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빙한담(極氷寒潭)!
이것이 연못의 정체였다. 빙하가 수백 년 동안 정제된 빙기인 빙령정으로 이루어진 연못. 얼음의 빙점을 초과하는 빙기를 소유한 빙령정. 그 한 방울로도 물체를 순식간에 얼렸다가 유리조각같이 부스러트린다.
그런데 한 물체! 극빙한담의 한가운데 둥실 떠 있는 인간. 그 끔찍한 극빙한담에 잠기고도 얼지 붙지 않는 한 명의 인간이 있다.
머리를 산발하고 쓸어져 있는 인간! 과연 살아있는 것인가.
그는 바로 내상을 입고 암동으로 떨어진 설 무영, 그였다. 암저(喑低)의 윗부분인 석벽이 무너지며 빙동으로 떨어진 것이다.
비몽사몽(非夢似夢), 설 무영은 빙동을 기어가다가 허기진 배를 채우려 빙벽에 열린 열매를 게걸스럽게 입속으로 삼키고 빙동을 기어 나와 극빙한담에 목을 축이고는 다시 혼절 한 것이었다. 용암이라도 얼어붙게 하는 극빙한담이지만 그는 극빙한담에 떨어지고도 전혀 이상이 없었다.
옷은 거의 너덜너덜 떨어져 거의 벌거벗은 상태이지만 그는 다만 정신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마에는 주홍빛 서기가 맴돌고 있었다. 천기조원(天氣朝元), 극양지기의 지체인 까닭에 살아날 수 있는 것이었다. 도리어 빙령정에 의해 그의 내상은 치료가 되고 있는 것이었다.
"......."
연못 주변에는 오십 가까이 되어 보이는 여인과 십팔 세정도의 소녀, 그리고 노파를 비롯한 장한 두 명이 쓰러져 있는 설 무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궁장차림의 오십대 여인의 이름은 유라천후(琉羅天后) 난홍빈(暖鴻賓), 유라혼빙천(琉羅魂氷天)의 천후(天后)였다. 나이에 비해 아직도 농후한 여체와 젊은 피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유라천후의 뒤로는 유라천후의 무남독녀 유라설화(琉羅雪花) 하루미(賀漏美)가 서있었고, 일장 뒤에는 노파와 두 명의 장한이 서 있다.
나이 지긋한 노파는 빙령옥모(氷靈玉母) 빙나희(馮羅喜).
유라혼빙천의 총관(總官)이고 한설빙혼공(寒雪氷魂功) 하나로 거친 변황에서 팔십년의 세월을 보낸 역전의 여장이며 유라천후의 가신이다.
태황적도(太皇赤刀) 도인광(刀隣光)
적룡도(赤龍刀)라는 애병(愛兵)과 천극적혈도법(天極赤血刀法)으로 변황무림에서 도왕(刀王)의 칭호를 받고 있으며 유라천빙궁의 결사대 유라혈사대(琉羅血死隊)를 관할하고 있다.
백귀나찰(白鬼拏刹) 백뇌수(百雷壽)
흑사비류술(黑沙飛流術)이란 톡특한 암기술과 백운비뢰장(白雲飛雷掌)이란 전무후무하게 강력한 장법은 변황무림에서 감히 상대하기를 꺼려한다. 그는 유라천빙궁의 또 다른 결사대 유라비마대(琉羅飛馬隊)를 관장하고 있다.
이곳의 세 여인들은 모두 벽안금발(壁眼金髮)의 색목녀(色目女)이다.
"이 청년이 어찌해서 이곳에 쓰러져 있지.......?"
유라천후는 약관의 청년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라천후는 설 무영의 모습에서 상승무공을 익혔고, 심한 격투를 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설 무영은 빙하에 있는 유라혼빙천(琉羅魂氷天)의 지하 수정궁(水晶宮)에 떨어진 것이다.
"......?!"
유라설화 하루미는 유라천후의 등 뒤에서 설 무영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은어(銀魚)같이 포동포동하고 핏줄이 보일 듯 투명한 피부, 동그스름하고 귀여운 봉옥에는 아직 동안의 용모가 남아있었고, 앙증맞은 붉은 입술, 오뚝한 콧날, 색목인치고는 호리호리하고 작은 체구, 푸르스름한 눈동자와 금발의 자태는 중원의 어느 여인에 뒤지지 않는 색목미인이다. 그런데 그녀의 미소가 듬뿍 담긴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하루미의 봉옥이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십팔 세의 처녀지체로서 남자의 벌거벗은 남자의 반라를 처음 접하는 그녀였기에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너덜너덜 떨어진 옷을 걸쳤지만, 빈틈없는 근육질이면서도 늘씬한 풍모에 윤기 나는 피부와 짙은 검미의 우뚝한 콧날, 관옥(冠玉)간이 빛나는 얼굴, 굳게 다문 붉은 입술, 봉두난발 속의 헌헌장부(軒軒丈夫)의 영준한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빙령옥모 빙나희가 유라천후 옆으로 다가서서 설 무영을 들여다보았다. 빙나희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빙나희와 유라천후의 눈이 마주쳤다. 빙나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천후님은 이 녀석을 어떻게 보시나요?"
"천세에 없는 극양지기의 용골지체.......!?"
유라천후가 빙나희에게 지시를 했다.
“어찌했던 저 젊은이를 안으로 옮기세요.”
"네…! 천후님!"
한 동안 다시 설 무영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유라천후가 안으로 사라졌다. 빙나희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도 뒤쫓아 사라졌다.
얼마 후, 설 무영은 두 사람의 장한에 의해서 다른 빙벽으로 된 석실로 옮겨졌다.
"......!?"
설 무영! 정신이 든 그가 깨어나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그는 비단의 오색 휘장이 처진 백색 상아(象牙)로 만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음…! 여기가 어디지......?"
그의 시야에 들어 온 것은 온통 백색 대리석과 투명한 수정 대리석으로 꾸며진 방이었다. 불빛이 없어도 빙벽을 통하여 들어온 통하여 들어온 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에게는 백색 무명옷이 걸쳐져 있었다.
"헉!......."
갑자기 설 무영은 임독양맥과 혈맥이 폭발할 듯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급히 가부좌하고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들끓던 맥과 혈을 통천하니 기혈을 따라 다시 흐르기 시작하였다. 허지만,
"으~헉!"
좌우의 혈이 거꾸로 흐르면서 내장육보와 혈맥이 부풀어 곧 터질 것 같았다. 그는 급히 일회천한 것을 용천혈(湧泉穴)에 넣고 잠갔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몰랐던 것이다. 남자는 건(乾) 그리고 하늘(天)이고 양(陽)이며, 여인은 곤(坤) 그리고 땅(地)이고 음(陰)이다. 따라서 남자는 극양지기의 무공을 익히고, 여인은 극음지기의 무공을 익혀야 하는 것을 설 무영도 알고 있었다.
헌데 이미 타고요의 순음지기를 받아 들였고 극양지기의 그가 마신 것은 극빙한수(極氷寒水)였다. 그리고 그가 먹은 열매는 만년빙련실(萬年氷蓮實)로서 모두 극음지기의 영약을 먹은 것이다. 그러한데 운기행공을 하였으니 그의 몸에서는 서로 상극의 기도와 경락이 경맥(經脈)과 혈로(血路)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하하하.......!"
"호호호.......!"
그때 웃음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열리며 두 여인이 들어왔다. 오십대의 여인과 팔십대의 노파, 그들은 유라천후 난홍빈과 빙령옥모 빙나희이었다.
"......!?"
설 무영은 두 색목여인의 출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빙령옥모의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못난 놈…! 넌 양과 음의 두 경혈과 혈맥의 충돌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죽기 전에 우리 수정궁(水晶宮)에 왜 침입했는지 말해라!"
"난 침입하지 않았소!"
의외로 설 무영의 대답은 당당하였다. 빙령옥모가 발을 구르며 발끈했다.
"네 이놈! 유라섭령진(琉羅攝靈陣)은 제갈공명(諸葛孔明)이 환생해도 파해(破解)하지 못할 것인데, 침입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냐?"
"그깐 유라섭령진이 무슨 기진(奇陣)이라고...?"
설무영은 기문둔갑의 오묘한 진리를 모두 해독할 줄 알지 않는가?
"네. 이놈! 어른을 놀리느냐? 우리 유라혼빙천의 설룡(雪龍)도 네 놈이 죽였지~?"
".......!"
(켁! 참! 드릅게, 이놈 저놈 하네......)
설 무영은 펄펄 뛰는 빙령옥모에게 답변하기조차 귀찮았다. 그러나 그가 죽인 괴물이 어떠한 내상이나 도상(刀傷)이라도 한번 복용하기만 하면 상처를 낫게 할 수 있고, 만년이 된 만년설룡의 내단은 내공을 증진시킨다는 영물로서 설산(雪山)에만 산다는 설룡임을 알고는 놀라고 있었다.
"야…! 이놈아! 그나마 제명에 못 죽고 분근착골(分筋搾骨)의 고통을 당해야 이실직고 하겠느냐?"
“..........”
설 무영이 묵묵부답이자, 빙령옥모가 금나수법(擒拏手法)으로 설 무영의 완맥과 견정혈을 찍으러 달려들었다.
"옥모~!"
추이만 살피던 유라천후가 빙령옥모를 제제하고 나섰다.
".......!"
빙령옥모는 분을 삭이지 못한 듯 씨근덕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유라천후가 조용한 목소리로 설 무영에게 물었다.
"그럼 어찌하여 이곳에 오게 되었느냐?"
"저는 단지........"
설무영은 그들의 오해를 풀어 주기위해서 자초자종을 설명하였다. 천황마제(天荒魔帝) 파고로(巴枯露)와 있었던 일과 지옥철타군(地獄鐵駝軍)과의 혈투 중에 수정궁에 들어오게 된 상황을 말했다.
"진작 말할 거지......"
그때서야, 빙령옥모도 오해가 풀렸는지 입맛을 다셨다. 한편 유라천후는 자애로운 봉옥에 놀란 표정을 짓고 말했다.
"지옥철타군과 홀로 혈투를 버리다니........! "
"......."
유라천후는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변황에서 두려운 것 중에 하나가 지옥철타군인데, 그것도 단신으로 지옥철타진을 파해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황마제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너무 큰 거물을 건드렸어......,! 앞으로 조심해야 할 거야!"
"......!?"
"그런데 소협은 누구이며 어느 사부를 모셨는가?"
"소생은 무영(霧影)이라 하고, 무학의 기초는 저의 백부 되시는 분에게 깨우쳤습니다."
"흠…! 백부께서는 대단한 잠룡을 키우셨군! 그런데.....?"
유라천후가 걱정스러운 듯 설 무영을 처다 보았다.
"......?"
"혹시, 소협에게... 정혼한 여인이 있는지 물어봐도 될는지......?"
"저.......?"
(이건 또 무슨 수작?)
설 무영은 이상한 운명에 휩싸인 기분이었다. 벌써 두 번째로 정혼녀에 관한 질문을 듣는 것이다. 그의 뇌리에 파고요, 그리고 또 다시 전도련과 소루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있습니다!"
설 무영의 단호한 대답에 유라천후는 실망하는 모습이 역역하였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유라천후가 빙령옥모에게 눈짓을 하였다. 그들 간에 무슨 약속이 있었는지 빙령옥모가 방을 나갔다. 유라천후가 잔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후(本后)와 가군(家君)과의 사이에는 일남일녀의 자식을 두었었지........"
유라천후의 말은 이러했다.
유라혼빙천의 천주였던 유라천주(琉羅天主) 하용문(賀龍雯)과 유라천후 사이에는 하용빈(賀龍彬)이라는 아들과 하루미(賀漏美)라는 딸이 있었다. 하용문은 중원에 신의가 두터운 친구가 많았다.
어느날 하용문은 아들을 데리고 중원을 나가게 되었다. 중원 남해에 사는 친구 영애의 결혼식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수정궁에서 기다리던 유라천후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달되었다. 아들 하용빈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하용문은 묘령의 극독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것이었다.
유라천후는 만리 길을 단걸음에 남해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사후수습은 다 된 상태이고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단지 하용문의 시신에서 제남국(濟南國)에서 사용했던 오공마독(蜈蚣魔毒)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오공독은 지네의 독에 극약을 처방한 독성이 극악한 약으로 마도사파(魔道邪派)에서 조차 사용을 금지한 것이었다. 유라천후는 더 이상 원흉을 캐낼 도리도 없었다.
그녀는 제남국의 공주였고 국왕인 난후량(暖吼良)은 그녀의 부친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믿을 수도 없었고, 결혼식에 참석했던 자신의 부친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유라천후는 또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유라천후의 이야기 도중에 빙령옥모와 유라설화 하루미(賀漏美)가 들어와 있었다. 하루미가 나긋나긋한 자태로 유라천후에게 다가갔다. 설 무영의 눈길이 금발을 늘어트린 하루미에게 향했다. 팔닥거리는 은어(銀魚)같이 동그랗고 파르스름한 눈망울에는 눈웃음이 항상 담겨 있었다. 도톰한 입술과 동그스름한 봉옥이 무척 앙증맞았고, 몸에 착 달라붙는 취의궁장(翠衣宮裝) 탓에 색목인치고는 작은 체구이건만, 육감적인 자태가 완연히 들어나 있다.
벽안금발(壁眼金髮)의 색목미녀(色目美女)! 그녀의 날씬한 체구는 틀에 잡힌 듯 잘 짜여 진 옥각(玉刻)이었다.
"극음지기(極陰之氣)의 옥골(玉骨).....?"
설 무영은 내심 그녀의 체구를 보고 놀랐다. 그는 하루미에게서 소류진과 버금가는 지체인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의 피부는 투명한 피부는 희다 못해 백납같이 핏기가 없었다.
"어머니!........"
유라천후의 손을 잡은 하루미가 상심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달랬다.
".......!"
설 무영은 유라천후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고 측은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허지만 그로서는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설 무영은 혼자의 생각에 잠겼다. 그 자신 말고도 천하에는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설 무영이 바라는 생이라는 것은 따뜻하고 포근한 가족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존재하는 것은 그 따뜻해야할 가족을 붕괴시킨 원흉을 찾아 보복하는 것이다. 단지 그 하나를 위해 그도, 그의 조상도 삼백여 년을 핍박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목숨을 유지했다.
그래서 설 무영은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잘 안다. 어찌 부유한 자의 아픔이 헐벗고 가난한자의 슬픔만 할 것이냐? 허지만 유라천후의 말을 듣고 보니 변황무림의 네 개의 하늘 중에 하나를 소유한 그들의 뒤에도 가슴 아픈 사연은 있다는 것 을 안 것이다.
"모르겠다! 진정한 세인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가 혼자의 상념에 빠져 있을 때 하루미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는 부끄러움도 없이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귀엽고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핑 돌고 있었다. 설 무영은 하루미의 커다란 눈망울 속에 푹 빠져버릴 것 같은 착각에 들었다.
"우리 어머니를 슬프게 하지 말아 주세요!"
건드리기만 해도 톡! 터질 것 같은 육감적인 하루미의 입술이 설 무영을 향해 종알거렸다. 그녀는 유라천후를 슬프게 한 사람이 설 무영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다만.....!?"
당돌한 하루미의 말에 설 무영은 당황스러웠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유라천후가 입가에 미소를 가득담고 하루미에게 말을 했다.
"미아(美兒)야! 소협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란다......."
유라천후의 말을 들은 하루미가 눈가에 웃음을 가득 담고 설 무영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소협!"
말을 마친 하루미는 핏기 없는 봉옥을 일순간 붉히고는 유라천후의 등 뒤로 갔다. 그녀는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설 무영에게 시선을 향했다. 의외로 하루미에게는 순수하고 쾌활한 면이 가득했다. 유라천후의 지긋한 눈빛이 설 무영을 향했다.
"소협에게 정혼에 관해 물어 본 것은 미아 때문에......! 예(禮)가 아닌 줄 알면서도......."
유라천후는 말을 체 잇지 못하고 설 무영의 눈치를 살폈다. 설 무영이 두 손을 쥐고 유라천후의 말을 재촉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미아를 소협이 거두어 줘요.......!"
"네?........"
설 무영은 어리둥절하여 유라천후와 하루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루미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유라천후의 등 뒤에 얼굴을 묻었다.
"물론, 어려운 청이라는 것을 알지만.......!"
"저는........"
설 무영으로서는 다시 은원관계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소생에게는 선대비사(先代秘事)로 구천(九天)을 떠도는 선조의 원혼이 있습니다. 소생의 목숨은 그 원혼을 대신해 태어난 운명인지라, 가족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그 원혼이란 게 무엇인가?"
"그건 밝힐 수 없습니다!"
"그 원혼을 만든 대상자가 누구이건데 소협의 운명을 건다는 것이지?"
설 무영은 아버지와 선조의 유지대로 가족에 관한 비밀을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설 무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입을 열었다.
"무림인이라면 모두 원혼관계일 수도......."
".......!?"
무공을 익힌 무림인 전부가 원수라는 말인가? 유라천후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에 이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인명(人命)이란 귀중한 것 일진데......."
"난 모든 무림인이 대상자라고 하지는 않았소! 다만 어떤 무림인이라도 원혼의 대상자라면 물러설 수 없다는 뜻이오. 비록 내 생명을 잃는다 해도.......!"
자세한 이야기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설 무영의 말에는 구구절절 결연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허지만 유라천후의 마음은 또 다른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본후(本后)나 하루미는 소협에게 어떤 부담도 주지 않을 거야.......! 어쩌면 이것이 필연(必緣)인지도 모르는 것이기에........"
".......!?"
(이것 참! 미치겠네........!)
설 무영은 유라천후에게 천황마제와는 다른 진실함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무슨 말로 유라천후를 이해시킬 것인가를 고심하지만 유라천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원래 우리 미아는 천음절맥(天陰絶脈)으로 태어나서 십오 세를 넘길 수 없는 아이야........"
(허 엇…! 천음절맥이라고.......?)
설 무영은 다시 한 번 하루미를 바라보았다. 유라천후의 등 뒤에서 설 무영을 살짝 쳐다보는 눈길은 태연하고 오히려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자신의 운명에 낙관하는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천음절맥의 지체란, 무공연마를 하면은 백년 수련을 일 년이면 달성하고, 임독이맥(任督二脈)과 천지현관(天地玄關)이 타통 되어 태어난 극음지기의 지체이지만, 십오 세가 되면 극음의 기도를 주체치 못하고 경혈이 굳어 버리는 일종의 천운을 얻는 까닭에 겪는 운명이었다.
"만년빙련실(萬年氷蓮實)로 연명하고 있지만, 그것도 이십 세를 넘기지 못하는 것이 천음절맥이지........! 이 병을 고치는 단 하나의 희망은 극양지기의 현양지체와 부부 연을 맺어 극음의 기도를 순화시키는 방법뿐이 없는 거야......! 그런데 하루미에게 천운인지 만세에 없는 현양지체인 소협을 만나게 된 거야. 소협의 도움과 정심으로 우리아이가 생명을 얻어 밝은 생을 얻기를 바랄 뿐이야. 소협.......!"
"......!?"
유라천후의 말은 딸에 대한 애절하고 간절한 정이 흘러넘치고,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듯 심장을 나타내는 태도였다. 설 무영은 난처한 입장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 머리만 긁적거렸다. 그때, 빙령옥모가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소협도 극음지기인 극빙한수와 만년빙련설을 섭취하고 운공하였기에 혈맥이 순탄치 못하지 않은가?"
"......!"
"극음기공을 익힌 순음지기에 의해 극음빙맥을 순화통천(純化通天)하지 않으면 온전치 못할 것인데 무얼 꾸물거리는 게야?"
빙령옥모의 말은 맞는 것이었다. 극음지기의 영약을 비몽사몽(非夢似夢)에 마구 섭취한 그였기에 운행 중 막힌 혈맥(穴脈)의 기도(氣道)를 용천혈(湧泉穴)에 넣고 임시로 잠그지 않았는가. 그러나 설 무영의 웅심과 혈기는 추호도 자신의 단점과 조건 등을 내세운 핍박에 구애받고 싶지 않았다.
"그건 소생의 잘못인지라, 소생이 감당할 것이요!"
"..........!?"
설 무영의 대담한 답변 한마디에 그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설 무영의 단호한 입장에 유라천후는 탄식을 하며 주저앉았다.
"우리 미아가 더 이상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운명이고, 인연이 아닌 모양이구나......."
"천후님......!"
빙령옥모가 유라천후를 부축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유라천후가 한탄조로 말했다.
"죽어서도 돌아가신 가군을 볼 면목이 없구나....!"
"아닙니다! 아직은 기회가 있으니 심려하지 마소서. 이 옥모가 천하를 다 뒤져서라도 극양지기의 지체를 찾을 것입니다~!"
그들의 사연을 듣고 있던 설 무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그도 엉킨 혈도를 풀어야 무공을 펼칠 수 있고, 또한 양강지기를 이룬다면 태천혼원승공(太天魂原承功)이 갑절의 공력을 얻는다고 신검성황(神劍聖皇)의 비록에 기록되어 있었다. 설 무영은 전혀 악의가 없는 그들의 마음에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하고, 나 또한 양강지기를 이룰 기회가 아닌가.......!)
마음을 굳힌 설 무영은 유라천후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며 정중하게 두 손을 보아 읍하였다.
"허지만! 소생은 마음을 굳혔소! 천후님을 빙모(聘母)로 부르기로......!"
"저, 정말인가…?"
유라천후는 빙령옥모를 젖히고 벌떡 일어서서 설 무영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설 무영은 급히 무릎을 꿇으려는 유라천후를 제재하였다.
"이렇게 까지는.......!?"
두 사람의 자세가 엉거주춤 하였다. 두 사람은 은연중에 상대방의 내공의 깊이에 놀라고 있었다. 설 무영은 유라천후의 공력이 오 갑자 이상의 내공이 실린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무리한 공력으로 자신을 내세우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빙모로 모시기로 작정한 이상 자신에게 유라천후가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이것이 연못의 정체였다. 빙하가 수백 년 동안 정제된 빙기인 빙령정으로 이루어진 연못. 얼음의 빙점을 초과하는 빙기를 소유한 빙령정. 그 한 방울로도 물체를 순식간에 얼렸다가 유리조각같이 부스러트린다.
그런데 한 물체! 극빙한담의 한가운데 둥실 떠 있는 인간. 그 끔찍한 극빙한담에 잠기고도 얼지 붙지 않는 한 명의 인간이 있다.
머리를 산발하고 쓸어져 있는 인간! 과연 살아있는 것인가.
그는 바로 내상을 입고 암동으로 떨어진 설 무영, 그였다. 암저(喑低)의 윗부분인 석벽이 무너지며 빙동으로 떨어진 것이다.
비몽사몽(非夢似夢), 설 무영은 빙동을 기어가다가 허기진 배를 채우려 빙벽에 열린 열매를 게걸스럽게 입속으로 삼키고 빙동을 기어 나와 극빙한담에 목을 축이고는 다시 혼절 한 것이었다. 용암이라도 얼어붙게 하는 극빙한담이지만 그는 극빙한담에 떨어지고도 전혀 이상이 없었다.
옷은 거의 너덜너덜 떨어져 거의 벌거벗은 상태이지만 그는 다만 정신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마에는 주홍빛 서기가 맴돌고 있었다. 천기조원(天氣朝元), 극양지기의 지체인 까닭에 살아날 수 있는 것이었다. 도리어 빙령정에 의해 그의 내상은 치료가 되고 있는 것이었다.
"......."
연못 주변에는 오십 가까이 되어 보이는 여인과 십팔 세정도의 소녀, 그리고 노파를 비롯한 장한 두 명이 쓰러져 있는 설 무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궁장차림의 오십대 여인의 이름은 유라천후(琉羅天后) 난홍빈(暖鴻賓), 유라혼빙천(琉羅魂氷天)의 천후(天后)였다. 나이에 비해 아직도 농후한 여체와 젊은 피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유라천후의 뒤로는 유라천후의 무남독녀 유라설화(琉羅雪花) 하루미(賀漏美)가 서있었고, 일장 뒤에는 노파와 두 명의 장한이 서 있다.
나이 지긋한 노파는 빙령옥모(氷靈玉母) 빙나희(馮羅喜).
유라혼빙천의 총관(總官)이고 한설빙혼공(寒雪氷魂功) 하나로 거친 변황에서 팔십년의 세월을 보낸 역전의 여장이며 유라천후의 가신이다.
태황적도(太皇赤刀) 도인광(刀隣光)
적룡도(赤龍刀)라는 애병(愛兵)과 천극적혈도법(天極赤血刀法)으로 변황무림에서 도왕(刀王)의 칭호를 받고 있으며 유라천빙궁의 결사대 유라혈사대(琉羅血死隊)를 관할하고 있다.
백귀나찰(白鬼拏刹) 백뇌수(百雷壽)
흑사비류술(黑沙飛流術)이란 톡특한 암기술과 백운비뢰장(白雲飛雷掌)이란 전무후무하게 강력한 장법은 변황무림에서 감히 상대하기를 꺼려한다. 그는 유라천빙궁의 또 다른 결사대 유라비마대(琉羅飛馬隊)를 관장하고 있다.
이곳의 세 여인들은 모두 벽안금발(壁眼金髮)의 색목녀(色目女)이다.
"이 청년이 어찌해서 이곳에 쓰러져 있지.......?"
유라천후는 약관의 청년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라천후는 설 무영의 모습에서 상승무공을 익혔고, 심한 격투를 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설 무영은 빙하에 있는 유라혼빙천(琉羅魂氷天)의 지하 수정궁(水晶宮)에 떨어진 것이다.
"......?!"
유라설화 하루미는 유라천후의 등 뒤에서 설 무영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은어(銀魚)같이 포동포동하고 핏줄이 보일 듯 투명한 피부, 동그스름하고 귀여운 봉옥에는 아직 동안의 용모가 남아있었고, 앙증맞은 붉은 입술, 오뚝한 콧날, 색목인치고는 호리호리하고 작은 체구, 푸르스름한 눈동자와 금발의 자태는 중원의 어느 여인에 뒤지지 않는 색목미인이다. 그런데 그녀의 미소가 듬뿍 담긴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하루미의 봉옥이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십팔 세의 처녀지체로서 남자의 벌거벗은 남자의 반라를 처음 접하는 그녀였기에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너덜너덜 떨어진 옷을 걸쳤지만, 빈틈없는 근육질이면서도 늘씬한 풍모에 윤기 나는 피부와 짙은 검미의 우뚝한 콧날, 관옥(冠玉)간이 빛나는 얼굴, 굳게 다문 붉은 입술, 봉두난발 속의 헌헌장부(軒軒丈夫)의 영준한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빙령옥모 빙나희가 유라천후 옆으로 다가서서 설 무영을 들여다보았다. 빙나희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빙나희와 유라천후의 눈이 마주쳤다. 빙나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천후님은 이 녀석을 어떻게 보시나요?"
"천세에 없는 극양지기의 용골지체.......!?"
유라천후가 빙나희에게 지시를 했다.
“어찌했던 저 젊은이를 안으로 옮기세요.”
"네…! 천후님!"
한 동안 다시 설 무영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유라천후가 안으로 사라졌다. 빙나희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도 뒤쫓아 사라졌다.
얼마 후, 설 무영은 두 사람의 장한에 의해서 다른 빙벽으로 된 석실로 옮겨졌다.
"......!?"
설 무영! 정신이 든 그가 깨어나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그는 비단의 오색 휘장이 처진 백색 상아(象牙)로 만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음…! 여기가 어디지......?"
그의 시야에 들어 온 것은 온통 백색 대리석과 투명한 수정 대리석으로 꾸며진 방이었다. 불빛이 없어도 빙벽을 통하여 들어온 통하여 들어온 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에게는 백색 무명옷이 걸쳐져 있었다.
"헉!......."
갑자기 설 무영은 임독양맥과 혈맥이 폭발할 듯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급히 가부좌하고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들끓던 맥과 혈을 통천하니 기혈을 따라 다시 흐르기 시작하였다. 허지만,
"으~헉!"
좌우의 혈이 거꾸로 흐르면서 내장육보와 혈맥이 부풀어 곧 터질 것 같았다. 그는 급히 일회천한 것을 용천혈(湧泉穴)에 넣고 잠갔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몰랐던 것이다. 남자는 건(乾) 그리고 하늘(天)이고 양(陽)이며, 여인은 곤(坤) 그리고 땅(地)이고 음(陰)이다. 따라서 남자는 극양지기의 무공을 익히고, 여인은 극음지기의 무공을 익혀야 하는 것을 설 무영도 알고 있었다.
헌데 이미 타고요의 순음지기를 받아 들였고 극양지기의 그가 마신 것은 극빙한수(極氷寒水)였다. 그리고 그가 먹은 열매는 만년빙련실(萬年氷蓮實)로서 모두 극음지기의 영약을 먹은 것이다. 그러한데 운기행공을 하였으니 그의 몸에서는 서로 상극의 기도와 경락이 경맥(經脈)과 혈로(血路)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하하하.......!"
"호호호.......!"
그때 웃음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열리며 두 여인이 들어왔다. 오십대의 여인과 팔십대의 노파, 그들은 유라천후 난홍빈과 빙령옥모 빙나희이었다.
"......!?"
설 무영은 두 색목여인의 출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빙령옥모의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못난 놈…! 넌 양과 음의 두 경혈과 혈맥의 충돌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죽기 전에 우리 수정궁(水晶宮)에 왜 침입했는지 말해라!"
"난 침입하지 않았소!"
의외로 설 무영의 대답은 당당하였다. 빙령옥모가 발을 구르며 발끈했다.
"네 이놈! 유라섭령진(琉羅攝靈陣)은 제갈공명(諸葛孔明)이 환생해도 파해(破解)하지 못할 것인데, 침입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냐?"
"그깐 유라섭령진이 무슨 기진(奇陣)이라고...?"
설무영은 기문둔갑의 오묘한 진리를 모두 해독할 줄 알지 않는가?
"네. 이놈! 어른을 놀리느냐? 우리 유라혼빙천의 설룡(雪龍)도 네 놈이 죽였지~?"
".......!"
(켁! 참! 드릅게, 이놈 저놈 하네......)
설 무영은 펄펄 뛰는 빙령옥모에게 답변하기조차 귀찮았다. 그러나 그가 죽인 괴물이 어떠한 내상이나 도상(刀傷)이라도 한번 복용하기만 하면 상처를 낫게 할 수 있고, 만년이 된 만년설룡의 내단은 내공을 증진시킨다는 영물로서 설산(雪山)에만 산다는 설룡임을 알고는 놀라고 있었다.
"야…! 이놈아! 그나마 제명에 못 죽고 분근착골(分筋搾骨)의 고통을 당해야 이실직고 하겠느냐?"
“..........”
설 무영이 묵묵부답이자, 빙령옥모가 금나수법(擒拏手法)으로 설 무영의 완맥과 견정혈을 찍으러 달려들었다.
"옥모~!"
추이만 살피던 유라천후가 빙령옥모를 제제하고 나섰다.
".......!"
빙령옥모는 분을 삭이지 못한 듯 씨근덕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유라천후가 조용한 목소리로 설 무영에게 물었다.
"그럼 어찌하여 이곳에 오게 되었느냐?"
"저는 단지........"
설무영은 그들의 오해를 풀어 주기위해서 자초자종을 설명하였다. 천황마제(天荒魔帝) 파고로(巴枯露)와 있었던 일과 지옥철타군(地獄鐵駝軍)과의 혈투 중에 수정궁에 들어오게 된 상황을 말했다.
"진작 말할 거지......"
그때서야, 빙령옥모도 오해가 풀렸는지 입맛을 다셨다. 한편 유라천후는 자애로운 봉옥에 놀란 표정을 짓고 말했다.
"지옥철타군과 홀로 혈투를 버리다니........! "
"......."
유라천후는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변황에서 두려운 것 중에 하나가 지옥철타군인데, 그것도 단신으로 지옥철타진을 파해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황마제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너무 큰 거물을 건드렸어......,! 앞으로 조심해야 할 거야!"
"......!?"
"그런데 소협은 누구이며 어느 사부를 모셨는가?"
"소생은 무영(霧影)이라 하고, 무학의 기초는 저의 백부 되시는 분에게 깨우쳤습니다."
"흠…! 백부께서는 대단한 잠룡을 키우셨군! 그런데.....?"
유라천후가 걱정스러운 듯 설 무영을 처다 보았다.
"......?"
"혹시, 소협에게... 정혼한 여인이 있는지 물어봐도 될는지......?"
"저.......?"
(이건 또 무슨 수작?)
설 무영은 이상한 운명에 휩싸인 기분이었다. 벌써 두 번째로 정혼녀에 관한 질문을 듣는 것이다. 그의 뇌리에 파고요, 그리고 또 다시 전도련과 소루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있습니다!"
설 무영의 단호한 대답에 유라천후는 실망하는 모습이 역역하였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유라천후가 빙령옥모에게 눈짓을 하였다. 그들 간에 무슨 약속이 있었는지 빙령옥모가 방을 나갔다. 유라천후가 잔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후(本后)와 가군(家君)과의 사이에는 일남일녀의 자식을 두었었지........"
유라천후의 말은 이러했다.
유라혼빙천의 천주였던 유라천주(琉羅天主) 하용문(賀龍雯)과 유라천후 사이에는 하용빈(賀龍彬)이라는 아들과 하루미(賀漏美)라는 딸이 있었다. 하용문은 중원에 신의가 두터운 친구가 많았다.
어느날 하용문은 아들을 데리고 중원을 나가게 되었다. 중원 남해에 사는 친구 영애의 결혼식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수정궁에서 기다리던 유라천후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달되었다. 아들 하용빈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하용문은 묘령의 극독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것이었다.
유라천후는 만리 길을 단걸음에 남해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사후수습은 다 된 상태이고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단지 하용문의 시신에서 제남국(濟南國)에서 사용했던 오공마독(蜈蚣魔毒)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오공독은 지네의 독에 극약을 처방한 독성이 극악한 약으로 마도사파(魔道邪派)에서 조차 사용을 금지한 것이었다. 유라천후는 더 이상 원흉을 캐낼 도리도 없었다.
그녀는 제남국의 공주였고 국왕인 난후량(暖吼良)은 그녀의 부친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믿을 수도 없었고, 결혼식에 참석했던 자신의 부친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유라천후는 또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유라천후의 이야기 도중에 빙령옥모와 유라설화 하루미(賀漏美)가 들어와 있었다. 하루미가 나긋나긋한 자태로 유라천후에게 다가갔다. 설 무영의 눈길이 금발을 늘어트린 하루미에게 향했다. 팔닥거리는 은어(銀魚)같이 동그랗고 파르스름한 눈망울에는 눈웃음이 항상 담겨 있었다. 도톰한 입술과 동그스름한 봉옥이 무척 앙증맞았고, 몸에 착 달라붙는 취의궁장(翠衣宮裝) 탓에 색목인치고는 작은 체구이건만, 육감적인 자태가 완연히 들어나 있다.
벽안금발(壁眼金髮)의 색목미녀(色目美女)! 그녀의 날씬한 체구는 틀에 잡힌 듯 잘 짜여 진 옥각(玉刻)이었다.
"극음지기(極陰之氣)의 옥골(玉骨).....?"
설 무영은 내심 그녀의 체구를 보고 놀랐다. 그는 하루미에게서 소류진과 버금가는 지체인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의 피부는 투명한 피부는 희다 못해 백납같이 핏기가 없었다.
"어머니!........"
유라천후의 손을 잡은 하루미가 상심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달랬다.
".......!"
설 무영은 유라천후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고 측은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허지만 그로서는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설 무영은 혼자의 생각에 잠겼다. 그 자신 말고도 천하에는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설 무영이 바라는 생이라는 것은 따뜻하고 포근한 가족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존재하는 것은 그 따뜻해야할 가족을 붕괴시킨 원흉을 찾아 보복하는 것이다. 단지 그 하나를 위해 그도, 그의 조상도 삼백여 년을 핍박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목숨을 유지했다.
그래서 설 무영은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잘 안다. 어찌 부유한 자의 아픔이 헐벗고 가난한자의 슬픔만 할 것이냐? 허지만 유라천후의 말을 듣고 보니 변황무림의 네 개의 하늘 중에 하나를 소유한 그들의 뒤에도 가슴 아픈 사연은 있다는 것 을 안 것이다.
"모르겠다! 진정한 세인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가 혼자의 상념에 빠져 있을 때 하루미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는 부끄러움도 없이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귀엽고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핑 돌고 있었다. 설 무영은 하루미의 커다란 눈망울 속에 푹 빠져버릴 것 같은 착각에 들었다.
"우리 어머니를 슬프게 하지 말아 주세요!"
건드리기만 해도 톡! 터질 것 같은 육감적인 하루미의 입술이 설 무영을 향해 종알거렸다. 그녀는 유라천후를 슬프게 한 사람이 설 무영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다만.....!?"
당돌한 하루미의 말에 설 무영은 당황스러웠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유라천후가 입가에 미소를 가득담고 하루미에게 말을 했다.
"미아(美兒)야! 소협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란다......."
유라천후의 말을 들은 하루미가 눈가에 웃음을 가득 담고 설 무영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소협!"
말을 마친 하루미는 핏기 없는 봉옥을 일순간 붉히고는 유라천후의 등 뒤로 갔다. 그녀는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설 무영에게 시선을 향했다. 의외로 하루미에게는 순수하고 쾌활한 면이 가득했다. 유라천후의 지긋한 눈빛이 설 무영을 향했다.
"소협에게 정혼에 관해 물어 본 것은 미아 때문에......! 예(禮)가 아닌 줄 알면서도......."
유라천후는 말을 체 잇지 못하고 설 무영의 눈치를 살폈다. 설 무영이 두 손을 쥐고 유라천후의 말을 재촉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미아를 소협이 거두어 줘요.......!"
"네?........"
설 무영은 어리둥절하여 유라천후와 하루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루미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유라천후의 등 뒤에 얼굴을 묻었다.
"물론, 어려운 청이라는 것을 알지만.......!"
"저는........"
설 무영으로서는 다시 은원관계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소생에게는 선대비사(先代秘事)로 구천(九天)을 떠도는 선조의 원혼이 있습니다. 소생의 목숨은 그 원혼을 대신해 태어난 운명인지라, 가족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그 원혼이란 게 무엇인가?"
"그건 밝힐 수 없습니다!"
"그 원혼을 만든 대상자가 누구이건데 소협의 운명을 건다는 것이지?"
설 무영은 아버지와 선조의 유지대로 가족에 관한 비밀을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설 무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입을 열었다.
"무림인이라면 모두 원혼관계일 수도......."
".......!?"
무공을 익힌 무림인 전부가 원수라는 말인가? 유라천후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에 이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인명(人命)이란 귀중한 것 일진데......."
"난 모든 무림인이 대상자라고 하지는 않았소! 다만 어떤 무림인이라도 원혼의 대상자라면 물러설 수 없다는 뜻이오. 비록 내 생명을 잃는다 해도.......!"
자세한 이야기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설 무영의 말에는 구구절절 결연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허지만 유라천후의 마음은 또 다른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본후(本后)나 하루미는 소협에게 어떤 부담도 주지 않을 거야.......! 어쩌면 이것이 필연(必緣)인지도 모르는 것이기에........"
".......!?"
(이것 참! 미치겠네........!)
설 무영은 유라천후에게 천황마제와는 다른 진실함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무슨 말로 유라천후를 이해시킬 것인가를 고심하지만 유라천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원래 우리 미아는 천음절맥(天陰絶脈)으로 태어나서 십오 세를 넘길 수 없는 아이야........"
(허 엇…! 천음절맥이라고.......?)
설 무영은 다시 한 번 하루미를 바라보았다. 유라천후의 등 뒤에서 설 무영을 살짝 쳐다보는 눈길은 태연하고 오히려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자신의 운명에 낙관하는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천음절맥의 지체란, 무공연마를 하면은 백년 수련을 일 년이면 달성하고, 임독이맥(任督二脈)과 천지현관(天地玄關)이 타통 되어 태어난 극음지기의 지체이지만, 십오 세가 되면 극음의 기도를 주체치 못하고 경혈이 굳어 버리는 일종의 천운을 얻는 까닭에 겪는 운명이었다.
"만년빙련실(萬年氷蓮實)로 연명하고 있지만, 그것도 이십 세를 넘기지 못하는 것이 천음절맥이지........! 이 병을 고치는 단 하나의 희망은 극양지기의 현양지체와 부부 연을 맺어 극음의 기도를 순화시키는 방법뿐이 없는 거야......! 그런데 하루미에게 천운인지 만세에 없는 현양지체인 소협을 만나게 된 거야. 소협의 도움과 정심으로 우리아이가 생명을 얻어 밝은 생을 얻기를 바랄 뿐이야. 소협.......!"
"......!?"
유라천후의 말은 딸에 대한 애절하고 간절한 정이 흘러넘치고,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듯 심장을 나타내는 태도였다. 설 무영은 난처한 입장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 머리만 긁적거렸다. 그때, 빙령옥모가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소협도 극음지기인 극빙한수와 만년빙련설을 섭취하고 운공하였기에 혈맥이 순탄치 못하지 않은가?"
"......!"
"극음기공을 익힌 순음지기에 의해 극음빙맥을 순화통천(純化通天)하지 않으면 온전치 못할 것인데 무얼 꾸물거리는 게야?"
빙령옥모의 말은 맞는 것이었다. 극음지기의 영약을 비몽사몽(非夢似夢)에 마구 섭취한 그였기에 운행 중 막힌 혈맥(穴脈)의 기도(氣道)를 용천혈(湧泉穴)에 넣고 임시로 잠그지 않았는가. 그러나 설 무영의 웅심과 혈기는 추호도 자신의 단점과 조건 등을 내세운 핍박에 구애받고 싶지 않았다.
"그건 소생의 잘못인지라, 소생이 감당할 것이요!"
"..........!?"
설 무영의 대담한 답변 한마디에 그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설 무영의 단호한 입장에 유라천후는 탄식을 하며 주저앉았다.
"우리 미아가 더 이상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운명이고, 인연이 아닌 모양이구나......."
"천후님......!"
빙령옥모가 유라천후를 부축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유라천후가 한탄조로 말했다.
"죽어서도 돌아가신 가군을 볼 면목이 없구나....!"
"아닙니다! 아직은 기회가 있으니 심려하지 마소서. 이 옥모가 천하를 다 뒤져서라도 극양지기의 지체를 찾을 것입니다~!"
그들의 사연을 듣고 있던 설 무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그도 엉킨 혈도를 풀어야 무공을 펼칠 수 있고, 또한 양강지기를 이룬다면 태천혼원승공(太天魂原承功)이 갑절의 공력을 얻는다고 신검성황(神劍聖皇)의 비록에 기록되어 있었다. 설 무영은 전혀 악의가 없는 그들의 마음에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하고, 나 또한 양강지기를 이룰 기회가 아닌가.......!)
마음을 굳힌 설 무영은 유라천후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며 정중하게 두 손을 보아 읍하였다.
"허지만! 소생은 마음을 굳혔소! 천후님을 빙모(聘母)로 부르기로......!"
"저, 정말인가…?"
유라천후는 빙령옥모를 젖히고 벌떡 일어서서 설 무영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설 무영은 급히 무릎을 꿇으려는 유라천후를 제재하였다.
"이렇게 까지는.......!?"
두 사람의 자세가 엉거주춤 하였다. 두 사람은 은연중에 상대방의 내공의 깊이에 놀라고 있었다. 설 무영은 유라천후의 공력이 오 갑자 이상의 내공이 실린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무리한 공력으로 자신을 내세우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빙모로 모시기로 작정한 이상 자신에게 유라천후가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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