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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9:49 1,080회 0건
아버지는 땅 속에 묻힐 때도 편하지 못했다. 장례식장에서 볼 수 없었던 고모와 삼촌부부가 따로 도착해서는 이런 저런 참견을 해서 새엄마와 신경전을 벌였다. 인부들은 작업이 중단 될 때마다 인상을 구기며 한쪽으로 가 담배를 피워댔다.

나는 위에서 아버지를 보내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려서도 그랬고 성장한 지금에서도 난 이 집안의 객일 뿐이었다. 주인여자는 어이없는 광경을 흥미롭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시가 조금 넘어서 주인여자의 차를 타고 출발을 했다. 오늘은 학원에 나가야 하는 날인데 시간을 계산해 보면 얼추 7시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가 죽었음에도 난 잘나빠진 일에 대한 책임감을 먼저 느끼고 있었다. 친 아버지였어도 그랬을까?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난 그 섬에 가고 싶다...”

주인여자는 국도를 달리면서 갑자기 짧은 시를 읊었다. 단 2행밖에 안 되는 짧은 시에 어쩌면 그렇게도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것인지 정말이지 저 놈의 시를 볼 때마다 등짝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마치 억지로 발가벗겨진 채 나의 고독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들어나는 것 같아 너무나도 당황스럽게 만드는 그런 시였다.


“모두들 많이 외로워 보이네요. 친척 분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어제 그 분도 그렇고...저도 그렇고...태복씨도 그래요...왜 그럴까요?”

“ ... ...”

왜 그런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나의 주변을 인식할 때부터 난 무섭고 외로웠으니까.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족할 것 없이 살 수 있었던 아버지와 형제들은 왜 그렇게 외로움에 치를 떨었을까? 그리고 상위 1프로 안에 들 정도의 능력과 미모를 타고 태어난 엄마는 또 왜 그랬을까?


“...그런 것을 밝혀줘야 하는 것이 작가들이 할 일 아닌가요?...저 같은 범인들의 몫이 아닙니다...”

내 말에 주인여자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부담감 작렬이네요...후후...!”


장난스럽게 말하는 주인여자를 보면서 말처럼 부담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변했다. 이 여자는 이제 변했다.


“뭘 그렇게 쳐다봐요? 또 절 분석하려는 건가요?”

“인영씨가 달라 보여서요...십대 소녀처럼 들떠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흐음...그렇군요...그러네요...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긴 참 오랜 만이에요...”


심장 뛰는 소리를 들은 적이 나도 있었다. 처음으로 인영이 내 자지를 자기 손으로 잡았을 때였다. 하지만 주인여자가 말하는 것 하고는 다른 것 같았다. 동기 중에 4수를 하고 들어온 효정이 누나가 있었다. 보통은 합격의 기쁨에 취해서 한 학기를 보내기 마련이었는데, 그 누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술을 마시면서 이상한 소리를 했었다.


[...도대체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입시를 준비하고 또 시험을 치르면서는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분 좋은 긴장감에 빠졌었는데... 막상 합격을 하니 모든 것이 엉망이 돼버렸어...난 어디로 가버린 거지?]

난 학생시절을 보내면서 시험이란 것에 치여 본 적이 없었다. 어떤 과목이든 출제자들이 원하는 지점은 너무나 명확하고 뻔했기 때문이었지만 그것은 운이 좋게도 내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었지 일반적인 학생들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그리고 대학입시 4년을 그렇게 보낸 효정이 누나는 이미 시험을 보는 기계가 되어 있었고 오직 입시란 것에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효정이 누나는 지금 서울 본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유명 강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가끔씩 어울려 놀았는데 유명한 만큼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돈을 많이 버니 탐닉하는 쪽으로 생활이 굳어져 가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 누나의 잘 못이었다. 절대로 대학에 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잘 나빠진 서울대에 입학하는 정도였으니 애초부터 목표가 잘 못된 것이었다.

대학에 합격한 친구들 모두가 그렇게 새로운 목표를 정하지 못한 채로 방황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자신의 삶의 목표를 새로 정하는 것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뭘 하고 싶고 또 뭘 가장 잘 하는지를 확인하기 보다는 돈을 많이 버는 쪽으로 노선을 결정해 버렸다. 한 창 삶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시기에 습관대로 또 다른 입시체제에 편승해 버렸다.

광호도 그렇고 정 원장도 그렇고 요즘 20대들이 사회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질타했었지만 난 동의하지 않았다. 종석이처럼 부모 잘 만난 녀석들은 삶에 치일 일이 없기 때문에 사회 부조리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고, 한국처럼 어려운 가정에 태어난 사람들은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대해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중산층 부모 밑에서 자란 친구들은 여유가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들은 자신의 위에 있는 종석이 같은 친구들의 삶을 동경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과연 지금 20대들만의 잘 못일까?

“아무튼 고마워요 태복씨. 덕분에 은사님 말씀이 뭔지 알 수 있게 됐어요. 좀 더 빨리 이럴 수 있었으면...좋았을 텐데...정말 신기해요. 28살짜리 남자를 통해서 내 존재이유를 알았다니 말이에요...”

주인여자의 말엔 많은 아쉬움과 함께 기대감이 담겨있었다. 과연 나를 통해 무엇을 느꼈다는 말인가?

“전 특별히 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후후...작가란 집을 짓는 다는 뜻이죠. 혼자서 집을 짓는 정도의 고통이 스며든 단어지만 전 그래서 그 한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이니까요.”

“... ...”

“...세상 모든 부조리를 먹고 ...그것을 삭여내고 또 삭여서 세상에 조금이라도 이로운 물질을 배설해줘야 하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집을 짓는다니 너무나 단순한 선택인 것 같아요.”

“그럼 뭐라고 부르죠?...지렁이?...”

내 말에 주인여자가 크게 웃었고 나도 웃었다. 주인여자의 말대로 작가란 단어가 단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작가 스스로가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명확하다면 작가란 단어가 그렇게 편협하지만은 않은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인영씨는 야설이란 거 본적 있어요?”

“흐음...네. 남편 때문에 소라란 곳을 알게 됐죠.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는데 나중엔 즐겨찾기를 해 놓고 들어가게 되더군요, 하하하!~”

“야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국가에서는 좋지 않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말이죠. 미성년들도 그곳에 들어오고...그들도 지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것이든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양쪽이 공존하기 마련이죠. 그런 면에서 야설이 일정부분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상상은 상상일 뿐이니까...애초에 있는 자지, 있는 보지를 없다고 하라고 강요하는 것 자체가 잘 못 된 거죠. 후후...”

주인여자의 말에 놀랐지만 웃음이 나왔다.

“인영씨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오니까 놀라운데요?”

“그곳의 소설을 모두 다 본 것은 아니지만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바라는 것을 알 수 있겠더군요.”

나는 주인여자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사실, 난 그동안 섹스에 대한 생각이 없었기 때문인지 야설이나 야동에도 특별하게 관심이 없었다. 희한한 것은 종석이었다. 원하기만 하면 어떤 여자들과도 침대에서든 차에서든 아니면 길바닥에서든 섹스를 할 수 있는 녀석이 야사, 야동, 야설에 빠져있었다. 내가 알기로 녀석이 섹파와 찍은 야사와 야동만 해도 1테라 바이트가 넘을 것이었다.


“섹스...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원하는 것은 섹스란 결론이죠. 야설을 남성학 교재로 사용해서 여학생들에게 가르친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남자가 여자를 모르는 측면이 많지만 사실, 여자들이 남자들에 대해 너무 무지하죠. 특히, 한국 여성들은 말이에요.”

“요즘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한국 여자들도 많이 변했죠.”

“흐음...그렇군요. 나도 변했으니까...하하!...”

갑작스런 일로 피곤할 법도 한데 주인여자는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혈색도 좋아보였고 편안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향기...그랬다. 이것은 여자의 향기, 여자의 냄새였다. 그동안 미처 느끼지 못했던 여자의 냄새였다.


“야설이 일정부분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한국에선 다른 부분의 문제처럼 심각한 상황이 있습니다.”

주인여자는 내 말에 호기심을 느꼈는지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전방을 주시했다.

“어떤 ...문제죠?”

“야설도 그렇고 야동, 야사도 그렇고 모두 젊은이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건 마치 가요에서 십대를 위한 음악만이 판을 치는 상황과 비슷한 거죠. 분명히 노인들도 장애자들도 성욕이 존재 할 텐데 말입니다.”

“어차피 자율적이란 측면에서 볼 때 차별 한다고 보기 보다는 그들이 참여하지 않기 때문 아닐까요?”

“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게 만드는 이유가 있겠죠. 십대들 콘서트에 나이 먹은 사람이 간다면 어떨까요? 클럽에 노인들이나 장애자들이 간 다 면요?...”

“하하하! 꼴리라고 올린 건데 태복씨는 참 여러 가지를 생각했네요...네...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 곳에서 조차 한국 사회의 불평등한 모습을 본다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겠죠. 흐음!~ 태복씨는 작업을 시작하려면 저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네요...”

“...예?”

“...친부모의 일로 태복씨는 자신을 들어내지 못하고 있어요. 스스로 만든 연좌제에 갇혀있는 거죠. 제 친구들과 2pm 콘서트에 가도 누구도 뭐라 하는 애들이 없어요. 클럽에 가는 친구들도 있고...놀랍죠?”

사실, 정말로 놀라운 얘기였다. 내 문제를 직접적으로 얘기한 것도 그렇고 주인여자의 나이에 십대들 콘서트에 가거나 클럽에 갔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웠다. 나는 아직도 벽에 갇혀서 옴쭉 달싹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첫사랑이었던 인영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존재하고 있던 문제가 인영의 일이 촉매제로 작용한 것뿐이었다.


“노인들의 섹스문제...장애자들의 섹스문제...모두 그들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문제에요.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니까...”

어떤 상처든 치유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감추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들어내야 했다. 곪아터진 것은 짜내고 움푹 파인 상처는 약을 바르고 스스로의 치유능력에 맞게 기다려야했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이 아픔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남편은 저와의 섹스가 원만하지 않아서 많이 힘들어 했어요. 하지만 저도 어쩔 수가 없었죠. 서로를 사랑하지만 소유하지 않은 채로 살았죠. 조카들이 커가는 재미를 느끼면서...각자가 알아서 해결했죠. 저야 뭐 특별히 성욕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요.”

“... ...”

“조카들이 서울로 올라간 후부터 남편이 변하기 시작했죠. 어떡해서든 자신이 나를 흥분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 그것이 쉽지 않으니까 자신이 사귀고 있는 여자까지 집으로 데려왔죠. 그 여자...정말 매력적인 여자였어요. 그 나이에 그런 몸을 하고...”

나도 그렇지만 주인여자의 일도 알면 알수록 놀라운 일에 연속이었다. 결혼이란 것을 해 보지 않은 나로서는 두 사람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인데 거기다가 아내가 있는 집에 다른 여자를 데려오는 일은 정말로 파격적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인남자는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이 여자를 흥분하게 만들고 싶었단 말인가?

“그 여자...나를 보고도 전혀 위축되거나 당황하지 않았어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남편에게서 상황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아무튼 대범한 여자였어요... 남편과 여자는 섹스를 했고 난 옆에서 지켜봤는데도 흥분이 되지 않았어요...흐음...”

“...실망을 많이 하셨겠네요...”

“... 남편은 그래도 오히려 절 위로했죠. 대단한 남자죠? 어떡해든 남편이 바라는 것을 들어주고 싶긴 하지만...그게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이젠 가능하지 않을 까요?...”

나와의 섹스 얘기를 하려다가 나는 그만 두었다. 두 사람의 사이에 끼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럴까요?...저도 사실 그게 궁금해요. 남편과 내가 과연 가능할지 말이에요...”

섹스는 복잡했다. 구구단처럼 쉽다고 느끼다가도 어느 순간 미분, 적분처럼 까다롭고 난해하게 다가왔다. 거의 모든 나라가 일부일처제라는 결혼제도를 택하고 있지만 왜 한 여자, 한 남자에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일까? 우주선을 달나라에 보내고 화성에 보내고 외계인과의 교신을 시도하는 것보다 인간들이 좀 더 행복한 성생활을 누리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보였다.


“하하하!~ 후후...”

주인여자가 갑자기 크게 웃어서 조금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미안해요. 후후...갑자기 나와 태복씨가 야설 속 주인공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 달도 안 된 사이에 나는 벌써 세 여자와 섹스를 했다. 두 여자는 남의 여자였고 한 여자는 이혼을 한 여자였다. 더군다나 그녀들과의 섹스는 아주 쉽게 너무나도 쉽게 시작되었다. 내게서 벌어진 일들이 과연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상인씨와는 ...어때요?”

‘어때요’라는 말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관계를 하고 있냐는 말인지 아니면 느낌이 어땠냐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 주인여자를 쳐다보았다.


“저와는 다른가요? ...느낌이?...”

솔직히 상인과의 섹스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내 의지로 시작한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경숙이나 주인여자처럼 기억나지가 않았다. 하지만 주인여자에게 상인의 얘기를 듣자 내 자기가 발기가 되었다. 그리곤 상인을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우리가 야설 속 주인공이 맞는 다는 생각이 드네요...세 들어 사는 집의 주인여자와 이런 대화를 하는 젊은 남자는 없을 테니까요.”

주인여자가 웃었고 나도 웃었다.

“형수를 본지는 오래됐습니다. 제 의지가 아니어서 그런지 아니면 섹스에 대한 생각이 없다가 갑자기 시작해서 그런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당시엔 형수를 하루라도 안 보면 미칠 것 같았는데 ...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고 부터는 참을 수 있게 되더군요...”

“... ...”

“실망했나요?”

“아...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태복씨는 저와 비슷하게 그런 욕구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정말로 그랬었습니다. 발기도 안 됐었는데...갑자기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저도 왜 제가 변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묻지도 않은 얘기를 주인여자에게 시시콜콜 다하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자에게는 내 모든 것을 얘기해주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초희에 대해 궁금하죠?...”

실은 아까부터 초희의 일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있었다. 그런데 주인여자가 먼저 얘기를 하는 것을 보니 나만 이 여자에게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나와 주인여자는 대화 상대가 없었던 것일까? 그래서 이렇게 서로에 대해 끊임없이 주저리주저리 얘기하고 싶은 것인가?


“...정말로 초희의 소설을 보면서 질투를 느끼셨나요?...”

“... ...”

상당히 예민한 질문이었지만 내 궁금증이 그런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소설은 신동이 없는 분야였다. 다른 분야에서는 십대 때 일찍 그 재주가 만개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소설이라는 분야에서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소설가들 중엔 참혹할 정도의 처절한 삶을 살아낸 사람들이 많았고, 또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게 보일지라도 정신 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사람들이 많았다. 헤밍웨이만 해도 자신의 폭력성을 주체하지 못 해 스페인 내전에까지 참전할 정도였으니 소설이란 장르는 어린 나이에 쉽게 담아낼 수 없는 크기라고 할 수 있었다.


“...태복씨도 글을 쓰고 있죠?...”

사실이었다. 정확하게 내가 중학교 때 가출했다가 아버지에게 끌려 들어와 엄마에게 뺨을 맞은 후부터 글을 썼었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었고 저절로 시작했다. 당시 내가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유일한 일탈의 장소였을 것이었다. 미친 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고 다행스럽게도 글을 쓰면서 태생적으로 나의 내면에 존재하던 폭력성이 글 속에 녹아들었고, 가출을 결정할 때와 같은 휘발성의 감정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더 이상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머리가 폭발할 것 같은 그런 감정들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고, 장롱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하지 않아도 됐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그림에서 안정을 찾지 못하죠...글을 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직업 외에 다른 것을 항상 갖고 있어야 하죠. 그것이 음악이든 낚시든 운동이든 사람들은 다른 것을 함께 병행해야 안정을 찾을 수 있어요.”

“...저희 과 선배 중에 김민기란 분이 있는데...오히려 음악가로 명성을 날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맞아요. 그 분 미술을 전공했죠. 오히려 음대 친구였던 조영남이 화가가 됐고...하하하! 재밌네요.”

주인여자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안정된 것이 그림을 시작해서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나 혼자만 보는 글이었기 때문에 문장에 대해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 오타에 대해 골치 아파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쓴 기록들이 모여서 어느새 일반 공책으로 180권에 달하고 있었다. 우연히 시작한 글쓰기를 통해 내 감정들을 객관화 시킨 덕분이었다.


“...제가 다시 글을 쓰지 못했던 것은 남편 때문이었어요...”

“... ...”

“십대, 이십대, 삼십대까지 전 한 번도 안정된 생활을 해 본적이 없었죠...아파트란 소설은 어쩌면 동생의 비극이 아니더라도 나왔을 소설이었어요. 부모 없이 어린 동생과 살면서 받았던 상처들...그리고 성장하면서 느꼈던 이해할 수 없는 사회구조들...은사님은 그런 감정들 모두를 삭여내야 한다고 했었는데...동생의 죽음을 마주하자 전 은사님을 증오하기 시작했어요...”


아파트란 소설은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었지만 상당한 재미를 주는 소설이었다. 시니컬하고 드라이한 문체로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써내려간 11권의 소설 속엔 사람에 대한 증오와 사회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보통의 작가들은 글 말미에 가면서 어떤 식으로든 화해를 시도하기 마련이었지만 주인여자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어떠한 화해의 시도도 하지 않고 끝을 맺고 있었는데 왜 그런 결말이 나왔는지 이제야 짐작이 갔다.

아무튼 그런 결말로 인해 아직까지도 독자들은 소설이 끝나지 않았다고 외치고 있었고 다음 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 없는 불친절한 소설가...끝나지 않은 진행형의 소설...출판사와 주인여자가 철저하게 마케팅을 한 것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저 두 가지 요소는 아파트란 소설 신드롬의 핵심이었다.


“...초희는 ...학송씨 친딸이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엄마랑 그렇게 닮았는데...”

“피를 섞지 않아도 닮은 사람은 너무나 많죠...저도 너무 놀랐으니까요. 학송씨는 애를 좋아하는데 초희 엄마는 쌍둥이를 낳고는 더 이상 애를 낳지 못하니까 초희를 입양한 모양이에요. 아마 학송씨는 지금도 하나 더 입양하자고 조르고 있던데...”

[그럼 그때 아침을 먹으면서 학송이 늦둥이를 보자고 한 것은... 입양을 하자는 것이었나?]

광호의 새 가게 오픈식에 참석하고 돌아올 때 초희엄마는 나와 초희가 잘 맞을 것 같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초희엄마는 내가 입양됐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인가? 학송과 초희엄마가 나에 대한 일을 알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초희엄마는 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그냥 한 얘기인가? 그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것저것 겹쳐지면서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학송부부도 그렇고 쌍둥이 언니 오빠도 그렇고...누구하나 초희에게 다른 피라고 부담을 준적은 없어요. 뭐 제가 모르는 부분도 있겠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부분은 그렇죠.”

나도 주인여자의 생각이 옳다고 느꼈다. 적어도 내가 봤던 학송 가족들의 모습은 정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초희가 14살 때였나...가출을 했었어요. 모두 로미 녀석 때문이라고 했지만 제가 알기론 초희 때문에 로미가 가출한 거죠. 몰라서들 그렇지 로미는 행동력이 없는 단순한 애에요. 로미가 망나니처럼 굴게 된 건 바람둥이 아빠의 대한 영향도 있지만 그것을 부추긴 건 초희였죠. 걔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대단히 복잡한 애에요. 여리면서도 강하고 단단하면서도 무른 ...참...얘기 하면서도 복잡하네요...”

초희는 나와 비슷한 나이에 정체성에 대해 방황하고 있었다. 공감은 됐지만 그것이 대단한 글을 쓸 정도의 이유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그 나이 땐 누구나 홍역처럼 겪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라에 가보면 필명 ‘변기’를 찾아보세요. 그럼 초희의 글을 볼 수 있고 녀석의 또 다른 면을 알 수 있을 거에요.”

“흐음...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 투성이네요. 녀석이 야설을 쓰나요?”

“놀라운 일이지만 섹스신도 제법 잘 쓰더군요. 뭐 말로 설명할 수는 없고 직접 보면 알거에요. 그러고 보니 태복씨는 야설을 잘 보지 않았군요? 그렇게 유명한 작가를 모르다니...”

“녀석을 가르쳐 보고 싶지는 않았나요? 어떤 식으로든 ...”

차의 속력이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내 질문에 주인여자가 반응하는 것으로 보아 초희에 대해 상당한 고민을 했던 것 같았다.


“...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은 절대로 가르치는 직업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제가 그렇죠. 전 항상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어요. 제가 원하지 않아도 말이죠. 동생이 제부를 데리고 왔을 때 전 결혼을 반대했었어요. 제부에게 자기 인생 모든 것을 거는 동생이 한심하기도 했고...”

“...그만 얘기하셔도 됩니다...”

“아니에요...하고 싶어요. 태복씨에겐 모든 걸 다 말해버리고 싶어요...”

“... ...”

“남편도 그렇지만 제부는 건설업을 할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를 보고 10초 만에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망가질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제부는 낭만적인 사람이었죠. 차라리 가난뱅이 화가였거나 음악인이었다면 그렇게까지 반대하진 않았을 거에요. 동생이 독립적인 인간으로 변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제부는 동생에게 ...정말로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했어요. 그런 제부가 죽었으니 ...”

“... ...”

“...초희를 가리고 있는 안개를 치워주고 싶긴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녀석은 나와 비슷한 십대를 보내고 있었고...분명...제가 은사님께 그랬던 것처럼 제게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죠...”

“... ...”

“...겁이 났어요...후후...이젠 녀석이 안쓰럽게 생각되지만...저도 변한 모양이에요. 저도 은사님처럼 그렇게 조금...아주 조금 삶을 알게 된 걸 까요?”

“...지구에서 겨우 28년 밖에 살지 못한 제게 인생에 대해 물어보시면 어쩝니까?”

“하하하! 미안해요. 이상하죠? 태복씨는 전혀 28년 산 남자로 보이지가 않아요...애 늙은이...후후...!”

“...초희 아버님이나 초희 어머님은 ...초희에 대해 잘 모르고 계신 모양입니다. 예를 들면 초희가 성적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입니다.”

난 되는대로 넘겨짚어서 말을 했다.


“아무리 부모여도 자식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죠. 더군다나 녀석처럼 벽속에 꽁꽁 숨어 있다면 말이에요. 로미 말로는 초희가 7개 국어를 한다더군요...그런 애가 성적 때문에 얼마 안 남은 기간에 갑자기 미대에 간다고 했을 때 전 더욱 ...걔가 무서웠어요. 어떤 인간이든 빈틈이 있기 마련인데 ...”

야설 얘기를 하다가 이상한 쪽으로 결말이 나고 말았다. 초희의 전혀 다른 면을 마주한 나는 할 말이 없었고 그로인해 침묵이 흘렀다. 주인여자나 나나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지만 답답해하거나 위축되진 않았다. 나도 그렇지만 주인여자도 초희 문제를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이래서 이놈의 직업을 싫어했다. 온전히 그림만 가르치는 것도 좆같은 일인데 그 외의 일들까지 신경 써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틈...빈 틈...나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했던 아버지나 엄마도 내게서 틈을 찾지 못해서 그랬던 것일까? 그렇게 오래전 얘기도 아님에도 난 내 과거를 기억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숨이 막혔던 것만 기억이 날 뿐 나로 인해 힘들어 했던 아버지와 엄마의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초희를 생각하니 엄마가 느꼈을 막막함과 아버지가 느꼈을 답답함이 내게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뭔가는 해주고 싶은데...해줘야겠다는 마음은 간절한데 1미터 정도의 장막을 치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서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았다.


“형님은 제 과거를 알고 있나요?”

“우리...그 이요?”

“...예...”

“갑자기 왜 그런 걸 묻죠? ...그이가 태복씨 과거에 대해 알 수가 없잖아요?”


주인여자는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난 전부터 초희엄마의 말이 신경 쓰여서 물은 것이었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여자는 나에 대해 전혀 모른 채 관심을 갖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주인남자도 나에 모르고 있을까? 광호와의 일로 주인남자와 가까워지면서 겪은 바로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내가 한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을 노리고 있는 여자와 연결 된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쉽게 대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아닌가? 공무원으로서의 연륜이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연기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래도 좋을 것이었지만 이상하게 그것이 신경 쓰였다. 주인남자와 연결된 사람들은 이 지역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주인남자가 나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렇다면 상황은 복잡해 질 수밖엔 없었다.

하긴...그들이 나에 대해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나를 통해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괜한 생각으로 에너지만 소진시키고 말았다. 이제 주인여자의 문제는 정리가 됐고 초희가 문제였다. 모르면 몰라도 내가 녀석을 가르치고 있는 상태에서 입시에 방해될 소지가 충분할 만한 얘기를 알게 된 이상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섣부르게 건드리면 벌집을 건드린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또 다시 침묵이 흐르다가 주인여자는 휴게소가 보이자 차를 그쪽으로 몰아갔다. 차를 세운 그녀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내렸고 나도 따라 내려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태양 빛은 따가웠지만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쓰레기통에 버릴 때 쯤 주인여자가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한 없이 인자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커피를 건네는 주인여자를 보자 머리가 맑아졌다.


“그거 아세요? 인영씨를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거요?”

“태복씨도 그래요...전과는 다르게...”

경숙이 말한 내 몸 앞에 있던 것이 사라져 버린 모양이었다. 비과학적인 얘기는 싫어했지만 기라는 것은 어쩌면 정말로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다 마신 뒤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남의 차고 또 보험도 안 됐기 때문에 난 시속 60키로 이상의 속력을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운전을 해야 했지만 짜증이 나진 않았다. 괜찮다고 하던 주인여자는 피곤했는지 조수석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잠이 들고 말았다. 너무나 편하게 잠이 든 주인여자의 모습은 아름답고 섹시했지만 성욕이 올라오진 않았다.

몸을 섞은 사이였지만 주인여자에게서 난 모성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여자에겐 어떤 얘기든 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인가? 오랜 동안 잊고 있었던 친모의 생각을 떠올렸지만 역시나 내 기억 속엔 낯선 존재였다. 친모에 대한 생각으로 주인여자에 대한 감정이 약간 혼란스러웠지만 음악을 들으면서 금방 정리 할 수 있었다. 주인여자가 변한 것만큼 나도 변했다.


다행스럽게도 차가 막히지 않아서 원룸에 도착했을 때는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고생하셨어요... 전 이제 출근을 해야 합니다.”

“원장님께 말씀드리면 오늘은 쉬어도 될 텐데 고지식해요, 후후...태복씨도 고생 많으셨어요.”

여러 가지가 포함된 주인여자의 말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는 각자의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태복씨?...”

주인여자가 불러서 나는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살아있는 거...맞죠?...”

“네...과분할 정도로요...”

주인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내 원룸으로 들어왔다. 약간 피곤했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가볍게 샤워를 한 뒤 난 내 차를 끌고 학원으로 달려갔다.




“어머, 아빠샘!~”

희정, 경화, 유림이 나를 보고는 합창하듯 외쳤다. 나는 세 여자에게 미소를 보였고, 미리 와 있던 학생들이 나를 보고 웃었다.

“못 오신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오셨어요?”

유림이 내게 말했다. 내가 학원에 나오지 못 한다니 무슨 말이지? 원장에겐 아버지의 죽음을 알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연락도 안 했고 그래서 이렇게 나온 것인데 이상했다.


“제가 못 온다고요?...누가요?”

“이상하다...원장님이 그러시던데...”

소란스런 상황에서 경숙이 원장실에서 나왔다. 경숙은 나를 보더니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그녀가 놀라는 것이 전에 일 때문인지 아니면 유림의 얘기 때문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경숙은 전과 똑 같이 나를 대했고 나 자신이 얄밉도록 나도 늘 하던 대로 경숙에게 인사를 했다.

경숙은 나를 지나쳐 유림에게로 다가가 뭔가 얘기를 주고받았다. 은은한 향수 냄새와 함께 경숙의 몸이 내 눈으로 가득 들어왔다. 그러자 경화와 유림, 희정의 몸까지 시야에 잡히면서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성욕이 끌어 올라오고 말았다.

이곳에서 난 경숙과 짐승처럼 섹스를 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지금 상황 또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경숙도 의식하고 있을 까? 그때를 떠 올리며 흥분을 하고 있을까?

유림과 얘기하는 것을 보니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경숙이 유림과 희정, 경화를 대하는 말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친언니처럼 살갑게 대하던 말투는 사라지고 차갑게 느껴졌다. 경숙이 유림에게 뭔가를 지시하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무장실로 들어갔다.


“어휴!~ 요즘 저 언니 왜 저래? 무슨 일 있는 거야?”

“그러게...무서워서 학원에 나오겠니? 흐음...”


유림과 경화가 울상이 되어서 말했고, 희정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가 학원에 안 나오는 사이 무슨 일인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내가 말 한 것 때문인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와 새로운 관계가 된 사람들도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뭘 의미하는 것이고 어떻게 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변해버린 것은 사실이었다.


노크를 하고 원장실로 들어가니 정 원장과 유정이 나를 보고는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내 표정을 밝게 바꾸고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와아!~ 장 선생, 너무 오랜만이다 그지?”

유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며 그렇게 말했다.

“아니, 이 여자가 서방님보다 다른 남자를 더 반가워하고 말이야...이거 소외감 느끼는데...”

유정과 정 원장은 늘 그렇듯이 내게 하던 그대로의 반응을 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는 지금은 확인할 수 없었다. 유정은 항상 그렇듯이 내게 금방 내린 원두커피를 권했다. 나는 커피 잔을 받아들고 정 원장 앞에 앉았고, 유정은 내 옆 에 앉았다.


“휴가는 잘 보내셨어요?”

“후우!~ 파리 시내를 미친년처럼 돌아다녔지 뭐, 하하!”

“야야!~ 쏘셜 포지션이 있지...미친년이 뭐냐, 미친년이?”

“어라? 포지션 따지는 사람이 마누라에게 야야는 뭐냐?”

정 원장과 유정이 내 앞에서 보이는 모습은 3년 동안 내게 보였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다르게 다가왔다. 사람들을 분석하는 정말이지 진저리나도록 싫어하는 내 습관이 또 발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경숙 일행에게 내가 오늘 나오지 못 할 것이라고 얘기를 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고 내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 사실을 이 두 사람이 어떻게 알았을까? 주인여자가 연락을 했다면 집에 도착했을 때 나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었다.

초희엄마도 내가 고아로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정 원장과 유정은 내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 과거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들은 누굴 통해서 그 사실을 알았을까?

결과적으로 초희엄마는 학송과 연결되니 아마 가장 나중에 알았다고 볼 수 있었다. 정 원장과 유정은 서울 본원의 길 원장과 연결되었다. 길 원장은 도대체 내 과거를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오직 천 선생 화실에서만 그림을 준비해서 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에 길 원장은 본적도 없었다. 내가 길 원장 학원에 들어가게 된 경위는 4수를 하고 입학했던 효정이 누나의 소개 덕분이었다.

모두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 어쩌다가 알게 된 것 뿐이었지만 이들은 분명 내 과거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길 원장은 엄마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밤을 세고 왔더니 몸이 정상이 아니어서 오늘은 일찍 들어갔으면 합니다.”

내 말에 정 원장과 유정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정이나 정 원장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 까지 직접적으로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었다.


“그, 그래? 그럼 들어가서 좀 쉬어야지...많이 피곤해 보인다.”

정 원장이 말하자 유정도 그의 말을 거들었다. 나는 두 사람을 궁지에 몰 생각은 없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엄마였기 때문이었다. 유정과 정 원장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경숙은 사무장실에 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유림, 경화, 희정이 굳은 얼굴로 일을 보고 있었다. 학생들은 수업 시작이 임박하자 서둘러서 자기 반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에서 내려 차에 올랐다. 머리를 많이 써서 그런지 눈이 침침해서 미칠 것 같았다. 좌석을 뒤로 해 잠시 눈을 감아 버렸다. 눈알을 빼서 찬 물에 넣었다가 다시 끼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 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디오를 켜자 돈데보이란 음악이 흘러나왔다. 초희엄마가 구워준 시디가 차에 있었던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한 동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누워만 있으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모든 퍼즐을 완성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확인만 하면 그 뿐이었다. 누운 채로 핸드폰을 들고 문자를 날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 숨만 쉬고 있었다. 내가 뿌린 먹이를 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시디에 있는 모든 음악을 다 들을 때쯤? 아니면 24시간? 아니면...

생각한 것 보다 빠른 답장이 도착했다. 엄마였다. 나는 엄마에게 길 춘택이란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지의 여부와 함께 사실을 알려줄 경우 미술학원 강사를 때려치우겠다고 보냈다. 이에 엄마는 만난 적이 있다는 답장을 보냈다. 엄마답지 않은 성급한 반응이었다.

결국 내 예상이 맞았다. 길 원장은 엄마를 알고 있었고 나이도 어린 내가 본원에서 특별대우를 받은 것은 내 능력 때문이 아니라 엄마의 능력 덕분이었다. 갑자기 웃음이 나오려고 하고 있었고 이상할 정도로 몸이 들썩거렸다. 이런 감정은 오래전 정말로 아주 오래전 느꼈던 것이었다.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여자 애들을 강간하던 녀석들에게서 느꼈던 그런 감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나는 성장했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감정을 추스르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길 원장과 엄마가 연결이 되어있었다. 그로인해 정 원장과 유정은 껄끄럽지만 나를 맡았고 엄마 덕분으로 지역 유지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도의원의 조카딸인 로미와 연결된 것은 단순히 내가 발기가 안 됐기 때문이 아니었다. 발기가 되어 로미와 섹스를 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했다. 학송이 처음 상담에서는 노발대발 하다가 갑자기 변한 것은 역시 로미 삼촌 권중에게 내가 로미를 입학 시킨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을 꿈꾸는 한 여자와 깊게 연결이 되어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하나로 뭉쳐지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비슷한 삶을 사는 나를 무척이나 못 마땅해 했던 엄마였는데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아버지를 사랑한 것이었다. 어떤 이유가 아버지와 헤어지는 원인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표현하는 방법을 모를 뿐 아버지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자존심으로 나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 이었을 텐데 그렇게까지 엄마가 약해진 것인가?

막상, 엄마의 약해진 모습을 확인하고 나자 기분이 이상했다. 예상은 했지만 엄마의 재혼은 정략적인 것이었다. 그 만큼 외로웠을 엄마를 떠 올리자 너무나 안쓰러웠고 애처롭게 느껴졌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를 권력을 갖고 있는 여자가 안쓰럽게 느껴진다는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과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쳐서 그런지 갑자기 엄청난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눈까풀이 이렇게 무거운 것인 줄은 정말 몰랐다.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나는 좌석에 누운 채로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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