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향은 종이뭉치에 시선을 둔 유관필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년, 주제를 압니다. 감히 장주님을 연인으로 두겠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월향의 그 말은 반쯤은 장난으로 전언의 글월을 전했던 유관필의 마음을 가볍게 했지만, 이어진 월향의 말에 다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하지만, 이 년 장주님의 그늘에 살고 싶습니다. 차면 이지러지고 마는 달, 꽉 채워도 곧 사라지고 마는 향기가 아니라, 그저 열 두살 때 처음 받은 월향이 아니라, 한 사람의 여인으로 장주님의 곁에서 마음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뭐라 불러야 할 지 모르겠소. 기명이 아니라 원래 이름이 무엇이오?"
"부모도 없이 전쟁통에 쫓겨 고아로 살다보니 딱히 따로 이름이 없었습니다. 열 두살에 동기로 팔려와 처음 받은 이름이 월향이지요."
"이 자리가 파할 때까지 이름을 생각합시다. 뜻을 정한 것 같으니 내 어찌 하겠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유가장 근처의 땅을 구매했다 들었소. 그게 사실이오?"
"네. 그러합니다. 작은 집을 지을 생각입니다."
"이 곳을 나오면 무슨 일을 할 생각인게요? 유가장 근처는 알다시피 가난한 사람들 뿐이라오. 무엇을 팔수도, 무엇을 사기도 힘든 곳인데, 호구지책은 있는 거요?"
월향은 말이 없었다. 곤란해하는 월향을 보던 유관필이 뜬금없이 종이뭉치에서 한 장의 종이를 덜어내더니 뜬금없이 월향의 필체를 칭찬했다.
"단정한 서체요. 공부가 깊어 보이오."
"아닙니다. 그저 손님들의 말동냥을 한 것 뿐입니다. 공부가 깊지 않습니다. 시경을 읽은 정도입니다."
"경서를 읽었단 말이오. 허어. 그럴 것 같았소. 이러면 어떨까 싶소만. 내 집에 들어와 사시오. 내 아들의 선생님이 되어 주시오."
"예?"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야 사람인게요. 나 때문에 기적을 파내고, 기루를 그만두는 소저를 모른 척하고 편히 살지는 못하겠소. 그렇다고 아내를 두고, 다른 여인을 취해 살 생각도 없소. 다행히 내 집엔 남는 방도 있고, 이렇게 단정하고 바른 서체를 가진 선생님이 필요하기도 했다오."
"장주님......"
"아이를 가르치고, 맛있는 것을 먹고, 그 동안 축난 마음을 채우기 바라오. 마음이 꽉 차서 속이 허하지 않게 되면 다시 이야기를 하십시다. 소저의 미래에 대해서 말이오. 일단 내 곁에서 좀 쉬시오. 소저의 쓸쓸한 얼굴만 봐도 배가 고프겠소."
월향이 유관필에게 주려고 집었던 고기전을 젓가락에 들고서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놓치고 어깨를 흔들거리다 곧 울고 말았다. 유관필은 태연하게 월향이 떨어뜨린 육전을 상에서 주워서 먹으면서 말했다.
"윤영이 좋겠소. 빛날 윤에, 영원할 영. 난 소저의 앞날이 빛나고 영원했으면 좋겠으니까. 땅은 샀으니 그냥 두고, 집은 짓지 마시오. 내 안에 일러 소저의 방을 꾸며 놓으라 할테니. 그럼 쉬시오. 난 고민에 빠진 노인네들을 데리러 가야 하니 이만 일어나겠소. 달포면 그만 둘 수 있다 들었으니. 그 때 사람을 보내겠소."
월향이 일어서는 유관필을 향해 읍하고는 정성스럽고 길게 흐트러지지 않는 절을 했다.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결에 꽂힌 꽃잠의 장식이 반짝하고 빛을 냈다. 유관필은 그녀의 인생이 저 꽃잠의 장식처럼 영원히 빛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루에는 여전히 고민에 빠져있는 적송자와 당척이 식어버린 차를 앞에 두고서 턱을 괴고 있었다. 유관필이 다루에 들어가자, 고민에 빠져 있는 두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일행이 유난히 반가운 기색을 하면서 유관필을 맞았다. 당가의 총관 당확이 유관필에게 잠깐 밖에서 뵙자는 전음을 전하고는 밖으로 나왔는데, 당확을 따라나섰더니 청성에서 온 듯한 중년인 하나도 유관필과 당확을 따라 나오는 것이었다. 당확이 유관필을 보고는 사정하듯 말했다.
"장주님. 제발 저희 가주님을 설득해 주십시오. 지금 고민중이신 것 같은데, 만약 가주님께서 소실을 들이는 쪽으로 선택을 하시면, 그 뒤에 일어날 일들이...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장주님. 저희야말로 부탁드립니다. 아, 전 청성의 중양자라고 합니다. 장로님께서 도적을 파하시고 내려가신다면, 저희는 청성산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회수해야 합니다. 청성으로부터 받은 내공을 파하고, 사지의 근맥을 잘라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적 어르신이 청성산을 내려오시려면, 사지의 근맥을 잘라야 한다는 말입니까?"
"모든 문파가 같습니다. 청성으로부터 받은 것들은 청성을 내려가며 거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게 도와주시지요. 유장주."
"청성은 적 어르신으로부터 받으신 것이 없는 것입니까?"
"네?"
"무슨 놈의 도량이 그 도량을 믿는 도사가 그만둔다는 이유로 사람의 몸을 해한다는 말입니까? 그런 이치가 있는데도 청성이 바른 도를 따르는 도량입니까?"
유관필의 목소리는 컸기 때문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유관필의 목소리에 놀란 당척과 적송자가 다루의 밖으로 나오자, 유관필이 중양자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청성파가 도량이긴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든 문파가 같습니다. 문파의 핵심무공을 지닌 채로 하산을 허락하는 문파는 없습니다. 청성파도 다르지 않을 뿐입니다."
"청성으로부터 받은 것은 놓고가야 한다 이 말씀인거지요?"
"그렇지 않게 도와달라는 겁니다."
"청성파는 그렇군요. 청성산엔 도가 없군요."
"말씀이 심하십니다. 장주!"
"청성산에 도가 있다면, 산을 내려가고자 하는 도사에게 제일 먼저 요구해야 할 것은 무공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청성의 도를 설파하지 말라는 약속을 받아내야 했을 겁니다. 70평생을 도사로 살아오신 적 어르신에게 청성의 도를 말과 행동으로 누구에게든 전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셔야 했습니다. 도량에서 중요한 것이 과연 무공입니까? 도입니까?"
중양자는 허를 찔려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곤혹스런 얼굴의 중양자를 보던 그를 수행하던 젊은 제자들이 모여든 사람들을 흩으려하자 유관필이 그것을 제지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모인 사람들 모두가 유관필의 입술에 집중했다.
"제가 최근에 화산기담이라는 야담집을 본 일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나연중은 멋있었습니다. 제가 이런 팔과 몸으로 나연중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정신은 꼭 본받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연히 당가의 어린 소저를 만나서 무가와 인연이 이어졌습니다. 예인이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솔직하고 꾸밈이 없고, 잘못을 말해주면 고칠 줄 아는 아이였으니까요. 그러다 적 어르신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소탈하고 꾸밈이 없고,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해주는 어르신이 전 좋았습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사고무친인 저한테는 아버지같은 분이셨으니까요. 그저 좋았습니다. 제 밥을 드시고 환하게 웃는 것도 좋았고, 제 아이 손을 잡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나무와 지붕을 날아다니시는 것도 좋았습니다. 맛있는 것을 좋아하셔서 예인이와 늘 투닥거리시는 것도 좋았습니다. 어느 날 제 아이가 어르신께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요. 어르신께서는 아이에게 말해주셨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요. 사람이란 살아가게 되면 살아지는 거라고요. 궁금해하는 아이에게 떡을 물려주시면서 맛있는 것을 맛있다고 하고, 아프면 아프다 하고 그렇게 솔직하게 살아가다보면 신선이 된다 하셨습니다. 아이같으셨습니다. 전 나이를 먹은 어른 중 어르신 같은 분을 뵌 적이 없습니다. 누구든 속이고 살지요. 저도 가끔 남이 아니라 저 자신을 속일 때가 있습니다.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합니다. 청성산엔 신선이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중양자는 말이 없었고, 적송자는 부끄러운 듯 뒷머리를 긁었으며, 당척은 격정에 휘말려 있었다. 그래, 어찌되었든 살아가면 살아지게 되는 법이다. 꼭 당문의 가주가 천하제일의 무위를 가지고, 마누라의 존경을 받으며 살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멋대로 살아가는 것도 문제지만, 자신을 속이고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애써 변명하며 살 이유가 자신에게는 없었다. 그래, 난 좀 더 으스대며 살고 싶었어.
당척이 피식 웃으면서, 혼란스러운 눈의 중양자를 향해 한 마디 말을 던졌다.
"중 장로, 제수씨에게 들었는데, 내 지금에서야 알았소. 내 아우가 좀 바른 사람이오. 누구든 바른 사람에게서는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오. 눈에 티가 가득 붙어 있거나 얼굴에 낙서가 되어 있어도 모를 땐 상관이 없지만, 면경을 보고나면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소? 까짓 것 고칩시다. 잘못된 것을 알고 고치면 그건 훌륭한 일이 되지만, 우기기 시작하면 그저 바보가 되니 말이오. 여러분. 당가의 가주로서 말합니다. 오늘부터 당가는 가문을 떠나려는 사람에게 행하던 폐혈과 근맥절단을 폐지하겠습니다. 떠나라고 사정을 해도 붙어있고 싶은 가문을 만들겠습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기분이 좋아진 당척이 아직도 흥분한 유관필의 어깨를 툭하고 살짝 치면서 말했다.
"그만, 가세나.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네. 자네도 어쨌거나 대강은 해결한 눈치고, 각자 마누라에게 좀 뜯길 일이 남았지 않나. 우리 마누라가 자네 집에 있다니 일단 자네 집으로 가세나. 고문님 일은 제가 청성파와 담판을 지어서라도 해결하겠습니다."
"아닐세. 장주의 그 말이 계속 마음에 남는구만. 보잘것없는 사이비 도사인 내게서 청성산의 향취를 느꼈다는 말. 거칠 것 없이 살았네만, 난 실은 내가 도사라고 생각해 본 일이 거의 없네. 난 그냥 무인이었지. 도적을 받은 것도 실은 더 강한 무공을 익히고 싶어서였다네. 물론, 도경을 공부는 했지. 공부를 하지 않으면 더 깊은 무공을 익힐 수 없으니까. 평생 수도도 했네. 더 강한 무인이 되고 싶었으니까. 뭐랄까. 허리어림에 힘이 들어가는구만. 장주, 오해는 말게. 청성산엔 진짜 신선들이 산다네. 나와 저 아이로 청성을 판단하지 말았으면 하네. 말이란 언제나 실수를 그 안에 가지고 있는 거니까. 저 아이는 아마 안달이 나서 왔을 것이네. 일면식이 없는 자네에게 매달려서라도 내가 산을 내려와 사는 것을 막고 싶어 그랬을 것이네. 만약 청성에서 내게 무공을 내어달라 햇으면 제일 먼저 나를 도망시킬 아이가 저 아이네. 누구나 급하면 다들 그러지 않는가. 들어가세. 밤이 길었네."
올 때와 비슷한 방법으로 양 팔을 당척과 적송자에게 잡힌 채 경공으로 달려온 유가장은 여전히 고즈넉했고, 아늑했다. 일문을 청해 제갈지민이 돌아간 것을 안 당척이 내일 봄세라는 말과 함께 당가로 돌아갔고, 적송자마저 더 늦기전에 청성산에 다녀오겠다면서, 시일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인사를 하고는 청성산으로 올라가 버리자, 유관필만 덩그라니 남았다. 새벽 공기가 시원했다.
사랑에 들어서 긴 하루를 반추하는 유관필의 장지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오세인이었다.
"이 년, 주제를 압니다. 감히 장주님을 연인으로 두겠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월향의 그 말은 반쯤은 장난으로 전언의 글월을 전했던 유관필의 마음을 가볍게 했지만, 이어진 월향의 말에 다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하지만, 이 년 장주님의 그늘에 살고 싶습니다. 차면 이지러지고 마는 달, 꽉 채워도 곧 사라지고 마는 향기가 아니라, 그저 열 두살 때 처음 받은 월향이 아니라, 한 사람의 여인으로 장주님의 곁에서 마음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뭐라 불러야 할 지 모르겠소. 기명이 아니라 원래 이름이 무엇이오?"
"부모도 없이 전쟁통에 쫓겨 고아로 살다보니 딱히 따로 이름이 없었습니다. 열 두살에 동기로 팔려와 처음 받은 이름이 월향이지요."
"이 자리가 파할 때까지 이름을 생각합시다. 뜻을 정한 것 같으니 내 어찌 하겠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유가장 근처의 땅을 구매했다 들었소. 그게 사실이오?"
"네. 그러합니다. 작은 집을 지을 생각입니다."
"이 곳을 나오면 무슨 일을 할 생각인게요? 유가장 근처는 알다시피 가난한 사람들 뿐이라오. 무엇을 팔수도, 무엇을 사기도 힘든 곳인데, 호구지책은 있는 거요?"
월향은 말이 없었다. 곤란해하는 월향을 보던 유관필이 뜬금없이 종이뭉치에서 한 장의 종이를 덜어내더니 뜬금없이 월향의 필체를 칭찬했다.
"단정한 서체요. 공부가 깊어 보이오."
"아닙니다. 그저 손님들의 말동냥을 한 것 뿐입니다. 공부가 깊지 않습니다. 시경을 읽은 정도입니다."
"경서를 읽었단 말이오. 허어. 그럴 것 같았소. 이러면 어떨까 싶소만. 내 집에 들어와 사시오. 내 아들의 선생님이 되어 주시오."
"예?"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야 사람인게요. 나 때문에 기적을 파내고, 기루를 그만두는 소저를 모른 척하고 편히 살지는 못하겠소. 그렇다고 아내를 두고, 다른 여인을 취해 살 생각도 없소. 다행히 내 집엔 남는 방도 있고, 이렇게 단정하고 바른 서체를 가진 선생님이 필요하기도 했다오."
"장주님......"
"아이를 가르치고, 맛있는 것을 먹고, 그 동안 축난 마음을 채우기 바라오. 마음이 꽉 차서 속이 허하지 않게 되면 다시 이야기를 하십시다. 소저의 미래에 대해서 말이오. 일단 내 곁에서 좀 쉬시오. 소저의 쓸쓸한 얼굴만 봐도 배가 고프겠소."
월향이 유관필에게 주려고 집었던 고기전을 젓가락에 들고서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놓치고 어깨를 흔들거리다 곧 울고 말았다. 유관필은 태연하게 월향이 떨어뜨린 육전을 상에서 주워서 먹으면서 말했다.
"윤영이 좋겠소. 빛날 윤에, 영원할 영. 난 소저의 앞날이 빛나고 영원했으면 좋겠으니까. 땅은 샀으니 그냥 두고, 집은 짓지 마시오. 내 안에 일러 소저의 방을 꾸며 놓으라 할테니. 그럼 쉬시오. 난 고민에 빠진 노인네들을 데리러 가야 하니 이만 일어나겠소. 달포면 그만 둘 수 있다 들었으니. 그 때 사람을 보내겠소."
월향이 일어서는 유관필을 향해 읍하고는 정성스럽고 길게 흐트러지지 않는 절을 했다.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결에 꽂힌 꽃잠의 장식이 반짝하고 빛을 냈다. 유관필은 그녀의 인생이 저 꽃잠의 장식처럼 영원히 빛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루에는 여전히 고민에 빠져있는 적송자와 당척이 식어버린 차를 앞에 두고서 턱을 괴고 있었다. 유관필이 다루에 들어가자, 고민에 빠져 있는 두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일행이 유난히 반가운 기색을 하면서 유관필을 맞았다. 당가의 총관 당확이 유관필에게 잠깐 밖에서 뵙자는 전음을 전하고는 밖으로 나왔는데, 당확을 따라나섰더니 청성에서 온 듯한 중년인 하나도 유관필과 당확을 따라 나오는 것이었다. 당확이 유관필을 보고는 사정하듯 말했다.
"장주님. 제발 저희 가주님을 설득해 주십시오. 지금 고민중이신 것 같은데, 만약 가주님께서 소실을 들이는 쪽으로 선택을 하시면, 그 뒤에 일어날 일들이...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장주님. 저희야말로 부탁드립니다. 아, 전 청성의 중양자라고 합니다. 장로님께서 도적을 파하시고 내려가신다면, 저희는 청성산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회수해야 합니다. 청성으로부터 받은 내공을 파하고, 사지의 근맥을 잘라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적 어르신이 청성산을 내려오시려면, 사지의 근맥을 잘라야 한다는 말입니까?"
"모든 문파가 같습니다. 청성으로부터 받은 것들은 청성을 내려가며 거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게 도와주시지요. 유장주."
"청성은 적 어르신으로부터 받으신 것이 없는 것입니까?"
"네?"
"무슨 놈의 도량이 그 도량을 믿는 도사가 그만둔다는 이유로 사람의 몸을 해한다는 말입니까? 그런 이치가 있는데도 청성이 바른 도를 따르는 도량입니까?"
유관필의 목소리는 컸기 때문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유관필의 목소리에 놀란 당척과 적송자가 다루의 밖으로 나오자, 유관필이 중양자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청성파가 도량이긴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든 문파가 같습니다. 문파의 핵심무공을 지닌 채로 하산을 허락하는 문파는 없습니다. 청성파도 다르지 않을 뿐입니다."
"청성으로부터 받은 것은 놓고가야 한다 이 말씀인거지요?"
"그렇지 않게 도와달라는 겁니다."
"청성파는 그렇군요. 청성산엔 도가 없군요."
"말씀이 심하십니다. 장주!"
"청성산에 도가 있다면, 산을 내려가고자 하는 도사에게 제일 먼저 요구해야 할 것은 무공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청성의 도를 설파하지 말라는 약속을 받아내야 했을 겁니다. 70평생을 도사로 살아오신 적 어르신에게 청성의 도를 말과 행동으로 누구에게든 전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셔야 했습니다. 도량에서 중요한 것이 과연 무공입니까? 도입니까?"
중양자는 허를 찔려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곤혹스런 얼굴의 중양자를 보던 그를 수행하던 젊은 제자들이 모여든 사람들을 흩으려하자 유관필이 그것을 제지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모인 사람들 모두가 유관필의 입술에 집중했다.
"제가 최근에 화산기담이라는 야담집을 본 일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나연중은 멋있었습니다. 제가 이런 팔과 몸으로 나연중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정신은 꼭 본받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연히 당가의 어린 소저를 만나서 무가와 인연이 이어졌습니다. 예인이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솔직하고 꾸밈이 없고, 잘못을 말해주면 고칠 줄 아는 아이였으니까요. 그러다 적 어르신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소탈하고 꾸밈이 없고,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해주는 어르신이 전 좋았습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사고무친인 저한테는 아버지같은 분이셨으니까요. 그저 좋았습니다. 제 밥을 드시고 환하게 웃는 것도 좋았고, 제 아이 손을 잡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나무와 지붕을 날아다니시는 것도 좋았습니다. 맛있는 것을 좋아하셔서 예인이와 늘 투닥거리시는 것도 좋았습니다. 어느 날 제 아이가 어르신께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요. 어르신께서는 아이에게 말해주셨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요. 사람이란 살아가게 되면 살아지는 거라고요. 궁금해하는 아이에게 떡을 물려주시면서 맛있는 것을 맛있다고 하고, 아프면 아프다 하고 그렇게 솔직하게 살아가다보면 신선이 된다 하셨습니다. 아이같으셨습니다. 전 나이를 먹은 어른 중 어르신 같은 분을 뵌 적이 없습니다. 누구든 속이고 살지요. 저도 가끔 남이 아니라 저 자신을 속일 때가 있습니다.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합니다. 청성산엔 신선이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중양자는 말이 없었고, 적송자는 부끄러운 듯 뒷머리를 긁었으며, 당척은 격정에 휘말려 있었다. 그래, 어찌되었든 살아가면 살아지게 되는 법이다. 꼭 당문의 가주가 천하제일의 무위를 가지고, 마누라의 존경을 받으며 살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멋대로 살아가는 것도 문제지만, 자신을 속이고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애써 변명하며 살 이유가 자신에게는 없었다. 그래, 난 좀 더 으스대며 살고 싶었어.
당척이 피식 웃으면서, 혼란스러운 눈의 중양자를 향해 한 마디 말을 던졌다.
"중 장로, 제수씨에게 들었는데, 내 지금에서야 알았소. 내 아우가 좀 바른 사람이오. 누구든 바른 사람에게서는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오. 눈에 티가 가득 붙어 있거나 얼굴에 낙서가 되어 있어도 모를 땐 상관이 없지만, 면경을 보고나면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소? 까짓 것 고칩시다. 잘못된 것을 알고 고치면 그건 훌륭한 일이 되지만, 우기기 시작하면 그저 바보가 되니 말이오. 여러분. 당가의 가주로서 말합니다. 오늘부터 당가는 가문을 떠나려는 사람에게 행하던 폐혈과 근맥절단을 폐지하겠습니다. 떠나라고 사정을 해도 붙어있고 싶은 가문을 만들겠습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기분이 좋아진 당척이 아직도 흥분한 유관필의 어깨를 툭하고 살짝 치면서 말했다.
"그만, 가세나.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네. 자네도 어쨌거나 대강은 해결한 눈치고, 각자 마누라에게 좀 뜯길 일이 남았지 않나. 우리 마누라가 자네 집에 있다니 일단 자네 집으로 가세나. 고문님 일은 제가 청성파와 담판을 지어서라도 해결하겠습니다."
"아닐세. 장주의 그 말이 계속 마음에 남는구만. 보잘것없는 사이비 도사인 내게서 청성산의 향취를 느꼈다는 말. 거칠 것 없이 살았네만, 난 실은 내가 도사라고 생각해 본 일이 거의 없네. 난 그냥 무인이었지. 도적을 받은 것도 실은 더 강한 무공을 익히고 싶어서였다네. 물론, 도경을 공부는 했지. 공부를 하지 않으면 더 깊은 무공을 익힐 수 없으니까. 평생 수도도 했네. 더 강한 무인이 되고 싶었으니까. 뭐랄까. 허리어림에 힘이 들어가는구만. 장주, 오해는 말게. 청성산엔 진짜 신선들이 산다네. 나와 저 아이로 청성을 판단하지 말았으면 하네. 말이란 언제나 실수를 그 안에 가지고 있는 거니까. 저 아이는 아마 안달이 나서 왔을 것이네. 일면식이 없는 자네에게 매달려서라도 내가 산을 내려와 사는 것을 막고 싶어 그랬을 것이네. 만약 청성에서 내게 무공을 내어달라 햇으면 제일 먼저 나를 도망시킬 아이가 저 아이네. 누구나 급하면 다들 그러지 않는가. 들어가세. 밤이 길었네."
올 때와 비슷한 방법으로 양 팔을 당척과 적송자에게 잡힌 채 경공으로 달려온 유가장은 여전히 고즈넉했고, 아늑했다. 일문을 청해 제갈지민이 돌아간 것을 안 당척이 내일 봄세라는 말과 함께 당가로 돌아갔고, 적송자마저 더 늦기전에 청성산에 다녀오겠다면서, 시일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인사를 하고는 청성산으로 올라가 버리자, 유관필만 덩그라니 남았다. 새벽 공기가 시원했다.
사랑에 들어서 긴 하루를 반추하는 유관필의 장지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오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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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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