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는 호프. 어둠의 망자들이 모일 법한 분위기의 공간.
-블랙 홀- 을 전쟁터로 삼고 싸우는 두 명의 남녀가 있다.
수라와 준영이었다.
처음에 시켰던 흑맥주 두병은 동이 난지가 먼 옛날이었고, 추가된 병의 갯수가 늘어나갈 뿐이다.
수라는 지금 미칠 지경이었다.
설마 하니 준영이 녀석이 이정도로 잘 마실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대작으로 대결 한번 하자고 했을 때 녀석의 회심진 미소를 주의깊게 살폈어야 했는데 그녀는 지금 후회 막심이었다.
벌컥벌컥 시원스럽게 마셔 대며 자신의 몫을 비워 가는 준영. 그는 아직은 여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 아아...정말....이게 뭐야..... 두번째 패배를 먹여주겠다고 녀석을 비웃은건 내가 아니었어? 비..빌어먹을... 저 자식 왜 이렇게 잘 먹는 거야?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은걸?"
하지만 그녀는 진정 고수였다. 착잡한 내심은 감쪽같이 숨기고, 전혀 위기감을 드러내지 않은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속마음은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수라가 그렇게 속으로 힘겨워하고, 핑핑 도는 머리를 정신력으로 버텨 낼 무렵 준영도 마음 속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푸~하, 어때? 큭큭.... 아직까진 원샷은 껌이지 머. 흐흐~~"
잔 하나를 또 깔끔히 비워 내고 수라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는 그였지만, 실상은 그도 수라 못지 않게 미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제...제기랄....이 계집애.....생각보다 훨씬 잘 마시잖아? 웬만한 남자놈들보다 더 잘 마시는 것 같아. 가만있자. 다시 세보자. 지금 도대체 몇 병째야? 세 병, 네 병, 다섯.....끄윽....... 으아 ~~
돈이 얼마야 지금? 아아악~ 작전 완전 실패야. 설마 이렇게까지 잘 마실 줄이야....."
네 병만 마셔도 수라가 헤롱거릴거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근데 수라랑 마시다가 점점 쌓여 가는 병들의 갯수를 슬쩍슬쩍 확인 해보고 자신 못지 않게 잘 마셔 대는 수라를 보며 어느 순간 그는 일이 잘못 돌아감을 느낄 수 있었다.
흑맥주의 가격은 우습게 볼 바가 못 된다. 계산이 가능할 만큼의 돈은 가지고 있었지만, 알바 열심히 해서 오늘 탕진될 돈값이 떠올라 그는 속으로 쓴맛이 배가 되어 돌 수밖에....
" 제...제길.....그래도...이걸 계기로 수라랑 잘 되볼 수만 있다면...별로 아까울 것 없지. 여차 하면 다 써버릴수도 있다."
눈앞에 있는 소녀를 잡을 수만 있다면 돈이 대수인가? 무릇 훌륭한 낚시꾼이라 함은, 대어를 낚음에 있어 미끼의 가격과 양에 연연해 해선 안되는 것이다.
수라를 여친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어? 하고 생각하는 준영이었다. 그렇기에 속으로 피눈물을 머금었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절대로.....
수라와 준영의 잔에 다시 맥주들이 담기고 또 마셔 대기 시작했다.
잔을 테이블에 내려 놓고 수라가 갑자기 궁금한 듯 물었다.
"여기는...쯩 검사를 안 하네?"
"왜? 쯩 검사 받고 싶냐?"
"아니......보통은 하더라구...내가 들어가면....."
수라가 동안 이었기에 따른 곳에서는 거의 검사를 안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준영이 피식 웃더니 말해줬다.
"그건 내가 같이 왔기 때문이지. 여기 종업원 들 중에서 내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몇 있거든. 내가 마시러 여기를 심심치 않게 오기 때문에... 나와 친구로 온 것 같으니까 안 한 거지."
"그렇군..."
수라는 약간 볼멘듯이 대답했다. 준영은 그녀의 뾰로통해진 얼굴을 보곤 헤벌쭉거렸다.
"크흐흐, 역시 여자애는 저런 맛이 있어야지. 싸울 때는 완전 여자 왈패같더니 여자같은 구석이 역시 있구만. 티는 안 내지만 요약하자면 쯩 자랑하고 싶다는 것 아냐? 의외로 귀엽게 노네?"
준영은 실실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조금 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준영의 눈에 이채가 스쳐 갔다. 수라가 점점 지쳐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혀가 조금 꼬이기 시작했다.
"하으....빨리이.....담 잔 따라아....아직...괜찮으니까...."
수라의 앞머리결이 이마 밑으로 흘러 내리도록 그녀의 상체가 꺾였다. 준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후와~ 괴물같은 것. 드~럽게 잘 마시네. 드디어 지쳐 가는 모습을 보이는거냐?"
술이란 놈은 웃기다. 웬만큼 마신다는 사람들이라면, 한 잔을 받던 열 잔을 받던 아주 그렇게 큰 차이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큰 변화가 없다가 어느 한 순간부터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분명히 자신은 잘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퍼뜩 정신을 차려보면 다음 날이기 일쑤이다.
수라는 그 조짐이 지금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철벽인 성문은 바수고 들어가기 전이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뚫리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턴 일사천리다.
준영은 자신에게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마음이 급해졌지만, 그런 자신을 다잡았다.
"이렇게 된 거....아예 보내버리자."
준영은 결심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면서(속은 흉물스럽게 웃으며) 수라의 잔에 또 따라 주고는 궁금한 것을 또 수라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만난 게 오늘이 처음이니 궁금한 게 많을 수밖에. 이상하게 수라 쪽에선 별로 묻지 않았지만....
"수라.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니가 화낼 지도 몰라서 묻는 건데...."
"뭔데에....뜸들이지 말고 빨리 물어봐..."
수라는 질문을 받자 재빨리 고개를 쳐들곤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붉은 빛이 얼굴에 완연하게 채색된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는 아직 괜찮았지만 덩달아 술이 오르는 것 같았다.
물론 그는 흥분으로 인해 얼굴이 붉어진 것이었지만....
"니가 화낼지도 몰라서...."
"음....대략 먼 질문 할지...내가 맞춰볼께. 내 이름이 왜 아수라 냐고 물으려 한 거 아냐?"
"귀신이네."
준영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수라는 키득거렸다.
"수라가 귀신이잖아"
"아무튼.....특이한 이름이라서....물어봐도 돼?"
"나야 상관없지만....니가 믿고 안 믿고의 문제인데...해줘?"
" 응 "
사실 대단한 실례의 이야기였다. 한마디로 이렇게 묻는 것 아닌가? 너 이름 되게 특이하네? 왜 부모님이 그렇게 지었어? 하고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니....하지만 수라는 스스럼 없이 가르쳐 주었다.
"난....태어나면서부터 적발로 태어났거든"
" 적발?"
"붉은 머리카락이라고...."
"뭐?"
말이 되는가? 신생아가 붉은 머리카락으로 태어날 리가 없다. 준영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수라를 쳐다 보았다. 수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눈으로 준영을 보며 웃었다.
"말했지? 믿거나 말거나 라고? 머리카락 뿐만이 아니고 붉은 눈썹에 붉은 눈을 가지고 태어났지. 부모님은 내 모습을 보고 수라 라고 이름 지었어."
"으, 응...."
준영은 어정쩡하게 마주 웃어주면서 속으로 깊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야 뭐야...혹시....술을 내가 너무 많이 먹였나? 그래서 머리가 어떻게 이상해진 것?"
깊이 사색하는 준영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수라는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에게 들리지는 않을 정도로 조그맣게 중얼 거렸다.
"내 본명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수라는 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쓸데 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술이 웬만큼 들어가면 내면의 심리를 누군가에게 쏟아내고 싶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수라는 갑자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맘에 두고 있었던 녀석 이야기는 준영에게 처음 하는 것이다. 괜한 짓을 했다 싶었다. 아주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휘청~
몸이 또 휘청거린다. 잔을 잡아가는 손이 실수로 허공을 휘저었다.
잡생각이 많아지다 보니 그녀석 생각이 자꾸 났다. 자신만큼 강했던.... 강함이란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던 그 녀석. 연하 주제에 괜시리 자신의 마음을 콩닥거리게 했던 그 녀석. 그리고 몹쓸 짓도 했던 그 녀석.
처음에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그가 미웠으나 떠나온 나중에 와선 문득문득 떠올려 보면 단순히 개구장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지금은 왈칵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녀석 때문에 약해진 자신의 모습에는 화가 난다.
수라의 연한 눈썹이 찡그려지기 시작했다.
준영은 그녀를 보고 당황이 되었다. 그렇게도 생글거리고 깔깔거리던 수라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기 때문이다.
"수라?"
".........."
"왜 그러는 거야?"
".........."
준영은 수라의 찡그린 얼굴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야, 어떻게 된 거야? 이번엔 술로 패배를 안겨 주겠다며? 이제 힘든가보지? 하하 ~ 뭐하는 거야? 난 잔을 비었다고."
수라가 잠시간의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의 잔을 비워놓았던 것이다. 그녀의 잔엔 여전히 맥주가 담겨 있었다.
준영은 통쾌했다. 수라의 패배감에 물든 얼굴을 보니 유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갑자기 소변이 마려웠다. 맥주는 화장실을 자주 가게 한다. 준영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야, 나 화장실 좀 다녀 올께."
".......갔다와 "
짧게 말한 수라는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표정은 아니나 워낙 얼굴이 받쳐주니 그런 모습 조차도 예쁘다고 준영은 느꼈다.
근데 준영은 화장실을 가다가 잠시 얼굴을 갸우뚱거렸다. 그리고는...
그 역시 약간 취해 있었기에 숙녀에게 실례인 질문을 해버렸다.
"근데 넌 화장실을 안가? 가는 걸 못 봤네?"
마시는 중에 자신도 서너 차례는 다녀 왔다. 맥주의 특성상 그건 어쩔수 없었다. 근데 그녀는 한번도 화장실을 가지 않았던 것이다.
".....난 화장실 안 가도 돼....."
준영은 잠시간 "저건 또 뭔 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지만 화장실이 급했기에 일단 서둘러서 화장실을 향했다. 수라는 여전히 침울한 얼굴이었다.
화장실을 다녀온 준영이 자리에 다시 앉을 동안에도 수라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래도 잔은 비워져 있었다.
하지만 준영은 수라의 붉어질 대로 붉어진 얼굴을 보고 수라가 거의 한계에 달했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녀의 눈꺼풀이 점점 까물락거리고 힘겨워 하는 것이 역력해 보일 정도였다.
"흐흐...됐어...조금만 더..."
준영은 킬킬 거리면서 또 잔을 따라줬다. 수라 잔에 따른 후에 자신의 것까지 재빨리 채운 후에 그는 키득거리다가 "건배"를 외쳤다. 수라는 말없이 쳐 주기만 했다.
이번 것까지도 시원스럽게 받아 넘긴 준영은 먼저 잔을 내려놓고 수라를 보았다. 수라는 이번 잔을 아주 천천히, 정말 천천히 마셨다. 그리고는 잔을 조용히 탁자에....가 아니고 거칠게 내려놓았다.
탕-
"하아...."
수라가 한숨을 쉬었다. 이젠 정말로 지쳐 보였다. 고개도 힘겹게 다시 들어올린 채 가는 팔의 한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고개를 받쳤다.
준영은 키들거리면서 수라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내가 이길 것 같은걸?"
"........제길....."
수라는 짤막하게 말했지만 분하다는 감정이 역력하게 담겨 표출되는 것 같았다. 준영은 약간 크게 웃었다.
"하하~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어. 내가 자신 있어 하는거 보면 몰랐냐?"
".....빌어먹을... 빌어먹을.....그게 아니라구. 난 원래 너보다 잘 마셨어. 너보다 잘 마셨다구....제길......정말....."
수라는 참을 수 없이 분한 것 같았다. 쉴새없이 중얼거렸다.
"......아아. 이것도 다 그녀석 때문이야. 이게 정말 무슨 꼴이야? 한심하네 나 정말....."
그 녀석? 그 연하의 남자를 말하는 건가 하고 준영이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한 수라는...
수라는 슬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녀의 눈이 꼬옥 감기더니 갑자기 정말 의외로.....
이슬이 몇 방울 흘러 내렸다. 맑고 영롱하기가 이를 데 없는 액체의 결정. 준영은 입을 정말 찢어지게 벌렸다.
설마 하니 수라가 눈물을 보인 것도 정말로 의외였지만,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예뻤던 것이다.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지금 순간만은 수라가 정말로 연약해 보였다. 그 막강해 보이던 여자애가....
"커억...."
준영은 대경실색했지만 사실은 엄청난 행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라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수라는 고개를 살짝 돌려 재빨리 눈물을 닦아 내고는 갑자기 자작을 시작했다. 대차게 연거푸 무려 석 잔을 원샷 해버렸다.
꿀꺽꿀꺽...
"이...이봐. 좀 천천히 마시는 것이...."
"....시끄러워.....그냥 내버려 두라구."
그녀의 단호한 기색 때문에 말리지도 못했다. 그렇게 내리 석 잔을 깨끗하게 비워 낸 후 수라는 거칠게 "탕" 소리가 나도록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수라는 준영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약간 혀가 꼬인 채로, 천천히 토막 토막 끊어뜨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아....너 정말....잘 마시네.....내가 인정하지....내가......하지만.......예전의 나에게 걸렸다면 넌 오픈 게임도 안 되었을...거야....정말....오늘같은 날은....그 애가 더 원망이...되네.... 아무튼 진 건 진 거니까.....할 말은......없는 것 같네....."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몇 호홉을 고르고 난 후에 수라는 준영에게 툭 던지듯이 말을 했다.
"준영....."
"응?"
"남자란 건......여자를 뭘로 생각하는 걸까?"
갑자기 그런 말을 던질 줄은 몰랐기에 준영은 어정쩡하게 대답할 수밖에...
"그, 글쎄?"
"남자란 존재들 말이야....여자를....장난감으로 생각.....하는거 아니야?"
",,,,,,,,,,,"
"....난 그렇게.....생각..."
거기까지 말하고는 수라는 푹신한 의자의 옆에 쓰러졌다. 애초에 4명이 앉을 정도의 자리였기에 수라가 옆으로 눕는 데는 자리가 충분했다.
준영은 수라의 토막쳐진 말을 듣다가 갑자기 누워버리자 황당했고 그녀가 불쑥 물어본 말에 대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수라는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을까?
"흠....음....."
그렇게 생각 하는데 갑자기 준영의 머리 위에 경종이 크게 두어 번 울렸다. 지금 그런게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완전한 승리의 열매가 지금 두가지 이루어져 있었다.
한가지는 바로 자신은 승리했다는 것. 두번째 패배를 선사해 주겠다고 하던 수라가 자신에게 패한 것이었다. 이번엔 수라에게 한번 먹인 꼴이니 절로 기쁠 수밖에.
그리고 또 한가지는..... 수라는 지금 완전히 뻗어버렸다는 것이다.
두근두근....
인사불성이 된채 의자에 몸을 가로누이고 있는 수라를 보며 준영은 절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준영은 잠시 그러다가 얼른 달려가서 깔끔하게 계산을 시작했다. 종업원이 살인적인 액수값을 말하는 동안에도 그는 귀에 안 들린다는 듯이 오로지 저쪽에 누워 있는 수라만을 바라 봤다.
계산을 끝낸 후에 다가온 준영은 수라의 가느다란 어깨로 손을 뻗고 있었다. 지금 그의 얼굴은 흥분 상태 그 자체를 보여주는 듯했다..
-블랙 홀- 을 전쟁터로 삼고 싸우는 두 명의 남녀가 있다.
수라와 준영이었다.
처음에 시켰던 흑맥주 두병은 동이 난지가 먼 옛날이었고, 추가된 병의 갯수가 늘어나갈 뿐이다.
수라는 지금 미칠 지경이었다.
설마 하니 준영이 녀석이 이정도로 잘 마실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대작으로 대결 한번 하자고 했을 때 녀석의 회심진 미소를 주의깊게 살폈어야 했는데 그녀는 지금 후회 막심이었다.
벌컥벌컥 시원스럽게 마셔 대며 자신의 몫을 비워 가는 준영. 그는 아직은 여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 아아...정말....이게 뭐야..... 두번째 패배를 먹여주겠다고 녀석을 비웃은건 내가 아니었어? 비..빌어먹을... 저 자식 왜 이렇게 잘 먹는 거야?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은걸?"
하지만 그녀는 진정 고수였다. 착잡한 내심은 감쪽같이 숨기고, 전혀 위기감을 드러내지 않은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속마음은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수라가 그렇게 속으로 힘겨워하고, 핑핑 도는 머리를 정신력으로 버텨 낼 무렵 준영도 마음 속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푸~하, 어때? 큭큭.... 아직까진 원샷은 껌이지 머. 흐흐~~"
잔 하나를 또 깔끔히 비워 내고 수라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는 그였지만, 실상은 그도 수라 못지 않게 미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제...제기랄....이 계집애.....생각보다 훨씬 잘 마시잖아? 웬만한 남자놈들보다 더 잘 마시는 것 같아. 가만있자. 다시 세보자. 지금 도대체 몇 병째야? 세 병, 네 병, 다섯.....끄윽....... 으아 ~~
돈이 얼마야 지금? 아아악~ 작전 완전 실패야. 설마 이렇게까지 잘 마실 줄이야....."
네 병만 마셔도 수라가 헤롱거릴거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근데 수라랑 마시다가 점점 쌓여 가는 병들의 갯수를 슬쩍슬쩍 확인 해보고 자신 못지 않게 잘 마셔 대는 수라를 보며 어느 순간 그는 일이 잘못 돌아감을 느낄 수 있었다.
흑맥주의 가격은 우습게 볼 바가 못 된다. 계산이 가능할 만큼의 돈은 가지고 있었지만, 알바 열심히 해서 오늘 탕진될 돈값이 떠올라 그는 속으로 쓴맛이 배가 되어 돌 수밖에....
" 제...제길.....그래도...이걸 계기로 수라랑 잘 되볼 수만 있다면...별로 아까울 것 없지. 여차 하면 다 써버릴수도 있다."
눈앞에 있는 소녀를 잡을 수만 있다면 돈이 대수인가? 무릇 훌륭한 낚시꾼이라 함은, 대어를 낚음에 있어 미끼의 가격과 양에 연연해 해선 안되는 것이다.
수라를 여친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어? 하고 생각하는 준영이었다. 그렇기에 속으로 피눈물을 머금었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절대로.....
수라와 준영의 잔에 다시 맥주들이 담기고 또 마셔 대기 시작했다.
잔을 테이블에 내려 놓고 수라가 갑자기 궁금한 듯 물었다.
"여기는...쯩 검사를 안 하네?"
"왜? 쯩 검사 받고 싶냐?"
"아니......보통은 하더라구...내가 들어가면....."
수라가 동안 이었기에 따른 곳에서는 거의 검사를 안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준영이 피식 웃더니 말해줬다.
"그건 내가 같이 왔기 때문이지. 여기 종업원 들 중에서 내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몇 있거든. 내가 마시러 여기를 심심치 않게 오기 때문에... 나와 친구로 온 것 같으니까 안 한 거지."
"그렇군..."
수라는 약간 볼멘듯이 대답했다. 준영은 그녀의 뾰로통해진 얼굴을 보곤 헤벌쭉거렸다.
"크흐흐, 역시 여자애는 저런 맛이 있어야지. 싸울 때는 완전 여자 왈패같더니 여자같은 구석이 역시 있구만. 티는 안 내지만 요약하자면 쯩 자랑하고 싶다는 것 아냐? 의외로 귀엽게 노네?"
준영은 실실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조금 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준영의 눈에 이채가 스쳐 갔다. 수라가 점점 지쳐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혀가 조금 꼬이기 시작했다.
"하으....빨리이.....담 잔 따라아....아직...괜찮으니까...."
수라의 앞머리결이 이마 밑으로 흘러 내리도록 그녀의 상체가 꺾였다. 준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후와~ 괴물같은 것. 드~럽게 잘 마시네. 드디어 지쳐 가는 모습을 보이는거냐?"
술이란 놈은 웃기다. 웬만큼 마신다는 사람들이라면, 한 잔을 받던 열 잔을 받던 아주 그렇게 큰 차이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큰 변화가 없다가 어느 한 순간부터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분명히 자신은 잘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퍼뜩 정신을 차려보면 다음 날이기 일쑤이다.
수라는 그 조짐이 지금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철벽인 성문은 바수고 들어가기 전이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뚫리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턴 일사천리다.
준영은 자신에게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마음이 급해졌지만, 그런 자신을 다잡았다.
"이렇게 된 거....아예 보내버리자."
준영은 결심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면서(속은 흉물스럽게 웃으며) 수라의 잔에 또 따라 주고는 궁금한 것을 또 수라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만난 게 오늘이 처음이니 궁금한 게 많을 수밖에. 이상하게 수라 쪽에선 별로 묻지 않았지만....
"수라.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니가 화낼 지도 몰라서 묻는 건데...."
"뭔데에....뜸들이지 말고 빨리 물어봐..."
수라는 질문을 받자 재빨리 고개를 쳐들곤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붉은 빛이 얼굴에 완연하게 채색된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는 아직 괜찮았지만 덩달아 술이 오르는 것 같았다.
물론 그는 흥분으로 인해 얼굴이 붉어진 것이었지만....
"니가 화낼지도 몰라서...."
"음....대략 먼 질문 할지...내가 맞춰볼께. 내 이름이 왜 아수라 냐고 물으려 한 거 아냐?"
"귀신이네."
준영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수라는 키득거렸다.
"수라가 귀신이잖아"
"아무튼.....특이한 이름이라서....물어봐도 돼?"
"나야 상관없지만....니가 믿고 안 믿고의 문제인데...해줘?"
" 응 "
사실 대단한 실례의 이야기였다. 한마디로 이렇게 묻는 것 아닌가? 너 이름 되게 특이하네? 왜 부모님이 그렇게 지었어? 하고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니....하지만 수라는 스스럼 없이 가르쳐 주었다.
"난....태어나면서부터 적발로 태어났거든"
" 적발?"
"붉은 머리카락이라고...."
"뭐?"
말이 되는가? 신생아가 붉은 머리카락으로 태어날 리가 없다. 준영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수라를 쳐다 보았다. 수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눈으로 준영을 보며 웃었다.
"말했지? 믿거나 말거나 라고? 머리카락 뿐만이 아니고 붉은 눈썹에 붉은 눈을 가지고 태어났지. 부모님은 내 모습을 보고 수라 라고 이름 지었어."
"으, 응...."
준영은 어정쩡하게 마주 웃어주면서 속으로 깊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야 뭐야...혹시....술을 내가 너무 많이 먹였나? 그래서 머리가 어떻게 이상해진 것?"
깊이 사색하는 준영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수라는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에게 들리지는 않을 정도로 조그맣게 중얼 거렸다.
"내 본명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수라는 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쓸데 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술이 웬만큼 들어가면 내면의 심리를 누군가에게 쏟아내고 싶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수라는 갑자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맘에 두고 있었던 녀석 이야기는 준영에게 처음 하는 것이다. 괜한 짓을 했다 싶었다. 아주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휘청~
몸이 또 휘청거린다. 잔을 잡아가는 손이 실수로 허공을 휘저었다.
잡생각이 많아지다 보니 그녀석 생각이 자꾸 났다. 자신만큼 강했던.... 강함이란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던 그 녀석. 연하 주제에 괜시리 자신의 마음을 콩닥거리게 했던 그 녀석. 그리고 몹쓸 짓도 했던 그 녀석.
처음에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그가 미웠으나 떠나온 나중에 와선 문득문득 떠올려 보면 단순히 개구장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지금은 왈칵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녀석 때문에 약해진 자신의 모습에는 화가 난다.
수라의 연한 눈썹이 찡그려지기 시작했다.
준영은 그녀를 보고 당황이 되었다. 그렇게도 생글거리고 깔깔거리던 수라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기 때문이다.
"수라?"
".........."
"왜 그러는 거야?"
".........."
준영은 수라의 찡그린 얼굴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야, 어떻게 된 거야? 이번엔 술로 패배를 안겨 주겠다며? 이제 힘든가보지? 하하 ~ 뭐하는 거야? 난 잔을 비었다고."
수라가 잠시간의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의 잔을 비워놓았던 것이다. 그녀의 잔엔 여전히 맥주가 담겨 있었다.
준영은 통쾌했다. 수라의 패배감에 물든 얼굴을 보니 유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갑자기 소변이 마려웠다. 맥주는 화장실을 자주 가게 한다. 준영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야, 나 화장실 좀 다녀 올께."
".......갔다와 "
짧게 말한 수라는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표정은 아니나 워낙 얼굴이 받쳐주니 그런 모습 조차도 예쁘다고 준영은 느꼈다.
근데 준영은 화장실을 가다가 잠시 얼굴을 갸우뚱거렸다. 그리고는...
그 역시 약간 취해 있었기에 숙녀에게 실례인 질문을 해버렸다.
"근데 넌 화장실을 안가? 가는 걸 못 봤네?"
마시는 중에 자신도 서너 차례는 다녀 왔다. 맥주의 특성상 그건 어쩔수 없었다. 근데 그녀는 한번도 화장실을 가지 않았던 것이다.
".....난 화장실 안 가도 돼....."
준영은 잠시간 "저건 또 뭔 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지만 화장실이 급했기에 일단 서둘러서 화장실을 향했다. 수라는 여전히 침울한 얼굴이었다.
화장실을 다녀온 준영이 자리에 다시 앉을 동안에도 수라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래도 잔은 비워져 있었다.
하지만 준영은 수라의 붉어질 대로 붉어진 얼굴을 보고 수라가 거의 한계에 달했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녀의 눈꺼풀이 점점 까물락거리고 힘겨워 하는 것이 역력해 보일 정도였다.
"흐흐...됐어...조금만 더..."
준영은 킬킬 거리면서 또 잔을 따라줬다. 수라 잔에 따른 후에 자신의 것까지 재빨리 채운 후에 그는 키득거리다가 "건배"를 외쳤다. 수라는 말없이 쳐 주기만 했다.
이번 것까지도 시원스럽게 받아 넘긴 준영은 먼저 잔을 내려놓고 수라를 보았다. 수라는 이번 잔을 아주 천천히, 정말 천천히 마셨다. 그리고는 잔을 조용히 탁자에....가 아니고 거칠게 내려놓았다.
탕-
"하아...."
수라가 한숨을 쉬었다. 이젠 정말로 지쳐 보였다. 고개도 힘겹게 다시 들어올린 채 가는 팔의 한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고개를 받쳤다.
준영은 키들거리면서 수라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내가 이길 것 같은걸?"
"........제길....."
수라는 짤막하게 말했지만 분하다는 감정이 역력하게 담겨 표출되는 것 같았다. 준영은 약간 크게 웃었다.
"하하~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어. 내가 자신 있어 하는거 보면 몰랐냐?"
".....빌어먹을... 빌어먹을.....그게 아니라구. 난 원래 너보다 잘 마셨어. 너보다 잘 마셨다구....제길......정말....."
수라는 참을 수 없이 분한 것 같았다. 쉴새없이 중얼거렸다.
"......아아. 이것도 다 그녀석 때문이야. 이게 정말 무슨 꼴이야? 한심하네 나 정말....."
그 녀석? 그 연하의 남자를 말하는 건가 하고 준영이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한 수라는...
수라는 슬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녀의 눈이 꼬옥 감기더니 갑자기 정말 의외로.....
이슬이 몇 방울 흘러 내렸다. 맑고 영롱하기가 이를 데 없는 액체의 결정. 준영은 입을 정말 찢어지게 벌렸다.
설마 하니 수라가 눈물을 보인 것도 정말로 의외였지만,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예뻤던 것이다.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지금 순간만은 수라가 정말로 연약해 보였다. 그 막강해 보이던 여자애가....
"커억...."
준영은 대경실색했지만 사실은 엄청난 행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라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수라는 고개를 살짝 돌려 재빨리 눈물을 닦아 내고는 갑자기 자작을 시작했다. 대차게 연거푸 무려 석 잔을 원샷 해버렸다.
꿀꺽꿀꺽...
"이...이봐. 좀 천천히 마시는 것이...."
"....시끄러워.....그냥 내버려 두라구."
그녀의 단호한 기색 때문에 말리지도 못했다. 그렇게 내리 석 잔을 깨끗하게 비워 낸 후 수라는 거칠게 "탕" 소리가 나도록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수라는 준영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약간 혀가 꼬인 채로, 천천히 토막 토막 끊어뜨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아....너 정말....잘 마시네.....내가 인정하지....내가......하지만.......예전의 나에게 걸렸다면 넌 오픈 게임도 안 되었을...거야....정말....오늘같은 날은....그 애가 더 원망이...되네.... 아무튼 진 건 진 거니까.....할 말은......없는 것 같네....."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몇 호홉을 고르고 난 후에 수라는 준영에게 툭 던지듯이 말을 했다.
"준영....."
"응?"
"남자란 건......여자를 뭘로 생각하는 걸까?"
갑자기 그런 말을 던질 줄은 몰랐기에 준영은 어정쩡하게 대답할 수밖에...
"그, 글쎄?"
"남자란 존재들 말이야....여자를....장난감으로 생각.....하는거 아니야?"
",,,,,,,,,,,"
"....난 그렇게.....생각..."
거기까지 말하고는 수라는 푹신한 의자의 옆에 쓰러졌다. 애초에 4명이 앉을 정도의 자리였기에 수라가 옆으로 눕는 데는 자리가 충분했다.
준영은 수라의 토막쳐진 말을 듣다가 갑자기 누워버리자 황당했고 그녀가 불쑥 물어본 말에 대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수라는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을까?
"흠....음....."
그렇게 생각 하는데 갑자기 준영의 머리 위에 경종이 크게 두어 번 울렸다. 지금 그런게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완전한 승리의 열매가 지금 두가지 이루어져 있었다.
한가지는 바로 자신은 승리했다는 것. 두번째 패배를 선사해 주겠다고 하던 수라가 자신에게 패한 것이었다. 이번엔 수라에게 한번 먹인 꼴이니 절로 기쁠 수밖에.
그리고 또 한가지는..... 수라는 지금 완전히 뻗어버렸다는 것이다.
두근두근....
인사불성이 된채 의자에 몸을 가로누이고 있는 수라를 보며 준영은 절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준영은 잠시 그러다가 얼른 달려가서 깔끔하게 계산을 시작했다. 종업원이 살인적인 액수값을 말하는 동안에도 그는 귀에 안 들린다는 듯이 오로지 저쪽에 누워 있는 수라만을 바라 봤다.
계산을 끝낸 후에 다가온 준영은 수라의 가느다란 어깨로 손을 뻗고 있었다. 지금 그의 얼굴은 흥분 상태 그 자체를 보여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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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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