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쿄이야기/宇京物語 1卷. 美少年 1부-미지와의 조우
시간은 오후7시를 넘기고 있었다. 이른 초봄이라 땅거미가 일찌감치 내리고 있었다.
친구인 석현이 운전하고 있는 차의 조수석에 타고 있던 혁은 신호대기 중에 거울로 뒷좌석을 흘끔 봤다.
사오토메 우쿄는 자신의 봄 점퍼를 덮고 옆에 앉아 있던 신입생의 다리를 베고 옆으로 널 부러지다시피
해서 잠들어 있었다.
예상조차 못한 봉변을 당한 충격이 컸던지 표정에 극도로 지친 모습이 역력했던 데다 잠시 공황恐惶상태를
보여서 선배들이 진정시키기 위해 음료수에다 술을 조금 타서 먹여서인지 무척 나른해 했다.
음료수 한잔에 소주를 한 25%타서 불과 4~5잔 먹였을 뿐인데 해롱해롱하는 걸로 보아 술을 별로 못 마시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신입생이 우쿄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주고 있었다.
상당히 친숙한 사이임에 분명했다.
<그 사오토메군君 말인데, 혹시 자네와 아는 사이인가?>
<아 예. 실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
그러자 운전하던 친구가 뒤를 흘끔 보며 그에게 물었다.
<자네도 일본인인가?>
그러자 신입생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에이~~~~ 저는 당연히 순 토종 대한민국 열혈남아지요.>
하긴 우쿄의 한국어는 무척 어색해서 이 학생과는 비교가 확연했다.
혁이 얼핏 듣기에 우쿄가 배운 한국어는 한국어라기 보다는 재일 교포들이 쓰는 일본어를 바탕으로 한국어와
“피진-크레올”이 된“재일한국어#”인 듯 했다.
혁의 옛날 여자친구 중에 거의 일본인이었던 재일 한국인이 있어서
약간 귀에 익었다.
<아, 그래? 실례했군. >
아까 우쿄의 주눅든 듯한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씩씩한 기백이 마음에 들었다. 이 친구는 여성적이고
아동兒童적인 외모의 우쿄와는 달리 키도 크고 무척 남자답게 잘 생겼으면서도 활달한 재치가 느껴졌다.
약관의 나이임에도 상당히 술이 쎈 모양인지 상당한 양의 술을 마셨는데도 취한 기색이 안보였다.
<.....그럼 자네 이름은?>
<넷! 남궁 석진입니다!!>
<마음에 든다. 아, 그 친구 잘 보살펴 주게. 나이도 어린 친구가 외국에 혼자 지내는 것도 안쓰럽지만
선배 중에 애먼 데 애국심을 발휘하는 이상한 놈들이 많아서 말야. >
혁의 말에 석현이 한마디 덧붙였다.
<어느 조교는 미국시민권을 가진 후배를 미국 놈이라고 이유 없이 막 갈구더라고.>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애가 말도 서툴고 너무 순진해 놓아서.... 아, 저 길로 들어가면 됩니다.>
차는 한 2층의 깔끔하게 꾸며진 주택 앞에 세웠다. 석진이 먼저 내려서 현관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요? >
<선생님!! 저 석진이입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에 혁과 석현은 우쿄를 조심스럽게 끌어낸 뒤 품에 안았다.
차마 깨우기는 뭣했다.
<아니, 왜 이렇게 가벼워? 이 친구 체중이 몇이야?>
<한 43kg쯤 이라던가요. >
< 아무리 그래도 이 키에 겨우 그 정도면 좀 심각하구먼.................
여자도 그렇게 가볍지는 않은데……>
<그러게…… >
우쿄를 끌어안은 혁은 문은 대문은 없는 1.3M쯤 높이의 담장 기둥에서 잠시
멈칫했다.
손바닥 만 한 크기에 주소와 함께 "權錫柱"라고 쓰여 있는 문패에다
밑에는 "변호사 권우경 사무소"라는 현판이 달려 있었다.
둘 다 기억에 익은 이름이었다.
블록으로 예쁘게 단장된 좁은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에 들어서자
현관문이 일찌감치 열려 있었다
나이에 비해 키가 크고 당당한 체구에 머리를 짧게 깎은 개량한복 차림의 중년남자가 우쿄를 품에 안은
혁과 석진을 맞이했다.
혁은 문패의 이름의 주인인 이 중년남자가 안면이 있었다.
<엇? 너?!!>
<선생님!!!>
<야~~! 이 자식!! 몇 년만이냐? 완전히 훤칠한 청년이 다됐구먼?>
혁과 중년남자는 혁의 품에 안겨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우쿄를 사이에 두고 상당히 반가워했다.
<민혁아. 아는 분이야? >
<내 고등학교 때 선생님. >
<아, 처음 뵙겠습니다. 민혁이와 초등학교 때 친구입니다. >
<어서 와요. >
<아참, 사오토메군의 방은 어디입니까?>
<아, 2층. 근데, 술 먹인 건가? 우리 애는 술을 전혀 못 마시는데....>
<아 예. 죄송합니다.>
가만, 우리 애?
<아니, 괜찮아. 뭐, 그럴 수도 있지.....>
혁은 내심 의아했다, 이 중년남자-권 석주선생은 혁의 고등학교 은사인데 이 분 성격에 일본인 학생을
자기 집에 들여놓았던 것도 이상하고 거기다 자기 친자식을 보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석진의 안내로 안방과 주방 사이의 나무계단으로 올라가서 옆의 방으로 들어가서 석진에게 요를 깔게 하고
그 위에 눕혔다.
혁은 체력 하나는 자신이 있었지만 아무리 힘이 세고 들어야 할 사람 무게가 가벼워도 40kg넘는 무게를
안고 계단까지 올라가서 상당한 거리를 걷는 것은 어느 정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같은 남자아이임에도 안는 감촉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아니. 감촉이 상당히 말랑말랑하고 따듯한 감촉이 좋게 느껴졌다.
혁은 내심 흥분되었다.
우쿄를 조심스럽게 석진이 갈아놓은 요 위에 눕히기 무섭게 혁의 상체도 그 위에 포개 엎어졌다.
혁의 얼굴이 우쿄의 목덜미에 처박혔고 우쿄의 체취가 혁의 후각을 자극했다. 딱히 무슨 향수 같은걸
쓰는 것도 아닌 듯 한데 왠지 모르게 풋풋하고 꽤 좋은 냄새가 소년의 몸에서 나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우쿄가 고개를 악간 혁의 반대편으로 돌린 채 입을 희미하게 열린 채로 잠이 들어 있었다.
혁은 순간적으로 두근거림을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한쪽 손바닥으로
우쿄의 뺨을 쓰다듬었다. 상당히 작은 얼굴이라서 인지 손바닥이 한쪽
뺨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손바닥에 우쿄의 아기피부 같은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져서 혁을 흥분시켰다.
얼굴에 남아 있는 젖 살이 무척 귀여웠다.
우쿄는 입을 다문 채 손바닥의 따뜻한 감촉이 좋은 듯 그쪽으로 뺨을 더더욱 비벼댔다.
그 모습이 다소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도 새침하고 요염하게 느껴졌다.
얇고도 빨간 입술에 시선이 가자 흥분이 더했다. 키스하고 싶었다.
<야, 뭐해? >
석현의 부름에 혁은 간신히 정신이 차려졌다.
석현과 석진에게 멋적은 시선을 보낸 뒤 다시 우쿄에게 돌리자 자신이 소년에게 묘한 느낌을
받았다는 걸 느꼈다.
<아 그래. -나 오늘 좀 이상하네. ->
혁은 우쿄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줬다. 우쿄의 안경을 옆의 코다츠-일본식
탁자난로 위의 놓다가 후지쯔 노트북 컴퓨터 옆에 액자로 만들어져 놓인 사진 중에 하나에 시선이 갔다.
우쿄가 기모노차림의 일본여성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우쿄는 예전에 한국에서 교복자유화 전의 고등학교 교복 같은 검은 색의
일본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혁의 아버지의 고등학생 때의 사진에서 보이는 교복차림-에
까까머리를 모자로 가린 것 같은-의 촌스러움과는 전혀 무관했다.
우쿄의 가냘픈 몸매에 맞춰서인지 늘씬한 게 오히려 기품 있고 세련된 인상이었다.
다소곳하고 은은한 미소가 신비스러운 매력을 풍기고 있어서 혁은 당황스러웠다.
그 옆에 우쿄를 인자한 어머니처럼 어깨를 감싸고 가볍게 안고 있는 기모노차림의 네 여성은
우쿄와 얼굴 생김새가 상당히 닮은 모습이었다.
아마도 가족사진인 듯 했다. 혁은 그 중에 한 사람이 왠지 낮이 익었다.
<근데, 여기는 완전히 일본이네. >
석현의 말에 혁은 잠시 우쿄의 방을 둘러보고 놀랐다. 상당히 정갈하게 정리된 방향제 향기로
가득 차있는 –코다츠에 심지어 다다미까지 깔려 있는- 사뭇 일본적인 분위기의 방은 검소하면서도
상당히 여성적이지만 놀란 것은 책이 도서관의 한 켠을 방불할 만큼 상당히 많다는 것이고 당연하지만
대개 일본어로 된 책이었다.
얼핏 제목을 봐서는 약간의 만화책을 제외하고는 다양한 분야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서적을 읽는 듯 했다.
그 중에 “주신구라忠臣藏”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같은 일본고전이 상당히 많다는 게 특이했다.
요즘 어린 세대 중에 이렇게 고전같은 것-은커녕 문학 같은 지루한 것-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은 없을 것이었다.
서가의 한편에 있는 음반들은 몇몇 일본 곡들을 제외하고 대개는 혁도 들어본 적이 있는 곡으로 대개
뉴에이지등의 신비주의계열의 곡이 대부분이었고 다소 슬픈 분위기의 곡이었다.
그리고 한쪽 벽에 일본어로 전국 서예경시대회 학생부 대상이라는 표가 붙은 거의 히라카나풍의 초서 체로
" 야마토 다마시이 大和魂 "이라고 쓴 서예작품이 액자에 붙어 있었는데 혁은 명필의 글씨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그 서예작품의 가냘프고 섬세한 서체에서 왠지 모를 음영陰影 짙은 원념怨念같은 것을 느끼고
섬뜩해졌다.
거기에 심지어 책장의 한쪽 구석에는 일본식의 불단佛壇이 간단히 차려져 있었다. 불단에는 아까의 사진의
여성 중에 한 명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가는 사람과 같이 있는 사진이 영정사진으로 놓여져 있었다.
방을 나와서 마루로 내려가자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다.
얼핏 혁보다도 어려보이는 듯한 긴 생머리를 리본으로 예쁘게 묶고 스커트와 파란색 블라우스,
레이스 장식이 많이 달린 에이프런으로 된 청초한 옷차림의 상당한 미모의 젊은 여성- 그것도 아까
우쿄의 책상 위의 가족사진 안의 여성과 똑같이 생긴-이 3살 정도 된 남자아이를 안은 채 자리를 권했다.
<앉으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근데…………… 혹시 선생님의 조카따님이신가요? >
순간 석주의 표정에서 쓴 웃음이 흘렀고 그녀는 우습다는 표정을 지었다.
석현은 그녀를 보고 반했다는 듯 얼굴이 빨개졌다.
혁은 친구에게 정신차리라는 듯 팔꿈치로 툭툭 쳤다.
<야. 선생님의 사모님이셔. >
석현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우리랑 같은 나이 같은데? >
<저래 뵈어도 우리보다 열 살은 위시거든? >
친구는 못 믿는 표정이었다.
<농담하냐? >
<농담은……… 죄송합니다. 오래간만에 뵈는데. >
<그러게, 참 오래간만이네요. 민혁군. >
그녀는 혁이 바로 자신을 알아보자 좋아라 하고 있었다.
<예. 근데 사투리를 완전히 고치셨네요. >
혁은 고등학교 때 이런 저런 이유로 은사의 사모님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도 지금보다 너무 나이가 어려 보여서 종종 조카딸로
오해 받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10년 전인 그때도 신혼때는 너무 어려 보여서 어린애를 억지로 데리고 사는
아동성학대자로 오해를 받아서 신고를 받은 경찰이 집을 기웃거리더라고 당시에 석주가 쓴 웃음을
지으며 수업 막간의 잡담 중에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녀가 아까 우쿄의 가족사진에 나온 일본여성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우쿄와 사모님이 닮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럴 리가 없을 터인데?
우쿄는 일본인이고, 그녀는 한국인이 아니었는가?
하여튼 사모님이 권하는 대로 마루에 앉아서 7년만에 고등학교 때의 선생과 마주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집에서 내놓은 자식 취급 받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아였던 혁은 외갓집인
마산으로 거의 유배당하다시피 해서 내려와서 그때 은인 같은 스승인 권선생, 석주를 만났었고
그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혁이 마산으로 전학 갔을 때 석주는 사범대기간 동안 ROTC-學軍團-과정을 이수하고 육군장교로
병역을 마치자마자 교육공무원이 되어서 첫번째 임지로 마산에 부임해 내려와 있었다.
석주는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심지어 반쯤 죽을 만큼 몇 번 두들겨 패서까지-계속 엇나가려던 혁을
바로 세우고 잡아 끌었던 것이다.
덕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명문대에 속하는 지금 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 뒤 자신의
은사와 마찬가지로 ROTC과정을 거쳐 육군 장교로 병역을 마친 뒤 다시 대학원에 진학했던 것이다.
<뭐, 지금 생각하면 내가 좀 심하지 않았나 싶긴 해.>
<덕분에 저는 이렇게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때 제가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어디까지
굴러 떨어졌을지, 솔직히 끔찍합니다.
대학 입학하고 내려갔더니 전근을 가셨는데 어디로 가셨는지 아시는 선생님이 안 계셔서.....>
석주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랬어? 그럴 줄 알았으면 전근한 곳을 알려둘 걸 잘못했네? >
<죄송합니다. >
석주는 쾌활하게 웃었다.
< 그럼 이번에 우리 아들이 자네 후배로 들어갔으니 잘 좀 부탁해.
애가 너무 유약하고 낮 가림이 심해서 좀 적응하기 어려울 거야.
이번에 다시 애를 집으로 데려다 놓았더니, 너무 낯설어하고 자기
애비를 너무 어려워하더라고......>
<아 예…… 예? 아드……님이라니요? >
<아, 실은 말이지……>
혁과 친구는 얘기 중에 우쿄와 석주의 관계를 알고 놀랐다.
죽었다는 우쿄의 부모는 실은 자기 호적에 우쿄를 입적시켜서
친자식으로 키우던 큰 이모 부부로 석주 부부가 바로 우쿄의 생부, 생모였다는 것이다.
실은 은사의 사모님인 우경은 원래 일본인이었고 혁은 처음 봤을 때는
-설상가상으로 그때 쓰던 말이 능숙한 마산사투리라서 마산토박이인줄 알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몰랐었다.
결혼 전에 한국에 아버지를 따라 놀러왔다가 곤경에 빠진 그녀를 군대에서 외출 나왔던 석주가
어떻게 곤경에서 구해줬고 그게 계기가 되어서 서로 사랑에 빠져서 결혼까지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의
집안어른들이 반일감정을 앞세워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혼인신고도 못한 채 석주의 아내인 우쿄
-놀랍게도 두 모자母子가 동명이인同名異人이었던 것이다. 여동생인 우쿄가 한국으로 간 뒤 언니가
아들을 입적시키면서 가장 귀여워하던 막내 여동생의 이름을 그대로 붙였기 때문이다. -가 친가 쪽
어른들의 등쌀에 일본으로 돌아가서 미혼모상태로 낳은 아들을 큰언니 카스미 부부가 자기 아들로
입적시켰던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게 그녀가 일본으로 귀국할 때 임신 사실을 몰랐고
임신했던 시기에는 석주와 결혼이 가능하기나 한지조차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딸의 장래를 염려한 장인이 마침 아들이 간절했던 맏딸에게 입양을 권했던 것이고……
그런데 석주는 우쿄가 임신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아버지를 강경하게
설득해 우쿄- 우경을 한국으로 데려와서 정식으로 결혼한 뒤 딸을 낳았고 아들 우쿄는 그대로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성장했다.
우쿄가 재작년에 한번 한국으로 와서 잠깐 친 가족과 산 적이 있는데 맏처형인 카스미가
죽은 것으로 우쿄가 호적상으로 고아가 돼 버린 것이 기회가 된 것이다.
일본에는 석주의 장인 외에도 막내 처남 1명. 처형2명, 우쿄의 호적상 형제로 2명의 시집간
누나가 있었고 다들 어떻게든 귀염둥이였던 우쿄를 맡고 싶어했지만 이 기회에 아들을 되찾고
싶었던 데다가 친가 부모들의 성화때문에라도 부부는 자신들이 혈연상 친부모임들 근거로 약간
억지를 부려 우쿄를 한국으로 데려왔고 우쿄를 석주가 근무하는 학교에 편입학 시켰-고 그래서
석진과 같은 반이 되었었-는데 한국의 생활에 제대로 적응을 못하고 한국의 친척들과도 사이가
안 좋았던 우쿄가 일본으로 가출해서 돌아가 버린 뒤 한국으로 오는 걸 거부해버렸고 대입
검정고시를 치러서 패스하는 걸로 이미 법적으로 고등학교는 졸업해 버린 셈이어서 그대로 일본에서
대학을 진학해 버린 것이다.
하여간 우여곡절이 너무 많았고 특히 재작년의 일을 생각하면 석주는 속이 새까맣게 타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내 아들이지만 일본에서는 응석받이로 자라서 다른 때는 완전히 어린애같은 녀석이 공부할
때만은 완전히 독종毒種이더라니까. >
이미 초등학교 때 2번이나 월반해서 4년만에 초등학교 과정을 해치운 전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으로 돌아갔을 때 거리낌 없이
전에 다니던 고등학교에 돌아가는 대신에 그대로 대입 입시를 준비해 한번에 대학에 합격했었고……
2층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파자마위에 앞을 가느다란 저고리동정으로 안이 보일 정도로
묶은 격자무늬의 한텐袢纏-일본전통 식 코트-을 걸친 우쿄가 벽에 손을 짚으면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아, 일어났냐? 이리 와서 앉아. >
자기 아버지가 옆에 앉으라는데도 주저하고 있었다.
아직도 아버지가 어색한 건지 선배 앞에서 파자마 차림인 게 마음에 걸려서인지 알 수 없었다.
우쿄는 쭈뼛쭈뼛하면서 자리에 앉더니 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 初日から迷惑をかけて申し譯ありません, 先輩。
(첫날부터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선배님.)>
< いや. 加えた子たちもいるのに何を, 大丈夫 大丈夫。
(아니. 더 한 애들도 있는데 뭘,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고 했음에도 상당히 죄송하게 생각하는 우쿄의 모습이 혁은 어느 후배들 보다
무척 마음에 들었다. 요즘 후배들 중에 저렇게 예의 바른 후배는 보기가 어려운데,,,
그 순간에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고 우경이 문을 열어주자 왠 아가씨가 들어오고 있었다.
혁은 우쿄와 닮았지만 훨씬 키가 크고 피부가 너무 흰 우쿄와는 달리 완전히 "살색"의 피부여서
훨씬 건강해 보이고 생기발랄한 분위기의 긴 생머리를 약간 오른 쪽으로 올려 묶은 맵시 있는
교복차림의 아가씨를 보는 순간 마산에서 처음 봤을 때의 우경을 보는 느낌이었다.
<야! 너는 계집애가 왜 이리 늦게 다니냐?>
<아잉~~~ 아빠. 친구하고 같이 공부하느라 고요♡>
<그래도 좀 일찍 다녀!!>
<네~~~ㅇ♡>
그래도 딸이 애교를 떠는 게 귀여운지 석주는 적당히 꾸중하는 선에서
그친 뒤 서재에서 울리는 전화벨에 잠시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 아가씨가 우쿄에게 약간 쌍심지를 켜고 흘겨봤다.
우쿄은 약간 움찔했다
<오빠!! 동사무소 앞의 비디오가게에 갔었지?>
<오빠라고?>
석진이 혁에게 귀속 말을 했다.
<우쿄의 여동생인 수진이예요. 제 여자친구입니다.>
<아, 마산에서 본 적이 있어, 많이 컸네, 그런데 나이가 오빠보다는
많아 보이는데...>
<저래뵈도 이제 고 1입니다.>
우쿄는 멀뚱히 자기 여동생을 응시했다.
<거기 언니가 오빠를 내 동생이냐고 묻잖아. 얼마나 민망했는데!>
<あ,そう (아. 그랬니)?>
<몰라몰라몰라!! 이제 거기 창피해서 못 가게 생겼단 말이야. 책임져!!>
수진이 그러면서 우쿄에게 달려들어서 앵겨들었다.
이제 보니 오빠한테 화내는 게 아니라 애교스럽게 투정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우쿄는 여동생의 몸무게가 약간 버겁다는 표정이다.
<야! 권수진!! 오라비만 보이고 이 서방님은 안보이냐?>
<오빠는!! 결혼도 안 해놓고 누가 서방이야?>
석진의 짓궂은 농담에 이번에는 수진이 장난스럽게 흘겨봤다.
문득 수진이 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와 이 오빠 캡 멋있다!!! 누구세요?>
혁은 내심 섭섭했다.
가끔 본적이 있는 그때는 유치원생이었던 꼬마숙녀는 혁을 몰라보는
듯 했다..
<수진짱. 손님 앞에서 너무 버릇없이 굴지마.>
우쿄가 약간 어눌한 한국어지만 사뭇 엄한 태도로 자기의 목을 감싸
안고 앵겨 있는 수진에게 가볍게 나무랐다.
<피!! 알았어영.>
수진이 우쿄에게 내려와 앉으면서 혀를 삐죽 내밀었다.
지금 이 상황이 두 남매의 성격차이-고지식하고 수줍음 많은 새침데기와 생기발랄 말괄량이-를
그대로 드러낸 것 같아 보여서 혁은 여러모로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럼 선생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 이제 집도 알았으니 자주 놀러 와라. >
<예. 早乙女君も學校で見よう。 先ほど歡迎會で仕事はとても心に留めずに,
このような人, あんな人もいるものと決まっているから。
(사오토메군도 학교에서 보자고. 아까 환영회에서 일은 너무 마음에 두지 말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도 있게 마련이니까.)>
옛 은사에게 인사를 한 혁은 우쿄의 어깨를 두들겨줬다.
< これからよろしくお願いいたします。(앞으로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우쿄의 다소 경직된 90%각도 인사에 혁은 약간 부담스러워했다.
<좀 오버네^^;;;>
석현의 농담 섞인 지적에 고개를 든 우쿄는 오른 손 끝으로 입을 가리면서 얼굴이
빨개졌다.
원래 낮선 환경에 직면하면 한동안 적응하느라 마음고생을 해야 하는 우쿄였지만
처음 알게 된 이 선배는 무척 좋은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에 부담감이 점 덜해지는 것 같았다.
혁은 우쿄의 수줍은 모습에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세 사람은 같이 집을 나왔다.
<사오토메군이 상당히 온순하고 예의 바른 친구인 것 같군. 그런데 너무 양순한 것 같은데..>
그 말에 석진은 약간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휴~~~ 그렇긴 합니다만, 쟤도 고집 피울 땐 아무도 못 말립니다. >
<그래?>
<고등학교를 한 학년 빼먹고 거기다 그 일본에서 제일 간다는 동경대를 재수도 안하고
대학에 붙은 게 실은 그 녀석의 황소고집 때문이거든요. 그 녀석 고집만 빼면 진짜
바보스러우리만치 착하고 순진해 빠진 녀석인데...아, 저는 여기서 바로 가면 됩니다.>
<그래? 그럼 학교에서 보자.>
혁이 손을 내밀자 석진은 머쓱해하며 혁과 악수를 했다.
<옛!! 저도 앞으로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선배님!!>
악수를 마치고 나서 석진은 활달하게 군대식 경례까지 하고서 옆길로 빠졌고 혁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석진을 배웅한 뒤에 혁과 친구는 차에 탔다.
<뭘 그렇게 생각해? >
조수석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던 혁은 석현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응? 내가 뭘? >
<계속 멍 때리고 있잖냐? >
<그랬나? >
<하여간 그애 아깝지 않았냐? 고녀석, 여자였으면……>
<너도 참 못 말린다.>
입맛을 쩝쩝 다시는 석현에게 가볍게 핀잔을 준 혁도 뭔가 남은 게
있는 것 같은 아쉬움과 어리둥절함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우쿄의 집을 나와서 걸으면서 지금껏 있었던 일을 속으로 정리하면서
가장 어처구니 없었던 것은 우쿄에게 느낀 감정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혁은 술이 무척 센 편이고 아까의 신입생
환영회에서 마신 술이라고는 우쿄를 도와줄 요량으로 원샷한 폭탄주가 전부니까
지극히 정상인데도 그 신입생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아무리 귀엽게 생겼지만 그 아이는 남자였지 않은가?
단순히 새로 알게 된 남자후배를 보는 감정이 아니라 이를테면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느꼈던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혁은 이미 고등학교때부터 제법 경력이 화려한 편이었다
확실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너무 굴곡진 사춘기시절을 보내는 것
같아 가엾다는 생각이"든 건 사실이다.
일단 아무리 귀여운 소년이라고 해도 남자한테 이상한 감정을 품었던
것은 자기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냥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야. 근데 놀랐다. 천하의 강민혁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다니? >
<뭐가? >
혁은 짐짓 딴청을 부렸다.
그로부터 한 3일 간 혁은 학교에서 우쿄를 보지 못했다.
학교 당국에서도 도쿄대와의 관계 때문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었고 그 사실을 학교사무를 맡던 동급생
조교助敎에게 들은 혁으로서도 우쿄의 장기결석은 궁금증을 자아냈다.
<알았어, 내가 한번 알아보지. >
<감기라고? >
3일후쯤에 우연히 만난 석진에게 들은 우쿄의 결석이유가 이러했다.
<예. 워낙 에 몸이 약한 녀석이라 조금만 감기기운이 있어도 펄펄 끓고 난리가 아니거든요.
실은 그날 좀 많이 놀라기도 했고.........>
그러고 보면 그때부터 왠지 안색이 않좋고 안았을 때 몸이 뜨겁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혁은 상당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오늘 사오토메군에게 들를 건가? >
<네? 예 그럴 겁니다만......>
<나도 병문안 삼아 같이 가면 안될까? >
<네?!!!>
난데없는 혁의 말에 석진은 당황했다. 혁도 자기가 그런 말을 왜 했는지 몰라서 당황했다.
요 며칠 동안 혁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려 밤마다 시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왔다. 그리고 공적인 이유도 있었다.
<아무래도 사오토메군의 모교가 모교다 보니 학교당국에서도 신경을 쓰고 있거든. >
석진은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석진과 이따 같이 가기로 약속을 하고 말았다.
재킷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 뒤 면바지주머니에
한 손을 쑤셔 넣은 채 대학원 쪽으로 가기 위해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다가 오토바이가 하나 들어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전혀 반갑지 않은 화상畵像이었다.
오토바이 주인은 혁을 보자 순간 움찔 하다 자못 비굴하게 웃어보였다.
<잘 들어 갔었나~~~!>
능글한 표정을 지으며 아는 체를 하는 꾀죄죄한 가죽옷에 히피랍시고 씻지도 않아
악취를 내 풍기며 보호헬멧을 쓰지도 않은 선글라스만 그럴싸한 시커먼 피부색의 그 3학년생-재영이다.
검은 피부에 마치 네안데르탈인을 연상시키는 얼굴이 흉했다.
별로 듣기 좋은 것도 아닌 목소리로 억지로 무게를 잡는
목소리를 내는 것도 역겹기 이를 데 없었다.
혁도 응대를 해줬지만 표정은 냉랭했다. 오토바이를 주차장에 세워둔 놈이 혁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환영회 때 봤던 그 가시나 같이 생긴 안경잡이 있잖나, 학교
안 나온다메? 싸가지 없는 자슥 아이가? 신입생 따위가 우데 그리
곤죠根性없이 구노? >
순간 혁의 속내에서 삐끗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요새 신경이 다소 날카로워져 있던 터였다.
<뭐? >
<그런 놈무 자슥은 이빠이 쿠사리를 줘야 한다카이.>
순간 혁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가 풀려졌다. 혁은 걸음을 멈추고 피우던 담배를 거칠게 뱉은 뒤 비벼 껐다.
<학부도 다른 주제에 다른 학부 신입생 환영회에 끼어들어 추태를 부린 것도 주제넘은 짓이지만 남의 학부
학생 출석문제에 옳네 그르네 하는 것도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생각 않나? >
<학부는 다르지만 서도 그래도 내가 선배 아이가? 후배가 잘못하면 옳게 끌어주는 게 당연한 기제.
선배로 가오顔가 있다 아이가?>
(또라이!! 몰염치한 정신병자 같은 놈!! )
환영회 때 놈이 우쿄에게 벌인 추태와 행패가 새삼 떠올라서 새삼 놈에 대해 경멸감과 노기가 일기 시작했다.
애가 그날 이놈한테 얼마나 시달리고 놀랐으면 몸 져 누웠단 말인가?
이놈은 고등학교에서부터 영 맘에 안 들던 놈이다.
혁도 그때는 심각한 비행청소년이었지만 놈도 애초에 싹수가 노란 개망나니로 그때도 주제넘게 설치고
다니다 혁에게 두들겨 맞던 녀석이니......
이 미친놈의 고질병은 어줍잖게 선배임을 내세워서 후배들을 깔아뭉개고 치졸한 지배욕구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들고 여의치 않으면 행패를 부려서 아는 학생들에게 심적 물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점으로
전부터 학생들에게 원성을 듣고 있던 참이었다.
더구나 최근에 알려져서 학교를 발칵 뒤집히게 만든 바로는 전문대에 입학할 실력도 안 되는
인간을 그의 아버지가 아는 연줄을 이용해뇌물로 -그런 이 녀석 부모도 참 불쌍한 인사임에 틀림없다.
인간 좀 만들겠다고 그렇게 대학을 보내놓았더니 겉멋만 들어서 되지도 않는 음악실력으로 록밴드 하네
뭐하네 하며 사고치는 아들놈 뒤처리나 하는 꼬락서니가 안쓰러울 지경이다. -
가장 인기가 없고 만만한 학부에 억지로 끼워 넣었다는 비리내용이 터져 나오면서 학생회까지
들고 일어날 정도로 학교와 학생들 공히 밉상취급을 받으면서도 자기가 대단한 인간인양
과대망상 속에 사는 쓰레기 같은 놈이다.
그러고도 입학한 지 4년이 넘어가도록 이제 3학년에 간신히 올라온 것이다.
문제아였던 옛날과는 달리 지금은 수재秀才인 혁이지만 옛날의 거칠고
격한 성격을 억누르면서 아는 사람들에게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옛날의 문제아였던 모습은 현재 혁을 아는 사람들로선 전혀 실감이 안 나는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놈이 천둥벌거숭이같이 설치면서 후배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언젠가는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전부터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놈은 한번 혁에게 두들겨 맞으면 혁이 무서워서라도 설치지 못한다.
특히나 복수하겠다는 배짱도 없는 놈이고 그렇다고 허세만 잔뜩 들어간 놈이니 두들겨 맞았다고
어디 하소연이라도 할 녀석도 아니고 그래서
놈은 고등학교 시절에 혁의 밥이었다.
처음 혁이 놈을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 마산에서였는데 처음에
시쳇말로 인근의"짱" 이었던 놈은 혁이 서울에서 내려왔다며 -서울 물을 먹은 게 고깝다는 듯- 경멸조로
"서울띠"라고 부르면서 깔아뭉개려고 들었다 처음에는 사고 안치려 참으려다 결국에 참다
참다 못한 혁에게 첫 싸움에서 지금껏 부린 위세가 무색하게 철저히 두들겨 맞은 뒤 처음에는 수차에 복수를
꾀했다가 되려 화만 자초할 뿐이었다.
심지어 인근에 싸움 좀 한다 하는 불량배들을 20명씩이나 불러들여서 집단구타를 하려다가 오히려 혁이
그 20명을 혼자 때려눕히는 것을 보고 질려버려서 그 뒤부터 혁에게는 철저히 비굴한 태도를 취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혁은 한동안 냉정하게 놈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옛날처럼 충동적이고 부주의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성격도 이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헌데 놈의 더러운 입에 우쿄가 씹혔다고 생각하자 불쾌해졌다.
<그러는 너는 선배인 나한테 말을 놓으면서 이렇게 건방을 떨 수 없을 터인데? >
조소 섞인 말을 내뱉으며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진 혁의 눈빛에놈이 움찔했다.
덩치는 어떨지 몰라도 혁에게 몇 번이나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아서 혁을 내심 무서워하는 놈이니 시건방을
떨다가도 혁의 눈빛이 달라지면 겁을 먹게 되는 것이다.
아니, 혁이 아니어도 자신이 한번 기가 꺾이면 범접을 못하지만 만만해 보이면 볼 것 없이 우위를 점하고
휘어잡으려 드는, 말하자면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비열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 놈이 우쿄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우쿄가 만만해 보인다는 뜻이다.
그런 어린 애에게……. 놈의 비열함과 야비함에 혁은 치를 떨었다.
<에이~~ 우리는 친구 아이가? 새삼스럽게 와 그라노? 근데 글마말이다. 이쁘장한게 진짜로 가시나였으믄
참말로 꼴리게 생기지 않았나? 요즘 밤마다 글마를 가시나로 만들어서 빠구리 뜨는 상상하문서 딸치는 재미로
지낸다 아이가~~~. >
이 천박하기 짝이 없는 놈이 군침을 삼키면서 추잡한 속내를 드러내자 혁은 순간적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능욕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분노가 극한에 다다랐다.
그러고 보면 놈은 고등학교 시절의 자기 담임의 사모님인 우경에게도 흑심을 품다가 그녀를 겁간하려고 석주가
집을 비운 날에 가택침입을 기도企圖했다가 혁에게 제지를 당했었던 놈이었다.
석주와 함께 그의 아내인 우경도 혁이 바로 설 수 있게 힘을 실어 주었었고 더구나 그녀는 혁에게 처음으로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해줌으로서 너무나 엄했던 석주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도록 해 주었기 때문에
당시에 혁에게 무척 고마운 존재였다.
그때에는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실은 그때 놈에게서 우경이 일본여자라는 말을 처음 들었었지만 혁은 믿지 않고 한 귀로 흘려 들었었다.
그녀를 어떻게 하려는 구실이라고 생각해서였던데다 그 다음에 한다는 소리가 아주 쓰레기같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여자들은 색만 밝힌다는 둥 어떻다는 둥 근거도 없이 줏어들은
비열한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그녀도 일본 여자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식으로 헛소리를 해
그때도 혁의 분노를 자아냈었던 것이다.
건물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의도하지 않게 인적이 뜸한 곳이다.
<그렇게 생겨묵은 가시나 하나 있으믄 당장에 어디 끌고가서 따묵는 긴.....>
<이 개새끼!!!!!>
"퍽!!!"
혁의 주먹이 기어이 놈의 큼지막한 턱에 꽂혔고 놈은 곰 같은 덩치에 안 어울리게 그대로 나둥그러졌다.
이놈은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저지르려고 드는 짐승이다.
놈의 추잡한 광언狂言도 더 참고 들어줄수가 없다!
<니, 와, 와이라노? >
놈은 주저앉아 맞은 곳을 한 손으로 감싸며 공포에 질려 혁을 올려봤다.
혁의 입에서 중 저음의 한기가 도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번 말해봐, 밤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쿠사리를 줘야 한다고? >
혁은 놈의 면상에 또다시 발도 장을 찍었다.
뒤로 엎어진 놈은 뒤를 보이며 엎드려 기기 시작했고 혁은 놈의 엉덩이 한 가운데를 구둣발로 걷어찼다.
<ㅎ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ㅓㄱㄱㄱ!!!!!!!!!!!!!!!!!!!!!!!!!!!!!!!!!!!!!!!!!!!!!!!!!!!!!!!!!!!!!>
놈은 엉덩이 한가운데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데굴데굴 굴렀다. 항문을 정통으로 얻어맞았기 때문에 비명도 못
지르고 물밖에 끌려 나온 붕어처럼 거품 문 입만 뻐끔뻐금 거리며 숨만 헐떡였다.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다시 주먹이 몇 차례 놈의 얼굴을 정통으로 꽂혔다.
놈의 양쪽 콧구멍에서 코피가 주루룩 흘러내렸다.
<아이고~~~~~~~~메~~~내, 내가 잘못했다~~ 때리지 좀 마라~~
내 죽는다~~>
싸워야 상대가 안된다는 걸 애초에 알고 있기 때문에라도 저항도 못하고 죽는 소리를 하며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은 없이 그저- 비굴하게 싹싹 비는 놈을 혁은 무릎으로 배를 가격한 뒤 팔꿈치로 윗동을
내려꽂았다.
놈은 그대로 엎어졌다.
놈을 다시 발로 차면서 구석으로 내몬 뒤 짓밟아버렸다.
한참 뒤에 발길질을 멈추고 숨을 헐떡이며 놈을 노려보았다.
놈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다가 혁의 구둣발에 산산이 깨졌다.
<아~~이~~~고~~~메~~~~~~>
간신히 놈이 도처에 멍이 든 상태로 코와 입으로 피와 콧물과 침을 내뿜으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혁은 옆의 상당히 무거운 알루미늄 재질의 쓰레기통을 들어서 놈의 등에다 내려 던졌다.
놈은 그대로 다시 엎어져서 꿈틀댔다. 혁의 한쪽 구둣발이 놈의 얼굴을 짓이겼다.
<잘 들어, 이 버러지새끼야. 앞으로 또 철모르고 설치고 다니면 아예 산에다 생으로 파묻어버릴 줄 알아.
특히. 또 그 신입생에게 선배랍시고 개수작 걸면 네놈 X대가리를 뽑아버릴 테니까,
이건 공갈이 아니야, 진짜 경고야, 알아서 처신해. 알았어, 이 쓰레기새끼야?>
놈은 혁에게 밟혀서 짓이겨지고 있는 얼굴을 간신히 끄덕였다.
생각 같아선 놈을 고자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지만
그것만은 참기로 했다.
혁은 놈의 얼굴에서 발을 내리더니
<선배? 웃기고 있네, 이 미친 새끼!! 너네 애비가 십일조 거둬서 네놈한테 처들인 학비가 아깝다,
이 대가리에 똥만 가득 찬 거지같은 새끼!!>
다시 그 발로 머리통을 걷어찼다. 놈은 걷어 채인 반동으로 벽 건물에 뒤통수를 부딪히며 아예 절명했다.
혁은 놈의 면상에다 침을 뱉고 돌아섰다.
혁이 자리를 뜬 10여분 뒤에 놈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더니 신음소리를 내면서 맞아서 퉁퉁 불은 곳을
어루만지다가 누가볼새라 오토바이를 끌고 도로 혼자 살고 있는 -쓰레기 하치장 같은- 하숙집으로 가버렸다.
한동안은 학교에 못나올 것이다.
누가 봤다면 얼굴을 들 수 없으니까..... 아니, 더 이상 이 학교에서 들고 다닐 낮이 없으니 자퇴를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공부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한 학년에 1~2년씩 유급하면서 후배들 괴롭히고 등쳐먹는
재미로 다녔는데 작년에는 견디다 못한 1학년생들에게 집단린치를
당했고 그 공포로 한동안 잠잠해야 했다.
이제야 훨씬 만만한 호구를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천적인 혁이 그 먹잇감에 관심을 두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어진 것이다.
놈과 달리 혁은 누구든지 후배들을 자상하게 돌봐주고 인도해주는 성격이다.
그래서 후배들한테 인망도 높았고.....
특히나 혁에게 특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라면 녀석에게는 기회가 없다고 봐야 한다. 어쩌다 마주쳐서 어떻게
하려 해도 그게 혁의 귀에 들어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버지의 막대한 돈으로 이 학교에 들어와서 자신의 강적인 혁이 학교 선배로 있는 걸
보고 갖은 아첨으로 적당히 관계를 유지했는데 오늘에야 말로 파탄을 맞은 셈이다.
혁이 비행청소년이었을 때조차 아닌 척 하면서 교내에서 약한 애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놈들을
힘으로 제압하고 굴복시켜서 약자를 보호해주는 입장이었으되 사람을 악의를 갖고 작심하고 괴롭히는
비열함과는 전연 관계가 없는 성격이었지만 놈의 사고방식으로는 혁이 정말 그렇게 나온다면
녀석으로서는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석진은 아까 본 것과는 달리 냉랭하기 짝이 없는 혁의 표정에 긴장했다.
혁의 자가용안에서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은 선후배는 잠시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저기...선배님,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아, 아냐. 기분 나쁜 일은 무슨;;; 하하하;;;>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말은 건 석진에게 짐짓 웃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참. 사오토메군이 뭐 좋아하는 게 있나? 과일이라든가...>
<글쎄요? 그러고 보니 워낙 에 입이 짧은 녀석이라...>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에 몸을 마치 태 속의 아기처럼 이불로 돌돌 말아서 방구석의 요 위에 몸을 벽 쪽으로
향하고 잠이 들어있던 우쿄는 잠에서 깼다.
아침에 약을 먹고 몇 시간을 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불 속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아침에 잰 체온이 37도 8부였다. 4일이나 지속된 열이 오늘 아침에야
간신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직도 오한이 우쿄의 몸을 옥죄고 있었다.
다다미 밑의 온돌에서 따뜻한 온기가 우쿄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지만 일본도 아니고 외국 땅에서
병석病席에 누웠다는 생각이 들자 서글퍼 지면서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밑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 말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京太郞. 寢るの? (케타로. 자니? )>
방문이 열림과 동시에 우쿄는 몸을 일으켜 탁자난로에서 안경을 집어 썼다.
<熱がちょっと下ったの, 京太郞?(열이 좀 내렸니, 케타로)?>
우쿄는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케타로”는 우쿄의 양어머니인 카스미가 처음에 우쿄에게 붙였던 이름으로 일본에서 이름이 같은
친 어머니 우경때문에 지금까지도 거의 우쿄의 별명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물론 대개는 “우쿄”라는
이름으로 더 불리고 친엄마와 구분 할 때는 ちび宇京(꼬마 우쿄)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편 석주는 엄마와 아들이 특이하게도 일본이름은 사오토메 우쿄, 한국식은 권 우경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동명이인이라 한동안 부르는 데 골치를 썩다가 아들을 “우경”이라 부르며 정작 아내를 이름으로
부를 때 “경아”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들의 별명들은 왜색倭色이 너무 짙다 하여 질색이었다.
시집온 지 20년이 넘어서 완전히 한국인이 다 된 우경이지만 친정식구를 만나거나 완전히 일본인인
아들과는 일본어를 사용하는 그녀였다.
재작년과는 달리 우쿄를 위해 일부러 일본식으로 꾸민 방의 분위기가 정작 우경에게 마음에 들었다.
특히나 우쿄가 가져온 두벌의 탁자난로는 어렸을 때 향수를 느끼게 했다.
한국으로 오면서 우쿄는 항공우편으로 일부러 한국에 없는 탁자난로를 거실에 놓을 큼지막한 것과 자기가
쓰게 될 방에 놓을 소형으로 두 개나 가지고 와서 일본인인 아내를 빼고 왜색倭色의 물건을 별로 안 좋아하는
석주를 찜찜하게 만들었다.
어린 아가씨라는 뜻을 지닌 사오토메早乙女라는 성씨때문인지 외가의 이모나 누나들, 젊었을 때의
외할머니까지 전부 거의 비슷하게 생긴 미인들인데 지금까지 자기랑 이름이 똑 같은 막내이모로
알고 있던 친 어머니 우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36세, 한국나이로 치면 37세가
된 그녀는 허리까지 내려간 긴 생머리 머리를 리본으로 묶은 모습이 어울리는 아직 20대 중 후반으로 보이는
앳되고 청초한 미인으로 단지 결혼전의 온순하고 순진했던 인상과는 달리 나이가 들어가면서 약간 색기있고
고혹蠱惑적인 원숙미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쿄와 친동생인 수진도 외모가 친가 쪽하고는 전혀 무관하게 오히려 외가 쪽을 닮아 있는 게
아버지로서는 은근히 섭섭한 점이다.
그나마 우주가 아버지를 닮아가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가......
체온계를 우쿄의 입에 물렸다가 뽑아봤다. 37도 3부, 우경은 안도했다.
< あ. お客さん來た. 會う。 (아, 손님 오셨다. 만날래?) >
<誰ですか。(누군데요?)>
< 錫進君とこの前に君を送ってくれた先輩。(석진이랑 저번에 너를 데려다 줬던 선배.)>
< マジ? それでは居間に出ます。(정말? 그럼 거실로 나갈게요.)>
< ねえ! 體も痛い子がどこを出るの? そのまま部屋で會って。(얘!. 몸도 아픈 애가 어딜 나가니?
그냥 방에서 만나.)>
< だ, だめよ。私の部屋では!! 4日間掃除もしなかったが!!!!(아, 안돼요, 내방에서는!! 4일 동안 청소도
안 했는데!!)>
< 大丈夫. 充分にきれいなの!(괜찮아. 충분히 깨끗해!!)>
< 恥ずかしいのよ!!(창피하단 말이에요!!)>
밑에서 석진과 함께 2층의 대화를 들은 혁은 아까 혁에게 두들겨 맞던 녀석 말에 비속어로 일본말
(곤죠,이빠이, 쿠사리.가오)이 들어가 있던 게 생각나 순간 실소했다.
혁도 원래 일본이라는 나라를 싫어하지만 두 모자의 일본어대화는 마치 귀여운 음악소품을 연상시켰다.
혁과 석진은 그냥 방으로 들어갔다.
우쿄는 두 사람이 들어오자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워낙 에 흰 피부라 빨개진 게 더 두드러졌다.
주인이 며칠 청소 안 했다고 부끄러워하는 방은 객관적으로 볼 때 깨끗하기만 했다.
< いらっしゃいませ. 先輩。 (어서 오세요. 선배님.)>
단색의 연 하늘색 잠옷에 일전의 그 일본식 외투를 어깨에 걸친 우쿄는 난감해 하다가 약간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4일 동안에 꽤 수척해 보였다.
<야. 너는 여기서 뭐 더 치울 게 있다고 그렇게 수선이냐? 하여간 병이야 병! 자꾸 그러다 장가가면 마누라가
얼마 못 견디고 도망간다.>
석진이 우쿄의 결벽증을 흉보면서 우회적으로 안심시켰다.
< すいません, 先輩。 これで學校に出ることができなくて……
(죄송해요, 선배님. 이래서 학교에 나오질 못해서.....)>
< 何, 私にすまない理由はない, 私が學校 關係者でもなくて...... 體の調子が惡いのよ仕方ないでしょう,
健康が最高だから...
(뭐, 나한테 미안할 이유는 없어, 내가 학교 관계자도 아니고...... 몸이 안 좋은 거니 어쩔 수 없지 뭐,
건강이 최고니까...)>
혁은 우경이 깨끗이 씻어서 쟁반에 내온 사과를 깎아서 자른 뒤 과일용 포크에 꽂아 우쿄에게 건네며 말했다.
우쿄는 수줍게 사과조각을 받아먹었다.
세 사람은 어울려서 얘기를 나누며 제법 가까워졌다.
아직 몸에 열이 나고 몸이 나른하지만 4일씩이나 지루하게 방에 처박혀 누워 있어야 했던 우쿄로서는
병을 잊을 만큼 간만에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게 즐겁게 느껴졌다.
석진은 평소에 과묵한 우쿄가 알게 된지 얼마 안된 사람과 어느 정도 말하는 걸 보고 의외라고 느꼈다.
석진이야 계기가 있어서 우쿄와 빨리 친해질 수 있었지만, 석진이 겪은 바로는 웬만한 사람에게 우쿄는
원래 낫 선 사람과 잘 못 어울리거나 친해지더라도 처음 알게 된 뒤부터 친해지기까지 한참 지나야 하는
-대신에 완전히 친해지고 나면 신뢰할 수 있고 다정다감한데다
본보기로도 삼을 수 있는-성격이지만 혁은 바로 우쿄와 친해질 수 있었다. 우쿄로선 환영회 때 폐를 끼쳤다는
부채감負債感도 있고 상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좋은 선배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곧은 성격으로 남한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우쿄이지만 환영회 때의 그 야만인野蠻人이
신경 쓰여서 잠깐이나마 혁에게 잘 보여서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까 했는데 혁을 본 순간 그런 약삭빠르고
타산 打算 적인 생각을 했다는 게 부끄럽고 미안하게 생각되었다.
혁은 우쿄가 수재秀才이고 꽤 복잡한 어린시절을 보냈음에도 여전히 순진하고 천진한 성격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고 상당히 어리고 귀여운 동생으로 느껴져서 한동안 그에게 이상한 생각을 했던 게 미안하게
느껴졌고 문득 아까의 놈이 이런 우쿄에게 추악하고 음험한 생각을 했다는 걸 생각해서 내심 놈에게 -아까
아주 반 죽여 놓았었음에도-화가 났다.
혁은 동생이라야 이복남매라서 한때는 그다지 정이 안 갔던 터였다.
우쿄의 일본생활 얘기를 나누는 중에 혁의 시선이 우쿄의 일본에서의 사진으로 잠깐 시선을 돌렸다.
<あの制服, 早乙女君に一番よく似合うのに。(저 교복, 사오토메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데?) >
<そ, そうでしょうか? 姨母夫は別にだと言うが...(그, 그런가요? 이모부-친 아버지-는 별로 라시던데...>
<いいえ。 服模樣だその人にどんなに似合うのかによったの。 小粋で. 趣もあってちょっと
可愛かったりしたように見えて...... 被った姿が見たくなって.....
(아니야. 옷 모양이야 그 사람에게 어떻게 어울리느냐에 달렸겠지. 맵시 있고. 멋도 있고 좀 귀엽기도
해 보이고...... 입은 모습이 보고 싶어져.)>
우쿄는 그 말에 상당히 부끄러워했다.
늦은 오후에 혁은 자리를 떴다.
너무 오래 있으면 우쿄가 좀 힘들어 할 것 같아서였다.
우쿄와 마침 방에 들어온 우경이 만류했다.
<あの, もっとあっていらっしゃっても良いですが....(저기, 더 있다 가셔도 되는데요....)>
<그래요, 민혁군, 바깥양반도 조만간 돌아올 거고 저녁준비도 이따 할 거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도 약속이 있고 해서요.>
우쿄가 혁을 배웅하기 위해 일어나려는 것도 혁은 말렸다.
<無理して起きるな. 早く治って學校で見よう. 分かったの? 攝生お上手で......(무리해서 일어나지마.
빨리 나아서 학교에서 보자. 알았지? 몸조리 잘하고......)>
혁은 우쿄를 다시 잠자리에 눕힌 뒤 얼굴을 어루만져줬다. 우쿄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졌다.
혁과 석진이 간 뒤 우쿄는 잠시 이불을 몸에 둘둘 말고 일어나서 창문으로
두 사람을 배웅해줬다.
그리고 책상 위의 사진을 잠시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 http://www.tufs.ac.jp/ts/personal/choes/bibimbab/zainitigo/Sjaeileo.html
시간은 오후7시를 넘기고 있었다. 이른 초봄이라 땅거미가 일찌감치 내리고 있었다.
친구인 석현이 운전하고 있는 차의 조수석에 타고 있던 혁은 신호대기 중에 거울로 뒷좌석을 흘끔 봤다.
사오토메 우쿄는 자신의 봄 점퍼를 덮고 옆에 앉아 있던 신입생의 다리를 베고 옆으로 널 부러지다시피
해서 잠들어 있었다.
예상조차 못한 봉변을 당한 충격이 컸던지 표정에 극도로 지친 모습이 역력했던 데다 잠시 공황恐惶상태를
보여서 선배들이 진정시키기 위해 음료수에다 술을 조금 타서 먹여서인지 무척 나른해 했다.
음료수 한잔에 소주를 한 25%타서 불과 4~5잔 먹였을 뿐인데 해롱해롱하는 걸로 보아 술을 별로 못 마시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신입생이 우쿄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주고 있었다.
상당히 친숙한 사이임에 분명했다.
<그 사오토메군君 말인데, 혹시 자네와 아는 사이인가?>
<아 예. 실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
그러자 운전하던 친구가 뒤를 흘끔 보며 그에게 물었다.
<자네도 일본인인가?>
그러자 신입생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에이~~~~ 저는 당연히 순 토종 대한민국 열혈남아지요.>
하긴 우쿄의 한국어는 무척 어색해서 이 학생과는 비교가 확연했다.
혁이 얼핏 듣기에 우쿄가 배운 한국어는 한국어라기 보다는 재일 교포들이 쓰는 일본어를 바탕으로 한국어와
“피진-크레올”이 된“재일한국어#”인 듯 했다.
혁의 옛날 여자친구 중에 거의 일본인이었던 재일 한국인이 있어서
약간 귀에 익었다.
<아, 그래? 실례했군. >
아까 우쿄의 주눅든 듯한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씩씩한 기백이 마음에 들었다. 이 친구는 여성적이고
아동兒童적인 외모의 우쿄와는 달리 키도 크고 무척 남자답게 잘 생겼으면서도 활달한 재치가 느껴졌다.
약관의 나이임에도 상당히 술이 쎈 모양인지 상당한 양의 술을 마셨는데도 취한 기색이 안보였다.
<.....그럼 자네 이름은?>
<넷! 남궁 석진입니다!!>
<마음에 든다. 아, 그 친구 잘 보살펴 주게. 나이도 어린 친구가 외국에 혼자 지내는 것도 안쓰럽지만
선배 중에 애먼 데 애국심을 발휘하는 이상한 놈들이 많아서 말야. >
혁의 말에 석현이 한마디 덧붙였다.
<어느 조교는 미국시민권을 가진 후배를 미국 놈이라고 이유 없이 막 갈구더라고.>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애가 말도 서툴고 너무 순진해 놓아서.... 아, 저 길로 들어가면 됩니다.>
차는 한 2층의 깔끔하게 꾸며진 주택 앞에 세웠다. 석진이 먼저 내려서 현관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요? >
<선생님!! 저 석진이입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에 혁과 석현은 우쿄를 조심스럽게 끌어낸 뒤 품에 안았다.
차마 깨우기는 뭣했다.
<아니, 왜 이렇게 가벼워? 이 친구 체중이 몇이야?>
<한 43kg쯤 이라던가요. >
< 아무리 그래도 이 키에 겨우 그 정도면 좀 심각하구먼.................
여자도 그렇게 가볍지는 않은데……>
<그러게…… >
우쿄를 끌어안은 혁은 문은 대문은 없는 1.3M쯤 높이의 담장 기둥에서 잠시
멈칫했다.
손바닥 만 한 크기에 주소와 함께 "權錫柱"라고 쓰여 있는 문패에다
밑에는 "변호사 권우경 사무소"라는 현판이 달려 있었다.
둘 다 기억에 익은 이름이었다.
블록으로 예쁘게 단장된 좁은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에 들어서자
현관문이 일찌감치 열려 있었다
나이에 비해 키가 크고 당당한 체구에 머리를 짧게 깎은 개량한복 차림의 중년남자가 우쿄를 품에 안은
혁과 석진을 맞이했다.
혁은 문패의 이름의 주인인 이 중년남자가 안면이 있었다.
<엇? 너?!!>
<선생님!!!>
<야~~! 이 자식!! 몇 년만이냐? 완전히 훤칠한 청년이 다됐구먼?>
혁과 중년남자는 혁의 품에 안겨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우쿄를 사이에 두고 상당히 반가워했다.
<민혁아. 아는 분이야? >
<내 고등학교 때 선생님. >
<아, 처음 뵙겠습니다. 민혁이와 초등학교 때 친구입니다. >
<어서 와요. >
<아참, 사오토메군의 방은 어디입니까?>
<아, 2층. 근데, 술 먹인 건가? 우리 애는 술을 전혀 못 마시는데....>
<아 예. 죄송합니다.>
가만, 우리 애?
<아니, 괜찮아. 뭐, 그럴 수도 있지.....>
혁은 내심 의아했다, 이 중년남자-권 석주선생은 혁의 고등학교 은사인데 이 분 성격에 일본인 학생을
자기 집에 들여놓았던 것도 이상하고 거기다 자기 친자식을 보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석진의 안내로 안방과 주방 사이의 나무계단으로 올라가서 옆의 방으로 들어가서 석진에게 요를 깔게 하고
그 위에 눕혔다.
혁은 체력 하나는 자신이 있었지만 아무리 힘이 세고 들어야 할 사람 무게가 가벼워도 40kg넘는 무게를
안고 계단까지 올라가서 상당한 거리를 걷는 것은 어느 정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같은 남자아이임에도 안는 감촉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아니. 감촉이 상당히 말랑말랑하고 따듯한 감촉이 좋게 느껴졌다.
혁은 내심 흥분되었다.
우쿄를 조심스럽게 석진이 갈아놓은 요 위에 눕히기 무섭게 혁의 상체도 그 위에 포개 엎어졌다.
혁의 얼굴이 우쿄의 목덜미에 처박혔고 우쿄의 체취가 혁의 후각을 자극했다. 딱히 무슨 향수 같은걸
쓰는 것도 아닌 듯 한데 왠지 모르게 풋풋하고 꽤 좋은 냄새가 소년의 몸에서 나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우쿄가 고개를 악간 혁의 반대편으로 돌린 채 입을 희미하게 열린 채로 잠이 들어 있었다.
혁은 순간적으로 두근거림을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한쪽 손바닥으로
우쿄의 뺨을 쓰다듬었다. 상당히 작은 얼굴이라서 인지 손바닥이 한쪽
뺨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손바닥에 우쿄의 아기피부 같은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져서 혁을 흥분시켰다.
얼굴에 남아 있는 젖 살이 무척 귀여웠다.
우쿄는 입을 다문 채 손바닥의 따뜻한 감촉이 좋은 듯 그쪽으로 뺨을 더더욱 비벼댔다.
그 모습이 다소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도 새침하고 요염하게 느껴졌다.
얇고도 빨간 입술에 시선이 가자 흥분이 더했다. 키스하고 싶었다.
<야, 뭐해? >
석현의 부름에 혁은 간신히 정신이 차려졌다.
석현과 석진에게 멋적은 시선을 보낸 뒤 다시 우쿄에게 돌리자 자신이 소년에게 묘한 느낌을
받았다는 걸 느꼈다.
<아 그래. -나 오늘 좀 이상하네. ->
혁은 우쿄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줬다. 우쿄의 안경을 옆의 코다츠-일본식
탁자난로 위의 놓다가 후지쯔 노트북 컴퓨터 옆에 액자로 만들어져 놓인 사진 중에 하나에 시선이 갔다.
우쿄가 기모노차림의 일본여성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우쿄는 예전에 한국에서 교복자유화 전의 고등학교 교복 같은 검은 색의
일본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혁의 아버지의 고등학생 때의 사진에서 보이는 교복차림-에
까까머리를 모자로 가린 것 같은-의 촌스러움과는 전혀 무관했다.
우쿄의 가냘픈 몸매에 맞춰서인지 늘씬한 게 오히려 기품 있고 세련된 인상이었다.
다소곳하고 은은한 미소가 신비스러운 매력을 풍기고 있어서 혁은 당황스러웠다.
그 옆에 우쿄를 인자한 어머니처럼 어깨를 감싸고 가볍게 안고 있는 기모노차림의 네 여성은
우쿄와 얼굴 생김새가 상당히 닮은 모습이었다.
아마도 가족사진인 듯 했다. 혁은 그 중에 한 사람이 왠지 낮이 익었다.
<근데, 여기는 완전히 일본이네. >
석현의 말에 혁은 잠시 우쿄의 방을 둘러보고 놀랐다. 상당히 정갈하게 정리된 방향제 향기로
가득 차있는 –코다츠에 심지어 다다미까지 깔려 있는- 사뭇 일본적인 분위기의 방은 검소하면서도
상당히 여성적이지만 놀란 것은 책이 도서관의 한 켠을 방불할 만큼 상당히 많다는 것이고 당연하지만
대개 일본어로 된 책이었다.
얼핏 제목을 봐서는 약간의 만화책을 제외하고는 다양한 분야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서적을 읽는 듯 했다.
그 중에 “주신구라忠臣藏”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같은 일본고전이 상당히 많다는 게 특이했다.
요즘 어린 세대 중에 이렇게 고전같은 것-은커녕 문학 같은 지루한 것-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은 없을 것이었다.
서가의 한편에 있는 음반들은 몇몇 일본 곡들을 제외하고 대개는 혁도 들어본 적이 있는 곡으로 대개
뉴에이지등의 신비주의계열의 곡이 대부분이었고 다소 슬픈 분위기의 곡이었다.
그리고 한쪽 벽에 일본어로 전국 서예경시대회 학생부 대상이라는 표가 붙은 거의 히라카나풍의 초서 체로
" 야마토 다마시이 大和魂 "이라고 쓴 서예작품이 액자에 붙어 있었는데 혁은 명필의 글씨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그 서예작품의 가냘프고 섬세한 서체에서 왠지 모를 음영陰影 짙은 원념怨念같은 것을 느끼고
섬뜩해졌다.
거기에 심지어 책장의 한쪽 구석에는 일본식의 불단佛壇이 간단히 차려져 있었다. 불단에는 아까의 사진의
여성 중에 한 명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가는 사람과 같이 있는 사진이 영정사진으로 놓여져 있었다.
방을 나와서 마루로 내려가자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다.
얼핏 혁보다도 어려보이는 듯한 긴 생머리를 리본으로 예쁘게 묶고 스커트와 파란색 블라우스,
레이스 장식이 많이 달린 에이프런으로 된 청초한 옷차림의 상당한 미모의 젊은 여성- 그것도 아까
우쿄의 책상 위의 가족사진 안의 여성과 똑같이 생긴-이 3살 정도 된 남자아이를 안은 채 자리를 권했다.
<앉으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근데…………… 혹시 선생님의 조카따님이신가요? >
순간 석주의 표정에서 쓴 웃음이 흘렀고 그녀는 우습다는 표정을 지었다.
석현은 그녀를 보고 반했다는 듯 얼굴이 빨개졌다.
혁은 친구에게 정신차리라는 듯 팔꿈치로 툭툭 쳤다.
<야. 선생님의 사모님이셔. >
석현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우리랑 같은 나이 같은데? >
<저래 뵈어도 우리보다 열 살은 위시거든? >
친구는 못 믿는 표정이었다.
<농담하냐? >
<농담은……… 죄송합니다. 오래간만에 뵈는데. >
<그러게, 참 오래간만이네요. 민혁군. >
그녀는 혁이 바로 자신을 알아보자 좋아라 하고 있었다.
<예. 근데 사투리를 완전히 고치셨네요. >
혁은 고등학교 때 이런 저런 이유로 은사의 사모님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도 지금보다 너무 나이가 어려 보여서 종종 조카딸로
오해 받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10년 전인 그때도 신혼때는 너무 어려 보여서 어린애를 억지로 데리고 사는
아동성학대자로 오해를 받아서 신고를 받은 경찰이 집을 기웃거리더라고 당시에 석주가 쓴 웃음을
지으며 수업 막간의 잡담 중에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녀가 아까 우쿄의 가족사진에 나온 일본여성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우쿄와 사모님이 닮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럴 리가 없을 터인데?
우쿄는 일본인이고, 그녀는 한국인이 아니었는가?
하여튼 사모님이 권하는 대로 마루에 앉아서 7년만에 고등학교 때의 선생과 마주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집에서 내놓은 자식 취급 받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아였던 혁은 외갓집인
마산으로 거의 유배당하다시피 해서 내려와서 그때 은인 같은 스승인 권선생, 석주를 만났었고
그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혁이 마산으로 전학 갔을 때 석주는 사범대기간 동안 ROTC-學軍團-과정을 이수하고 육군장교로
병역을 마치자마자 교육공무원이 되어서 첫번째 임지로 마산에 부임해 내려와 있었다.
석주는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심지어 반쯤 죽을 만큼 몇 번 두들겨 패서까지-계속 엇나가려던 혁을
바로 세우고 잡아 끌었던 것이다.
덕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명문대에 속하는 지금 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 뒤 자신의
은사와 마찬가지로 ROTC과정을 거쳐 육군 장교로 병역을 마친 뒤 다시 대학원에 진학했던 것이다.
<뭐, 지금 생각하면 내가 좀 심하지 않았나 싶긴 해.>
<덕분에 저는 이렇게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때 제가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어디까지
굴러 떨어졌을지, 솔직히 끔찍합니다.
대학 입학하고 내려갔더니 전근을 가셨는데 어디로 가셨는지 아시는 선생님이 안 계셔서.....>
석주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랬어? 그럴 줄 알았으면 전근한 곳을 알려둘 걸 잘못했네? >
<죄송합니다. >
석주는 쾌활하게 웃었다.
< 그럼 이번에 우리 아들이 자네 후배로 들어갔으니 잘 좀 부탁해.
애가 너무 유약하고 낮 가림이 심해서 좀 적응하기 어려울 거야.
이번에 다시 애를 집으로 데려다 놓았더니, 너무 낯설어하고 자기
애비를 너무 어려워하더라고......>
<아 예…… 예? 아드……님이라니요? >
<아, 실은 말이지……>
혁과 친구는 얘기 중에 우쿄와 석주의 관계를 알고 놀랐다.
죽었다는 우쿄의 부모는 실은 자기 호적에 우쿄를 입적시켜서
친자식으로 키우던 큰 이모 부부로 석주 부부가 바로 우쿄의 생부, 생모였다는 것이다.
실은 은사의 사모님인 우경은 원래 일본인이었고 혁은 처음 봤을 때는
-설상가상으로 그때 쓰던 말이 능숙한 마산사투리라서 마산토박이인줄 알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몰랐었다.
결혼 전에 한국에 아버지를 따라 놀러왔다가 곤경에 빠진 그녀를 군대에서 외출 나왔던 석주가
어떻게 곤경에서 구해줬고 그게 계기가 되어서 서로 사랑에 빠져서 결혼까지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의
집안어른들이 반일감정을 앞세워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혼인신고도 못한 채 석주의 아내인 우쿄
-놀랍게도 두 모자母子가 동명이인同名異人이었던 것이다. 여동생인 우쿄가 한국으로 간 뒤 언니가
아들을 입적시키면서 가장 귀여워하던 막내 여동생의 이름을 그대로 붙였기 때문이다. -가 친가 쪽
어른들의 등쌀에 일본으로 돌아가서 미혼모상태로 낳은 아들을 큰언니 카스미 부부가 자기 아들로
입적시켰던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게 그녀가 일본으로 귀국할 때 임신 사실을 몰랐고
임신했던 시기에는 석주와 결혼이 가능하기나 한지조차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딸의 장래를 염려한 장인이 마침 아들이 간절했던 맏딸에게 입양을 권했던 것이고……
그런데 석주는 우쿄가 임신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아버지를 강경하게
설득해 우쿄- 우경을 한국으로 데려와서 정식으로 결혼한 뒤 딸을 낳았고 아들 우쿄는 그대로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성장했다.
우쿄가 재작년에 한번 한국으로 와서 잠깐 친 가족과 산 적이 있는데 맏처형인 카스미가
죽은 것으로 우쿄가 호적상으로 고아가 돼 버린 것이 기회가 된 것이다.
일본에는 석주의 장인 외에도 막내 처남 1명. 처형2명, 우쿄의 호적상 형제로 2명의 시집간
누나가 있었고 다들 어떻게든 귀염둥이였던 우쿄를 맡고 싶어했지만 이 기회에 아들을 되찾고
싶었던 데다가 친가 부모들의 성화때문에라도 부부는 자신들이 혈연상 친부모임들 근거로 약간
억지를 부려 우쿄를 한국으로 데려왔고 우쿄를 석주가 근무하는 학교에 편입학 시켰-고 그래서
석진과 같은 반이 되었었-는데 한국의 생활에 제대로 적응을 못하고 한국의 친척들과도 사이가
안 좋았던 우쿄가 일본으로 가출해서 돌아가 버린 뒤 한국으로 오는 걸 거부해버렸고 대입
검정고시를 치러서 패스하는 걸로 이미 법적으로 고등학교는 졸업해 버린 셈이어서 그대로 일본에서
대학을 진학해 버린 것이다.
하여간 우여곡절이 너무 많았고 특히 재작년의 일을 생각하면 석주는 속이 새까맣게 타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내 아들이지만 일본에서는 응석받이로 자라서 다른 때는 완전히 어린애같은 녀석이 공부할
때만은 완전히 독종毒種이더라니까. >
이미 초등학교 때 2번이나 월반해서 4년만에 초등학교 과정을 해치운 전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으로 돌아갔을 때 거리낌 없이
전에 다니던 고등학교에 돌아가는 대신에 그대로 대입 입시를 준비해 한번에 대학에 합격했었고……
2층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파자마위에 앞을 가느다란 저고리동정으로 안이 보일 정도로
묶은 격자무늬의 한텐袢纏-일본전통 식 코트-을 걸친 우쿄가 벽에 손을 짚으면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아, 일어났냐? 이리 와서 앉아. >
자기 아버지가 옆에 앉으라는데도 주저하고 있었다.
아직도 아버지가 어색한 건지 선배 앞에서 파자마 차림인 게 마음에 걸려서인지 알 수 없었다.
우쿄는 쭈뼛쭈뼛하면서 자리에 앉더니 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 初日から迷惑をかけて申し譯ありません, 先輩。
(첫날부터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선배님.)>
< いや. 加えた子たちもいるのに何を, 大丈夫 大丈夫。
(아니. 더 한 애들도 있는데 뭘,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고 했음에도 상당히 죄송하게 생각하는 우쿄의 모습이 혁은 어느 후배들 보다
무척 마음에 들었다. 요즘 후배들 중에 저렇게 예의 바른 후배는 보기가 어려운데,,,
그 순간에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고 우경이 문을 열어주자 왠 아가씨가 들어오고 있었다.
혁은 우쿄와 닮았지만 훨씬 키가 크고 피부가 너무 흰 우쿄와는 달리 완전히 "살색"의 피부여서
훨씬 건강해 보이고 생기발랄한 분위기의 긴 생머리를 약간 오른 쪽으로 올려 묶은 맵시 있는
교복차림의 아가씨를 보는 순간 마산에서 처음 봤을 때의 우경을 보는 느낌이었다.
<야! 너는 계집애가 왜 이리 늦게 다니냐?>
<아잉~~~ 아빠. 친구하고 같이 공부하느라 고요♡>
<그래도 좀 일찍 다녀!!>
<네~~~ㅇ♡>
그래도 딸이 애교를 떠는 게 귀여운지 석주는 적당히 꾸중하는 선에서
그친 뒤 서재에서 울리는 전화벨에 잠시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 아가씨가 우쿄에게 약간 쌍심지를 켜고 흘겨봤다.
우쿄은 약간 움찔했다
<오빠!! 동사무소 앞의 비디오가게에 갔었지?>
<오빠라고?>
석진이 혁에게 귀속 말을 했다.
<우쿄의 여동생인 수진이예요. 제 여자친구입니다.>
<아, 마산에서 본 적이 있어, 많이 컸네, 그런데 나이가 오빠보다는
많아 보이는데...>
<저래뵈도 이제 고 1입니다.>
우쿄는 멀뚱히 자기 여동생을 응시했다.
<거기 언니가 오빠를 내 동생이냐고 묻잖아. 얼마나 민망했는데!>
<あ,そう (아. 그랬니)?>
<몰라몰라몰라!! 이제 거기 창피해서 못 가게 생겼단 말이야. 책임져!!>
수진이 그러면서 우쿄에게 달려들어서 앵겨들었다.
이제 보니 오빠한테 화내는 게 아니라 애교스럽게 투정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우쿄는 여동생의 몸무게가 약간 버겁다는 표정이다.
<야! 권수진!! 오라비만 보이고 이 서방님은 안보이냐?>
<오빠는!! 결혼도 안 해놓고 누가 서방이야?>
석진의 짓궂은 농담에 이번에는 수진이 장난스럽게 흘겨봤다.
문득 수진이 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와 이 오빠 캡 멋있다!!! 누구세요?>
혁은 내심 섭섭했다.
가끔 본적이 있는 그때는 유치원생이었던 꼬마숙녀는 혁을 몰라보는
듯 했다..
<수진짱. 손님 앞에서 너무 버릇없이 굴지마.>
우쿄가 약간 어눌한 한국어지만 사뭇 엄한 태도로 자기의 목을 감싸
안고 앵겨 있는 수진에게 가볍게 나무랐다.
<피!! 알았어영.>
수진이 우쿄에게 내려와 앉으면서 혀를 삐죽 내밀었다.
지금 이 상황이 두 남매의 성격차이-고지식하고 수줍음 많은 새침데기와 생기발랄 말괄량이-를
그대로 드러낸 것 같아 보여서 혁은 여러모로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럼 선생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 이제 집도 알았으니 자주 놀러 와라. >
<예. 早乙女君も學校で見よう。 先ほど歡迎會で仕事はとても心に留めずに,
このような人, あんな人もいるものと決まっているから。
(사오토메군도 학교에서 보자고. 아까 환영회에서 일은 너무 마음에 두지 말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도 있게 마련이니까.)>
옛 은사에게 인사를 한 혁은 우쿄의 어깨를 두들겨줬다.
< これからよろしくお願いいたします。(앞으로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우쿄의 다소 경직된 90%각도 인사에 혁은 약간 부담스러워했다.
<좀 오버네^^;;;>
석현의 농담 섞인 지적에 고개를 든 우쿄는 오른 손 끝으로 입을 가리면서 얼굴이
빨개졌다.
원래 낮선 환경에 직면하면 한동안 적응하느라 마음고생을 해야 하는 우쿄였지만
처음 알게 된 이 선배는 무척 좋은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에 부담감이 점 덜해지는 것 같았다.
혁은 우쿄의 수줍은 모습에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세 사람은 같이 집을 나왔다.
<사오토메군이 상당히 온순하고 예의 바른 친구인 것 같군. 그런데 너무 양순한 것 같은데..>
그 말에 석진은 약간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휴~~~ 그렇긴 합니다만, 쟤도 고집 피울 땐 아무도 못 말립니다. >
<그래?>
<고등학교를 한 학년 빼먹고 거기다 그 일본에서 제일 간다는 동경대를 재수도 안하고
대학에 붙은 게 실은 그 녀석의 황소고집 때문이거든요. 그 녀석 고집만 빼면 진짜
바보스러우리만치 착하고 순진해 빠진 녀석인데...아, 저는 여기서 바로 가면 됩니다.>
<그래? 그럼 학교에서 보자.>
혁이 손을 내밀자 석진은 머쓱해하며 혁과 악수를 했다.
<옛!! 저도 앞으로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선배님!!>
악수를 마치고 나서 석진은 활달하게 군대식 경례까지 하고서 옆길로 빠졌고 혁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석진을 배웅한 뒤에 혁과 친구는 차에 탔다.
<뭘 그렇게 생각해? >
조수석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던 혁은 석현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응? 내가 뭘? >
<계속 멍 때리고 있잖냐? >
<그랬나? >
<하여간 그애 아깝지 않았냐? 고녀석, 여자였으면……>
<너도 참 못 말린다.>
입맛을 쩝쩝 다시는 석현에게 가볍게 핀잔을 준 혁도 뭔가 남은 게
있는 것 같은 아쉬움과 어리둥절함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우쿄의 집을 나와서 걸으면서 지금껏 있었던 일을 속으로 정리하면서
가장 어처구니 없었던 것은 우쿄에게 느낀 감정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혁은 술이 무척 센 편이고 아까의 신입생
환영회에서 마신 술이라고는 우쿄를 도와줄 요량으로 원샷한 폭탄주가 전부니까
지극히 정상인데도 그 신입생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아무리 귀엽게 생겼지만 그 아이는 남자였지 않은가?
단순히 새로 알게 된 남자후배를 보는 감정이 아니라 이를테면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느꼈던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혁은 이미 고등학교때부터 제법 경력이 화려한 편이었다
확실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너무 굴곡진 사춘기시절을 보내는 것
같아 가엾다는 생각이"든 건 사실이다.
일단 아무리 귀여운 소년이라고 해도 남자한테 이상한 감정을 품었던
것은 자기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냥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야. 근데 놀랐다. 천하의 강민혁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다니? >
<뭐가? >
혁은 짐짓 딴청을 부렸다.
그로부터 한 3일 간 혁은 학교에서 우쿄를 보지 못했다.
학교 당국에서도 도쿄대와의 관계 때문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었고 그 사실을 학교사무를 맡던 동급생
조교助敎에게 들은 혁으로서도 우쿄의 장기결석은 궁금증을 자아냈다.
<알았어, 내가 한번 알아보지. >
<감기라고? >
3일후쯤에 우연히 만난 석진에게 들은 우쿄의 결석이유가 이러했다.
<예. 워낙 에 몸이 약한 녀석이라 조금만 감기기운이 있어도 펄펄 끓고 난리가 아니거든요.
실은 그날 좀 많이 놀라기도 했고.........>
그러고 보면 그때부터 왠지 안색이 않좋고 안았을 때 몸이 뜨겁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혁은 상당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오늘 사오토메군에게 들를 건가? >
<네? 예 그럴 겁니다만......>
<나도 병문안 삼아 같이 가면 안될까? >
<네?!!!>
난데없는 혁의 말에 석진은 당황했다. 혁도 자기가 그런 말을 왜 했는지 몰라서 당황했다.
요 며칠 동안 혁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려 밤마다 시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왔다. 그리고 공적인 이유도 있었다.
<아무래도 사오토메군의 모교가 모교다 보니 학교당국에서도 신경을 쓰고 있거든. >
석진은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석진과 이따 같이 가기로 약속을 하고 말았다.
재킷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 뒤 면바지주머니에
한 손을 쑤셔 넣은 채 대학원 쪽으로 가기 위해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다가 오토바이가 하나 들어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전혀 반갑지 않은 화상畵像이었다.
오토바이 주인은 혁을 보자 순간 움찔 하다 자못 비굴하게 웃어보였다.
<잘 들어 갔었나~~~!>
능글한 표정을 지으며 아는 체를 하는 꾀죄죄한 가죽옷에 히피랍시고 씻지도 않아
악취를 내 풍기며 보호헬멧을 쓰지도 않은 선글라스만 그럴싸한 시커먼 피부색의 그 3학년생-재영이다.
검은 피부에 마치 네안데르탈인을 연상시키는 얼굴이 흉했다.
별로 듣기 좋은 것도 아닌 목소리로 억지로 무게를 잡는
목소리를 내는 것도 역겹기 이를 데 없었다.
혁도 응대를 해줬지만 표정은 냉랭했다. 오토바이를 주차장에 세워둔 놈이 혁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환영회 때 봤던 그 가시나 같이 생긴 안경잡이 있잖나, 학교
안 나온다메? 싸가지 없는 자슥 아이가? 신입생 따위가 우데 그리
곤죠根性없이 구노? >
순간 혁의 속내에서 삐끗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요새 신경이 다소 날카로워져 있던 터였다.
<뭐? >
<그런 놈무 자슥은 이빠이 쿠사리를 줘야 한다카이.>
순간 혁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가 풀려졌다. 혁은 걸음을 멈추고 피우던 담배를 거칠게 뱉은 뒤 비벼 껐다.
<학부도 다른 주제에 다른 학부 신입생 환영회에 끼어들어 추태를 부린 것도 주제넘은 짓이지만 남의 학부
학생 출석문제에 옳네 그르네 하는 것도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생각 않나? >
<학부는 다르지만 서도 그래도 내가 선배 아이가? 후배가 잘못하면 옳게 끌어주는 게 당연한 기제.
선배로 가오顔가 있다 아이가?>
(또라이!! 몰염치한 정신병자 같은 놈!! )
환영회 때 놈이 우쿄에게 벌인 추태와 행패가 새삼 떠올라서 새삼 놈에 대해 경멸감과 노기가 일기 시작했다.
애가 그날 이놈한테 얼마나 시달리고 놀랐으면 몸 져 누웠단 말인가?
이놈은 고등학교에서부터 영 맘에 안 들던 놈이다.
혁도 그때는 심각한 비행청소년이었지만 놈도 애초에 싹수가 노란 개망나니로 그때도 주제넘게 설치고
다니다 혁에게 두들겨 맞던 녀석이니......
이 미친놈의 고질병은 어줍잖게 선배임을 내세워서 후배들을 깔아뭉개고 치졸한 지배욕구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들고 여의치 않으면 행패를 부려서 아는 학생들에게 심적 물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점으로
전부터 학생들에게 원성을 듣고 있던 참이었다.
더구나 최근에 알려져서 학교를 발칵 뒤집히게 만든 바로는 전문대에 입학할 실력도 안 되는
인간을 그의 아버지가 아는 연줄을 이용해뇌물로 -그런 이 녀석 부모도 참 불쌍한 인사임에 틀림없다.
인간 좀 만들겠다고 그렇게 대학을 보내놓았더니 겉멋만 들어서 되지도 않는 음악실력으로 록밴드 하네
뭐하네 하며 사고치는 아들놈 뒤처리나 하는 꼬락서니가 안쓰러울 지경이다. -
가장 인기가 없고 만만한 학부에 억지로 끼워 넣었다는 비리내용이 터져 나오면서 학생회까지
들고 일어날 정도로 학교와 학생들 공히 밉상취급을 받으면서도 자기가 대단한 인간인양
과대망상 속에 사는 쓰레기 같은 놈이다.
그러고도 입학한 지 4년이 넘어가도록 이제 3학년에 간신히 올라온 것이다.
문제아였던 옛날과는 달리 지금은 수재秀才인 혁이지만 옛날의 거칠고
격한 성격을 억누르면서 아는 사람들에게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옛날의 문제아였던 모습은 현재 혁을 아는 사람들로선 전혀 실감이 안 나는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놈이 천둥벌거숭이같이 설치면서 후배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언젠가는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전부터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놈은 한번 혁에게 두들겨 맞으면 혁이 무서워서라도 설치지 못한다.
특히나 복수하겠다는 배짱도 없는 놈이고 그렇다고 허세만 잔뜩 들어간 놈이니 두들겨 맞았다고
어디 하소연이라도 할 녀석도 아니고 그래서
놈은 고등학교 시절에 혁의 밥이었다.
처음 혁이 놈을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 마산에서였는데 처음에
시쳇말로 인근의"짱" 이었던 놈은 혁이 서울에서 내려왔다며 -서울 물을 먹은 게 고깝다는 듯- 경멸조로
"서울띠"라고 부르면서 깔아뭉개려고 들었다 처음에는 사고 안치려 참으려다 결국에 참다
참다 못한 혁에게 첫 싸움에서 지금껏 부린 위세가 무색하게 철저히 두들겨 맞은 뒤 처음에는 수차에 복수를
꾀했다가 되려 화만 자초할 뿐이었다.
심지어 인근에 싸움 좀 한다 하는 불량배들을 20명씩이나 불러들여서 집단구타를 하려다가 오히려 혁이
그 20명을 혼자 때려눕히는 것을 보고 질려버려서 그 뒤부터 혁에게는 철저히 비굴한 태도를 취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혁은 한동안 냉정하게 놈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옛날처럼 충동적이고 부주의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성격도 이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헌데 놈의 더러운 입에 우쿄가 씹혔다고 생각하자 불쾌해졌다.
<그러는 너는 선배인 나한테 말을 놓으면서 이렇게 건방을 떨 수 없을 터인데? >
조소 섞인 말을 내뱉으며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진 혁의 눈빛에놈이 움찔했다.
덩치는 어떨지 몰라도 혁에게 몇 번이나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아서 혁을 내심 무서워하는 놈이니 시건방을
떨다가도 혁의 눈빛이 달라지면 겁을 먹게 되는 것이다.
아니, 혁이 아니어도 자신이 한번 기가 꺾이면 범접을 못하지만 만만해 보이면 볼 것 없이 우위를 점하고
휘어잡으려 드는, 말하자면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비열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 놈이 우쿄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우쿄가 만만해 보인다는 뜻이다.
그런 어린 애에게……. 놈의 비열함과 야비함에 혁은 치를 떨었다.
<에이~~ 우리는 친구 아이가? 새삼스럽게 와 그라노? 근데 글마말이다. 이쁘장한게 진짜로 가시나였으믄
참말로 꼴리게 생기지 않았나? 요즘 밤마다 글마를 가시나로 만들어서 빠구리 뜨는 상상하문서 딸치는 재미로
지낸다 아이가~~~. >
이 천박하기 짝이 없는 놈이 군침을 삼키면서 추잡한 속내를 드러내자 혁은 순간적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능욕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분노가 극한에 다다랐다.
그러고 보면 놈은 고등학교 시절의 자기 담임의 사모님인 우경에게도 흑심을 품다가 그녀를 겁간하려고 석주가
집을 비운 날에 가택침입을 기도企圖했다가 혁에게 제지를 당했었던 놈이었다.
석주와 함께 그의 아내인 우경도 혁이 바로 설 수 있게 힘을 실어 주었었고 더구나 그녀는 혁에게 처음으로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해줌으로서 너무나 엄했던 석주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도록 해 주었기 때문에
당시에 혁에게 무척 고마운 존재였다.
그때에는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실은 그때 놈에게서 우경이 일본여자라는 말을 처음 들었었지만 혁은 믿지 않고 한 귀로 흘려 들었었다.
그녀를 어떻게 하려는 구실이라고 생각해서였던데다 그 다음에 한다는 소리가 아주 쓰레기같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여자들은 색만 밝힌다는 둥 어떻다는 둥 근거도 없이 줏어들은
비열한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그녀도 일본 여자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식으로 헛소리를 해
그때도 혁의 분노를 자아냈었던 것이다.
건물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의도하지 않게 인적이 뜸한 곳이다.
<그렇게 생겨묵은 가시나 하나 있으믄 당장에 어디 끌고가서 따묵는 긴.....>
<이 개새끼!!!!!>
"퍽!!!"
혁의 주먹이 기어이 놈의 큼지막한 턱에 꽂혔고 놈은 곰 같은 덩치에 안 어울리게 그대로 나둥그러졌다.
이놈은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저지르려고 드는 짐승이다.
놈의 추잡한 광언狂言도 더 참고 들어줄수가 없다!
<니, 와, 와이라노? >
놈은 주저앉아 맞은 곳을 한 손으로 감싸며 공포에 질려 혁을 올려봤다.
혁의 입에서 중 저음의 한기가 도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번 말해봐, 밤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쿠사리를 줘야 한다고? >
혁은 놈의 면상에 또다시 발도 장을 찍었다.
뒤로 엎어진 놈은 뒤를 보이며 엎드려 기기 시작했고 혁은 놈의 엉덩이 한 가운데를 구둣발로 걷어찼다.
<ㅎ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ㅓㄱㄱㄱ!!!!!!!!!!!!!!!!!!!!!!!!!!!!!!!!!!!!!!!!!!!!!!!!!!!!!!!!!!!!!>
놈은 엉덩이 한가운데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데굴데굴 굴렀다. 항문을 정통으로 얻어맞았기 때문에 비명도 못
지르고 물밖에 끌려 나온 붕어처럼 거품 문 입만 뻐끔뻐금 거리며 숨만 헐떡였다.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다시 주먹이 몇 차례 놈의 얼굴을 정통으로 꽂혔다.
놈의 양쪽 콧구멍에서 코피가 주루룩 흘러내렸다.
<아이고~~~~~~~~메~~~내, 내가 잘못했다~~ 때리지 좀 마라~~
내 죽는다~~>
싸워야 상대가 안된다는 걸 애초에 알고 있기 때문에라도 저항도 못하고 죽는 소리를 하며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은 없이 그저- 비굴하게 싹싹 비는 놈을 혁은 무릎으로 배를 가격한 뒤 팔꿈치로 윗동을
내려꽂았다.
놈은 그대로 엎어졌다.
놈을 다시 발로 차면서 구석으로 내몬 뒤 짓밟아버렸다.
한참 뒤에 발길질을 멈추고 숨을 헐떡이며 놈을 노려보았다.
놈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다가 혁의 구둣발에 산산이 깨졌다.
<아~~이~~~고~~~메~~~~~~>
간신히 놈이 도처에 멍이 든 상태로 코와 입으로 피와 콧물과 침을 내뿜으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혁은 옆의 상당히 무거운 알루미늄 재질의 쓰레기통을 들어서 놈의 등에다 내려 던졌다.
놈은 그대로 다시 엎어져서 꿈틀댔다. 혁의 한쪽 구둣발이 놈의 얼굴을 짓이겼다.
<잘 들어, 이 버러지새끼야. 앞으로 또 철모르고 설치고 다니면 아예 산에다 생으로 파묻어버릴 줄 알아.
특히. 또 그 신입생에게 선배랍시고 개수작 걸면 네놈 X대가리를 뽑아버릴 테니까,
이건 공갈이 아니야, 진짜 경고야, 알아서 처신해. 알았어, 이 쓰레기새끼야?>
놈은 혁에게 밟혀서 짓이겨지고 있는 얼굴을 간신히 끄덕였다.
생각 같아선 놈을 고자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지만
그것만은 참기로 했다.
혁은 놈의 얼굴에서 발을 내리더니
<선배? 웃기고 있네, 이 미친 새끼!! 너네 애비가 십일조 거둬서 네놈한테 처들인 학비가 아깝다,
이 대가리에 똥만 가득 찬 거지같은 새끼!!>
다시 그 발로 머리통을 걷어찼다. 놈은 걷어 채인 반동으로 벽 건물에 뒤통수를 부딪히며 아예 절명했다.
혁은 놈의 면상에다 침을 뱉고 돌아섰다.
혁이 자리를 뜬 10여분 뒤에 놈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더니 신음소리를 내면서 맞아서 퉁퉁 불은 곳을
어루만지다가 누가볼새라 오토바이를 끌고 도로 혼자 살고 있는 -쓰레기 하치장 같은- 하숙집으로 가버렸다.
한동안은 학교에 못나올 것이다.
누가 봤다면 얼굴을 들 수 없으니까..... 아니, 더 이상 이 학교에서 들고 다닐 낮이 없으니 자퇴를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공부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한 학년에 1~2년씩 유급하면서 후배들 괴롭히고 등쳐먹는
재미로 다녔는데 작년에는 견디다 못한 1학년생들에게 집단린치를
당했고 그 공포로 한동안 잠잠해야 했다.
이제야 훨씬 만만한 호구를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천적인 혁이 그 먹잇감에 관심을 두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어진 것이다.
놈과 달리 혁은 누구든지 후배들을 자상하게 돌봐주고 인도해주는 성격이다.
그래서 후배들한테 인망도 높았고.....
특히나 혁에게 특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라면 녀석에게는 기회가 없다고 봐야 한다. 어쩌다 마주쳐서 어떻게
하려 해도 그게 혁의 귀에 들어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버지의 막대한 돈으로 이 학교에 들어와서 자신의 강적인 혁이 학교 선배로 있는 걸
보고 갖은 아첨으로 적당히 관계를 유지했는데 오늘에야 말로 파탄을 맞은 셈이다.
혁이 비행청소년이었을 때조차 아닌 척 하면서 교내에서 약한 애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놈들을
힘으로 제압하고 굴복시켜서 약자를 보호해주는 입장이었으되 사람을 악의를 갖고 작심하고 괴롭히는
비열함과는 전연 관계가 없는 성격이었지만 놈의 사고방식으로는 혁이 정말 그렇게 나온다면
녀석으로서는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석진은 아까 본 것과는 달리 냉랭하기 짝이 없는 혁의 표정에 긴장했다.
혁의 자가용안에서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은 선후배는 잠시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저기...선배님,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아, 아냐. 기분 나쁜 일은 무슨;;; 하하하;;;>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말은 건 석진에게 짐짓 웃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참. 사오토메군이 뭐 좋아하는 게 있나? 과일이라든가...>
<글쎄요? 그러고 보니 워낙 에 입이 짧은 녀석이라...>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에 몸을 마치 태 속의 아기처럼 이불로 돌돌 말아서 방구석의 요 위에 몸을 벽 쪽으로
향하고 잠이 들어있던 우쿄는 잠에서 깼다.
아침에 약을 먹고 몇 시간을 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불 속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아침에 잰 체온이 37도 8부였다. 4일이나 지속된 열이 오늘 아침에야
간신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직도 오한이 우쿄의 몸을 옥죄고 있었다.
다다미 밑의 온돌에서 따뜻한 온기가 우쿄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지만 일본도 아니고 외국 땅에서
병석病席에 누웠다는 생각이 들자 서글퍼 지면서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밑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 말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京太郞. 寢るの? (케타로. 자니? )>
방문이 열림과 동시에 우쿄는 몸을 일으켜 탁자난로에서 안경을 집어 썼다.
<熱がちょっと下ったの, 京太郞?(열이 좀 내렸니, 케타로)?>
우쿄는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케타로”는 우쿄의 양어머니인 카스미가 처음에 우쿄에게 붙였던 이름으로 일본에서 이름이 같은
친 어머니 우경때문에 지금까지도 거의 우쿄의 별명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물론 대개는 “우쿄”라는
이름으로 더 불리고 친엄마와 구분 할 때는 ちび宇京(꼬마 우쿄)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편 석주는 엄마와 아들이 특이하게도 일본이름은 사오토메 우쿄, 한국식은 권 우경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동명이인이라 한동안 부르는 데 골치를 썩다가 아들을 “우경”이라 부르며 정작 아내를 이름으로
부를 때 “경아”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들의 별명들은 왜색倭色이 너무 짙다 하여 질색이었다.
시집온 지 20년이 넘어서 완전히 한국인이 다 된 우경이지만 친정식구를 만나거나 완전히 일본인인
아들과는 일본어를 사용하는 그녀였다.
재작년과는 달리 우쿄를 위해 일부러 일본식으로 꾸민 방의 분위기가 정작 우경에게 마음에 들었다.
특히나 우쿄가 가져온 두벌의 탁자난로는 어렸을 때 향수를 느끼게 했다.
한국으로 오면서 우쿄는 항공우편으로 일부러 한국에 없는 탁자난로를 거실에 놓을 큼지막한 것과 자기가
쓰게 될 방에 놓을 소형으로 두 개나 가지고 와서 일본인인 아내를 빼고 왜색倭色의 물건을 별로 안 좋아하는
석주를 찜찜하게 만들었다.
어린 아가씨라는 뜻을 지닌 사오토메早乙女라는 성씨때문인지 외가의 이모나 누나들, 젊었을 때의
외할머니까지 전부 거의 비슷하게 생긴 미인들인데 지금까지 자기랑 이름이 똑 같은 막내이모로
알고 있던 친 어머니 우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36세, 한국나이로 치면 37세가
된 그녀는 허리까지 내려간 긴 생머리 머리를 리본으로 묶은 모습이 어울리는 아직 20대 중 후반으로 보이는
앳되고 청초한 미인으로 단지 결혼전의 온순하고 순진했던 인상과는 달리 나이가 들어가면서 약간 색기있고
고혹蠱惑적인 원숙미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쿄와 친동생인 수진도 외모가 친가 쪽하고는 전혀 무관하게 오히려 외가 쪽을 닮아 있는 게
아버지로서는 은근히 섭섭한 점이다.
그나마 우주가 아버지를 닮아가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가......
체온계를 우쿄의 입에 물렸다가 뽑아봤다. 37도 3부, 우경은 안도했다.
< あ. お客さん來た. 會う。 (아, 손님 오셨다. 만날래?) >
<誰ですか。(누군데요?)>
< 錫進君とこの前に君を送ってくれた先輩。(석진이랑 저번에 너를 데려다 줬던 선배.)>
< マジ? それでは居間に出ます。(정말? 그럼 거실로 나갈게요.)>
< ねえ! 體も痛い子がどこを出るの? そのまま部屋で會って。(얘!. 몸도 아픈 애가 어딜 나가니?
그냥 방에서 만나.)>
< だ, だめよ。私の部屋では!! 4日間掃除もしなかったが!!!!(아, 안돼요, 내방에서는!! 4일 동안 청소도
안 했는데!!)>
< 大丈夫. 充分にきれいなの!(괜찮아. 충분히 깨끗해!!)>
< 恥ずかしいのよ!!(창피하단 말이에요!!)>
밑에서 석진과 함께 2층의 대화를 들은 혁은 아까 혁에게 두들겨 맞던 녀석 말에 비속어로 일본말
(곤죠,이빠이, 쿠사리.가오)이 들어가 있던 게 생각나 순간 실소했다.
혁도 원래 일본이라는 나라를 싫어하지만 두 모자의 일본어대화는 마치 귀여운 음악소품을 연상시켰다.
혁과 석진은 그냥 방으로 들어갔다.
우쿄는 두 사람이 들어오자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워낙 에 흰 피부라 빨개진 게 더 두드러졌다.
주인이 며칠 청소 안 했다고 부끄러워하는 방은 객관적으로 볼 때 깨끗하기만 했다.
< いらっしゃいませ. 先輩。 (어서 오세요. 선배님.)>
단색의 연 하늘색 잠옷에 일전의 그 일본식 외투를 어깨에 걸친 우쿄는 난감해 하다가 약간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4일 동안에 꽤 수척해 보였다.
<야. 너는 여기서 뭐 더 치울 게 있다고 그렇게 수선이냐? 하여간 병이야 병! 자꾸 그러다 장가가면 마누라가
얼마 못 견디고 도망간다.>
석진이 우쿄의 결벽증을 흉보면서 우회적으로 안심시켰다.
< すいません, 先輩。 これで學校に出ることができなくて……
(죄송해요, 선배님. 이래서 학교에 나오질 못해서.....)>
< 何, 私にすまない理由はない, 私が學校 關係者でもなくて...... 體の調子が惡いのよ仕方ないでしょう,
健康が最高だから...
(뭐, 나한테 미안할 이유는 없어, 내가 학교 관계자도 아니고...... 몸이 안 좋은 거니 어쩔 수 없지 뭐,
건강이 최고니까...)>
혁은 우경이 깨끗이 씻어서 쟁반에 내온 사과를 깎아서 자른 뒤 과일용 포크에 꽂아 우쿄에게 건네며 말했다.
우쿄는 수줍게 사과조각을 받아먹었다.
세 사람은 어울려서 얘기를 나누며 제법 가까워졌다.
아직 몸에 열이 나고 몸이 나른하지만 4일씩이나 지루하게 방에 처박혀 누워 있어야 했던 우쿄로서는
병을 잊을 만큼 간만에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게 즐겁게 느껴졌다.
석진은 평소에 과묵한 우쿄가 알게 된지 얼마 안된 사람과 어느 정도 말하는 걸 보고 의외라고 느꼈다.
석진이야 계기가 있어서 우쿄와 빨리 친해질 수 있었지만, 석진이 겪은 바로는 웬만한 사람에게 우쿄는
원래 낫 선 사람과 잘 못 어울리거나 친해지더라도 처음 알게 된 뒤부터 친해지기까지 한참 지나야 하는
-대신에 완전히 친해지고 나면 신뢰할 수 있고 다정다감한데다
본보기로도 삼을 수 있는-성격이지만 혁은 바로 우쿄와 친해질 수 있었다. 우쿄로선 환영회 때 폐를 끼쳤다는
부채감負債感도 있고 상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좋은 선배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곧은 성격으로 남한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우쿄이지만 환영회 때의 그 야만인野蠻人이
신경 쓰여서 잠깐이나마 혁에게 잘 보여서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까 했는데 혁을 본 순간 그런 약삭빠르고
타산 打算 적인 생각을 했다는 게 부끄럽고 미안하게 생각되었다.
혁은 우쿄가 수재秀才이고 꽤 복잡한 어린시절을 보냈음에도 여전히 순진하고 천진한 성격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고 상당히 어리고 귀여운 동생으로 느껴져서 한동안 그에게 이상한 생각을 했던 게 미안하게
느껴졌고 문득 아까의 놈이 이런 우쿄에게 추악하고 음험한 생각을 했다는 걸 생각해서 내심 놈에게 -아까
아주 반 죽여 놓았었음에도-화가 났다.
혁은 동생이라야 이복남매라서 한때는 그다지 정이 안 갔던 터였다.
우쿄의 일본생활 얘기를 나누는 중에 혁의 시선이 우쿄의 일본에서의 사진으로 잠깐 시선을 돌렸다.
<あの制服, 早乙女君に一番よく似合うのに。(저 교복, 사오토메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데?) >
<そ, そうでしょうか? 姨母夫は別にだと言うが...(그, 그런가요? 이모부-친 아버지-는 별로 라시던데...>
<いいえ。 服模樣だその人にどんなに似合うのかによったの。 小粋で. 趣もあってちょっと
可愛かったりしたように見えて...... 被った姿が見たくなって.....
(아니야. 옷 모양이야 그 사람에게 어떻게 어울리느냐에 달렸겠지. 맵시 있고. 멋도 있고 좀 귀엽기도
해 보이고...... 입은 모습이 보고 싶어져.)>
우쿄는 그 말에 상당히 부끄러워했다.
늦은 오후에 혁은 자리를 떴다.
너무 오래 있으면 우쿄가 좀 힘들어 할 것 같아서였다.
우쿄와 마침 방에 들어온 우경이 만류했다.
<あの, もっとあっていらっしゃっても良いですが....(저기, 더 있다 가셔도 되는데요....)>
<그래요, 민혁군, 바깥양반도 조만간 돌아올 거고 저녁준비도 이따 할 거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도 약속이 있고 해서요.>
우쿄가 혁을 배웅하기 위해 일어나려는 것도 혁은 말렸다.
<無理して起きるな. 早く治って學校で見よう. 分かったの? 攝生お上手で......(무리해서 일어나지마.
빨리 나아서 학교에서 보자. 알았지? 몸조리 잘하고......)>
혁은 우쿄를 다시 잠자리에 눕힌 뒤 얼굴을 어루만져줬다. 우쿄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졌다.
혁과 석진이 간 뒤 우쿄는 잠시 이불을 몸에 둘둘 말고 일어나서 창문으로
두 사람을 배웅해줬다.
그리고 책상 위의 사진을 잠시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 http://www.tufs.ac.jp/ts/personal/choes/bibimbab/zainitigo/Sjaeileo.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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