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설명4) 오미선
37세, 도서관 사서, 기혼, 신장:158 체중:53
출생부터 지금까지 A시에서만 살아온 토박이, 평생의 취미인 독서를 좇아 직업도 도서관 사서를 택한다. 근면한 생활태도, 무난한 성격, 상냥함을 두루 갖춘 무난한 아줌마. 그러나 실은 외유 내강형의 인물이다.
A시 식물원-
이국적인 형상을 한 기묘한 열대식물이 즐비한 곳, 영수와 선영은 그 식물원의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중형승용차만한 바위 위에 앉아있다. 한 시간 정도 화초와 나무들을 구경하던 그들은 지겨운 생각이 들어 자리를 잡고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선영은 MP3 플레이어의 이어폰을 귀에 꽂고 벌렁 누워버렸고 영수는 캔맥주를 연신 홀짝홀짝 마신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요?”
자는 줄만 알았던 선영이 말을 걸어오자 영수는 새삼 그녀를 돌아다본다.
“아 자고있는 줄 알았어요.”
“아뇨, 안 잤어요. 하나, 둘, 셋....그거 네 개째 캔이군요?”
“요즘 술이 느네요.”
“초조한가요?”
“특별히 초조하다기보다는 권태롭기도 하고 아직 이 세상에 적응이 안 되었다고나 할까요?”
“아직?”
“네, 아직....”
“그래요 우린 이 상태로 평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겠죠?”
“모르겠어요. 하지만 언젠간 알게 되지 않을까요?”
“이제는 신곡도 새책도 새영화도 나오지 않겠군요.”
“그렇죠. 우리가 곡을 책을 영화를 만들지 않는한 그렇겠죠.”
“아, 이 상태로라면 올드팝, 고전영화, 고전문학을 줄줄 꿰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것도 괜찮지 않나요?”
“헤헤, 전 옛날 것은 왠지 현실감각이 안생겨서....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거에요.”
“........”
“그런데 말이죠?”
“네.”
“당신과 소연씨가 떠나있는동안 우리 한 번도 모이지 않았어요.”
“네. 이야기 들었어요.”
“다들 관계가 소원해 지는 것 같네요.”
“서로 조금씩 지치는게 아닌가 싶네요. 아니면 반대로 이 생활에 익숙해져서 만나서 의논할 필요성을 못느끼던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그런 모임은 별로 반갑지만은 않아요. 처음 몇 번은 서로 의지가 되기도 해서 만나기도 했지만....”
“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나요?”
“말하면 비밀로 해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마땅히 비밀로 할 겁니다.”
“저는 채유선이란 여자가 싫어요.”
“왜죠?”
“후우~ 사실 우리 오빠는 치과의에요. 개업의죠. 그런데 말이죠....좋아하게 된 거에요.”
영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좋아하다니요?”
“우리 오빠가 그 여자를 좋아하게 된거에요.”
“그런데요?”
“소연씨는 계속 거절했고 우리 오빠는 그 여자에게 지지치않고 대쉬를 했어요.”
“안됐군요. 남녀사이는 마음대로 안되는 거죠.”
“오빠는 뭔가에 미친 사람 같았어요. 유선이란 여자에게 단단히 홀렸죠. 병원을 자주 비우는 일이 비일비재하고....게다가 오빠는 당시에 병원신축이나 여러 가지 일로 빚이 많았거든요. 아무튼 생활이 엉망이었죠. 그리고 오빠는 마지막 수단을 쓰게 되죠.”
영수의 미간이 순간 찌푸러졌다.
(설마, 강간? 아냐. 유선이는 처녀였어.)
“그게 뭐죠?”
“이혼해 버렸어요.”
“오빠가 결혼을 했었나요?
“그래요 오빠는 서른 다섯 이었죠. 그때가 결혼한지 일년도 되지 않은 시기였죠. 하하 믿을 수 있어요? 결혼한 지 일년도 안 된 새신랑이 또 다른 사랑에 빠져버린 거에요.”
“유감이네요.”
“전 막아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은행을 쉬고 그 여자를 찾아갔어요.”
“가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나요?”
“저 솔직히 오빠를 신고해 달라고 했어요. 뭐 스토커나 그런 걸로...알잖아요?”
“정말요?”
“제가 나쁜 년 같나요?”
“그렇진 않아요.”
“당시 우리 집 분위기는 정말 흉흉했어요. 당신은 이해 못 할 거에요. 전 오빠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정도 고통은 약이라 생각했어요. 벌금만 조금 물고 나올 거 아니에요?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오빠는 그런 일을 겪으면 다시 한 번 이성적으로 변할 지도 모르죠. 일종의 충격요법이죠. 소문이 무서우면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병원을 개업하면 그만이에요. 물론 그리되면 많이 힘들겠지만....”
“유선씨에게 그 말을 전달했나요?”
“아니요.”
“만날 수 없었나요?”
“만났죠. 만났지만 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어요. 혼자 으름장만 놓고 사라지더군요. 정말 불쾌한 기억이에요.”
“........”
“제가 오빠의 동생임을 밝히자마자 커다란 회의실 같은 곳으로 절 끌고 가더군요. 가운을 벗어서 저한테 집어 던지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더군요.”
“정말 그랬나요?”
“네. 저와 우리 오빠가 벌레래요. 벌레...참 나...뭐라고 뭐라고 신세한탄을 하는 것도 같았고....아무튼 자기 인생에 개입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계속 이러면 자기가 죽던지 우리 가족들을 죽여버리겠다는 말도 했구요.”
“사람들은 극도로 흥분하면 그런 말을 하기도 하죠.”
“아뇨. 그 여자는 정말 죽일 것 같았어요.”
“........”
“그리고 방을 나가며 침을 뱉었는데 그 침이 제 종아리에 떨어졌어요.”
“저런!”
“제 평생 최대의 치욕이었어요.”
“그게 언제였는데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기 바로 전 날이었죠.”
“제 소중한 사람이 다 사라졌는데 그 여자가 떡하니 남아있는 거에요. 제가 화가 안나겠어요? 게다가 모임을 하는 날엔 그여자가 가장 말을 많이 하더군요. 마치 저는 아무것도 아니니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듯이요. 별로 도움되는 말도 안하면서.... 이번 탐사도 당신과 소연씨가 맡았고 결국 그녀는 아무 것도 안했잖아요?”
“............”
“당신은 결국 그녀에게 내가 한 말을 전하겠죠?”
선영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영수를 바라보면 말했다.
“아뇨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사실 당신도 싫어했어요.”
“제가 유선씨와 친해서요?”
영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지내보니 당신은 그 여자와는 다른 것 같아요. 지금은 싫어하지 않아요.”
영수는 선영의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였다.
(사실 별일은 아니군. 그녀의 오빠가 유부남임에도 유선이에게 과도하게 집착했다는 것, 이혼했다는 것. 그리고 유선이의 감정폭발은 상식적인 수준이었다. 사람이 순간 이성을 잃으면 그 이상의 일도 벌어지기 마련인데. 하지만 선영이의 감정의 앙금은 쉽게 지워지지 않겠군. 지금 내가 유선이를 변호하면 역효과를 낼 뿐이다. )
“다행입니다. 저도 선영씨를 좋게 보고 있었어요. 사실 이 전의 일반적인 사회였다면 대학생에 불과한 저는 선영씨에겐 풋내기에 불과하죠. 하지만 제가 유일한 남자인고로 약간 특권을 누리는 것 같아요. 그리고 아까 모임이 탐탁지 않다고 하셨는데 사람들이 원하지 않은데 반드시 모임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봐요. 그와는 다른 방법으로 서로 의견교환을 가질 루트는 많으니까요.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앞으로도 세상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으면 해요. 전 제대 후 복학을 기다리는 휴학생에 불과하니까요.”
선영은 기지개를 펴며 새삼 영수를 바라보았다. 가식적이지 않은 그가 방금 전보다 훨씬 친숙해 보였다. 그녀는 예의 그 밝은 미소를 띄우며 활짝 웃었다.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저야 좋죠. 워낙 심심한 세상이고. 맥주 하나 줄래요?”
영수와 선영은 맥주를 들이키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이 시시한 이야기였으나 현재의 비정상적인 세상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처지였다.
종미는 오늘도 영화를 본다. ‘러브 액츄얼리’라는 영화, 사실 영화가 무엇이건 간에 상관이 없다. 책을 읽기에는 그녀의 머리가 너무나 복잡하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것이다. 나이 많은 여자들처럼 그녀는 작금의 상황을 순순히 받아 드릴 수 없었다. 그저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언니 점심은 뭘 먹을까?”
동생 종선이 불현듯 방에서 나와 종미에게 묻는다.
“어? 글쎄...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그것보다 오므라이스 어때?”
“난 상관없어. 언니가 금방 만들게.”
“아냐 오늘은 내가 할게. 언니는 영화 보고 있어.”
종미는 새삼 동생 종선을 바라본다.
(불쌍한 녀석, 저 나이에 이런 끔찍한 세상에 살다니....)
종미는 코가 시큰해진다.
“종선아!”
종미는 주방에 있는 종선이를 큰 소리로 부른다.
“왜, 언니? 뭐 다른걸 먹고 싶어?”
역시 종선이도 큰 소리도 대답한다.
“너 영수 오빠 한 번 꼬셔봐라.”
주방에서 식칼로 야채를 써는 소리가 순간 사라진다. 종선이가 주방에서 나와 종미를 놀란 얼굴로 바라본다. 종미는 그런 동생을 바라보며 푸근하게 웃는다.
“말 그대로야. 꼬셔봐.”
식물원의 거석 위에서 격렬한 키스를 하고 있는 영수와 선영. 어떤 개연성있는 행위가 아니었다. 단지 남성과 여성이 만나 자연스럽게 하는 행위였다. 그들은 사실 외로운 것이다. 영수의 손이 선영의 스커트 속으로 침입한다. 어떤 자극을 받았는지 선영의 눈이 찌푸려진다. 선영도 영수의 티를 벗기려고 시도한다. 선영이 가슴까지 영수의 티를 밀어 올렸을 때 선영은 상대의 눈을 봤다. 선영은 순간 손을 거두며 영수에게서 조금 물러선다.
“싫어요.”
어리둥절해진 영수가 선영에게 묻는다.
“선영씨, 제가 무슨 실수라도?”
“당신...나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안을 생각인가요?”
“네? 그 무슨....”
“당신 나 좋아해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영수는 이 돌발적인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물론 선영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미인이다. 그러나 좋아한다고 확신할 만큼 대단한 사이는 아니었다. 영수는 순간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했어요.”
“호호호호호~ 당신 순진하군요.”
“네?”
“여자가 이렇게 튕겨도 몇 번쯤은 달콤한 말로 설득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쉽게 마음을 드러내 보이다니요.”
“그게 저인걸요.”
선영은 새삼 상대의 진면목을 발견한 것처럼 그윽하게 바라본다.
“나 당신이 좋아질 것 같아요.”
“저도 선영씨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조금 복잡해서...지금..”
“알아요. 당신, 이미 두 명의 여자가 있죠?”
“네.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부담스러운 거군요?”
“네. 저는 거짓말을 하며 살고 싶진 않거든요.”
“우리 사이가 떳떳해질 때 날 얻으러 와요.”
영수는 단호한 표정으로 상대를 처다보며 말했다.
“당신을 꼭 가지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에요.”
선영은 사내의 다짐에 어떤 운명같은 것을 느끼며 심작박동이 빨라졌다.
선영의 집 앞, 그녀는 이층 단독 주택에 혼자 살고 있었다. 영수는 그녀를 바래다 주려고 이 집 앞까지 차를 몰았던 것이다. 차에서 내린 선영은 영수에게 방긋 웃어 보이며 작별을 했다.
“오늘은 고마웠어요. 앞으로 자주 이런 시간을 가지면 좋으련만....그럴 수 있을까요?”
“제가 바라던 바에요. 꼭 그러길 바랍니다.”
“그럼..”
“네. 편히 쉬세요.”
선영은 펌프스의 날카로운 굽소리를 내며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영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어떤 비애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복잡하다. 내가 처음 느꼈던 이 세계와는 다르다. 단지 넋 놓고 하루하루를 놀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도 엄연히 각자의 독특한 인생관이 존재하고 인간관계에 신경써야한다. 소연이가 돌아오면 상의를 해봐야 하겠는걸?)
“야! 임마!”
의외의 장소에서의 의외의 부름. 영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미용사 미란이 거기에 서있었다. 미란은 영수의 초등하교 동창의 누나이다. 그다지 기억에 남는 동창은 아니었지만 미란은 왠지 영수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어서 그를 볼 때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친근감을 드러낸다.
“너, 이 자식 여행에서 돌아왔으면서 이 누나를 한 번도 안 찾을 수가 있니?”
미란은 미니 스커트 아래의 늘씬한 다리를 휘저으며 도발적으로 그에게 걸어오며 말했다.
“아? 누나, 그렇지 않아도 지금 누나를 찾아갈 참이었어요.”
그것은 정말이었다. 평소 친절하게 대해주는 미란을 영수는 만나고 싶었다.
“흥! 연애에 바쁘신 것 같은데....나한테 내줄 시간이 있을까? 선영씨에게 까지 손을 뻗쳤니?”
“아! 그...그건...”
“쳇! 부정을 안 하는군. 너! 임마! 오늘은 누나한테 잡혀서 밤새 술을 좀 마셔야겠다.”
“저..저기 오늘은 곤란해요. 내일하죠?”
금발로 물들인 머릿결이 순간 출렁이며 미란이 발끈한다.
“왜?”
“유선씨하고 선약이 있어요. 죄송해요.”
“아~ 그 여자? 그래, 가 보도록 해.”
미선은 한껏 비꼬는 투로 대꾸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기, 누나 정말 미안해요. 제가 어떻게....”
“됐으니, 가보도록 해~”
영수는 난처해져서 자리를 떠야 할지 말아야할지 망설여졌다. 그런 영수를 아랑곳 않고 미란은 몸을 돌려 골목길로 사라져갔다. 영수는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뒤엉킨 것처럼 복잡해졌다.
영수는 유선의 집 앞에 도착했다. 아마도 유선은 낮부터 그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불과 아홉 명의 사람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아홉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문제는 그들은 모두 여자이다. 고개를 휘휘 저으며 영수는 유선의 아파트 입구로 들어선다. 일단은 시장기가 동했고 사람의 따듯한 온기가 그리웠다. 자, 과연 유선이가 어떤 영화를 준비했을까? 이렇게 오늘도 저물어 간다.
.....9월 5일 23시 37분 이 곳은 J시의 주류판매점....난 술을 마시고 있다...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도저히 진정이 안된다...너무나...너무나...놀라운 경험을 했다...J시의 발전소에서...말 하기조차 두렵다....그것은 반가움보다는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다...나는...나...나는 열한 번 째 사람을....만났다....
-소연의 녹취 테잎 중에서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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