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은 집사를 따라 처음에 들어왔던 식당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채광창을 통해 들어온 회색빛 자연광이 단단해 보이는 집사의 등 위로 너울댔다. 쇼트웨이브는 먼지 하나 없는 선연한 방 안의 풍광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보여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뒤 쪽에서는 요리사들이 태엽인형처럼 정확한 동작으로 그릇을 포개 금속 수레에 싣고 있었다. 집사는 문 옆 협탁에서 33이라는 문패를 꺼내 문에 걸었다.
"그건 33층이 아니라 뒷뜰이라는 뜻이겠지요?"
쇼트웨이브가 집사의 말투를 흉내내서 묻자 그는 바지 지퍼를 내리듯이 입을 벌리며 미소를 지었다.
"뭐..대충 그런 뜻이지요."
집사는 이를 드러내며 그녀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문을 밀어 열었다. 문 밖은 바로 마당이었다.
느닷없이 맞닥뜨린 스산한 찬 공기에 그녀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곳은 시청 본관 측면에 있는 커다란 뜰이었는데, 그녀들이 서 있는 오른쪽으로 시청으로 들어올 때 통과했던 높은 탑이 보였다. 날씨는 여전히 비가 올듯 을씨년 스러웠고, 탑은 구름 중간을 찔러 물이라도 뺄 것처럼 날카롭게 하늘을 겨냥하고 있었다.
낮익은 그녀들의 차는 담 쪽에 붙어 있었다. 몇몇 인부들이 커다란 자루와 상자를 들고 뜰을 지나가며 그녀들을 힐끗 힐끗 쳐다보았다. 뜰은 군데군데 수북하게 둔덕을 만들어 놓은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울퉁불퉁해 보이는 작은 사각형의 돌조각으로 온통 포장되어 있었다. 둔덕들은 마치 지저분한 사춘기 남학생 얼굴에 돋아난 여드름처럼 이곳저곳에 불규칙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밋밋하게 올라오는 둔덕의 주변부가 부드러운 잔디들로 새파랗게 덮여 있어 대머리 아저씨의 머리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들은 집사를 따라 뜰로 내려가 차를 향해 걸어갔다. 무슨 바쁜 일이 있는지 뜰 한 쪽에 나 있는 쪽문을 통해 인부들이 쉬지 않고 들락거렸다. 디지털퍼머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지만, 그들은 무례하게도 그녀를 특이한 원숭이 보듯이 관찰하면서 아무 대꾸없이 지나갔다. 기분이 상한 디지털퍼머가 냉랭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뜰에서는 들척지근하게 썩어가는 꿀풀향과 비슷한 냄새가 길잃은 잠자리처럼 떠돌고 있었다.
차에 도착하자 쇼트웨이브는 키를 꽂아 앞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운전석에 모로 앉아서 차 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작은 아가씨는 대단히 치밀한 사람인것 같습니다."
차 앞좌석에서 몸을 돌려 뒷자석으로 반쯤 넘어간 상태로 뭔가를 찾고 있는 쇼트웨이브의 모습을 보면서 집사가 말을 꺼냈다. 윗 옷이 말려 올라가 바지 위로 그녀의 새하얀 옆구리 살이 살짝 드러났다. 집사의 눈에서 알 듯 모를 듯 감지하기 힘든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예."
디지털퍼머가 흘낏 집사를 쳐다보고는 잠자코 뜰을 둘러친 높은 담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집사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관찰력도 뛰어나고 게다가 굉장히 침착해요. 평소에도 그렇습니까?"
그녀가 몸을 약간 움츠리며 대답했다.
"그뿐만이 아니죠. 아는건 또 얼마나 많은데요."
집사가 윗 입술을 천천히 핥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게 특이한 점이예요. 너무 많이 알아요. 보기엔 아주 젊어 보이는데 말이지요. 작은 아가씨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디지털퍼머는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숫자를 입 끝에서 겨우 집어삼켰다.
"직접 물어보세요."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가 대꾸하자, 집사는 구두 끝으로 포석을 톡톡 건드렸다.
"왜요? 비밀인가요? 생각보다 나이들이 많으신가 부죠."
"네. 먹을만큼 먹었어요."
그녀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집사는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저런..작은 아가씨의 걱정이 큰 아가씨한테 전염된 모양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그녀들의 나이를 함부로 가르쳐 주었다간 나중에 쇼트웨이브에게 단단히 욕을 먹을 터였다. 디지털퍼머는 입술을 오므리며 차를 쳐다보았다. 차 안에선 쇼트웨이브가 뒷자리에 놔두었던 자신의 커다란 배낭에다가 찾아낸 몇가지 물건을 쑤셔넣고 있었다.
"아까 하신 말씀 말인데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디지털퍼머는 소매부리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꺼냈다. 집사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집사님께선 정말 지옥에 다녀오신 적이 있나요?"
집사가 입꼬리를 길게 들어올리며 징글징글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요."
"식당에서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지옥에서 우르반 2세의 영혼을 보셨다면서요."
"지옥을 본 적이 있다고 했지요. 지옥을 다녀왔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똑같은 말 아닌가요?"
집사는 턱을 한번 만지고는 대답했다.
"완전히 다르지요. 망원경으로 멀리서 놀이터를 보는 것과 직접 놀이터에 가서 시소를 타고 노는 것이 어떻게 같겠습니까. 지옥을 드나드는 것은 권력의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악마의 권세가 필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지옥을 보는 것은 기술의 문제입니다. 위험하긴 하지만 요령을 터득하면 불가능하지만도 않습니다."
그녀가 입에 손을 갖다대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령이라구요? 지옥을 보는 요령?"
대답 대신 집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요령을 파악하면 우리도 지옥을 볼 수 있다는 소린가요?"
집사가 난처한 듯 말했다.
"글쎄요. 그건 뭐라고 딱 부러지게 말씀드리기가 좀 어려운데요. 일단 우리가 쓰는 기술은 우리에게 적합하게 만들어진 것이라서요. 아가씨들은 이 방법이 매우 위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군요."
"음.."
집사가 신음처럼 길게 말을 늘였다.
"쉽게 말해서 아가씨들과 우리는 거의 비슷하지만 뚜렷이 대비되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 때문에 그 기술을 쓰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그래요? 아니, 집사님과 우리가 어떤 차이가 있는데요?"
집사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차 쪽으로 돌렸다.
"지금 말씀드리긴 좀 그렇구요. 약간 충격적인 광경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가씨들께서 원하신다면 우리가 지옥을 보는 방법을 구경시켜 드릴 순 있습니다. 그걸 보신다면 제 말 뜻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그녀가 깡총 뛰어오르며 손뼉을 쳤다.
"정말 보고 싶군요. 언제쯤 보여주실건데요?"
집사가 약간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글쎄, 그게 그렇게 재미있는 구경만은 아닐 겁니다. 하여튼 조만간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보지요."
디지털퍼머가 뭐라고 다시 물으려고 할 때 쇼트웨이브가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어깨엔 그녀가 책가방으로 가지고 다니던 검은 색 배낭이 메어져 있었다. 그녀가 디지털퍼머에게 물었다.
"너는 필요한거 없어?"
디지털퍼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응, 난 어제 다 가져왔어."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눕혀 집사를 가리켰다.
"좀 전에 집사님께서 지옥을 구경시켜 주시겠다고 했어."
집사가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제가 언제 지옥을 구경시켜 드린다고 했습니까."
"방금 그러셨잖아요. 조만간 자리를 마련한다면서요."
"지옥을 보는 방법을 구경시켜 드린다고 했지요.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아가씨들께서 직접 그 방법을 쓰는 것은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다니까요."
쇼트웨이브는 이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건가 싶어 눈을 깜박거리고만 있었다. 디지털퍼머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팔짱을 꼈다.
"무슨 마술 같은 걸 보여주시겠다는 건가요?"
"마술이라.."
집사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더니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걸 좋아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웃음을 그친 집사는 허리를 약간 굽혀 쇼트웨이브 가까이로 얼굴을 가져갔다.
"원하는건 다 가져오신 겁니까?"
"네. 일단은요."
"그럼 가실까요?"
집사가 빙글 몸을 돌렸다. 또다시 한 무리의 인부들이 나무로 된 파이프 뭉치를 들고 어슬렁 거리며 지나갔다.
식당 문은 닫지 않고 열려져 있었다. 문 안 쪽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요리사들이 보였다.
쇼트웨이브가 슬쩍 집사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문을 일부러 닫지 않으신건가요?"
"네. 왜 그러시죠?"
집사가 손잡이를 잡으며 물었다. 쇼트웨이브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참 재미있는 구조군요."
"뭐가 말입니까."
"집사님네 승강기 말이예요. 아마도 문을 닫는 순간 공간이 단절되는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다시 돌아가기 쉽게 아예 문을 열어놓으신거죠. 여기 뜰 쪽 입구에는 문패를 보관하는 협탁이 없으니까요."
집사가 눈 밑을 비볐다.
"정말 눈치 빠르시군요."
"뭘요..그런데 만약 집사님이 문을 닫으셨었다면 지금 이 문을 열었을 때 저희는 어디에 있게 되나요?"
"시청 본관의 수랑 복도 끝부분이 나오게 됩니다. 그럼 승강기까지 좀 더 오래 걸으셔야 되지요. 그게 귀찮으니까 아예 닫지를 않은 거구요."
"아하."
쇼트웨이브는 종달새 부리처럼 입술을 삐죽이고서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 승강기는 단지 층과 층 사이를 연결하는 것 뿐이 아니고, 원하는 공간의 문 앞까지 연결해주는 능력이 있나보네요."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빠른 두뇌회전이 그다지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이 건물 내에서만이라면 원하는 곳까지 가능합니다."
이제 알겠다는 듯이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그래서 어젯밤에 제가 소리를 질러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토록 빨리 저희 방에 오실 수 있었던 거로군요."
집사는 별다른 대꾸없이 문을 활짝 열고 옆으로 비켜서 그녀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그녀들이 식당에 들어서자 집사는 문을 닫고 협탁에서 5라고 씌어진 문패를 달았다. 그리고는 다시 문을 열었다. 식당 밖은 그녀들이 거처하는 층의 복도였다.
"그것 참."
나직막한 디지털퍼머의 감탄이 들려왔다.
변함없는 벽화가 이어지고 집사와 그녀들은 방 앞에 도달했다.
"그럼 잠시 쉬고 계십시오. 행차가 준비되면 제가 모시러 오겠습니다. 얼마 안 걸릴 거예요."
그녀들이 방으로 들어가자 집사는 문을 닫아주고 사라졌다. 쇼트웨이브는 화장대 위에 가방을 내려놓더니 그 안에서 차량에 구비해 놓는 작은 비상용 손전등을 꺼냈다.
채광창을 통해 들어온 회색빛 자연광이 단단해 보이는 집사의 등 위로 너울댔다. 쇼트웨이브는 먼지 하나 없는 선연한 방 안의 풍광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보여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뒤 쪽에서는 요리사들이 태엽인형처럼 정확한 동작으로 그릇을 포개 금속 수레에 싣고 있었다. 집사는 문 옆 협탁에서 33이라는 문패를 꺼내 문에 걸었다.
"그건 33층이 아니라 뒷뜰이라는 뜻이겠지요?"
쇼트웨이브가 집사의 말투를 흉내내서 묻자 그는 바지 지퍼를 내리듯이 입을 벌리며 미소를 지었다.
"뭐..대충 그런 뜻이지요."
집사는 이를 드러내며 그녀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문을 밀어 열었다. 문 밖은 바로 마당이었다.
느닷없이 맞닥뜨린 스산한 찬 공기에 그녀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곳은 시청 본관 측면에 있는 커다란 뜰이었는데, 그녀들이 서 있는 오른쪽으로 시청으로 들어올 때 통과했던 높은 탑이 보였다. 날씨는 여전히 비가 올듯 을씨년 스러웠고, 탑은 구름 중간을 찔러 물이라도 뺄 것처럼 날카롭게 하늘을 겨냥하고 있었다.
낮익은 그녀들의 차는 담 쪽에 붙어 있었다. 몇몇 인부들이 커다란 자루와 상자를 들고 뜰을 지나가며 그녀들을 힐끗 힐끗 쳐다보았다. 뜰은 군데군데 수북하게 둔덕을 만들어 놓은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울퉁불퉁해 보이는 작은 사각형의 돌조각으로 온통 포장되어 있었다. 둔덕들은 마치 지저분한 사춘기 남학생 얼굴에 돋아난 여드름처럼 이곳저곳에 불규칙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밋밋하게 올라오는 둔덕의 주변부가 부드러운 잔디들로 새파랗게 덮여 있어 대머리 아저씨의 머리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들은 집사를 따라 뜰로 내려가 차를 향해 걸어갔다. 무슨 바쁜 일이 있는지 뜰 한 쪽에 나 있는 쪽문을 통해 인부들이 쉬지 않고 들락거렸다. 디지털퍼머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지만, 그들은 무례하게도 그녀를 특이한 원숭이 보듯이 관찰하면서 아무 대꾸없이 지나갔다. 기분이 상한 디지털퍼머가 냉랭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뜰에서는 들척지근하게 썩어가는 꿀풀향과 비슷한 냄새가 길잃은 잠자리처럼 떠돌고 있었다.
차에 도착하자 쇼트웨이브는 키를 꽂아 앞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운전석에 모로 앉아서 차 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작은 아가씨는 대단히 치밀한 사람인것 같습니다."
차 앞좌석에서 몸을 돌려 뒷자석으로 반쯤 넘어간 상태로 뭔가를 찾고 있는 쇼트웨이브의 모습을 보면서 집사가 말을 꺼냈다. 윗 옷이 말려 올라가 바지 위로 그녀의 새하얀 옆구리 살이 살짝 드러났다. 집사의 눈에서 알 듯 모를 듯 감지하기 힘든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예."
디지털퍼머가 흘낏 집사를 쳐다보고는 잠자코 뜰을 둘러친 높은 담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집사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관찰력도 뛰어나고 게다가 굉장히 침착해요. 평소에도 그렇습니까?"
그녀가 몸을 약간 움츠리며 대답했다.
"그뿐만이 아니죠. 아는건 또 얼마나 많은데요."
집사가 윗 입술을 천천히 핥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게 특이한 점이예요. 너무 많이 알아요. 보기엔 아주 젊어 보이는데 말이지요. 작은 아가씨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디지털퍼머는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숫자를 입 끝에서 겨우 집어삼켰다.
"직접 물어보세요."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가 대꾸하자, 집사는 구두 끝으로 포석을 톡톡 건드렸다.
"왜요? 비밀인가요? 생각보다 나이들이 많으신가 부죠."
"네. 먹을만큼 먹었어요."
그녀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집사는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저런..작은 아가씨의 걱정이 큰 아가씨한테 전염된 모양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그녀들의 나이를 함부로 가르쳐 주었다간 나중에 쇼트웨이브에게 단단히 욕을 먹을 터였다. 디지털퍼머는 입술을 오므리며 차를 쳐다보았다. 차 안에선 쇼트웨이브가 뒷자리에 놔두었던 자신의 커다란 배낭에다가 찾아낸 몇가지 물건을 쑤셔넣고 있었다.
"아까 하신 말씀 말인데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디지털퍼머는 소매부리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꺼냈다. 집사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집사님께선 정말 지옥에 다녀오신 적이 있나요?"
집사가 입꼬리를 길게 들어올리며 징글징글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요."
"식당에서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지옥에서 우르반 2세의 영혼을 보셨다면서요."
"지옥을 본 적이 있다고 했지요. 지옥을 다녀왔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똑같은 말 아닌가요?"
집사는 턱을 한번 만지고는 대답했다.
"완전히 다르지요. 망원경으로 멀리서 놀이터를 보는 것과 직접 놀이터에 가서 시소를 타고 노는 것이 어떻게 같겠습니까. 지옥을 드나드는 것은 권력의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악마의 권세가 필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지옥을 보는 것은 기술의 문제입니다. 위험하긴 하지만 요령을 터득하면 불가능하지만도 않습니다."
그녀가 입에 손을 갖다대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령이라구요? 지옥을 보는 요령?"
대답 대신 집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요령을 파악하면 우리도 지옥을 볼 수 있다는 소린가요?"
집사가 난처한 듯 말했다.
"글쎄요. 그건 뭐라고 딱 부러지게 말씀드리기가 좀 어려운데요. 일단 우리가 쓰는 기술은 우리에게 적합하게 만들어진 것이라서요. 아가씨들은 이 방법이 매우 위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군요."
"음.."
집사가 신음처럼 길게 말을 늘였다.
"쉽게 말해서 아가씨들과 우리는 거의 비슷하지만 뚜렷이 대비되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 때문에 그 기술을 쓰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그래요? 아니, 집사님과 우리가 어떤 차이가 있는데요?"
집사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차 쪽으로 돌렸다.
"지금 말씀드리긴 좀 그렇구요. 약간 충격적인 광경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가씨들께서 원하신다면 우리가 지옥을 보는 방법을 구경시켜 드릴 순 있습니다. 그걸 보신다면 제 말 뜻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그녀가 깡총 뛰어오르며 손뼉을 쳤다.
"정말 보고 싶군요. 언제쯤 보여주실건데요?"
집사가 약간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글쎄, 그게 그렇게 재미있는 구경만은 아닐 겁니다. 하여튼 조만간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보지요."
디지털퍼머가 뭐라고 다시 물으려고 할 때 쇼트웨이브가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어깨엔 그녀가 책가방으로 가지고 다니던 검은 색 배낭이 메어져 있었다. 그녀가 디지털퍼머에게 물었다.
"너는 필요한거 없어?"
디지털퍼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응, 난 어제 다 가져왔어."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눕혀 집사를 가리켰다.
"좀 전에 집사님께서 지옥을 구경시켜 주시겠다고 했어."
집사가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제가 언제 지옥을 구경시켜 드린다고 했습니까."
"방금 그러셨잖아요. 조만간 자리를 마련한다면서요."
"지옥을 보는 방법을 구경시켜 드린다고 했지요.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아가씨들께서 직접 그 방법을 쓰는 것은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다니까요."
쇼트웨이브는 이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건가 싶어 눈을 깜박거리고만 있었다. 디지털퍼머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팔짱을 꼈다.
"무슨 마술 같은 걸 보여주시겠다는 건가요?"
"마술이라.."
집사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더니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걸 좋아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웃음을 그친 집사는 허리를 약간 굽혀 쇼트웨이브 가까이로 얼굴을 가져갔다.
"원하는건 다 가져오신 겁니까?"
"네. 일단은요."
"그럼 가실까요?"
집사가 빙글 몸을 돌렸다. 또다시 한 무리의 인부들이 나무로 된 파이프 뭉치를 들고 어슬렁 거리며 지나갔다.
식당 문은 닫지 않고 열려져 있었다. 문 안 쪽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요리사들이 보였다.
쇼트웨이브가 슬쩍 집사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문을 일부러 닫지 않으신건가요?"
"네. 왜 그러시죠?"
집사가 손잡이를 잡으며 물었다. 쇼트웨이브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참 재미있는 구조군요."
"뭐가 말입니까."
"집사님네 승강기 말이예요. 아마도 문을 닫는 순간 공간이 단절되는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다시 돌아가기 쉽게 아예 문을 열어놓으신거죠. 여기 뜰 쪽 입구에는 문패를 보관하는 협탁이 없으니까요."
집사가 눈 밑을 비볐다.
"정말 눈치 빠르시군요."
"뭘요..그런데 만약 집사님이 문을 닫으셨었다면 지금 이 문을 열었을 때 저희는 어디에 있게 되나요?"
"시청 본관의 수랑 복도 끝부분이 나오게 됩니다. 그럼 승강기까지 좀 더 오래 걸으셔야 되지요. 그게 귀찮으니까 아예 닫지를 않은 거구요."
"아하."
쇼트웨이브는 종달새 부리처럼 입술을 삐죽이고서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 승강기는 단지 층과 층 사이를 연결하는 것 뿐이 아니고, 원하는 공간의 문 앞까지 연결해주는 능력이 있나보네요."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빠른 두뇌회전이 그다지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이 건물 내에서만이라면 원하는 곳까지 가능합니다."
이제 알겠다는 듯이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그래서 어젯밤에 제가 소리를 질러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토록 빨리 저희 방에 오실 수 있었던 거로군요."
집사는 별다른 대꾸없이 문을 활짝 열고 옆으로 비켜서 그녀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그녀들이 식당에 들어서자 집사는 문을 닫고 협탁에서 5라고 씌어진 문패를 달았다. 그리고는 다시 문을 열었다. 식당 밖은 그녀들이 거처하는 층의 복도였다.
"그것 참."
나직막한 디지털퍼머의 감탄이 들려왔다.
변함없는 벽화가 이어지고 집사와 그녀들은 방 앞에 도달했다.
"그럼 잠시 쉬고 계십시오. 행차가 준비되면 제가 모시러 오겠습니다. 얼마 안 걸릴 거예요."
그녀들이 방으로 들어가자 집사는 문을 닫아주고 사라졌다. 쇼트웨이브는 화장대 위에 가방을 내려놓더니 그 안에서 차량에 구비해 놓는 작은 비상용 손전등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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