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남과 연 교수.
사실 이 둘은 깊은 인연을 이어왔다. 아니, 연 교수 입장에서는 선남이 악연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문제는 이 둘의 관계에 있지 않았다. 선남은 오로지 강 이사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니...
최근 몇 개월을 제외하고 선남은 연 교수가 만났던 남자들을 전부 관리해 왔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 교수와 만나지 말 것’을 협박한 것이었지만... 어찌 됐든, 연 교수를 지나쳐 간 남자들은 전부 선남이 알고 있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들이 연 교수와 헤어지게 된 이면에는 전부 강 이사의 지시를 받은 선남의 협박 때문이란 것도 사실이었다.
그만큼 선남은 연 교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연 교수 역시 선남의 존재 및 그의 역할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단지 그것 뿐 이기도 했다. 물론, 강 이사의 비서 역할을 하는 선남이 종종 연 교수와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지난 10년 간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가벼운 농담을 할 만큼의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남의 입장에서 연 교수는 강 이사의 아내였고, 그녀의 사생활 - 연 교수가 만나는 남자 - 대부분을 알고 있었지만 딱 그 뿐이었다. 물론, 인간적으로 연 교수의 삶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건 비단 연 교수 뿐 만 아니라 강 이사의 삶도 그러했다. 어차피 선남 입장에서는 연 교수든, 강 이사든 이해를 할 이유도 없었고, 단지 강 이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뿐, 연 교수의 남자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반대로 연 교수 입장에서 선남은 꼴 보기 싫은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모든 지시를 강 이사가 했고 선남은 그것을 따르는 것 뿐 이라고 생각했지만, 종종 마주칠 때의 선남의 표정은 항상 무표정이었기에 연 교수는 그 역시 남편인 강 이사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끼리끼리 뭉친다라는 말이 있듯이 연 교수가 생각하기에는 선남 역시 냉혈한 사람이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물론, 그런 것을 떠나서 자신의 남자들에게 협박을 하는 직접적인 사람이 선남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연 교수는 그가 싫을 이유가 충분했다.
이렇듯 선남과 연 교수는 서로 직접적으로 교류할 일도 없고, 평소에 관심을 둘 이유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인 호감은 더더욱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선남에게 연 교수가 직접적으로 전화를 한 것이었다. 신분을 밝힌 연 교수의 목소리를 듣고 선남은 내심 당황 할 수 밖 에 없었다. 도대체 왜 연 교수가 자신에게 직접 전화를 했을까?
“아... 사모님이시군요.”
- 갑작스레 전화해서 미안해요. 번호는... 우연찮게 알게 되었어요.
당황 한 선남과는 달리 연 교수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있었다. 물론, 계획적으로 선남에게 전화를 건 당사자이기에 여유가 있는 건 당연할 수도 있었지만... 어찌 됐든, 선남의 입장에서는 연 교수의 전화도 당황스러웠지만, 자신의 휴대폰을 어떻게 알고 전화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연 교수는 ‘우연’이라는 말을 쓰며 묻기도 전에 대답을 했고, 선남은 ‘정말일까?’라는 의문이 들 뿐이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무슨 일로...”
- 이 과장. 지금 통화 가능하겠죠? 옆에 남편이 있다면... 나중에 했으면 하는데...
선남은 연 교수의 연락이 반갑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복잡한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은 자신에게 해가 되면 해가 됐지, 득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40년 간 살아오면서 깨달은 경험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이런 상황에서 연 교수는 강 이사의 부존재라는 단서를 제안하고 있었다. 선남의 입장에서는 다시 한 번 당황할 수 밖 에 없었다. 강 이사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연 교수와 대화를 할 거리라도 있나라는 생각을 순간 해봤지만, 머릿속은 백지상태일 뿐이었다.
“혼자이긴 합니다만... 무슨 일 인지...”
- 아 그래요?
선남의 혼자라는 말에 연 교수의 목소리 톤이 아주 순간이었지만 활기가 느껴졌고, 선남은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제가 사모님과 대화를 할... 그런 게 있나 싶은데...”
- 제가 이 과장에게 용건이 있어요.
“... 말씀하시죠.”
- 호호. 이 과장 매우 궁금하나 봐요? 아니, 당황을 하셨으려나?
도대체 연 교수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선남은 알 길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남자 문제 밖에 없을 것 같은데, 정작 그 문제에 대해서는 최근 몇 개월간 선남이 손을 대지 못했다. 강 이사를 따르는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 그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네. 솔직히 당황스럽니다. 이런 적이 처음이라...”
- 호호... 그래요?
“사모님. 무슨 일인지 말씀을 해주셔야...”
- 그래요. 사실 내가 이 과장에게 용건이 있는데... 전화로는 하기 힘들 것 같고... 한 번 만났으면 하는데...
만나자는 연 교수의 제안에 선남이 머리를 굴려보지만, 딱히 연 교수와 만남까지 하면서 풀 문제는 없었다.
“꼭... 만나야 하나요?”
- 만나서 대화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눈치 챘겠지만... 그이가 이 사실은 몰랐으면 하군요.
“음.”
단호히 거절을 해야한다고 생각을 한 선남이었지만, 또 그렇게 하기에는 현재 처한 상황이 매우 어려웠다. 연 교수가 직접 만나자고 할 정도면 분명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선남은 이번에 거절을 한다고 해서 그녀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 어렵게 고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이 과장.
“전 솔직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사님 모르게 만나자고 제안을 하신 이유라도... 알고 싶습니다.”
- 훗... 좋아요. 그 이와 이 과장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전화로는 힘들 것 같아서... 직접 만나서 눈을 보고 대화를 해야 진솔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겠어요?
연 교수의 말을 들으며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선남이지만, 그녀의 대답은 모호할 뿐이었다.
‘나와 강 이사의 문제라... 도대체 뭘까?’
수수께끼와 같은 연 교수의 제안, 선남으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문제가 달렸다는 연 교수의 말을 듣고서는 거절하기 힘들었다.
“꼭 만나서 해야... 합니까?”
- 그럼요.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그이가 알아서는 안돼요.
사실 선남은 불안했다. 배고픈 자신의 앞에 사과가 놓여 있는데, 먹으면 죽을 수 밖 에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배고픔을 못 이겨 먹어야 하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연 교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아직 알 길은 없었지만, 선남은 예감 상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사님 몰래 만나는 건....”
- 마음에 걸리나 봐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 이 과장. 그래도 나랑 만나서 대화를 하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도... 도움이요?”
- 그건 와 보면 알겠죠. 선택해요.
연 교수의 ‘도움’이라는 말에 선남은 급하게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선남은 최근에 강 이사에게 벗어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연 교수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선남은 연 교수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연 교수의 입에서 ‘도움’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선남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젠장.’
선남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정보 역시 없었다. 단지 연 교수의 이유 모를 제안을 받았을 뿐이고 선남은 선택을 해야 했다.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선남은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지금 받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연 교수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 그때도 과연 피할 수 있을 것인가? 회의적이었다.
“알겠습니다.”
- 호호. 그래요? 그러면 시간이 언제 되나요? 이 과장.
“사실... 지금 옆에 이사님이 안 계십니다. 지금이 가장 편안 시간대입니다만...”
- 이 과장... 좋아요. 지금 집으로 와요.
집으로 오라는 연 교수의 말에 내심 당황한 선남이었다.
- 나랑 밖에서 만나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을까요? 이 과장.
“그렇다고 그냥 가기에는...”
- 이 과장.
“네.”
- 나 교수예요. 그러면 대기업의 이사를 모실 정도의 사람이라면... 머리는 쓸 수 있어야겠지요. 호호.
사실 연 교수의 제안은 일리가 있었다. 선남이 연 교수를 밖에서 만나는 건 오히려 좋지 않았다. 선남을 감시하는 자들에게 대화 내용을 들킬 위험도 있었고, 그렇다고 차안에 있거나 외곽으로 빠질 경우 사진이나 영상에 찍히면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오히려 연 교수의 집 - 강 이사의 집이기도 했으나, 보통 때는 잘 들어가지 않았다 - 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었다. 물론, 이 역시 감시자들에게 들킬 확률이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연 교수는 강 이사의 아내였다. 그로 인한 핑계거리는 만들 수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1시간 후에 가도록 하지요.”
- 기다릴게요.
연 교수와의 전화를 끊은 선남은 지체할 시간도 없이 길거리에서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강 이사가 차를 직접 몰고 가버렸기 때문에 선남에게는 차가 없었다. 다행히도 빈 택시를 기다린 지, 3분도 지나지 않아서 선남은 택시를 탈 수 있었다. 택시의 뒷좌석에 탄 선남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택시 기사에게 말을 했다.
“가까운 대형 서점으로 갑시다.”
***
셀 수도 없이 많은 묘지가 있었고, 그 묘지들은 대부분 잘 관리가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묘지의 무덤 앞에 있는 비석들의 경우 죽은 자들을 위한 것 치고는 크고 화려한 것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고급스럽고 크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비석들이 많은 것만 보더라도 이곳이 생전에 있는 자들이 많이 묻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은 자들을 위한 이 공간에 현재 딱 한 사람만이 산 사람이었는데, 뜻밖에도 그 사람은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강 이사였다.
강 이사는 한 무덤 앞에 멀거니 서 있었다. 혹자가 본다면 서서 죽어버린 사람처럼 아무 움직임 없이 강 이사는 서 있었는데, 그래도 오로지 눈동자 하나는 그의 앞에 있는 무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무덤 앞에는 역시 고급스러워 보이는 비석이 하나 있었고, 생전에 가졌던 망자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최수진.
최수진, 지금은 이 세상을 떠나 잊혀져버린 이름이었지만, 그녀는 K 건설 강 회장의 아내였고, 그녀의 무덤 앞에 서 있는 강 이사의 형수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날개 없는 천사’라며 사랑을 받았지만, 정작 그녀는 많은 선행을 한 삶과는 다르게 5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런 수진의 무덤 앞에 왜 강 이사가 찾아왔을까?
“형수...”
한참동안 무덤을 바라보던 강 이사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 말이요. 형수가 떠난 2년 간 생각해 봤는데... 모르겠소.”
분명 대답하는 자는 없었다. 아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 이사는 무덤의 주인이자 이제는 망자인 수진을 향해 계속 홀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쪽지 말이요.”
강 이사의 오른손에는 작은 메모지 하나가 들려 있었고, 그건 수진이 죽기 바로 직전에 자신의 지인을 통해서 강 이사에게 알린 유언 중 하나였다. K 건설을 이끄는 강씨 집안에서 오로지 강 이사만이 이 메모지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고작... 13글자... 참 어렵소. 왜 죽기 전에 나에게 이런 쪽지를 남겼단 말이오. 무엇을 위해서? 형수의 뜻이 무엇이오? 대답 좀 해보시오.”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강 이사의 질문에 대답을 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스산하게 부는 바람만이 이곳에 강 이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사람도 없음을 알려왔다.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형수의 뜻을 모르겠소. 하지만... 난 결정했소. 지난 2년 간 생각을 했고... 이게 형수의 뜻이 아닐 것이라 생각되지만... 난 내 뜻대로 할 것이오. 그것을 말하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이오.”
강 이사의 눈에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은 알 수 없는 강 이사의 단호함을 저지하기 위해서인지 바람은 좀 더 세차게 불며 그의 눈을 괴롭혔다. 잠시 먼지들 때문에 눈을 깜빡인 강 이사가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소. 지금 이렇게 말려도... 내 결정은 바뀌지 않소. 내 결정이 싫다면 왜 죽기 전에 나에게 이런 쪽지를 남겼단 말이오.”
강 이사는 자신의 오른손에 쥐고 있는 수진이 남긴 메모지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녀가 남긴 13글자의 유언을 중얼거렸지만, 세찬 바람 소리에 금방 사라져버렸다.
“....몽...에서...천...가...태...다.”
수진의 마지막 유언을 중얼거린 강 이사는 메모지를 자신의 품속에 넣었고, 수진의 무덤을 향해 마지막 말을 남겼다.
“더 이상 찾지 않을 것이오. 편히 쉬란 말도 못하겠소.”
강 이사는 수진의 무덤에서 몸을 돌렸고, 바람은 세차게 불며 그를 잡는 듯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강 이사의 발길을 잡을 수 있는 건 없었다.
***
25살의 이미연.
꽃다운 나이이기도 하지만, 외모만큼은 어지간한 여자 연예인보다 뛰어난 그녀였다. 길거리를 걸어가면 젊은 남자는 물론, 숟가락을 들 힘이 있는 남자라면 그 누구라도 한 번쯤은 쳐다볼 정도로 매력이 넘친 미연이었지만, 현재 그녀는 강 이사의 정부에 불과했다.
소위 스폰이라는 관계가 넘치는 시대였기에 나이는 많지만 그만큼 돈 많은 남자가 젊고 아리따운 여자들에게 금전적 대우를 해주며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이 그리 이상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이런 관계가 사회적 인식 및 윤리적으로는 옳다고 할 수 없었지만, 이미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버린 이런 관계를 법을 통해서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연의 경우에는 더더욱 용서를 하기 힘든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 경우에는 강 이사의 책임도 다분했다. 미연에게 있어 강 이사는 자신에게 금전적 대우를 충분히 해주는 후원자이기도 - 돈을 받고 육체적 관계를 해주는 사이 - 했지만, 그 이전에 중고는 물론 대학까지 동창인 친구 희정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무려 10년이 넘게 친하게 지낸 친구의 아버지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미연이기에 일반인들의 시선으로는 곱게 볼 수야 없었지만, 정작 미연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미 강 이사가 주는 돈의 맛에 흠뻑 취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생각을 해보라. 아무것도 안하고 나이든 남자를 상대해주는 것 뿐 인데, 고급 아파트, 고급 차, 명품은 물론 한 달에 1000만원이 넘는 돈을 받는데, 미연으로서는 이 삶을 겪은 후로는 포기할 수도 없었고, 포기해서도 안 되었다. 또래의 그 누구보다 편안하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질 만능주의, 그러나 처음부터 미연이 이런 삶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연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항상 삶에 지쳐 살아왔다. 이런 지침에는 가난이라는 세상 그 누구라도 공감하는 문제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일개 개인의 삶에 치명적인 역할을 했다.
무언가 항상 부족하다는 것은 사람을 질리게 만들고, 삶의 여유는커녕,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마저 할 정도로 이 세상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미연 역시 그 부류 중 한 사람이었다.
미연은 뛰어난 미모를 받았지만, 그녀의 집은 내내 가난했다. 뛰어난 미모로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긴 했지만, 그만큼 질시도 받아야 했다. 여자들의 질투가 그러했고, 나중에 집이 가난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좀 산다는 여학생들에게는 멸시까지 받아야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미연에게는 사는 게 고통 그 자체였다. 왜 자신이 특정인들에게 미움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꼭 개인의 이해만으로 흘러가지도 않았고, 문제가 생기더라도 풀 수가 없었다. 이때 미연의 손을 잡아준 이가 강 이사의 외동딸인 강희정이었다. 희정은 비록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으나, 주위의 그 누구보다 힘이 있었다. K 건설이라는 대기업의 이사가 아버지였고, 큰아버지는 회장이었다. 학교 선생님들부터 희정을 대하는 것이 달랐고, 그녀는 자신이 큰 힘을 가지고 있음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힘들어하는 미연을 구해주는 건 희정에게는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미연은 자신에게 손을 내 민 희정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그때부터 이 둘은 친구가 되었다. 미연이 집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학창시절 및 대학 시절까지도 희정은 미연에게 어느 정도 물질적 지원을 해줬고, 미연은 항상 희정에게 고마움을 가지고 살았다.
물론, 이 둘은 친구였다. 허나 사람 관계라는 것이 한 쪽이 계속 지원을 하고, 한 쪽이 계속 받기만 한다면 친구라는 관계도 아주 묘하게 바뀌기 마련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미연은 희정을 모시고 있었다. 친구라기보다는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같은 관계가 되었다. 일례로 대학을 다닐 때에도 희정은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미연에게 그것을 시켰고, 미연은 당연하다는 듯이 커피숍으로 달려갔다.
미연에게는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의 대학 등록금까지 내주는 희정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지만, 이런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리고 2년 전, 미연은 희정의 말 몇 마디에 크나 큰 복수심이 가슴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중학교 동창에 간 미연과 희정은 마음껏 술을 마시고 놀았고, 미연은 화장실을 가다가 우연찮게 희정과 그녀들의 동창이 하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미연이 아직도 갖고 놀고 있어?”
“그렇지... 그 년... 돈만 주면 가랑이도 벌릴 년이야. 돈에 미쳤지. 나 같으면 자존심 상해서라도 안 할 텐데...”
“희정이 네가 왕따 시킨 줄도 모르지?”
“힘들 때 내가 도와주니까... 아주 충성을 다하던걸? 호호. 개 같지 않아? 주인이 몽둥이로 때려도 밥 조금 주면... 꼬리 살랑살랑 흔들고...”
“호호호. 참 웃기네.”
“얼굴이 반반해서 남자들은 또 존나 꼬이던데... 그 꼴 보기 짜증나서... 주위 남자들에게 갈보라고 소문냈는데... 그 년만 몰라. 나중에 술 먹여서... 남자들 불러다가 한 번씩 박게 해준다고 했는데... 조만간 해봐야지.”
“야... 그건 너무.... 재밌겠다야... 호호.”
미연은 충격에 빠졌고, 그 날 동창 모임에서 어떻게 있었는지조차 기억을 하지 못했다. 단지 중간에 몸이 안 좋아서 일찍 집에 들어간다는 말만 했을 뿐, 미연은 그날 길거리에서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울지 않으면 가슴에 쌓인 그 무언가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미연은 희정을 조금씩 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되도록 희정 앞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내비치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술자리를 가지더라도 취할 정도로 마시지 않았다. 이런 미연의 변화에 희정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갖긴 했지만, 취업이 걱정이라는 미연의 말에 희정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시간이 흘렀고, 대학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을 시점이었다. 미연에게는 뜻밖의 사건이 하나 생겼는데, 바로 모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연예인 제의를 받은 것이었다. 워낙에 뛰어난 미모를 가졌던 미연이기에 우연찮게 길거리에서 그 제의를 받았고, 한동안 미연은 그것을 고심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가난이 너무너무 지긋했기 때문이었다. 미연은 대중매체에 보이는 연예인들의 삶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위치에 서면 누구도 자신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더더욱 친구라 생각했던 희정에게 더 이상 무시를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미연은 모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노크를 했고, 본격적으로 연예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연이 모르는 세상 이치가 하나 있었다. 믿을만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경우에는 공개 오디션이 기본이었고, 설령 그 공개 오디션을 통해서 후에 연예인이 되어도 엔터테인먼트 회사와 불공정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미연이 몸담은 회사는 일반인이 이름조차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곳이었다.
결국 미연에게 다가온 것은 접대였다. 사회 유명 인사들에게 성 접대를 하면서 미연이 연예인이 되길 바라는 게 회사의 마음이었다. 미연은 거절을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가 없었다. 계약상에서도 회사에 비해 터무니없을 정도의 약자이기도 했다. 울며 겨자 막기로 성 접대에 나선 미연은 몇 차례에 걸쳐 정치인 및 방송국 PD에게 몸을 맡겨야 했고,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단 몇 차례의 성 접대였지만, 미연은 지쳐만 갔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 길도 없었다. 그렇게 힘든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미연의 앞에 나타난 남자가 강 이사였다.
강 이사 역시 접대를 받으러 나왔고, 그 자리에서 미연을 만났다. 그리고 둘은 서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이 둘은 미연이 어릴 때부터 수차례에 걸쳐 만난 적이 있었고, 그녀가 대학 시절에는 등록금을 강 이사가 대신 내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 물론, 표면상으로는 희정이 돈을 건넸지만, 이 사실은 강 이사도 알고 있었다 -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이 둘은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인사를 했고, 또 술자리도 가졌다. 그러나 밤은 함께 보내지 않았다.
아무리 여자를 좋아하는 강 이사라도 자신의 하나 뿐인 딸의 친구와 관계를 가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만남은 미연에게 큰 변화를 주었다. 미연은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도움을 준 강 이사의 실체를 알 수 없었다. 물론, 궁금해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만남을 통해서 미연은 희정의 아버지인 강 이사가 여자를 즐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적극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몇 번의 접대 후의 결과가 신통치 않아서 연예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흐릿해진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미연은 강 이사에게 연락을 시도했고, 강 이사와의 두 번째 술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술자리에서 미연은 강 이사 앞에서 울었다. 또 그동안의 사정을 말하면서 강 이사에게 매달렸다. 강 이사는 미연의 사정을 듣고 그냥 넘어갈 수 없었기에 꽤 큰돈을 들여서 미연을 그녀가 소속된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빼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분명 강 이사가 희정의 아버지로서 미연에게 베푼 선행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 이 둘이 만났을 때에는 더 이상 친구의 아버지와 딸의 친구 관계가 아니었다. 미연은 적극적으로 강 이사를 유혹하기 시작했고, 이성의 마지막 끈을 놓지 않았던 강 이사는
‘이건 아닌데’라는 머릿속 울림이 있었지만, 결국 미연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미연은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미연과 하룻밤을 보낸 강 이사는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미연과 강 이사는 서로가 원하는 바를 채우며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관계가 시작되면서 미연은 전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희정을 비웃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모멸감을 준 친구의 아버지가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으니... 미연은 일종의 희정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미연은 강 이사가 마련 해준 돈으로 아주 풍족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란 것이 간사하게도 하나가 충족되면 또 다른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배가 고프면 당장 빵 한 조각이 아쉽지만, 배가 부르면 편안한 잠자리가 떠오르지 않던가.
미연은 젊었다. 비록 강 이사와 육체관계를 맺고 있긴 하지만, 그건 정신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행위가 아니었다. 강 이사를 사랑해서 하는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강 이사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미연은 진정한 사랑을 원했다. 그리고 또래의 젊은 여자들처럼 비슷한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이때쯤 대학 시절 미연에게 관심을 보이던 남자와 우연찮게 연락이 닿았고, 미연은 스트레스도 풀 겸 그 남자와 종종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강 이사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그는 50살의 나이를 가지고 있었고, 25살의 청년이 갖고 있는 젊음과 감성은 가질 수가 없었다. 미연에게는 그게 사랑이 아닐지라도, 매우 신선함은 분명했다.
호기심이 생긴 미연은 약 한 달 전부터 그 남자를 직접 만나기 시작했다. 물론, 강 이사가 집에 오는 날은 만날 수 없었고, 이 만남 역시 강 이사 몰래 진행되었다. 강 이사 앞에서는 아양을 떠는 그녀였지만, 어떻게 보면 그건 미연에게 있어 생존을 위한 하나의 행동일 뿐이었다. 일종의 직업과 비슷했다. 그에 반하여 자신의 또래 남자를 만나는 건, 여가 생활과 비슷했다. 여유와 즐거움이 공존했고, 그 속에서 20대 여성의 건강함을 느낄 수 있는 미연이었다.
이 날 역시 미연은 강 이사 몰래 그 남자와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아침에 만나서 조조 영화를 봤고, 맛있는 점심도 먹었으며, 드라이브를 한 후, 공원 산책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오랜만에 서점에 와 있었다. 남자와 서점에서 이런저런 책을 뒤적이며 키득거렸고, 미연이 지금이 너무나 행복했다.
“나... 잠시 화장실 좀...”
미연이 남자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말을 했다. 남자의 고개 끄덕거림을 본, 미연은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화장실을 향했다. 미연이 화장실에 온 이유는 생리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여자들이 꼭 그런 이유 때문에 화장실은 찾는 건 아니었으니...
세면대에 있는 대형 거울을 통해서 화장 상태를 확인한 미연은 미흡한 부분에 대해서 화장을 좀 더 하고 옷매무새를 다시 확인했다. 미연은 거울을 통해 본 자신의 모습에 만족감을 느꼈고, 어떤 남자가 보더라도 치명적이게 느껴질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다시 남자와의 데이트를 위해서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미연은 자신의 오른 쪽 어깨에서 낯선 남자의 손길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엄마야!”
놀란 미연이 작은 비명과 함께 몸을 돌려서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미연의 눈에는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바로 선남이었다.
...계속
사실 이 둘은 깊은 인연을 이어왔다. 아니, 연 교수 입장에서는 선남이 악연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문제는 이 둘의 관계에 있지 않았다. 선남은 오로지 강 이사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니...
최근 몇 개월을 제외하고 선남은 연 교수가 만났던 남자들을 전부 관리해 왔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 교수와 만나지 말 것’을 협박한 것이었지만... 어찌 됐든, 연 교수를 지나쳐 간 남자들은 전부 선남이 알고 있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들이 연 교수와 헤어지게 된 이면에는 전부 강 이사의 지시를 받은 선남의 협박 때문이란 것도 사실이었다.
그만큼 선남은 연 교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연 교수 역시 선남의 존재 및 그의 역할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단지 그것 뿐 이기도 했다. 물론, 강 이사의 비서 역할을 하는 선남이 종종 연 교수와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지난 10년 간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가벼운 농담을 할 만큼의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남의 입장에서 연 교수는 강 이사의 아내였고, 그녀의 사생활 - 연 교수가 만나는 남자 - 대부분을 알고 있었지만 딱 그 뿐이었다. 물론, 인간적으로 연 교수의 삶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건 비단 연 교수 뿐 만 아니라 강 이사의 삶도 그러했다. 어차피 선남 입장에서는 연 교수든, 강 이사든 이해를 할 이유도 없었고, 단지 강 이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뿐, 연 교수의 남자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반대로 연 교수 입장에서 선남은 꼴 보기 싫은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모든 지시를 강 이사가 했고 선남은 그것을 따르는 것 뿐 이라고 생각했지만, 종종 마주칠 때의 선남의 표정은 항상 무표정이었기에 연 교수는 그 역시 남편인 강 이사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끼리끼리 뭉친다라는 말이 있듯이 연 교수가 생각하기에는 선남 역시 냉혈한 사람이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물론, 그런 것을 떠나서 자신의 남자들에게 협박을 하는 직접적인 사람이 선남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연 교수는 그가 싫을 이유가 충분했다.
이렇듯 선남과 연 교수는 서로 직접적으로 교류할 일도 없고, 평소에 관심을 둘 이유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인 호감은 더더욱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선남에게 연 교수가 직접적으로 전화를 한 것이었다. 신분을 밝힌 연 교수의 목소리를 듣고 선남은 내심 당황 할 수 밖 에 없었다. 도대체 왜 연 교수가 자신에게 직접 전화를 했을까?
“아... 사모님이시군요.”
- 갑작스레 전화해서 미안해요. 번호는... 우연찮게 알게 되었어요.
당황 한 선남과는 달리 연 교수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있었다. 물론, 계획적으로 선남에게 전화를 건 당사자이기에 여유가 있는 건 당연할 수도 있었지만... 어찌 됐든, 선남의 입장에서는 연 교수의 전화도 당황스러웠지만, 자신의 휴대폰을 어떻게 알고 전화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연 교수는 ‘우연’이라는 말을 쓰며 묻기도 전에 대답을 했고, 선남은 ‘정말일까?’라는 의문이 들 뿐이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무슨 일로...”
- 이 과장. 지금 통화 가능하겠죠? 옆에 남편이 있다면... 나중에 했으면 하는데...
선남은 연 교수의 연락이 반갑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복잡한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은 자신에게 해가 되면 해가 됐지, 득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40년 간 살아오면서 깨달은 경험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이런 상황에서 연 교수는 강 이사의 부존재라는 단서를 제안하고 있었다. 선남의 입장에서는 다시 한 번 당황할 수 밖 에 없었다. 강 이사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연 교수와 대화를 할 거리라도 있나라는 생각을 순간 해봤지만, 머릿속은 백지상태일 뿐이었다.
“혼자이긴 합니다만... 무슨 일 인지...”
- 아 그래요?
선남의 혼자라는 말에 연 교수의 목소리 톤이 아주 순간이었지만 활기가 느껴졌고, 선남은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제가 사모님과 대화를 할... 그런 게 있나 싶은데...”
- 제가 이 과장에게 용건이 있어요.
“... 말씀하시죠.”
- 호호. 이 과장 매우 궁금하나 봐요? 아니, 당황을 하셨으려나?
도대체 연 교수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선남은 알 길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남자 문제 밖에 없을 것 같은데, 정작 그 문제에 대해서는 최근 몇 개월간 선남이 손을 대지 못했다. 강 이사를 따르는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 그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네. 솔직히 당황스럽니다. 이런 적이 처음이라...”
- 호호... 그래요?
“사모님. 무슨 일인지 말씀을 해주셔야...”
- 그래요. 사실 내가 이 과장에게 용건이 있는데... 전화로는 하기 힘들 것 같고... 한 번 만났으면 하는데...
만나자는 연 교수의 제안에 선남이 머리를 굴려보지만, 딱히 연 교수와 만남까지 하면서 풀 문제는 없었다.
“꼭... 만나야 하나요?”
- 만나서 대화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눈치 챘겠지만... 그이가 이 사실은 몰랐으면 하군요.
“음.”
단호히 거절을 해야한다고 생각을 한 선남이었지만, 또 그렇게 하기에는 현재 처한 상황이 매우 어려웠다. 연 교수가 직접 만나자고 할 정도면 분명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선남은 이번에 거절을 한다고 해서 그녀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 어렵게 고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이 과장.
“전 솔직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사님 모르게 만나자고 제안을 하신 이유라도... 알고 싶습니다.”
- 훗... 좋아요. 그 이와 이 과장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전화로는 힘들 것 같아서... 직접 만나서 눈을 보고 대화를 해야 진솔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겠어요?
연 교수의 말을 들으며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선남이지만, 그녀의 대답은 모호할 뿐이었다.
‘나와 강 이사의 문제라... 도대체 뭘까?’
수수께끼와 같은 연 교수의 제안, 선남으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문제가 달렸다는 연 교수의 말을 듣고서는 거절하기 힘들었다.
“꼭 만나서 해야... 합니까?”
- 그럼요.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그이가 알아서는 안돼요.
사실 선남은 불안했다. 배고픈 자신의 앞에 사과가 놓여 있는데, 먹으면 죽을 수 밖 에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배고픔을 못 이겨 먹어야 하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연 교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아직 알 길은 없었지만, 선남은 예감 상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사님 몰래 만나는 건....”
- 마음에 걸리나 봐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 이 과장. 그래도 나랑 만나서 대화를 하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도... 도움이요?”
- 그건 와 보면 알겠죠. 선택해요.
연 교수의 ‘도움’이라는 말에 선남은 급하게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선남은 최근에 강 이사에게 벗어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연 교수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선남은 연 교수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연 교수의 입에서 ‘도움’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선남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젠장.’
선남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정보 역시 없었다. 단지 연 교수의 이유 모를 제안을 받았을 뿐이고 선남은 선택을 해야 했다.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선남은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지금 받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연 교수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 그때도 과연 피할 수 있을 것인가? 회의적이었다.
“알겠습니다.”
- 호호. 그래요? 그러면 시간이 언제 되나요? 이 과장.
“사실... 지금 옆에 이사님이 안 계십니다. 지금이 가장 편안 시간대입니다만...”
- 이 과장... 좋아요. 지금 집으로 와요.
집으로 오라는 연 교수의 말에 내심 당황한 선남이었다.
- 나랑 밖에서 만나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을까요? 이 과장.
“그렇다고 그냥 가기에는...”
- 이 과장.
“네.”
- 나 교수예요. 그러면 대기업의 이사를 모실 정도의 사람이라면... 머리는 쓸 수 있어야겠지요. 호호.
사실 연 교수의 제안은 일리가 있었다. 선남이 연 교수를 밖에서 만나는 건 오히려 좋지 않았다. 선남을 감시하는 자들에게 대화 내용을 들킬 위험도 있었고, 그렇다고 차안에 있거나 외곽으로 빠질 경우 사진이나 영상에 찍히면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오히려 연 교수의 집 - 강 이사의 집이기도 했으나, 보통 때는 잘 들어가지 않았다 - 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었다. 물론, 이 역시 감시자들에게 들킬 확률이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연 교수는 강 이사의 아내였다. 그로 인한 핑계거리는 만들 수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1시간 후에 가도록 하지요.”
- 기다릴게요.
연 교수와의 전화를 끊은 선남은 지체할 시간도 없이 길거리에서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강 이사가 차를 직접 몰고 가버렸기 때문에 선남에게는 차가 없었다. 다행히도 빈 택시를 기다린 지, 3분도 지나지 않아서 선남은 택시를 탈 수 있었다. 택시의 뒷좌석에 탄 선남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택시 기사에게 말을 했다.
“가까운 대형 서점으로 갑시다.”
***
셀 수도 없이 많은 묘지가 있었고, 그 묘지들은 대부분 잘 관리가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묘지의 무덤 앞에 있는 비석들의 경우 죽은 자들을 위한 것 치고는 크고 화려한 것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고급스럽고 크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비석들이 많은 것만 보더라도 이곳이 생전에 있는 자들이 많이 묻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은 자들을 위한 이 공간에 현재 딱 한 사람만이 산 사람이었는데, 뜻밖에도 그 사람은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강 이사였다.
강 이사는 한 무덤 앞에 멀거니 서 있었다. 혹자가 본다면 서서 죽어버린 사람처럼 아무 움직임 없이 강 이사는 서 있었는데, 그래도 오로지 눈동자 하나는 그의 앞에 있는 무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무덤 앞에는 역시 고급스러워 보이는 비석이 하나 있었고, 생전에 가졌던 망자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최수진.
최수진, 지금은 이 세상을 떠나 잊혀져버린 이름이었지만, 그녀는 K 건설 강 회장의 아내였고, 그녀의 무덤 앞에 서 있는 강 이사의 형수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날개 없는 천사’라며 사랑을 받았지만, 정작 그녀는 많은 선행을 한 삶과는 다르게 5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런 수진의 무덤 앞에 왜 강 이사가 찾아왔을까?
“형수...”
한참동안 무덤을 바라보던 강 이사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 말이요. 형수가 떠난 2년 간 생각해 봤는데... 모르겠소.”
분명 대답하는 자는 없었다. 아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 이사는 무덤의 주인이자 이제는 망자인 수진을 향해 계속 홀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쪽지 말이요.”
강 이사의 오른손에는 작은 메모지 하나가 들려 있었고, 그건 수진이 죽기 바로 직전에 자신의 지인을 통해서 강 이사에게 알린 유언 중 하나였다. K 건설을 이끄는 강씨 집안에서 오로지 강 이사만이 이 메모지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고작... 13글자... 참 어렵소. 왜 죽기 전에 나에게 이런 쪽지를 남겼단 말이오. 무엇을 위해서? 형수의 뜻이 무엇이오? 대답 좀 해보시오.”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강 이사의 질문에 대답을 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스산하게 부는 바람만이 이곳에 강 이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사람도 없음을 알려왔다.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형수의 뜻을 모르겠소. 하지만... 난 결정했소. 지난 2년 간 생각을 했고... 이게 형수의 뜻이 아닐 것이라 생각되지만... 난 내 뜻대로 할 것이오. 그것을 말하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이오.”
강 이사의 눈에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은 알 수 없는 강 이사의 단호함을 저지하기 위해서인지 바람은 좀 더 세차게 불며 그의 눈을 괴롭혔다. 잠시 먼지들 때문에 눈을 깜빡인 강 이사가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소. 지금 이렇게 말려도... 내 결정은 바뀌지 않소. 내 결정이 싫다면 왜 죽기 전에 나에게 이런 쪽지를 남겼단 말이오.”
강 이사는 자신의 오른손에 쥐고 있는 수진이 남긴 메모지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녀가 남긴 13글자의 유언을 중얼거렸지만, 세찬 바람 소리에 금방 사라져버렸다.
“....몽...에서...천...가...태...다.”
수진의 마지막 유언을 중얼거린 강 이사는 메모지를 자신의 품속에 넣었고, 수진의 무덤을 향해 마지막 말을 남겼다.
“더 이상 찾지 않을 것이오. 편히 쉬란 말도 못하겠소.”
강 이사는 수진의 무덤에서 몸을 돌렸고, 바람은 세차게 불며 그를 잡는 듯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강 이사의 발길을 잡을 수 있는 건 없었다.
***
25살의 이미연.
꽃다운 나이이기도 하지만, 외모만큼은 어지간한 여자 연예인보다 뛰어난 그녀였다. 길거리를 걸어가면 젊은 남자는 물론, 숟가락을 들 힘이 있는 남자라면 그 누구라도 한 번쯤은 쳐다볼 정도로 매력이 넘친 미연이었지만, 현재 그녀는 강 이사의 정부에 불과했다.
소위 스폰이라는 관계가 넘치는 시대였기에 나이는 많지만 그만큼 돈 많은 남자가 젊고 아리따운 여자들에게 금전적 대우를 해주며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이 그리 이상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이런 관계가 사회적 인식 및 윤리적으로는 옳다고 할 수 없었지만, 이미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버린 이런 관계를 법을 통해서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연의 경우에는 더더욱 용서를 하기 힘든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 경우에는 강 이사의 책임도 다분했다. 미연에게 있어 강 이사는 자신에게 금전적 대우를 충분히 해주는 후원자이기도 - 돈을 받고 육체적 관계를 해주는 사이 - 했지만, 그 이전에 중고는 물론 대학까지 동창인 친구 희정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무려 10년이 넘게 친하게 지낸 친구의 아버지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미연이기에 일반인들의 시선으로는 곱게 볼 수야 없었지만, 정작 미연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미 강 이사가 주는 돈의 맛에 흠뻑 취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생각을 해보라. 아무것도 안하고 나이든 남자를 상대해주는 것 뿐 인데, 고급 아파트, 고급 차, 명품은 물론 한 달에 1000만원이 넘는 돈을 받는데, 미연으로서는 이 삶을 겪은 후로는 포기할 수도 없었고, 포기해서도 안 되었다. 또래의 그 누구보다 편안하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질 만능주의, 그러나 처음부터 미연이 이런 삶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연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항상 삶에 지쳐 살아왔다. 이런 지침에는 가난이라는 세상 그 누구라도 공감하는 문제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일개 개인의 삶에 치명적인 역할을 했다.
무언가 항상 부족하다는 것은 사람을 질리게 만들고, 삶의 여유는커녕,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마저 할 정도로 이 세상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미연 역시 그 부류 중 한 사람이었다.
미연은 뛰어난 미모를 받았지만, 그녀의 집은 내내 가난했다. 뛰어난 미모로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긴 했지만, 그만큼 질시도 받아야 했다. 여자들의 질투가 그러했고, 나중에 집이 가난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좀 산다는 여학생들에게는 멸시까지 받아야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미연에게는 사는 게 고통 그 자체였다. 왜 자신이 특정인들에게 미움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꼭 개인의 이해만으로 흘러가지도 않았고, 문제가 생기더라도 풀 수가 없었다. 이때 미연의 손을 잡아준 이가 강 이사의 외동딸인 강희정이었다. 희정은 비록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으나, 주위의 그 누구보다 힘이 있었다. K 건설이라는 대기업의 이사가 아버지였고, 큰아버지는 회장이었다. 학교 선생님들부터 희정을 대하는 것이 달랐고, 그녀는 자신이 큰 힘을 가지고 있음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힘들어하는 미연을 구해주는 건 희정에게는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미연은 자신에게 손을 내 민 희정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그때부터 이 둘은 친구가 되었다. 미연이 집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학창시절 및 대학 시절까지도 희정은 미연에게 어느 정도 물질적 지원을 해줬고, 미연은 항상 희정에게 고마움을 가지고 살았다.
물론, 이 둘은 친구였다. 허나 사람 관계라는 것이 한 쪽이 계속 지원을 하고, 한 쪽이 계속 받기만 한다면 친구라는 관계도 아주 묘하게 바뀌기 마련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미연은 희정을 모시고 있었다. 친구라기보다는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같은 관계가 되었다. 일례로 대학을 다닐 때에도 희정은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미연에게 그것을 시켰고, 미연은 당연하다는 듯이 커피숍으로 달려갔다.
미연에게는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의 대학 등록금까지 내주는 희정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지만, 이런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리고 2년 전, 미연은 희정의 말 몇 마디에 크나 큰 복수심이 가슴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중학교 동창에 간 미연과 희정은 마음껏 술을 마시고 놀았고, 미연은 화장실을 가다가 우연찮게 희정과 그녀들의 동창이 하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미연이 아직도 갖고 놀고 있어?”
“그렇지... 그 년... 돈만 주면 가랑이도 벌릴 년이야. 돈에 미쳤지. 나 같으면 자존심 상해서라도 안 할 텐데...”
“희정이 네가 왕따 시킨 줄도 모르지?”
“힘들 때 내가 도와주니까... 아주 충성을 다하던걸? 호호. 개 같지 않아? 주인이 몽둥이로 때려도 밥 조금 주면... 꼬리 살랑살랑 흔들고...”
“호호호. 참 웃기네.”
“얼굴이 반반해서 남자들은 또 존나 꼬이던데... 그 꼴 보기 짜증나서... 주위 남자들에게 갈보라고 소문냈는데... 그 년만 몰라. 나중에 술 먹여서... 남자들 불러다가 한 번씩 박게 해준다고 했는데... 조만간 해봐야지.”
“야... 그건 너무.... 재밌겠다야... 호호.”
미연은 충격에 빠졌고, 그 날 동창 모임에서 어떻게 있었는지조차 기억을 하지 못했다. 단지 중간에 몸이 안 좋아서 일찍 집에 들어간다는 말만 했을 뿐, 미연은 그날 길거리에서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울지 않으면 가슴에 쌓인 그 무언가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미연은 희정을 조금씩 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되도록 희정 앞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내비치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술자리를 가지더라도 취할 정도로 마시지 않았다. 이런 미연의 변화에 희정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갖긴 했지만, 취업이 걱정이라는 미연의 말에 희정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시간이 흘렀고, 대학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을 시점이었다. 미연에게는 뜻밖의 사건이 하나 생겼는데, 바로 모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연예인 제의를 받은 것이었다. 워낙에 뛰어난 미모를 가졌던 미연이기에 우연찮게 길거리에서 그 제의를 받았고, 한동안 미연은 그것을 고심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가난이 너무너무 지긋했기 때문이었다. 미연은 대중매체에 보이는 연예인들의 삶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위치에 서면 누구도 자신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더더욱 친구라 생각했던 희정에게 더 이상 무시를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미연은 모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노크를 했고, 본격적으로 연예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연이 모르는 세상 이치가 하나 있었다. 믿을만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경우에는 공개 오디션이 기본이었고, 설령 그 공개 오디션을 통해서 후에 연예인이 되어도 엔터테인먼트 회사와 불공정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미연이 몸담은 회사는 일반인이 이름조차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곳이었다.
결국 미연에게 다가온 것은 접대였다. 사회 유명 인사들에게 성 접대를 하면서 미연이 연예인이 되길 바라는 게 회사의 마음이었다. 미연은 거절을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가 없었다. 계약상에서도 회사에 비해 터무니없을 정도의 약자이기도 했다. 울며 겨자 막기로 성 접대에 나선 미연은 몇 차례에 걸쳐 정치인 및 방송국 PD에게 몸을 맡겨야 했고,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단 몇 차례의 성 접대였지만, 미연은 지쳐만 갔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 길도 없었다. 그렇게 힘든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미연의 앞에 나타난 남자가 강 이사였다.
강 이사 역시 접대를 받으러 나왔고, 그 자리에서 미연을 만났다. 그리고 둘은 서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이 둘은 미연이 어릴 때부터 수차례에 걸쳐 만난 적이 있었고, 그녀가 대학 시절에는 등록금을 강 이사가 대신 내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 물론, 표면상으로는 희정이 돈을 건넸지만, 이 사실은 강 이사도 알고 있었다 -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이 둘은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인사를 했고, 또 술자리도 가졌다. 그러나 밤은 함께 보내지 않았다.
아무리 여자를 좋아하는 강 이사라도 자신의 하나 뿐인 딸의 친구와 관계를 가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만남은 미연에게 큰 변화를 주었다. 미연은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도움을 준 강 이사의 실체를 알 수 없었다. 물론, 궁금해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만남을 통해서 미연은 희정의 아버지인 강 이사가 여자를 즐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적극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몇 번의 접대 후의 결과가 신통치 않아서 연예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흐릿해진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미연은 강 이사에게 연락을 시도했고, 강 이사와의 두 번째 술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술자리에서 미연은 강 이사 앞에서 울었다. 또 그동안의 사정을 말하면서 강 이사에게 매달렸다. 강 이사는 미연의 사정을 듣고 그냥 넘어갈 수 없었기에 꽤 큰돈을 들여서 미연을 그녀가 소속된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빼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분명 강 이사가 희정의 아버지로서 미연에게 베푼 선행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 이 둘이 만났을 때에는 더 이상 친구의 아버지와 딸의 친구 관계가 아니었다. 미연은 적극적으로 강 이사를 유혹하기 시작했고, 이성의 마지막 끈을 놓지 않았던 강 이사는
‘이건 아닌데’라는 머릿속 울림이 있었지만, 결국 미연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미연은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미연과 하룻밤을 보낸 강 이사는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미연과 강 이사는 서로가 원하는 바를 채우며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관계가 시작되면서 미연은 전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희정을 비웃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모멸감을 준 친구의 아버지가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으니... 미연은 일종의 희정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미연은 강 이사가 마련 해준 돈으로 아주 풍족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란 것이 간사하게도 하나가 충족되면 또 다른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배가 고프면 당장 빵 한 조각이 아쉽지만, 배가 부르면 편안한 잠자리가 떠오르지 않던가.
미연은 젊었다. 비록 강 이사와 육체관계를 맺고 있긴 하지만, 그건 정신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행위가 아니었다. 강 이사를 사랑해서 하는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강 이사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미연은 진정한 사랑을 원했다. 그리고 또래의 젊은 여자들처럼 비슷한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이때쯤 대학 시절 미연에게 관심을 보이던 남자와 우연찮게 연락이 닿았고, 미연은 스트레스도 풀 겸 그 남자와 종종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강 이사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그는 50살의 나이를 가지고 있었고, 25살의 청년이 갖고 있는 젊음과 감성은 가질 수가 없었다. 미연에게는 그게 사랑이 아닐지라도, 매우 신선함은 분명했다.
호기심이 생긴 미연은 약 한 달 전부터 그 남자를 직접 만나기 시작했다. 물론, 강 이사가 집에 오는 날은 만날 수 없었고, 이 만남 역시 강 이사 몰래 진행되었다. 강 이사 앞에서는 아양을 떠는 그녀였지만, 어떻게 보면 그건 미연에게 있어 생존을 위한 하나의 행동일 뿐이었다. 일종의 직업과 비슷했다. 그에 반하여 자신의 또래 남자를 만나는 건, 여가 생활과 비슷했다. 여유와 즐거움이 공존했고, 그 속에서 20대 여성의 건강함을 느낄 수 있는 미연이었다.
이 날 역시 미연은 강 이사 몰래 그 남자와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아침에 만나서 조조 영화를 봤고, 맛있는 점심도 먹었으며, 드라이브를 한 후, 공원 산책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오랜만에 서점에 와 있었다. 남자와 서점에서 이런저런 책을 뒤적이며 키득거렸고, 미연이 지금이 너무나 행복했다.
“나... 잠시 화장실 좀...”
미연이 남자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말을 했다. 남자의 고개 끄덕거림을 본, 미연은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화장실을 향했다. 미연이 화장실에 온 이유는 생리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여자들이 꼭 그런 이유 때문에 화장실은 찾는 건 아니었으니...
세면대에 있는 대형 거울을 통해서 화장 상태를 확인한 미연은 미흡한 부분에 대해서 화장을 좀 더 하고 옷매무새를 다시 확인했다. 미연은 거울을 통해 본 자신의 모습에 만족감을 느꼈고, 어떤 남자가 보더라도 치명적이게 느껴질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다시 남자와의 데이트를 위해서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미연은 자신의 오른 쪽 어깨에서 낯선 남자의 손길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엄마야!”
놀란 미연이 작은 비명과 함께 몸을 돌려서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미연의 눈에는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바로 선남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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