뒤에서 누나가 걷는 것을 보니까, 밖이 엄청 좋은가?"

"밖이 좋은 것 보다는 자기랑 걸으니까 좋은 거지. 자기는 안 그래?"

"나도 좋아. 이렇게 좋아하는 누나를 보니까 나도 엄청 좋아."



나는 최은희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가을 저녁을 즐기며 한참을 걸었다. 식당이 있어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내 배에서 쪼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최은희가 깜짝 놀란다.



"세상에. 배가 얼마나 고팠으면 .."
"어? 저녁 먹은 지 얼마 안되거든요. 그렇게 고픈 편은 아닌데?"

"거짓말을 왜 해? 자기 배는 다르게 말하잖아. 하하."



길 모퉁이에 기사식당이라고 적힌 간판이 눈에 띈다. 최은희가 앞장서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식당의 종업원은 우리에게 돼지고기를 매운 양념으로 절여서 볶은 요리를 추천했다. 우리는 그 음식을 주문했다.



"회장님이 되신 것 맞아? 하하."
"회장은 무슨 회장? 그냥 빈 자리를 채우는 정도야."

"그래? 서전무 생각은 다르던데?"
"뭐라고 했어요?"

"나중에 자기가 캐나다에 가서 공부하도록, 날더러 자기를 잘 구슬러달래.
거기 지사를 자기한테 맡기고 싶어하는 눈치 같아."

"그런 말을 했어?"
"자기 딸 지혜도 거기 데려다가 공부시키면 어떻겠느냐고 하던데?"

"지혜는 영어 때문에 쉽지 않을꺼야."
"그 쪽에도 외국인 학생들이 공부 시작하기 전에 미리 영어를 배우는 과정이 있거든요."

"조용하게 공부하는 지혜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요.
그러지 말고, 그 쪽 지사는 차라리 누나가 맡아서 하겠다고 얘기하세요."

"여보세요. 나는 지금 맥꼴은행에서 아주 만족스럽게 근무하거든요."




우리 식탁으로 음식이 나왔다. 우리는 상추쌈에 고기를 싸서 서로의 입에 넣어주면서 열심히 먹었다. 고기는 엄청 매운 맛이지만, 약간은 고소한 맛도 나면서 맛있다. 우리는 또 곁들여서 소주도 마셨다. 최은희의 얼굴에 홍조가 돋는다.



내 전화기로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주은혜이다.



"급한 일인데 통화 돼요?"





나는 최은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여주며 양해를 구하고, 주은혜에게 전화를 했다.




"누나, 나야. 무슨 일인데요?"

"내일 아침 10시에 장례식이라며?"
"그래. 맞아요."

"우리는 오늘 저녁에 매장으로 옮기는 일을 끝낼꺼야.
그럼 내일 아침에 바로 판매를 시작할 수 있거든.
장례식 끝나고 시작할까? 아니면 그냥 우리끼리 해?
어차피 내일 하루는 주말을 위해서 전시하는 날 것 같은데."

"장례식은 신경 쓰지 마시고, 매장 오픈 할 때 시판을 시작하시는 것이 좋겠어요.
한상무님은 뭐라고 하셔요?"

"아직 뵙지도 못했어. 나도 공장에서 지금 막 나오는 길이야."
"나는 내일 장례식 끝나고 출근할께요."

"오케이. 그럼 내일 봐."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최은희의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우리는 욕실로 들어가서 거울 앞에 나란히 섰다. 그녀가 나에게 칫솔을 내주어서 우리는 같이 양치를 했다.

최은희는 홈웨어로 갈아입고 주방으로 나왔다. 그녀는 커피를 내려서 소파로 들고 왔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한수정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미국이나 캐나다나에서 백인들은 자기들이 우월하다는 생각에 쩔어있어.
그래서 우리 같은 동양에서 온 외국인들을 대놓고 무시해."

"인종차별? 누나도 그거 당했어?"

"어렸을 때 부터 그런 문제는 크든 작든 항상 있거든.
내가 박사과정 할 때 어떤 교수는 아예 대놓고 그랬어.
한국인은 원래 경영학을 모르던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는 나한테 B 이상은 주지 않겠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 교수한테 당신 수업 듣지 않겠으며, 당신이 한 말을 SNS에 그대로 올리겠다고 했어.
그리고 그 날 바로 그대로 해버렸지.
그 학기 말까지 그 교수는 인종차별이라는 논란에 휩싸이다가 결국 그 대학에서 쫓겨났어."

"하하하. 그 인간은 누나한테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

"지금까지 그에게 당한 사람들이 하나 둘 이었겠어?
당하고도 가만히 있으니까 제가 잘난 줄 알았나봐.
난 인종차별이나 그런 것 보면 용서 못해."

"누나가 어려서부터 그런 것들을 많이 겪었겠구나."
"오죽했으면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공부에 이를 갈았을까."

"그런데 수정이는 어떨까?"

"수정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수정이처럼 실력있는 외국인을 보면 걔네들은 무조건 고개를 숙이거든."

"그래도 잘 해야 할텐데 .."

"걔는 실력도 좋지만, 인기도 엄청 좋아.
수정이가 동양인 중에서는 영어도 엄청 잘하고, 무엇보다도 미모가 워낙 되잖아?"


"그렇다면 다행이고."

"수정이는 백인들이 뻑가는 마스크야.
그래서 걔 주변에는 남자들도 엄청 많아.
걔가 성에 대해서는 지독하게 보수적이라는 것을 자기는 다행으로 알아야 해.
안그랬더라면 벌써 남자 여럿 갈아 치웠을껄. 하하."


"누나도 보수적이야?"

"나는 그런 것 전혀 없어.
인종차별에서 밀리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실력밖에 없거든요.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일하다 보니까, 그런 쪽으로는 전혀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것뿐이야."

"우선순위(Priority)의 문제인가?"

"아무래도 그렇겠지.
나이를 먹고 인생을 살면서 보니까 섹스보다 엄청 중요하고 심각한 것들이 있더라고.
그런 것들에 매달리다가 오늘에 온 거지.
그런다고 인생이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은데 .."



최은희의 얼굴이 창 쪽으로 향한다. 그녀는 어두운 창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다. 최은희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또 존경스럽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 너무 예뻐서, 나는 그녀를 천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그 선생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공부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 생각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최은희는 그 때 그 선생님의 모습과 너무 닮았다.

가끔 그 선생님과 마주치면 나는 얼른 그녀에게 인사를 했고, 그녀는 나에게 공부를 잘한다며 창찬하는 말을 했다. 그 말이 나에게 그렇게 좋았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교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직 그 선생님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 내 눈에 보이는 최은희는 고독한 여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녀는 지금 마치 허허벌판에 혼자 서있는 한 그루의 나무와도 같다. 그것도 잎사귀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가지만 앙상한 겨울 나무. 그녀만의 외로움이 그녀의 그림자를 가득 채우고 있다. 저 여인의 심연에 유일하게 버티고 있는 것은 고독이라는 덩어리이리다. 어쩌면 저 고독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인생을 이토록 고집스럽게 살도록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최은희의 어깨로 팔을 둘렀다. 그제서야 최은희는 고개를 숙이며 어깨 저쪽에서 내 손을 잡는다. 나는 최은희의 어깨를 내 쪽으로 당겼다. 최은희가 내게로 힘없이 쓰러져온다. 최은희가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나는 얼굴을 그녀의 머리로 내렸다. 내 코로 그녀의 머리를 문지르다시피 했다. 원피스의 앞섶이 벌어지면서, 그 안에 있는 두 개의 뽀얀 탱탱한 살덩이가 눈에 들어온다. 그 한 개는 짙은 꼭지까지 얼핏 보인다.

내가 숨쉬는 것이 불규칙해진다. 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도 점점 빨라진다. 이것은 여자의 가슴을 보았다고 해서 흥분했기 때문이 아니다. 나에게 안기다시피 하고 있는 최은희라는 여인 때문이다.


최은희가 드디어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나는 그녀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오자 무척 반가웠다. 짙은 눈매와 오똑한 콧날, 그리고 그녀의 붉은 입술, 또 그 아래로 점차 좁아지면서 내려가다가 둥그렇게 마무리되어 끝나는 턱.

이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있는 최은희의 얼굴로 내 뺨을 댔다. 내 뺨은 그녀의 이마와 눈을 지긋이 눌렀다. 또 그녀의 코에 댔다. 그녀의 입술이 내 뺨에 눌렸다. 최은희의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그녀의 손이 내 뺨을 쓰다듬는다. 우리는 조용히 입술을 포갰다. 내 입술에 그녀의 말랑말랑한 입술이 눌린다.

내 혀가 그녀의 입술을 핥기 위해 입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최은희의 입이 열리면서 내 혀를 입술로 물고 입 안으로 빨아당긴다. 나도 그녀의 혀와 입술을 동시에 빨아들였다. 입술은 놓아주고 혀만 빨았다. 그녀의 향기가 내 코와 입으로 들어온다. 최은희도 내 입술을 빨았다. 그녀는 내 손목을 꼬옥 잡는다. 나는 그 손으로 최은희의 가슴을 살짝 덮었다. 최은희가 나의 그 손을 지긋이 누른다. 그녀가 입을 떼며 내게 말했다.



"하아. .. 자기야. 침대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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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일 202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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