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39장
"뭐하시는 거에요?"
그 날,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옆집 여자를 만났다. 늘 그랬지만 만나려고 해서 만났던건 아니었다. 다만 문을 활짝 열어두고, 방 안에서 이것저것을 정리하고 있는 그녀를 보니 호기심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유정이의 이삿짐을 정리하는걸 도와주다 오는 길이었기에 옆집 여자의 그 모습이 왠지 비슷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아~ 이제 슬슬 여기를 떠나려고."
"네?"
그녀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다. 대답을 듣는 순간 그 말이 내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옆집 여자는 그런 것엔 별 관심이 없는듯 천천히 짐을 정리하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정리된 박스를 하나하나 복도로 내어놓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그저 멍하니 굳어있었다.
"잠깐만요. 이렇게 갑자기요?"
"뭐가 갑자기야? 내가 너한테 이사간다고 미리 보고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래도...."
이런 상황에 놓이고보니 그녀는 나에게 있어 정말로 괴이한 존재라는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내 "일상"에 있어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다시피 한 그녀였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내 주위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굉장히 큰 일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그럼 이건요?"
나는 품에서 타임 리와인더를 꺼내 그녀의 앞에 내보였다. 그 은색의 초시계야말로 나와 옆집 여자 사이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형상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조차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했다.
"글쎄. 어떡할까? "당분간" 니가 갖고 있을래?"
마치 어린아이 손에서 풍선을 뺏을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만약 정말로 그런 선택의 권한이 주어진다면야, 나는 당연히 이 시계를 내 소유로 두고 싶었지만 내 생각에 그 결정권이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내심 그녀가 여전히 나를 갖고 놀고 있다고 여겼다.
"뭐... 그래도 된다면요."
"그래봤자 그렇게 길게 갖고 있지는 못할 거야. 있을 때 최대한 즐기던가."
그녀는 또 그렇게, 중요한 것 같으면서도 결코 구체적이지는 못한 이야기를 했다. 어차피 그녀는 내가 캐물어도 대답을 해줄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그게 정말로 그렇게 될 일이라면 내가 알건 모르건 간에 그렇게 되리란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보며 비교적 담담하게 말했다.
"그거 아세요?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걸."
"그게 왜?"
"당신이 여전히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긴 하지만, 어느덧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된다는 뜻이죠."
"어, 그래서?"
"당신 이름이 뭐죠?"
이렇게 입 밖으로 뱉고 보니, 왜 지금까지 이걸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스스로도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비로소 자물쇠를 하나하나 풀어내듯이 그동안 내가 건드리지 못했던 많은 영역들에 한발씩 다가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질문을 받은 옆집 여자가 짐을 옮기다말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졌지?"
"얼굴을 안 지도 오래되었는데 이름을 모른다는게 더 이상한거 아니에요?"
혹시나 이 질문을 건넸을 때 그녀가 조금이라도 당황하진 않을까 나는 내심 추측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오히려 꽤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흠, 알고 싶어?"
"알고 싶긴 한데, 왠지 당신이 가르쳐 줄 것 같진 않네요."
"왜 그렇게 생각해?"
"뭐 늘 그런 식이니까요."
그녀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뜻도 알 수 없는 그 애매모호한 웃음에서 나는 유정이의 모습을 희미하게 겹쳐보았지만, 한편으로 또 그 모습은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유정이의 웃음과 무척 달라보였다.
"좀 도와드릴까요?"
침묵이 불편하진 않았지만 나는 일부러 정적을 깨뜨렸다. 그녀는 내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그만 쉬려고."
"그래요... 그럼 난 갈게요."
혹시나 내 방으로 들어오면서, 등 뒤에서 그녀가 내게 뭔가 한 마디를 더 할까 싶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발걸음을 잡아세우는 목소리는 없었다. 나는 일부러 문을 소리나게 탁 닫았다.
*
다음 날은 주말이었다. 하지만 그리 즐거운 주말이 되지는 못했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는 표현에는 약간 어폐가 있겠으나, 주말을 이용해서 벼락치기로 과제를 끝내겠다는 나와 서연이의 계획이 통째로 틀어진 것이다.
"미안해... 나 정말 어떡하지?"
서연이는 떠나기 직전까지도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외가에 큰 초상이 난 것이다. 주말을 이용해서 부산에 내려갔다와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서연이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 역시 서연이로부터 소식을 들었을 때 무척 안타깝긴 했지만 알고보니 이 경우는 자연사에 의한 것이라 딱히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괜찮아. 걱정말고 다녀와."
"그래도... 두 사람이서 정말 괜찮겠어?"
집안에 큰일이 나긴 했어도 과제를 홀로 빠지는 것에 서연이는 못내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나는 정말로 과제에 대해 별 걱정이 없기도 했고, 그보다는 사실 서연이가 이 상황에서 고작 과제 따위에 크게 신경 쓰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기에 최대한 담담한 말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물론 그럼에도 그녀는 내내 불안해했다.
"그러니까 진작 좀 해둘걸....! 미루고 미루다가 이렇게 된 것 같아서 너무 속상해."
"됐어. 장례식 가면서 무슨 과제 걱정이야? 나랑 유정이가 알아서 잘 할게."
지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은근슬쩍 유정이의 이름을 "유정이"라 부르는 나의 태도에 서연이가 눈을 째릿하게 흘겼다. 하지만 지금은 초상 때문에 마음이 복잡한지 굳이 더 따지고 들진 않았다. 그녀는 부산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슬라이드 디자인이라도 돕겠다며 내 방에서 노트북으로 이것저것을 했다.
"이제 가봐야겠어. 아빠가 차몰고 역으로 오실 거야."
"조심해서 다녀와. 여유 생기면 전화하구."
그러자 신발을 신던 서연이가 뚱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과제도 과제지만 두 사람만 남겨놓고 가는게 더 걱정이거든? 나 없다고 유성이한테 괜히 허튼 짓 하지말고 얌전히 과제만 해야해."
"야, 내가 무슨 허튼 짓을 한다고...."
하지만 솔직히 항변하는 내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나는 이미 유정이에게 서연이가 말하는 그 "허튼 짓"이란걸 제대로 해버린 상태였으니 말이다. 다행히 서연이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고 그녀는 문을 나서기 전에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문득 나도 그녀와 헤어지는게 적잖이 아쉬워졌다.
"갔다올게."
"응, 조심해."
서연이가 가버리고나자 나는 홀로 방 안을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별 걱정을 하고 있지 않긴 하지만 어쨌든 과제를 하기는 해야 했고, 유정이와 둘이서 그걸 하려면 오늘 또 단둘이 만남을 가져야 한다는건 기정사실이었다. 나는 그 상황에 내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지, 아니면 행복해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좀체 분간할 수가 없었다.
"올 때가 됐는데...."
유정이와 약속한 시간이 점점 다가올수록 괜히 마음이 두근대는 것을 참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다되도록 그녀가 오질 않자 기다리는 것이 조금 힘들게 느껴졌다. 그만큼 내가 유정이를 얼른 보고 싶어한다는 반증일 수도 있었다.
그대로 얌전히 기다리면 될 것을, 초조한 마음에 나는 신발을 신었다. 어차피 몇 걸음만 가면 유정이의 집이 있는데 내가 먼저 가면 그만큼 빨리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러고보니 서연이에겐 아직도 유정이가 이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한 상태였다. 어째 갈수록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서연이가 그걸 알아봐야 하등 좋을건 없었지만 괜히 비밀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 다음번엔 꼭 얘기를 하는게 좋으리라....
"안에 있으려나..."
멍하니 생각에 빠져 눈 깜짝할 사이에 105호 앞까지 도달했다. 사실 내게는 그 거리가 무척 애매하게 느껴졌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묘한 애매함....
그 순간 왜 그런 이상한 행동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나는 초인종을 누르거나, 노크를 하는 일 없이 조심스럽게 문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어쩌면 유정이와 몸으로 사랑을 나누고 나니 그녀의 방에 출입하는 것이 무의식 중에 조금 편하게 느껴진 이유도 있었을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인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지만.... 사실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까지만 해도 내심 문이 열리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있었고, 벨은 그 후에 눌러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말 뜻밖에도 문이 그대로 열리고 말았다.
"......."
실례인줄 알면서도 왜 항상 남의 집 문을 이렇게 열어보는건지. 새삼스럽게 옆집 여자의 집에도 이런 식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났다. 그래도 상황이 이쯤되니 나도 모르게 약간의 장난기마저 발동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조용히 몰래 들어갈 수 있다면 유정이가 날 보고 깜짝 놀랄까? 언제나 담담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유정이였기에 그녀의 놀란 얼굴을 볼 수 있다는건 비록 짖궂은 생각이긴 했지만 꽤 매력적인 유혹이었다.
"그러고보니 섹스할 때 유정이 얼굴은 정말 귀여웠지.... 평소에 무표정이라 그런지 흥분한 모습이 정말 예뻤어."
주책스럽게도 유정이의 알몸이 다시 생생하게 머릿속에 뭉게뭉게 떠올랐다. 새하얀 살결, 너무도 깨끗한 몸. 그리고 그 순수한 나신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가슴.... 허공에서 한껏 출렁거리던 커다란 젖가슴.
"아이씨, 갑자기 이게 왜 떠오르는거야?"
도둑놈 꼴을 해가지고 몰래 집 안으로 살금살금 들어가면서도, 머리로는 엄한 상상을 하며 아랫도리를 세우고 있는 나였다. 유정이를 곧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그런 주책스런 상상을 더욱 불러일으킨걸까? 이대로 유정이를 보면 아마 흥분하게 될 것 같은데.... 혹시 또 기습 키스를 하면 이번에도 받아주려나?
별의별 상상을 다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이미 유정이의 집 안으로 들어와버렸다. 그런데 망상을 애써 머릿속에서 날려버리고나니, 눈 앞에는 선뜻 납득되지 않는 장면이 펼쳐져있었다.
"어라...?"
처음에는 내가 방을 잘못 들어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나가서 확인해 본 결과 이곳은 틀림없는 105였고, 그 증거로 내가 유정이와 함께 정리했던 짐들의 위치 또한 내 기억 속 그대로였다. 이곳은 분명 유정이의 방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지?"
나는 침대 위에서 조용히 규칙적으로 숨소리를 뱉으며 잠들어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 침대는 나와 유정이가 몸으로 사랑을 나누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래서 나는 이곳이 유정이의 방이라는 확신을 더욱 강하게 얻을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그 사내의 정체를 더더욱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
나는 조심스럽게 의문의 사내를 향해 목소리를 내려다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판단력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도 본능적인 비약이었지만, 왠지 이 순간 유정이가 얼마 전에 내게 했던 이야기가 살짝 떠올랐던 것이다.
"그, 그럼 혹시 이 분이...."
머릿속으로 그 생각이 번뜩하고 스친 것은.... 그야말로 1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많은 일이 일어났다. 내가 상상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이미 내 몸이 허공을 부웅 하고 날고 있었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면서도 이 순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선뜻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식이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고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그저 사지만 허둥거릴 뿐이었다. 내가 알 수 있는거라곤 그저 누워있던 낯선 사내의 눈이 희미하게 뜨이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내 몸이 바닥에서 공중으로 떴다는 것 뿐이었다.
한쪽 팔이 등 뒤로 꺾여있다는 사실을 느낀 것은 그 다음이었다. 번개보다 빠른 듯한 움직으로 내 팔을 제압한 의문의 사내가 내 뒤통수에다 대고 나지막히 물었다.
"웬 놈이십니까.... 아니, 웬 놈이냐?"
"아아악!! 놔 줘요!!"
나는 머리가 아래로 꺾여있었기에 사내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그는 내 상반신을 뒷목에 엄지손가락 하나를 찍어누르는 것으로 제압하고 있었다. 그저 그것 뿐인데 나는 온몸을 포박이라도 당한듯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혹시 자네 도둑인가?"
"아, 아니에요! 일단 이것 좀 놔줘요!"
"음."
그는 나를 순순히 놓아줄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정말 기적적인 타이밍으로 입구쪽에서부터 한 여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졌다. 당황이 한가득 묻어나는 그 목소리는 다행스럽게도 내가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유, 유정아."
신발을 벗어던진 유정이가 급한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그 와중에도 나는 왠지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그녀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팔을 어떻게든 풀려고 했으나 내 힘으로 그걸 푸는게 도저히 불가능했다. 다음 순간, 버둥거리는 내 모습을 보며 유정이가 방을 가득 메우는 큰 목소리로 쩌렁하게 외쳤다.
"아버지!! 당장 그 손 놓으세요!"
"응?"
그러자 내 몸을 옥죄고 있던 사내의 손이 스르륵 풀려나가는게 느껴졌다. 무슨 짓을 해도 풀리지 않던 속박이 허무하도록 손쉽게 풀리자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들어 사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사내도 똑같이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히려 나 이상으로 당황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사실 애초에 반쯤 짐작 했었는데다, 유정이에게 방금 확인사살까지 받은 상태였긴 하지만.... 차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아서 나는 거의 현실을 회피하듯이 멍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자네야말로...."
그게 유정이 아버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
"이, 이거 정말 미안하게 됐네...."
"아, 아뇨... 저야말로 못 알아뵙고...."
"......."
방 안에 삼각형으로 빙 둘러앉은 세 사람.... 나와 유정이 아버지는 차마 말로 표현조차 못할 만큼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서로에게 쭈뻣거리며 사과를 했다. 그나마 유정이 아버지는 이 상황을 빠르게 납득한 것 같았지만 나는 아직도 거의 반패닉 상태에 빠져있는 채였다. 그리고 유정이는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살금살금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잠결에 도둑이나 강도인 줄 알고 그러셨다구요?"
"으음. 아무래도 젊은 여자애 혼자 사는 집은 무뢰배 같은 놈들이 호시탐탐 노리기 쉽잖니.... 게다가 이 청년이 워낙 조용히 들어왔는지라.... 난 영락없이 도둑인 줄로만 알았단다. 벨이라도 눌렀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미, 미안하구나. 애비의 불찰이다."
"......."
돌이켜보면 참으로 다이나믹한 첫만남이었다. 하긴 내가 벨이나 노크도 없이 살금살금 소리 죽이고 방에 들어간 꼴을 생각해보면 누가 보더라도 도둑으로 오인할 만한 상황이었다. 대체 뭔 생각으로 내가 그랬던 걸까? 혹시 짖궂은 장난기에 대한 하늘의 벌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에요! 그러다 상대가 크게 다쳤으면 어쩔 뻔 했어요. 게다가 다른 분도 아니고 아버지가 일반인을 상대로 무력을 쓰시면 어떡하냐구요!"
"미, 미안하구나... 애비가 면목이 없단다."
"......."
실제로 뵙게 된 유정이의 아버지는 솔직히, 그간 유정이에게 들어왔던 이야기로 상상해왔던 내 이미지를 초장부터 완전히 깨뜨리고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를 매몰차게 구박하는 유정이의 그런 모습 또한 내 상상과는 완전히 딴판이었기에 나는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그만큼 화가 났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때면 마치 동경의 대상을 그리듯 공손하게 "아버님" 하며 이야기를 하곤 했던 유정이였기에 그녀의 그런 모습은 정말이지 예상 밖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똑 부러지는 태도로 자신을 구박하는 딸아이 앞에서 쩔쩔매는 유정이 아버지의 모습이 또 가관인지라, 딸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딸바보를 연상케 했다.
"이거 자네에게 정말 미안하구만.... 딸아이를 혼자 살게 내버려두고 있다보니 애비 입장에서 늘 걱정이 많은지라, 나도 모르게 초면에 실례를 저질렀네. 자네가 좀 이해해주게."
"그, 그럼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애초에 수상 쩍게 들어온 제 잘못인걸요."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유정이는 타박하는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자 유정이 아버지는 더욱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봐도 뿌리 깊은 정통 무술가문의 권위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 어수룩한 모습에 나는 그만 또 얼이 빠졌다.
생각보다 유정이 아버지는 건장한 체구가 아니었다. 이야기만 들었을 때에는 기골이 장대하고 인상이 호탕하며, 풍채가 위압적인 중년남성의 이미지를 떠올렸는데 실제로 뵙게 된 모습은 상상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던 것이다. 마치 어릴적 옆집 아저씨를 보는 듯한 평범한 외모와 체격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나는 그 작은 체구에서 느껴지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과, 수수한 인상 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을 느꼈다.
나는 내심 아직까지도 아까 느꼈던 그 묵직한 위압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기에, 유정이 아버지가 겉보기와는 다른 인물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 몸을 제압당한 것 뿐이지만 그 순간 마치 태산처럼 무거운 힘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완력의 문제가 아니라 유정이의 말마따나 "일반인"들은 결코 흉내내지 못할 기운이 그 평범한 체구에서 솟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 분이 딸아이의 앞이 아니라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거라고, 나는 내심 짐작할 뿐이었다.
"미안해요, 오빠.... 정말 어디 다친 데는 없나요?"
"으응. 괜찮아."
"곧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오시는 바람에.... 아버지가 드시는 차를 좀 사오는 길이었어요. 늦어서 정말 미안해요."
"아니야. 정말 괜찮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유정이가 약속에 조금 늦은 것도, 유정이 아버지와 오해가 있었던 것도 사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떻게든 유정이 아버지와의 첫만남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정이"의 아버지를 만났다는 사실이 괜히 나를 긴장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애인도 아닌 여자의 아버지를 만났다는 이유로 긴장한다는게 참 어찌보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본능적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또한 그와 더불어, 그렇기 때문에 유정이가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딸아이가 사과를 하는 모습이 아버지 입장에선 좋게 보일 리는 없을테니.
"....오빠?"
하지만 유정이 아버지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부분에서 반응하는 것 같았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영어로 랩이라도 하는 광경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딱 벌리고 딸아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무척 가관이었다.
"오빠.... 라고?"
"아, 그게... 성진 오빠는 저보다 나이가 7살이나 더 많으니까요. 그, 그게 왜요?"
유정이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걸 설명하려 했지만, 솔직히 나도 이제 유정이를 알만큼 알기 때문인지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를 속일 수 있을 리는 없으니 말이다.
"음, 내 보기에 아무래도 "그냥" 오빠는 아닌 듯 싶구나."
"네?"
"이 애비는 너를 잘 안단다."
"무슨 말씀이세요?"
"사귀는 사람이니?"
"아버지!!"
눈빛을 반짝이며 의미심장하게 묻던 아버지였지만 딸아이의 목청 앞에 또 수그러들어 우물쭈물하는 모습이었다.
"그래, 그러고보니 문 교관이 내게 그런 소릴 하더구나. 아가씨에게 만나는 남자가 생긴 것 같다느니 하면서.... 난 사실 믿지 않았는데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허허."
"아버지! 그런거 아니라구요. 문 교관님이 무슨 말을 했는진 몰라도 그냥 오해일 뿐이에요."
문 교관이라면 아마도 유정이와 함께 있었던 그 체격 좋은 여인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녀에게든 유정이 아버지에게든, 내가 유정이의 남자친구로 보였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꽤 기분 좋은 일이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예, 남자친구입니다." 하고 나를 소개하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찝찝했고, 또 그것이 유정이에게 미안했다.
유정이도 거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답함이 있었는지 아버지의 오해를 딱 잘라 일축하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런 태도가 더욱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으음, 정말이니? 저 청년을 대하는 너의 말투나 태도를 봐서는 필시 보통 사이는 아닐거라 짐작했는데.... 애비가 헛다리를 짚은 건지, 아니면 우리 딸의 성격이 그동안 좀 달라진건지 영 헷갈리는구나."
유정이의 아버지는 아마도 나 정도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유정이란 아이에 대해서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는 분일 터였다. 유정이도 그것을 알기에 차마 아버지를 완전히 속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우물거리며 애매한 대답을 이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애매한 한편, 너무도 솔직했기에 옆에서 듣는 나조차도 당황케 하였다.
"정말로 사귀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인건 맞아요."
"어....?"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던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설마 유정이가 그런 식의 대답을 할 거라곤 예상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 대답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있어서도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내 눈에는 다소 당황하는 듯 보였다.
"아아, 그런 거였니? 그게 요새 젊은이들이 말하는.... 그, 뭐라더라....?"
"......?"
"그래그래, "썸"이라고 했던가? 아직은 그런 단계라는 말이겠지?"
"모, 몰라요! 그런거 자꾸 캐묻지 마세요. 그리고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우신 거에요?"
"문 교관이랑 함께 다니다보니 어깨너머로 주워듣는 것이 꽤 많단다. 아무튼 흥미롭구나."
나를 이모저모로 뜯어보는 유정이 아버지의 눈길 앞에 나는 또한번 위축되는 기분을 느꼈다. 어떠한 압박이나 중압감에 의해 위축되는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그저 알 수 없는 묵직한 기운에 내 스스로가 눌리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왠지 내 속마음을 눈 앞의 어른에게 모두 내보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일순간 등골이 섬칫해질 지경이었다.
"으음, 이거 미안하네. 나도 모르게 너무 유심히 봤구만."
"아, 아닙니다."
유정이 아버지도 내가 그런 기분을 느꼈다는걸 인지했던 걸까?
"내 딸아이가.... "좋아하는 사람"이란 말을 쓰다니 쉽게 믿기지 않는군. 자네도 대강 알 듯은 하지만 내 딸아이가 워낙 남자애 같은 성격이라 나는 저 애가 평생 홀로 사는건 아닐지 많이 걱정했었다네. 아무튼 내 딸이 마음에 품은 남자라니, 이거 오늘 의도치 않게 중요한 만남을 갖게 되었군. 나는 유정이 아비 되는 한석진이라 하네. 인사가 늦었지만 정말 반갑네."
"예. 유정이랑 같은 학과에서 공부하고 있는 최성진입니다. 저도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아버...."
나도 모르게 "아버님"이라는 말이 나오려고 했는데, 어쩐 이유에선지 그 말을 삼키고 말았다. 물론 한국인들이 상대방의 부모님을 높여부를때 "아버님,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이 경우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왔다는게 스스로도 위화감이 들 정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이질적인 감각에 나는 말을 아끼고 말았다.
그리고 내 직감인지 확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유정이 아버지도 내가 그런 기분을 느꼈다는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하, 그냥 관장님이라고 부르게."
"관장님... 이요?"
그러자 유정이게 옆에서 내 옆구리를 살며시 찌르며 낮게 일러주었다.
"아버지는 젊은 사람들에게 관장님이라고 불리는걸 좋아하세요."
"아... 그래."
이 때부터 유정이 아버지를 관장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실 따지고보면 문하생도 아닌데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을 법도 하련만, 왠지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버님" 소리보다는 더 편하게 느껴져 나도 별 거부감이 없이 그 호칭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래, 아까 두 사람 얘기를 들어보니 오늘 약속이 되어있었다던데.... 내가 주책맞게 안 좋은 날에 와버린 모양이군. 미안하게 됐네. 성진 군이라 했던가?"
"아, 네."
"시간을 뺏어서 미안했네. 다음에 또 봤으면 좋겠군."
유정이 아버지.... 아니, 관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와 유정이도 함께 일어섰다. 멀리 나오지 말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관장님을 건물 입구까지 배웅해드렸다. 관장님은 마치 여유로운 행랑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장을 섰다. 헤어지기 전에 관장님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 두 사람 뭐하는 건지 물어도 되겠나? 혹시 데이트인가?"
"아버지!! 그냥 같이 과제를 하는 것 뿐이에요."
"단 둘이서 말이니? 그것도 실내에서?"
"그, 그게 왜요?"
관장님이 어수룩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를 올려다보자 나는 내심 찔끔해지고 말았다. 하긴 딸아이를 가진 아버지 입장에서라면 딸이 남자와 단둘이, 방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사실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유정이의 집안처럼 뼈대있고 격식있는 가문이라면 아마도 더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관장님은 의외로 그저 허허 웃으며 돌아서고 말았다.
"하긴, 내 딸이 그렇게 연약한 편은 아니니."
"아, 아버지.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에요?"
당황하여 소리치는 유정이였지만 나는 사실 죄인처럼 찔끔하고 말았다. 관장님이 알까 모르겠다만 이미 나는 관장님이 우려하는 상황을 이미 옛적에 만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만약 아신다면 어떻게 나오실까.... 나를 찢어죽이실까?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리듯 찔끔했던 나의 죄책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관장님이 무어라 더 말을 하려는 찰나 옆에서 신경 쓰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별 것 아닌 소리였지만 그것은 유독 우리 세 사람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옆집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이사.... 간다고 했었지."
옆집 여자는 현관 입구에 작은 트럭을 대고 박스로 정리한 짐들을 옮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녀가 어제 떠난다고 했었던 것이 이제야 비로소 현실감 있게 느껴져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정말 이대로 떠나는 걸까?
"허허, 젊은 아가씨 혼자 고생이 많구만. 내가 좀 도와드릴까?"
그런데 정말 뜻밖에도, 관장님이 그 순간 불쑥 앞으로 나서며 옆집 여자에게 그런 말을 했다. 트럭의 뒷편에 짐을 싣고 있었던 옆집 여자가 순간 멈칫하더니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이 마주쳤다.
관장님은 옆집 여자의 대답을 굳이 기다리지 않았다. 현관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상자 더미들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관장님이 맨 아래에 있는 상자에 슬며시 손을 뻗었다. 어르신이 나서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어쩔 수 없이 나도 거들려고 몸을 숙이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괴, 괴력인가...?"
놀랍게도 관장님이 맨 아랫쪽의 상자 하나를 붙들고 들어올리자, 마치 자석으로 이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 위에 일렬로 차곡차곡 쌓여있던 상자들이 모조리 하늘로 떠오른 것이다. 정확한 무게를 알 수는 없지만 부피로만 따져봐도 도저히 한 사람의 근력으로 들 수 있는 무게가 아닌 것 같은데다, 관장님의 평범한 체구에서 나올 수 있는 근력은 더더욱 아닌 것 같았기에 나는 벙찔 수 밖에 없었다.
"흠."
관장님은 마치 페트병이라도 다루듯이 가볍게 그 상자의 뭉텅이들을 트럭 위로 올려놓았다. 애초에 옆집 여자가 상자를 차곡차곡 쌓아놓았기 때문에 관장님이 그렇게 한번을 옮긴 것만으로도 절반 이상이 옮겨진 느낌이었다. 나는 허둥거리며 남은 상자들을 트럭 위로 옮겼고, 유정이까지 몇개 거들어 일은 순식간에 마무리 되었다.
짐이 모두 트럭에 실리자 옆집 여자가 한숨을 푹 쉬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를 보았다는 것은 나의 착각인지, 그녀는 순식간에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이번엔 관장님을 바라보았다. 온화한 인상의 그 얼굴을 마주하자 옆집 여자의 눈동자에서 문득 파문이 일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허허. 뭘 이런 것 가지고.... 그런데 내가 벌써 할애비 소리 들을 만큼 나이가 들어보이는 겐가? 아직은 중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수룩한 관장님의 모습에 옆집 여자는 싱긋 웃음을 지었다. 여지껏 내가 보았던 옆집 여자의 웃음 중에 가장 깨끗한 미소였다. 염세적인 느낌이 사라진 순수한 미소. 그녀도 그런 웃음을 지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 한편으로는 그 모습이 그녀답지 않게 퍽 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아, 저기...."
옆집 여자의 시선이 유정이에게로 머물렀다. 아무 관련도 없는 유정이는 애매하게 서성이고 있다가, 옆집 여자의 눈길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의아하게 그 시선을 마주보았다. 그러자 옆집 여자의 얼굴이, 도저히 나로서는 읽어낼 수 없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띄었다.
뭔가 말을 하려는 듯 마려는 듯.... 그렇게 망설이는 옆집 여자의 모습이 정말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다.
"건강하세요."
"네?"
뜬금없는 그 말에 유정이가 반문했다. 하지만 옆집 여자는 방금 전처럼 싱긋 웃을 뿐이었다.
"늘 건강하세요. 지금처럼."
"네? 아... 네."
얼떨결에 대답은 했지만 유정이는 상당히 당황스런 얼굴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옆집 여자는 트럭에 올라탔다. 짐을 가득실은 트럭에 시동이 걸렸고, 불안정한 엔진소리와 함께 트럭은 곧 출발했다. 옆집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나니 왠지 이상한 허탈감이 가슴 가득히 밀려들었다. 멍하니 그 사라진 흔적을 눈으로 좇고 있는 내게 유정이가 물었다.
"오빠. 혹시 저 분 아세요?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아, 글쎄...."
그러고보니 유정이와 옆집 여자가 마주친 적이 있긴 하지. 예전에 옆집 여자가 가스검침으로 위장하고 우리 사이를 훼방 놓았을 때.... 유정이가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는 옆집 여자의 기억이 과연 그 때가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떠오르지 않는 그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하네요. 분명 아는 사람인 것 같긴 한데.... 기억 속엔 없는 것 같고. 정말 애매한 기분이에요. 오빠 혹시 저 분 이름을 아세요?"
"아니... 그냥 옆집 이웃일 뿐이라서."
끝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매함을 나에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엔 유정이에게까지 남기고 떠나버린 옆집 여자를.... 나는 기억 속에 어떻게 남겨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정말 내게 그냥 옆집 이웃이었을까?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아, 예. 살펴들어가세요."
관장님은 왠지 기분이 좋은지 희미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그렇게 멀어져가셨다. 그 뒷모습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던 유정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오빠. 오늘 너무 갑작스러웠죠?"
"아니야. 나도 아버님 뵙게 되서 좋았어."
"기왕이면 남자친구라고 소개하고 싶었지만...."
유정이의 그 말 속에는 뼈가 있었다. 내가 아무리 둔감해도 그걸 못 느낀다면 나가죽어야 마땅했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기에 나는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내가 불편함을 느꼈다는걸 유정이도 눈치챘는지 그녀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그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아버질 만나보니 어떤가요? 생각과는 많이 다른가요?"
"응. 생각했던 것하고 비슷했던 부분도 있었지만 다른 부분이 더 많았어. 특히 네가 나를 아버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소개했을 때 나는 아버님이 나를 안좋게 보시거나,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약간 반기는 듯한 기색이셔서 많이 놀랐어."
"안 좋게 보실 줄 알았다구요?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어, 음, 글쎄.... 사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쑥스럽지만.... 유정이 네 입장에선 내가 "첫사랑"인 거 아니야?"
내가 되려 그렇게 물으니 유정이가 약간 쑥스러워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 그게 왜요?"
"아버님도 그걸 알고 계실 테니까.... 소중한 딸아이의 첫사랑이라면 좀 더 특별한 사람이길 바라셨을 지도 모르지. 내가 너무 평범한 것 같아서 스스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오빠는 평범하지 않아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난 그걸로 충분해요."
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내 어디가 좋아서 나를 좋아한다는 것인진 모르겠지만 그녀의 그 말은 나를 너무도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녀를 가볍게 포옹하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
"다음에 아버지에게 소개할 때는 남자친구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겠죠...?"
"......."
뭐든지간에 명쾌한 대답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하건 간에 명쾌하지 않은 대답이 나올 것만 같았다.... 결국 생각 끝에 나는 명쾌하지 않은 대답을 했다.
"노력할게."
*
유정이를 내 방으로 먼저 올라가게끔 하고는, 나는 있는 힘껏 내달려 옆집 여자의 트럭이 사라진 골목의 귀퉁이를 돌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골목길을 돌자마자 나는 마치 그렇게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길 한편에 차를 세우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옆집 여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미란."
"네?"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만을 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미처 생각을 하기도 전에 불쑥 입을 열었다.
"최미란. 내 이름이야."
"최... 미란..."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이름이 아닌 성에 더 신경이 쓰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동안 이 문제로 인해 많은 고민을 했고 답을 떠올리기 위해 막막한 바다 속을 헤쳐왔지만 지금 내 머리를 관통하고 있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 뿐이었다. 희미했던 가정의 실타래가 마치 뚜렷한 화살이 되어 나를 궤뚫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신이 설마...."
"그래, 난 너에게 이미 많은 힌트를 줬어. 너도 이제는 알겠지. 내가 너의 딸이라는걸."
혹시나, 만약에, 설마, 하며 그런 가정을 이따금씩 떠올려보긴 했었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로써 확인받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충격으로 얼어붙어 할 말을 잃은 내게, 옆집 여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너와 한유정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며.... 그동안 수없이 많은 타임 워프를 해오며 너와 엄마의 사이가 이어지도록 도와왔던 장본인이지. 내 존재에 모순이 생기지 않도록, 네가 반드시 나를 낳을 수 있도록 말이야."
"뭐, 뭐라고?"
"이제와서 새삼 놀랄 필요 없어. 두 사람은 굳이 내가 개입하지 않더라도 무언가에 의해 강력하게 이어져있으니. 그걸 "운명"이라고 부르겠다면 그것도 좋아. 아빠가 엄마와 만나서 사랑에 빠지기까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강렬한 이끌림에 이끌려왔다는 것을 아빠도, 엄마도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녀는 이제 나를 "아빠"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 한 마디로 인해 내가 마주한 현실의 인식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은 것이다. 두렵지는 않았지만 다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내가 할 수 있는 질문들을 해나갔다.
"자, 잠깐. 그렇다면 계속해서 시간을 되감아 내 앞에 나타났던 이유가 뭐야? 네가 돕지 않아도 내가 유정이와 사랑에 빠지게 되어있는게 운명이라면.... 네가 내 앞에 나타나서, 이 시계를 건네줬던 이유는 뭐냐고?"
"의외로 내가 아빠의 딸이라는 사실 자체에는 그리 충격받지 않은 모양이네. 썩 괜찮은 질문이야. 그러잖아도 나 역시 이젠 너무 지쳤거든.... 아마 시간 되감기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몰라."
"뭐....?"
그녀가 나의 딸이라는 것도, 그리고 나와 유정이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는 것도 어쩌면 이미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하나의 가정으로써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정녕 알 수 없는 부분은 나의 딸이 긴 시간을 되돌아와 젊은 시절의 나를 만나고자 한 이유였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임을 나는 확신했다.
"수차례 시간을 되감아 이곳으로 돌아왔고, 그 때마다 나는 같은 결과를 만들어냈어. 하지만 내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지. 운명은 정말로 강력한거야, 아빠. 설령 시간을 되감거나 해도 바뀌는게 아니라구. 나 역시 처음에는 내 두뇌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어."
"네, 네가 원하는 미래라니....? 제발 자세히 설명을 해줘!"
"다른게 더 필요해."
"뭐...?"
나는 알 수 없는 기묘한 감각에 오싹함을 느끼고 그녀에게로.... 아니, 내 딸에게로 한발짝을 더 떼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만큼을 물러서며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타임 리와인더.... 하지만 그것은 내가 갖고 있는 타임 리와인더와는 달랐다. 그것은 내 것처럼 투박한 은백색의 빛깔이 아닌, 새카만 칠흑 빛깔을 띄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도 유독 눈에 들어오는 금빛의 초침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럼 또 잠시동안 작별이야, 아빠."
"자, 잠깐! 기다려. 네가 정말 내 딸이라면 난 더 많은걸 알아야 해.... 그렇게 가버리지 말란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손에 쥔 시계의 금빛 초침을 한바퀴 돌리고 말았다. 나는 그 행위의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그 손가락의 움직임 하나가 너무도 비정하게 느껴져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메마른 표정이었고, 다만 절규하는 나를 보며 쓸쓸하게 한마디를 덧붙일 뿐이었다.
"아빠.... 난 아빠가 정말 싫어."
그리고 세상이 요동치는 듯한.... 시간 되감기 특유의 아찔한 감각이 나를 덮쳤다.
*
"오빠! 오빠, 정신이 들어요? 눈 좀 떠 봐요!"
그리고 나는 그 후.... 다섯 시간이 지나 응급실 침대에서 눈을 떴다.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보았던 것은 나를 내려다보는 유정이의 두 눈동자였다. 미래의 내 딸을 낳은 여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든 현실감각이 상실된 채 내 두뇌는 시계바늘처럼 똑딱거리는 소리를 내며 오직 이 순간의 "시간"만을 되짚어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여러가지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난잡하게 뒤섞이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검은색 초시계만은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 검은 시계는 시간을 "되"감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앞으로 감아버린 것이다.
유정이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두 눈이 희미하게 깜빡이는걸 보고 유정이는 내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다음 날이 되어 있었고, 나는 검은색 초시계나 골목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아무 것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저 옆집 여자가 떠났다는 것만을 희미하게 인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이번 화도 너무 늦었지요? ㅠ
죄송합니다
이직을 했다보니 새로운 근무환경에 적응하는게 사실 쉽지 않네요
틈틈이 쓰고는 있지만 예전만큼은 속도가 나질 않는 것이.... 모쪼록 독자님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할 따름입니다
지난 주 내내 엄두도 못내고 있다가 오늘은 꼭 39장을 올리고 싶어 다소 이른아침에 눈을 떴습니다
지난화에서 제가 설명을 애매하게 한 탓인지 다소 혼동을 하신 독자님들이 계신 듯 합니다
추천수 이벤트는 지난화(38장)에서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회를 봐서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
추천수 이벤트를 하려면 미리 연재분을 3회 정도는 해놓아야 하는데 아직은 그게 준비가 안 되었거든요...
새로운 업무환경에 적응도 하고, 회식도 좀 잦아들 무렵이 되면 추천수 이벤트는 물론이거니와
2~3일에 꼭 한편 씩은 올리고 싶네요
연재 속도가 늦어져도 꾸준히 기다려주시는 독자분들껜 죄송하면서도 한편으론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또 일주일의 시작이네요
다들 월요병 이겨내시고 힘찬 하루 보내시길 ^^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39장
"뭐하시는 거에요?"
그 날,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옆집 여자를 만났다. 늘 그랬지만 만나려고 해서 만났던건 아니었다. 다만 문을 활짝 열어두고, 방 안에서 이것저것을 정리하고 있는 그녀를 보니 호기심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유정이의 이삿짐을 정리하는걸 도와주다 오는 길이었기에 옆집 여자의 그 모습이 왠지 비슷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아~ 이제 슬슬 여기를 떠나려고."
"네?"
그녀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다. 대답을 듣는 순간 그 말이 내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옆집 여자는 그런 것엔 별 관심이 없는듯 천천히 짐을 정리하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정리된 박스를 하나하나 복도로 내어놓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그저 멍하니 굳어있었다.
"잠깐만요. 이렇게 갑자기요?"
"뭐가 갑자기야? 내가 너한테 이사간다고 미리 보고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래도...."
이런 상황에 놓이고보니 그녀는 나에게 있어 정말로 괴이한 존재라는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내 "일상"에 있어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다시피 한 그녀였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내 주위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굉장히 큰 일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그럼 이건요?"
나는 품에서 타임 리와인더를 꺼내 그녀의 앞에 내보였다. 그 은색의 초시계야말로 나와 옆집 여자 사이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형상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조차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했다.
"글쎄. 어떡할까? "당분간" 니가 갖고 있을래?"
마치 어린아이 손에서 풍선을 뺏을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만약 정말로 그런 선택의 권한이 주어진다면야, 나는 당연히 이 시계를 내 소유로 두고 싶었지만 내 생각에 그 결정권이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내심 그녀가 여전히 나를 갖고 놀고 있다고 여겼다.
"뭐... 그래도 된다면요."
"그래봤자 그렇게 길게 갖고 있지는 못할 거야. 있을 때 최대한 즐기던가."
그녀는 또 그렇게, 중요한 것 같으면서도 결코 구체적이지는 못한 이야기를 했다. 어차피 그녀는 내가 캐물어도 대답을 해줄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그게 정말로 그렇게 될 일이라면 내가 알건 모르건 간에 그렇게 되리란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보며 비교적 담담하게 말했다.
"그거 아세요?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걸."
"그게 왜?"
"당신이 여전히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긴 하지만, 어느덧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된다는 뜻이죠."
"어, 그래서?"
"당신 이름이 뭐죠?"
이렇게 입 밖으로 뱉고 보니, 왜 지금까지 이걸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스스로도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비로소 자물쇠를 하나하나 풀어내듯이 그동안 내가 건드리지 못했던 많은 영역들에 한발씩 다가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질문을 받은 옆집 여자가 짐을 옮기다말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졌지?"
"얼굴을 안 지도 오래되었는데 이름을 모른다는게 더 이상한거 아니에요?"
혹시나 이 질문을 건넸을 때 그녀가 조금이라도 당황하진 않을까 나는 내심 추측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오히려 꽤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흠, 알고 싶어?"
"알고 싶긴 한데, 왠지 당신이 가르쳐 줄 것 같진 않네요."
"왜 그렇게 생각해?"
"뭐 늘 그런 식이니까요."
그녀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뜻도 알 수 없는 그 애매모호한 웃음에서 나는 유정이의 모습을 희미하게 겹쳐보았지만, 한편으로 또 그 모습은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유정이의 웃음과 무척 달라보였다.
"좀 도와드릴까요?"
침묵이 불편하진 않았지만 나는 일부러 정적을 깨뜨렸다. 그녀는 내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그만 쉬려고."
"그래요... 그럼 난 갈게요."
혹시나 내 방으로 들어오면서, 등 뒤에서 그녀가 내게 뭔가 한 마디를 더 할까 싶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발걸음을 잡아세우는 목소리는 없었다. 나는 일부러 문을 소리나게 탁 닫았다.
*
다음 날은 주말이었다. 하지만 그리 즐거운 주말이 되지는 못했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는 표현에는 약간 어폐가 있겠으나, 주말을 이용해서 벼락치기로 과제를 끝내겠다는 나와 서연이의 계획이 통째로 틀어진 것이다.
"미안해... 나 정말 어떡하지?"
서연이는 떠나기 직전까지도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외가에 큰 초상이 난 것이다. 주말을 이용해서 부산에 내려갔다와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서연이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 역시 서연이로부터 소식을 들었을 때 무척 안타깝긴 했지만 알고보니 이 경우는 자연사에 의한 것이라 딱히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괜찮아. 걱정말고 다녀와."
"그래도... 두 사람이서 정말 괜찮겠어?"
집안에 큰일이 나긴 했어도 과제를 홀로 빠지는 것에 서연이는 못내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나는 정말로 과제에 대해 별 걱정이 없기도 했고, 그보다는 사실 서연이가 이 상황에서 고작 과제 따위에 크게 신경 쓰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기에 최대한 담담한 말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물론 그럼에도 그녀는 내내 불안해했다.
"그러니까 진작 좀 해둘걸....! 미루고 미루다가 이렇게 된 것 같아서 너무 속상해."
"됐어. 장례식 가면서 무슨 과제 걱정이야? 나랑 유정이가 알아서 잘 할게."
지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은근슬쩍 유정이의 이름을 "유정이"라 부르는 나의 태도에 서연이가 눈을 째릿하게 흘겼다. 하지만 지금은 초상 때문에 마음이 복잡한지 굳이 더 따지고 들진 않았다. 그녀는 부산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슬라이드 디자인이라도 돕겠다며 내 방에서 노트북으로 이것저것을 했다.
"이제 가봐야겠어. 아빠가 차몰고 역으로 오실 거야."
"조심해서 다녀와. 여유 생기면 전화하구."
그러자 신발을 신던 서연이가 뚱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과제도 과제지만 두 사람만 남겨놓고 가는게 더 걱정이거든? 나 없다고 유성이한테 괜히 허튼 짓 하지말고 얌전히 과제만 해야해."
"야, 내가 무슨 허튼 짓을 한다고...."
하지만 솔직히 항변하는 내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나는 이미 유정이에게 서연이가 말하는 그 "허튼 짓"이란걸 제대로 해버린 상태였으니 말이다. 다행히 서연이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고 그녀는 문을 나서기 전에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문득 나도 그녀와 헤어지는게 적잖이 아쉬워졌다.
"갔다올게."
"응, 조심해."
서연이가 가버리고나자 나는 홀로 방 안을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별 걱정을 하고 있지 않긴 하지만 어쨌든 과제를 하기는 해야 했고, 유정이와 둘이서 그걸 하려면 오늘 또 단둘이 만남을 가져야 한다는건 기정사실이었다. 나는 그 상황에 내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지, 아니면 행복해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좀체 분간할 수가 없었다.
"올 때가 됐는데...."
유정이와 약속한 시간이 점점 다가올수록 괜히 마음이 두근대는 것을 참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다되도록 그녀가 오질 않자 기다리는 것이 조금 힘들게 느껴졌다. 그만큼 내가 유정이를 얼른 보고 싶어한다는 반증일 수도 있었다.
그대로 얌전히 기다리면 될 것을, 초조한 마음에 나는 신발을 신었다. 어차피 몇 걸음만 가면 유정이의 집이 있는데 내가 먼저 가면 그만큼 빨리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러고보니 서연이에겐 아직도 유정이가 이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한 상태였다. 어째 갈수록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서연이가 그걸 알아봐야 하등 좋을건 없었지만 괜히 비밀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 다음번엔 꼭 얘기를 하는게 좋으리라....
"안에 있으려나..."
멍하니 생각에 빠져 눈 깜짝할 사이에 105호 앞까지 도달했다. 사실 내게는 그 거리가 무척 애매하게 느껴졌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묘한 애매함....
그 순간 왜 그런 이상한 행동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나는 초인종을 누르거나, 노크를 하는 일 없이 조심스럽게 문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어쩌면 유정이와 몸으로 사랑을 나누고 나니 그녀의 방에 출입하는 것이 무의식 중에 조금 편하게 느껴진 이유도 있었을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인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지만.... 사실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까지만 해도 내심 문이 열리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있었고, 벨은 그 후에 눌러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말 뜻밖에도 문이 그대로 열리고 말았다.
"......."
실례인줄 알면서도 왜 항상 남의 집 문을 이렇게 열어보는건지. 새삼스럽게 옆집 여자의 집에도 이런 식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났다. 그래도 상황이 이쯤되니 나도 모르게 약간의 장난기마저 발동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조용히 몰래 들어갈 수 있다면 유정이가 날 보고 깜짝 놀랄까? 언제나 담담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유정이였기에 그녀의 놀란 얼굴을 볼 수 있다는건 비록 짖궂은 생각이긴 했지만 꽤 매력적인 유혹이었다.
"그러고보니 섹스할 때 유정이 얼굴은 정말 귀여웠지.... 평소에 무표정이라 그런지 흥분한 모습이 정말 예뻤어."
주책스럽게도 유정이의 알몸이 다시 생생하게 머릿속에 뭉게뭉게 떠올랐다. 새하얀 살결, 너무도 깨끗한 몸. 그리고 그 순수한 나신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가슴.... 허공에서 한껏 출렁거리던 커다란 젖가슴.
"아이씨, 갑자기 이게 왜 떠오르는거야?"
도둑놈 꼴을 해가지고 몰래 집 안으로 살금살금 들어가면서도, 머리로는 엄한 상상을 하며 아랫도리를 세우고 있는 나였다. 유정이를 곧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그런 주책스런 상상을 더욱 불러일으킨걸까? 이대로 유정이를 보면 아마 흥분하게 될 것 같은데.... 혹시 또 기습 키스를 하면 이번에도 받아주려나?
별의별 상상을 다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이미 유정이의 집 안으로 들어와버렸다. 그런데 망상을 애써 머릿속에서 날려버리고나니, 눈 앞에는 선뜻 납득되지 않는 장면이 펼쳐져있었다.
"어라...?"
처음에는 내가 방을 잘못 들어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나가서 확인해 본 결과 이곳은 틀림없는 105였고, 그 증거로 내가 유정이와 함께 정리했던 짐들의 위치 또한 내 기억 속 그대로였다. 이곳은 분명 유정이의 방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지?"
나는 침대 위에서 조용히 규칙적으로 숨소리를 뱉으며 잠들어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 침대는 나와 유정이가 몸으로 사랑을 나누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래서 나는 이곳이 유정이의 방이라는 확신을 더욱 강하게 얻을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그 사내의 정체를 더더욱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
나는 조심스럽게 의문의 사내를 향해 목소리를 내려다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판단력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도 본능적인 비약이었지만, 왠지 이 순간 유정이가 얼마 전에 내게 했던 이야기가 살짝 떠올랐던 것이다.
"그, 그럼 혹시 이 분이...."
머릿속으로 그 생각이 번뜩하고 스친 것은.... 그야말로 1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많은 일이 일어났다. 내가 상상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이미 내 몸이 허공을 부웅 하고 날고 있었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면서도 이 순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선뜻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식이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고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그저 사지만 허둥거릴 뿐이었다. 내가 알 수 있는거라곤 그저 누워있던 낯선 사내의 눈이 희미하게 뜨이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내 몸이 바닥에서 공중으로 떴다는 것 뿐이었다.
한쪽 팔이 등 뒤로 꺾여있다는 사실을 느낀 것은 그 다음이었다. 번개보다 빠른 듯한 움직으로 내 팔을 제압한 의문의 사내가 내 뒤통수에다 대고 나지막히 물었다.
"웬 놈이십니까.... 아니, 웬 놈이냐?"
"아아악!! 놔 줘요!!"
나는 머리가 아래로 꺾여있었기에 사내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그는 내 상반신을 뒷목에 엄지손가락 하나를 찍어누르는 것으로 제압하고 있었다. 그저 그것 뿐인데 나는 온몸을 포박이라도 당한듯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혹시 자네 도둑인가?"
"아, 아니에요! 일단 이것 좀 놔줘요!"
"음."
그는 나를 순순히 놓아줄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정말 기적적인 타이밍으로 입구쪽에서부터 한 여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졌다. 당황이 한가득 묻어나는 그 목소리는 다행스럽게도 내가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유, 유정아."
신발을 벗어던진 유정이가 급한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그 와중에도 나는 왠지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그녀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팔을 어떻게든 풀려고 했으나 내 힘으로 그걸 푸는게 도저히 불가능했다. 다음 순간, 버둥거리는 내 모습을 보며 유정이가 방을 가득 메우는 큰 목소리로 쩌렁하게 외쳤다.
"아버지!! 당장 그 손 놓으세요!"
"응?"
그러자 내 몸을 옥죄고 있던 사내의 손이 스르륵 풀려나가는게 느껴졌다. 무슨 짓을 해도 풀리지 않던 속박이 허무하도록 손쉽게 풀리자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들어 사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사내도 똑같이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히려 나 이상으로 당황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사실 애초에 반쯤 짐작 했었는데다, 유정이에게 방금 확인사살까지 받은 상태였긴 하지만.... 차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아서 나는 거의 현실을 회피하듯이 멍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자네야말로...."
그게 유정이 아버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
"이, 이거 정말 미안하게 됐네...."
"아, 아뇨... 저야말로 못 알아뵙고...."
"......."
방 안에 삼각형으로 빙 둘러앉은 세 사람.... 나와 유정이 아버지는 차마 말로 표현조차 못할 만큼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서로에게 쭈뻣거리며 사과를 했다. 그나마 유정이 아버지는 이 상황을 빠르게 납득한 것 같았지만 나는 아직도 거의 반패닉 상태에 빠져있는 채였다. 그리고 유정이는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살금살금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잠결에 도둑이나 강도인 줄 알고 그러셨다구요?"
"으음. 아무래도 젊은 여자애 혼자 사는 집은 무뢰배 같은 놈들이 호시탐탐 노리기 쉽잖니.... 게다가 이 청년이 워낙 조용히 들어왔는지라.... 난 영락없이 도둑인 줄로만 알았단다. 벨이라도 눌렀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미, 미안하구나. 애비의 불찰이다."
"......."
돌이켜보면 참으로 다이나믹한 첫만남이었다. 하긴 내가 벨이나 노크도 없이 살금살금 소리 죽이고 방에 들어간 꼴을 생각해보면 누가 보더라도 도둑으로 오인할 만한 상황이었다. 대체 뭔 생각으로 내가 그랬던 걸까? 혹시 짖궂은 장난기에 대한 하늘의 벌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에요! 그러다 상대가 크게 다쳤으면 어쩔 뻔 했어요. 게다가 다른 분도 아니고 아버지가 일반인을 상대로 무력을 쓰시면 어떡하냐구요!"
"미, 미안하구나... 애비가 면목이 없단다."
"......."
실제로 뵙게 된 유정이의 아버지는 솔직히, 그간 유정이에게 들어왔던 이야기로 상상해왔던 내 이미지를 초장부터 완전히 깨뜨리고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를 매몰차게 구박하는 유정이의 그런 모습 또한 내 상상과는 완전히 딴판이었기에 나는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그만큼 화가 났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때면 마치 동경의 대상을 그리듯 공손하게 "아버님" 하며 이야기를 하곤 했던 유정이였기에 그녀의 그런 모습은 정말이지 예상 밖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똑 부러지는 태도로 자신을 구박하는 딸아이 앞에서 쩔쩔매는 유정이 아버지의 모습이 또 가관인지라, 딸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딸바보를 연상케 했다.
"이거 자네에게 정말 미안하구만.... 딸아이를 혼자 살게 내버려두고 있다보니 애비 입장에서 늘 걱정이 많은지라, 나도 모르게 초면에 실례를 저질렀네. 자네가 좀 이해해주게."
"그, 그럼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애초에 수상 쩍게 들어온 제 잘못인걸요."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유정이는 타박하는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자 유정이 아버지는 더욱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봐도 뿌리 깊은 정통 무술가문의 권위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 어수룩한 모습에 나는 그만 또 얼이 빠졌다.
생각보다 유정이 아버지는 건장한 체구가 아니었다. 이야기만 들었을 때에는 기골이 장대하고 인상이 호탕하며, 풍채가 위압적인 중년남성의 이미지를 떠올렸는데 실제로 뵙게 된 모습은 상상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던 것이다. 마치 어릴적 옆집 아저씨를 보는 듯한 평범한 외모와 체격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나는 그 작은 체구에서 느껴지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과, 수수한 인상 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을 느꼈다.
나는 내심 아직까지도 아까 느꼈던 그 묵직한 위압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기에, 유정이 아버지가 겉보기와는 다른 인물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 몸을 제압당한 것 뿐이지만 그 순간 마치 태산처럼 무거운 힘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완력의 문제가 아니라 유정이의 말마따나 "일반인"들은 결코 흉내내지 못할 기운이 그 평범한 체구에서 솟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 분이 딸아이의 앞이 아니라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거라고, 나는 내심 짐작할 뿐이었다.
"미안해요, 오빠.... 정말 어디 다친 데는 없나요?"
"으응. 괜찮아."
"곧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오시는 바람에.... 아버지가 드시는 차를 좀 사오는 길이었어요. 늦어서 정말 미안해요."
"아니야. 정말 괜찮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유정이가 약속에 조금 늦은 것도, 유정이 아버지와 오해가 있었던 것도 사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떻게든 유정이 아버지와의 첫만남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정이"의 아버지를 만났다는 사실이 괜히 나를 긴장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애인도 아닌 여자의 아버지를 만났다는 이유로 긴장한다는게 참 어찌보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본능적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또한 그와 더불어, 그렇기 때문에 유정이가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딸아이가 사과를 하는 모습이 아버지 입장에선 좋게 보일 리는 없을테니.
"....오빠?"
하지만 유정이 아버지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부분에서 반응하는 것 같았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영어로 랩이라도 하는 광경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딱 벌리고 딸아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무척 가관이었다.
"오빠.... 라고?"
"아, 그게... 성진 오빠는 저보다 나이가 7살이나 더 많으니까요. 그, 그게 왜요?"
유정이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걸 설명하려 했지만, 솔직히 나도 이제 유정이를 알만큼 알기 때문인지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를 속일 수 있을 리는 없으니 말이다.
"음, 내 보기에 아무래도 "그냥" 오빠는 아닌 듯 싶구나."
"네?"
"이 애비는 너를 잘 안단다."
"무슨 말씀이세요?"
"사귀는 사람이니?"
"아버지!!"
눈빛을 반짝이며 의미심장하게 묻던 아버지였지만 딸아이의 목청 앞에 또 수그러들어 우물쭈물하는 모습이었다.
"그래, 그러고보니 문 교관이 내게 그런 소릴 하더구나. 아가씨에게 만나는 남자가 생긴 것 같다느니 하면서.... 난 사실 믿지 않았는데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허허."
"아버지! 그런거 아니라구요. 문 교관님이 무슨 말을 했는진 몰라도 그냥 오해일 뿐이에요."
문 교관이라면 아마도 유정이와 함께 있었던 그 체격 좋은 여인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녀에게든 유정이 아버지에게든, 내가 유정이의 남자친구로 보였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꽤 기분 좋은 일이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예, 남자친구입니다." 하고 나를 소개하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찝찝했고, 또 그것이 유정이에게 미안했다.
유정이도 거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답함이 있었는지 아버지의 오해를 딱 잘라 일축하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런 태도가 더욱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으음, 정말이니? 저 청년을 대하는 너의 말투나 태도를 봐서는 필시 보통 사이는 아닐거라 짐작했는데.... 애비가 헛다리를 짚은 건지, 아니면 우리 딸의 성격이 그동안 좀 달라진건지 영 헷갈리는구나."
유정이의 아버지는 아마도 나 정도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유정이란 아이에 대해서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는 분일 터였다. 유정이도 그것을 알기에 차마 아버지를 완전히 속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우물거리며 애매한 대답을 이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애매한 한편, 너무도 솔직했기에 옆에서 듣는 나조차도 당황케 하였다.
"정말로 사귀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인건 맞아요."
"어....?"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던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설마 유정이가 그런 식의 대답을 할 거라곤 예상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 대답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있어서도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내 눈에는 다소 당황하는 듯 보였다.
"아아, 그런 거였니? 그게 요새 젊은이들이 말하는.... 그, 뭐라더라....?"
"......?"
"그래그래, "썸"이라고 했던가? 아직은 그런 단계라는 말이겠지?"
"모, 몰라요! 그런거 자꾸 캐묻지 마세요. 그리고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우신 거에요?"
"문 교관이랑 함께 다니다보니 어깨너머로 주워듣는 것이 꽤 많단다. 아무튼 흥미롭구나."
나를 이모저모로 뜯어보는 유정이 아버지의 눈길 앞에 나는 또한번 위축되는 기분을 느꼈다. 어떠한 압박이나 중압감에 의해 위축되는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그저 알 수 없는 묵직한 기운에 내 스스로가 눌리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왠지 내 속마음을 눈 앞의 어른에게 모두 내보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일순간 등골이 섬칫해질 지경이었다.
"으음, 이거 미안하네. 나도 모르게 너무 유심히 봤구만."
"아, 아닙니다."
유정이 아버지도 내가 그런 기분을 느꼈다는걸 인지했던 걸까?
"내 딸아이가.... "좋아하는 사람"이란 말을 쓰다니 쉽게 믿기지 않는군. 자네도 대강 알 듯은 하지만 내 딸아이가 워낙 남자애 같은 성격이라 나는 저 애가 평생 홀로 사는건 아닐지 많이 걱정했었다네. 아무튼 내 딸이 마음에 품은 남자라니, 이거 오늘 의도치 않게 중요한 만남을 갖게 되었군. 나는 유정이 아비 되는 한석진이라 하네. 인사가 늦었지만 정말 반갑네."
"예. 유정이랑 같은 학과에서 공부하고 있는 최성진입니다. 저도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아버...."
나도 모르게 "아버님"이라는 말이 나오려고 했는데, 어쩐 이유에선지 그 말을 삼키고 말았다. 물론 한국인들이 상대방의 부모님을 높여부를때 "아버님,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이 경우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왔다는게 스스로도 위화감이 들 정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이질적인 감각에 나는 말을 아끼고 말았다.
그리고 내 직감인지 확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유정이 아버지도 내가 그런 기분을 느꼈다는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하, 그냥 관장님이라고 부르게."
"관장님... 이요?"
그러자 유정이게 옆에서 내 옆구리를 살며시 찌르며 낮게 일러주었다.
"아버지는 젊은 사람들에게 관장님이라고 불리는걸 좋아하세요."
"아... 그래."
이 때부터 유정이 아버지를 관장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실 따지고보면 문하생도 아닌데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을 법도 하련만, 왠지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버님" 소리보다는 더 편하게 느껴져 나도 별 거부감이 없이 그 호칭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래, 아까 두 사람 얘기를 들어보니 오늘 약속이 되어있었다던데.... 내가 주책맞게 안 좋은 날에 와버린 모양이군. 미안하게 됐네. 성진 군이라 했던가?"
"아, 네."
"시간을 뺏어서 미안했네. 다음에 또 봤으면 좋겠군."
유정이 아버지.... 아니, 관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와 유정이도 함께 일어섰다. 멀리 나오지 말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관장님을 건물 입구까지 배웅해드렸다. 관장님은 마치 여유로운 행랑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장을 섰다. 헤어지기 전에 관장님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 두 사람 뭐하는 건지 물어도 되겠나? 혹시 데이트인가?"
"아버지!! 그냥 같이 과제를 하는 것 뿐이에요."
"단 둘이서 말이니? 그것도 실내에서?"
"그, 그게 왜요?"
관장님이 어수룩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를 올려다보자 나는 내심 찔끔해지고 말았다. 하긴 딸아이를 가진 아버지 입장에서라면 딸이 남자와 단둘이, 방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사실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유정이의 집안처럼 뼈대있고 격식있는 가문이라면 아마도 더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관장님은 의외로 그저 허허 웃으며 돌아서고 말았다.
"하긴, 내 딸이 그렇게 연약한 편은 아니니."
"아, 아버지.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에요?"
당황하여 소리치는 유정이였지만 나는 사실 죄인처럼 찔끔하고 말았다. 관장님이 알까 모르겠다만 이미 나는 관장님이 우려하는 상황을 이미 옛적에 만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만약 아신다면 어떻게 나오실까.... 나를 찢어죽이실까?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리듯 찔끔했던 나의 죄책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관장님이 무어라 더 말을 하려는 찰나 옆에서 신경 쓰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별 것 아닌 소리였지만 그것은 유독 우리 세 사람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옆집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이사.... 간다고 했었지."
옆집 여자는 현관 입구에 작은 트럭을 대고 박스로 정리한 짐들을 옮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녀가 어제 떠난다고 했었던 것이 이제야 비로소 현실감 있게 느껴져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정말 이대로 떠나는 걸까?
"허허, 젊은 아가씨 혼자 고생이 많구만. 내가 좀 도와드릴까?"
그런데 정말 뜻밖에도, 관장님이 그 순간 불쑥 앞으로 나서며 옆집 여자에게 그런 말을 했다. 트럭의 뒷편에 짐을 싣고 있었던 옆집 여자가 순간 멈칫하더니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이 마주쳤다.
관장님은 옆집 여자의 대답을 굳이 기다리지 않았다. 현관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상자 더미들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관장님이 맨 아래에 있는 상자에 슬며시 손을 뻗었다. 어르신이 나서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어쩔 수 없이 나도 거들려고 몸을 숙이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괴, 괴력인가...?"
놀랍게도 관장님이 맨 아랫쪽의 상자 하나를 붙들고 들어올리자, 마치 자석으로 이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 위에 일렬로 차곡차곡 쌓여있던 상자들이 모조리 하늘로 떠오른 것이다. 정확한 무게를 알 수는 없지만 부피로만 따져봐도 도저히 한 사람의 근력으로 들 수 있는 무게가 아닌 것 같은데다, 관장님의 평범한 체구에서 나올 수 있는 근력은 더더욱 아닌 것 같았기에 나는 벙찔 수 밖에 없었다.
"흠."
관장님은 마치 페트병이라도 다루듯이 가볍게 그 상자의 뭉텅이들을 트럭 위로 올려놓았다. 애초에 옆집 여자가 상자를 차곡차곡 쌓아놓았기 때문에 관장님이 그렇게 한번을 옮긴 것만으로도 절반 이상이 옮겨진 느낌이었다. 나는 허둥거리며 남은 상자들을 트럭 위로 옮겼고, 유정이까지 몇개 거들어 일은 순식간에 마무리 되었다.
짐이 모두 트럭에 실리자 옆집 여자가 한숨을 푹 쉬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를 보았다는 것은 나의 착각인지, 그녀는 순식간에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이번엔 관장님을 바라보았다. 온화한 인상의 그 얼굴을 마주하자 옆집 여자의 눈동자에서 문득 파문이 일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허허. 뭘 이런 것 가지고.... 그런데 내가 벌써 할애비 소리 들을 만큼 나이가 들어보이는 겐가? 아직은 중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수룩한 관장님의 모습에 옆집 여자는 싱긋 웃음을 지었다. 여지껏 내가 보았던 옆집 여자의 웃음 중에 가장 깨끗한 미소였다. 염세적인 느낌이 사라진 순수한 미소. 그녀도 그런 웃음을 지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 한편으로는 그 모습이 그녀답지 않게 퍽 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아, 저기...."
옆집 여자의 시선이 유정이에게로 머물렀다. 아무 관련도 없는 유정이는 애매하게 서성이고 있다가, 옆집 여자의 눈길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의아하게 그 시선을 마주보았다. 그러자 옆집 여자의 얼굴이, 도저히 나로서는 읽어낼 수 없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띄었다.
뭔가 말을 하려는 듯 마려는 듯.... 그렇게 망설이는 옆집 여자의 모습이 정말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다.
"건강하세요."
"네?"
뜬금없는 그 말에 유정이가 반문했다. 하지만 옆집 여자는 방금 전처럼 싱긋 웃을 뿐이었다.
"늘 건강하세요. 지금처럼."
"네? 아... 네."
얼떨결에 대답은 했지만 유정이는 상당히 당황스런 얼굴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옆집 여자는 트럭에 올라탔다. 짐을 가득실은 트럭에 시동이 걸렸고, 불안정한 엔진소리와 함께 트럭은 곧 출발했다. 옆집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나니 왠지 이상한 허탈감이 가슴 가득히 밀려들었다. 멍하니 그 사라진 흔적을 눈으로 좇고 있는 내게 유정이가 물었다.
"오빠. 혹시 저 분 아세요?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아, 글쎄...."
그러고보니 유정이와 옆집 여자가 마주친 적이 있긴 하지. 예전에 옆집 여자가 가스검침으로 위장하고 우리 사이를 훼방 놓았을 때.... 유정이가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는 옆집 여자의 기억이 과연 그 때가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떠오르지 않는 그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하네요. 분명 아는 사람인 것 같긴 한데.... 기억 속엔 없는 것 같고. 정말 애매한 기분이에요. 오빠 혹시 저 분 이름을 아세요?"
"아니... 그냥 옆집 이웃일 뿐이라서."
끝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매함을 나에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엔 유정이에게까지 남기고 떠나버린 옆집 여자를.... 나는 기억 속에 어떻게 남겨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정말 내게 그냥 옆집 이웃이었을까?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아, 예. 살펴들어가세요."
관장님은 왠지 기분이 좋은지 희미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그렇게 멀어져가셨다. 그 뒷모습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던 유정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오빠. 오늘 너무 갑작스러웠죠?"
"아니야. 나도 아버님 뵙게 되서 좋았어."
"기왕이면 남자친구라고 소개하고 싶었지만...."
유정이의 그 말 속에는 뼈가 있었다. 내가 아무리 둔감해도 그걸 못 느낀다면 나가죽어야 마땅했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기에 나는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내가 불편함을 느꼈다는걸 유정이도 눈치챘는지 그녀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그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아버질 만나보니 어떤가요? 생각과는 많이 다른가요?"
"응. 생각했던 것하고 비슷했던 부분도 있었지만 다른 부분이 더 많았어. 특히 네가 나를 아버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소개했을 때 나는 아버님이 나를 안좋게 보시거나,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약간 반기는 듯한 기색이셔서 많이 놀랐어."
"안 좋게 보실 줄 알았다구요?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어, 음, 글쎄.... 사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쑥스럽지만.... 유정이 네 입장에선 내가 "첫사랑"인 거 아니야?"
내가 되려 그렇게 물으니 유정이가 약간 쑥스러워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 그게 왜요?"
"아버님도 그걸 알고 계실 테니까.... 소중한 딸아이의 첫사랑이라면 좀 더 특별한 사람이길 바라셨을 지도 모르지. 내가 너무 평범한 것 같아서 스스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오빠는 평범하지 않아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난 그걸로 충분해요."
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내 어디가 좋아서 나를 좋아한다는 것인진 모르겠지만 그녀의 그 말은 나를 너무도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녀를 가볍게 포옹하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
"다음에 아버지에게 소개할 때는 남자친구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겠죠...?"
"......."
뭐든지간에 명쾌한 대답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하건 간에 명쾌하지 않은 대답이 나올 것만 같았다.... 결국 생각 끝에 나는 명쾌하지 않은 대답을 했다.
"노력할게."
*
유정이를 내 방으로 먼저 올라가게끔 하고는, 나는 있는 힘껏 내달려 옆집 여자의 트럭이 사라진 골목의 귀퉁이를 돌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골목길을 돌자마자 나는 마치 그렇게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길 한편에 차를 세우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옆집 여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미란."
"네?"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만을 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미처 생각을 하기도 전에 불쑥 입을 열었다.
"최미란. 내 이름이야."
"최... 미란..."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이름이 아닌 성에 더 신경이 쓰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동안 이 문제로 인해 많은 고민을 했고 답을 떠올리기 위해 막막한 바다 속을 헤쳐왔지만 지금 내 머리를 관통하고 있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 뿐이었다. 희미했던 가정의 실타래가 마치 뚜렷한 화살이 되어 나를 궤뚫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신이 설마...."
"그래, 난 너에게 이미 많은 힌트를 줬어. 너도 이제는 알겠지. 내가 너의 딸이라는걸."
혹시나, 만약에, 설마, 하며 그런 가정을 이따금씩 떠올려보긴 했었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로써 확인받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충격으로 얼어붙어 할 말을 잃은 내게, 옆집 여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너와 한유정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며.... 그동안 수없이 많은 타임 워프를 해오며 너와 엄마의 사이가 이어지도록 도와왔던 장본인이지. 내 존재에 모순이 생기지 않도록, 네가 반드시 나를 낳을 수 있도록 말이야."
"뭐, 뭐라고?"
"이제와서 새삼 놀랄 필요 없어. 두 사람은 굳이 내가 개입하지 않더라도 무언가에 의해 강력하게 이어져있으니. 그걸 "운명"이라고 부르겠다면 그것도 좋아. 아빠가 엄마와 만나서 사랑에 빠지기까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강렬한 이끌림에 이끌려왔다는 것을 아빠도, 엄마도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녀는 이제 나를 "아빠"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 한 마디로 인해 내가 마주한 현실의 인식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은 것이다. 두렵지는 않았지만 다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내가 할 수 있는 질문들을 해나갔다.
"자, 잠깐. 그렇다면 계속해서 시간을 되감아 내 앞에 나타났던 이유가 뭐야? 네가 돕지 않아도 내가 유정이와 사랑에 빠지게 되어있는게 운명이라면.... 네가 내 앞에 나타나서, 이 시계를 건네줬던 이유는 뭐냐고?"
"의외로 내가 아빠의 딸이라는 사실 자체에는 그리 충격받지 않은 모양이네. 썩 괜찮은 질문이야. 그러잖아도 나 역시 이젠 너무 지쳤거든.... 아마 시간 되감기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몰라."
"뭐....?"
그녀가 나의 딸이라는 것도, 그리고 나와 유정이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는 것도 어쩌면 이미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하나의 가정으로써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정녕 알 수 없는 부분은 나의 딸이 긴 시간을 되돌아와 젊은 시절의 나를 만나고자 한 이유였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임을 나는 확신했다.
"수차례 시간을 되감아 이곳으로 돌아왔고, 그 때마다 나는 같은 결과를 만들어냈어. 하지만 내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지. 운명은 정말로 강력한거야, 아빠. 설령 시간을 되감거나 해도 바뀌는게 아니라구. 나 역시 처음에는 내 두뇌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어."
"네, 네가 원하는 미래라니....? 제발 자세히 설명을 해줘!"
"다른게 더 필요해."
"뭐...?"
나는 알 수 없는 기묘한 감각에 오싹함을 느끼고 그녀에게로.... 아니, 내 딸에게로 한발짝을 더 떼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만큼을 물러서며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타임 리와인더.... 하지만 그것은 내가 갖고 있는 타임 리와인더와는 달랐다. 그것은 내 것처럼 투박한 은백색의 빛깔이 아닌, 새카만 칠흑 빛깔을 띄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도 유독 눈에 들어오는 금빛의 초침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럼 또 잠시동안 작별이야, 아빠."
"자, 잠깐! 기다려. 네가 정말 내 딸이라면 난 더 많은걸 알아야 해.... 그렇게 가버리지 말란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손에 쥔 시계의 금빛 초침을 한바퀴 돌리고 말았다. 나는 그 행위의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그 손가락의 움직임 하나가 너무도 비정하게 느껴져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메마른 표정이었고, 다만 절규하는 나를 보며 쓸쓸하게 한마디를 덧붙일 뿐이었다.
"아빠.... 난 아빠가 정말 싫어."
그리고 세상이 요동치는 듯한.... 시간 되감기 특유의 아찔한 감각이 나를 덮쳤다.
*
"오빠! 오빠, 정신이 들어요? 눈 좀 떠 봐요!"
그리고 나는 그 후.... 다섯 시간이 지나 응급실 침대에서 눈을 떴다.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보았던 것은 나를 내려다보는 유정이의 두 눈동자였다. 미래의 내 딸을 낳은 여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든 현실감각이 상실된 채 내 두뇌는 시계바늘처럼 똑딱거리는 소리를 내며 오직 이 순간의 "시간"만을 되짚어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여러가지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난잡하게 뒤섞이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검은색 초시계만은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 검은 시계는 시간을 "되"감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앞으로 감아버린 것이다.
유정이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두 눈이 희미하게 깜빡이는걸 보고 유정이는 내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다음 날이 되어 있었고, 나는 검은색 초시계나 골목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아무 것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저 옆집 여자가 떠났다는 것만을 희미하게 인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이번 화도 너무 늦었지요? ㅠ
죄송합니다
이직을 했다보니 새로운 근무환경에 적응하는게 사실 쉽지 않네요
틈틈이 쓰고는 있지만 예전만큼은 속도가 나질 않는 것이.... 모쪼록 독자님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할 따름입니다
지난 주 내내 엄두도 못내고 있다가 오늘은 꼭 39장을 올리고 싶어 다소 이른아침에 눈을 떴습니다
지난화에서 제가 설명을 애매하게 한 탓인지 다소 혼동을 하신 독자님들이 계신 듯 합니다
추천수 이벤트는 지난화(38장)에서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회를 봐서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
추천수 이벤트를 하려면 미리 연재분을 3회 정도는 해놓아야 하는데 아직은 그게 준비가 안 되었거든요...
새로운 업무환경에 적응도 하고, 회식도 좀 잦아들 무렵이 되면 추천수 이벤트는 물론이거니와
2~3일에 꼭 한편 씩은 올리고 싶네요
연재 속도가 늦어져도 꾸준히 기다려주시는 독자분들껜 죄송하면서도 한편으론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또 일주일의 시작이네요
다들 월요병 이겨내시고 힘찬 하루 보내시길 ^^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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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2-28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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