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새벽을 지나 아침을 향해간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하늘은 우울한 붉은 빛을 띄며 낮게 으르렁거린다. 아무래도 곧 비가 올 듯 하다.
가로등의 노란 불빛은 창가의 그녀를 비추고 부드러운 어깨의 곡선을 만나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녀의 가늘고 하얀 손가락은 까만 담배를 집어들고는 능숙하게 불을 붙인다.
어두운 방안에서 그녀의 손가락만이 눈부시게 빛난다. 담배의 불빛보다 더 밝게.
방안의 가득했던 열기와 땀냄세는 열려진 창문으로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불어와 모두 날려버리고
그녀의 담배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체리향이 방안을 체워간다
"..let it be..let it be.."
끊어질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흥얼거리기 시작했을때 타당 타당 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빗방울은 아스팔트를 적시며 비릿한 냄세를 풍기기 시작하지만 그녀의 방안은 달콤한 체리향만이 가득하다.
그녀는 세상 모든곳의 비릿한 비내음을 지우기라도 할듯 힘껏 담배연기를 뿜어낸다.
"오래 걸렸지? 이제 금방이야."
빗방울은 창틀을 발판삼아 그녀의 어깨위로 올라선다. 그리곤 부끄러움도 모르는듯 그녀의 계곡 사이로 흘러내려간다.
두번째 녀석, 세번째 녀석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경쟁이라도 하듯이 계곡을 지나 아래로 아래로 내달린다.
방향을 잘못 잡은 녀석. 길을 만드느라 자신을 모두 소진한 녀석.
그리곤 마침내 그녀의 은밀한 화원에 도착한다.
그녀는 잠시 몸을 부르르 떨고는 창문을 닫는다. 봄이 다가오고 있다해고 새벽 공기는 차다.
게다가 첫 봄비는 눈이 되려고 했었다는듯이 아직도 겨울의 한기를 가지고 있다.
#0. 펑크걸
그녀들이 만난건 미터, 흔히들 ot라고 하는 자리였다.
대학생활을 알려준다는 핑계아래 마치 대학생활이란 유치한 율동과 별 필요없는 조언들 그리고 술만이 존재 한다고
순진한 새내기를 속이기 위한 자리를 사람들은 새내기를 위한 자리를 일부 몰지각한 선배들은 믿고 있었지만
순진한 새내기들 중에 그것을 믿지않는 사람들도 있을법 하지 않을까?
백명이 넘는 순진한 새내기들 중에서 가희는 그렇지 않았음에 확실하다.
하얀 피부에 약간 쳐진 눈. 웃을때 눈이 보이지 않고 반달을 그리는 미소는 그저 순진하게만 보이지만
그녀의 표정이나 행동, 복장은 그 누구도 새내기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미터같은 자리에나 새내기의 복장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과감한 흑백의 체크가 들어간 짧은 치마나 손톱의 검정색 매니큐어.
우리나라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어F게 길렀는지 허리에 약간 못미치는 긴 생머리는 누가 봐도 새내기로 보이지 않았다.
2,3학년 들도 복학한 선배인지알고 머리굽혀 인사했을 정도라면 대충 감이 잡힐까?
처음만나는 사람들이 모였을때는 언제나 공통의 관심사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런면에서 유선은 참으로 적절한 소재였는지 모른다.
남자같이 짧은 머리에 약간 화난듯한게 다듬은 눈썹은 "나 성깔있는 사람이니 건드리지 마시오"라고 말하는것 같다.
체크와 체인. 블랙 & 화이트. 가죽과 광택. 그리고 피어싱.
이것이 펑크 패션을 말하는 것이라면 유선은 펑크걸이라고 말해도 될듯하다.
한쪽팔만 체크가 들어가고 해골 패치가 붙어 있는 남방과 찢어진 검은 진에 검은 세무 워커.
펑크는 저항의 정신이라고 했던가?
여자이기를 거부하는 듯이. 아니 성性이라는 것은 그저 이름의 성姓인것 처럼 무시하고 싶다는 듯이
동기나 선배들은 한껏 까칠하게 대한다. 물론 당사자들은 여자니까라는 마음을 가지면서 받아주는 것이겠지만 -전공 자체가 여자가 많지 않고, 유선의 이쁘장한 얼굴이 한 몫 했음을 부인할수 없다.-
그녀는 여자이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새내기들에게는 무척이나 친절하게 대해준다. 마치 누나처럼 혹은 엄마처럼 말이다.
초보대학생 만큼이나 서툰 초보 선배다.
두명의 펑크걸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것은 부실한 ot의 내용에 비례해 커질수 밖에 없었다.
펑크라인이니, 누가 누구의 동생이 아니냐느니 등등의 이야기가 커지면서 유선과 가희는 서로 다른 조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알아 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앎이란 것이 일방적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유치한 율동과 컨텐츠가 끝나고 술자리가 벌어지면서 술잔과 젓가락만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늘어갈때 쯤에야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술을 마실수 있게 榮?
"안녕하세요. 06학번 서가희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05학번 신유선입니다."
가희는 살짝 꼬부라진 발음으로 이야기를 풀기 시작한다.
"저. 선배 알아요."
주위의 사람들은 둘의 대화를 듣기만 한고 있었다. 어쩌면 대화를 듣고 있었다기 보다는 가희의 복장과는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미소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선은 오늘 하루종일 들어온 그녀의 이야기에 그녀에게 친근감을 느끼는것은 물론이고, 가희의 화장기 하나없는 하얀 얼굴에서 비춰지는 해맑은 미소에 호감을
가지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어디선가 본듯한 미소라는 생각을 했지만 술기운은 그런 생각을 금세 날려버린다.
여자의 몸으로 남자들보다 더 행사같은데서 더 잘 할 수 있다느니, 스타일이 너무 맘에 든다느니. 또는 어떻게 들으면 조금 예의에 어긋날 수 도 있는 이야기들까지 하며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늘다보니 주위의 사람들도, 스스로도 점점 취해만 갔다.
가희는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해지더니 결국엔 유선에게 쓰러져 버린다.
"가희야.가희야! 괜찮니?"
주위에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시체가되어 실려 나갔기에 그저 그녀의 미소를, 다리 각선미를 볼 수 없는 생각에 쓴웃음만 지으며
빨리 다른 사람이 처리해 주기만을 기다린다. 여자가 쓰러졌을땐 여자가 챙겨야지 남자가 섣불리 다가가면 괜한 오해만 산다는걸 하루만에 다 배운 사람만이 남아 있는 자리였다
그 시간까지 남아있는 여자라곤 선배, 후배 다 포함해서 유선밖에 없었고, 유선 역시 슬슬 한계를 느끼며 일어선 타이밍을 잡고 있던 참에 쓰러진 가희를 챙겨준다는
핑계로 자기로 자리를 뜰 수 있는 기회를 놓칠리가 없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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