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45장
그 괴로운 시간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졌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굳이 그것을 인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나는 두 눈을 감은 채로, 이 순간이 어떤 형태로든 빨리 마무리되기만을 빌었다. 유일하게 내가 느낀 것이라곤 어느 순간 룸의 문을 노크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이었다.
"오빠.... 안에 있어?"
머뭇거리는 듯한 조심스러운 목소리. 현주의 목소리였다....
"읍! 으으읍!"
지환이 새끼는 내 휴대폰을 이용해 현주에게로 객실의 번호를 보냈고, 현주는 바보 같을 만큼 아무 의심 없이 그걸 보고선 여기까지 제발로 찾아오고 말았다. 전화라도 한번 걸어볼 것이지.... 하지만 내가 어떻게 현주를 탓할 수 있겠는가.
나는 안간힘을 써서 현주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어서 돌아가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지환이 새끼는 이것마저 대비해서 미리 내 입에 테이프를 다시 감아둔 뒤였다. 정말로 지독한 새끼였다.... 목구멍이 터져라 문을 향해 소리쳤지만 목이 막혀 발버둥치는 듯한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소중한 네 "진짜 여친"께서 오셨군.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지 않아?"
"읍... 으으읍... 으읍!"
나는 벌레처럼 땅바닥을 기어서라도 놈이 문을 열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벌레가 꿈틀대는 수준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간신히 기어가 놈의 바짓단을 이빨로 물어뜯었지만 놈은 비웃듯이 나를 발로 사정없이 찍어내렸다.
수차례의 구타와 채찍질로 너무 많은 피를 흘린 탓인지 의식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바닥에 힘없이 널부러진 나는 의식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정신을 잃으면 안 되는데.... 서연이와 현주를 지켜야 하는데.
"꺄악!"
문이 열리고, 나는 현주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흐려지는 눈동자를 억지로 들어 문을 보니 지환이 새끼가 현주의 입을 막은 채로, 그녀를 안으로 끌고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로서는 제발 누군가가 저 소리를 듣고 그녀를.... 아니, 우리를 구해주기를 바랐다.
"한수 선배, 테이프로 입 막아버려요."
"헤헤... 알았어."
쉬지 않고 서연이를 강간하던 한수 새끼는 새로운 장난감이 생겨서 즐겁다는 듯이, 냅다 전기 테이프를 들고 이쪽으로 뛰어왔다. 침대 위에 처참하게 널부러져있는 서연이의 모습과, 강제로 끌려들어오며 기겁하는 현주의 모습을 나는 번갈아 볼 수 있었다. 시야가 뿌옇게 물들어갔다....
박현아.... 그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과연 알고 있을까? 자신의 잘못으로 동생을 두 번이나 망가뜨리게 되었다는걸 그녀가 알면 분명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텐데. 그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는걸 깨닫고 나면 그 때는 동생에게 어떻게 용서를 구할까.
다른 모든 것들을 떠나서, 나는 현주에게 있어서 너무도 미안했다. 간신히 벗어던졌던 그녀의 트라우마를 또다시 이런 최악의 형태로 경험하게 만들어버리다니.... 나는 어쩌면 그녀에게 최악의 남자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욕심 내어 그녀를 억지로 내 곁에 붙들어 두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 테니.
"미안해.... 미안해 현주야."
또 다시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런데 문득 뭔가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희뿌옇게 변한 눈망울에 눈물이 글썽이며 맺히기 전에, 나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광경을 보았다. 지환이가 현주를 끌고 들어오느라 열어두었던 문이, 저절로 닫히지 않고 아직까지 미세하게 열려있었던 것이다. 호텔 객실의 문은 일부러 바깥 쪽에서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는 이상 저절로 닫히고 잠금장치까지 작동하게 되어 있는데....
지환이와 한수 놈들은 현주의 입을 테이프로 봉하고, 서연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손발을 끈으로 묶느라 정신이 없었다. 벌어진 문 틈새로 복도가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지만 놈들은 아직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소리를 질러야 하는데.... 어떻게든 소리를 질러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읍... 으으읍... 읍!"
문 쪽을 바라보며 내가 애벌레처럼 엉금엉금 발악을 해대자, 한수 새끼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현주가 두 놈에게 유린당할 위기에 처했는데도 내가 그에 대한 반응을 하지 않고 다른 곳에 신경을 쏟고 있으니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아하~ 문이 아직도 열려있었네. 이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킬킬."
결국 한수 새끼가 눈치를 채고 내게 이죽거리자 그만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유일했을지도 모르는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버린 것 같아서 그렇게 비통할 수가 없었다. 한수 놈은 그런 나를 한번 비웃어주고는 문을 닫기 위해 입구까지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놈이 문을 닫으려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도저히 내가 상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 쾅!
짤막하고 둔탁한 소리가 한차례 울린 것 같더니, 한수 놈의 몸뚱이가 허공을 붕 날고 있었다. 2미터에 가까운 놈의 거구가.... 공중에 뜬 채로 입구에서부터 룸 중앙까지 날아왔다. 아마 내 정신이 지금 이렇게 피폐해진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마 입을 벌리고 경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봐도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뭐, 뭐야?"
현주의 옷을 벗기느라 눈이 뒤집혀있던 지환이 새끼가 움찔하며 문을 바라보았다. 나 또한 문에서부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찰나의 순간에.... 나는 혹시라도, 유정이가 나를 구하러 온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 마음 속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이 그녀 밖에 없었기 때문일까.
그런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문을 열고 나타난 인물의 인영은, 도저히 유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형상이었고, 심지어는 여인의 모습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평범한 체구에서 느껴지는 깊고 무거운 중압감을, 나는 분명 예전에도 한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저 분은...."
주름이 패인 그 중년 남성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이 상황의 긴박함도 잊고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졌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 사람은 분명 유정이 아버지인 것 같은데....
"뭐야! 당신 누구야!"
지환이 놈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냅다 입구를 향해 내달렸다. 순식간에 문 앞까지 뛰어든 놈이 문간에 서 있는 중년의 남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은 다시 한번 더 일어났다.
달려드는 지환이 놈을 향해 중년의 사내가 휙, 하는 손짓을 한번 했을 뿐인 데 놈의 체구가 순식간에 공중에 한바퀴 빙글 하고 돌았다. 허공에서 뒤집힌 놈의 몸이 문 앞으로 볼품없이 처박혔다. 그러자 등골이 부러지는 충격에 지환이 놈이 게거품을 물면서도 품 속에서 잽싸게 전기충격기를 꺼내들었다.
치직, 하는 소리를 내면서 작동하는 충격기를 중년의 남성은 힐끗 바라보더니,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뚜벅뚜벅 실내를 향해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스위트룸 안을 이리저리 한번 쓱 하고 둘러보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했는지 지환이 놈이 인상을 구기며 중년 남성의 뒷통수에 전기충격기를 지지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희미해진 의식 탓에 아직 정체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중년 남성을 향해 조심하라고 소리칠 뻔 했다. 입이 막혀있지만 않았어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 쾅!
심지어 나는 전기충격기를 손에 쥐고 달려들던 지환이 놈이 어떻게 다시 땅바닥에 처박혔는지, 눈으로 볼 수도 없었다. 성인 남성 두 명을 너무도 손쉽게 제압한 중년의 사내는 다시 방 안으로 한발짝 더 성큼 들어와 고개를 돌려가며 이모저모를 살폈다.
바닥에 버려져 꿈틀대고 있었던 나와 중년 남성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에게로 다가와 입가에 둘러져 있는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떼어내었다. 한겹 한겹 입을 구속했던 것이 떨어져나가고, 마침내 내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유를 찾게 되자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관장님....?"
신기하게도 왜 이 순간에 그 말이 떠올랐을까. 나는 어떻게든 그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더는 의식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이 스르르 감겨왔고, 의식이 멀어졌다.
*
전통 고무술(古武術)의 맥을 잇고 있는 "무신류"의 제 20대 당주이자, 현 유파 최고의 실력자인 한석진. 그에게는 한국에 홀로 남겨놓은 딸이 있었다. 당주의 책임을 위해 불가피하게 일본 땅에 기거하면서도, 그는 늘 마음 한 구석으로 딸아이에 대해 걱정해왔다.
그랬기에 그는 이번 기회에 잠깐이나마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 아주 보람찬 시간이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딸아이가 다니고 있다는 대학교 구경도 해보고, 지내고 있다는 자취방에도 한번 들러보았다. 여전히 어린 딸을 혼자 지내도록 놔두는 것이 가슴 아팠지만, 그래도 여느 여자아이와는 달리 강하게 자라주어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 딸이 그 와중에도 못내 고맙고 기특했다.
게다가 어쩐지 지금은 딸아이에게 만나고 있는 남자도 한 명 생긴 것 같았다. 딸이 지내고 있는 원룸에 방문했을 때 우연히 만나게 된 그 청년이 딸아이와 어느 정도의 관계인지 그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아비의 입장으로 봐서는 유정이가 그 청년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것 만큼은 분명해보였다.
그 청년의 첫 인상이 어땠는가, 의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석진은 딸이 누군가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이 우선은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내와 가문의 요구에 못 이겨 딸에게 어릴 적부터 무술의 기초를 가르친 적이 있긴 하지만, 자신의 딸이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기를 누구보다 원했던 석진으로서는 유정이가 그저 평범한 여자로서의 행복을 누리고 살기만을 바랐다.
그렇기에 지금껏 남성적인 삶을 지향해왔던 유정이가, 여자로서의 연애 감정을 누군가에게 품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비인 그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반길 만한 일이었다. 전통 무술 가문의 당주라는 직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극히 보수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생각해왔지만, 오히려 그는 마음 속으로 줄곧 딸아이의 그런 변화를 내심 기대해왔기 때문이었다.
최성진이라는 그 청년이 남긴 인상은 꽤 복잡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아직 섣불리 판단할 만큼 그 청년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다만, 어쩐지 그 청년이 딸아이를 행복하게 해줄 만한 인물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석진은 구태여 딸아이 앞에서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의 딸인 유정은 자기 앞가림을 못할 만큼 모자란 아이가 아니라고 그는 믿었다. 부모의 보살핌 없이 여기까지 홀로 자라나 준 기특한 아이였고, 또한 어느 남자들보다도 강한 정신력을 지닌 아이였다. 그런 그녀가 마음을 주기로 선택한 상대라면 우선은 간섭하지 않고 지켜만 보는 것이, 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배려일 거라고 석진은 생각했다. 그는 아버지로서 유정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차앗!"
유정의 오른발이 매섭게 허공을 가르고 석진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느긋하게 상념에 빠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석진은 어렵지 않게 발차기를 털어내듯이 비껴내버렸다. 아버지가 자신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낼 거라고 유정은 당연히 예상했는지 그 자세에서 몸을 틀어 반대쪽 발로 후속 공격을 시도했다.
돌려차기의 동작이 컸던 탓에 빈틈이 생겼다고는 해도,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 석진의 몸은 이미 유정이 가한 발차기의 궤도에서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비껴나 있었다. 목표를 놓친 유정의 발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전에, 석진의 발 뒤꿈치가 가볍게 유정의 한쪽 다리를 걸어넘겼다.
"앗..."
유정의 가벼운 몸이 허공에 잠깐 떴다 싶더니, 다음 순간 석진이 기우뚱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양팔로 받쳐냈다. 마치 어릴 적에 아기였던 유정을 양팔로 안아든 것만 같은 자세였다. 당황하는 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석진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투로가 너무 단조롭고 딱딱하구나. 마지막으로 수련을 했던게 언제였니?"
"그게.... 좀 오래 되었네요."
유정은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기색으로 답했다. 하지만 석진은 인자하게 웃을 뿐이었다. 딸아이와 대련을 해보는 것도 오랜만이고, 이렇게 그녀가 도복을 입은 모습을 보는 것 역시 오랜만이었지만, 석진은 유정에게 도복보다는 소녀다운 옷이 훨씬 더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이 아비는 이제 네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수련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가끔씩 네 마음의 수양을 위해 도복을 입어보는 것도 나쁠 건 없겠지. 살아가면서 생각이 복잡해지는 순간이 올 때면 한번쯤은 이 아비가 어릴 적에 가르쳤던 것들을 떠올려주렴."
"네... 명심할게요."
"그래, 대련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유정과 석진은 모처럼 그녀가 지내는 원룸이 아닌, 어릴 적에 석진의 가족이 살았던 그의 본가를 방문해 있었다. 유정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었던 바로 그 집이었다. 석진에게 있어서는 한 때 이곳이 한국의 청년들을 가르치고 함께 수련했었던 무도장이기도 했다.
석진이 일본으로 가면서부터 이 곳에는 오직 유정 한 사람만이 남게되었다. 아마도 딸아이는 이 넓디 넓은 곳에, 자기 혼자만이 살고 있다는 그 외로운 기분을 견디기 힘들어 사는 곳을 옮겼던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한번 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그런데 그런 불편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쯤, 석진의 귓가에 희미한 진동 소리가 한 차례 울렸다.
"음?"
딸아이는 몸을 씻겠다고 샤워실로 들어가버린 것 같았다. 지금 이 진동소리는 그녀가 대련하기 전에 평상 위에 잠시 올려두었던 유정의 휴대폰으로부터 울려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석진이 일부러 보려고 해서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때마침 평상 앞을 걷고 있었기에 딸아이의 휴대폰 액정에 떠오른 그 이름을 보고도 일부러 못 본 척하기는 꽤 힘든 일이었다.
"그 청년이잖아."
젊은 세대들이 메시지를 주고 받는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어떤 메신저 프로그램을 통해서, 최성진이란 청년이 딸아이에게 뭔가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매사에 주책 맞은 사람은 결코 아니었지만, 한편으로 딸에 관해서는 간혹 팔불출이 되기도 했기에 청년이 딸에게 보내는 메시지의 내용이 심히 궁금해지려는 것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궁금하긴 하나...."
젊은이들의 연애 문제에 기성 세대들이 함부로 간섭하고 참견하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이라 그는 생각했다. 그도 사람인 이상 호기심을 억누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순간에 허락도 없이 딸의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하는 것은 좋은 아비가 할 만한 행동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렇기에 그는 아쉽지만 그것을 못 본 체 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마도 마지막에 전송된 메시지가 화면에 잠깐 떠오른 것만 아니었다면, 그는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 OO호텔 XX호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유성아~ 꼭 와줬으면 좋겠어.
메신저로 전송된 메시지가 액정에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기능이 있었다는게 그 순간에는 참으로 큰 의미를 발휘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메시지를 볼 수 밖에 없었던 석진은 속으로 의아함에 빠졌다.
"호...텔?"
설마하니 딸아이가 벌써 그 청년과 그만한 사이로까지 발전한 걸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곤 해도, 자신의 딸이 호텔 같은 곳을 수시로 들락거릴 만한 성격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딸의 자유를 존중하는 편이었지만, 이것은 자유의 문제이기 이전에 유정이라는 아이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 일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이 청년은 지난번에 분명 딸아이를 내가 지어준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한유정"이라는 이름으로 딸을 부르는 사람은 지금껏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 이름을 지어주었던 석진 그 자신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불과 얼마 전에, 그 이름으로 딸을 부르는 이가 한 사람 더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그 최성진이라는 청년이었다.
석진에게 있어서, 유정을 그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딸에게나, 석진에게나 결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는 일이었다. 그것은 유정이 누군가로 하여금 자신을 그렇게 부르길 허락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석진도 처음 만났을 때 그 청년이 유정을 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걸 감안한다면 지금 이 메시지가 주는 느낌은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석진의 생각대로 청년과 유정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관계라고 한다면, 이제와서 그가 유성이란 이름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젊은 사람들의 변덕 내지는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라고 치부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궁금함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흠...."
아마도 유정은 곧 이 메시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석진은 딸아이가 이 메시지를 받으면 청년의 말을 따라 호텔로 향하게 될지 아닐지 무척 궁금했지만, 한편으로는 참견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 극심한 갈등에 빠졌다. 아마도 그를 이렇게까지 고민하게 만들 수 있는 문제는 근 몇 년 들어 처음 있는 일일 터였다.
"허허허, 미안하구나 딸아. 아무래도 아비가 어쩔 수 없는 팔불출인가보구나."
비록 갈등에 빠지긴 했지만 석진은 고민을 길게 끄는 위인이 아니었다. 유정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먼저 가서 분위기만 살짝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것이 석진의 생각이었다. 물론 유정이 정말로 호텔로 오게 된다면 그 꼴을 아비로서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차후에 생각할 문제였지만 말이다.
"아버지? 어디 가세요?"
"으음... 잠시 갈 데가 생겼구나. 이따 천천히 들어오마."
"네? 아버지!"
때마침 몸을 씻고 나온 딸애가 석진을 불렀지만 그는 그 길로 은근슬쩍 도장을 빠져나와버렸다.
*
"요새 젊은이들은 데이트를 이런 곳에서 즐기나?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곳인데."
나이는 오십 줄을 훌쩍 넘겼지만 기억력만큼은 아직 어지간한 이십 대 못지 않은 석진은, 메시지를 통해서 보았던 호텔의 이름과 호실을 외우고 있었기에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리 어려울 것은 없었다.
잠행술(潛行術)로 따지자면 석진은 일본 전체를 통틀어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였다. 본래 그 뿌리가 암중에서 적의 수장을 제거하기 위해 고안된 암살비법의 하나인 잠행술을, 고작 호텔 복도에서 기척을 숨기기 위해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 누가 보면 참으로 우스꽝스럽게 여길 만한 일이었지만 그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혹시라도 딸아이가 기척을 눈치챈다면 바가지를 긁히는 정도로 끝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석진은 최성진이 보낸 호실의 룸이 있는 복도층에 자리를 잡고는, 멀찍이 떨어져 방문을 가만히 주시했다. 쓸 데 없이 CCTV의 사각지대까지 파악해가며 열심히 임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는 역시 팔불출의 기질을 속이기 힘든 것이리라.
"딸애가 정말 오려나?"
그는 정말 순수하게 그것이 궁금했다. 만약 유정이가 어느새 그 정도로까지 이성 관게에 있어서 진보적인 성향을 갖추게 되었다면 아비로서 과연 그걸 축하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 정말로 순수하게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아버지의 이런 고민을 알게 된다면 한편으로 기가 막혀 하겠지.
그런데 석진의 예상과는 다르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그 문 앞에 먼저 도달한 여인은 그의 딸이 아닌 다른 여성이었다. 어딘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석진이 주시하고 있는 방문 앞까지 다가간 그 여인은 머뭇거리며 방 문에 대고 몇 차례 노크를 했다.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일이 그 후에 벌어졌다. 문이 열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방 안에서 어떤 남성이 달려나와 잽싼 몸짓으로 그 여성의 입을 틀어막고는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간 것이다. 입이 막히기 전에 여인은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남자가 너무도 갑작스럽게 입을 막아버린 탓에 별다른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방 안으로 끌려 들어가버렸다.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석진이 그 순간 몸을 움직인 것은 어떤 사리판단에 기초한 움직임이 아닌, 그야말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그로서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있어서 분별을 내리기 이전에 몸의 감각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 너무도 익숙했던 것이다.
거의 이십 미터가 넘는 거리를 눈 몇 번 깜빡거릴 만큼 짧은 순간에 걸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필시 유령이라고 경악했을 만한 움직임이 아닐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그는 유령 같은 움직임으로 스르륵 움직여, 저절로 닫히려는 룸의 문을 그 전에 잡아챈 것이다.
희미하게 벌어진 문 틈새로, 석진은 청각을 곤두세워보았다.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극도로 발달되어 있는 예민한 청각이 심상치 않은 소리들을 포착했다. 희미한 비명 소리와 몸부림치는 소리, 그리고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어떤 개운치 못한 감각.
"읍... 으읍... 읍...."
"아하~ 문이 아직도 열려있었네. 이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킬킬."
방 안에서 누군가가 뚜벅뚜벅 문을 향해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떻게 할까, 잠깐 고민을 했지만 그는 역시나 고민을 길게 끄는 위인은 아니었다.
- 쾅!
문이 열리는 순간, 그는 가볍게 힘을 실어 거구의 사내를 향해 내력의 원리를 뿜었다. 그러자 사내의 몸이 공중에 붕 뜨더니 순식간에 룸 안쪽으로 곤두박질쳤다.
"뭐, 뭐야? 당신 누구야!"
룸의 안쪽으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가보니, 아니나다를까 심상치 않은 광경들이 보였다. 특히 바닥에 사지가 결박되어 널부러져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가 바로 자신이 찾던 최성진이라는 청년이었기에.
조잡한 전류가 흐르는 기계를 들고 덤비는 한 젊은 사내를 제압하고 나서, 석진은 성진의 입에 붙은 것들을 떼어내주었다. 파르르 떨리는 청년의 눈동자가 자신을 알아본 듯 흔들리더니, 간신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관장님....?"
겨우 한 마디를 내뱉고나서, 청년은 의식을 잃었다.
*
"정신이 좀 드나?"
나는 눈을 떴다. 온 몸이 욱신거렸고, 피를 너무 쏟았기 때문인이 여전히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등을 떠받치고 있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내 몸에는 호텔 가운이 한겹 입혀져 있었다.
"관장님....?"
"자네가 피를 많이 흘린 것 같아서 지혈을 좀 하고, 몸의 혈자리와 뼈들을 약간 손봤네. 응급처치만으로 될 일은 아닌 것 같으니 상황을 정리하고 나면 함께 병원으로 가도록 하세."
"과, 관장님이.... 여길 어떻게...."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세나. 우선 일어날 수 있겠나?"
"오빠!"
그 때, 울먹이는 현주의 목소리가 나와 관장님 사이로 파고 들었다. 내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 초조하게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 같은 현주는,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얼굴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몸의 뼈가 뭉개지는 것 같은 충격이 따라왔지만 나는 그녀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현주는 두 짐승 같은 놈들로부터 유린 당할 뻔 했는지, 여전히 옷이 반쯤 벗겨지다 만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옷매무새를 정리할 생각도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구원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현주마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라 생각하니 섬뜩한 기분이 다시 엄습했다.
"서, 서연아!"
하지만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나는 온 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도 잊고 벌떡 몸을 일으켜 룸 안을 두리번거렸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니,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지환이와 한수 두 놈의 모습이 보였고, 그에 이어서 침대 위에 담요가 덮혀진 채로 누워있는 서연이가 보였다.
"서연아! 서연아, 괜찮아? 눈 좀 떠봐!"
난 서연이에게로 달려들어 그녀를 품에 안고 흔들어보았다. 그녀는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내가 서연이를 흔들고 있는데, 뒤에서 관장님의 손길이 나를 제지했다.
"그 아가씨는 내가 잠시 혈을 짚어 재워두었네. 상태가 좋지 않아보이더군. 화학적인 약물의 영향인 것 같은데.... 자네도 그렇고, 아가씨도 그렇고 어서 병원으로 가보는게 좋겠어.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 너무 당황하지는 말게."
"........."
서연이의 몸을 끌어안은 내 두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도대체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한단 말인가?
"으, 으... 으아아아아!!"
어찌할 바도 모른 채, 그저 울분이 이끄는 대로 나는 바닥에 쓰러진 지환이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먹이 놈의 얼굴을 때리는지, 바닥을 때리는지도 느끼지 못한 채 마구잡이로 주먹질을 해댔고, 미친 듯이 한수 놈의 몸뚱이에도 발길질을 가했다. 의식을 잃은 그 놈들의 얼굴에서도 피가 흐르기 시작했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지환이 놈이 내 성기를 잘라버리겠다고 위협했던 바로 그 가위를 집어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내가 지환이 놈의 물건을 정말로 잘라버리기 위해 가위의 날을 힘주어 벌리자, 지켜보던 현주가 경악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관장님의 손길이 뒤에서 나를 제지했다.
"놔, 놔 주세요.... 이놈들은.... 이놈들은 벌을 받아야만 해요."
"사정은 잘 모르지만 진정하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지 않은가...."
"이, 이놈들 때문에.... 서연이가... 현주가...."
증오심이 극도에 달하니 오히려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아마도 그 순간, "그녀"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관장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어코 놈들의 혐오스런 물건을 잘라버리려고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분명 그랬을 것이다....
"현.... 주?"
혼잡한 방 안의 분위기를 궤뚫고, 누군가의 익숙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나는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박현아가 거기에 서 있었다. 일이 모두 끝난 것으로 알고 방 안의 상황을 살피러 온 그녀는, 이 자리에 그녀의 동생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한 목소리로 동생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
나는 내 팔을 쥐고 있는 관장님의 손을 내리고는, 그녀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내 모습을 현아는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앞까지 당도한 나는, 있는 힘껏 팔을 휘둘러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철썩! 하는 둔탁한 소리가 방 안에 가득히 울렸다.
"꺄악!!"
있는 힘껏 후려쳤기 때문인지 현아는 뺨을 감싸쥐고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하지만 비명소리는 그녀가 아닌 현주에게서 터져나왔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언니를 불러야 할지 오빠를 불러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아... 하아..."
고작 뺨 한대를 때린 것 뿐인데 호흡이 거칠어지며 숨이 구역질처럼 뭉텅이로 나왔다. 입술이 터진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현아를 내려다보며 나는 더듬더듬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다고 해서 이러는게 아니야.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당신이 현주를 두 번이나 지옥에 빠뜨릴 뻔 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야...."
"뭐....?"
현아가 흔들리는 눈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이 여자가 정말로 어리석고, 정말로 불쌍하며, 정말로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향한 타오르는 분노를 꺼뜨릴 수가 없었다.
"오빠....?"
그 때 나는 한순간, 현주가 나를 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절대 현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지금 내가 이런 부끄러운 모습이 되어있다는 것을 유일하게 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아마 그녀의 얼굴을 처음으로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지금 내 귀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유... 정아...."
나는 열린 문 틈새로, 복도에 서 있는 유정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방금 막 이곳에 도착한 것 같은 그녀는, 방 안을 들여다보며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나는 물론이고 등 뒤에 서 있었던 관장님마저도 헛기침을 하며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네... 네가 어떻게...."
"어떻게라니요? 나는 오빠가 불러서...."
"......."
나는 말없이 등을 돌려, 룸 안에 지환이 새끼가 어딘가에 팽개쳐놓은 나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지환이 놈이 나를 가장해서 현주와 유정이에게 보냈던 메시지들을 확인하자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조심스럽게 나를 따라 들어온 유정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더니,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을 이었다.
"그게... 오빠가 평소에 보냈던 것들과는 말투가 조금 달라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오빠가 나를 이런 곳으로 부른다는 것도 조금 이상했고.... 그래서 전화를 걸어봤는데 몇 번이나 해도 오빠가 받질 않아서.... 걱정이 되서 한번 확인해 보는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유정이가 나에게 설명을 했지만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만 또렷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서연이와 현주로도 모자라서, 유정이마저도 위험에 빠뜨릴 뻔 한 것이다....
"흑... 흐흑... 흑...."
병신같이 눈물이 흘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유정이가 깜짝 놀라 나에게 달려와 내 상태를 살폈다. 우왕좌왕하는 분위기 속에서 관장님만이 평정을 유지하며 나를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자... 우선 병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네. 성진 군은 내가 부축할 테니 다른 사람들이 저기 침대 위의 아가씨를 좀 부축해주면 좋겠는데."
"아...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나는 억지로 눈물을 닦아내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을 여기저기 뒤져 나는 내가 벗어두었던 옷가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남은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찾는지 도우려는 것 같았지만 내가 찾으려는 것을 몰라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마치 쓰레기처럼 방 구석에 구겨져 있었던 상의 점퍼에서 나는 투박한 은백색의 초시계를 말없이 꺼내들었다.
타임 리와인더.
마침내 이것을 다시 손에 쥐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지옥 같은 시간은 지나가버렸고, 내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 입거나, 또는 상처 입을 뻔 하였다. 그리고 그 흔적들이 내게 남아버렸다. 시간을 되감아 이 순간을 지운다 해도.... 나는 이 기억을 잊을 수 있을까?
극도의 회의감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나는 우선 이 상황을 해결해야만 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타임 리와인더의 바늘을 움직여보았다. 다행히 시계바늘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정상적으로 움직여 옆으로 이동해주었다. 왜 진작 이렇게 하지 못했는지 하늘을 원망하고 싶을 정도로....
뱃 속이 요동치는 감각이 나를 찾아왔고, 세상이 뒤바뀌었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룸 안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져있었다. 나는 이제 호텔 가운을 입은 채로, 아무도 없는 스위트룸 안에 홀로 멍청히 시계를 손에 쥐고 서 있었다. 룸 안에 아무도 사람이 없을 때 시간을 되감아서 다행이라는 생각 따위는 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멍하니 몸을 움직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도망치듯 로비를 가로질렀다. 호텔 가운 한 장만 입은 채로 로비를 달려나가니 지배인과 프론트의 직원들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막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입구를 달려나와 미친 놈처럼 쉴 새 없이 거리를 내달렸다.
얼마나 뛰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익숙한 방향을 향해 쉼 없이 뛰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원룸 앞에 도달해있었다. 나는 전봇대에 몸을 기댄 채, 있는대로 구역질을 하며 속을 게워냈다.
"우웨엑! 웨에에엑!"
위산이 식도를 타고 올라와 얼굴에 눈물이 맺힐 때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익숙한 방의 모습.... 하지만 정말로 여전히 모든 것이 그대로일까?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원래부터가 나는 겁쟁이였으니.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울렸다.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화면을 확인해보니 서연이로부터 무어라고 메시지가 와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화면 위로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서연이는 이제 무사할까? 정말 지금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사람이 서연이가 맞긴 한 걸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 어디야? 오늘 조별 발표하는 날인데 아까부터 연락도 안 되구. 혹시 아파? 무슨 일 있어?
심호흡을 하고 간신히 메시지를 확인해보았다. 이것 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찾기 위해 보냈던 메시지들과 부재중 전화들의 목록이 한가득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눈물이 핑 도는 와중에도 조별 발표라는 말에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며칠씩이나 시간을 되감아버렸다는 얘기였다....
안심이 되어야 할 상황이건만 이상하게 무언가가 속에서부터 자꾸 울렁울렁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두 짐승에게 유린당하며 망가지던 서연이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게 눈 앞에 떠올랐다. 이미 속을 한껏 게워냈지만 나는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변기를 부여잡고 또다시 한바탕 헛구역질을 해댔다.
"우웩... 웨에엑..."
눈물과 콧물과 침과 위액이 뒤섞인 것들을 모조리 변기 안에 쏟아넣듯이 토악질을 해대고는, 나는 기력이 풀려 그대로 또 정신을 잃었다. 화장실 바닥에 몸이 쓰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
"자기야! 자기야, 정신차려! 괜찮아?"
나를 흔들어 깨우는 누군가의 목소리. 지끈거리는 골을 억지로 일깨워 나는 정신을 차렸다. 고사리만한 두 손으로 누군가가 쉴 새 없이 나를 흔들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한 얼굴....
"서, 서연아....?"
서연이가 품에 나를 끌어안고, 화장실 바닥에 주저 앉은 채 다급하게 내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내가 간신히 눈을 뜨자 그녀가 놀라 나를 부둥켜 안으며 얼굴을 매만졌다.
"괜찮아? 정신 들어? 어떻게 된 거야....?"
"......."
방금 전까지 나를 흔들어 깨우기만 했던 그녀가, 내가 정신을 차리니 이제는 되려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서연이의 눈에 맺힌 이슬방울을 보자 나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눈물을 흘리며 처참하게 유린 당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그녀의 품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왜, 왜 그래...."
"서연아. 너 괜찮아....?"
"뭐, 뭐가...."
서연이는 어안이 벙벙한지 여전히 눈물이 핑 맺힌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괜찮냐구... 다, 다친데 없어? 아픈데는?"
"어... 없어.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픈건 자기면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아, 아니. 그런게 아니라... 몸에 이상이 있다거나, 후유증 같은게 남았다거나 그런거 없냐구...."
"이상...? 후유증...? 도대체 무슨 소리야. 혹시 술 마셨어?"
혹시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닌가 싶어 서연이는 덜컥 겁이 난 듯한 표정이었다. 119에라도 신고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는 듯한 그녀를 보며 나는 더듬더듬 물었다.
"어, 어떻게 알고 왔어?"
"어떻게 알고 왔냐니.... 오늘 발표하는 날인데 아침부터 연락은 안 되구. 전화도 안 받구. 무슨 일 있나 싶어서 수업 끝나자마자 온 거지. 그런데 문 열고 들어오니까 자기는 화장실에 쓰러져있고 내가 얼마나 놀랬겠어.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단 말이야...."
"오, 오늘 그럼 월요일 맞는 거야?"
"당연하지. 아까부터 왜 그래...? 어디 아파? 내가 구급차 부를 테니까 같이 병원갈까?"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해보았다. 눈도 한번 깜빡여보았다.
"그, 그럼... 서연이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아무 일도 없는 거지?"
"........"
서연이는 내가 정말로 이상하다는 듯, 이모저모 나를 뜯어보는 눈치였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손길에 그녀는 놀라면서도 나를 뿌리치지는 않았다.
"흑... 흐흑...흑... 미안해.... 미안해, 서연아...."
"자, 자기.... 울어?"
서연이의 당황하는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녀의 목소리.... 바보같이 그 목소리를 들으니 호스가 터지듯 눈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왜 그래.... 울지 마, 자기야. 응? 울지 마."
서연이가 꼬마 아이를 어르듯이 내 등을 가볍게 쓸어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 수록 울음이 더 커져만 갔다. 나는 품 안 가득 평소와 다름없는 서연이를 꽉 끌어안았고, 서연이는 당황하면서도 그런 나를 달래주었다.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어깨를 적시는데도 서연이가 나를 계속 안고 있어 주는 것이 고마웠다.
"잠깐...."
서연이가 내 몸을 보드랍게 감싸안고 있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내 몸에서 손을 떼고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옷 안에 살짝 들어갔던 그녀의 손에는 이제 겨우 말라가기 시작한 피딱지들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지환이로부터 얻어맞은 채찍질의 흔적이었다.
"자기... 이거 혹시 피야?"
"........"
서연이의 품에 안기자 극도의 긴장감과 공포가 한번에 허물어져 내리며, 나는 좀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은 무의식의 나락으로 가라앉았다. 그렇게 또 한번 기절을 해버렸고, 그 후 나는 병원 침대에서 눈을 떴다.
*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면서 나는 여러가지 목소리들을 들었다.
온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누군가의 목소리는 또렷이 들렸다.
아마도 그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시간을 되감는다고 해서 모든 것을 지울 수는 없는 거라고.
모든 것은 인과응보를 따르게 되어 있어.
그래서 매순간의 선택이 중요한 거야.
그걸 꼭 기억해.
알겠지, 아빠?
- 다음 화에 계속 -
지난 화의 몇몇 댓글들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많지만....
구태여 길게 썼다간 기분만 상할 듯 하니 최대한 말을 아끼겠습니다
제 의도만 간략하게 밝히고 넘어가려 하니 한번 읽어보시고
제 생각이 본인의 성향과 맞지 않다고 느끼는 분들은 앞으로 제 글을 읽지 말아주십시오
바쁜 일상에 시간을 쪼개가며 소라에 글을 올리면서, 제가 구상한 이야기를 소라에 자유롭게 쓰는 것이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구상했고, 오로지 제 머릿속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굳이 그런 식의 불쾌한 장면 (강간)을 보여줘야 했는지 많은 분들이 불만의 수준을 넘어서 욕설이나 억지가 난무하는 댓글들을 쓰셨던데 그분들에게 말하고 싶네요.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의 입맛에 맞는 글을 읽고 싶다면 본인의 머리로 이야기를 구상해서 스스로 글을 쓰세요. 정당한 비판은 수용합니다만 제가 제 이야기를 펼칠 권리를 왜 침해받아야 하는지? 소라에서마저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자유를 제한 받아야 합니까?
저는 모든 분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쓰기 위해서 무일푼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글쟁이가 아니에요. 제가 구상한 이야기를 제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풀어내는건 저의 권리라는 뜻입니다. 누군가는 SF 장르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하시고, 누군가는 이것이 강한 장면에 대한 강박이 아니냐는 말씀을 하셨지만 이 또한 처음부터 제가 구상해 놓았던 장면입니다. 게다가 전체 스토리 상에 있어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 부분이구요. 이 부분을 다른 식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시는 분이 물론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버리는 순간 이건 제가 구상한 글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글이 되겠지요.
"상상의신비"라는 사람이 쓰는 글이 불쾌하고 성향에 맞지 않으신다면 제발 읽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그런 욕설이나 들으려고 바쁜 일상을 쪼개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제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재밌게 읽어주시는 독자님들의 반응을 기다리는 즐거움 때문입니다.
어제는 내가 왜 이런 소리나 들으려고 컴퓨터 앞에서 팔 아프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작가분들이 왜 소라를 뜨는지 이해할 수 있는 심정이었습니다. 전 매화마다 댓글 남겨주시는 분들의 아이디를 기억하기 때문에 악플을 다는 분들의 아이디를 한번 유심히 봤는데, 그 분들의 아이디를 보면 평소엔 그저 읽기만 하고 지나가시던 분들이 내용 전개가 본인의 바람에 맞지 않으니 욕설을 남기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더군요.
악플도 관심이라고 하셨나요? 저는 그런 관심 사양하겠습니다. 성인사이트 들락거릴 만큼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어른들이 왜 타인의 표현과 사고를 존중하지 못합니까? 저는 적어도 저에게 도움이 되는 논리적인 비판을 원합니다. 그리고 어떤 반응이 있던 간에 저는 제가 구상했던 이야기를 끝까지 써나갈 겁니다. 결말에 이르러 독자분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주실지 모르지만 그래야만 제가 글을 쓰는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1부 완결을 9월 중으로 짓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어 요며칠 틈틈이 글을 썼던 것이 정말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다시는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진 않네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본인의 성향과 정 맞지 않다면 제 글을 읽지 말아주시고, 또 이런 일들이 이어진다면 일부 악플러들의 소행이 어쩔 수 없는 소라넷의 특성이라 이해하고 글을 중단하겠습니다.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45장
그 괴로운 시간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졌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굳이 그것을 인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나는 두 눈을 감은 채로, 이 순간이 어떤 형태로든 빨리 마무리되기만을 빌었다. 유일하게 내가 느낀 것이라곤 어느 순간 룸의 문을 노크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이었다.
"오빠.... 안에 있어?"
머뭇거리는 듯한 조심스러운 목소리. 현주의 목소리였다....
"읍! 으으읍!"
지환이 새끼는 내 휴대폰을 이용해 현주에게로 객실의 번호를 보냈고, 현주는 바보 같을 만큼 아무 의심 없이 그걸 보고선 여기까지 제발로 찾아오고 말았다. 전화라도 한번 걸어볼 것이지.... 하지만 내가 어떻게 현주를 탓할 수 있겠는가.
나는 안간힘을 써서 현주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어서 돌아가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지환이 새끼는 이것마저 대비해서 미리 내 입에 테이프를 다시 감아둔 뒤였다. 정말로 지독한 새끼였다.... 목구멍이 터져라 문을 향해 소리쳤지만 목이 막혀 발버둥치는 듯한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소중한 네 "진짜 여친"께서 오셨군.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지 않아?"
"읍... 으으읍... 으읍!"
나는 벌레처럼 땅바닥을 기어서라도 놈이 문을 열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벌레가 꿈틀대는 수준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간신히 기어가 놈의 바짓단을 이빨로 물어뜯었지만 놈은 비웃듯이 나를 발로 사정없이 찍어내렸다.
수차례의 구타와 채찍질로 너무 많은 피를 흘린 탓인지 의식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바닥에 힘없이 널부러진 나는 의식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정신을 잃으면 안 되는데.... 서연이와 현주를 지켜야 하는데.
"꺄악!"
문이 열리고, 나는 현주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흐려지는 눈동자를 억지로 들어 문을 보니 지환이 새끼가 현주의 입을 막은 채로, 그녀를 안으로 끌고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로서는 제발 누군가가 저 소리를 듣고 그녀를.... 아니, 우리를 구해주기를 바랐다.
"한수 선배, 테이프로 입 막아버려요."
"헤헤... 알았어."
쉬지 않고 서연이를 강간하던 한수 새끼는 새로운 장난감이 생겨서 즐겁다는 듯이, 냅다 전기 테이프를 들고 이쪽으로 뛰어왔다. 침대 위에 처참하게 널부러져있는 서연이의 모습과, 강제로 끌려들어오며 기겁하는 현주의 모습을 나는 번갈아 볼 수 있었다. 시야가 뿌옇게 물들어갔다....
박현아.... 그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과연 알고 있을까? 자신의 잘못으로 동생을 두 번이나 망가뜨리게 되었다는걸 그녀가 알면 분명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텐데. 그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는걸 깨닫고 나면 그 때는 동생에게 어떻게 용서를 구할까.
다른 모든 것들을 떠나서, 나는 현주에게 있어서 너무도 미안했다. 간신히 벗어던졌던 그녀의 트라우마를 또다시 이런 최악의 형태로 경험하게 만들어버리다니.... 나는 어쩌면 그녀에게 최악의 남자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욕심 내어 그녀를 억지로 내 곁에 붙들어 두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 테니.
"미안해.... 미안해 현주야."
또 다시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런데 문득 뭔가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희뿌옇게 변한 눈망울에 눈물이 글썽이며 맺히기 전에, 나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광경을 보았다. 지환이가 현주를 끌고 들어오느라 열어두었던 문이, 저절로 닫히지 않고 아직까지 미세하게 열려있었던 것이다. 호텔 객실의 문은 일부러 바깥 쪽에서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는 이상 저절로 닫히고 잠금장치까지 작동하게 되어 있는데....
지환이와 한수 놈들은 현주의 입을 테이프로 봉하고, 서연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손발을 끈으로 묶느라 정신이 없었다. 벌어진 문 틈새로 복도가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지만 놈들은 아직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소리를 질러야 하는데.... 어떻게든 소리를 질러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읍... 으으읍... 읍!"
문 쪽을 바라보며 내가 애벌레처럼 엉금엉금 발악을 해대자, 한수 새끼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현주가 두 놈에게 유린당할 위기에 처했는데도 내가 그에 대한 반응을 하지 않고 다른 곳에 신경을 쏟고 있으니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아하~ 문이 아직도 열려있었네. 이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킬킬."
결국 한수 새끼가 눈치를 채고 내게 이죽거리자 그만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유일했을지도 모르는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버린 것 같아서 그렇게 비통할 수가 없었다. 한수 놈은 그런 나를 한번 비웃어주고는 문을 닫기 위해 입구까지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놈이 문을 닫으려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도저히 내가 상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 쾅!
짤막하고 둔탁한 소리가 한차례 울린 것 같더니, 한수 놈의 몸뚱이가 허공을 붕 날고 있었다. 2미터에 가까운 놈의 거구가.... 공중에 뜬 채로 입구에서부터 룸 중앙까지 날아왔다. 아마 내 정신이 지금 이렇게 피폐해진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마 입을 벌리고 경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봐도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뭐, 뭐야?"
현주의 옷을 벗기느라 눈이 뒤집혀있던 지환이 새끼가 움찔하며 문을 바라보았다. 나 또한 문에서부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찰나의 순간에.... 나는 혹시라도, 유정이가 나를 구하러 온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 마음 속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이 그녀 밖에 없었기 때문일까.
그런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문을 열고 나타난 인물의 인영은, 도저히 유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형상이었고, 심지어는 여인의 모습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평범한 체구에서 느껴지는 깊고 무거운 중압감을, 나는 분명 예전에도 한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저 분은...."
주름이 패인 그 중년 남성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이 상황의 긴박함도 잊고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졌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 사람은 분명 유정이 아버지인 것 같은데....
"뭐야! 당신 누구야!"
지환이 놈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냅다 입구를 향해 내달렸다. 순식간에 문 앞까지 뛰어든 놈이 문간에 서 있는 중년의 남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은 다시 한번 더 일어났다.
달려드는 지환이 놈을 향해 중년의 사내가 휙, 하는 손짓을 한번 했을 뿐인 데 놈의 체구가 순식간에 공중에 한바퀴 빙글 하고 돌았다. 허공에서 뒤집힌 놈의 몸이 문 앞으로 볼품없이 처박혔다. 그러자 등골이 부러지는 충격에 지환이 놈이 게거품을 물면서도 품 속에서 잽싸게 전기충격기를 꺼내들었다.
치직, 하는 소리를 내면서 작동하는 충격기를 중년의 남성은 힐끗 바라보더니,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뚜벅뚜벅 실내를 향해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스위트룸 안을 이리저리 한번 쓱 하고 둘러보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했는지 지환이 놈이 인상을 구기며 중년 남성의 뒷통수에 전기충격기를 지지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희미해진 의식 탓에 아직 정체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중년 남성을 향해 조심하라고 소리칠 뻔 했다. 입이 막혀있지만 않았어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 쾅!
심지어 나는 전기충격기를 손에 쥐고 달려들던 지환이 놈이 어떻게 다시 땅바닥에 처박혔는지, 눈으로 볼 수도 없었다. 성인 남성 두 명을 너무도 손쉽게 제압한 중년의 사내는 다시 방 안으로 한발짝 더 성큼 들어와 고개를 돌려가며 이모저모를 살폈다.
바닥에 버려져 꿈틀대고 있었던 나와 중년 남성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에게로 다가와 입가에 둘러져 있는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떼어내었다. 한겹 한겹 입을 구속했던 것이 떨어져나가고, 마침내 내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유를 찾게 되자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관장님....?"
신기하게도 왜 이 순간에 그 말이 떠올랐을까. 나는 어떻게든 그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더는 의식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이 스르르 감겨왔고, 의식이 멀어졌다.
*
전통 고무술(古武術)의 맥을 잇고 있는 "무신류"의 제 20대 당주이자, 현 유파 최고의 실력자인 한석진. 그에게는 한국에 홀로 남겨놓은 딸이 있었다. 당주의 책임을 위해 불가피하게 일본 땅에 기거하면서도, 그는 늘 마음 한 구석으로 딸아이에 대해 걱정해왔다.
그랬기에 그는 이번 기회에 잠깐이나마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 아주 보람찬 시간이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딸아이가 다니고 있다는 대학교 구경도 해보고, 지내고 있다는 자취방에도 한번 들러보았다. 여전히 어린 딸을 혼자 지내도록 놔두는 것이 가슴 아팠지만, 그래도 여느 여자아이와는 달리 강하게 자라주어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 딸이 그 와중에도 못내 고맙고 기특했다.
게다가 어쩐지 지금은 딸아이에게 만나고 있는 남자도 한 명 생긴 것 같았다. 딸이 지내고 있는 원룸에 방문했을 때 우연히 만나게 된 그 청년이 딸아이와 어느 정도의 관계인지 그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아비의 입장으로 봐서는 유정이가 그 청년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것 만큼은 분명해보였다.
그 청년의 첫 인상이 어땠는가, 의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석진은 딸이 누군가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이 우선은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내와 가문의 요구에 못 이겨 딸에게 어릴 적부터 무술의 기초를 가르친 적이 있긴 하지만, 자신의 딸이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기를 누구보다 원했던 석진으로서는 유정이가 그저 평범한 여자로서의 행복을 누리고 살기만을 바랐다.
그렇기에 지금껏 남성적인 삶을 지향해왔던 유정이가, 여자로서의 연애 감정을 누군가에게 품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비인 그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반길 만한 일이었다. 전통 무술 가문의 당주라는 직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극히 보수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생각해왔지만, 오히려 그는 마음 속으로 줄곧 딸아이의 그런 변화를 내심 기대해왔기 때문이었다.
최성진이라는 그 청년이 남긴 인상은 꽤 복잡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아직 섣불리 판단할 만큼 그 청년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다만, 어쩐지 그 청년이 딸아이를 행복하게 해줄 만한 인물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석진은 구태여 딸아이 앞에서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의 딸인 유정은 자기 앞가림을 못할 만큼 모자란 아이가 아니라고 그는 믿었다. 부모의 보살핌 없이 여기까지 홀로 자라나 준 기특한 아이였고, 또한 어느 남자들보다도 강한 정신력을 지닌 아이였다. 그런 그녀가 마음을 주기로 선택한 상대라면 우선은 간섭하지 않고 지켜만 보는 것이, 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배려일 거라고 석진은 생각했다. 그는 아버지로서 유정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차앗!"
유정의 오른발이 매섭게 허공을 가르고 석진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느긋하게 상념에 빠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석진은 어렵지 않게 발차기를 털어내듯이 비껴내버렸다. 아버지가 자신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낼 거라고 유정은 당연히 예상했는지 그 자세에서 몸을 틀어 반대쪽 발로 후속 공격을 시도했다.
돌려차기의 동작이 컸던 탓에 빈틈이 생겼다고는 해도,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 석진의 몸은 이미 유정이 가한 발차기의 궤도에서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비껴나 있었다. 목표를 놓친 유정의 발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전에, 석진의 발 뒤꿈치가 가볍게 유정의 한쪽 다리를 걸어넘겼다.
"앗..."
유정의 가벼운 몸이 허공에 잠깐 떴다 싶더니, 다음 순간 석진이 기우뚱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양팔로 받쳐냈다. 마치 어릴 적에 아기였던 유정을 양팔로 안아든 것만 같은 자세였다. 당황하는 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석진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투로가 너무 단조롭고 딱딱하구나. 마지막으로 수련을 했던게 언제였니?"
"그게.... 좀 오래 되었네요."
유정은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기색으로 답했다. 하지만 석진은 인자하게 웃을 뿐이었다. 딸아이와 대련을 해보는 것도 오랜만이고, 이렇게 그녀가 도복을 입은 모습을 보는 것 역시 오랜만이었지만, 석진은 유정에게 도복보다는 소녀다운 옷이 훨씬 더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이 아비는 이제 네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수련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가끔씩 네 마음의 수양을 위해 도복을 입어보는 것도 나쁠 건 없겠지. 살아가면서 생각이 복잡해지는 순간이 올 때면 한번쯤은 이 아비가 어릴 적에 가르쳤던 것들을 떠올려주렴."
"네... 명심할게요."
"그래, 대련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유정과 석진은 모처럼 그녀가 지내는 원룸이 아닌, 어릴 적에 석진의 가족이 살았던 그의 본가를 방문해 있었다. 유정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었던 바로 그 집이었다. 석진에게 있어서는 한 때 이곳이 한국의 청년들을 가르치고 함께 수련했었던 무도장이기도 했다.
석진이 일본으로 가면서부터 이 곳에는 오직 유정 한 사람만이 남게되었다. 아마도 딸아이는 이 넓디 넓은 곳에, 자기 혼자만이 살고 있다는 그 외로운 기분을 견디기 힘들어 사는 곳을 옮겼던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한번 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그런데 그런 불편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쯤, 석진의 귓가에 희미한 진동 소리가 한 차례 울렸다.
"음?"
딸아이는 몸을 씻겠다고 샤워실로 들어가버린 것 같았다. 지금 이 진동소리는 그녀가 대련하기 전에 평상 위에 잠시 올려두었던 유정의 휴대폰으로부터 울려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석진이 일부러 보려고 해서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때마침 평상 앞을 걷고 있었기에 딸아이의 휴대폰 액정에 떠오른 그 이름을 보고도 일부러 못 본 척하기는 꽤 힘든 일이었다.
"그 청년이잖아."
젊은 세대들이 메시지를 주고 받는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어떤 메신저 프로그램을 통해서, 최성진이란 청년이 딸아이에게 뭔가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매사에 주책 맞은 사람은 결코 아니었지만, 한편으로 딸에 관해서는 간혹 팔불출이 되기도 했기에 청년이 딸에게 보내는 메시지의 내용이 심히 궁금해지려는 것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궁금하긴 하나...."
젊은이들의 연애 문제에 기성 세대들이 함부로 간섭하고 참견하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이라 그는 생각했다. 그도 사람인 이상 호기심을 억누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순간에 허락도 없이 딸의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하는 것은 좋은 아비가 할 만한 행동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렇기에 그는 아쉽지만 그것을 못 본 체 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마도 마지막에 전송된 메시지가 화면에 잠깐 떠오른 것만 아니었다면, 그는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 OO호텔 XX호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유성아~ 꼭 와줬으면 좋겠어.
메신저로 전송된 메시지가 액정에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기능이 있었다는게 그 순간에는 참으로 큰 의미를 발휘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메시지를 볼 수 밖에 없었던 석진은 속으로 의아함에 빠졌다.
"호...텔?"
설마하니 딸아이가 벌써 그 청년과 그만한 사이로까지 발전한 걸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곤 해도, 자신의 딸이 호텔 같은 곳을 수시로 들락거릴 만한 성격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딸의 자유를 존중하는 편이었지만, 이것은 자유의 문제이기 이전에 유정이라는 아이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 일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이 청년은 지난번에 분명 딸아이를 내가 지어준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한유정"이라는 이름으로 딸을 부르는 사람은 지금껏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 이름을 지어주었던 석진 그 자신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불과 얼마 전에, 그 이름으로 딸을 부르는 이가 한 사람 더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그 최성진이라는 청년이었다.
석진에게 있어서, 유정을 그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딸에게나, 석진에게나 결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는 일이었다. 그것은 유정이 누군가로 하여금 자신을 그렇게 부르길 허락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석진도 처음 만났을 때 그 청년이 유정을 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걸 감안한다면 지금 이 메시지가 주는 느낌은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석진의 생각대로 청년과 유정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관계라고 한다면, 이제와서 그가 유성이란 이름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젊은 사람들의 변덕 내지는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라고 치부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궁금함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흠...."
아마도 유정은 곧 이 메시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석진은 딸아이가 이 메시지를 받으면 청년의 말을 따라 호텔로 향하게 될지 아닐지 무척 궁금했지만, 한편으로는 참견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 극심한 갈등에 빠졌다. 아마도 그를 이렇게까지 고민하게 만들 수 있는 문제는 근 몇 년 들어 처음 있는 일일 터였다.
"허허허, 미안하구나 딸아. 아무래도 아비가 어쩔 수 없는 팔불출인가보구나."
비록 갈등에 빠지긴 했지만 석진은 고민을 길게 끄는 위인이 아니었다. 유정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먼저 가서 분위기만 살짝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것이 석진의 생각이었다. 물론 유정이 정말로 호텔로 오게 된다면 그 꼴을 아비로서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차후에 생각할 문제였지만 말이다.
"아버지? 어디 가세요?"
"으음... 잠시 갈 데가 생겼구나. 이따 천천히 들어오마."
"네? 아버지!"
때마침 몸을 씻고 나온 딸애가 석진을 불렀지만 그는 그 길로 은근슬쩍 도장을 빠져나와버렸다.
*
"요새 젊은이들은 데이트를 이런 곳에서 즐기나?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곳인데."
나이는 오십 줄을 훌쩍 넘겼지만 기억력만큼은 아직 어지간한 이십 대 못지 않은 석진은, 메시지를 통해서 보았던 호텔의 이름과 호실을 외우고 있었기에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리 어려울 것은 없었다.
잠행술(潛行術)로 따지자면 석진은 일본 전체를 통틀어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였다. 본래 그 뿌리가 암중에서 적의 수장을 제거하기 위해 고안된 암살비법의 하나인 잠행술을, 고작 호텔 복도에서 기척을 숨기기 위해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 누가 보면 참으로 우스꽝스럽게 여길 만한 일이었지만 그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혹시라도 딸아이가 기척을 눈치챈다면 바가지를 긁히는 정도로 끝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석진은 최성진이 보낸 호실의 룸이 있는 복도층에 자리를 잡고는, 멀찍이 떨어져 방문을 가만히 주시했다. 쓸 데 없이 CCTV의 사각지대까지 파악해가며 열심히 임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는 역시 팔불출의 기질을 속이기 힘든 것이리라.
"딸애가 정말 오려나?"
그는 정말 순수하게 그것이 궁금했다. 만약 유정이가 어느새 그 정도로까지 이성 관게에 있어서 진보적인 성향을 갖추게 되었다면 아비로서 과연 그걸 축하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 정말로 순수하게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아버지의 이런 고민을 알게 된다면 한편으로 기가 막혀 하겠지.
그런데 석진의 예상과는 다르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그 문 앞에 먼저 도달한 여인은 그의 딸이 아닌 다른 여성이었다. 어딘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석진이 주시하고 있는 방문 앞까지 다가간 그 여인은 머뭇거리며 방 문에 대고 몇 차례 노크를 했다.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일이 그 후에 벌어졌다. 문이 열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방 안에서 어떤 남성이 달려나와 잽싼 몸짓으로 그 여성의 입을 틀어막고는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간 것이다. 입이 막히기 전에 여인은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남자가 너무도 갑작스럽게 입을 막아버린 탓에 별다른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방 안으로 끌려 들어가버렸다.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석진이 그 순간 몸을 움직인 것은 어떤 사리판단에 기초한 움직임이 아닌, 그야말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그로서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있어서 분별을 내리기 이전에 몸의 감각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 너무도 익숙했던 것이다.
거의 이십 미터가 넘는 거리를 눈 몇 번 깜빡거릴 만큼 짧은 순간에 걸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필시 유령이라고 경악했을 만한 움직임이 아닐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그는 유령 같은 움직임으로 스르륵 움직여, 저절로 닫히려는 룸의 문을 그 전에 잡아챈 것이다.
희미하게 벌어진 문 틈새로, 석진은 청각을 곤두세워보았다.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극도로 발달되어 있는 예민한 청각이 심상치 않은 소리들을 포착했다. 희미한 비명 소리와 몸부림치는 소리, 그리고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어떤 개운치 못한 감각.
"읍... 으읍... 읍...."
"아하~ 문이 아직도 열려있었네. 이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킬킬."
방 안에서 누군가가 뚜벅뚜벅 문을 향해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떻게 할까, 잠깐 고민을 했지만 그는 역시나 고민을 길게 끄는 위인은 아니었다.
- 쾅!
문이 열리는 순간, 그는 가볍게 힘을 실어 거구의 사내를 향해 내력의 원리를 뿜었다. 그러자 사내의 몸이 공중에 붕 뜨더니 순식간에 룸 안쪽으로 곤두박질쳤다.
"뭐, 뭐야? 당신 누구야!"
룸의 안쪽으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가보니, 아니나다를까 심상치 않은 광경들이 보였다. 특히 바닥에 사지가 결박되어 널부러져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가 바로 자신이 찾던 최성진이라는 청년이었기에.
조잡한 전류가 흐르는 기계를 들고 덤비는 한 젊은 사내를 제압하고 나서, 석진은 성진의 입에 붙은 것들을 떼어내주었다. 파르르 떨리는 청년의 눈동자가 자신을 알아본 듯 흔들리더니, 간신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관장님....?"
겨우 한 마디를 내뱉고나서, 청년은 의식을 잃었다.
*
"정신이 좀 드나?"
나는 눈을 떴다. 온 몸이 욱신거렸고, 피를 너무 쏟았기 때문인이 여전히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등을 떠받치고 있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내 몸에는 호텔 가운이 한겹 입혀져 있었다.
"관장님....?"
"자네가 피를 많이 흘린 것 같아서 지혈을 좀 하고, 몸의 혈자리와 뼈들을 약간 손봤네. 응급처치만으로 될 일은 아닌 것 같으니 상황을 정리하고 나면 함께 병원으로 가도록 하세."
"과, 관장님이.... 여길 어떻게...."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세나. 우선 일어날 수 있겠나?"
"오빠!"
그 때, 울먹이는 현주의 목소리가 나와 관장님 사이로 파고 들었다. 내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 초조하게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 같은 현주는,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얼굴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몸의 뼈가 뭉개지는 것 같은 충격이 따라왔지만 나는 그녀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현주는 두 짐승 같은 놈들로부터 유린 당할 뻔 했는지, 여전히 옷이 반쯤 벗겨지다 만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옷매무새를 정리할 생각도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구원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현주마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라 생각하니 섬뜩한 기분이 다시 엄습했다.
"서, 서연아!"
하지만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나는 온 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도 잊고 벌떡 몸을 일으켜 룸 안을 두리번거렸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니,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지환이와 한수 두 놈의 모습이 보였고, 그에 이어서 침대 위에 담요가 덮혀진 채로 누워있는 서연이가 보였다.
"서연아! 서연아, 괜찮아? 눈 좀 떠봐!"
난 서연이에게로 달려들어 그녀를 품에 안고 흔들어보았다. 그녀는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내가 서연이를 흔들고 있는데, 뒤에서 관장님의 손길이 나를 제지했다.
"그 아가씨는 내가 잠시 혈을 짚어 재워두었네. 상태가 좋지 않아보이더군. 화학적인 약물의 영향인 것 같은데.... 자네도 그렇고, 아가씨도 그렇고 어서 병원으로 가보는게 좋겠어.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 너무 당황하지는 말게."
"........."
서연이의 몸을 끌어안은 내 두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도대체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한단 말인가?
"으, 으... 으아아아아!!"
어찌할 바도 모른 채, 그저 울분이 이끄는 대로 나는 바닥에 쓰러진 지환이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먹이 놈의 얼굴을 때리는지, 바닥을 때리는지도 느끼지 못한 채 마구잡이로 주먹질을 해댔고, 미친 듯이 한수 놈의 몸뚱이에도 발길질을 가했다. 의식을 잃은 그 놈들의 얼굴에서도 피가 흐르기 시작했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지환이 놈이 내 성기를 잘라버리겠다고 위협했던 바로 그 가위를 집어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내가 지환이 놈의 물건을 정말로 잘라버리기 위해 가위의 날을 힘주어 벌리자, 지켜보던 현주가 경악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관장님의 손길이 뒤에서 나를 제지했다.
"놔, 놔 주세요.... 이놈들은.... 이놈들은 벌을 받아야만 해요."
"사정은 잘 모르지만 진정하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지 않은가...."
"이, 이놈들 때문에.... 서연이가... 현주가...."
증오심이 극도에 달하니 오히려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아마도 그 순간, "그녀"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관장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어코 놈들의 혐오스런 물건을 잘라버리려고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분명 그랬을 것이다....
"현.... 주?"
혼잡한 방 안의 분위기를 궤뚫고, 누군가의 익숙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나는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박현아가 거기에 서 있었다. 일이 모두 끝난 것으로 알고 방 안의 상황을 살피러 온 그녀는, 이 자리에 그녀의 동생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한 목소리로 동생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
나는 내 팔을 쥐고 있는 관장님의 손을 내리고는, 그녀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내 모습을 현아는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앞까지 당도한 나는, 있는 힘껏 팔을 휘둘러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철썩! 하는 둔탁한 소리가 방 안에 가득히 울렸다.
"꺄악!!"
있는 힘껏 후려쳤기 때문인지 현아는 뺨을 감싸쥐고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하지만 비명소리는 그녀가 아닌 현주에게서 터져나왔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언니를 불러야 할지 오빠를 불러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아... 하아..."
고작 뺨 한대를 때린 것 뿐인데 호흡이 거칠어지며 숨이 구역질처럼 뭉텅이로 나왔다. 입술이 터진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현아를 내려다보며 나는 더듬더듬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다고 해서 이러는게 아니야.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당신이 현주를 두 번이나 지옥에 빠뜨릴 뻔 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야...."
"뭐....?"
현아가 흔들리는 눈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이 여자가 정말로 어리석고, 정말로 불쌍하며, 정말로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향한 타오르는 분노를 꺼뜨릴 수가 없었다.
"오빠....?"
그 때 나는 한순간, 현주가 나를 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절대 현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지금 내가 이런 부끄러운 모습이 되어있다는 것을 유일하게 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아마 그녀의 얼굴을 처음으로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지금 내 귀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유... 정아...."
나는 열린 문 틈새로, 복도에 서 있는 유정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방금 막 이곳에 도착한 것 같은 그녀는, 방 안을 들여다보며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나는 물론이고 등 뒤에 서 있었던 관장님마저도 헛기침을 하며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네... 네가 어떻게...."
"어떻게라니요? 나는 오빠가 불러서...."
"......."
나는 말없이 등을 돌려, 룸 안에 지환이 새끼가 어딘가에 팽개쳐놓은 나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지환이 놈이 나를 가장해서 현주와 유정이에게 보냈던 메시지들을 확인하자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조심스럽게 나를 따라 들어온 유정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더니,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을 이었다.
"그게... 오빠가 평소에 보냈던 것들과는 말투가 조금 달라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오빠가 나를 이런 곳으로 부른다는 것도 조금 이상했고.... 그래서 전화를 걸어봤는데 몇 번이나 해도 오빠가 받질 않아서.... 걱정이 되서 한번 확인해 보는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유정이가 나에게 설명을 했지만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만 또렷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서연이와 현주로도 모자라서, 유정이마저도 위험에 빠뜨릴 뻔 한 것이다....
"흑... 흐흑... 흑...."
병신같이 눈물이 흘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유정이가 깜짝 놀라 나에게 달려와 내 상태를 살폈다. 우왕좌왕하는 분위기 속에서 관장님만이 평정을 유지하며 나를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자... 우선 병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네. 성진 군은 내가 부축할 테니 다른 사람들이 저기 침대 위의 아가씨를 좀 부축해주면 좋겠는데."
"아...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나는 억지로 눈물을 닦아내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을 여기저기 뒤져 나는 내가 벗어두었던 옷가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남은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찾는지 도우려는 것 같았지만 내가 찾으려는 것을 몰라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마치 쓰레기처럼 방 구석에 구겨져 있었던 상의 점퍼에서 나는 투박한 은백색의 초시계를 말없이 꺼내들었다.
타임 리와인더.
마침내 이것을 다시 손에 쥐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지옥 같은 시간은 지나가버렸고, 내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 입거나, 또는 상처 입을 뻔 하였다. 그리고 그 흔적들이 내게 남아버렸다. 시간을 되감아 이 순간을 지운다 해도.... 나는 이 기억을 잊을 수 있을까?
극도의 회의감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나는 우선 이 상황을 해결해야만 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타임 리와인더의 바늘을 움직여보았다. 다행히 시계바늘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정상적으로 움직여 옆으로 이동해주었다. 왜 진작 이렇게 하지 못했는지 하늘을 원망하고 싶을 정도로....
뱃 속이 요동치는 감각이 나를 찾아왔고, 세상이 뒤바뀌었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룸 안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져있었다. 나는 이제 호텔 가운을 입은 채로, 아무도 없는 스위트룸 안에 홀로 멍청히 시계를 손에 쥐고 서 있었다. 룸 안에 아무도 사람이 없을 때 시간을 되감아서 다행이라는 생각 따위는 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멍하니 몸을 움직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도망치듯 로비를 가로질렀다. 호텔 가운 한 장만 입은 채로 로비를 달려나가니 지배인과 프론트의 직원들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막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입구를 달려나와 미친 놈처럼 쉴 새 없이 거리를 내달렸다.
얼마나 뛰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익숙한 방향을 향해 쉼 없이 뛰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원룸 앞에 도달해있었다. 나는 전봇대에 몸을 기댄 채, 있는대로 구역질을 하며 속을 게워냈다.
"우웨엑! 웨에에엑!"
위산이 식도를 타고 올라와 얼굴에 눈물이 맺힐 때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익숙한 방의 모습.... 하지만 정말로 여전히 모든 것이 그대로일까?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원래부터가 나는 겁쟁이였으니.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울렸다.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화면을 확인해보니 서연이로부터 무어라고 메시지가 와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화면 위로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서연이는 이제 무사할까? 정말 지금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사람이 서연이가 맞긴 한 걸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 어디야? 오늘 조별 발표하는 날인데 아까부터 연락도 안 되구. 혹시 아파? 무슨 일 있어?
심호흡을 하고 간신히 메시지를 확인해보았다. 이것 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찾기 위해 보냈던 메시지들과 부재중 전화들의 목록이 한가득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눈물이 핑 도는 와중에도 조별 발표라는 말에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며칠씩이나 시간을 되감아버렸다는 얘기였다....
안심이 되어야 할 상황이건만 이상하게 무언가가 속에서부터 자꾸 울렁울렁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두 짐승에게 유린당하며 망가지던 서연이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게 눈 앞에 떠올랐다. 이미 속을 한껏 게워냈지만 나는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변기를 부여잡고 또다시 한바탕 헛구역질을 해댔다.
"우웩... 웨에엑..."
눈물과 콧물과 침과 위액이 뒤섞인 것들을 모조리 변기 안에 쏟아넣듯이 토악질을 해대고는, 나는 기력이 풀려 그대로 또 정신을 잃었다. 화장실 바닥에 몸이 쓰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
"자기야! 자기야, 정신차려! 괜찮아?"
나를 흔들어 깨우는 누군가의 목소리. 지끈거리는 골을 억지로 일깨워 나는 정신을 차렸다. 고사리만한 두 손으로 누군가가 쉴 새 없이 나를 흔들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한 얼굴....
"서, 서연아....?"
서연이가 품에 나를 끌어안고, 화장실 바닥에 주저 앉은 채 다급하게 내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내가 간신히 눈을 뜨자 그녀가 놀라 나를 부둥켜 안으며 얼굴을 매만졌다.
"괜찮아? 정신 들어? 어떻게 된 거야....?"
"......."
방금 전까지 나를 흔들어 깨우기만 했던 그녀가, 내가 정신을 차리니 이제는 되려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서연이의 눈에 맺힌 이슬방울을 보자 나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눈물을 흘리며 처참하게 유린 당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그녀의 품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왜, 왜 그래...."
"서연아. 너 괜찮아....?"
"뭐, 뭐가...."
서연이는 어안이 벙벙한지 여전히 눈물이 핑 맺힌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괜찮냐구... 다, 다친데 없어? 아픈데는?"
"어... 없어.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픈건 자기면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아, 아니. 그런게 아니라... 몸에 이상이 있다거나, 후유증 같은게 남았다거나 그런거 없냐구...."
"이상...? 후유증...? 도대체 무슨 소리야. 혹시 술 마셨어?"
혹시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닌가 싶어 서연이는 덜컥 겁이 난 듯한 표정이었다. 119에라도 신고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는 듯한 그녀를 보며 나는 더듬더듬 물었다.
"어, 어떻게 알고 왔어?"
"어떻게 알고 왔냐니.... 오늘 발표하는 날인데 아침부터 연락은 안 되구. 전화도 안 받구. 무슨 일 있나 싶어서 수업 끝나자마자 온 거지. 그런데 문 열고 들어오니까 자기는 화장실에 쓰러져있고 내가 얼마나 놀랬겠어.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단 말이야...."
"오, 오늘 그럼 월요일 맞는 거야?"
"당연하지. 아까부터 왜 그래...? 어디 아파? 내가 구급차 부를 테니까 같이 병원갈까?"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해보았다. 눈도 한번 깜빡여보았다.
"그, 그럼... 서연이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아무 일도 없는 거지?"
"........"
서연이는 내가 정말로 이상하다는 듯, 이모저모 나를 뜯어보는 눈치였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손길에 그녀는 놀라면서도 나를 뿌리치지는 않았다.
"흑... 흐흑...흑... 미안해.... 미안해, 서연아...."
"자, 자기.... 울어?"
서연이의 당황하는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녀의 목소리.... 바보같이 그 목소리를 들으니 호스가 터지듯 눈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왜 그래.... 울지 마, 자기야. 응? 울지 마."
서연이가 꼬마 아이를 어르듯이 내 등을 가볍게 쓸어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 수록 울음이 더 커져만 갔다. 나는 품 안 가득 평소와 다름없는 서연이를 꽉 끌어안았고, 서연이는 당황하면서도 그런 나를 달래주었다.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어깨를 적시는데도 서연이가 나를 계속 안고 있어 주는 것이 고마웠다.
"잠깐...."
서연이가 내 몸을 보드랍게 감싸안고 있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내 몸에서 손을 떼고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옷 안에 살짝 들어갔던 그녀의 손에는 이제 겨우 말라가기 시작한 피딱지들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지환이로부터 얻어맞은 채찍질의 흔적이었다.
"자기... 이거 혹시 피야?"
"........"
서연이의 품에 안기자 극도의 긴장감과 공포가 한번에 허물어져 내리며, 나는 좀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은 무의식의 나락으로 가라앉았다. 그렇게 또 한번 기절을 해버렸고, 그 후 나는 병원 침대에서 눈을 떴다.
*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면서 나는 여러가지 목소리들을 들었다.
온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누군가의 목소리는 또렷이 들렸다.
아마도 그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시간을 되감는다고 해서 모든 것을 지울 수는 없는 거라고.
모든 것은 인과응보를 따르게 되어 있어.
그래서 매순간의 선택이 중요한 거야.
그걸 꼭 기억해.
알겠지, 아빠?
- 다음 화에 계속 -
지난 화의 몇몇 댓글들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많지만....
구태여 길게 썼다간 기분만 상할 듯 하니 최대한 말을 아끼겠습니다
제 의도만 간략하게 밝히고 넘어가려 하니 한번 읽어보시고
제 생각이 본인의 성향과 맞지 않다고 느끼는 분들은 앞으로 제 글을 읽지 말아주십시오
바쁜 일상에 시간을 쪼개가며 소라에 글을 올리면서, 제가 구상한 이야기를 소라에 자유롭게 쓰는 것이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구상했고, 오로지 제 머릿속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굳이 그런 식의 불쾌한 장면 (강간)을 보여줘야 했는지 많은 분들이 불만의 수준을 넘어서 욕설이나 억지가 난무하는 댓글들을 쓰셨던데 그분들에게 말하고 싶네요.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의 입맛에 맞는 글을 읽고 싶다면 본인의 머리로 이야기를 구상해서 스스로 글을 쓰세요. 정당한 비판은 수용합니다만 제가 제 이야기를 펼칠 권리를 왜 침해받아야 하는지? 소라에서마저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자유를 제한 받아야 합니까?
저는 모든 분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쓰기 위해서 무일푼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글쟁이가 아니에요. 제가 구상한 이야기를 제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풀어내는건 저의 권리라는 뜻입니다. 누군가는 SF 장르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하시고, 누군가는 이것이 강한 장면에 대한 강박이 아니냐는 말씀을 하셨지만 이 또한 처음부터 제가 구상해 놓았던 장면입니다. 게다가 전체 스토리 상에 있어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 부분이구요. 이 부분을 다른 식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시는 분이 물론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버리는 순간 이건 제가 구상한 글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글이 되겠지요.
"상상의신비"라는 사람이 쓰는 글이 불쾌하고 성향에 맞지 않으신다면 제발 읽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그런 욕설이나 들으려고 바쁜 일상을 쪼개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제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재밌게 읽어주시는 독자님들의 반응을 기다리는 즐거움 때문입니다.
어제는 내가 왜 이런 소리나 들으려고 컴퓨터 앞에서 팔 아프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작가분들이 왜 소라를 뜨는지 이해할 수 있는 심정이었습니다. 전 매화마다 댓글 남겨주시는 분들의 아이디를 기억하기 때문에 악플을 다는 분들의 아이디를 한번 유심히 봤는데, 그 분들의 아이디를 보면 평소엔 그저 읽기만 하고 지나가시던 분들이 내용 전개가 본인의 바람에 맞지 않으니 욕설을 남기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더군요.
악플도 관심이라고 하셨나요? 저는 그런 관심 사양하겠습니다. 성인사이트 들락거릴 만큼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어른들이 왜 타인의 표현과 사고를 존중하지 못합니까? 저는 적어도 저에게 도움이 되는 논리적인 비판을 원합니다. 그리고 어떤 반응이 있던 간에 저는 제가 구상했던 이야기를 끝까지 써나갈 겁니다. 결말에 이르러 독자분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주실지 모르지만 그래야만 제가 글을 쓰는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1부 완결을 9월 중으로 짓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어 요며칠 틈틈이 글을 썼던 것이 정말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다시는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진 않네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본인의 성향과 정 맞지 않다면 제 글을 읽지 말아주시고, 또 이런 일들이 이어진다면 일부 악플러들의 소행이 어쩔 수 없는 소라넷의 특성이라 이해하고 글을 중단하겠습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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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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