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18장
그 후로 정확히 일주일이 흘렀다.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평일날의 평범한 아침이었다.
유성이... 아니, 유정이의 꿈을 꿨다. 그러고 보면 병원에 있을 때도 그녀가 꿈에 나와 몽정을 한 적이 있었지.
왜 그녀가 유독 꿈에 잘 나타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 내가 정말 유정이를 좋아하는 건가?
"익숙해. 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정말 이상한 감각이었다. 원래 설레임은 익숙함을 동반할 수 없는 법이니까. 사랑에 빠질 때 우리가 설레임을 느끼는 이유는 상대방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내가 몰랐던 그 혹은 그녀의 모습을 점점 더 알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설레임. 그것은 미지의 영역을 향한 일종의 모험이자 개척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두근거리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서 설레임은 익숙함으로 변한다. 두 감각은 동시에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공존할 수 있더라도 그 시기는 매우 짧다. 상대방에 대해 충분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이상 설레임을 느끼기는 힘든 법이니... 비약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법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정말 이상한 감각이었다. 꿈 속에서의 유정이를 보는 순간 내 마음은 심장소리 하나하나까지 귓가에 울릴 만큼 설레고 두근거렸지만 그러면서도 그녀의 존재가 내게 익숙하다는 그 이유 모를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마치 섞일 수 없는 두 감각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것 같은 느낌.
내가 아는 그 어떤 언어로도 그 미증유의 감각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내가 널 좋아하는거니?"
내 스스로 답을 알 수 없어서 꿈 속의 그녀에게 물었다. 나를 안고 있던 그녀는 그저 밝게 웃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그렇게까지 환하게 웃음 짓는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걸까? 아마도 사랑은 아닐 거야.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아직까지 그렇게 길었던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녀가 다른 여자들보다 더욱 특별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
호감. 호감인가? 내가 그녀에게 가르쳤던 그 단어.
그래, 내가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건 틀림 없는 것 같아. 하지만 도대체 왜?
현주. 문득 현주의 이름도 떠올랐다. 내가 현주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나?
꿈 속에서는 왠지 현주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여자친구가 현주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그 꿈이 현실감 없는 꿈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죄책감 같은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 꿈은 그런 불편한 감각을 지워버릴 수 있게 해주는 곳이었다.
"유정아, 너 나랑 사귈래?"
솔직히 나는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현주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현주도 사랑하지만, 유정이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유정이를 여자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한유성을 한유정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남자가 "나"이기를 바랐다.
그 역할을 다른 사람이 갖게 되는 것을 내 마음은 허용치 않고 있었다. 내 품에 안겨 여자로서의 행복을 깨달아 가는 유정이의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지극히 행복해졌다.
알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이래선 안 된다는 걸.
그녀에게 있어 생애 처음으로 "사랑"이란 이름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는 나 또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주어야 한다. 이미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으면서, 나머지 마음 반 쪽으로 그녀에게 그런 행복을 안겨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 나의 착각이다.
하지만 이 꿈은 왠지 그런 불편한 감각을 지워버릴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이 꿈이 마음에 들었다.
"유정아."
그렇게 꿈 속에서 하염없이 그녀를 안고 있다가 꿈에서 깨었던 것 같다. 별 다른걸 하지 않았는데도 그냥 안고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꿈에서 깨기 전에 그녀도 나를 소리내어 무어라고 불렀다. 나는 그녀가 나를 어떻게 부르는지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듣기 전에 꿈에서 깨고 말았다.
그 순간 그녀는 나를 뭐라고 불렀을까?
선배? 아니면 오빠?
*
"젠장. 쪽팔리게...."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팬티 속이 축축하다는걸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이로써 두번째.
요즘 들어 왜 이렇게 몽정을 자주 하는거지? 성생활이 딱히 부족하다거나 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유정이만 나오면 왜....
"아~ 젠장. 군인도 아니고 이 나이 먹고 쪽팔리게 몽정이라니... 나중에 학교 가서 유정이 얼굴 어떻게 보지? 오늘은 휴일도 아닌데."
설상가상으로 오늘은 유정이, 서연이와 함께 듣는 그 교양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원래 어떤 이성에 대한 민망한 꿈을 꾸고 나면 하루 동안은 그 사람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운 법인데, 싫어도 얼굴을 볼 수 밖에 없는 시간이 오늘 포함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이 왠지 불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내심 기대되는 그 이중적인 기분을 속일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무의식적으로 휴대폰부터 확인한건 딱히 연락이 올만한데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현대인의 습관 같은 것이었을 뿐. 어쩌면 현주로부터 문자가 와 있을지도 모르고.
"엥?"
물론 현주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긴 했다. 대충 보니 딱히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시선을 먼저 잡아끈 카톡 한 줄이 있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자고 있는 동안 휴대폰으로 날아온 카톡이 현주의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것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카톡이 현주의 것보다 더 먼저 눈에 띄었던 이유는 공교롭게도 그것이 그녀의 언니로부터 날아온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저장해두었던 현아씨의 연락처로부터 하나의 메시지가 와 있었던 것이었다.
간밤에 뜬금없이 자매로부터 나란히 카톡을 받게 될 줄은 몰랐기에 나는 우선 현주의 카톡을 확인하고, 그 다음 현아 씨의 카톡을 확인했다. 솔직한 마음으로 현주의 카톡은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평범한 아침인사였으니 더욱 호기심이 가는 쪽은 그녀의 언니 것이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여유를 두고 읽고 싶었다.
- 성진 씨, 오늘 잠시 시간 좀 내줄래요~?
의외로 이모티콘 하나 없이 짤막한 문장이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도 물결무늬를 붙인 것을 보니 밝고 명랑한 현아 씨의 음성 톤이 연상되는 기분이었다. 문득 현주로부터 들었던 그녀들의 과거가 떠올라 나는 순간 몹쓸 생각을 했다. 어릴 적에 그런 일을 겪고도 현아 씨는 정말 뭐랄까...
하지만 못 된 생각은 잠시 지우고 우선 답장을 하기로 한다.
- 오늘요? 학교 가는 날이긴 한데.
이상하게 여친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치곤 괜히 말투를 의식하게 된다. 하지만 굳이 그걸 또 드러내고 싶진 않아서 나도 담담하게 짤막한 답장으로 응수했다. 답장까지 시간이 꽤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마침 현아 씨도 휴대폰을 보고 있었는지 별로 텀을 두지 않고 빠른 답장이 날아왔다.
- 그럼 학교 끝나고 잠시 보면 안 돼요? 혹시 약속 있어요?
- 아뇨. 끝나고 보는건 괜찮아요. 그럼 수업 끝나고 만날까요?
- 그래요~~ ^^ 성진 씨 OO대 다니는거 맞죠? 내가 그리로 갈게요.
이모티콘을 쓰는 모습을 보니 새삼 더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쓸 데 없는 생각은 지우고 역시나 본론에 집중한다.
- 굳이 학교로 안 오셔도 되는데. 제가 현아 씨 집 근처로 갈게요.
- 모처럼 캠퍼스 구경 하고 싶어서 그래요~~ 현주 몰래 보고 싶기도 하고.
현주 몰래? 그건 무슨 의미일까?
또 나도 모르게 현아 씨에 대한 이상한 망상에 빠지려다 그 생각을 애써 털어냈다.
현주의 과거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현아 씨의 언행을 바라보는 시선을 약간 바꾸어놓았다.
현주에게서 이야기를 듣기 전이었다면 몰라도 그녀의 과거를 알고 난 지금, 왠지 현주의 언니인 그녀가 동생 몰래 동생에게 해가 될 짓을 하려고 나에게 접근하는 거라는 생각은 좀체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가 평소에 그렇게 성적으로 유별난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에 있어서도 나는 그 나름의 어떤 이유가 있을거라 막연히 짐작했다. 그건 아마도 현주가 내게 얘기해주지 않은 나머지 부분과도 관련이 있을 터였다. 아직은 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기에, 섣불리 현아 씨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수업은 4시에 끝나요.
- 오키. 네 시까지 학교로 갈게요~
짧은 카톡이 끝났다. 이른 아침부터 조금은 의외의 이벤트였다.
뭐 별다른 일이야 있겠냐 싶어 나는 크게 우려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등교길에 올랐다.
*
그 날은 서연이가 유독 예뻐 보였다. 물론 서연이가 예쁜 거야 원래부터 당연히 알고 있었던 거지만 그날 따라 유독 그랬다. 하늘하늘한 플레어 스커트에 단정한 가을 코트를 매칭한 그녀의 스타일에서 여성적인 감각과 세련미가 물씬 느껴졌다. 깔끔한 코디였지만 그녀의 날씬하고 맵시 있는 몸매를 너무도 잘 드러내는 차림이었기에 캠퍼스를 같이 걷는게 황송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지나가는 남학생들이 한번씩은 흘끗 돌아보고 갈 정도였으니까.
쏟아지는 남학생들의 시선들을 받으며 나는 좀 멋쩍어 졌다. 서연이와 캠퍼스를 같이 걷기만 하는데도 내가 이런 따가운 눈총을 받는 이유는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새삼 내가 서연이와 몸을 섞은 관계라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세상 남자들이 이 사실을 알면 무슨 생각을 할까? 아마 날 죽이려 들겠지?
"오늘 예쁘네."
그녀에게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예전에 그녀에게 추근거릴 때 호감을 얻어보겠다고 막무가내로 예쁘다는 칭찬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그녀도 그런 칭찬을 거북해 했었고. 하지만 지금은 정말 있는 그대로의 의미에서 칭찬을 하는 거란걸 그녀도 느끼는지 빙긋 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웬 칭찬이에요?"
"뭐 그냥... 오늘 가을 여자 느낌도 나고. 니가 쓸데없이 너무 예쁘니까 남자들이 괜히 나한테 험한 시선 보낸다."
"어머, 정말요?"
예쁘다는 칭찬 앞에 여자는 장사 없다더니 서연이 같은 퀸카도 그건 마찬가지인가보다. 예쁘다는 말은 평소에도 충분히 듣고 살텐데 그 말이 그렇게 기분 좋은 걸까? 그녀가 내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다음 말이 왠지 나를 샐쭉하게 만들었다.
"어디 잘 생긴 남자가 말이라도 걸어주면 좋겠네요."
"뭐야?"
괜히 질투가 솟구쳐 서연이를 노려보았다. 보는 눈이 많으니 요걸 혼낼 수도 없고.
"너 남자한테 잘 보이려고 이렇게 예쁘게 입은 거야?"
"원래 남자든 여자든 꾸미는건 이성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거 아니에요?"
물론 그 말이 맞긴 했지만 서연이가 다른 남자 운운하는게 썩 기분 좋지 않았다.
"그래서 잘 생긴 남자가 대시하면 그거 받아줄 거야?"
"글쎄요. 얼굴 봐서요. 아, 이제부턴 얼굴 말고 다른데부터 보기로 했으니까 "그거"라도 한번 해봐야 하나?"
서연이가 말하는 "그거"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더욱 아니꼬운 감정이 뱃 속에서 치솟았다. 마음 같아서는 요 앙큼한 년을 당장이라도 홀랑 벗겨서 혼쭐 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서연이는 왠지 그런 내 반응을 알고 나를 골려 먹는 것 같았다.
"나 말고 다른 남자랑 옷 벗고 뒹굴겠다 이거야?"
"참 나. 자기는 여자친구까지 버젓하게 있으면서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순간 서연이의 당돌한 멘트 앞에 할 말을 잃는 나였다. 하긴 그 말이 맞긴 했다. 하지만 침대에서 섹스할 때는 오직 나만의 정액받이가 되어주겠다는 듯이 내게 헌신적으로 봉사하곤 했던 그녀가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니 마음 한 구석이 꽁해지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누가봐도 명백한 소유욕이겠지?
"뭐... 그렇긴 하네."
그렇잖아도 현주를 두고 요새 서연이나 유정이와 얽히고 있는게 괜스레 자꾸 속이 찔리고 있는 나였다. 서연이의 그 한마디가 내 치부를 정확하게 콕 찌르는 것 같아서 나는 그만 침울해졌다. 서연이는 이런 내 속도 모르고 내가 질투를 하는게 재밌다는 눈치였다.
학생식당에 들어서니 문득 서연이와 이 날은 매주 같이 점심을 먹기로 약속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놓고 그 뒤에 여러가지 일이 겹쳐 줄곧 같이 밥을 먹지 못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녀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식판을 들고 내 뒤에 붙으면서 재잘거렸다.
"그러고보니 우리 이 날은 같이 밥먹기로 했으면서 첫날 이후로 한번도 못 먹었네요."
"어어. 그러네."
무미건조하게 대꾸하는 내 얼굴을 서연이가 빼꼼 올려다본다. 그제야 내 기분이 상했다는걸 느끼는지 서연이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선배, 혹시 삐쳤어요?"
"몰라."
원래 삐친 인간한테 삐쳤냐고 물어보면 더 아니꼬운 법이다.
서연이가 마치 유치원생 어르듯이 나를 달래기 시작한다.
"에이~ 왜 그래요. 아까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래요?"
"......."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것도 자존심 상한다.
"알았어요 알았어~ 장난 안 칠게요. 화 풀고 밥 먹어요."
"됐어. 네 말대로 우리가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끝까지 꽁한 티를 내며 고개를 돌리고 줄을 서 있자 서연이가 잠시 말이 없더니 자기도 얌전히 내 뒤에 가서 줄을 섰다. 혹시 달래줄 마음을 아예 접은 건가? 그렇다면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서운한데... 제길, 나 왜 이러냐.
하지만 다음 순간 서연이는 텅 빈 식판으로 내 등을 팡하고 때렸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난 화들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표정이 샐쭉해져 있었다.
"이럴 거에요? 남자가 쪼잔하게 정말."
"야, 그거 성차별적 발언이야. 남자도 서운할 수 있는 거지."
"서운해요? 내가 다른 남자 얘기해서?"
왠지 그렇다며 곧이 곧대로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자존심 때문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녀 말마따나 우리가 연인 사이도 아닌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싫은 기색을 드러내는게 과연 말이 되는 이야긴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감정은 질투라는걸 인정하고 있었지만 머리는 그게 불합리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냥... 조금."
하지만 결국 솔직히 인정하고 만다. 차라리 그게 더 좋을 것 같아서였다.
괜히 아닌 척 해봐야 내가 티를 내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서연이가 그걸 간파 못 할 리 없으니까.
"쳇. 선배 그거 알아요?"
"뭐를?"
"선배는 오늘만 그런 기분 느낀 거죠? 나는 선배를 볼 때마다 그런 기분을 느껴야 해요. 선배 옆엔 항상 여자친구가 있잖아요. 안 그래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육체적인 부분으로만 나와 맺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서연이의 입에서 돌발적으로 그런 말이 나오니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할 말이 없어져 서연이의 얼굴을 내려다 보니 그녀는 나만큼이나 서운한 얼굴이었다. 평소에도 그녀는 정말 나를 보며 그런 서운함을 느꼈을까?
"너... 나 좋아해?"
도저히 학생들이 바글거리는 학생 식당 한복판에서 물어볼 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서연이는 고개만 숙이고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괜한 소릴 했구나 싶어 스스로 약간 찔끔해졌다. 하긴 물어도 이런 장소에서 묻는건 아니었는데...
덕분에 아까 전의 좋은 분위기는 어디론가 날아가고 어색한 정적만이 남게 되었다. 식사를 받아서 한쪽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도 우리는 그저 한동안 조용히 먹기만 했다. 숟가락 젓가락을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우리 사이에 간간히 한번씩 울렸고 나는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만큼 그녀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한동안 밥알을 깨작거리던 그녀가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나는 밥을 거의 다 먹어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식판을 보니 절반도 먹지 않은 채였다.
"선배."
"으, 으응."
그 기묘한 박력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화났을 때의 유정이만큼은 아니지만 서연이의 그 모습에선 또 그녀 나름대로의 독특한 위압감이 있었다.
"선배 눈엔 내가 어떤 여자로 보였는지 모르지만 난 사실 섹스파트너 같은거 만들어 본 적... 몇 번 없어요."
인적이 뜸한 구석 자리에 앉은게 다행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난 모습의 그녀는 천천히 뒷말을 이었다.
"섹스를 좋아하는건 사실이지만 그렇게까지 문란하게 살았던건 아니라구요. 하룻밤 불장난 정도는 좀 쳐봤어도 이렇게 꾸준히 만나면서 복잡한 관계로 지냈던 적은 거의 없구요, 특히 내가 먼저 요구해서 이런 관계가 된 건 처음이에요."
사실 그 부분은 내가 가끔 서연이에게 궁금했던 점이기도 했다. 그녀는 나 말고도 다른 남자와 섹스파트너로 지내본 적이 있는지, 있다면 얼마나 경험이 많았는지 등등.... 어쩌면 내가 그런 경험이 전무했기에 이런 관계를 유지함에 있어서는 그녀가 나보다 더 능숙하리라 내심 여겨왔는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그녀가 그런 말을 하는건 내게는 조금 충격이었다. 특히나 그녀가 먼저 요구한 적은 처음이라는 부분이 내 기분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물룬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뭐랄까, 내가 좀 나쁜 놈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난 사실 선배를 볼 때마다 무슨 기분으로 선배를 대해야 하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구요. 내가 감정선을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지. 정말 육체적인 부분으로만 깔끔하게 대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부분까지 생각해야 하는 건지...."
"......."
나는 서연이의 말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에 와서 그런 무의미한 의심 따위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서연이는 나와 이런 육체적인 관계로 지냄에 있어 지극히 무덤덤하고 익숙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녀에게 있어선 처음 있는 일이 아닐 테니까, 당연히 별 힘든게 없을 거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도 그녀 나름대로의 어떤 고민과 고충이 있었을 텐데, 연인이 있고 없고만이 문제가 아니었을 텐데.
특히나 그녀는 여자이기에 내가 짐작할 수 없는 더더욱 감성적인 어떤 부분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여태껏 서연이와 지내면서 서연이의 입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한번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던 부분이, 신기하게도 그녀의 말 한마디로 갑자기 너무도 선명하게 인식되었다.
왜 진작 그걸 몰랐을까?
그래서 부끄러웠다.
"미, 미안...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구나."
늘 남 앞에서 도도하고 프라이드 넘쳤던 그녀가 누군가가 들을지도 모르는 이런 공간에서 참다 못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게, 어찌 보면 그녀가 얼마나 서운해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사실 서연이가 뭐가 아쉬워서 나와 이런 떳떳치 못한 관계로 지내고 싶었을까.
그녀는 나와의 육체적인 관계가 그렇게 좋았던 걸까?
그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묵묵히 감수할 만큼...
"솔직히 내가 선배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환 선배 이후로 아직 누군가와 사귀고 싶은 맘이 들지 않는 것도 있구요. 그래도 나는요... 선배를 볼 때마다 혼란스러워요. 내가 이런 관계에 익숙하다고는 생각 안 했으면 좋겠어요. 선배는 적어도 내 연인의 존재 때문에 고민하거나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구구절절 맞는 말 앞에서 나는 고개를 들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먼저 이렇게 지낼 것을 요구했기에 그걸로 충분하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 쪽에서 먼저 그것을 바랐어도 내가 그것을 승낙한 이상 나에게도 그녀의 입장을 헤아려줄 책임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었다.
"네 말이 맞아."
침중한 표정이 된 내가 고개를 푹 숙이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더욱 무거워졌다. 괜히 쓸 데 없는 부분을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서연이도 이런 무거운 공기가 맘에 들지 않는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러니까 이제부턴 내 생각도 좀 해주는 거에요. 그럴 수 있죠?"
"응."
같이 밥을 먹고 인문관으로 올라오니 수업시간까지 생각보다 공강이 길었다. 분위기가 크게 서먹한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서연이와 약간 미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기에 나는 어떻게든 다시 화해를 하고 싶었다. 문득 같이 복도를 걷다보니 수업이 없는 빈 강의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여긴 왜요?"
"잠깐만."
다행히 들어와 있는 학생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강의실의 문을 안쪽에서 잠구었다. 문을 잠구는 내 모습을 보자 서연이의 표정이 약간 샐쭉해졌다. 마치 "이 상황에서도 엉큼한 생각이 나니?"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지금은 좀 더 로맨틱한걸 해주고 싶다 이거야.
"웁."
강의실 문을 닫자마자 나는 서연이를 벽면에다 밀치고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덮었다. 갑작스런 기습 키스에 놀라 토끼처럼 눈이 동그래지는 서연이였지만 나는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그녀를 벽에다 단단히 몰고는 한 손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감쌌다. 차가운 돌벽에 그녀의 등이 닿지 않도록 해주기 위해서였다.
혀와 혀가 엉키었다. 처음엔 강제로 뚫고 들어갔지만 내가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나머지 손으로는 그녀의 머릿결을 지나 목 뒤를 쓰다 듬으니 그녀도 머뭇거리며 차츰 혀를 얽어왔다. 노골적으로 큰 소리를 내기는 힘들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은근한 스릴을 만끽할 수 있는 키스였다.
아까의 일에 대한 사과라도 하는 듯이 나는 정말 지극정성으로 그녀의 입안 곳곳을 애무했다. 밥 먹고나서 양치를 아직 안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같은걸 먹었으니 상관없겠지 싶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그녀와 섹스를 배제하고 키스를 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계곡에서 한번 있었나? 하지만 그 때도 결국 섹스로 넘어갔지.
"흐음...."
서로 입은 더없이 바빴기에 코로 숨결을 흘려내야만 했다. 뜨겁고 간지러운 숨결이 서로의 코 끝을 자극하자 그 느낌이 무척 짜릿했다. 내 손은 여전히 그녀의 등 뒤를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었고 나머지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카락이나 목, 얼굴 등을 매만지고 있었다. 마치 소중한 인형을 다루기라도 하는 듯한 손놀림으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듯한 그 손길에 서연이도 평소랑은 다르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적극적이고 격정적이었던 그녀의 반응도 좋았지만 이렇게 얌전히 내 키스를 받아들이며 어딘지 모르게 약간 쑥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 또한 지극히 사랑스러웠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를 내 연인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하아..."
서로의 타액이 끈적이며 엉키는 소리가 들리자 청각에 자극을 받는지 그녀의 숨이 약간 더 뜨거워졌다. 하지만 결코 가슴이나 엉덩이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저 조용히 이런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다. 깊어졌던 키스가 약간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우리는 잠시 떨어졌다.
솜털 하나하나가 보일 정도로 가까이서 우리는 서로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서연이는 역시나 너무도 예뻤다. 그녀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치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앞으로는 네 기분 더 많이 생각할게."
"치."
갑작스러웠지만 아늑했던 키스도, 키스 후에 이어진 나의 솔직한 사과도 그녀에게 썩 나쁘지 않았었나보다. 여전히 입을 샐쭉하게 내미는 서연이였지만 아까만큼 우리 사이의 분위기가 무겁지는 않게 느껴져서 좋았다.
"어떻게 더 많이 생각하려구요? 여자친구랑 헤어지기라도 할 거에요?"
"글쎄...."
만약 현주를 버리고 서연이와 만난다면 어떨까? 더 행복할까?
적어도 현주와의 사이에서 겪어야 하는 그런 문제에 대해선 고민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걸 보면 내가 현주를 그만큼 사랑하는걸까?
아니면 이 또한 구질구질한 욕심과 소유욕의 발로일 뿐일지도 모르지...
"선배는 보기보다 솔직한 사람이에요."
"무슨 뜻이야?"
"그냥... 지금 같은 분위기에선 대충 비위 맞추려고 대답할 수도 있는데 끝까지 고민하니까요. 선배가 고민하고 있다는게 내게도 느껴져요."
서로의 몸이 이렇게 닿아있으면 그만큼 더 뚜렷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긴 있나보다.
"그래도 선배는 내 마음을 읽는데 서투른 것 같으니까, 선배가 모르는거 하나 정도는 가르쳐줄게요."
"뭔데?"
"사실 오늘 예쁘게 차려입은 거, 선배한테 잘 보이고 싶은 이유도 있었어요. 선배랑 같은 수업을 듣는 날이니까요."
"어.. 어?"
너무도 뜻밖의 내용이라 나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가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꾸미고 왔다는 말이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정도 화가 풀렸는지 내 그런 모습을 보며 키득거리며 웃기까지 하는 서연이였다. 멍하게 서 있는 내게 서연이가 쏙 안겨오며 애교를 부린다.
"여자는 자기 입으로 이런거 말하는거 싫어해요. 그러니까 질투만 하려고 하지말고 그런 부분까지 읽으려고 노력해 봐요. 알았어요?"
"아, 으응...."
누가 보면 엄한 학교 강의실 안에서 대체 뭐하는 짓거리냐고 타박했겠지만 왠지 서연이의 그런 눈빛, 말투, 행동이 너무도 가슴 설레게 느껴져 나는 그저 멍하니 그녀를 안아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다음은 없어요?"
"응? 뭐가?"
"키스만 하고 끝이냐구요."
순간 말의 진의를 파악하기가 힘들어 약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혹시 그 뒤를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걸까?
"오, 오늘은 그냥 키스만 하려고 했는데... 너랑 화해하고 싶어서."
"뭐에요? 그럼 처음부터 흥분시키질 말았어야지."
젠장. 뭐지 이 딜레마는? 기껏 섹스를 자제하겠답시고 했던 로맨틱한 행동이 섹스를 부르게 된다니.
"그, 그럼 여기서?"
설마 강의실에서 한 판 하자는 건가? 물론 야동에서나 보았던 그런 경험을 실제로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 쪽이 또 짜릿해지는건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학회장인데 그래도 되는 걸까? 문득 계곡에서의 실수가 떠올랐다. 만약 강의실에서 한빠구리 하다 들키는 날에는 정말 문제가 심각해 질 텐데.
진지하게 고민하는 내 모습이 웃겼는지 서연이는 가만히 반응을 살피다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또다른 의미에서 어안이 벙벙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농담이에요. 좀 있으면 수업시간이잖아요. 쪼금 아쉽지만 이 뒤는 다음으로 미뤄요."
"으, 으응, 그래."
아무래도 서연이는 침대 위에서는 내게 복종하는 대신, 평소 일상에서는 나를 갖고 노는데에 약간 재미가 들린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갖고 놀아라, 놀아. 대신 나는 다음에 또 침대 위에서 단단히 혼쭐을 내줄 테니까.
"그럼 오늘 수업 마치고 선배 방에 들렀다 갈까요?"
"뭐, 뭐어?"
하지만 당돌하게도 그녀가 먼저 제안을 해오니 막상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들렀다 간다고는 했지만 나와 서연이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이건 누가 보더라도 섹스하자는 뜻이었다. 물론 나도 놀라긴 했지만 결코 싫은건 아니었다. 군침을 줄줄 흘리며 "좋아!" 라고 대답할 뻔 하다가, 문득 아침에 잡았던 약속 생각이 났다.
"아.... 그, 그게...."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미안해.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그 순간 현아 씨와 잡았던 선약이 그렇게까지 걸림돌로 느껴질 수가 없었다. 괜스레 현아 씨에 대한 미운 감정까지 치솟을 지경이었다. 현아 씨는 왜 그 많은 날 중에 하필 오늘 약속을 잡아가지구선.... 으으.
"선약이요? 혹시 여친?"
호기심 가득한 그녀의 눈길 앞에 거짓말을 하기가 힘들기도 했지만, 다행히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게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여친의 언니이지, 여친은 아니니까.
"아니... 여친은 아냐. 그런데 갑자기 취소하기도 좀 애매한 약속이라... 미안해. 다음에 꼭 하자."
"흐음~"
혹시나 서연이가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까 싶어 눈치를 살폈는데, 천만다행스럽게도 그렇게 까지 기분이 나빠보이지는 않았다. "다음에 꼭 하자"라는 말에서 나도 그녀 이상으로 아쉬워하고 아쉬워하고 있음이 절절이 배어났기 때문일까? 그녀는 약간 토라진 표정을 지었지만 농담조로 대답 했다.
"알았어요~ 할 수 없죠. 그런데... 다음에 꼭 하자는건 뭐에요? 들른다고만 했지 뭘 "하자고"는 얘기 안 했는데."
"......."
문득 내 자취방에서 그녀와 처음으로 섹스 했을 때가 떠올랐다. 섹스 후에 나누었던 대화까지도.
그 때 장난친 것에 대한 보복 같은 건가? 요망한 계집애 같으니...
아무튼 그렇게 또 우리는 강의실에서 우리만의 짧은 추억을 하나 만들었다.
*
교양수업이 있는 강의실로 이동하니 역시나 유정이가 먼저 와 있었다. 사실은 인문관 입구로 들어오면서 주차장에 그녀의 오토바이가 있는 것을 보았기에 그 때부터 내심으로는 이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다. 서연이와 그렇게 키스까지 하면서도 한편으로 다른 여자 생각을 했다는건 오버였지만, 그래도 아까부터 속으로 유정이의 얼굴을 보게 되는걸 은근히 떠올리고 있었던 것을 부정할 순 없었다.
"안녕하세요."
유정이는 나란히 들어오는 우리를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혹시나 나는 유정이가 우리 모습을 보고 뭔가를 느끼거나 하지는 않을까 하는 혼자만의 망상에 빠졌지만 역시나 유정이는 평소와 다름 없이 담담한 모습이었다. 나는 문득 아침에 있었던 몽정을 생각하며 붉어진 얼굴을 그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내가 그녀의 꿈을 꾸며 팬티를 축축하게 적신 채로 잠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저 백지장 같이 순진한 애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왠지 모르게 부끄럽다. 나 또한 그 부끄러운 기분을 굳이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네본다.
"유정아, 밥은 먹었어?"
"예. 저는 이게 오늘 첫수업이라 집에서 먹고 왔어요. 오빠는요?"
그 날 이후로 유정이는 나를 약속대로 오빠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 또한 그런 유정이의 친밀한 호칭이 듣기 좋았기에 전혀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서연이가 듣는 앞에서 유정이가 나를 오빠라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이 번뜩 뇌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나다를까, 옆에서 듣고 있던 서연이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뭐어~? 오빠아~?"
"......."
인간 최성진. 참 오래 살다보니 이런 기분도 느끼게 되는 구나.
"오.빠.아~~??"
그렇게까지 꼬집어서 비꼴 필요가 있을까 싶었냐만, 서연이의 두 눈에서는 "이게 무슨 뜻인지 당장 내게 설명 좀 해볼래?" 라는 메시지를 담은 전자광선 비슷한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에, 나는 그저 아무 말도 못하고 조용히 찌그러졌다. 어떻게 설명 해야할지 조차도 감이 안 잡힌다. 그래서 애써 서연이의 반응을 무시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강의실은 책상 배치가 2열 배치로 되어있었기에 나와 서연이, 유성이가 나란히 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첫 날에 내가 서연이와 나란히 앉았었기 때문인지 우리 셋은 언제나 나와 서연이가 나란히 앉고, 그 앞자리에 유성이가 혼자 앉는 모습으로 자리를 정해왔었다.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은 거기에 대해 별 생각을 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오늘은 왠지 유정이 뒷자리에 앉으려니 뭔가 마음 한켠이 불편한 기분이었다. 서연이와 나란히 앉아서 홀로 앉은 유정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게 왠지 좀.... 서연이는 아마도 이런 내 마음 모르겠지만 말이다.
"유정아. 혼자 앉아있으면 안 심심해?"
"괜찮아요. 어차피 수업 듣는데 심심할 건 없죠."
내가 유정이의 등을 콕콕 찌르며 묻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담담하게 대답한다. 하지만 오히려 담담하지 않은 것은 유정이도 나도 아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3자인 서연이였다. 다행히 그 순간 교수님이 들어와 서연이가 내게 뭐라고 즉각 따지고 들진 못했지만 수업이 시작되고나서 그녀의 질문공세가 시작되었다.
내 옆구리를 거의 쑤시듯이 쿡쿡 찌르며 자신의 노트 한 구석을 내게 들이미는 그녀. 수업시간에 목소리를 내어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순 없으니 노트에 문자 메시지처럼 직접 글귀를 적어서 내가 전달한 모양이다. 마치 고전적인 연애쪽지를 주고 받는 영화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이게 연애쪽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 유정이가 누구에요?
노트 한구석에 그녀만의 아기자기한 글씨체로 그런 질문이 쓰여 있었다. 대답을 회피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글자로 눈 앞에 들이미니까 어떻게 피할 수도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글씨체 밑에 나의 삐뚤한 글씨체로 답변을 달아주었다. 앞자리의 유정이가 이 모습을 볼 수 없다는게 왠지 다행인 것처럼 느껴졌다.
- 애칭 같은거야.
하지만 적고 나서 순간 내가 실수했다는걸 깨달았다. 기껏 글씨로 조용히 얘기하려 했던 서연이가 자기 본연의 의도를 잊고 순간적으로 목소리를 냈던 것이다.
"애치잉~?"
"......."
내가 아무 대답을 않자 그녀가 한층 더 톤을 높이면서 말투를 비비 꼬았다.
"애.치.잉~~??"
"......."
비록 그 순간 교수님이 강의실 앞에 PPT 영상을 띄웠기 때문에 교수님을 포함한 다른 학생들이 서연이의 목소리를 듣진 못했지만 대신 유정이가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나는 애써 유정이에게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손짓하고는, 쏟아지는 서연이의 도끼날 같은 시선을 피하느라 식은땀을 흘렸다.
젠장. 괜히 말했나보다.
*
"두 사람 생각보다 많이 친한가봐요. 내가 명색이 학회장인데 학과 돌아가는걸 잘 모르고 있었네. 호.호.호~"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연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유정이 사이를 파고들어 뭔가를 캐내려는 듯 취조심문을 시작했다. 스스로 찔리는 구석이 있는 나는 잠자코 조용히 걸었지만 유정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일단 유정이는 오토바이를 타고 내려갈테니 우선 그녀를 보내기만 하면 그래도 뭔가 변명이라도 꺼낼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어서 우리 발걸음이 입구까지 도달하기만을 바랐다.
시계를 보니 3시 50분이 조금 넘었다. 현아 씨가 4시까지 학교로 오겠다던 말이 기억났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는 이 근처에 있을까? 문득 연락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학교 근처에서 만날 생각이라면 기왕이면 서연이나 유정이와 함께 있을때 현아 씨와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잖아도 병원에서의 일도 있었기에 현아 씨와 서연이를 마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게다가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서연이에게도 현아 씨와 만나는 모습을 보이는게 하등 좋을 턱이 없었다. 게다가 서연이의 끈적한 유혹을 거절해야만 했던 이유인 "선약"의 정체가 현아 씨와의 약속이라는걸 굳이 보여줄 필요는 더더욱 없고....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이제보니 선배한테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네요? 여자 후리는 노하우라도 있는 건지~ 호호. 어쩌면 내가 숨은 카사노바를 몰라봤던 건가? 궁금하네~"
"......."
낯은 웃고 있지만 서연이의 비꼬는 말 속에서 활화산 같은 언짢음을 느낄 수 있었기에 나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조용해졌다. 애써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현아 씨에게선 딱히 메시지가 온게 없었기에 나는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답장이 곧바로 날아오지는 않았다.
"입구에 유독 사람들이 많네요."
서연이가 당최 왜 저러는지 몰라 내려오는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던 유성이가 입을 열었다. 나는 메시지를 보내는데에 열중하고 있었기에 그저 고개를 흘끗 들어 보기만 했다.
"그러게. 수업 마치고 나온 사람들인가보지 뭐."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이상하리만치 남학생들로만 이루어진 인파였다. 그것도 뭔가 목적이 있어서 모였다기보단 애매하게 퍼질러져 웅성이고 있는 것으로 봐서 상당히 이상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메시지를 보내는 것에 더해서 서연이의 눈치를 잔뜩 살피느라 기가 죽어있었던 나는 굳이 그런 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실 문자는 아까 전에 보낸지 오래였지만, 어떻게든 서연이의 눈총을 피하고자 억지로 핸드폰에 시선을 갖다 박고 있었던 것이도 했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휴대폰에만 고정시킨 채 문자에 신경을 쓰는 척 하며, 입구를 지나가려는데 우연히도 그 순간 입구에 몰려있던 인파들 한가운데에서 웅성이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까지 들려왔다. 왠지 모르게 들뜬 듯한 어느 남학생의 그 목소리에는 이유 모를 감탄사까지 깔려 나오고 있었다.
"와~~ 죽인다..."
"몸매 좀 봐..."
쯧쯧, 하여간 남자새끼들이란... 왜 모여있나 했더니 다른 것도 아니고 여자구경이나 하고 있었던 건가?
솔직히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도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지금 이 상황에서 엄한 여자에게 관심을 돌렸다간 서연이에게 또 무슨 소릴 들을지 몰라 애써 관심을 껐다.
하지만 얄궂은 우연의 장난이 나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들었나보다. 다음 순간 서연이의 쯧쯧 하는 혀 차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아니꼬운 말투에 나는 고개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쯧, 남자들은 정말 저렇게 반쯤 헐벗고 다니는 여자들이 좋은 거에요?"
"엉?"
그 순간 내가 고개를 들었던건, "헐벗고"라는 그녀의 표현에서 직감적으로 뇌리를 스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던 그 곳을 향해 나도 마지못해 고개를 들면서, 나는 제발 내가 속으로 생각한 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빌었다.
"이제 여름도 아닌데 저렇게까지 벗고 다닐 필요가 있는지~ 참."
못마땅해 하는 서연이의 말소리를 한귀로 흘리며 나는 집중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비록 시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그녀의 차림새를 세세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유독 살색이 많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노출이 심하다는 것만큼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내 주변에서 저런 노출 차림을 즐기는 여자는 한 사람 밖에 없지만, 설마하니 그 여자가 내가 아는 그 한 사람이려구... 하하, 설마 그런 지독한 우연이?
"어라? 성진 씨~~"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뛰어오는 현아 씨를 보며 나는 하늘을 탓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웬만하면 출근 전에 올리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오늘 아침에 인터넷이 먹통이더군요
아쉬운 대로 TXT 파일만 옮겨와서 회사 컴으로 업로드 했습니다 ^^;
사실 여유 있을 때 올릴까 싶기도 했지만 제가 금요일까지는 글을 올리지 못할 것 같아서요 ㅠ.ㅠ
요번주 스케줄이 조금 빡빡할 것 같아서리... 다음 화는 토요일 오전 쯤에 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독자분들은 양해 좀 부탁드릴게요~~ ^^;
회사 컴으로 소라 접속하는게 또 미묘한 스릴이 있네요 하하
다들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내세요!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18장
그 후로 정확히 일주일이 흘렀다.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평일날의 평범한 아침이었다.
유성이... 아니, 유정이의 꿈을 꿨다. 그러고 보면 병원에 있을 때도 그녀가 꿈에 나와 몽정을 한 적이 있었지.
왜 그녀가 유독 꿈에 잘 나타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 내가 정말 유정이를 좋아하는 건가?
"익숙해. 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정말 이상한 감각이었다. 원래 설레임은 익숙함을 동반할 수 없는 법이니까. 사랑에 빠질 때 우리가 설레임을 느끼는 이유는 상대방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내가 몰랐던 그 혹은 그녀의 모습을 점점 더 알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설레임. 그것은 미지의 영역을 향한 일종의 모험이자 개척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두근거리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서 설레임은 익숙함으로 변한다. 두 감각은 동시에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공존할 수 있더라도 그 시기는 매우 짧다. 상대방에 대해 충분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이상 설레임을 느끼기는 힘든 법이니... 비약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법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정말 이상한 감각이었다. 꿈 속에서의 유정이를 보는 순간 내 마음은 심장소리 하나하나까지 귓가에 울릴 만큼 설레고 두근거렸지만 그러면서도 그녀의 존재가 내게 익숙하다는 그 이유 모를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마치 섞일 수 없는 두 감각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것 같은 느낌.
내가 아는 그 어떤 언어로도 그 미증유의 감각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내가 널 좋아하는거니?"
내 스스로 답을 알 수 없어서 꿈 속의 그녀에게 물었다. 나를 안고 있던 그녀는 그저 밝게 웃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그렇게까지 환하게 웃음 짓는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걸까? 아마도 사랑은 아닐 거야.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아직까지 그렇게 길었던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녀가 다른 여자들보다 더욱 특별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
호감. 호감인가? 내가 그녀에게 가르쳤던 그 단어.
그래, 내가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건 틀림 없는 것 같아. 하지만 도대체 왜?
현주. 문득 현주의 이름도 떠올랐다. 내가 현주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나?
꿈 속에서는 왠지 현주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여자친구가 현주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그 꿈이 현실감 없는 꿈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죄책감 같은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 꿈은 그런 불편한 감각을 지워버릴 수 있게 해주는 곳이었다.
"유정아, 너 나랑 사귈래?"
솔직히 나는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현주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현주도 사랑하지만, 유정이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유정이를 여자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한유성을 한유정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남자가 "나"이기를 바랐다.
그 역할을 다른 사람이 갖게 되는 것을 내 마음은 허용치 않고 있었다. 내 품에 안겨 여자로서의 행복을 깨달아 가는 유정이의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지극히 행복해졌다.
알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이래선 안 된다는 걸.
그녀에게 있어 생애 처음으로 "사랑"이란 이름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는 나 또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주어야 한다. 이미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으면서, 나머지 마음 반 쪽으로 그녀에게 그런 행복을 안겨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 나의 착각이다.
하지만 이 꿈은 왠지 그런 불편한 감각을 지워버릴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이 꿈이 마음에 들었다.
"유정아."
그렇게 꿈 속에서 하염없이 그녀를 안고 있다가 꿈에서 깨었던 것 같다. 별 다른걸 하지 않았는데도 그냥 안고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꿈에서 깨기 전에 그녀도 나를 소리내어 무어라고 불렀다. 나는 그녀가 나를 어떻게 부르는지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듣기 전에 꿈에서 깨고 말았다.
그 순간 그녀는 나를 뭐라고 불렀을까?
선배? 아니면 오빠?
*
"젠장. 쪽팔리게...."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팬티 속이 축축하다는걸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이로써 두번째.
요즘 들어 왜 이렇게 몽정을 자주 하는거지? 성생활이 딱히 부족하다거나 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유정이만 나오면 왜....
"아~ 젠장. 군인도 아니고 이 나이 먹고 쪽팔리게 몽정이라니... 나중에 학교 가서 유정이 얼굴 어떻게 보지? 오늘은 휴일도 아닌데."
설상가상으로 오늘은 유정이, 서연이와 함께 듣는 그 교양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원래 어떤 이성에 대한 민망한 꿈을 꾸고 나면 하루 동안은 그 사람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운 법인데, 싫어도 얼굴을 볼 수 밖에 없는 시간이 오늘 포함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이 왠지 불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내심 기대되는 그 이중적인 기분을 속일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무의식적으로 휴대폰부터 확인한건 딱히 연락이 올만한데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현대인의 습관 같은 것이었을 뿐. 어쩌면 현주로부터 문자가 와 있을지도 모르고.
"엥?"
물론 현주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긴 했다. 대충 보니 딱히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시선을 먼저 잡아끈 카톡 한 줄이 있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자고 있는 동안 휴대폰으로 날아온 카톡이 현주의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것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카톡이 현주의 것보다 더 먼저 눈에 띄었던 이유는 공교롭게도 그것이 그녀의 언니로부터 날아온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저장해두었던 현아씨의 연락처로부터 하나의 메시지가 와 있었던 것이었다.
간밤에 뜬금없이 자매로부터 나란히 카톡을 받게 될 줄은 몰랐기에 나는 우선 현주의 카톡을 확인하고, 그 다음 현아 씨의 카톡을 확인했다. 솔직한 마음으로 현주의 카톡은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평범한 아침인사였으니 더욱 호기심이 가는 쪽은 그녀의 언니 것이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여유를 두고 읽고 싶었다.
- 성진 씨, 오늘 잠시 시간 좀 내줄래요~?
의외로 이모티콘 하나 없이 짤막한 문장이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도 물결무늬를 붙인 것을 보니 밝고 명랑한 현아 씨의 음성 톤이 연상되는 기분이었다. 문득 현주로부터 들었던 그녀들의 과거가 떠올라 나는 순간 몹쓸 생각을 했다. 어릴 적에 그런 일을 겪고도 현아 씨는 정말 뭐랄까...
하지만 못 된 생각은 잠시 지우고 우선 답장을 하기로 한다.
- 오늘요? 학교 가는 날이긴 한데.
이상하게 여친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치곤 괜히 말투를 의식하게 된다. 하지만 굳이 그걸 또 드러내고 싶진 않아서 나도 담담하게 짤막한 답장으로 응수했다. 답장까지 시간이 꽤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마침 현아 씨도 휴대폰을 보고 있었는지 별로 텀을 두지 않고 빠른 답장이 날아왔다.
- 그럼 학교 끝나고 잠시 보면 안 돼요? 혹시 약속 있어요?
- 아뇨. 끝나고 보는건 괜찮아요. 그럼 수업 끝나고 만날까요?
- 그래요~~ ^^ 성진 씨 OO대 다니는거 맞죠? 내가 그리로 갈게요.
이모티콘을 쓰는 모습을 보니 새삼 더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쓸 데 없는 생각은 지우고 역시나 본론에 집중한다.
- 굳이 학교로 안 오셔도 되는데. 제가 현아 씨 집 근처로 갈게요.
- 모처럼 캠퍼스 구경 하고 싶어서 그래요~~ 현주 몰래 보고 싶기도 하고.
현주 몰래? 그건 무슨 의미일까?
또 나도 모르게 현아 씨에 대한 이상한 망상에 빠지려다 그 생각을 애써 털어냈다.
현주의 과거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현아 씨의 언행을 바라보는 시선을 약간 바꾸어놓았다.
현주에게서 이야기를 듣기 전이었다면 몰라도 그녀의 과거를 알고 난 지금, 왠지 현주의 언니인 그녀가 동생 몰래 동생에게 해가 될 짓을 하려고 나에게 접근하는 거라는 생각은 좀체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가 평소에 그렇게 성적으로 유별난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에 있어서도 나는 그 나름의 어떤 이유가 있을거라 막연히 짐작했다. 그건 아마도 현주가 내게 얘기해주지 않은 나머지 부분과도 관련이 있을 터였다. 아직은 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기에, 섣불리 현아 씨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수업은 4시에 끝나요.
- 오키. 네 시까지 학교로 갈게요~
짧은 카톡이 끝났다. 이른 아침부터 조금은 의외의 이벤트였다.
뭐 별다른 일이야 있겠냐 싶어 나는 크게 우려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등교길에 올랐다.
*
그 날은 서연이가 유독 예뻐 보였다. 물론 서연이가 예쁜 거야 원래부터 당연히 알고 있었던 거지만 그날 따라 유독 그랬다. 하늘하늘한 플레어 스커트에 단정한 가을 코트를 매칭한 그녀의 스타일에서 여성적인 감각과 세련미가 물씬 느껴졌다. 깔끔한 코디였지만 그녀의 날씬하고 맵시 있는 몸매를 너무도 잘 드러내는 차림이었기에 캠퍼스를 같이 걷는게 황송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지나가는 남학생들이 한번씩은 흘끗 돌아보고 갈 정도였으니까.
쏟아지는 남학생들의 시선들을 받으며 나는 좀 멋쩍어 졌다. 서연이와 캠퍼스를 같이 걷기만 하는데도 내가 이런 따가운 눈총을 받는 이유는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새삼 내가 서연이와 몸을 섞은 관계라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세상 남자들이 이 사실을 알면 무슨 생각을 할까? 아마 날 죽이려 들겠지?
"오늘 예쁘네."
그녀에게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예전에 그녀에게 추근거릴 때 호감을 얻어보겠다고 막무가내로 예쁘다는 칭찬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그녀도 그런 칭찬을 거북해 했었고. 하지만 지금은 정말 있는 그대로의 의미에서 칭찬을 하는 거란걸 그녀도 느끼는지 빙긋 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웬 칭찬이에요?"
"뭐 그냥... 오늘 가을 여자 느낌도 나고. 니가 쓸데없이 너무 예쁘니까 남자들이 괜히 나한테 험한 시선 보낸다."
"어머, 정말요?"
예쁘다는 칭찬 앞에 여자는 장사 없다더니 서연이 같은 퀸카도 그건 마찬가지인가보다. 예쁘다는 말은 평소에도 충분히 듣고 살텐데 그 말이 그렇게 기분 좋은 걸까? 그녀가 내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다음 말이 왠지 나를 샐쭉하게 만들었다.
"어디 잘 생긴 남자가 말이라도 걸어주면 좋겠네요."
"뭐야?"
괜히 질투가 솟구쳐 서연이를 노려보았다. 보는 눈이 많으니 요걸 혼낼 수도 없고.
"너 남자한테 잘 보이려고 이렇게 예쁘게 입은 거야?"
"원래 남자든 여자든 꾸미는건 이성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거 아니에요?"
물론 그 말이 맞긴 했지만 서연이가 다른 남자 운운하는게 썩 기분 좋지 않았다.
"그래서 잘 생긴 남자가 대시하면 그거 받아줄 거야?"
"글쎄요. 얼굴 봐서요. 아, 이제부턴 얼굴 말고 다른데부터 보기로 했으니까 "그거"라도 한번 해봐야 하나?"
서연이가 말하는 "그거"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더욱 아니꼬운 감정이 뱃 속에서 치솟았다. 마음 같아서는 요 앙큼한 년을 당장이라도 홀랑 벗겨서 혼쭐 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서연이는 왠지 그런 내 반응을 알고 나를 골려 먹는 것 같았다.
"나 말고 다른 남자랑 옷 벗고 뒹굴겠다 이거야?"
"참 나. 자기는 여자친구까지 버젓하게 있으면서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순간 서연이의 당돌한 멘트 앞에 할 말을 잃는 나였다. 하긴 그 말이 맞긴 했다. 하지만 침대에서 섹스할 때는 오직 나만의 정액받이가 되어주겠다는 듯이 내게 헌신적으로 봉사하곤 했던 그녀가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니 마음 한 구석이 꽁해지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누가봐도 명백한 소유욕이겠지?
"뭐... 그렇긴 하네."
그렇잖아도 현주를 두고 요새 서연이나 유정이와 얽히고 있는게 괜스레 자꾸 속이 찔리고 있는 나였다. 서연이의 그 한마디가 내 치부를 정확하게 콕 찌르는 것 같아서 나는 그만 침울해졌다. 서연이는 이런 내 속도 모르고 내가 질투를 하는게 재밌다는 눈치였다.
학생식당에 들어서니 문득 서연이와 이 날은 매주 같이 점심을 먹기로 약속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놓고 그 뒤에 여러가지 일이 겹쳐 줄곧 같이 밥을 먹지 못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녀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식판을 들고 내 뒤에 붙으면서 재잘거렸다.
"그러고보니 우리 이 날은 같이 밥먹기로 했으면서 첫날 이후로 한번도 못 먹었네요."
"어어. 그러네."
무미건조하게 대꾸하는 내 얼굴을 서연이가 빼꼼 올려다본다. 그제야 내 기분이 상했다는걸 느끼는지 서연이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선배, 혹시 삐쳤어요?"
"몰라."
원래 삐친 인간한테 삐쳤냐고 물어보면 더 아니꼬운 법이다.
서연이가 마치 유치원생 어르듯이 나를 달래기 시작한다.
"에이~ 왜 그래요. 아까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래요?"
"......."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것도 자존심 상한다.
"알았어요 알았어~ 장난 안 칠게요. 화 풀고 밥 먹어요."
"됐어. 네 말대로 우리가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끝까지 꽁한 티를 내며 고개를 돌리고 줄을 서 있자 서연이가 잠시 말이 없더니 자기도 얌전히 내 뒤에 가서 줄을 섰다. 혹시 달래줄 마음을 아예 접은 건가? 그렇다면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서운한데... 제길, 나 왜 이러냐.
하지만 다음 순간 서연이는 텅 빈 식판으로 내 등을 팡하고 때렸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난 화들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표정이 샐쭉해져 있었다.
"이럴 거에요? 남자가 쪼잔하게 정말."
"야, 그거 성차별적 발언이야. 남자도 서운할 수 있는 거지."
"서운해요? 내가 다른 남자 얘기해서?"
왠지 그렇다며 곧이 곧대로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자존심 때문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녀 말마따나 우리가 연인 사이도 아닌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싫은 기색을 드러내는게 과연 말이 되는 이야긴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감정은 질투라는걸 인정하고 있었지만 머리는 그게 불합리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냥... 조금."
하지만 결국 솔직히 인정하고 만다. 차라리 그게 더 좋을 것 같아서였다.
괜히 아닌 척 해봐야 내가 티를 내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서연이가 그걸 간파 못 할 리 없으니까.
"쳇. 선배 그거 알아요?"
"뭐를?"
"선배는 오늘만 그런 기분 느낀 거죠? 나는 선배를 볼 때마다 그런 기분을 느껴야 해요. 선배 옆엔 항상 여자친구가 있잖아요. 안 그래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육체적인 부분으로만 나와 맺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서연이의 입에서 돌발적으로 그런 말이 나오니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할 말이 없어져 서연이의 얼굴을 내려다 보니 그녀는 나만큼이나 서운한 얼굴이었다. 평소에도 그녀는 정말 나를 보며 그런 서운함을 느꼈을까?
"너... 나 좋아해?"
도저히 학생들이 바글거리는 학생 식당 한복판에서 물어볼 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서연이는 고개만 숙이고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괜한 소릴 했구나 싶어 스스로 약간 찔끔해졌다. 하긴 물어도 이런 장소에서 묻는건 아니었는데...
덕분에 아까 전의 좋은 분위기는 어디론가 날아가고 어색한 정적만이 남게 되었다. 식사를 받아서 한쪽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도 우리는 그저 한동안 조용히 먹기만 했다. 숟가락 젓가락을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우리 사이에 간간히 한번씩 울렸고 나는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만큼 그녀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한동안 밥알을 깨작거리던 그녀가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나는 밥을 거의 다 먹어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식판을 보니 절반도 먹지 않은 채였다.
"선배."
"으, 으응."
그 기묘한 박력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화났을 때의 유정이만큼은 아니지만 서연이의 그 모습에선 또 그녀 나름대로의 독특한 위압감이 있었다.
"선배 눈엔 내가 어떤 여자로 보였는지 모르지만 난 사실 섹스파트너 같은거 만들어 본 적... 몇 번 없어요."
인적이 뜸한 구석 자리에 앉은게 다행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난 모습의 그녀는 천천히 뒷말을 이었다.
"섹스를 좋아하는건 사실이지만 그렇게까지 문란하게 살았던건 아니라구요. 하룻밤 불장난 정도는 좀 쳐봤어도 이렇게 꾸준히 만나면서 복잡한 관계로 지냈던 적은 거의 없구요, 특히 내가 먼저 요구해서 이런 관계가 된 건 처음이에요."
사실 그 부분은 내가 가끔 서연이에게 궁금했던 점이기도 했다. 그녀는 나 말고도 다른 남자와 섹스파트너로 지내본 적이 있는지, 있다면 얼마나 경험이 많았는지 등등.... 어쩌면 내가 그런 경험이 전무했기에 이런 관계를 유지함에 있어서는 그녀가 나보다 더 능숙하리라 내심 여겨왔는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그녀가 그런 말을 하는건 내게는 조금 충격이었다. 특히나 그녀가 먼저 요구한 적은 처음이라는 부분이 내 기분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물룬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뭐랄까, 내가 좀 나쁜 놈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난 사실 선배를 볼 때마다 무슨 기분으로 선배를 대해야 하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구요. 내가 감정선을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지. 정말 육체적인 부분으로만 깔끔하게 대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부분까지 생각해야 하는 건지...."
"......."
나는 서연이의 말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에 와서 그런 무의미한 의심 따위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서연이는 나와 이런 육체적인 관계로 지냄에 있어 지극히 무덤덤하고 익숙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녀에게 있어선 처음 있는 일이 아닐 테니까, 당연히 별 힘든게 없을 거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도 그녀 나름대로의 어떤 고민과 고충이 있었을 텐데, 연인이 있고 없고만이 문제가 아니었을 텐데.
특히나 그녀는 여자이기에 내가 짐작할 수 없는 더더욱 감성적인 어떤 부분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여태껏 서연이와 지내면서 서연이의 입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한번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던 부분이, 신기하게도 그녀의 말 한마디로 갑자기 너무도 선명하게 인식되었다.
왜 진작 그걸 몰랐을까?
그래서 부끄러웠다.
"미, 미안...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구나."
늘 남 앞에서 도도하고 프라이드 넘쳤던 그녀가 누군가가 들을지도 모르는 이런 공간에서 참다 못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게, 어찌 보면 그녀가 얼마나 서운해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사실 서연이가 뭐가 아쉬워서 나와 이런 떳떳치 못한 관계로 지내고 싶었을까.
그녀는 나와의 육체적인 관계가 그렇게 좋았던 걸까?
그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묵묵히 감수할 만큼...
"솔직히 내가 선배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환 선배 이후로 아직 누군가와 사귀고 싶은 맘이 들지 않는 것도 있구요. 그래도 나는요... 선배를 볼 때마다 혼란스러워요. 내가 이런 관계에 익숙하다고는 생각 안 했으면 좋겠어요. 선배는 적어도 내 연인의 존재 때문에 고민하거나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구구절절 맞는 말 앞에서 나는 고개를 들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먼저 이렇게 지낼 것을 요구했기에 그걸로 충분하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 쪽에서 먼저 그것을 바랐어도 내가 그것을 승낙한 이상 나에게도 그녀의 입장을 헤아려줄 책임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었다.
"네 말이 맞아."
침중한 표정이 된 내가 고개를 푹 숙이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더욱 무거워졌다. 괜히 쓸 데 없는 부분을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서연이도 이런 무거운 공기가 맘에 들지 않는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러니까 이제부턴 내 생각도 좀 해주는 거에요. 그럴 수 있죠?"
"응."
같이 밥을 먹고 인문관으로 올라오니 수업시간까지 생각보다 공강이 길었다. 분위기가 크게 서먹한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서연이와 약간 미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기에 나는 어떻게든 다시 화해를 하고 싶었다. 문득 같이 복도를 걷다보니 수업이 없는 빈 강의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여긴 왜요?"
"잠깐만."
다행히 들어와 있는 학생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강의실의 문을 안쪽에서 잠구었다. 문을 잠구는 내 모습을 보자 서연이의 표정이 약간 샐쭉해졌다. 마치 "이 상황에서도 엉큼한 생각이 나니?"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지금은 좀 더 로맨틱한걸 해주고 싶다 이거야.
"웁."
강의실 문을 닫자마자 나는 서연이를 벽면에다 밀치고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덮었다. 갑작스런 기습 키스에 놀라 토끼처럼 눈이 동그래지는 서연이였지만 나는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그녀를 벽에다 단단히 몰고는 한 손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감쌌다. 차가운 돌벽에 그녀의 등이 닿지 않도록 해주기 위해서였다.
혀와 혀가 엉키었다. 처음엔 강제로 뚫고 들어갔지만 내가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나머지 손으로는 그녀의 머릿결을 지나 목 뒤를 쓰다 듬으니 그녀도 머뭇거리며 차츰 혀를 얽어왔다. 노골적으로 큰 소리를 내기는 힘들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은근한 스릴을 만끽할 수 있는 키스였다.
아까의 일에 대한 사과라도 하는 듯이 나는 정말 지극정성으로 그녀의 입안 곳곳을 애무했다. 밥 먹고나서 양치를 아직 안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같은걸 먹었으니 상관없겠지 싶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그녀와 섹스를 배제하고 키스를 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계곡에서 한번 있었나? 하지만 그 때도 결국 섹스로 넘어갔지.
"흐음...."
서로 입은 더없이 바빴기에 코로 숨결을 흘려내야만 했다. 뜨겁고 간지러운 숨결이 서로의 코 끝을 자극하자 그 느낌이 무척 짜릿했다. 내 손은 여전히 그녀의 등 뒤를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었고 나머지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카락이나 목, 얼굴 등을 매만지고 있었다. 마치 소중한 인형을 다루기라도 하는 듯한 손놀림으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듯한 그 손길에 서연이도 평소랑은 다르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적극적이고 격정적이었던 그녀의 반응도 좋았지만 이렇게 얌전히 내 키스를 받아들이며 어딘지 모르게 약간 쑥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 또한 지극히 사랑스러웠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를 내 연인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하아..."
서로의 타액이 끈적이며 엉키는 소리가 들리자 청각에 자극을 받는지 그녀의 숨이 약간 더 뜨거워졌다. 하지만 결코 가슴이나 엉덩이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저 조용히 이런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다. 깊어졌던 키스가 약간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우리는 잠시 떨어졌다.
솜털 하나하나가 보일 정도로 가까이서 우리는 서로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서연이는 역시나 너무도 예뻤다. 그녀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치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앞으로는 네 기분 더 많이 생각할게."
"치."
갑작스러웠지만 아늑했던 키스도, 키스 후에 이어진 나의 솔직한 사과도 그녀에게 썩 나쁘지 않았었나보다. 여전히 입을 샐쭉하게 내미는 서연이였지만 아까만큼 우리 사이의 분위기가 무겁지는 않게 느껴져서 좋았다.
"어떻게 더 많이 생각하려구요? 여자친구랑 헤어지기라도 할 거에요?"
"글쎄...."
만약 현주를 버리고 서연이와 만난다면 어떨까? 더 행복할까?
적어도 현주와의 사이에서 겪어야 하는 그런 문제에 대해선 고민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걸 보면 내가 현주를 그만큼 사랑하는걸까?
아니면 이 또한 구질구질한 욕심과 소유욕의 발로일 뿐일지도 모르지...
"선배는 보기보다 솔직한 사람이에요."
"무슨 뜻이야?"
"그냥... 지금 같은 분위기에선 대충 비위 맞추려고 대답할 수도 있는데 끝까지 고민하니까요. 선배가 고민하고 있다는게 내게도 느껴져요."
서로의 몸이 이렇게 닿아있으면 그만큼 더 뚜렷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긴 있나보다.
"그래도 선배는 내 마음을 읽는데 서투른 것 같으니까, 선배가 모르는거 하나 정도는 가르쳐줄게요."
"뭔데?"
"사실 오늘 예쁘게 차려입은 거, 선배한테 잘 보이고 싶은 이유도 있었어요. 선배랑 같은 수업을 듣는 날이니까요."
"어.. 어?"
너무도 뜻밖의 내용이라 나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가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꾸미고 왔다는 말이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정도 화가 풀렸는지 내 그런 모습을 보며 키득거리며 웃기까지 하는 서연이였다. 멍하게 서 있는 내게 서연이가 쏙 안겨오며 애교를 부린다.
"여자는 자기 입으로 이런거 말하는거 싫어해요. 그러니까 질투만 하려고 하지말고 그런 부분까지 읽으려고 노력해 봐요. 알았어요?"
"아, 으응...."
누가 보면 엄한 학교 강의실 안에서 대체 뭐하는 짓거리냐고 타박했겠지만 왠지 서연이의 그런 눈빛, 말투, 행동이 너무도 가슴 설레게 느껴져 나는 그저 멍하니 그녀를 안아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다음은 없어요?"
"응? 뭐가?"
"키스만 하고 끝이냐구요."
순간 말의 진의를 파악하기가 힘들어 약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혹시 그 뒤를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걸까?
"오, 오늘은 그냥 키스만 하려고 했는데... 너랑 화해하고 싶어서."
"뭐에요? 그럼 처음부터 흥분시키질 말았어야지."
젠장. 뭐지 이 딜레마는? 기껏 섹스를 자제하겠답시고 했던 로맨틱한 행동이 섹스를 부르게 된다니.
"그, 그럼 여기서?"
설마 강의실에서 한 판 하자는 건가? 물론 야동에서나 보았던 그런 경험을 실제로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 쪽이 또 짜릿해지는건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학회장인데 그래도 되는 걸까? 문득 계곡에서의 실수가 떠올랐다. 만약 강의실에서 한빠구리 하다 들키는 날에는 정말 문제가 심각해 질 텐데.
진지하게 고민하는 내 모습이 웃겼는지 서연이는 가만히 반응을 살피다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또다른 의미에서 어안이 벙벙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농담이에요. 좀 있으면 수업시간이잖아요. 쪼금 아쉽지만 이 뒤는 다음으로 미뤄요."
"으, 으응, 그래."
아무래도 서연이는 침대 위에서는 내게 복종하는 대신, 평소 일상에서는 나를 갖고 노는데에 약간 재미가 들린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갖고 놀아라, 놀아. 대신 나는 다음에 또 침대 위에서 단단히 혼쭐을 내줄 테니까.
"그럼 오늘 수업 마치고 선배 방에 들렀다 갈까요?"
"뭐, 뭐어?"
하지만 당돌하게도 그녀가 먼저 제안을 해오니 막상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들렀다 간다고는 했지만 나와 서연이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이건 누가 보더라도 섹스하자는 뜻이었다. 물론 나도 놀라긴 했지만 결코 싫은건 아니었다. 군침을 줄줄 흘리며 "좋아!" 라고 대답할 뻔 하다가, 문득 아침에 잡았던 약속 생각이 났다.
"아.... 그, 그게...."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미안해.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그 순간 현아 씨와 잡았던 선약이 그렇게까지 걸림돌로 느껴질 수가 없었다. 괜스레 현아 씨에 대한 미운 감정까지 치솟을 지경이었다. 현아 씨는 왜 그 많은 날 중에 하필 오늘 약속을 잡아가지구선.... 으으.
"선약이요? 혹시 여친?"
호기심 가득한 그녀의 눈길 앞에 거짓말을 하기가 힘들기도 했지만, 다행히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게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여친의 언니이지, 여친은 아니니까.
"아니... 여친은 아냐. 그런데 갑자기 취소하기도 좀 애매한 약속이라... 미안해. 다음에 꼭 하자."
"흐음~"
혹시나 서연이가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까 싶어 눈치를 살폈는데, 천만다행스럽게도 그렇게 까지 기분이 나빠보이지는 않았다. "다음에 꼭 하자"라는 말에서 나도 그녀 이상으로 아쉬워하고 아쉬워하고 있음이 절절이 배어났기 때문일까? 그녀는 약간 토라진 표정을 지었지만 농담조로 대답 했다.
"알았어요~ 할 수 없죠. 그런데... 다음에 꼭 하자는건 뭐에요? 들른다고만 했지 뭘 "하자고"는 얘기 안 했는데."
"......."
문득 내 자취방에서 그녀와 처음으로 섹스 했을 때가 떠올랐다. 섹스 후에 나누었던 대화까지도.
그 때 장난친 것에 대한 보복 같은 건가? 요망한 계집애 같으니...
아무튼 그렇게 또 우리는 강의실에서 우리만의 짧은 추억을 하나 만들었다.
*
교양수업이 있는 강의실로 이동하니 역시나 유정이가 먼저 와 있었다. 사실은 인문관 입구로 들어오면서 주차장에 그녀의 오토바이가 있는 것을 보았기에 그 때부터 내심으로는 이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다. 서연이와 그렇게 키스까지 하면서도 한편으로 다른 여자 생각을 했다는건 오버였지만, 그래도 아까부터 속으로 유정이의 얼굴을 보게 되는걸 은근히 떠올리고 있었던 것을 부정할 순 없었다.
"안녕하세요."
유정이는 나란히 들어오는 우리를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혹시나 나는 유정이가 우리 모습을 보고 뭔가를 느끼거나 하지는 않을까 하는 혼자만의 망상에 빠졌지만 역시나 유정이는 평소와 다름 없이 담담한 모습이었다. 나는 문득 아침에 있었던 몽정을 생각하며 붉어진 얼굴을 그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내가 그녀의 꿈을 꾸며 팬티를 축축하게 적신 채로 잠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저 백지장 같이 순진한 애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왠지 모르게 부끄럽다. 나 또한 그 부끄러운 기분을 굳이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네본다.
"유정아, 밥은 먹었어?"
"예. 저는 이게 오늘 첫수업이라 집에서 먹고 왔어요. 오빠는요?"
그 날 이후로 유정이는 나를 약속대로 오빠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 또한 그런 유정이의 친밀한 호칭이 듣기 좋았기에 전혀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서연이가 듣는 앞에서 유정이가 나를 오빠라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이 번뜩 뇌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나다를까, 옆에서 듣고 있던 서연이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뭐어~? 오빠아~?"
"......."
인간 최성진. 참 오래 살다보니 이런 기분도 느끼게 되는 구나.
"오.빠.아~~??"
그렇게까지 꼬집어서 비꼴 필요가 있을까 싶었냐만, 서연이의 두 눈에서는 "이게 무슨 뜻인지 당장 내게 설명 좀 해볼래?" 라는 메시지를 담은 전자광선 비슷한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에, 나는 그저 아무 말도 못하고 조용히 찌그러졌다. 어떻게 설명 해야할지 조차도 감이 안 잡힌다. 그래서 애써 서연이의 반응을 무시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강의실은 책상 배치가 2열 배치로 되어있었기에 나와 서연이, 유성이가 나란히 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첫 날에 내가 서연이와 나란히 앉았었기 때문인지 우리 셋은 언제나 나와 서연이가 나란히 앉고, 그 앞자리에 유성이가 혼자 앉는 모습으로 자리를 정해왔었다.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은 거기에 대해 별 생각을 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오늘은 왠지 유정이 뒷자리에 앉으려니 뭔가 마음 한켠이 불편한 기분이었다. 서연이와 나란히 앉아서 홀로 앉은 유정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게 왠지 좀.... 서연이는 아마도 이런 내 마음 모르겠지만 말이다.
"유정아. 혼자 앉아있으면 안 심심해?"
"괜찮아요. 어차피 수업 듣는데 심심할 건 없죠."
내가 유정이의 등을 콕콕 찌르며 묻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담담하게 대답한다. 하지만 오히려 담담하지 않은 것은 유정이도 나도 아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3자인 서연이였다. 다행히 그 순간 교수님이 들어와 서연이가 내게 뭐라고 즉각 따지고 들진 못했지만 수업이 시작되고나서 그녀의 질문공세가 시작되었다.
내 옆구리를 거의 쑤시듯이 쿡쿡 찌르며 자신의 노트 한 구석을 내게 들이미는 그녀. 수업시간에 목소리를 내어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순 없으니 노트에 문자 메시지처럼 직접 글귀를 적어서 내가 전달한 모양이다. 마치 고전적인 연애쪽지를 주고 받는 영화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이게 연애쪽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 유정이가 누구에요?
노트 한구석에 그녀만의 아기자기한 글씨체로 그런 질문이 쓰여 있었다. 대답을 회피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글자로 눈 앞에 들이미니까 어떻게 피할 수도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글씨체 밑에 나의 삐뚤한 글씨체로 답변을 달아주었다. 앞자리의 유정이가 이 모습을 볼 수 없다는게 왠지 다행인 것처럼 느껴졌다.
- 애칭 같은거야.
하지만 적고 나서 순간 내가 실수했다는걸 깨달았다. 기껏 글씨로 조용히 얘기하려 했던 서연이가 자기 본연의 의도를 잊고 순간적으로 목소리를 냈던 것이다.
"애치잉~?"
"......."
내가 아무 대답을 않자 그녀가 한층 더 톤을 높이면서 말투를 비비 꼬았다.
"애.치.잉~~??"
"......."
비록 그 순간 교수님이 강의실 앞에 PPT 영상을 띄웠기 때문에 교수님을 포함한 다른 학생들이 서연이의 목소리를 듣진 못했지만 대신 유정이가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나는 애써 유정이에게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손짓하고는, 쏟아지는 서연이의 도끼날 같은 시선을 피하느라 식은땀을 흘렸다.
젠장. 괜히 말했나보다.
*
"두 사람 생각보다 많이 친한가봐요. 내가 명색이 학회장인데 학과 돌아가는걸 잘 모르고 있었네. 호.호.호~"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연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유정이 사이를 파고들어 뭔가를 캐내려는 듯 취조심문을 시작했다. 스스로 찔리는 구석이 있는 나는 잠자코 조용히 걸었지만 유정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일단 유정이는 오토바이를 타고 내려갈테니 우선 그녀를 보내기만 하면 그래도 뭔가 변명이라도 꺼낼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어서 우리 발걸음이 입구까지 도달하기만을 바랐다.
시계를 보니 3시 50분이 조금 넘었다. 현아 씨가 4시까지 학교로 오겠다던 말이 기억났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는 이 근처에 있을까? 문득 연락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학교 근처에서 만날 생각이라면 기왕이면 서연이나 유정이와 함께 있을때 현아 씨와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잖아도 병원에서의 일도 있었기에 현아 씨와 서연이를 마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게다가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서연이에게도 현아 씨와 만나는 모습을 보이는게 하등 좋을 턱이 없었다. 게다가 서연이의 끈적한 유혹을 거절해야만 했던 이유인 "선약"의 정체가 현아 씨와의 약속이라는걸 굳이 보여줄 필요는 더더욱 없고....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이제보니 선배한테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네요? 여자 후리는 노하우라도 있는 건지~ 호호. 어쩌면 내가 숨은 카사노바를 몰라봤던 건가? 궁금하네~"
"......."
낯은 웃고 있지만 서연이의 비꼬는 말 속에서 활화산 같은 언짢음을 느낄 수 있었기에 나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조용해졌다. 애써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현아 씨에게선 딱히 메시지가 온게 없었기에 나는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답장이 곧바로 날아오지는 않았다.
"입구에 유독 사람들이 많네요."
서연이가 당최 왜 저러는지 몰라 내려오는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던 유성이가 입을 열었다. 나는 메시지를 보내는데에 열중하고 있었기에 그저 고개를 흘끗 들어 보기만 했다.
"그러게. 수업 마치고 나온 사람들인가보지 뭐."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이상하리만치 남학생들로만 이루어진 인파였다. 그것도 뭔가 목적이 있어서 모였다기보단 애매하게 퍼질러져 웅성이고 있는 것으로 봐서 상당히 이상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메시지를 보내는 것에 더해서 서연이의 눈치를 잔뜩 살피느라 기가 죽어있었던 나는 굳이 그런 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실 문자는 아까 전에 보낸지 오래였지만, 어떻게든 서연이의 눈총을 피하고자 억지로 핸드폰에 시선을 갖다 박고 있었던 것이도 했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휴대폰에만 고정시킨 채 문자에 신경을 쓰는 척 하며, 입구를 지나가려는데 우연히도 그 순간 입구에 몰려있던 인파들 한가운데에서 웅성이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까지 들려왔다. 왠지 모르게 들뜬 듯한 어느 남학생의 그 목소리에는 이유 모를 감탄사까지 깔려 나오고 있었다.
"와~~ 죽인다..."
"몸매 좀 봐..."
쯧쯧, 하여간 남자새끼들이란... 왜 모여있나 했더니 다른 것도 아니고 여자구경이나 하고 있었던 건가?
솔직히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도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지금 이 상황에서 엄한 여자에게 관심을 돌렸다간 서연이에게 또 무슨 소릴 들을지 몰라 애써 관심을 껐다.
하지만 얄궂은 우연의 장난이 나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들었나보다. 다음 순간 서연이의 쯧쯧 하는 혀 차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아니꼬운 말투에 나는 고개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쯧, 남자들은 정말 저렇게 반쯤 헐벗고 다니는 여자들이 좋은 거에요?"
"엉?"
그 순간 내가 고개를 들었던건, "헐벗고"라는 그녀의 표현에서 직감적으로 뇌리를 스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던 그 곳을 향해 나도 마지못해 고개를 들면서, 나는 제발 내가 속으로 생각한 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빌었다.
"이제 여름도 아닌데 저렇게까지 벗고 다닐 필요가 있는지~ 참."
못마땅해 하는 서연이의 말소리를 한귀로 흘리며 나는 집중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비록 시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그녀의 차림새를 세세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유독 살색이 많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노출이 심하다는 것만큼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내 주변에서 저런 노출 차림을 즐기는 여자는 한 사람 밖에 없지만, 설마하니 그 여자가 내가 아는 그 한 사람이려구... 하하, 설마 그런 지독한 우연이?
"어라? 성진 씨~~"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뛰어오는 현아 씨를 보며 나는 하늘을 탓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웬만하면 출근 전에 올리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오늘 아침에 인터넷이 먹통이더군요
아쉬운 대로 TXT 파일만 옮겨와서 회사 컴으로 업로드 했습니다 ^^;
사실 여유 있을 때 올릴까 싶기도 했지만 제가 금요일까지는 글을 올리지 못할 것 같아서요 ㅠ.ㅠ
요번주 스케줄이 조금 빡빡할 것 같아서리... 다음 화는 토요일 오전 쯤에 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독자분들은 양해 좀 부탁드릴게요~~ ^^;
회사 컴으로 소라 접속하는게 또 미묘한 스릴이 있네요 하하
다들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내세요!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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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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