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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09:43 701회 0건
신년 첫날은 안식일이었다. 밤새도록 앙느쿠테 행사에 참여했던 라크라오스와 예스프리 부자는 행사를 마치고 국왕의 집무실에 들었다. 따뜻한 차와 다과가 나오고 그들은 마주 앉아 함께 그것을 들었다.
“오래간만이구나, 예스프리. 아주 잘 컸구나.”
“황공하옵니다, 폐하.”
“좀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폐하?”
“낮잠은 태만의 상징일세.”
“그건 교리에서 말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자네도 자려고…?”
이 무늬만 교인들은 소리내어 웃으며 은근히 교리를 향해 비아냥을 날렸다. 웃음을 그친 바루나는 예스프리에게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그래, 중대장의 직위는 어떻던가. 할 만 한가? … …. 아들이 뜸을 들이자 라크라오스가 어서 대답하지 않고 뭘 하느냐 다그쳤다.
“뭔가 문제가 있는 모양이군….”
“폐하. 아이가 아직 철이 없어 그러니 이해해주시지요. 문제가 없는 곳이 어디있겠습니까.”
“아니, 아니…. 한 번 들어는 보지.”
“….”
“말해보라. 국왕을 만날 기회가 어디 그리 많던가. 게다가 나는 네겐 백부와도 같으니라.”
“폐하…!”
“뭘 그리 정색을 하는가. 자넨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게.”
“… ….”
“어서 말해보라.”
“말씀드리긴 황송하오나…, 현재 군의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습니다.”
“군의 상황이 좋지가 않다…?”
“예, 폐하. 얼마 되지 않는 기간이었습니다만, 중대장으로서 보건대 훈련을 하는 그 자체가 병사들에게 무리입니다.”
“…. 계속하라. 어째서 그런가.”
“첫째는 그들이 너무나 허약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들이 제대로 먹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병사들은 겨우 빵과 양고기 수프로 끼니를 채우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수프라기보다는 그저 양고기를 넣고 우려낸 것일 뿐, 고기 수프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지경입니다.”
“으음….”
“게다가 추운 날씨에 따뜻한 곳에서 손을 녹이며 식사할 곳 하나 없이 수프 그릇의 열기로 손을 녹이고, 군막은 바람이나 겨우 막아주는 천막에 불과하니, 자면서도 얼어 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들을 훈련시켜봐야 적과 싸워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예스프리…!”
“아니다.”
라크라오스를 가로막고 바루나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군사령부 직할대의 사정이 이런데, 다른 외지의 부대는 어떻겠습니까. 이 점을 살피셔서 군사들이 강군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살펴주셨으면 합니다.”
“으음….”
할 말을 다 쏟아내는 아들로 인해 라크라오스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국왕의 앞이라 한숨을 삼켜버려야 했지만, 그는 삼킨 만큼 더욱 무거운 안색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바루나가 예스프리를 두둔했다.
“지금 아들이 한 말은 자네의 실정이야. 알고 있는가?”
“예, 폐하.”
“하하하…. 국왕의 앞에서 그 신하의 실정을 말하다니…, 역시 자네 아들답구먼…!”
“황송하옵니다, 폐하.”
“아니야, 아니야…. 아주 잘 말해줬어. 자네는…, 새 병부대신에게 이 점들에 대해서 잘 알려주게. 세심하게 챙길 수 있도록.”
“예, 폐하.”
‘새 병부대신’이란 말에 예스프리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제 아비와 국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감히 눈을 들 수는 없었지만, 그는 적이 놀린 얼굴을 감추지는 못했다.
“놀란 모양이군. 네 아비는 이제 병부대신이 아니라 정무대신이다. 미키네오스에서 나를 제외하곤 가장 높은 어른이 되는 거지.”
“… ….”
라크라오스는 그저 고요한 얼굴로 찻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전 부대-, 발도-!!”
우렁찬 구령소리와 함께 수백 명의 군사들이 동시에 검을 뽑았다. 이어지는 구령 소리와 함께 검을 수직으로 세우며 군례를 올리는 군사들을 보며 한율은 혀를 끌끌 찼다.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이놈들…. 정말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조바심이 나긴 했으나, 이왕 시작한 것 중간에 멈추면 그 꼴이 더 우스워지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론지니아 전투의 영웅 한율 위원님께서 우리 보위부 중앙수비대를 방문해주시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수비대의 수장인 사령장이 공손한 말투로, 그러나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로 그를 맞았다. 화려한 공치사에 머쓱해진 한율도 뭔가 대응할 말이 없어 그저 군례를 올렸던 군사들의 도열에 대한 칭찬으로 둘러붙였다. 우리 중앙수비대는 수도 시락의 방위군 중에서도 가장 핵심에 속하는 부대입니다. 701여단의 예하부대로 병력은 총 4천 2백 31명이죠. 규모로 치자면 연대급을 조금 상회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사령장의 설명이 이어지면서 한율은 지휘부로 향했다. 도열이 끝난 병사들은 그가 들어갈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지만, 군례를 받을 때처럼은 물론 아니었다.
“야, 크긴 무지하게 크다.”
“사령장이 난장이같애.”
“거인이네, 거인….”
“어쨌든 우리가 처음이니, 이제 오늘 시찰 끝나면 살 만하겠다.”
“누가 아니래…. 영웅이건 뭐건…. 윗사람 온다고 하면 우리만 죽어나는데….”
그 시각, 아이린은 혼자 말을 타고 와선 군부대의 입구에 서 있었다. 부대의 외각 경비를 서던 병사들은 웬 근사한 여자가 와서 서성대나 하는 얼굴로 흘끔흘끔 그녀를 쳐다봤지만, 딱히 접근을 하고 있진 않았기에 가서 뭐라 말을 붙일 수도 없었다.
“누구야, 저 여잔…?”
“글쎄요. 귀족 같긴 한데….”
“귀족이 왜 혼자 말을 타고 와?”
“모르겠습니다, 저도….”
“알짱거리니까 신경 쓰이네, 저거….”
경비대장은 못마땅하다는 눈초리로 아이린을 한동안 쏘아보더니 연초를 피우며 그 자리를 얼른 떠버렸다. 경계 잘 서, 이놈들아. 엉뚱한 데 신경 쓰지 말고. 안쪽으로 가던 그는 지휘부 쪽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오는 것을 보고는 얼른 연초를 내던졌다. 부대장인 사령장과 시찰을 나왔던 한율이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는 말을 돌려 입구 쪽으로 가 군례를 올릴 준비를 시켰다.
“…!”
아이린은 멀리서 한율이 오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말을 이끌고 면회소 뒤쪽으로 가 숨어버렸다. 경비를 서던 군사들은 저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눈치였으나, 일단 부대장과 보위부 자문이 오고 있으니 그런 것에 계관할 여가는 없었다.
“발도-!!”
그들이 다가오자 경비대장은 힘차게 구령을 부쳤다.
“예도-!!”
군례를 받으며 부대 입구를 나선 한율은 사령장의 극진한 인사를 받았다.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위원님. 배우기는요. 정말입니다. 저는 싸우는 건 할 줄 알아도 군사를 운용하는 방법은 잘 모릅니다. 아무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온갖 환대를 받으며 부대 정문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한율을 아이린은 면회소 뒤에 숨어 슬그머니 내다보았다. 괜히 면회소의 기둥을 찰싹 때리며 잔뜩 토라진 얼굴을 한 그녀는 이내 말 위에 올라 집 쪽으로 길을 잡았다. 웬 여자가 혼자 말을 타고 부대를 떠나는 모습을 본 사령장이 저건 뭐냐며 경비대장에게 물었고, 경비대장도 잘 모르겠다며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다.
“마님, 아가씨 돌아오셨습니다.”
“그래…?”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요즘 부쩍 아가씨를 많이 나무라시는 것 같네요.”
“유모는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저 아이가 지금 얼마나 철없이 구는지 알기나 하고 그래?”
“또 무슨 일이 있었어요?”
“글쎄~, …. 아냐, 됐어.”
말을 하려다 말고 엄마는 1층으로 내려갔다. 아이린이 조금 지친 얼굴로 들어오는 걸 보고는 어딜 다녀 오냐며 나무라듯 물었다. 그냥…, 바람 좀 쐬러…. 그럼 마차를 타고 갔다 올 일이지, 다 큰 여자애가 혼자 말을 타고 다녀? 아이린은 입을 비죽거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올라가 봐. 사람 와 있어.”
“…? 누구…?”
“가 보면 알아.”
“….”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녀에게 외투를 건네고는 3층으로 올라갔다. 누가 온 건데? 시녀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3층의 응접실에는 점잖게 차려입은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다가 아이린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끈한 차림새에 비해 옷은 간소하게 입은 것으로 보아 귀족은 아니고, 어느 집안의 집사처럼 보였다.
“아이린 바슈미르 아가씨로군요. 저는 스클로도프 저택의 부집사 단토라고 합니다.”
“스클로도프…?”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정중한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무슨 일이냐고 대뜸 물었다. 역시 아가씨께선 말씀을 시원시원하게 하시는군요. 괜한 공치사는 듣기가 싫었다.
“저희 집 도련님이신 루카스 스클로도프 사령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루카스…, 누구라고요?”
“아….”
전혀 모르겠다는 반응에 단토는 당황하며 연말 연회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때 아가씨와 인사를 나눴다고…. 그…랬나요? 당시 아이린은 한율에게로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어 루카스가 하는 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단토는 속으로 몹시 불쾌해하고 있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계집이로군…, 제아무리 여당 최고의원집 외동딸이라고 해도…. 이어지는,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는 아이린의 말이 그를 더욱 자극시켰다.
“알았으니까 두고 가세요.”
“…!”
그 말에는 시녀까지도 당황하여 아이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게끔 했다. 왜 그래? 아가씨~. 왜? 뭐 잘못됐어? 시녀와 실랑이를 벌이는 아이린을 보고 단토는 이젠 어처구니가 없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생각했다.
“여기 도련님께서 드리는 서한입니다. 그럼 전 이만….”
“네, 안녕히 가세요.”
집을 나서서 마차를 타는 단토의 표정이 엉망이었다. 함께 온 시종이 왜 그러느냐 묻자, 그는 연초부터 꺼내 태우며 투덜거렸다. 도련님께서도 왜 저런 계집에게 선물까지 보내시는지…, 정말 어이가 없군…!
“어머…! 꽃다발이 이렇게 크다니…! 전 이런 거 처음 봐요, 아가씨…!”
“어…, 그렇구나.”
시녀가 괜스레 더 야단이었다. 아이린은 그저 그런가보다 하는 투로 반응하고는 그 자리에 앉아 서한을 뜯어보았다. 힘찬 필치가 드러나는, 제법 글씨를 잘 쓴 글이었다.
- 바슈미르 아가씨께.
저는 지금 그리움과 연민의 정을 담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움은 아가씨를 향한 것이며, 연민은 저 스스로를 향한 것입니다. 지난해 마지막 날 연회에서 아가씨를 처음 본 순간 저는 아가씨의 완전한 포로가 되었습니다. 저를 보시는 그 크고 깊은 은빛 눈동자는 마치 마법의 호수처럼 저를 통째로 삼켜버리고야 말았습니다. …(중략)… -
서한을 읽는 아이린의 손이 점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종이에 가려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손을 본 시녀가 다가와 무슨 내용이냐 물었다. 혹여 심각한 내용인가 싶었는지 시녀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으으읍… …, 푸하하하하하하하하…!!!!!”
별안간 터져나온 아이린의 폭소에 시녀는 깜짝 놀라 넘어질 뻔했다. 아이린은 응접실 테이블을 부서져라 두드리며 미친듯이 웃었다. 이 난리통에 놀란 엄마와 시종장을 비롯한 사람들이 3층으로 뛰어 올라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어? 얘 왜 이래?!”
아이린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서한을 손가락질하며 눈물까지 찔끔거리고 있었고, 엄마는 대체 왜 그러냐며 딸에게 다가가 앉았다.
“얘가 주저앉아서 뭐 하는….”
“엄마…! 엄마 나 미치겠어, 이거 좀 봐…!”
입을 가리며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는 아이린의 옆에 얼굴을 가까이 하고 서한을 한 줄 한 줄 읽어내려가던 엄마는 아이린과 똑같이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 이 상황을 보며 시녀들이 모두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색하게 웃었고, 시종장은 혀를 끌끌 찼다. 어유…, 누가 누굴 보고 뭐라 그래…. 똑같아가지곤….
방에 들어올 때까지 키득거리는 엄마를 보고 시종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 참…, 한참을 웃었네….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유모가 안 읽어봐서, 몰라서 그래. 에휴…. 엄마는 화장대 앞에 앉아 몇 가지의 문서 두루마리를 정리하면서, 그래도 문장은 잘 썼더라고 칭찬했다.
“역시 배운 애들은 뭐가 달라. 그 젊은 나이에 보위부 사령씩이나 된 걸 보면 능력도 있단 얘길 테고….”
“몇 살인데요…?”
“아이린보다 다섯 살 많대. 그 집도 꽤 애먹을 거야. 아들이 스물 일곱씩이나 됐는데 아직도 혼인을 못 시켰으니….”
“늦긴 늦었군요.”
“늦었지~, 우리 애도 계속 저러면 그 꼴 되기 십상인데…. 누굴 닮아서 저렇게 말을 안 들을까?”
돌아보며 묻는 엄마를 향해 시종장은 시선을 꼿꼿하게 그녀를 향해 쏘아주고 있었다. 뭐야, 왜 그렇게 봐? 마님 닮았지 누굴 닮았겠어요. 유모…! 제가 틀린 말 한 거 아니잖아요. 쟤가 어딜 날 닮아, 닮긴…?! 참 내 원….
“기억 안 나세요? 의원님하고 연회에서 만났을 적에 첫 눈에 반했다며 잉그라드까지 쫓아가시려다 항구에서 잡혔던 거….”
“입 안 다물어?!”
“그러지요.”
저녁때가 되어 식사를 하는 핫산의 얼굴이 그닥 밝지 못했다. 엄마는 그것이 한율의 시찰 때문인 것을 알고는 딱히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이린도 자신이 행여 부대 근처에서 어슬렁거렸던 것이 들켰을까 싶어 조마조마한 얼굴로 조용히 앞에 놓인 음식만 먹고 있었다.
“애들이 없으니까 좀 허전하군….”
“시찰 때문에 정신없잖아요. 안식일이나 되어야 올까 말까 할 텐데….”
‘시찰’이란 말에 아이린은 움찔했지만 엄마와 핫산은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중얼거리듯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경…많이 쓰여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어…. 안 했으면 싶었는데…. 하지 말라 그러지, 왜. 수프를 뜨던 핫산의 수저가 잠시 멈추고 한숨이 새나왔다.
“해보려고 했는데…. 아니, 하긴 했는데. 내가 직접적으로 말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직접 말해야지, 당신이….”
“좀…, 민망하더라고. 그런 것까지 막는 건….”
“…그것도 그러네….”
“그런데 그만둘 수 없대.”
“대체 무슨 생각이래요, 그놈은…?”
아이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대들기 전에 핫산이 먼저 엄마에게 경고하듯 주의를 줬다. 말조심해, 명색이 보위부 군사자문이야. 엄마는 입을 비죽거리며 툴툴거렸다.
“시찰은 그만둘 수 없지만, 조만간 뭔가 결정을 해서 찾아온다고 했어.”
“찾아온다고요? 여기로??”
“어디로 오건.”
“그냥 집무실에서 만나요~ 뭐하러 여긴 온대?”
두 사람의 대화에 아이린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
“서로에게 득이 될 만한 결정을 해서 온다고 약속했으니까 믿고 기다려 봐야지, 뭐….”
“그게 뭔데…?”
“글쎄. 기다려 봐야 알겠지만….”
“아, 뜸들이지 말고 빨리 얘기 좀 해봐요~.”
“… ….”
다시 손을 멈춘 핫산의 눈이 잠시 아이린에게로 향했다. 한숨이 뒤섞인 그의 대답은 아이린을 그대로 굳혀버렸다.
“떠나는 거지. 바이마샤르를. 자문직도 사임하고.”
“…!!”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온 아이린은 멍한 얼굴로 책상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버지의 말이 계속 환청처럼 들려왔다. 떠나는 거지. 바이마샤르를….
그가 떠난다. 생전 처음으로, 그것도 너무나 강렬하게 마음이 끌려버린 남자가 떠난다. 떠난다면 언제, 어디로 가는 걸까. 자문직까지 사임하고 떠난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단 얘긴가. 정말로 떠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같으면 당장이라도 그를 따라 나서겠지만,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 곳을 빠져나가 그를 따라 가겠지만. 아빠는 몰라도, 그가 떠난다고 하면 엄마는 날 가둬놓으려고 할 텐데. 그 전에 무슨 수를 써야 할 텐데.
심경이 복잡했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확인된 건 없었다. 한율이 무슨 결정을 할 지, 부친이 말했던 것은 단지 추측이고 예상일 뿐이었다. 한율은 특이하고 특별한 사람이니, 뭔가 다른 결정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아이린은 스스로를 달랬다. 서랍장을 연 그녀의 손에 자그마한 서한 한 장이 들렸다. 거기엔 빼곡하게 보위부 각 예하부대의 이름과 위치가 날짜와 함께 적혀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한율의 시찰 계획이었다.
“두 번째 안식일 전날…, 보위부 제 2 기마대대…, 시락 남쪽 메이체르트 농산물 시장 입구에서 서쪽으로 두 시간 거리….”
두 번째 시찰 일정을 보며 천천히 중얼거리듯 되뇌어 본 아이린은 결연한(?) 눈빛으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뭐라고…?!”
이야기를 전해들은 루카스는 우선은 놀라고, 그 다음엔 황당한 듯 말이 없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부집사 단토는 여전히 불쾌한 얼굴이었다. 한참을 웃고 있는 이 작은 주인에게 그는 대체 그녀가 왜 마음에 드느냐 물었다.
“왜…? 부집사가 보기엔 별로였나보지?”
“그렇잖아요~, 하는 행동이며 말법하며…. 도무지 귀족 출신만 아니라면 봐줄 것이 없는 아가씨였습니다. 도련님께서 그렇게 성의껏 편지를 보내시고 하는 게 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화낼 것 없어. 원래 성격이 그런 거니까….”
“제 말이 그 말이잖습니까.”
“…, 부집사가 꽤 불만이 많네. 앞으로 안주인이라도 되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내가 다 일러바치면 부집사 자리 내놓고 주방에나 가 있어야 할 걸?”
“도련님…!”
루카스는 농담이라며 여유있게 웃고는 알았으니 그만 가 보라 일렀다.
“… ….”
“그만 가 보라니까. 나 지금 바빠. 말했잖아~.”
“도련님께서…,”
“거 참…! 나 급하게 해야 할 일 있으니까 그만 가 보라고.”
“… 예.”
“아 참, 어머니껜 말씀드리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 예.”
단토가 집무실에서 나가자 루카스는 손에 들고 있던 문서들에로 다시 눈을 주며 찻잔을 들어 기울였다. 찬찬히 문서를 읽어내려가며, 차츰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그의 눈빛에 잠시 싸늘함이 끼어들었다.
“도련님은 뭐라세요?”
“나도 모르겠다. 정말 좋아서 저러시는 건지….”
“여태까지 도련님께서 그렇게까지 정성을 들여보신 적이 없잖아요.”
“그야….”
“그럼 정말 반하신 거 아닐까요?”
“아, 반할 년이 없어 그런 년한테…!!”
단토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같이 마차를 타고 있던 시종이 목을 움츠렸다. 이 성질 사나운 부집사에게 걸리면 지팡이가 부러질 정도로 맞아야 했다. 혀를 차며 연초를 태우던 부집사가 열을 식히듯 한숨을 내뱉었다.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분이니, 도련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만…. 어쨌든 자네도 입단속 잘하고 있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예, 부집사님.”

시찰을 다녀온 한율은 중앙수비대에서 받은 자료들을 읽어보며 시간을 보냈다.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산처럼 쌓여있는 자료들을 읽고 나면 아마도 밤이 되어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생각보다는 재미있었던 터라 그는 서재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자료들을 검토했다.
‘다 들었던 얘기긴 한데…, 이렇게 그림으로 보고 있으니 좀 알겠군….’
그는 지도를 펴놓고 비교해가며 손가락을 하나 하나 짚어보았다.
“위원님, 헨야입니다.”
“예, 예~.”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시녀복을 입은 동그란 얼굴의 자그마한 여자였다. 쟁반에 쿠키와 차를 담아 들어온 그녀는 문서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는 한율의 옆에 쿠키와 차를 내려놓고는 멀뚱히 서서 그가 들고 있는 문서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복잡한 표시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술 안마십니다, 바빠요~.”
이 대충 만들어진 캐릭터는 한율이 자신을 집사라고 생각했다는 걸 알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에 어라? 하며 고개를 든 한율도 멋쩍게 웃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시기에 모르셨어요? 아, 뭐…. 시찰하면서 얻은 것들인데….
“전 뭐가 뭔지 봐도 모르겠어요.”
“하하…, 군에 관한 거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웃으며 지도 등을 한쪽으로 밀어두고는 쿠키를 끌어 앞으로 놓았다. 난 원래 주전부리는 잘 안하는데…. 제가 좀 먹어드릴까요? 뭐, 그러시구랴. 한율은 선선히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며 담뱃대를 꺼내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집사가 안 보이네.’
늘 이 시각이면 들어와 어김없이 그를 놀려먹던 집사가 오후에 한 차례 들어와 놓곤 이후 감감 무소식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여쭤봐도 돼요?”
“그러시구려.”
“위원님은 왜 시녀들한테까지 전부 존대를 하세요?”
“…. 당연한 거 아니요?”
“보통은 그러지 않아요. 집사들도 오랫동안 그 집에 있지 않는 한은 어차피 다 하인들이라서….”
“하인은 무슨…. 없으면 아쉬워할 거면서….”
“그렇죠~?”
둘은 쿠키와 함께 잡담을 나누며 그렇게 시간을 축냈다. 이따금씩은 한율이 웃기기도 하고, 이따금씩은 스무 살도 되어보이지 않는 이 조그만 시녀가 그를 웃기기도 했다. 한율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처럼 사는 것도…. 나름 재미는 있구먼.’
“왜 그런 표정이세요?”
“…? 내 표정이 어때서요?”
“방금 좀…뭐랄까. 누굴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누굴 생각한 거 아닌데요?”
“혹시 집사님 아니에요?”
“내가 왜 집사님을 생각해요?”
“좀 섭섭합니다, 위원님.”
그 말에 대한 반응은 열려있는 문쪽에서부터 들렸다. 나타났다. 한율이 괜스레 인상을 쓰며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헨야는 얼른 일어나 옆으로 비켜섰다. 군사 자료를 보다가 쉬고 계셨군요. 집사님이 방해한 거외다. 그것 참 다행이군요. 오자마자 또 놀려먹기 시작이다. 인상을 구기는 한율을 모른 척 하며 집사는 슬쩍 헨야를 돌아봤다. 그녀는 그만 가보겠다며 꾸벅 인사를 하고는 나가며 문을 닫아주었다.
“거 남 잘 놀고 있는데 왜 또 와서 훼방입니까?”
“자료들은 다 훑어보셨습니까?”
“뭐…, 대충은요.”
“어떠셨습니까?”
“글쎄요…. 뭔가 좀 찜찜하긴 한데, 뭐가 찜찜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담뱃대를 내려놓고 지도를 편 한율은 수비대의 예하대대 배치 현황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설명했다. 기마병이 이쪽에 이렇게… 그리고 이쪽도 이렇게…. 그런데 뭔가 이게 거꾸로 된 것 같기도 하고….
“바로 보셨습니다. 기마대가 전진 배치되어 있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요.”
“아, 그렇습니까?”
“예.”
“흐음…. 그래도 여기 이렇게….”
그는 수비대가 위치한 시락의 성벽 근방을 가리키며 지형을 언급했다. 평지잖습니까. 그럼 수비를 한다고 해도 전투를 안 할 수는 없으니까…, 평지전에선 기마대가 훨씬 유리하잖아요. 수비대의 위치가 전선의 맨 앞이라면 위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집사는 여전히 꼿꼿하게 선 채로 중앙수비대의 기본 위치에 대해 설명했다.
“시락을 수비한다는 건 말 그대로 최후 방어선인 셈입니다. 최후 방어선까지 전선이 밀렸다는 건 전세가 몹시 좋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마대가 앞에 있다는 건 공격을 하겠다는 말이 됩니다. 그보다는 보병이 앞에 서서 땅을 파든 뭘 세우든 해서 적의 공격을 지연시킬 수 있는 지형을 마련하는 게 옳습니다.”
“오호…. 그럼 기마대는요?”
“만일 기마대를 운용할 여유가 있다면, 후방에서 적을 치도록 만드는 편이 낫지요. 그래서 기마대의 움직임은 적에게 노출되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기마대대가 전방에 있을 것이 아니라 성 안에 주둔지를 두고 있어야 하겠지요.”
“성 안이라면…?”
“적이 어디로 몰려올 지 모르니까요. 일단 포위를 당하게 된다면 방법이 없겠지만, 포위를 당하기 전에 기마대는 적의 시선이 닿지 않는 성문 쪽으로 나가서 크게 우회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시의 기마대 주둔지는 성 안쪽이 되는 편이 합당합니다.”
“으음…”
“물론 전쟁이란 건 항상 변수가 많은 법이라서요. 제가 말씀드리는 게 전부는 아닙니다.”
“아니, 대체…! …. 아닙니다. 관둡시다.”
“정체가 뭐냐고 물어보시려고 했던 것 아닙니까?”
“어차피 집사라고 말할 거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때 되면 집사님께서 스스로 알려주시겠지요. 입 꽉 다물고 계시는데 뭘 물어보겠습니까.”
“때가 되도 안 알려드릴 겁니다.”
“에이, 진짜…!”
무슨 말을 해도 어쨌든 그가 한 수 위였다. 더 이상 말을 섞어봐야 손해라고 생각한 한율은 담뱃대만 빨았다. 쯧….
“그보다 헨야는 어떻습니까?”
모른 척 다른 질문을 하는 집사.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물어보려던 한율은 먼저 헨야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헨야가 누굽니까? 방금 전까지 이야기 나누시던 시녀 말입니다. 아하…. 아직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요. 역시 위원님이십니다. 다시 놀려먹는 말에 이젠 일일이 반응하기도 지겨웠다. 쓴 입맛을 다신 한율은 담뱃대를 한 번 빨고는 피식 웃었다.
“거 쪼끄만 게 귀엽더이다. 아직 애 같던데….”
“스물 여덟입니다.”
“뭐요?!”
“한 번 안아보시지요.”
“아니…. 뭐~요~?!”
“보통 시녀들 중 몇 명은 주인과 잠자리를 함께 하기도 합니다. 어차피 하인으로 살고 있으니, 주인의 귀여움을 받는 걸로 위안을 삼는 아이들도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나보고 적선이라도 하라는 겁니까?”
“여자경험…, 없어요?”
“에이, 진짜…! 사람을 뭘로 보고….”
“적선이 아니라 적당히 즐기시라는 겁니다.”
“에에~? 점점 하시는 말씀이 아주….”
“사람처럼 사시라는 겁니다. 위원님께선 매우 허술하신 듯 보이지만 조금만 지내보면 빈틈 없는 분이란 걸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말입니까…?”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안 시종들이 하던 이야기를 전했다. 농담도 잘 하시고, 하인들 하나 하나 함부로 대하질 않으시니 일단 좋아들은 하고 있습니다만, 뭣보다 위원님께선 워낙 뚫고 들어가기가 힘든 부분을 갖고 계셔서 더 다가가기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한율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틀린 말이 아니니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홀로 다니기가 워낙 익숙하고 한 곳에 정착하질 않은 채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하며 7년을 떠돌아다녔으니, 그런 습성이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율의 이런 해명에 집사는 싱긋 웃는 얼굴로 응답했다.
“그렇군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너무 완고하게 지내진 마십시오. 사람은 사람다울 때 가장 그 인생이 풍족해지는 법이니까요.”
“… ….”
말이 없는 한율에게 집사는 오랫동안 시간을 빼앗았다며 인사를 하곤 서재를 나섰다. 그가 나간 후에도 그대로 앉아 이미 불이 꺼진 담뱃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한율은 ‘사람다울 때 가장 풍족하다’는 집사의 말을 되씹듯 중얼거렸다.
“진짜 저 양반 정체가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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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늦었네요. 요즘은 정신이 없어서 날짜가 어떻게 가는지도 잘...;;; 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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