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야 정말 알았어, 내 마음을.
"제발, 제발 그만하세요 제발..."
"너무 아파요.. 아악!.."
"아, 안돼..!!"
깜짝 놀라서 눈을 뜬다.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몸은 짓눌린듯 무겁고 구석구석마다 식은땀으로 축축하다.
잠시 끊겼던 사고의 퓨즈는 빠르게 교체되고 암순응에 적응한 눈으로 주변을 훑는다.
내 방이다.
상황의 위화감은 익숙한 장소로 씻어내린, 내 방이 확실하다.
그제서야 방금 전 일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턱 끝까지 차올라 회반죽마냥 굳어버린 탁한 숨,
빠르게 쏘아대는 좌심방과 쪼그라드는 폐, 어느 하나 정상적이지 않은 감각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쉰다.
꿈이다, 꿈이였어.
현실을 받아들이고 정리하기엔 아직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막 악몽에서 깨어났고, 이것 마저도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숫자를 50까지 세어본다.
.... 47, 48, 49, 50.
문제 없다.
그제서야 비로소 온몸의 긴장을 억지로나마 풀어낸다. 머리맡에 두었던 휴대폰을 집어든다.
4시 33분.
많이 잔건지, 못잔건지 모르겠지만 시계는 정확히 지금을 가리켰다.
나는 여전히 침대에 누운채 꼼짝도 않고 있다. 그리곤 휘발하는 기억을 붙잡고 배를 갈라 속을 끄집어 낸다.
어디서부터 시작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탁한 꿈 속에서 나는 누군가를 범하고 있다.
굉장히 탁하고 노이즈가 잔뜩 낀, 시야의 윗부분 태반 이상이 감가상각 되버린 상태.
나는 들끓어 오르는 도가니 그 자체였고, 아래엔 부드러운 형상이 존재한다.
남자는 아니다, 선이 가는 것이 여자가 틀림 없다.
누군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이미 시력은 빠른 속도로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기에.
아니다, 이 여자는 내가 분명 알고 있는 존재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아니다.
틀림없다. 은채다, 은채였다.
레드 아웃과 블랙 아웃을 반복하는 시각의 롤러코스터 앞에서도 나는
신기하게도 그녀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반갑고 또 반갑다. 겨우, 겨우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흥분이 잔뜩 고양되고 에피네프린이 분비된다. 교감신경에서부터 시작된 자극은 전신으로 번졌고,
당연하게도 그녀의 몸 안에 틀어박힌 자지도 한껏 딱딱해진다.
꿈에서 나는 그녀를 잔인하게 굴린다. 이유는 모르지만 마치 그렇게 해야한다는 당위성이 부여된 듯,
믿음과 사명을 다하여 몸을 놀린다. 그 증거로 아래에 깔려서 신음하던 은채의 얼굴은 심하게 부어있었고,
평소 당차던 눈망울은 잔뜩 찌그러져 탁한 부유물이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다.
내 손은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굉장히 강한 힘이 들어간, 왠만한 남자도 뻐근해질 악력을
은채는 온몸을 비틀며 감내한다. 나는 그 상황에 다다라서야 이리저리 시선을 옮긴다.
내가 있는 이 곳이 어딘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굉장히 허름한게 창고나 공사장 인듯,
은채가 빽빽대며 엉망진창으로 소리를 질러도 나는 아랑곳 않고 계속 움직인다.
"아으윽..! 제,제발..!!"
그녀가 온몸을 비튼다, 애처롭게도.
토막난 필름 같은 이 악몽 속에서, 어이없지만 나는 은채의 따뜻한 속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거기서부터 기억은 조금씩 선명해진다. 아마도 나는 일정 간격으로 은채를 때려온듯 싶었다.
그녀는 이미 이곳 저곳이 울긋불긋해 있었고 눈에는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행위의 모든 것을 증명해주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종료된 과거의 시점이 아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진행 상황"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여전히 의식적으로 손을 들고 그녀를 때린다.
때리는 부위는 따로 정해두지 않았으므로 손이 가는 모든 곳에 자국을 새겼다.
가장 만만한 곳은 뺨이다. 이미 실컷 때린 후였는지 양 볼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이곳 저곳에 손을 대고 있었다. 허벅지나 엉덩이를 때리는 손은 스스로도 놀랄만큼
빠르고 매섭다. 짝-! 하는 소리가 공간을 까랑까랑하게 울리면,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울음이
봇물처럼 터진다. 그러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빙글대며 같은 곳을 두어번 마저 때리곤 했다.
은채가 아무리 울부짖고 애원해도 멈추지 않는다. 그녀를 그저 연민의 수용체처럼 다룬다.
신기하게도 그런 상황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마치 죄책감이라는 부분을 식칼로 통째 도려내버린듯,
나 홀로 붕 떠버린 느낌이다. 한창을 그렇게 반복하면 은채는 이를 악물고 참아낸다.
개미 한마리, 손가락 한마디 못들어가게 단단히 틀어막으면, 나는 그제서야 손을 멈춘다.
그리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다고 칭찬한다.
그러면 은채는 잔뜩 일그러진 입매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순종의 표시를 흔든다.
굴욕적일 수 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온전히 잣대를 들이대기엔 나는 심히 무자비했고
그녀에겐 당장의 고통이 더욱 중요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감내한다.
어느새 내 손은 그녀의 얼굴로 내려온다.
장님이 코끼리 쓰다듬 듯, 손 끝의 감촉을 살려 구석 구석 훑어간다.
아직 솜털이 남아있는 발간 뺨, 도톰하고 말캉한 입술, 그 안의 가지런한 치아까지도 손 끝을 통해
오롯이 담는다. 그 모든 형태의 신호는 어두운 신경절을 새하얗게 그려내며 덧칠한다.
내가 아는 그녀다.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반갑다.
그녀를 더듬던 손에 조바심이 깃든다. 당장이라도 우그러뜨릴 듯 힘이 들어가지만 가까스로 억누른다.
그리곤 다 채워지지 않은 반쪽 그림의 완성을 위해 마저 손을 놀린다.
올망한 콧대와 그 아래의 앙증맞은 두 구멍, 동그란 이마와 거기서 이어진 올 곧은 눈썹까지도.
하나 하나 채워질 수록 마음이 들뜬다. 눈부신 은채의 모습이 완성되어 간다.
그녀는 내 안에서 더없이 활짝 웃고 있다.
뭐가 그렇게 좋은건가? 내가 마음에 든 건가?
설레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채 마지막 방점을 찍어간다.
비어 있는 그녀의 마지막 부위, 대망의 화룡점정을 위해 그녀의 눈으로 손을 옮긴다.
물컹한 감촉과 함께 은채의 모습이 완성된다.
예쁘고 아름다운 그녀다. 단지 평소의 똘망똘망한 눈이 아닌, 퉁퉁 불어터졌다는게 다를 뿐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깨닿는다.
시각을 넘어선 초월적인 감각의 인지,
울어서 잔뜩 어그러진 그녀의 눈,
그 너머의 시선이 나로 하여금 꿈 속의 현실로 회귀시킨다.
나는 은채에게 저열한 짓을 하고 있다.
나는 걸작을 완성하는 예술가가 아니다.
마지막 한땀이 남은 줄 알았건만, 밑그림도 그리지 못한 상태다.
그렇게 망상에서 깨어난다.
혼란스럽고 실망스럽다. 나는 전혀 고상하지도, 고결하지도 않았다. 어떠한 대의도, 필연의 선택도 없었다.
풀이 죽는 순간 무섭게도 현실을 확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푹 꺼진 순결의 자리엔 본성의 욕망이 치환된다.
아무럼 어떠냐, 이게 현실이라면 여기에 순응하면 그 뿐.
나의 롤플레이는 계속 된다.
펑펑 울어서 부은 눈이 그녀에게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손 끝에서 느껴지는 도톰한 감촉이 음란하게 느껴진다.
내 입에선 끈적한 단내가 흘러내린다. 그녀를 다루는 손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은채의 두려움이 손끝 그대로 느껴졌고, 나는 그 이상으로 웃는다.
내 손은 다시 옮겨가고, 은채의 눈썹은 파르르 떨린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나를 피하지 못한다.
아니, 그러지 않는다.
왜인지 모르지만 나도 그녀도 잘 알고 있는 무언의 약속이니까.
우리의 역할은 편향성 밖에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하며
끝없는 반복의 가속을 끝내곤 마침내 나는 잠에서 깬 것이다.
생각만해도 아찔한 꿈이다.
얼마나 생생했던지, 그게 꿈이라는 사실을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도의 한숨 한번 내쉬지 못한채
결국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여느 때와 같이 식탁에는 대여섯가지의 푸짐한 반찬이 차려져 있다.
평소라면 아래 위로 잔뜩 엉겨붙은 눈을 비비며 맛있게 한숟갈 뜨겠지만 그러질 못하고 있다.
"아들, 속이 안좋니?"
주저하는 모습이 당신께는 아픈걸로 보였을까, 어머니는 그 새를 못참고 걱정 가득한 음색으로 되묻는다.
"아, 아니에요. 잠이 좀 덜 깨서..."
나는 대충 얼무어버리며 평소처럼 한 숟갈 뜬 다음 야무지게 입에 넣는다.
깔깔하고 퍼석하다.
막상 떠먹은 나 조차도 놀랄만큼 맛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일단 꿀떡꿀떡 삼킨다.
주머니에 모래를 채워넣은 듯, 그렇게 배만 불러온다. 적당한 타이밍에 숟가락을 놓고는 얼렁뚱땅
집을 빠져나왔다. 한시라도 빨리 은채를 두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다.
"아, 선배 왔어..? 헤헤"
은채는 그 날의 서먹함이 아직 남았는지 말꼬리를 흘린다.
사푼거리는 발걸음과는 달리,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초점이 평소와의 간격을 반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뿐이다. 그녀는 "고작" 그 때의 일만으로 나를 어색하게 대할 뿐이다.
"......"
나는 비로소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낀다.
새벽부터 잠을 설치며, 밥을 먹는둥 마는둥 헐레벌떡 학교로 달려왔다.
그럴리가 없겠지만, 물론 그럴 수 없지만 혹시라도 내가 그녀를 엉망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는 사로잡혀 있었고, 그걸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강의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도착했음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있었지만
초조함까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은채가 나타나길 1분 1초를 쪼개어가며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녀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랬다, 도무지 얼굴을 볼 수 없을거라 생각했기에.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았겠지만, 불안한 마음은 나를 연신 쪽계단으로 몰아넣어 담배를 입에 물렸다.
그렇게 40분이나 기다려서 확인한 은채는 아무 탈 없이 무사했다.
나는 목 울대가 위로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기도를 꽉 조이는 목 근육에 숨이 막히지만 억지로 쪼개어 만들어 말을 꺼냈다.
"은채야, 빨리 왔네?"
일부러 명랑한 척 구는 목소리에 그녀가 눈치 챌까, 손아귀에 땀이 한 웅큼 고인다.
제발 그냥 그대로 넘어가 줘.
"후후, 헤헤..~"
은채가 배실대며 다가온다. 그녀의 한 걸음, 걸음이 천천히 눈으로 빨려들어온다.
웃기게도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선 채 은채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고개를 푹 숙이고있는 내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그녀의 발.
조막만한 그녀의 발은 앙증맞을 정도로 예뻤지만, 그 이외에는 도무지 볼 곳이 없었다.
아니, 볼 용기가 안난다.
다 꿈이라고, 그저 악몽이 틀림없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시큼한 노이즈는 평소보다 좀 오래갈 뿐이며,
그 것은 당사자를 만나서 무사함을 확인하면 금방이라도 걷어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저 발이 뭐라고.
자꾸만 생각나게 만든다.
내가 움켜 쥐었던 발, 발버둥 치는 그녀를 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붙잡은 그 발.
한 손에 충분히 잡을 정도로 앙증맞던 은채의 발이 자꾸만 오버랩 되어갔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 올수록 칙칙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꿈에서 잡아본거랑 사이즈가 비슷해보이는데..."
인지는 사실의 장벽을 넘어 인식의 길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부끄럽게도 그 순간, 그녀를 앞에 두고 내 자지가 꺼덕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비슷하다면, 발 사이즈가 비슷하다면..."
"혹시 다른 곳도 비슷하지 않을까..."
떨쳐내려는 힘이 어린애 장난 같았는지, 꿈과 현실의 괴리는 한없이 0에 가깝게 수렴해갔다.
순간적으로 핑 하고 눈 앞이 돈다. 그래픽카드가 맛이 간 컴퓨터처럼 수 많은 줄이 동공을 가로지른다.
건강에 이상이 있었던 적은 없다. 당연히 과거 병력도 없고 하드웨어적 문제점은 아니다.
시력에 입력된 에러는 정신적인 문제, 인지하는 소프트웨어가 상황의 간격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은채의 향기가 강하게 난다. 그녀에게서는 항상 민트향의 샴푸냄새가 난다.
나는 엘라스틴 쓰는데.
결코 내 몸에서 나지 않는 익숙한 냄새는 나를 슬쩍 튕기며 자극한다.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사실 새벽의 그 꿈은 오늘의 연장선에 있는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가끔 그런경우가 있지않던가.
데자뷰( Deja Vu ).
그 꺼림직한 기시감을 현현할 첫번째 단추가 오늘, 그것도 바로 지금이다.
머리는 느리지만 차곡차곡 돌아간다.
지금부터 잘만 만들어가면 분명히 다시 한번 그 상황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꿈을 잘 되짚어보자.
나와 은채는 분명 외딴 곳, 가령 창고 같은 곳에 있었다.
그 상황을 맞추어내려면 그녀를 그 장소로 데려갈 필요성이 있다.
타일러 볼까, 겁을 줄까, 아니면 때려서 끌고 갈까.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우로보로스의 형상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짝-!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내 등짝이 시원스레 울린다.
은채에게 속마음을 들킬까봐 둥글게 말았던 몸이 반사적으로 펴진다.
은채다.
그녀가 내 앞에 서 있다.
"어허, 선배! 벌써부터 자세가 그렇게 구부정해서 되겠어?"
짐짓 엄한 표정을 짓는 그녀가, 정말 너무나도 말도 안되게 예뻐보였다.
"자자, 빨리 허리를 펴시오, 안그러면 척추가 잉잉 웁니다?"
은채는 연신 내 등짝을 팡팡- 친다. 그렇지만 아프진 않다, 오히려 짜르르 울리는 것이 시원한 느낌이다.
나는 싱글벙글한 얼굴을 절반도 숨기지 못한 채 허리를 곧추 세운다.
그녀의 유치한 보폭에 스스로를 맞춘 것이다.
"본디 소인은 농부의 자손인지라 저도 모르게 자세가... 어라, 어딨지? 안보이네?"
나는 턱을 한껏 치켜올려 시선을 든다. 그리고는 은채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혼잣말을 계속 이어 붙였다.
"뭐야, 그새 튄거야? 우리 후배님 걸음도 빠르셔~"
그리곤 혼자 복도를 걸어간다.
장난끼 다분한 노골적인 무시에 은채는 당황한다. "어어.." 하며 나를 쫓아오며 계속 말을 걸지만
나는 여전히 딴청을 부린다. 결국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 내 앞을 막아선다.
"아, 선배 너무하시넹! 사람을 이렇게 무시하다니!?"
여전히 천장을 쳐다보며 시선을 피하는 나와, 그 앞에서 폴짝거리며 시야에 들고자 안간힘을 쓰는 은채.
"푸하하하!"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그 올망한 대립은 참지못한 웃음소리와 함께 스러졌다.
아~~ 너무 귀여워, 미치겠다 정말.
나는 은채를 지긋이 쳐다본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꿈 생각에 그녀의 얼굴 근처도 보기 힘들었는데, 그 묵직한 녀석은 어디로 감쪽같이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버린 머릿 속에, 지금 눈 앞의 그녀를 덧그린다.
거기엔 하얀 마음이 가득한 그녀가 있다.
퉁퉁 불어터진 눈이 아닌, 동그랗고 땡그란 눈을 지닌 은채가.
내 느낌으로는 한참을 쳐다본 것 같은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나보다.
충분히 따가울만도 한데 그녀는 지금 구부정했던 내 허리가 꼿꼿하게 펴진게 더 중요한 듯,
만족감을 얼굴 한가득 걸어두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옳지, 옳지!"
마치 나를 달래는 유치원 교사처럼 그녀는 보람찬 마음에 젖어 있었고, 얇팍한 허리를 받치는 양손도
그녀의 뿌듯함을 한껏 지탱해주고 있었다.
갑각의 눈을 벗어던진 나는 그녀를 쳐다본다. 계속 쳐다본다, 계속계속 쳐다본다.
그녀는 무엇을 바라는 걸까?
그녀의 의기양양함 뒤엔 무엇이 기다리는 걸까?
나 역시 그녀 못지 않게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먼지를 털어내듯 훌훌 날려보낸다. 복잡하고 정밀한 계산은
고도의 탑을 쌓을 수 있지만, 때론 무의식에 가까운 행동 하나가 지름길을 자처하기도 했다.
슥슥-
은채의 머리를 쓰다 듬었다. 향긋한 샴푸향이 싱그럽게 퍼진다.
"이제 괜찮지? 말 잘듣는 선배니까, 우리 후배님 하라는대로 꼭 그렇게 할께."
"후후."
"헤헤헤."
우리는 서로를 마주하며 한참을 웃었다.
만약 수업이 시작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 곳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어색함을 풀었다.
그녀는 함께 술을 마신 그날의 일을,
나는 오늘 새벽의 찝찝한 꿈을.
목표는 달랐지만 방향은 같았고, 우리는 나름의 답을 얻었으니까.
앞으로 더 크게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를 보고 두근거리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부끄럽게도 그 순간, 나는 발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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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모든 비축분을 연재분이 따라잡게 되었네요.
짬짬히 적어갔지만, 워낙 글 쓰는 속도가 느린지라 몇 달의 간격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군요.
이걸 좋아해야할 지, 슬퍼해야할 지 원...
순수 창작이라는게 이렇게 어려운 것이라니 많은 작가님들이 새삼 존경스럽습니다.
시놉시스와 나아갈 방향은 잡아놨지만, 살을 붙이는 과정이 매끄럽지만은 않네요.
나름의 설정과 납득할만한 인과관계가 허접하게 느껴질 따름입니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연재가 더욱 더뎌질테니 죄송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래도 하루에 한줄이라도 써내려간다면, 제자리에 멈추는 일만큼은 없겠죠?
이럴땐 제 글이 비교적 HOT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달빛요정의 <치킨런>처럼 언젠간 저도 잊혀지고 말까요?
"제발, 제발 그만하세요 제발..."
"너무 아파요.. 아악!.."
"아, 안돼..!!"
깜짝 놀라서 눈을 뜬다.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몸은 짓눌린듯 무겁고 구석구석마다 식은땀으로 축축하다.
잠시 끊겼던 사고의 퓨즈는 빠르게 교체되고 암순응에 적응한 눈으로 주변을 훑는다.
내 방이다.
상황의 위화감은 익숙한 장소로 씻어내린, 내 방이 확실하다.
그제서야 방금 전 일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턱 끝까지 차올라 회반죽마냥 굳어버린 탁한 숨,
빠르게 쏘아대는 좌심방과 쪼그라드는 폐, 어느 하나 정상적이지 않은 감각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쉰다.
꿈이다, 꿈이였어.
현실을 받아들이고 정리하기엔 아직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막 악몽에서 깨어났고, 이것 마저도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숫자를 50까지 세어본다.
.... 47, 48, 49, 50.
문제 없다.
그제서야 비로소 온몸의 긴장을 억지로나마 풀어낸다. 머리맡에 두었던 휴대폰을 집어든다.
4시 33분.
많이 잔건지, 못잔건지 모르겠지만 시계는 정확히 지금을 가리켰다.
나는 여전히 침대에 누운채 꼼짝도 않고 있다. 그리곤 휘발하는 기억을 붙잡고 배를 갈라 속을 끄집어 낸다.
어디서부터 시작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탁한 꿈 속에서 나는 누군가를 범하고 있다.
굉장히 탁하고 노이즈가 잔뜩 낀, 시야의 윗부분 태반 이상이 감가상각 되버린 상태.
나는 들끓어 오르는 도가니 그 자체였고, 아래엔 부드러운 형상이 존재한다.
남자는 아니다, 선이 가는 것이 여자가 틀림 없다.
누군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이미 시력은 빠른 속도로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기에.
아니다, 이 여자는 내가 분명 알고 있는 존재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아니다.
틀림없다. 은채다, 은채였다.
레드 아웃과 블랙 아웃을 반복하는 시각의 롤러코스터 앞에서도 나는
신기하게도 그녀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반갑고 또 반갑다. 겨우, 겨우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흥분이 잔뜩 고양되고 에피네프린이 분비된다. 교감신경에서부터 시작된 자극은 전신으로 번졌고,
당연하게도 그녀의 몸 안에 틀어박힌 자지도 한껏 딱딱해진다.
꿈에서 나는 그녀를 잔인하게 굴린다. 이유는 모르지만 마치 그렇게 해야한다는 당위성이 부여된 듯,
믿음과 사명을 다하여 몸을 놀린다. 그 증거로 아래에 깔려서 신음하던 은채의 얼굴은 심하게 부어있었고,
평소 당차던 눈망울은 잔뜩 찌그러져 탁한 부유물이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다.
내 손은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굉장히 강한 힘이 들어간, 왠만한 남자도 뻐근해질 악력을
은채는 온몸을 비틀며 감내한다. 나는 그 상황에 다다라서야 이리저리 시선을 옮긴다.
내가 있는 이 곳이 어딘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굉장히 허름한게 창고나 공사장 인듯,
은채가 빽빽대며 엉망진창으로 소리를 질러도 나는 아랑곳 않고 계속 움직인다.
"아으윽..! 제,제발..!!"
그녀가 온몸을 비튼다, 애처롭게도.
토막난 필름 같은 이 악몽 속에서, 어이없지만 나는 은채의 따뜻한 속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거기서부터 기억은 조금씩 선명해진다. 아마도 나는 일정 간격으로 은채를 때려온듯 싶었다.
그녀는 이미 이곳 저곳이 울긋불긋해 있었고 눈에는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행위의 모든 것을 증명해주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종료된 과거의 시점이 아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진행 상황"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여전히 의식적으로 손을 들고 그녀를 때린다.
때리는 부위는 따로 정해두지 않았으므로 손이 가는 모든 곳에 자국을 새겼다.
가장 만만한 곳은 뺨이다. 이미 실컷 때린 후였는지 양 볼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이곳 저곳에 손을 대고 있었다. 허벅지나 엉덩이를 때리는 손은 스스로도 놀랄만큼
빠르고 매섭다. 짝-! 하는 소리가 공간을 까랑까랑하게 울리면,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울음이
봇물처럼 터진다. 그러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빙글대며 같은 곳을 두어번 마저 때리곤 했다.
은채가 아무리 울부짖고 애원해도 멈추지 않는다. 그녀를 그저 연민의 수용체처럼 다룬다.
신기하게도 그런 상황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마치 죄책감이라는 부분을 식칼로 통째 도려내버린듯,
나 홀로 붕 떠버린 느낌이다. 한창을 그렇게 반복하면 은채는 이를 악물고 참아낸다.
개미 한마리, 손가락 한마디 못들어가게 단단히 틀어막으면, 나는 그제서야 손을 멈춘다.
그리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다고 칭찬한다.
그러면 은채는 잔뜩 일그러진 입매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순종의 표시를 흔든다.
굴욕적일 수 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온전히 잣대를 들이대기엔 나는 심히 무자비했고
그녀에겐 당장의 고통이 더욱 중요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감내한다.
어느새 내 손은 그녀의 얼굴로 내려온다.
장님이 코끼리 쓰다듬 듯, 손 끝의 감촉을 살려 구석 구석 훑어간다.
아직 솜털이 남아있는 발간 뺨, 도톰하고 말캉한 입술, 그 안의 가지런한 치아까지도 손 끝을 통해
오롯이 담는다. 그 모든 형태의 신호는 어두운 신경절을 새하얗게 그려내며 덧칠한다.
내가 아는 그녀다.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반갑다.
그녀를 더듬던 손에 조바심이 깃든다. 당장이라도 우그러뜨릴 듯 힘이 들어가지만 가까스로 억누른다.
그리곤 다 채워지지 않은 반쪽 그림의 완성을 위해 마저 손을 놀린다.
올망한 콧대와 그 아래의 앙증맞은 두 구멍, 동그란 이마와 거기서 이어진 올 곧은 눈썹까지도.
하나 하나 채워질 수록 마음이 들뜬다. 눈부신 은채의 모습이 완성되어 간다.
그녀는 내 안에서 더없이 활짝 웃고 있다.
뭐가 그렇게 좋은건가? 내가 마음에 든 건가?
설레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채 마지막 방점을 찍어간다.
비어 있는 그녀의 마지막 부위, 대망의 화룡점정을 위해 그녀의 눈으로 손을 옮긴다.
물컹한 감촉과 함께 은채의 모습이 완성된다.
예쁘고 아름다운 그녀다. 단지 평소의 똘망똘망한 눈이 아닌, 퉁퉁 불어터졌다는게 다를 뿐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깨닿는다.
시각을 넘어선 초월적인 감각의 인지,
울어서 잔뜩 어그러진 그녀의 눈,
그 너머의 시선이 나로 하여금 꿈 속의 현실로 회귀시킨다.
나는 은채에게 저열한 짓을 하고 있다.
나는 걸작을 완성하는 예술가가 아니다.
마지막 한땀이 남은 줄 알았건만, 밑그림도 그리지 못한 상태다.
그렇게 망상에서 깨어난다.
혼란스럽고 실망스럽다. 나는 전혀 고상하지도, 고결하지도 않았다. 어떠한 대의도, 필연의 선택도 없었다.
풀이 죽는 순간 무섭게도 현실을 확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푹 꺼진 순결의 자리엔 본성의 욕망이 치환된다.
아무럼 어떠냐, 이게 현실이라면 여기에 순응하면 그 뿐.
나의 롤플레이는 계속 된다.
펑펑 울어서 부은 눈이 그녀에게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손 끝에서 느껴지는 도톰한 감촉이 음란하게 느껴진다.
내 입에선 끈적한 단내가 흘러내린다. 그녀를 다루는 손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은채의 두려움이 손끝 그대로 느껴졌고, 나는 그 이상으로 웃는다.
내 손은 다시 옮겨가고, 은채의 눈썹은 파르르 떨린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나를 피하지 못한다.
아니, 그러지 않는다.
왜인지 모르지만 나도 그녀도 잘 알고 있는 무언의 약속이니까.
우리의 역할은 편향성 밖에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하며
끝없는 반복의 가속을 끝내곤 마침내 나는 잠에서 깬 것이다.
생각만해도 아찔한 꿈이다.
얼마나 생생했던지, 그게 꿈이라는 사실을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도의 한숨 한번 내쉬지 못한채
결국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여느 때와 같이 식탁에는 대여섯가지의 푸짐한 반찬이 차려져 있다.
평소라면 아래 위로 잔뜩 엉겨붙은 눈을 비비며 맛있게 한숟갈 뜨겠지만 그러질 못하고 있다.
"아들, 속이 안좋니?"
주저하는 모습이 당신께는 아픈걸로 보였을까, 어머니는 그 새를 못참고 걱정 가득한 음색으로 되묻는다.
"아, 아니에요. 잠이 좀 덜 깨서..."
나는 대충 얼무어버리며 평소처럼 한 숟갈 뜬 다음 야무지게 입에 넣는다.
깔깔하고 퍼석하다.
막상 떠먹은 나 조차도 놀랄만큼 맛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일단 꿀떡꿀떡 삼킨다.
주머니에 모래를 채워넣은 듯, 그렇게 배만 불러온다. 적당한 타이밍에 숟가락을 놓고는 얼렁뚱땅
집을 빠져나왔다. 한시라도 빨리 은채를 두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다.
"아, 선배 왔어..? 헤헤"
은채는 그 날의 서먹함이 아직 남았는지 말꼬리를 흘린다.
사푼거리는 발걸음과는 달리,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초점이 평소와의 간격을 반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뿐이다. 그녀는 "고작" 그 때의 일만으로 나를 어색하게 대할 뿐이다.
"......"
나는 비로소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낀다.
새벽부터 잠을 설치며, 밥을 먹는둥 마는둥 헐레벌떡 학교로 달려왔다.
그럴리가 없겠지만, 물론 그럴 수 없지만 혹시라도 내가 그녀를 엉망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는 사로잡혀 있었고, 그걸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강의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도착했음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있었지만
초조함까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은채가 나타나길 1분 1초를 쪼개어가며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녀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랬다, 도무지 얼굴을 볼 수 없을거라 생각했기에.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았겠지만, 불안한 마음은 나를 연신 쪽계단으로 몰아넣어 담배를 입에 물렸다.
그렇게 40분이나 기다려서 확인한 은채는 아무 탈 없이 무사했다.
나는 목 울대가 위로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기도를 꽉 조이는 목 근육에 숨이 막히지만 억지로 쪼개어 만들어 말을 꺼냈다.
"은채야, 빨리 왔네?"
일부러 명랑한 척 구는 목소리에 그녀가 눈치 챌까, 손아귀에 땀이 한 웅큼 고인다.
제발 그냥 그대로 넘어가 줘.
"후후, 헤헤..~"
은채가 배실대며 다가온다. 그녀의 한 걸음, 걸음이 천천히 눈으로 빨려들어온다.
웃기게도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선 채 은채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고개를 푹 숙이고있는 내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그녀의 발.
조막만한 그녀의 발은 앙증맞을 정도로 예뻤지만, 그 이외에는 도무지 볼 곳이 없었다.
아니, 볼 용기가 안난다.
다 꿈이라고, 그저 악몽이 틀림없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시큼한 노이즈는 평소보다 좀 오래갈 뿐이며,
그 것은 당사자를 만나서 무사함을 확인하면 금방이라도 걷어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저 발이 뭐라고.
자꾸만 생각나게 만든다.
내가 움켜 쥐었던 발, 발버둥 치는 그녀를 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붙잡은 그 발.
한 손에 충분히 잡을 정도로 앙증맞던 은채의 발이 자꾸만 오버랩 되어갔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 올수록 칙칙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꿈에서 잡아본거랑 사이즈가 비슷해보이는데..."
인지는 사실의 장벽을 넘어 인식의 길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부끄럽게도 그 순간, 그녀를 앞에 두고 내 자지가 꺼덕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비슷하다면, 발 사이즈가 비슷하다면..."
"혹시 다른 곳도 비슷하지 않을까..."
떨쳐내려는 힘이 어린애 장난 같았는지, 꿈과 현실의 괴리는 한없이 0에 가깝게 수렴해갔다.
순간적으로 핑 하고 눈 앞이 돈다. 그래픽카드가 맛이 간 컴퓨터처럼 수 많은 줄이 동공을 가로지른다.
건강에 이상이 있었던 적은 없다. 당연히 과거 병력도 없고 하드웨어적 문제점은 아니다.
시력에 입력된 에러는 정신적인 문제, 인지하는 소프트웨어가 상황의 간격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은채의 향기가 강하게 난다. 그녀에게서는 항상 민트향의 샴푸냄새가 난다.
나는 엘라스틴 쓰는데.
결코 내 몸에서 나지 않는 익숙한 냄새는 나를 슬쩍 튕기며 자극한다.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사실 새벽의 그 꿈은 오늘의 연장선에 있는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가끔 그런경우가 있지않던가.
데자뷰( Deja Vu ).
그 꺼림직한 기시감을 현현할 첫번째 단추가 오늘, 그것도 바로 지금이다.
머리는 느리지만 차곡차곡 돌아간다.
지금부터 잘만 만들어가면 분명히 다시 한번 그 상황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꿈을 잘 되짚어보자.
나와 은채는 분명 외딴 곳, 가령 창고 같은 곳에 있었다.
그 상황을 맞추어내려면 그녀를 그 장소로 데려갈 필요성이 있다.
타일러 볼까, 겁을 줄까, 아니면 때려서 끌고 갈까.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우로보로스의 형상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짝-!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내 등짝이 시원스레 울린다.
은채에게 속마음을 들킬까봐 둥글게 말았던 몸이 반사적으로 펴진다.
은채다.
그녀가 내 앞에 서 있다.
"어허, 선배! 벌써부터 자세가 그렇게 구부정해서 되겠어?"
짐짓 엄한 표정을 짓는 그녀가, 정말 너무나도 말도 안되게 예뻐보였다.
"자자, 빨리 허리를 펴시오, 안그러면 척추가 잉잉 웁니다?"
은채는 연신 내 등짝을 팡팡- 친다. 그렇지만 아프진 않다, 오히려 짜르르 울리는 것이 시원한 느낌이다.
나는 싱글벙글한 얼굴을 절반도 숨기지 못한 채 허리를 곧추 세운다.
그녀의 유치한 보폭에 스스로를 맞춘 것이다.
"본디 소인은 농부의 자손인지라 저도 모르게 자세가... 어라, 어딨지? 안보이네?"
나는 턱을 한껏 치켜올려 시선을 든다. 그리고는 은채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혼잣말을 계속 이어 붙였다.
"뭐야, 그새 튄거야? 우리 후배님 걸음도 빠르셔~"
그리곤 혼자 복도를 걸어간다.
장난끼 다분한 노골적인 무시에 은채는 당황한다. "어어.." 하며 나를 쫓아오며 계속 말을 걸지만
나는 여전히 딴청을 부린다. 결국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 내 앞을 막아선다.
"아, 선배 너무하시넹! 사람을 이렇게 무시하다니!?"
여전히 천장을 쳐다보며 시선을 피하는 나와, 그 앞에서 폴짝거리며 시야에 들고자 안간힘을 쓰는 은채.
"푸하하하!"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그 올망한 대립은 참지못한 웃음소리와 함께 스러졌다.
아~~ 너무 귀여워, 미치겠다 정말.
나는 은채를 지긋이 쳐다본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꿈 생각에 그녀의 얼굴 근처도 보기 힘들었는데, 그 묵직한 녀석은 어디로 감쪽같이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버린 머릿 속에, 지금 눈 앞의 그녀를 덧그린다.
거기엔 하얀 마음이 가득한 그녀가 있다.
퉁퉁 불어터진 눈이 아닌, 동그랗고 땡그란 눈을 지닌 은채가.
내 느낌으로는 한참을 쳐다본 것 같은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나보다.
충분히 따가울만도 한데 그녀는 지금 구부정했던 내 허리가 꼿꼿하게 펴진게 더 중요한 듯,
만족감을 얼굴 한가득 걸어두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옳지, 옳지!"
마치 나를 달래는 유치원 교사처럼 그녀는 보람찬 마음에 젖어 있었고, 얇팍한 허리를 받치는 양손도
그녀의 뿌듯함을 한껏 지탱해주고 있었다.
갑각의 눈을 벗어던진 나는 그녀를 쳐다본다. 계속 쳐다본다, 계속계속 쳐다본다.
그녀는 무엇을 바라는 걸까?
그녀의 의기양양함 뒤엔 무엇이 기다리는 걸까?
나 역시 그녀 못지 않게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먼지를 털어내듯 훌훌 날려보낸다. 복잡하고 정밀한 계산은
고도의 탑을 쌓을 수 있지만, 때론 무의식에 가까운 행동 하나가 지름길을 자처하기도 했다.
슥슥-
은채의 머리를 쓰다 듬었다. 향긋한 샴푸향이 싱그럽게 퍼진다.
"이제 괜찮지? 말 잘듣는 선배니까, 우리 후배님 하라는대로 꼭 그렇게 할께."
"후후."
"헤헤헤."
우리는 서로를 마주하며 한참을 웃었다.
만약 수업이 시작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 곳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어색함을 풀었다.
그녀는 함께 술을 마신 그날의 일을,
나는 오늘 새벽의 찝찝한 꿈을.
목표는 달랐지만 방향은 같았고, 우리는 나름의 답을 얻었으니까.
앞으로 더 크게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를 보고 두근거리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부끄럽게도 그 순간, 나는 발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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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모든 비축분을 연재분이 따라잡게 되었네요.
짬짬히 적어갔지만, 워낙 글 쓰는 속도가 느린지라 몇 달의 간격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군요.
이걸 좋아해야할 지, 슬퍼해야할 지 원...
순수 창작이라는게 이렇게 어려운 것이라니 많은 작가님들이 새삼 존경스럽습니다.
시놉시스와 나아갈 방향은 잡아놨지만, 살을 붙이는 과정이 매끄럽지만은 않네요.
나름의 설정과 납득할만한 인과관계가 허접하게 느껴질 따름입니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연재가 더욱 더뎌질테니 죄송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래도 하루에 한줄이라도 써내려간다면, 제자리에 멈추는 일만큼은 없겠죠?
이럴땐 제 글이 비교적 HOT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달빛요정의 <치킨런>처럼 언젠간 저도 잊혀지고 말까요?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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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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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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