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35장
집으로 가는 길 내내 현주는 말이 없었다. 서연이와는 원룸 앞에서 헤어졌다. 자존심 강한 서연이로서는 이틀 연속이나 뒷전으로 밀려버린게 서운할만도 하건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별 탈 없이 이해하는 듯한 눈치였다.
아파트 단지 앞에 차를 세우고 현주와 함께 내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현주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게 좋겠다고 두뇌가 조언하고 있었다. 경비실을 지나 엘리베이터 근처까지 다다르자 결국 현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음, 우리... 다시 사귀는거야?"
이상한 질문이었다. 왜 그걸 내게 묻는걸까? 그걸 결정하는건 순전히 현주에게 달린 것일 텐데. 하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그녀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게 미룸으로써 내가 그녀의 마음을 이끌어주길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헤어진 적 없었잖아."
그 천연덕스러운 대꾸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뻔뻔하게 보였다. 하지만 이제 굳이 그런걸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대로, 꾸밈이나 포장 없이 드러내면 되는 것이다.
"그런가..."
물론 그렇다고 한들, 그걸 또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현주가 너무도 착해빠진 순둥이라는 사실은 변함 없지만 말이다. 그녀는 여전히 무척 혼란스러워 보였다.
"사실은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오빠.... 이게 정말 맞는 건지. 내가 이렇게 납득하고 순응한다는게 내 자신에게 큰 실수를 하는건 아닐까 그게 자꾸 불안하고 걱정돼."
엘리베이터가 수차례 1층을 오고 갔지만 현주는 탈 생각을 못하고 서성거렸다. 나는 불안해하는 현주를 살며시 품에 안아보았다. 주춤하며 망설이는 그녀였지만 용케도 내 품을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내게 안겼다. 물론 평소처럼 두 팔을 뻗어 적극적으로 나를 껴안거나 하지는 않았다.
비록 불안해하고 있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지만, 적어도 그녀가 지금 우리의 상황을 이전처럼 거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내게는 희망의 징조로 보였다. 지금은 그녀의 입에서 이별이나 거절의 극단적인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기만 했다.
"너한테 상처주지 않도록 내가 더 잘할게. 아니, 이미 상처줬지만.... 그래도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내가 너에게 소홀해지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어쩌면 이런 관계가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잖아."
"흥... 변명하지마. 오빠는 그냥 욕심쟁이일 뿐이야."
그렇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면서도 한편으론 포옹을 풀지 않는 모습이 귀여웠다. 하기에 따라서는 정말 이대로 우리만의 관계를 구축할 수도 있지 않을까....? 비록 꿈 같은 이야기였지만 내게는 바로 그 꿈 같은 이야기가 다른 무엇보다도 더 훌륭한 선택인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야 어쨌건 간에 그럴 수만 있다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았다.
"주말엔 둘이서 데이트하자. 오랜만에."
"......."
차마 고개를 끄덕거리기는 자존심이 상하는지,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뻣뻣하게 내 포옹을 받아들이고만 있었다.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다시 한번 1층으로 내려왔다. 이미 수차례 엘리베이터를 보냈으니 이번엔 아쉽지만 그녀를 태워보내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데 채 포옹도 풀기 전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엇...."
혹시나 그게 신의 장난이라면 정말 악취미라고 부를 만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필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내린 사람이, 내가 지금 세상에서 상대하기 가장 껄끄러운 사람일 줄은....
"어, 언니...."
현주가 더듬거리며 내 품에서 조심스럽게 떨어졌다. 그녀의 그 반응만으로도 나는 등 뒤에 서있는 여자의 이름과, 또 그 여자의 반응이 어떤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현아가 나를 죽일 듯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 또한 나와 현주가 서로 부둥켜 안고 있는 모습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지만, 그 놀라움은 타오르는 분노 앞에 너무도 쉽게 삼켜진 것처럼 보였다.
"뭐야, 당신!"
현아가 순식간에 나와 현주 사이로 끼어들어 우리 두 사람 사이를 매몰차게 갈라버렸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나로부터 자신의 동생을 보호하려는 듯, 현주를 등 뒤로 숨겼다.
"뭐하는 짓이야? 아직도 내 동생한테 볼 일이 남았어?"
"어, 언니... 그런거 아냐."
내가 현주와 영락없이 끝난 줄로만 아는 현아는, 등 뒤에서 현주가 뭐라고 웅얼거리던지 간에 나를 용서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사실 현아의 입장에서는 내가 현주와 헤어지는 것보다 오히려 이렇게 다시 눈 앞에 나타난 것이 더 화가 날지도 모르리라.
현주는 그런 언니의 분노한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생각보다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현아가 나타난 것 자체야 운이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녀의 그런 반응은 애초에 예상했던 것이니....
"가! 꺼져! 내 동생 앞에 나타나지 마."
한마디 한마디를 끊을 때마다 나를 드세게 밀쳐내며 위협하는 그녀의 모습은 퍽 사나워보였다. 아프거나 하진 않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 소변도 받아마셨던 적이 있는 그녀가 이렇게 나를 향해 이빨을 세우고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뭐라 말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은 비뚤어진 야릇한 기분이었다.
"언니... 그러지 마."
어쨌거나 현주는 언니를 말리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런 동생의 모습이 이해가 가질 않는지 현아는 동생의 말리는 손길을 되려 밀어내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이거 놔봐. 넌 저 인간이 밉지도 않아?"
"나, 난 괜찮아."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너 설마 지금도 저 남자를 좋아하는건 아니지?"
아마도 현아의 그 질문은 답답한 동생과, 그리고 혐오스런 나에 대한 미움이 섞이다 못해 별 생각없이 튀어나온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로서는 당연하게도 현주가 아직도 내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을 리가 없었고, 그 때문에 그녀는 그 질문이 현주를 자극할 것이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좋아해! 아직 좋아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복도를 떠나가라 울릴 만큼 충동적인 현주의 외침 앞에 나도 현아도, 할 말을 잃었다.
*
현아는 현주를 데리고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탔다. 두 사람이 사라지기 전에 나는 언뜻 눈물을 훔치는 현주의 얼굴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내 시선을 피하는 현아의 얼굴을 동시에 본 것 같았다. 자매가 사라진 자리에서 서성이며 머물던 나는 그 후로 차를 타고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난봉꾼인가?"
새삼스럽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정말로 새삼스러웠다. 이제와서 그 무슨 의미 없는 물음이란 말인가.... 사실 거기에 대해서 고민하던 불과 어제까지의 나와, 비로소 그 고민을 한꺼풀 벗어버린 지금의 나 사이의 다른 점이라곤 다만 그것을 허울로써 포장하려 드느냐 마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래. 내가 원래 이런 놈인걸."
마치 스스로에게 주문이라도 걸듯, 나는 굳이 입밖으로 소리내어 나를 구박해보았다. 내 자신에게 비난을 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면 그 뿐이라는, 그 간단한 깨달음을 스스로에게 더욱 뚜렷이 새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무법자, 난봉꾼, 파렴치한...."
그러한 삶의 마인드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뭐가 있을지 한번 머릿속으로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딱 들어맞는 적절한 표현은 없었다. 하지만 괜찮아. 굳이 그걸 세상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아도 좋다. 그 누구의 언어에도, 가치관에도, 사고방식에도 얽매이지 않으리라. 단지 내 스스로 생각하고 조절해나가면 된다.
"그래. 그 뿐이야."
그 다짐을 고정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입으로 소리를 낸다. 실은 타임 리와인더를 손에 넣었을 때부터 내 마음은 그러한 갈등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시계를 가져보지 못한 사람은 좀체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능력을 손에 넣는 순간부터는 어쩔 수 없이 그런 고민 아래 놓이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을 나름대로 지금까지 겪어본 내 경험에 의하면, 그것은 정말이지 매순간 새로운 고민에 부딪혀가며 끊임없이 새로운 대답을 내어놓은 과정의 반복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 또 한번의 대답을 되찾은 셈이었다.
어찌보면 참으로 모순적이게도, 나는 반복되는 고민의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처음 이 시계를 손에 넣었을 때의 그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이 단순하고 무식한 모습이야말로 내게 조금 더 어울리는, 그리고 내가 더욱더 바라는 나의 모습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
본의 아니게 그 다음 날엔 현주의 일로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물론 그녀와의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다른 일에도 조금씩은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동안 복잡한 여자 관계를 해결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탓에, 나는 조별 과제가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을 미처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큰일이네. 이제 다음 시간이면 당장 발표를 해야 하는데.... 왜 그동안 이걸 잊고 있었지?"
옆에서 서연이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내심으로 그럴 만 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겪은 그 "복잡한 여자관계"라는 것의 중심에 바로 그녀가 있었기에, 내가 겪은 혼란을 그녀도 함께 겪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일상에 이토록 타격을 주었다는 사실을 좀체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서연이는 사실 학과에서도 내로라 하는 엘리트인지라 이런 식으로 과제를, 거기다가 조별 과제를 등한시하고 있었다는 것에 자괴감마저 느끼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를 위로했지만 사실 시간이 촉박해졌다는 사실만은 틀림이 없었다. 물론 나에게는 그게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지난번에 얘기한대로 이번 주말에 오빠 방에 모여서 PPT부터 만들어봐요. 하루이틀 바짝 열심히 만들면 자료 준비는 될 테고, 발표 연습만 하면 되지 않을까요?"
유정이가 나이에 걸맞지 않는 차분한 태도로 최선책을 내놓았다. 처음에 조를 만들 때만 해도 나와 서연이가 유정이를 이끌어가는 그림이 나올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가장 어른스러운게 유정이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냐! 주말까지 미루기에도 너무 늦어. 그러다가 주말에 다 못하면 어떡해. 아무래도 오늘 당장 시작해야겠어."
"오, 오늘?"
예정에 없던 일정이 생겨버리자 나는 약간 움찔했지만 서연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강행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나는 내심으로, 제시간에 준비를 다 못하면 타임 리와인더를 써서라도 내가 준비하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생각이 들었지만.... 깨달음을 얻었다해서 수명을 담보로 너무 능력을 남발하는 것도 조금 곤란하겠다는 판단 때문에 결국 서연이의 의욕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두 사람 다 저녁에 별 일 없지?"
과제를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한 반성이라도 하듯 활활 불타오르는 서연이의 모습을 차마 말리지 못하고, 유정이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게다가 비록 서연이의 의욕으로 인해 결정된 사실이긴 했지만, 그 날 오후에 있었던 수업에서 우리의 그 결정을 한층 더 부채질 하는 사건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이상 여기까지가 저희 7조의 발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진이가 나름대로 능숙하게 발표를 마무리하고 강의실 교탁에서 내려왔을 때, 나는 물론이고 강의실 안에 있었던 모든 학생들이 그녀의 조가 썩 괜찮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 조와 함께 견학을 갔었던 예진이네 조는 순서상으로보면 우리의 바로 앞주자였기에, 다음 강의에는 즉 우리조가 발표를 할 순서라는 뜻이었다. 이제 정말로 시간이 없다는 그 촉박함이 우리의 의욕을 더욱 굳혀준 것도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우리조의 걱정을 부추겼던 일은 따로 있었다.
"그래, 잘 들었네. 평가를 내리기 이전에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네만...."
교수님이 차분하게 운을 떼자, 교탁에서 내려오려던 예진이가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섰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학생들 모두가 그 후에 이어질 전개를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예진이네 조가 준비한 발표 내용은 상당히 괜찮은 수준이었다. 준비한 내용의 구성도 그렇거니와 그걸 설명하는 예진이의 유창한 솜씨에도 딱히 크게 흠 잡을 구석은 없었고, 제시한 PPT의 디자인도 예진이가 직접 작업을 한 것인지 여성 특유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학생들 모두는 교수님의 평가가 좋은 내용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라 짐작했지만, 예상을 깨고서 교수님은 전혀 의외의 질문을 가장 첫머리에 던졌다.
"발표 자체는 괜찮았어. 내용도 잘 정리한 것 같고.... 그런데 이게 아무리 봐도 조별 발표라기보단 발표자 한 사람만의 개인 과제로 느껴지는 것은 내 착각인가?"
"......."
예진이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교수님의 질문을 몇몇 학생들은 납득하지 못하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어렴풋이 "아~" 하고 느껴지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예진이네 조가 견학하는 모습을 옆에서 직접 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애초에 견학을 할 때부터 예진이의 조에서 그녀를 제외하고 남은 두 사람은 발표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존재감이 없었던 사람은 논외로 치더라도, 한수 그 놈은 과제 자체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서연이의 환심을 사려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 제시한 PPT 내용의 문체 전부가 지금 발표하고 있는 여학생 한 사람의 화법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 같네만. 자료에서도, 발표에서도 발표자를 제외한 다른 조원들의 의견이 섞여있는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네. 간단히 말해서 내 생각에는 이 발표가 조별로 이루어진게 아니라 어느 한 사람이 3인분의 몫을 해낸 개인과제로 밖에 볼 수 없다는 뜻일세."
"교수님.... 그게...."
대학에서 조별 과제의 무임승차는 사실 비일비재한 일이고, 실제로 그것이 요즘 젊은 학생들로 하여금 조별 수행을 꺼리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구태여 지적하고 드는 교수님들은 생각보다 드물었다. 어찌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무임승차 구성원을 가려낼 만한 방법도 여의치 않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교수님은 오로지 자신의 직감으로 그것을 구별해내는 것 같았고, 예진이네로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 직감이 꽤나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 같았다.
"아, 아니에요 교수님.... 발표는 제가 했지만 PPT는 세 사람이 같이...."
본능적으로 예진이 또한 이 노년의 깐깐한 교수님이 발표 자체에 대한 평가도 우선시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조원들 간의 협동 부분에도 크게 신경을 쓰는 분이라는걸 느낀 것 같았다. 대개 이런 스타일의 교수님들에게는 발표 내용이 부실한 것보다도 오히려 이러한 부분이 더욱 큰 감점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가? 그럼 거기 앞줄에 앉아있는 남학생이 일어나서 3-2 페이지에 대한 설명을 직접 한번 해보게. 정신분석학에서 비롯한 무의식의 발견을 이론적 틀로 설명한 그 부분 말이네만."
"예, 예?"
교수님이 한수를 지적하자, 마치 투명인간처럼 발표 내내 숨죽이고 앉아있기만 했던 한수가 화들짝 놀라 기겁을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료 조사를 할 때조차 손놓고 서연이 뒤꽁무니만 따라다녔던 한수로서는 그걸 설명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게다가 교수님이 이어서 지목한 다른 남학생마저도 버벅거리며 요구받은 설명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러자 예진이는 눈에 보일 정도로 확연하게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보니 한수 녀석이 서연이에게 대차게 까인 뒤로 한참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더니, 오늘 모처럼 본 녀석의 모습은 아주 가관이었다. 면도도 제대로 하지 않은데다 옷차림도 꼬질꼬질했고, 피부는 푸석했으며 눈빛은 퀭했다. 사람이 실연을 하게 되면 저렇게 망가질 수도 있는거구나 싶었다.
문득 서연이가 아직도 한수 녀석에게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을까 속 좁은 의심이 들어 흘끗 서연이의 눈치를 살폈는데, 서연이는 한수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고 오직 친구인 예진이가 교수님에게 혼쭐이 나고 있는 모습을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런 모습을 보고 나니 발표 준비에 대한 촉박함이 더욱 생생히 느껴지는 듯, 더욱 비장한 얼굴이 되는 그녀였다.
결국 예진이네 조는 평가에서 C를 받고 말았다. D가 아닌 것만 해도 어디냐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예진이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너무 가혹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C 따위나 받으려고 혼자서 발표 준비를 했던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비록 나는 예진이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불쌍한건 사실이었다.
"두 사람도 잘 봤지? 교수님이 보통 깐깐한게 아니야. 우리는 꼭 제대로 준비해서 어떤 질문이나 피드백이 들어와도 대처할 수 있게끔 준비해야해. 알았지? 오늘 저녁에 준비해서 보자."
예진이가 C를 먹었다는 충격적인 사태 앞에 서연이는 더욱 초조해하고 있었다. 학과 회의로 자리를 뜨면서도 그녀는 나와 유정이에게 몇 번이나 더 당부를 하고 사라졌다. 둘만 남게된 유정이와 나는 잠시 어색한 공기 속에 쭈뻣거리고 서 있었지만, 나는 이내 유정이에게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학생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마 우리는 잘 할 수 있을 거에요. 우린 그 조랑은 다르게 협동이 잘 되니까...."
"응. 나도 별 걱정은 안해."
사실 진짜로 별 걱정은 되지 않았다. 한낱 조별 과제 따위 자체가, 아니, 어쩌면 이 공부라는 것 자체가 이제 내게는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마음만 먹으면 A를 받는건 너무도 손 쉬운 일이 아닌가. 그 이전에 심지어 꼭 A를 받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유정이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캠퍼스를 걸어내려가고 있는데 중앙도서관 앞에서 익숙한 한 남녀의 모습을 보았다. 불과 조금 전에 발표를 아주 허망하게 말아먹어버린 예진이와 한수였다. 딱하긴 했어도 그 이상의 관심은 없었기에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하필 지나치려는 순간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귀에까지 들렸다.
"그렇다고 교수한테 가서 그걸 있는 그대로 얘기하면 어떡해? 나 C라도 받아야 하는거 몰라? 그거 F뜨면 졸업 위험하단 말이야."
"내가 그런 쓰레기 학점이나 받으려고 혼자 밤새가면서 준비한건줄 알아? 두 사람 F로 떨어뜨리는 한이 있어도 교수님한테 따져서 학점 올릴거야."
"야, 그건 좀 아니지. 너 하나 살겠다고 다른 조원 이름을 빼?"
"조원? 조원 같은 소리하고 있네. 솔직히 나 말고 두 사람이 한게 뭐가 있어? 특히 선배는 서연이한테 까이고나서 그동안 학교도 안 나오고 심지어 과제가 있다는 것조차도 신경 끄고 있었잖아. 안 그래?"
두 사람이 싸우는 거야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예진이의 말이 한수의 콤플렉스를 건드린 것 같았다. 서연이에게 차인 기억을 고스란히 헤집는 예진이의 발언에 한수가 얼굴이 붉어지며 눈이 뒤집혔다.
"씨발,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해?"
"뭐? 씨발? 그 따위? 참 나, 내가 틀린 말 했어? 차였으면 차인거지 유치하게 실연병 흉내 내다가 다른 사람까지 피해준 꼴이잖아."
"아, 씨발... 이게 진짜."
흥분을 이기지 못한 한수가 욕지거리를 내뱉자 순식간에 주변의 이목이 두 사람을 향해 집중되었다. 나 또한 그 이목들 가운데 하나였다. 갑자기 집중되는 시선을 의식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한수의 두 눈이 어느 순간 나와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러자 한수의 얼굴이 무참하게 굳어지며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역시 들은건가? 서연이랑 내가 사귄단 소식을?"
아무래도 학과의 최고 인기녀인 서연이인만큼 그 소식도 빠르게 퍼졌을 테지.... 한수가 그 소식을 들었다면 녀석에게 있어 나야말로 원수 그 자체이지 않을 수 없으리라.
"씨이발!"
한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으로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며 서있더니, 별안간 예진이의 팔을 이끌고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질질 끌려가는 소가 된 듯한 모습의 예진이가 고통스러워하며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한수는 아랑곳 않고 그녀를 끌고갔다.
"아, 아야! 아파! 이거 안 놔? 아, 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끌려가는 예진이의 꼴은 보는 입장에서 심히 걱정스러워 보였지만 다부진 체격의 한수가 성질내는 모습이 너무 사나웠기 때문인지 주변 학생들은 누구 하나 나설 생각을 않고 저마다 가던 길을 다시 가기 시작했다.
굳이 타인의 사정에 끼어들고 싶어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사실 나 또한 두 사람에게 신경을 쓸 이유는 없었기에 가던 대로 유정이와 밥을 먹으러 갈까 싶었지만 나와 다르게 유정이는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따라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응? 왜?"
"제 느낌이지만 저런 남자들은 위험하거든요.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차마 그런 유정이의 면전에다 대고 "뭐 우리랑은 상관없지 않나? 하하!" 하며 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야말로 자의반 타의반의 심정으로 나는 어쩔 수 없이 한수의 뒤를 쫓아갔다.
"야, 씨발... 너 돌았냐?"
골목을 돌자마자 눈에 보인 광경은 꽤나 심상치 않았다. 후미진 곳으로 예진이를 밀어붙인 한수는 척 보기에도 위협적으로 예진이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었는데, 예진이년도 제법 성깔이 있는 년이라 그런지 거기에 주눅들지 않고 앙칼지게 대꾸하고 있었다.
"뭐. 내가 틀린말 했냐니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딴 소릴 지껄여? 내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 그랬지."
"웃기고 있네. 고백해놓고 차이니까 쪽팔려? 다른 사람들이 그거 아는게 그렇게 창피한가보지? 그럴거면 애초에 고백은 왜했어? 병신 같이."
"아오, 이 개같은 년이 진짜!"
"아악!"
불길한 예감은 꼭 들어맞는 법인지 결국 일이 터지나보다. 실연을 겪고 반병신이 된 한수 녀석의 꼴이 정상은 아닌 것 같았지만 설마하니 여자애를 상대로 폭력을 쓸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예진이의 말이 녀석의 치부를 너무 심하게 헤집은 모양이었다. 한수 녀석이 예진이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쥐어잡자 그녀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악! 씨발! 이거 놔!"
"좆 같은 년아. 말이면 다인줄 알아? 진짜 사람 빡도는 꼴 한번 볼래?"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던 예진이가 결국 봉변을 당하는 꼴을 보니 조금쯤은 자업자득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사실 가만히 두고 보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딱히 의협심 때문은 아니었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구경이나 하고 있는 것도 웃긴 꼴이라 나는 헛기침을 하며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야, 그만해."
"뭐야?"
내 얼굴을 확인한 한수의 얼굴이 역시나 딱딱하게 일그러졌다. 녀석 입장에서는 내가 오매불망 그리던 여인을 어이없게 뺏어간 불구대천 원수일 테니 그럴 만도 하겠지. 마치 예전에 지환이 녀석을 보는 내 기분이 지금 한수의 기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자애 상대로 좀 심하잖아. 이거 놓고 얘기하자."
"씨발... 신경 끄고 그냥 가던 길이나 가라. 응?"
그러니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이렇게 눈 앞에 나타나서 끼어드는 꼴이 놈의 입장에서는 견딜 수 없이 얄미울 것이다. 어차피 이성적인 대화가 통할 것 같진 않았기에 나는 그저 얼른 이 자리를 뜨는 것이 최선일 거라 생각하여 예진이의 팔을 끌고 이끌었다. 입씨름 할 것 없이 조용히 예진이만 데리고 사라지는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서예진. 가자."
하지만 다음 순간 뒤통수에 둔탁한 통증과 함께 눈 앞에 불빛이 번쩍이며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볼품없이 앞으로 나뒹굴면서 나도 모르게 머리를 두 팔로 감쌌는데, 주먹질과 발길질이 수차례 뒤이어 날아왔다.
"씨발, 신경 끄고 가던 길 가라고 했지? 개새끼야!"
마치 설움을 모조리 토해내는 듯한 구타 앞에 우습게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서연이 주변의 남자들과 엮이면 항상 이 꼴이 나는가?" 였다. 분명 그런 여유있는 감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음에도 한수 녀석의 무차별 구타 앞에 그 언젠가의 지환이 새끼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니가 날 놀려? 니가 날 갖고 놀아? 그래, 이 씹새끼야. 니 여자친구한테 찝적거리는 내 모습 보면서 속으로 존나게 비웃었겠지. 그래서 좋냐? 좋냐고, 개새끼야! 좆 같은 찌질이 새끼 주제에!"
퍼억퍼억퍼억퍼억!
씨발..! 내 몸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명나게 타격음이 퍽퍽 울렸다. 개처럼 얻어맞으면서도 한수 녀석의 얼굴에서 지환이 새끼가 겹쳐보였던걸 보면 그 때와 지금의 상황이 여간 비슷한게 아니었나보다.
그리고 심지어 그 구타의 상황에서 나를 구해준 인물 역시 그 때와 같은 여인이었다.
"야!!"
소낙비처럼 퍼붓는 주먹세례 속에서도 유정이의 화난 목소리를 한 차례 얼핏 들은 것 같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부터 한수 녀석의 주먹과 발길질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얼굴을 감싼 두 팔을 내리고 위를 올려다보니 한수 녀석이 숨이 넘어갈 듯한 얼굴로 명치를 감싸쥔 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커.. 커억.."
게거품을 물 듯한 한수 녀석의 모습과 유정이의 꾹 쥐어져 있는 주먹을 보건대 상황이 대충 짐작이 갔다. 그걸 지켜보는 예진이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있었다.
"너... 너 뭐야... 이 씨발년아... 커헉...."
하지만 유정이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한수 새끼의 가랑이 사이를 번개처럼 냅다 올려차버렸다.
"끄허억!"
맙소사.... 급소 중의 급소를 얻어맞은 한수 녀석은 그야말로 눈깔의 흰자위가 뒤집혀 혀를 쭉 빼고는 길바닥에 흐느적거리며 무너져내렸다. 입가엔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고꾸라진 모습을 보니 방금 전까지 나를 패던 새끼임에도 불구하고 순간 걱정이 될 정도였다.
"유, 유정아...."
내가 더듬거리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유정이는 약간 불편한 표정으로 나와 쓰러진 한수의 모습을 번갈아보았다.
"어설프게 패면 지난번처럼 또 뒤에서 덤빌까봐...."
"......"
유정이가 말하는 지난번이 뭘 의미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지만 새삼 그녀의 무지막지한 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마는 순간이었다. 물론 갑자기 얻어맞은 것도 놀랄 일이긴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보니 어느 박자에 놀라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아, 암튼 가자...."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한수 녀석을 그늘에다 대충 앉혀주고는 잽싸게 유정이와 예진이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혹시나 죽었나 싶어서 숨을 쉬는지까지 확인해보았다.
"저, 저기요. 선배."
한참을 걷고 난 후에야 예진이가 숨을 헐떡거리며 나를 불러세웠다.
"왜?"
"한수 선배, 괜찮겠죠?"
"몰라. 걱정되면 니가 가서 부축해주든지...."
예진이는 자꾸만 유정이를 흘끗거리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마치 외계에서 온 괴물이라도 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솔직히 나도 유정이의 저 가느다란 팔이 순식간에 건장한 사내를 고꾸라지게 만드는 모습을 두 번이나 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게 사실이었으니, 예진이의 반응도 무리가 아니었다.
"너 말야.... 그러게 왜 그런 식으로 그 놈을 자극하고 그래? 물론 니가 학점 때문에 민감해진 것도 이해는 간다만 조금 조심해서 말할 수도 있었던 거잖아. 안 그래?"
"아, 그게요~ 헤헤...."
하지만 다음 순간 예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나로 하여금 할말을 잃게 만들었다.
"사실 선배가 보고 있는걸 알고 있었거든요. 성진 선배가 도와주나 안 도와주나 한번 보려고.... 헤헤헤."
"뭐어....?"
나는 물론이고, 심지어 평정을 유지하던 유정이의 얼굴까지 순간 당혹스럽게 변했다.
"왠지 선배가 도와줄 것 같았거든요. 한번 시험해 본 거에요~ 히히."
"야."
골통 어딘가가 지끈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애써 입을 열었다. 이 년이 지금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일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내가 안 도와줬으면 어쩌려고 했는데?"
"음... 글쎄요. 결과적으로 내 생각이 맞았던 거잖아요."
"아냐. 너를 걱정한건 내가 아니라 유정이였어."
"아하~ 그래요? 아무튼 고마워요."
도대체 이 년은 뭐지.... 어처구니 없게 일그러지는 내 표정을 보면서도 예진이가 생긋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말했잖아요. 난 성진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꼭 알고 싶다고."
"야... 너 있잖아."
나는 평정을 가장하는 선 안에서 최대한 위협적인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말했다.
"충고하는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는 그 짓거리를 그만두지 않으면 방금 전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이 생길거야. 내기해도 좋아."
"오옷. 그래요? 그럼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네요! 난 궁금한건 정말 못 참으니까요."
어우, 이 년이 진짜....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암튼 고마웠어요~!"
그 때, 그렇게 손을 흔들며 사라지려는 예진이를 붙드는 손이 있었다. 바로 유정이였다.
"잠깐만요."
예진이를 불러세우는 유정이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나 뿐만 아니라 예진이도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유정이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유정이의 얼굴은 평소의 담담한 모습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지만 나는 어쩐지 그 얼굴이 조금 화나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오빠한테 괜한 짓 하지 말아요."
"으, 응? 뭐라구?"
"성진 오빠한테 괜한 짓 하지 말라구요."
정말 자존심 상하게도, 그 순간 솔직히 말해서 내가 예진이에게 했던 그 어떤 위협적인 말보다도 유정이의 한마디가 훨씬 더 효과가 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지막한 유정이의 목소리 앞에 예진이가 움찔하며 차마 대답도 못하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마도 아까 보았던 유정이의 무서운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꼭 새겨들어요."
유정이는 볼 일이 끝났다는 듯 예진이를 세워두고 등을 돌렸고, 나는 덩달아 유정이를 따라 걷게 되었다. 뭔가 묵직한 언짢음을 드러내는 유정이의 뒷모습이 평소와는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런 그녀를 바짝 뒤따라가면서도 나는 문득 예진이를 한번 슬쩍 돌아보았는데, 그녀는 샐쭉한 표정으로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
"오빠."
"응."
유정이의 오토바이를 타고 원룸까지 오는 길 내내 우리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물론 오토바이 위에서 대화를 나누기도 쉽지 않긴 했지만 그보다는 유정이가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결국 그녀가 입을 연 것은 주차장에 오토바이를 대고 나서였다.
예전 같으면 유정이가 나를 집까지 바래다 주는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젠 그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신기했다. 이 원룸 건물은 이제 나의 집이기도 했지만 유정이의 집이기도 했다. 한 건물 안에 우리가 같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왠지 붕 뜨는 것 같았다.
"서연 언니 때문에 왠지 자주 봉변을 당하시는 것 같네요."
"으, 응. 그러게... 하하."
유정이 또한 아까 내가 했던 생각을 그대로 하고 있었는지 꽤 정곡을 찔러 말했다.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애써 웃음을 지었지만 유정이는 성큼성큼 걷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유정이의 방은 1층이었고 나는 3층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와 1층에서 헤어질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나를 따라 계단을 걸어올라왔다.
"서연 언니 오기 전까지 둘이서 PPT 기초작업 좀 하고 있는게 좋겠어요."
"아, 그, 그럴까?"
서연이는 학과 회의와 오후 수업 때문에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방으로 오겠다고 했다. 시간은 금이니 두 사람이라서라도 빨리 작업을 시작하는게 좋긴 하겠지만 왠지 유정이와 한 방에 둘이 있게 된다는 것이 나를 자극했다. 게다가 유정이와 단 둘이 있을 때마다 왠지 불미스런 일이 자꾸 일어났던 것을 감안하면 더욱더....
"유정이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건가?"
지난번에 내가 그녀에게 두번째로 기습 키스를 했을 때의 기억을 그녀도 아직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나와 한 방에 단 둘이 있게 되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는게 신기했다.
"그리고 오빠 얼굴에 상처도 치료해야 해요."
"어...?"
유정이의 말을 듣고 얼굴을 확인해보니 나도 여태껏 몰랐던 핏자국이 있었다. 아마도 아까 한수에게 얻어맞으면서 바닥에 엎어질 때 긁힌 상처인가보다. 여태까지 몰랐을 정도이니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왠지 다쳤다는걸 인식하고나니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얼굴 이리 대봐요."
방에 들어오자마자 유정이는 내게 소독액과 약품을 달라고 하더니 상처를 소독하고 위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그러다보니 나와 유정이의 얼굴이 가깝게 밀착되어, 그렇지 않아도 이전에 있었던 두 번의 키스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던 나를 더욱 자극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혹시.... 오늘도 키스하면 옆집 여자가 달려와서 뺨을 후려치려나?"
그 순간 발칙하게도 옆집 여자를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나를 조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만 했던 그녀의 반응을 나 또한 시험해보고 싶다는 기분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기분 내키는 대로 살겠다는 다짐이 이런 무모함까지 내게 심어준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우습게도 하필 그 순간 예진이의 당돌한 한 마디가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한번 시험해 본 거에요~ 랬나?
"가만 있어요. 왜 자꾸 움직이는 거에요?"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리나보다. 밴드를 붙이려는 유정이가 내 얼굴을 잡아 고정시켰다. 그러자 얄궂게도.... 나와 유정이의 시선이 그 가까운 거리에서 정확하게 부딪혔다.
"오빠."
"응?"
그리고 다음 순간 유정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다음 말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또 갑자기 키스할 생각 하고 있는 거에요?"
"......."
아마도 인간의 두뇌가 짧은 순간에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면, 맹세컨대 내 두뇌는 지금 그 기능을 최대한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야말로 온갖 생각이 뒤죽박죽 뒤엉켰지만, 이상하게도 입 밖으로 나온 대답은 생각과는 별 관련이 없는 충동적인 한 마디였다.
"응. 맞아."
"........"
이번에는 유정이가 할 말을 잃고 만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곧바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흡...."
언제나처럼 충동적인, 우리의 세번째 키스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 몽환적인 순간을 깨고 당장이라도 옆집 여자가 나타날 것만 같아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점점 더 본능에 몸을 맡기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월요일에 다가오고 있네요!! 하하하하...
메르스 조심, 더위 조심, 건강 조심하세요 ^^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35장
집으로 가는 길 내내 현주는 말이 없었다. 서연이와는 원룸 앞에서 헤어졌다. 자존심 강한 서연이로서는 이틀 연속이나 뒷전으로 밀려버린게 서운할만도 하건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별 탈 없이 이해하는 듯한 눈치였다.
아파트 단지 앞에 차를 세우고 현주와 함께 내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현주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게 좋겠다고 두뇌가 조언하고 있었다. 경비실을 지나 엘리베이터 근처까지 다다르자 결국 현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음, 우리... 다시 사귀는거야?"
이상한 질문이었다. 왜 그걸 내게 묻는걸까? 그걸 결정하는건 순전히 현주에게 달린 것일 텐데. 하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그녀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게 미룸으로써 내가 그녀의 마음을 이끌어주길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헤어진 적 없었잖아."
그 천연덕스러운 대꾸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뻔뻔하게 보였다. 하지만 이제 굳이 그런걸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대로, 꾸밈이나 포장 없이 드러내면 되는 것이다.
"그런가..."
물론 그렇다고 한들, 그걸 또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현주가 너무도 착해빠진 순둥이라는 사실은 변함 없지만 말이다. 그녀는 여전히 무척 혼란스러워 보였다.
"사실은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오빠.... 이게 정말 맞는 건지. 내가 이렇게 납득하고 순응한다는게 내 자신에게 큰 실수를 하는건 아닐까 그게 자꾸 불안하고 걱정돼."
엘리베이터가 수차례 1층을 오고 갔지만 현주는 탈 생각을 못하고 서성거렸다. 나는 불안해하는 현주를 살며시 품에 안아보았다. 주춤하며 망설이는 그녀였지만 용케도 내 품을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내게 안겼다. 물론 평소처럼 두 팔을 뻗어 적극적으로 나를 껴안거나 하지는 않았다.
비록 불안해하고 있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지만, 적어도 그녀가 지금 우리의 상황을 이전처럼 거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내게는 희망의 징조로 보였다. 지금은 그녀의 입에서 이별이나 거절의 극단적인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기만 했다.
"너한테 상처주지 않도록 내가 더 잘할게. 아니, 이미 상처줬지만.... 그래도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내가 너에게 소홀해지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어쩌면 이런 관계가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잖아."
"흥... 변명하지마. 오빠는 그냥 욕심쟁이일 뿐이야."
그렇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면서도 한편으론 포옹을 풀지 않는 모습이 귀여웠다. 하기에 따라서는 정말 이대로 우리만의 관계를 구축할 수도 있지 않을까....? 비록 꿈 같은 이야기였지만 내게는 바로 그 꿈 같은 이야기가 다른 무엇보다도 더 훌륭한 선택인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야 어쨌건 간에 그럴 수만 있다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았다.
"주말엔 둘이서 데이트하자. 오랜만에."
"......."
차마 고개를 끄덕거리기는 자존심이 상하는지,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뻣뻣하게 내 포옹을 받아들이고만 있었다.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다시 한번 1층으로 내려왔다. 이미 수차례 엘리베이터를 보냈으니 이번엔 아쉽지만 그녀를 태워보내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데 채 포옹도 풀기 전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엇...."
혹시나 그게 신의 장난이라면 정말 악취미라고 부를 만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필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내린 사람이, 내가 지금 세상에서 상대하기 가장 껄끄러운 사람일 줄은....
"어, 언니...."
현주가 더듬거리며 내 품에서 조심스럽게 떨어졌다. 그녀의 그 반응만으로도 나는 등 뒤에 서있는 여자의 이름과, 또 그 여자의 반응이 어떤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현아가 나를 죽일 듯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 또한 나와 현주가 서로 부둥켜 안고 있는 모습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지만, 그 놀라움은 타오르는 분노 앞에 너무도 쉽게 삼켜진 것처럼 보였다.
"뭐야, 당신!"
현아가 순식간에 나와 현주 사이로 끼어들어 우리 두 사람 사이를 매몰차게 갈라버렸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나로부터 자신의 동생을 보호하려는 듯, 현주를 등 뒤로 숨겼다.
"뭐하는 짓이야? 아직도 내 동생한테 볼 일이 남았어?"
"어, 언니... 그런거 아냐."
내가 현주와 영락없이 끝난 줄로만 아는 현아는, 등 뒤에서 현주가 뭐라고 웅얼거리던지 간에 나를 용서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사실 현아의 입장에서는 내가 현주와 헤어지는 것보다 오히려 이렇게 다시 눈 앞에 나타난 것이 더 화가 날지도 모르리라.
현주는 그런 언니의 분노한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생각보다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현아가 나타난 것 자체야 운이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녀의 그런 반응은 애초에 예상했던 것이니....
"가! 꺼져! 내 동생 앞에 나타나지 마."
한마디 한마디를 끊을 때마다 나를 드세게 밀쳐내며 위협하는 그녀의 모습은 퍽 사나워보였다. 아프거나 하진 않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 소변도 받아마셨던 적이 있는 그녀가 이렇게 나를 향해 이빨을 세우고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뭐라 말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은 비뚤어진 야릇한 기분이었다.
"언니... 그러지 마."
어쨌거나 현주는 언니를 말리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런 동생의 모습이 이해가 가질 않는지 현아는 동생의 말리는 손길을 되려 밀어내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이거 놔봐. 넌 저 인간이 밉지도 않아?"
"나, 난 괜찮아."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너 설마 지금도 저 남자를 좋아하는건 아니지?"
아마도 현아의 그 질문은 답답한 동생과, 그리고 혐오스런 나에 대한 미움이 섞이다 못해 별 생각없이 튀어나온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로서는 당연하게도 현주가 아직도 내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을 리가 없었고, 그 때문에 그녀는 그 질문이 현주를 자극할 것이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좋아해! 아직 좋아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복도를 떠나가라 울릴 만큼 충동적인 현주의 외침 앞에 나도 현아도, 할 말을 잃었다.
*
현아는 현주를 데리고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탔다. 두 사람이 사라지기 전에 나는 언뜻 눈물을 훔치는 현주의 얼굴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내 시선을 피하는 현아의 얼굴을 동시에 본 것 같았다. 자매가 사라진 자리에서 서성이며 머물던 나는 그 후로 차를 타고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난봉꾼인가?"
새삼스럽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정말로 새삼스러웠다. 이제와서 그 무슨 의미 없는 물음이란 말인가.... 사실 거기에 대해서 고민하던 불과 어제까지의 나와, 비로소 그 고민을 한꺼풀 벗어버린 지금의 나 사이의 다른 점이라곤 다만 그것을 허울로써 포장하려 드느냐 마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래. 내가 원래 이런 놈인걸."
마치 스스로에게 주문이라도 걸듯, 나는 굳이 입밖으로 소리내어 나를 구박해보았다. 내 자신에게 비난을 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면 그 뿐이라는, 그 간단한 깨달음을 스스로에게 더욱 뚜렷이 새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무법자, 난봉꾼, 파렴치한...."
그러한 삶의 마인드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뭐가 있을지 한번 머릿속으로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딱 들어맞는 적절한 표현은 없었다. 하지만 괜찮아. 굳이 그걸 세상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아도 좋다. 그 누구의 언어에도, 가치관에도, 사고방식에도 얽매이지 않으리라. 단지 내 스스로 생각하고 조절해나가면 된다.
"그래. 그 뿐이야."
그 다짐을 고정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입으로 소리를 낸다. 실은 타임 리와인더를 손에 넣었을 때부터 내 마음은 그러한 갈등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시계를 가져보지 못한 사람은 좀체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능력을 손에 넣는 순간부터는 어쩔 수 없이 그런 고민 아래 놓이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을 나름대로 지금까지 겪어본 내 경험에 의하면, 그것은 정말이지 매순간 새로운 고민에 부딪혀가며 끊임없이 새로운 대답을 내어놓은 과정의 반복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 또 한번의 대답을 되찾은 셈이었다.
어찌보면 참으로 모순적이게도, 나는 반복되는 고민의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처음 이 시계를 손에 넣었을 때의 그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이 단순하고 무식한 모습이야말로 내게 조금 더 어울리는, 그리고 내가 더욱더 바라는 나의 모습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
본의 아니게 그 다음 날엔 현주의 일로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물론 그녀와의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다른 일에도 조금씩은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동안 복잡한 여자 관계를 해결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탓에, 나는 조별 과제가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을 미처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큰일이네. 이제 다음 시간이면 당장 발표를 해야 하는데.... 왜 그동안 이걸 잊고 있었지?"
옆에서 서연이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내심으로 그럴 만 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겪은 그 "복잡한 여자관계"라는 것의 중심에 바로 그녀가 있었기에, 내가 겪은 혼란을 그녀도 함께 겪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일상에 이토록 타격을 주었다는 사실을 좀체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서연이는 사실 학과에서도 내로라 하는 엘리트인지라 이런 식으로 과제를, 거기다가 조별 과제를 등한시하고 있었다는 것에 자괴감마저 느끼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를 위로했지만 사실 시간이 촉박해졌다는 사실만은 틀림이 없었다. 물론 나에게는 그게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지난번에 얘기한대로 이번 주말에 오빠 방에 모여서 PPT부터 만들어봐요. 하루이틀 바짝 열심히 만들면 자료 준비는 될 테고, 발표 연습만 하면 되지 않을까요?"
유정이가 나이에 걸맞지 않는 차분한 태도로 최선책을 내놓았다. 처음에 조를 만들 때만 해도 나와 서연이가 유정이를 이끌어가는 그림이 나올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가장 어른스러운게 유정이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냐! 주말까지 미루기에도 너무 늦어. 그러다가 주말에 다 못하면 어떡해. 아무래도 오늘 당장 시작해야겠어."
"오, 오늘?"
예정에 없던 일정이 생겨버리자 나는 약간 움찔했지만 서연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강행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나는 내심으로, 제시간에 준비를 다 못하면 타임 리와인더를 써서라도 내가 준비하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생각이 들었지만.... 깨달음을 얻었다해서 수명을 담보로 너무 능력을 남발하는 것도 조금 곤란하겠다는 판단 때문에 결국 서연이의 의욕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두 사람 다 저녁에 별 일 없지?"
과제를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한 반성이라도 하듯 활활 불타오르는 서연이의 모습을 차마 말리지 못하고, 유정이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게다가 비록 서연이의 의욕으로 인해 결정된 사실이긴 했지만, 그 날 오후에 있었던 수업에서 우리의 그 결정을 한층 더 부채질 하는 사건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이상 여기까지가 저희 7조의 발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진이가 나름대로 능숙하게 발표를 마무리하고 강의실 교탁에서 내려왔을 때, 나는 물론이고 강의실 안에 있었던 모든 학생들이 그녀의 조가 썩 괜찮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 조와 함께 견학을 갔었던 예진이네 조는 순서상으로보면 우리의 바로 앞주자였기에, 다음 강의에는 즉 우리조가 발표를 할 순서라는 뜻이었다. 이제 정말로 시간이 없다는 그 촉박함이 우리의 의욕을 더욱 굳혀준 것도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우리조의 걱정을 부추겼던 일은 따로 있었다.
"그래, 잘 들었네. 평가를 내리기 이전에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네만...."
교수님이 차분하게 운을 떼자, 교탁에서 내려오려던 예진이가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섰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학생들 모두가 그 후에 이어질 전개를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예진이네 조가 준비한 발표 내용은 상당히 괜찮은 수준이었다. 준비한 내용의 구성도 그렇거니와 그걸 설명하는 예진이의 유창한 솜씨에도 딱히 크게 흠 잡을 구석은 없었고, 제시한 PPT의 디자인도 예진이가 직접 작업을 한 것인지 여성 특유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학생들 모두는 교수님의 평가가 좋은 내용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라 짐작했지만, 예상을 깨고서 교수님은 전혀 의외의 질문을 가장 첫머리에 던졌다.
"발표 자체는 괜찮았어. 내용도 잘 정리한 것 같고.... 그런데 이게 아무리 봐도 조별 발표라기보단 발표자 한 사람만의 개인 과제로 느껴지는 것은 내 착각인가?"
"......."
예진이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교수님의 질문을 몇몇 학생들은 납득하지 못하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어렴풋이 "아~" 하고 느껴지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예진이네 조가 견학하는 모습을 옆에서 직접 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애초에 견학을 할 때부터 예진이의 조에서 그녀를 제외하고 남은 두 사람은 발표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존재감이 없었던 사람은 논외로 치더라도, 한수 그 놈은 과제 자체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서연이의 환심을 사려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 제시한 PPT 내용의 문체 전부가 지금 발표하고 있는 여학생 한 사람의 화법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 같네만. 자료에서도, 발표에서도 발표자를 제외한 다른 조원들의 의견이 섞여있는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네. 간단히 말해서 내 생각에는 이 발표가 조별로 이루어진게 아니라 어느 한 사람이 3인분의 몫을 해낸 개인과제로 밖에 볼 수 없다는 뜻일세."
"교수님.... 그게...."
대학에서 조별 과제의 무임승차는 사실 비일비재한 일이고, 실제로 그것이 요즘 젊은 학생들로 하여금 조별 수행을 꺼리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구태여 지적하고 드는 교수님들은 생각보다 드물었다. 어찌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무임승차 구성원을 가려낼 만한 방법도 여의치 않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교수님은 오로지 자신의 직감으로 그것을 구별해내는 것 같았고, 예진이네로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 직감이 꽤나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 같았다.
"아, 아니에요 교수님.... 발표는 제가 했지만 PPT는 세 사람이 같이...."
본능적으로 예진이 또한 이 노년의 깐깐한 교수님이 발표 자체에 대한 평가도 우선시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조원들 간의 협동 부분에도 크게 신경을 쓰는 분이라는걸 느낀 것 같았다. 대개 이런 스타일의 교수님들에게는 발표 내용이 부실한 것보다도 오히려 이러한 부분이 더욱 큰 감점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가? 그럼 거기 앞줄에 앉아있는 남학생이 일어나서 3-2 페이지에 대한 설명을 직접 한번 해보게. 정신분석학에서 비롯한 무의식의 발견을 이론적 틀로 설명한 그 부분 말이네만."
"예, 예?"
교수님이 한수를 지적하자, 마치 투명인간처럼 발표 내내 숨죽이고 앉아있기만 했던 한수가 화들짝 놀라 기겁을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료 조사를 할 때조차 손놓고 서연이 뒤꽁무니만 따라다녔던 한수로서는 그걸 설명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게다가 교수님이 이어서 지목한 다른 남학생마저도 버벅거리며 요구받은 설명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러자 예진이는 눈에 보일 정도로 확연하게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보니 한수 녀석이 서연이에게 대차게 까인 뒤로 한참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더니, 오늘 모처럼 본 녀석의 모습은 아주 가관이었다. 면도도 제대로 하지 않은데다 옷차림도 꼬질꼬질했고, 피부는 푸석했으며 눈빛은 퀭했다. 사람이 실연을 하게 되면 저렇게 망가질 수도 있는거구나 싶었다.
문득 서연이가 아직도 한수 녀석에게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을까 속 좁은 의심이 들어 흘끗 서연이의 눈치를 살폈는데, 서연이는 한수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고 오직 친구인 예진이가 교수님에게 혼쭐이 나고 있는 모습을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런 모습을 보고 나니 발표 준비에 대한 촉박함이 더욱 생생히 느껴지는 듯, 더욱 비장한 얼굴이 되는 그녀였다.
결국 예진이네 조는 평가에서 C를 받고 말았다. D가 아닌 것만 해도 어디냐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예진이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너무 가혹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C 따위나 받으려고 혼자서 발표 준비를 했던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비록 나는 예진이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불쌍한건 사실이었다.
"두 사람도 잘 봤지? 교수님이 보통 깐깐한게 아니야. 우리는 꼭 제대로 준비해서 어떤 질문이나 피드백이 들어와도 대처할 수 있게끔 준비해야해. 알았지? 오늘 저녁에 준비해서 보자."
예진이가 C를 먹었다는 충격적인 사태 앞에 서연이는 더욱 초조해하고 있었다. 학과 회의로 자리를 뜨면서도 그녀는 나와 유정이에게 몇 번이나 더 당부를 하고 사라졌다. 둘만 남게된 유정이와 나는 잠시 어색한 공기 속에 쭈뻣거리고 서 있었지만, 나는 이내 유정이에게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학생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마 우리는 잘 할 수 있을 거에요. 우린 그 조랑은 다르게 협동이 잘 되니까...."
"응. 나도 별 걱정은 안해."
사실 진짜로 별 걱정은 되지 않았다. 한낱 조별 과제 따위 자체가, 아니, 어쩌면 이 공부라는 것 자체가 이제 내게는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마음만 먹으면 A를 받는건 너무도 손 쉬운 일이 아닌가. 그 이전에 심지어 꼭 A를 받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유정이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캠퍼스를 걸어내려가고 있는데 중앙도서관 앞에서 익숙한 한 남녀의 모습을 보았다. 불과 조금 전에 발표를 아주 허망하게 말아먹어버린 예진이와 한수였다. 딱하긴 했어도 그 이상의 관심은 없었기에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하필 지나치려는 순간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귀에까지 들렸다.
"그렇다고 교수한테 가서 그걸 있는 그대로 얘기하면 어떡해? 나 C라도 받아야 하는거 몰라? 그거 F뜨면 졸업 위험하단 말이야."
"내가 그런 쓰레기 학점이나 받으려고 혼자 밤새가면서 준비한건줄 알아? 두 사람 F로 떨어뜨리는 한이 있어도 교수님한테 따져서 학점 올릴거야."
"야, 그건 좀 아니지. 너 하나 살겠다고 다른 조원 이름을 빼?"
"조원? 조원 같은 소리하고 있네. 솔직히 나 말고 두 사람이 한게 뭐가 있어? 특히 선배는 서연이한테 까이고나서 그동안 학교도 안 나오고 심지어 과제가 있다는 것조차도 신경 끄고 있었잖아. 안 그래?"
두 사람이 싸우는 거야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예진이의 말이 한수의 콤플렉스를 건드린 것 같았다. 서연이에게 차인 기억을 고스란히 헤집는 예진이의 발언에 한수가 얼굴이 붉어지며 눈이 뒤집혔다.
"씨발,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해?"
"뭐? 씨발? 그 따위? 참 나, 내가 틀린 말 했어? 차였으면 차인거지 유치하게 실연병 흉내 내다가 다른 사람까지 피해준 꼴이잖아."
"아, 씨발... 이게 진짜."
흥분을 이기지 못한 한수가 욕지거리를 내뱉자 순식간에 주변의 이목이 두 사람을 향해 집중되었다. 나 또한 그 이목들 가운데 하나였다. 갑자기 집중되는 시선을 의식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한수의 두 눈이 어느 순간 나와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러자 한수의 얼굴이 무참하게 굳어지며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역시 들은건가? 서연이랑 내가 사귄단 소식을?"
아무래도 학과의 최고 인기녀인 서연이인만큼 그 소식도 빠르게 퍼졌을 테지.... 한수가 그 소식을 들었다면 녀석에게 있어 나야말로 원수 그 자체이지 않을 수 없으리라.
"씨이발!"
한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으로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며 서있더니, 별안간 예진이의 팔을 이끌고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질질 끌려가는 소가 된 듯한 모습의 예진이가 고통스러워하며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한수는 아랑곳 않고 그녀를 끌고갔다.
"아, 아야! 아파! 이거 안 놔? 아, 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끌려가는 예진이의 꼴은 보는 입장에서 심히 걱정스러워 보였지만 다부진 체격의 한수가 성질내는 모습이 너무 사나웠기 때문인지 주변 학생들은 누구 하나 나설 생각을 않고 저마다 가던 길을 다시 가기 시작했다.
굳이 타인의 사정에 끼어들고 싶어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사실 나 또한 두 사람에게 신경을 쓸 이유는 없었기에 가던 대로 유정이와 밥을 먹으러 갈까 싶었지만 나와 다르게 유정이는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따라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응? 왜?"
"제 느낌이지만 저런 남자들은 위험하거든요.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차마 그런 유정이의 면전에다 대고 "뭐 우리랑은 상관없지 않나? 하하!" 하며 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야말로 자의반 타의반의 심정으로 나는 어쩔 수 없이 한수의 뒤를 쫓아갔다.
"야, 씨발... 너 돌았냐?"
골목을 돌자마자 눈에 보인 광경은 꽤나 심상치 않았다. 후미진 곳으로 예진이를 밀어붙인 한수는 척 보기에도 위협적으로 예진이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었는데, 예진이년도 제법 성깔이 있는 년이라 그런지 거기에 주눅들지 않고 앙칼지게 대꾸하고 있었다.
"뭐. 내가 틀린말 했냐니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딴 소릴 지껄여? 내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 그랬지."
"웃기고 있네. 고백해놓고 차이니까 쪽팔려? 다른 사람들이 그거 아는게 그렇게 창피한가보지? 그럴거면 애초에 고백은 왜했어? 병신 같이."
"아오, 이 개같은 년이 진짜!"
"아악!"
불길한 예감은 꼭 들어맞는 법인지 결국 일이 터지나보다. 실연을 겪고 반병신이 된 한수 녀석의 꼴이 정상은 아닌 것 같았지만 설마하니 여자애를 상대로 폭력을 쓸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예진이의 말이 녀석의 치부를 너무 심하게 헤집은 모양이었다. 한수 녀석이 예진이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쥐어잡자 그녀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악! 씨발! 이거 놔!"
"좆 같은 년아. 말이면 다인줄 알아? 진짜 사람 빡도는 꼴 한번 볼래?"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던 예진이가 결국 봉변을 당하는 꼴을 보니 조금쯤은 자업자득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사실 가만히 두고 보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딱히 의협심 때문은 아니었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구경이나 하고 있는 것도 웃긴 꼴이라 나는 헛기침을 하며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야, 그만해."
"뭐야?"
내 얼굴을 확인한 한수의 얼굴이 역시나 딱딱하게 일그러졌다. 녀석 입장에서는 내가 오매불망 그리던 여인을 어이없게 뺏어간 불구대천 원수일 테니 그럴 만도 하겠지. 마치 예전에 지환이 녀석을 보는 내 기분이 지금 한수의 기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자애 상대로 좀 심하잖아. 이거 놓고 얘기하자."
"씨발... 신경 끄고 그냥 가던 길이나 가라. 응?"
그러니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이렇게 눈 앞에 나타나서 끼어드는 꼴이 놈의 입장에서는 견딜 수 없이 얄미울 것이다. 어차피 이성적인 대화가 통할 것 같진 않았기에 나는 그저 얼른 이 자리를 뜨는 것이 최선일 거라 생각하여 예진이의 팔을 끌고 이끌었다. 입씨름 할 것 없이 조용히 예진이만 데리고 사라지는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서예진. 가자."
하지만 다음 순간 뒤통수에 둔탁한 통증과 함께 눈 앞에 불빛이 번쩍이며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볼품없이 앞으로 나뒹굴면서 나도 모르게 머리를 두 팔로 감쌌는데, 주먹질과 발길질이 수차례 뒤이어 날아왔다.
"씨발, 신경 끄고 가던 길 가라고 했지? 개새끼야!"
마치 설움을 모조리 토해내는 듯한 구타 앞에 우습게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서연이 주변의 남자들과 엮이면 항상 이 꼴이 나는가?" 였다. 분명 그런 여유있는 감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음에도 한수 녀석의 무차별 구타 앞에 그 언젠가의 지환이 새끼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니가 날 놀려? 니가 날 갖고 놀아? 그래, 이 씹새끼야. 니 여자친구한테 찝적거리는 내 모습 보면서 속으로 존나게 비웃었겠지. 그래서 좋냐? 좋냐고, 개새끼야! 좆 같은 찌질이 새끼 주제에!"
퍼억퍼억퍼억퍼억!
씨발..! 내 몸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명나게 타격음이 퍽퍽 울렸다. 개처럼 얻어맞으면서도 한수 녀석의 얼굴에서 지환이 새끼가 겹쳐보였던걸 보면 그 때와 지금의 상황이 여간 비슷한게 아니었나보다.
그리고 심지어 그 구타의 상황에서 나를 구해준 인물 역시 그 때와 같은 여인이었다.
"야!!"
소낙비처럼 퍼붓는 주먹세례 속에서도 유정이의 화난 목소리를 한 차례 얼핏 들은 것 같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부터 한수 녀석의 주먹과 발길질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얼굴을 감싼 두 팔을 내리고 위를 올려다보니 한수 녀석이 숨이 넘어갈 듯한 얼굴로 명치를 감싸쥔 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커.. 커억.."
게거품을 물 듯한 한수 녀석의 모습과 유정이의 꾹 쥐어져 있는 주먹을 보건대 상황이 대충 짐작이 갔다. 그걸 지켜보는 예진이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있었다.
"너... 너 뭐야... 이 씨발년아... 커헉...."
하지만 유정이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한수 새끼의 가랑이 사이를 번개처럼 냅다 올려차버렸다.
"끄허억!"
맙소사.... 급소 중의 급소를 얻어맞은 한수 녀석은 그야말로 눈깔의 흰자위가 뒤집혀 혀를 쭉 빼고는 길바닥에 흐느적거리며 무너져내렸다. 입가엔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고꾸라진 모습을 보니 방금 전까지 나를 패던 새끼임에도 불구하고 순간 걱정이 될 정도였다.
"유, 유정아...."
내가 더듬거리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유정이는 약간 불편한 표정으로 나와 쓰러진 한수의 모습을 번갈아보았다.
"어설프게 패면 지난번처럼 또 뒤에서 덤빌까봐...."
"......"
유정이가 말하는 지난번이 뭘 의미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지만 새삼 그녀의 무지막지한 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마는 순간이었다. 물론 갑자기 얻어맞은 것도 놀랄 일이긴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보니 어느 박자에 놀라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아, 암튼 가자...."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한수 녀석을 그늘에다 대충 앉혀주고는 잽싸게 유정이와 예진이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혹시나 죽었나 싶어서 숨을 쉬는지까지 확인해보았다.
"저, 저기요. 선배."
한참을 걷고 난 후에야 예진이가 숨을 헐떡거리며 나를 불러세웠다.
"왜?"
"한수 선배, 괜찮겠죠?"
"몰라. 걱정되면 니가 가서 부축해주든지...."
예진이는 자꾸만 유정이를 흘끗거리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마치 외계에서 온 괴물이라도 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솔직히 나도 유정이의 저 가느다란 팔이 순식간에 건장한 사내를 고꾸라지게 만드는 모습을 두 번이나 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게 사실이었으니, 예진이의 반응도 무리가 아니었다.
"너 말야.... 그러게 왜 그런 식으로 그 놈을 자극하고 그래? 물론 니가 학점 때문에 민감해진 것도 이해는 간다만 조금 조심해서 말할 수도 있었던 거잖아. 안 그래?"
"아, 그게요~ 헤헤...."
하지만 다음 순간 예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나로 하여금 할말을 잃게 만들었다.
"사실 선배가 보고 있는걸 알고 있었거든요. 성진 선배가 도와주나 안 도와주나 한번 보려고.... 헤헤헤."
"뭐어....?"
나는 물론이고, 심지어 평정을 유지하던 유정이의 얼굴까지 순간 당혹스럽게 변했다.
"왠지 선배가 도와줄 것 같았거든요. 한번 시험해 본 거에요~ 히히."
"야."
골통 어딘가가 지끈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애써 입을 열었다. 이 년이 지금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일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내가 안 도와줬으면 어쩌려고 했는데?"
"음... 글쎄요. 결과적으로 내 생각이 맞았던 거잖아요."
"아냐. 너를 걱정한건 내가 아니라 유정이였어."
"아하~ 그래요? 아무튼 고마워요."
도대체 이 년은 뭐지.... 어처구니 없게 일그러지는 내 표정을 보면서도 예진이가 생긋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말했잖아요. 난 성진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꼭 알고 싶다고."
"야... 너 있잖아."
나는 평정을 가장하는 선 안에서 최대한 위협적인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말했다.
"충고하는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는 그 짓거리를 그만두지 않으면 방금 전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이 생길거야. 내기해도 좋아."
"오옷. 그래요? 그럼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네요! 난 궁금한건 정말 못 참으니까요."
어우, 이 년이 진짜....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암튼 고마웠어요~!"
그 때, 그렇게 손을 흔들며 사라지려는 예진이를 붙드는 손이 있었다. 바로 유정이였다.
"잠깐만요."
예진이를 불러세우는 유정이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나 뿐만 아니라 예진이도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유정이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유정이의 얼굴은 평소의 담담한 모습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지만 나는 어쩐지 그 얼굴이 조금 화나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오빠한테 괜한 짓 하지 말아요."
"으, 응? 뭐라구?"
"성진 오빠한테 괜한 짓 하지 말라구요."
정말 자존심 상하게도, 그 순간 솔직히 말해서 내가 예진이에게 했던 그 어떤 위협적인 말보다도 유정이의 한마디가 훨씬 더 효과가 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지막한 유정이의 목소리 앞에 예진이가 움찔하며 차마 대답도 못하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마도 아까 보았던 유정이의 무서운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꼭 새겨들어요."
유정이는 볼 일이 끝났다는 듯 예진이를 세워두고 등을 돌렸고, 나는 덩달아 유정이를 따라 걷게 되었다. 뭔가 묵직한 언짢음을 드러내는 유정이의 뒷모습이 평소와는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런 그녀를 바짝 뒤따라가면서도 나는 문득 예진이를 한번 슬쩍 돌아보았는데, 그녀는 샐쭉한 표정으로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
"오빠."
"응."
유정이의 오토바이를 타고 원룸까지 오는 길 내내 우리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물론 오토바이 위에서 대화를 나누기도 쉽지 않긴 했지만 그보다는 유정이가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결국 그녀가 입을 연 것은 주차장에 오토바이를 대고 나서였다.
예전 같으면 유정이가 나를 집까지 바래다 주는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젠 그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신기했다. 이 원룸 건물은 이제 나의 집이기도 했지만 유정이의 집이기도 했다. 한 건물 안에 우리가 같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왠지 붕 뜨는 것 같았다.
"서연 언니 때문에 왠지 자주 봉변을 당하시는 것 같네요."
"으, 응. 그러게... 하하."
유정이 또한 아까 내가 했던 생각을 그대로 하고 있었는지 꽤 정곡을 찔러 말했다.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애써 웃음을 지었지만 유정이는 성큼성큼 걷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유정이의 방은 1층이었고 나는 3층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와 1층에서 헤어질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나를 따라 계단을 걸어올라왔다.
"서연 언니 오기 전까지 둘이서 PPT 기초작업 좀 하고 있는게 좋겠어요."
"아, 그, 그럴까?"
서연이는 학과 회의와 오후 수업 때문에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방으로 오겠다고 했다. 시간은 금이니 두 사람이라서라도 빨리 작업을 시작하는게 좋긴 하겠지만 왠지 유정이와 한 방에 둘이 있게 된다는 것이 나를 자극했다. 게다가 유정이와 단 둘이 있을 때마다 왠지 불미스런 일이 자꾸 일어났던 것을 감안하면 더욱더....
"유정이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건가?"
지난번에 내가 그녀에게 두번째로 기습 키스를 했을 때의 기억을 그녀도 아직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나와 한 방에 단 둘이 있게 되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는게 신기했다.
"그리고 오빠 얼굴에 상처도 치료해야 해요."
"어...?"
유정이의 말을 듣고 얼굴을 확인해보니 나도 여태껏 몰랐던 핏자국이 있었다. 아마도 아까 한수에게 얻어맞으면서 바닥에 엎어질 때 긁힌 상처인가보다. 여태까지 몰랐을 정도이니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왠지 다쳤다는걸 인식하고나니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얼굴 이리 대봐요."
방에 들어오자마자 유정이는 내게 소독액과 약품을 달라고 하더니 상처를 소독하고 위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그러다보니 나와 유정이의 얼굴이 가깝게 밀착되어, 그렇지 않아도 이전에 있었던 두 번의 키스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던 나를 더욱 자극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혹시.... 오늘도 키스하면 옆집 여자가 달려와서 뺨을 후려치려나?"
그 순간 발칙하게도 옆집 여자를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나를 조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만 했던 그녀의 반응을 나 또한 시험해보고 싶다는 기분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기분 내키는 대로 살겠다는 다짐이 이런 무모함까지 내게 심어준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우습게도 하필 그 순간 예진이의 당돌한 한 마디가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한번 시험해 본 거에요~ 랬나?
"가만 있어요. 왜 자꾸 움직이는 거에요?"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리나보다. 밴드를 붙이려는 유정이가 내 얼굴을 잡아 고정시켰다. 그러자 얄궂게도.... 나와 유정이의 시선이 그 가까운 거리에서 정확하게 부딪혔다.
"오빠."
"응?"
그리고 다음 순간 유정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다음 말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또 갑자기 키스할 생각 하고 있는 거에요?"
"......."
아마도 인간의 두뇌가 짧은 순간에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면, 맹세컨대 내 두뇌는 지금 그 기능을 최대한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야말로 온갖 생각이 뒤죽박죽 뒤엉켰지만, 이상하게도 입 밖으로 나온 대답은 생각과는 별 관련이 없는 충동적인 한 마디였다.
"응. 맞아."
"........"
이번에는 유정이가 할 말을 잃고 만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곧바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흡...."
언제나처럼 충동적인, 우리의 세번째 키스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 몽환적인 순간을 깨고 당장이라도 옆집 여자가 나타날 것만 같아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점점 더 본능에 몸을 맡기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월요일에 다가오고 있네요!! 하하하하...
메르스 조심, 더위 조심, 건강 조심하세요 ^^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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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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