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밤과 새벽 사이
이곳에서도 벌써 이틀째, 지훈은 오늘도 여전히 새 휠체어에 앉아 창 밖 저 아래를 내려다 본다. 서수원버스터미널이 내려다 보이는 여기는 호텔이란 이름의 모텔. 만약 이렇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이라도 있지 않았다면 지훈도 선경도 답답함을 견디지 못했을 터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선경의 가슴도 자꾸만 타들어 갔다. 재복 아저씨란 사람의 소식은 아직도 없었다. 처음 몇 번 방송에 나왔던 추락사고 소식도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고 미국에 계시다는 지훈의 할아버지도 여전히 연락이 닿질 않았다. 아마도 지훈으로서는 너무나 막막한 상황이리라.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혹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자책하지는 않을까? 아니면 앞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의 미로를 어떻게 헤쳐갈까 고민하고 있을까? 선경은 다만 그가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낙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우리 산책 갈까요?”
지훈의 그 말에 선경은 의아했다. 저 밖의 세상을 믿을 수 없어 이렇게 감옥 아닌 감옥생활을 하면서 산책을 가자니. 그것이 무슨 뜻일까? 걱정이 밀려들었다.
“그래도 될까요?”
“가요, 우리. 산책하러.”
아무 말없이 그의 휠체어를 밀며 방을 나섰다. 조금은 어두운 복도를 지나 저 앞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는 걸음이 선경은 자꾸만 무거웠다.
“정말… 괜찮을까요?”
자신이야 어떻게든 가리면 알아보기 어렵다고 해도 휠체어가 필요한 그는 어떻게 자신을 숨기려는 걸까? 설마 자포자기?
“갈까요?
망설이는 선경과 달리 지훈은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스스로 휠체어를 밀고 들어가며 선경을 재촉했다. 그런 그를 보며 선경도 무거운 걸음을 엘리베이터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 아래층 로비를 누르려는데
“이미 눌렀어요.”
(그럴 리가. 아래층 로비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는데. 지금 켜진 것은 꼭대기층. 꼭대기층?)
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오던 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중간에 서지 않고 올라 온 엘리베이터가 꼭대기층에서 열렸고 지훈이 자신의 손으로 훌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지훈씨!”
그가 돌아보며 말했다.
“이리 오세요.”
“어때요?”
“좋네요, 정말! 이런 곳이 있을 줄 몰랐어요.”
지훈이 빙긋이 웃었다.
“심심해서 이곳 팜플렛을 보니 옥상에 정원이 있다고 되어 있더군요. 밖에 나가지 않고도 이렇게 산책을 할 수 있으니 참 좋네요.”
선경이 피식 웃었다. 조금 전 자신의 우울한 상상이 웃기기만 했다.
“왜요?”
“아니에요. 잠깐 엉뚱한 상상을 했었거든요.”
“어떤… 상상을요?”
“그냥요. 후훗……”
알 수 없는 선경의 미소에 그도 그저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크지 않은 옥상 정원을 몇 번이고 돌았다. 아주 먼 길을 가듯 그렇게 같은 길을 반복하며 선경은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이렇게 반복된 일상을 통해 다람쥐 쳇바퀴처럼 늘 같은 곳에 매여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럼에도 어느 날엔가는 시간의 길을 따라 자신도 알지 못하는 아주 먼 곳에 당도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아무 말 없이 움직이는 그들 머리 위로 하늘이 우르르 소리를 냈다. 곧이어 누군가의 복받친 울음 같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비 오네요! 어서 들어가요.”
“아뇨, 잠시만요.”
“안돼요.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떡해요?”
“잠시만, 아주 잠시만요.”
머리에 손을 얹고 비를 피하던 선경은 휠체어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는 지훈을 따라 손을 내리고 자신도 하늘을 올려다 봤다. 상처 입은 새처럼 푸득이며 떨어져 내리는 가을 비가 선경의 눈에는 마치 안개꽃이 바람을 타고 흩어져 내리는 것처럼 슬프게 보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할게요. 그냥 계세요.”
“그래도……”
선경이 지훈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옷들을 하나씩 벗겨냈다.
“어서 몸을 따뜻하게 씻어야 감기 안 걸리죠. 옷도 세탁해야 하구요. 마침 여긴 세탁 서비스가 있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어쩔 뻔 했어요?”
선경의 투덜거림에 지훈이 미안함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이처럼 말을 들었다. 손을 들어 옷을 벗기 쉽게 해주고 옷이 잘 빠지도록 몸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렇지만 바지에 손을 대는 선경의 손길에는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내가 하겠습니다. 내가!”
당황한 그의 음성에도 선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세요. 그게 도와주는 거에요.”
거침없는 선경의 손길에 지훈은 그만 단념하듯 말을 멈췄다. 선경이 옷을 벗기기 쉽게 몸을 들어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그도 아는 것 같았다. 마침내 속옷 하나만 남았을 때, 두 팔로 팔걸이를 잡고 상체를 들어주고는 지훈은 눈을 감았다. 곧 이어 지훈의 속옷이 다리 아래로 내려지고 다리 한쪽씩 들어가며 완전히 벗겨낸 선경이 그의 휠체어를 밀며 욕실로 들어갔다. 이미 욕조에는 김이 오르는 따뜻한 물이 적당히 받아져 있었다.
“욕조에 들어가 계세요. 옷 세탁 맡기고 올게요.”
“네? 아뇨, 아니요. 씻는 건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그냥 물에 들어가서 가만히 계세요. 공연히 일거리 만들지 마시구요. 욕조에서도 바깥 경치가 보이니까 구경하시던가 아니면 TV 설치 되어 있으니 TV 보시던가 하면서요. 아셨죠?”
지훈이 얼빠진 눈으로 선경의 시선을 피했다. 붉어진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보였다.
욕실을 나간 선경이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몇 분. 그 몇 분의 시간 동안 지훈은 어쩔 줄 모르는 불안함으로 욕조 안에 아이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선경은 그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것은 마치 선경이 봉사활동을 했던 보육원의 아이들과의 처음 만남을 떠올리게 했다. 상처 입은 그 아이들의 불안한 시선, 때로 적대적인 날카로운 시선, 그럼에도 선경의 손길에 공통되게 보이던 당황한 모습들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선경은 어느 새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지훈이 슬쩍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욕조 앞에 있는 TV를 켜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지만 초점은 맞춰져 있지 않은 듯 했다.
선경이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 한 쪽에 걸었다. 가운 안에 선경은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얼굴과 손과 팔과 다리의 돋보이는 하얀 피부는 예고편과 같았다. 그렇듯 보이지 않던 곳의 피부는 더욱 하얗게 빛났다. 그 모습은 마치 페르시안 고양이를 보는 듯 했다. 아마 누구도 선경의 그 하얀 피부가 몸 전체를 빛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망설임 없이 욕조로 들어온 선경의 손에는 거품입욕제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거침없이 욕조에 쏟아졌고 시간이 갈수록 거품이 몽실몽실 욕조의 표면을 채워나갔다. 이어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선경을 보며 지훈은 별로 물러날 곳 없는 욕조의 끝으로 도망을 갔다.
“왜, 왜 그러세요?”
지훈이 놀란 목소리로 눈을 크게 뜨고 선경을 바라봤다.
“씻어야죠. 한동안 목욕도 제대로 못하셨을 텐데.”
“그거야 내 손으로 하면 됩니다.”
“오늘은 제가 해드릴게요. 저 아이들 많이 씻겨봐서 잘 해요. 맡겨 보세요.”
목욕스펀지를 든 선경이 지훈의 팔을 잡았다. 지훈이 질겁을 하며 손을 뺐다.
“아이처럼 왜 그러세요? 가만히 계셔야 빨리 씻죠. 자꾸 물 튀기면 나중에 정리하기 어렵단 말이에요.”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그런 소리 마세요. 등은 어떻게 씻으시게요? 제가 해드릴 테니 그냥 가만히 계세요. 아이처럼 굴지 말고.”
순간 지훈은 머리를 무언가에 맞은 듯 했다.
(그래, 예전 어렸을 때 엄마가 이렇게 씻겨주곤 했지. 그 때도 나는 창피하다고 도망을 갔고, 엄마는 때릴 듯이 혼내키며 나를 씻겨주시곤 했어. 처음엔 창피하다가도 나중엔 엄마의 부드러운 손길에 너무나 기분이 좋아지곤 했던 기억이 나네. 후후…….)
착한 아이처럼 가만히 있는 지훈의 몸을 선경이 꼼꼼히 씻겨 나갔다. 팔과 가슴과 등을, 그리고 다리를. 마지막엔 어렵게 들려진 그의 엉덩이와 그의 남성을. 그 사이 지훈은 체념하듯 눈을 감고 모든 것을 선경에게 맡겼다. 가끔씩 선경이 움직이라는 데로 움직이면서. 섬세한 선경의 손길에 지훈은 처음의 어색함과 불편함을 잊고 점차 편안해져 갔다.
“이제 됐어요. 조금만 계세요. 저도 좀 씻고 헹궈드릴게요.”
지훈은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얼마 후 선경이 욕조의 물을 빼고 샤워기를 틀어 지훈의 머리부터 거품의 흔적을 씻어 내렸다. 상쾌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상쾌한 목욕을 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정말 오랜 만의 기분 좋은 목욕. 눈을 감은 지훈의 입가에 저절로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 지훈의 기분 좋은 느낌이 한 순간 멈췄다. 선경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뚝 멈춰있었다.
“무슨……”
선경을 보며 입을 열던 지훈은 선경의 놀란 눈을 따라 자신의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그 자신도 놀라 입을 벌리며 눈을 크게 떴다.
“이, 이……”
얼마 만인가, 그의 남성이 꼿꼿이 고개를 쳐든 것이! 그도 선경도 그 모습에 놀라 한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지나 놈의 고개가 숙여져서야 서로의 시선을 마주했다.
“지훈씨!”
“선경씨……”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두 사람은 직감했다. 처음으로 그의 굳어진 몸이 살아있다고 신호를 보내온 것이라는 것을. 선경이 지훈에게 다가와 와락 그를 안았다. 지훈도 선경을 끌어 안았다. 서로가 옷부스러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지훈의 상태가 반가운 두 사람이었다. 그러다 잠시 후 선경이 다시금 놀라 후다닥 물러섰다.
“어머!”
얼굴을 붉히며 순간 고개를 외면했던 선경이 조심스레 다시 고개를 돌려 지훈의 중심을 바라봤다. 어느새 다시 고개를 든 지훈의 남성이 선경을 날카롭게 조준하고 있었다.
그날 밤, 선경도 지훈도 서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 침대를 쓰는 것에도 이젠 어색하지 않다 여겼던 것들이 하나의 변화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침대에 누운 두 사람의 거리가 끝에서 끝으로 멀어졌다. 서로가 등을 돌린 채 숨을 고르느라 힘이 들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저 끝에 세워진 등의 희미한 붉은 빛이 자꾸만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지훈의 핸드폰이 정적을 깨며 울렸다.
“여보세요?”
“……”
“아저씨!”
선경이 그 소리에 몸을 돌려 앉으며 물었다.
“재복 아저씨인가요?”
지훈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신 거죠?”
“……”
“우리 차 한강에 빠진 거 봤습니다. 걱정 많이 했어요.”
“……”
“다행이었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길었다. 그러다 지훈의 목소리의 톤이 높아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
“그럴 수가! 설마 했는데, 정말 큰아버지가……”
“……”
“어쩔 수 없는 일이군요. 다른 건 몰라도 부모님에 대한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
“알겠습니다. 아저씨 생각대로 하세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연락이 안돼요. 어떻게 된 일인지 걱정입니다.”
“…….”
“그래요? 음…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더 기다려 보죠.”
“……”
“실은 저와 선경씨도 일이 좀 있었습니다.”
“……”
“그게……”
선경도 익히 아는 그간의 일을 설명하는 지훈의 목소리가 조금은 격앙된 듯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은 차도 버리고 은거 중입니다.”
“……”
그럼 저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이번엔 제발 몸 조심하세요.”
“……”
“네, 그럼 또 연락주세요.”
전화기를 내려 놓는 지훈을 보고 선경이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괜찮으시대요?”
“네. 상황이 무척 좋지 않았던 모양인데 지금은 괜찮다고 하는군요.”
“다행이네요.”
“위험하긴 했지만 대신에 소득도 얻었다고 합니다. 아저씨도 할아버지와 연락이 되지 않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하네요.”
“네……”
“아저씨 말로는 일이 마무리 될 때까지 저보고 선경씨와 숨어있으라고 합니다. 그들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지금보다 더 우리를 찾을 것이라고요.”
“우리가 무슨 소용이 있어서요?”
“글쎄요. 아저씨는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인데 자세한 말씀은 안 하시네요.”
“짐작 가는 건 없으세요?”
“대충 알 것 같긴 한데……”
지훈의 입을 쳐다봤다. 그가 망설이다 선경의 궁금증 가득한 눈을 보고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갖고 있는 정보가 그들에게는 무척 곤란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그걸 회수하고 싶지 않을까요? 그런데 아저씨가 그들과 협상할 일이 없을 테니 결국 협상을 위해선 아저씨가 협상에 응할만한 것을 손에 쥐려고 하겠죠.”
“그게 우리란 말이군요.”
“아마도.”
선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의 생각이 맞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들을 찾는 데 그렇게까지 온 힘을 기울일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아저씨는 행방불명 상태로 드러나지 않게 행동하실 거라고 하네요. 그래야 저들도 아저씨가 사고로 죽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게 될 테고 조금은 경계를 늦추게 될 테니까요.”
“그렇겠군요.”
“아무튼 아저씨가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네, 맞아요. 저도 속으로 걱정했거든요. 후훗!”
“이야호!”
지훈이 손을 들며 기쁨을 표현했다. 그런 지훈의 모습을 보며 선경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훈이 방금 전의 자신의 행동이 쑥스러운지 고개를 빼는 시늉을 하며 머쓱해했다.
“기분이 무척 좋아서요. 하하하……”
선경이 웃으며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저두요.”
약간의 어색한 시간 후에 지훈이 선경의 손을 잡아 끌었다. 선경이 왜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선경의 얼굴에 포개어졌다.
(어쩌면 난 예감 했던 거야. 이렇게 될 줄. 처음 남산에서 그의 선한 눈을 본 그 순간에.)
생각은 생각대로 몸은 몸대로 움직였다. 그의 입술이 선경의 입술을 탐했다. 조금씩 더 깊숙이. 그리고 선경의 마음처럼 그녀의 입술도 그를 품어나갔다. 조금씩 더 깊숙이. 커튼 너머의 바깥 세상도 이제 곧 새벽이 올 듯 비구름이 서서히 물러서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벌써 이틀째, 지훈은 오늘도 여전히 새 휠체어에 앉아 창 밖 저 아래를 내려다 본다. 서수원버스터미널이 내려다 보이는 여기는 호텔이란 이름의 모텔. 만약 이렇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이라도 있지 않았다면 지훈도 선경도 답답함을 견디지 못했을 터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선경의 가슴도 자꾸만 타들어 갔다. 재복 아저씨란 사람의 소식은 아직도 없었다. 처음 몇 번 방송에 나왔던 추락사고 소식도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고 미국에 계시다는 지훈의 할아버지도 여전히 연락이 닿질 않았다. 아마도 지훈으로서는 너무나 막막한 상황이리라.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혹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자책하지는 않을까? 아니면 앞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의 미로를 어떻게 헤쳐갈까 고민하고 있을까? 선경은 다만 그가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낙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우리 산책 갈까요?”
지훈의 그 말에 선경은 의아했다. 저 밖의 세상을 믿을 수 없어 이렇게 감옥 아닌 감옥생활을 하면서 산책을 가자니. 그것이 무슨 뜻일까? 걱정이 밀려들었다.
“그래도 될까요?”
“가요, 우리. 산책하러.”
아무 말없이 그의 휠체어를 밀며 방을 나섰다. 조금은 어두운 복도를 지나 저 앞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는 걸음이 선경은 자꾸만 무거웠다.
“정말… 괜찮을까요?”
자신이야 어떻게든 가리면 알아보기 어렵다고 해도 휠체어가 필요한 그는 어떻게 자신을 숨기려는 걸까? 설마 자포자기?
“갈까요?
망설이는 선경과 달리 지훈은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스스로 휠체어를 밀고 들어가며 선경을 재촉했다. 그런 그를 보며 선경도 무거운 걸음을 엘리베이터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 아래층 로비를 누르려는데
“이미 눌렀어요.”
(그럴 리가. 아래층 로비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는데. 지금 켜진 것은 꼭대기층. 꼭대기층?)
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오던 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중간에 서지 않고 올라 온 엘리베이터가 꼭대기층에서 열렸고 지훈이 자신의 손으로 훌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지훈씨!”
그가 돌아보며 말했다.
“이리 오세요.”
“어때요?”
“좋네요, 정말! 이런 곳이 있을 줄 몰랐어요.”
지훈이 빙긋이 웃었다.
“심심해서 이곳 팜플렛을 보니 옥상에 정원이 있다고 되어 있더군요. 밖에 나가지 않고도 이렇게 산책을 할 수 있으니 참 좋네요.”
선경이 피식 웃었다. 조금 전 자신의 우울한 상상이 웃기기만 했다.
“왜요?”
“아니에요. 잠깐 엉뚱한 상상을 했었거든요.”
“어떤… 상상을요?”
“그냥요. 후훗……”
알 수 없는 선경의 미소에 그도 그저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크지 않은 옥상 정원을 몇 번이고 돌았다. 아주 먼 길을 가듯 그렇게 같은 길을 반복하며 선경은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이렇게 반복된 일상을 통해 다람쥐 쳇바퀴처럼 늘 같은 곳에 매여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럼에도 어느 날엔가는 시간의 길을 따라 자신도 알지 못하는 아주 먼 곳에 당도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아무 말 없이 움직이는 그들 머리 위로 하늘이 우르르 소리를 냈다. 곧이어 누군가의 복받친 울음 같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비 오네요! 어서 들어가요.”
“아뇨, 잠시만요.”
“안돼요.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떡해요?”
“잠시만, 아주 잠시만요.”
머리에 손을 얹고 비를 피하던 선경은 휠체어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는 지훈을 따라 손을 내리고 자신도 하늘을 올려다 봤다. 상처 입은 새처럼 푸득이며 떨어져 내리는 가을 비가 선경의 눈에는 마치 안개꽃이 바람을 타고 흩어져 내리는 것처럼 슬프게 보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할게요. 그냥 계세요.”
“그래도……”
선경이 지훈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옷들을 하나씩 벗겨냈다.
“어서 몸을 따뜻하게 씻어야 감기 안 걸리죠. 옷도 세탁해야 하구요. 마침 여긴 세탁 서비스가 있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어쩔 뻔 했어요?”
선경의 투덜거림에 지훈이 미안함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이처럼 말을 들었다. 손을 들어 옷을 벗기 쉽게 해주고 옷이 잘 빠지도록 몸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렇지만 바지에 손을 대는 선경의 손길에는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내가 하겠습니다. 내가!”
당황한 그의 음성에도 선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세요. 그게 도와주는 거에요.”
거침없는 선경의 손길에 지훈은 그만 단념하듯 말을 멈췄다. 선경이 옷을 벗기기 쉽게 몸을 들어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그도 아는 것 같았다. 마침내 속옷 하나만 남았을 때, 두 팔로 팔걸이를 잡고 상체를 들어주고는 지훈은 눈을 감았다. 곧 이어 지훈의 속옷이 다리 아래로 내려지고 다리 한쪽씩 들어가며 완전히 벗겨낸 선경이 그의 휠체어를 밀며 욕실로 들어갔다. 이미 욕조에는 김이 오르는 따뜻한 물이 적당히 받아져 있었다.
“욕조에 들어가 계세요. 옷 세탁 맡기고 올게요.”
“네? 아뇨, 아니요. 씻는 건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그냥 물에 들어가서 가만히 계세요. 공연히 일거리 만들지 마시구요. 욕조에서도 바깥 경치가 보이니까 구경하시던가 아니면 TV 설치 되어 있으니 TV 보시던가 하면서요. 아셨죠?”
지훈이 얼빠진 눈으로 선경의 시선을 피했다. 붉어진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보였다.
욕실을 나간 선경이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몇 분. 그 몇 분의 시간 동안 지훈은 어쩔 줄 모르는 불안함으로 욕조 안에 아이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선경은 그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것은 마치 선경이 봉사활동을 했던 보육원의 아이들과의 처음 만남을 떠올리게 했다. 상처 입은 그 아이들의 불안한 시선, 때로 적대적인 날카로운 시선, 그럼에도 선경의 손길에 공통되게 보이던 당황한 모습들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선경은 어느 새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지훈이 슬쩍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욕조 앞에 있는 TV를 켜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지만 초점은 맞춰져 있지 않은 듯 했다.
선경이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 한 쪽에 걸었다. 가운 안에 선경은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얼굴과 손과 팔과 다리의 돋보이는 하얀 피부는 예고편과 같았다. 그렇듯 보이지 않던 곳의 피부는 더욱 하얗게 빛났다. 그 모습은 마치 페르시안 고양이를 보는 듯 했다. 아마 누구도 선경의 그 하얀 피부가 몸 전체를 빛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망설임 없이 욕조로 들어온 선경의 손에는 거품입욕제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거침없이 욕조에 쏟아졌고 시간이 갈수록 거품이 몽실몽실 욕조의 표면을 채워나갔다. 이어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선경을 보며 지훈은 별로 물러날 곳 없는 욕조의 끝으로 도망을 갔다.
“왜, 왜 그러세요?”
지훈이 놀란 목소리로 눈을 크게 뜨고 선경을 바라봤다.
“씻어야죠. 한동안 목욕도 제대로 못하셨을 텐데.”
“그거야 내 손으로 하면 됩니다.”
“오늘은 제가 해드릴게요. 저 아이들 많이 씻겨봐서 잘 해요. 맡겨 보세요.”
목욕스펀지를 든 선경이 지훈의 팔을 잡았다. 지훈이 질겁을 하며 손을 뺐다.
“아이처럼 왜 그러세요? 가만히 계셔야 빨리 씻죠. 자꾸 물 튀기면 나중에 정리하기 어렵단 말이에요.”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그런 소리 마세요. 등은 어떻게 씻으시게요? 제가 해드릴 테니 그냥 가만히 계세요. 아이처럼 굴지 말고.”
순간 지훈은 머리를 무언가에 맞은 듯 했다.
(그래, 예전 어렸을 때 엄마가 이렇게 씻겨주곤 했지. 그 때도 나는 창피하다고 도망을 갔고, 엄마는 때릴 듯이 혼내키며 나를 씻겨주시곤 했어. 처음엔 창피하다가도 나중엔 엄마의 부드러운 손길에 너무나 기분이 좋아지곤 했던 기억이 나네. 후후…….)
착한 아이처럼 가만히 있는 지훈의 몸을 선경이 꼼꼼히 씻겨 나갔다. 팔과 가슴과 등을, 그리고 다리를. 마지막엔 어렵게 들려진 그의 엉덩이와 그의 남성을. 그 사이 지훈은 체념하듯 눈을 감고 모든 것을 선경에게 맡겼다. 가끔씩 선경이 움직이라는 데로 움직이면서. 섬세한 선경의 손길에 지훈은 처음의 어색함과 불편함을 잊고 점차 편안해져 갔다.
“이제 됐어요. 조금만 계세요. 저도 좀 씻고 헹궈드릴게요.”
지훈은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얼마 후 선경이 욕조의 물을 빼고 샤워기를 틀어 지훈의 머리부터 거품의 흔적을 씻어 내렸다. 상쾌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상쾌한 목욕을 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정말 오랜 만의 기분 좋은 목욕. 눈을 감은 지훈의 입가에 저절로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 지훈의 기분 좋은 느낌이 한 순간 멈췄다. 선경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뚝 멈춰있었다.
“무슨……”
선경을 보며 입을 열던 지훈은 선경의 놀란 눈을 따라 자신의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그 자신도 놀라 입을 벌리며 눈을 크게 떴다.
“이, 이……”
얼마 만인가, 그의 남성이 꼿꼿이 고개를 쳐든 것이! 그도 선경도 그 모습에 놀라 한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지나 놈의 고개가 숙여져서야 서로의 시선을 마주했다.
“지훈씨!”
“선경씨……”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두 사람은 직감했다. 처음으로 그의 굳어진 몸이 살아있다고 신호를 보내온 것이라는 것을. 선경이 지훈에게 다가와 와락 그를 안았다. 지훈도 선경을 끌어 안았다. 서로가 옷부스러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지훈의 상태가 반가운 두 사람이었다. 그러다 잠시 후 선경이 다시금 놀라 후다닥 물러섰다.
“어머!”
얼굴을 붉히며 순간 고개를 외면했던 선경이 조심스레 다시 고개를 돌려 지훈의 중심을 바라봤다. 어느새 다시 고개를 든 지훈의 남성이 선경을 날카롭게 조준하고 있었다.
그날 밤, 선경도 지훈도 서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 침대를 쓰는 것에도 이젠 어색하지 않다 여겼던 것들이 하나의 변화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침대에 누운 두 사람의 거리가 끝에서 끝으로 멀어졌다. 서로가 등을 돌린 채 숨을 고르느라 힘이 들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저 끝에 세워진 등의 희미한 붉은 빛이 자꾸만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지훈의 핸드폰이 정적을 깨며 울렸다.
“여보세요?”
“……”
“아저씨!”
선경이 그 소리에 몸을 돌려 앉으며 물었다.
“재복 아저씨인가요?”
지훈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신 거죠?”
“……”
“우리 차 한강에 빠진 거 봤습니다. 걱정 많이 했어요.”
“……”
“다행이었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길었다. 그러다 지훈의 목소리의 톤이 높아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
“그럴 수가! 설마 했는데, 정말 큰아버지가……”
“……”
“어쩔 수 없는 일이군요. 다른 건 몰라도 부모님에 대한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
“알겠습니다. 아저씨 생각대로 하세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연락이 안돼요. 어떻게 된 일인지 걱정입니다.”
“…….”
“그래요? 음…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더 기다려 보죠.”
“……”
“실은 저와 선경씨도 일이 좀 있었습니다.”
“……”
“그게……”
선경도 익히 아는 그간의 일을 설명하는 지훈의 목소리가 조금은 격앙된 듯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은 차도 버리고 은거 중입니다.”
“……”
그럼 저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이번엔 제발 몸 조심하세요.”
“……”
“네, 그럼 또 연락주세요.”
전화기를 내려 놓는 지훈을 보고 선경이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괜찮으시대요?”
“네. 상황이 무척 좋지 않았던 모양인데 지금은 괜찮다고 하는군요.”
“다행이네요.”
“위험하긴 했지만 대신에 소득도 얻었다고 합니다. 아저씨도 할아버지와 연락이 되지 않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하네요.”
“네……”
“아저씨 말로는 일이 마무리 될 때까지 저보고 선경씨와 숨어있으라고 합니다. 그들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지금보다 더 우리를 찾을 것이라고요.”
“우리가 무슨 소용이 있어서요?”
“글쎄요. 아저씨는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인데 자세한 말씀은 안 하시네요.”
“짐작 가는 건 없으세요?”
“대충 알 것 같긴 한데……”
지훈의 입을 쳐다봤다. 그가 망설이다 선경의 궁금증 가득한 눈을 보고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갖고 있는 정보가 그들에게는 무척 곤란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그걸 회수하고 싶지 않을까요? 그런데 아저씨가 그들과 협상할 일이 없을 테니 결국 협상을 위해선 아저씨가 협상에 응할만한 것을 손에 쥐려고 하겠죠.”
“그게 우리란 말이군요.”
“아마도.”
선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의 생각이 맞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들을 찾는 데 그렇게까지 온 힘을 기울일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아저씨는 행방불명 상태로 드러나지 않게 행동하실 거라고 하네요. 그래야 저들도 아저씨가 사고로 죽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게 될 테고 조금은 경계를 늦추게 될 테니까요.”
“그렇겠군요.”
“아무튼 아저씨가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네, 맞아요. 저도 속으로 걱정했거든요. 후훗!”
“이야호!”
지훈이 손을 들며 기쁨을 표현했다. 그런 지훈의 모습을 보며 선경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훈이 방금 전의 자신의 행동이 쑥스러운지 고개를 빼는 시늉을 하며 머쓱해했다.
“기분이 무척 좋아서요. 하하하……”
선경이 웃으며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저두요.”
약간의 어색한 시간 후에 지훈이 선경의 손을 잡아 끌었다. 선경이 왜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선경의 얼굴에 포개어졌다.
(어쩌면 난 예감 했던 거야. 이렇게 될 줄. 처음 남산에서 그의 선한 눈을 본 그 순간에.)
생각은 생각대로 몸은 몸대로 움직였다. 그의 입술이 선경의 입술을 탐했다. 조금씩 더 깊숙이. 그리고 선경의 마음처럼 그녀의 입술도 그를 품어나갔다. 조금씩 더 깊숙이. 커튼 너머의 바깥 세상도 이제 곧 새벽이 올 듯 비구름이 서서히 물러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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