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47장
다음날 눈을 떴을 때, 나는 문득 누운 자리가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뒤척이며, 나는 어젯밤의 기억을 되짚었다. 풀밭 위에서 유정이와 끌어안고 누워있었던 아늑한 순간이 떠오르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혹시 풀밭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렸던 걸까?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주변의 모습들을 천천히 살펴보고 있자니, 적어도 이곳이 야외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어제 하루동안 수차례의 시간을 되감으면서 나는 휴식을 취하지도, 음식을 먹지도 않았기 때문에 온 몸의 에너지가 모두 고갈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긴 시간 동안 쫄쫄 굶은 배는 이제 배고프다는 감각마저 상실해버린 것 같았고, 주먹 하나 쥐는 것조차 힘들게 느껴질 만큼 내 몸에는 아무런 기운이 없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몸을 지탱해 힘겹게 일어서자, 나는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더욱 궁금해졌다. 누워있었던 곳이 야외가 아닌 실내라는 점 만큼은 알 수 있었지만, 지극히 고풍스럽다 못해 현실감각을 잃게 만드는 그 방의 분위기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벽에는 드문드문 절제된 느낌의 동양화가 몇 점 걸려있었다. 난초를 심은 화분도 하나 보였지만 사람의 손이 꽤 오랫동안 닿지 않았는지 시들해져 있는 느낌이었다. 어찌됐든 밖으로 나가봐야겠단 생각이 들어 비틀대면서도 나는 걸음을 옮겼다.
오늘날에는 좀체 구경하기 힘들 것만 같은 오래된 느낌의 미닫이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일직선으로 쭉 뻗은 나무 복도가 나타났다. 일반 가정집의 구조는 확실히 아니었다. 한 방향으로 곧게 나 있는 복도를 조심스럽게 걸어가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는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관... 장님?"
그 분의 얼굴과 모습, 존재감이 내 뇌리에 너무도 강렬하게 새겨져 있었던 탓일까. 나는 먼발치에서 그 분의 뒷모습만 보고도 유정이 아버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관장님은 사방이 널찍하게 트인 마당의 변두리에 서 계셨다. 청명한 햇살이 마당 안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지금은 메말라있는 것 같지만 작은 연못의 흔적도 보였다. 그것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21세기에 마당이 있는 고풍스런 한옥집이라니.... 기분이 얼떨떨하게 붕 떴지만 나는 일부러 관장님을 부르지 않고 멀리 떨어진 채로 그 분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관장님은 무언가에 집중하고 계신 것 같았다.
어찌보면 유유자적하게 산책을 즐기시는 것 같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명상에 잠겨 계신 것 같기도 했다. 느릿하지만 가벼운 걸음걸이로 마당을 잠시 활보하던 관장님이 나무 그늘 밑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 분이 천천히 팔을 들어올려 나무 몸통에 조용히 손바닥을 대는 것을, 나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아...."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관장님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또는 그 행동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그 순간 나는 감탄을 넘어서 경외에 가까운 기분을 느꼈다.
그 분은 마치 자연 그 자체인 것만 같았다. 마당을 수놓은 갖가지 풍경들 속에서, 한 인간의 존재가 전혀 독립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풍경 속에서 함께 살아 숨쉬는 것처럼 관장님의 모습은 그것에 동화되어 있었다. 그 분의 손길이 닿은 나무가, 한줄기 산들바람이라도 맞은 것처럼 미세하게 흔들렸다.
무슨 이유로 그 모습이 그 정도의 경외심을 자아냈는지는 스스로도 모를 일이다. 그저 관장님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려왔다. 조금은 부끄러움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을 느끼고 서 있으니 관장님이 나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일어났는가, 성진 군?"
"아.... 네, 네."
그러고보니 관장님은 아마 그 날 나를 구해주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다. 시간을 되감아버렸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장님은 마치 하루 전에 만났던 익숙한 사람을 다시 보는 듯이, 평온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반면에 관장님을 대하는 나는 어쩐지 민망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여 연신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과, 관장님. 여기는....?"
"이 곳은 내 집일세.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가족이 원래 살던 집이지. 유정이가 어릴 때만 해도 가족 모두 이곳에서 함께 살았지만 지금은 자네도 알다시피 서로 떨어져 지낸지 꽤 오래 되었다네. 예전에 길렀던 것들이 꽤 많이 죽거나 사라져버려서 안타깝군."
"그렇군요.... 그, 그런데 제가 왜 여기에?"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겐가? 어젯밤에 정신을 잃은 자네를 딸아이가 등에 업고 들어왔는데 말이야."
"네에?"
놀라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순간 혼란스러웠다. 관장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어제 풀밭에서 잠이 든 나를 유정이가 본가로 데려왔다는 걸까? 그... 그것도 등에 업고?
"오밤중에 유정이가 외간 남자를 업고 들어와서 나도 무척이나 놀랐지만 그보다는 자네 몸의 기력이 많이 쇠한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네. 다행히 깊은 잠에 빠진 것 뿐이라 편히 잘 수 있도록 내가 침을 좀 놓긴 했네만.... 그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더군. 딸아이는 원체 성격이 그렇지만 제대로 설명을 해주지 않거든."
그러고보니 몸을 움직이는 것이 어제보다는 더 수월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는데, 관장님이 손을 썼기 때문일까. 하지만 거기에 감사를 표하기보다도, 나도 모르는 사이 너무도 큰 결례를 저질러버린 것 같아 나는 극도로 조심스러워졌다.
"죄, 죄송합니다 관장님.... 제가 너무 피곤했나 봅니다."
"흠, 그런가? 자네 몸의 기운이 지금 너무 탁한데."
사과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실 내가 관장님께 감히 진실을 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설령 관장님이 아니라해도, 어떻게 딸을 둔 아버지의 면전에 대고 "어제 따님과 낯부끄러운 일을 하다 그만 잠이 들어버렸습니다."하고 곧이 곧대로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렴 관장님이 나 같은 사람을 상대로 폭력을 쓰시진 않겠지만, 만약 그렇게 실토했다간 왠지 눈 깜짝할 사이에 사지가 해체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아마 유정이도 비슷한 이유로 설명을 하지 못한 것이리라. 왜 유정이는 우리가 지내고 있는 원룸이 아닌 그녀의 본가로 나를 데려온 걸까?
"저, 그게...."
머뭇거리는 내 눈치를 다행히 관장님은 헤아려 주신 것 같았다. 그 분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자 나도 따라서 걷게 되었다.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으신 걸로 봐서는 내게 모종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은연 중에 짐작하신 것 같기도 했다. 다행스런 일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감사한 일이었다.
한옥집에, 그것도 사람이 지내고 있는 한옥집에 방문해 본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아마 추측컨대 관장님이 들어선 곳은 안채에 해당하는 공간인 것 같았다. 그 곳에서 관장님은 손수 뭔가를 부지런히 준비하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소박하게 차려진 밥상을 내 앞에 내어오셨다.
"우선 식사나 들고나서 이야기하지. 자네 몸의 기력이 너무 쇠했어. 위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한 음식을 준비했으니 반찬이 소박하더라도 이해하게."
"아니... 가, 감사합니다. 재워주신 것으로도 모자라서....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 지."
황송함에 내가 어쩔 줄을 몰라하자 관장님은 또다시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평상 위에 앉아서, 나는 관장님과 마주보고 식사를 했다. 유정이의 아버지 되는 분과 마주앉아 식사를 한다는 것이 못내 불편하게 여겨질 법도 했고, 또 오랜 시간 음식물을 받아들이지 못한 위가 부담을 느낄 만도 했으련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도를 넘어가는 음식들이 무척 부드럽게 느껴져 생각보다는 편하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만큼 배가 고팠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관장님은 상을 치우고는 정갈한 빛깔이 나는 차를 내어오셨다. 나는 뭐라도 돕고 싶었지만 부엌이 정확히 어딘지조차 알 수가 없었기에 앉은 자리에서 진땀만 흘릴 뿐이었다.
관장님이 주신 차를 한 모금씩 천천히 들이키니 어쩐지 속이 따뜻해지면서 머릿속이 맑게 개었다. 차를 마시면서 나는 유정이가 어릴 적에 살았던, 그리고 나와 같은 원룸 건물에 살기 전까지 있었던 그녀의 본가를 이모저모 살펴볼 수 있었다.
그 넓은 집을 한번 둘러보고 나서 처음으로 들었던 감상은.... 유정이가 그동안 많이 외로웠겠다는 생각이었다. 이 넓디 넓은 집에서 여자애 홀로 지내면서, 얼마나 가족의 품이 그리웠을까? 유정이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나는 그제야 조심스레 입을 열어 관장님께 물었다.
"저... 관장님, 그런데 유정이는 어디 있습니까?"
"아, 내가 잠시 심부름을 시킨 일이 있네. 딸아이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그동안 소화도 할 겸 산책이나 함께 한바퀴 하지 않겠나?"
관장님은 바깥으로 나설 채비를 하고 계신 듯 했다. 여전히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서둘러 관장님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정이 없이 관장님과 둘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 특별한 시간 동안, 나는 그 분과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바깥으로 나온 관장님은, 앞장서서 산길을 걷기 시작하셨다. 밖으로 나오고 나서 나는 이곳이 도심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걸 새삼스럽게 인식할 수 있었다. 그 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닌 것 같았지만, 아침 산책 삼아 걷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군소리 않고 묵묵히 관장님의 뒤를 따라 걸었다.
"헉.... 허억.... 헥...."
점점 관장님의 등을 따라가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 분의 뒷모습을 쫓아가려 무던히 애쓰면서 나는 내가 평소에 얼마나 운동부족이었는지를 실감했다. 나와는 다르게 말그대로 산책을 나온 듯한 모습의 관장님은, 유유자적한 걸음을 옮기다가도 내가 많이 뒤처진다 싶으면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려주셨다. 어쩐지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허허, 괜찮은가?"
"아... 예. 부끄럽습니다."
"앞장 서 보게."
"예?"
길도 제대로 모르는 나를 관장님은 앞에다 세우셨다. 내가 앞장서서 정처없이 그저 위를 향해 걸어올라가자, 관장님이 내 등에 조용히 손바닥을 얹었다. 그러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등에 손바닥이 닿았을 뿐인데 몸에 없던 활기가 생겼고, 삐걱거렸던 전신의 근육들이 제자리를 찾아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왠지 그러고 있으니, 관장님이 손바닥 하나로 나를 제어하기라도 하는 듯 나는 자연스레 그 분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갈림길에서도 나는 별 어려움 없이 관장님이 살짝 밀기만 하는 대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그렇게 산길을 오르다보니 언제부터인가 고요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 거의 다 온 것 같군 그래."
잔잔하게 물이 흐르는 곳이 눈 앞에 나타나자 나는 깜짝 놀랐다. 그곳은 계곡이라기보단 차라리 호수에 가까운 곳이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수면이 녹색 풍경들을 맑게 비추었다. 싱그러운 바람에 고개를 흔드는 풀과 나뭇잎 소리도 귓전을 간지럽혔다. 정갈한 자연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경치가 아닐 수 없었다.
"산의 정기가 모이는 곳에는 물이 흐르기 마련이지. 폭포가 흐르는 계곡이라 하면 요새는 대개 더위를 피하기 위한 휴양지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산 속에 흐르는 물은 생각보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네."
"아.... 예."
"자네는 지금 너무 탁한 기운을 몸에 담고 있네. 조금이라도 맑은 공기를 마시고 탁한 것들을 비워보려고 애써 보게. 그런 기운을 몸에 품은 채 살아간다면 아마 틀림없이 스스로 화를 입을 게야."
관장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관장님이 얼마만큼 내 속을 깊이 들여다보았는지는 몰라도, 지금 내 마음 속에 켜켜이 맺혀 있는 이 분노의 덩어리들이 나를 괴물로 만들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나는 어제 정말로 사람을 죽였을까? 그 피 냄새가 여전히 손에 배어있어 관장님도 그것을 알아보시는 걸까? 실은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점은, 그런 극한의 시간을 거치고 나서도 내게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 복수가 내게 남긴 것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아니, 애초에 그것이 복수이긴 했었나?
"저.... 관장님."
"말해보게."
관장님은 그저 풍경을 감상하듯이 뒷짐을 지고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계셨지만, 그 분이 내가 스스로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뭐라고 표현을 해야 좋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솔직한 마음으로 전했다.
"관장님께 여러가지를 배우고 싶습니다. 저를 가르쳐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가르침이라고? 그건 무예에 대한 이야기인가?"
나는 생각했다. 그 지옥 같았던 최악의 상황에서, 고작해야 마음 속으로 유정이에게 기댈 수 밖에 없었던 나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위험한 곳으로 그녀가 나를 구하러 오는 것 만이 유일한 구원이라고 여겼던 그 용서할 수 없는 나약함에 대해서 생각했다....
"저, 저는.... 제 한 몸을 스스로 지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강인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좀체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군.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라도 있는 겐가?"
"소중한 사람이 너무도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다른 이들까지도 그렇게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순전히 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육체의 강함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제게는 마음을 강건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저는 무예를 갈고 닦는 것이나, 심신을 수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저를 이끌어 줄 수 있는 분이 관장님 외엔 달리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관장님은 나를 구원해주었던 그 순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끔찍했던 경험은 내 몸과 마음에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지만, 그와 더불어 관장님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어떤 필연에 의해서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인지를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그 분은 결코 평범한 분이 아니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맥을 이어내려 온 고무술의 권위자이셨고, 분명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청년이 아니더라도 이미 수없이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계실 무예 가문의 책임자이셨다.
그런 그 분에게 감히 함부로 가르침을 구한다는 것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정도를 넘어서 일견 무례함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비록 무술이나 전통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나였지만 그 정도는 굳이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무모한 질문을 던진 것은, 결코 타임 리와인더의 기능에 의지했다거나 하는 비겁함의 발로는 아니었다. 유정이를 위험에 빠뜨릴 뻔 했던 그 순간의 자기혐오를 나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일을 겪고서도 여전히 복수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나 자신의 나약함을 견딜 수 없었다.
"흠...."
관장님은 꽤 오랫동안 말씀이 없었다.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볼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쯤, 비로소 관장님이 말문을 여셨다.
"딸아이에게서 내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
"유정이의.... 어머님 말씀이십니까?"
관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유정이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도 내가 가문의 데릴사위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겠군."
이번엔 내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유정이가 나를 구해주었던, 평생을 가도 잊을 수 없는 계곡에서의 그 날 밤, 그녀가 직접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였다. 나는 관장님이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잠자코 그 분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지금은 나와 아내의 관계가 예전에 비해 다소 좋아지긴 했지만, 실은 그 전까지 나와 아내는 조금 어색하리만치 사이가 좋지 않았네. 그나마도 딸아이가 우리 사이에 있어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가족이라 불릴 수 있었겠지만 돌이켜보면 우린 부부로서의 유대나 사랑을 썩 깊이 나누진 못했지."
"........"
"당연한 일일세. 우린 서로 사랑했던 사이가 아니었어. 내 장인어른, 그러니까 전대 당주님 되시는 분께선 젊었을 적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셨을 때부터 내 자질을 눈여겨 보고 계셨네. 그 분께선 나에게 당주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하셨지. 그 과정으로 생각하셨던게 바로 결혼이었네. 당신의 여식과 나를 이어주는 것으로, 나로 하여금 후대를 계승할 수 있는 당위성을 갖게 만드셨지. 심지어 나는 당주의 자리를 이어받겠노라고 결정한 다음에야 일본으로 건너가서 지금의 아내를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지.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서로의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네."
마치 머나먼 옛 시절의 이야기를 다룬 사극이나, 중세시대 풍의 영화 속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였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의 정략결혼이라니.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쉽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유정이에게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이렇게 관장님의 입을 통해서 직접 듣게 되니 그 느낌이 많이 달랐다.
"고리타분한 구시대적 관습으로 여겨지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로 치부되기도 한다네. 심지어 그건 지금도 그렇지. 집단과 집단을 이어줄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결혼이라는 것은 여전히 그런 식으로 이용되곤 한다네. 내가 자네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겠나?"
"자, 잘 모르겠습니다."
관장님은 지극히 쓸쓸한 눈빛으로, 호수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어 나를 보셨다.
"유정이에겐 이미 내정되어 있는 약혼자가 있네."
"네에?"
마치 머릿속에 벼락 한 줄기가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져,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고 관장님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정되어 있는 약혼자라기보다는, 내정되어 있는 "가문"의 자제이겠지. 적당한 표현이 없어서 내정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아마 유정이는 그 약혼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본 기억이 없을 게야. 하지만 내가 아내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을 때부터 그것은 은연 중에 예정되어 왔던 일이었네."
"그, 그런...."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숭상하고 있는 "무신류"라는 무예는 그 뿌리가 본디 일본 본토의 것일세. 하지만 장인께서는 본토의 수많은 실력자들을 제치고 한국 땅에서 태어난 나를 후계자로 지목하셨지. 그 당시에 가문 내에서 얼마나 많은 반발이 있었을지 자네도 조금 쯤은 예상이 될 게야. 그들은 반드시 다음 당주를 본토 유파의 실력자들 가운데에서 찾으려 할 걸세. 비록 내게 뒤늦게 아들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그 반발은 끊임없이 계속될 게야."
"그, 그게 유정이의 약혼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유파 인물을 당주로 추대하고 싶어하지만, 그 와중에도 계승하는 과정에서의 정당성을 얻어야만 하네. 비록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긴 하지만 나는 엄연한 20대 당주이고, 어떤 형태로든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후대 계승은 이루어질 수 없어. 그래서 그들은 딸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일찌감치 내 여식을 그 수단으로써 눈여겨 보고 있었던 거야. 내가 전대 당주님의 여식과 혼인을 함으로써 당주 자리를 물려받은 것처럼 말일세. 그들은 자신들 가문의 인물을 내 딸인 유정이와 연결함으로써 당위성을 확보하려 하는 게지."
"그렇다면.... 외람된 말씀이지만, 관장님께서 그것을 거부하면 되는 문제가 아닙니까?"
"난 그렇게 할 수 없네, 성진 군."
"어, 어째서죠?"
이러한 부분이 감히 내가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무겁고도 중요한 사안이라는 사실을 나는 물론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묻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유정이가 다른 남자와, 그것도 정략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 내가 어떻게 침착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관장님은 내 무례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말을 이으셨다.
"왜냐하면 지금의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네. 자네의 눈으로 보기엔 원하지도 않는 상대와 결혼을 함으로써 자리를 이어받는 이러한 세습의 과정이 지극히 비인간적이고 잔인하게 여겨지겠지.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히 판단할 문제만은 아닐세. 천 년을 넘게 계승되어 온 뿌리 깊은 무(武)의 맥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너무도 거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네. 그 앞에서 한 개인의 의지나 행복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지. 나는 비록 가문의 책임자이지만, 이 거대한 가문의 뿌리는 나 혼자서 이어나가는 것이 아닐세. 원로들은 본토 유파의 실력자가 내 딸과 맺어지기를 바라고, 나는 그들의 그러한 요구를 "내 딸의 행복을 바란다"는 이유만으로 가벼이 묵살할 수가 없네. 누가 뭐래도 나는 당주이기 때문일세...."
"........"
미칠 듯이 속이 답답해졌지만, 나는 그 이상 감히 함부로 관장님께 따져묻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를 하며 괴로워하는 관장님의 마음이 내게도 너무 절절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관장님은 분명 유정이를 정말로 아끼고 사랑하고 계셨지만, 당신에게 주어진 자리의 무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딸의 행복을 외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그 잔혹한 압박감으로부터 오랜 세월 시달려오신 것이었다.
관장님 또한 그런 결혼의 과정을 거쳐 지금의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유정이만큼은 진정으로 그녀가 원하는 상대와 맺어져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리라. 딸아이가 여성으로서의 행복을 누리며 살길 누구보다 원했던 관장님이셨다. 허나 그 간절한 바람도 무색하게 만들 만큼 가문의 문제라는 것은 그 의미가 너무도 무거운 모양이었다.
"실은 내가 유정이를 한국땅에서 키웠던 것에도 그런 이유가 있다네. 훗날이 어찌될지는 모르지만 그 아이가 가문이니 계승이니 하는 문제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서 그 아이만의 삶을 살길 원했지. 하지만 아내의 바람은 그렇지 않았어. 나는 이제와서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아내의 그런 부분은 조금 안타깝다네."
"그, 그러면 관장님은.... 언젠가는 결국 유정이를 얼굴도 모르는 가문의 남자와 결혼시킬 생각이십니까?"
부끄럽게도 나는 떨림을 숨기지 못하고, 내 마음 속에서 줄곧 떠올랐던 가장 중요한 질문을 결국 관장님께 던졌다. 관장님은 나를 마주보던 시선을 다시 물 위로 옮겼다. 잠자코 그렇게 수면 위를 응시하던 관장님은, 또 한번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셨다.
"그럼 아까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자네는 내 제자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네. 그것이 무예에 관한 것이든, 수양에 관한 것이든 말일세.... 내 말이 맞나?"
"......."
대답을 듣지 못해 답답했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 이야기로 돌아온 것이, 관장님이 꺼냈던 이야기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실은 자네가 그런 이야기를 해줘서 내심으로 조금 반가운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네."
"예? 어... 어째서입니까?"
"딸아이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피하기 위한 방법은 한 가지 뿐일세. 다음 후계자를 가리기 위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떠오르기 전에 유정이가 먼저 혼례를 올려버린다면 그들은 더이상 내 딸과의 혼인을 주장할 수 없게 되지 않겠나. 하지만 자네도 짐작했다시피 여기에는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네."
"그게 혹시....?"
"그렇네. 그런 식으로 유정이가 혼인을 올리기 위해서는 뒤집을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필요해. 그 혼인의 상대가 반드시 유파의 인물이어야만 한다는 점이지. 가문의 뿌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외부인을 데려다 갑자기 결혼을 시키겠다고 말해도 원로들은 절대 수긍하지 않을게야. 나는 아비된 입장에서 유정이가 진정 원하는 상대를 찾아서 맺어지길 언제나 원해왔지만, 관습에 매어있는 가문의 인물들은 절대 그걸 허용하지 않을 거란 이야기일세. 그들의 입장에서 보기에 유정이는 한 명의 여성이라기보단, 후대 계승의 실권을 쥐고 있는 중요한 열쇠나 다름이 없으니까.... 내 이야기를 이해하겠나?"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가문 내에서 유정이의 존재란, 후계자의 자리를 노리는 이들의 가장 중요한 쟁점일 수 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그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여인이, 고작해야 외부에서 굴러들어온 어중이떠중이와 맺어지는 것을 그들은 결코 용납하지 못하리라. 그것은 곧 후계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혼인의 상대가 유파의 인물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져.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어찌됐든 같은 뿌리 내에서 이루어진 혼례사를 뒤집어가면서까지 정략결혼을 주장할 수는 없다는 말이네. 그들의 속내야 어찌되었든 간에, 표면적으로 더이상 그들은 내 딸을 이용할 수 없게 되겠지. 그러니까.... 내 말의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기분이 들지만 말일세, 자네가 만약 내 딸과 이어져야 한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자네에게 반드시 "자격"을 부여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라네."
"그, 그 자격이라는게 설마.... 관장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까?"
"바로 그렇네. 자네는 좀체 실감하기 어렵겠지만, 나를 사사(師事)한다는 것은 가문 내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일세. 그렇게만 된다면 자네는 명실상부한 내 제자가 되는 동시에 유파의 인물로써 충분한 자격을 갖추게 되겠지."
이미 내 상식과 세계를 한참 벗어나버린 이야기에, 나는 절로 다리가 덜덜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이미 내가 가르침을 구한다거나, 수양을 쌓고 싶다거나 하는 차원에서 가벼이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내가 관장님에게 배움을 구한다는 것은, 지금껏 내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세계에 정면으로 뛰어드는 것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유정이와의 결혼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 너무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물론 나는 아직 자네라는 사람을 깊이 알지 못하네. 자네의 됨됨이는 어떤지, 또한 내 딸과 어느 정도로 깊은 관계인지, 혹은 자네가 내 딸에 대해 지니고 있는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에 대해서도 아직 잘 모른다네. 하지만 나는 자네를 보는 유정이의 모습에서 느꼈네. 나는 그 아이의 아비이기 때문에 알 수 있어. 분명 내 딸은 자네를 사랑하고 있다네. 그리고 나는 그 마음을 존중해주고 싶네."
"관장님...."
"이런 이야기가 자네에게 큰 무게감을 주리라는 것도 알고, 젊은 사람에게 터무니 없는 부담을 지운다는 것도 알고 있네. 그래서 더더욱 딸을 둔 아비의 입장에서 진솔하게 말하는 것일세. 내가 자네에 대해 충분히 모르는 만큼, 자네가 내게서 가르침을 구한다면 나 또한 자네를 더욱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겠지. 자네가 허락해준다면 나는 우리가 그런 관계가 되었으면 하네."
가슴이 벅차게 느껴질 정도로 과분하게 느껴지는 관장님의 이야기. 나는 다리의 떨림을 멈추지도 못하고 그저 그 분의 눈을 피하지 않기만을 위해 애썼다. 만약 관장님의 이야기를 받아들인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생전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무예를 뒤늦은 나이에 배우고, 관장님의 제자가 되어, 결국엔 유정이와 결혼을 하게 될까?
유정이가 다른 남자와, 그것도 원하지도 않는 결혼을 한다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내가 마음 먹기에 따라서 그녀에게 그런 불행을 안기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나는 마땅히 그리해야 할 것이다. 나 또한 그것을 원하고 있다고 나는 믿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의 문제로만 덥썩 대답하기에는, 이 결정이 너무도 무겁고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자네는 시기가 너무 늦은 만큼, 아마 내게서 가르침을 받는다해도 무예가로서 일정 수준 이상에 오르기는 힘들 걸세. 하지만 자네가 말한대로 자네 마음 속의 짐들을 내려놓는 데에는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걸세. 나는 무술이 상대방을 힘으로 꺾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네. 자네가 심신의 수양으로써 그 과정을 받아들여준다면 나로서도 기쁜 일일세."
"관장님....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게. 충분한 시간을 갖고 고민해보게나. 그리고 고민을 함에 있어서 이 부분을 꼭 생각해주게."
"어떤 부분 말씀입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한국에 오래 머물 수 없네. 자리를 오래 비울 수가 없으니 조만간 일본으로 돌아가게 될 테지. 그리고 머지않아, 적당한 때가 되면 나는 유정이를 일본으로 함께 데려가려고 한다네."
"네?"
나는 또 한 차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말의 의미는 곧....
"딸아이를 홀로 내버려두는 것이 항상 불편했기도 하거니와, 이제는 가문 내에서 점점 압박을 가해오고 있네. 핏줄을 이은 정통한 여식을 가문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외지에 남겨두는 것이 원로들의 눈에도 보기 좋지만은 않았겠지. 여러가지 이유로 유정이를 데려가야만 할 것 같네. 사실 나도 그 편을 바라고 있는 것 같고...."
"그, 그렇다면.... 그게 정확히 언제쯤....?"
"아직 정확하게 결정한 문제는 아닐세. 그 아이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고, 가벼이 다룰 문제는 아니니 족히 몇 달은 걸릴 테지. 아마 그 사이에 나는 잠시 따로 본토에 다녀와야겠지만 말이네."
"몇 달...."
그렇다면, 몇 달 후엔 유정이가 일본으로 떠나버린다는 이야기일까? 그녀가 그렇게 영영 떠나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는 유정이를 볼 수 없게 되어버릴까?
"자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를 자네도 짐작하겠지. 만약 자네가 내 의도를 받아들여줄 수 있다면.... 나와 유정이를 따라서 함께 일본으로 가자고, 나는 지금 자네에게 제안하고 있는 것일세."
"........"
일본....? 일본이라고?
숨이 턱 막혀왔다. 그것은 단순히 사는 곳을 바꾸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학이라는 말 따위로 대체할 수 있는 가벼운 개념도 아니었다. 내가 한국에서 나고 자랐던 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완전히 다른 세계를 향해서 내 한 몸만 가지고 뛰어들 수 있는지를 묻는 문제인 것이다.
"얼굴을 알게 된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런 이야기를 자네에게 한다는 것이 나로서도 정말 황당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네. 이런 크고 무거운 문제를 자네에게 결정하라고 떠민다는 것이 얼마나 경우 없는 행동인지 나도 알고 있다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네에게 이런 이야기를 과감히 건넬 수 있는 이유는....."
관장님은 내 두 눈을 날카롭게 들여다보며 뒷말을 이으셨다. 처음 뵈었을 때, 나의 내면을 속속들이 궤뚫어보는 것처럼 느껴졌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이전에도 분명 내가 자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고, 또한 자네가 내 뜻을 받아들인 적이 이미 수차례 있었던 것만 같은.... 그런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감각을 나는 자네에게서 줄곧 느끼고 있기 때문이야."
"......."
관장님은, 그 순간의 내가 느끼고 있었던 기분과 너무나도 비슷하게 여겨지는 "기이한 감각"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어쩌면 그 때 나와 관장님은 서로 같은 느낌을 공유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정녕 운명이었을까?
"오늘 자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 기뻤네.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으니 이제 그만 내려가세나."
"아, 예...."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조차 나는 쉽게 건넬 수 없었다. 그저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유유자적히 앞서 걷는 관장님의 뒷모습을 따라 묵묵히 걸었을 뿐이었다. 몸은 어느새 많이 가벼워져 있었다....
*
"아버지? 오빠...?"
다시 한옥집으로 내려갔을 때, 유정이가 마당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나는 기쁘기도 했고,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라 괜스레 관장님 앞에서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유정이의 얼굴을 보는 것이 내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활력을 주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가슴이 뛰었다.
"산책을 좀 다녀왔단다."
"아.... 두 분이 같이요?"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던 내가 산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유정이에게도 조금 놀라운 모양이었다. 내가 유정이에게 멋쩍은 웃음을 짓자 유정이도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는데, 그 잔잔한 미소를 보니 문득 어젯밤에 그녀가 내 기억에 새겨놓은 한 마디가 다시금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나요?"
어쩌면 유정이는 이런 일을 예상했던 걸까? 그래서 나에게 그런 약속을 받고 싶었던 걸까? 그녀가 일본으로 떠나가더라도 내가 자신의 곁으로 쫓아와주길 바라면서....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대답을 해버린 것 같은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여느 여자 아이들처럼 그런 불안함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그런 모습으로 돌려 말할 수 밖에 없는 유정이의 처지를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강한 여자아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지만, 새삼 관장님으로부터 유정이가 처한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그녀가 얼마나 답답한 울타리에 갇혀있는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런 사실들을 진작에 알고서, 원하지 않는 상대와 언젠가 결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내내 느끼며 살아왔던 걸까?
그녀가 내게 진작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서운함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기분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유정이가 내게 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너무도 많은 고민과 걱정을 그 작고 여린 몸 속에 담아왔을 유정이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릿해져 왔다.
"무슨 생각해요, 오빠?"
"응? 아, 아니야."
관장님은 산에 올라서 했던 이야기들을 아직까지 유정이에겐 비밀로 하고 싶으신 것 같았다. 나 또한 지금은 구태여 유정이에게 말할 이유가 없겠다는 생각에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러자 유정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나와 관장님을 안채로 이끌었다.
"두 분, 시장하시지 않나요? 점심 드실래요?"
분명 아침을 먹고 산에 올랐던 것 같은데, 산에서 내려오니 벌써 배가 꺼져 있었다. 그만큼 소박하게 아침 식사를 했단 의미일까, 아니면 운동을 많이 했기 때문일까.
"음, 뭐 그러자꾸나."
나는 배가 고프다고 느꼈지만 관장님은 어떠실까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평상에 앉아있으니 유정이가 곧 상을 내어왔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정성들여 한 상 가득 반찬을 준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침 식사와는 다르게, 고기 반찬에서부터 전이나 나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식들이 푸짐하게 차려져있는 상을 보고는 관장님이 껄껄 웃기 시작했다.
"허허허, 이거 내가 성진 군 덕분에 오늘 호강하는구만. 평소 같았으면 이만한 정성은 기대도 못 했을 텐데 말이야. 딸아이가 자네 생각을 해서 특별히 솜씨를 발휘한 것 같군 그래."
"아버지, 그런 말씀은 굳이 안하셔도 돼요."
유정이가 손에 주걱을 든 채로 관장님에게 핀잔 섞인 한 마디를 던졌다. 유정이에겐 실례되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왠지 그 모습에서 너무도 사랑스럽고, 여성적인 매력이 느껴져 나는 숟가락을 들 생각도 못하고 그녀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유정이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의아하면서도 쑥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 그래요?"
"아.... 아니야."
평상 위에서 우리는 같이 밥을 먹었다. 수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어쩐지 너무도 편안하게 들렸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다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정이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좋았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 한옥집의 마당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유정이는 나와 함께 원룸 건물로 돌아오지 않고 모처럼 본가에서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고 했다. 나는 유정이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고, 그녀는 도심에 가까워지자 내가 편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정류장 근처에 나를 내려주었다.
"고마워, 유정아."
"뭐가요?"
"그냥.... 전부 다."
내가 어설프게 웃자 유정이도 애매하게나마 의미를 이해한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나를 본가로 데려갔던 거야?"
곯아떨어진 나를 등에 업고 걸었을 유정이의 모습이 떠올라, 나는 너무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이것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왠지 오빠에게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어요. 그냥 느낌이었지만요. 오빠가 아버지와 이야기를 해보면 뭔가 나아질거라 생각했어요. 그런 제 생각이.... 맞았나요?"
"응.... 맞았어. 새로운 고민이 생겼지만 예전보다는 모든게 나아질 것 같아. 정말 고마워. 그리고...."
나는 어제 유정이가 내게 했던 것처럼, 유정이의 헬멧을 벗기고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정류장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짐짓 괜찮은 척 하려고 애썼다.
"사랑해."
그녀는 굉장히 놀란 것 같았다. 토끼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유정이가 이내 조금은 쑥스럽게 웃으며 뺨을 긁었다.
"나두요."
사귀는 사이가 아닌데도 이런 교감을 나눈다는 것이 가능한 얘기일까? 아니면 우리는 이미 "사귄다"는 표면적인 약속을 넘어서, 지금의 관계 그 자체로 충분한 유대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
오토바이를 타고 멀어져가는 유정이의 뒷모습을 나는 한동안 계속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허공에 너울거리는 것이, 늘 그랬지만 너무도 예뻤다.
"아...."
버스를 타고 원룸 건물 앞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유정이와 함께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물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은, 지금 내가 유정이와 결코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은 유일한 여인이었다.
"서연아...."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서연이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눈가에 찔끔 맺힌 눈물을 훔치며 내게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대체 어딜 갔었던 거야, 이 나쁜 놈아!"
그녀에게서 그런 욕은 또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만큼 화가 났다는 의미일까. 서연이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고사리 같은 손을 꼭 쥐고는 내게 쉴 새 없이 주먹질을 해댔다. 주먹질로도 모자라 발차기까지 날아오자 나는 그녀를 거의 부둥켜 안듯이 달래며 물었다.
"지, 진정해. 왜 그러는 거야?"
"내가 얼마나 연락을 많이 했는데....! 폰은 꺼져있고.... 진짜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훌쩍이며 성을 내는 서연이의 말을 듣고, 휴대폰을 꺼내보니 그제야 전원이 꺼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음이 안쓰러워져 나는 서연이를 말리려고 끌어안았던 팔을 더더욱 힘주었다.
"미안해. 많이 걱정했어?"
"그래, 이 멍청아!"
"그런데 왜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지 않고....? 비밀번호 알잖아?"
"안에 있으니까 더 불안해서 그러지! 언제 올지 알 수도 없고.... 어쩜 그럴 수가 있어? 진짜 너무한거 아니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서연이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내게는 너무도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아버린 것 같았다. 어떤 이유로든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서연이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면서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어르고 달래주었다. 여전히 입을 삐죽 내민 채였긴 하지만,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진심이 통했는지 서연이는 울음을 그쳤다.
"어디 갔었어?"
"이따 얘기해줄게. 일단 들어가자."
은근슬쩍 대답을 회피하며 나는 서연이를 안으로 이끌었다. 서연이를 내 방 침대 위에 앉히고 나니, 온갖 생각이 갑자기 다 들기 시작하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침대 위에서.... 그동안 서연이와 수도 없이 많은 사랑을 나누었다. 처음으로 그녀와 이 침대 위에서 몸을 섞었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오롯하게 서로의 육체만을 탐했던 그 시절의 우리.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향한 마음을 내심 키워가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내가 처음 그녀를 범했던 바로 그 때부터?
마음이란 정말 이상한 것이다. 책장을 분류하는 것처럼 명확하게 구분하여 나눌 수가 없다. 그랬기에 우리는 아마도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온전히 육체의 쾌락만을 나눠갖자고 약속했지만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버렸고, 또한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불과 같이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사랑. 나와 서연이의 사랑은 분명 그랬을 것이다.
"서연아. 나.... 할말이 있어."
그 사랑은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고, 이기심이었을지도 모르고, 또 한편으로는 솔직함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것 하나로 명확하게 정리를 해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난 진작 그러지 못했기에 그녀를 그만큼 힘들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뭔데?"
난 서연이 옆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부끄럽게도 자꾸만 처음 그녀를 이 곳에 눕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
서연이는 내 말을 해석하려고 그리 애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무슨 싱거운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살피더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알아. 나도 자기 사랑해."
"........"
단호하게 마음 먹고 얘기를 꺼낸 건데, 그만 맥이 빠졌다. 나는 약간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아니야."
"뭐?"
질질 끌 수도 없고, 끌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눈 딱 감고,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유정이를 사랑해."
"........"
비로소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지독한 적막을 나는 충분히 예상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고, 만약 후회하게 되더라도 타임 리와인더를 이용해 지금의 이 순간을 돌이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 유정이가, 내가 알고 있는 그 유정이 맞지?"
꽤 오랜 침묵이 이어진 후에, 서연이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차 할 말을 잃은 서연이는 다시금 침묵 속에 빠졌고, 나는 이번에도 잠자코 기다렸다.
내 욕심 때문이었고, 내 잘못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욕도, 벌도, 원망도 겸허히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되도록 마음을 비우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연이의 이어진 말은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응?"
"그래서 어쩌라구.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면 해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한때는 너와 현주를 속이고 유정이를 만날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했었어. 하지만 이제 그런 고민을 하지는 않을거야. 설령 너와 현주를 속일 수 있다고 해도 난 그렇게 못 해."
"현주 씨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더러 한번 더 관용을 베풀어달란 뜻이야? 자기가 한 사람을 더 만날 수 있도록 내가 조금 더 배려를 해달라는....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아니."
나는 그런 식의 사랑이, 자유로운 것이라 믿었다. 오롯하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타인의 가치관과 잣대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세상이 제시하는 도덕의 기준을 벗어나, 내 관념적인 사랑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이루어보려고 객기를 부렸다. 그게 누군가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젠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건 관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얼마나 배려해 줄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나의 울타리 안에서만 우리의 관계를 해석하려 했기 때문에 현주도, 서연이도 결국 힘들어 했던 것이다. 한발짝 물러나서 보면 정말로 어리석은 이야기였다.
"너.... 예전에 우리가 병원 침대 위에서 했던 이야기 기억해? 우리 관계가 남들 눈에는 난잡하고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서로에게 비밀만은 만들지 말자고 했잖아. 언젠가 우리 관계가 변해야 할 순간이 오면 그 때는 누가 되었든 먼저 숨김없이 털어놓자고."
"......."
"그 때 너는 누군가의 육체적인 첫 번째가 될 지언정, 정서적인 두 번째는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었어. 그것도 기억 나?"
"......."
서연이는 일관 된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 네가 어떤 사람을 만나든, 정서적으로도 첫 번째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해. 넌 그럴 만한 사람이니까. 넌.... 너무 좋은 여자니까."
"그래서....?"
날카롭게 따져묻는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난 네가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 너를 위해서...."
"듣기 싫어! 닥쳐!!"
서연이가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백을 집어던졌다.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지른 그녀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절절히 울리기 시작하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지만 난 그녀의 어깨를 안아주지도 못했다. 여기서 그런 행동을 해버린다면 기껏 용기를 낸 것이 모두 무너질 것만 같았다.....
"비겁해.... 너, 넌 정말 나빠.... 결국 지금 나한테 유정이를 만나는걸 이해해달라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너.... 넌 내가 나 말고 다른 여자를 계속해서 만나는걸 참고 이해해줬으면 하는 거잖아. 그래서 지금 괜히 돌려 말하면서 수 쓰는 거지? 그렇지?"
"아니야, 서연아.... 그렇지 않아."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아가며 독기어린 소리를 내뱉는 서연이의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자존심이 강한 서연이로서는 이런 순간에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이는게 싫었겠지만 그녀는 결국 내게 쏟아지는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그녀가 얼마나 서러울지 나는 알고 있었기에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세상 어느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의 애정을 반으로 쪼개가면서까지 곁에 머물고 싶어하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나와 만나기 위해서 그러한 형태의 사랑을 감수했었고, 또한 너무도 헌신적으로 그 문제를 받아들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에게 이별을 고했다. 어쩌면 서연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겪은 이별 중에 이것은 가장 부질없고, 가장 비참하며, 가장 후회되는 이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웠다. 나는 애초에 서연이에게 그만큼 의미있는 사람이 될 자격이 있었을까.
"꺼져! 내 눈 앞에서 사라져! 유정인지 뭔지 그 년에게로 가서 천년만년 둘이 행복하게 만나! 나 따위 걸레 같은 년은 잊고..... 너도 그러고 싶어서 얘기한 거잖아. 어서 가 버려!"
"서연아."
나는 결국 그녀를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주기 위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헤어지더라도 이런 식으로 이별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 또한 욕심일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좋은 이별을 맞이할 수 있을까.
"꺼지라고! 나 더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흐, 흐흑...."
이대로 돌아서주는게 어쩌면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일지도 모르기에, 나는 등을 돌렸다. 하필 이별의 장소로써 고르게 된 자리가 이 곳이라는 점이, 문득 후회가 되었다. 내가 그녀를 위해 사라져주면 그녀는 나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고 나와의 기억이 묻어있는 이 곳에서 홀로 떠나줄 수 있을까.
흐느끼는 서연이를 내버려둔 채, 나는 원룸을 나왔고 건물을 빠져나와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서연이가 떠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침대 위에서 울고 있을 줄 알았던 서연이가, 어느새 달려와 내 등에 와락 달려들었다.
"가지 마!"
"서, 서연아...."
내 등을 끌어안고 매달린 서연이가 아직도 울고 있다는게 피부로 느껴졌다. 눈물을 통해서, 피부의 떨림을 통해서.... 유정이가 나의 슬픔을 읽었듯이 나도 서연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가지 말라고....! 흑... 흐흑... 네, 네가 이렇게 가버리면 나는.... 우리는 이제 어떡하라는 거야?"
"우리.... 라고?"
나는 서연이의 흐느낌 속에서,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지는 한 마디를 끄집어냈다. 아무리 되짚어 생각해도 서연이가 쓴 그 "우리"라는 표현이, 나와 서연이 둘 사이를 가르키는 표현으로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뜻이야?"
"........"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퉁퉁 부어 있는, 눈물 젖은 눈이 보였다. 그토록 아름답고 멋졌던 서연이가 겨우 나 같은 놈 때문에 이렇게 엉망이 되어있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서연이는 내 목을 끌어안은 팔을 풀고는, 여전히 히끅거리며 작은 손 안에 꼭 쥐고 있었던 사진 한 장을 내게 천천히 건네주었다. 온통 검정색 바탕에, 희뿌연 색의 윤곽이 어슴푸레하게 그려져 있는 자그마한 사진이었다.
"서연아, 너...."
순간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고, 받아든 손이 덜덜 떨려왔다. 초음파 투시의 흔적이 남아있는 그 조그만 사진 한 장을 받아든 채로 내가 멍하니 굳어있자, 서연이는 눈물을 억눌러 삼키며 간신히 내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임신.... 했어."
- 다음 화에 계속 -
1부의 마무리가 얼마 남지 않았네요... ^^
쓰기 시작했을 때도 그렇지만, 여전히 많은 분들이 아껴주셔서 가슴 벅차고 감사합니다
좋게 마무리 하고 싶어요
힘을 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47장
다음날 눈을 떴을 때, 나는 문득 누운 자리가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뒤척이며, 나는 어젯밤의 기억을 되짚었다. 풀밭 위에서 유정이와 끌어안고 누워있었던 아늑한 순간이 떠오르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혹시 풀밭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렸던 걸까?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주변의 모습들을 천천히 살펴보고 있자니, 적어도 이곳이 야외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어제 하루동안 수차례의 시간을 되감으면서 나는 휴식을 취하지도, 음식을 먹지도 않았기 때문에 온 몸의 에너지가 모두 고갈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긴 시간 동안 쫄쫄 굶은 배는 이제 배고프다는 감각마저 상실해버린 것 같았고, 주먹 하나 쥐는 것조차 힘들게 느껴질 만큼 내 몸에는 아무런 기운이 없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몸을 지탱해 힘겹게 일어서자, 나는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더욱 궁금해졌다. 누워있었던 곳이 야외가 아닌 실내라는 점 만큼은 알 수 있었지만, 지극히 고풍스럽다 못해 현실감각을 잃게 만드는 그 방의 분위기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벽에는 드문드문 절제된 느낌의 동양화가 몇 점 걸려있었다. 난초를 심은 화분도 하나 보였지만 사람의 손이 꽤 오랫동안 닿지 않았는지 시들해져 있는 느낌이었다. 어찌됐든 밖으로 나가봐야겠단 생각이 들어 비틀대면서도 나는 걸음을 옮겼다.
오늘날에는 좀체 구경하기 힘들 것만 같은 오래된 느낌의 미닫이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일직선으로 쭉 뻗은 나무 복도가 나타났다. 일반 가정집의 구조는 확실히 아니었다. 한 방향으로 곧게 나 있는 복도를 조심스럽게 걸어가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는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관... 장님?"
그 분의 얼굴과 모습, 존재감이 내 뇌리에 너무도 강렬하게 새겨져 있었던 탓일까. 나는 먼발치에서 그 분의 뒷모습만 보고도 유정이 아버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관장님은 사방이 널찍하게 트인 마당의 변두리에 서 계셨다. 청명한 햇살이 마당 안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지금은 메말라있는 것 같지만 작은 연못의 흔적도 보였다. 그것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21세기에 마당이 있는 고풍스런 한옥집이라니.... 기분이 얼떨떨하게 붕 떴지만 나는 일부러 관장님을 부르지 않고 멀리 떨어진 채로 그 분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관장님은 무언가에 집중하고 계신 것 같았다.
어찌보면 유유자적하게 산책을 즐기시는 것 같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명상에 잠겨 계신 것 같기도 했다. 느릿하지만 가벼운 걸음걸이로 마당을 잠시 활보하던 관장님이 나무 그늘 밑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 분이 천천히 팔을 들어올려 나무 몸통에 조용히 손바닥을 대는 것을, 나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아...."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관장님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또는 그 행동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그 순간 나는 감탄을 넘어서 경외에 가까운 기분을 느꼈다.
그 분은 마치 자연 그 자체인 것만 같았다. 마당을 수놓은 갖가지 풍경들 속에서, 한 인간의 존재가 전혀 독립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풍경 속에서 함께 살아 숨쉬는 것처럼 관장님의 모습은 그것에 동화되어 있었다. 그 분의 손길이 닿은 나무가, 한줄기 산들바람이라도 맞은 것처럼 미세하게 흔들렸다.
무슨 이유로 그 모습이 그 정도의 경외심을 자아냈는지는 스스로도 모를 일이다. 그저 관장님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려왔다. 조금은 부끄러움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을 느끼고 서 있으니 관장님이 나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일어났는가, 성진 군?"
"아.... 네, 네."
그러고보니 관장님은 아마 그 날 나를 구해주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다. 시간을 되감아버렸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장님은 마치 하루 전에 만났던 익숙한 사람을 다시 보는 듯이, 평온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반면에 관장님을 대하는 나는 어쩐지 민망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여 연신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과, 관장님. 여기는....?"
"이 곳은 내 집일세.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가족이 원래 살던 집이지. 유정이가 어릴 때만 해도 가족 모두 이곳에서 함께 살았지만 지금은 자네도 알다시피 서로 떨어져 지낸지 꽤 오래 되었다네. 예전에 길렀던 것들이 꽤 많이 죽거나 사라져버려서 안타깝군."
"그렇군요.... 그, 그런데 제가 왜 여기에?"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겐가? 어젯밤에 정신을 잃은 자네를 딸아이가 등에 업고 들어왔는데 말이야."
"네에?"
놀라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순간 혼란스러웠다. 관장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어제 풀밭에서 잠이 든 나를 유정이가 본가로 데려왔다는 걸까? 그... 그것도 등에 업고?
"오밤중에 유정이가 외간 남자를 업고 들어와서 나도 무척이나 놀랐지만 그보다는 자네 몸의 기력이 많이 쇠한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네. 다행히 깊은 잠에 빠진 것 뿐이라 편히 잘 수 있도록 내가 침을 좀 놓긴 했네만.... 그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더군. 딸아이는 원체 성격이 그렇지만 제대로 설명을 해주지 않거든."
그러고보니 몸을 움직이는 것이 어제보다는 더 수월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는데, 관장님이 손을 썼기 때문일까. 하지만 거기에 감사를 표하기보다도, 나도 모르는 사이 너무도 큰 결례를 저질러버린 것 같아 나는 극도로 조심스러워졌다.
"죄, 죄송합니다 관장님.... 제가 너무 피곤했나 봅니다."
"흠, 그런가? 자네 몸의 기운이 지금 너무 탁한데."
사과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실 내가 관장님께 감히 진실을 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설령 관장님이 아니라해도, 어떻게 딸을 둔 아버지의 면전에 대고 "어제 따님과 낯부끄러운 일을 하다 그만 잠이 들어버렸습니다."하고 곧이 곧대로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렴 관장님이 나 같은 사람을 상대로 폭력을 쓰시진 않겠지만, 만약 그렇게 실토했다간 왠지 눈 깜짝할 사이에 사지가 해체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아마 유정이도 비슷한 이유로 설명을 하지 못한 것이리라. 왜 유정이는 우리가 지내고 있는 원룸이 아닌 그녀의 본가로 나를 데려온 걸까?
"저, 그게...."
머뭇거리는 내 눈치를 다행히 관장님은 헤아려 주신 것 같았다. 그 분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자 나도 따라서 걷게 되었다.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으신 걸로 봐서는 내게 모종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은연 중에 짐작하신 것 같기도 했다. 다행스런 일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감사한 일이었다.
한옥집에, 그것도 사람이 지내고 있는 한옥집에 방문해 본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아마 추측컨대 관장님이 들어선 곳은 안채에 해당하는 공간인 것 같았다. 그 곳에서 관장님은 손수 뭔가를 부지런히 준비하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소박하게 차려진 밥상을 내 앞에 내어오셨다.
"우선 식사나 들고나서 이야기하지. 자네 몸의 기력이 너무 쇠했어. 위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한 음식을 준비했으니 반찬이 소박하더라도 이해하게."
"아니... 가, 감사합니다. 재워주신 것으로도 모자라서....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 지."
황송함에 내가 어쩔 줄을 몰라하자 관장님은 또다시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평상 위에 앉아서, 나는 관장님과 마주보고 식사를 했다. 유정이의 아버지 되는 분과 마주앉아 식사를 한다는 것이 못내 불편하게 여겨질 법도 했고, 또 오랜 시간 음식물을 받아들이지 못한 위가 부담을 느낄 만도 했으련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도를 넘어가는 음식들이 무척 부드럽게 느껴져 생각보다는 편하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만큼 배가 고팠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관장님은 상을 치우고는 정갈한 빛깔이 나는 차를 내어오셨다. 나는 뭐라도 돕고 싶었지만 부엌이 정확히 어딘지조차 알 수가 없었기에 앉은 자리에서 진땀만 흘릴 뿐이었다.
관장님이 주신 차를 한 모금씩 천천히 들이키니 어쩐지 속이 따뜻해지면서 머릿속이 맑게 개었다. 차를 마시면서 나는 유정이가 어릴 적에 살았던, 그리고 나와 같은 원룸 건물에 살기 전까지 있었던 그녀의 본가를 이모저모 살펴볼 수 있었다.
그 넓은 집을 한번 둘러보고 나서 처음으로 들었던 감상은.... 유정이가 그동안 많이 외로웠겠다는 생각이었다. 이 넓디 넓은 집에서 여자애 홀로 지내면서, 얼마나 가족의 품이 그리웠을까? 유정이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나는 그제야 조심스레 입을 열어 관장님께 물었다.
"저... 관장님, 그런데 유정이는 어디 있습니까?"
"아, 내가 잠시 심부름을 시킨 일이 있네. 딸아이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그동안 소화도 할 겸 산책이나 함께 한바퀴 하지 않겠나?"
관장님은 바깥으로 나설 채비를 하고 계신 듯 했다. 여전히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서둘러 관장님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정이 없이 관장님과 둘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 특별한 시간 동안, 나는 그 분과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바깥으로 나온 관장님은, 앞장서서 산길을 걷기 시작하셨다. 밖으로 나오고 나서 나는 이곳이 도심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걸 새삼스럽게 인식할 수 있었다. 그 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닌 것 같았지만, 아침 산책 삼아 걷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군소리 않고 묵묵히 관장님의 뒤를 따라 걸었다.
"헉.... 허억.... 헥...."
점점 관장님의 등을 따라가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 분의 뒷모습을 쫓아가려 무던히 애쓰면서 나는 내가 평소에 얼마나 운동부족이었는지를 실감했다. 나와는 다르게 말그대로 산책을 나온 듯한 모습의 관장님은, 유유자적한 걸음을 옮기다가도 내가 많이 뒤처진다 싶으면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려주셨다. 어쩐지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허허, 괜찮은가?"
"아... 예. 부끄럽습니다."
"앞장 서 보게."
"예?"
길도 제대로 모르는 나를 관장님은 앞에다 세우셨다. 내가 앞장서서 정처없이 그저 위를 향해 걸어올라가자, 관장님이 내 등에 조용히 손바닥을 얹었다. 그러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등에 손바닥이 닿았을 뿐인데 몸에 없던 활기가 생겼고, 삐걱거렸던 전신의 근육들이 제자리를 찾아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왠지 그러고 있으니, 관장님이 손바닥 하나로 나를 제어하기라도 하는 듯 나는 자연스레 그 분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갈림길에서도 나는 별 어려움 없이 관장님이 살짝 밀기만 하는 대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그렇게 산길을 오르다보니 언제부터인가 고요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 거의 다 온 것 같군 그래."
잔잔하게 물이 흐르는 곳이 눈 앞에 나타나자 나는 깜짝 놀랐다. 그곳은 계곡이라기보단 차라리 호수에 가까운 곳이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수면이 녹색 풍경들을 맑게 비추었다. 싱그러운 바람에 고개를 흔드는 풀과 나뭇잎 소리도 귓전을 간지럽혔다. 정갈한 자연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경치가 아닐 수 없었다.
"산의 정기가 모이는 곳에는 물이 흐르기 마련이지. 폭포가 흐르는 계곡이라 하면 요새는 대개 더위를 피하기 위한 휴양지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산 속에 흐르는 물은 생각보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네."
"아.... 예."
"자네는 지금 너무 탁한 기운을 몸에 담고 있네. 조금이라도 맑은 공기를 마시고 탁한 것들을 비워보려고 애써 보게. 그런 기운을 몸에 품은 채 살아간다면 아마 틀림없이 스스로 화를 입을 게야."
관장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관장님이 얼마만큼 내 속을 깊이 들여다보았는지는 몰라도, 지금 내 마음 속에 켜켜이 맺혀 있는 이 분노의 덩어리들이 나를 괴물로 만들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나는 어제 정말로 사람을 죽였을까? 그 피 냄새가 여전히 손에 배어있어 관장님도 그것을 알아보시는 걸까? 실은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점은, 그런 극한의 시간을 거치고 나서도 내게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 복수가 내게 남긴 것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아니, 애초에 그것이 복수이긴 했었나?
"저.... 관장님."
"말해보게."
관장님은 그저 풍경을 감상하듯이 뒷짐을 지고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계셨지만, 그 분이 내가 스스로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뭐라고 표현을 해야 좋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솔직한 마음으로 전했다.
"관장님께 여러가지를 배우고 싶습니다. 저를 가르쳐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가르침이라고? 그건 무예에 대한 이야기인가?"
나는 생각했다. 그 지옥 같았던 최악의 상황에서, 고작해야 마음 속으로 유정이에게 기댈 수 밖에 없었던 나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위험한 곳으로 그녀가 나를 구하러 오는 것 만이 유일한 구원이라고 여겼던 그 용서할 수 없는 나약함에 대해서 생각했다....
"저, 저는.... 제 한 몸을 스스로 지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강인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좀체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군.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라도 있는 겐가?"
"소중한 사람이 너무도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다른 이들까지도 그렇게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순전히 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육체의 강함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제게는 마음을 강건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저는 무예를 갈고 닦는 것이나, 심신을 수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저를 이끌어 줄 수 있는 분이 관장님 외엔 달리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관장님은 나를 구원해주었던 그 순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끔찍했던 경험은 내 몸과 마음에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지만, 그와 더불어 관장님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어떤 필연에 의해서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인지를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그 분은 결코 평범한 분이 아니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맥을 이어내려 온 고무술의 권위자이셨고, 분명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청년이 아니더라도 이미 수없이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계실 무예 가문의 책임자이셨다.
그런 그 분에게 감히 함부로 가르침을 구한다는 것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정도를 넘어서 일견 무례함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비록 무술이나 전통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나였지만 그 정도는 굳이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무모한 질문을 던진 것은, 결코 타임 리와인더의 기능에 의지했다거나 하는 비겁함의 발로는 아니었다. 유정이를 위험에 빠뜨릴 뻔 했던 그 순간의 자기혐오를 나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일을 겪고서도 여전히 복수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나 자신의 나약함을 견딜 수 없었다.
"흠...."
관장님은 꽤 오랫동안 말씀이 없었다.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볼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쯤, 비로소 관장님이 말문을 여셨다.
"딸아이에게서 내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
"유정이의.... 어머님 말씀이십니까?"
관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유정이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도 내가 가문의 데릴사위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겠군."
이번엔 내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유정이가 나를 구해주었던, 평생을 가도 잊을 수 없는 계곡에서의 그 날 밤, 그녀가 직접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였다. 나는 관장님이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잠자코 그 분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지금은 나와 아내의 관계가 예전에 비해 다소 좋아지긴 했지만, 실은 그 전까지 나와 아내는 조금 어색하리만치 사이가 좋지 않았네. 그나마도 딸아이가 우리 사이에 있어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가족이라 불릴 수 있었겠지만 돌이켜보면 우린 부부로서의 유대나 사랑을 썩 깊이 나누진 못했지."
"........"
"당연한 일일세. 우린 서로 사랑했던 사이가 아니었어. 내 장인어른, 그러니까 전대 당주님 되시는 분께선 젊었을 적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셨을 때부터 내 자질을 눈여겨 보고 계셨네. 그 분께선 나에게 당주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하셨지. 그 과정으로 생각하셨던게 바로 결혼이었네. 당신의 여식과 나를 이어주는 것으로, 나로 하여금 후대를 계승할 수 있는 당위성을 갖게 만드셨지. 심지어 나는 당주의 자리를 이어받겠노라고 결정한 다음에야 일본으로 건너가서 지금의 아내를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지.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서로의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네."
마치 머나먼 옛 시절의 이야기를 다룬 사극이나, 중세시대 풍의 영화 속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였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의 정략결혼이라니.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쉽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유정이에게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이렇게 관장님의 입을 통해서 직접 듣게 되니 그 느낌이 많이 달랐다.
"고리타분한 구시대적 관습으로 여겨지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로 치부되기도 한다네. 심지어 그건 지금도 그렇지. 집단과 집단을 이어줄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결혼이라는 것은 여전히 그런 식으로 이용되곤 한다네. 내가 자네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겠나?"
"자, 잘 모르겠습니다."
관장님은 지극히 쓸쓸한 눈빛으로, 호수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어 나를 보셨다.
"유정이에겐 이미 내정되어 있는 약혼자가 있네."
"네에?"
마치 머릿속에 벼락 한 줄기가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져,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고 관장님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정되어 있는 약혼자라기보다는, 내정되어 있는 "가문"의 자제이겠지. 적당한 표현이 없어서 내정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아마 유정이는 그 약혼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본 기억이 없을 게야. 하지만 내가 아내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을 때부터 그것은 은연 중에 예정되어 왔던 일이었네."
"그, 그런...."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숭상하고 있는 "무신류"라는 무예는 그 뿌리가 본디 일본 본토의 것일세. 하지만 장인께서는 본토의 수많은 실력자들을 제치고 한국 땅에서 태어난 나를 후계자로 지목하셨지. 그 당시에 가문 내에서 얼마나 많은 반발이 있었을지 자네도 조금 쯤은 예상이 될 게야. 그들은 반드시 다음 당주를 본토 유파의 실력자들 가운데에서 찾으려 할 걸세. 비록 내게 뒤늦게 아들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그 반발은 끊임없이 계속될 게야."
"그, 그게 유정이의 약혼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유파 인물을 당주로 추대하고 싶어하지만, 그 와중에도 계승하는 과정에서의 정당성을 얻어야만 하네. 비록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긴 하지만 나는 엄연한 20대 당주이고, 어떤 형태로든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후대 계승은 이루어질 수 없어. 그래서 그들은 딸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일찌감치 내 여식을 그 수단으로써 눈여겨 보고 있었던 거야. 내가 전대 당주님의 여식과 혼인을 함으로써 당주 자리를 물려받은 것처럼 말일세. 그들은 자신들 가문의 인물을 내 딸인 유정이와 연결함으로써 당위성을 확보하려 하는 게지."
"그렇다면.... 외람된 말씀이지만, 관장님께서 그것을 거부하면 되는 문제가 아닙니까?"
"난 그렇게 할 수 없네, 성진 군."
"어, 어째서죠?"
이러한 부분이 감히 내가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무겁고도 중요한 사안이라는 사실을 나는 물론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묻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유정이가 다른 남자와, 그것도 정략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 내가 어떻게 침착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관장님은 내 무례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말을 이으셨다.
"왜냐하면 지금의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네. 자네의 눈으로 보기엔 원하지도 않는 상대와 결혼을 함으로써 자리를 이어받는 이러한 세습의 과정이 지극히 비인간적이고 잔인하게 여겨지겠지.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히 판단할 문제만은 아닐세. 천 년을 넘게 계승되어 온 뿌리 깊은 무(武)의 맥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너무도 거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네. 그 앞에서 한 개인의 의지나 행복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지. 나는 비록 가문의 책임자이지만, 이 거대한 가문의 뿌리는 나 혼자서 이어나가는 것이 아닐세. 원로들은 본토 유파의 실력자가 내 딸과 맺어지기를 바라고, 나는 그들의 그러한 요구를 "내 딸의 행복을 바란다"는 이유만으로 가벼이 묵살할 수가 없네. 누가 뭐래도 나는 당주이기 때문일세...."
"........"
미칠 듯이 속이 답답해졌지만, 나는 그 이상 감히 함부로 관장님께 따져묻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를 하며 괴로워하는 관장님의 마음이 내게도 너무 절절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관장님은 분명 유정이를 정말로 아끼고 사랑하고 계셨지만, 당신에게 주어진 자리의 무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딸의 행복을 외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그 잔혹한 압박감으로부터 오랜 세월 시달려오신 것이었다.
관장님 또한 그런 결혼의 과정을 거쳐 지금의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유정이만큼은 진정으로 그녀가 원하는 상대와 맺어져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리라. 딸아이가 여성으로서의 행복을 누리며 살길 누구보다 원했던 관장님이셨다. 허나 그 간절한 바람도 무색하게 만들 만큼 가문의 문제라는 것은 그 의미가 너무도 무거운 모양이었다.
"실은 내가 유정이를 한국땅에서 키웠던 것에도 그런 이유가 있다네. 훗날이 어찌될지는 모르지만 그 아이가 가문이니 계승이니 하는 문제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서 그 아이만의 삶을 살길 원했지. 하지만 아내의 바람은 그렇지 않았어. 나는 이제와서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아내의 그런 부분은 조금 안타깝다네."
"그, 그러면 관장님은.... 언젠가는 결국 유정이를 얼굴도 모르는 가문의 남자와 결혼시킬 생각이십니까?"
부끄럽게도 나는 떨림을 숨기지 못하고, 내 마음 속에서 줄곧 떠올랐던 가장 중요한 질문을 결국 관장님께 던졌다. 관장님은 나를 마주보던 시선을 다시 물 위로 옮겼다. 잠자코 그렇게 수면 위를 응시하던 관장님은, 또 한번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셨다.
"그럼 아까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자네는 내 제자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네. 그것이 무예에 관한 것이든, 수양에 관한 것이든 말일세.... 내 말이 맞나?"
"......."
대답을 듣지 못해 답답했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 이야기로 돌아온 것이, 관장님이 꺼냈던 이야기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실은 자네가 그런 이야기를 해줘서 내심으로 조금 반가운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네."
"예? 어... 어째서입니까?"
"딸아이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피하기 위한 방법은 한 가지 뿐일세. 다음 후계자를 가리기 위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떠오르기 전에 유정이가 먼저 혼례를 올려버린다면 그들은 더이상 내 딸과의 혼인을 주장할 수 없게 되지 않겠나. 하지만 자네도 짐작했다시피 여기에는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네."
"그게 혹시....?"
"그렇네. 그런 식으로 유정이가 혼인을 올리기 위해서는 뒤집을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필요해. 그 혼인의 상대가 반드시 유파의 인물이어야만 한다는 점이지. 가문의 뿌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외부인을 데려다 갑자기 결혼을 시키겠다고 말해도 원로들은 절대 수긍하지 않을게야. 나는 아비된 입장에서 유정이가 진정 원하는 상대를 찾아서 맺어지길 언제나 원해왔지만, 관습에 매어있는 가문의 인물들은 절대 그걸 허용하지 않을 거란 이야기일세. 그들의 입장에서 보기에 유정이는 한 명의 여성이라기보단, 후대 계승의 실권을 쥐고 있는 중요한 열쇠나 다름이 없으니까.... 내 이야기를 이해하겠나?"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가문 내에서 유정이의 존재란, 후계자의 자리를 노리는 이들의 가장 중요한 쟁점일 수 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그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여인이, 고작해야 외부에서 굴러들어온 어중이떠중이와 맺어지는 것을 그들은 결코 용납하지 못하리라. 그것은 곧 후계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혼인의 상대가 유파의 인물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져.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어찌됐든 같은 뿌리 내에서 이루어진 혼례사를 뒤집어가면서까지 정략결혼을 주장할 수는 없다는 말이네. 그들의 속내야 어찌되었든 간에, 표면적으로 더이상 그들은 내 딸을 이용할 수 없게 되겠지. 그러니까.... 내 말의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기분이 들지만 말일세, 자네가 만약 내 딸과 이어져야 한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자네에게 반드시 "자격"을 부여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라네."
"그, 그 자격이라는게 설마.... 관장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까?"
"바로 그렇네. 자네는 좀체 실감하기 어렵겠지만, 나를 사사(師事)한다는 것은 가문 내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일세. 그렇게만 된다면 자네는 명실상부한 내 제자가 되는 동시에 유파의 인물로써 충분한 자격을 갖추게 되겠지."
이미 내 상식과 세계를 한참 벗어나버린 이야기에, 나는 절로 다리가 덜덜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이미 내가 가르침을 구한다거나, 수양을 쌓고 싶다거나 하는 차원에서 가벼이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내가 관장님에게 배움을 구한다는 것은, 지금껏 내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세계에 정면으로 뛰어드는 것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유정이와의 결혼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 너무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물론 나는 아직 자네라는 사람을 깊이 알지 못하네. 자네의 됨됨이는 어떤지, 또한 내 딸과 어느 정도로 깊은 관계인지, 혹은 자네가 내 딸에 대해 지니고 있는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에 대해서도 아직 잘 모른다네. 하지만 나는 자네를 보는 유정이의 모습에서 느꼈네. 나는 그 아이의 아비이기 때문에 알 수 있어. 분명 내 딸은 자네를 사랑하고 있다네. 그리고 나는 그 마음을 존중해주고 싶네."
"관장님...."
"이런 이야기가 자네에게 큰 무게감을 주리라는 것도 알고, 젊은 사람에게 터무니 없는 부담을 지운다는 것도 알고 있네. 그래서 더더욱 딸을 둔 아비의 입장에서 진솔하게 말하는 것일세. 내가 자네에 대해 충분히 모르는 만큼, 자네가 내게서 가르침을 구한다면 나 또한 자네를 더욱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겠지. 자네가 허락해준다면 나는 우리가 그런 관계가 되었으면 하네."
가슴이 벅차게 느껴질 정도로 과분하게 느껴지는 관장님의 이야기. 나는 다리의 떨림을 멈추지도 못하고 그저 그 분의 눈을 피하지 않기만을 위해 애썼다. 만약 관장님의 이야기를 받아들인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생전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무예를 뒤늦은 나이에 배우고, 관장님의 제자가 되어, 결국엔 유정이와 결혼을 하게 될까?
유정이가 다른 남자와, 그것도 원하지도 않는 결혼을 한다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내가 마음 먹기에 따라서 그녀에게 그런 불행을 안기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나는 마땅히 그리해야 할 것이다. 나 또한 그것을 원하고 있다고 나는 믿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의 문제로만 덥썩 대답하기에는, 이 결정이 너무도 무겁고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자네는 시기가 너무 늦은 만큼, 아마 내게서 가르침을 받는다해도 무예가로서 일정 수준 이상에 오르기는 힘들 걸세. 하지만 자네가 말한대로 자네 마음 속의 짐들을 내려놓는 데에는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걸세. 나는 무술이 상대방을 힘으로 꺾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네. 자네가 심신의 수양으로써 그 과정을 받아들여준다면 나로서도 기쁜 일일세."
"관장님....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게. 충분한 시간을 갖고 고민해보게나. 그리고 고민을 함에 있어서 이 부분을 꼭 생각해주게."
"어떤 부분 말씀입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한국에 오래 머물 수 없네. 자리를 오래 비울 수가 없으니 조만간 일본으로 돌아가게 될 테지. 그리고 머지않아, 적당한 때가 되면 나는 유정이를 일본으로 함께 데려가려고 한다네."
"네?"
나는 또 한 차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말의 의미는 곧....
"딸아이를 홀로 내버려두는 것이 항상 불편했기도 하거니와, 이제는 가문 내에서 점점 압박을 가해오고 있네. 핏줄을 이은 정통한 여식을 가문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외지에 남겨두는 것이 원로들의 눈에도 보기 좋지만은 않았겠지. 여러가지 이유로 유정이를 데려가야만 할 것 같네. 사실 나도 그 편을 바라고 있는 것 같고...."
"그, 그렇다면.... 그게 정확히 언제쯤....?"
"아직 정확하게 결정한 문제는 아닐세. 그 아이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고, 가벼이 다룰 문제는 아니니 족히 몇 달은 걸릴 테지. 아마 그 사이에 나는 잠시 따로 본토에 다녀와야겠지만 말이네."
"몇 달...."
그렇다면, 몇 달 후엔 유정이가 일본으로 떠나버린다는 이야기일까? 그녀가 그렇게 영영 떠나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는 유정이를 볼 수 없게 되어버릴까?
"자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를 자네도 짐작하겠지. 만약 자네가 내 의도를 받아들여줄 수 있다면.... 나와 유정이를 따라서 함께 일본으로 가자고, 나는 지금 자네에게 제안하고 있는 것일세."
"........"
일본....? 일본이라고?
숨이 턱 막혀왔다. 그것은 단순히 사는 곳을 바꾸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학이라는 말 따위로 대체할 수 있는 가벼운 개념도 아니었다. 내가 한국에서 나고 자랐던 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완전히 다른 세계를 향해서 내 한 몸만 가지고 뛰어들 수 있는지를 묻는 문제인 것이다.
"얼굴을 알게 된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런 이야기를 자네에게 한다는 것이 나로서도 정말 황당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네. 이런 크고 무거운 문제를 자네에게 결정하라고 떠민다는 것이 얼마나 경우 없는 행동인지 나도 알고 있다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네에게 이런 이야기를 과감히 건넬 수 있는 이유는....."
관장님은 내 두 눈을 날카롭게 들여다보며 뒷말을 이으셨다. 처음 뵈었을 때, 나의 내면을 속속들이 궤뚫어보는 것처럼 느껴졌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이전에도 분명 내가 자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고, 또한 자네가 내 뜻을 받아들인 적이 이미 수차례 있었던 것만 같은.... 그런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감각을 나는 자네에게서 줄곧 느끼고 있기 때문이야."
"......."
관장님은, 그 순간의 내가 느끼고 있었던 기분과 너무나도 비슷하게 여겨지는 "기이한 감각"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어쩌면 그 때 나와 관장님은 서로 같은 느낌을 공유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정녕 운명이었을까?
"오늘 자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 기뻤네.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으니 이제 그만 내려가세나."
"아, 예...."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조차 나는 쉽게 건넬 수 없었다. 그저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유유자적히 앞서 걷는 관장님의 뒷모습을 따라 묵묵히 걸었을 뿐이었다. 몸은 어느새 많이 가벼워져 있었다....
*
"아버지? 오빠...?"
다시 한옥집으로 내려갔을 때, 유정이가 마당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나는 기쁘기도 했고,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라 괜스레 관장님 앞에서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유정이의 얼굴을 보는 것이 내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활력을 주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가슴이 뛰었다.
"산책을 좀 다녀왔단다."
"아.... 두 분이 같이요?"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던 내가 산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유정이에게도 조금 놀라운 모양이었다. 내가 유정이에게 멋쩍은 웃음을 짓자 유정이도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는데, 그 잔잔한 미소를 보니 문득 어젯밤에 그녀가 내 기억에 새겨놓은 한 마디가 다시금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나요?"
어쩌면 유정이는 이런 일을 예상했던 걸까? 그래서 나에게 그런 약속을 받고 싶었던 걸까? 그녀가 일본으로 떠나가더라도 내가 자신의 곁으로 쫓아와주길 바라면서....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대답을 해버린 것 같은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여느 여자 아이들처럼 그런 불안함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그런 모습으로 돌려 말할 수 밖에 없는 유정이의 처지를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강한 여자아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지만, 새삼 관장님으로부터 유정이가 처한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그녀가 얼마나 답답한 울타리에 갇혀있는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런 사실들을 진작에 알고서, 원하지 않는 상대와 언젠가 결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내내 느끼며 살아왔던 걸까?
그녀가 내게 진작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서운함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기분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유정이가 내게 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너무도 많은 고민과 걱정을 그 작고 여린 몸 속에 담아왔을 유정이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릿해져 왔다.
"무슨 생각해요, 오빠?"
"응? 아, 아니야."
관장님은 산에 올라서 했던 이야기들을 아직까지 유정이에겐 비밀로 하고 싶으신 것 같았다. 나 또한 지금은 구태여 유정이에게 말할 이유가 없겠다는 생각에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러자 유정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나와 관장님을 안채로 이끌었다.
"두 분, 시장하시지 않나요? 점심 드실래요?"
분명 아침을 먹고 산에 올랐던 것 같은데, 산에서 내려오니 벌써 배가 꺼져 있었다. 그만큼 소박하게 아침 식사를 했단 의미일까, 아니면 운동을 많이 했기 때문일까.
"음, 뭐 그러자꾸나."
나는 배가 고프다고 느꼈지만 관장님은 어떠실까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평상에 앉아있으니 유정이가 곧 상을 내어왔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정성들여 한 상 가득 반찬을 준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침 식사와는 다르게, 고기 반찬에서부터 전이나 나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식들이 푸짐하게 차려져있는 상을 보고는 관장님이 껄껄 웃기 시작했다.
"허허허, 이거 내가 성진 군 덕분에 오늘 호강하는구만. 평소 같았으면 이만한 정성은 기대도 못 했을 텐데 말이야. 딸아이가 자네 생각을 해서 특별히 솜씨를 발휘한 것 같군 그래."
"아버지, 그런 말씀은 굳이 안하셔도 돼요."
유정이가 손에 주걱을 든 채로 관장님에게 핀잔 섞인 한 마디를 던졌다. 유정이에겐 실례되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왠지 그 모습에서 너무도 사랑스럽고, 여성적인 매력이 느껴져 나는 숟가락을 들 생각도 못하고 그녀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유정이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의아하면서도 쑥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 그래요?"
"아.... 아니야."
평상 위에서 우리는 같이 밥을 먹었다. 수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어쩐지 너무도 편안하게 들렸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다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정이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좋았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 한옥집의 마당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유정이는 나와 함께 원룸 건물로 돌아오지 않고 모처럼 본가에서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고 했다. 나는 유정이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고, 그녀는 도심에 가까워지자 내가 편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정류장 근처에 나를 내려주었다.
"고마워, 유정아."
"뭐가요?"
"그냥.... 전부 다."
내가 어설프게 웃자 유정이도 애매하게나마 의미를 이해한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나를 본가로 데려갔던 거야?"
곯아떨어진 나를 등에 업고 걸었을 유정이의 모습이 떠올라, 나는 너무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이것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왠지 오빠에게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어요. 그냥 느낌이었지만요. 오빠가 아버지와 이야기를 해보면 뭔가 나아질거라 생각했어요. 그런 제 생각이.... 맞았나요?"
"응.... 맞았어. 새로운 고민이 생겼지만 예전보다는 모든게 나아질 것 같아. 정말 고마워. 그리고...."
나는 어제 유정이가 내게 했던 것처럼, 유정이의 헬멧을 벗기고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정류장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짐짓 괜찮은 척 하려고 애썼다.
"사랑해."
그녀는 굉장히 놀란 것 같았다. 토끼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유정이가 이내 조금은 쑥스럽게 웃으며 뺨을 긁었다.
"나두요."
사귀는 사이가 아닌데도 이런 교감을 나눈다는 것이 가능한 얘기일까? 아니면 우리는 이미 "사귄다"는 표면적인 약속을 넘어서, 지금의 관계 그 자체로 충분한 유대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
오토바이를 타고 멀어져가는 유정이의 뒷모습을 나는 한동안 계속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허공에 너울거리는 것이, 늘 그랬지만 너무도 예뻤다.
"아...."
버스를 타고 원룸 건물 앞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유정이와 함께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물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은, 지금 내가 유정이와 결코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은 유일한 여인이었다.
"서연아...."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서연이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눈가에 찔끔 맺힌 눈물을 훔치며 내게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대체 어딜 갔었던 거야, 이 나쁜 놈아!"
그녀에게서 그런 욕은 또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만큼 화가 났다는 의미일까. 서연이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고사리 같은 손을 꼭 쥐고는 내게 쉴 새 없이 주먹질을 해댔다. 주먹질로도 모자라 발차기까지 날아오자 나는 그녀를 거의 부둥켜 안듯이 달래며 물었다.
"지, 진정해. 왜 그러는 거야?"
"내가 얼마나 연락을 많이 했는데....! 폰은 꺼져있고.... 진짜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훌쩍이며 성을 내는 서연이의 말을 듣고, 휴대폰을 꺼내보니 그제야 전원이 꺼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음이 안쓰러워져 나는 서연이를 말리려고 끌어안았던 팔을 더더욱 힘주었다.
"미안해. 많이 걱정했어?"
"그래, 이 멍청아!"
"그런데 왜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지 않고....? 비밀번호 알잖아?"
"안에 있으니까 더 불안해서 그러지! 언제 올지 알 수도 없고.... 어쩜 그럴 수가 있어? 진짜 너무한거 아니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서연이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내게는 너무도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아버린 것 같았다. 어떤 이유로든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서연이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면서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어르고 달래주었다. 여전히 입을 삐죽 내민 채였긴 하지만,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진심이 통했는지 서연이는 울음을 그쳤다.
"어디 갔었어?"
"이따 얘기해줄게. 일단 들어가자."
은근슬쩍 대답을 회피하며 나는 서연이를 안으로 이끌었다. 서연이를 내 방 침대 위에 앉히고 나니, 온갖 생각이 갑자기 다 들기 시작하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침대 위에서.... 그동안 서연이와 수도 없이 많은 사랑을 나누었다. 처음으로 그녀와 이 침대 위에서 몸을 섞었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오롯하게 서로의 육체만을 탐했던 그 시절의 우리.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향한 마음을 내심 키워가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내가 처음 그녀를 범했던 바로 그 때부터?
마음이란 정말 이상한 것이다. 책장을 분류하는 것처럼 명확하게 구분하여 나눌 수가 없다. 그랬기에 우리는 아마도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온전히 육체의 쾌락만을 나눠갖자고 약속했지만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버렸고, 또한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불과 같이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사랑. 나와 서연이의 사랑은 분명 그랬을 것이다.
"서연아. 나.... 할말이 있어."
그 사랑은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고, 이기심이었을지도 모르고, 또 한편으로는 솔직함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것 하나로 명확하게 정리를 해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난 진작 그러지 못했기에 그녀를 그만큼 힘들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뭔데?"
난 서연이 옆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부끄럽게도 자꾸만 처음 그녀를 이 곳에 눕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
서연이는 내 말을 해석하려고 그리 애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무슨 싱거운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살피더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알아. 나도 자기 사랑해."
"........"
단호하게 마음 먹고 얘기를 꺼낸 건데, 그만 맥이 빠졌다. 나는 약간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아니야."
"뭐?"
질질 끌 수도 없고, 끌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눈 딱 감고,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유정이를 사랑해."
"........"
비로소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지독한 적막을 나는 충분히 예상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고, 만약 후회하게 되더라도 타임 리와인더를 이용해 지금의 이 순간을 돌이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 유정이가, 내가 알고 있는 그 유정이 맞지?"
꽤 오랜 침묵이 이어진 후에, 서연이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차 할 말을 잃은 서연이는 다시금 침묵 속에 빠졌고, 나는 이번에도 잠자코 기다렸다.
내 욕심 때문이었고, 내 잘못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욕도, 벌도, 원망도 겸허히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되도록 마음을 비우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연이의 이어진 말은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응?"
"그래서 어쩌라구.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면 해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한때는 너와 현주를 속이고 유정이를 만날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했었어. 하지만 이제 그런 고민을 하지는 않을거야. 설령 너와 현주를 속일 수 있다고 해도 난 그렇게 못 해."
"현주 씨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더러 한번 더 관용을 베풀어달란 뜻이야? 자기가 한 사람을 더 만날 수 있도록 내가 조금 더 배려를 해달라는....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아니."
나는 그런 식의 사랑이, 자유로운 것이라 믿었다. 오롯하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타인의 가치관과 잣대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세상이 제시하는 도덕의 기준을 벗어나, 내 관념적인 사랑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이루어보려고 객기를 부렸다. 그게 누군가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젠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건 관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얼마나 배려해 줄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나의 울타리 안에서만 우리의 관계를 해석하려 했기 때문에 현주도, 서연이도 결국 힘들어 했던 것이다. 한발짝 물러나서 보면 정말로 어리석은 이야기였다.
"너.... 예전에 우리가 병원 침대 위에서 했던 이야기 기억해? 우리 관계가 남들 눈에는 난잡하고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서로에게 비밀만은 만들지 말자고 했잖아. 언젠가 우리 관계가 변해야 할 순간이 오면 그 때는 누가 되었든 먼저 숨김없이 털어놓자고."
"......."
"그 때 너는 누군가의 육체적인 첫 번째가 될 지언정, 정서적인 두 번째는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었어. 그것도 기억 나?"
"......."
서연이는 일관 된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 네가 어떤 사람을 만나든, 정서적으로도 첫 번째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해. 넌 그럴 만한 사람이니까. 넌.... 너무 좋은 여자니까."
"그래서....?"
날카롭게 따져묻는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난 네가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 너를 위해서...."
"듣기 싫어! 닥쳐!!"
서연이가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백을 집어던졌다.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지른 그녀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절절히 울리기 시작하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지만 난 그녀의 어깨를 안아주지도 못했다. 여기서 그런 행동을 해버린다면 기껏 용기를 낸 것이 모두 무너질 것만 같았다.....
"비겁해.... 너, 넌 정말 나빠.... 결국 지금 나한테 유정이를 만나는걸 이해해달라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너.... 넌 내가 나 말고 다른 여자를 계속해서 만나는걸 참고 이해해줬으면 하는 거잖아. 그래서 지금 괜히 돌려 말하면서 수 쓰는 거지? 그렇지?"
"아니야, 서연아.... 그렇지 않아."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아가며 독기어린 소리를 내뱉는 서연이의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자존심이 강한 서연이로서는 이런 순간에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이는게 싫었겠지만 그녀는 결국 내게 쏟아지는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그녀가 얼마나 서러울지 나는 알고 있었기에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세상 어느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의 애정을 반으로 쪼개가면서까지 곁에 머물고 싶어하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나와 만나기 위해서 그러한 형태의 사랑을 감수했었고, 또한 너무도 헌신적으로 그 문제를 받아들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에게 이별을 고했다. 어쩌면 서연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겪은 이별 중에 이것은 가장 부질없고, 가장 비참하며, 가장 후회되는 이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웠다. 나는 애초에 서연이에게 그만큼 의미있는 사람이 될 자격이 있었을까.
"꺼져! 내 눈 앞에서 사라져! 유정인지 뭔지 그 년에게로 가서 천년만년 둘이 행복하게 만나! 나 따위 걸레 같은 년은 잊고..... 너도 그러고 싶어서 얘기한 거잖아. 어서 가 버려!"
"서연아."
나는 결국 그녀를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주기 위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헤어지더라도 이런 식으로 이별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 또한 욕심일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좋은 이별을 맞이할 수 있을까.
"꺼지라고! 나 더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흐, 흐흑...."
이대로 돌아서주는게 어쩌면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일지도 모르기에, 나는 등을 돌렸다. 하필 이별의 장소로써 고르게 된 자리가 이 곳이라는 점이, 문득 후회가 되었다. 내가 그녀를 위해 사라져주면 그녀는 나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고 나와의 기억이 묻어있는 이 곳에서 홀로 떠나줄 수 있을까.
흐느끼는 서연이를 내버려둔 채, 나는 원룸을 나왔고 건물을 빠져나와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서연이가 떠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침대 위에서 울고 있을 줄 알았던 서연이가, 어느새 달려와 내 등에 와락 달려들었다.
"가지 마!"
"서, 서연아...."
내 등을 끌어안고 매달린 서연이가 아직도 울고 있다는게 피부로 느껴졌다. 눈물을 통해서, 피부의 떨림을 통해서.... 유정이가 나의 슬픔을 읽었듯이 나도 서연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가지 말라고....! 흑... 흐흑... 네, 네가 이렇게 가버리면 나는.... 우리는 이제 어떡하라는 거야?"
"우리.... 라고?"
나는 서연이의 흐느낌 속에서,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지는 한 마디를 끄집어냈다. 아무리 되짚어 생각해도 서연이가 쓴 그 "우리"라는 표현이, 나와 서연이 둘 사이를 가르키는 표현으로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뜻이야?"
"........"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퉁퉁 부어 있는, 눈물 젖은 눈이 보였다. 그토록 아름답고 멋졌던 서연이가 겨우 나 같은 놈 때문에 이렇게 엉망이 되어있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서연이는 내 목을 끌어안은 팔을 풀고는, 여전히 히끅거리며 작은 손 안에 꼭 쥐고 있었던 사진 한 장을 내게 천천히 건네주었다. 온통 검정색 바탕에, 희뿌연 색의 윤곽이 어슴푸레하게 그려져 있는 자그마한 사진이었다.
"서연아, 너...."
순간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고, 받아든 손이 덜덜 떨려왔다. 초음파 투시의 흔적이 남아있는 그 조그만 사진 한 장을 받아든 채로 내가 멍하니 굳어있자, 서연이는 눈물을 억눌러 삼키며 간신히 내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임신.... 했어."
- 다음 화에 계속 -
1부의 마무리가 얼마 남지 않았네요... ^^
쓰기 시작했을 때도 그렇지만, 여전히 많은 분들이 아껴주셔서 가슴 벅차고 감사합니다
좋게 마무리 하고 싶어요
힘을 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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