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 무림 역사상 천기조원을 타고난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녀의 음양교합에 의해서는 태어날 수 없는 지체이기 때문이다. 그들 가문은 어찌하여 윤회역근대승공(輪廻逆筋坮承功)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들 가문의 원한이 그렇게도 피 맺힌 절규였던가?
윤회역근대승공은 당대에 이룰 수 없는 것이기에 결코 사술도 아니고, 검(劍)과 도(刀) 등 무기를 다루거나 상대를 제압하는 무공(武功)이 아니다. 무한내공을 만드는 무공이고, 오직 근(根), 골(骨), 혈(血)만을 정화시켜 불사지체로 만드는 의공(醫功)이되 신공(神功)이라 하였다.
오호(嗚呼)! 이런 비공(泌功)이 있었던가!
무가의 후손인 그들은 삼백 여년을 내려오면서 상대를 제압하는 무공을 가까이 해 본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 후손의 생활은 단순할 수밖에 없었다. 윤회역근대승공에 억매여 일생을 살아가고, 남의 이목을 피해 은거 생활을 해야 하기에 자연히 글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었다.
무영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도, 조부도, 증조부도, 선조대대로 그랬다.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유훈(遺訓)을 지키기 위해서도 그랬다.
유사무사(有事無死), 어떤 일이 있어도 죽어선 안 된다!
가사무전(家事無傳), 집안 내력을 알리지 마라!
유청무심(有聽無心), 들어도 들은 척 마라!
유구무언(有口無言),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마라!
무공무연(武功無練), 어떤 무공도 배우지 말고 아는 척도 마라!
그래서 더욱 천지현관(天地玄關)의 지체인 서무영(舒霧影)은 책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서 무영은 역사(歷史),의학(醫學),진법(陣法),역(易)을 비롯해 서(書),음(音),가(歌),화(畵)의 예(藝)와 음양의 합궁술 등 잡기(雜技)를 배웠다.
그는 언문(言文)에도 능통하여 고어(古語), 범어(梵語), 과두문( ?文), 갑골문(甲骨文), 몽골어(蒙古語), 고대법문(古代法文)등 그가 이해치 못하는 책자가 없었다.
"앉아라!"
장중한 서진탁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긴장한 탓일까.
그들은 작은 원탁을 중심으로 앉았다. 한 가닥 미풍이 흐른다. 차를 따르는 궁 단향(弓端香)에게서 흐르는 야래향. 그것은 서무영이 십 오년 동안 안기었던 둥지의 향기이고, 서 무영의 고향이요, 안식처인 어머니의 품에서 흐르는 체취였다.
"여보! 드세요.....무영이도......"
"................."
궁 단향의 자애롭고 고운 시선이 두 남자에게 분분히 날아든다. 서 진탁(舒進卓)이 두 손에 찻잔을 받쳐 든다. 서 무영(舒霧影)도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침묵 속에 단지 마음과 눈빛만으로 마주하며 차를 마신다. 아니 아내와 어머니의 체취를 만끽한다.
모진 역경과 고독을 마지막 음미하듯이 오직 느낌만으로 그들은 차를 마신다. 그들은 차 한 잔을 마치, 전장으로 떠나는 무사의 마지막 술잔처럼 소중하게 마셨다. 서 진탁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무영아! 마음의 준비는 되었느냐?"
"네!"
부모들의 심사숙고한 분위기에 눌려 서무영도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제.... 이제 마지막 윤회역근대승공을 시전하기 전에 네게 할 말이 있단다. 십대의 선조님들로부터 이 순간까지 고난과 고독 속에서 존재하기 위한 이유이기도 한단다."
"네. 심혈을 다해 경청하겠습니다."
서 무영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서진탁의 눈동자 속에 눈물이 맺힌다. 남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궁 단향은 잘 안다. 궁 단향의 눈은 햇살을 먹음은 하얀 눈 속의 설국(雪菊)을 닮았다. 설국에서 눈물이 흘러 봉옥을 촉촉이 적신다. 서 진탁의 말은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아버지도, 조부의 조부도....... 너를 위해 살아왔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고 오직 이 시간을 위해 살아야만 했던 업보를 타고난 가문이란다. 삼백 삼십 년 전 무림에는 하나의 무림 종파 가솔이 모두 멸살 당하는 엄청난 비사가 있었단다."
"음........!"
서 무영은 서 진탁의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서언(序言)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 뱉었다.
"그 당시 사천성(四川省), 연화성궁의 소 가주 백골마인(白骨魔人) 설 무혁(渫武赫)이라는 젊은 협객이 있었다. 설 무혁의 가친이며 궁주였던 옥룡신검(玉龍神劍) 설 구경(渫球境)은 상고시대의 제왕검형(帝王劍形)이라는 상승무공비급을 얻는 기연이 있었다. 그것을 자신의 아들에게 주었고, 설 무혁은 타고난 재질과 골격으로 궁주보다도 더 비상한 내공과 무공을 이룰 수 있었단다. 가히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무신의 지경이었지......."
"하......!"
서 무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신의 지경이라니. 무림인이 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서 진탁으로부터 가히 짐작할 수 없는 무림비사가 흘러 나왔다.
백골마인이 누구인가. 흉악무도한 마도인이라는 이유로 전 무림이 그를 상대로 대적했던 무인이 아닌가. 내용인즉 그는 결코 정도를 걷는 젊은 협객이었을 뿐이었다.
당시 연화성궁은 외부 무림과는 거의 내통이 없는 인(仁)과 의(義)를 숭고하게 여기는 독보적인 혈족으로 이루어진 무림종파였다. 그런데 설 무혁이 중원의 경험을 얻으려 유람 중에 곤륜의 호법 금안천군(錦顔天君) 위패웅(魏覇雄)과 사소한 싸움이 있었다.
위패웅은 남궁세가의 소 보주 남궁보(南宮寶), 뇌황궁의 수제자 화령신풍(畵嶺神風)과 함께 등천삼룡(登天三龍)이란 별호로 중원무림의 삼잠룡(三潛龍)이었다. 이 싸움에서 위패웅은 상처를 입고 절치부심하였다. 며칠 후 다시 등천삼룡 삼인이 설 무혁에게 협공으로 보복을 가해왔다.
무림에 경험이 없었던 설 무혁은 이 일이 더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들에게 사과를 했으나 등천삼룡은 살수를 펼쳐서 설 무혁이 내상을 입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설 무혁도 살수를 펼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제왕검형 단 십 초식에 등천삼룡은 피를 뿌리고 시신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중원무림에 벌집을 건드린 결과가 될 줄은 몰랐다. 연화성궁을 업신여기던 곤륜, 남궁세가, 뇌왕궁이 연화성궁이 있는 태산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삼백이 넘는 사상자만 남기고 돌아갔다. 그만큼 베일에 감추어졌던 연화성궁의 무공도 높았지만, 설 무혁의 제왕검형(帝王劍形)이라는 상승무공은 그 깊이를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은 연화성궁이 우월감에 먹칠을 하게 된 정통성을 내세우는 강호 무림종파들의 공적이 되었다. 무림 절대강자를 꿈꾸는 종파들의 연합맹은 협공을 펼쳐 공격해 들어왔고 연화성궁은 멸궁이 되는 사태가 되고 말았다. 이후 세인들은 이 참사를 "연화곡(蓮花谷)의 변(變)"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큰 시간이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끝낸 서 진탁이 긴 한숨을 내 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무영아.....!"
"네~!"
"너는 연화성궁 설(渫)가 가문(家門)의 십대 손(孫)이란다...."
"그럼.....!?"
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의 머리가 갈기처럼 곤두섰다. 서 진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단다. 너의 성은 서(舒)씨가 아니라 설 무혁의 후손인 설(渫)이란다..."
".....!?"
(아! 이런 기막힌 비사가 우리 가문에 있었던가..?)
무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아버지 망을 경청했다. 서 진탁이 아닌 설 진탁(渫進卓)의 말은 계속되었다.
"너의 선조이시고 그 당시 궁주이셨던 옥령신검께서는 후일을 도모하기위해서 내상에 상처를 입은 영식(令息) 설무혁을 은밀히 도피시켰단다. 그리고는 기연으로 얻게 된 윤회역근대승공(輪廻逆筋坮承功)비급을 주면서 이것이 완성되는 십대 후손이 우리가문의 원한을… 업보를 풀어 달라고 하셨단다. 그 후 우리 선조들은 가업을 달성하려고 생사를 넘나드는 많은 수모를 당해야 했단다......."
그렇다! 원한(怨恨).
억겁이 지나도 잊지 못할 피맺힌 원한 때문이었다. 설 무혁은 내상을 입은 몸을 은거하여 부친의 유언대로 윤회역근대승공의 비급을 수련하고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그 당시 대 참살에 참여하였던 강호 문파는 시신을 찾지 못한 설 무혁을 혈안이 되어 찾았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설가 후손의 흔적에 상금을 내걸기도 했다.
은연중 설가 후손이 윤회역근대승법(輪廻逆筋坮承法)을 연마한다는 소문이 났다. 그 소문이 한 입 건너 두 입 건너 소문이 나자 그들은 분노했다. 만약 그 결과에 탄생된 후손이 무공을 익힌다면 강호무림은 그 아래 굴복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다. 강호무림은 추적대를 결성하여 설가의 후손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으드득...."
설 무영(渫霧影)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의 안색이 분노와 증오로 창백하게 변했다.
(아! 그래서 우리 가문의 선조들이 그런 고통 속에 생을 마쳐야했구나....! 불쌍하신 분들.....)
설 무영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었고, 살수를 피해 살아야했던 선조를 대신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가문의 원한을 갚아야하는 후손으로 태어난 것이었다.
"앉아라! 앉아서 운기조식 하거라. 이제 마지막 윤회역근대승공(輪廻逆筋坮承功)을 시전하면 너는 결과에 따라서 예측불허의 내공을 갖게 된다. 체질과 능력에 따라 어떠한 전대미문의 내공과 불사지체가 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은 운명에 달렸다."
"..........!"
설 무영(渫霧影)이 운기 조식에 들어갔다. 설 진탁(渫進卓)의 말이 계속해서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영아 내일 아침에 떠나라. 요즈음 강호의 동태가 이상한 것을 알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그들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비밀추적대를 결성하여 추적에 들어갔고 우리의 신원이 들어난 것 같다. 다른 곳으로 주거를 옮기려 해도 너의 마지막 윤회역근대승공의 마지막 운천(運天)을 끝내야 하겠기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
"그리고 이것을 줄 테니 장안성(長安城)의 불망객(不忘客)을 찾아가 보여라. 불망객(不忘客)은 아비가 고서를 구하느라 강호를 유람 중에 알게 되어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란다. 연화령환(蓮花令環)을 보이면 묵계가 있어 너의 무공 수련에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최강자가 되기 전에 강호에 나와서는 절대 안 된다."
설 진탁은 중후한 말소리와 함께 자색 빛이 은은한 반지를 설 무영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연화령환(蓮花令環)!
옛 연화성궁의 화려함과 죽어간 선조들의 넋을 대변하는 증표이자 조사의 신표였다. 그들은 상의를 벗고 마주 앉아 앞머리를 올리고 영웅건을 질끈 매었다.
오! 그들의 이마에는 붉은 반점이 피어 있었다. 그렇다! 윤회역근대승공(輪廻逆筋坮承功)을 연마해서 나타나는 도화(桃花)모양의 붉은 상흔(像痕)!
그들은 상대방의 손을 마주대고 앉아 시전에 들어갔다. 잠시 후, 설 진탁(渫進卓)의 이마에서는 땀이 솟고, 설무경(渫霧影)의 온몸의 모공에서 흰 서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우드득......."
두 사람의 뼈가 늘어나는 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핏줄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츠 으으으.......!
설 무영의 모공에서부터 흰 서기가 오색으로 바뀌어 올랐다. 줄기줄기 뻗쳐 나온 서기가 퍼져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의 이마에 매화가 시뻘건 빛을 발했다. 정말 경이로운 일이 벌어졌다. 오색서기가 무영의 전신 삼백육십오 개의 경혈을 돌아 기경팔맥을 마구 휘젓고 다녔다. 핏줄과 근육이 용트림을 했다. 그의 골격(骨格)이 마구 축소 확대를 반복한다.
"우 드드...득!"
뼈마디가 마구 터져 나가는 소리가 화산이 폭발하는 듯하였다. 설 무영은 내장과 기맥, 정맥이 불덩이 같이 달아오르는 충격을 견디고 있다. 어느 초식보다도 참기 힘들었다. 꺼져가는 의식을 윤회역근대승공의 구결을 뇌리에 떠 올리며 간신히 지탱하고 있다.
"으으으....."
참다못해 설 무영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고통의 신음.
"너는 이제 우리 일가의 대망이자 원혼이 되는 것이다.!"
설 진탁이 온통 땀범벅이 된 체 와락! 고함을 질렀다. 설 무영(渫霧影)이 기진하여 의식을 잃을까 두려운 탓이다
그의 몸은 삼백 삽 십여 년의 세월, 십대 후손들의 원한과 분노의 밑거름으로 탄생되는 새로운 몸이 되는 것이다. 한 식경이 흐르고 설 무영에게 서렸던 오색 서기가 백회혈로 스며들었다. 그의 안색이 평온해지면서 그의 표정은 태동시의 태아처럼 천진한 모습으로 변했다.
이제 설 무영은 고갈을 모르는 체 끊임없는 진기의 지체, 죽는 순간까지 임독양맥이 영원히 막히지 않는 천혜의 신력을 지닌 무한내공(無限內功), 불사지체가 된 것이다. 설 무영과 마주한 손바닥을 떼어낸 설 진탁의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도 설 무영 못지않은 진기를 소모한 탓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며 말하였다.
"앞으로 운공을 게을리 하지 마라. 다른 무공과는 달라서 윤회역근대승공으로 꾸준히 운기조식을 하면 일정한 량만큼의 내공을 끊임없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운공을 마치면 이 책자를 보아라. 내일 아침에 아비에게 오면 연화령환(蓮花令環)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설 진탁은 원탁위에 책자를 내려놓고 연공실을 빠져 나갔다. 진력이 쇄잔 해진 설 무영은 누운자세(臥身)에서 무상무념(無想無念)에 들어 운기조식을 시작하였다. 설 무영의 이마에 있는 매화의 상흔(像痕)에서 다시 하얀 운무가 피어올랐다.
인간에게 기(氣)라는 것이 있다. 기는 모든 형태의 생명과 모든 우주 물질의 절대적인 근원이다. 기는 모든 생명기관과 행동의식을 지탱해주고, 이것을 적응시키는 능력을 익히면 기의 강(强) 약(弱) 고(高) 저(低)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조절 할 수 있다.
그 방법을 무림인들은 내공심법(內攻心法)이라 하고, 그 수단을 운기조식(運氣調息)이라 한다. 운기조식이란 토납법(吐納法) 또는 호흡법(呼吸法)이라 한다. 대개는 가부좌(跏趺坐)하고 호홉기관을 통하여 운기조식 하지만, 윤회역근대승공의 운기조식은 어떤 자세에서도 할 수 있고, 모든 모공(毛孔)과 호흡기관을 통하여 할 수 있다.
윤회역근대승공은 일반 무인들과 같이 기해혈(氣海穴)을 비롯한 다섯 천혈에서 수직하여 명문혈(命門穴)등 중혈을 거쳐 단전에 모아 용천혈(湧泉穴)에 이르게 하기도 하고, 역행(逆行)하여 천혈과 중혈, 용천으로 각기 나누어 역행시키기도 한다.
"곧 내가 우주(宇宙)요, 우주가 곧 나(自我)이니, 나 자신을 둘러싼 원(圓)안에 나는 점(點)이요, 점이 곧 원이요, 원은 곧 우주요 내 자신이니라."
설 무영은 두시각 동안의 운공삼매(運功三昧)에 빠졌다.
"휴우......!"
설 무영을 둘러쌓던 백색 운무가 그의 매화상흔(梅花傷痕)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그는 눈을 뜨고 부친이 주고 간 책자를 집어 들었다.
무림비연록(武林秘然錄).
그것은 무림역대 전후의 비사와 , 그리고 각 종파의 인물, 무공 명칭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호…! 이런 것이.......!?"
설 무영은 무공의 실록에 관한 것은 처음 접하기에 호기심이 발동 하였다. 한시진도 안 되서 그의 지혜가 막대한 머릿속에는 모든 것이 낱낱이 기억되었다.
아침이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화창한 날씨.
산봉우리 위로 구름이 높게 걸린 하늘에는 수정이 깔린 듯 맑고 푸르다.
설 무영은 아직도 연공실에서 눈을 감은 채 좌중하고 있었다.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눈을 감고 있지만 깊은 생각에 잠긴 것이다.
이제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아버님의 말씀대로라면 자금성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우선인데........
강호에 경험이 없는 그이지만 가문의 피 맺힌 원한을 풀겠다는 신념이 가득하다. 하루 전과는 다르다. 천지현관의 지체이며, 무림비연록으로 몰랐던 강호 무림 전후의 상황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아직도 그가 갈 길은 멀지만, 조상 대대로 인내하고 살아온 인고의 세월에 비하면 비길 바가 안 된다고 설 무영(渫霧影)은 생각했다.
"............"
지하 연공실 입구 평석 밖에서 무엇인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비명소리와 함께 소란스런 소리.......! 아버님이 하셨던 말이 문뜩 떠오른다.
(요즈음 강호의 동태가 이상한 것을 알고 있다.......)
설 무영은 불안한 생각이 떠올리자 부리나케 입구로 다가갔다. 밖으로부터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급하게 입구의 평석을 밀어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헉!...."
그는 경악하고 말았다. 눈앞에 들어오는 광경은 기겁을 할 노릇이었다. 그와 등을 지고 서있는 황포괴인과 흑포괴인. 사색이 되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어머니 궁 단향(弓端香).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는 설 진탁(渫進卓)은 흑포괴인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채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 설 진탁의 이마에 홍화반점(紅花斑點)이 선연하다.
"하하하.....! 이마에 반점을 보니 의공을 연마한다는 설가 족속! 잘도 숨어 있었구나! 너희 버러지 같은 것들이 뛰어 봐야 벼룩이지. 우리 눈과 귀는 중원 어디에도 있는 걸 몰랐느냐.......!"
"네놈들…! 원혼이 되어서라도 네놈들의 내장과 피를 갈아 먹을 거다......."
고통스런 표정으로 설 진탁이 쥐어짜는 비명을 질렀다.
"그래! 그 원귀마저 내가 가루로 만들어 주마!."
흑포괴인이 설 진탁의 가슴을 걷어차자, 그는 피를 한 모금 울컥 뱉어내며 나동그라졌다. 그 광경을 보던 설 무영(渫霧影)의 눈에 독기가 올랐다. 설 무영은 평석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느닷없이 달려가 흑포괴인의 등을 향해 마구 주먹질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퍼퍼 벅! 퍽!"
"어......!"
등지고 있던 흑포괴인은 불의의 공격에 어안이 벙벙하여 쳐다봤다. 뜻밖으로 약관인 설 무영의 공격에 의한 충격이 켰던 것이다. 설 무영이 무공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설 무영의 주먹은 이미 그 자신도 가히 짐작할 수 없는 내공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당황스런 흑포괴인이 경이의 표정으로 설 무영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어린놈이 손이 매섭네...."
"퍽! 우당탕...!"
설 무영은 흑포괴인이 발산한 한 번의 장력에 털썩!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안 돼.....!"
설 진탁과 궁 단향의 외마디 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흑포괴인이 설 무영의 멱살을 잡아들었다.
"쥐새끼 같은 놈......."
설 무영을 바라보는 흑포괴인은 좌안(左眼)이 없는 외눈박이였다. 눈매가 날카롭게 찢어져 올라간 우안(右眼) 뿐이었다. 한쪽의 우안에서 마기(魔氣)가 뿜어져 나왔다. 설 무영은 치를 떨며 계속 흑포괴인의 가슴을 향해 연달아 두 주먹을 내 지르고 있었다.
"쬐 만한 놈이....!"
흑포괴인의 두터운 손바닥이 바람을 갈랐다.
"퍼....억!"
"어...억!"
설 무영의 뺨이 붉게 물들고. 입에서 피가 터졌다.
"안 돼~! 그 아이만은…! 제발........"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애절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설 진탁은 온 몸의 뼈가 으스러진 상태이고 한쪽 구석의 궁 단향은 충격에 거의 실신 상태였다. 흑포괴인이 설 무영의 기혈을 누르고는 번쩍 들어 구석으로 팽개쳤다.
"쿠 당탕.....쿵!"
"커~억!"
설 무영의 몸이 짐짝같이 나동그라졌다. 또 한 차례 입에서 왈칵 피를 토하는 설 무영의 눈동자는 분노의 눈동자로 이글거렸다.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서 저 괴인들을 어떻게든 죽여야 한다.)
허지만 기혈이 잡힌 그의 몸은 꼼짝할 수도 없었다.
".......!?"
흑포괴인이 설 무영에게 다가와서 다시 간단하게 혈도를 누르면서 자세히 드려다 봤다.
"그 놈.........! 자세히 보니 천세의 용골이네. 흠.....! 죽이기는 아까워. 여보 게 아우!.."
"네...."
황포괴인이 다가와서 흑포괴인과 설 무영을 번갈아 봤다.
"이 애송이! 아까운데......."
황포괴인이 음흉하게 히죽거리고 미소를 띠었다. 혈도가 잡힌 설 무영은 꼼짝할 수도 없었다.
"아! 보기 드문 골격......."
"이 놈을 데려가서 수제자로 키울까?"
"범의 새끼를 키워서 후환을 남기려고요.......?"
흑포괴인이 앙천대소를 하였다.
"하하하.......! 뇌멸몽윤귀공(腦滅夢輪鬼功)이면?"
"으흐흐.....! 그럼 형님은 변황에........."
"그래!"
흑포괴인이 회심의 미소를 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뇌멸몽윤귀공(腦滅夢輪鬼功).
이미 사라진 변황의 사파 무공. 사람의 기억을 상실시키고 전혀 새로운 기억의 인간을 탄생시킨다는 사악한 무공을 그들은 말하는가!
"형님! 그러면 저 것들을 빨리 처리하고 갑시다."
흑포괴인이 설 진탁을 향해 돌아섰다.
"이놈들! 너희 놈들 틀림없이 악마의 저주를 받으리라...."
"하하하.......! 너희들은 이제 영원히 눈을 감아 줘야겠어. 무림의 일급 제거 대상인 너희들을 제거함으로서 본 어른의 함자가 강호에 또 한 번 명성을 날릴 거야! 크크크.......!"
흑포괴인이 설 진탁을 향해 쌍 장을 들었다. 그의 두 손바닥에 붉은 운무가 피어 나왔다. 붉은 운무(赤雲)! 설 무영은 괴기스런 적운에 몸서리쳤다.
"쏴아아..펑!"
붉은 운무가 설 진탁(渫進卓)의 심장을 향해 쏟아져 갔다.
"으 억.....!"
"아버님...!"
"여보!....커억!"
설 진탁이 가슴이 뻥 뚫리며 걸레처럼 구석에 날아가 박혀 버렸다.
"쿠 당탕.....!"
설 진탁이 날아간 방향으로 선혈이 흥건하게 떨어져 이어져 있었다. 그는 형태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냥 핏덩어리 그 자체였다. 동시에 설 무영과 궁 단향의 단발마의 비명 소리가 터졌다.
"크....윽!......"
궁 단향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실신을 해 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있어야 하는 설 무영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흐흐흑....흑....흑!"
궁 단향(弓端香)에게 다가가던 황포괴인의 눈빛이 음탕하게 변했다. 그녀의 뽀얀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잡아 젖혔다.
"형님! 이 계집은 아우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요...."
"......!?"
흑포괴인이 입술이 비틀어지면서 사악한 미소를 흘린다.
"후후…! 알았네. 빨리 해 치우게나........"
"형님이 먼저...!?"
"아니야. 이 형은 양마지공을 연마하는 중이라서 음은 멀리해야하네."
"형님의 은공은 하늘같습니다......."
"쩝.......!"
"크크크..... 고것, 사람 미치게 하네."
음흉한 눈빛을 번뜩이는 황포괴인이 기절해 쓰러져 있는 궁 단향에게 다가갔다.------------------------
윤회역근대승공은 당대에 이룰 수 없는 것이기에 결코 사술도 아니고, 검(劍)과 도(刀) 등 무기를 다루거나 상대를 제압하는 무공(武功)이 아니다. 무한내공을 만드는 무공이고, 오직 근(根), 골(骨), 혈(血)만을 정화시켜 불사지체로 만드는 의공(醫功)이되 신공(神功)이라 하였다.
오호(嗚呼)! 이런 비공(泌功)이 있었던가!
무가의 후손인 그들은 삼백 여년을 내려오면서 상대를 제압하는 무공을 가까이 해 본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 후손의 생활은 단순할 수밖에 없었다. 윤회역근대승공에 억매여 일생을 살아가고, 남의 이목을 피해 은거 생활을 해야 하기에 자연히 글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었다.
무영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도, 조부도, 증조부도, 선조대대로 그랬다.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유훈(遺訓)을 지키기 위해서도 그랬다.
유사무사(有事無死), 어떤 일이 있어도 죽어선 안 된다!
가사무전(家事無傳), 집안 내력을 알리지 마라!
유청무심(有聽無心), 들어도 들은 척 마라!
유구무언(有口無言),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마라!
무공무연(武功無練), 어떤 무공도 배우지 말고 아는 척도 마라!
그래서 더욱 천지현관(天地玄關)의 지체인 서무영(舒霧影)은 책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서 무영은 역사(歷史),의학(醫學),진법(陣法),역(易)을 비롯해 서(書),음(音),가(歌),화(畵)의 예(藝)와 음양의 합궁술 등 잡기(雜技)를 배웠다.
그는 언문(言文)에도 능통하여 고어(古語), 범어(梵語), 과두문( ?文), 갑골문(甲骨文), 몽골어(蒙古語), 고대법문(古代法文)등 그가 이해치 못하는 책자가 없었다.
"앉아라!"
장중한 서진탁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긴장한 탓일까.
그들은 작은 원탁을 중심으로 앉았다. 한 가닥 미풍이 흐른다. 차를 따르는 궁 단향(弓端香)에게서 흐르는 야래향. 그것은 서무영이 십 오년 동안 안기었던 둥지의 향기이고, 서 무영의 고향이요, 안식처인 어머니의 품에서 흐르는 체취였다.
"여보! 드세요.....무영이도......"
"................."
궁 단향의 자애롭고 고운 시선이 두 남자에게 분분히 날아든다. 서 진탁(舒進卓)이 두 손에 찻잔을 받쳐 든다. 서 무영(舒霧影)도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침묵 속에 단지 마음과 눈빛만으로 마주하며 차를 마신다. 아니 아내와 어머니의 체취를 만끽한다.
모진 역경과 고독을 마지막 음미하듯이 오직 느낌만으로 그들은 차를 마신다. 그들은 차 한 잔을 마치, 전장으로 떠나는 무사의 마지막 술잔처럼 소중하게 마셨다. 서 진탁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무영아! 마음의 준비는 되었느냐?"
"네!"
부모들의 심사숙고한 분위기에 눌려 서무영도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제.... 이제 마지막 윤회역근대승공을 시전하기 전에 네게 할 말이 있단다. 십대의 선조님들로부터 이 순간까지 고난과 고독 속에서 존재하기 위한 이유이기도 한단다."
"네. 심혈을 다해 경청하겠습니다."
서 무영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서진탁의 눈동자 속에 눈물이 맺힌다. 남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궁 단향은 잘 안다. 궁 단향의 눈은 햇살을 먹음은 하얀 눈 속의 설국(雪菊)을 닮았다. 설국에서 눈물이 흘러 봉옥을 촉촉이 적신다. 서 진탁의 말은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아버지도, 조부의 조부도....... 너를 위해 살아왔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고 오직 이 시간을 위해 살아야만 했던 업보를 타고난 가문이란다. 삼백 삼십 년 전 무림에는 하나의 무림 종파 가솔이 모두 멸살 당하는 엄청난 비사가 있었단다."
"음........!"
서 무영은 서 진탁의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서언(序言)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 뱉었다.
"그 당시 사천성(四川省), 연화성궁의 소 가주 백골마인(白骨魔人) 설 무혁(渫武赫)이라는 젊은 협객이 있었다. 설 무혁의 가친이며 궁주였던 옥룡신검(玉龍神劍) 설 구경(渫球境)은 상고시대의 제왕검형(帝王劍形)이라는 상승무공비급을 얻는 기연이 있었다. 그것을 자신의 아들에게 주었고, 설 무혁은 타고난 재질과 골격으로 궁주보다도 더 비상한 내공과 무공을 이룰 수 있었단다. 가히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무신의 지경이었지......."
"하......!"
서 무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신의 지경이라니. 무림인이 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서 진탁으로부터 가히 짐작할 수 없는 무림비사가 흘러 나왔다.
백골마인이 누구인가. 흉악무도한 마도인이라는 이유로 전 무림이 그를 상대로 대적했던 무인이 아닌가. 내용인즉 그는 결코 정도를 걷는 젊은 협객이었을 뿐이었다.
당시 연화성궁은 외부 무림과는 거의 내통이 없는 인(仁)과 의(義)를 숭고하게 여기는 독보적인 혈족으로 이루어진 무림종파였다. 그런데 설 무혁이 중원의 경험을 얻으려 유람 중에 곤륜의 호법 금안천군(錦顔天君) 위패웅(魏覇雄)과 사소한 싸움이 있었다.
위패웅은 남궁세가의 소 보주 남궁보(南宮寶), 뇌황궁의 수제자 화령신풍(畵嶺神風)과 함께 등천삼룡(登天三龍)이란 별호로 중원무림의 삼잠룡(三潛龍)이었다. 이 싸움에서 위패웅은 상처를 입고 절치부심하였다. 며칠 후 다시 등천삼룡 삼인이 설 무혁에게 협공으로 보복을 가해왔다.
무림에 경험이 없었던 설 무혁은 이 일이 더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들에게 사과를 했으나 등천삼룡은 살수를 펼쳐서 설 무혁이 내상을 입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설 무혁도 살수를 펼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제왕검형 단 십 초식에 등천삼룡은 피를 뿌리고 시신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중원무림에 벌집을 건드린 결과가 될 줄은 몰랐다. 연화성궁을 업신여기던 곤륜, 남궁세가, 뇌왕궁이 연화성궁이 있는 태산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삼백이 넘는 사상자만 남기고 돌아갔다. 그만큼 베일에 감추어졌던 연화성궁의 무공도 높았지만, 설 무혁의 제왕검형(帝王劍形)이라는 상승무공은 그 깊이를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은 연화성궁이 우월감에 먹칠을 하게 된 정통성을 내세우는 강호 무림종파들의 공적이 되었다. 무림 절대강자를 꿈꾸는 종파들의 연합맹은 협공을 펼쳐 공격해 들어왔고 연화성궁은 멸궁이 되는 사태가 되고 말았다. 이후 세인들은 이 참사를 "연화곡(蓮花谷)의 변(變)"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큰 시간이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끝낸 서 진탁이 긴 한숨을 내 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무영아.....!"
"네~!"
"너는 연화성궁 설(渫)가 가문(家門)의 십대 손(孫)이란다...."
"그럼.....!?"
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의 머리가 갈기처럼 곤두섰다. 서 진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단다. 너의 성은 서(舒)씨가 아니라 설 무혁의 후손인 설(渫)이란다..."
".....!?"
(아! 이런 기막힌 비사가 우리 가문에 있었던가..?)
무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아버지 망을 경청했다. 서 진탁이 아닌 설 진탁(渫進卓)의 말은 계속되었다.
"너의 선조이시고 그 당시 궁주이셨던 옥령신검께서는 후일을 도모하기위해서 내상에 상처를 입은 영식(令息) 설무혁을 은밀히 도피시켰단다. 그리고는 기연으로 얻게 된 윤회역근대승공(輪廻逆筋坮承功)비급을 주면서 이것이 완성되는 십대 후손이 우리가문의 원한을… 업보를 풀어 달라고 하셨단다. 그 후 우리 선조들은 가업을 달성하려고 생사를 넘나드는 많은 수모를 당해야 했단다......."
그렇다! 원한(怨恨).
억겁이 지나도 잊지 못할 피맺힌 원한 때문이었다. 설 무혁은 내상을 입은 몸을 은거하여 부친의 유언대로 윤회역근대승공의 비급을 수련하고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그 당시 대 참살에 참여하였던 강호 문파는 시신을 찾지 못한 설 무혁을 혈안이 되어 찾았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설가 후손의 흔적에 상금을 내걸기도 했다.
은연중 설가 후손이 윤회역근대승법(輪廻逆筋坮承法)을 연마한다는 소문이 났다. 그 소문이 한 입 건너 두 입 건너 소문이 나자 그들은 분노했다. 만약 그 결과에 탄생된 후손이 무공을 익힌다면 강호무림은 그 아래 굴복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다. 강호무림은 추적대를 결성하여 설가의 후손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으드득...."
설 무영(渫霧影)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의 안색이 분노와 증오로 창백하게 변했다.
(아! 그래서 우리 가문의 선조들이 그런 고통 속에 생을 마쳐야했구나....! 불쌍하신 분들.....)
설 무영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었고, 살수를 피해 살아야했던 선조를 대신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가문의 원한을 갚아야하는 후손으로 태어난 것이었다.
"앉아라! 앉아서 운기조식 하거라. 이제 마지막 윤회역근대승공(輪廻逆筋坮承功)을 시전하면 너는 결과에 따라서 예측불허의 내공을 갖게 된다. 체질과 능력에 따라 어떠한 전대미문의 내공과 불사지체가 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은 운명에 달렸다."
"..........!"
설 무영(渫霧影)이 운기 조식에 들어갔다. 설 진탁(渫進卓)의 말이 계속해서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영아 내일 아침에 떠나라. 요즈음 강호의 동태가 이상한 것을 알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그들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비밀추적대를 결성하여 추적에 들어갔고 우리의 신원이 들어난 것 같다. 다른 곳으로 주거를 옮기려 해도 너의 마지막 윤회역근대승공의 마지막 운천(運天)을 끝내야 하겠기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
"그리고 이것을 줄 테니 장안성(長安城)의 불망객(不忘客)을 찾아가 보여라. 불망객(不忘客)은 아비가 고서를 구하느라 강호를 유람 중에 알게 되어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란다. 연화령환(蓮花令環)을 보이면 묵계가 있어 너의 무공 수련에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최강자가 되기 전에 강호에 나와서는 절대 안 된다."
설 진탁은 중후한 말소리와 함께 자색 빛이 은은한 반지를 설 무영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연화령환(蓮花令環)!
옛 연화성궁의 화려함과 죽어간 선조들의 넋을 대변하는 증표이자 조사의 신표였다. 그들은 상의를 벗고 마주 앉아 앞머리를 올리고 영웅건을 질끈 매었다.
오! 그들의 이마에는 붉은 반점이 피어 있었다. 그렇다! 윤회역근대승공(輪廻逆筋坮承功)을 연마해서 나타나는 도화(桃花)모양의 붉은 상흔(像痕)!
그들은 상대방의 손을 마주대고 앉아 시전에 들어갔다. 잠시 후, 설 진탁(渫進卓)의 이마에서는 땀이 솟고, 설무경(渫霧影)의 온몸의 모공에서 흰 서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우드득......."
두 사람의 뼈가 늘어나는 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핏줄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츠 으으으.......!
설 무영의 모공에서부터 흰 서기가 오색으로 바뀌어 올랐다. 줄기줄기 뻗쳐 나온 서기가 퍼져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의 이마에 매화가 시뻘건 빛을 발했다. 정말 경이로운 일이 벌어졌다. 오색서기가 무영의 전신 삼백육십오 개의 경혈을 돌아 기경팔맥을 마구 휘젓고 다녔다. 핏줄과 근육이 용트림을 했다. 그의 골격(骨格)이 마구 축소 확대를 반복한다.
"우 드드...득!"
뼈마디가 마구 터져 나가는 소리가 화산이 폭발하는 듯하였다. 설 무영은 내장과 기맥, 정맥이 불덩이 같이 달아오르는 충격을 견디고 있다. 어느 초식보다도 참기 힘들었다. 꺼져가는 의식을 윤회역근대승공의 구결을 뇌리에 떠 올리며 간신히 지탱하고 있다.
"으으으....."
참다못해 설 무영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고통의 신음.
"너는 이제 우리 일가의 대망이자 원혼이 되는 것이다.!"
설 진탁이 온통 땀범벅이 된 체 와락! 고함을 질렀다. 설 무영(渫霧影)이 기진하여 의식을 잃을까 두려운 탓이다
그의 몸은 삼백 삽 십여 년의 세월, 십대 후손들의 원한과 분노의 밑거름으로 탄생되는 새로운 몸이 되는 것이다. 한 식경이 흐르고 설 무영에게 서렸던 오색 서기가 백회혈로 스며들었다. 그의 안색이 평온해지면서 그의 표정은 태동시의 태아처럼 천진한 모습으로 변했다.
이제 설 무영은 고갈을 모르는 체 끊임없는 진기의 지체, 죽는 순간까지 임독양맥이 영원히 막히지 않는 천혜의 신력을 지닌 무한내공(無限內功), 불사지체가 된 것이다. 설 무영과 마주한 손바닥을 떼어낸 설 진탁의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도 설 무영 못지않은 진기를 소모한 탓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며 말하였다.
"앞으로 운공을 게을리 하지 마라. 다른 무공과는 달라서 윤회역근대승공으로 꾸준히 운기조식을 하면 일정한 량만큼의 내공을 끊임없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운공을 마치면 이 책자를 보아라. 내일 아침에 아비에게 오면 연화령환(蓮花令環)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설 진탁은 원탁위에 책자를 내려놓고 연공실을 빠져 나갔다. 진력이 쇄잔 해진 설 무영은 누운자세(臥身)에서 무상무념(無想無念)에 들어 운기조식을 시작하였다. 설 무영의 이마에 있는 매화의 상흔(像痕)에서 다시 하얀 운무가 피어올랐다.
인간에게 기(氣)라는 것이 있다. 기는 모든 형태의 생명과 모든 우주 물질의 절대적인 근원이다. 기는 모든 생명기관과 행동의식을 지탱해주고, 이것을 적응시키는 능력을 익히면 기의 강(强) 약(弱) 고(高) 저(低)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조절 할 수 있다.
그 방법을 무림인들은 내공심법(內攻心法)이라 하고, 그 수단을 운기조식(運氣調息)이라 한다. 운기조식이란 토납법(吐納法) 또는 호흡법(呼吸法)이라 한다. 대개는 가부좌(跏趺坐)하고 호홉기관을 통하여 운기조식 하지만, 윤회역근대승공의 운기조식은 어떤 자세에서도 할 수 있고, 모든 모공(毛孔)과 호흡기관을 통하여 할 수 있다.
윤회역근대승공은 일반 무인들과 같이 기해혈(氣海穴)을 비롯한 다섯 천혈에서 수직하여 명문혈(命門穴)등 중혈을 거쳐 단전에 모아 용천혈(湧泉穴)에 이르게 하기도 하고, 역행(逆行)하여 천혈과 중혈, 용천으로 각기 나누어 역행시키기도 한다.
"곧 내가 우주(宇宙)요, 우주가 곧 나(自我)이니, 나 자신을 둘러싼 원(圓)안에 나는 점(點)이요, 점이 곧 원이요, 원은 곧 우주요 내 자신이니라."
설 무영은 두시각 동안의 운공삼매(運功三昧)에 빠졌다.
"휴우......!"
설 무영을 둘러쌓던 백색 운무가 그의 매화상흔(梅花傷痕)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그는 눈을 뜨고 부친이 주고 간 책자를 집어 들었다.
무림비연록(武林秘然錄).
그것은 무림역대 전후의 비사와 , 그리고 각 종파의 인물, 무공 명칭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호…! 이런 것이.......!?"
설 무영은 무공의 실록에 관한 것은 처음 접하기에 호기심이 발동 하였다. 한시진도 안 되서 그의 지혜가 막대한 머릿속에는 모든 것이 낱낱이 기억되었다.
아침이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화창한 날씨.
산봉우리 위로 구름이 높게 걸린 하늘에는 수정이 깔린 듯 맑고 푸르다.
설 무영은 아직도 연공실에서 눈을 감은 채 좌중하고 있었다.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눈을 감고 있지만 깊은 생각에 잠긴 것이다.
이제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아버님의 말씀대로라면 자금성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우선인데........
강호에 경험이 없는 그이지만 가문의 피 맺힌 원한을 풀겠다는 신념이 가득하다. 하루 전과는 다르다. 천지현관의 지체이며, 무림비연록으로 몰랐던 강호 무림 전후의 상황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아직도 그가 갈 길은 멀지만, 조상 대대로 인내하고 살아온 인고의 세월에 비하면 비길 바가 안 된다고 설 무영(渫霧影)은 생각했다.
"............"
지하 연공실 입구 평석 밖에서 무엇인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비명소리와 함께 소란스런 소리.......! 아버님이 하셨던 말이 문뜩 떠오른다.
(요즈음 강호의 동태가 이상한 것을 알고 있다.......)
설 무영은 불안한 생각이 떠올리자 부리나케 입구로 다가갔다. 밖으로부터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급하게 입구의 평석을 밀어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헉!...."
그는 경악하고 말았다. 눈앞에 들어오는 광경은 기겁을 할 노릇이었다. 그와 등을 지고 서있는 황포괴인과 흑포괴인. 사색이 되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어머니 궁 단향(弓端香).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는 설 진탁(渫進卓)은 흑포괴인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채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 설 진탁의 이마에 홍화반점(紅花斑點)이 선연하다.
"하하하.....! 이마에 반점을 보니 의공을 연마한다는 설가 족속! 잘도 숨어 있었구나! 너희 버러지 같은 것들이 뛰어 봐야 벼룩이지. 우리 눈과 귀는 중원 어디에도 있는 걸 몰랐느냐.......!"
"네놈들…! 원혼이 되어서라도 네놈들의 내장과 피를 갈아 먹을 거다......."
고통스런 표정으로 설 진탁이 쥐어짜는 비명을 질렀다.
"그래! 그 원귀마저 내가 가루로 만들어 주마!."
흑포괴인이 설 진탁의 가슴을 걷어차자, 그는 피를 한 모금 울컥 뱉어내며 나동그라졌다. 그 광경을 보던 설 무영(渫霧影)의 눈에 독기가 올랐다. 설 무영은 평석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느닷없이 달려가 흑포괴인의 등을 향해 마구 주먹질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퍼퍼 벅! 퍽!"
"어......!"
등지고 있던 흑포괴인은 불의의 공격에 어안이 벙벙하여 쳐다봤다. 뜻밖으로 약관인 설 무영의 공격에 의한 충격이 켰던 것이다. 설 무영이 무공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설 무영의 주먹은 이미 그 자신도 가히 짐작할 수 없는 내공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당황스런 흑포괴인이 경이의 표정으로 설 무영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어린놈이 손이 매섭네...."
"퍽! 우당탕...!"
설 무영은 흑포괴인이 발산한 한 번의 장력에 털썩!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안 돼.....!"
설 진탁과 궁 단향의 외마디 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흑포괴인이 설 무영의 멱살을 잡아들었다.
"쥐새끼 같은 놈......."
설 무영을 바라보는 흑포괴인은 좌안(左眼)이 없는 외눈박이였다. 눈매가 날카롭게 찢어져 올라간 우안(右眼) 뿐이었다. 한쪽의 우안에서 마기(魔氣)가 뿜어져 나왔다. 설 무영은 치를 떨며 계속 흑포괴인의 가슴을 향해 연달아 두 주먹을 내 지르고 있었다.
"쬐 만한 놈이....!"
흑포괴인의 두터운 손바닥이 바람을 갈랐다.
"퍼....억!"
"어...억!"
설 무영의 뺨이 붉게 물들고. 입에서 피가 터졌다.
"안 돼~! 그 아이만은…! 제발........"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애절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설 진탁은 온 몸의 뼈가 으스러진 상태이고 한쪽 구석의 궁 단향은 충격에 거의 실신 상태였다. 흑포괴인이 설 무영의 기혈을 누르고는 번쩍 들어 구석으로 팽개쳤다.
"쿠 당탕.....쿵!"
"커~억!"
설 무영의 몸이 짐짝같이 나동그라졌다. 또 한 차례 입에서 왈칵 피를 토하는 설 무영의 눈동자는 분노의 눈동자로 이글거렸다.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서 저 괴인들을 어떻게든 죽여야 한다.)
허지만 기혈이 잡힌 그의 몸은 꼼짝할 수도 없었다.
".......!?"
흑포괴인이 설 무영에게 다가와서 다시 간단하게 혈도를 누르면서 자세히 드려다 봤다.
"그 놈.........! 자세히 보니 천세의 용골이네. 흠.....! 죽이기는 아까워. 여보 게 아우!.."
"네...."
황포괴인이 다가와서 흑포괴인과 설 무영을 번갈아 봤다.
"이 애송이! 아까운데......."
황포괴인이 음흉하게 히죽거리고 미소를 띠었다. 혈도가 잡힌 설 무영은 꼼짝할 수도 없었다.
"아! 보기 드문 골격......."
"이 놈을 데려가서 수제자로 키울까?"
"범의 새끼를 키워서 후환을 남기려고요.......?"
흑포괴인이 앙천대소를 하였다.
"하하하.......! 뇌멸몽윤귀공(腦滅夢輪鬼功)이면?"
"으흐흐.....! 그럼 형님은 변황에........."
"그래!"
흑포괴인이 회심의 미소를 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뇌멸몽윤귀공(腦滅夢輪鬼功).
이미 사라진 변황의 사파 무공. 사람의 기억을 상실시키고 전혀 새로운 기억의 인간을 탄생시킨다는 사악한 무공을 그들은 말하는가!
"형님! 그러면 저 것들을 빨리 처리하고 갑시다."
흑포괴인이 설 진탁을 향해 돌아섰다.
"이놈들! 너희 놈들 틀림없이 악마의 저주를 받으리라...."
"하하하.......! 너희들은 이제 영원히 눈을 감아 줘야겠어. 무림의 일급 제거 대상인 너희들을 제거함으로서 본 어른의 함자가 강호에 또 한 번 명성을 날릴 거야! 크크크.......!"
흑포괴인이 설 진탁을 향해 쌍 장을 들었다. 그의 두 손바닥에 붉은 운무가 피어 나왔다. 붉은 운무(赤雲)! 설 무영은 괴기스런 적운에 몸서리쳤다.
"쏴아아..펑!"
붉은 운무가 설 진탁(渫進卓)의 심장을 향해 쏟아져 갔다.
"으 억.....!"
"아버님...!"
"여보!....커억!"
설 진탁이 가슴이 뻥 뚫리며 걸레처럼 구석에 날아가 박혀 버렸다.
"쿠 당탕.....!"
설 진탁이 날아간 방향으로 선혈이 흥건하게 떨어져 이어져 있었다. 그는 형태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냥 핏덩어리 그 자체였다. 동시에 설 무영과 궁 단향의 단발마의 비명 소리가 터졌다.
"크....윽!......"
궁 단향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실신을 해 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있어야 하는 설 무영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흐흐흑....흑....흑!"
궁 단향(弓端香)에게 다가가던 황포괴인의 눈빛이 음탕하게 변했다. 그녀의 뽀얀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잡아 젖혔다.
"형님! 이 계집은 아우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요...."
"......!?"
흑포괴인이 입술이 비틀어지면서 사악한 미소를 흘린다.
"후후…! 알았네. 빨리 해 치우게나........"
"형님이 먼저...!?"
"아니야. 이 형은 양마지공을 연마하는 중이라서 음은 멀리해야하네."
"형님의 은공은 하늘같습니다......."
"쩝.......!"
"크크크..... 고것, 사람 미치게 하네."
음흉한 눈빛을 번뜩이는 황포괴인이 기절해 쓰러져 있는 궁 단향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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