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19장
"성진 씨~~ 반가워요!"
꽤 오랜만에 만난 현아 씨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누구보다 밝고 쾌활한 특유의 목소리도 그랬고, 귀티나 보이는 고급스런 장식들도 그랬고, 특히나 주위의 이목을 한껏 끌어당기는 그 어마어마한 노출 또한 여전히 그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를 구성하는 요소 중 어느 것 하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는게 없을 것 같았다.
"현주한테 성진 씨가 인문대 수업 많이 듣는다는 얘기 듣고 여기서 기다렸는데~~ 이렇게 딱 마주쳤네요. 나 센스 있죠? 내가 잘 찾아온거 맞죠?"
"......."
"왜 말이 없어요? 내가 반갑지 않아요?"
"아, 아니요..."
상황이 어찌되었든 간에 현아 씨가 내게로 달려오자 나는 당연스럽게도 그녀의 옷차림에 시선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자리에 현아 씨를 보기 위해 모여있는 대다수 역시 그녀의 옷차림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 자리에 있으면 누구라도 당연히 현아 씨의 차림새에 시선을 주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 그 정도로 지금 그녀의 노출이 주는 존재감은 대단했다.
비록 내가 여자의 패션에 좀 둔감한 편이긴 하지만 그녀와 서연이의 차림새가 닮은 듯 하면서도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둘 다 얇고 단정한 가을 코트를 맵시 있게 걸친 모습이긴 했지만 서연이의 경우는 하늘하늘한 플레어스커트로 다리를 감싸면서도 은근한 각선미만 드러내어 몸매를 살렸다. 하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현아 씨는.... 아예 완전히 벗어제꼈다.
흔히들 말하는 "하의 실종"이라고 해야 할까? 팔랑거리는 코트 자락 밑으로 스커트 자락조차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그녀가 짧은 바지든 치마든 간에 하의 자체를 입었는지가 의심될 모습이었고, 게다가 스타킹조차 하지 않은 것 같은 매끈한 맨 다리가 코트 밑으로 쭉 뻗어있었기에 뒤에서 보면 정말 알몸에 코트 한장 달랑 입은건 아닌가 할 정도로 노출도가 심했다.
물론 그녀도 상식이 있는 사람인지라, 앞에서 보니 코트 안에 얇은 이너를 입긴 했다. 하지만 그 이너라는 것 조차도 너무도 깊이 훅 파여 있는 디자인이라 현아 씨의 얌전하게 모인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 보였고, 설상가상으로 가슴골 사이에는 아슬아슬하게 백금 목걸이가 걸처져 있었으므로 당연히 가슴에 더욱 시선이 쏠릴 수 밖에 없었다. 그 꼴은 마치 "내 가슴 좀 봐라~ 목걸이가 파묻힐 정도로 크지롱!" 하고 약을 올리는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오히려 쳐다보지 않는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준이었다.
"혀, 현아 씨... 일단 우리 다른데로 좀...."
가슴골과 맨다리를 훤하게 노출시킨 그녀의 차림새는 한여름이라 하더라도 결코 흔히 볼 수는 없을 만한 그런 모습이었다. 게다가 이 와중에 현아 씨의 몸매는 정말 또 쓸데없이 좋아놔서, 주변 남학생들로 하여금 "천하다"는 생각보다는 "최고다!"라는 함성을 지르게끔 만들고 있었다.
원래 얼굴이든 몸매든 어딘가 부족한 여인이 함부로 저렇게 천박하게 느껴질 만큼의 대담한 노출을 감행한다면, 그 댓가로 반드시 눈쌀 찌푸린 시선과 혀 차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좋아할 남자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바라보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남자란 시각에 아주 솔직하고 개방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현아 씨 정도의 얼굴과 몸매를 가진 여자가 이런 모습을 하고 캠퍼스 한복판에 나타났으니, 거의 절대다수의 남학생들이 열광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 주관적인 평가에 따르면 현아 씨의 얼굴은 거의 서연이에 필적하며, 몸매의 볼륨 자체는 오히려 서연이를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형적인 모델의 몸매랄까? 들어올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그 환상의 곡선이 코트 위로도 드러날 정도였다. 비로소 나는 왜 지금 이 시간에 인문대 입구 앞에 남학생들이 이렇게 줄지어 서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고, 또 한편으론 정말 현아 씨가 원망스러웠다. 그 수많은 남학생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게로 몰려와 꽂힌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에.
사방에서 "저놈은 뭐지?", "혹시 남친?", "에이 설마" 등의 의미를 담은 수군거리과 함께 온갖 따가운 눈빛의 화살들이 나를 연속으로 강타했고, 나는 어떻게든 빨리 이 자리를 수습한 후 뜨고 싶은 마음 뿐이었지만 그것조차 마음같이 쉽지는 않았다. 다음 순간, 내가 가장 우려하던 사태가 현실로 이루어졌기에.
"어어? 그쪽은?"
지금 이 사태의 심각성을 단 1%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현아 씨가, 내 옆에 서 있었던 서연이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현아 씨가 내게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모습을 목격한 뒤로 무어라 말로 형용하기 힘든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서연이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저 가만히 두 눈을 끔뻑거렸다. 하지만 현아 씨는 이내 곧 무언가를 떠올려냈는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반가워요~ 우리 구면 아니던가요?"
"네에...?"
서연이는 현아 씨를 기억하지 못하나보다. 하긴 그 때 병원에서 자리를 피할 때는 너무도 허둥지둥 병실을 나서느라 경황이 없었겠지. 하지만 현아 씨는 느낌으로 뭔가를 파악한 상태였으니 그만큼 서연이의 모습을 더욱 자세히 눈여겨 봐두었을테고... 물론 아무리 그렇다한들 고작 단 한번 본 것만으로 이렇게 정확히 알아본다는건, 역시나 그녀의 내공이 보통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저 못 알아보시겠어요? 아쉽네요. 저는 그쪽 얼굴이 기억 나는데~"
"누.. 구.. 세요?"
두 여자의 대치를 가만히 지켜보던 나로서는 제발 현아 씨가 "저는 성진 씨 여친의 언니 되는 사람이에요~ 그날 병원에서 봤었잖아요!" 라는 식의 대사만은 하지 않아주기를 바랐다. 물론 그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 상황에서 왠지 "여친의 언니" 따위의 말이 나왔다간 나중에 서연이에게 무슨 욕을 얻어먹을지 알 수가 없었기에 그저 현아 씨가 눈치껏 넘어가주기를 나는 소원했다.
내 기도가 통한 것인지, 아니면 현아 씨의 눈치가 정말 100단 쯤 되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현아 씨가 유독 유별난 사람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굳이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다만 교태롭게 웃으면서 서연이의 반응을 살피듯 장난스런 농을 던질 뿐이었다.
"성진 씨가 학과에서 제일 친한 후배라고, 그렇게 예쁘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던걸요? 다시 보니 정말 예쁘시네요. 부러워요~"
"네에?"
서연이는 대답 대신 내 얼굴을 홱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아까보다 한층 더 강력해진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는게 느껴져 등에 식은땀이 또 주르륵 흘렀다. 눈빛 속에 담긴 메시지는 노골적으로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냐?" 라는 문장을 전달하고 있었다. 나는 애써 그 날카로운 눈빛을 회피하며 현아 씨와 서연이, 유성이를 이끌고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여자 셋, 그리고 나....
현아 씨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인해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해괴한 조합이 이루어지자 그 틈바구니에서 나는 혼자 속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의외로 세 여자들은 서로의 존재에 대해 별다른 경계를 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지만, 지금 상황의 복잡미묘함을 만들어낸 주체나 다름 없는 나는 괜히 혼자서 불안해 하고 있었다.
"유, 유정아."
"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내 신경을 쓰이게 만드는 존재는 서연이도 현아 씨도 아닌, 이 소용돌이에서 가장 바깥 쪽에 떨어져 있다고 여겨지는 유정이었다. 유정이는 옷을 반쯤 벗어제낀 여자 한 명이 갑자기 나타나든 말든 여느 때처럼 담담하게 대꾸하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왠지 그녀에게 현아 씨와 만나는 모습을 보인 것이 내내 신경 쓰이고 있었다. 서연이에 이어 현아 씨까지 내게 얽혀있다는 느낌을 그녀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저기... 밑에까지 태워다 줄까?"
너무 신경이 쓰였기 때문인지 입에서는 되도 않은 헛소리가 튀어나온다. 유정이가 오토바이를 몰고 왔다는건 아까 건물에 들어서면서부터 눈으로 확인했던 사실인데. 역시나 유정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요. 저 오토바이 타고 왔어요."
"그, 그래."
결국 유정이가 바이크의 엑셀을 당기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더 붙일 수가 없었다. 여느 때처럼 바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유정이는 사라졌고, 나는 그 뒤에 남은 매캐한 연기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이 왜 이리 찝찝할까?
"나도 갈게요."
쌀쌀맞은 서연이의 한마디가 들리자 그제야 유정이의 뒷모습을 잊고 현실로 돌아온다. 기분이 상할대로 상한 듯한 서연이가 가방을 고쳐매고 이미 또각또각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서연이에게도 별 시덥잖은 인삿말을 건넸지만 그녀는 간단히 묵살해버린다.
"서연아, 태워줄까?"
"됐어요."
그리고는 유정이의 뒤를 이어 사라져버리는 서연이. 결국 주차장엔 나와 현아 씨만 남게 되었다.
나는 차마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현아 씨의 얼굴을 물끄러미 마주보았다. 현아 씨는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지금의 이 고요한 소용돌이를 그저 관망하면서 무척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고 있었다.
"킥킥."
"왜 웃으세요?"
"성진 씨가 생각보다 더 재밌는 사람일 것 같은 기분이 막막 드네요."
"......."
할 말이 없다. 한숨조차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선 그녀를 내 차에 태웠다.
주인의 기분을 대변하는 듯한 힘 없는 엔진소리 한 차례와 함께 내 차가 주차장을 조용히 떠났다.
*
"성진 씨, 보기보다 대단하네요."
"뭐가요?"
비록 인정하긴 싫었지만, 서연이와 유성이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니 비로소 현아 씨를 대함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의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물론 최악의 타이밍을 골라서 등장한 현아 씨에게 여전히 약간의 원망이 남아있었기에 대답이 생각보다 조금 퉁명스럽게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아까처럼 그녀의 말이 당황스럽게 들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늘 보니까 한 미모 하는 여자들을 줄줄이 달고 다니던걸요?"
"줄줄이라니요?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우리 현주로도 모자라서 예쁜 후배를 두 명이나 끼고 다닐 정도면 충분히 줄줄이 아니에요?"
"그런거 아니거든요. 오토바이 타는 애랑은 그런 사이 아니에요."
현아 씨로 하여금 유정이마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귀찮은 일이 하나 더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은 물론이고, 왠지 유정이와 관련된 일엔 마냥 조심스러워지는 나였다. 하지만 현아 씨는 눈빛을 빛내며 내 옆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볼 뿐이었다.
그녀는 애초부터 조수석에 올라탔는데, 운전하는 입장에서는 조금만 고개를 옆으로 꺾어도 그녀의 가슴골이 훤히 보이게 되니 아주 기분이 민망했다. 그 대담하게 파인 이너 셔츠 덕분에 보기 싫어도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녀의 가슴 쪽에 시선이 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가슴골을 엿보는게 썩 싫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사이드미러를 볼 때조차 괜히 시선을 신경써야 하니 그것도 나름대로 곤욕이었다.
"호호호, 성진 씨 딱 걸렸어요."
"네?"
"오토바이 타는 애랑"은"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건, 병원에서 봤던 그 예쁜 아가씨 쪽과는 "그런 사이"라는걸 스스로 인정한 잖아요. 안 그래요?"
"그, 그건...."
아무래도 현아 씨가 나와 서연이 사이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내 안에서 너무 기정사실화 해버렸나보다. 자연스럽게 뱉고난 말이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런 의미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았다. 너무 경솔했나 싶어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혹시나 운전에 지장이 없도록 애써 운전대를 잡고 시선을 앞에 고정시켰다.
"호호. 뭐 좋아요. 그 아가씨 얘기는 일단 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또 뭐가 남았나요?"
"그 오토바이 타는 여학생 말이에요, 내가 보기에는 그 아가씨하고도 뭔가 있긴 있던 것 같은데요?"
"무슨 말씀이세요?"
"그 학생 뒷모습을 바라보는 성진 씨 눈빛 말이에요. 절대 "아무 사이"도 아닌 여자를 보는 눈은 아니었거든요."
"......."
예전부터 왜 이 여자는 나를 이렇게 파헤치지 못해서 안달인걸까?
아...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거겠구나. 자기 동생과도 관련이 있는 일일테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현주의 언니인 그녀로서는 화를 내거나, 따지고 들어야 되는 상황이 아닌가?
왜 그녀는 이렇게 즐기는 듯한 모습인지, 도대체 그녀의 진의는 무엇인지, 나는 점점 혼란스러웠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에요?"
"난 그냥 성진 씨와 솔직한 대화를 하고 싶은 것 뿐이에요."
솔직한...
"솔직"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렇게까지 다의적으로 여겨졌던 적도 처음인 것 같다.
그녀가 정말로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감을 잡고 있다면 어떻게 이 상황에서 솔직이라는 단어를 요구한단 말인가.
솔직하긴 솔직하되, 숨길 부분은 숨겨서 대화를 하자는 건가? 그건 말도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여친의 언니인 그녀에게 진정 "솔직한" 의미에서 모든걸 시인해 버리면 그것은 곧 내가 현주와 헤어져도 할 말이 없음을 그녀에게 시인하는 꼴이나 다름이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나의 표정이 딱딱해졌음을 현아 씨도 느꼈나보다. 그녀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성진 씨, 오늘 나랑 내기 하나 할래요?"
"내기... 라니요?"
뜬금없는 한 마디에 나의 신경이 다시 조수석 쪽으로 쏠렸다. 그녀도 내가 운전에 집중하지 못할까봐 우려되는지 아주 천천히, 내가 뜻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오늘 내가 성진 씨랑 헤어지기 전까지, 성진 씨가 내게 솔직한 모습만 보여준다면 나는 성진 씨에게 피해를 주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거에요. 현주에게 내가 느끼고 있는 바를 솔직히 말해준다거나, 하는 일도 없을 거에요. 성진 씨가 원하는 대로 말이에요."
"........"
그녀는 정말이지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과연 무슨 의중으로 그녀가 내게 이런 제안을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이 상황에서 어설픈 발뺌이나 연기를 하는 것이 그녀의 직감을 속이는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거란 것쯤은 너무도 잘 알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솔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면요?"
나는 직설적인 대답을 회피하는 대신 그렇게 돌려물었다. 현아 씨는 내 질문에 고양이처럼 방긋 웃으면서, 그 교태로운 웃음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했다.
"현주와 헤어지게 할 거에요."
"......."
뭘 어떻게 헤어지게 만들겠다는건지 난 모른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 수 있다.
늘 장난스러워 보였던 그녀였지만 방금 전의 그 한마디는 더없이 뚜렷한 진심이라는걸.
더불어 그녀가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조금쯤은 선명해졌다. 그녀는 지금 말그대로 내게 "솔직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적당한 위장과 변명으로 덮여진 그런 대답을 원하는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그녀는 듣고 싶어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더없는 모순이었다. 그걸 다 듣고도 내가 그녀의 동생과 계속 만나는 것을 용인하겠다니?
그녀는 내게 피해를 주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겠다 말했지만, 내 솔직한 대답을 듣고 나서도 만약 그녀가 자신의 말을 지킨다면 그것은 도저히 현주를 위하는 것이라곤 볼 수 없었다.
"난 현아 씨를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네요."
"그래요. 그래서 난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는 거에요. 성진 씨는 모르겠지만, 난 성진 씨에 대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이미 알고 있으니까."
"중요한 사실이라니요?"
"약속대로 성진 씨가 끝까지 솔직한 모습만 보여준다면 그것도 말해줄게요."
"하는 거 봐서.... 라는 뜻인가요?"
"그렇죠. 호호."
겉으로 보기에 현아 씨의 말투는 아까나 지금이나 변한 구석이 없다. 하지만 직접 맞대하고 있는 나는 알 수 있다. 지금도 그녀의 말에 비록 장난기가 가득하지만, 어느 것 하나 허투로 얘기하고 있는 내용은 없다는걸. 그래서 나는 그녀가 말하는 그 "중요한 사실"이라는게 무엇인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정말 이미 뭔가를 알고 있다면, 우선은 그녀의 말을 그대로 따라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 진의야 무엇이든 간에.... 서투르게 부정을 해봐야 남는게 없을 테니.
"좋아요. 그렇게 하죠."
나는 그녀의 장단에 놀아나 보기로 했다.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건지 두고 보겠다는 의미였다.
그 때 속으로 "타임 리와인더" 생각이 났다. 만약 지금 내 손에 그 초시계 하나만 있었어도, 지금 상황에서 전혀 고민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
"약속한 거에요."
현아 씨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백미러로 그 미소를 마주한 순간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타임 리와인더가 내 손에 있을 때에는 결코 단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인간 본연의 감각.
그것은 바로 예측할 수 없는 앞일에 대한 불안함이었다.
*
"현아 씨, 여기는...?"
나는 현아 씨가 지시하는 방향대로 운전을 했고, 그에 따라 어느 한 장소에서 내렸다. 하지만 내린 장소에서 나를 맞이한 것은 내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건물이었다.
"왜요? 호텔은 처음이에요?"
그 천연덕스런 반문에 오히려 내가 할 말이 없어진다. 설마 여길 들어가자는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벌써 저만치 앞장 서서 들어가고 있는 현아 씨.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으니 일단 그녀를 따라 들어간다.
그녀의 말마따나 나는 호텔이 처음이다. 하지만 그런 내 눈으로 보기에도 이 호텔이 결코 허접한 곳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느껴진다. 입구의 인테리어와 분위기부터가 어지간한 사람들은 쉽게 출입조차 하지 못하게 할 만큼 격식있는 아우라를 내재하고 있었다.
과연 이런 곳에 들어가도 되는지조차 망설이고 있는데, 프론트에서 현아 씨가 직원에게 황금색으로 된 한 장의 카드를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프론트의 직원 일동 전체가 일순 현아 씨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다. 더더욱 할 말이 없어지는 나였다.
"따라와요, 성진 씨."
기가 팍 죽었다. 그녀의 명령 앞에 일순간 작아지는 내가 초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타임 리와인더를 가지고 있을 때엔 결코 누구 앞에서 기가 죽는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능력을 지닌 인간인 것처럼 내심 여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나를 이끌고 가는 이 여자의 일부분을 엿보았을 뿐인데도 내가 과연 그녀에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지부터를 재보게 된다.
내가 그 시계 하나에 얼마나 종속되어 있었는지를 새삼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런 시시콜콜한 되새김보다도, 지금은 눈 앞에 놓인 이 의외의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내게는 더 중요했다.
현아 씨는 나를 고층의 어느 조용한 룸으로 안내했다. 그 때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 곳은 현아 씨가 미리 예약해둔 스위트룸이었다. 끽해야 모텔이 전부였던 내게 그 곳의 시설은 그야말로 별천지로 다가왔기에, 나는 방에 입장하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텔은 정말 처음이에요?"
"아... 네."
어찌나 위축되었는지 목소리마저 기어들어가는 내가 싫다. 현아 씨는 아랑곳 않고 옷걸이에 자신이 입고 왔던 코트를 벗어서 걸었다. 그 아슬아슬한 노출 차림을 간신히 가리고 있었던 코트 한겹이 사라져 버리자, 나는 현아 씨가 과연 하의를 입었을까 아닐까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치마를 입기는 입었다. 하지만 그것은 치마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어색한 옷이었다. 치마라는 것 또한 몸을 가리기 위한 의복의 일부분임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치마로서의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할 것 같았다. 허벅지는커녕 엉덩이조차 제대로 가려질까 의심되는 그 짧은 길이의 치마는 몸을 조금만 숙이거나 다리를 들어올리기만 해도 그 속을 훤하게 비출 것처럼 보였다. 코트를 입었을 때 치마 자락이 보이지 않았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나는 괜히 그녀의 다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의 분위기에서만큼은 내가 그녀의 몸에 시선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왠지 그녀에게 말려가는 듯한 이 분위기가 싫었다. 더이상 그녀의 손에 놀아나다가는 뭔가 장난감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저를 왜 여기 데려오신 거에요?"
"나한텐 여기가 제 2의 집쯤 되는 곳이거든요. 우리집 다음으로 맘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곳이랄까? 호호, 그러니 현주 몰래 이런 이야기를 하기엔 가장 좋은 장소라고도 할 수 있겠죠."
"여기가... 집이라구요?"
"업무 상의 집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내 고객들도 여기를 자유롭게 드나들곤 하니까."
고객.... 그러고 보면 내가 현주네 집에 처음 찾아갔을 때 현아 씨의 방에서 나왔던 그 남자도 "고객"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그 당시에는 중요하게 생각치 않았지만 그건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현아 씨의 뇌쇄적이고 선정적인 이미지와 겹쳐져, 문득 머릿 속에 하나의 가정이 그려진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고객"이 맞는 건가?
"현아 씨가 하시는 일이 뭔지... 물어도 될까요?"
그녀의 입에서는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나요? 보험 설계사에요."
"보, 보험 설계사요? 그럼 고객이라는게...."
"말 그대로 보험 계약을 해주는 고객들이죠. 왜요?"
순간 또 한차례 할말을 잃고 말았다. 사실 질문을 그렇게 하기는 했었지만 마음 속에서는 이미 현아 씨의 직업을 퇴폐적인 유흥업 쪽으로 어느 정도 기정사실화 해놓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정말로 묻고 싶었던건 현아 씨가 그런 일을 하게 된 이유였다. 하지만 그녀는 첫 대답부터 나의 가정을 정면으로 뒤집어 버린 것이다.
"어머, 혹시 성진 씨 나를 이상한 여자로 생각했던건 아니죠?"
애매하게 꼬인 나의 표정에서 그녀가 무엇인가를 읽었는지 눈썹을 치켜올리며 나를 찔러온다.
한순간 그녀를 홍등가의 여자로 생각했던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나는 그만 발뺌을 했다.
"아,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흐음, 그래요? 혹시 나를 오피스걸이나 콜걸 정도로 생각했던건 아니구요?"
"그, 그런거 아니에요."
그녀는 정확하게 내가 생각했던 바를 콕 짚어오고 있었다. 여태까지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면 그녀가 하는 일이 적어도 "그쪽 분야" 내에 속한 걸거라 막연히 확신했었기에, 나는 솔직히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애써 당황스런 마음을 숨기려는 내게 현아 씨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더니, 하나를 접었다.
"성진 씨, 내가 세 번의 기회를 줄게요. 한번 실수로 내기에서 지게 되는건 억울할 테니까."
"무슨 말... 이에요?"
"말 그대로, 솔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도 세 번까지는 허용해 주겠다는 거에요. 그리고 방금 성진 씨는 한번의 기회를 날렸네요."
"뭐라구요?"
"성진 씨 눈빛에서부터 느낄 수 있어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날 창녀로 생각했다면 그렇게 생각했다고 솔직하게 말해요. 적어도 오늘 여기서 나갈 때까지는 그래야 해요. 오늘 나와 헤어지기 전까진 솔직해지기로 약속하지 않았나요?"
"......."
부정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그저 침묵했다. 내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현아 씨는 그대로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그녀가 다리를 꼬으니 역시나 치마가 가림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말려 올라가 버린다. 나는 그 부분을 애써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요. 사실 그렇게 생각했어요. 현아 씨는 창녀일 거라고... 이제 됐나요?"
"좋아요. 그렇게 솔직하게 얘기해줘요. 이 안에서는."
나를 가지고 노는 듯한 그 모습에 나는 속으로 울컥하고 있었다. 서연이가 나를 애교 섞어 가지고 노는 것과는 느낌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나는 그저 지금 이 여자의 손에서 마리오네트처럼 조롱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따지고보면 나이도 나와 같은 그녀에게서 그런 취급을 받게 되니 자존심이 상하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을 해도 되겠어요?"
"예."
사실 속으로 켕기는 것이 있어 그녀의 질문을 되도록 피하고 싶은 나였지만, 그 순간의 욱하는 마음 때문에 호기롭게 대답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뒤 이어진 그녀의 질문부터가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나의 태도를 이미 무너뜨리고 있었다.
"우리 현주, 많이 사랑하나요?"
"......."
설마하니 그런 질문이 나올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나와 서연이, 혹은 나와 유성이의 관계를 물어올거라 생각했던 나였기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오히려 이런 질문이라면 대답 못할 것도 없었다.
"예."
"그래요? 한 점 망설임 없이 그렇게 대답할 수 있어요?"
그녀는 나에게 솔직함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요구대로 솔직한 대답을 해주었다. 내가 현주를 사랑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예."
"흐음~"
현아 씨가 테이블 위로 턱을 괴고 내 눈을 들여다 보았다. 사람의 속내를 읽어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실제로도 그녀는 상대방의 속을 읽어내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선을 마주하던 그녀가 살풋 웃음을 지었다. 아까의 그 장난기 넘치는 웃음이었다.
"좋아요~ 호호. 사실 아니라고 했으면 더 물어볼 게 없었을 거에요."
"그런걸 물어보실 줄은 몰랐네요."
"왜요?"
"학교 후배와 무슨 관계인지, 뭐 그런 것들을 물어보실 줄 알았는데요."
"이미 답을 알고 있는걸 구태여 확인하기 위해서 시간을 써야 하나요?"
너무도 맹랑한, 거만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녀의 반문 앞에 오히려 내가 다시 할 말을 잃고 만다. 벙 찐 표정을 하고 있는 내게 현아 씨는 여유 넘치는 웃음을 지으며 되려 다시 질문을 던진다.
"섹스 파트너잖아요. 안 그래요?"
"......."
부정할 래야 부정할 수가 없는 벼랑까지 내몰리고 말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전혀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는 현아 씨를 보며 나는 도저히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싶은건 성진 씨가 그 여자와 "섹스" 따위를 했는지 아닌지가 아니에요. 오히려 묻고 싶은건 이거죠. 그 여자를 사랑하나요?"
"사.. 랑이라니요?"
그녀는 내게 서연이를 사랑하냐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이야말로 내가 생각하기에 요지를 완전히 비껴나가는 질문이었다. 섹스파트너 사이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연인이지 결코 섹스파트너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현아 씨도 짐작하셨겠지만 그냥... 섹스 파트너일 뿐이에요."
"그래요? 정서적인 부분 없이 서로 몸으로만 얽혀있는 사이란 뜻이에요?"
"맞아요."
나는 최대한 당당하게 말하려 애썼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구태여 변명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그녀의 질문을 들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서연이에 대한 내 마음을 다시 되짚어보고 있는 내 속내를 현아 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정말 서연이에게 아무런 정서적인 감정이 없는 걸까? 내가 아무리 둔감하다한들 서연이가 내게 섹스파트너 그 이상의 어떤 부분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어떨까? 정말로 주서연이라는 여자를 단순한 성욕의 배출구로만 여기고 있는 걸까?
그에 대한 확실한 답을 나조차도 내리기 힘들었다. 그래서 떳떳하게 답했다. 나조차도 모르는 내 마음까지도 현아 씨가 알 수는 없을 테니까. 대신 나는 혼란스러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녀에게 되려 질문을 던진다.
"그게 중요한가요?"
"아주 중요해요. 왜냐하면 나는 성진 씨가 그것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그녀는 더이상 말해주지 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렇다면 현주 말고 마음에 둔 사람이 있나요?"
"......없어요."
좀 전의 질문처럼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못했던 이유는, 그 순간 내 머릿 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현아 씨도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이 분명했다.
"두 번째 기회를 날리셨네요."
"........"
어쩌면 그렇게 성급하게 대답한 것은 그만큼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불과 오늘 처음으로 잠깐 얼굴을 마주쳤을 뿐인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성진 씨 스스로도 알고 있을 거에요. 꼭 사랑이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마음 속에 현주 말고 누군가가 있다면 솔직히 말해주세요. 나는 성진 씨 생각보다 꽤 많은걸 읽고 있으니까요."
"그래요, 있어요."
유정이에 대한 내 마음을, 이런 식으로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인정하게 될 줄은 몰랐다. 도대체 나에 대해서 뭘 얼마나 파헤치고 싶다는 걸까? 이렇게 나를 속속들이 해부해서 그녀가 얻게 되는게 뭐지?
"이제 마지막 한 번의 기회가 남았어요, 성진 씨. 단 한번이라도 내게 솔직하지 못한 대답을 한다면 난 오늘 성진 씨와의 대화를 끝낼 거에요."
말의 내용은 누가 보더라도 협박이었지만, 이상하게 내 귀에는 그것이 협박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내게 더욱 솔직해져 달라는 부탁이나 다름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성진 씨에게만 솔직한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 또한 너무 일방적이겠죠. 여태까지 성진 씨가 나름대로의 솔직함을 보여준 답례로, 나 또한 내 솔직한 부분을 보여줄게요. 비록 일부분이지만."
"현아 씨의 솔직한 부분이라구요?"
"그래요. 현주에게서 우리가 과거에 겪었던 일을 들었지요?"
현아 씨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굳이 그것까지 부정하고 싶은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자신의 수치스런 과거를 알고 있는 남자를 눈 앞에 두고서도, 그녀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그 과거를 알고 있어 다행이라는 듯, 그녀는 자연스럽게 다음 말을 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과거는 우리 자매에게 각각 무언가 하나씩을 새겨놓았지요. 성진 씨도 알다시피... 내 동생에게는 불감증이라는 이름의 상처를 남겼구요."
물론 나도 묻고 싶었다. 왜 현아 씨는 그런 과거를 보내고서도 아무렇지 않은듯 살아가는 건지.
무슨 이유로 남자들을 유혹하는 듯한 그런 손길, 눈빛, 말투로 자신을 교태롭게 꾸미며 살아가는 건지.
하지만 굳이 먼저 묻지 않았다.
"나에게는 무엇을 남겼을까요?"
"글쎄요."
내 모호한 대답을 들은 그녀가 더없이 은근한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비록 표정을 억제한 고요한 웃음이었지만, 여태까지 내가 보았던 현아 씨의 웃음 중에 가장 유혹적이고 은밀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알고 싶나요?"
만약 그것이 현주에게 남은 것과 마찬가지의 고통스런 상처라면 나는 그것을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이 하나 뿐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네."
현아 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시선은 그녀의 발걸음을 고스란히 좇았다. 아무런 예고 없이 침대 옆에 놓인 수화기를 집어든 그녀는 프론트에 난데없이 전화 연결을 걸었다.
"강 사장님 도착하셨으면 지금 바로 올려보내세요."
그 한 마디만 남기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어리둥절하여 바라만 보고 있는 내게 그녀가 다시 한번 은근한 웃음을 빙긋 지어보인다. 사람 하나는 충분히 들어가 숨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옷장을 가르키며,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잠시 들어가 있어줄래요? 놀라운걸 보게 될 테니까."
현주가 내게 말하지 못한 그녀의 과거 이야기 중 남은 부분을, 바로 이 자리에서 듣게 될거라곤 이 때 미처 상상하지 못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이번 주는 상당히 바쁜 한 주였던 듯 합니다
금요일까지 정말 눈코 뜰새가 없었던 것 같군요 ^^;
그래도 토요일 오전에 한편을 올리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금 이른 기상을 해보았습니다
현아의 캐릭터는 내면이 조금 복잡하기에 표현하는데에 시간이 좀 걸리네요
아마 다음 화까지는 현아의 이야기를 하게 될 듯 합니다
조금 재미가 없을 수도 있어요 하핫 ;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19장
"성진 씨~~ 반가워요!"
꽤 오랜만에 만난 현아 씨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누구보다 밝고 쾌활한 특유의 목소리도 그랬고, 귀티나 보이는 고급스런 장식들도 그랬고, 특히나 주위의 이목을 한껏 끌어당기는 그 어마어마한 노출 또한 여전히 그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를 구성하는 요소 중 어느 것 하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는게 없을 것 같았다.
"현주한테 성진 씨가 인문대 수업 많이 듣는다는 얘기 듣고 여기서 기다렸는데~~ 이렇게 딱 마주쳤네요. 나 센스 있죠? 내가 잘 찾아온거 맞죠?"
"......."
"왜 말이 없어요? 내가 반갑지 않아요?"
"아, 아니요..."
상황이 어찌되었든 간에 현아 씨가 내게로 달려오자 나는 당연스럽게도 그녀의 옷차림에 시선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자리에 현아 씨를 보기 위해 모여있는 대다수 역시 그녀의 옷차림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 자리에 있으면 누구라도 당연히 현아 씨의 차림새에 시선을 주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 그 정도로 지금 그녀의 노출이 주는 존재감은 대단했다.
비록 내가 여자의 패션에 좀 둔감한 편이긴 하지만 그녀와 서연이의 차림새가 닮은 듯 하면서도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둘 다 얇고 단정한 가을 코트를 맵시 있게 걸친 모습이긴 했지만 서연이의 경우는 하늘하늘한 플레어스커트로 다리를 감싸면서도 은근한 각선미만 드러내어 몸매를 살렸다. 하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현아 씨는.... 아예 완전히 벗어제꼈다.
흔히들 말하는 "하의 실종"이라고 해야 할까? 팔랑거리는 코트 자락 밑으로 스커트 자락조차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그녀가 짧은 바지든 치마든 간에 하의 자체를 입었는지가 의심될 모습이었고, 게다가 스타킹조차 하지 않은 것 같은 매끈한 맨 다리가 코트 밑으로 쭉 뻗어있었기에 뒤에서 보면 정말 알몸에 코트 한장 달랑 입은건 아닌가 할 정도로 노출도가 심했다.
물론 그녀도 상식이 있는 사람인지라, 앞에서 보니 코트 안에 얇은 이너를 입긴 했다. 하지만 그 이너라는 것 조차도 너무도 깊이 훅 파여 있는 디자인이라 현아 씨의 얌전하게 모인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 보였고, 설상가상으로 가슴골 사이에는 아슬아슬하게 백금 목걸이가 걸처져 있었으므로 당연히 가슴에 더욱 시선이 쏠릴 수 밖에 없었다. 그 꼴은 마치 "내 가슴 좀 봐라~ 목걸이가 파묻힐 정도로 크지롱!" 하고 약을 올리는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오히려 쳐다보지 않는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준이었다.
"혀, 현아 씨... 일단 우리 다른데로 좀...."
가슴골과 맨다리를 훤하게 노출시킨 그녀의 차림새는 한여름이라 하더라도 결코 흔히 볼 수는 없을 만한 그런 모습이었다. 게다가 이 와중에 현아 씨의 몸매는 정말 또 쓸데없이 좋아놔서, 주변 남학생들로 하여금 "천하다"는 생각보다는 "최고다!"라는 함성을 지르게끔 만들고 있었다.
원래 얼굴이든 몸매든 어딘가 부족한 여인이 함부로 저렇게 천박하게 느껴질 만큼의 대담한 노출을 감행한다면, 그 댓가로 반드시 눈쌀 찌푸린 시선과 혀 차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좋아할 남자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바라보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남자란 시각에 아주 솔직하고 개방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현아 씨 정도의 얼굴과 몸매를 가진 여자가 이런 모습을 하고 캠퍼스 한복판에 나타났으니, 거의 절대다수의 남학생들이 열광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 주관적인 평가에 따르면 현아 씨의 얼굴은 거의 서연이에 필적하며, 몸매의 볼륨 자체는 오히려 서연이를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형적인 모델의 몸매랄까? 들어올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그 환상의 곡선이 코트 위로도 드러날 정도였다. 비로소 나는 왜 지금 이 시간에 인문대 입구 앞에 남학생들이 이렇게 줄지어 서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고, 또 한편으론 정말 현아 씨가 원망스러웠다. 그 수많은 남학생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게로 몰려와 꽂힌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에.
사방에서 "저놈은 뭐지?", "혹시 남친?", "에이 설마" 등의 의미를 담은 수군거리과 함께 온갖 따가운 눈빛의 화살들이 나를 연속으로 강타했고, 나는 어떻게든 빨리 이 자리를 수습한 후 뜨고 싶은 마음 뿐이었지만 그것조차 마음같이 쉽지는 않았다. 다음 순간, 내가 가장 우려하던 사태가 현실로 이루어졌기에.
"어어? 그쪽은?"
지금 이 사태의 심각성을 단 1%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현아 씨가, 내 옆에 서 있었던 서연이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현아 씨가 내게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모습을 목격한 뒤로 무어라 말로 형용하기 힘든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서연이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저 가만히 두 눈을 끔뻑거렸다. 하지만 현아 씨는 이내 곧 무언가를 떠올려냈는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반가워요~ 우리 구면 아니던가요?"
"네에...?"
서연이는 현아 씨를 기억하지 못하나보다. 하긴 그 때 병원에서 자리를 피할 때는 너무도 허둥지둥 병실을 나서느라 경황이 없었겠지. 하지만 현아 씨는 느낌으로 뭔가를 파악한 상태였으니 그만큼 서연이의 모습을 더욱 자세히 눈여겨 봐두었을테고... 물론 아무리 그렇다한들 고작 단 한번 본 것만으로 이렇게 정확히 알아본다는건, 역시나 그녀의 내공이 보통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저 못 알아보시겠어요? 아쉽네요. 저는 그쪽 얼굴이 기억 나는데~"
"누.. 구.. 세요?"
두 여자의 대치를 가만히 지켜보던 나로서는 제발 현아 씨가 "저는 성진 씨 여친의 언니 되는 사람이에요~ 그날 병원에서 봤었잖아요!" 라는 식의 대사만은 하지 않아주기를 바랐다. 물론 그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 상황에서 왠지 "여친의 언니" 따위의 말이 나왔다간 나중에 서연이에게 무슨 욕을 얻어먹을지 알 수가 없었기에 그저 현아 씨가 눈치껏 넘어가주기를 나는 소원했다.
내 기도가 통한 것인지, 아니면 현아 씨의 눈치가 정말 100단 쯤 되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현아 씨가 유독 유별난 사람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굳이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다만 교태롭게 웃으면서 서연이의 반응을 살피듯 장난스런 농을 던질 뿐이었다.
"성진 씨가 학과에서 제일 친한 후배라고, 그렇게 예쁘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던걸요? 다시 보니 정말 예쁘시네요. 부러워요~"
"네에?"
서연이는 대답 대신 내 얼굴을 홱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아까보다 한층 더 강력해진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는게 느껴져 등에 식은땀이 또 주르륵 흘렀다. 눈빛 속에 담긴 메시지는 노골적으로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냐?" 라는 문장을 전달하고 있었다. 나는 애써 그 날카로운 눈빛을 회피하며 현아 씨와 서연이, 유성이를 이끌고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여자 셋, 그리고 나....
현아 씨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인해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해괴한 조합이 이루어지자 그 틈바구니에서 나는 혼자 속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의외로 세 여자들은 서로의 존재에 대해 별다른 경계를 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지만, 지금 상황의 복잡미묘함을 만들어낸 주체나 다름 없는 나는 괜히 혼자서 불안해 하고 있었다.
"유, 유정아."
"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내 신경을 쓰이게 만드는 존재는 서연이도 현아 씨도 아닌, 이 소용돌이에서 가장 바깥 쪽에 떨어져 있다고 여겨지는 유정이었다. 유정이는 옷을 반쯤 벗어제낀 여자 한 명이 갑자기 나타나든 말든 여느 때처럼 담담하게 대꾸하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왠지 그녀에게 현아 씨와 만나는 모습을 보인 것이 내내 신경 쓰이고 있었다. 서연이에 이어 현아 씨까지 내게 얽혀있다는 느낌을 그녀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저기... 밑에까지 태워다 줄까?"
너무 신경이 쓰였기 때문인지 입에서는 되도 않은 헛소리가 튀어나온다. 유정이가 오토바이를 몰고 왔다는건 아까 건물에 들어서면서부터 눈으로 확인했던 사실인데. 역시나 유정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요. 저 오토바이 타고 왔어요."
"그, 그래."
결국 유정이가 바이크의 엑셀을 당기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더 붙일 수가 없었다. 여느 때처럼 바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유정이는 사라졌고, 나는 그 뒤에 남은 매캐한 연기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이 왜 이리 찝찝할까?
"나도 갈게요."
쌀쌀맞은 서연이의 한마디가 들리자 그제야 유정이의 뒷모습을 잊고 현실로 돌아온다. 기분이 상할대로 상한 듯한 서연이가 가방을 고쳐매고 이미 또각또각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서연이에게도 별 시덥잖은 인삿말을 건넸지만 그녀는 간단히 묵살해버린다.
"서연아, 태워줄까?"
"됐어요."
그리고는 유정이의 뒤를 이어 사라져버리는 서연이. 결국 주차장엔 나와 현아 씨만 남게 되었다.
나는 차마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현아 씨의 얼굴을 물끄러미 마주보았다. 현아 씨는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지금의 이 고요한 소용돌이를 그저 관망하면서 무척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고 있었다.
"킥킥."
"왜 웃으세요?"
"성진 씨가 생각보다 더 재밌는 사람일 것 같은 기분이 막막 드네요."
"......."
할 말이 없다. 한숨조차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선 그녀를 내 차에 태웠다.
주인의 기분을 대변하는 듯한 힘 없는 엔진소리 한 차례와 함께 내 차가 주차장을 조용히 떠났다.
*
"성진 씨, 보기보다 대단하네요."
"뭐가요?"
비록 인정하긴 싫었지만, 서연이와 유성이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니 비로소 현아 씨를 대함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의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물론 최악의 타이밍을 골라서 등장한 현아 씨에게 여전히 약간의 원망이 남아있었기에 대답이 생각보다 조금 퉁명스럽게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아까처럼 그녀의 말이 당황스럽게 들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늘 보니까 한 미모 하는 여자들을 줄줄이 달고 다니던걸요?"
"줄줄이라니요?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우리 현주로도 모자라서 예쁜 후배를 두 명이나 끼고 다닐 정도면 충분히 줄줄이 아니에요?"
"그런거 아니거든요. 오토바이 타는 애랑은 그런 사이 아니에요."
현아 씨로 하여금 유정이마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귀찮은 일이 하나 더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은 물론이고, 왠지 유정이와 관련된 일엔 마냥 조심스러워지는 나였다. 하지만 현아 씨는 눈빛을 빛내며 내 옆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볼 뿐이었다.
그녀는 애초부터 조수석에 올라탔는데, 운전하는 입장에서는 조금만 고개를 옆으로 꺾어도 그녀의 가슴골이 훤히 보이게 되니 아주 기분이 민망했다. 그 대담하게 파인 이너 셔츠 덕분에 보기 싫어도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녀의 가슴 쪽에 시선이 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가슴골을 엿보는게 썩 싫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사이드미러를 볼 때조차 괜히 시선을 신경써야 하니 그것도 나름대로 곤욕이었다.
"호호호, 성진 씨 딱 걸렸어요."
"네?"
"오토바이 타는 애랑"은"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건, 병원에서 봤던 그 예쁜 아가씨 쪽과는 "그런 사이"라는걸 스스로 인정한 잖아요. 안 그래요?"
"그, 그건...."
아무래도 현아 씨가 나와 서연이 사이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내 안에서 너무 기정사실화 해버렸나보다. 자연스럽게 뱉고난 말이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런 의미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았다. 너무 경솔했나 싶어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혹시나 운전에 지장이 없도록 애써 운전대를 잡고 시선을 앞에 고정시켰다.
"호호. 뭐 좋아요. 그 아가씨 얘기는 일단 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또 뭐가 남았나요?"
"그 오토바이 타는 여학생 말이에요, 내가 보기에는 그 아가씨하고도 뭔가 있긴 있던 것 같은데요?"
"무슨 말씀이세요?"
"그 학생 뒷모습을 바라보는 성진 씨 눈빛 말이에요. 절대 "아무 사이"도 아닌 여자를 보는 눈은 아니었거든요."
"......."
예전부터 왜 이 여자는 나를 이렇게 파헤치지 못해서 안달인걸까?
아...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거겠구나. 자기 동생과도 관련이 있는 일일테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현주의 언니인 그녀로서는 화를 내거나, 따지고 들어야 되는 상황이 아닌가?
왜 그녀는 이렇게 즐기는 듯한 모습인지, 도대체 그녀의 진의는 무엇인지, 나는 점점 혼란스러웠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에요?"
"난 그냥 성진 씨와 솔직한 대화를 하고 싶은 것 뿐이에요."
솔직한...
"솔직"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렇게까지 다의적으로 여겨졌던 적도 처음인 것 같다.
그녀가 정말로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감을 잡고 있다면 어떻게 이 상황에서 솔직이라는 단어를 요구한단 말인가.
솔직하긴 솔직하되, 숨길 부분은 숨겨서 대화를 하자는 건가? 그건 말도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여친의 언니인 그녀에게 진정 "솔직한" 의미에서 모든걸 시인해 버리면 그것은 곧 내가 현주와 헤어져도 할 말이 없음을 그녀에게 시인하는 꼴이나 다름이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나의 표정이 딱딱해졌음을 현아 씨도 느꼈나보다. 그녀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성진 씨, 오늘 나랑 내기 하나 할래요?"
"내기... 라니요?"
뜬금없는 한 마디에 나의 신경이 다시 조수석 쪽으로 쏠렸다. 그녀도 내가 운전에 집중하지 못할까봐 우려되는지 아주 천천히, 내가 뜻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오늘 내가 성진 씨랑 헤어지기 전까지, 성진 씨가 내게 솔직한 모습만 보여준다면 나는 성진 씨에게 피해를 주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거에요. 현주에게 내가 느끼고 있는 바를 솔직히 말해준다거나, 하는 일도 없을 거에요. 성진 씨가 원하는 대로 말이에요."
"........"
그녀는 정말이지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과연 무슨 의중으로 그녀가 내게 이런 제안을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이 상황에서 어설픈 발뺌이나 연기를 하는 것이 그녀의 직감을 속이는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거란 것쯤은 너무도 잘 알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솔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면요?"
나는 직설적인 대답을 회피하는 대신 그렇게 돌려물었다. 현아 씨는 내 질문에 고양이처럼 방긋 웃으면서, 그 교태로운 웃음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했다.
"현주와 헤어지게 할 거에요."
"......."
뭘 어떻게 헤어지게 만들겠다는건지 난 모른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 수 있다.
늘 장난스러워 보였던 그녀였지만 방금 전의 그 한마디는 더없이 뚜렷한 진심이라는걸.
더불어 그녀가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조금쯤은 선명해졌다. 그녀는 지금 말그대로 내게 "솔직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적당한 위장과 변명으로 덮여진 그런 대답을 원하는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그녀는 듣고 싶어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더없는 모순이었다. 그걸 다 듣고도 내가 그녀의 동생과 계속 만나는 것을 용인하겠다니?
그녀는 내게 피해를 주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겠다 말했지만, 내 솔직한 대답을 듣고 나서도 만약 그녀가 자신의 말을 지킨다면 그것은 도저히 현주를 위하는 것이라곤 볼 수 없었다.
"난 현아 씨를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네요."
"그래요. 그래서 난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는 거에요. 성진 씨는 모르겠지만, 난 성진 씨에 대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이미 알고 있으니까."
"중요한 사실이라니요?"
"약속대로 성진 씨가 끝까지 솔직한 모습만 보여준다면 그것도 말해줄게요."
"하는 거 봐서.... 라는 뜻인가요?"
"그렇죠. 호호."
겉으로 보기에 현아 씨의 말투는 아까나 지금이나 변한 구석이 없다. 하지만 직접 맞대하고 있는 나는 알 수 있다. 지금도 그녀의 말에 비록 장난기가 가득하지만, 어느 것 하나 허투로 얘기하고 있는 내용은 없다는걸. 그래서 나는 그녀가 말하는 그 "중요한 사실"이라는게 무엇인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정말 이미 뭔가를 알고 있다면, 우선은 그녀의 말을 그대로 따라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 진의야 무엇이든 간에.... 서투르게 부정을 해봐야 남는게 없을 테니.
"좋아요. 그렇게 하죠."
나는 그녀의 장단에 놀아나 보기로 했다.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건지 두고 보겠다는 의미였다.
그 때 속으로 "타임 리와인더" 생각이 났다. 만약 지금 내 손에 그 초시계 하나만 있었어도, 지금 상황에서 전혀 고민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
"약속한 거에요."
현아 씨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백미러로 그 미소를 마주한 순간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타임 리와인더가 내 손에 있을 때에는 결코 단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인간 본연의 감각.
그것은 바로 예측할 수 없는 앞일에 대한 불안함이었다.
*
"현아 씨, 여기는...?"
나는 현아 씨가 지시하는 방향대로 운전을 했고, 그에 따라 어느 한 장소에서 내렸다. 하지만 내린 장소에서 나를 맞이한 것은 내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건물이었다.
"왜요? 호텔은 처음이에요?"
그 천연덕스런 반문에 오히려 내가 할 말이 없어진다. 설마 여길 들어가자는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벌써 저만치 앞장 서서 들어가고 있는 현아 씨.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으니 일단 그녀를 따라 들어간다.
그녀의 말마따나 나는 호텔이 처음이다. 하지만 그런 내 눈으로 보기에도 이 호텔이 결코 허접한 곳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느껴진다. 입구의 인테리어와 분위기부터가 어지간한 사람들은 쉽게 출입조차 하지 못하게 할 만큼 격식있는 아우라를 내재하고 있었다.
과연 이런 곳에 들어가도 되는지조차 망설이고 있는데, 프론트에서 현아 씨가 직원에게 황금색으로 된 한 장의 카드를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프론트의 직원 일동 전체가 일순 현아 씨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다. 더더욱 할 말이 없어지는 나였다.
"따라와요, 성진 씨."
기가 팍 죽었다. 그녀의 명령 앞에 일순간 작아지는 내가 초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타임 리와인더를 가지고 있을 때엔 결코 누구 앞에서 기가 죽는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능력을 지닌 인간인 것처럼 내심 여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나를 이끌고 가는 이 여자의 일부분을 엿보았을 뿐인데도 내가 과연 그녀에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지부터를 재보게 된다.
내가 그 시계 하나에 얼마나 종속되어 있었는지를 새삼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런 시시콜콜한 되새김보다도, 지금은 눈 앞에 놓인 이 의외의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내게는 더 중요했다.
현아 씨는 나를 고층의 어느 조용한 룸으로 안내했다. 그 때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 곳은 현아 씨가 미리 예약해둔 스위트룸이었다. 끽해야 모텔이 전부였던 내게 그 곳의 시설은 그야말로 별천지로 다가왔기에, 나는 방에 입장하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텔은 정말 처음이에요?"
"아... 네."
어찌나 위축되었는지 목소리마저 기어들어가는 내가 싫다. 현아 씨는 아랑곳 않고 옷걸이에 자신이 입고 왔던 코트를 벗어서 걸었다. 그 아슬아슬한 노출 차림을 간신히 가리고 있었던 코트 한겹이 사라져 버리자, 나는 현아 씨가 과연 하의를 입었을까 아닐까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치마를 입기는 입었다. 하지만 그것은 치마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어색한 옷이었다. 치마라는 것 또한 몸을 가리기 위한 의복의 일부분임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치마로서의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할 것 같았다. 허벅지는커녕 엉덩이조차 제대로 가려질까 의심되는 그 짧은 길이의 치마는 몸을 조금만 숙이거나 다리를 들어올리기만 해도 그 속을 훤하게 비출 것처럼 보였다. 코트를 입었을 때 치마 자락이 보이지 않았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나는 괜히 그녀의 다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의 분위기에서만큼은 내가 그녀의 몸에 시선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왠지 그녀에게 말려가는 듯한 이 분위기가 싫었다. 더이상 그녀의 손에 놀아나다가는 뭔가 장난감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저를 왜 여기 데려오신 거에요?"
"나한텐 여기가 제 2의 집쯤 되는 곳이거든요. 우리집 다음으로 맘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곳이랄까? 호호, 그러니 현주 몰래 이런 이야기를 하기엔 가장 좋은 장소라고도 할 수 있겠죠."
"여기가... 집이라구요?"
"업무 상의 집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내 고객들도 여기를 자유롭게 드나들곤 하니까."
고객.... 그러고 보면 내가 현주네 집에 처음 찾아갔을 때 현아 씨의 방에서 나왔던 그 남자도 "고객"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그 당시에는 중요하게 생각치 않았지만 그건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현아 씨의 뇌쇄적이고 선정적인 이미지와 겹쳐져, 문득 머릿 속에 하나의 가정이 그려진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고객"이 맞는 건가?
"현아 씨가 하시는 일이 뭔지... 물어도 될까요?"
그녀의 입에서는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나요? 보험 설계사에요."
"보, 보험 설계사요? 그럼 고객이라는게...."
"말 그대로 보험 계약을 해주는 고객들이죠. 왜요?"
순간 또 한차례 할말을 잃고 말았다. 사실 질문을 그렇게 하기는 했었지만 마음 속에서는 이미 현아 씨의 직업을 퇴폐적인 유흥업 쪽으로 어느 정도 기정사실화 해놓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정말로 묻고 싶었던건 현아 씨가 그런 일을 하게 된 이유였다. 하지만 그녀는 첫 대답부터 나의 가정을 정면으로 뒤집어 버린 것이다.
"어머, 혹시 성진 씨 나를 이상한 여자로 생각했던건 아니죠?"
애매하게 꼬인 나의 표정에서 그녀가 무엇인가를 읽었는지 눈썹을 치켜올리며 나를 찔러온다.
한순간 그녀를 홍등가의 여자로 생각했던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나는 그만 발뺌을 했다.
"아,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흐음, 그래요? 혹시 나를 오피스걸이나 콜걸 정도로 생각했던건 아니구요?"
"그, 그런거 아니에요."
그녀는 정확하게 내가 생각했던 바를 콕 짚어오고 있었다. 여태까지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면 그녀가 하는 일이 적어도 "그쪽 분야" 내에 속한 걸거라 막연히 확신했었기에, 나는 솔직히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애써 당황스런 마음을 숨기려는 내게 현아 씨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더니, 하나를 접었다.
"성진 씨, 내가 세 번의 기회를 줄게요. 한번 실수로 내기에서 지게 되는건 억울할 테니까."
"무슨 말... 이에요?"
"말 그대로, 솔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도 세 번까지는 허용해 주겠다는 거에요. 그리고 방금 성진 씨는 한번의 기회를 날렸네요."
"뭐라구요?"
"성진 씨 눈빛에서부터 느낄 수 있어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날 창녀로 생각했다면 그렇게 생각했다고 솔직하게 말해요. 적어도 오늘 여기서 나갈 때까지는 그래야 해요. 오늘 나와 헤어지기 전까진 솔직해지기로 약속하지 않았나요?"
"......."
부정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그저 침묵했다. 내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현아 씨는 그대로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그녀가 다리를 꼬으니 역시나 치마가 가림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말려 올라가 버린다. 나는 그 부분을 애써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요. 사실 그렇게 생각했어요. 현아 씨는 창녀일 거라고... 이제 됐나요?"
"좋아요. 그렇게 솔직하게 얘기해줘요. 이 안에서는."
나를 가지고 노는 듯한 그 모습에 나는 속으로 울컥하고 있었다. 서연이가 나를 애교 섞어 가지고 노는 것과는 느낌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나는 그저 지금 이 여자의 손에서 마리오네트처럼 조롱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따지고보면 나이도 나와 같은 그녀에게서 그런 취급을 받게 되니 자존심이 상하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을 해도 되겠어요?"
"예."
사실 속으로 켕기는 것이 있어 그녀의 질문을 되도록 피하고 싶은 나였지만, 그 순간의 욱하는 마음 때문에 호기롭게 대답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뒤 이어진 그녀의 질문부터가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나의 태도를 이미 무너뜨리고 있었다.
"우리 현주, 많이 사랑하나요?"
"......."
설마하니 그런 질문이 나올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나와 서연이, 혹은 나와 유성이의 관계를 물어올거라 생각했던 나였기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오히려 이런 질문이라면 대답 못할 것도 없었다.
"예."
"그래요? 한 점 망설임 없이 그렇게 대답할 수 있어요?"
그녀는 나에게 솔직함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요구대로 솔직한 대답을 해주었다. 내가 현주를 사랑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예."
"흐음~"
현아 씨가 테이블 위로 턱을 괴고 내 눈을 들여다 보았다. 사람의 속내를 읽어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실제로도 그녀는 상대방의 속을 읽어내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선을 마주하던 그녀가 살풋 웃음을 지었다. 아까의 그 장난기 넘치는 웃음이었다.
"좋아요~ 호호. 사실 아니라고 했으면 더 물어볼 게 없었을 거에요."
"그런걸 물어보실 줄은 몰랐네요."
"왜요?"
"학교 후배와 무슨 관계인지, 뭐 그런 것들을 물어보실 줄 알았는데요."
"이미 답을 알고 있는걸 구태여 확인하기 위해서 시간을 써야 하나요?"
너무도 맹랑한, 거만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녀의 반문 앞에 오히려 내가 다시 할 말을 잃고 만다. 벙 찐 표정을 하고 있는 내게 현아 씨는 여유 넘치는 웃음을 지으며 되려 다시 질문을 던진다.
"섹스 파트너잖아요. 안 그래요?"
"......."
부정할 래야 부정할 수가 없는 벼랑까지 내몰리고 말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전혀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는 현아 씨를 보며 나는 도저히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싶은건 성진 씨가 그 여자와 "섹스" 따위를 했는지 아닌지가 아니에요. 오히려 묻고 싶은건 이거죠. 그 여자를 사랑하나요?"
"사.. 랑이라니요?"
그녀는 내게 서연이를 사랑하냐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이야말로 내가 생각하기에 요지를 완전히 비껴나가는 질문이었다. 섹스파트너 사이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연인이지 결코 섹스파트너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현아 씨도 짐작하셨겠지만 그냥... 섹스 파트너일 뿐이에요."
"그래요? 정서적인 부분 없이 서로 몸으로만 얽혀있는 사이란 뜻이에요?"
"맞아요."
나는 최대한 당당하게 말하려 애썼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구태여 변명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그녀의 질문을 들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서연이에 대한 내 마음을 다시 되짚어보고 있는 내 속내를 현아 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정말 서연이에게 아무런 정서적인 감정이 없는 걸까? 내가 아무리 둔감하다한들 서연이가 내게 섹스파트너 그 이상의 어떤 부분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어떨까? 정말로 주서연이라는 여자를 단순한 성욕의 배출구로만 여기고 있는 걸까?
그에 대한 확실한 답을 나조차도 내리기 힘들었다. 그래서 떳떳하게 답했다. 나조차도 모르는 내 마음까지도 현아 씨가 알 수는 없을 테니까. 대신 나는 혼란스러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녀에게 되려 질문을 던진다.
"그게 중요한가요?"
"아주 중요해요. 왜냐하면 나는 성진 씨가 그것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그녀는 더이상 말해주지 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렇다면 현주 말고 마음에 둔 사람이 있나요?"
"......없어요."
좀 전의 질문처럼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못했던 이유는, 그 순간 내 머릿 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현아 씨도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이 분명했다.
"두 번째 기회를 날리셨네요."
"........"
어쩌면 그렇게 성급하게 대답한 것은 그만큼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불과 오늘 처음으로 잠깐 얼굴을 마주쳤을 뿐인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성진 씨 스스로도 알고 있을 거에요. 꼭 사랑이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마음 속에 현주 말고 누군가가 있다면 솔직히 말해주세요. 나는 성진 씨 생각보다 꽤 많은걸 읽고 있으니까요."
"그래요, 있어요."
유정이에 대한 내 마음을, 이런 식으로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인정하게 될 줄은 몰랐다. 도대체 나에 대해서 뭘 얼마나 파헤치고 싶다는 걸까? 이렇게 나를 속속들이 해부해서 그녀가 얻게 되는게 뭐지?
"이제 마지막 한 번의 기회가 남았어요, 성진 씨. 단 한번이라도 내게 솔직하지 못한 대답을 한다면 난 오늘 성진 씨와의 대화를 끝낼 거에요."
말의 내용은 누가 보더라도 협박이었지만, 이상하게 내 귀에는 그것이 협박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내게 더욱 솔직해져 달라는 부탁이나 다름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성진 씨에게만 솔직한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 또한 너무 일방적이겠죠. 여태까지 성진 씨가 나름대로의 솔직함을 보여준 답례로, 나 또한 내 솔직한 부분을 보여줄게요. 비록 일부분이지만."
"현아 씨의 솔직한 부분이라구요?"
"그래요. 현주에게서 우리가 과거에 겪었던 일을 들었지요?"
현아 씨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굳이 그것까지 부정하고 싶은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자신의 수치스런 과거를 알고 있는 남자를 눈 앞에 두고서도, 그녀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그 과거를 알고 있어 다행이라는 듯, 그녀는 자연스럽게 다음 말을 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과거는 우리 자매에게 각각 무언가 하나씩을 새겨놓았지요. 성진 씨도 알다시피... 내 동생에게는 불감증이라는 이름의 상처를 남겼구요."
물론 나도 묻고 싶었다. 왜 현아 씨는 그런 과거를 보내고서도 아무렇지 않은듯 살아가는 건지.
무슨 이유로 남자들을 유혹하는 듯한 그런 손길, 눈빛, 말투로 자신을 교태롭게 꾸미며 살아가는 건지.
하지만 굳이 먼저 묻지 않았다.
"나에게는 무엇을 남겼을까요?"
"글쎄요."
내 모호한 대답을 들은 그녀가 더없이 은근한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비록 표정을 억제한 고요한 웃음이었지만, 여태까지 내가 보았던 현아 씨의 웃음 중에 가장 유혹적이고 은밀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알고 싶나요?"
만약 그것이 현주에게 남은 것과 마찬가지의 고통스런 상처라면 나는 그것을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이 하나 뿐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네."
현아 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시선은 그녀의 발걸음을 고스란히 좇았다. 아무런 예고 없이 침대 옆에 놓인 수화기를 집어든 그녀는 프론트에 난데없이 전화 연결을 걸었다.
"강 사장님 도착하셨으면 지금 바로 올려보내세요."
그 한 마디만 남기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어리둥절하여 바라만 보고 있는 내게 그녀가 다시 한번 은근한 웃음을 빙긋 지어보인다. 사람 하나는 충분히 들어가 숨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옷장을 가르키며,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잠시 들어가 있어줄래요? 놀라운걸 보게 될 테니까."
현주가 내게 말하지 못한 그녀의 과거 이야기 중 남은 부분을, 바로 이 자리에서 듣게 될거라곤 이 때 미처 상상하지 못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이번 주는 상당히 바쁜 한 주였던 듯 합니다
금요일까지 정말 눈코 뜰새가 없었던 것 같군요 ^^;
그래도 토요일 오전에 한편을 올리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금 이른 기상을 해보았습니다
현아의 캐릭터는 내면이 조금 복잡하기에 표현하는데에 시간이 좀 걸리네요
아마 다음 화까지는 현아의 이야기를 하게 될 듯 합니다
조금 재미가 없을 수도 있어요 하핫 ;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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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2-28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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