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49장
"아빠 때문이야!"
꿈 속에서 나는 딸아이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들었다. 그것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마지막 자각몽이었다. 지금껏 꿈을 꾸며 겪어왔던 그 모든 과정을 한번에 뛰어넘어, 나는 이제 분노와 절망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딸과 마주하고 있었다.
"아빠만 아니었어도 오빠는 죽지 않았을 거야!
딸아이는 아들의 무덤 앞에서 며칠 동안이고 떠날 줄을 몰랐다. 보다못한 내가 딸을 데리고 오기 위해 무덤을 다시 찾아갔을 때, 딸아이는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내게 소리를 지르며 증오심을 드러냈다.
"미안하구나, 미란아."
아들이 묻혀버린 자그마한 묘를 바라보는 내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젊은 날의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 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오빠를 살려내! 오빠를 살려내란 말이야!"
그렇게 심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딸의 모습을 아마도 나는 처음 보았던 것 같다. 표정 한 줄기 얼굴에 띄우는 일조차 드물었던 딸의 그런 모습을 처음으로 보면서도, 나는 미란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그 사실이 스스로 못내 괴로웠다. 왜 그리도 딸에게 무심했던 걸까? 그리고 그녀에게도....
"아빠가 정말 미워!"
괴로워하는 딸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져갔다.
장면이 바뀌어 나는 이제 하늘을 날고 있었다. 꿈 속에서의 나는 여전히 한 마리의 나비였다. 그 꿈은 바로 지난 번에 내가 꾸었던, 호접몽을 연상케 했던 바로 그 꿈이었다. 내게 인과응보의 필연을 경고해주었던 그 꿈.
작은 날개를 퍼덕여 창공을 헤매고 있던 중에, 나는 또다시 그 "누군가"의 모습을 보았다. 분명 내가 아님에도, 나와 무척 비슷하게 느껴지는....그 날개 없는 한 마리의 나비. 그가 또다시 땅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쳤고, 그렇게 그대로 죽어버렸다.
"미안하구나, 아들아."
그제야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죽어버린 그 나비가 누구였는지.
"미안해."
*
식은땀에 젖은 채로, 나는 잠에서 깨었다. 몸을 일으켜 본 나는, 내가 책상 위에서 팔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시간을 확인했지만 다행히도 아직 아침이 밝지도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서 나는 들떠있는 마음을 되도록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지난밤에 들었던 유정이의 목소리는 결코 꿈이 아니었다. 나는 오늘 그녀를 만날 것이고, 어떤 형태로든 그녀와의 관계에 대한 답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서연이는....? 서연이는 어떻게 하지?
"괜찮아. 먼저 공항에 갔다가, 시간에 맞춰서 서연이를 만나러 가면...."
유정이가 일본으로 떠나는 항공편의 출발 시간은 오전. 서연이의 부모님을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후이니.... 잘만 하면 유정이를 만나고 나서도 늦지 않게 서연이에게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속으로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치솟았지만, 나는 어찌되었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최악의 상황이 도래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스런 일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로 했다.
자꾸만 유정이를 만나고 나서, 서연이를 만나러 가지 못하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정이를 만나는 순간 나의 시간은 그대로 정지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를 만나고 난 이후에도, 내가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도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만약 내가 계획한 대로 유정이를 만나고 나서 서연이를 만나러 가게 된다면, 서연이를 보러 가고 있을 순간의 나는 이미 유정이를 일본으로 떠나보낸 다음일까? 유정이를 저 먼 곳으로 떠나보내고 나서도, 나는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서연이의 얼굴을 마주하러 갈 수 있을까? 그것도 결혼이라는 큰 문제를 떠안고서?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자."
우선은 유정이를 만나야만 했다. 그 어떤 고민과 갈등이 뒤따른다 해도 지금 이대로 유정이를 보지도 못한 채, 그녀를 떠나보내는 것만은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유정이의 얼굴을 보고 나서, 그녀와 이야기를 해야 했다. 복잡한 생각은 그 이후로 미루자고 나는 마음 먹었다.
애매하리만치 이른 시간에 깨어났지만 나는 다시 침대에 눕지 않았다. 몸을 씻고, 단정한 옷을 입고, 좁은 방 안에 덩그러니 앉아 유정이와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주길 바라며 나는 그 자리에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었다.
약속시간이 두 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공항으로 가기에는 여전히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공항에서 유정이를 기다리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 신발을 신고 복도로 나섰다.
"응?"
걸음을 채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나는 이질적인 느낌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언젠가부터 굳게 닫혀있기만 했었던 302호의 문이, 애매한 틈새를 남기고 열려있었던 것이다.
옆집 여자가 왜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기억에 남은 것이 없던 나였지만,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부터 그 문이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는 것 만큼은 알고 있었기에 나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과거의 실수를 다시 한번 돌이키는 어리석은 행동이었겠지만, 불가항력에 이끌려 나는 문 틈새를 들여다보았다.
안쪽에서 기이한 소리가 자꾸만 울려나왔다. 그 순간의 나로서는, 아마 그 어떤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다 할 지라도, 그 방 안으로 들어서고 싶어하는 나의 충동적인 이끌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이 장소는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었고, 더불어 여전히 풀리지 않은 비밀을 간직한 신비의 공간이었다.
"저기.... 계세요?"
이 공간에 옆집 여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을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떨리는 걸음을 한발, 두발 내딛어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그러자 여전히 유령처럼 그 곳을 떠돌아다니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삭막한 눈빛, 표정 없는 얼굴, 염세적인 분위기.... 비록 얼마 만의 재회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내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종잡을 수 없는 시선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태도까지도.
"오, 오랜만이네요."
나는 옆집 여자의 모습을 보자 왠지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봐선 안 될 것을 보고 말았다는 느낌. 열지 말아야 할 것을 열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고, 시선이 마주쳤다.
"엄마를 만나러 가는 거야?"
"네....?"
아득하게, 낭떠러지 밑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으로는 엉겁결에 그런 말이 나왔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뒤통수를 망치로 세게 맞은 듯이 뭔가가 크게 흔들렸고, 세상이 뒤집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애써 부여잡고 나는 쓰러질 듯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너, 너는...."
산산조각났던 거울의 파편들이 퍼즐처럼 제자리로 돌아와, 온전한 모습으로 붙었다. 그와 동시에 깊숙히 가라앉았던 기억들이 다시 뇌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끊어졌던 필름을 다시 재생시키기 시작하자 잊고 있었던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떠올라 눈 앞을 수놓았다.
골목길에서 옆집 여자와 나누었던 이야기, 그녀가 했던 말들, 내가 느꼈던 감각까지도 모두....
"미란아....?"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이름이 뇌리 한 켠에 새겨져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마치 너무도 친숙한 이름을 부르듯이, 나는 그녀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러자 미란이는 말없이 내게서 등을 돌리고는 방 어딘가를 뒤져 내 앞에 손바닥 만한 작은 액자 하나를 가져왔다.
"아빠, 이 사진이 보여?"
"........"
액자 속의 사진에서 나는 두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 아니, 실은 여인이라기엔 아직 너무도 어린 여자아이와, 그 아이를 품에 안아 든 한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리가 어질해지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미란이를 안아들고 있는 유정이의 모습을.... 사진 속에서 본 것이었다.
"왜 이 사진 속에는 아빠의 모습이 없을까?"
"........"
물론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미란이도 구태여 내 대답 따위를 듣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내 눈 앞에서 액자를 치워버리고는, 방 안을 서성이던 걸음을 멈추고 얌전히 의자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말해 봐, 아빠."
"뭘....?"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나왔지만 나는 되도록 침착하게 대답을 이어나가려 애썼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딸아이 앞에서 공포라는 감정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가서 엄마를 만나고 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 거야? 엄마를 곁에 붙잡아둘 거야? 아니면 머나먼 땅으로 엄마를 이렇게 보내버릴 거야?"
"........"
긴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온 딸과 마주하여, 이런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미란이는 내가 무슨 대답을 하길 원하며 지금 내게 이것을 묻는 걸까?
"모, 모르겠어. 나는 그냥.... 유정이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아빠, 정말로 엄마를 사랑해?"
"무슨 뜻이야?"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그 마음 말이야. 정말로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아빠가 그렇게 믿고 있는 건지 스스로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미란이는 또 "운명"이라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이 온전한 것이라 믿었다. 유정이를 사랑하는 이 마음이 다른 무언가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 아님을 나는 미란이에게 전하고 싶었다.
"난 유정이를 진심으로 사랑해. 시간을 몇 번이고 되감아 돌아가더라도 유정이를 사랑할 거야. 맹세할 수 있어."
"하하하하하!"
미란이가 실성한 듯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나는 움찔했지만, 잠자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눈물까지 글썽일 정도로 미친 듯이 웃어대더니, 히스테릭한 모습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내게 말했다.
"그래, 말 한번 잘했어, 아빠."
"뭐?"
"엄마는 그래서 불행할 수 밖에 없었던 거야."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방 안을 서성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대다가, 그녀는 나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너무도 오싹하게 느껴졌다.
"보여줄게, 아빠."
"뭐, 뭘 말이야?"
"아빠가 지난 날에 했던 선택들을."
순간, 주변이 흔들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내 착각이 아니었다. 울렁증이 치밀어오를 정도로 흔들림이 심해지더니 결국 사방이 모조리 뒤섞였고, 내 몸은 어느 순간부터 그 작은 공간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나는 그 방으로부터 멀어져 다른 장소를 향해 헤엄쳐가고 있었다.
한바탕 소용돌이에 휩쓸린 후에 나는 다시 눈을 떴다.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의식이 다시 희미하게 돌아왔을 때, 나는 전혀 다른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령처럼 허공에 붕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저건, 설마...."
마치 오래된 옛날 영화에서 앵글이 아래를 비추듯이, 나는 흑백으로 물든 세상에서 누군가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평범한 얼굴, 그리고 단정하게 차려 입은 옷.
"나....?"
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듯 괴로워하면서도, 내가 바라보고 있는 나는 누군가를 찾기 위해 쉴 새 없이 달리고 있었다. 커다란 가방이나 캐리어를 손에 든 채로 분주히 걸어가고 있는 주변 사람들이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장소가 공항이라는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아....!"
미친 듯이 달리던 내가, 어느 순간 무언가를 보고 그 자리에 서서히 멈춰 섰다. 나는 또다른 나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함께 바라보았고, 함께 전율했다.
유정이가,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유정이가 먼발치에서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다시금 달려가기 시작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얼마나 떨고 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또다른 나의 생각이나 감정이 나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그것은 전해질 필요도 없이 나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보고 싶었어."
볼륨이 고장난 TV를 보는 것처럼, 비록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해."
유정이에게 이야기하는 내 입모양에 맞추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도 덩달아 그 말을 소리내어 입 밖으로 내뱉어보았다. 기억 속의 장면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조금은 희미하게 그려지고 있는 유정이의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이 말을 전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에 전율했다.
"내 곁에 있어줘."
이게 정말로 이미 지나간 과거의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나는 유정이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반복되어 왔던 수 차례의 시간 속에서 그녀는 내 말에 어떤 대답을 했을까.
나는 유정이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무정하게도 그 순간 나와 유정이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눈 앞에는 이내 다른 모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공항의 모습이 사라지고, 대신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예식장이 나타났다. 적지 않은 사람들의 박수갈채 속에서, 카펫 위로 천천히 오르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턱시도를 단정하게 갖춰 입은 내 모습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이제 떨리는 두 다리로, 조금은 길게 느껴지는 카펫 위를 걷고 있었다. 그 길의 끝에서 반짝이는 순백의 드레스를 몸에 두른 채,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 여인은 유정이가 아니었다.
"유정아...."
박수를 치고, 폭죽을 터뜨리며, 즐겁게 환호하는 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유정이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온통 흑백으로 물들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그녀만이 내 눈에 빛나고 있었다.
유정이는 멀찍이 떨어져 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이 화려한 카펫 위에 서서 다른 여인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하며 마침내 신부와 입맞춤을 했을 때, 나는 하객들 사이로 보이는 유정이의 얼굴을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결혼식을 올리는 내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유정이의 눈가에, 결국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는 여전히 신부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
또 장면이 바뀌었다.
아들이 태어났고, 그 이후 내 삶은 조금 더 힘들고 빡빡하게 변했다. 여느 아버지들처럼 나도 가정을 위해서 무던히 노력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삶의 수많은 관문들이 대개 그러하듯, 힘들어도 반드시 이겨내야만 하는 과정이었다.
아내는 나를 많이 사랑해주었다. 나를 사랑해주었고, 아이를 사랑해주었고, 가정을 사랑해주었다. 그녀는 좋은 아내였으며, 또한 좋은 어머니였다. 그랬기에 아마도 나는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행복의 와중에 다른 누군가는 점점 더 외로워져 갔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유정이에게 해줄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었다....
*
또 다른 장면이 이어졌다.
실로 오랜만에 유정이를 찾았다. 얼굴을 못 본지 무척 오래되었지만 유정이는 마치 어제 보았던 것처럼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어쩐지 그 사이에 그녀는 좀 더 야윈 것 같았다.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아보여, 나는 그녀에게 병원에 가볼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녀는 딸을 홀로 버려두고 오랜 시간 집을 비우고 싶지 않다며 언제나처럼 내 권유를 거절했다. 살며시 열린 방 문 틈새로, 마치 경계하는 듯이 고개만 빼꼼 내밀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 쌍의 눈동자가 느껴졌다.
"미란아, 이리 와 보렴."
나는 용기내어 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딸은 들은 체도 않고, 내 면전에서 세차게 문을 닫았다.
*
결국 그녀는 어느날 쓰러졌고, 그 때부터 병원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이따금씩 바쁜 일상의 와중에도 억지로 시간을 내어 병원으로 그녀를 찾아가곤 했다.
폐암이라니....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처음엔 어찌나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았던지.... 젊었을 적엔 그 누구보다 건강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언제부터 담배를 그렇게 입에 대기 시작했는지,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유정이가 누운 병원 침대의 머리맡에는 언제나 미란이가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미란이의 곁에는 아들이 있었다. 유정이가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 둘은 부쩍 함께 있는 시간이 늘었다. 나는 그것이 내심 다행한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유정이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펐다.
*
결국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극심한 슬픔 속에서 나는 그녀가 남긴 유언을 떠올렸다. 그 유언의 대부분은 미란이에 관한 것이었다.
*
미란이를 우리 집에 머물게 하고는 있었지만, 그 아이는 좀체 나와 교류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내 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다. 어찌되었든 그녀가 마음을 터놓고 지낼 상대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유정이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핏줄인 그 아이가,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
그것조차 욕심이었을까. 어느 날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던 나는, 다급하게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고 넋이 나가 부리나케 응급실로 향했다. 적색 램프가 들어온 응급실의 문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나는 아들의 수술을 기다렸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나는 두 번째 절망을 겪었다.
*
아들이 죽고 나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나도, 아내도, 그리고.... 미란이도.
미란이는 온종일 먹지도 않고 조촐하게 마련한 연구실에 틀어박혀 무언가에 몰두했다. 어릴 적부터 내 자식들에게는 뭔가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아들만 해도 사물을 보는 방식이 남들과 달랐고, 무언가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줄을 몰랐다.
유정이는 살아있었을 때, 이따금씩 미란이의 특별한 재능에 대해서 줄곧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딸아이가 특별한 재능으로 말미암아 속박 된 삶을 사는 것보다는 여느 아이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기만을 바랐다. 나는 그런 유정이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죽음은 결국 미란이를 바꾸어 놓고 말았다.
*
거의 몇 년 동안, 미란이는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식사를 하는 것조차 나와 마주치지 않도록, 나를 피해가며 했기에 그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조심스럽게 연구실의 문을 두드려봐도 딸아이는 내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가끔 그 안에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이한 소리가 울려나오곤 했다.
그랬기에 그녀가 거의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바깥에 나왔을 때 나는 무척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이는 여전히 내게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의 손에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쥐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은백색으로 반짝이는, 아주 투박한 시계의 형상을 하고 있는 물건이었다.
*
어느 날, 뱃 속이 요동치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실타래를 도로 되감듯이, 나는 무언가로부터 역행하여 어느 곳으로 거슬러 올라와 있었다. 이제 나는 다시 내가 유정이를 만났던 그 공항에 서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
나와 유정이는 숲속을 걷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한국 땅과는 미묘하게 다른, 조금 더 습하고 덥게 느껴지는 공기에 나는 적응하려고 애썼다. 가끔 드라마 속에서나 봤던 기모노 풍의 일본식 옷을 몸에 두른 유정이는, 내 팔에 다정한 모습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함께 숲속을 거닐며 우리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후계에 대한 문제, 결혼에 대한 문제, 가문에 대한 문제..... 뭐 그런 것들을 말이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세계에 뛰어든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열심히 노력했다. 유정이는 곁에서 그런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주었다. 그녀는 행복해했고, 나 또한 그런 유정이를 보는 것이 행복했다.
하지만 이따금씩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나는 우울해지곤 했다. 나는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것들을 버리고 이 곳에 왔다. 한국 땅에 남겨두고 온 누군가를 떠올리면, 나는 참을 수 없이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
딸아이가 태어났다. 유정이는 딸에게 일본의 이름이 아닌, 나의 본래 성을 딴 이름을 지어주었다.
*
미란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나와 유정이는 일본에서 혼례를 올렸고, 우리는 행복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여겼다.
가끔씩 딸아이는 이상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거나, 어느 것 하나를 손에 쥐고는 잘게잘게 해부해보곤 하는 취미가 생긴 것 같았다. 한번은 딸아이가 쉴 새 없이 혼잣말을 웅얼거리길래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
어느 날, 딸아이는 미친 듯이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세상이 떠나갈 것처럼 통곡하는 딸아이의 울음소리에, 나도 유정이도 깜짝 놀라 그녀를 달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실성한 것처럼 흐느끼는 와중에도 미란이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딸아이에게 정서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
미란이가 어느날 곤히 잠들었을 때, 나는 몰래 딸아이의 방으로 들어가 그녀가 끄적이고 있던 것들을 보았다. 옅은 글씨로 적혀있는 몇 가지 단편적인 글귀들이 눈에 띄었다. 도통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들이었다.
반드시 필요한 것들, 바꿔서는 안 되는 것들. 너덜너덜한 종이의 끄트머리에 그런 말들이 적혀있었다. 그 아래에 조그마한 글씨로 "오빠"라는 단어도 희미하게 새겨져있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또다른 한쪽 귀퉁이에는, 마치 해바라기처럼 생긴 시계의 그림이 엉성하게 그려져있었다.
*
나는 뒤늦게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후계의 자리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실 그것을 바랄 이유도 없었다. 내가 이 길로 들어선 이유는 오직 하나, 유정이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나는 다음 당주가 가려지는 과정에서 멀찍이 물러나 그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다.
21대 당주의 후보가 마침내 둘로 압축되었다. 하나는 하야토 가의 수제자였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나의 처남.... 유정이의 남동생이었다.
정통성을 따지자면 처남이 후계를 계승하는 것이 옳았지만, 본토의 원로들은 더이상 한국의 핏줄에 당주의 자리를 맡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논쟁은 결투로 이어지게 되었다.
미란이는 이 시끄러운 논쟁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근래 들어 딸아이의 관심사는 무엇 하나로 딱 좁혀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미란이는 도통 내게 말을 해주지 않았다.
*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혼자만의 연구를 거듭하던 미란이는 어느날 마침내 알 수 없는 물건 하나를 만들어냈다. 은백색의 초시계.... 도무지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
"아빠, 이제 알겠어?"
처음으로 나는, 마치 꿈처럼 비현실적인 그 공간에서, 현실의 미란이가 내게 전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미란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귓가에 또렷하게 울렸다.
*
이제 나는, 또다시 선택의 갈림길이 되었던 그 공항으로 어느새 되돌아와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유정이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서글픈 얼굴을 한 채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어쩐지 내가 평소 알고 있던 그녀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나요?"
그녀는 예전에 내게서 받아갔던 그 약속의 말을 다시 한번 꺼냈다.
순간 눈가에 눈물이 또 핑하고 맺혔다. 왜 진작 알지 못했던 걸까? 그녀의 배가 부풀어있었다. 이 때 그녀는, 이미 뱃속에 내 딸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고,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
"아빠."
눈을 떴을때 나는 비로소, 그 좁디 좁은 302호의 바닥 위로 되돌아와 있었다. 눈 앞에는 현실의 미란이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새카만 칠흑색 빛깔을 하고 있는 초시계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것은 평소 내가 알고 있던 그 은백색의 초시계가 아니었다. 아마도 나는 이전에 딱 한번, 그 검은 시계를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예전에 아빠가 내게 했던 유일한 약속, 기억하지? 아빠가 그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나는 가만히 지켜보겠지만, 단 한 가지, 아빠가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을 해주기로 했었잖아. 그 약속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아빠는 이 능력이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아니야. 이 원리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뒤따르는 무수한 제약과 법칙에 대해 반드시 알고 있어야만 해. 아빠는 그동안 내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 마음껏 이 능력을 즐겼겠지만, 사실 나는 아빠에게 고작 사랑놀음 따위나 하라고 이 능력을 손에 쥐어준게 아니란 말이야."
"안 돼!"
미란이의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검은 시계를 본 순간부터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고 있었기에, 나도 모르게 소리칠 수 밖에 없었다.
"안 돼! 지금 내 기억을 지워서는 안 돼.... 난 반드시 유정이를 만나러 가야한단 말이야!"
"난 지금까지 아빠가 온갖 선택을 내리도록 아빠를 도왔고, 또 옆에서 그 모습들을 지켜봐왔어. 하지만 결국엔 마찬가지야. 엄마가 괴로워지거나, 또는 내가 괴로워지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지."
"그러지 마.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미래도 있을 거야.... 내가 꼭 그렇게 만들어 볼게."
"그건 불가능해. 내가 개입해서 아빠의 정해진 미래를 바꿔버리는 순간부터 나는 법칙을 어기는게 되니까. 아빠가 엄마를 쫓아 일본으로 가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시간을 되감을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지."
"하지 마! 제발!"
"미안해. 하지만 아빠는 나에게 이미 약속했잖아."
미란이의 손가락이 무정하게도 칠흑색 초시계의 금빛 바늘을 돌렸다. 어김없이 뱃속이 요동치며, 나는 다시 빙글빙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넌 정말로 잔인하구나. 내가 널 그렇게 만들어버린 거니?"
정신을 잃기 전에 나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의식이 멀어지는 순간, 딸의 모습조차 눈에서 사라져버렸다. 다만 눈이 감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의 희미한 목소리를 들었다.
"아빠. 나도 이젠 지쳤어.... 끝내고 싶어."
*
눈을 떴다.
맑게 개인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뭔가 아주 깊은 잠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꿈을 꾼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모처럼 깊이 자고 일어난 것 같아서 나는 개운함을 느꼈다. 부스스하게 기지개를 켜며, 나는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내 방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창문을 열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문득 방을 한번 슥 둘러보았다. 조촐하게 꾸며진 내 방은 여전히 평상시 그대로였다. 하지만 분명 오늘 하루는, 여느 때처럼 흔하디 흔한 그런 날이 되지는 않으리라.
"그래, 오늘은 서연이 부모님을 뵙는 날이니까."
우리의 결혼에 대한 문제, 우리의 아이에 대한 문제, 나아가서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문제를 결정해야만 하는 날이었다. 어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연이를 만나기로 한 시간은 저녁 무렵이었지만, 나는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몸을 씻었고 단정한 옷을 골랐으며, 미용실에 들러 머리도 깔끔하게 꾸몄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냈다.
"아, 긴장 돼. 방 청소라도 좀 하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으려나?"
내 방 꼴이 어지러운 것이야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왠지 그 난잡한 모습을 보고 있는게 마음가짐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괜히 방 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단정하게 정리된 방을 보면 조금이나마 긴장이 가라 앉을 것 같았다.
처음엔 가벼운 청소로 시작했는데 하다보니 규모가 꽤 커져 결국 대청소를 하고 말았다. 쓸모없는 물건들은 서랍에 모두 넣어버렸고, 깔끔하게 바닥을 쓸고 닦았다. 반짝반짝 정리된 방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좀 흡족해졌다.
"그럼 이 박스는 옷장 안에 넣어둬야겠다."
잡동사니들을 정리한 작은 박스를 옷장 안에 넣어두기 위해, 나는 옷장 문을 열었다. 안쪽에 박스를 밀어넣다 말고, 나는 문득 익숙하게 느껴지는 서랍 하나를 열어보았다. 그 서랍은 옷장 안에서도 가장 깊숙하게 느껴지는 구석진 공간이었다.
"이상하다. 이쪽에 뭔가 중요한걸 넣어뒀던 것 같은데...."
왠지 나는 그 서랍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안에는 분명히 내가, 정말로 중요하지만 결코 사용하지는 않는 어떤 특별한 물건을 넣어두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물건이 무엇인지 좀체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에이, 별 것 아니겠지."
몇 번이고 그 서랍을 뒤져보았지만, 안쪽에는 구깃구깃한 옷가지들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애초에 이런 깊숙한 공간에 보관할 물건이라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나는 떠오르지 않는 어떤 물건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는 서랍을 다시 탁 하고 닫았다.
때마침 휴대폰이 진동 소리를 내며 울렸다.
"여보세요?"
- 자기야, 준비 잘 하고 있어?
서연이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오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응. 그럼. 늦지않게 갈 테니까 너무 걱정 마."
- 헤헤. 알았어. 그런데 자기 오늘 기분 좋아보이네?
"그런가? 방 청소를 해서 그런가봐."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청소를 했기 때문인지, 확실히 아까보단 긴장이 덜 되는 것 같았다.
열어둔 창문을 통해서 청명한 빛깔의 하늘이 보였다. 날씨가 무척 쌀쌀할 때인데도 불구하고 오늘은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그 맑은 하늘에, 작은 점 같이 새겨진 비행기 한 대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마치 새처럼 보이는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을 보자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
"자기야!"
서연이는 일부러 그녀의 집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마중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나를 데려가기 전에 우리끼리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제법 볼록하게 솟아오른 배를 조심스럽게 감싸안고 있는 서연이를 보자 문득 사랑스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많이 기다렸어? 힘들 텐데 마중은 괜히 나와가지구...."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고 싶어서 그러지. 나도, 우리 아기도."
서연이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들어 자신의 배 위로 얹었다. 그것이 쓰다듬어달라는 신호임을 나는 잘 알기에 부드럽게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아가, 아빠 왔어."
조용히 속삭여보았다. 안쪽에서 생명이 태동하는 듯한 떨림이 느껴져왔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 떨림을 느끼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서연이도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
이듬해, 나와 서연이는 함께 졸업했다. 하지만 우리는 학교에서 열린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우리는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식의 막바지에 턱시도와 드레스 대신 학사모, 학사복을 입고서 동문들과 함께 졸업사진을 찍었다.
서연이의 친구들은 그녀가 그렇게 빨리 시집을 가버릴 줄 몰랐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러면서도 드레스를 입은 서연이의 미모를 극찬하곤 했다. 신랑인 내가 보기에도 그 날의 서연이는, 진심으로 내게 과분하게 느껴질 만큼 눈부시게 예뻤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와주어서 나는 조금 쑥스러우면서도 기뻤다. 부모님은 결혼식이 있기 전날까지 내 바가지를 긁으셨지만, 다행히 식을 올리는 당일에는 서연이를 품에 안아주셨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거창하게 다녀오지 못했다. 서연이의 거동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나면, 우리끼리 꼭 제대로 신혼여행을 다녀오자고 나는 그녀에게 약속했다.
"하아....!"
대신 우리는 결혼식을 올린 그 날 밤, 어느 신혼부부보다도 더 뜨겁고 애틋한 첫날밤을 보냈다. 서로의 몸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우리는, 아이를 배에 품은 채로도 서로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여러모로 고민하고 노력했다.
"으응...! 좋아."
아이를 배면서 한층 풍만하게 부풀어오른 서연이의 가슴을 부드럽게 감싸쥐자 그녀가 달뜬 신음을 흘렸다.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그만큼 더 애틋한 애무에 그녀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아!"
높게 울리는 서연이의 신음성. 비록 화려한 허니문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행복해했고, 나 또한 그런 그녀로 인해 행복을 느꼈다.
*
"자기, 그 소식 들었어....?"
"응? 뭘?"
침대 위에서 서로의 알몸을 끌어안은 채로, 나는 서연이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있었다. 서연이는 말을 꺼내야하나 무척 갈등하는 눈치였지만, 결국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정이 말야. 자퇴했다더라.... 난 몰랐는데."
"유정이?"
서연이가 그녀를 유정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어쩌면 유정이에게 내내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
"생각하긴 싫은데,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이 들어. 유정이가 자퇴해버린게 나 때문은 아닐까 하고...."
"........"
유정이.... 한유정.
이제는 왠지 그 이름이 너무도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아직도 나는 눈을 감으면 그녀의 얼굴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럴 때마다 왠지 내가 그녀에 관한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는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그래도 그 애.... 나를 참 많이 따랐는데. 생각해보면 너무 모질게 대한 것 같아서."
웅얼거리는 서연이를 꼭 끌어안으며 나는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지나간 일인데 뭐."
"그렇겠지? 떠올리지 말까?"
"응."
내가 등을 살며시 두드려주자 서연이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새근거리는 그녀의 숨소리를 느끼며, 나는 뱃속의 아이에게 행여나 몸을 부딪히지 않으려고 신경 썼다.
"뭘까?"
나는 무엇을 잊고 있는 걸까. 이제는 아득히 먼 옛날의, 흘러간 기억 정도로만 남아있는 유정이의 흔적....
나는 그녀를 많이 사랑했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유정이도 나를 그만큼 사랑했던 것 같다. 서연이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결국 그 이후로 유정이와 만날 수가 없었다. 괴로웠지만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렇게 유정이의 잔재 역시 내게서 점점 옅어져갔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나요?"
가끔은 희미한 기억의 틈새를 비집고, 어느 들판에서의 약속이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그 또한 이제는 크게 의미가 없으리라. 유정이도 어디선가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살고 있으면 좋으련만.....
"아."
바보같이, 거의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주책 맞게 눈물이 한방울 흐른다. 서연이가.... 아니, 아내가 깨지 않도록 나는 조심스럽게 눈물을 훔쳤다. 왠지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
더위가 심했던 어느 8월의 여름날, 서연이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다행히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해주었다.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만 해도 다소 떨떠름한 반응이셨던 양가의 부모님들 또한 결국 손자의 모습을 보고 나니, 이젠 마음이 많이 누그러지신 듯 했다.
우리는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모든 것이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다. 나는 아내를 사랑했고, 아내도 나를 사랑했다.
아내를 위해, 아이를 위해, 나는 더 노력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아버지로서의 삶은 힘겨웠다. 하지만 이겨내야 하는 것이기에 불평하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분주하게 일하는 나날들 속에서 시간은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 일도, 생활도, 계절도 그렇게 쳇바퀴처럼 굴러갔다. 정해져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아마 남은 내 삶도 그런 식으로 흘러가게 되겠지. 물살이 흐르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야. 시간이 지날 수록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게 된다. 그저 이렇게 변함없는 나날들이 계속 이어지기만 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
*
그 날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출장을 다녀오던 나는 실로 몇 년만에 나와 아내가 함께 다녔던 모교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아들이 태어나고 집을 옮기면서부터 이 쪽으로는 좀체 올 일이 없었기에, 이렇게 캠퍼스의 건물을 보는 것은 너무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겠다만 나는 괜스레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캠퍼스를 조금 거닐어보았다. 수많은 추억들이 새록새록 머릿속에 떠올랐다. 삶에 찌든 평범한 30대 남성치고는 너무 감성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나는 과거의 기억 속에 깊이 빠져들었다.
저절로 발걸음이 어느 곳으로 향했다. 학교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내 대학생활을 보냈었던 작은 원룸 건물의 자취방. 그러고보면 지금의 아내와도 저 곳에서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었지.
"내가 살던 방이 303호였던가?"
이제는 너무 낯설게만 느껴지는 그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기억을 더듬어 안으로 한번 들어가보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현관 입구에서부터 비밀번호가 포함된 잠금장치를 풀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쉽군."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여기에 오면 꼭 둘러보고 싶었던 곳들이 있었는데. 예를들면 303호라던지, 302호라던지, 105호라던지.... 하긴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을 테니 어차피 들어가지 못했으려나?
"잠깐, 105호?"
105호에는 누가 살았었더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서 오토바이 한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작은 점처럼 보였던 바이크가 어느새 점점 가까워져왔고, 그렇게 옆으로 나를 지나쳐 갔다.
"오토바이...."
아련한 향수가 번지는 것처럼, 애달프리만치 그리운 기분을 느끼며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내가 바라보고 있었던 그 작은 건물 앞에 오토바이가 멈춰섰다. 타고 있었던 누군가가 날렵하게 바이크에서 내리며, 헬멧을 벗었다.
그러자 헬멧 아래로 폭포수처럼 출렁이며 쏟아지는, 허리까지 내려올 만큼 그 길고 긴 생머리....
"신기루일까?"
마치 꿈을 꾸듯이 나는 그 장면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몸짓으로, 벗은 헬멧을 손잡이에 걸고는, 한 여인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또 눈물이 흘렀다....
그녀가 그 곳에 있었다.
- 다음 화는 1부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 -
어느새 1부 마무리까지 딱 한 편만을 남겨두고 있네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것들은 다음 화에서 에필로그와 함께 적어보겠습니다
실은 1부만으로 이야기 전체를 전달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되어서
나름대로 2부를 구상하고는 있었는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에필로그 끝의 후기로 간략하게 적어보겠습니다
어쨌든 1부의 결말이 보이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49장
"아빠 때문이야!"
꿈 속에서 나는 딸아이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들었다. 그것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마지막 자각몽이었다. 지금껏 꿈을 꾸며 겪어왔던 그 모든 과정을 한번에 뛰어넘어, 나는 이제 분노와 절망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딸과 마주하고 있었다.
"아빠만 아니었어도 오빠는 죽지 않았을 거야!
딸아이는 아들의 무덤 앞에서 며칠 동안이고 떠날 줄을 몰랐다. 보다못한 내가 딸을 데리고 오기 위해 무덤을 다시 찾아갔을 때, 딸아이는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내게 소리를 지르며 증오심을 드러냈다.
"미안하구나, 미란아."
아들이 묻혀버린 자그마한 묘를 바라보는 내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젊은 날의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 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오빠를 살려내! 오빠를 살려내란 말이야!"
그렇게 심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딸의 모습을 아마도 나는 처음 보았던 것 같다. 표정 한 줄기 얼굴에 띄우는 일조차 드물었던 딸의 그런 모습을 처음으로 보면서도, 나는 미란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그 사실이 스스로 못내 괴로웠다. 왜 그리도 딸에게 무심했던 걸까? 그리고 그녀에게도....
"아빠가 정말 미워!"
괴로워하는 딸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져갔다.
장면이 바뀌어 나는 이제 하늘을 날고 있었다. 꿈 속에서의 나는 여전히 한 마리의 나비였다. 그 꿈은 바로 지난 번에 내가 꾸었던, 호접몽을 연상케 했던 바로 그 꿈이었다. 내게 인과응보의 필연을 경고해주었던 그 꿈.
작은 날개를 퍼덕여 창공을 헤매고 있던 중에, 나는 또다시 그 "누군가"의 모습을 보았다. 분명 내가 아님에도, 나와 무척 비슷하게 느껴지는....그 날개 없는 한 마리의 나비. 그가 또다시 땅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쳤고, 그렇게 그대로 죽어버렸다.
"미안하구나, 아들아."
그제야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죽어버린 그 나비가 누구였는지.
"미안해."
*
식은땀에 젖은 채로, 나는 잠에서 깨었다. 몸을 일으켜 본 나는, 내가 책상 위에서 팔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시간을 확인했지만 다행히도 아직 아침이 밝지도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서 나는 들떠있는 마음을 되도록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지난밤에 들었던 유정이의 목소리는 결코 꿈이 아니었다. 나는 오늘 그녀를 만날 것이고, 어떤 형태로든 그녀와의 관계에 대한 답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서연이는....? 서연이는 어떻게 하지?
"괜찮아. 먼저 공항에 갔다가, 시간에 맞춰서 서연이를 만나러 가면...."
유정이가 일본으로 떠나는 항공편의 출발 시간은 오전. 서연이의 부모님을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후이니.... 잘만 하면 유정이를 만나고 나서도 늦지 않게 서연이에게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속으로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치솟았지만, 나는 어찌되었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최악의 상황이 도래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스런 일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로 했다.
자꾸만 유정이를 만나고 나서, 서연이를 만나러 가지 못하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정이를 만나는 순간 나의 시간은 그대로 정지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를 만나고 난 이후에도, 내가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도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만약 내가 계획한 대로 유정이를 만나고 나서 서연이를 만나러 가게 된다면, 서연이를 보러 가고 있을 순간의 나는 이미 유정이를 일본으로 떠나보낸 다음일까? 유정이를 저 먼 곳으로 떠나보내고 나서도, 나는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서연이의 얼굴을 마주하러 갈 수 있을까? 그것도 결혼이라는 큰 문제를 떠안고서?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자."
우선은 유정이를 만나야만 했다. 그 어떤 고민과 갈등이 뒤따른다 해도 지금 이대로 유정이를 보지도 못한 채, 그녀를 떠나보내는 것만은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유정이의 얼굴을 보고 나서, 그녀와 이야기를 해야 했다. 복잡한 생각은 그 이후로 미루자고 나는 마음 먹었다.
애매하리만치 이른 시간에 깨어났지만 나는 다시 침대에 눕지 않았다. 몸을 씻고, 단정한 옷을 입고, 좁은 방 안에 덩그러니 앉아 유정이와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주길 바라며 나는 그 자리에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었다.
약속시간이 두 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공항으로 가기에는 여전히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공항에서 유정이를 기다리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 신발을 신고 복도로 나섰다.
"응?"
걸음을 채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나는 이질적인 느낌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언젠가부터 굳게 닫혀있기만 했었던 302호의 문이, 애매한 틈새를 남기고 열려있었던 것이다.
옆집 여자가 왜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기억에 남은 것이 없던 나였지만,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부터 그 문이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는 것 만큼은 알고 있었기에 나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과거의 실수를 다시 한번 돌이키는 어리석은 행동이었겠지만, 불가항력에 이끌려 나는 문 틈새를 들여다보았다.
안쪽에서 기이한 소리가 자꾸만 울려나왔다. 그 순간의 나로서는, 아마 그 어떤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다 할 지라도, 그 방 안으로 들어서고 싶어하는 나의 충동적인 이끌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이 장소는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었고, 더불어 여전히 풀리지 않은 비밀을 간직한 신비의 공간이었다.
"저기.... 계세요?"
이 공간에 옆집 여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을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떨리는 걸음을 한발, 두발 내딛어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그러자 여전히 유령처럼 그 곳을 떠돌아다니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삭막한 눈빛, 표정 없는 얼굴, 염세적인 분위기.... 비록 얼마 만의 재회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내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종잡을 수 없는 시선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태도까지도.
"오, 오랜만이네요."
나는 옆집 여자의 모습을 보자 왠지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봐선 안 될 것을 보고 말았다는 느낌. 열지 말아야 할 것을 열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고, 시선이 마주쳤다.
"엄마를 만나러 가는 거야?"
"네....?"
아득하게, 낭떠러지 밑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으로는 엉겁결에 그런 말이 나왔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뒤통수를 망치로 세게 맞은 듯이 뭔가가 크게 흔들렸고, 세상이 뒤집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애써 부여잡고 나는 쓰러질 듯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너, 너는...."
산산조각났던 거울의 파편들이 퍼즐처럼 제자리로 돌아와, 온전한 모습으로 붙었다. 그와 동시에 깊숙히 가라앉았던 기억들이 다시 뇌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끊어졌던 필름을 다시 재생시키기 시작하자 잊고 있었던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떠올라 눈 앞을 수놓았다.
골목길에서 옆집 여자와 나누었던 이야기, 그녀가 했던 말들, 내가 느꼈던 감각까지도 모두....
"미란아....?"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이름이 뇌리 한 켠에 새겨져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마치 너무도 친숙한 이름을 부르듯이, 나는 그녀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러자 미란이는 말없이 내게서 등을 돌리고는 방 어딘가를 뒤져 내 앞에 손바닥 만한 작은 액자 하나를 가져왔다.
"아빠, 이 사진이 보여?"
"........"
액자 속의 사진에서 나는 두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 아니, 실은 여인이라기엔 아직 너무도 어린 여자아이와, 그 아이를 품에 안아 든 한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리가 어질해지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미란이를 안아들고 있는 유정이의 모습을.... 사진 속에서 본 것이었다.
"왜 이 사진 속에는 아빠의 모습이 없을까?"
"........"
물론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미란이도 구태여 내 대답 따위를 듣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내 눈 앞에서 액자를 치워버리고는, 방 안을 서성이던 걸음을 멈추고 얌전히 의자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말해 봐, 아빠."
"뭘....?"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나왔지만 나는 되도록 침착하게 대답을 이어나가려 애썼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딸아이 앞에서 공포라는 감정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가서 엄마를 만나고 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 거야? 엄마를 곁에 붙잡아둘 거야? 아니면 머나먼 땅으로 엄마를 이렇게 보내버릴 거야?"
"........"
긴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온 딸과 마주하여, 이런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미란이는 내가 무슨 대답을 하길 원하며 지금 내게 이것을 묻는 걸까?
"모, 모르겠어. 나는 그냥.... 유정이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아빠, 정말로 엄마를 사랑해?"
"무슨 뜻이야?"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그 마음 말이야. 정말로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아빠가 그렇게 믿고 있는 건지 스스로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미란이는 또 "운명"이라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이 온전한 것이라 믿었다. 유정이를 사랑하는 이 마음이 다른 무언가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 아님을 나는 미란이에게 전하고 싶었다.
"난 유정이를 진심으로 사랑해. 시간을 몇 번이고 되감아 돌아가더라도 유정이를 사랑할 거야. 맹세할 수 있어."
"하하하하하!"
미란이가 실성한 듯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나는 움찔했지만, 잠자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눈물까지 글썽일 정도로 미친 듯이 웃어대더니, 히스테릭한 모습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내게 말했다.
"그래, 말 한번 잘했어, 아빠."
"뭐?"
"엄마는 그래서 불행할 수 밖에 없었던 거야."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방 안을 서성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대다가, 그녀는 나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너무도 오싹하게 느껴졌다.
"보여줄게, 아빠."
"뭐, 뭘 말이야?"
"아빠가 지난 날에 했던 선택들을."
순간, 주변이 흔들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내 착각이 아니었다. 울렁증이 치밀어오를 정도로 흔들림이 심해지더니 결국 사방이 모조리 뒤섞였고, 내 몸은 어느 순간부터 그 작은 공간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나는 그 방으로부터 멀어져 다른 장소를 향해 헤엄쳐가고 있었다.
한바탕 소용돌이에 휩쓸린 후에 나는 다시 눈을 떴다.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의식이 다시 희미하게 돌아왔을 때, 나는 전혀 다른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령처럼 허공에 붕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저건, 설마...."
마치 오래된 옛날 영화에서 앵글이 아래를 비추듯이, 나는 흑백으로 물든 세상에서 누군가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평범한 얼굴, 그리고 단정하게 차려 입은 옷.
"나....?"
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듯 괴로워하면서도, 내가 바라보고 있는 나는 누군가를 찾기 위해 쉴 새 없이 달리고 있었다. 커다란 가방이나 캐리어를 손에 든 채로 분주히 걸어가고 있는 주변 사람들이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장소가 공항이라는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아....!"
미친 듯이 달리던 내가, 어느 순간 무언가를 보고 그 자리에 서서히 멈춰 섰다. 나는 또다른 나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함께 바라보았고, 함께 전율했다.
유정이가,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유정이가 먼발치에서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다시금 달려가기 시작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얼마나 떨고 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또다른 나의 생각이나 감정이 나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그것은 전해질 필요도 없이 나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보고 싶었어."
볼륨이 고장난 TV를 보는 것처럼, 비록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해."
유정이에게 이야기하는 내 입모양에 맞추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도 덩달아 그 말을 소리내어 입 밖으로 내뱉어보았다. 기억 속의 장면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조금은 희미하게 그려지고 있는 유정이의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이 말을 전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에 전율했다.
"내 곁에 있어줘."
이게 정말로 이미 지나간 과거의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나는 유정이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반복되어 왔던 수 차례의 시간 속에서 그녀는 내 말에 어떤 대답을 했을까.
나는 유정이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무정하게도 그 순간 나와 유정이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눈 앞에는 이내 다른 모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공항의 모습이 사라지고, 대신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예식장이 나타났다. 적지 않은 사람들의 박수갈채 속에서, 카펫 위로 천천히 오르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턱시도를 단정하게 갖춰 입은 내 모습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이제 떨리는 두 다리로, 조금은 길게 느껴지는 카펫 위를 걷고 있었다. 그 길의 끝에서 반짝이는 순백의 드레스를 몸에 두른 채,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 여인은 유정이가 아니었다.
"유정아...."
박수를 치고, 폭죽을 터뜨리며, 즐겁게 환호하는 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유정이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온통 흑백으로 물들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그녀만이 내 눈에 빛나고 있었다.
유정이는 멀찍이 떨어져 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이 화려한 카펫 위에 서서 다른 여인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하며 마침내 신부와 입맞춤을 했을 때, 나는 하객들 사이로 보이는 유정이의 얼굴을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결혼식을 올리는 내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유정이의 눈가에, 결국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는 여전히 신부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
또 장면이 바뀌었다.
아들이 태어났고, 그 이후 내 삶은 조금 더 힘들고 빡빡하게 변했다. 여느 아버지들처럼 나도 가정을 위해서 무던히 노력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삶의 수많은 관문들이 대개 그러하듯, 힘들어도 반드시 이겨내야만 하는 과정이었다.
아내는 나를 많이 사랑해주었다. 나를 사랑해주었고, 아이를 사랑해주었고, 가정을 사랑해주었다. 그녀는 좋은 아내였으며, 또한 좋은 어머니였다. 그랬기에 아마도 나는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행복의 와중에 다른 누군가는 점점 더 외로워져 갔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유정이에게 해줄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었다....
*
또 다른 장면이 이어졌다.
실로 오랜만에 유정이를 찾았다. 얼굴을 못 본지 무척 오래되었지만 유정이는 마치 어제 보았던 것처럼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어쩐지 그 사이에 그녀는 좀 더 야윈 것 같았다.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아보여, 나는 그녀에게 병원에 가볼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녀는 딸을 홀로 버려두고 오랜 시간 집을 비우고 싶지 않다며 언제나처럼 내 권유를 거절했다. 살며시 열린 방 문 틈새로, 마치 경계하는 듯이 고개만 빼꼼 내밀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 쌍의 눈동자가 느껴졌다.
"미란아, 이리 와 보렴."
나는 용기내어 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딸은 들은 체도 않고, 내 면전에서 세차게 문을 닫았다.
*
결국 그녀는 어느날 쓰러졌고, 그 때부터 병원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이따금씩 바쁜 일상의 와중에도 억지로 시간을 내어 병원으로 그녀를 찾아가곤 했다.
폐암이라니....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처음엔 어찌나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았던지.... 젊었을 적엔 그 누구보다 건강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언제부터 담배를 그렇게 입에 대기 시작했는지,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유정이가 누운 병원 침대의 머리맡에는 언제나 미란이가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미란이의 곁에는 아들이 있었다. 유정이가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 둘은 부쩍 함께 있는 시간이 늘었다. 나는 그것이 내심 다행한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유정이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펐다.
*
결국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극심한 슬픔 속에서 나는 그녀가 남긴 유언을 떠올렸다. 그 유언의 대부분은 미란이에 관한 것이었다.
*
미란이를 우리 집에 머물게 하고는 있었지만, 그 아이는 좀체 나와 교류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내 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다. 어찌되었든 그녀가 마음을 터놓고 지낼 상대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유정이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핏줄인 그 아이가,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
그것조차 욕심이었을까. 어느 날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던 나는, 다급하게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고 넋이 나가 부리나케 응급실로 향했다. 적색 램프가 들어온 응급실의 문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나는 아들의 수술을 기다렸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나는 두 번째 절망을 겪었다.
*
아들이 죽고 나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나도, 아내도, 그리고.... 미란이도.
미란이는 온종일 먹지도 않고 조촐하게 마련한 연구실에 틀어박혀 무언가에 몰두했다. 어릴 적부터 내 자식들에게는 뭔가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아들만 해도 사물을 보는 방식이 남들과 달랐고, 무언가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줄을 몰랐다.
유정이는 살아있었을 때, 이따금씩 미란이의 특별한 재능에 대해서 줄곧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딸아이가 특별한 재능으로 말미암아 속박 된 삶을 사는 것보다는 여느 아이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기만을 바랐다. 나는 그런 유정이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죽음은 결국 미란이를 바꾸어 놓고 말았다.
*
거의 몇 년 동안, 미란이는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식사를 하는 것조차 나와 마주치지 않도록, 나를 피해가며 했기에 그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조심스럽게 연구실의 문을 두드려봐도 딸아이는 내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가끔 그 안에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이한 소리가 울려나오곤 했다.
그랬기에 그녀가 거의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바깥에 나왔을 때 나는 무척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이는 여전히 내게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의 손에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쥐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은백색으로 반짝이는, 아주 투박한 시계의 형상을 하고 있는 물건이었다.
*
어느 날, 뱃 속이 요동치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실타래를 도로 되감듯이, 나는 무언가로부터 역행하여 어느 곳으로 거슬러 올라와 있었다. 이제 나는 다시 내가 유정이를 만났던 그 공항에 서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
나와 유정이는 숲속을 걷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한국 땅과는 미묘하게 다른, 조금 더 습하고 덥게 느껴지는 공기에 나는 적응하려고 애썼다. 가끔 드라마 속에서나 봤던 기모노 풍의 일본식 옷을 몸에 두른 유정이는, 내 팔에 다정한 모습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함께 숲속을 거닐며 우리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후계에 대한 문제, 결혼에 대한 문제, 가문에 대한 문제..... 뭐 그런 것들을 말이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세계에 뛰어든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열심히 노력했다. 유정이는 곁에서 그런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주었다. 그녀는 행복해했고, 나 또한 그런 유정이를 보는 것이 행복했다.
하지만 이따금씩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나는 우울해지곤 했다. 나는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것들을 버리고 이 곳에 왔다. 한국 땅에 남겨두고 온 누군가를 떠올리면, 나는 참을 수 없이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
딸아이가 태어났다. 유정이는 딸에게 일본의 이름이 아닌, 나의 본래 성을 딴 이름을 지어주었다.
*
미란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나와 유정이는 일본에서 혼례를 올렸고, 우리는 행복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여겼다.
가끔씩 딸아이는 이상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거나, 어느 것 하나를 손에 쥐고는 잘게잘게 해부해보곤 하는 취미가 생긴 것 같았다. 한번은 딸아이가 쉴 새 없이 혼잣말을 웅얼거리길래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
어느 날, 딸아이는 미친 듯이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세상이 떠나갈 것처럼 통곡하는 딸아이의 울음소리에, 나도 유정이도 깜짝 놀라 그녀를 달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실성한 것처럼 흐느끼는 와중에도 미란이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딸아이에게 정서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
미란이가 어느날 곤히 잠들었을 때, 나는 몰래 딸아이의 방으로 들어가 그녀가 끄적이고 있던 것들을 보았다. 옅은 글씨로 적혀있는 몇 가지 단편적인 글귀들이 눈에 띄었다. 도통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들이었다.
반드시 필요한 것들, 바꿔서는 안 되는 것들. 너덜너덜한 종이의 끄트머리에 그런 말들이 적혀있었다. 그 아래에 조그마한 글씨로 "오빠"라는 단어도 희미하게 새겨져있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또다른 한쪽 귀퉁이에는, 마치 해바라기처럼 생긴 시계의 그림이 엉성하게 그려져있었다.
*
나는 뒤늦게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후계의 자리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실 그것을 바랄 이유도 없었다. 내가 이 길로 들어선 이유는 오직 하나, 유정이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나는 다음 당주가 가려지는 과정에서 멀찍이 물러나 그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다.
21대 당주의 후보가 마침내 둘로 압축되었다. 하나는 하야토 가의 수제자였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나의 처남.... 유정이의 남동생이었다.
정통성을 따지자면 처남이 후계를 계승하는 것이 옳았지만, 본토의 원로들은 더이상 한국의 핏줄에 당주의 자리를 맡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논쟁은 결투로 이어지게 되었다.
미란이는 이 시끄러운 논쟁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근래 들어 딸아이의 관심사는 무엇 하나로 딱 좁혀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미란이는 도통 내게 말을 해주지 않았다.
*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혼자만의 연구를 거듭하던 미란이는 어느날 마침내 알 수 없는 물건 하나를 만들어냈다. 은백색의 초시계.... 도무지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
"아빠, 이제 알겠어?"
처음으로 나는, 마치 꿈처럼 비현실적인 그 공간에서, 현실의 미란이가 내게 전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미란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귓가에 또렷하게 울렸다.
*
이제 나는, 또다시 선택의 갈림길이 되었던 그 공항으로 어느새 되돌아와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유정이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서글픈 얼굴을 한 채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어쩐지 내가 평소 알고 있던 그녀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나요?"
그녀는 예전에 내게서 받아갔던 그 약속의 말을 다시 한번 꺼냈다.
순간 눈가에 눈물이 또 핑하고 맺혔다. 왜 진작 알지 못했던 걸까? 그녀의 배가 부풀어있었다. 이 때 그녀는, 이미 뱃속에 내 딸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고,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
"아빠."
눈을 떴을때 나는 비로소, 그 좁디 좁은 302호의 바닥 위로 되돌아와 있었다. 눈 앞에는 현실의 미란이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새카만 칠흑색 빛깔을 하고 있는 초시계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것은 평소 내가 알고 있던 그 은백색의 초시계가 아니었다. 아마도 나는 이전에 딱 한번, 그 검은 시계를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예전에 아빠가 내게 했던 유일한 약속, 기억하지? 아빠가 그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나는 가만히 지켜보겠지만, 단 한 가지, 아빠가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을 해주기로 했었잖아. 그 약속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아빠는 이 능력이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아니야. 이 원리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뒤따르는 무수한 제약과 법칙에 대해 반드시 알고 있어야만 해. 아빠는 그동안 내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 마음껏 이 능력을 즐겼겠지만, 사실 나는 아빠에게 고작 사랑놀음 따위나 하라고 이 능력을 손에 쥐어준게 아니란 말이야."
"안 돼!"
미란이의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검은 시계를 본 순간부터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고 있었기에, 나도 모르게 소리칠 수 밖에 없었다.
"안 돼! 지금 내 기억을 지워서는 안 돼.... 난 반드시 유정이를 만나러 가야한단 말이야!"
"난 지금까지 아빠가 온갖 선택을 내리도록 아빠를 도왔고, 또 옆에서 그 모습들을 지켜봐왔어. 하지만 결국엔 마찬가지야. 엄마가 괴로워지거나, 또는 내가 괴로워지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지."
"그러지 마.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미래도 있을 거야.... 내가 꼭 그렇게 만들어 볼게."
"그건 불가능해. 내가 개입해서 아빠의 정해진 미래를 바꿔버리는 순간부터 나는 법칙을 어기는게 되니까. 아빠가 엄마를 쫓아 일본으로 가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시간을 되감을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지."
"하지 마! 제발!"
"미안해. 하지만 아빠는 나에게 이미 약속했잖아."
미란이의 손가락이 무정하게도 칠흑색 초시계의 금빛 바늘을 돌렸다. 어김없이 뱃속이 요동치며, 나는 다시 빙글빙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넌 정말로 잔인하구나. 내가 널 그렇게 만들어버린 거니?"
정신을 잃기 전에 나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의식이 멀어지는 순간, 딸의 모습조차 눈에서 사라져버렸다. 다만 눈이 감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의 희미한 목소리를 들었다.
"아빠. 나도 이젠 지쳤어.... 끝내고 싶어."
*
눈을 떴다.
맑게 개인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뭔가 아주 깊은 잠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꿈을 꾼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모처럼 깊이 자고 일어난 것 같아서 나는 개운함을 느꼈다. 부스스하게 기지개를 켜며, 나는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내 방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창문을 열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문득 방을 한번 슥 둘러보았다. 조촐하게 꾸며진 내 방은 여전히 평상시 그대로였다. 하지만 분명 오늘 하루는, 여느 때처럼 흔하디 흔한 그런 날이 되지는 않으리라.
"그래, 오늘은 서연이 부모님을 뵙는 날이니까."
우리의 결혼에 대한 문제, 우리의 아이에 대한 문제, 나아가서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문제를 결정해야만 하는 날이었다. 어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연이를 만나기로 한 시간은 저녁 무렵이었지만, 나는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몸을 씻었고 단정한 옷을 골랐으며, 미용실에 들러 머리도 깔끔하게 꾸몄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냈다.
"아, 긴장 돼. 방 청소라도 좀 하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으려나?"
내 방 꼴이 어지러운 것이야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왠지 그 난잡한 모습을 보고 있는게 마음가짐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괜히 방 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단정하게 정리된 방을 보면 조금이나마 긴장이 가라 앉을 것 같았다.
처음엔 가벼운 청소로 시작했는데 하다보니 규모가 꽤 커져 결국 대청소를 하고 말았다. 쓸모없는 물건들은 서랍에 모두 넣어버렸고, 깔끔하게 바닥을 쓸고 닦았다. 반짝반짝 정리된 방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좀 흡족해졌다.
"그럼 이 박스는 옷장 안에 넣어둬야겠다."
잡동사니들을 정리한 작은 박스를 옷장 안에 넣어두기 위해, 나는 옷장 문을 열었다. 안쪽에 박스를 밀어넣다 말고, 나는 문득 익숙하게 느껴지는 서랍 하나를 열어보았다. 그 서랍은 옷장 안에서도 가장 깊숙하게 느껴지는 구석진 공간이었다.
"이상하다. 이쪽에 뭔가 중요한걸 넣어뒀던 것 같은데...."
왠지 나는 그 서랍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안에는 분명히 내가, 정말로 중요하지만 결코 사용하지는 않는 어떤 특별한 물건을 넣어두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물건이 무엇인지 좀체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에이, 별 것 아니겠지."
몇 번이고 그 서랍을 뒤져보았지만, 안쪽에는 구깃구깃한 옷가지들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애초에 이런 깊숙한 공간에 보관할 물건이라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나는 떠오르지 않는 어떤 물건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는 서랍을 다시 탁 하고 닫았다.
때마침 휴대폰이 진동 소리를 내며 울렸다.
"여보세요?"
- 자기야, 준비 잘 하고 있어?
서연이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오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응. 그럼. 늦지않게 갈 테니까 너무 걱정 마."
- 헤헤. 알았어. 그런데 자기 오늘 기분 좋아보이네?
"그런가? 방 청소를 해서 그런가봐."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청소를 했기 때문인지, 확실히 아까보단 긴장이 덜 되는 것 같았다.
열어둔 창문을 통해서 청명한 빛깔의 하늘이 보였다. 날씨가 무척 쌀쌀할 때인데도 불구하고 오늘은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그 맑은 하늘에, 작은 점 같이 새겨진 비행기 한 대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마치 새처럼 보이는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을 보자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
"자기야!"
서연이는 일부러 그녀의 집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마중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나를 데려가기 전에 우리끼리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제법 볼록하게 솟아오른 배를 조심스럽게 감싸안고 있는 서연이를 보자 문득 사랑스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많이 기다렸어? 힘들 텐데 마중은 괜히 나와가지구...."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고 싶어서 그러지. 나도, 우리 아기도."
서연이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들어 자신의 배 위로 얹었다. 그것이 쓰다듬어달라는 신호임을 나는 잘 알기에 부드럽게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아가, 아빠 왔어."
조용히 속삭여보았다. 안쪽에서 생명이 태동하는 듯한 떨림이 느껴져왔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 떨림을 느끼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서연이도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
이듬해, 나와 서연이는 함께 졸업했다. 하지만 우리는 학교에서 열린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우리는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식의 막바지에 턱시도와 드레스 대신 학사모, 학사복을 입고서 동문들과 함께 졸업사진을 찍었다.
서연이의 친구들은 그녀가 그렇게 빨리 시집을 가버릴 줄 몰랐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러면서도 드레스를 입은 서연이의 미모를 극찬하곤 했다. 신랑인 내가 보기에도 그 날의 서연이는, 진심으로 내게 과분하게 느껴질 만큼 눈부시게 예뻤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와주어서 나는 조금 쑥스러우면서도 기뻤다. 부모님은 결혼식이 있기 전날까지 내 바가지를 긁으셨지만, 다행히 식을 올리는 당일에는 서연이를 품에 안아주셨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거창하게 다녀오지 못했다. 서연이의 거동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나면, 우리끼리 꼭 제대로 신혼여행을 다녀오자고 나는 그녀에게 약속했다.
"하아....!"
대신 우리는 결혼식을 올린 그 날 밤, 어느 신혼부부보다도 더 뜨겁고 애틋한 첫날밤을 보냈다. 서로의 몸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우리는, 아이를 배에 품은 채로도 서로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여러모로 고민하고 노력했다.
"으응...! 좋아."
아이를 배면서 한층 풍만하게 부풀어오른 서연이의 가슴을 부드럽게 감싸쥐자 그녀가 달뜬 신음을 흘렸다.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그만큼 더 애틋한 애무에 그녀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아!"
높게 울리는 서연이의 신음성. 비록 화려한 허니문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행복해했고, 나 또한 그런 그녀로 인해 행복을 느꼈다.
*
"자기, 그 소식 들었어....?"
"응? 뭘?"
침대 위에서 서로의 알몸을 끌어안은 채로, 나는 서연이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있었다. 서연이는 말을 꺼내야하나 무척 갈등하는 눈치였지만, 결국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정이 말야. 자퇴했다더라.... 난 몰랐는데."
"유정이?"
서연이가 그녀를 유정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어쩌면 유정이에게 내내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
"생각하긴 싫은데,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이 들어. 유정이가 자퇴해버린게 나 때문은 아닐까 하고...."
"........"
유정이.... 한유정.
이제는 왠지 그 이름이 너무도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아직도 나는 눈을 감으면 그녀의 얼굴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럴 때마다 왠지 내가 그녀에 관한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는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그래도 그 애.... 나를 참 많이 따랐는데. 생각해보면 너무 모질게 대한 것 같아서."
웅얼거리는 서연이를 꼭 끌어안으며 나는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지나간 일인데 뭐."
"그렇겠지? 떠올리지 말까?"
"응."
내가 등을 살며시 두드려주자 서연이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새근거리는 그녀의 숨소리를 느끼며, 나는 뱃속의 아이에게 행여나 몸을 부딪히지 않으려고 신경 썼다.
"뭘까?"
나는 무엇을 잊고 있는 걸까. 이제는 아득히 먼 옛날의, 흘러간 기억 정도로만 남아있는 유정이의 흔적....
나는 그녀를 많이 사랑했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유정이도 나를 그만큼 사랑했던 것 같다. 서연이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결국 그 이후로 유정이와 만날 수가 없었다. 괴로웠지만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렇게 유정이의 잔재 역시 내게서 점점 옅어져갔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나요?"
가끔은 희미한 기억의 틈새를 비집고, 어느 들판에서의 약속이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그 또한 이제는 크게 의미가 없으리라. 유정이도 어디선가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살고 있으면 좋으련만.....
"아."
바보같이, 거의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주책 맞게 눈물이 한방울 흐른다. 서연이가.... 아니, 아내가 깨지 않도록 나는 조심스럽게 눈물을 훔쳤다. 왠지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
더위가 심했던 어느 8월의 여름날, 서연이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다행히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해주었다.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만 해도 다소 떨떠름한 반응이셨던 양가의 부모님들 또한 결국 손자의 모습을 보고 나니, 이젠 마음이 많이 누그러지신 듯 했다.
우리는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모든 것이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다. 나는 아내를 사랑했고, 아내도 나를 사랑했다.
아내를 위해, 아이를 위해, 나는 더 노력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아버지로서의 삶은 힘겨웠다. 하지만 이겨내야 하는 것이기에 불평하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분주하게 일하는 나날들 속에서 시간은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 일도, 생활도, 계절도 그렇게 쳇바퀴처럼 굴러갔다. 정해져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아마 남은 내 삶도 그런 식으로 흘러가게 되겠지. 물살이 흐르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야. 시간이 지날 수록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게 된다. 그저 이렇게 변함없는 나날들이 계속 이어지기만 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
*
그 날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출장을 다녀오던 나는 실로 몇 년만에 나와 아내가 함께 다녔던 모교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아들이 태어나고 집을 옮기면서부터 이 쪽으로는 좀체 올 일이 없었기에, 이렇게 캠퍼스의 건물을 보는 것은 너무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겠다만 나는 괜스레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캠퍼스를 조금 거닐어보았다. 수많은 추억들이 새록새록 머릿속에 떠올랐다. 삶에 찌든 평범한 30대 남성치고는 너무 감성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나는 과거의 기억 속에 깊이 빠져들었다.
저절로 발걸음이 어느 곳으로 향했다. 학교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내 대학생활을 보냈었던 작은 원룸 건물의 자취방. 그러고보면 지금의 아내와도 저 곳에서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었지.
"내가 살던 방이 303호였던가?"
이제는 너무 낯설게만 느껴지는 그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기억을 더듬어 안으로 한번 들어가보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현관 입구에서부터 비밀번호가 포함된 잠금장치를 풀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쉽군."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여기에 오면 꼭 둘러보고 싶었던 곳들이 있었는데. 예를들면 303호라던지, 302호라던지, 105호라던지.... 하긴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을 테니 어차피 들어가지 못했으려나?
"잠깐, 105호?"
105호에는 누가 살았었더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서 오토바이 한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작은 점처럼 보였던 바이크가 어느새 점점 가까워져왔고, 그렇게 옆으로 나를 지나쳐 갔다.
"오토바이...."
아련한 향수가 번지는 것처럼, 애달프리만치 그리운 기분을 느끼며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내가 바라보고 있었던 그 작은 건물 앞에 오토바이가 멈춰섰다. 타고 있었던 누군가가 날렵하게 바이크에서 내리며, 헬멧을 벗었다.
그러자 헬멧 아래로 폭포수처럼 출렁이며 쏟아지는, 허리까지 내려올 만큼 그 길고 긴 생머리....
"신기루일까?"
마치 꿈을 꾸듯이 나는 그 장면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몸짓으로, 벗은 헬멧을 손잡이에 걸고는, 한 여인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또 눈물이 흘렀다....
그녀가 그 곳에 있었다.
- 다음 화는 1부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 -
어느새 1부 마무리까지 딱 한 편만을 남겨두고 있네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것들은 다음 화에서 에필로그와 함께 적어보겠습니다
실은 1부만으로 이야기 전체를 전달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되어서
나름대로 2부를 구상하고는 있었는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에필로그 끝의 후기로 간략하게 적어보겠습니다
어쨌든 1부의 결말이 보이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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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2-28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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