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역시 오후 두 시가 되어 남편이 출근하고, 혼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가
불현듯 옆집 여자가 놀러 오라고 한 말이 생각이 난다.
한번 놀러 가 볼까?
학교에 갔다 온 애들을 보고 엄마가 옆집에 갔다 올 테니까 둘이서 놀고 있으라고 하고,
밖으로 나와 우리 아파트 바로 옆에 있는 그 여자의 아파트 벨을 누른다.
누구세요? 란 그 여자의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린다.
“아이고.. 어서 와.”
그녀가 반갑게 날 맞이한다.
내가 거실 안으로 들어선다.
아파트의 구조야 우리 집과 똑같지만, 무언가 분위기가 좀 틀린 것 같다.
거실을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고 커튼도 레이스 장식이 달린 것으로 걸어 놓아
아늑한 기분이 든다.
나는 성격이 보통 여자들과는 달리 애살이 없고, 좀 담백하다고 해야 하나..
남자와 같은 성격이 있어서 살림살이를 아기자기하게 꾸미는 것은 잘 하지 못한다.
집안에 필요한 가재도구들이나 물건들만 필요한 자리에 갖다 놓지,
무슨 장식용 액자나 장식용 술.. 양주나 과일 주 담은 것 등을 보기 좋게 진열을
해 놓는다든지 그러질 못한다.
그러다 보니 집안이 포근하다기 보다 단출한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뭘 해? 앉지 않고?”
잠시 서서 거실을 둘러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미진이의 목소리에 소파에 와서
앉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 거실을 잘 꾸며 놓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 포근한 느낌이 들고..”
“그래? 그래도 집안이 산만하지 않아? 니네 집은 깔끔한 느낌이 들던데..
참.. 무슨 차를 줄까?”
“커피나 한잔 줘.”
“그러지 말고 양주 한잔 어때?”
이 여자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술 마시려고?”
“왜, 마실 줄 몰라? 한잔하면 기분이 좋을 텐데..”
“그럼, 양주 한잔 줘.”
미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진열장 쪽으로 가더니 양주 잔에 양주를 두잔 따라서
가지고 온다.
“해네시 꼬낙인데 한번 마셔봐. 향이 좋은 게 마실 만 해.”
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맛을 본다.
혀가 짜릿한 게 술 맛이 부드럽고 좋다. 얼마 만에 마시는 술인가?
미진이도 한 모금 마시더니 날보고 물어본다.
“술 맛이 어때?”
“부드럽고 좋네?”
“얘. 너도 술 마실 줄 아나 보다. 부드럽다고 하는 걸 보니..”
“마실 줄 알기는? 그냥 그런 맛이 들어서 그래..”
“지난번 추석 때 남편이 선물 받은 건데 심심해서 한잔 마셔 봤더니
괜찮대? 기분도 좋아지는 게.. 그래서, 가끔 한잔씩 해.”
“술병이 표시가 날 텐데 남편이 뭐라고 안 해?”
“남편은 그런 걸 가지고 뭐라고 안 해. 오히려 좋아하면 좋아하지..
내가 술에 취하면 서비스를 잘해 주거든..”
갑자기 풋 하고 웃음이 나온다.
너무 자연스레 서비스를 잘해준다는 말이 나오니..
“왜 웃어?”
“네가 서비스를 잘해준다는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애는? 우리 나이에 가릴 말이 뭐가 있어? 더군다나 친구 사이에..”
“근데, 애들이 보이지 않네?”
“응.. 계집애 하나 있는데 지금 피아노 학원에 가 있어. 한 시간 정도 더 있어야 올 거야.”
갑자기 미진이가 십년지기 친구처럼 느껴진다.
전혀 부담이 없고 편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아주 가깝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얘.. 네 이야기 좀 해봐.”
내 이야길 하라고? 그 많은 이야기를?
“글쎄.. 별로 이야기할 게 없을 것 같은데..”
“네 얼굴을 보면 아주 이야기할 게 많을 것 같은데?”
“그렇게 보여?”
“넌.. 뭔가 좀 다르게 보여. 우리하고는.. 뭐랄까? 무언가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아주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아.”
미진이가 좀 단순한 줄 알았는데, 이런 말을 다 하다니..
정말 내 얼굴에 그런 것들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렇진 않아.”
내가 남은 양주를 마저 들이킨다. 속이 훈훈해지는 것 같고 기분이 좀 오르는 것 같다.
미진이도 어느 새 잔을 비웠다.
“한잔 더 할래?”
“그래도 될까?”
“그럼.. 그래도 되지. 네가 그 말을 하니까 마시고는 싶은데 주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 같아.”
미진이가 다시 양주 두 잔을 따라 가지고 온다.
다시 잔을 들고 양주를 마신다.
“미진아. 너.. 남편말고 다른 사람 사랑해본 적이 있니?”
“결혼하기 전이야 사랑한 사람이 있었지.. 결혼 후 아직까지는 그런 사람이 없었어.
어쩌다 마음에 드는 남자를 볼 때가 있었지만, 그냥 마음뿐이지..
그래 봤으면 좋겠다. 아주 짜릿할 것 같아.”
“남편은 네게 잘해주니?”
“특별히 잘해준다고 하기에도 그렇고, 그렇지 못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그저 그래. 그냥 무덤덤하지 뭐.. 넌 어때?”
“나?”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남편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미진이가 말한다.
“좀.. 힘든 모양이구나?”
“그걸 힘들다고 해야 하나..”
“우리 나이에 거의 대부분 다 그렇지 뭐.. 개중에 아직까지 남편의 사랑을 많이 느끼며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독백처럼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미진이는 진지한 자세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고..
“나.. 얼마 전에 아주 멀리 여행을 다녀 왔어. 한번 가면 돌아오기 힘든 그런 곳을..
같이 여행을 떠난 사람이 있었지. 나를 많이 사랑 해주고 아껴주었던 사람인데,
그 곳은 그 사람에겐 잘 아는 곳이었고 나에게는 낮 선 그런 곳으로 여행을 가서
그 곳에서 한 동안 지냈었어..
나에게 무관심하고 힘들게 하는 남편에 비해서 순간순간 너무 황홀할 정도로 나를 많이
사랑해 주었고, 그런 그 사람의 사랑을 한 순간도 의심해 본적이 없었어..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시들어 가는 꽃처럼 자꾸 내 몸은 말라 만 갔어.
한 순간이라도 그 사람이 내 곁에 없으면 이 세상에 나만 홀로 내버려진 것 같은 생각이
들고, 그 사람이 안 보이는 그 공간이 너무 무섭고 사무치도록 외로웠어.
그러다가 그 사람이 내 곁에 보이면 안도를 하고, 허전함과 외로움을 떨쳐 버리려고
한없이 그 사람의 몸을 탐했지.
그리고, 아이가 너무 보고 싶었어.. 친구들도 보고 싶었고, 엄마나 내 동생들,,
나와 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웠어.
희한하게도 그 지긋지긋하던 내 남편도 보고 싶은 거야..
그러던 어느 날 추석이 되었는데, 그 사람이 집에 다녀와야 하겠다고 내게 말했어.
그 사람의 집이 바로 그 곳이었거든.. 그 사람의 집에는 어엿한 마누라도 있었고..
추석날 나 혼자 아파트에 남겨져 있었는데, 내가 지내던 그 곳이 아파트였어.
아.. 나를 그렇게 사랑한다 던 그 남자도 때가 되니까 날 혼자 내버려두고 자기의 집으로
다니러 갈수가 있구나.. 난 그 사람의 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난 그 사람의 숨겨진 여자였어. 그걸 그때야 깨달은 거지.
나도 내 집에 가면 엄연한 한 가정의 안주인인데, 내가 왜 추석날 이렇게 숨어 지내야 하나
하고 자괴감이 들었어..
그 사람이 떠나자 마자 좀 전에 사온 맥주를 그 텅 빈 아파트에서 계속 마셨어.
맥주를 한 여섯 병쯤 마시니까 술에 너무 취해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어.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지탱하고 침대로 가서 그대로 쓰러져 버렸지.
그리고, 잠이 들었어.. 아마, 오후 네 시쯤 잠이 들었을 거야.
그 다음날 저녁 일곱시 경에 진수씨가 돌아올 때까지 잠을 잤어.
그 남자의 이름이 진수씨 였어..
그러니까 스물 일곱 시간을 죽은 듯이 잠만 잔 거지..
진수씨가 돌아와서 나를 깨웠어.
눈을 뜨니까 진수씨가 침대 옆에 앉아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다 보더군.
진수씨의 얼굴을 보니까, 죽이고 싶도록 미운 거야.
나를 이렇게 내버려둘 수 있다니..
당신 하나 보고 모든 걸 다 버리고 여기까지 따라 왔는데, 당신은 날 내버려 두고
당신 집에 갈수 있다니.. 그것도 자기 부모가 있고, 자기 마누라가 있고, 자기 자식들이
있는 그 집에 말이야.
난들 부모가 없고, 난들 남편이 없고, 난들 아이들이 없는 줄 알아?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사람을 때리고 울부짖었어.
당신 땜에 내 신세가 이 모양 이 꼬라지가 됐다고.. 왜? 날 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느냐고..
한참을 그렇게 울부짖으며 그 사람을 때리니까 나중에는 지쳐서 울음도 안 나오고
힘이 없어 더 이상 때리지도 못하겠더라고..
내가 때리는 대로 몸을 맡기고, 나의 악다구니를 아무 소리없이 듣고 있던 진수씨가
내가 지쳐 가만히 있으니까 내 몸을 끌어 안고 토닥거렸어.
그렇게 힘들었냐고..
몸을 좀 씻으려고 침대에서 내려서다가 그대로 쓰러져 버렸어.
이틀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내내 잠만 잤으니.. 그것도 술에 잔뜩 취해서 말이야.
몸에 진이 다 빠져나가 버린 거지.
진수씨가 나를 다시 눕히고 미음을 끓여 왔어.
한편으로 생각하니까, 이 사람도 어쩔 수가 없었으니 그렇게 한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진수씨에게 말했지.
내일 엄마한테 좀 다녀와야 겠다고..
그랬더니, 엄마가 보고 싶은 게 아니고 애들이 보고 싶은 게 아니냐고 되물었어.
역시 그랬지. 제일 보고 싶었던 게 애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엄마한테는 몰라도 남편이 있는 내 집에는 쉽게 갈수가 없잖아?
진수씨가 그러더군. 꼭 부산에 갔다 와야 되겠느냐고..
그래서 엄마만 보고 다시 돌아 온다고 했지..
하지만, 내 마음은 그냥 부산에 간다는 생각만 했지, 다시 돌아 온다는 것은 차후 문제였어.
다시 돌아 올 거냐고 진수씨가 재차 물었어. 돌아오겠다고 다시 약속을 했지.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진수씨랑 아파트를 나섰어. 내 집에 가기 위해서 말이야.
내 마음은 하늘을 나는 것 같았어.
부산에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에..
그런데, 동대구역에 가니까 명절 연휴 때문에 부산가는 열차표를 구할 수가 없었어.
정말 미치겠더라구.. 누군가 나를 내 집에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그렇게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진수씨가 그러더군.
시외버스 터미날에 가면 시외버스가 아니더라도 명절날 운행하는 관광버스가 있다고..
부산에 갈 수가 있을 거라고..
정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구나 하는 마음에 너무 감사했어..
그리고, 택시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날로 와서 관광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올 수가 있었지..
진수씨가 떠나는 나에게 봉투를 하나 주었어.
떠나오는 버스 안에서 그 봉투를 열어 보니까, 돈 오백만원과 편지 한 장이 있었어.
그 편지를 읽어 보니까, 진수씨가 내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리고, 앞으로는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잘살면 좋겠다는 글이 쓰여져 있었어.
진수씨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절절히 느낄 수가 있었고, 너무 고마웠어.
부산에 도착해서 엄마 집에 갔었지.
엄마 집의 마당에 들어서는데, 엄마가 마루에 앉아 있다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말씀 하셨어. ‘이제 오니?’ 하고 말이야.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딸을 맞이 하듯이 말이야.
그렇게 나를 맞아주는 엄마가 너무 좋았어.
그리고, 엄마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었지..”
그때의 순간을 이야기 하려니까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 진다.
잠시 마음을 가라 앉히고 있는데, 미진이가 말한다.
“네 엄마가 참 여장부시구나? 그렇게 딸을 맞이할 수 있다니..
양주 한잔 더 할래?”
“그래 주겠니?”
미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양주 두 잔을 들고 온다.
같이 잔을 들고 한번에 다 마신다.
짜릿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양주의 느낌이 좋고, 양주 석 잔을 마시다 보니 술이 좀
오르는 게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미진이가 빈 잔을 내려 놓고 말한다.
“그래, 그 다음은 어떻게 됐니?”
내가 빈 술잔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계속 한다.
“명절 연휴라 집에 내려와 있던 동생들과 제부 그리고, 올케가 내가 우는 소리를 들었던지 모두 밖으로 나왔어.
그리고, 나를 부르고는 말문이 열리지 않는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어.
엄마와 내가 안방으로 들어가고, 따라 들어오려는 동생들을 못 들어오게 했어.
엄마가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 보시더니 말씀을 하시더군..
얼굴에 피골이 상접했다면서, 그렇게 힘들어 할 걸 왜 집을 나갔었느냐고..
내 처지가 힘들더라도 참고 살았으면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 아니냐고..
엄마가 내 남편에게 전화를 했어.
그리고, 남편이 바로 온다고 했어..
잠시 후, 남편이 왔는데 남편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어.
엄마가 남편에게 말을 했지.
아직도 나를 마누라로 생각을 하느냐고..
남편이 그렇다고 하니까, 이번 일을 죽을 때까지 입에 담지 않는다면 내 딸을 보내줄 수가
있다고 했어. 그렇지 않다면 엄마가 날 데리고 살거라고 했지.
남편이 그러겠다고 했어.
그리고, 남편과 내가 집으로 돌아온 거야.
이렇게 해서 오 개월에 걸친 여행이 모두 끝이 났어.
내 사랑도 끝이 나고..”
그렇게 길고 긴 내 이야기가 끝이 난다.
어제, 오늘 두 번 서로 말을 나누고 안면을 튼 미진이에게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
할 수 있다니..
내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는다.
그렇게 미진이가 편했던가? 아니, 그 보다는 내 가슴 속에 앙금처럼 남아 있던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 놓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내 이야기를 하고 나니까 가슴 속이 후련해지고 편하다.
미진이가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너에게 그런 엄청난 일이 있었구나.. 어쩐지 너의 모습에서 무언가 많은 일들을 겪은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어. 그 이후로 네 남편은 그 일로 너를 괴롭히진 않았니?”
“아니.. 그러진 않았어.”
“네 남편도 속이 좁은 사람 같진 않구나.”
“자기 자존심 때문이겠지..”
미진이가 나를 꼭 껴안으며 말한다.
“너와는 아주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아..”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
*****************************************************
이번 글은 한편을 올리고 나면 다음 글의 구상을 하면서 너무 즐겁읍니다.
아마.. 긴 이야기가 될것 같읍니다.
이제 첫번째 남자의 이야기가 끝났거든요.
다시 두번째 남자를 만나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남자를 만납니다.
세번째 남자는 현재 진행형이지만, 여기 주인공의 마지막 남자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읍니다.
불현듯 옆집 여자가 놀러 오라고 한 말이 생각이 난다.
한번 놀러 가 볼까?
학교에 갔다 온 애들을 보고 엄마가 옆집에 갔다 올 테니까 둘이서 놀고 있으라고 하고,
밖으로 나와 우리 아파트 바로 옆에 있는 그 여자의 아파트 벨을 누른다.
누구세요? 란 그 여자의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린다.
“아이고.. 어서 와.”
그녀가 반갑게 날 맞이한다.
내가 거실 안으로 들어선다.
아파트의 구조야 우리 집과 똑같지만, 무언가 분위기가 좀 틀린 것 같다.
거실을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고 커튼도 레이스 장식이 달린 것으로 걸어 놓아
아늑한 기분이 든다.
나는 성격이 보통 여자들과는 달리 애살이 없고, 좀 담백하다고 해야 하나..
남자와 같은 성격이 있어서 살림살이를 아기자기하게 꾸미는 것은 잘 하지 못한다.
집안에 필요한 가재도구들이나 물건들만 필요한 자리에 갖다 놓지,
무슨 장식용 액자나 장식용 술.. 양주나 과일 주 담은 것 등을 보기 좋게 진열을
해 놓는다든지 그러질 못한다.
그러다 보니 집안이 포근하다기 보다 단출한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뭘 해? 앉지 않고?”
잠시 서서 거실을 둘러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미진이의 목소리에 소파에 와서
앉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 거실을 잘 꾸며 놓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 포근한 느낌이 들고..”
“그래? 그래도 집안이 산만하지 않아? 니네 집은 깔끔한 느낌이 들던데..
참.. 무슨 차를 줄까?”
“커피나 한잔 줘.”
“그러지 말고 양주 한잔 어때?”
이 여자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술 마시려고?”
“왜, 마실 줄 몰라? 한잔하면 기분이 좋을 텐데..”
“그럼, 양주 한잔 줘.”
미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진열장 쪽으로 가더니 양주 잔에 양주를 두잔 따라서
가지고 온다.
“해네시 꼬낙인데 한번 마셔봐. 향이 좋은 게 마실 만 해.”
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맛을 본다.
혀가 짜릿한 게 술 맛이 부드럽고 좋다. 얼마 만에 마시는 술인가?
미진이도 한 모금 마시더니 날보고 물어본다.
“술 맛이 어때?”
“부드럽고 좋네?”
“얘. 너도 술 마실 줄 아나 보다. 부드럽다고 하는 걸 보니..”
“마실 줄 알기는? 그냥 그런 맛이 들어서 그래..”
“지난번 추석 때 남편이 선물 받은 건데 심심해서 한잔 마셔 봤더니
괜찮대? 기분도 좋아지는 게.. 그래서, 가끔 한잔씩 해.”
“술병이 표시가 날 텐데 남편이 뭐라고 안 해?”
“남편은 그런 걸 가지고 뭐라고 안 해. 오히려 좋아하면 좋아하지..
내가 술에 취하면 서비스를 잘해 주거든..”
갑자기 풋 하고 웃음이 나온다.
너무 자연스레 서비스를 잘해준다는 말이 나오니..
“왜 웃어?”
“네가 서비스를 잘해준다는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애는? 우리 나이에 가릴 말이 뭐가 있어? 더군다나 친구 사이에..”
“근데, 애들이 보이지 않네?”
“응.. 계집애 하나 있는데 지금 피아노 학원에 가 있어. 한 시간 정도 더 있어야 올 거야.”
갑자기 미진이가 십년지기 친구처럼 느껴진다.
전혀 부담이 없고 편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아주 가깝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얘.. 네 이야기 좀 해봐.”
내 이야길 하라고? 그 많은 이야기를?
“글쎄.. 별로 이야기할 게 없을 것 같은데..”
“네 얼굴을 보면 아주 이야기할 게 많을 것 같은데?”
“그렇게 보여?”
“넌.. 뭔가 좀 다르게 보여. 우리하고는.. 뭐랄까? 무언가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아주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아.”
미진이가 좀 단순한 줄 알았는데, 이런 말을 다 하다니..
정말 내 얼굴에 그런 것들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렇진 않아.”
내가 남은 양주를 마저 들이킨다. 속이 훈훈해지는 것 같고 기분이 좀 오르는 것 같다.
미진이도 어느 새 잔을 비웠다.
“한잔 더 할래?”
“그래도 될까?”
“그럼.. 그래도 되지. 네가 그 말을 하니까 마시고는 싶은데 주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 같아.”
미진이가 다시 양주 두 잔을 따라 가지고 온다.
다시 잔을 들고 양주를 마신다.
“미진아. 너.. 남편말고 다른 사람 사랑해본 적이 있니?”
“결혼하기 전이야 사랑한 사람이 있었지.. 결혼 후 아직까지는 그런 사람이 없었어.
어쩌다 마음에 드는 남자를 볼 때가 있었지만, 그냥 마음뿐이지..
그래 봤으면 좋겠다. 아주 짜릿할 것 같아.”
“남편은 네게 잘해주니?”
“특별히 잘해준다고 하기에도 그렇고, 그렇지 못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그저 그래. 그냥 무덤덤하지 뭐.. 넌 어때?”
“나?”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남편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미진이가 말한다.
“좀.. 힘든 모양이구나?”
“그걸 힘들다고 해야 하나..”
“우리 나이에 거의 대부분 다 그렇지 뭐.. 개중에 아직까지 남편의 사랑을 많이 느끼며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독백처럼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미진이는 진지한 자세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고..
“나.. 얼마 전에 아주 멀리 여행을 다녀 왔어. 한번 가면 돌아오기 힘든 그런 곳을..
같이 여행을 떠난 사람이 있었지. 나를 많이 사랑 해주고 아껴주었던 사람인데,
그 곳은 그 사람에겐 잘 아는 곳이었고 나에게는 낮 선 그런 곳으로 여행을 가서
그 곳에서 한 동안 지냈었어..
나에게 무관심하고 힘들게 하는 남편에 비해서 순간순간 너무 황홀할 정도로 나를 많이
사랑해 주었고, 그런 그 사람의 사랑을 한 순간도 의심해 본적이 없었어..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시들어 가는 꽃처럼 자꾸 내 몸은 말라 만 갔어.
한 순간이라도 그 사람이 내 곁에 없으면 이 세상에 나만 홀로 내버려진 것 같은 생각이
들고, 그 사람이 안 보이는 그 공간이 너무 무섭고 사무치도록 외로웠어.
그러다가 그 사람이 내 곁에 보이면 안도를 하고, 허전함과 외로움을 떨쳐 버리려고
한없이 그 사람의 몸을 탐했지.
그리고, 아이가 너무 보고 싶었어.. 친구들도 보고 싶었고, 엄마나 내 동생들,,
나와 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웠어.
희한하게도 그 지긋지긋하던 내 남편도 보고 싶은 거야..
그러던 어느 날 추석이 되었는데, 그 사람이 집에 다녀와야 하겠다고 내게 말했어.
그 사람의 집이 바로 그 곳이었거든.. 그 사람의 집에는 어엿한 마누라도 있었고..
추석날 나 혼자 아파트에 남겨져 있었는데, 내가 지내던 그 곳이 아파트였어.
아.. 나를 그렇게 사랑한다 던 그 남자도 때가 되니까 날 혼자 내버려두고 자기의 집으로
다니러 갈수가 있구나.. 난 그 사람의 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난 그 사람의 숨겨진 여자였어. 그걸 그때야 깨달은 거지.
나도 내 집에 가면 엄연한 한 가정의 안주인인데, 내가 왜 추석날 이렇게 숨어 지내야 하나
하고 자괴감이 들었어..
그 사람이 떠나자 마자 좀 전에 사온 맥주를 그 텅 빈 아파트에서 계속 마셨어.
맥주를 한 여섯 병쯤 마시니까 술에 너무 취해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어.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지탱하고 침대로 가서 그대로 쓰러져 버렸지.
그리고, 잠이 들었어.. 아마, 오후 네 시쯤 잠이 들었을 거야.
그 다음날 저녁 일곱시 경에 진수씨가 돌아올 때까지 잠을 잤어.
그 남자의 이름이 진수씨 였어..
그러니까 스물 일곱 시간을 죽은 듯이 잠만 잔 거지..
진수씨가 돌아와서 나를 깨웠어.
눈을 뜨니까 진수씨가 침대 옆에 앉아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다 보더군.
진수씨의 얼굴을 보니까, 죽이고 싶도록 미운 거야.
나를 이렇게 내버려둘 수 있다니..
당신 하나 보고 모든 걸 다 버리고 여기까지 따라 왔는데, 당신은 날 내버려 두고
당신 집에 갈수 있다니.. 그것도 자기 부모가 있고, 자기 마누라가 있고, 자기 자식들이
있는 그 집에 말이야.
난들 부모가 없고, 난들 남편이 없고, 난들 아이들이 없는 줄 알아?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사람을 때리고 울부짖었어.
당신 땜에 내 신세가 이 모양 이 꼬라지가 됐다고.. 왜? 날 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느냐고..
한참을 그렇게 울부짖으며 그 사람을 때리니까 나중에는 지쳐서 울음도 안 나오고
힘이 없어 더 이상 때리지도 못하겠더라고..
내가 때리는 대로 몸을 맡기고, 나의 악다구니를 아무 소리없이 듣고 있던 진수씨가
내가 지쳐 가만히 있으니까 내 몸을 끌어 안고 토닥거렸어.
그렇게 힘들었냐고..
몸을 좀 씻으려고 침대에서 내려서다가 그대로 쓰러져 버렸어.
이틀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내내 잠만 잤으니.. 그것도 술에 잔뜩 취해서 말이야.
몸에 진이 다 빠져나가 버린 거지.
진수씨가 나를 다시 눕히고 미음을 끓여 왔어.
한편으로 생각하니까, 이 사람도 어쩔 수가 없었으니 그렇게 한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진수씨에게 말했지.
내일 엄마한테 좀 다녀와야 겠다고..
그랬더니, 엄마가 보고 싶은 게 아니고 애들이 보고 싶은 게 아니냐고 되물었어.
역시 그랬지. 제일 보고 싶었던 게 애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엄마한테는 몰라도 남편이 있는 내 집에는 쉽게 갈수가 없잖아?
진수씨가 그러더군. 꼭 부산에 갔다 와야 되겠느냐고..
그래서 엄마만 보고 다시 돌아 온다고 했지..
하지만, 내 마음은 그냥 부산에 간다는 생각만 했지, 다시 돌아 온다는 것은 차후 문제였어.
다시 돌아 올 거냐고 진수씨가 재차 물었어. 돌아오겠다고 다시 약속을 했지.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진수씨랑 아파트를 나섰어. 내 집에 가기 위해서 말이야.
내 마음은 하늘을 나는 것 같았어.
부산에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에..
그런데, 동대구역에 가니까 명절 연휴 때문에 부산가는 열차표를 구할 수가 없었어.
정말 미치겠더라구.. 누군가 나를 내 집에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그렇게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진수씨가 그러더군.
시외버스 터미날에 가면 시외버스가 아니더라도 명절날 운행하는 관광버스가 있다고..
부산에 갈 수가 있을 거라고..
정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구나 하는 마음에 너무 감사했어..
그리고, 택시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날로 와서 관광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올 수가 있었지..
진수씨가 떠나는 나에게 봉투를 하나 주었어.
떠나오는 버스 안에서 그 봉투를 열어 보니까, 돈 오백만원과 편지 한 장이 있었어.
그 편지를 읽어 보니까, 진수씨가 내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리고, 앞으로는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잘살면 좋겠다는 글이 쓰여져 있었어.
진수씨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절절히 느낄 수가 있었고, 너무 고마웠어.
부산에 도착해서 엄마 집에 갔었지.
엄마 집의 마당에 들어서는데, 엄마가 마루에 앉아 있다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말씀 하셨어. ‘이제 오니?’ 하고 말이야.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딸을 맞이 하듯이 말이야.
그렇게 나를 맞아주는 엄마가 너무 좋았어.
그리고, 엄마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었지..”
그때의 순간을 이야기 하려니까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 진다.
잠시 마음을 가라 앉히고 있는데, 미진이가 말한다.
“네 엄마가 참 여장부시구나? 그렇게 딸을 맞이할 수 있다니..
양주 한잔 더 할래?”
“그래 주겠니?”
미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양주 두 잔을 들고 온다.
같이 잔을 들고 한번에 다 마신다.
짜릿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양주의 느낌이 좋고, 양주 석 잔을 마시다 보니 술이 좀
오르는 게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미진이가 빈 잔을 내려 놓고 말한다.
“그래, 그 다음은 어떻게 됐니?”
내가 빈 술잔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계속 한다.
“명절 연휴라 집에 내려와 있던 동생들과 제부 그리고, 올케가 내가 우는 소리를 들었던지 모두 밖으로 나왔어.
그리고, 나를 부르고는 말문이 열리지 않는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어.
엄마와 내가 안방으로 들어가고, 따라 들어오려는 동생들을 못 들어오게 했어.
엄마가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 보시더니 말씀을 하시더군..
얼굴에 피골이 상접했다면서, 그렇게 힘들어 할 걸 왜 집을 나갔었느냐고..
내 처지가 힘들더라도 참고 살았으면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 아니냐고..
엄마가 내 남편에게 전화를 했어.
그리고, 남편이 바로 온다고 했어..
잠시 후, 남편이 왔는데 남편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어.
엄마가 남편에게 말을 했지.
아직도 나를 마누라로 생각을 하느냐고..
남편이 그렇다고 하니까, 이번 일을 죽을 때까지 입에 담지 않는다면 내 딸을 보내줄 수가
있다고 했어. 그렇지 않다면 엄마가 날 데리고 살거라고 했지.
남편이 그러겠다고 했어.
그리고, 남편과 내가 집으로 돌아온 거야.
이렇게 해서 오 개월에 걸친 여행이 모두 끝이 났어.
내 사랑도 끝이 나고..”
그렇게 길고 긴 내 이야기가 끝이 난다.
어제, 오늘 두 번 서로 말을 나누고 안면을 튼 미진이에게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
할 수 있다니..
내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는다.
그렇게 미진이가 편했던가? 아니, 그 보다는 내 가슴 속에 앙금처럼 남아 있던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 놓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내 이야기를 하고 나니까 가슴 속이 후련해지고 편하다.
미진이가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너에게 그런 엄청난 일이 있었구나.. 어쩐지 너의 모습에서 무언가 많은 일들을 겪은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어. 그 이후로 네 남편은 그 일로 너를 괴롭히진 않았니?”
“아니.. 그러진 않았어.”
“네 남편도 속이 좁은 사람 같진 않구나.”
“자기 자존심 때문이겠지..”
미진이가 나를 꼭 껴안으며 말한다.
“너와는 아주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아..”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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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한편을 올리고 나면 다음 글의 구상을 하면서 너무 즐겁읍니다.
아마.. 긴 이야기가 될것 같읍니다.
이제 첫번째 남자의 이야기가 끝났거든요.
다시 두번째 남자를 만나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남자를 만납니다.
세번째 남자는 현재 진행형이지만, 여기 주인공의 마지막 남자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읍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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