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12장
자각몽... 루시드 드림이라고 하던가?
꿈 속에서의 나는 여전히 눈을 뜨고 있었지만,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망망대해를 마음껏 유영하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비록 꿈이었지만 느낌이 너무도 생생했다.
손 끝에 닿는 감촉 하나하나까지 또렷하다. 상의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자 그곳에는 여전히 투박하고 낡은 감촉의 은백색 초시계가 들어있었다. 그것을 손에 움켜쥐었다.
꿈 속에서 나는 또 한번의 시간 여행을 했다. 하지만 여느 때와 같은 과거로의 시간 되감기는 아니었다. 나는 미래로 향했다. 굳이 미래를 보겠다기보단, 먼 훗날 나의 모습이 어떤지 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시간을 헤집듯이 위를 향해 마구 헤엄쳐 올라가던 도중 나는 미래의 나를 볼 수 있었다. 가까이 가보고 싶었지만 마치 액자 속을 들여다보듯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미래의 나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두 여인과 함께 있었는데,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느낌으로 곧 알 수 있었다.
내 아내와 딸이구나.
문득 얼굴을 보고 싶었다. 미래의 아내와 딸의 얼굴을 알게 된다면 내 삶에 혹시 변화가 올까?
하긴 그걸 누가 알 수 있을까. 운명이란 말처럼 부질 없는 것도 없는걸.
만약 운명이란게 내게 있었다면, 과거를 조금씩 바꾸어 올 때마다 그 운명도 조금씩 바뀌어 왔을테니.
"이름이 뭐니?"
미래의 내 딸이 어느새 나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나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단지 어린애의 품 답지 않게 매우 아늑하고 포근하다는 느낌만 들었다.
내가 아직 어리기 때문일까?
"왜 울고 있어?"
볼 수는 없었지만 아이가 울고 있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내 딸이니까 달래줘야 했다.
안간힘을 써서 뒤를 돌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조금씩 내 몸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이제 조금만 더 애를 쓰면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머리칼이 보이고, 옆얼굴이 보인다.
"어?"
그리고 아이의 얼굴을 마주 보는 순간, 나는 그만 잠에서 깨었다.
잠에서 깨는 순간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얼굴인데,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던 것 같다.
*
"선배."
불어오는 찬바람에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아무리 더위가 꺾였기로소니 아직 9월 밖에 안되는데... 왜 이렇게 추운걸까?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떨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정신이 들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등 뒤에서 줄곧 끌어안고 있었다는 사실도.
"으윽..."
"정신 들어요?"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유성이....?"
"다행이네요. 살아있어서."
기억을 더듬어 정신을 잃기 전을 떠올려 보았다. 물에 빠진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헤엄을 쳐야한다는 생각만 하다가 그렇게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살아있는걸 보니 어떻게든 물 밖으로 나온 것 같긴 하다.
"어, 어떻게 된거야....?"
"물살에 쓸려오면서 헤엄을 치다보니까 어떻게 운이 좋았는지... 여길 발견하긴 했어요."
유성이가 정신을 잃은 나를 데리고 헤엄을 쳐서 물 바깥으로 나왔다는건가? 정말 대단한 애구나...
문득 의식이 끊기기 전에 봤었던 유성이의 무서운 모습까지 덩달아 떠올랐다.
"여, 여기가 어딘데?"
"그게...."
애매하게 말 끝을 흐리는 유성이. 나는 애써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려보려고 했다. 하지만 신경을 관통하는 듯한 무지막지한 통증을 느끼고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채 다시 돌바닥 위에 털썩 쓰러졌다.
"선배! 움직이면 안 돼요."
"아윽...."
"많이 다치셨어요. 그냥 가만히 누워있어요."
"왜 이렇게 아프지...?"
"선배 몸을 대충 봤는데... 물에 떨어질때 수면에 부딪히면서 등이랑 발목을 다친 것 같아요. 발목이야 그렇다쳐도 등이 다친건 잘못 조치했다간 평생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여자애 답지 않게 어떻게 겉으로 보고 그런 것까지 다 알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부분을 채 궁금해하기도 전에 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고 말았다. 내 몸이.... 지금 내 모습이....
"자, 잠깐. 내가 왜 알몸이야?"
몸만 정상적으로 움직였더라도 나는 즉시 몸을 일으켜 몸을 가릴 것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기는커녕 기겁하는 시늉을 하는 것조차 힘들어 나는 그저 얼빠진 표정으로 유성이에게 물을 뿐이었다.
"선배, 지금 춥죠?"
"으응. 무척...."
유성이의 말마따나 뼛속까지 시린 오한이 으슬으슬 몰려들고 있었다. 여름이 지나갈 무렵이라곤 해도 분명 이렇게까지 추울 시기는 아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추울까?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데 거기다가 오한까지 몰려드니 움직일 수가 없는 탓에 더 춥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치 한겨울 야외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지금 상황에서 몸을 가릴 옷가지가 더욱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물론 추위도 추위였지만 부끄러움도 한 몫 단단히 했다. 나는 지금 스무살짜리 여자애 앞에서 팬티 한장 걸치지 않은 완전한 알몸으로 누워있었던 것이었다. 물에 쓸려오면서 옷이 찢겨나가기라도 한 건가? 그렇다고 팬티까지 다 찢겨나갈 리가 없는데....
"가, 갑자기 왜 이렇게 춥지? 유성아, 내 옷은 어디 있어?"
얼마나 추웠는지 얼굴이 새파래지며 이빨까지 딱딱 떨려왔다. 부끄러움과 추위라는 두 가지 이유가 공존하고 있었지만 곧이어 상상을 초월하는 오한 앞에서 부끄러움은 잠시 잊혀져버렸다. 지금은 오직 조금이라도 몸을 따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간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안해요, 선배. 선배 옷은 내가 잠시 벗겨뒀어요. 차가운 물에 빠진 경우엔 익사보다 체온 저하로 인해 죽는 경우가 더 많아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물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저체온증이 온 거에요. 저체온증 환자는 체온 손실을 막고 몸을 데워줘야 하는데.... 물에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체온을 빼앗기니까.... 어쩔 수 없이...."
술술 설명하던 유성이었지만 마지막 부분에선 말꼬리를 조금 흐린다. 아무렴 그 애 스스로도 다 큰 남자의 옷을 팬티까지 홀랑 벗겨버린 행동에 대해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부끄러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기에도 벅찬 상태였으므로 그저 오한에 떨며 괴로워 할 뿐이었다.
"으윽... 그, 그럼 어쩌지... 너무 추운데..."
"많이 추워요? 미안해요... 라이터라도 갖고 있을걸... 선배 혼자 두고 주변을 둘러보러 갈 수도 없고 해서...."
"아니야.... 네가 나 데리고 헤엄쳐와서 살아난 건데.... 으큭...."
유성이가 나보다 어리기에 나는 그녀를 되도록 안심시켜 주려고 괜찮은 척을 해보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무리였다. 저체온증 상태의 오한이 뼛속까지 스며들자 도저히 가만히 있기 힘들 정도로 몸이 으스스 떨렸다. 그렇다고 해도 몸을 일으킬 수도 없는 상태였기에 상황은 최악이나 다름 없었다.
"선배."
"으, 응."
"뒤 돌아보지 마세요."
"뭐, 뭐라구?"
유성이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뒤를 돌아볼 힘조차 없었다. 뒤에서 뭔가가 스륵 거리며 바닥에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몇 차례 그 소리가 반복되더니, 이내 유성이가 나를 목 뒤에서 감싸듯이 껴안았다. 그 순간, 나는 그 극한의 몸상태에도 불구하고 놀라서 그만 펄쩍 뛸 뻔 했다.
등에 와서 닿는 유성이의 몸 느낌이 나와 같은 맨 살결의 느낌이었다. 내 맨살에 유성이의 맨살이 와서 닿은 것이었다. 느낌으로 보건데 온 몸 전체가 그런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방금 전에 등 뒤에서 바닥에 툭툭 떨어지던 것이 유성이의 옷들이었단걸 알 수 있었다. 자기 스스로 옷을 벗어버린 것이다.
"유, 유성아. 뭐 하는 거야?"
너무 놀랍다보니 놀라는 시늉을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유성이의 음색은 오히려 나보다 담담했다.
"가만 있어요."
"왜, 왜 이러는...."
"지금은 이게 체온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라이터 같은 도구도 없고.... 부끄럽지만 산 속에서 불 피우는 방법 같은건 잘 몰라요. 그러니 사람들이 구조하러 올 때까진 이렇게 몸을 데우고 있을 수 밖에 없어요... 몸끼리 붙어 있으면 체온을 높이는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고 배웠어요.... 이해해주세요."
솔직히 지금 이 상황이 유성이가 내게 이해해달라고 말할 만한 경우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건 내가 이해해 달라고 해야 할 경우가 아닌가? 유성이가 하는 말이 맞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다 큰 남녀가 서로 알몸인 채로 껴안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선뜻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살고 죽는 문제 앞에서 쓸데없는 기분 같은건 잠시 버리세요. 지금은 이 방법 밖에 없잖아요. 선배 혼자 두고 사람들을 찾으러 갈 순 없으니까요. 만약 저 혼자 간다고 해도 이렇게 어두워서는 산 속에서 분명 길을 잃을 거에요. 그렇게 되면 문제가 더 커져요. 열을 보호하면서 여기서 구조를 기다리는게 최선이에요. 이 상황에서는요...."
"으, 응...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긴 해..."
어쩐지 겨우 스무살 난 여자애인 유성이가 지금은 나보다 더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는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런 의외의 모습들을 드문드문 보여주는 걸까?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핸드폰은.... 고장 났겠지?"
"당연하죠. 선배 거랑 제 거 둘다 확인해봤어요. 서연 언니랑 연락만 됐어도 우리가 지금 이 고생 안하고 있겠죠."
연락 수단 고장에, 나는 움직일 수 없고, 주변이 어두워서 앞길도 안보이니 유성이가 함부로 자리를 뜰 수도 없다. 이거야말로 정말 진퇴양난, 최악의 상황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과연 사람들이 구조를 하러 오긴 올까?
그래도 이 최악의 상황에서 불행 중 다행인게 딱 하나 있다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만약 유성이 없이 나 혼자 계곡에 떨어졌다면 십중십 익사 혹은 저체온증으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의식을 잃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해보니 나를 끌고 물 밖까지 헤엄을 쳐온 것도 그렇고, 체온을 보호해준 것도 그렇고, 어느 모로 보나 유성이는 내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유성아.. 고마워. 니가 아니었으면 난 정말 죽었겠다.."
"그런 말은 나중에 해요. 선배도 날 구하려다 이렇게 된 거 잖아요."
문득 지환이 그 쌍놈의 새끼가 생각이 났다.
그러고보니 그 놈의 발길질로부터 유성이를 구하려다가 같이 떨어지게 되었지.... 이거 완전 살인미수 아냐?
"그 새끼... 돌아가면 가만 안 둘거야."
"그것도 살고 난 다음이죠. 일단 구조 되는 것부터 생각하기로 해요."
"그래... 알겠어."
한심하게도 나는 나보다 어린 유성이의 말 한마디에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었다. 도저히 그 나이 또래로는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와 연륜이 유성이에게서 느껴졌다.
게다가 유성이의 말대로 이렇게 알몸을 서로 부대끼고 있으니까 체온 회복에 도움이 되긴 되는지, 비록 아직 춥기는 했지만 아까처럼 죽을 것 같이 몸이 으슬으슬 떨리지는 않았다.
"유성아. 오, 옷 벗고 있는거... 괜찮아?"
"어쩔 수 없잖아요. 내 옷도 다 젖었으니까.... 젖은 옷 입고 껴안고 있으면 선배 몸은 더 차가워질걸요."
여느 때처럼 담담하게 말을 하긴 하지만 나는 유성이의 말 속에 미세한 부끄러움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유성이의 표정을 보지 않는 것이 지금 그 아이에 대한 예의일 것 같았다. 그저 그렇게 알몸의 유성이가, 알몸의 나를 등 뒤에서 껴안고 있는 상태로 가만히 누워있기만 했다.
어느 정도 체온이 돌아오고 나니 이성적인 생각도 하나둘씩 가능해지는 것 같았다. 나도 불편하지만, 유성이도 지금 이 모습이 많이 불편할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 있어야 한다면 편하게는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혹시 넌 감이 오니?"
"대충 보니까.... 바위 틈바구니에 계곡 물살이 밀어닥쳐서 자연적으로 움푹 패인 곳 같아요. 우린 여전히 계곡 한가운데에 있는 거나 다름 없어요. 날이 밝으면 주변 지형을 자세히 볼 수 있겠지만 그 전 까지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치켜떠 간신히 고개만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치 앞도 안 보일만큼 사방이 어두웠지만 바위 면의 형태나 근처 지형으로 보건대, 계곡 급류에 휩쓸려 오다가 운 좋게도 암벽이 패인 곳을 유성이가 놓치지 않고 발견한 것 같았다.
바다로 치면 해식동굴 같은 지형이랄까.... 파도에 의한 침식작용에 동굴이 생기는 것처럼 이곳도 원래는 바위로 둘러쌓인 곳이 계곡 물살에 의해 한쪽 면이 움푹 패임으로써 이렇게 사람 두 명이 간신히 누울만한 자리가 만들어진 장소인 것 같았다. 어찌보면 물살에 휩쓸려 오는 그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이런 공간을 발견한 것 자체가 천운이라고 보아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계곡 물길의 바깥으로 벗어나지 못한 장소에 위치해 있다는 뜻이었기에, 분명 목숨을 건진 것에 감사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그리 좋게는 여겨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곳은 물장구나 치고 놀 수 있는 수준의 얕은 수심지역도 아닌 것 같았기에 섣불리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들어갈 수 있다고 쳐도 이 몸으로는 헤엄치는게 무리였겠지만 말이다.
"아무리 봐도 최악이네... 우리 이제 어쩌냐?"
"걱정 말고 좀 기다려보죠. 분명 사람들이 구조하러 올 거에요."
"그럴까... 엠티 자리니까 다들 논다고 정신 없어서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닐걸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서연 선배는 성진 선배가 안 보이면 분명 걱정할 거에요."
"서연이가...? 그럴까?"
"그럴 거에요."
"그건 그렇고... 저체온증에 걸릴 정도라면 내가 물 속에서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거야?"
"나도 잘은 몰라요. 선배가 절 감싸안고 물에 빠진 덕분에.... 저는 의식은 있었거든요. 그냥 무작정 헤엄쳤어요. 물살이 너무 세서 올라올 공간이 보이자마자 올라왔구요."
"그래... 잘했어. 아무튼 정말 고맙다."
체온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하니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해지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춥긴 했지만 불평을 할 순 없었다. 유성이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걸 알기 때문이었다. 서로 알몸이 맞닿아있는 민망한 상황에서 분위기가 더 어색해지지 않기 위해 나는 최대한 다양한 대화를 시도했다. 비록 입을 열기도 힘겨웠지만 말이다.
"근데... 그렇게 오래 물에 빠져있었는데 나 용케도 익사하지 않았네."
"물을 너무 많이 마셔서 위험하긴 했어요. 아까는 숨을 안 쉬셔서... 좀 걱정 했어요."
"뭐? 그런데 어떻게...."
그 순간 혹시? 하는 생각이 머릿 속을 스쳤다. 혹시? 에 이어 설마?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을 이 때 실감했다.
"사실 인공호흡을 좀... 하긴 했어요."
"......."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유성이가 내 목숨을 구해준 마당에 내가 정신을 잃고 있었을 동안 인공호흡을 하거나 옷을 벗겼다고 해서 내가 불평을 할 순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아무 것도 모르는 사이에 옷도 벗겨지고 엄연히 스무살 성인인 여자애가 내 입속에 숨까지 불어넣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긴 했다.
"그, 그랬어?"
"........"
이번엔 유성이가 침묵한다. 비록 나는 유성이의 표정을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알몸이 이렇게 맞닿아있다 보니 왠지 유성이가 지금 그녀 답지 않게 민망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유성이를 그리 잘 안다고는 할 수 없기에 "그녀 답다"라는 말을 쓰는게 이상하기는 했지만...
"기왕 하는거 내가 좀 잘 생겼으면 너도 좋았을 텐데. 못 생긴 얼굴에 억지로 입 맞추려니까 힘들었지?"
"지금 농담이 나와요?"
하지만 농담은 확실히 분위기를 풀어주는데에는 효과가 있는지, 유성이도 침묵을 깨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농담을 할 정도면 그래도 아까보단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뜻인걸 유성이도 알기에 그녀도 말과는 달리 조금 안심하는 것 같았다.
"미안해, 유성아. 괜히 나 때문에 이런데 휘말리고는."
"그런 말 말라고 했잖아요. 따지고보면 서로 구해준거에요. 그냥 단지...."
"단지 뭐?"
"그냥 단지.... 재수가 드럽게 없었을 뿐이에요."
신기하게도 유성이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 속은 과거에 스쳐지나갔던 기억 속의 한 장면을 용케도 끄집어내고 있었다. 강변도로에서 들었던 누군가의 한 마디가 하필이면 그 때 귓가에 겹쳐 들렸던 것이다.
"젠장... 재수 드럽게 없네."
그랬다. 나는 유성이의 이 거칠고 투박한 어감을 분명 예전에 한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학교에서 이 아이를 만났을 때보다 더 이전에.
"유성아. 솔직히 말해봐. 우리 마주친 적 있지? 강변도로에서."
"......."
다시 침묵하는 유성이를 보고, 나는 그제서야 그녀가 여태껏 나를 알아보았음에도 일부러 모른척 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가만히 기다리자, 마지못해 유성이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을 한다.
"풋... 킥킥."
"왜 웃으세요?"
"아니, 그냥. 나 그 때 너 처음 봤을 때,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싶어서 다시 만나면 혼쭐을 내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니까 상황이 웃기잖아."
"그 아저씨가 학교 선배일줄은 나도 몰랐죠."
"이게 어디서 아저씨래. 넌 언제부터 알아본거야?"
"아까 계곡에서 선배가 강변도로 얘기했을 때부터요."
"큭큭...."
왠지 그 아픈 와중에도 웃음이 튀어나왔다. 세상 일은 참 신기한가보다. 만나면 혼구녕을 내주겠다고 다짐했던 그 싹수 없는 여자애가 설마 내 생명의 은인이 될 줄이야. 너무도 뜻밖의 상황이라 평소였다면 입을 벌리고 놀랐겠지만 지금은 왠지 그게 유쾌한 재미로 느껴지는걸 보니 확실히 내가 지금 정상은 아닌가보다.
"야, 너 그 때 왜 나한테 뻐큐날렸냐?"
"그냥요. 쪽팔리잖아요."
"뭐가?"
"자빠진 것도 쪽팔려 죽겠는데 자꾸 웬 아저씨가 정신사납게 구니까."
"뭐? 하하하하."
이제보니 유성이는 꽤 재미있는 아이인 것 같다. 문득 이 아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별 탈 없이 구조되고나면 유성이랑도 좀 친해져보려고 노력해야겠다.
"근데 유성아. 아까 말이야... 내가 지환이랑 싸울 때. 너 왠지 다 알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던데... 어떻게 된거야?"
내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던 유성이가 곧 순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저도 봤어요."
"뭘?"
"선배가 낮에 계곡에서 서연 선배랑... 그...."
"계곡"과 "서연 선배"까지만 나와도 나는 유성이가 뭘 봤다는 것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행위가 생략되었지만 왠지 유성이는 거칠 때의 모습과는 다르게 "섹스"라는 말을 선뜻 하기 힘든 성격인 것 같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이는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해했음을 자기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사실은 서연 선배를 계속 보고 있었는데, 서연 선배가 성진 선배랑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길래... 호기심에 따라가봤어요. 선배랑 서연 선배가 그거 하는걸 보고, 저는 놀라서 그냥 보고만 있었어요.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하필 그 때 근처에 숨어서 엿보고 있는 지환 선배... 아니, 그 새끼를 보게 된거에요."
"지환이를....? 그랬구나."
결국 서연이와 내가 야외에서 그 짓을 하는걸 무려 두 명에게나 들키고 말았다는 얘기였다. 나는 내 부주의를 다시 한번 마음 속으로 질책했다. 나는 그렇다쳐도 서연이는 그런 모습이 밝혀지면 나보다 훨씬 더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다. 앞으로 아무리 성욕이 불타올라도 때와 장소는 좀 구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새끼가 사진을 찍는걸 멀리서 봤어요. 다행히 그 놈은 저를 못 봤지만요. 그 사진들로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성진 선배나 서연 선배한테 안 좋은 짓을 하려고 한다는건 쉽게 알 수 있었죠. 그래서 계속 세 사람을 유심히 보고 있었던 거에요. 언젠간 마주칠 테니까. 담력 훈련에서도 뒤에서 가만히 보고만 있었는데, 그 지환이라는 새끼가 성진 선배가 나오자마자 따라 붙는걸 보고 직감이 왔어요.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나도 가겠다고 따라 붙은거였구요...."
"그랬구나... 이제 대충 이해가 가."
유성이의 설명을 들으니 왜 지환이에 이어 유성이까지 나를 따라가겠다고 나섰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유성이에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고마운 마음이 울컥 솟는 것을 느꼈다.
"넌 나를 걱정한 거였구나."
"그냥... 나한테 먼저 말 걸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요. 그리고 서연 선배가 잘못 될까봐 걱정했던 이유도 있고..."
"그래. 그래도 고마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보니 체온도 조금 올라가고 긴장도 풀리는 것 같았다. 왠지 나는 이 와중에도 기분이 좀 좋아졌다. 이대로 내일 날이 밝을 때까지 있어도 얼어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노곤노곤 졸음이 쏟아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꾸벅꾸벅 잠에 빠지려고 하자, 유성이가 내 등을 스파이크 하듯이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화들짝 놀라서 내가 깨어나자 유성이가 경고를 주었다.
"절대 자면 안 돼요. 잠시 체온이 올라갔다고 해서 이대로 잠들면 진짜 죽을 수도 있다구요."
"으, 응. 그렇다고 다친데를 때리면 어떡해... 아파 죽겠는데."
"그건 미안해요. 저도 좀 놀라서."
"근데 잠이 오긴 온다."
"참아요. 아니면 계속 얘기를 해봐요. 뭐라도 좋으니까."
"음... 얘기..."
무슨 얘기를 하는게 좋을까? 사실 유성이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거 나는 사람들이 구조하러 올 때까지 유성이에게 묻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물어보기로 했다.
"그럼 내가 뭐 물어보면 다 대답해줄래?"
"뭔데요? 들어보고요."
"음... 일단은 네가 서연이를 왜 그렇게 따르는지가 궁금해."
"제가 서연 선배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어요?"
"아니었어? 서연이 말을 잘 듣는 것도 그렇고, 방금 이야기할 때도 계속 서연이 걱정을 했잖아. 내 눈엔 그렇게 보였는데."
등 뒤에서 알몸으로 나를 껴안은 유성이의 감촉이 문득 느껴지자, 나는 순간 말하다 말고 척추가 찌릿하게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등의 통증 때문은 아니었다. 내 느낌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 방금 유성이의 말캉한 가슴이 내 등을 쓸고 지나갔던 것이다. 감촉으로 보건대 브래지어조차 하고 있지 않은게 틀림 없었다.
이 와중에도 목구멍에 침이 꼴딱 넘어간다. 유성이는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침묵을 했다. 나는 그 침묵의 의미가 무시하는 것이 아닌,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란걸 느낄 수 있었다. 알몸을 맞대고 있으니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
"서연 선배는... 굳이 비유하자면, 롤 모델 같은 거에요."
"롤 모델?"
"우상이라는 단어는 좀 그렇고.... 그냥,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같은 느낌? 하여튼, 서연 선배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게 있었어요."
사실 서연이에 비하면 객관적으로 한 끗발 밀리긴 하지만 유성이도 결코 어디가서 기죽을 얼굴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몸매가 어디 빠지거나 빈약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유성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왜? 너도 그렇게 모자란 외모는 아닌 것 같은데."
"굳이 외모가 아니더라도, 뭐랄까... 그 선배에게서는 여자라는 냄새가 나요. 여성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건 확실히 나한테는 없는 거죠."
"여성적인 것만이 매력은 아니잖아. 요새는 중성적인 매력도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남한테서 인기를 얻고 싶다는건 아니에요. 나는요... 어렸을 때부터 "여자다운 것"을 피해서 살았어요. 난 여자애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늘 남자애가 되고 싶었고, 또 그렇게 되야 하는게 내 운명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단걸 중학생이 되서야 깨달았죠."
유성이에게는 남 모르는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하지만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괜히 어떤 상처를 건드리는건 아닌지 신경 쓰였던 것이다.
"듣고 싶어요?"
그래서 유성이가 먼저 그렇게 말해주었을 때, 나는 고마우면서도 놀라웠다.
유성이를 그리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늘어놓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서로를 구했다는 그 특별한 유대감이 그 순간의 우리를 좀 더 가깝게 만들어 놓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게 결코 아무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님을 나는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응."
정확하게 내가 뭘 듣고 싶은 건진 콕 집어서 얘기하기가 힘들었지만, 유성이도 나도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건지는 서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내 원래 이름은 유정이었어요. 한유정."
이윽고 유성이의 입이 열렸고, 그녀가 과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남자애가 태어나면 한유성, 여자애가 태어나면 한유정.
내가 어머니의 뱃 속에 있을 때부터 아버지는 내 이름을 그렇게 지어놓으셨대요.
어머니가 나를 낳으셨을 때, 아버지는 내게 유정이라는 이름을 주고 싶어했죠.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의견을 반대했어요. 어머니는 나를 남자애로 키우고 싶어했죠. 내가 여자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우리 집안은 일본에서 천 년을 넘게 이어내려온 고무술(古武術)의 맥을 잇는 무예가들의 유파 가문이에요.
이제는 이름만 간신히 남아서 혈통을 이어가고 있는 "무신류" 라는 무예를 숭상하는 가문이죠.
그 중에서도 어머니는 원류의 혈통을 잇는 뼈대 있는 정통가문의 여인이었어요. 어머니는 일본인이셨죠.
어머니의 아버지, 즉 우리 외할아버님이 19대 당주님이셨거든요.
하지만 당주이셨던 할아버님은 딸인 어머니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물려주지 않았어요. 너무도 보수적인 유파의 관습 때문도 있었지만 여인의 몸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넘지 못한 어머님의 무예 실력 때문도 있었지요.
결국 할아버님은 한국 유파 출신의 실력자 한 명을 데릴사위로 맞이해서 어머님과 결혼을 시켰죠.
어머님에게 후계자 자리를 줄 수가 없었으니, 당신께서 눈여겨 보셨던 한국의 인재와 어머님을 짝 지은 후 그 남자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준 거에요. 그래요, 그게 우리 아버지였어요.
그 숱한 일본 본토의 실력자들을 두고 할아버님이 왜 굳이 한국의 실력자를 후계자로 맞이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몰라요. 아무도 그 이유를 내게 설명해주진 않았죠.
아무튼 제 부모님은 그렇게 결혼하셨지만, 그 때부터 어머니는 줄곧 "여인의 몸" 이었기에 후계를 계승할 수 없었다는 여인으로서의 수치심 비슷한 걸 떠안고 사셨어요. 내가 태어나고 나서도 그건 변함이 없었죠.
어머님은 비록 여인의 몸이었지만 어려서부터 누구보다도 무예에 충실한 삶을 살아오셨대요. 하지만 정말 특출한 재능을 갖지 않은 이상 여인의 몸으로 남성의 벽을 뛰어넘는다는건 쉽지 않은 일이죠. 안타깝게도 어머니에게 그런 재능은 없었어요.
스스로 직접 후계를 계승하지 못했다는 점을 늘 부끄럽게 여겨왔던 어머니는 적어도 당신의 자식만큼은 꼭 후계자로 만들어주겠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죠. 그리고 내가 태어났어요. 어머니의 바람과는 다르게 나는 여자애의 몸으로 태어나고 말았어요. 어머니에겐 그게 더없는 비극이었겠죠.
그 때부터 어머니는 이상한 집착에 빠지셨어요. 나를 남자애로 만들고 싶어했죠. 내 또래 여자애들이라면 응당 할 수 있는 것들을 나는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하고 자랐어요. 걸음마를 떼고나서부터 무도복을 입었으니까요.
결국 어머니는 나에게 유정이라는 이름 대신 "유성"이라는 이름을 주었어요.
이상하게 그 후로도 몇 번이고 아들을 낳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셨지만 한번도 회임을 하실 순 없었대요.
상황이 그렇게 되니 어머니는 어머니가 못 이루었던 여성 후계자의 꿈을 자식인 제가 대신 이루어주길 바라셨나봐요. 나를 정말 혹독하게 수련시켰지요. 하지만 내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어머니는 점점 내게 실망하기 시작하셨어요. 나에게도 역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남성을 뛰어넘을 만한 재능이 있지는 않았거든요.
내가 무예를 배워서 딱 하나 좋은 점이 있다면 학교에서는 누구도 나를 괴롭힐 수 없었다는 거에요. 여자애들은 물론이고 웬만한 남자애들도 내 상대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평범한 또래들끼리의 주먹다툼에서나 통하는 얘기였을 뿐이에요. 천 년이 넘는 고(古) 무술의 맥을 잇는 후계 자리를 논하기엔 나 같은건 그냥 하찮은 먼지나 다름이 없었죠.
일본 본토에는 나 말고도 후계 2순위로 지목되고 있는 남성 무예가들이 많았죠. 중학생이 되었을 때쯤, 난 그 사람들과 대련을 해봤어요. 단 한 번도 이길 수 없었죠. 어머니는 그 때 크게 실망하셔서 일본으로 돌아가셨어요.
더 이상 나에게선 가망을 찾을 수가 없다나.... 아무튼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랑 둘이서 살게 되었죠.
슬프지 않았냐고요? 물론 슬프긴 슬펐죠. 하지만 약간 후련하기도 했어요.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나는 내가 하려고 했던 일, 그리고 걸어가야 하는 길이 내가 가진 몸과는 너무도 다르다는걸 조금씩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아버지는 나를 많이 예뻐했죠. 속으로는 아마 나를 여자애로 키우고 싶으셨을 거에요.
어머니의 집착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지만요.
우리 아버지는 가문에서 그다지 힘이 없었어요. 실력만은 누구보다 뛰어나셨지만 데릴사위라는 신분 때문이었죠.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할아버님이 정한 유파의 후계자였기 때문에 다음 후계를 계승하는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만 했어요. 내가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쯤, 아버지는 후계 문제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 결국 일본으로 가셨죠.
나 때문에라도 한국에 더 오래 있고 싶어하셨던 아버지였지만 가문의 중요한 문제 앞에서 더 고집을 부리기는 힘드셨을 거에요. 무예를 숭상하는 가문에서 가문의 중대사란 자식보다도 훨씬 우선하는 중요한 문제거든요.
내가 2학년이 되었을 때, 일본에서 소식 하나가 날아왔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뒤늦게 자식이 생겼다는 거였죠. 가문 전체가 들썩일 만큼 큰 소식이었어요. 내게는 동생이 생긴 셈이었구요.
뭐랄까... 기분이 이상했어요. 기쁘다거나 하는 생각보다는 그냥 제발 남자애였으면, 하는 생각만 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더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했거든요. 그리고 그런 내 기도와.... 어머니의 기도까지 하늘에 닿았는지 결국 내 동생은 사내아이로 태어났죠. 어머닌 그 아이에게 일본인의 이름을 붙였구요.
저는 제 동생의 얼굴을 본 적이 거의 없어요. 아마 일본에 갔을 때 두어번 정도 본게 전부일 거에요.
이제 겨우 두세살 정도 되었을테니 걸음마는 뗐으려나요? 아마 곧 그 동생도 무도복을 입게 되겠죠.
아무튼 동생이 태어나고 난 이후부터 나는 뭔가로부터 해방되었어요. 나를 얽매고 있던 가문이니, 후계니 하는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워진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기분이 참 이상했죠.
평생을 남자애처럼 살아오다가, 갑자기 여자가 되려는건 너무 힘들었어요. 나는 줄곧 그렇게 남자처럼 사는게 옳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고, 또 그런 삶의 방식만이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또래 여학생들과 어울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남자애들과 놀기도 힘들었죠.
고3이 되었을 때, 나는 오토바이 타는 법을 배웠어요. 그게 마음에 들었죠. 헬멧을 쓰고 달리다보면 남들은 저게 여자인지 남자인지 잘 모르잖아요. 게다가 미친 듯이 달리고 있으면 외로움을 잊을 수 있다는 것도 좋았어요.
한국에서 부모님도, 가족도 없이 혼자 살고 있었던 나는 사실 많이 외로웠거든요. 하지만 티를 내지 않았죠.
그토록 바라던 후계자를 얻은 어머니의 행복을 깨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일본으로 돌아가서 다시 가문과 후계 따위의 문제에 휩쓸려가며 살기도 싫었어요. 그저 아버지가 어서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랬을 뿐...
그러다보니까 뭐 폭주족 친구들도 좀 사귀게 됐어요. 걔네들한테서 이것저것 배우기도 했죠. 욕이라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썩 좋은 친구들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네요. 걔네들 덕분에 안 좋은 것도 좀 배우고 했으니.
아무튼 나는 오토바이 타는게 좋아요. 달리는걸 즐기는 것도 좋지만, 내 안에는 아직도 남자애가 되려고 하는 본능이 한 구석에 남아있는 모양이죠.
돌이켜보면 내 삶이 참 모호했어요. 여자이면서 남자이고 싶어했지만 그 남자가 된다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결국 이도 저도 아닌 20년의 삶을 살고 나서 내게 남은건 여기에도 저기에도 끼어들 수 없는 그런 박쥐 같은 모호함 뿐....
동생이 태어나고나서, 나는 비로소 진짜 "여자"가 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셈이었죠. 하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뭘 어떻게 해야 여자가 되는지, 여자다운게 도대체 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고작해야 TV나 영화 따위를 보면서 막연하게 여성성이란건 저런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 뿐.... 암만 노력해봐야 나는 반쪽짜리 여자였죠.
이제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 내게 주어진 그대로 살고 싶은 거에요. 하지만 어떻게 하면 여자가 될 수 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네요. 마치 쉬운 문제를 굳이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듯한 그런 기분도 들지만요...
아무튼, 정말 어려워요.
내게는 말이에요.
*
"........"
유성이의 긴 이야기가 끝이 나자, 나는 그녀를 위해 잠시 아무 말도 않고 조금 더 기다려주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조금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든지 털어놓고 싶었겠지만, 역설적으로 누구에게도 쉽게 얘기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가 모처럼 누군가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기로 마음 먹은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부 쏟아내기를 바랐다.
"그랬구나."
그녀가 더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
"뭐를요?"
"너에 대해서."
그제서야 나는 비로소, 유성이에게서 받았던 첫 느낌이 왜 그렇게 모호했는지, 왜 그녀를 무언가 하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기가 그토록 힘이 들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모호한 이중성 뒤에는 내가 생각도 못한 그녀만의 사연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왜 남자를 불편하다고 얘기했었는지와, 더불어 왜 그토록 서연이를 따르려고 했는지까지도.
"서연이는.... 네가 닮고 싶어했던 일종의 이상형, 같은 거였구나."
"그래요. 외모든 행동이든.... 서연 선배처럼 하면 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죠.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나와는 다른 사람이니까. 천상 여자로 태어난...."
"어쩌면 굳이 서연이를 닮으려고 하지 않아도 넌 좋은 여자애가 될 수 있을거야."
더 멋진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이 짧은 순간 그녀의 인생에 공감하고 답을 내려줄 수 있을까.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나면 그녀에게 더 좋은 말을 해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이런 얘기 남에게 이렇게까지 자세히 들려주는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어쩌면 처음일지도."
"고마워. 뭔가 영광스럽다."
"내가 솔직히 얘기해줬으니 이젠 내 차례에요. 선배도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뭔데?"
"서연 선배랑은 무슨 사이에요?"
난감하다. 설마하니 그 많은 질문들 중에 그걸 던질 줄은 몰랐다.
"으음... 그게...."
"난 정말 솔직하게 다 얘기한거에요. 선배도 내게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유성이의 표정을 볼 순 없었다. 하지만 굳이 눈을 마주치지 않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어떻게 이 아이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는가? 지극히 감성적인 이유이긴 했지만, 난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사귀는 사이는 아냐. 정말로."
"내가 보기엔... 서연 선배가 성진 선배한테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요."
"에이. 그것도 아냐. 예전에 내가 서연이 얼마나 쫓아다녔는데. 그 때 서연이가 나 완전 벌레보듯이 무시하고 그랬었어."
"예전이라면서요. 지금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 그건 그렇지만...."
"여자는 호감이 없는 남자에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아직 여자가 되지도 못 했으면서."
"라고 책에서 읽었거든요."
"뭐? 참나...."
"어서 말해보세요. 사귀는 사이가 아니면 뭐에요? 설마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하려는건 아니죠?"
아니라고 말을 하고 싶긴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내가 계곡에서 서연이와 섹스하는걸 유성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섹스파트너라고 말하기도 좀 그렇지 않나?
"사귀는건 아냐. 정말이야. 나한텐 여자친구도 따로 있는걸."
비록 섹스는 안해주는 여자친구지만....
"뭐라구요?"
유성이의 표정을 볼 순 없지만 몸에 닿는 반응으로 봐서 그녀가 놀랐다는게 느껴졌다. 이렇게 알몸을 부대끼고 있으니 왠지 서로의 감정까지 캐치가 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 여자친구 따로 있어."
"그런데... 왜... 서연 선배랑...."
섹스했어요? 라고 묻고 싶을 테지.
"그게 말야.... 꼭 사귀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섹스라는건 할 수 도 있는거거든. 아니, 뭐 그게 도덕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경우가 아주 가끔씩 생기긴 해."
""여성적인" 여자들은 사랑하기만 한다면 사귀지 않고도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 뭐 그런 말인가요?"
"뭐? 아냐! 그런건 절대 아냐!"
뭔가 나로 인해 순수한 어린아이의 윤리적 가치관이 망쳐질지도 모르겠다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초등학교 도덕 선생님들의 기분이 이럴까?
"그냥... 서연이랑 나 사이는 조금 특별해. 뭐랄까... 연인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몸을 섞을 수는 있는...."
"서연 선배가 그걸 원해요?"
이 질문에서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도저히 지금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기에 나는 있는 그대로 대답해주었다.
"응."
혹시나 내가 섣불리 뱉은 진실이 유성이로 하여금 이상형으로 생각해왔던 선배에 대한 환상을 부수는 행동이 되지는 않을까? 어쩌면 내가 괜한 소릴 한 건지도.
"궁금하네요."
"뭐가?"
"서연 선배 같은 여자가 왜 사귀지도 않는 남자와 몸을 섞고 싶어하는지 말이에요."
"글쎄... 서연이랑 친해지고 나면 다음에 네가 한번 물어보던지...."
"그래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어요."
"뭐? 아니야! 농담이야. 농담으로 한 말이었어."
옥신각신 이야기를 주고 받다보니 어느새 꽤 시간이 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구조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서연이가 지금쯤 우리에게 사고가 났다는걸 알긴 알아챘을까?
"타임 리와인더."
그 순간에 또 다시 타임 리와인더가 떠오른걸 보면 역시 나는 아직도 이 시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습관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내 스스로도 납득은 할 수 있다. 이건 그만큼 난감한 상황이니까.
"젠장."
하지만 나는 타임 리와인더를 지금은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유성이가 알지 못하게 속으로 혀를 찼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원래 물이 들어가서 고장이 나있던 시계였는데, 계곡에 빠져 떠내려오면서 아까 낮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물이 들어갔을거라 생각하니 시계의 상태가 궁금해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 그러고 보니 유성아... 내 윗도리는 어딨어? 상의 점퍼."
"그건 왜요? 저기 구석에 벗겨뒀는데."
"정말 미안한데... 한가지만 확인해주면 안될까? 내 점퍼 안주머니에 약간 무거운 초시계 같은게 하나 들어있는지 한번만 확인해줄래? 나한텐 너무 중요한 거라서... 혹시 떠내려오다가 없어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지금 상황에선 무척 귀찮은 부탁이겠지만 유성이는 의외로 군말없이 일어나 바위 구석에 박아두었던 내 상의 안쪽을 뒤져주었다. 몇번을 뒤적거리던 그녀가 곧 시계를 발견했는지 입을 열었다.
"있어요. 약간 투박한 느낌의 초시계."
"그, 그래. 이제 됐어. 다시 이리 와."
"핸드폰도 고장 났는데 이것도 아마 고장나지 않았을까요? 그리로 갖다 줄까요?"
"아... 아냐. 그냥 다시 넣어놔줘."
어차피 이 어둠 속에서는 시계의 상태를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다. 타임 리와인더에 야광 기능까지 있는건 아니니까. 물살에 쓸려오는 동안 혹시라도 분실했으면 어쩌나 했는데, 적어도 그게 아니란걸 알았으니 일단은 안심이다. 자세한 기능 문제는 이따가 천천히 혼자 살펴볼 수 밖에.... 우선 구조부터 되고 나면 말이다.
"으윽... 추, 추워...."
유성이가 나를 안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유성이의 품이 떨어지자 언제 조금 살만했었냐는 듯 다시 오한과 강추위가 몰려들었다. 아무리 초가을 날씨라도 저체온증에 걸리면 동사할 수도 있음을 나는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리광스럽게도, 얼른 유성이가 나를 다시 안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나는 너무도 당연하지만 여태껏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유성이 쪽을 바라보니 역시나 그녀의 실루엣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어둠 속이라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 역시도 떨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멍청한 새끼...."
내가 추우면 유성이도 추운거다. 아무리 나는 정신을 잃고 그녀는 멀쩡했었다곤 하지만, 물에 빠졌던 것도 마찬가지고, 지금 옷을 벗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 추운 것만 신경 쓰느라 그녀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신경을 써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최성진. 이런 병신같은 새끼. 선배가 되어가지고 온갖 도움만 받고.... 정작 이런 것 하나 신경을 안 쓰고 있었다니.
"유성아. 미안해... 너도 추웠지? 내가 신경을 못 쓰고 있었어. 빨리 이리와."
"선배.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잖아요. 지금 다 벗고 있는데 돌아보면 어떡해요?"
"걱정 마. 어두워서 하나도 안 보이니까. 그보다 빨리 이리와. 너도 지금 춥잖아."
유성이는 그녀답게 비교적 담담한 말투로 말했지만, 그녀의 알몸을 향해 내가 얼굴을 돌리고 있다는게 조금은 부끄러운게 틀림없었다. 타임 리와인더를 살펴보려갔던 그녀가 쭈뻣거리며 다시 돌아오자마자, 나는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뚱이를 억지로 움직여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누웠다.
그리고 아까처럼 유성이가 내 등 뒤에서 끌어안는 자세가 아닌, 나와 유성이가 서로 마주보고 끌어안을 수 있는 자세를 만들었다.
"선배... 이건 좀...."
"네가 아까 그랬잖아. 죽고 사는 문제 앞에서 쓸데없는 기분은 잠시 버리라고. 너도 똑같이 물에 들어갔다 나왔으니 지금 체온이 낮을거 아냐. 나만 따뜻하면 그만이야?"
"......"
자기가 했던 말이라서 차마 반박은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유성이가 머뭇거리는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에 어느 다 큰 여자가 남자랑 알몸으로 서로 마주 안는 상황에서 태연하겠는가?
아무리 유성이처럼 여성성을 모르고 살아온 아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서로 몸을 따듯하게 만들어줘야 사람들이 구조를 하러 올 때까지 살아있든말든 할 거 아냐? 빨리 이리와."
보통 여자라면 차라리 추워죽더라도 그 꼴만은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여자들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유성이는 유성인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내 품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유성이의 알몸을 품 안에 안고는, 양팔로 꽉 안아주었다. 보드라운 스무살 여자의 알몸이 내 알몸에 닿아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물론 부끄러움도 있기는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끌어안은 유성이의 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차가웠기에, 나는 내 무신경함을 더욱 질책하며 유성이를 한층 세게 끌어안아주었다.
"미안해. 너도 추웠을텐데...."
"아니에요."
"이렇게 있으니까 좀 나은 것 같아?"
"네."
"젖은 옷이라도 입는게 나았으려나?"
"안 돼요. 물에 젖은 옷은 열기를 더욱 뺏어갈 뿐이에요."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 알몸으로 마주보고 끌어안고 있자니, 정말 기분이 묘한 것도 사실이다.
"유성아. 너 그거 알아?"
"뭘요?"
"내가 안기라고 했을때 방금 네가 부끄러워했잖아.... 그건 네가 여자애라는 확실한 증거야. 어쩌면 네가 굳이 여자가 되는 방법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너는 이미 한 명의 어엿한 여자애일 수도 있어. 단지 네가 그걸 아직 못 느끼고 있을 뿐...."
"......."
"그,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야. 너무 불편하게 있지 말고 편하게 있어. 지금은 몸을 덥히는게 중요하니까."
하지만 편하게 있으라고 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는걸 나도 알고 있었다. 내 가슴에 닿는 유성이의 가슴 감촉이 느껴졌다. 스무살 여자애라고 해서 뭔가 나와는 나이 차이가 한참 날 것 같은 어린애처럼 그동안 생각했지만, 따지고 보면 고작 열 살도 차이나지 않는다.
게다가 스무 살이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이미 그녀의 몸은 완연한 성인이라는 사실이 새삼 알몸을 통해 생생하게 느껴져왔다. 이 극한의 위험 상황에서 여체의 굴곡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면 누가 보기엔 정말 한심하게 여기겠지만, 그 누군가도 아마 남자라면 지금의 내 심정을 이해할 순 있을 것이다.
"......."
약간 불편한지 유성이가 몸을 뒤척거리자, 나는 비록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유성이의 가슴 끝자락에 달린 젖꼭지의 감촉이 내 가슴을 살짝 긁은 것이었다. 유두가 내 가슴을 스쳤다는걸 유성이도 느낀 것이 틀림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가 약간 당황하고 있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미, 미안해요."
그녀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자, 왠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통증으로 가득했던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게 느껴졌다. 그 야릇한 기분이란, 분명 지금의 이 상황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가 없는 감각이었다.
"미, 미쳤냐, 최성진... 지금 상황에서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거야.... 그냥 몸을 데워주기 위해서 알몸으로 안고 있는 것 뿐이야. 진정해...."
하지만 내가 속으로 내 자신에게 암만 진정하라고 사인을 보낸다 한들, 피부 대 피부로 생생하게 느껴져오는 알몸 곳곳의 감촉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유두가 가슴을 긁고 나자 당황한 유성이가 내 품 안에서 미세하게 몸을 움찔거렸지만 그 작은 움직임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더욱 많은 스킨십을 유발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꼼지락거릴 때마다 서로의 가슴이 맞닿았고, 그럴 때마다 유성이의 가슴은 말캉거리며 내 가슴에 짓눌려 뭉개지곤 했다. 게다가 그럴 때마다 하체에서 뭔가 찌릿찌릿한 감각이 타고 올라오는게 느껴졌다. 지금 상황에서 도저히 인정하긴 싫지만, 그건 다른 것도 아닌 "흥분"이라는 이름의 감각이었다.
"안돼. 안돼. 다른 때도 아니도 지금 같을 때에 흥분이라니. 아무리 남자라지만 이건 아냐... 진정해라, 진정."
하지만 말초신경이란 놈은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서,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토록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지만 이미 내 아랫도리에서는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몸이 만신창이가 된 와중에도 자지는 살아있다는 건가? 이게 정말 자랑스러워 해야 할 일인지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유, 유성아... 미안."
"......."
정말 얄궂게도 하필 발기된 자지는 위치도 정확하게 유성이의 다리 사이 한가운데를 향해서 벌떡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밀착해서 끌어안고 있는 상태였기에, 한쪽 다리에 귀두가 가로막히자 어쩔 수 없이 유성이는 다리를 살짝 들었고, 그 틈새를 파고 들어간 자지는 정확하게 그녀의 두 다리 사이 안쪽에 안착하고 말았다. 즉, 유성이의 가장 은밀한 부위 바로 아래쪽에 아슬아슬하게 내 자지가 들어서버린 것이다.
"선배. 흥분했어요?"
다행히 유성이도 역시나 알건 아는지, 사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 물어온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오니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으응."
"조금 민망하긴 하네요."
유성이로서는 최대한 지금의 상황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들리게 얘기하려고 시도한 거겠지만, 나는 물론이고 유성이 본인조차도 지금 이게 "조금 민망한" 상황 정도가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 왕성한 내 좆대가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우뚝하니 고개를 쳐들은 내 자지는 유성이의 가랑이 안쪽 깊은 곳까지 가서 밀착해버렸고, 좆기둥 표면으로 까슬까슬한 감촉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유성이의 "그 곳"에 난 털들이 내 자지를 긁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보지털이 느껴지는 걸로 봐서, 조금만 더 자지가 위로 올라가면 아마 구멍에까지 닿을 것이었다. 나는 그 사태만큼은 피하자고 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었지만, 빌어먹을 말초 신경은 그렇게 생각할수록 오히려 더 짜릿한 자극을 받는지 자지는 아직까지도 조금씩 발기하고 있었다.
"미, 미안해... 남자들은 가끔 이러거든."
"그런건 나도 알아요. 어쩔 수 없는거 아니까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우습게도 스무살 여자애에게 이런 식의 위로를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선배는 내가 여자로 보이나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신경을 다른데로 돌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환영이었기에 나는 잽싸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럼 네가 남자애겠어? 너 여자애 맞아. 그것도 상당히 괜찮은...."
어영부영 말을 하는 내 입가에서 뿜어져 나온 숨이 어쩐지 뜨뜻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가운 한기에 덜덜 떨고 있었는데 말이다... 유성이의 입에서 나온 숨결 또한 내 볼에 와서 닿는게 느껴졌다.
그 숨결은 비록 나처럼 뜨겁게 느껴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서로의 숨결이 닿는다는 것이 그 때의 나에겐 분명 속일 수 없는 하나의 자극이었다.
"유성아.... 우리 키스할래?"
그 순간의 나는 아마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하긴 그런 상황에서 누군들 제정신일 수 있을까.
다만 남자는 이런 순간에서 두 부류로 나뉘게 된다. 자제를 할 수 있는 놈과 그렇지 못한 놈으로.
유성이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후자였나보다.
"웁..."
나는 유성이의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그 아이의 입술을 덮었다. 정말 막되먹은 행동인건 알고 있었지만 그 때의 나에겐 "참기 위해선 키스라도 하는 수 밖에 없어!" 따위의 얄팍한 자기 합리화가 있었나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내 입술이 유성이의 입술을 덮고, 내 혀가 유성이의 혀 끝에 가서 닿자마자, 다친 몸에서 느껴지던 통증과 이 힘든 상황이 주는 불안함 등등에 아슬아슬하게 가려져왔던 성적인 흥분이 마치 댐이 터지듯 폭발해버렸다. 나는 스무살 후배를 상대로, 그것도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로 행하는 키스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칠게 유성이의 입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생각보다 유성이의 입 안은 너무나도 보드라웠고, 따뜻했다. 마치 서연이나 현주처럼 말이다.
갑작스럽게 내가 밀어붙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유성이는 키스에 익숙치 않는게 틀림 없었다. 애매한 태도이긴 했지만 입을 벌려주는 것을 봐서는 완강한 거부의 표현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키스라는걸 몇 번 해보지 않은 듯 어디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스스로 리드하며 유성이의 혀를 내 혀로 옭아매고는 사정없이 유린했고, 조금 뒤에는 아래 위의 입술까지 정신없이 빨아주었다. 조금은 어설프지만 지극히 동물적인 키스가 야밤의 계곡 한복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선배! 성진 선배! 유성아!"
솔직히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때의 타이밍은 정말이지 신의 악취미처럼 느껴졌었다.
하필 그 타이밍에 구조대의 목소리가 들려올 줄은....
아득하게 흘러가는 계곡의 물살 소리를 타고 왠지 서연이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정신없이 키스를 하던 나와 유성이는 황급히 놀라 서로에게서 입을 뗐다.
우리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끌어안은 몸은 그대로였는데, 나는 그제서야 유성이의 팔이 내 등을 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는 우리.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성이보다는 내가 먼저 입을 여는 것이 이 상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성아... 미안해. 많이 놀랐지?"
"조금요."
유성이는 이런 상황에서도 유성이답게 담담한 말투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유성이의 기분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그 모습이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12장
자각몽... 루시드 드림이라고 하던가?
꿈 속에서의 나는 여전히 눈을 뜨고 있었지만,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망망대해를 마음껏 유영하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비록 꿈이었지만 느낌이 너무도 생생했다.
손 끝에 닿는 감촉 하나하나까지 또렷하다. 상의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자 그곳에는 여전히 투박하고 낡은 감촉의 은백색 초시계가 들어있었다. 그것을 손에 움켜쥐었다.
꿈 속에서 나는 또 한번의 시간 여행을 했다. 하지만 여느 때와 같은 과거로의 시간 되감기는 아니었다. 나는 미래로 향했다. 굳이 미래를 보겠다기보단, 먼 훗날 나의 모습이 어떤지 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시간을 헤집듯이 위를 향해 마구 헤엄쳐 올라가던 도중 나는 미래의 나를 볼 수 있었다. 가까이 가보고 싶었지만 마치 액자 속을 들여다보듯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미래의 나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두 여인과 함께 있었는데,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느낌으로 곧 알 수 있었다.
내 아내와 딸이구나.
문득 얼굴을 보고 싶었다. 미래의 아내와 딸의 얼굴을 알게 된다면 내 삶에 혹시 변화가 올까?
하긴 그걸 누가 알 수 있을까. 운명이란 말처럼 부질 없는 것도 없는걸.
만약 운명이란게 내게 있었다면, 과거를 조금씩 바꾸어 올 때마다 그 운명도 조금씩 바뀌어 왔을테니.
"이름이 뭐니?"
미래의 내 딸이 어느새 나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나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단지 어린애의 품 답지 않게 매우 아늑하고 포근하다는 느낌만 들었다.
내가 아직 어리기 때문일까?
"왜 울고 있어?"
볼 수는 없었지만 아이가 울고 있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내 딸이니까 달래줘야 했다.
안간힘을 써서 뒤를 돌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조금씩 내 몸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이제 조금만 더 애를 쓰면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머리칼이 보이고, 옆얼굴이 보인다.
"어?"
그리고 아이의 얼굴을 마주 보는 순간, 나는 그만 잠에서 깨었다.
잠에서 깨는 순간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얼굴인데,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던 것 같다.
*
"선배."
불어오는 찬바람에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아무리 더위가 꺾였기로소니 아직 9월 밖에 안되는데... 왜 이렇게 추운걸까?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떨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정신이 들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등 뒤에서 줄곧 끌어안고 있었다는 사실도.
"으윽..."
"정신 들어요?"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유성이....?"
"다행이네요. 살아있어서."
기억을 더듬어 정신을 잃기 전을 떠올려 보았다. 물에 빠진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헤엄을 쳐야한다는 생각만 하다가 그렇게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살아있는걸 보니 어떻게든 물 밖으로 나온 것 같긴 하다.
"어, 어떻게 된거야....?"
"물살에 쓸려오면서 헤엄을 치다보니까 어떻게 운이 좋았는지... 여길 발견하긴 했어요."
유성이가 정신을 잃은 나를 데리고 헤엄을 쳐서 물 바깥으로 나왔다는건가? 정말 대단한 애구나...
문득 의식이 끊기기 전에 봤었던 유성이의 무서운 모습까지 덩달아 떠올랐다.
"여, 여기가 어딘데?"
"그게...."
애매하게 말 끝을 흐리는 유성이. 나는 애써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려보려고 했다. 하지만 신경을 관통하는 듯한 무지막지한 통증을 느끼고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채 다시 돌바닥 위에 털썩 쓰러졌다.
"선배! 움직이면 안 돼요."
"아윽...."
"많이 다치셨어요. 그냥 가만히 누워있어요."
"왜 이렇게 아프지...?"
"선배 몸을 대충 봤는데... 물에 떨어질때 수면에 부딪히면서 등이랑 발목을 다친 것 같아요. 발목이야 그렇다쳐도 등이 다친건 잘못 조치했다간 평생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여자애 답지 않게 어떻게 겉으로 보고 그런 것까지 다 알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부분을 채 궁금해하기도 전에 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고 말았다. 내 몸이.... 지금 내 모습이....
"자, 잠깐. 내가 왜 알몸이야?"
몸만 정상적으로 움직였더라도 나는 즉시 몸을 일으켜 몸을 가릴 것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기는커녕 기겁하는 시늉을 하는 것조차 힘들어 나는 그저 얼빠진 표정으로 유성이에게 물을 뿐이었다.
"선배, 지금 춥죠?"
"으응. 무척...."
유성이의 말마따나 뼛속까지 시린 오한이 으슬으슬 몰려들고 있었다. 여름이 지나갈 무렵이라곤 해도 분명 이렇게까지 추울 시기는 아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추울까?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데 거기다가 오한까지 몰려드니 움직일 수가 없는 탓에 더 춥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치 한겨울 야외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지금 상황에서 몸을 가릴 옷가지가 더욱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물론 추위도 추위였지만 부끄러움도 한 몫 단단히 했다. 나는 지금 스무살짜리 여자애 앞에서 팬티 한장 걸치지 않은 완전한 알몸으로 누워있었던 것이었다. 물에 쓸려오면서 옷이 찢겨나가기라도 한 건가? 그렇다고 팬티까지 다 찢겨나갈 리가 없는데....
"가, 갑자기 왜 이렇게 춥지? 유성아, 내 옷은 어디 있어?"
얼마나 추웠는지 얼굴이 새파래지며 이빨까지 딱딱 떨려왔다. 부끄러움과 추위라는 두 가지 이유가 공존하고 있었지만 곧이어 상상을 초월하는 오한 앞에서 부끄러움은 잠시 잊혀져버렸다. 지금은 오직 조금이라도 몸을 따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간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안해요, 선배. 선배 옷은 내가 잠시 벗겨뒀어요. 차가운 물에 빠진 경우엔 익사보다 체온 저하로 인해 죽는 경우가 더 많아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물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저체온증이 온 거에요. 저체온증 환자는 체온 손실을 막고 몸을 데워줘야 하는데.... 물에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체온을 빼앗기니까.... 어쩔 수 없이...."
술술 설명하던 유성이었지만 마지막 부분에선 말꼬리를 조금 흐린다. 아무렴 그 애 스스로도 다 큰 남자의 옷을 팬티까지 홀랑 벗겨버린 행동에 대해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부끄러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기에도 벅찬 상태였으므로 그저 오한에 떨며 괴로워 할 뿐이었다.
"으윽... 그, 그럼 어쩌지... 너무 추운데..."
"많이 추워요? 미안해요... 라이터라도 갖고 있을걸... 선배 혼자 두고 주변을 둘러보러 갈 수도 없고 해서...."
"아니야.... 네가 나 데리고 헤엄쳐와서 살아난 건데.... 으큭...."
유성이가 나보다 어리기에 나는 그녀를 되도록 안심시켜 주려고 괜찮은 척을 해보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무리였다. 저체온증 상태의 오한이 뼛속까지 스며들자 도저히 가만히 있기 힘들 정도로 몸이 으스스 떨렸다. 그렇다고 해도 몸을 일으킬 수도 없는 상태였기에 상황은 최악이나 다름 없었다.
"선배."
"으, 응."
"뒤 돌아보지 마세요."
"뭐, 뭐라구?"
유성이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뒤를 돌아볼 힘조차 없었다. 뒤에서 뭔가가 스륵 거리며 바닥에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몇 차례 그 소리가 반복되더니, 이내 유성이가 나를 목 뒤에서 감싸듯이 껴안았다. 그 순간, 나는 그 극한의 몸상태에도 불구하고 놀라서 그만 펄쩍 뛸 뻔 했다.
등에 와서 닿는 유성이의 몸 느낌이 나와 같은 맨 살결의 느낌이었다. 내 맨살에 유성이의 맨살이 와서 닿은 것이었다. 느낌으로 보건데 온 몸 전체가 그런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방금 전에 등 뒤에서 바닥에 툭툭 떨어지던 것이 유성이의 옷들이었단걸 알 수 있었다. 자기 스스로 옷을 벗어버린 것이다.
"유, 유성아. 뭐 하는 거야?"
너무 놀랍다보니 놀라는 시늉을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유성이의 음색은 오히려 나보다 담담했다.
"가만 있어요."
"왜, 왜 이러는...."
"지금은 이게 체온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라이터 같은 도구도 없고.... 부끄럽지만 산 속에서 불 피우는 방법 같은건 잘 몰라요. 그러니 사람들이 구조하러 올 때까진 이렇게 몸을 데우고 있을 수 밖에 없어요... 몸끼리 붙어 있으면 체온을 높이는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고 배웠어요.... 이해해주세요."
솔직히 지금 이 상황이 유성이가 내게 이해해달라고 말할 만한 경우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건 내가 이해해 달라고 해야 할 경우가 아닌가? 유성이가 하는 말이 맞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다 큰 남녀가 서로 알몸인 채로 껴안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선뜻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살고 죽는 문제 앞에서 쓸데없는 기분 같은건 잠시 버리세요. 지금은 이 방법 밖에 없잖아요. 선배 혼자 두고 사람들을 찾으러 갈 순 없으니까요. 만약 저 혼자 간다고 해도 이렇게 어두워서는 산 속에서 분명 길을 잃을 거에요. 그렇게 되면 문제가 더 커져요. 열을 보호하면서 여기서 구조를 기다리는게 최선이에요. 이 상황에서는요...."
"으, 응...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긴 해..."
어쩐지 겨우 스무살 난 여자애인 유성이가 지금은 나보다 더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는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런 의외의 모습들을 드문드문 보여주는 걸까?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핸드폰은.... 고장 났겠지?"
"당연하죠. 선배 거랑 제 거 둘다 확인해봤어요. 서연 언니랑 연락만 됐어도 우리가 지금 이 고생 안하고 있겠죠."
연락 수단 고장에, 나는 움직일 수 없고, 주변이 어두워서 앞길도 안보이니 유성이가 함부로 자리를 뜰 수도 없다. 이거야말로 정말 진퇴양난, 최악의 상황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과연 사람들이 구조를 하러 오긴 올까?
그래도 이 최악의 상황에서 불행 중 다행인게 딱 하나 있다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만약 유성이 없이 나 혼자 계곡에 떨어졌다면 십중십 익사 혹은 저체온증으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의식을 잃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해보니 나를 끌고 물 밖까지 헤엄을 쳐온 것도 그렇고, 체온을 보호해준 것도 그렇고, 어느 모로 보나 유성이는 내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유성아.. 고마워. 니가 아니었으면 난 정말 죽었겠다.."
"그런 말은 나중에 해요. 선배도 날 구하려다 이렇게 된 거 잖아요."
문득 지환이 그 쌍놈의 새끼가 생각이 났다.
그러고보니 그 놈의 발길질로부터 유성이를 구하려다가 같이 떨어지게 되었지.... 이거 완전 살인미수 아냐?
"그 새끼... 돌아가면 가만 안 둘거야."
"그것도 살고 난 다음이죠. 일단 구조 되는 것부터 생각하기로 해요."
"그래... 알겠어."
한심하게도 나는 나보다 어린 유성이의 말 한마디에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었다. 도저히 그 나이 또래로는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와 연륜이 유성이에게서 느껴졌다.
게다가 유성이의 말대로 이렇게 알몸을 서로 부대끼고 있으니까 체온 회복에 도움이 되긴 되는지, 비록 아직 춥기는 했지만 아까처럼 죽을 것 같이 몸이 으슬으슬 떨리지는 않았다.
"유성아. 오, 옷 벗고 있는거... 괜찮아?"
"어쩔 수 없잖아요. 내 옷도 다 젖었으니까.... 젖은 옷 입고 껴안고 있으면 선배 몸은 더 차가워질걸요."
여느 때처럼 담담하게 말을 하긴 하지만 나는 유성이의 말 속에 미세한 부끄러움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유성이의 표정을 보지 않는 것이 지금 그 아이에 대한 예의일 것 같았다. 그저 그렇게 알몸의 유성이가, 알몸의 나를 등 뒤에서 껴안고 있는 상태로 가만히 누워있기만 했다.
어느 정도 체온이 돌아오고 나니 이성적인 생각도 하나둘씩 가능해지는 것 같았다. 나도 불편하지만, 유성이도 지금 이 모습이 많이 불편할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 있어야 한다면 편하게는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혹시 넌 감이 오니?"
"대충 보니까.... 바위 틈바구니에 계곡 물살이 밀어닥쳐서 자연적으로 움푹 패인 곳 같아요. 우린 여전히 계곡 한가운데에 있는 거나 다름 없어요. 날이 밝으면 주변 지형을 자세히 볼 수 있겠지만 그 전 까지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치켜떠 간신히 고개만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치 앞도 안 보일만큼 사방이 어두웠지만 바위 면의 형태나 근처 지형으로 보건대, 계곡 급류에 휩쓸려 오다가 운 좋게도 암벽이 패인 곳을 유성이가 놓치지 않고 발견한 것 같았다.
바다로 치면 해식동굴 같은 지형이랄까.... 파도에 의한 침식작용에 동굴이 생기는 것처럼 이곳도 원래는 바위로 둘러쌓인 곳이 계곡 물살에 의해 한쪽 면이 움푹 패임으로써 이렇게 사람 두 명이 간신히 누울만한 자리가 만들어진 장소인 것 같았다. 어찌보면 물살에 휩쓸려 오는 그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이런 공간을 발견한 것 자체가 천운이라고 보아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계곡 물길의 바깥으로 벗어나지 못한 장소에 위치해 있다는 뜻이었기에, 분명 목숨을 건진 것에 감사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그리 좋게는 여겨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곳은 물장구나 치고 놀 수 있는 수준의 얕은 수심지역도 아닌 것 같았기에 섣불리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들어갈 수 있다고 쳐도 이 몸으로는 헤엄치는게 무리였겠지만 말이다.
"아무리 봐도 최악이네... 우리 이제 어쩌냐?"
"걱정 말고 좀 기다려보죠. 분명 사람들이 구조하러 올 거에요."
"그럴까... 엠티 자리니까 다들 논다고 정신 없어서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닐걸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서연 선배는 성진 선배가 안 보이면 분명 걱정할 거에요."
"서연이가...? 그럴까?"
"그럴 거에요."
"그건 그렇고... 저체온증에 걸릴 정도라면 내가 물 속에서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거야?"
"나도 잘은 몰라요. 선배가 절 감싸안고 물에 빠진 덕분에.... 저는 의식은 있었거든요. 그냥 무작정 헤엄쳤어요. 물살이 너무 세서 올라올 공간이 보이자마자 올라왔구요."
"그래... 잘했어. 아무튼 정말 고맙다."
체온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하니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해지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춥긴 했지만 불평을 할 순 없었다. 유성이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걸 알기 때문이었다. 서로 알몸이 맞닿아있는 민망한 상황에서 분위기가 더 어색해지지 않기 위해 나는 최대한 다양한 대화를 시도했다. 비록 입을 열기도 힘겨웠지만 말이다.
"근데... 그렇게 오래 물에 빠져있었는데 나 용케도 익사하지 않았네."
"물을 너무 많이 마셔서 위험하긴 했어요. 아까는 숨을 안 쉬셔서... 좀 걱정 했어요."
"뭐? 그런데 어떻게...."
그 순간 혹시? 하는 생각이 머릿 속을 스쳤다. 혹시? 에 이어 설마?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을 이 때 실감했다.
"사실 인공호흡을 좀... 하긴 했어요."
"......."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유성이가 내 목숨을 구해준 마당에 내가 정신을 잃고 있었을 동안 인공호흡을 하거나 옷을 벗겼다고 해서 내가 불평을 할 순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아무 것도 모르는 사이에 옷도 벗겨지고 엄연히 스무살 성인인 여자애가 내 입속에 숨까지 불어넣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긴 했다.
"그, 그랬어?"
"........"
이번엔 유성이가 침묵한다. 비록 나는 유성이의 표정을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알몸이 이렇게 맞닿아있다 보니 왠지 유성이가 지금 그녀 답지 않게 민망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유성이를 그리 잘 안다고는 할 수 없기에 "그녀 답다"라는 말을 쓰는게 이상하기는 했지만...
"기왕 하는거 내가 좀 잘 생겼으면 너도 좋았을 텐데. 못 생긴 얼굴에 억지로 입 맞추려니까 힘들었지?"
"지금 농담이 나와요?"
하지만 농담은 확실히 분위기를 풀어주는데에는 효과가 있는지, 유성이도 침묵을 깨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농담을 할 정도면 그래도 아까보단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뜻인걸 유성이도 알기에 그녀도 말과는 달리 조금 안심하는 것 같았다.
"미안해, 유성아. 괜히 나 때문에 이런데 휘말리고는."
"그런 말 말라고 했잖아요. 따지고보면 서로 구해준거에요. 그냥 단지...."
"단지 뭐?"
"그냥 단지.... 재수가 드럽게 없었을 뿐이에요."
신기하게도 유성이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 속은 과거에 스쳐지나갔던 기억 속의 한 장면을 용케도 끄집어내고 있었다. 강변도로에서 들었던 누군가의 한 마디가 하필이면 그 때 귓가에 겹쳐 들렸던 것이다.
"젠장... 재수 드럽게 없네."
그랬다. 나는 유성이의 이 거칠고 투박한 어감을 분명 예전에 한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학교에서 이 아이를 만났을 때보다 더 이전에.
"유성아. 솔직히 말해봐. 우리 마주친 적 있지? 강변도로에서."
"......."
다시 침묵하는 유성이를 보고, 나는 그제서야 그녀가 여태껏 나를 알아보았음에도 일부러 모른척 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가만히 기다리자, 마지못해 유성이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을 한다.
"풋... 킥킥."
"왜 웃으세요?"
"아니, 그냥. 나 그 때 너 처음 봤을 때,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싶어서 다시 만나면 혼쭐을 내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니까 상황이 웃기잖아."
"그 아저씨가 학교 선배일줄은 나도 몰랐죠."
"이게 어디서 아저씨래. 넌 언제부터 알아본거야?"
"아까 계곡에서 선배가 강변도로 얘기했을 때부터요."
"큭큭...."
왠지 그 아픈 와중에도 웃음이 튀어나왔다. 세상 일은 참 신기한가보다. 만나면 혼구녕을 내주겠다고 다짐했던 그 싹수 없는 여자애가 설마 내 생명의 은인이 될 줄이야. 너무도 뜻밖의 상황이라 평소였다면 입을 벌리고 놀랐겠지만 지금은 왠지 그게 유쾌한 재미로 느껴지는걸 보니 확실히 내가 지금 정상은 아닌가보다.
"야, 너 그 때 왜 나한테 뻐큐날렸냐?"
"그냥요. 쪽팔리잖아요."
"뭐가?"
"자빠진 것도 쪽팔려 죽겠는데 자꾸 웬 아저씨가 정신사납게 구니까."
"뭐? 하하하하."
이제보니 유성이는 꽤 재미있는 아이인 것 같다. 문득 이 아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별 탈 없이 구조되고나면 유성이랑도 좀 친해져보려고 노력해야겠다.
"근데 유성아. 아까 말이야... 내가 지환이랑 싸울 때. 너 왠지 다 알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던데... 어떻게 된거야?"
내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던 유성이가 곧 순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저도 봤어요."
"뭘?"
"선배가 낮에 계곡에서 서연 선배랑... 그...."
"계곡"과 "서연 선배"까지만 나와도 나는 유성이가 뭘 봤다는 것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행위가 생략되었지만 왠지 유성이는 거칠 때의 모습과는 다르게 "섹스"라는 말을 선뜻 하기 힘든 성격인 것 같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이는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해했음을 자기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사실은 서연 선배를 계속 보고 있었는데, 서연 선배가 성진 선배랑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길래... 호기심에 따라가봤어요. 선배랑 서연 선배가 그거 하는걸 보고, 저는 놀라서 그냥 보고만 있었어요.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하필 그 때 근처에 숨어서 엿보고 있는 지환 선배... 아니, 그 새끼를 보게 된거에요."
"지환이를....? 그랬구나."
결국 서연이와 내가 야외에서 그 짓을 하는걸 무려 두 명에게나 들키고 말았다는 얘기였다. 나는 내 부주의를 다시 한번 마음 속으로 질책했다. 나는 그렇다쳐도 서연이는 그런 모습이 밝혀지면 나보다 훨씬 더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다. 앞으로 아무리 성욕이 불타올라도 때와 장소는 좀 구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새끼가 사진을 찍는걸 멀리서 봤어요. 다행히 그 놈은 저를 못 봤지만요. 그 사진들로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성진 선배나 서연 선배한테 안 좋은 짓을 하려고 한다는건 쉽게 알 수 있었죠. 그래서 계속 세 사람을 유심히 보고 있었던 거에요. 언젠간 마주칠 테니까. 담력 훈련에서도 뒤에서 가만히 보고만 있었는데, 그 지환이라는 새끼가 성진 선배가 나오자마자 따라 붙는걸 보고 직감이 왔어요.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나도 가겠다고 따라 붙은거였구요...."
"그랬구나... 이제 대충 이해가 가."
유성이의 설명을 들으니 왜 지환이에 이어 유성이까지 나를 따라가겠다고 나섰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유성이에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고마운 마음이 울컥 솟는 것을 느꼈다.
"넌 나를 걱정한 거였구나."
"그냥... 나한테 먼저 말 걸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요. 그리고 서연 선배가 잘못 될까봐 걱정했던 이유도 있고..."
"그래. 그래도 고마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보니 체온도 조금 올라가고 긴장도 풀리는 것 같았다. 왠지 나는 이 와중에도 기분이 좀 좋아졌다. 이대로 내일 날이 밝을 때까지 있어도 얼어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노곤노곤 졸음이 쏟아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꾸벅꾸벅 잠에 빠지려고 하자, 유성이가 내 등을 스파이크 하듯이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화들짝 놀라서 내가 깨어나자 유성이가 경고를 주었다.
"절대 자면 안 돼요. 잠시 체온이 올라갔다고 해서 이대로 잠들면 진짜 죽을 수도 있다구요."
"으, 응. 그렇다고 다친데를 때리면 어떡해... 아파 죽겠는데."
"그건 미안해요. 저도 좀 놀라서."
"근데 잠이 오긴 온다."
"참아요. 아니면 계속 얘기를 해봐요. 뭐라도 좋으니까."
"음... 얘기..."
무슨 얘기를 하는게 좋을까? 사실 유성이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거 나는 사람들이 구조하러 올 때까지 유성이에게 묻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물어보기로 했다.
"그럼 내가 뭐 물어보면 다 대답해줄래?"
"뭔데요? 들어보고요."
"음... 일단은 네가 서연이를 왜 그렇게 따르는지가 궁금해."
"제가 서연 선배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어요?"
"아니었어? 서연이 말을 잘 듣는 것도 그렇고, 방금 이야기할 때도 계속 서연이 걱정을 했잖아. 내 눈엔 그렇게 보였는데."
등 뒤에서 알몸으로 나를 껴안은 유성이의 감촉이 문득 느껴지자, 나는 순간 말하다 말고 척추가 찌릿하게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등의 통증 때문은 아니었다. 내 느낌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 방금 유성이의 말캉한 가슴이 내 등을 쓸고 지나갔던 것이다. 감촉으로 보건대 브래지어조차 하고 있지 않은게 틀림 없었다.
이 와중에도 목구멍에 침이 꼴딱 넘어간다. 유성이는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침묵을 했다. 나는 그 침묵의 의미가 무시하는 것이 아닌,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란걸 느낄 수 있었다. 알몸을 맞대고 있으니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
"서연 선배는... 굳이 비유하자면, 롤 모델 같은 거에요."
"롤 모델?"
"우상이라는 단어는 좀 그렇고.... 그냥,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같은 느낌? 하여튼, 서연 선배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게 있었어요."
사실 서연이에 비하면 객관적으로 한 끗발 밀리긴 하지만 유성이도 결코 어디가서 기죽을 얼굴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몸매가 어디 빠지거나 빈약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유성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왜? 너도 그렇게 모자란 외모는 아닌 것 같은데."
"굳이 외모가 아니더라도, 뭐랄까... 그 선배에게서는 여자라는 냄새가 나요. 여성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건 확실히 나한테는 없는 거죠."
"여성적인 것만이 매력은 아니잖아. 요새는 중성적인 매력도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남한테서 인기를 얻고 싶다는건 아니에요. 나는요... 어렸을 때부터 "여자다운 것"을 피해서 살았어요. 난 여자애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늘 남자애가 되고 싶었고, 또 그렇게 되야 하는게 내 운명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단걸 중학생이 되서야 깨달았죠."
유성이에게는 남 모르는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하지만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괜히 어떤 상처를 건드리는건 아닌지 신경 쓰였던 것이다.
"듣고 싶어요?"
그래서 유성이가 먼저 그렇게 말해주었을 때, 나는 고마우면서도 놀라웠다.
유성이를 그리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늘어놓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서로를 구했다는 그 특별한 유대감이 그 순간의 우리를 좀 더 가깝게 만들어 놓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게 결코 아무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님을 나는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응."
정확하게 내가 뭘 듣고 싶은 건진 콕 집어서 얘기하기가 힘들었지만, 유성이도 나도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건지는 서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내 원래 이름은 유정이었어요. 한유정."
이윽고 유성이의 입이 열렸고, 그녀가 과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남자애가 태어나면 한유성, 여자애가 태어나면 한유정.
내가 어머니의 뱃 속에 있을 때부터 아버지는 내 이름을 그렇게 지어놓으셨대요.
어머니가 나를 낳으셨을 때, 아버지는 내게 유정이라는 이름을 주고 싶어했죠.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의견을 반대했어요. 어머니는 나를 남자애로 키우고 싶어했죠. 내가 여자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우리 집안은 일본에서 천 년을 넘게 이어내려온 고무술(古武術)의 맥을 잇는 무예가들의 유파 가문이에요.
이제는 이름만 간신히 남아서 혈통을 이어가고 있는 "무신류" 라는 무예를 숭상하는 가문이죠.
그 중에서도 어머니는 원류의 혈통을 잇는 뼈대 있는 정통가문의 여인이었어요. 어머니는 일본인이셨죠.
어머니의 아버지, 즉 우리 외할아버님이 19대 당주님이셨거든요.
하지만 당주이셨던 할아버님은 딸인 어머니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물려주지 않았어요. 너무도 보수적인 유파의 관습 때문도 있었지만 여인의 몸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넘지 못한 어머님의 무예 실력 때문도 있었지요.
결국 할아버님은 한국 유파 출신의 실력자 한 명을 데릴사위로 맞이해서 어머님과 결혼을 시켰죠.
어머님에게 후계자 자리를 줄 수가 없었으니, 당신께서 눈여겨 보셨던 한국의 인재와 어머님을 짝 지은 후 그 남자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준 거에요. 그래요, 그게 우리 아버지였어요.
그 숱한 일본 본토의 실력자들을 두고 할아버님이 왜 굳이 한국의 실력자를 후계자로 맞이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몰라요. 아무도 그 이유를 내게 설명해주진 않았죠.
아무튼 제 부모님은 그렇게 결혼하셨지만, 그 때부터 어머니는 줄곧 "여인의 몸" 이었기에 후계를 계승할 수 없었다는 여인으로서의 수치심 비슷한 걸 떠안고 사셨어요. 내가 태어나고 나서도 그건 변함이 없었죠.
어머님은 비록 여인의 몸이었지만 어려서부터 누구보다도 무예에 충실한 삶을 살아오셨대요. 하지만 정말 특출한 재능을 갖지 않은 이상 여인의 몸으로 남성의 벽을 뛰어넘는다는건 쉽지 않은 일이죠. 안타깝게도 어머니에게 그런 재능은 없었어요.
스스로 직접 후계를 계승하지 못했다는 점을 늘 부끄럽게 여겨왔던 어머니는 적어도 당신의 자식만큼은 꼭 후계자로 만들어주겠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죠. 그리고 내가 태어났어요. 어머니의 바람과는 다르게 나는 여자애의 몸으로 태어나고 말았어요. 어머니에겐 그게 더없는 비극이었겠죠.
그 때부터 어머니는 이상한 집착에 빠지셨어요. 나를 남자애로 만들고 싶어했죠. 내 또래 여자애들이라면 응당 할 수 있는 것들을 나는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하고 자랐어요. 걸음마를 떼고나서부터 무도복을 입었으니까요.
결국 어머니는 나에게 유정이라는 이름 대신 "유성"이라는 이름을 주었어요.
이상하게 그 후로도 몇 번이고 아들을 낳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셨지만 한번도 회임을 하실 순 없었대요.
상황이 그렇게 되니 어머니는 어머니가 못 이루었던 여성 후계자의 꿈을 자식인 제가 대신 이루어주길 바라셨나봐요. 나를 정말 혹독하게 수련시켰지요. 하지만 내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어머니는 점점 내게 실망하기 시작하셨어요. 나에게도 역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남성을 뛰어넘을 만한 재능이 있지는 않았거든요.
내가 무예를 배워서 딱 하나 좋은 점이 있다면 학교에서는 누구도 나를 괴롭힐 수 없었다는 거에요. 여자애들은 물론이고 웬만한 남자애들도 내 상대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평범한 또래들끼리의 주먹다툼에서나 통하는 얘기였을 뿐이에요. 천 년이 넘는 고(古) 무술의 맥을 잇는 후계 자리를 논하기엔 나 같은건 그냥 하찮은 먼지나 다름이 없었죠.
일본 본토에는 나 말고도 후계 2순위로 지목되고 있는 남성 무예가들이 많았죠. 중학생이 되었을 때쯤, 난 그 사람들과 대련을 해봤어요. 단 한 번도 이길 수 없었죠. 어머니는 그 때 크게 실망하셔서 일본으로 돌아가셨어요.
더 이상 나에게선 가망을 찾을 수가 없다나.... 아무튼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랑 둘이서 살게 되었죠.
슬프지 않았냐고요? 물론 슬프긴 슬펐죠. 하지만 약간 후련하기도 했어요.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나는 내가 하려고 했던 일, 그리고 걸어가야 하는 길이 내가 가진 몸과는 너무도 다르다는걸 조금씩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아버지는 나를 많이 예뻐했죠. 속으로는 아마 나를 여자애로 키우고 싶으셨을 거에요.
어머니의 집착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지만요.
우리 아버지는 가문에서 그다지 힘이 없었어요. 실력만은 누구보다 뛰어나셨지만 데릴사위라는 신분 때문이었죠.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할아버님이 정한 유파의 후계자였기 때문에 다음 후계를 계승하는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만 했어요. 내가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쯤, 아버지는 후계 문제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 결국 일본으로 가셨죠.
나 때문에라도 한국에 더 오래 있고 싶어하셨던 아버지였지만 가문의 중요한 문제 앞에서 더 고집을 부리기는 힘드셨을 거에요. 무예를 숭상하는 가문에서 가문의 중대사란 자식보다도 훨씬 우선하는 중요한 문제거든요.
내가 2학년이 되었을 때, 일본에서 소식 하나가 날아왔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뒤늦게 자식이 생겼다는 거였죠. 가문 전체가 들썩일 만큼 큰 소식이었어요. 내게는 동생이 생긴 셈이었구요.
뭐랄까... 기분이 이상했어요. 기쁘다거나 하는 생각보다는 그냥 제발 남자애였으면, 하는 생각만 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더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했거든요. 그리고 그런 내 기도와.... 어머니의 기도까지 하늘에 닿았는지 결국 내 동생은 사내아이로 태어났죠. 어머닌 그 아이에게 일본인의 이름을 붙였구요.
저는 제 동생의 얼굴을 본 적이 거의 없어요. 아마 일본에 갔을 때 두어번 정도 본게 전부일 거에요.
이제 겨우 두세살 정도 되었을테니 걸음마는 뗐으려나요? 아마 곧 그 동생도 무도복을 입게 되겠죠.
아무튼 동생이 태어나고 난 이후부터 나는 뭔가로부터 해방되었어요. 나를 얽매고 있던 가문이니, 후계니 하는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워진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기분이 참 이상했죠.
평생을 남자애처럼 살아오다가, 갑자기 여자가 되려는건 너무 힘들었어요. 나는 줄곧 그렇게 남자처럼 사는게 옳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고, 또 그런 삶의 방식만이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또래 여학생들과 어울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남자애들과 놀기도 힘들었죠.
고3이 되었을 때, 나는 오토바이 타는 법을 배웠어요. 그게 마음에 들었죠. 헬멧을 쓰고 달리다보면 남들은 저게 여자인지 남자인지 잘 모르잖아요. 게다가 미친 듯이 달리고 있으면 외로움을 잊을 수 있다는 것도 좋았어요.
한국에서 부모님도, 가족도 없이 혼자 살고 있었던 나는 사실 많이 외로웠거든요. 하지만 티를 내지 않았죠.
그토록 바라던 후계자를 얻은 어머니의 행복을 깨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일본으로 돌아가서 다시 가문과 후계 따위의 문제에 휩쓸려가며 살기도 싫었어요. 그저 아버지가 어서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랬을 뿐...
그러다보니까 뭐 폭주족 친구들도 좀 사귀게 됐어요. 걔네들한테서 이것저것 배우기도 했죠. 욕이라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썩 좋은 친구들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네요. 걔네들 덕분에 안 좋은 것도 좀 배우고 했으니.
아무튼 나는 오토바이 타는게 좋아요. 달리는걸 즐기는 것도 좋지만, 내 안에는 아직도 남자애가 되려고 하는 본능이 한 구석에 남아있는 모양이죠.
돌이켜보면 내 삶이 참 모호했어요. 여자이면서 남자이고 싶어했지만 그 남자가 된다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결국 이도 저도 아닌 20년의 삶을 살고 나서 내게 남은건 여기에도 저기에도 끼어들 수 없는 그런 박쥐 같은 모호함 뿐....
동생이 태어나고나서, 나는 비로소 진짜 "여자"가 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셈이었죠. 하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뭘 어떻게 해야 여자가 되는지, 여자다운게 도대체 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고작해야 TV나 영화 따위를 보면서 막연하게 여성성이란건 저런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 뿐.... 암만 노력해봐야 나는 반쪽짜리 여자였죠.
이제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 내게 주어진 그대로 살고 싶은 거에요. 하지만 어떻게 하면 여자가 될 수 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네요. 마치 쉬운 문제를 굳이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듯한 그런 기분도 들지만요...
아무튼, 정말 어려워요.
내게는 말이에요.
*
"........"
유성이의 긴 이야기가 끝이 나자, 나는 그녀를 위해 잠시 아무 말도 않고 조금 더 기다려주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조금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든지 털어놓고 싶었겠지만, 역설적으로 누구에게도 쉽게 얘기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가 모처럼 누군가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기로 마음 먹은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부 쏟아내기를 바랐다.
"그랬구나."
그녀가 더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
"뭐를요?"
"너에 대해서."
그제서야 나는 비로소, 유성이에게서 받았던 첫 느낌이 왜 그렇게 모호했는지, 왜 그녀를 무언가 하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기가 그토록 힘이 들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모호한 이중성 뒤에는 내가 생각도 못한 그녀만의 사연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왜 남자를 불편하다고 얘기했었는지와, 더불어 왜 그토록 서연이를 따르려고 했는지까지도.
"서연이는.... 네가 닮고 싶어했던 일종의 이상형, 같은 거였구나."
"그래요. 외모든 행동이든.... 서연 선배처럼 하면 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죠.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나와는 다른 사람이니까. 천상 여자로 태어난...."
"어쩌면 굳이 서연이를 닮으려고 하지 않아도 넌 좋은 여자애가 될 수 있을거야."
더 멋진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이 짧은 순간 그녀의 인생에 공감하고 답을 내려줄 수 있을까.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나면 그녀에게 더 좋은 말을 해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이런 얘기 남에게 이렇게까지 자세히 들려주는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어쩌면 처음일지도."
"고마워. 뭔가 영광스럽다."
"내가 솔직히 얘기해줬으니 이젠 내 차례에요. 선배도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뭔데?"
"서연 선배랑은 무슨 사이에요?"
난감하다. 설마하니 그 많은 질문들 중에 그걸 던질 줄은 몰랐다.
"으음... 그게...."
"난 정말 솔직하게 다 얘기한거에요. 선배도 내게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유성이의 표정을 볼 순 없었다. 하지만 굳이 눈을 마주치지 않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어떻게 이 아이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는가? 지극히 감성적인 이유이긴 했지만, 난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사귀는 사이는 아냐. 정말로."
"내가 보기엔... 서연 선배가 성진 선배한테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요."
"에이. 그것도 아냐. 예전에 내가 서연이 얼마나 쫓아다녔는데. 그 때 서연이가 나 완전 벌레보듯이 무시하고 그랬었어."
"예전이라면서요. 지금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 그건 그렇지만...."
"여자는 호감이 없는 남자에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아직 여자가 되지도 못 했으면서."
"라고 책에서 읽었거든요."
"뭐? 참나...."
"어서 말해보세요. 사귀는 사이가 아니면 뭐에요? 설마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하려는건 아니죠?"
아니라고 말을 하고 싶긴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내가 계곡에서 서연이와 섹스하는걸 유성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섹스파트너라고 말하기도 좀 그렇지 않나?
"사귀는건 아냐. 정말이야. 나한텐 여자친구도 따로 있는걸."
비록 섹스는 안해주는 여자친구지만....
"뭐라구요?"
유성이의 표정을 볼 순 없지만 몸에 닿는 반응으로 봐서 그녀가 놀랐다는게 느껴졌다. 이렇게 알몸을 부대끼고 있으니 왠지 서로의 감정까지 캐치가 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 여자친구 따로 있어."
"그런데... 왜... 서연 선배랑...."
섹스했어요? 라고 묻고 싶을 테지.
"그게 말야.... 꼭 사귀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섹스라는건 할 수 도 있는거거든. 아니, 뭐 그게 도덕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경우가 아주 가끔씩 생기긴 해."
""여성적인" 여자들은 사랑하기만 한다면 사귀지 않고도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 뭐 그런 말인가요?"
"뭐? 아냐! 그런건 절대 아냐!"
뭔가 나로 인해 순수한 어린아이의 윤리적 가치관이 망쳐질지도 모르겠다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초등학교 도덕 선생님들의 기분이 이럴까?
"그냥... 서연이랑 나 사이는 조금 특별해. 뭐랄까... 연인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몸을 섞을 수는 있는...."
"서연 선배가 그걸 원해요?"
이 질문에서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도저히 지금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기에 나는 있는 그대로 대답해주었다.
"응."
혹시나 내가 섣불리 뱉은 진실이 유성이로 하여금 이상형으로 생각해왔던 선배에 대한 환상을 부수는 행동이 되지는 않을까? 어쩌면 내가 괜한 소릴 한 건지도.
"궁금하네요."
"뭐가?"
"서연 선배 같은 여자가 왜 사귀지도 않는 남자와 몸을 섞고 싶어하는지 말이에요."
"글쎄... 서연이랑 친해지고 나면 다음에 네가 한번 물어보던지...."
"그래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어요."
"뭐? 아니야! 농담이야. 농담으로 한 말이었어."
옥신각신 이야기를 주고 받다보니 어느새 꽤 시간이 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구조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서연이가 지금쯤 우리에게 사고가 났다는걸 알긴 알아챘을까?
"타임 리와인더."
그 순간에 또 다시 타임 리와인더가 떠오른걸 보면 역시 나는 아직도 이 시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습관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내 스스로도 납득은 할 수 있다. 이건 그만큼 난감한 상황이니까.
"젠장."
하지만 나는 타임 리와인더를 지금은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유성이가 알지 못하게 속으로 혀를 찼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원래 물이 들어가서 고장이 나있던 시계였는데, 계곡에 빠져 떠내려오면서 아까 낮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물이 들어갔을거라 생각하니 시계의 상태가 궁금해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 그러고 보니 유성아... 내 윗도리는 어딨어? 상의 점퍼."
"그건 왜요? 저기 구석에 벗겨뒀는데."
"정말 미안한데... 한가지만 확인해주면 안될까? 내 점퍼 안주머니에 약간 무거운 초시계 같은게 하나 들어있는지 한번만 확인해줄래? 나한텐 너무 중요한 거라서... 혹시 떠내려오다가 없어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지금 상황에선 무척 귀찮은 부탁이겠지만 유성이는 의외로 군말없이 일어나 바위 구석에 박아두었던 내 상의 안쪽을 뒤져주었다. 몇번을 뒤적거리던 그녀가 곧 시계를 발견했는지 입을 열었다.
"있어요. 약간 투박한 느낌의 초시계."
"그, 그래. 이제 됐어. 다시 이리 와."
"핸드폰도 고장 났는데 이것도 아마 고장나지 않았을까요? 그리로 갖다 줄까요?"
"아... 아냐. 그냥 다시 넣어놔줘."
어차피 이 어둠 속에서는 시계의 상태를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다. 타임 리와인더에 야광 기능까지 있는건 아니니까. 물살에 쓸려오는 동안 혹시라도 분실했으면 어쩌나 했는데, 적어도 그게 아니란걸 알았으니 일단은 안심이다. 자세한 기능 문제는 이따가 천천히 혼자 살펴볼 수 밖에.... 우선 구조부터 되고 나면 말이다.
"으윽... 추, 추워...."
유성이가 나를 안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유성이의 품이 떨어지자 언제 조금 살만했었냐는 듯 다시 오한과 강추위가 몰려들었다. 아무리 초가을 날씨라도 저체온증에 걸리면 동사할 수도 있음을 나는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리광스럽게도, 얼른 유성이가 나를 다시 안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나는 너무도 당연하지만 여태껏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유성이 쪽을 바라보니 역시나 그녀의 실루엣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어둠 속이라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 역시도 떨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멍청한 새끼...."
내가 추우면 유성이도 추운거다. 아무리 나는 정신을 잃고 그녀는 멀쩡했었다곤 하지만, 물에 빠졌던 것도 마찬가지고, 지금 옷을 벗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 추운 것만 신경 쓰느라 그녀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신경을 써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최성진. 이런 병신같은 새끼. 선배가 되어가지고 온갖 도움만 받고.... 정작 이런 것 하나 신경을 안 쓰고 있었다니.
"유성아. 미안해... 너도 추웠지? 내가 신경을 못 쓰고 있었어. 빨리 이리와."
"선배.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잖아요. 지금 다 벗고 있는데 돌아보면 어떡해요?"
"걱정 마. 어두워서 하나도 안 보이니까. 그보다 빨리 이리와. 너도 지금 춥잖아."
유성이는 그녀답게 비교적 담담한 말투로 말했지만, 그녀의 알몸을 향해 내가 얼굴을 돌리고 있다는게 조금은 부끄러운게 틀림없었다. 타임 리와인더를 살펴보려갔던 그녀가 쭈뻣거리며 다시 돌아오자마자, 나는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뚱이를 억지로 움직여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누웠다.
그리고 아까처럼 유성이가 내 등 뒤에서 끌어안는 자세가 아닌, 나와 유성이가 서로 마주보고 끌어안을 수 있는 자세를 만들었다.
"선배... 이건 좀...."
"네가 아까 그랬잖아. 죽고 사는 문제 앞에서 쓸데없는 기분은 잠시 버리라고. 너도 똑같이 물에 들어갔다 나왔으니 지금 체온이 낮을거 아냐. 나만 따뜻하면 그만이야?"
"......"
자기가 했던 말이라서 차마 반박은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유성이가 머뭇거리는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에 어느 다 큰 여자가 남자랑 알몸으로 서로 마주 안는 상황에서 태연하겠는가?
아무리 유성이처럼 여성성을 모르고 살아온 아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서로 몸을 따듯하게 만들어줘야 사람들이 구조를 하러 올 때까지 살아있든말든 할 거 아냐? 빨리 이리와."
보통 여자라면 차라리 추워죽더라도 그 꼴만은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여자들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유성이는 유성인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내 품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유성이의 알몸을 품 안에 안고는, 양팔로 꽉 안아주었다. 보드라운 스무살 여자의 알몸이 내 알몸에 닿아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물론 부끄러움도 있기는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끌어안은 유성이의 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차가웠기에, 나는 내 무신경함을 더욱 질책하며 유성이를 한층 세게 끌어안아주었다.
"미안해. 너도 추웠을텐데...."
"아니에요."
"이렇게 있으니까 좀 나은 것 같아?"
"네."
"젖은 옷이라도 입는게 나았으려나?"
"안 돼요. 물에 젖은 옷은 열기를 더욱 뺏어갈 뿐이에요."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 알몸으로 마주보고 끌어안고 있자니, 정말 기분이 묘한 것도 사실이다.
"유성아. 너 그거 알아?"
"뭘요?"
"내가 안기라고 했을때 방금 네가 부끄러워했잖아.... 그건 네가 여자애라는 확실한 증거야. 어쩌면 네가 굳이 여자가 되는 방법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너는 이미 한 명의 어엿한 여자애일 수도 있어. 단지 네가 그걸 아직 못 느끼고 있을 뿐...."
"......."
"그,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야. 너무 불편하게 있지 말고 편하게 있어. 지금은 몸을 덥히는게 중요하니까."
하지만 편하게 있으라고 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는걸 나도 알고 있었다. 내 가슴에 닿는 유성이의 가슴 감촉이 느껴졌다. 스무살 여자애라고 해서 뭔가 나와는 나이 차이가 한참 날 것 같은 어린애처럼 그동안 생각했지만, 따지고 보면 고작 열 살도 차이나지 않는다.
게다가 스무 살이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이미 그녀의 몸은 완연한 성인이라는 사실이 새삼 알몸을 통해 생생하게 느껴져왔다. 이 극한의 위험 상황에서 여체의 굴곡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면 누가 보기엔 정말 한심하게 여기겠지만, 그 누군가도 아마 남자라면 지금의 내 심정을 이해할 순 있을 것이다.
"......."
약간 불편한지 유성이가 몸을 뒤척거리자, 나는 비록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유성이의 가슴 끝자락에 달린 젖꼭지의 감촉이 내 가슴을 살짝 긁은 것이었다. 유두가 내 가슴을 스쳤다는걸 유성이도 느낀 것이 틀림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가 약간 당황하고 있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미, 미안해요."
그녀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자, 왠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통증으로 가득했던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게 느껴졌다. 그 야릇한 기분이란, 분명 지금의 이 상황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가 없는 감각이었다.
"미, 미쳤냐, 최성진... 지금 상황에서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거야.... 그냥 몸을 데워주기 위해서 알몸으로 안고 있는 것 뿐이야. 진정해...."
하지만 내가 속으로 내 자신에게 암만 진정하라고 사인을 보낸다 한들, 피부 대 피부로 생생하게 느껴져오는 알몸 곳곳의 감촉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유두가 가슴을 긁고 나자 당황한 유성이가 내 품 안에서 미세하게 몸을 움찔거렸지만 그 작은 움직임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더욱 많은 스킨십을 유발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꼼지락거릴 때마다 서로의 가슴이 맞닿았고, 그럴 때마다 유성이의 가슴은 말캉거리며 내 가슴에 짓눌려 뭉개지곤 했다. 게다가 그럴 때마다 하체에서 뭔가 찌릿찌릿한 감각이 타고 올라오는게 느껴졌다. 지금 상황에서 도저히 인정하긴 싫지만, 그건 다른 것도 아닌 "흥분"이라는 이름의 감각이었다.
"안돼. 안돼. 다른 때도 아니도 지금 같을 때에 흥분이라니. 아무리 남자라지만 이건 아냐... 진정해라, 진정."
하지만 말초신경이란 놈은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서,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토록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지만 이미 내 아랫도리에서는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몸이 만신창이가 된 와중에도 자지는 살아있다는 건가? 이게 정말 자랑스러워 해야 할 일인지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유, 유성아... 미안."
"......."
정말 얄궂게도 하필 발기된 자지는 위치도 정확하게 유성이의 다리 사이 한가운데를 향해서 벌떡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밀착해서 끌어안고 있는 상태였기에, 한쪽 다리에 귀두가 가로막히자 어쩔 수 없이 유성이는 다리를 살짝 들었고, 그 틈새를 파고 들어간 자지는 정확하게 그녀의 두 다리 사이 안쪽에 안착하고 말았다. 즉, 유성이의 가장 은밀한 부위 바로 아래쪽에 아슬아슬하게 내 자지가 들어서버린 것이다.
"선배. 흥분했어요?"
다행히 유성이도 역시나 알건 아는지, 사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 물어온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오니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으응."
"조금 민망하긴 하네요."
유성이로서는 최대한 지금의 상황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들리게 얘기하려고 시도한 거겠지만, 나는 물론이고 유성이 본인조차도 지금 이게 "조금 민망한" 상황 정도가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 왕성한 내 좆대가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우뚝하니 고개를 쳐들은 내 자지는 유성이의 가랑이 안쪽 깊은 곳까지 가서 밀착해버렸고, 좆기둥 표면으로 까슬까슬한 감촉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유성이의 "그 곳"에 난 털들이 내 자지를 긁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보지털이 느껴지는 걸로 봐서, 조금만 더 자지가 위로 올라가면 아마 구멍에까지 닿을 것이었다. 나는 그 사태만큼은 피하자고 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었지만, 빌어먹을 말초 신경은 그렇게 생각할수록 오히려 더 짜릿한 자극을 받는지 자지는 아직까지도 조금씩 발기하고 있었다.
"미, 미안해... 남자들은 가끔 이러거든."
"그런건 나도 알아요. 어쩔 수 없는거 아니까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우습게도 스무살 여자애에게 이런 식의 위로를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선배는 내가 여자로 보이나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신경을 다른데로 돌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환영이었기에 나는 잽싸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럼 네가 남자애겠어? 너 여자애 맞아. 그것도 상당히 괜찮은...."
어영부영 말을 하는 내 입가에서 뿜어져 나온 숨이 어쩐지 뜨뜻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가운 한기에 덜덜 떨고 있었는데 말이다... 유성이의 입에서 나온 숨결 또한 내 볼에 와서 닿는게 느껴졌다.
그 숨결은 비록 나처럼 뜨겁게 느껴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서로의 숨결이 닿는다는 것이 그 때의 나에겐 분명 속일 수 없는 하나의 자극이었다.
"유성아.... 우리 키스할래?"
그 순간의 나는 아마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하긴 그런 상황에서 누군들 제정신일 수 있을까.
다만 남자는 이런 순간에서 두 부류로 나뉘게 된다. 자제를 할 수 있는 놈과 그렇지 못한 놈으로.
유성이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후자였나보다.
"웁..."
나는 유성이의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그 아이의 입술을 덮었다. 정말 막되먹은 행동인건 알고 있었지만 그 때의 나에겐 "참기 위해선 키스라도 하는 수 밖에 없어!" 따위의 얄팍한 자기 합리화가 있었나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내 입술이 유성이의 입술을 덮고, 내 혀가 유성이의 혀 끝에 가서 닿자마자, 다친 몸에서 느껴지던 통증과 이 힘든 상황이 주는 불안함 등등에 아슬아슬하게 가려져왔던 성적인 흥분이 마치 댐이 터지듯 폭발해버렸다. 나는 스무살 후배를 상대로, 그것도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로 행하는 키스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칠게 유성이의 입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생각보다 유성이의 입 안은 너무나도 보드라웠고, 따뜻했다. 마치 서연이나 현주처럼 말이다.
갑작스럽게 내가 밀어붙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유성이는 키스에 익숙치 않는게 틀림 없었다. 애매한 태도이긴 했지만 입을 벌려주는 것을 봐서는 완강한 거부의 표현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키스라는걸 몇 번 해보지 않은 듯 어디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스스로 리드하며 유성이의 혀를 내 혀로 옭아매고는 사정없이 유린했고, 조금 뒤에는 아래 위의 입술까지 정신없이 빨아주었다. 조금은 어설프지만 지극히 동물적인 키스가 야밤의 계곡 한복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선배! 성진 선배! 유성아!"
솔직히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때의 타이밍은 정말이지 신의 악취미처럼 느껴졌었다.
하필 그 타이밍에 구조대의 목소리가 들려올 줄은....
아득하게 흘러가는 계곡의 물살 소리를 타고 왠지 서연이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정신없이 키스를 하던 나와 유성이는 황급히 놀라 서로에게서 입을 뗐다.
우리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끌어안은 몸은 그대로였는데, 나는 그제서야 유성이의 팔이 내 등을 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는 우리.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성이보다는 내가 먼저 입을 여는 것이 이 상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성아... 미안해. 많이 놀랐지?"
"조금요."
유성이는 이런 상황에서도 유성이답게 담담한 말투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유성이의 기분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그 모습이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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