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6호 중편 1장]
느즈막한 밤 시각.
무거운 발걸음이 들린다.
[터벅. 터벅.]
“휴.... 힘들다.”
사내는 찌들은 삶의 무게가 묻어나는 한숨을 내 뱉는다.
그의 발걸음은 7동 현관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엇? 잠깐만요!!!”
안에서 엘리베이터가 닫히려는 기척을 느낀 사내가 후다닥 발걸음을 재촉한다.
[지이이잉.....]
하지만, 엘리베이터 문은 굳게 닫히고 만다.
“이런 씨발.. 같이 좀 가면 덧나? 뛰어 오는거 빤히 봐 놓고는... 쳇~”
사내는 야속하다는 듯 엘리베이터를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지이이잉.....]
닫혔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금 열린다.
“?”
사내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머쓱하게 안으로 들어선다.
가벼운 목례 후 안으로 들어선 사내의 눈에는 낯설은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은 어깨까지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에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검정색 기모 재킷을 입고 있었으며, 쫙 달라붙는 청바지가 가느다란 각선미를 자랑하듯 뽐내고 있었다.
술에 취한건지 일에 지쳐 있는건지 여인은 엘리베이터 가새에 몸을 기댄 채 힘없이 몸을 늘여뜨리고 있었다.
사내는 몇 번이고 여인의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조심스레 말을 건낸다.
“저... 죄송해요... 그냥 올라가 버리는 줄 알고....”
“......네?”
“아? 아..아... 아니에요...”
“훗...”
한쪽 입꼬리를 잔뜩 올려 피식 하니 웃더니 여인은 다시금 몸을 가새에 기댄다.
[지이이이이이....]
엘레에이터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린다.
사내가 허겁지겁 8층을 누른다.
버튼은 7층이 눌려져 있었다.
사내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여인을 쳐다본다.
사내의 눈에 비친 여인은 동공이 풀린 듯 눈에는 초점이 상실된 채 넋을 놓은 사람마냥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머리칼이 얼굴의 반쯤을 가려 여인의 얼굴을 정확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백옥색 새하얀 피부의 상당히 출중한 미모의 여인임은 틀림없어 보였다.
도톰하게 솟아오른 앵두같이 빨간 입술이 여인의 하얀 피부를 더욱 도드라지게 보이게 했다.
[땡... 지이이잉.....]
7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였다.
“예... 예린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사내가 여인을 향해 외쳤다.
여인은 사내의 외침을 들은체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긴다.
[또각. 또각. 또각.]
엘리베이터 문을 나서 몇걸음 옮겼을까, 갑자기 여인의 발걸음이 멈춘다.
그리고는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정확하게는 사내를 향해 공허한 여인의 시선이 멈춘다.
사내는 얼어 붙은 채 꼴깍 하니 침을 삼킨 채 여인을 주시한다.
[또각. 또각....]
여인의 발걸음이 다시금 엘리베이터로 향하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선다.
[지이이잉......]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에 잠시 침묵이 흐른다.
“아... 아는 여자랑 너무 닮아서.....”
사내는 금새 거짓말이 탄로라도 났는지 얼굴이 빨개진 채 여인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말을 한다.
[땡. 지이이이잉.....]
8층에 멈춰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실례 했습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그...그게...... 아.. 죄송해요. 가던 길 가세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 사내가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한잔........... 하실래요?”
여인이 나지막하게 말을 건낸다.
“...........?”
놀란 사내가 여인을 쳐다보자, 여인은 풀어진 한쪽 머리 귀뒤로 쓸어 올리고 사내를 향해 게슴츠레한 미소를 흘린다.
사내는 여인을 바라보았지만, 청초하게 보이는 여인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지만, 엘레베이터 조명이 어두워 잘 보이는 않는다.
“......”
한동안 정적이 흐르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 사내가 올라 탄다.
둘은 아무 말도 없다.
엘리베이터는 내려가지 않고, 9층으로 올라가서는 멈춰 섰다.
[땡. 지이이이잉.........]
밖에서 어린아이를 들쳐 업은 듬직한 체구의 사내가 올라 탄다.
“아이~ 무슨 전세낸느교~? 먼떼 이시간에 엘리베이터를 붙잡아 쌌능교~? 이시간에 뭐 이삿짐이라도 옮겨요~?”
씩씩거리며 올라탄 거구의 사내는 서둘러 1층 버튼을 누른 후 안에 있는 남녀를 향해 쏘아붙히며 말을 잇는다.
“아이~ 아가 지금 아파 응겁실 실려가 당장 치료럴 받아야 하는데, 뭐한다꼬 엘리베이터를 붙잡아 두고 쌌능교? 둘이 뭐 여서 연애라도 핸능교?”
세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한다.
“와 말을 안하는교? 여서 뭐라도 했심니꼬? 지금 아 안보이능교? 아가 이리 아펀데~~~”
사내는 들쳐업은 아이를 토닥 거리면서 연신 두 남녀를 향해 눈을 쏘아 붙힌다.
“죄송함미데이... 시골에서 와가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처음 타봐서 그랬심데이...”
여자가 다소 혀가 꼬부라진 발음으로 사내를 향해 목례를 하며 대답을 한다.
“머라꼬예? 짐 나랑 농담 따묵기 하자 이깁니꼬? 참나...”
“아닙니데이... 죄송합니데이...”
여자는 다시금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리며 사내에게 사과를 한다.
[땡... 지이이이잉.....]
어느덧 엘리베이터는 1층에 다다랐고, 아이를 들쳐업은 사내는 걸음을 재촉한다.
“아야.. 쪼매 참으래이... 곧 어매 보러 가제이~~”
끙끙거리는 아이를 달래고는 서둘러 나간다.
사내가 나간 후 두 남녀는 서로를 보고 뭐가 그리 웃긴지 한참을 깔깔 거리고 웃는다.
“하하하하하하하....”
“흐흐흐흐흐흐...”
한참을 서로 쳐다보며 마음껏 웃다가 사내가 입을 연다.
“어디 아는 술집이라도 있으신건지....?”
여인은 사내의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음... 저기 앞에 가면 포차 하나 있어요. 늦게까지 하는데, 거기로 가실래요? 걸어가기엔 거리가 좀 되는데..... 그래도 늦게까지 마실 수는 있어서......”
“네.....”
몇 걸음 앞선 사내의 걸음을 여인이 뒤 ?는다.
한참을 걷다 사내가 여인에게 묻는다.
“근데, 7층에 사세요? 왜 여지껏 한번 도 못 봤던거죠?”
“.................”
여인은 그저 피식하고 웃을 뿐, 사내의 말에 대답이 없다.
“무슨 볼 일 있어서 오신거 아니세요? 제가 이 아파트 오래 살았는데, 이런 미모의 여인을 그동안 못 봤다는게... 그리고 같은 동에 사는데..... 이건 말이 안되는데.... 허허허”
“........... 재미있어요?”
사내의 질문에 뜬금없이 여인이 화를 낸다.
“네? 아..... 그냥 처음 뵌 분이라서... 뭔가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후훗.... 이미 한잔 마셔서 그런건지..... 미친년이 실성한다고 생각하세요.”
“아.. 아니요... 전혀....”
머리를 긁적이며 사내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 발걸음을 이어간다.
수분을 침묵속에 걷고나서 멀찌감치 보이던 포장마차 불빛이 가까워졌다.
“이모~ 오랜만~”
사내는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서며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에게 인사를 한다.
“어머머머~ 동생~ 이시간에 왠일..................엥? 옆에 처자는 누구래?”
“아... 어..... 고...고객이요~ 고객...”
“으...응?...”
“아하하하하.. 이모... 그게.... 하하하...”
사내는 이모를 향해 윙크를 한번 한다.
“으크크크...”
이모는 넉살좋게 웃어대고는 칼을 쥔 손으로 원을 빙글빙글 돌리며 알았다는 듯이 고갯짓을 한다.
사내는 여인을 이끌고 이모가 있는 조리대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힌다.
“그래.. 뭐 줘?”
“여기 그냥.. 일단 소주랑요~ 저기. 뭐.. 좋아해요? 포장마차 음식 뭐 좋아해요?”
“후훗.... 다......”
“응..? 다...? 뭐...... 가리는 거 없다는 거죠? 이모~ 여기 그냥 소주랑 천엽이랑 계란말이 주세요. 이모, 알죠? 계란말이는 오동통하게~~”
“응~ 그래~ 아주 오동통하게 뭐 같이 해서 내 줄게~ 으흐흐흐흐흐... 소주는 저기서 동생이 빼가~”
이모는 음흉한 미소를 흘리고는 요리에 여념이 없다.
사내는 구석의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들고는 조리대 옆에 소주잔 두 개를 챙기고는 자리에 앉는다.
“근데 고향이 부산이세요?”
“후후....”
여인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사내는 고개를 갸우뚱 하니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여인을 바라본다.
그러기를 수초간의 정적이 흐른다.
[끼리릭...]
소주 뚜껑을 돌려 따고는 여인에게 한잔을 권한다.
“근데, 이름이 뭐에요? 통성명이나 하죠. 전 권일이라고 하는데, 김권일!”
말없이 잔을 받아 들은 여인이 사내에게 맞잔을 따른다.
“후후.... 예린이...?”
사내는 장난어린 여인의 눈빛이 내심 못 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리며 잔을 받아 든다.
[돌똘똘똘똘....]
잔에 술이 채워지는 소리가 예쁘게도 들리더니 [주룩]하고 넘쳐 흐른다.
“어어...?”
“후훗... 미안....”
“술.. 좀 많이 드시고 오셨나봐요...”
“조금.....”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봐요?”
“그런가....?”
여인의 알수 없는 표정에 사내는 슬슬 짜증이 났는지, 몸을 한껏 뒤로 축 젖히고는 이내 테이블로 바짝 다가가 앉는다.
“기왕 같이 마시는건데, 재미있게 마셔요.. 고민이 있어도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죠. 시간 지나면 뭐, 다 잊혀지고.. 뭐...”
“더..... 선명해 진다면....?”
“으.. 응?”
말없이 여인이 사내에게 건배를 청한다.
[짠]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건배한 잔을 든 채로 둘 사이의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수초간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근데, 우리 위하여도 안해요?”
".........?......"
"그래도 첫만나서 건배를 하는건데.. 뭐라도 위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허허허..."
“..........................아이의 쾌유를 위해....”
“으..응..? ........아...아아~~~”
부인이 말 없이 잔을 입에 들이키며 대번에 원샷을 한다.
“와.... 잘 드시네....”
이내 사내도 따라 입에 술을 들이 킨다.
“크~~~~~~ 조오타!!!!”
“자~ 여기 맛있게들 잡숴~”
이모가 천엽을 내와서 정적이 깨진다.
“하하.. 잘 먹을께요, 이모~”
사내는 천엽을 한젓가락 들더니 참기름을 듬뿍 묻혀 입에 가져간다.
“아.. 맛있네... 이런거 드세요?”
“저 신경 쓰지 말고 드세요...”
“으으?.... 네에....”
사내는 알수 없는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더니 분위기를 띄우려 말을 건낸다.
“근데, 부산 아니신가봐요? 아깐 사투리 쓰는 것 같더니... 장난 친거죠?”
“..........흐흐흐..... 네에....”
“아. 네에..... 자, 한잔 더 받아요.”
사내는 부인에게 잔을 권한다.
[똘똘똘똘똘똘....]
[탁]
병을 내려놓은지 한참이 지나도 여인은 사내에게 잔을 따라주지 않는다.
[똘똘똘똘똘똘....]
“자작하면 3년간 재수없다고 하던데...”
들으라는 듯 나지막히 말을 내뱉고는 사내는 이런 분위기가 이제 짜증이 난다는 듯 여인을 퉁명스레 쳐다보기 시작한다.
“후..............”
부인은 땅이 꺼져라 큰 한숨을 내쉰다.
사내는 말 없이 천엽을 입에 가져다 댄다.
“내....................이야기......................들어................줄래요?”
“으응?... 네, 뭐 아무거나 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맘껏 해요. 머리도 나빠서 내일 일어나면 다 까먹어요.. 허허..”
“좀 긴데.......”
“아~ 괜찮아요.. 어차피 출근도 좀 늦는 편이라.. 날 새도 되요~ 체력도 좋아서... 허허...”
“그럼.... 내 얘기 들어주면...”
다시금 수초간의 정적이 흐른다.
여인은 잔을 들어 사내에게 건배를 청한다.
[짠]
잔을 부딪힘과 동시에 둘은 벌컥하고 들이킨다.
“크...................근데, 천엽 못 드시나봐요... 이모!! 여기 계란말이 언제 나와요? 얼른 좀 내와요~~”
“아~ 알았어. 곧 나가~”
“아니 무슨 새벽되서 닭장가서 달걀 꺼내서 만들거유? 그냥 빨리 좀 내봐요~”
“으휴~ 성격 급하긴~~”
사내는 다시금 여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여인은 사내의 잔에 술을 채워주려 술병을 든다.
“아~.. 네네~~ 감사감사... 따라주는 잔이 제맛이죠.. 허허..”
“그새끼..... 당신이 죽여ㅈ...”
“으....응?”
“....................”
“응? 방금 뭐라고 말 안했어요?”
여인이 혼잣말처럼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해서 사내는 못 알아 들은 모양이다.
아니면, 말은 알아 들었지만 너무 뜻밖의 돌발 발언에 놀란 모양이다.
“흐흐흐... 아니에요.... 아무것도....”
-계속-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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