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2부 4장
“한 선생님!”
유정은 누군가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동료 교사인 박 선생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꽤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는지 박 선생이 여러 차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나보다.
“아, 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고 계셔요? 곧 점심시간인데.”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좀…….”
유정의 표정이 안 좋아보였는지 박 선생이 옆자리에 천천히 앉으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나이가 올해로 30대 중반이 조금 넘은 박 선생은 푸근하게 보이는 인상만큼이나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상냥한 여인이었다. 그 다정다감한 성격 덕분에 유정도 이곳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그녀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곤 했었다.
“아이들이 한 선생님을 찾아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죠?”
“아니에요. 아이들이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 선생님이 조금만 안 보여도 제게 투정을 부려대니, 호호.”
인심 좋게 웃는 박 선생의 모습은 늘 그랬듯이 어린이집 교사라는 직업이 무척 잘 어울려보였다. 너그러운 마음씨와 편안한 미소, 그리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성향. 어느 모로 보아도 그녀에게는 이 일이 천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박 선생의 모습을 보며 유정은 오늘따라 퍽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이렇게까지 오래 하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 했는데……. 그 때는 순전히 생활비와 미란의 양육비를 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르다가 우연히 어린이집 교사를 택했던 것뿐이었다. 그렇게 시작했던 일을, 어느새 2년이 넘도록 계속해오고 있었다.
“선생님!”
블록을 쌓으며 놀고 있었던 몇몇 아이들이, 유정이 나타나자 그녀에게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왠지 토끼들이 총총걸음으로 뛰어오는 모습처럼 느껴져 유정은 희미하게 웃었다. 박 선생 같은 사람이야말로 이 일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지만, 유정은 그녀 자신도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이 일이 적성에 잘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어린아이를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었지만,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유정은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아무런 걱정 없이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기도 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미란을 보란 듯이 잘 키워내고 싶다는 마음가짐도 더욱 굳건해지곤 했다. 비록 혼자 키우는 딸이나 다름없긴 하지만 여느 집 부모들 못지않게 뒷바라지를 해주고 싶은 것이 유정의 바람이었다. 그것이 마음같이 잘 되지 않아 답답할 때가 많았지만 말이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해버렸구나. 잊어버리자.’
이렇게 마음 한구석에 우울한 기분이 자리 잡는 날이면 그만큼 딴 생각도 많아지곤 했다. 애써 그 기분을 털어내려고 유정은 평소보다 더욱 밝은 웃음을 지어보았다. 그래도 이곳에 오면 아이들이 자신을 반겨주니 그것만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선생님! 재호가 또 애들을 괴롭혀요……. 혼내주세요.”
“그러니?”
칭얼대는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반에 가보니 과연 재호가 또 친구들을 못살게 굴고 있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덩치가 크고 인상이 사나운 재호는, 주변 아이들에게 힘을 과시하는 방법을 일찍 깨우친 것 같았다. 그 아이는 6살이라는 나이에 벌써부터 패거리를 만드는 법을 배우고, 남들 앞에서 거들먹거리거나 우월감을 느끼는 것을 즐기곤 했다.
유정은 재호를 보고 있으면 꼭 애들이라고 해서 마냥 다 순수하고 귀여운 것은 아니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았지만 그것을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심 속으로는 재호가 자란 환경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란 생각을 종종 해보곤 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재호는 자신의 집안이 부유하다는 것이 곧, 남들 앞에서는 사회적인 힘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미 본성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돌려줘! 아빠가 사주신거란 말이야.”
“싫어. 진 사람이 아끼는 물건 하나 주기로 내기했었잖아.”
“내가 언제 그런 내기를 했어! 빨리 줘!”
특히 재호는 예쁘장한 여자아이들을 곯리거나 못살게 구는 일이 많았다. 여자아이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이야 그 나이 또래 남자애들의 특징이겠지만 재호의 경우는 그 특유의 성향이 더해져 유독 심할 만큼 여자애들을 괴롭히곤 했다. 지금도 가만 보니, 은주라는 아이가 아끼는 인형을 억지로 빼앗아 그녀를 해코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재호야, 또 친구들을 괴롭히는 거니? 너 한번만 더 그러면 정말 혼난다고 그랬지?”
유정은 재호가 은주로부터 빼앗아 흔들어대던 봉제인형을 손쉽게 가로채고는 다시 은주에게로 돌려주었다. 그러자 은주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고, 반면 재호의 표정은 샐쭉하게 변했다.
그 사람 좋은 박 선생조차도 재호의 행동을 여러 차례 꾸짖곤 했었다. 한번은 심각함을 느낀 박 선생이 재호의 부모님에게 상담 요청을 한 적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별다른 소득 없이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 때의 일을 떠올리니 유정은 자기도 모르게 또 한숨이 푹 나왔다.
‘하긴, 아버지란 사람이 제대로 교육을 시킬 마음이 없어 보이니…….’
유정은 박 선생의 간곡한 요청으로 어린이집에 면담을 하러 방문했던 재호의 아버지를 본 적이 있었다. 좋은 인상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썩 옳지 못한 일이겠지만 유정은 그 사람이 분명 좋은 아버지는 아닐 거라고 짐작했다.
“친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왜 자꾸 힘없는 애들을 못살게 굴고 그러는 거니? 너 자꾸 그러면 나중에 커서 깡패아저씨 같은 사람 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저 계집애가 내기를 해놓고 괜히 지고 나서 저러는 거라고요.”
유정은 재호의 머리에 꿀밤을 꽁, 하고 한 대 쥐어박았다. 전혀 힘을 싣지 않았지만 재호는 집에서 부모에게도 맞아본 적이 없는 꿀밤을 맞은 것이 퍽 굴욕적이었는지, 머리를 싸매고는 인상을 구기며 유정과 은주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친구한테 계집애가 뭐니? 그리고 아무리 내기를 했다고 해도 친구 물건은 함부로 뺏는 거 아니야. 알겠니?”
“씨이……!”
재호는 상당히 열이 오른 표정으로 뭐라 구시렁대며 저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저러고는 또 화풀이를 한다며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진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유정은 또 한 차례 한숨을 푹 쉬었다.
*
“어, 어라?”
민혁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없네.”
여느 때처럼 조심스럽게 빌라 옥상의 철문을 열어보았지만, 눈에 들어온 그 곳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있었던 한 소녀의 모습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민혁은 그동안의 관찰을 통해서 미란이 학교를 마치고 나면 언제나 이 옥상에 머물다 집으로 내려가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미란의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한 이후로, 그녀를 옥상에서 만나지 못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민혁은 심히 혼란스러웠다.
‘왜지? 어, 어디 아픈가?’
응당 오늘도 그 자리에서 말 한마디 없이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어야 할 미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민혁은 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는 이 복잡한 기분이, 정해진 규칙을 벗어난 미란의 이질적인 행동에서 느낀 호기심 때문인지 아니면 순수하게 미란의 안부가 걱정되는 것인지 스스로도 무척 혼란스러웠다.
‘아니면 그 때 정말로 화가 났던 걸까……? 내가 말을 건네서?’
담요를 덮어주려고 조심스럽게 다가갔을 때 앙칼지게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질렀던 미란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전히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는 알 수 없는 민혁이었지만, 그 때 그녀의 모습은 무척 날카로웠기에 민혁은 그 부분에 대해서도 지금껏 줄곧 고민해왔던 것이다.
민혁은 그녀가 늘 앉았던 자리에 천천히 다가가 보았다. 미란이 없는 그 장소가 민혁에게는 영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긴 애초에 미란이 아니었다면 민혁이 이곳에 올 이유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왠지 그 순간, 옥상의 철문이 미세하게 끼익 하고 열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민혁은 화들짝 놀라 철문을 돌아보았지만 문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잘못 들었던 것일까……? 미심쩍은 기분에 사로잡혀 민혁은 다시 한 번 미란이 있었던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내일은 있겠지?’
그러고 보니 담요가 사라져있었다. 혹시 미란이 챙긴 것일까? 민혁은 가능하다면, 다음번엔 좀 더 미란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녀가 그럴 마음을 내줄 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야! 최민혁!”
빌라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오던 민혁은 입구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기에 그는 어리둥절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용수와 정아의 모습이 보였다.
“너희가…… 왜 여기 있어?”
“궁금해서 따라와 봤지. 요새 학교 끝나기만 하면 어디로 사라지는지 통 말을 안 해주니까.”
“뭐야? 스토킹을 했다는 거야?”
정작 자신이 하고 있는 일도 스토킹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렇게 따져 묻는 민혁이었다. 정아는 심통이 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매일 말도 없이 가버리니까 그렇지. 학원이라도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여기는 뭐 하러 왔는데? 여기 누가 살아?”
“아, 그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망설여졌지만, 민혁은 차라리 설명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두 친구의 집요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민혁은 끝내 입을 닫은 채, 지독한 허무함을 느끼며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
“한 선생님,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아니에요, 고생은요. 박 선생님도 얼른 들어가세요.”
“호호, 저는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남편 분이요?”
“네. 그 이가 오늘 퇴근 후에 차로 데리러 오겠다고 해요. 그동안 아이들 앨범이나 좀 정리하면서 기다려야겠어요.”
“아…… 그렇군요.”
유정은 퇴근할 채비를 하다 말고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남편과 함께하는 퇴근길이라……. 아마 자신은 평생가도 그 기분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씁쓸한 생각은 되도록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요새 들어서는 꽤 자주 이런 우울함에 빠지곤 했다.
비단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요새는 건강도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은연중에 종종 느껴졌다.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운 탓일까……?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끊지 못하는 이 나약함이 결국 몸과 마음을 좀먹고 있는 것일지도.
“유성 씨.”
“네?”
동료 교사들끼리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기본이었지만, 박 선생은 가끔씩 이렇게 유정뿐만이 아니라 주변 동료들을 이름으로 부르곤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유정은 지난 2년간의 경험으로 박 선생이 이렇게 이름으로 누군가를 부를 때에는, 지극히 사적인 얘기를 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유성 씨는 재혼할 생각이 없나요?”
“재……혼이라니요?”
“아, 재혼이라는 표현은 좀 어폐가 있지만…… 그래도 남편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지 않나요? 따님을 위해서도, 또 유성 씨 본인을 위해서도요.”
박 선생은 유정의 사정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아마도 박 선생은 유정을 위하려는 마음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유정은 내심 시집을 갈 마음이 있었다면 이렇게 한국 땅에 머무르고 있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글쎄요. 저는 그런 건 딱히…….”
“주제넘은 참견이었다면 미안해요. 다만 나는 유성 씨가 가끔은 너무 쓸쓸해보여서요. 우리도 애들을 가까이서 지켜보기 때문에 잘 알잖아요. 부모라는 존재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간절히 필요한 것인지. 아마 유성 씨도 그렇겠지만 따님도 평소에 많이 외로울 거예요.”
“…….”
“심각하게 듣진 말아요. 그냥 내 생각이거든요. 게다가 유성 씨는 웬만한 처녀들보다 인물이 좋잖아요?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결혼하려는 남자들이 줄을 설 것 같은데…… 호호. 늦기 전에 주위를 한번 둘러봐요. 좋은 인연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생각해볼게요.”
유정은 박 선생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사무실을 나왔다.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대충 대답을 하긴 했지만 박 선생의 이야기엔 아무래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가 자신을 위해서 하는 얘기라는 것도 알고, 또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새겨들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유정은 자신이 지극히 비정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여자이기 때문에, 딸인 미란이 마저도 힘들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글프지만 그것은 사실일지도 몰랐다. 사랑이라는 것은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나뿐만 아니라 자식까지도 힘들게 만들 정도로…….
아직도 사랑이라는 환상을 쫓고 있는 10대 아이들과 내가 다른 게 뭘까? 그런 생각이 들자 유정은 또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예전에는 이런 기분이 들 때면 차라리 눈물을 한번 훔치고 말았지만, 이제는 니코틴을 들이마시는 걸로 그걸 대신하고 있었기에 건강도 덩달아 나빠지고 있었다. 유독 오늘따라 마음이 무거워지는 유정이었다.
“재호야, 너 집에 안 가니?”
입구에서 유정은 재호를 만났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덩치가 가로로 두 배는 됨직한 재호였기에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어린이집 입구에서 혼자 서성대고 있었던 재호는 유정의 모습을 보자 입을 샐쭉하게 내밀며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아까 혼이 났던 것에 대해 아직 서먹함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역시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버스 기사님은 아까 출발했을 텐데? 너는 버스 안 탔어?”
“오늘은…… 아빠가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
재호는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로 우물거리듯이 대답을 했다. 유정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남편 얘기에 이어서 아빠 얘기라니……. 좀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언제 오시는데?”
“모르겠어요. 아마 곧 오실 거예요…….”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재호의 모습에서 어린아이 특유의 고집스러움이 느껴졌다. 유정은 머리라도 한번 쓰다듬어줄까 하다가, 문득 얼른 자리를 피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호의 아버지가 오기로 되어있다면, 되도록 그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다. 선생의 입장에서 학부형을 피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만 유정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렇구나. 그럼 선생님은 먼저 가볼게. 내일 보자, 재호야.”
“저기, 선생님.”
“응?”
재호가 머뭇거리며 땅을 내려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걸까?
“왜 그러니?”
“저기요, 사실은…….”
하지만 유정은 그 뒷말을 듣지 못했다. 재호가 입을 웅얼거리며 무어라고 말을 뱉으려는 찰나 길 건너편에서 자동차의 클락션이 요란하게 울렸기 때문이었다. 유정이 고개를 들어보니, 광택이 번쩍이는 외제 승용차 한 대가 어린이집 앞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입구 앞에 멈춰선 세단에서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내리자, 유정은 속으로 혀를 한번 찼다. 이래서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던 건데…….
“오……! 유성 씨 아니십니까.”
“안녕하세요, 재호 아버님.”
유정은 지극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늘 그랬듯이 재호의 아버지는 부산스럽게 요란을 떨며 유정에게 인사를 건넸다. 광택이 빛나는 외제차에, 값비싼 양복과 몸에 여기저기 걸쳐진 번쩍거리는 장식품들은 오늘도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말로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하하, 또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시네요. 그냥 편하게 병호 씨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저한테는 재호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편한걸요.”
그의 이름이 병호든 병신이든 간에, 유정은 그를 사적인 호칭으로 부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유정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줄곧 그녀에게 소위 ‘편한 관계’를 요구해왔었다.
유정이 어린이집 교사의 입장에서 재호의 아버지를 피하고 싶은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박 선생의 요청으로 재호의 면담을 위해 그가 어린이집을 방문했을 때, 유정은 뜻하지 않게 그를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그는 매번 잊을 만하면 이렇게 나타나서 그녀에게 시답지 않은 말들을 늘어놓곤 했던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유정은, 이 사람이 자신을 자꾸 ‘유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대는 것도 썩 맘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의 영향으로 인해 이제는 유정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 때문도 있었지만, 이 경우에는 사실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한유성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단순히 이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대는 것 자체가 싫을 뿐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마주치게 되어서 다행이네요. 유성 씨를 만나려고 온 건데, 차가 너무 막혀서 말이죠. 이미 퇴근하셨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재호를 데리러 오신 게 아니었나요?”
“하하, 물론 그렇긴 하지만 겸사겸사……”
겉으로 보기에 그는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유정과 연배가 비슷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어린 남학생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가벼움이 느껴졌다.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그것도 이렇게 아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 걸까?
유정은 문득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 기분을 억눌러 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무척 생소하게 느껴졌다. 대학에 다녔을 무렵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 때는 일단 짜증이 났다하면…….
‘이게 어른스러워진다는 걸까? 뭐든 속으로 꾹꾹 눌러 참고 인내하는 것이…….’
외로움도, 슬픔도, 짜증도…… 뭐든 이렇게 겉으로 내보이지 않고 마음속에 조용히 묻어가는 삶의 방식에 그녀는 익숙해지고 있었다. 때로는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배려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 같은 순간에서는 그것이 그저 거추장스런 족쇄처럼 느껴졌다.
“유성 씨, 그러지 마시고 제게 연락처라도 남겨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유성 씨와 좀 더 친밀한 사이로 지내고 싶습니다.”
유정의 기분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병호는 계속해서 치근거렸다. 경박함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들이 보는 앞에서 이것은 너무한 게 아닌가 싶어 결국 유정도 조금 못마땅한 기색을 담아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네요. 아드님이 보는 앞에서 그런 말씀을 하셔도 되는 건가요? 아버님이 제게 이러시는 걸 사모님이 아시면 꽤 곤란해지실 텐데요.”
“하하, 와이프 말인가요?”
꽤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고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그는 유정의 생각보다 더 뻔뻔한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생각보다 꽤 순수하시네요, 유성 씨.”
“무슨 뜻이죠?”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소위 ‘상류층’ 사람들의 가정 문화가 어떤지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유성 씨 눈에는 제가 가벼워 보일지 모르겠지만, 아마 제 와이프도 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겁니다.”
“뭐라구요?”
“하하. 전 그런 아내를 비난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기본적으로 사고방식이 같은 사람이니까요. 한번 사는 인생을 후회 없이 즐기자……는 것이 우리 부부의 모토랄까요?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겼다고 해서 내 인생을 즐길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는 건 아니죠.”
유정은 그들 부부가 어떠한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선 일절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답지 않게 울컥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어떤 아이에게는 간절히 필요한 그 부모라는 존재가, 또 어떤 아이에게는 없는 것만도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박 선생도 그렇고, 유정 자신도 평소에 늘 아이들에겐 부모의 존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왔지만…… 과연 이런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이런 형편없는 아버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다는 걸까?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유정은 눈앞의 남자보다도 더 형편없는 환경에서 미란을 키우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유정에게 있어 도저히 참기 힘든 모욕이었다.
“재호가…… 이런 아버님 모습을 보고 뭘 배워갈까요?”
“삶을 즐기는 법을 배우겠죠.”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지만 유정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기분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유정의 그런 올곧은 면을 흥미롭게 여긴 듯이 여전히 여유롭게 웃으며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아버지와 선생님을 초조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아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유정의 얼굴 가까이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유성 씨……. 저는 돌려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방금 제 입으로 말했듯이 저에게는 와이프 말고도 꽤 많은 여자들이 있죠. 내연녀라든지, 첩이라든지, 세컨드라든지……. 뭐 편하실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그 중에는 이혼녀들은 물론이고, 남편 가진 유부녀들도 더러 있죠. 저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여자들이 생각보다 꽤 많으니까요. 심지어 유성 씨처럼 애 딸린 미혼모도 드물긴 하지만 몇몇 있긴 하답니다.”
“단도직입적이라고 해놓곤 말씀이 너무 기네요.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이 뭐죠?”
“그야 물론…… 유성 씨도 그 중의 하나가 되어보시면 어떨까, 하는 거죠. 하하하.”
극도로 어처구니가 없다보니 오히려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유정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며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그런 어이없는 말을 하시면서, 혹시나 제가 ‘네, 좋아요.’하고 대답할 거라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군요.”
“간단한 자신감이죠. 여태껏 제가 만나왔던 내연녀들은 대부분 스스로 원해서 저와 그런 관계가 되었으니까요. 유성 씨도 지금이야 자존심 문제로 제 말이 곱지 않게 들리겠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오히려 저보다는 유성 씨에게 더 좋은 일일 거라는 걸 아실 텐데요.”
“글쎄요. 저는 아둔한 여자라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요.”
“하하하. 남편도 없이 혼자 딸아이를 키우는 게 힘들지 않으신가요? 제 여자가 되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적어도 돈 걱정은 안하고 살 수 있을 텐데요. 이런 어린이집에서 고작해야 푼돈이나 받아가며 근근이 일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 아닐지…….”
“…….”
“게다가 법적 혼인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서로 즐기기만 하는 내연 관계가 되자는 것뿐이니, 유성 씨로서는 손해 볼 것도 없는 얘기죠. 오히려 손해를 보는 건 제 쪽이겠지만 저는 유성 씨 같은 여자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그는 유정의 귓가에 입을 바짝 가져다대고는,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그녀에게 나지막한 귓속말을 전했다.
“저는 유성 씨처럼 기가 센 여자가 좋거든요. 소유하는 맛이 있다고 해야 할까……. 유성 씨도 남편이 없으니 밤에 외로울 때가 종종 있으실 텐데요. 후후. 저는 아직 이십대 못지않게 여기가 팔팔하게 살아있으니 솔깃하게 여겨주시면 좋겠습니다.”
귓속말을 속삭이며 그는 은근슬쩍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밀어보였다. 그야말로 성희롱이나 다름없는 그의 발언과 행태 앞에 유정은 잠시 침묵했다. 병호라는 작자는 그녀가 어떻게 나오나 내심 기대까지 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문득 이런 인간을 상대로 화를 내는 것조차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하…….”
유정은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터지는 것을 느꼈다. 이 또한 화가 끝까지 치솟아서 터지는 헛웃음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실로 우습다는 듯 한참을 웃었다. 그녀의 반응을 살피고 있던 병호가 점차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아세요?”
그녀가 마침내 웃음을 멈추고는 말문을 열었다.
“뭘 말입니까?”
“누군가의 내연녀가 된다는 거……, 저도 어떤 기분인지 조금은 알고 있거든요. 하지만 재호 아버님의 말대로 그게 그렇게나 즐거운 일이라면 저는 이미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아버님의 모습이 조금은 안쓰럽네요.”
병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지만 유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유정과 아버지의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는 어린 재호에게 말했다.
“네가 힘들겠구나.”
“…….”
유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몰차게 부자(父子)를 남겨둔 채 자리를 떠났다.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더 이상 상종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
빌라 앞 공터에 멈춰 서서 유정은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원래 그녀는 이 시간대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담배냄새가 배어버리면 미란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줄 테고, 또 혹시나…… 저녁에 ‘그’가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흡연을 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느낌이라, 유정은 어쩔 수 없이 흡연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도대체 언제쯤 이 해로운 것을 끊을 수 있을까. 정말 폐암이라도 걸려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후우…….”
연기를 뱉고 나니 뭔가가 속에서 빠져나간 느낌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공허함을 메워주진 못했다. 오늘 들었던 몇몇 이야기들이 유정의 머릿속에서 쉽사리 떠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다만 나는 유성 씨가 가끔은 너무 쓸쓸해보여서요. 우리도 애들을 가까이서 지켜보기 때문에 잘 알잖아요. 부모라는 존재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간절히 필요한 것인지. 아마 유성 씨도 그렇겠지만 따님도 평소에 많이 외로울 거예요.’
‘남편도 없이 혼자 딸아이를 키우는 게 힘들지 않으신가요? 제 여자가 되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적어도 돈 걱정은 안하고 살 수 있을 텐데요. 이런 어린이집에서 고작해야 푼돈이나 받아가며 근근이 일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 아닐지……’
박 선생은 물론 유정과 미란의 외로움을 알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이겠지만, 유정은 홀몸의 외로움을 핑계 삼아 병호 같은 사람과 만날 바엔 차라리 평생 이렇게 썩어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병호라는 그 작자가 남긴 말 중에 유독 신경 쓰이는 부분은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고작해야 푼돈이나 받아가며 일하는 삶이라……? 물론 그 말이 틀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 미란이나 성진에게는 터놓고 말한 적이 없지만 이미 그녀는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직업을 갖고 있다고는 해도 급여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기에 두 사람의 생활비와 교육비를 충당하기에는 부족한 형편이었다.
가끔씩 일본에서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생활비를 보내주시긴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이지, 끝도 없이 가문에 손을 벌릴 수도 없지 않은가. 그녀는 한국에 남아있기 위해 본토를 떠났고, 그와 동시에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해버렸다. 그래서 유정은 아버지에게 늘 죄송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당주의 딸이건만, 그녀는 자기 손으로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힌 것이다. 그런 주제에 아버지에게 언제까지고 도움을 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힘으로 미란이를 잘 키워내야만 해…….’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유정은 성진이 가끔씩 가져다주곤 하는 생활비마저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자존심일까? 아마도 성진은 유정의 이런 속마음을 세세하게는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고충에 대해서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유정은 오늘따라 너무 막막하게 여겨졌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병호라는 그 작자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유정의 민감한 상처를 건드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유정은 그 느낌이 싫었다. 그저 지나가는 개가 짖는 소리라며 가볍게 무시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유성 씨 같은 여자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저는 유성 씨처럼 기가 센 여자가 좋거든요.’
문득 또, 어처구니 없는 웃음이 피식 하고 새어나왔다. 그녀는 담뱃불을 밟아 끄며 맥 빠진 목소리로 허공에다 대고 중얼거렸다.
“한유정……. 성격 많이 죽었다, 진짜.”
*
집에 돌아와서 보니 미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딸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나면 늘 옥상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대개는 유정이 퇴근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 있었기에 유정은 의아함을 느꼈다. 아직도 옥상에 있는 걸까?
유정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그대로 곧장 옥상으로 올라가보았다. 딸아이는 항상 그곳에 앉아서 동네를 내려다보든 일에 몰두하곤 했다.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행동이긴 했지만 유정은 굳이 미란에게 더 생산적인 일을 강요하고 싶진 않았기에, 그저 감기나 걸리지 말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탓에 직접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온 유정은, 천천히 옥상의 철문을 밀었다. 낡은 철문이 끼익, 하고 열리자 조금을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공간이 나타났다.
‘누구지?’
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웬 남자아이가 하나 있었다. 딸이 항상 앉아있었던 자리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던 그 소년은, 유정이 문을 열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구태여 그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유정은 기척을 지우고는 문으로부터 몇 발짝 떨어졌다.
남자아이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금 미란이 앉았던 자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유정은 여전히 철문의 희미한 틈새로 남자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그는 유정의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유정은 그 남자아이로부터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동네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처음 보는 얼굴인걸. 그런데 무척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단순히 익숙하게 느껴질 뿐만이 아니라, 그 사내아이에게선 유정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자취가 묻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유가 뭘까……?
유정 자신도 그 이상한 느낌을 꼬집어 표현할 수 없었지만, 참으로 미묘하게도 그녀는 먼발치에서 처음 얼굴을 본 것뿐인 어린아이에게서 성진의 모습을 겹쳐본 것이었다. 비록 느낌뿐인 감상이긴 했지만 유정은 그 감상에 사로잡혀 어린아이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며 서있었다.
잠시 그 자리에 머무르던 소년은 어딘가 아쉬운 표정이 되어 허공을 한번 멍하니 바라보고는, 걸음을 돌려 철문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정은 할 수 없이 근처에 몸을 숨기고는 그 길로 계단을 내려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빌라 복도의 창문을 통해 유정은 그 소년이 떠나가는 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건물 입구에서 친구로 보이는 학생들과 마주친 소년은 이윽고 그들과 함께 걸음을 옮겨 멀어져갔다.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는 도무지 모를 일이었지만…… 유정은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제 오니?”
“응, 엄마.”
딸아이가 너무 늦는다 싶어 슬슬 걱정이 될 무렵이 되자, 미란은 다행히도 현관문을 열고 나타났다. 유정은 손에 뭔가를 주렁주렁 쥐고 들어서는 미란에게 다가가 그 작고 여린 몸을 껴안아주었다.
“왜 이렇게 늦었니? 옥상에 있을 줄 알았는데. 걱정이 돼서 찾으러 나가보려던 참이었어.”
“걱정 마. 요새 뭔가를 좀 만들고 있어서……. 집에서 만들기는 좀 불편한 물건이거든.”
“그래? 뭘 만들고 있는데?”
“음, 다 만들고 나면 말해줄게.”
그러고 보니 미란의 손에 쥐어져 있는 물건들이 하나같이 모두 조잡하게 조립되어 있는 기계장치였다.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미란이 이렇게 알 수 없는 물건을 만드느라 몰두하곤 하는 경우가 이전에도 종종 있곤 했기에 유정은 그러려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유정 역시 미란의 엄마인 만큼 미란의 천재성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이 용도를 알 수 없는 주렁주렁한 기계장치들조차도 그러한 천재성의 발현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유정은 역시 미란이 그저 평범하게만 살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기에, 정도를 뛰어넘는 미란의 천재성을 그리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유정은 어쩌면 자신이 미란의 자질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종종 들곤 했다. 딸아이와 마음의 소통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해왔지만 미란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기 힘든 유정이었다.
“그래도 너무 늦게 오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엄마가 걱정되니까…….”
“음, 알았어. 사실 옥상에서 연구해도 되는 건데, 요새 자꾸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서.”
“응? 누구 말이니?”
“그런 게 있어. 좀 꼴 보기 싫은 누군가가…….”
“혹시 누가 괴롭히고 그러는 거니? 그런 사람이 있으면 엄마에게 꼭 말해줘야 해.”
“그런 건 아니야. 엄마는 걱정 안 해도 돼. 나비가 찾아오는 거랑 별로 다를 게 없거든.”
아리송한 말을 남기는 미란이었다. 딸아이는 이따금씩 이렇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곤 했다. 게다가 늘 그랬듯이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도 않았다.
“엄마는 오늘 어땠어? 일은 괜찮았어?”
“으응. 엄마는 괜찮았어.”
“아닌 것 같은데? 엄마야말로 주변에 파리가 있는 것 같아 보이는걸.”
“뭐?”
끝까지 애매모호한 말을 남기고는 미란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늘따라 기분이 예민하기 때문인지, 딸아이가 손에 주렁주렁 쥐고 가는 그 기계장치들에 자꾸만 신경이 유독 쓰이는 유정이었다.
“미란아, 그거 정말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 말 안 해줄 거야?”
“다 만들고 나면 말해줄 거야. 약속할게.”
미란은 엄마를 돌아보며 아리송한 웃음을 지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여전히 원고 수정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
틈틈이 2부도 쓰고 있구요
처음에 2부를 쓰기 시작했을 때엔 소라에서 글을 쓰다 중간에 옮겨갈 생각이었지만
요즘 드는 생각으로는 깔끔하게 2부 완결을 짓고 연재처를 옮겨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네요
독자분들로 하여금 연재처를 옮겨서 보시게 할 만큼 2부의 내용이 대단한 것은 아닌지라....
계약과정에서 큰 무리가 없다면 소라에서 2부의 끝을 보여드리고 싶은 의욕도 생깁니다
고정적으로 제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이겠죠
늘 감사하고 있단 말로 마음을 전할 뿐입니다 ^^
하루 활기차게 시작하시고, 저녁 날씨 조심하세요~~!!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2부 4장
“한 선생님!”
유정은 누군가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동료 교사인 박 선생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꽤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는지 박 선생이 여러 차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나보다.
“아, 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고 계셔요? 곧 점심시간인데.”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좀…….”
유정의 표정이 안 좋아보였는지 박 선생이 옆자리에 천천히 앉으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나이가 올해로 30대 중반이 조금 넘은 박 선생은 푸근하게 보이는 인상만큼이나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상냥한 여인이었다. 그 다정다감한 성격 덕분에 유정도 이곳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그녀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곤 했었다.
“아이들이 한 선생님을 찾아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죠?”
“아니에요. 아이들이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 선생님이 조금만 안 보여도 제게 투정을 부려대니, 호호.”
인심 좋게 웃는 박 선생의 모습은 늘 그랬듯이 어린이집 교사라는 직업이 무척 잘 어울려보였다. 너그러운 마음씨와 편안한 미소, 그리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성향. 어느 모로 보아도 그녀에게는 이 일이 천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박 선생의 모습을 보며 유정은 오늘따라 퍽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이렇게까지 오래 하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 했는데……. 그 때는 순전히 생활비와 미란의 양육비를 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르다가 우연히 어린이집 교사를 택했던 것뿐이었다. 그렇게 시작했던 일을, 어느새 2년이 넘도록 계속해오고 있었다.
“선생님!”
블록을 쌓으며 놀고 있었던 몇몇 아이들이, 유정이 나타나자 그녀에게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왠지 토끼들이 총총걸음으로 뛰어오는 모습처럼 느껴져 유정은 희미하게 웃었다. 박 선생 같은 사람이야말로 이 일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지만, 유정은 그녀 자신도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이 일이 적성에 잘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어린아이를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었지만,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유정은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아무런 걱정 없이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기도 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미란을 보란 듯이 잘 키워내고 싶다는 마음가짐도 더욱 굳건해지곤 했다. 비록 혼자 키우는 딸이나 다름없긴 하지만 여느 집 부모들 못지않게 뒷바라지를 해주고 싶은 것이 유정의 바람이었다. 그것이 마음같이 잘 되지 않아 답답할 때가 많았지만 말이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해버렸구나. 잊어버리자.’
이렇게 마음 한구석에 우울한 기분이 자리 잡는 날이면 그만큼 딴 생각도 많아지곤 했다. 애써 그 기분을 털어내려고 유정은 평소보다 더욱 밝은 웃음을 지어보았다. 그래도 이곳에 오면 아이들이 자신을 반겨주니 그것만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선생님! 재호가 또 애들을 괴롭혀요……. 혼내주세요.”
“그러니?”
칭얼대는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반에 가보니 과연 재호가 또 친구들을 못살게 굴고 있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덩치가 크고 인상이 사나운 재호는, 주변 아이들에게 힘을 과시하는 방법을 일찍 깨우친 것 같았다. 그 아이는 6살이라는 나이에 벌써부터 패거리를 만드는 법을 배우고, 남들 앞에서 거들먹거리거나 우월감을 느끼는 것을 즐기곤 했다.
유정은 재호를 보고 있으면 꼭 애들이라고 해서 마냥 다 순수하고 귀여운 것은 아니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았지만 그것을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심 속으로는 재호가 자란 환경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란 생각을 종종 해보곤 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재호는 자신의 집안이 부유하다는 것이 곧, 남들 앞에서는 사회적인 힘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미 본성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돌려줘! 아빠가 사주신거란 말이야.”
“싫어. 진 사람이 아끼는 물건 하나 주기로 내기했었잖아.”
“내가 언제 그런 내기를 했어! 빨리 줘!”
특히 재호는 예쁘장한 여자아이들을 곯리거나 못살게 구는 일이 많았다. 여자아이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이야 그 나이 또래 남자애들의 특징이겠지만 재호의 경우는 그 특유의 성향이 더해져 유독 심할 만큼 여자애들을 괴롭히곤 했다. 지금도 가만 보니, 은주라는 아이가 아끼는 인형을 억지로 빼앗아 그녀를 해코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재호야, 또 친구들을 괴롭히는 거니? 너 한번만 더 그러면 정말 혼난다고 그랬지?”
유정은 재호가 은주로부터 빼앗아 흔들어대던 봉제인형을 손쉽게 가로채고는 다시 은주에게로 돌려주었다. 그러자 은주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고, 반면 재호의 표정은 샐쭉하게 변했다.
그 사람 좋은 박 선생조차도 재호의 행동을 여러 차례 꾸짖곤 했었다. 한번은 심각함을 느낀 박 선생이 재호의 부모님에게 상담 요청을 한 적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별다른 소득 없이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 때의 일을 떠올리니 유정은 자기도 모르게 또 한숨이 푹 나왔다.
‘하긴, 아버지란 사람이 제대로 교육을 시킬 마음이 없어 보이니…….’
유정은 박 선생의 간곡한 요청으로 어린이집에 면담을 하러 방문했던 재호의 아버지를 본 적이 있었다. 좋은 인상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썩 옳지 못한 일이겠지만 유정은 그 사람이 분명 좋은 아버지는 아닐 거라고 짐작했다.
“친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왜 자꾸 힘없는 애들을 못살게 굴고 그러는 거니? 너 자꾸 그러면 나중에 커서 깡패아저씨 같은 사람 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저 계집애가 내기를 해놓고 괜히 지고 나서 저러는 거라고요.”
유정은 재호의 머리에 꿀밤을 꽁, 하고 한 대 쥐어박았다. 전혀 힘을 싣지 않았지만 재호는 집에서 부모에게도 맞아본 적이 없는 꿀밤을 맞은 것이 퍽 굴욕적이었는지, 머리를 싸매고는 인상을 구기며 유정과 은주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친구한테 계집애가 뭐니? 그리고 아무리 내기를 했다고 해도 친구 물건은 함부로 뺏는 거 아니야. 알겠니?”
“씨이……!”
재호는 상당히 열이 오른 표정으로 뭐라 구시렁대며 저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저러고는 또 화풀이를 한다며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진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유정은 또 한 차례 한숨을 푹 쉬었다.
*
“어, 어라?”
민혁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없네.”
여느 때처럼 조심스럽게 빌라 옥상의 철문을 열어보았지만, 눈에 들어온 그 곳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있었던 한 소녀의 모습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민혁은 그동안의 관찰을 통해서 미란이 학교를 마치고 나면 언제나 이 옥상에 머물다 집으로 내려가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미란의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한 이후로, 그녀를 옥상에서 만나지 못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민혁은 심히 혼란스러웠다.
‘왜지? 어, 어디 아픈가?’
응당 오늘도 그 자리에서 말 한마디 없이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어야 할 미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민혁은 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는 이 복잡한 기분이, 정해진 규칙을 벗어난 미란의 이질적인 행동에서 느낀 호기심 때문인지 아니면 순수하게 미란의 안부가 걱정되는 것인지 스스로도 무척 혼란스러웠다.
‘아니면 그 때 정말로 화가 났던 걸까……? 내가 말을 건네서?’
담요를 덮어주려고 조심스럽게 다가갔을 때 앙칼지게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질렀던 미란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전히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는 알 수 없는 민혁이었지만, 그 때 그녀의 모습은 무척 날카로웠기에 민혁은 그 부분에 대해서도 지금껏 줄곧 고민해왔던 것이다.
민혁은 그녀가 늘 앉았던 자리에 천천히 다가가 보았다. 미란이 없는 그 장소가 민혁에게는 영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긴 애초에 미란이 아니었다면 민혁이 이곳에 올 이유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왠지 그 순간, 옥상의 철문이 미세하게 끼익 하고 열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민혁은 화들짝 놀라 철문을 돌아보았지만 문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잘못 들었던 것일까……? 미심쩍은 기분에 사로잡혀 민혁은 다시 한 번 미란이 있었던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내일은 있겠지?’
그러고 보니 담요가 사라져있었다. 혹시 미란이 챙긴 것일까? 민혁은 가능하다면, 다음번엔 좀 더 미란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녀가 그럴 마음을 내줄 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야! 최민혁!”
빌라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오던 민혁은 입구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기에 그는 어리둥절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용수와 정아의 모습이 보였다.
“너희가…… 왜 여기 있어?”
“궁금해서 따라와 봤지. 요새 학교 끝나기만 하면 어디로 사라지는지 통 말을 안 해주니까.”
“뭐야? 스토킹을 했다는 거야?”
정작 자신이 하고 있는 일도 스토킹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렇게 따져 묻는 민혁이었다. 정아는 심통이 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매일 말도 없이 가버리니까 그렇지. 학원이라도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여기는 뭐 하러 왔는데? 여기 누가 살아?”
“아, 그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망설여졌지만, 민혁은 차라리 설명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두 친구의 집요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민혁은 끝내 입을 닫은 채, 지독한 허무함을 느끼며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
“한 선생님,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아니에요, 고생은요. 박 선생님도 얼른 들어가세요.”
“호호, 저는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남편 분이요?”
“네. 그 이가 오늘 퇴근 후에 차로 데리러 오겠다고 해요. 그동안 아이들 앨범이나 좀 정리하면서 기다려야겠어요.”
“아…… 그렇군요.”
유정은 퇴근할 채비를 하다 말고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남편과 함께하는 퇴근길이라……. 아마 자신은 평생가도 그 기분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씁쓸한 생각은 되도록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요새 들어서는 꽤 자주 이런 우울함에 빠지곤 했다.
비단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요새는 건강도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은연중에 종종 느껴졌다.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운 탓일까……?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끊지 못하는 이 나약함이 결국 몸과 마음을 좀먹고 있는 것일지도.
“유성 씨.”
“네?”
동료 교사들끼리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기본이었지만, 박 선생은 가끔씩 이렇게 유정뿐만이 아니라 주변 동료들을 이름으로 부르곤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유정은 지난 2년간의 경험으로 박 선생이 이렇게 이름으로 누군가를 부를 때에는, 지극히 사적인 얘기를 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유성 씨는 재혼할 생각이 없나요?”
“재……혼이라니요?”
“아, 재혼이라는 표현은 좀 어폐가 있지만…… 그래도 남편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지 않나요? 따님을 위해서도, 또 유성 씨 본인을 위해서도요.”
박 선생은 유정의 사정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아마도 박 선생은 유정을 위하려는 마음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유정은 내심 시집을 갈 마음이 있었다면 이렇게 한국 땅에 머무르고 있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글쎄요. 저는 그런 건 딱히…….”
“주제넘은 참견이었다면 미안해요. 다만 나는 유성 씨가 가끔은 너무 쓸쓸해보여서요. 우리도 애들을 가까이서 지켜보기 때문에 잘 알잖아요. 부모라는 존재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간절히 필요한 것인지. 아마 유성 씨도 그렇겠지만 따님도 평소에 많이 외로울 거예요.”
“…….”
“심각하게 듣진 말아요. 그냥 내 생각이거든요. 게다가 유성 씨는 웬만한 처녀들보다 인물이 좋잖아요?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결혼하려는 남자들이 줄을 설 것 같은데…… 호호. 늦기 전에 주위를 한번 둘러봐요. 좋은 인연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생각해볼게요.”
유정은 박 선생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사무실을 나왔다.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대충 대답을 하긴 했지만 박 선생의 이야기엔 아무래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가 자신을 위해서 하는 얘기라는 것도 알고, 또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새겨들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유정은 자신이 지극히 비정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여자이기 때문에, 딸인 미란이 마저도 힘들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글프지만 그것은 사실일지도 몰랐다. 사랑이라는 것은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나뿐만 아니라 자식까지도 힘들게 만들 정도로…….
아직도 사랑이라는 환상을 쫓고 있는 10대 아이들과 내가 다른 게 뭘까? 그런 생각이 들자 유정은 또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예전에는 이런 기분이 들 때면 차라리 눈물을 한번 훔치고 말았지만, 이제는 니코틴을 들이마시는 걸로 그걸 대신하고 있었기에 건강도 덩달아 나빠지고 있었다. 유독 오늘따라 마음이 무거워지는 유정이었다.
“재호야, 너 집에 안 가니?”
입구에서 유정은 재호를 만났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덩치가 가로로 두 배는 됨직한 재호였기에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어린이집 입구에서 혼자 서성대고 있었던 재호는 유정의 모습을 보자 입을 샐쭉하게 내밀며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아까 혼이 났던 것에 대해 아직 서먹함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역시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버스 기사님은 아까 출발했을 텐데? 너는 버스 안 탔어?”
“오늘은…… 아빠가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
재호는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로 우물거리듯이 대답을 했다. 유정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남편 얘기에 이어서 아빠 얘기라니……. 좀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언제 오시는데?”
“모르겠어요. 아마 곧 오실 거예요…….”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재호의 모습에서 어린아이 특유의 고집스러움이 느껴졌다. 유정은 머리라도 한번 쓰다듬어줄까 하다가, 문득 얼른 자리를 피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호의 아버지가 오기로 되어있다면, 되도록 그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다. 선생의 입장에서 학부형을 피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만 유정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렇구나. 그럼 선생님은 먼저 가볼게. 내일 보자, 재호야.”
“저기, 선생님.”
“응?”
재호가 머뭇거리며 땅을 내려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걸까?
“왜 그러니?”
“저기요, 사실은…….”
하지만 유정은 그 뒷말을 듣지 못했다. 재호가 입을 웅얼거리며 무어라고 말을 뱉으려는 찰나 길 건너편에서 자동차의 클락션이 요란하게 울렸기 때문이었다. 유정이 고개를 들어보니, 광택이 번쩍이는 외제 승용차 한 대가 어린이집 앞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입구 앞에 멈춰선 세단에서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내리자, 유정은 속으로 혀를 한번 찼다. 이래서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던 건데…….
“오……! 유성 씨 아니십니까.”
“안녕하세요, 재호 아버님.”
유정은 지극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늘 그랬듯이 재호의 아버지는 부산스럽게 요란을 떨며 유정에게 인사를 건넸다. 광택이 빛나는 외제차에, 값비싼 양복과 몸에 여기저기 걸쳐진 번쩍거리는 장식품들은 오늘도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말로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하하, 또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시네요. 그냥 편하게 병호 씨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저한테는 재호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편한걸요.”
그의 이름이 병호든 병신이든 간에, 유정은 그를 사적인 호칭으로 부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유정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줄곧 그녀에게 소위 ‘편한 관계’를 요구해왔었다.
유정이 어린이집 교사의 입장에서 재호의 아버지를 피하고 싶은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박 선생의 요청으로 재호의 면담을 위해 그가 어린이집을 방문했을 때, 유정은 뜻하지 않게 그를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그는 매번 잊을 만하면 이렇게 나타나서 그녀에게 시답지 않은 말들을 늘어놓곤 했던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유정은, 이 사람이 자신을 자꾸 ‘유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대는 것도 썩 맘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의 영향으로 인해 이제는 유정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 때문도 있었지만, 이 경우에는 사실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한유성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단순히 이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대는 것 자체가 싫을 뿐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마주치게 되어서 다행이네요. 유성 씨를 만나려고 온 건데, 차가 너무 막혀서 말이죠. 이미 퇴근하셨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재호를 데리러 오신 게 아니었나요?”
“하하, 물론 그렇긴 하지만 겸사겸사……”
겉으로 보기에 그는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유정과 연배가 비슷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어린 남학생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가벼움이 느껴졌다.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그것도 이렇게 아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 걸까?
유정은 문득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 기분을 억눌러 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무척 생소하게 느껴졌다. 대학에 다녔을 무렵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 때는 일단 짜증이 났다하면…….
‘이게 어른스러워진다는 걸까? 뭐든 속으로 꾹꾹 눌러 참고 인내하는 것이…….’
외로움도, 슬픔도, 짜증도…… 뭐든 이렇게 겉으로 내보이지 않고 마음속에 조용히 묻어가는 삶의 방식에 그녀는 익숙해지고 있었다. 때로는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배려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 같은 순간에서는 그것이 그저 거추장스런 족쇄처럼 느껴졌다.
“유성 씨, 그러지 마시고 제게 연락처라도 남겨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유성 씨와 좀 더 친밀한 사이로 지내고 싶습니다.”
유정의 기분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병호는 계속해서 치근거렸다. 경박함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들이 보는 앞에서 이것은 너무한 게 아닌가 싶어 결국 유정도 조금 못마땅한 기색을 담아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네요. 아드님이 보는 앞에서 그런 말씀을 하셔도 되는 건가요? 아버님이 제게 이러시는 걸 사모님이 아시면 꽤 곤란해지실 텐데요.”
“하하, 와이프 말인가요?”
꽤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고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그는 유정의 생각보다 더 뻔뻔한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생각보다 꽤 순수하시네요, 유성 씨.”
“무슨 뜻이죠?”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소위 ‘상류층’ 사람들의 가정 문화가 어떤지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유성 씨 눈에는 제가 가벼워 보일지 모르겠지만, 아마 제 와이프도 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겁니다.”
“뭐라구요?”
“하하. 전 그런 아내를 비난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기본적으로 사고방식이 같은 사람이니까요. 한번 사는 인생을 후회 없이 즐기자……는 것이 우리 부부의 모토랄까요?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겼다고 해서 내 인생을 즐길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는 건 아니죠.”
유정은 그들 부부가 어떠한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선 일절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답지 않게 울컥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어떤 아이에게는 간절히 필요한 그 부모라는 존재가, 또 어떤 아이에게는 없는 것만도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박 선생도 그렇고, 유정 자신도 평소에 늘 아이들에겐 부모의 존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왔지만…… 과연 이런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이런 형편없는 아버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다는 걸까?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유정은 눈앞의 남자보다도 더 형편없는 환경에서 미란을 키우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유정에게 있어 도저히 참기 힘든 모욕이었다.
“재호가…… 이런 아버님 모습을 보고 뭘 배워갈까요?”
“삶을 즐기는 법을 배우겠죠.”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지만 유정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기분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유정의 그런 올곧은 면을 흥미롭게 여긴 듯이 여전히 여유롭게 웃으며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아버지와 선생님을 초조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아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유정의 얼굴 가까이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유성 씨……. 저는 돌려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방금 제 입으로 말했듯이 저에게는 와이프 말고도 꽤 많은 여자들이 있죠. 내연녀라든지, 첩이라든지, 세컨드라든지……. 뭐 편하실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그 중에는 이혼녀들은 물론이고, 남편 가진 유부녀들도 더러 있죠. 저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여자들이 생각보다 꽤 많으니까요. 심지어 유성 씨처럼 애 딸린 미혼모도 드물긴 하지만 몇몇 있긴 하답니다.”
“단도직입적이라고 해놓곤 말씀이 너무 기네요.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이 뭐죠?”
“그야 물론…… 유성 씨도 그 중의 하나가 되어보시면 어떨까, 하는 거죠. 하하하.”
극도로 어처구니가 없다보니 오히려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유정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며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그런 어이없는 말을 하시면서, 혹시나 제가 ‘네, 좋아요.’하고 대답할 거라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군요.”
“간단한 자신감이죠. 여태껏 제가 만나왔던 내연녀들은 대부분 스스로 원해서 저와 그런 관계가 되었으니까요. 유성 씨도 지금이야 자존심 문제로 제 말이 곱지 않게 들리겠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오히려 저보다는 유성 씨에게 더 좋은 일일 거라는 걸 아실 텐데요.”
“글쎄요. 저는 아둔한 여자라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요.”
“하하하. 남편도 없이 혼자 딸아이를 키우는 게 힘들지 않으신가요? 제 여자가 되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적어도 돈 걱정은 안하고 살 수 있을 텐데요. 이런 어린이집에서 고작해야 푼돈이나 받아가며 근근이 일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 아닐지…….”
“…….”
“게다가 법적 혼인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서로 즐기기만 하는 내연 관계가 되자는 것뿐이니, 유성 씨로서는 손해 볼 것도 없는 얘기죠. 오히려 손해를 보는 건 제 쪽이겠지만 저는 유성 씨 같은 여자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그는 유정의 귓가에 입을 바짝 가져다대고는,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그녀에게 나지막한 귓속말을 전했다.
“저는 유성 씨처럼 기가 센 여자가 좋거든요. 소유하는 맛이 있다고 해야 할까……. 유성 씨도 남편이 없으니 밤에 외로울 때가 종종 있으실 텐데요. 후후. 저는 아직 이십대 못지않게 여기가 팔팔하게 살아있으니 솔깃하게 여겨주시면 좋겠습니다.”
귓속말을 속삭이며 그는 은근슬쩍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밀어보였다. 그야말로 성희롱이나 다름없는 그의 발언과 행태 앞에 유정은 잠시 침묵했다. 병호라는 작자는 그녀가 어떻게 나오나 내심 기대까지 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문득 이런 인간을 상대로 화를 내는 것조차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하…….”
유정은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터지는 것을 느꼈다. 이 또한 화가 끝까지 치솟아서 터지는 헛웃음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실로 우습다는 듯 한참을 웃었다. 그녀의 반응을 살피고 있던 병호가 점차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아세요?”
그녀가 마침내 웃음을 멈추고는 말문을 열었다.
“뭘 말입니까?”
“누군가의 내연녀가 된다는 거……, 저도 어떤 기분인지 조금은 알고 있거든요. 하지만 재호 아버님의 말대로 그게 그렇게나 즐거운 일이라면 저는 이미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아버님의 모습이 조금은 안쓰럽네요.”
병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지만 유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유정과 아버지의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는 어린 재호에게 말했다.
“네가 힘들겠구나.”
“…….”
유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몰차게 부자(父子)를 남겨둔 채 자리를 떠났다.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더 이상 상종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
빌라 앞 공터에 멈춰 서서 유정은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원래 그녀는 이 시간대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담배냄새가 배어버리면 미란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줄 테고, 또 혹시나…… 저녁에 ‘그’가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흡연을 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느낌이라, 유정은 어쩔 수 없이 흡연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도대체 언제쯤 이 해로운 것을 끊을 수 있을까. 정말 폐암이라도 걸려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후우…….”
연기를 뱉고 나니 뭔가가 속에서 빠져나간 느낌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공허함을 메워주진 못했다. 오늘 들었던 몇몇 이야기들이 유정의 머릿속에서 쉽사리 떠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다만 나는 유성 씨가 가끔은 너무 쓸쓸해보여서요. 우리도 애들을 가까이서 지켜보기 때문에 잘 알잖아요. 부모라는 존재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간절히 필요한 것인지. 아마 유성 씨도 그렇겠지만 따님도 평소에 많이 외로울 거예요.’
‘남편도 없이 혼자 딸아이를 키우는 게 힘들지 않으신가요? 제 여자가 되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적어도 돈 걱정은 안하고 살 수 있을 텐데요. 이런 어린이집에서 고작해야 푼돈이나 받아가며 근근이 일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 아닐지……’
박 선생은 물론 유정과 미란의 외로움을 알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이겠지만, 유정은 홀몸의 외로움을 핑계 삼아 병호 같은 사람과 만날 바엔 차라리 평생 이렇게 썩어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병호라는 그 작자가 남긴 말 중에 유독 신경 쓰이는 부분은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고작해야 푼돈이나 받아가며 일하는 삶이라……? 물론 그 말이 틀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 미란이나 성진에게는 터놓고 말한 적이 없지만 이미 그녀는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직업을 갖고 있다고는 해도 급여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기에 두 사람의 생활비와 교육비를 충당하기에는 부족한 형편이었다.
가끔씩 일본에서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생활비를 보내주시긴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이지, 끝도 없이 가문에 손을 벌릴 수도 없지 않은가. 그녀는 한국에 남아있기 위해 본토를 떠났고, 그와 동시에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해버렸다. 그래서 유정은 아버지에게 늘 죄송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당주의 딸이건만, 그녀는 자기 손으로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힌 것이다. 그런 주제에 아버지에게 언제까지고 도움을 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힘으로 미란이를 잘 키워내야만 해…….’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유정은 성진이 가끔씩 가져다주곤 하는 생활비마저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자존심일까? 아마도 성진은 유정의 이런 속마음을 세세하게는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고충에 대해서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유정은 오늘따라 너무 막막하게 여겨졌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병호라는 그 작자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유정의 민감한 상처를 건드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유정은 그 느낌이 싫었다. 그저 지나가는 개가 짖는 소리라며 가볍게 무시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유성 씨 같은 여자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저는 유성 씨처럼 기가 센 여자가 좋거든요.’
문득 또, 어처구니 없는 웃음이 피식 하고 새어나왔다. 그녀는 담뱃불을 밟아 끄며 맥 빠진 목소리로 허공에다 대고 중얼거렸다.
“한유정……. 성격 많이 죽었다, 진짜.”
*
집에 돌아와서 보니 미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딸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나면 늘 옥상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대개는 유정이 퇴근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 있었기에 유정은 의아함을 느꼈다. 아직도 옥상에 있는 걸까?
유정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그대로 곧장 옥상으로 올라가보았다. 딸아이는 항상 그곳에 앉아서 동네를 내려다보든 일에 몰두하곤 했다.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행동이긴 했지만 유정은 굳이 미란에게 더 생산적인 일을 강요하고 싶진 않았기에, 그저 감기나 걸리지 말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탓에 직접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온 유정은, 천천히 옥상의 철문을 밀었다. 낡은 철문이 끼익, 하고 열리자 조금을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공간이 나타났다.
‘누구지?’
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웬 남자아이가 하나 있었다. 딸이 항상 앉아있었던 자리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던 그 소년은, 유정이 문을 열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구태여 그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유정은 기척을 지우고는 문으로부터 몇 발짝 떨어졌다.
남자아이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금 미란이 앉았던 자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유정은 여전히 철문의 희미한 틈새로 남자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그는 유정의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유정은 그 남자아이로부터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동네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처음 보는 얼굴인걸. 그런데 무척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단순히 익숙하게 느껴질 뿐만이 아니라, 그 사내아이에게선 유정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자취가 묻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유가 뭘까……?
유정 자신도 그 이상한 느낌을 꼬집어 표현할 수 없었지만, 참으로 미묘하게도 그녀는 먼발치에서 처음 얼굴을 본 것뿐인 어린아이에게서 성진의 모습을 겹쳐본 것이었다. 비록 느낌뿐인 감상이긴 했지만 유정은 그 감상에 사로잡혀 어린아이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며 서있었다.
잠시 그 자리에 머무르던 소년은 어딘가 아쉬운 표정이 되어 허공을 한번 멍하니 바라보고는, 걸음을 돌려 철문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정은 할 수 없이 근처에 몸을 숨기고는 그 길로 계단을 내려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빌라 복도의 창문을 통해 유정은 그 소년이 떠나가는 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건물 입구에서 친구로 보이는 학생들과 마주친 소년은 이윽고 그들과 함께 걸음을 옮겨 멀어져갔다.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는 도무지 모를 일이었지만…… 유정은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제 오니?”
“응, 엄마.”
딸아이가 너무 늦는다 싶어 슬슬 걱정이 될 무렵이 되자, 미란은 다행히도 현관문을 열고 나타났다. 유정은 손에 뭔가를 주렁주렁 쥐고 들어서는 미란에게 다가가 그 작고 여린 몸을 껴안아주었다.
“왜 이렇게 늦었니? 옥상에 있을 줄 알았는데. 걱정이 돼서 찾으러 나가보려던 참이었어.”
“걱정 마. 요새 뭔가를 좀 만들고 있어서……. 집에서 만들기는 좀 불편한 물건이거든.”
“그래? 뭘 만들고 있는데?”
“음, 다 만들고 나면 말해줄게.”
그러고 보니 미란의 손에 쥐어져 있는 물건들이 하나같이 모두 조잡하게 조립되어 있는 기계장치였다.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미란이 이렇게 알 수 없는 물건을 만드느라 몰두하곤 하는 경우가 이전에도 종종 있곤 했기에 유정은 그러려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유정 역시 미란의 엄마인 만큼 미란의 천재성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이 용도를 알 수 없는 주렁주렁한 기계장치들조차도 그러한 천재성의 발현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유정은 역시 미란이 그저 평범하게만 살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기에, 정도를 뛰어넘는 미란의 천재성을 그리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유정은 어쩌면 자신이 미란의 자질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종종 들곤 했다. 딸아이와 마음의 소통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해왔지만 미란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기 힘든 유정이었다.
“그래도 너무 늦게 오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엄마가 걱정되니까…….”
“음, 알았어. 사실 옥상에서 연구해도 되는 건데, 요새 자꾸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서.”
“응? 누구 말이니?”
“그런 게 있어. 좀 꼴 보기 싫은 누군가가…….”
“혹시 누가 괴롭히고 그러는 거니? 그런 사람이 있으면 엄마에게 꼭 말해줘야 해.”
“그런 건 아니야. 엄마는 걱정 안 해도 돼. 나비가 찾아오는 거랑 별로 다를 게 없거든.”
아리송한 말을 남기는 미란이었다. 딸아이는 이따금씩 이렇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곤 했다. 게다가 늘 그랬듯이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도 않았다.
“엄마는 오늘 어땠어? 일은 괜찮았어?”
“으응. 엄마는 괜찮았어.”
“아닌 것 같은데? 엄마야말로 주변에 파리가 있는 것 같아 보이는걸.”
“뭐?”
끝까지 애매모호한 말을 남기고는 미란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늘따라 기분이 예민하기 때문인지, 딸아이가 손에 주렁주렁 쥐고 가는 그 기계장치들에 자꾸만 신경이 유독 쓰이는 유정이었다.
“미란아, 그거 정말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 말 안 해줄 거야?”
“다 만들고 나면 말해줄 거야. 약속할게.”
미란은 엄마를 돌아보며 아리송한 웃음을 지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여전히 원고 수정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
틈틈이 2부도 쓰고 있구요
처음에 2부를 쓰기 시작했을 때엔 소라에서 글을 쓰다 중간에 옮겨갈 생각이었지만
요즘 드는 생각으로는 깔끔하게 2부 완결을 짓고 연재처를 옮겨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네요
독자분들로 하여금 연재처를 옮겨서 보시게 할 만큼 2부의 내용이 대단한 것은 아닌지라....
계약과정에서 큰 무리가 없다면 소라에서 2부의 끝을 보여드리고 싶은 의욕도 생깁니다
고정적으로 제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이겠죠
늘 감사하고 있단 말로 마음을 전할 뿐입니다 ^^
하루 활기차게 시작하시고, 저녁 날씨 조심하세요~~!!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
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2-28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태그 | |||
황진이-무료한국야동,일본야동,중국야동,성인야설,토렌트,성인야사,애니야동
야동토렌트, 국산야동토렌트, 성인토렌트, 한국야동, 중국야동토렌트, 19금토렌트 |
추천 0 비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