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다람쥐 챗바퀴의 중간 점검 시간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자료를 모았으니 한데 모아서 정리한 다음 발표 자료를 만드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은채씨와 다른 여자애 그리고 나까지는 모였지만 4학년 선배는 취업계로 인해 간간히 출석만 하는 처지라
오늘 모임에는 나오지 않았다. 발표 하기 전에는 꼭 참석하겠다는 약속만 남기고 말이다.
사람은 한명 줄어든 덕분에 개개인의 분량이 제법 늘었지만, 적어도 나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학생이 끼어있으면 아무래도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은근 눈치도 보는 불편한 시간이 계속 되기 때문이었거든.
아무튼 우리 조의 경우, 전체 조 중에서 앞 순번에 배치되어 있었기에 실제 발표까지 남은 시간은
2주 남짓이었다. 자료 수집은 초반에 충분히 했었고, 그걸 보기 좋게 정리해서 시각자료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말은 이렇게 쉽게 했지만, 어차피 산 넘어 산이라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었다.
"이 사례를 강조해서 공감대를 많이 끌어올리고 중요 논점은 헤드라인 식으로 간략하게 가는 방안, 어때요?"
"움..~ 은채 네가 하자는 식이면 교수님도 당연히 좋아하시겠지? 그럼 그렇게 하자 헤헤~"
첫날에 자기 이름을 수민이라고 소개한 다른 조원은, 까놓고 말해서 생각 자체가 별로 없는게 틀림없다.
술에 술 탄듯, 물에 물 탄듯 그저 하자는 방향으로 숨펑숨펑 넘어가기 일 쑤고, 그 머리 어렵게 굴리지 않아도
은채씨만 잘 따라가면 이번 학기 이 수업은 괜찮은 점수를 딸 것이라는 짧은 수 놀음이 동반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나오는게 틀림 없지.
항상 그렇지만 참 나쁜 기생충이 아닌가. 원래 기생충이 좋은게 없는게 당연하지만.
왠지 그런 얼굴 간지러운 꼴은 계속 지켜보고 있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내가 남보고 "잘했네, 못했네" 할 정도의
간담을 가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쪽은 이쪽만의 방법으로 균형을 맞추고 최대한 무마한다.
"그 방안도 충분히 괜찮은거 같아요. 하지만 너무 한쪽 방향으로, 이미 답을 정한듯이 생각하는건 단순하고
공격의 여지가 많기 때문에 반대급부적인 사례를 한두개 들어서 오히려 이쪽에서 그걸 해체하는 식으로 가보죠."
"아! 그거 괜찮네요. 그렇게 하면 간접적으로나마 저희 조의 주장을 좀 더 돋보이게 할 수 있겠는걸요!!"
이왕이면 상생으로.
미토콘드리아 같은 역할을 해주고 싶다, 적어도...
다행히 정말로 괜찮은 방법이었나보다. 은채씨의 반응이 한결 고양되어 있었다.
"아, 저도 그거 괜찮은거 같은데..."
어설프게 한발 담그는 수민은 그냥 무시했다.
말 그대로 여기에선 "없는 사람"이니까, 걸맞게 취급하면 그만이다.
"저.. 그럼 다 끝난거 같으니 저 먼저..헤헤"
"아, 네 그럼 들어가세요. 저흰 마무리 좀 하고 갈께요 그럼."
"네~ 그럼 고생하세요 호호~"
수민은 그렇게 떠났다. 앉아서 스마트폰만 깨작댈 때와는 다르게, 나가는 건 정말 빠르다.
발표가 얼마 안남아서 한사람 한사람이 아쉬운 시점이었지만 차라리 없는게 낫겠다고 생각했기에 한편으론
안심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 혼자서만의 생각은 아니었던지, 은채씨의 표정에도 뭔가 시원섭섭한게 그대로
묻어나왔다.
"으음...~~~ 후아..!!"
깍지를 끼고 허공으로 쭉 뻗는 팔, 별거 아닌 기지개가 왜 그리 고단해보이는지 모르겠다.
"많이 답답하죠?"
뜬금 없는 말이지만 못 알아 듣진 않은듯 하다.
"에... 뭐 그런게 없진 않죠 호호.. 그래도 괜찮아요. 거의 다 끝난거라 손볼 곳도 몇 없는 걸요."
태반이 다 은채씨가 한거 잖아요.
욱 하는 마음에 그대로 쏟아낼 뻔 했지만 어찌어찌 참았다. 그녀가 잘못 한건 아니니까.
그냥 남들보다 좀 더 밝고,
남들보다 좀 더 부지런하고,
남들보다 좀 더 착한 것이다.
이용해먹기 좋은게 그녀의 잘못은 아니니까.
수민, 그 여자는 자기 방 쓰레기통을 비워주는 어머니의 마음을절대로 모를 것이다.
그래서 은채씨한테 마찬가지로 떠넘겨 버렸을테니까.
"에휴..."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던걸 억누다보니, 새된 소리만 꾸역꾸역 비집고 나왔다.
"하하하..."
오늘따라 그녀의 웃음소리가 더욱 어색하게 들린다.
"원래 사람이 그렇게 순해요?"
"..에?.."
살짝 얼은 그녀였지만, 가타부타 따질 생각은 없었기에 개의치 않고 말을 넘겼다.
"발표 자료 이거, 은채씨가 거의 다 해온거잖아요."
"......"
"열심히 한다곤 하지만 한명은 취직때문에 빠지고, 한명은 강 건너 불구경이고, 그나마 남은 놈은 멍청해서 빌빌대는데."
"......"
은채씨는 어설프게 웃던 그대로 굳었고, 나 역시 입안의 텁텁함을 게워내지 못한 채 방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둘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흐른다.
"..꼭, 꼭 그런 것만은 아닌데요... 이거 다들 열심히 해와서..."
억지로 꺼내놓은 패는, 자애와 박애가 버무려진 노벨 평화상감의 오지랖이다.
그런 그녀의 기어들어가는 그녀의 목소리는 오히려 날 더 딱딱하게 만들었다.
"..또, 또 그러네요 정말, 하..."
"......"
그녀가 움츠리고 내가 커진다.
자꾸 커진다. 터지지도 못하면서 자꾸만 부푼다.
혼자서 열을 받다 못해,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건물을 벗어나오자마자 자괴감이 마구 솟구쳤다.
왜 그렇게 화를 낸거지,내가 뭐라고...
고개가 자꾸만 아래로 처박히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담배를 태운지 좀 됐지만 그것 때문은 아닌게 분명했다.
잔뜩 움츠러들던 은채씨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항상 싹싹하고 붙임성도 좋았는데...
편하게 말 붙여주던 첫만남에서부터, PC방에서의 일들 모두가 고장난 카세트처럼 늘어져만 갔다.
지금 내가 왼발을 내딛는지 아니면 오른발인지 제대로 가늠조차 안되는걸 보면 되감기는 상당히 어려워 보였다.
부끄러움.
명백하게 퍼져가는 건 그녀에 대한 애처로움과 미움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은채씨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부리고 있는 생트집과는 아무 연관이 없었다.
그저 나는,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스스로가 찔렸을 뿐이다.
내색은 안했지만 나도 분명...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더니만 딱 그 꼴 아닌가.
병신새끼.
아침부터 오지게도 일어나기 싫더니만 결국 이렇게 됐다.
나는 지금 버스 안이고, 늘 내리던 학교 근처 정류장은 벌써 한참 전에 지나쳤다.
오늘따라 신기하게 마침 날씨도 딱 좋다. 그렇게 춥지도 않고 햇빛도 제법 쬐는게
지금 이 상황의 이유가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역시 어제 있었던 은채씨와의 일이 컸다.
그렇다, 솔직히 톡 까놓고 말해서 오늘은 정말로 그녀를 볼 자신이 없다.
뻔뻔하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인사를 건낼 간담도 아니고 물론 그러고 싶지도 않고.
인상 팍 쓰고 일일이 피해다니기엔 오늘은 겹치는 수업이 너무 많으니 어쩌겠는가, 하루 재껴버리는 수 밖에.
그래, 오늘은 나에게 주는 미룸의 시간이라고 하자.
잘못은 했지만 처리는 나중으로 접어두는, 집행유예의 시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이 자꾸 부풀다가 뻥 하고 터져서 내가 없어지게 될 것만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거 그냥 즐기자.
평소에는 도중에 내리느라 못가봤던 이 버스의 나머지 정류장도 한번 가보고, 딱 하루만 이렇게 마음대로 해보자.
늘 그렇듯 정하기까지가 복잡하지, 일단 결정 내리고나면 그 다음은 아주 매끄럽게 잘 돌아갔다.
천재거나, 순발력이 좋거나, 하다못해 뭐라도 하나는 좋나보지.
대학가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기에 버스 안은 쾌적했다.
아마 버스 창문에 서린 김이 없었다면 원래 이랬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나는 자리에 앉는 조그만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이 시간에는 손잡이 하나 잡기도 벅찬데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밖의 풍경은 빠르게 낯설어갔다.
아마 처음이던가?
여태껏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분명 동네 이름은 낯익다.
아침 저녁으로 마다 노선표로 봐왔으니까.
하지만 그 뿐이다. 어떻게 생겼는지, 뭐가 있는지는 가봐야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버스는 덜컹거리며 섰고, 나는 그대로 내려서 낯익은 이름의 동네에 있는 낯선 골목으로 사라졌다.
동네가 궁금했고, 그 골목 안에 뭐가 있는지 알고싶었으니까.
진짜로 알려면, 정말 다 알고 싶다면 해봐야 하더라구.
씨발 오늘 걸리기만 해봐라, 다 죽었어.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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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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