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은원 속에 태어나 설 무영은 해결의 가능성을 알 수 없는 길을 가야한다. 하지만, 그 한(限)을 스스로의 가슴에 삭이고, 타인의 아픔을 위해 몸을 던지는 격정적인 인간애가 있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말보다는 마음과 행동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였다.
고독하고 자신의 속을 털어내지 못하고 삭여야하는 설 무영은 외롭지만, 풀어야할 한 때문에 외로울 여유가 없는 인간이다. 그는 혼자이지만 그에게는 만인을 포용할 수 있는 가슴과 군왕의 패도가 잠재해 있었다.
휘이익!
먼 사막을 달려온 한 가닥 삭풍(朔風)이 그의 옷깃을 날렸다. 겨울이 오려나보다.
"부군(夫君), 오라버니....!"
(후후! 부군…! 오라버니......?)
설 무영은 빙긋이 웃으며 하루미를 바라보았다. 겸연쩍은지 설 무영을 바라보는 하루미의 미소가 가득 담긴 봉목이 장난스럽다. 그녀는 항상 보조개를 드리운 눈웃음으로 가득하다.
"며칠만 더 있다 가면 안 돼.......?"
"........!"
(미안하구나.…! 미아~!)
설 무영은 대답대신 눈빛으로 대답한다. 이슬이 맺힌 하루미의 눈동자가 그를 향한다.
"미아는 심심해서 어떻게 해......?"
"..........!"
그녀를 바라보는 설 무영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유라천후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선다.
"언제라도 기다릴 것이니......."
"네…!"
사막의 지평선 끝에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설 무영의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태양이 걸려있다. 황포를 나부끼며 도인광이 설 무영에게 다가와 두 손을 모아 포권(包拳)을 하였다.
"일백의 정예군을 뽑았습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설 무영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그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도인광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아니오. 혼자가 편합니다."
"그러면 돌아가지…? 이 길로 가면 천황전의 지옥철타군을 만날 텐데......!"
하루미를 받아달라고 간청할 때 이미 각오한 일이건만, 설 무영의 안위에 조바심이 들어 하는 유라천후의 말이었다. 설 무영은 걱정스런 표정의 유라천후의 모습이 마치 어머니를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설 무영은 두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겪은 일이다. 많은 상대와 혈투를 할 때의 두려움은 끔찍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허지만, 훗날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돌아서서 도인광에게 부탁을 했다.
"음…! 그렇다면......! 가족과 무림에 연고가 없되 검, 도를 다루는 중원인으로 호연지기 다섯 명만 부탁하겠소!"
"복명(復命)…!"
도인광이 뒤로 물러나 군마 속으로 들어갔다. 군마 속으로 사라져 간지 오래지않아 도인광은 다섯 명의 회색 도포를 걸친 장한들을 데리고 왔다. 회색도포의 장한들이 그 앞에 부복하고, 도인광이 그들에 대한 내력을 밝혔다.
길정학(吉丁鶴), 27세.
검객(劍客). 화산파의 속가제자에서 퇴출된 자로 화산파에 원한이 많음. 고아, 연고 없음,
화기석(禾己錫), 25세.
검객(劍客). 작고한 천주의 친구의 아들로 일가친척 없음. 부모 사망. 연고 없음.
비을호(裨乙虎), 25세.
검객(劍劍). 과거에 대한 기억 상실자. 부모와 연고 없음.
석계구(石癸龜), 26세.
도객(刀客). 남해에서 떠돌던 고아를 작고한 천주가 데려다 키움. 부모 확인 불가, 연고 없음.
면신산(綿辛散). 24세.
도객(刀客). 한 동안 녹림채(錄林彩)에 있었음. 부모 사망. 연고 없음.
"이들은 항상 혈사대의 선발이었습니다."
도인광의 설명을 듣는 동안 설 무영은 그들의 눈동자를 처다 보았다. 그들의 눈은 마치 버려진 야수(野獸)와 같았다. 그들 본 설 무영은 하나의 결심을 했다.
(저들에게서는 날카로운 발톱이 들어나 보인다! 적에게 발톱이 보이면 패한다. 내가 당신들의 날카로움을 부드러움으로 바꾸어 주마!)
"당신들의 목숨을 본주에게 맡기겠느냐?"
설 무영이 한마디 엄중하게 내뱉었다.
"네! 주군(主君)!"
오인의 혈사대원은 한결 같이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렸다.
"빙모님! 옥체안녕을 빌겠습니다."
설 무영은 유라천후를 향해 포권을 쥐어 예를 하고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남쪽을 향해 사막을 횡단하려 걸어 나갔다. 다섯 명의 혈사대원이 그의 뒤를 따랐다. 설 무영이 뒤를 따르려는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아니…! 다섯 분은 우회하여 감숙현 매화반점에 가서 기다리시오!"
눈동자에 유난히 흰자위가 들어나는 고리눈의 길종학이 앞으로 나섰다.
"그렇다면 천주께서는......?"
"나는 거쳐 갈 곳이 있으니, 먼저들 가시요!"
말을 마친 설 무영은 오장 높이 상천비탄(上天飛彈) 수법으로 치솟았다가 다섯 명의 혈사대원으로 부터 멀어져 갔다.
"주군~!"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혈사대원들은 그가 신 같은 존재로 보였다. 설 무영의 신공에 놀란 다섯 명의 혈사대원은 멀거니 사막 저편으로 흐려지는 점을 바라보다가 사라져 갔다.
천황궁(天荒宮).
하란산(賀蘭山) 중턱을 가로 지르는 단애 밑의 석전(石殿).
천황혼마전의 천화궁이다. 천황궁의 깊숙한 석실 안 석대(石臺)위를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는 몽골인이 있다. 비썩 마른 큰 키의 체구에 가죽을 부착한 백의의 노괴(老怪). 천황혼마전의 마제 파고로(巴枯露)다.
퍼고로는 지금 치미는 울화를 참느라, 그의 온몸은 마기와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던 그가 멈추어 서서 석대 아래를 내려다 봤다. 석대 아래 좌측으로 소마제웅 추래야 와 철타군장 녹수마가 서 있고, 우측으로는 각각 추(鎚)와 궁(弓)을 든 두 괴인이 서 있다.
"콰~앙......!"
천황마제의 주먹에 의해 석대위에 있던 옥석으로 된 탁자가 박살이 났다.
"모두 쓸모없는 놈들.....!"
석대 아래 서 있는 자들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그, 무영인가 하는 애송이 놈을 여태 못 찾았단 말이야?"
"그…! 그게......!"
고개를 조아린 채 추래야가 앞으로 나섰다.
파고르의 핏발이 선 두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 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천강여체를 만들려던 욕망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딸 파고요(巴枯腰)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실혼강시(失魂 屍)와 지옥철타군(地獄鐵駝軍)의 손실 또한 막대한 것이었다.
한 가닥 미미한 바람이 석실 안에 불어 왔다. 분노로 이글거리던 파고르의 두 눈이 날카롭게 석실을 둘러보았다. 고도의 마력을 지닌 그가 무엇인가 움직임을 감지한 것이다.
".........!?"
파고로는 미간을 찌푸리며 마음속으로 중얼 거렸다.
(움직였다! 무엇이지......? 감히 이곳을 침입할 놈은 없는데......?)
"훗…?"
그의 손에서 일어난 혈무가 번개같이 석실 구석으로 쏘아져 나가는 동시에 석실안의 사람들이 긴장을 하였다. 혈무가 파공음을 내며 터졌다.
퍼 퍼펑~!
"찌이익....찌익!"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새앙 쥐 하나가 피 덩어리로 변해서 구석에 처박혔다.
(쥐…!? 쥐란 말인가?)
파고요는 의심을 하면서도 자신의 심정이 너무 예민해 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파고요가 주시하던 석실 기둥 뒤 묵빛 천장에는 또 다른 묵빛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설 무영! 그가 천황궁으로 잠입 한 것이었다. 그는 수정궁을 떠나면서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과 같은 방법으로 당한 무고한 사람들이 천황혼마전의 혼마지옥(魂魔地獄)에 갇혀 있다는 것을.
그가 천황궁에 잠입한 것은 혼마지옥에 대한 호기심과 고통 받고 있을 사람들만이라도 구출하고 싶은 호연지기의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이미 환영일신공(幻影一神公) 야준(冶俊)의 환영비혼신공(幻影秘魂神功)을 익힌 그였다.
하란산에는 석굴이 많았다. 그는 천황궁에서 가까운 석굴 벽을 파괴하고 천황궁 지하로 들어왔다. 유령비은잠(幽靈秘隱潛)으로 천황궁에 잠입한 그는 어느 곳에도 몸을 숨기는 환영귀식대법(幻影龜息大法)으로 몸을 숨기고 천황마제 파고요의 말을 엿듣는 중이었다.
석실 구석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파고요는 안도의 표정을 짓고, 추래야를 처다 봤다.
"추래야! 아직도 할 말이 뭐야?"
추래야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섬뜩한 눈빛을 뿜고 있는 천황마제의 평소의 광폭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 그 자가 사라진 대, 대막산을 지나 북해까지 추격하였으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
추래야는 말하는 도중에도 파고요의 눈치를 살폈다.
"이방인을 두려워하는 유라혼빙천의 늙은 여우 유라천후에게 발견되었다면 그자의 목숨은 유라철사대에 의해 참살을 당했을 겁니다.......!"
"못난 놈들......!"
천황마제가 다시 안절부절못하며 석대 위를 오락가락 하였다. 그때 검은 흑무로 변한 설 무영이 석실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는 혼마지옥을 찾는 중이다. 석실을 나온 그는 흑석(黑石)으로 이루어진 통로를 연기처럼 빠져나가 암동에 이르렀다. 암동 밑은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 밑은 또 다른 석실이었다.
"누… 누구~?"
석실을 지키던 경비군이 그에게 창을 불쑥 겨누었다.
"윽~! 케 켁!"
비명도 내뱉지 못한 두 구의 시체가 환영금절수(幻影擒節手)의 수법에 쓸어졌다. 단지 그들은 흑무를 보았을 뿐이다. 그가 석실 문을 열었다.
끼~이…익!
등이 오싹하는 비음(鼻音)을 내고 문이 열렸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침목위에는 십여 구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시체들의 피부는 살아있는 사람처럼 붉었으나 용모는 백납처럼 창백하였다. 실혼강시가 되기 전의 모습들이었던 것이다.
"사악한 악마의 쓰레기들......!"
설 무영은 강시들을 향해 쌍장을 돋구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하얀 불꽃이 일어나 강시들을 태워 버리기 시작하였다. 상승 무공을 이루면 체내의 진력 가운데 양기가 충만된 순청진화(純靑眞火)가 형성된다. 그걸 체외로 반출하면 무형의 기가 유형의 기로 바뀌어 불꽃으로 변한다.
이갑자 이상의 내공의 삼매진화(三昧眞火)에 이르면 처음엔 붉은 빛의 불꽃이 일고, 파란 불꽃은 오갑자 이상의 내공 소유자이어야 한다. 그런데 하얀 불꽃이라니!?
"끄~르…륵! 끄~으…윽!"
강시들은 삼매진화에 의해 한줌의 재로 사라져 갔다. 석실을 나오니 앞을 분간할 수 없이 컴컴한 지하 석굴과 암굴이 나왔다. 암굴은 그가 다른 석굴을 파괴하고 들어온 곳이다. 그는 석굴로 들어섰다.
설 무영의 눈에서 빛이 흘러 나와 석굴을 비추었다. 내공이 심후한 자의 혜안(惠眼), 어둠을 밝히는 무광심안(無光心眼)의 빛살이었다. 삼천육백개의 계단 아래가 음기와 냉기가 흐르는 어둠의 지옥, 혼마지옥이었다.
"커 억! 큭!"
흑무가 지나쳐 가는 곳에 옥을 지키던 두 괴인이 죽는 이유도 모르고 시체가 되어 쓸어졌다.
철커덩~!
아무리 강한 병기에도 잘리지 않는 한철로 된 옥문이 용상검에 의해 잘려 나갔다. 어둠과 적막이 깔린 혼마지옥 안에는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만이 형광(螢光)을 발하며 흑무를 쳐다보고 있다.
철컹!… 철커덩!… 철컥.......!
철창문이 열리는 곳은 흑무가 지나쳐 간 곳이었다. 흑무는 단 한마디를 남긴다.
"살고 싶은 사람은 나가시오!"
철창안의 사람들은 흑무 속의 묵인을 혼이 나간 듯 쳐다봤다. 묵인은 일장 높이에서 떠다녔다. 그들이 보는 묵인은 천황혼마전 사람이 아니다. 신비로운 묵인의 움직임으로 봐서 무인임에 틀림없다. 묵인의 움직임은 한 가닥 바람이었다.
묵인이 마지막 창살 앞에 가서 섰다. 뼈골만 앙상한 노인이 쓸어져 있었다.
"...........!?"
철옥 안에 누워있던 노인이 힘겹게 일어나 창살 밖을 내다보았다. 태산 같은 검은 그림자로 묵인이 버티고 서 있었다. 묵인이 짤막하게 말을 뱉었다.
"노야(老爺)! 철옥은 열렸소!"
묵인은 검은 석상같이 우뚝 서서 노인을 내려다 봤다. 노인은 요지부동으로 한마디 흘렸다.
"쓰잘 데 없는 일~!"
".......?"
노인의 모습은 해괴스럽기 짝이 없다. 피부 전체가 쭈글쭈글한 가죽만 남아 있어 그 나이를 헤아릴 수 없고, 봉두난발한 사이에 두 눈은 검은 눈동자가 없이 흰자위뿐이다. 해골(骸骨)과 뼈 위에 넝마를 걸쳐 놓은 꼴이다.
"노야는 어느 고인이십니까?"
"푸후.......! 이름을 잊었네!"
노인은 헛바람 새는 웃음을 흘렸다. 쇠를 긁어내는 듯 목이 쉰 목소리였다. 묵인은 여전히 노인의 안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천황마제와는 어떻게......?"
"그 못난 놈이 마제라던가!? 후후…! 이 노부가 그 놈 애비지......!"
".......!?"
맙소사! 천황마제가 자신의 가친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철창 앞에 서 있는 묵인은 설 무영이었다. 노인은 세상을 해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놈의 가슴에 악마가 깃들어서....... 나를 가두고 무림제패를 꿈꾸지… 헛된 꿈…!"
"노야께서는 언제부터 여기에.......?"
"나…? 후후후…! 글쎄, 십년이나 지났을까? 노부는 이제 여기가 편해......! 못난 놈! 그놈도....... 그의 수하에 꼭두각시에 불과하지........!"
"그럼, 또 누가........?"
설 무영이 말끝을 맺을 사이 없이 노인이 말을 이어서 했다.
"실체는 보이지 않아~! 무형사심(無形邪心)이지…! 실체를 찾으려면 산마혼경(産魔魂鏡)을 찾아야 돼.......! 아수라(阿修羅)의 산마혼경......."
노인은 혼자 무슨 말인가를 자꾸 중얼 거리며 몸서리쳤다. 몸서리치는 노인의 넝마 같은 의복에서 부스러기가 후르르! 떨어졌다. 설 무영은 유라천후에게 아수라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허지만 산마혼경에 대해서는 문외한(門外漢)이었다.
"산마혼경이 무엇입니까?"
"산마혼경? 변황에는 예로부터 마종삼병(魔宗三兵)이라는 것이 있지.......! 그 중에 하나가 산마혼경이야! 허나…! 산마혼, 산마혼경은 못 찾아.......! 허어…!?"
설 무영을 바라보던 노인의 힘없는 눈에서 빛이 번쩍! 하였다.
"흑립 좀 벗어 봐 주겠나?"
"........!?"
설 무영은 노인이 악의가 없으면서도 괴이하다고 느끼며 흑립을 벗어 들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천룡(天龍)이야…! 마신환경재림(魔神還鏡再臨)이지만, 천룡탄파마경(天龍誕破魔鏡)이야.......! 허나 아직 날개를 못 달았어....!"
노인은 설 무영에게 천룡이라 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묘한 말을 뇌까렸다. 지금은 혼마지옥을 벗어나야할 다급한 순간이다. 또한 설 무영 자신은 생사지간에 풀어야할 한이 서린 과제가 있다. 그 과제의 단서도 아직 확인치 못했건만, 무림의 일에 자신이 관련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다급한 생각에 잠겨 노인의 말을 흘려들은 그가 되물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머지않아 날개를 달겠지....... 허지만 산마혼경은 얼마든지 만들어지지…! 산마혼경 진본을 찾아야 되고....... 멸사선공(滅邪禪功)이 필요해...! 꼭! 기억하게 천룡!."
"멸사선공........!?"
설 무영은 신비스럽고 기괴한 이야기에 넋을 잃었다. 어쩌면 소름이 끼치도록 두려운 이야기였다.
"노야께서는 어찌 그런 기고(奇古)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
"후후…! 그러니 이곳에 갇혔지! 죽지 않고 산 보람이 있고만.......!"
"그럼, 소생이 모시겠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미치광이처럼 기이한 넋두리를 중얼거렸다.
"아니야! 노부는 이곳에 있어도 죽겠지만, 이곳을 나가면 제명에 못 죽어....... 그렇다고 오래 살고 싶지는 않아........! 오래 살면 아수라가 사라지는 것을 보겠지만.......!"
"........!"
"후에라도 중원에서 추혼도법(追魂刀法)을 쓰는 취혼도(醉魂導)라는 자가 있으면 이 노부 파슬(巴瑟)이 안부를 묻더라고 해 주게! 둘도 없는 술친구지........"
"......!"
"어서 가보게나…! 잠을 자야겠으니......."
노인은 슬그머니 모로 누웠다. 설 무영은 노인을 구하지 못한 아쉬움을 안은 채 뒤돌아서서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철창 사이로는 살아 나가는 것조차 의욕을 잃어 남아있는 사람들도 간혹 눈에 띠었다. 그때, 그의 앞을 가로 막는 사람들이 있었다. 석옥에서 풀려난 사람들이었다.
"대협! 저희들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다섯 명의 장정이 무릎을 꿇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 무영이 쌍심지를 돋우었다.
"어느 분들이시오?"
그들 중 가운데의 고리눈을 한 장정이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듣자하면, 그들은 낙양에서 문전걸식으로 소년시절을 보낸 이십오 세 안 밖의 걸인들이었다. 우연히 추걸타(秋乞陀)라는 기이한 걸노(乞老)를 만나 개방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들은 추걸타로부터 무공을 전수 받고 제자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살길을 찾았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다행 중 불행으로 천황혼마전의 악귀들의 미혼약에 당하여 이곳에 끌려왔다. 그들과 같이 끌려오던 추걸타는 그들에게 대항하다가 죽었다고 하였다.
그들은 나이도 비슷하지만, 체격도 엇비슷하였다. 이름도 없었던 그들에게 추걸타가 자신의 성을 따서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추일갑(秋壹甲), 추이병(秋異丙), 추삼무(秋森戊), 추사경(秋思庚), 추오임(秋烏壬). 이렇게 성명을 지어주면서 추걸타는 장차 성명 덕을 볼 것이라고 하였다. 설 무영도 어쩐지 오묘한 뜻이 있음 즉 하다는 생각에 잠겼을 때, 철옥으로 통하는 암동 위로 부터 인기척이 들려왔다.
"우선 나갑시다!"
설 무영은 부리나케 철옥을 지나 암동을 빠져 나왔다.
천황마제가 혼마지옥의 철옥 문이 열린 것을 알았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천황궁을 빠져 나간 뒤였다. 혼마지옥을 빠져나온 대다수 사람들은 머지않은 훗날, 설 무영과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태양이 중천에 걸린 오시(午時), 중원을 향하여 등격리 사막을 질주하는 한 개의 점을 쫓는 다섯 개의 점이 있었다.
천계산(天桂山).
하북성(河北省) 서부와 산서성(山西省)에 인접한 고산으로 기봉(奇峰)과 울창한 삼림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주변으로는 역대황실의 폐궁이 된 황궁과 제왕묘가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천계산은 기봉과 삼림도 많지만, 기괴한 동굴과 묘한 형상의 봉우리도 많다.
제왕묘를 지나 절곡 안으로 들어가면 높이가 십여 장이 넘는 거석들이 밀집해 있고, 꼬불꼬불한 길이 깊이 이어져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거석들 사이에 석문이 있고 석문위에는 백마궁(白魔宮)이라고 석벽을 판 글씨가 보인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는지 석벽들은 온갖 잡초들이 뒤덮고 있었다. 하기에 웬만한 사람이면 이곳에 고궁이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만곡성 안에는 의외로 여러 개의 거각(巨閣)이 있었다. 그 중 가장 깊숙이 있는 백색소각(小閣), 백색소각만큼은 깨끗이 단장 되어 있었다.----------------------------------------------
고독하고 자신의 속을 털어내지 못하고 삭여야하는 설 무영은 외롭지만, 풀어야할 한 때문에 외로울 여유가 없는 인간이다. 그는 혼자이지만 그에게는 만인을 포용할 수 있는 가슴과 군왕의 패도가 잠재해 있었다.
휘이익!
먼 사막을 달려온 한 가닥 삭풍(朔風)이 그의 옷깃을 날렸다. 겨울이 오려나보다.
"부군(夫君), 오라버니....!"
(후후! 부군…! 오라버니......?)
설 무영은 빙긋이 웃으며 하루미를 바라보았다. 겸연쩍은지 설 무영을 바라보는 하루미의 미소가 가득 담긴 봉목이 장난스럽다. 그녀는 항상 보조개를 드리운 눈웃음으로 가득하다.
"며칠만 더 있다 가면 안 돼.......?"
"........!"
(미안하구나.…! 미아~!)
설 무영은 대답대신 눈빛으로 대답한다. 이슬이 맺힌 하루미의 눈동자가 그를 향한다.
"미아는 심심해서 어떻게 해......?"
"..........!"
그녀를 바라보는 설 무영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유라천후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선다.
"언제라도 기다릴 것이니......."
"네…!"
사막의 지평선 끝에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설 무영의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태양이 걸려있다. 황포를 나부끼며 도인광이 설 무영에게 다가와 두 손을 모아 포권(包拳)을 하였다.
"일백의 정예군을 뽑았습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설 무영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그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도인광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아니오. 혼자가 편합니다."
"그러면 돌아가지…? 이 길로 가면 천황전의 지옥철타군을 만날 텐데......!"
하루미를 받아달라고 간청할 때 이미 각오한 일이건만, 설 무영의 안위에 조바심이 들어 하는 유라천후의 말이었다. 설 무영은 걱정스런 표정의 유라천후의 모습이 마치 어머니를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설 무영은 두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겪은 일이다. 많은 상대와 혈투를 할 때의 두려움은 끔찍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허지만, 훗날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돌아서서 도인광에게 부탁을 했다.
"음…! 그렇다면......! 가족과 무림에 연고가 없되 검, 도를 다루는 중원인으로 호연지기 다섯 명만 부탁하겠소!"
"복명(復命)…!"
도인광이 뒤로 물러나 군마 속으로 들어갔다. 군마 속으로 사라져 간지 오래지않아 도인광은 다섯 명의 회색 도포를 걸친 장한들을 데리고 왔다. 회색도포의 장한들이 그 앞에 부복하고, 도인광이 그들에 대한 내력을 밝혔다.
길정학(吉丁鶴), 27세.
검객(劍客). 화산파의 속가제자에서 퇴출된 자로 화산파에 원한이 많음. 고아, 연고 없음,
화기석(禾己錫), 25세.
검객(劍客). 작고한 천주의 친구의 아들로 일가친척 없음. 부모 사망. 연고 없음.
비을호(裨乙虎), 25세.
검객(劍劍). 과거에 대한 기억 상실자. 부모와 연고 없음.
석계구(石癸龜), 26세.
도객(刀客). 남해에서 떠돌던 고아를 작고한 천주가 데려다 키움. 부모 확인 불가, 연고 없음.
면신산(綿辛散). 24세.
도객(刀客). 한 동안 녹림채(錄林彩)에 있었음. 부모 사망. 연고 없음.
"이들은 항상 혈사대의 선발이었습니다."
도인광의 설명을 듣는 동안 설 무영은 그들의 눈동자를 처다 보았다. 그들의 눈은 마치 버려진 야수(野獸)와 같았다. 그들 본 설 무영은 하나의 결심을 했다.
(저들에게서는 날카로운 발톱이 들어나 보인다! 적에게 발톱이 보이면 패한다. 내가 당신들의 날카로움을 부드러움으로 바꾸어 주마!)
"당신들의 목숨을 본주에게 맡기겠느냐?"
설 무영이 한마디 엄중하게 내뱉었다.
"네! 주군(主君)!"
오인의 혈사대원은 한결 같이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렸다.
"빙모님! 옥체안녕을 빌겠습니다."
설 무영은 유라천후를 향해 포권을 쥐어 예를 하고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남쪽을 향해 사막을 횡단하려 걸어 나갔다. 다섯 명의 혈사대원이 그의 뒤를 따랐다. 설 무영이 뒤를 따르려는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아니…! 다섯 분은 우회하여 감숙현 매화반점에 가서 기다리시오!"
눈동자에 유난히 흰자위가 들어나는 고리눈의 길종학이 앞으로 나섰다.
"그렇다면 천주께서는......?"
"나는 거쳐 갈 곳이 있으니, 먼저들 가시요!"
말을 마친 설 무영은 오장 높이 상천비탄(上天飛彈) 수법으로 치솟았다가 다섯 명의 혈사대원으로 부터 멀어져 갔다.
"주군~!"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혈사대원들은 그가 신 같은 존재로 보였다. 설 무영의 신공에 놀란 다섯 명의 혈사대원은 멀거니 사막 저편으로 흐려지는 점을 바라보다가 사라져 갔다.
천황궁(天荒宮).
하란산(賀蘭山) 중턱을 가로 지르는 단애 밑의 석전(石殿).
천황혼마전의 천화궁이다. 천황궁의 깊숙한 석실 안 석대(石臺)위를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는 몽골인이 있다. 비썩 마른 큰 키의 체구에 가죽을 부착한 백의의 노괴(老怪). 천황혼마전의 마제 파고로(巴枯露)다.
퍼고로는 지금 치미는 울화를 참느라, 그의 온몸은 마기와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던 그가 멈추어 서서 석대 아래를 내려다 봤다. 석대 아래 좌측으로 소마제웅 추래야 와 철타군장 녹수마가 서 있고, 우측으로는 각각 추(鎚)와 궁(弓)을 든 두 괴인이 서 있다.
"콰~앙......!"
천황마제의 주먹에 의해 석대위에 있던 옥석으로 된 탁자가 박살이 났다.
"모두 쓸모없는 놈들.....!"
석대 아래 서 있는 자들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그, 무영인가 하는 애송이 놈을 여태 못 찾았단 말이야?"
"그…! 그게......!"
고개를 조아린 채 추래야가 앞으로 나섰다.
파고르의 핏발이 선 두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 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천강여체를 만들려던 욕망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딸 파고요(巴枯腰)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실혼강시(失魂 屍)와 지옥철타군(地獄鐵駝軍)의 손실 또한 막대한 것이었다.
한 가닥 미미한 바람이 석실 안에 불어 왔다. 분노로 이글거리던 파고르의 두 눈이 날카롭게 석실을 둘러보았다. 고도의 마력을 지닌 그가 무엇인가 움직임을 감지한 것이다.
".........!?"
파고로는 미간을 찌푸리며 마음속으로 중얼 거렸다.
(움직였다! 무엇이지......? 감히 이곳을 침입할 놈은 없는데......?)
"훗…?"
그의 손에서 일어난 혈무가 번개같이 석실 구석으로 쏘아져 나가는 동시에 석실안의 사람들이 긴장을 하였다. 혈무가 파공음을 내며 터졌다.
퍼 퍼펑~!
"찌이익....찌익!"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새앙 쥐 하나가 피 덩어리로 변해서 구석에 처박혔다.
(쥐…!? 쥐란 말인가?)
파고요는 의심을 하면서도 자신의 심정이 너무 예민해 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파고요가 주시하던 석실 기둥 뒤 묵빛 천장에는 또 다른 묵빛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설 무영! 그가 천황궁으로 잠입 한 것이었다. 그는 수정궁을 떠나면서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과 같은 방법으로 당한 무고한 사람들이 천황혼마전의 혼마지옥(魂魔地獄)에 갇혀 있다는 것을.
그가 천황궁에 잠입한 것은 혼마지옥에 대한 호기심과 고통 받고 있을 사람들만이라도 구출하고 싶은 호연지기의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이미 환영일신공(幻影一神公) 야준(冶俊)의 환영비혼신공(幻影秘魂神功)을 익힌 그였다.
하란산에는 석굴이 많았다. 그는 천황궁에서 가까운 석굴 벽을 파괴하고 천황궁 지하로 들어왔다. 유령비은잠(幽靈秘隱潛)으로 천황궁에 잠입한 그는 어느 곳에도 몸을 숨기는 환영귀식대법(幻影龜息大法)으로 몸을 숨기고 천황마제 파고요의 말을 엿듣는 중이었다.
석실 구석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파고요는 안도의 표정을 짓고, 추래야를 처다 봤다.
"추래야! 아직도 할 말이 뭐야?"
추래야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섬뜩한 눈빛을 뿜고 있는 천황마제의 평소의 광폭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 그 자가 사라진 대, 대막산을 지나 북해까지 추격하였으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
추래야는 말하는 도중에도 파고요의 눈치를 살폈다.
"이방인을 두려워하는 유라혼빙천의 늙은 여우 유라천후에게 발견되었다면 그자의 목숨은 유라철사대에 의해 참살을 당했을 겁니다.......!"
"못난 놈들......!"
천황마제가 다시 안절부절못하며 석대 위를 오락가락 하였다. 그때 검은 흑무로 변한 설 무영이 석실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는 혼마지옥을 찾는 중이다. 석실을 나온 그는 흑석(黑石)으로 이루어진 통로를 연기처럼 빠져나가 암동에 이르렀다. 암동 밑은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 밑은 또 다른 석실이었다.
"누… 누구~?"
석실을 지키던 경비군이 그에게 창을 불쑥 겨누었다.
"윽~! 케 켁!"
비명도 내뱉지 못한 두 구의 시체가 환영금절수(幻影擒節手)의 수법에 쓸어졌다. 단지 그들은 흑무를 보았을 뿐이다. 그가 석실 문을 열었다.
끼~이…익!
등이 오싹하는 비음(鼻音)을 내고 문이 열렸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침목위에는 십여 구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시체들의 피부는 살아있는 사람처럼 붉었으나 용모는 백납처럼 창백하였다. 실혼강시가 되기 전의 모습들이었던 것이다.
"사악한 악마의 쓰레기들......!"
설 무영은 강시들을 향해 쌍장을 돋구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하얀 불꽃이 일어나 강시들을 태워 버리기 시작하였다. 상승 무공을 이루면 체내의 진력 가운데 양기가 충만된 순청진화(純靑眞火)가 형성된다. 그걸 체외로 반출하면 무형의 기가 유형의 기로 바뀌어 불꽃으로 변한다.
이갑자 이상의 내공의 삼매진화(三昧眞火)에 이르면 처음엔 붉은 빛의 불꽃이 일고, 파란 불꽃은 오갑자 이상의 내공 소유자이어야 한다. 그런데 하얀 불꽃이라니!?
"끄~르…륵! 끄~으…윽!"
강시들은 삼매진화에 의해 한줌의 재로 사라져 갔다. 석실을 나오니 앞을 분간할 수 없이 컴컴한 지하 석굴과 암굴이 나왔다. 암굴은 그가 다른 석굴을 파괴하고 들어온 곳이다. 그는 석굴로 들어섰다.
설 무영의 눈에서 빛이 흘러 나와 석굴을 비추었다. 내공이 심후한 자의 혜안(惠眼), 어둠을 밝히는 무광심안(無光心眼)의 빛살이었다. 삼천육백개의 계단 아래가 음기와 냉기가 흐르는 어둠의 지옥, 혼마지옥이었다.
"커 억! 큭!"
흑무가 지나쳐 가는 곳에 옥을 지키던 두 괴인이 죽는 이유도 모르고 시체가 되어 쓸어졌다.
철커덩~!
아무리 강한 병기에도 잘리지 않는 한철로 된 옥문이 용상검에 의해 잘려 나갔다. 어둠과 적막이 깔린 혼마지옥 안에는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만이 형광(螢光)을 발하며 흑무를 쳐다보고 있다.
철컹!… 철커덩!… 철컥.......!
철창문이 열리는 곳은 흑무가 지나쳐 간 곳이었다. 흑무는 단 한마디를 남긴다.
"살고 싶은 사람은 나가시오!"
철창안의 사람들은 흑무 속의 묵인을 혼이 나간 듯 쳐다봤다. 묵인은 일장 높이에서 떠다녔다. 그들이 보는 묵인은 천황혼마전 사람이 아니다. 신비로운 묵인의 움직임으로 봐서 무인임에 틀림없다. 묵인의 움직임은 한 가닥 바람이었다.
묵인이 마지막 창살 앞에 가서 섰다. 뼈골만 앙상한 노인이 쓸어져 있었다.
"...........!?"
철옥 안에 누워있던 노인이 힘겹게 일어나 창살 밖을 내다보았다. 태산 같은 검은 그림자로 묵인이 버티고 서 있었다. 묵인이 짤막하게 말을 뱉었다.
"노야(老爺)! 철옥은 열렸소!"
묵인은 검은 석상같이 우뚝 서서 노인을 내려다 봤다. 노인은 요지부동으로 한마디 흘렸다.
"쓰잘 데 없는 일~!"
".......?"
노인의 모습은 해괴스럽기 짝이 없다. 피부 전체가 쭈글쭈글한 가죽만 남아 있어 그 나이를 헤아릴 수 없고, 봉두난발한 사이에 두 눈은 검은 눈동자가 없이 흰자위뿐이다. 해골(骸骨)과 뼈 위에 넝마를 걸쳐 놓은 꼴이다.
"노야는 어느 고인이십니까?"
"푸후.......! 이름을 잊었네!"
노인은 헛바람 새는 웃음을 흘렸다. 쇠를 긁어내는 듯 목이 쉰 목소리였다. 묵인은 여전히 노인의 안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천황마제와는 어떻게......?"
"그 못난 놈이 마제라던가!? 후후…! 이 노부가 그 놈 애비지......!"
".......!?"
맙소사! 천황마제가 자신의 가친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철창 앞에 서 있는 묵인은 설 무영이었다. 노인은 세상을 해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놈의 가슴에 악마가 깃들어서....... 나를 가두고 무림제패를 꿈꾸지… 헛된 꿈…!"
"노야께서는 언제부터 여기에.......?"
"나…? 후후후…! 글쎄, 십년이나 지났을까? 노부는 이제 여기가 편해......! 못난 놈! 그놈도....... 그의 수하에 꼭두각시에 불과하지........!"
"그럼, 또 누가........?"
설 무영이 말끝을 맺을 사이 없이 노인이 말을 이어서 했다.
"실체는 보이지 않아~! 무형사심(無形邪心)이지…! 실체를 찾으려면 산마혼경(産魔魂鏡)을 찾아야 돼.......! 아수라(阿修羅)의 산마혼경......."
노인은 혼자 무슨 말인가를 자꾸 중얼 거리며 몸서리쳤다. 몸서리치는 노인의 넝마 같은 의복에서 부스러기가 후르르! 떨어졌다. 설 무영은 유라천후에게 아수라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허지만 산마혼경에 대해서는 문외한(門外漢)이었다.
"산마혼경이 무엇입니까?"
"산마혼경? 변황에는 예로부터 마종삼병(魔宗三兵)이라는 것이 있지.......! 그 중에 하나가 산마혼경이야! 허나…! 산마혼, 산마혼경은 못 찾아.......! 허어…!?"
설 무영을 바라보던 노인의 힘없는 눈에서 빛이 번쩍! 하였다.
"흑립 좀 벗어 봐 주겠나?"
"........!?"
설 무영은 노인이 악의가 없으면서도 괴이하다고 느끼며 흑립을 벗어 들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천룡(天龍)이야…! 마신환경재림(魔神還鏡再臨)이지만, 천룡탄파마경(天龍誕破魔鏡)이야.......! 허나 아직 날개를 못 달았어....!"
노인은 설 무영에게 천룡이라 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묘한 말을 뇌까렸다. 지금은 혼마지옥을 벗어나야할 다급한 순간이다. 또한 설 무영 자신은 생사지간에 풀어야할 한이 서린 과제가 있다. 그 과제의 단서도 아직 확인치 못했건만, 무림의 일에 자신이 관련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다급한 생각에 잠겨 노인의 말을 흘려들은 그가 되물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머지않아 날개를 달겠지....... 허지만 산마혼경은 얼마든지 만들어지지…! 산마혼경 진본을 찾아야 되고....... 멸사선공(滅邪禪功)이 필요해...! 꼭! 기억하게 천룡!."
"멸사선공........!?"
설 무영은 신비스럽고 기괴한 이야기에 넋을 잃었다. 어쩌면 소름이 끼치도록 두려운 이야기였다.
"노야께서는 어찌 그런 기고(奇古)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
"후후…! 그러니 이곳에 갇혔지! 죽지 않고 산 보람이 있고만.......!"
"그럼, 소생이 모시겠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미치광이처럼 기이한 넋두리를 중얼거렸다.
"아니야! 노부는 이곳에 있어도 죽겠지만, 이곳을 나가면 제명에 못 죽어....... 그렇다고 오래 살고 싶지는 않아........! 오래 살면 아수라가 사라지는 것을 보겠지만.......!"
"........!"
"후에라도 중원에서 추혼도법(追魂刀法)을 쓰는 취혼도(醉魂導)라는 자가 있으면 이 노부 파슬(巴瑟)이 안부를 묻더라고 해 주게! 둘도 없는 술친구지........"
"......!"
"어서 가보게나…! 잠을 자야겠으니......."
노인은 슬그머니 모로 누웠다. 설 무영은 노인을 구하지 못한 아쉬움을 안은 채 뒤돌아서서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철창 사이로는 살아 나가는 것조차 의욕을 잃어 남아있는 사람들도 간혹 눈에 띠었다. 그때, 그의 앞을 가로 막는 사람들이 있었다. 석옥에서 풀려난 사람들이었다.
"대협! 저희들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다섯 명의 장정이 무릎을 꿇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 무영이 쌍심지를 돋우었다.
"어느 분들이시오?"
그들 중 가운데의 고리눈을 한 장정이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듣자하면, 그들은 낙양에서 문전걸식으로 소년시절을 보낸 이십오 세 안 밖의 걸인들이었다. 우연히 추걸타(秋乞陀)라는 기이한 걸노(乞老)를 만나 개방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들은 추걸타로부터 무공을 전수 받고 제자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살길을 찾았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다행 중 불행으로 천황혼마전의 악귀들의 미혼약에 당하여 이곳에 끌려왔다. 그들과 같이 끌려오던 추걸타는 그들에게 대항하다가 죽었다고 하였다.
그들은 나이도 비슷하지만, 체격도 엇비슷하였다. 이름도 없었던 그들에게 추걸타가 자신의 성을 따서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추일갑(秋壹甲), 추이병(秋異丙), 추삼무(秋森戊), 추사경(秋思庚), 추오임(秋烏壬). 이렇게 성명을 지어주면서 추걸타는 장차 성명 덕을 볼 것이라고 하였다. 설 무영도 어쩐지 오묘한 뜻이 있음 즉 하다는 생각에 잠겼을 때, 철옥으로 통하는 암동 위로 부터 인기척이 들려왔다.
"우선 나갑시다!"
설 무영은 부리나케 철옥을 지나 암동을 빠져 나왔다.
천황마제가 혼마지옥의 철옥 문이 열린 것을 알았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천황궁을 빠져 나간 뒤였다. 혼마지옥을 빠져나온 대다수 사람들은 머지않은 훗날, 설 무영과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태양이 중천에 걸린 오시(午時), 중원을 향하여 등격리 사막을 질주하는 한 개의 점을 쫓는 다섯 개의 점이 있었다.
천계산(天桂山).
하북성(河北省) 서부와 산서성(山西省)에 인접한 고산으로 기봉(奇峰)과 울창한 삼림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주변으로는 역대황실의 폐궁이 된 황궁과 제왕묘가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천계산은 기봉과 삼림도 많지만, 기괴한 동굴과 묘한 형상의 봉우리도 많다.
제왕묘를 지나 절곡 안으로 들어가면 높이가 십여 장이 넘는 거석들이 밀집해 있고, 꼬불꼬불한 길이 깊이 이어져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거석들 사이에 석문이 있고 석문위에는 백마궁(白魔宮)이라고 석벽을 판 글씨가 보인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는지 석벽들은 온갖 잡초들이 뒤덮고 있었다. 하기에 웬만한 사람이면 이곳에 고궁이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만곡성 안에는 의외로 여러 개의 거각(巨閣)이 있었다. 그 중 가장 깊숙이 있는 백색소각(小閣), 백색소각만큼은 깨끗이 단장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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