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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0:43 1,012회 0건
2004년 6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

따르르르르릉~
침대 머리맡에 있는 자명종의 시끄러운 소리가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자명종 아래 쪽에는 창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태양빛을 반사해 눈이 부실 정도의 순백을 뽐내고 있는 티끌 하나 없는 침대 시트가 그 색상과 조금은 어울리지 않게 잔뜩 구겨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킹사이즈는 되어 보이는 침대는 덩치가 작은 사람이라면 족히 서너명은 잘 수 있을 정도로 컸는데 그 넓은 침대의 가장자리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자세로 잠들어 있는 사람이 있었다. 침대 위로 이리저리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과 실크재질의 물색 파자마를 입은 작은 몸집의 사람은 여자임이 분명했다. 그 여자는 자명종 소리가 귀에 거슬렸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한쪽 손을 뻗어 침대를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머리위쪽을 더듬던 가늘고 긴 손길은 조금씩 침대의 가장자리로 이동하더니 급기야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더듬었고 그 바람에 웅크리고 있던 몸이 "휘청" 하며 침대 밑으로 떨어지려 하였다. 다음 순간 잠결에 허공을 더듬던 손이 본능적으로 움직여 모서리를 잡았고 다행히 볼썽사납게 밑으로 떨어지는 상황은 모면할 수 있었다. 겨우 위기를 모면한 여자의 입에서는 작게 한숨이 흘러나왔고 정말 잠을 자고 있는 것인지 믿기 힘든 모습을 보여준 여자는 반대쪽으로 한바퀴를 구르더니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시 조용해 졌던 자명종이 다시 방안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소리를 만들어냈지만 잠에 빠져든 여자는 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


" 으으으음~ "

한참을 단잠에 취해 있던 여자는 마치 신음인듯 탄성인듯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양팔을 위쪽으로 쭉 뻗어 올리며 기지개를 켰다. 그 바람에 넓은 소매가 어깨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며 새하얀 피부를 드러냈다. 그녀는 위로 올렸던 팔을 앞으로 내리며 그 반동을 이용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 아~ "

얼굴에 와 닿는 햇빛이 꽤나 좋은 느낌이었는지 따뜻함과 상쾌함-오랜만에 푹 잤다고 느껴서인지-이 동시에 느껴진 그녀는 작고 도톰한 입술을 가진 입을 벌리며 탄성을 질렀다.

" 이렇게 기분 좋게 일어난게 얼마만이지? "

방안을 온통 하얗게 물들이고 있는 태양빛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흐느적거리며 움직여 겨우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걸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동작으로- 집을 나서는 것이 당연한 일과의 시작이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 어제 일찍 잔 보람이 있는데? 아직 알람도 울리지 않았고 우아하게 커피나 한잔 하...면...서... "

상쾌한 아침을 만끽하며 고개를 돌려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시계를 확인하던 여자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두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하더니 그 떨림은 곧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 아...아... 안돼!!! "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며 마치 불에라도 데인듯한 동작으로 침대에서 뛰어내린-실제로 침대에서 1m가 넘는 거리까지- 여자는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세수도 양치질도 하는둥 마는둥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정신없이 옷에 몸을 끼워 넣기 시작했다. 스커트와 재킷을 입고 그제서야 스타킹을 신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급하게 침대에 걸쳐 앉았다.

" 이런! 제발! "

급히 먹는 밥에 탈이 난다고 했던가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손톱에 긁혀 길게 올이 나간 스타킹을 바라보았다. 여분도 없었고 빨래통에 넣어둔 며칠 지난 것을 다시 꺼내 신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금새 체념의 빛이 떠올랐다. 마냥 이렇게 앉아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시계는 8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7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해도 겨우 시간에 맞출 수 있을 정도였는데 이미 한시간을 초과한 상태였다. 손에 들고 있던 스타킹을 방 한쪽 구석으로 던져놓은 그녀는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던 작은 가방을 집어 들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있는 힘껏 달리면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이힐을 신고 집을 나서던 그녀는 열쇠로 잠그지 않는 전자식 자물쇠를 설치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었는지를 생각하며 지하철 역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달려가는 그녀의 뒤로 현관문이 닫히고 있었고 문틈으로 현관 옆 신발장 위에 놓여진 갈색 서류봉투가 보였지만 그것은 이미 그녀의 관심사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 잠깐만요! "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하얗고 깨끗한 피부를 가진 여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엘리베이터가 아닌 이상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 사람이 몇미터 밖에서 땀을 흘리며 뛰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는지 힘을 주어 열어보았지만 그런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지하철의 문은 굳게 닫혀 버리고 말았다.

" 하아... 하아... "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지하철 앞에서 양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여자의 얼굴엔 절망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 시계! "

무심코 왼손을 들어올려 손목을 보던 여자는 시계도 차지 않고 나왔다는 것을 알고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승강장 위쪽에 설치되어 있는 시계도 있었지만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인지 힘들게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다음 지하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택시를 탈 수도 있었지만 이 시간에는 지하철이 훨씬 빠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녀는 이대로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가 오늘 했던 것 중에 가장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승강장 밖으로... ]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차 더 이상 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지하철을 보며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던 여자는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사람들 사이로 몸을 밀어넣기 시작했다. 예쁘게 생긴 여자의 너무도 필사적인 모습에 감동한 것인지 사람들이 조금씩 움직이며 자리를 양보해 주었고 지하철 문이 닫히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 하아... 하아... "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잠시도 멈추어 쉴 수가 없었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마자 백미터 달리기라도 하는 심정으로 뛰기 시작했고 몇백미터나 되는-가파른 계단까지 포함해서- 거리를 쉬지 않고 뛰어온 그녀의 다리에는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포기하고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목표로 하고 있는 빌딩이 바로 눈앞에 있었고 1분, 1초라도 빨리 그곳에 도착해야만 하는 그녀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빌딩 앞에 서 있던 경비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녀가 달려오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 여자는 조금 빨리 걷는 것과 별 차이 없는 속도로 달리고 있었지만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출근시간이 지난 빌딩 로비는 한산했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도 없어서 그녀는 쉽게 1층에 멈추어 있던 엘리베이터에 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그냥 주저앉고 싶은 마음 뿐이었지만 그녀는 가까스로 버티고 서 있었다. 20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반투명의 유리로 만들어진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뛰는 것은 고사하고 걷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가방에서 출입증을 꺼낸 그녀는 간절한 심정으로 감지기에 그것을 가져다 대었다.

삐이익~
[ 출근 시간이 지났습니다. 잠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

감지기 위쪽의 램프에 빨간 불이 켜지며 차가운 기계음과 함께 녹음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당연히 예상을 했던 소리였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엔 혹시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램이었다. 그녀는 지금껏 자신을 지탱해오던 끈이 끊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무릎에 힘이 빠지며 자연스럽게 앞으로 구부러졌고 그녀는 무너지듯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무릎이 바닥에 닿으며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되어버렸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고 그대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일어날 힘도 움직일 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분이나 지났을까 가벼운 진동과 함께 자신의 앞에 있던 유리문이 양쪽으로 열리는 것을 느낀 여자가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꿈에서도 결코 보지 않기를 원했던 여자가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계속 아까 힘이 빠져 꿇어앉은 자세로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힘이 없는 다리가 저리기까지 한지라 그만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문 안쪽에서 나타난 여자는 가슴 앞에서 팔짱을 낀 자세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 기가 막히는 군요. "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구겨진 옷에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로-비록 남자들의 눈에는 더욱 청순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표정을 한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어이가 없다고 느낀 여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 박하영씨! 당장 일어나지 못해요!? "



하영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뜨고 사방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밖에서는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렸다.

" 후우우... "

하영은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알고 십년은 감수했다는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팔을 들어올려 기지개를 켜는 동안 파자마 소매가 흘러내려 그녀의 하얀 피부가 햇빛에 반짝이게 만들었다. 비록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긴 했지만 그것이 꿈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지는 그녀였다.

" 아! "

갑자기 무언인가 생각난 듯 그녀는 급히 고개를 돌려 시계를 찾았다. 그러나 시계는 간밤에 확인했던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하영은 서서히 굳어지는 표정으로 시계를 찾아 방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침대 아래 쪽에 볼품없이 나뒹굴고 있는 시계를 발견했다.

" ......안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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