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2부 5장
“어휴! 저…… 저 여우같은 년 저거!”
“…….”
성진은 TV스크린을 바라보며 분통을 터뜨리는 서연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아내에게는 최근 들어 열성적으로 챙겨보기 시작한 드라마가 하나 생겼다. 결혼 전에도 원래부터 드라마 보는 것을 좋아했다던 아내는 지금도 취향에 맞는 작품이 나오면 퇴근 후에 그것을 종종 챙겨보곤 했다.
그 영향으로 성진도 덩달아 몇몇 장면들을 함께 보게 되었다. TV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는 요즘 말로 흔히들 ‘막장 드라마’라 일컫는 유형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서연이 분개하면서 보고 있는 그 장면을 가만히 살펴보니, 굉장히 청순하게 생긴 여자가 처량하게 눈물을 훔치며 떠나가려 하는 남자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곁눈질로 몇 부분만 함께 조금씩 챙겨봐 왔던 성진으로서는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를 알 수 없었기에, 아내의 성화를 진정시킬 겸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여자가 왜 여우같은 년이야?”
“딱 보면 답이 나오잖아. 남자는 이미 다른 여자랑 결혼까지 했는데, 저 여자가 혼자서 애를 키울 자신이 없으니까 뭐라도 뜯어내려고 동정심을 유발해서 남자를 계속 붙잡는 거거든. 남자는 아직도 저 여자에게 미련이 있으니까 쉽게 떠나지 못하는 거고.”
“…….”
어쩐지 남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 서연의 세세한 설명 앞에 괜히 가슴 한구석이 쿡쿡 찔려오는 성진이었다. 그런 기색을 아내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성진은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 그런데 저 여자에게는 이미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애가 있잖아. 아이를 키워야 하니까 남자의 도움이 필요한건 사실 당연한 거 아닐까?”
본의 아니게 관심조차 없었던 드라마 속의 인물을 옹호하고 나서게 된 성진이었다.
“그 애도 저 여자가 의도적으로 남자의 발목을 잡으려고 낳은 거거든. 원래 두 사람 사이는 예전에 끝난 거였는데, 남자의 사업이 성공했다는 걸 알고 나니까 여자가 다시 돌아와 족쇄를 채운 거야. 심지어 남자는 여자가 임신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지. 게다가 그 아기도 여자가 콘돔에 구멍을 뚫어서 의도적으로 임신이 되게끔 노렸다는 설정이고.”
“그, 그렇구나.”
누군가의 이야기와 무척 비슷하기도 한 듯, 또 아니기도 한 듯……. 기분이 아주 미묘해졌다.
“저기, 여보. 그럼 있잖아……. 당신은 저 상황에서 남자가 어떻게 행동하는 게 합리적일 것 같아? 이미 합리적이지 못한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도 해결을 하자면 말이야.”
“흠, 글쎄? 일단 아내에게 자기가 처한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놔야겠지.”
“정말……? 솔직하게 얘기하면 아내가 이해를 해줄까?”
“그건 모르지. 그래도 내가 보기엔 남자가 저렇게 속으로 감추고 지내니까 모든 문제들이 더 악화되기만 하는 것 같거든. 하긴 저건 드라마니까 언젠가 들통이 날 수밖에 없겠지만.”
서연은 웬일로 남편이 드라마에 몰입을 하는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더욱 몸을 가까이 붙여왔다. 그녀는 자신의 취미에 남편이 동참해주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여보, 이건 그냥 문득 든 생각인데…….”
“응. 뭔데?”
“만약에 내가 저 드라마 속의 남자고, 당신이 내 아내라면 말이야. 내가 여보에게 사실은 다른 곳에 숨겨둔 애가 있다고 고백하면 그거 이해해 줄 거야?”
서연은 잠시 고민을 하는 모양인지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소파에 놓인 자그마한 베개 하나를 집어 들어 남편의 등짝을 팡 하고 때렸다.
“왜 때려?”
“별 이상한 질문을 하니까 그렇지.”
“대답이라도 해주고 때리던가.”
하지만 성진은 끝내 그 대답을 듣지 못했다. 아주 얄궂은 타이밍으로 민혁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거실로 나온 것이었다. 베개싸움이라도 하듯이 두 손으로 베개를 꼭 쥐고 있던 서연은 잽싸게 그걸 내려놓고는 빙긋 웃었다.
“아들, 왜 그래? 배고파?”
“아니. 그냥 화장실.”
뚱한 표정으로 아빠와 엄마의 모습을 한번 보고는 민혁은 터덜터덜 화장실로 사라졌다. 왠지 아들의 그 표정에는 ‘또 시작이구나.’하는 감상이 드러나 있었다. 서연과 성진은 괜히 멋쩍어져 잠시 동안 말없이 TV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장면은 바뀌어, 결국 그 미련한 남자가 떠나가지 못한 채 여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
“혁아, 너 요새 왜 그래?”
“뭐가?”
정아가 뿔이 난 표정으로 노려보며 묻자 민혁은 조심스러워졌다. 정아의 그런 얼굴은 엄마가 아빠에게 화를 낼 때의 모습과 퍽 비슷해보였다. 엄마는 아주 가끔, 여자가 무척 화났을 때에는 무조건 여자 말을 들어주는 게 좋다는 말을 그에게 하곤 했었다.
“대체 어디에 정신이 팔려있는 거냐구. 요새는 말도 별로 없고.”
“아, 그건 그냥……”
“어제는 학교 마치고 나랑 같이 책 사러 가기로 해놓고 또 다른 데로 가버렸잖아. 그 빌라에는 왜 자꾸 가는 거야?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그, 그건 별 상관없어. 별 거 아니니까 넌 신경 안 써도 돼.”
그러자 정아는 거의 따귀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울먹거렸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그만해, 민혁이도 사정이 있겠지.”
다행히 용수가 옆에서 말리고 들었다. 정아는 여전히 뭔가를 더 따지고 싶은 눈치였지만, 실은 민혁 자신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기에 뭐라고 더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근래 들어서는 거의 정해진 일과처럼 학교가 끝나면 미란의 빌라로 향하곤 하지만 민혁은 여전히 스스로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을 이성적인 사람이라 여겨왔던 민혁이었기에 혼란은 더욱 심했다.
여전히 그는 미란을 꾸준히 지켜보는 행위에 대해 어떠한 의미도 찾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으니 그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엄마가 가끔씩 했던 말이 또 민혁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서연은 어린 민혁에게, 세상에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기도 한다며, 그 중의 하나가 남녀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종종 이야기했던 것이다.
‘어려워. 너무 어려워……. 학교에서도 차라리 이런 걸 가르쳐야 할 텐데. 여자애들에게 말을 거는 방법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교과서를 외우는 것보단 훨씬 생산적인 내용일 텐데.’
논리로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결국 오늘도 학교가 끝나자마자 빌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고 말았다. 용수와 정아를 떼어놓고 오느라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그녀는 매번 옥상에 오래 머물러 있으니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도 없으면 어떡하지?’
어제는 미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혹시나 민혁은 이제 그녀가 옥상에 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여 속으로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에 그 이유가 민혁 자신 때문이라면 더더욱 기분이 우울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민혁은 또, 스스로 왜 그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에 혼란을 느꼈다.
‘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옥상의 철문을 조심스럽게 열었을 때 민혁은 자신의 얼굴에 화색이 번지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어제는 황량한 바람만 불고 있었던 그 빈자리에, 오늘은 그녀가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늘 그녀의 모습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보였다. 매번 멍하니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던 그녀였지만, 오늘은 제법 분주하게 움직이며 무언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민혁은 처음 보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호기심과 더불어 극심한 관심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아, 안녕?”
“…….”
너무 호기심이 앞선 나머지,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민혁은 철문을 넘어 인기척을 드러내고 말았다. 사실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을 때에도 아마 미란은 그가 엿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챘던 모양이지만…… 민혁은 섣불리 모습을 드러낸 것이 너무 경솔했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넌 정말 할 일이 없나보구나.”
민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드물게도 미란이 입을 열었던 것이다. 비록 말의 내용은 곱지 않았지만 민혁은 몇 안 되는 예외의 경우를 발견한 과학자처럼 들뜨고 말았다.
“뭐하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돼?”
어벙하게 그런 질문을 던지니 미란은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민혁은 뒤늦게 속으로 좀 더 제대로 된 말을 꺼냈어야 하는데, 하고 후회했다.
비록 대답을 해주진 않았지만 미란은 민혁이 옥상에 있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가달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귀찮았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왕 문을 넘어서 여기까지 들어온 것, 민혁은 미란을 좀 더 세세하게 살펴보고 싶었다.
‘기계……?’
미란이 늘 앉았던 자리 근처에는, 민혁이 난생 처음 보는 조잡한 기계장치들이 복잡하게 연결된 채로 바닥에 놓여있었다. 평소 민혁의 주 관심사는 공학, 그 중에서도 기계공학이었기 때문에 미란이 다루고 있는 그 생소한 기계장치에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이게 뭔지 물어봐도 당연히 대답은 안 해주겠지?”
“…….”
당연히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민혁도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는, 그저 조심스럽게 기계 장치들을 눈으로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굉장히 복잡한 구조로 연결되어 있는 부품들이 눈에 띄었다. 마치 기차놀이라도 하듯이 줄줄이 연결되어 있는 그 기계장치에 대한 민혁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난잡함’이었다. 실린더나 피스톤, 압축기 등등이 여러 차례 조립되었다가 떨어져나간 듯, 군데군데 부품의 공백이 느껴지는 구멍들이 눈에 띄었다.
만약 저 조잡한 장치들을 크게 한 덩어리로 놓고 생각한다면, 분명 줄기줄기 연결된 저 부속품들은 어떤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순차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병렬구조의 일부일 거라고 민혁은 짐작했다. 아무리 봐도 그것이 운동에너지를 얻기 위한 구동원리를 취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민혁은 더더욱 장치의 목적이 궁금해졌다.
한편으로 민혁의 눈에는, 구조 자체가 굉장히 복잡한 형태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결합된 형식이나, 특정 에너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의 효율성을 따져본다면 전체적으로 조립 자체는 꽤 엉성한 솜씨로 이루어져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물론 민혁이나 미란의 나이에 이만한 크기의 기계 부속품들을 조립시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범상치 않은 일이긴 했지만, 이렇게 복잡한 구조의 장치를 고안해낸 창의성에 견주어서 비교해본다면 그렇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미란에게 했다가는 왠지 미움을 받을 것 같아서 민혁은 쉽사리 소감을 밝히지 못했다. 그저 멀찍이 소심하게 쭈그리고 앉아, 장치들을 여기저기 손보고 있는 미란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내 생각엔 세 번째 톱니를 다섯 번째 장치에 가깝게 옮기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
“뭐라고?”
그러나 입이 근질거렸던 민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생각을 불쑥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미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꾸하자 민혁은 속으로 아차 싶었지만, 그 와중에도 미란이 입을 열었다는 게 놀라운 한편 반갑게 느껴졌다.
“아, 미안해……. 내가 방해했지? 조용히 있을게.”
“다시 한 번 말해봐. 방금 뭐라고 했지?”
민혁은 움찔하고 말았다. 수차례 이곳을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란이 민혁에게 대화를 요구해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이전에 미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왠지 무섭게 느껴지는 민혁이었다.
“그게…… 그냥 내 생각일 뿐인데.”
“너 이게 뭔지 알아볼 수 있어?”
미란의 질문까지 받게 되자 민혁은 왠지 당황하여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언제나 또박또박한 목소리를 유지하는 그의 습관이 이 순간에는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다.
“아니. 용도는 전혀 모르겠는데……. 그래도 부속품들의 배열이나 구조를 살펴볼 수는 있으니까. 예를 들면 저기 세 번째 톱니바퀴들은 병렬구조로 뒤의 장치들에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압력을 전달해야 하는 다섯 번째 장치가 밸브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기분이 들어서……. 스파크 플러그를 밸브에 가깝게 옮기고 로드를 다시 설치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그, 근데…… 내 생각이니까 너무 신경 쓰진 말구.”
뒤늦게 소심한 한 마디를 덧붙이기는 했지만 이미 할 말을 해버린 후였기 때문에, 민혁은 부디 미란이 지난번처럼 버럭 화를 내거나 하진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민혁의 불안과는 다르게 미란은 그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또 입을 닫아버린 걸까 하며 민혁은 자신이 괜히 입을 열었다는 생각을 했지만, 미란은 평소의 침묵과는 다르게 민혁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기색이었다. 턱에 한 손을 얹고 잠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미란은 이윽고 옥상 한 구석에 놓인 자신의 책가방으로 다가가 거기에서 공책을 하나 꺼내왔다.
“야.”
“응?”
비록 퉁명스런 목소리긴 했지만 민혁은 미란이 자신을 소리 내어 부른다는 것이 무척 특별한 일처럼 느껴졌다.
“거기다가 방금 네가 말한 형태를 그림으로 한번 그려봐.”
“그, 그림으로? 나 그림 못 그리는데…….”
“개판으로 그려도 되니까 구조만 알아볼 수 있게 해봐. 기왕이면 그 부분 말고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더 스케치를 해보던지.”
갑작스런 요구에 민혁은 얼이 빠지고 말았다. 왠지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그럼 용도가 뭔지 말을 해줘야지.”
“용도를 몰라도 구조는 알 수 있다고 했잖아. 넌 구동하는 방식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돼.”
“그래서 안 가르쳐 줄 거야?”
“일단 그림이나 그려.”
거의 울며 겨자 먹기로 민혁은 손에 연필을 쥐었다. 여전히 그 난잡한 장치들의 목적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가 없는 민혁이었지만, 적어도 기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구조의 보완점을 몇 가지 제시할 수는 있을 것 같았기에 대충이나마 공책에 연필을 놀리기 시작했다. 무슨 장치든 간에 그것이 기계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면, 효율적인 구동을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구조가 있기 마련인 법이다. 게다가 기계의 구조와 원리에 대한 문제는 민혁의 천재성을 극도로 발휘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했다.
미술 솜씨라고 해봐야 그림일기 수준이 전부인 민혁으로서는 왜 이런 고충을 감내하고 있는지 통 알 수가 없었지만…… 왠지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조금 특별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연필을 움직이다 말고 틈틈이 미란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저기, 있잖아…….”
“…….”
“너하고 이렇게 길게 대화를 해본 건 처음인 것 같아. 그렇지? 어쩌면 너에게서 평범한 말투를 들어본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미란은 그 알 수 없는 기계에 대한 화제가 아니라면, 민혁과 말을 섞고 싶은 마음이 그다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민혁은 그럼에도 일방적으로 계속 떠들어댔다.
“어제는 네가 보이지 않아서 좀 신경 쓰였어. 혹시 어디 아픈 건가 싶기도 했고……. 난 네가 만약 옥상에 다시 오지 않기로 한 거면 어쩌나 싶어서 걱정했거든.”
“다시 안 오기로 했었지. 네가 자꾸 문 뒤에서 보고 있으니까 작업을 할 마음이 안 생겨서 말이야. 다른 곳에서 하려다가 어제 엄마가 하도 걱정을 하길래 마음을 바꾼 것뿐이야.”
“그, 그게 무슨 말이야……?”
하지만 미란은 다시 침묵태세로 전환했다. 이유도 모른 채, 왠지 멋쩍어진 민혁도 잠시 뒷머리를 긁다가 다시 공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미란은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민혁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연필 쥔 손을 움직였다. 소년과 소녀는 그렇게 한동안 말도 없이, 서로가 할 일에 묵묵히 집중했다. 옥상에는 다시금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지만 민혁에게는 왠지 그 정적이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부모님은 뭐하고 계셔? 일하시는 중이야?”
꽤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쯤, 민혁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내심으로는 그녀가 또 무시를 할 거라고 생각했던 민혁이었기에, 미란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자 오히려 퍽 놀라고 말았다.
“그건 왜 묻지?”
“아, 아니…… 그냥. 네가 방금 어머니 얘기를 해서 궁금했을 뿐이야.”
미란의 입에서 ‘엄마’라는 말을 듣고 나니 왠지 민혁은 그녀의 가정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미란의 저런 차갑고 날카로운 성격이 부모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일지 아닐지 민혁은 궁금했다. 하지만 민혁이 그런 질문을 던지는 걸 미란은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왠지 미란은,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기묘한 숨소리를 뱉었다. 민혁은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었지만 그것이 도저히 웃음으로는 보이지 않았기에 어리둥절했다.
“알 것 없어.”
“으, 응…….”
어쩐지 그녀가 조금 전보다 더 날카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어 민혁은 움츠러들었다. 그녀에게 무서움을 느낀다고 하면 남자로서 자존심이 조금 상할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한 감상으로 민혁은 미란이 조금 무서웠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제법 쌀쌀한 바람이 또 불어오기 시작했다. 살을 스치고 지나가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민혁은 미란의 모습을 보았다. 헐렁한 티셔츠 한 장이 전부인 그녀의 옷차림으로 보아 꽤 추울 것 같아서 문득 걱정이 되었다.
그 때, 미란이 공책을 꺼냈던 책가방으로 다가가 이번엔 가방에서 담요 하나를 꺼냈다. 그녀가 담요를 펼쳐 몸에 두르는 것을 본 민혁의 눈이 방울만큼 크게 뜨였다. 왠지 그것이 익숙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그거 챙겼었구나.”
“버리긴 아까우니까 주워다 쓴 것뿐이야. 도로 가져가든지.”
“아니야. 계속 너 써.”
바람은 여전히 서늘했지만 민혁은 왠지 입가에 웃음 한 줄기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분명 엄마의 말마따나…… 좀체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기분이었다.
*
그 날 옥상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소년과 소녀는 그들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을 끝내 볼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의 눈으로 여인을 보는 것이 지극히 모순적인 일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여인은 그저 말도 없이 두 아이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묵묵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소년과, 덕지덕지 연결된 기계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소녀……. 딱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에게 있어서는 어느 것 하나 눈을 떼기 힘든 장면이었다.
‘하하…….’
속으로 그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련함을 느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허무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뭐가 되었든 그런 두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은 언제나 색다른 기분이었다.
‘저것 봐. 결국엔 또 저렇게 되잖아. 마지막까지 정말 변하는 게 없구나.’
운명이라는 말을 쓰고 싶진 않았지만, 시간이라는 것에는 정해진 순서가 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순서……. 그것이 곧 인간에게는 운명인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두 아이는 이렇게 만났고, 또한 앞으로도 정해진 순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또 슬퍼지겠지.
‘이제 어떻게 할까…….’
이제 시간을 되감는 일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정해진 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녀는 턱에 손을 괴고는, 이번엔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물쭈물 하면서도 열심히 공책에 뭔가를 그리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보니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에서 옅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누군가의 삶을 바꾸게 된다면, 그 대가로 아마 저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겠지.
‘그렇구나. 어쩌면 그게 내 운명이었을지도.’
처음부터 그렇게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
*
비록 니코틴에 찌들어 있긴 했지만, 심신을 가다듬는 정도의 기초적인 수련 만큼은 틈틈이 계속해왔던 유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 아침부터 줄곧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던 그 기분 나쁜 인기척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물며 상대가 어린아이라면 더더욱…….
‘티가 나도 너무 나는데.’
아침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어지간해선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던 유정이었지만 어린아이치고는 집요할 정도로 인기척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우선 이야기는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선생님,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네. 알겠어요.”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박 선생을 뒤로 하고 유정은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뒤에서 졸졸 쫓아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딴에는 들키지 않으려고 지극히 조심스럽게 몸을 감추고 있는 듯 했지만, 유정은 벽 뒤에 숨어있는 아이의 기척을 눈 감고도 읽어낼 수 있었다.
화장실 안까지 들어와서 주변을 살펴보니 아이가 머뭇거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유정은 일부러 칸막이의 안으로 들어선 후에 문을 닫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인기척은 화장실 안까지 쫓아 들어왔다. 유정은 우선 어떻게 나오는지 보기 위해 잠자코 기다렸다.
곧이어, 덜덜 떨리는 손이 칸막이 아래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안에 있는 유정이 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쉽게 보이지 않는 뒤편에서 손을 밀어 넣은 듯 했지만, 그녀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칸막이 아래로 불쑥 들어온 손에는 렌즈가 정면에서 보이는 휴대폰 기기가 꾹 쥐어져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니, 재호야?”
유정은 높낮이가 없는 담담한 말투로 덜덜 떨리고 있는 손을 향해, 정확히는 칸막이 바깥에서 손을 밀어 넣고 있는 재호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소스라치게 놀란 손의 주인이, 휴대폰을 쥔 손을 부리나케 거두더니 바깥으로 다급히 도망쳐 나가는 게 느껴졌다.
유정은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박 선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아이들이 무리지어 있는 곳을 두루 살펴보았지만 재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신경을 집중해서 주변을 읽어보니 놀이방 안쪽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서성이는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선생님이 묻잖아.”
“으아악!”
유정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자, 놀이방 구석에서 초조하게 몸을 숨기고 있었던 재호는 거의 까무러치듯 비명을 질렀다. 재호는 여전히 휴대폰을 손에 쥔 채로, 불안함이 느껴지는 얼굴을 덜덜 떨어대고 있었다.
“말해봐. 왜 아까부터 계속 선생님 뒤를 쫓는 거니? 그것도 화장실에 갈 때마다.”
“그, 그런 적 없어요!”
“그럼 방금 전에 그걸로 뭘 찍으려고 했던 거야?”
손에 쥐어져 있는 휴대폰을 가리키며 유정이 묻자, 재호는 삽시간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제, 제가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벌써 네 번째인걸.”
“제가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다른 애가 그런 거예요!”
“그런 거? 그런 게 뭔데?”
“그, 그게…… 그러니까…… 나, 난 아무 것도 몰라요.”
유정이 손을 뻗자 재호는 꿀밤이라도 맞을 거라 생각했는지 움찔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유정은 손바닥을 펼쳐 자그마한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재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뜨자 유정은 타이르듯이 말을 이었다.
“재호야. 선생님은 가끔 널 야단치긴 하지만 네가 완전히 나쁜 애라고는 생각 안 해. 하지만 선생님한테까지 거짓말을 하게 되면 넌 나쁜 애가 되고 마는 거야. 너 나쁜 애가 되고 싶니?”
“…….”
“선생님은 네가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네가 잘못을 했더라도 절대 화내지 않을게.”
집안 환경으로 인해 거들먹대는 성격이 몸에 배긴 했어도, 고작 6살 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지 재호는 머뭇거리며 갈등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눈으로 유정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 진짜…… 화 안내실 거예요?”
“그래. 그러니까 네가 아까부터 찍으려고 했던 것들이 뭔지 말해주렴.”
재호는 귀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유정에게 머뭇머뭇 휴대폰을 내밀었다. 유정이 그것을 받아 파일들을 살펴보니, 화장실에 들어간 유정을 몰래 찍으려고 시도했다가 번번이 실패한 사진의 흔적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대체 이런 건 왜 찍으려고 한 거니?”
“그게…….”
그녀가 이유를 묻자, 재호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더니 급기야는 눈물을 찔끔대기 시작했다. 유정은 그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다.
“훌쩍…… 그, 그냥…… 야단맞은 게 기분 나빠서 그랬어요.”
“정말? 그게 전부니?”
“네, 네…… 훌쩍…….”
유정은 물끄러미 휴대폰과 재호를 번갈아보다가, 사진들을 모두 지우고는 재호에게 기기를 돌려주었다. 휴대폰을 받아든 재호는 여전히 눈물이 찔끔 흐르는 얼굴로 유정을 올려다보았다. 유정은 손가락 끝으로 재호의 닭똥 같은 눈물방울을 닦아주면서 그를 안심시켰다.
“알았어. 더는 안 물어볼게. 대신 이제 안 그러겠다고 약속할 수 있지?”
“네…….”
유정은 재호가 울음을 그치도록 등을 몇 번 토닥여주었다. 재호는 선생님이 정말로 화를 내지 않으니 안도하면서도 의아해하는 얼굴이 되어 고개를 조용히 수그렸다. 한참이나 땅을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던 재호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요, 선생님…….”
“응.”
“아, 아니에요.”
뭔가를 말하려다가 말고 재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유정은 직감적으로 더 이상 재호를 추궁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재호야.”
“네…….”
“혹시 오늘도 아버지가 널 데리러 오기로 하셨니?”
“네.”
“그래……. 선생님 화 안 났으니까 가서 친구들이랑 놀아. 또 친구들 괴롭히지 말고. 알았지?”
재호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려가는 재호의 뒷모습을 보며 유정은 골치가 약간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
검은빛의 광택을 뽐내는 세단이 어린이집 입구에 멈춰 섰다. 근처에 서있었던 유정은 재호가 아버지의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고는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유리창 너머로 유정의 모습을 확인한 병호가 순식간에 차에서 내리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호, 유성 씨. 안녕하십니까?”
“재호 아버님. 얘기 좀 하실까요?”
“물론이죠.”
“잠깐 자리를 옮겼으면 좋겠어요.”
유정은 멀지 않은 곳으로 그를 이끌어, 보는 눈이 없는 담벼락 밑으로 데려갔다. 병호는 여전히 여유가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이거, 유성 씨가 먼저 저를 찾아주실 줄은 몰랐네요. 혹시 제가 했던 이야기에 이제야 관심이 생기신 건가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유성 씨 같은 여자는 언제든 OK랍니다.”
“용건만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대화를 전혀 길게 끌고 싶지 않았기에, 유정은 그의 말을 단숨에 잘랐다.
“아드님을 시켜서 저에게 엉뚱한 짓을 한번만 더 하시려고 했다간, 후회하게 될 거예요.”
“하하.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아버님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하는데요.”
처음부터 이런 인간이 곧이곧대로 실토할 거라곤 유정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도 그녀 나름의 인내심을 발휘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재호의 아버지란 작자는 그런 인내심마저도 무색하게 만들 만한 위인이었다.
“하하하하…… 이거 원, 보아하니 아들 녀석이 실수를 해버린 것 같군요.”
“실수라고요?”
“돌아가면 야단을 좀 쳐줘야겠는걸요. 구질구질한 어린이집 같은 곳엘 굳이 돈 내가며 보내주고 있으면 보람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까짓 거 하나 제대로 못 찍고 들키는 꼴이라니……. 제 아들놈이지만 저를 닮지 않아서 그런지 참 한심한 녀석이죠. 하하하…….”
병호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껄껄대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유정은 그저 싸늘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는 유정의 굳은 얼굴이 재미있다는 듯 한층 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왜 그런 짓을 시켰는지 궁금하신 표정이군요. 간단해요. 유성 씨처럼 까칠한 여자는 약점을 하나 잡아놓으면 다루는 게 더 재미있는 법이니까요. 뭐 딱히 약점이 될 거라곤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일종의 유희거리인 셈이죠. 후후.”
“…….”
“그거 아십니까, 유성 씨? 저는 한번 찍은 여자는 결코 못 가진 적이 없죠.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느냐의 문제일 뿐이지 결국은 제 수집품이 되게 되어있어요. 이미 말했다시피 당신도 그 중 하나가 되겠죠.”
“어떻게 그렇게 하겠다는 건지 저도 조금은 궁금해지네요. 직접 한번 보여주시겠어요?”
“후후. 바로 이겁니다.”
병호는 품에서 금속성의 무언가를 꺼내어 유정을 똑바로 겨누었다. 총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그저 호신용 가스총이었다. 날카롭게 변한 유정의 눈매를 보고는 병호가 그 기색을 즐기듯이 설명을 해나갔다.
“너무 겁내지 마세요. 설마 진짜 총이겠습니까? 마취가스로 잠시 기절만 시키는 거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후후후. 그러고 보니 일부러 이렇게 인적 없는 곳으로 데려와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겠군요. 그대로 눈 감고 계시면 제 집으로 옮겨드릴 테니 잠시 동안 푹 주무시죠.”
그는 유정의 겁에 질린 반응을 꼭 보고 싶은 듯, 가스가 분사되는 총구를 더욱 유정의 얼굴 가까이에 들이대며 속삭였다.
“아니면 순순히 곱게 따라오시겠습니까? 저도 실은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말이죠. 어쨌든 유성 씨는 결국…… 윽!”
지껄이다 말고 뺨을 부여잡는 병호였다. 번개같이 날아온 손바닥이 그의 뺨을 철썩 하고 후려친 것이었다. 병호는 날아오는 손을 심지어 눈으로 보지도 못했기에 어리둥절했지만, 담벼락 아래에는 그와 유정 말고는 사람이 없었다.
“이 계집년이 어디서…….”
얼굴이 붉어진 병호가 가스총을 유정에게로 겨누고는 방아쇠를 눌렀다. 순식간에 희뿌연 마취성분의 가스가 자욱하게 전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손가락을 당기고 나서 그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가스를 들이마시고 쓰러져야 할 유정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사라졌던 유정의 몸이 다음 순간 허공에서, 그것도 병호의 등 뒤에서 허깨비처럼 나타났다. 기겁한 그가 미처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유정의 팔꿈치가 그의 뒷목을 정확히 가격했다. 그러자 마치 줄 끊어진 인형처럼 병호의 몸뚱이가 볼품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커헉!”
뒤늦게 외마디 비명을 쏟아내는 병호를 내려다보며,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쓰레기 같은 새끼.”
“이, 이 씨발년이!”
병호는 다시 마구잡이로 가스총을 난사해댔다. 하지만 유정은 이번에도 깃털 같은 움직임으로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허망하게 두리번거리며 그녀의 모습을 찾던 그의 얼굴에 또 한 차례 유정의 주먹이 꽂혔다. 코뼈가 뭉개지는 것 같은 감촉이 느껴진 것과 동시에 병호의 몸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피가 줄줄 흐르는 코를 부여잡고 처참하게 움츠러든 병호에게로 다가가, 유정은 가스총을 든 그의 오른손을 발로 짓밟아 눌렀다. 그러자 그가 신음을 지르며 손에서 총을 놓았고 그녀는 그것을 발로 걷어차 어디론가 날려버렸다.
“별 같잖은 새끼가 안 좋은 버릇이 나오게 만드네.”
“아, 아욱…… 욱.”
“나이 생각해서 그동안 잘 참고 지냈는데 너 같은 놈 때문에 또 입에서 쌍욕이 나오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이 좆만 한 새끼야.”
“이, 이거 안 놓…… 아으윽!”
철썩!
유정은 지껄이는 병호의 얼굴에 또 한 차례 따귀를 갈겼다. 코피가 쭐쭐 흐르던 그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가면서 이번엔 입술에서 피가 튀었다.
“걸레짝으로 만들어주려다 아들 생각해서 참는 거야. 데리고 얼른 꺼져. 그리고……”
유정은 병호의 멱살을 잡아 올려 가까이로 끌어당기고는, 한층 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한 번 더 눈에 띄면 주둥이를 찢어버릴 거야.”
“…….”
“알겠어?”
“…….”
“대답 안 해?”
“아악!”
병호가 차마 대답을 못 하고 얼이 빠진 눈으로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자, 유정은 발뒤꿈치로 그의 허벅지를 찍어버렸다. 혼절하기 직전인 그의 몸을 쥐고 거칠게 흔들어대자 그는 게거품을 물듯한 모습으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알았습니다.”
“꺼져.”
유정은 땅바닥에 그의 몸뚱이를 다시 내팽개쳤다. 털썩 소리를 내며 사지가 늘어지는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고는 유정은 등을 돌렸다.
“하아…….”
반대쪽으로 걸어가던 유정은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이 번개처럼 움직여 사라졌다. 순식간에 유정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리자, 주먹을 움켜쥐고 등 뒤에서 달려들던 병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 놀란 표정도 잠시였을 뿐 이내 고통을 호소하는 얼굴로 바뀌어버렸다.
“꺼흑!”
눈으로 보지도 못한 사이에, 그의 명치 안쪽으로 정확하게 유정의 팔꿈치가 꽂혀있었다. 팔극권의 초식인 확타정주를 급소에 얻어맞은 병호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게거품을 입에 물며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의식을 잃은 것이었다.
유정은 그 처참한 모습을 눈에 담을 가치도 없다는 듯, 널브러진 몸뚱이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등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
“재호야. 아버지가 오시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네?”
“차 안에서 좀 기다리는 게 좋겠구나.”
투실투실한 덩치의 재호는 어울리지 않게도 초조해하는 얼굴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같이 기다려주고 싶긴 한데, 아마 아버지가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오시면 모시고 집에 가렴.”
“네에…….”
재호를 뒤로 하고 퇴근길에 오르며 유정은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처녀 시절엔 거의 입에 욕을 달고 살았던 적도 있는데…… 오랜만에 입 밖으로 내뱉어보니 무척 생소한 느낌이었다. 애 엄마가 되어서 그런 걸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한 것 같아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그래도 스트레스는 좀 풀리네.’
문득 성진이 이런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생각하니, 어울리지 않게도 픽 웃음이 나왔다.
“윽…….”
그 순간, 유정은 가슴이 저려오는 기묘한 통증을 느끼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왠지 숨이 빨라지면서 가슴 한 쪽이 결리는 듯이 아파왔다. 조금 어지러운 기분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왜 이러지?’
고작 조금 빠르게 움직였다고 해서 지칠 만큼 허약한 몸은 아니라고 믿었다. 하지만 묘하게 숨이 가빠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유정은 잠시 가슴에 손을 얹고는 심호흡을 하며 기를 조절했다.
“담배를…… 끊긴 끊어야하는데, 정말로.”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져 왔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체력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유정은 애써 그 생각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렸다.
불길한 생각은 잊은 채, 얼른 집에 가서 미란과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대신 떠올렸다.
- 다음 화에 계속 -
2부도 얼른얼른 쓰고싶고
새로운 글도 쓰고 싶고
1부 수정도 빨리 마무리 해야 하고
글에 대한 의욕이 많이 생기는 요즘입니다
1부에 비해 독자층이 줄어들어 아쉽기도 하지만
꾸준히 봐주시는 분들을 생각하며 에너지를 얻습니다
조금만 더 응원해주세요 ^^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2부 5장
“어휴! 저…… 저 여우같은 년 저거!”
“…….”
성진은 TV스크린을 바라보며 분통을 터뜨리는 서연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아내에게는 최근 들어 열성적으로 챙겨보기 시작한 드라마가 하나 생겼다. 결혼 전에도 원래부터 드라마 보는 것을 좋아했다던 아내는 지금도 취향에 맞는 작품이 나오면 퇴근 후에 그것을 종종 챙겨보곤 했다.
그 영향으로 성진도 덩달아 몇몇 장면들을 함께 보게 되었다. TV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는 요즘 말로 흔히들 ‘막장 드라마’라 일컫는 유형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서연이 분개하면서 보고 있는 그 장면을 가만히 살펴보니, 굉장히 청순하게 생긴 여자가 처량하게 눈물을 훔치며 떠나가려 하는 남자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곁눈질로 몇 부분만 함께 조금씩 챙겨봐 왔던 성진으로서는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를 알 수 없었기에, 아내의 성화를 진정시킬 겸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여자가 왜 여우같은 년이야?”
“딱 보면 답이 나오잖아. 남자는 이미 다른 여자랑 결혼까지 했는데, 저 여자가 혼자서 애를 키울 자신이 없으니까 뭐라도 뜯어내려고 동정심을 유발해서 남자를 계속 붙잡는 거거든. 남자는 아직도 저 여자에게 미련이 있으니까 쉽게 떠나지 못하는 거고.”
“…….”
어쩐지 남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 서연의 세세한 설명 앞에 괜히 가슴 한구석이 쿡쿡 찔려오는 성진이었다. 그런 기색을 아내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성진은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 그런데 저 여자에게는 이미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애가 있잖아. 아이를 키워야 하니까 남자의 도움이 필요한건 사실 당연한 거 아닐까?”
본의 아니게 관심조차 없었던 드라마 속의 인물을 옹호하고 나서게 된 성진이었다.
“그 애도 저 여자가 의도적으로 남자의 발목을 잡으려고 낳은 거거든. 원래 두 사람 사이는 예전에 끝난 거였는데, 남자의 사업이 성공했다는 걸 알고 나니까 여자가 다시 돌아와 족쇄를 채운 거야. 심지어 남자는 여자가 임신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지. 게다가 그 아기도 여자가 콘돔에 구멍을 뚫어서 의도적으로 임신이 되게끔 노렸다는 설정이고.”
“그, 그렇구나.”
누군가의 이야기와 무척 비슷하기도 한 듯, 또 아니기도 한 듯……. 기분이 아주 미묘해졌다.
“저기, 여보. 그럼 있잖아……. 당신은 저 상황에서 남자가 어떻게 행동하는 게 합리적일 것 같아? 이미 합리적이지 못한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도 해결을 하자면 말이야.”
“흠, 글쎄? 일단 아내에게 자기가 처한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놔야겠지.”
“정말……? 솔직하게 얘기하면 아내가 이해를 해줄까?”
“그건 모르지. 그래도 내가 보기엔 남자가 저렇게 속으로 감추고 지내니까 모든 문제들이 더 악화되기만 하는 것 같거든. 하긴 저건 드라마니까 언젠가 들통이 날 수밖에 없겠지만.”
서연은 웬일로 남편이 드라마에 몰입을 하는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더욱 몸을 가까이 붙여왔다. 그녀는 자신의 취미에 남편이 동참해주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여보, 이건 그냥 문득 든 생각인데…….”
“응. 뭔데?”
“만약에 내가 저 드라마 속의 남자고, 당신이 내 아내라면 말이야. 내가 여보에게 사실은 다른 곳에 숨겨둔 애가 있다고 고백하면 그거 이해해 줄 거야?”
서연은 잠시 고민을 하는 모양인지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소파에 놓인 자그마한 베개 하나를 집어 들어 남편의 등짝을 팡 하고 때렸다.
“왜 때려?”
“별 이상한 질문을 하니까 그렇지.”
“대답이라도 해주고 때리던가.”
하지만 성진은 끝내 그 대답을 듣지 못했다. 아주 얄궂은 타이밍으로 민혁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거실로 나온 것이었다. 베개싸움이라도 하듯이 두 손으로 베개를 꼭 쥐고 있던 서연은 잽싸게 그걸 내려놓고는 빙긋 웃었다.
“아들, 왜 그래? 배고파?”
“아니. 그냥 화장실.”
뚱한 표정으로 아빠와 엄마의 모습을 한번 보고는 민혁은 터덜터덜 화장실로 사라졌다. 왠지 아들의 그 표정에는 ‘또 시작이구나.’하는 감상이 드러나 있었다. 서연과 성진은 괜히 멋쩍어져 잠시 동안 말없이 TV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장면은 바뀌어, 결국 그 미련한 남자가 떠나가지 못한 채 여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
“혁아, 너 요새 왜 그래?”
“뭐가?”
정아가 뿔이 난 표정으로 노려보며 묻자 민혁은 조심스러워졌다. 정아의 그런 얼굴은 엄마가 아빠에게 화를 낼 때의 모습과 퍽 비슷해보였다. 엄마는 아주 가끔, 여자가 무척 화났을 때에는 무조건 여자 말을 들어주는 게 좋다는 말을 그에게 하곤 했었다.
“대체 어디에 정신이 팔려있는 거냐구. 요새는 말도 별로 없고.”
“아, 그건 그냥……”
“어제는 학교 마치고 나랑 같이 책 사러 가기로 해놓고 또 다른 데로 가버렸잖아. 그 빌라에는 왜 자꾸 가는 거야?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그, 그건 별 상관없어. 별 거 아니니까 넌 신경 안 써도 돼.”
그러자 정아는 거의 따귀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울먹거렸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그만해, 민혁이도 사정이 있겠지.”
다행히 용수가 옆에서 말리고 들었다. 정아는 여전히 뭔가를 더 따지고 싶은 눈치였지만, 실은 민혁 자신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기에 뭐라고 더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근래 들어서는 거의 정해진 일과처럼 학교가 끝나면 미란의 빌라로 향하곤 하지만 민혁은 여전히 스스로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을 이성적인 사람이라 여겨왔던 민혁이었기에 혼란은 더욱 심했다.
여전히 그는 미란을 꾸준히 지켜보는 행위에 대해 어떠한 의미도 찾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으니 그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엄마가 가끔씩 했던 말이 또 민혁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서연은 어린 민혁에게, 세상에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기도 한다며, 그 중의 하나가 남녀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종종 이야기했던 것이다.
‘어려워. 너무 어려워……. 학교에서도 차라리 이런 걸 가르쳐야 할 텐데. 여자애들에게 말을 거는 방법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교과서를 외우는 것보단 훨씬 생산적인 내용일 텐데.’
논리로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결국 오늘도 학교가 끝나자마자 빌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고 말았다. 용수와 정아를 떼어놓고 오느라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그녀는 매번 옥상에 오래 머물러 있으니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도 없으면 어떡하지?’
어제는 미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혹시나 민혁은 이제 그녀가 옥상에 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여 속으로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에 그 이유가 민혁 자신 때문이라면 더더욱 기분이 우울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민혁은 또, 스스로 왜 그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에 혼란을 느꼈다.
‘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옥상의 철문을 조심스럽게 열었을 때 민혁은 자신의 얼굴에 화색이 번지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어제는 황량한 바람만 불고 있었던 그 빈자리에, 오늘은 그녀가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늘 그녀의 모습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보였다. 매번 멍하니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던 그녀였지만, 오늘은 제법 분주하게 움직이며 무언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민혁은 처음 보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호기심과 더불어 극심한 관심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아, 안녕?”
“…….”
너무 호기심이 앞선 나머지,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민혁은 철문을 넘어 인기척을 드러내고 말았다. 사실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을 때에도 아마 미란은 그가 엿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챘던 모양이지만…… 민혁은 섣불리 모습을 드러낸 것이 너무 경솔했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넌 정말 할 일이 없나보구나.”
민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드물게도 미란이 입을 열었던 것이다. 비록 말의 내용은 곱지 않았지만 민혁은 몇 안 되는 예외의 경우를 발견한 과학자처럼 들뜨고 말았다.
“뭐하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돼?”
어벙하게 그런 질문을 던지니 미란은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민혁은 뒤늦게 속으로 좀 더 제대로 된 말을 꺼냈어야 하는데, 하고 후회했다.
비록 대답을 해주진 않았지만 미란은 민혁이 옥상에 있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가달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귀찮았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왕 문을 넘어서 여기까지 들어온 것, 민혁은 미란을 좀 더 세세하게 살펴보고 싶었다.
‘기계……?’
미란이 늘 앉았던 자리 근처에는, 민혁이 난생 처음 보는 조잡한 기계장치들이 복잡하게 연결된 채로 바닥에 놓여있었다. 평소 민혁의 주 관심사는 공학, 그 중에서도 기계공학이었기 때문에 미란이 다루고 있는 그 생소한 기계장치에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이게 뭔지 물어봐도 당연히 대답은 안 해주겠지?”
“…….”
당연히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민혁도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는, 그저 조심스럽게 기계 장치들을 눈으로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굉장히 복잡한 구조로 연결되어 있는 부품들이 눈에 띄었다. 마치 기차놀이라도 하듯이 줄줄이 연결되어 있는 그 기계장치에 대한 민혁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난잡함’이었다. 실린더나 피스톤, 압축기 등등이 여러 차례 조립되었다가 떨어져나간 듯, 군데군데 부품의 공백이 느껴지는 구멍들이 눈에 띄었다.
만약 저 조잡한 장치들을 크게 한 덩어리로 놓고 생각한다면, 분명 줄기줄기 연결된 저 부속품들은 어떤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순차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병렬구조의 일부일 거라고 민혁은 짐작했다. 아무리 봐도 그것이 운동에너지를 얻기 위한 구동원리를 취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민혁은 더더욱 장치의 목적이 궁금해졌다.
한편으로 민혁의 눈에는, 구조 자체가 굉장히 복잡한 형태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결합된 형식이나, 특정 에너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의 효율성을 따져본다면 전체적으로 조립 자체는 꽤 엉성한 솜씨로 이루어져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물론 민혁이나 미란의 나이에 이만한 크기의 기계 부속품들을 조립시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범상치 않은 일이긴 했지만, 이렇게 복잡한 구조의 장치를 고안해낸 창의성에 견주어서 비교해본다면 그렇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미란에게 했다가는 왠지 미움을 받을 것 같아서 민혁은 쉽사리 소감을 밝히지 못했다. 그저 멀찍이 소심하게 쭈그리고 앉아, 장치들을 여기저기 손보고 있는 미란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내 생각엔 세 번째 톱니를 다섯 번째 장치에 가깝게 옮기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
“뭐라고?”
그러나 입이 근질거렸던 민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생각을 불쑥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미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꾸하자 민혁은 속으로 아차 싶었지만, 그 와중에도 미란이 입을 열었다는 게 놀라운 한편 반갑게 느껴졌다.
“아, 미안해……. 내가 방해했지? 조용히 있을게.”
“다시 한 번 말해봐. 방금 뭐라고 했지?”
민혁은 움찔하고 말았다. 수차례 이곳을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란이 민혁에게 대화를 요구해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이전에 미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왠지 무섭게 느껴지는 민혁이었다.
“그게…… 그냥 내 생각일 뿐인데.”
“너 이게 뭔지 알아볼 수 있어?”
미란의 질문까지 받게 되자 민혁은 왠지 당황하여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언제나 또박또박한 목소리를 유지하는 그의 습관이 이 순간에는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다.
“아니. 용도는 전혀 모르겠는데……. 그래도 부속품들의 배열이나 구조를 살펴볼 수는 있으니까. 예를 들면 저기 세 번째 톱니바퀴들은 병렬구조로 뒤의 장치들에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압력을 전달해야 하는 다섯 번째 장치가 밸브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기분이 들어서……. 스파크 플러그를 밸브에 가깝게 옮기고 로드를 다시 설치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그, 근데…… 내 생각이니까 너무 신경 쓰진 말구.”
뒤늦게 소심한 한 마디를 덧붙이기는 했지만 이미 할 말을 해버린 후였기 때문에, 민혁은 부디 미란이 지난번처럼 버럭 화를 내거나 하진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민혁의 불안과는 다르게 미란은 그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또 입을 닫아버린 걸까 하며 민혁은 자신이 괜히 입을 열었다는 생각을 했지만, 미란은 평소의 침묵과는 다르게 민혁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기색이었다. 턱에 한 손을 얹고 잠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미란은 이윽고 옥상 한 구석에 놓인 자신의 책가방으로 다가가 거기에서 공책을 하나 꺼내왔다.
“야.”
“응?”
비록 퉁명스런 목소리긴 했지만 민혁은 미란이 자신을 소리 내어 부른다는 것이 무척 특별한 일처럼 느껴졌다.
“거기다가 방금 네가 말한 형태를 그림으로 한번 그려봐.”
“그, 그림으로? 나 그림 못 그리는데…….”
“개판으로 그려도 되니까 구조만 알아볼 수 있게 해봐. 기왕이면 그 부분 말고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더 스케치를 해보던지.”
갑작스런 요구에 민혁은 얼이 빠지고 말았다. 왠지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그럼 용도가 뭔지 말을 해줘야지.”
“용도를 몰라도 구조는 알 수 있다고 했잖아. 넌 구동하는 방식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돼.”
“그래서 안 가르쳐 줄 거야?”
“일단 그림이나 그려.”
거의 울며 겨자 먹기로 민혁은 손에 연필을 쥐었다. 여전히 그 난잡한 장치들의 목적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가 없는 민혁이었지만, 적어도 기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구조의 보완점을 몇 가지 제시할 수는 있을 것 같았기에 대충이나마 공책에 연필을 놀리기 시작했다. 무슨 장치든 간에 그것이 기계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면, 효율적인 구동을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구조가 있기 마련인 법이다. 게다가 기계의 구조와 원리에 대한 문제는 민혁의 천재성을 극도로 발휘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했다.
미술 솜씨라고 해봐야 그림일기 수준이 전부인 민혁으로서는 왜 이런 고충을 감내하고 있는지 통 알 수가 없었지만…… 왠지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조금 특별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연필을 움직이다 말고 틈틈이 미란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저기, 있잖아…….”
“…….”
“너하고 이렇게 길게 대화를 해본 건 처음인 것 같아. 그렇지? 어쩌면 너에게서 평범한 말투를 들어본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미란은 그 알 수 없는 기계에 대한 화제가 아니라면, 민혁과 말을 섞고 싶은 마음이 그다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민혁은 그럼에도 일방적으로 계속 떠들어댔다.
“어제는 네가 보이지 않아서 좀 신경 쓰였어. 혹시 어디 아픈 건가 싶기도 했고……. 난 네가 만약 옥상에 다시 오지 않기로 한 거면 어쩌나 싶어서 걱정했거든.”
“다시 안 오기로 했었지. 네가 자꾸 문 뒤에서 보고 있으니까 작업을 할 마음이 안 생겨서 말이야. 다른 곳에서 하려다가 어제 엄마가 하도 걱정을 하길래 마음을 바꾼 것뿐이야.”
“그, 그게 무슨 말이야……?”
하지만 미란은 다시 침묵태세로 전환했다. 이유도 모른 채, 왠지 멋쩍어진 민혁도 잠시 뒷머리를 긁다가 다시 공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미란은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민혁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연필 쥔 손을 움직였다. 소년과 소녀는 그렇게 한동안 말도 없이, 서로가 할 일에 묵묵히 집중했다. 옥상에는 다시금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지만 민혁에게는 왠지 그 정적이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부모님은 뭐하고 계셔? 일하시는 중이야?”
꽤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쯤, 민혁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내심으로는 그녀가 또 무시를 할 거라고 생각했던 민혁이었기에, 미란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자 오히려 퍽 놀라고 말았다.
“그건 왜 묻지?”
“아, 아니…… 그냥. 네가 방금 어머니 얘기를 해서 궁금했을 뿐이야.”
미란의 입에서 ‘엄마’라는 말을 듣고 나니 왠지 민혁은 그녀의 가정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미란의 저런 차갑고 날카로운 성격이 부모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일지 아닐지 민혁은 궁금했다. 하지만 민혁이 그런 질문을 던지는 걸 미란은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왠지 미란은,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기묘한 숨소리를 뱉었다. 민혁은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었지만 그것이 도저히 웃음으로는 보이지 않았기에 어리둥절했다.
“알 것 없어.”
“으, 응…….”
어쩐지 그녀가 조금 전보다 더 날카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어 민혁은 움츠러들었다. 그녀에게 무서움을 느낀다고 하면 남자로서 자존심이 조금 상할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한 감상으로 민혁은 미란이 조금 무서웠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제법 쌀쌀한 바람이 또 불어오기 시작했다. 살을 스치고 지나가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민혁은 미란의 모습을 보았다. 헐렁한 티셔츠 한 장이 전부인 그녀의 옷차림으로 보아 꽤 추울 것 같아서 문득 걱정이 되었다.
그 때, 미란이 공책을 꺼냈던 책가방으로 다가가 이번엔 가방에서 담요 하나를 꺼냈다. 그녀가 담요를 펼쳐 몸에 두르는 것을 본 민혁의 눈이 방울만큼 크게 뜨였다. 왠지 그것이 익숙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그거 챙겼었구나.”
“버리긴 아까우니까 주워다 쓴 것뿐이야. 도로 가져가든지.”
“아니야. 계속 너 써.”
바람은 여전히 서늘했지만 민혁은 왠지 입가에 웃음 한 줄기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분명 엄마의 말마따나…… 좀체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기분이었다.
*
그 날 옥상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소년과 소녀는 그들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을 끝내 볼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의 눈으로 여인을 보는 것이 지극히 모순적인 일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여인은 그저 말도 없이 두 아이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묵묵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소년과, 덕지덕지 연결된 기계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소녀……. 딱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에게 있어서는 어느 것 하나 눈을 떼기 힘든 장면이었다.
‘하하…….’
속으로 그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련함을 느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허무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뭐가 되었든 그런 두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은 언제나 색다른 기분이었다.
‘저것 봐. 결국엔 또 저렇게 되잖아. 마지막까지 정말 변하는 게 없구나.’
운명이라는 말을 쓰고 싶진 않았지만, 시간이라는 것에는 정해진 순서가 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순서……. 그것이 곧 인간에게는 운명인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두 아이는 이렇게 만났고, 또한 앞으로도 정해진 순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또 슬퍼지겠지.
‘이제 어떻게 할까…….’
이제 시간을 되감는 일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정해진 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녀는 턱에 손을 괴고는, 이번엔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물쭈물 하면서도 열심히 공책에 뭔가를 그리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보니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에서 옅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누군가의 삶을 바꾸게 된다면, 그 대가로 아마 저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겠지.
‘그렇구나. 어쩌면 그게 내 운명이었을지도.’
처음부터 그렇게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
*
비록 니코틴에 찌들어 있긴 했지만, 심신을 가다듬는 정도의 기초적인 수련 만큼은 틈틈이 계속해왔던 유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 아침부터 줄곧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던 그 기분 나쁜 인기척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물며 상대가 어린아이라면 더더욱…….
‘티가 나도 너무 나는데.’
아침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어지간해선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던 유정이었지만 어린아이치고는 집요할 정도로 인기척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우선 이야기는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선생님,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네. 알겠어요.”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박 선생을 뒤로 하고 유정은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뒤에서 졸졸 쫓아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딴에는 들키지 않으려고 지극히 조심스럽게 몸을 감추고 있는 듯 했지만, 유정은 벽 뒤에 숨어있는 아이의 기척을 눈 감고도 읽어낼 수 있었다.
화장실 안까지 들어와서 주변을 살펴보니 아이가 머뭇거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유정은 일부러 칸막이의 안으로 들어선 후에 문을 닫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인기척은 화장실 안까지 쫓아 들어왔다. 유정은 우선 어떻게 나오는지 보기 위해 잠자코 기다렸다.
곧이어, 덜덜 떨리는 손이 칸막이 아래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안에 있는 유정이 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쉽게 보이지 않는 뒤편에서 손을 밀어 넣은 듯 했지만, 그녀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칸막이 아래로 불쑥 들어온 손에는 렌즈가 정면에서 보이는 휴대폰 기기가 꾹 쥐어져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니, 재호야?”
유정은 높낮이가 없는 담담한 말투로 덜덜 떨리고 있는 손을 향해, 정확히는 칸막이 바깥에서 손을 밀어 넣고 있는 재호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소스라치게 놀란 손의 주인이, 휴대폰을 쥔 손을 부리나케 거두더니 바깥으로 다급히 도망쳐 나가는 게 느껴졌다.
유정은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박 선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아이들이 무리지어 있는 곳을 두루 살펴보았지만 재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신경을 집중해서 주변을 읽어보니 놀이방 안쪽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서성이는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선생님이 묻잖아.”
“으아악!”
유정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자, 놀이방 구석에서 초조하게 몸을 숨기고 있었던 재호는 거의 까무러치듯 비명을 질렀다. 재호는 여전히 휴대폰을 손에 쥔 채로, 불안함이 느껴지는 얼굴을 덜덜 떨어대고 있었다.
“말해봐. 왜 아까부터 계속 선생님 뒤를 쫓는 거니? 그것도 화장실에 갈 때마다.”
“그, 그런 적 없어요!”
“그럼 방금 전에 그걸로 뭘 찍으려고 했던 거야?”
손에 쥐어져 있는 휴대폰을 가리키며 유정이 묻자, 재호는 삽시간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제, 제가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벌써 네 번째인걸.”
“제가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다른 애가 그런 거예요!”
“그런 거? 그런 게 뭔데?”
“그, 그게…… 그러니까…… 나, 난 아무 것도 몰라요.”
유정이 손을 뻗자 재호는 꿀밤이라도 맞을 거라 생각했는지 움찔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유정은 손바닥을 펼쳐 자그마한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재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뜨자 유정은 타이르듯이 말을 이었다.
“재호야. 선생님은 가끔 널 야단치긴 하지만 네가 완전히 나쁜 애라고는 생각 안 해. 하지만 선생님한테까지 거짓말을 하게 되면 넌 나쁜 애가 되고 마는 거야. 너 나쁜 애가 되고 싶니?”
“…….”
“선생님은 네가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네가 잘못을 했더라도 절대 화내지 않을게.”
집안 환경으로 인해 거들먹대는 성격이 몸에 배긴 했어도, 고작 6살 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지 재호는 머뭇거리며 갈등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눈으로 유정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 진짜…… 화 안내실 거예요?”
“그래. 그러니까 네가 아까부터 찍으려고 했던 것들이 뭔지 말해주렴.”
재호는 귀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유정에게 머뭇머뭇 휴대폰을 내밀었다. 유정이 그것을 받아 파일들을 살펴보니, 화장실에 들어간 유정을 몰래 찍으려고 시도했다가 번번이 실패한 사진의 흔적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대체 이런 건 왜 찍으려고 한 거니?”
“그게…….”
그녀가 이유를 묻자, 재호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더니 급기야는 눈물을 찔끔대기 시작했다. 유정은 그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다.
“훌쩍…… 그, 그냥…… 야단맞은 게 기분 나빠서 그랬어요.”
“정말? 그게 전부니?”
“네, 네…… 훌쩍…….”
유정은 물끄러미 휴대폰과 재호를 번갈아보다가, 사진들을 모두 지우고는 재호에게 기기를 돌려주었다. 휴대폰을 받아든 재호는 여전히 눈물이 찔끔 흐르는 얼굴로 유정을 올려다보았다. 유정은 손가락 끝으로 재호의 닭똥 같은 눈물방울을 닦아주면서 그를 안심시켰다.
“알았어. 더는 안 물어볼게. 대신 이제 안 그러겠다고 약속할 수 있지?”
“네…….”
유정은 재호가 울음을 그치도록 등을 몇 번 토닥여주었다. 재호는 선생님이 정말로 화를 내지 않으니 안도하면서도 의아해하는 얼굴이 되어 고개를 조용히 수그렸다. 한참이나 땅을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던 재호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요, 선생님…….”
“응.”
“아, 아니에요.”
뭔가를 말하려다가 말고 재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유정은 직감적으로 더 이상 재호를 추궁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재호야.”
“네…….”
“혹시 오늘도 아버지가 널 데리러 오기로 하셨니?”
“네.”
“그래……. 선생님 화 안 났으니까 가서 친구들이랑 놀아. 또 친구들 괴롭히지 말고. 알았지?”
재호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려가는 재호의 뒷모습을 보며 유정은 골치가 약간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
검은빛의 광택을 뽐내는 세단이 어린이집 입구에 멈춰 섰다. 근처에 서있었던 유정은 재호가 아버지의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고는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유리창 너머로 유정의 모습을 확인한 병호가 순식간에 차에서 내리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호, 유성 씨. 안녕하십니까?”
“재호 아버님. 얘기 좀 하실까요?”
“물론이죠.”
“잠깐 자리를 옮겼으면 좋겠어요.”
유정은 멀지 않은 곳으로 그를 이끌어, 보는 눈이 없는 담벼락 밑으로 데려갔다. 병호는 여전히 여유가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이거, 유성 씨가 먼저 저를 찾아주실 줄은 몰랐네요. 혹시 제가 했던 이야기에 이제야 관심이 생기신 건가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유성 씨 같은 여자는 언제든 OK랍니다.”
“용건만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대화를 전혀 길게 끌고 싶지 않았기에, 유정은 그의 말을 단숨에 잘랐다.
“아드님을 시켜서 저에게 엉뚱한 짓을 한번만 더 하시려고 했다간, 후회하게 될 거예요.”
“하하.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아버님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하는데요.”
처음부터 이런 인간이 곧이곧대로 실토할 거라곤 유정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도 그녀 나름의 인내심을 발휘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재호의 아버지란 작자는 그런 인내심마저도 무색하게 만들 만한 위인이었다.
“하하하하…… 이거 원, 보아하니 아들 녀석이 실수를 해버린 것 같군요.”
“실수라고요?”
“돌아가면 야단을 좀 쳐줘야겠는걸요. 구질구질한 어린이집 같은 곳엘 굳이 돈 내가며 보내주고 있으면 보람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까짓 거 하나 제대로 못 찍고 들키는 꼴이라니……. 제 아들놈이지만 저를 닮지 않아서 그런지 참 한심한 녀석이죠. 하하하…….”
병호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껄껄대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유정은 그저 싸늘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는 유정의 굳은 얼굴이 재미있다는 듯 한층 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왜 그런 짓을 시켰는지 궁금하신 표정이군요. 간단해요. 유성 씨처럼 까칠한 여자는 약점을 하나 잡아놓으면 다루는 게 더 재미있는 법이니까요. 뭐 딱히 약점이 될 거라곤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일종의 유희거리인 셈이죠. 후후.”
“…….”
“그거 아십니까, 유성 씨? 저는 한번 찍은 여자는 결코 못 가진 적이 없죠.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느냐의 문제일 뿐이지 결국은 제 수집품이 되게 되어있어요. 이미 말했다시피 당신도 그 중 하나가 되겠죠.”
“어떻게 그렇게 하겠다는 건지 저도 조금은 궁금해지네요. 직접 한번 보여주시겠어요?”
“후후. 바로 이겁니다.”
병호는 품에서 금속성의 무언가를 꺼내어 유정을 똑바로 겨누었다. 총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그저 호신용 가스총이었다. 날카롭게 변한 유정의 눈매를 보고는 병호가 그 기색을 즐기듯이 설명을 해나갔다.
“너무 겁내지 마세요. 설마 진짜 총이겠습니까? 마취가스로 잠시 기절만 시키는 거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후후후. 그러고 보니 일부러 이렇게 인적 없는 곳으로 데려와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겠군요. 그대로 눈 감고 계시면 제 집으로 옮겨드릴 테니 잠시 동안 푹 주무시죠.”
그는 유정의 겁에 질린 반응을 꼭 보고 싶은 듯, 가스가 분사되는 총구를 더욱 유정의 얼굴 가까이에 들이대며 속삭였다.
“아니면 순순히 곱게 따라오시겠습니까? 저도 실은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말이죠. 어쨌든 유성 씨는 결국…… 윽!”
지껄이다 말고 뺨을 부여잡는 병호였다. 번개같이 날아온 손바닥이 그의 뺨을 철썩 하고 후려친 것이었다. 병호는 날아오는 손을 심지어 눈으로 보지도 못했기에 어리둥절했지만, 담벼락 아래에는 그와 유정 말고는 사람이 없었다.
“이 계집년이 어디서…….”
얼굴이 붉어진 병호가 가스총을 유정에게로 겨누고는 방아쇠를 눌렀다. 순식간에 희뿌연 마취성분의 가스가 자욱하게 전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손가락을 당기고 나서 그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가스를 들이마시고 쓰러져야 할 유정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사라졌던 유정의 몸이 다음 순간 허공에서, 그것도 병호의 등 뒤에서 허깨비처럼 나타났다. 기겁한 그가 미처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유정의 팔꿈치가 그의 뒷목을 정확히 가격했다. 그러자 마치 줄 끊어진 인형처럼 병호의 몸뚱이가 볼품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커헉!”
뒤늦게 외마디 비명을 쏟아내는 병호를 내려다보며,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쓰레기 같은 새끼.”
“이, 이 씨발년이!”
병호는 다시 마구잡이로 가스총을 난사해댔다. 하지만 유정은 이번에도 깃털 같은 움직임으로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허망하게 두리번거리며 그녀의 모습을 찾던 그의 얼굴에 또 한 차례 유정의 주먹이 꽂혔다. 코뼈가 뭉개지는 것 같은 감촉이 느껴진 것과 동시에 병호의 몸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피가 줄줄 흐르는 코를 부여잡고 처참하게 움츠러든 병호에게로 다가가, 유정은 가스총을 든 그의 오른손을 발로 짓밟아 눌렀다. 그러자 그가 신음을 지르며 손에서 총을 놓았고 그녀는 그것을 발로 걷어차 어디론가 날려버렸다.
“별 같잖은 새끼가 안 좋은 버릇이 나오게 만드네.”
“아, 아욱…… 욱.”
“나이 생각해서 그동안 잘 참고 지냈는데 너 같은 놈 때문에 또 입에서 쌍욕이 나오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이 좆만 한 새끼야.”
“이, 이거 안 놓…… 아으윽!”
철썩!
유정은 지껄이는 병호의 얼굴에 또 한 차례 따귀를 갈겼다. 코피가 쭐쭐 흐르던 그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가면서 이번엔 입술에서 피가 튀었다.
“걸레짝으로 만들어주려다 아들 생각해서 참는 거야. 데리고 얼른 꺼져. 그리고……”
유정은 병호의 멱살을 잡아 올려 가까이로 끌어당기고는, 한층 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한 번 더 눈에 띄면 주둥이를 찢어버릴 거야.”
“…….”
“알겠어?”
“…….”
“대답 안 해?”
“아악!”
병호가 차마 대답을 못 하고 얼이 빠진 눈으로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자, 유정은 발뒤꿈치로 그의 허벅지를 찍어버렸다. 혼절하기 직전인 그의 몸을 쥐고 거칠게 흔들어대자 그는 게거품을 물듯한 모습으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알았습니다.”
“꺼져.”
유정은 땅바닥에 그의 몸뚱이를 다시 내팽개쳤다. 털썩 소리를 내며 사지가 늘어지는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고는 유정은 등을 돌렸다.
“하아…….”
반대쪽으로 걸어가던 유정은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이 번개처럼 움직여 사라졌다. 순식간에 유정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리자, 주먹을 움켜쥐고 등 뒤에서 달려들던 병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 놀란 표정도 잠시였을 뿐 이내 고통을 호소하는 얼굴로 바뀌어버렸다.
“꺼흑!”
눈으로 보지도 못한 사이에, 그의 명치 안쪽으로 정확하게 유정의 팔꿈치가 꽂혀있었다. 팔극권의 초식인 확타정주를 급소에 얻어맞은 병호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게거품을 입에 물며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의식을 잃은 것이었다.
유정은 그 처참한 모습을 눈에 담을 가치도 없다는 듯, 널브러진 몸뚱이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등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
“재호야. 아버지가 오시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네?”
“차 안에서 좀 기다리는 게 좋겠구나.”
투실투실한 덩치의 재호는 어울리지 않게도 초조해하는 얼굴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같이 기다려주고 싶긴 한데, 아마 아버지가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오시면 모시고 집에 가렴.”
“네에…….”
재호를 뒤로 하고 퇴근길에 오르며 유정은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처녀 시절엔 거의 입에 욕을 달고 살았던 적도 있는데…… 오랜만에 입 밖으로 내뱉어보니 무척 생소한 느낌이었다. 애 엄마가 되어서 그런 걸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한 것 같아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그래도 스트레스는 좀 풀리네.’
문득 성진이 이런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생각하니, 어울리지 않게도 픽 웃음이 나왔다.
“윽…….”
그 순간, 유정은 가슴이 저려오는 기묘한 통증을 느끼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왠지 숨이 빨라지면서 가슴 한 쪽이 결리는 듯이 아파왔다. 조금 어지러운 기분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왜 이러지?’
고작 조금 빠르게 움직였다고 해서 지칠 만큼 허약한 몸은 아니라고 믿었다. 하지만 묘하게 숨이 가빠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유정은 잠시 가슴에 손을 얹고는 심호흡을 하며 기를 조절했다.
“담배를…… 끊긴 끊어야하는데, 정말로.”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져 왔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체력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유정은 애써 그 생각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렸다.
불길한 생각은 잊은 채, 얼른 집에 가서 미란과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대신 떠올렸다.
- 다음 화에 계속 -
2부도 얼른얼른 쓰고싶고
새로운 글도 쓰고 싶고
1부 수정도 빨리 마무리 해야 하고
글에 대한 의욕이 많이 생기는 요즘입니다
1부에 비해 독자층이 줄어들어 아쉽기도 하지만
꾸준히 봐주시는 분들을 생각하며 에너지를 얻습니다
조금만 더 응원해주세요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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