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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09:45 679회 0건
팡그릿샤 왕도 대교구 사원 사제관.
윌토르는 경전을 펴놓은 채 고심하고 있었다. 물론 교회에 대한 고심은 아니었다. 눈앞에서 공주가 아른아른거렸다.
‘제길…, 그런 뒤로는 완전히 감감 무소식이네…. 그 때 너무 몰아부쳤나? 입맞춤까지만 하고 보낼 걸 그랬나….’
습관처럼 해대던 주전부리도 하지 않은 채 끙끙거리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며 안정을 하지 못했다. 공주, 공주, 공주, 공주…. 공주를 안는다…. 이거야말로 내 일생 일대의 전환점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자 아랫도리가 뻐근해져 왔다. 그는 딱딱해지는 것을 저도 모르게 만지작거리며 홀로 망상에 빠져들어갔다.
“대주교님.”
문밖에서 나는 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린 그는 얼른 아랫도리를 추스르며 자리에 앉았다. 음, 들어오게. 문이 열리고 시종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비센테 추기경께서 입궁하십니다. 다녀오시는 동안 본당을 맡아달라는 당부를 하셨습니다. 왕도 대교구의 추기경이었다. 귀찮다는 듯 알았다며 나가라는 윌토르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젠장,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좋은 생각하다가 김새버렸네 하는 표정으로 씨근거리던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아윽…! 하윽…! 악…!”
“흐윽…! 흑…! 헉…!”
수녀원에서 파견을 나와 있던 타마라의 거처에서 윌토르는 그녀를 겁간하듯 책상 위에 엎드리게 해놓은 채 거친 몸짓으로 욕정을 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쾌감에 일그러졌고, 행여 밖으로 새어나갈까 싶어 억누르며 자아내는 신음이 쥐어짜듯 헐떡거렸다.
“주교님…, 오늘…하악…! 대…대단해요…!”
“흑…! 헉…!”
그럴 수밖에. 주교의 감은 눈앞에는 공주가 아른거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다 아랫도리에서 뭔가 폭발하는 느낌에 그는 얼른 몸을 뺐고, 타마라는 책상에서 일어나 꿇어앉으며 주교의 벌겋게 달아오른 남근을 덥석 물었다. 입속에서 터져나오는 비릿한 정액을 삼키며 수녀는 그것을 뿌리까지 삼켰다. 목이 움직이며 정액을 삼키는 소리가 나길 서너 번, 곧이어 타마라는 머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그것을 빨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정액을 빨아내지 않으면 사제복이나 수녀복에 묻을 수 있었으니까. 욕정을 채우고, 증거인멸을 위해 미키네오스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가장 성스럽고 고결해야 할 수녀가 하고 있었다.
몇 차례에 걸쳐 대량으로 정액을 뿜어냈음에도 윌토르의 남근에선 그녀가 빨아내는대로 계속 뽑혀나왔다. 자신의 체액까지 깨끗하게 청소가 되었다 싶을 무렵이 되어서야 입을 뗀 타마라는 입안에 들어있던 정액을 다시 꿀꺽 삼키곤 옷매무새를 고쳤다.
“말해봐. 생 마린 수도원에는 자네만한 수녀가 얼마나 있지?”
아직 숨이 채 골라지지 않은 윌토르가 털썩 의자에 몸을 던지며 묻자 타마라는 날카롭게 웃으며 그를 흘겨보았다. 무슨 좋은 거라도 드셨어요? 오늘 주교님 정말 대단했어요. 많이 나오고…. 엉뚱한 말로 되묻는 수녀를 보고 윌토르는 혀를 차며 웃어버렸다.
“저만한 수녀는 없어요.”
연초를 물고 불을 붙여 건네는 타마라가 남자를 홀리는 웃음을 보이며 대답하자 윌토르는 한모금 빨아 다시 그녀에게 건네주며 받아쳤다.
“아름다운 외모는 신의 저주야. 남자를 홀리거든. 어서 그대가 늙어서 그 저주로부터 벗어났으면 좋겠군.”
웃음 자체가 죄악시되었기에 크게 소리내진 못했지만 타마라는 입을 가리고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비센테가 날더러 본당을 지키라더구만. 젠장…. 입궁한대.”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추기경께서 입궁하시는 날이죠.”
“어. 아마 앙느쿠테 때문이겠지.”
“그럴 때군요. 곧 연말이니….”
앙느쿠테. 송구영신 예배의식을 일컫는 말이었다. 매년 연말이 되면 왕도 대교구의 주관 하에 이 행사가 진행되곤 하였는데, 전후 한동안은 이전과 같이 교구 사원에서 진행되었다. 전통적 교권 국가인 미키네오스에서는 이 행사에 국왕을 비롯한 왕족 모두와 귀족 대신들까지 참석하는 것이 국법이었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교권이 무너진 이후 국왕의 권력이 강대해지면서 행사 장소는 왕궁으로 바뀌었다. 이후 의식이 행해지기 전, 그 의례 절차와 예산 등을 논의하기 위해 추기경이 직접 왕궁에 들어가 국왕을 알현하고 대신들을 만나는 것이 대교구 수장으로서의 중요한 연례업무였다.
“자네도 고생이겠어. 앙느쿠테 때문에….”
“고생이랄 게 있나요. 저한테도 떨어지는 게 있으니 이러고 있죠. 하하~.”
앙트쿠테 행사에서는 한 가지 해괴한 의식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국왕이 생 마린 수도원에서 선별된 수녀와 동침을 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제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를 하고 두 사람이 몸을 섞는데, 이것은 국왕의 권력이 아무리 강대하다 하더라도 신의 뜻을 전하는 이들이 국왕의 어머니와 같음을 나타내는 절차였다. 어머니의 몸으로 다시 기어들어갈 수야 없는 노릇이니, 몸의 일부를 넣어 출생의 근원으로 환원하게 됨을 상징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긴 자네도 이걸로 지긋지긋한 수녀생활 끝이네.”
“그렇죠. 아~ 정말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수녀들 중 적잖은 이들이 그 의식에 선발되기를 원했다. 일단은 처녀여야 했으나, 그 정도를 속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원.칙.적으로 국왕과 동침을 하게 되면 수녀직을 박탈당하는 혜택(?)이 있었기에 그러했다. 때문에 그 선발과정에서 암암리에 수녀들과 수도원 행정직에 있는 사제들 간의 거래 등이 끊임없이 발생해왔다.

“잘 썼다…. 정말 잘 썼어…, 아하하하하~!”
레이네는 제가 쓴 것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는 감탄하며 웃어제꼈다. 뭘 썼기에 그러고 있는지. 아무튼 그녀는 정보원을 불러 그것을 윌토르의 집무실 책상 위에 올려두라 명령했다. 바람처럼 사라진 정보원이 서 있던 자리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레이네.
“르로아, 그 멍청한 놈이 어디서 저런 편리한 것들을 구했담….”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알 수가 없으니, 정보원으로서 그만큼 이상적인 자들도 없었다. 그들이 가져왔던 교총 내 사제들에 대한 정보도 매우 상세하여 레이네가 전략을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연초를 뻐끔뻐끔 빨다가 뭔가 생각난 듯 아참~! 비센테한테도 보내야지. 하면서 호들갑스럽게 펜을 집어들고 종이를 펼쳤다.
파견 수녀의 거처에서 한 차례 더 힘을 빼고 노곤한 몸으로 집무실에서 시간을 보낸 윌토르는 저녁 나절이 되어 자신의 침실에 들어왔다가 놓여있는 서한을 발견했다. 이게 뭐야…? 들어 뒤집어 보니, 촛농에 찍혀 있는 직인이 보였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아 촛불을 들어 가까이 가져갔다.
“…!!”
직인의 모양을 본 윌토르의 눈이 놀라움과 반가움과 화색으로 이따만해졌다. 분명 그것은 왕가의 문장이었다. 공주…! 공주에게서 온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서한을 뜯는 그의 손이 기쁨으로 떨리기까지 했다. 허겁지겁 직인을 떼어내고 매듭을 풀어 서한을 펼치는 그의 손, 쌓여있던 욕구를 한 번에 해소하는 호색가의 손이 그와 같을 것이다.
‘존경하는 윌토르 대주교님.
차마 뵙고 사죄드리기가 민망하여 서한으로 대신하는 이 불경한 여인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지난날 신심이 얕고 알량한 자만으로 인하여, 절 위해 내려주신 신의 은총을 믿지 아니한 바, 신의 뜻을 말씀하시며 저를 기쁘게 하기 위해 헌신하셨던 대주교님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어 버렸던 지난 일에 대한 뉘우침과 참회로 하루 하루를 가득히 채우고 있습니다.
대주교님께선 신의 은총을 받으사 저를 위하여 강건한 신체를 가지셨으니, 부끄럽고 또한 외람되오나 다시 한 번 그 은총이 제게 내려질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어리석은 여인은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뜻을 세워 신심으로 대주교님께서 제게 전하실 신의 뜻을 받들어 모실 것입니다.
앙느쿠테가 열리는 날 사람을 보낼 것이오니, 부디 대주교님을 향한 제 연모의 정을 물리치지 말아주십시오.’
편지를 다 읽은 그의 손이 점점 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입꼬리가 실룩거리는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은 기쁨이다 못해 환희였다. 공주…, 공주…. 그렇게 연신 되뇌이며 그는 그 서한을 읽고 또 읽었다. 아무리 봐도 그것은 레이네의 서한이었다. 이미 두 번이나 정력을 소비하고 나서도, 그의 아랫도리는 불뚝 불뚝 일어서고 있었다.
한편 왕궁에서는 비센테 추기경이 국왕을 알현하고 대신들과 함께 앙느쿠테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6백 5십만 팡그라니요?! 그게 말이 된다고 보시오?!!”
“그 이상은 책정하기가 힘이 듭니다, 추기경님.”
재무대신의 직무대행으로 이 자리에 앉은 재무 부총관 플로랑 메르히네는 정중하게 추기경의 양해를 구했다. 며칠 있으면 귀환자들이 왕도에 도착합니다. 그들에게 지급할 정착금을 생각한다면 지금으로선 행사를 위해 많은 예산을 책정할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말은 되는 소리였으니 추기경으로서도 선뜻 거기에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나면 교권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 그래도 6백 5십만은 너무하잖소! 작년만 해도 천만 팡그는 되지 않았습니까…!”
외무대신이 그 말을 받았다.
“하지만 올해에는 모든 교총 산하 국가들이 7백만 이하의 예산을 들여 연말 예배의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올 한해 환율변동폭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심지어 아예 하지 않는 곳들도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우리가 작년처럼 천만이 넘는 예산을 책정하게 되면, 우리 미키네오스가 교총에 너무 저자세 아니냐는 시선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교총에 저자세 아니냐는 시선이라니…! 엄연히 우리 교총의 총장 예하께선 보르틴 대륙 전역에 대한 정신적 지주이시오! 일국의 군주라 해도 총장 예하 앞에선 성도일 뿐이란 말이오…!”
“무엄하시오!! 지금껏 교총의 위상을 높여주기 위해 폐하께서 지난 20년간 얼마나 노력을 하셨는지 모르지 않는 그대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는단 말인가!!!”
병부대신 라크라오스의 서릿발 같은 호통소리가 온 회당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무명(武名)은 추기경으로서도 익히 알고 있었던지라, 게다가 그 기세가 대단하여 저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병부대신은 진정하라. 추기경께선 말씀을 계속하시오.”
흠…! 비센테는 크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좌중을 쓸어보았다. 비센테에게 이 순간 가장 화가 나는 대상은 바로 국왕이었다. 이건 저희들끼리 똘똘 뭉쳐놓곤 나를 불러다 통보하는 식이 아닌가. 그는 차근차근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올해 미키네오스의 사정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건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나라의 개국 공신가문의 한 분이 변을 당하셨고, 반역까지 일어날 뻔 했었기에 지금 시민들이 불안해하고 있소. 게다가 예언서의 종말이 민초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또 귀환자들도 있질 않습니까? 새로이 터전을 잡을 귀환자들을 위해 축원의 기도를 올리는 일도 중요합니다. 교총의 입장도 생각을 좀 해주셔야지요. 무턱대고 그렇게 행사의 규모를 콱 줄여버리면 명분상 행사를 주관하는 교총은 뭐가 됩니까?”
“추기경의 말씀에 일리가 있는 것 같군….”
바루나의 동조에 추기경이 약간 얼굴을 폈다. 다른 의견은 없나? 둘러보는 그의 눈에는 조용히 앉아만 있는 대신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남몰래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들이…, 저 따위 논리 하나를 깨지 못하고…. 그가 나서려는데 재무대신 직무대행 플로랑 메르히네가 침묵을 깨고 나섰다.
“재무대신 직무대행 재무 부총관 플로랑 메르히네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
“말하라.”
“추기경께선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는 듯합니다.”
“…?”
바루나의 눈에 언뜻 기대의 빛이 떠올랐다. 무슨 말인가 하고 다른 대신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꽂히자 플로랑은 한 박자 쉬었다가 약간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이어갔다. 저 놈 물건이군…. 말을 꺼내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플로랑의 언술이었다.
“추기경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맞습니다. 미키네오스의 문제는 그런 것들이지요.”
“음….”
“하지만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은, 언제부터 추기경께서 미키네오스 왕실과 지도부에서 해야 할 일까지 관여하셨냐는 겁니다.”
“…!!”
“…!!”
… …! 그 말에는 바루나도 옳거니 싶었다. 그는 입꼬리가 실룩거리며 올라가려는 걸 간신히 참고 플로랑의 이어지는 말을 경청했다.
“방금 지적하신 모든 사항은 왕실과 여기 귀족 대신분들께서 논의하고 결정할 사안들입니다. 그런데 추기경께서는 그토록 다방면에서 곤란을 겪고 있는 미키네오스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계시면서 무리하게 예산 책정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몹시 외람됩니다만, 의심스럽습니다.”
“뭣…! 이자가…!!!”
책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추기경을 주저앉힌 것은 바루나의 목소리였다.
“그만하라.”
“폐하…!! 이 자의 말이 무례하지 않소!!”
“추기경은 자리에 앉으라.”
바루나의 눈빛과 목소리에 은은한 노기가 서렸다. 그의 인간됨을 잘 알고 있는지라, 비센테는 더 이상 항거하지 못하고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오늘 논의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지. 더 이야기를 하면 서로 감정 싸움이 될 듯하니.”
그 말을 끝으로 바루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퇴청했고, 다른 대신들도 각자 일어나 회당을 나서기 시작했다. 추기경만이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꼼짝하지 않은 채 분기를 되씹고 있을 뿐이었다.
“근위장.”
“예, 폐하.”
“재무 부총관을 부르라.”
“예.”
회당에서의 회의가 끝나면 언제나 그러듯 회당 바깥쪽을 돌아 라크라오스가 그의 집무실로 따라 들어왔다. 이 날도 마찬가지로 국왕은 라크라오스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술로 하지.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폐하.”
“잔은 세 개를 가져오게.”
“…? 누가 또 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보면 알 것이네. 그보다….”
“… …?”
“일단 기선은 꺾어놨으니 숨통을 틔워줘야 하지 않겠나.”
“공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겁니다.”
“…. 한다고 했으니…, 믿어봐야지.”
“… ….”
아무래도 국왕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라크라오스는 눈앞에 있는 자신의 주인이 딸에게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또한 공주가 어떤 방법으로 아비의 정치를 돕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 …. 뭐가 말인가.”
“…. 공주님 말입니다.”
“… …. 누굴 걱정하는 건가. 나인가, 아니면 그 아인가?”
“… 둘 다입니다.”
피식 하고 국왕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때 문밖에서 근위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재무대신 직무대행 플로랑 메르히네 공을 데려왔습니다.
“들이라.”
“국왕 폐하. 재무대신 직무대행, 재무 부총관 플로랑 메르히네 문후 올립니다. 찾으셨습니까?”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그에게 국왕이 자리를 권했다. 마침 시녀에게 시켰던 술도 준비되었고, 각자의 자리에 잔이 하나씩 놓였다. 간단한 과일도 함께 놓이고, 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가 각 잔에 술을 따랐다.
“들지.”
먼저 잔을 비우자 라크라오스와 플로랑도 잔을 들어 비워냈다.
다시 술잔이 채워지고, 한 순배가 더 돌았다.
“오늘 추기경을 눌러주는 솜씨가 대견해서 한 잔 같이 하자고 불렀어.”
“황공합니다, 폐하.”
“그대의 가문은 대대로 군부에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지…?”
“예, 폐하. 돌아가신 할아버님과 아버님께선 울리프 후작의 아래서 기사단을 이끄셨고, 현재 숙부님께선 레블로 성 기사단장으로 계십니다.”
“교총 직속의 기사단 단장이 숙부라면 추기경에게 그렇게 대놓고 반박하기가 힘들텐데, 자네 기개도 알아줄 만하구먼…!”
소리내어 웃는 국왕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했지만, 플로랑은 웃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까닭이었다.
“병부대신.”
“예, 폐하.”
조용히 웃음띤 얼굴을 하고만 있던 라크라오스는 이어지는 국왕의 말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 정도 집안이라면 군부를 맡아도 잘 하지 않을까?”
“…!”
“자네도 정치인생이 20년인데 이제 가신 노릇은 그만해야지.”
“폐하…!”
두 사람의 놀라는 얼굴에도 국왕은 개의치 않은 채 플로랑을 보며 그에게 작위가 있느냐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기사 작위 정도만 갖고 있다며 재상의 지위를 갖는 것은 당치도 않다 고사하였다.
“그럼 주면 되겠군. 남작이면 군권을 맡는 데 지장이 없겠지?”
“하지만 폐하, 저는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가병들은 있을 것 아닌가? 설마 자네 집안쯤 되는 데서 가병 하나 거느리지 않을 리는 없을 텐데?”
“허락하신다면 제가 곁에 있으면서 가르치겠습니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야. 그리고 정무대신을 자네가 맡아.”
그 말에 라크라오스는 확 굳어버렸다. 정무대신이 공석이었으니 누군가는 그 자리에 앉아야 함이 마땅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자리로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그였다. 그는 뼈속까지 군인이었다.
“외람되지만 폐하, 그것은….”
“왜, 싫은가?”
“아시겠지만 저는 천성이 군인입니다. 정치를 할 만한 그릇이 못됩니다.”
“정치를 할 만한 그릇이 못되면? 지난 20년간 자네가 했던 건 대체 뭔가? 병정놀이나 하고 있었던 건가?”
“그것은….”
“됐으니 맡아. 군부의 지휘관이건 행정부의 지휘관이건 사람 다스리는 건 크게 다르지 않아. 해 봐. 그리고 그대는 병부의 일을 맡되 여기 트레제게 경에게 조언을 자주 구하도록 해.”
“감사합니다, 폐하…! 최선을 다하여 폐하의 은덕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잘 해.”

회당에서 나와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비센테 추기경은 왕가의 문장이 찍힌 서한을 받아들고 있었다. 내용을 읽어본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대의 어려움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부왕께서 나라 안 사정을 이유로 하여 교총을 핍박하려 들고 있음을 압니다. 나 역시 교권이 융성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정신적으로 쇠약해지고 시민들이 사분오열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나는 그대와 뜻이 같습니다. 내가 그대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만나서 상의를 하고자 하니, 나와 손을 잡을 의사가 있다면 답신을 써서 왼쪽 손목에 두 개의 팔찌를 찬 시중에게 전해주십시오. 추기경님께 신의 은총이 언제나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왕녀 레이네의 서한이었다. 그는 당장 종이를 꺼내어 답신을 쓰기 시작했다.
‘왕녀의 후의에 매우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나는 기꺼이 왕녀의 손을 잡을 것입니다. 나 또한 왕녀의 후의에 반드시 보답할 것을 신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정해주신 장소와 시각에 뵙기로 하지요. 부디 전능하신 신의 무한한 은총과 영광이 왕녀와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제대로 먹혀들었네…? 좀 많이 몰렸던 모양이야.”
서한을 받아든 레이네의 얼굴엔 회심의 미소가 짙게 배었다. 이런 자에겐 화끈하게 밀어줘야 효과도 좋고 뒷탈도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사뇰을 불렀다.
“예, 공주님.”
“저녁때 객궁 후원으로 만찬상을 좀 마련해 놓으라고 해. 내가 그쪽으로 간다고 하고.”
“저녁때 객궁 후원에 만찬상을 마련해 놓으라 하겠습니다.”
복명복창을 하고 즉시 움직이는 사뇰을 조금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면서 레이네는 에반더를 향해 쟤 이상하지 않니, 요즘? 하고 물었다. 에반더는 싱긋 웃으면서 그의 행동에 대해 설명했다.
“저희는 공주님께서 진심을 보여주신 몇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성의껏 공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 …. 너 웃기도 하는구나?”
“하하….”
공주는 씩 웃는 얼굴로 소리까지 내는 에반더를 보다가 이내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워버렸다.
“하지만 착각은 말거라. 너희들에게 진심을 보였다기보다는 혼잣말을 하는데 거기 너희가 있었던 거니까….”
“…!”
에반더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어디까지나 너는 노예고 난 네 주인이야. 주인 앞에서 함부로 잇속을 드러내고 웃지 말거라. 명줄을 앞당기고 싶지 않으면…. 말도 아끼고.”
“… …. 예, 공주님.”
“그리고 그 빌어먹을 얼굴 좀 펴지?”
“예, 예, 공주님…!”
“물러가.”
허리를 굽히고 나오는 에반더의 얼굴은 구겨져 있었다. 어디 두고 보자 하는 말이 꾹 다물어진 잇속에서 맴돌았다.
그 날 저녁 객궁 후원에서 열린 조촐한 만찬에는 공주와 추기경 두 사람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른 데서 불빛을 볼 수 없도록 촛불을 조금만 밝힌 터라 오히려 은은한 불빛에 레이네의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왕녀께서 이토록 아름다우신 분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추기경께선 이 사람을 놀리시는군요. 아름다움은 원래 신의 저주가 아니었던가요? 보통 아름다운 이들은 어서 늙어서 그 저주를 벗어나라고 하던데요.”
“그건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하하…. 신의 말씀은 탐심과 음심을 멀리하고 정갈한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지요.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 해석하여 그런 어리석은 가르침을 펴기도 합니다만, 신의 뜻은 아닙니다.”
“그렇군요.”
공주는 포도주가 채워진 잔을 들었다.
“괜찮겠지요?”
“물론입니다. 구세주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 드셨던 성스러운 음료수가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하….”
좋다고 처웃기는…. 레이네는 속으로 그를 비웃으면서도 자못 감화된 얼굴로 잔을 기울였다. 이번 앙느쿠테…, 진행하시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으신 것으로 압니다. 네…, 그렇지요. 시민들을 다스리는 일이 반드시 왕실과 귀족 대신들만의 힘으로만 하는 일이 아닌데…. 그러게 말입니다. 왕녀께서는 현철한 분이시군요. 그런 폐하를 뵐 때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장차 이 나라의 왕위를 계승할 몸으로서 폐하의 용단에 번번이 반기를 들 수도 없을 테고….
“왕위라니요?”
별안간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쳐들고 물어오는 추기경을 보고는 아차 싶었다. 레이네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는 어쨌든, 귀환자들도 곧 돌아오고 할 테니 그들을 위해서라도 앙느쿠테는 좀…, 성대하게 치르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듣기로는 이번 예산이 터무니없이 깎였다고 하더군요. 맞습니까?”
“알고 계셨군요, 역시….”
추기경이 문득 손을 놓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네의 안타까운 표정이 그의 한숨을 거들었다. 왕녀께서 이 사람의 입장을 이해해주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귀족 대신들과 국왕 폐하께선 교총에서 미키네오스의 국정에 관여하려 든다고 오해를 하시는 듯합니다. 그럴 리가요…! 정색하는 레이네의 말에 추기경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은 단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키네오스의 시민들에게 신의 이름으로 위안을 주고자 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신을 믿는 한 성도로서, 그 중 신에 좀 더 가까운 한 사람으로서의 마음을 어째서 그렇게 곡해하시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해합니다.”
공주는 조용히 그 말에 동조하며 자신의 품 속에서 전표를 하나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 이게 뭡니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요.”
“…전표가 아닙니까…, …!!!”
추기경은 입이 딱 벌어졌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는 전표와 레이네를 번갈아 쳐다보았고, 레이네는 태연하게 웃으며 그에게 선물이라 말했다.
“어렸을 적부터 왕실에서 제게 주어지는 재산을 조금씩 모아두었던 겁니다. 어느새 이만큼 커졌군요. 항상 의미 있는 일에 쓰고 싶었는데, 신께서 이런 기회를 제게 주신 점 무한히 영광되고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 아니…. 이….”
“추기경님의 고민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되고말고요!! 아…이런…. 이 정도면…! 정말 감사합니다 왕녀님! 이럴 수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전표와 레이네를 계속 번갈아 쳐다보며 ‘신이여’를 연발했다. 전표에 적힌 금액은 오백만 팡그였다. 좀 출혈이 있긴 하지만…, 추기경 정도의 인물을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아깝진 않지…. 연신 싱글벙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추기경을 보며 레이네는 그렇게 되뇌었다.
“왕녀께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 지…! 신의 은총이 무한히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럴 것이니라. 그 중 이삼백만, 아니 오백만 전체가 네놈 아가리로 다 털어넣어질지도 모르니까…. 레이네는 이미 정보원들을 동원해 그가 앙느쿠테를 통해 상당량의 재산을 은닉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실질적인 앙느쿠테에 소요되는 예산은 대략 오백만. 그러니까 백오십만 팡그 정도를 이미 왕실과 대신들 사이에선 상납금으로 책정한 셈이었다. 그런 와중에 앙느쿠테를 한 번 더 치를 정도의 거액이 들어왔으니, 추기경이 함박입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신의 은총이라….”
중얼거리듯 그의 말을 곱씹은 공주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신의 뜻을 대변하는 이가 도와준다면 그 은총이 더욱 커지겠지요.”
“물론입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지금 당장 말입니까?”
“이를 말씀입니까…!”
양팔을 활짝 벌리며 언제든지 환영이란 뜻을 내비친 추기경을 보고 레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말씀하시지요.”
“…나는 전쟁을 원합니다.”
“…?”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교총과 부왕이 척을 지는 것이 싫습니다.”
“…,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지금 마놀로 융베리 전임 총장께서 이곳으로 오고 계십니다. 아마 사흘 정도 지나면 왕도로 입성을 하시겠지요.”
“….”
“부왕께선 론지니아의 전투로 형제나 다름없는 정무대신 도메네크 경을 잃었습니다. 나는 부왕과 정치적인 입장은 다르지만, 그 슬픔만큼은 나 역시 적지 않습니다.”
“…,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우리 보르틴 대륙에서 보르틴의 시민들과 미키네오스의 재상이 마도들에게 습격을 받아 변고를 당했습니다. 신의 뜻에 따라 신의 종으로써 살아가는 이들이 말입니다.”
“그렇지요…! 신의 종이 변고를 당한 겁니다…!”
“그들을 응징하지 않는다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사랑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은 형제 자매이니까요. 아닙니까?”
“맞습니다. 우리는 모두 신의 자식들이요, 형제 자매들입니다.”
“역시 추기경님께선 올바른 판단을 하시리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몇몇 이교도의 교리에 빠져 제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 그것이 진정 신의 판단인양 화합이네 용서네 떠드는 자들이 있다면 그 역시 형제의 사랑을 저버리라 강변하는 것과 같습니다. 곧 신의 뜻을 저버리려는 자들입니다.”
“용서와 화합이라니오, 당치도 않습니다! 마도의 무리들은 신심이란 것이 없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신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어떻게 같은 형제를 잡아먹는 그런 처참한…!”
“나는 교총에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자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럼요, 그래야지요, 암요! 왕녀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그를 보며 왕녀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드실까요…?”

국경을 넘은 귀환자 행렬은 이제 팡그릿샤를 이틀 길 앞두고 있었다. 미키네오스의 변방에서부터 왕도까지 가는 동안 그들은 썩 좋지 못한 미키네오스 민초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연말이라 날씨가 조금씩 추워지는 가운데 헐벗고 굶주리는 이들이 자주 눈에 띄기도 했다. 리타는 안쓰러운 마음에 숙영지에 갈 적마다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격려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바로 옆인데도 국경을 넘으니 이렇게 사정이 다르군요. 그래도 바이마샤르는 이렇게 헐벗은 사람들이 보이진 않았는데….”
“듣자하니, 미키네오스가 가장 혼란기의 상황이라는데…. 내치에 힘쓰지 않고 지금 왕도에선 뭘 하는지….”
융베리의 한숨도 깊었다. 대륙의 최강대국인 미키네오스. 그 허울뿐인 이름의 실상이 눈앞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봐…!!”
“…?”
숙영지를 차리면 어김없이 거리를 돌아다녔으니, 두 사람은 밤중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남녀가 된 셈이었다. 치안을 담당한 군사 몇이 저쪽에서부터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걸이를 보아하니 술을 좀 마신 듯했다.
“뭐어야아~ 해 지면 집에 처들어가서 잠을 자든가. 뭐 하는 놈들이야, 이놈들? 어엉~?”
“수상하잖아. 어? 하나는 계집이네…?”
융베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고, 리타는 눈을 감은 채 그들에게선 신경을 끈 듯 보였다. 이것들 봐라. 늙은이랑 계집이잖아. 이 쭈그렁 노인네가 어떻게 이런 기막힌 계집을….
“어이, 노인네. 거 뭐 하는 분이슈?”
리타는 키가 좀 큰 것을 제외하면 몸이 곧고 인물이 훤해서 여성으로서도 눈에 띄는 외모였다. 아름답기보다는 잘 난 인물에 속하는 부류였지만, 그런 것을 그들이 따질 리 없었다.
“자네들은 치안을 담당하는 군사들이 아닌가? 그런데 순찰을 다녀야 할 때 술을 마시고 다니다니!!”
융베리가 준엄하게 꾸짖자 뭐 좀 있는 사람인가보다 싶어 그들은 주눅이 들어 쭈뼛거렸다. 구…군부에 계시나보다. 뭐 해~! 둘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이내 융베리를 향해 검을 세우고 군례를 올렸다. 그…근무 중 이상 무!
“그대들은 무슨 돈으로 술을 마셨는가…?”
리타의 입이 열렸다.
융베리의 엄격함과는 또 다른 느낌의 음성이었다. 꼿꼿하게 서서 자신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찬바람이 쌩하니 부는 듯한 말씨였다. 듣자니 융베리보다 훨씬 높은 사람 같았다.
“저…저희들 녹봉…으로…, 날씨가 추워서 그냥 한 …잔….”
어쩔 줄을 몰라하는 그들을 향해 리타가 묻는다. 그대들의 녹봉은 누구에게서 받는 것인가? 아무리 봐도 이 여자의 말투는 보통 사람의 그것이 아니다. 적어도 왕족쯤은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얼른 그 자리에 엎드려 죄를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 그대들의 녹봉은 어디서 거두어 들이는가…?”
“…나…나라에서 걷어가는 세금입니다…!”
“그 세금은 어디서 걷어가는가…?”
“시민…시민들입죠, 시민들…!”
“… …. 그래. 그대들이 술을 마시는 그 돈은 시민들의 피땀이다.”
“예예!! 물론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좋으나, 그 술값은 그대들이 치르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치르는 것이다. 그대들은 시민들이 주는 밥을 먹고, 시민들이 주는 술을 마시며, 시민들이 지어 준 집에서 사는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 ….”
리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고, 융베리는 리타의 말에 감탄의 기색을 내보이며 이어질 다음 말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이 여행과 같은 귀환길을 오며 대국의 황녀로서 리타가 가진 자질에 감복해 있었다. 일어나거라. 병사들이 감히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엎드려 있자 리타가 다시 재촉했다. 주춤주춤 일어난 병사들은 그녀에게 거듭 죄를 빌었다.
“그대들은 비록 근무시간에 술을 마셨으나 맡은 바를 다했다. 밤중에 지나다니는 낯선 이를 단속하는 것은 근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대들에게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죄를 물을 수야 없지.”
“가…감사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민들의 사정이 좋지 않으니 치하하는 것만으로 그 상을 대신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상 따위는 없어도 됩니다!”
리타는 그들을 하나 하나 쓸어보고는 말을 맺었다.
“남의 밥을 먹고, 남의 옷을 입는 이들은… 응당 남의 근심을 품고 살아야 한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남의 밥…, 남의 옷….”
올바른 왕도정치의 뜻을 알기 쉽게 풀어놓는 그녀의 말을 병사들은 되뇌어보았다. 리타는 그들에게 슬쩍 웃음을 내비치며 그만 가보라 일렀다.
“전하께선….”
“….”
“이미 황제의 자리에 오르셔도 되겠습니다.”
감탄의 빛이 역력한 표정이었지만, 정작 리타는 다문 입술에서 결연한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는 듯 보였다.
“바루나가 감추고 있던 것을 알아냈습니다.”
“…!”
이게 무슨 소린가. 바루나가 감추고 있던 것이라니. 뭔가 다른 계략을 꾸미고 있었단 말인가? 융베리는 그런 얼굴로 리타를 응시했다. 리타의 단호한 표정에서 그것이 결코 그녀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설마…. 전하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어서 리타의 입으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바루나의 전쟁을 위한 물밑 작업이 얼마나 치밀하고 냉혹한지, 심지어 야비하기까지 한 그 술수에 융베리는 몸서리가 처졌다. 여기서 상세한 이야기를 밝히는 건 이야기의 흐름상 좋은 일이 아니니, 그로 인해 융베리가 해야 할 일만을 밝힌다면,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을 막아야만 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막사를 나서는 그의 표정은 발걸음만큼이나 무거웠다.
막아야 한다. 이 전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해…. 하지만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융베리는 교총에 남아있는 자신의 인맥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현임 총장인 레오 움베르티노는 무언가에 적극적으로 나설만한 인사가 아니었다. 총장부터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인다면 누가 나서더라도 바루나와 맞서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현재의 교총은 바루나가 이름값을 올려준 것에 다름아니다. 그에게 맞서 반전론을 펼치려면 교총이 일치단결을 해야 해. 다행히 바루나는 명분에 약한 자다. 총장의 권위로 교총이 뜻을 모으면 바루나 역시 우격다짐으로 나올 수는 없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맨 먼저 총장을 설득할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그의 그런 마음은 이미 공주의 발빠른 공작으로 시작도 하기 전에 원천차단이 되어버렸고, 이 때의 그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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