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은 여인들 - 달맞이꽃 1장
where do I begin to tell the story...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는 추억이 된 영화, ‘러브 스토리’의 주제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도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 * * * * * * * *
신입사원 연수 때, 나도 그 연수원에서 연수를 했었다. 입사 인원은 이백여 명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들어간 회차에 같이 교육받은 인원은 한 사오십 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2주 동안 같이 먹고 자며 같이 교육받은 동기들은 나중에도 많이 생각나곤 했었다. 동기모임을 만들자고 여러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지만, 겨우 한 번 모이고는 흐지부지 되었었다.
그 중, 서울 본사로 배치된 귀여운 여직원이 있었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스물한살이었다. 지수민이라는 그 아가씨는 컴퓨터를 얼마나 잘 다루었는지, 타자가 분당 몇백 타에 엑셀이며 파워포인트며 못하는 게 없었고, 입사 후에야 엑셀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던 나를 꽤나 놀려대곤 했었다.
연수원에서 분반토의 때 나와 같은 조에서 얼굴을 익힌 지수민씨는, 연수하던 2주 동안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해 주었고, 실무에 배치된 후에도 내가 컴퓨터 관련해서 뭔가 모르는 게 있을 때마다 생각이 났다. 물어볼 사람이라고는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선배밖에 없었는데, 선배는 컴퓨터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몰랐다. 결국 생각나는 사람이 수민씨였고, 수민씨에게 전화해야 했다.
처음엔 전화로 물어보기가 민망하고 미안했지만, 나중에는 당연한 듯, 아주 뻔뻔하게 물어보게 되었고, 내가 물어볼 때마다 수민씨는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었다.
- 절대주소, 상대주소... 이제 아시겠죠?
- 아, 나... 그걸 몰라서 참.
- 혼자 공부해서 알긴 어렵죠.
- 아, 고마웠어. 덕분에 해결했어.
- 그럼 맛있는 거 사주에요. 큭~
- 아, 사야지. 한번 아니라 열 번이라도 사야지.
나중엔 사기로 한 밥이 쌓이고 쌓여서, 한달 내내 밥 사야겠다고 농담할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로 만난 건 일년 동안 서너 번이 전부였다. 물론, 밥이 아니라 술을 먹었지만...
내 주변에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워낙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니까 미안하면서도 자꾸 묻게 되었다. 한번은 내가 엑셀 함수 관련해서 주말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한참을 전화로 설명해도 내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자, 황송하게도 직접 연수원까지 행차를 한 적도 있었다.
- 어... 그러면 내가 미안하잖아... 뭐, 그걸로 여기까지...
- 그럼 어떡해요. 보여줄 방법도 없고...
- 화면 캡처해서 메일로 보내면...
- 캡처? 캡처가 뭐예요?
- 아니다, 그것도...
그걸 다 설명하려면 화면을 수십 장은 캡처해야 했다. 화면을 보여줄 방법이 없었다. 영상통화라도 했다면 모를까, 그때까지는 영상통화라는 게 없었다. 영상통화가 되는 휴대폰이 나오기 얼마 전이었다. 지금이야 원격으로 다 처리할 수 있지만 그땐 컴퓨터도 잘 몰랐었다.
수민씨의 집은 수원에서 전철로 삼십분쯤 가야하는 K시였다. 근무하던 서울 본사에서 오는 것보다는 가까웠지만 그래도 일부러 온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 도움받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스럽고 미안한 일이었다.
전화를 끊고 수민씨가 연수원에 도착하기까지는 두어 시간이 걸렸지만, 수민씨가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은 채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 아, 이 함수는 좀 복잡하네... 시프트 누르고 엔터를 치면... 이렇게 되는구나...
- 복잡하긴요. 이건 복잡한 것도 아니예요. 셀에 프로그램을 짜 넣을 수도 있어요.
- 이 안에 프로그램을 넣는다고...? 우와... 허허...
- 뭐, 그러니까 엑셀이죠.
- 가르쳐 줘도 난 못 하겠다.
- 금방 되는 건 아니지만... 해 보세요. 재밌어요...
- 아이구, 머리 아파. 어쨌든, 또 신세졌네? 고마워서 어쩌지?
- 괜찮아요.
- 아니야, 내가 뭐 선물이라도 해 주고 싶은데...
- 선물은요, 무슨...
- 그래도, 이것 때문에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데...
- 아니예요. 자꾸 그러시면 다음에 물어보시기 불편해질 거 같애요.
- 그런가? 그래, 오늘은 찐하게 먹자. 저기 이스턴호텔 뷔페 맛있다던데...
- 뷔페요?
- 응, 끝내 준대. 나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 주말인데... 예약 안 하고 괜찮을까요?
- 가 보지 뭐...
나는 진짜로 시내 유명호텔 뷔페라도 사주고 싶을 정도로 고마웠다. 그러나 그날, 수민씨는 연수원에서 같이 나오다가 눈에 띈 식당의 밥집의 국밥이 먹고 싶다고 졸랐고, 연수원 아랫동네 식당에서 국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고 돌아갔다.
- 아, 맛있다... 맛있죠?
- 응... 맛있긴 한데... 이거, 이걸로 퉁치긴 미안한데...
- 맛있으면 됐죠, 뭐.
- 그래도...
서울과 수원은 그리 멀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가깝지도 않았다. 그렇게 이따금씩 통화하거나, 내가 서울 본사 근처에 가면 한번쯤 얼굴 보곤 했던 아가씨였는데, 내가 혜진이와 사귀게 되면서 거의 얼굴을 못 봤었다.
아, 혜진이와 친해지기 전에 수민씨가 연수원에 찾아와서 만난 적이 한번 있었다. 언젠가 참 쌀쌀했던 날, 수민씨가 전화를 했었다.
- 네...
- 저, 수민이예요...
- 응, 수민씨, 웬일이야? 휴대폰으로 전화를 다 하고...?
- 치... 토요일이니까 휴대폰으로 하죠.
- 나, 지금도 연수원이야.
- 왜요?
- 연수 있어서... 오늘 내일 여기서 자야 돼.
- 그렇구나...
- 그래, 왜?
- 아니... 그냥... 안 바쁘면 얼굴이나 볼까 해서요.
- 그래? 음... 그럼 잠깐 볼까?
- 연수 있다면서요?
- 낮에는 잠깐 나가도 돼.
전철역 부근에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시간에 나갔는데...
- 여기요, 받으세요...
- 이게 다 뭐야? 웬 꽃다발?
- 치이... 꽃다발 아닌데...
- 어라? 이거 뭐지?
그 꽃다발은 초콜렛을 꽃 모양으로 하나하나 포장한 거였다.
- 우와... 이게 다 뭐야?
- 아저씨, 설마...
- 설마, 뭐?
- 아저씨, 오늘 무슨 날인지 모르는 건 아니죠?
- 오늘...? 오늘이 거, 무슨 데이... 뭐 그거야?
- 아유, 아저씨~... 무슨 데이가 뭐예요, 무슨 데이가...
그날이 바로 발랑까진 날이었다. 초콜렛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런 상업적인 마케팅을 위해 일부러 특별한 날처럼 떠들며 어린 소녀들을 부추기는 행태를 싫어했지만, 다행히도, 거기서 수민이를 앞에 두고 그런 얘기를 할 정도로 모자라고 멍청한 놈은 아니었다.
- 아니야, 이거 예쁘다구...
- 아저씨 생각해서 일부러 샀단 말이예요.
- 예쁘네... 이런 건 어디 팔아?
- 예뻐요? 히힛~ 재료만 사서 내가 만든 거예요.
- 그래? 손재주도 좋네. 자, 먹어 봐.
수민이는 초콜렛을 입에 물고 한참을 녹여 먹었고, 나도 하나를 맛보았다.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술병 모양으로 만들어 안에 술을 넣은 초콜렛은 먹을 만했다.
- 음... 맛있네.
- 킥~
- 왜?
- 이제 아저씨가 들고 가야 되잖아.
- 들고 가야지. 근데 왜?
- 나, 전철 타고 오는 동안 얼마나 창피했는데... 다 나만 보는 것 같구...
- 음....
- 버스에서 너무 얼굴 빨개지지 마세요. 킥~
전철역까지 수민씨를 배웅한 후, 그걸 들고 버스를 타고 연수원까지 들어왔었다. 누가 보든지 말든지 신경쓰지 않으려 했지마 자꾸 주위를 돌아보게 되고, 얼굴도 빨개졌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전철을 타고 그걸 집까지 가져갈 생각은 없었다. 초콜렛은 사무실에서 누가 먹었는지, 녹아 버렸는지... 나도 모르게 어느새 다 사라졌다.
그때는 별 생각 없이 그냥 그런 날이라서 왔었나 보다 생각하고 말았었다. 덕분에 뭐 물어볼 때는 좀더 편하게 대해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만 했었다.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던, 바보 같았던 때였다. 여자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물론, 생각조차 없던 때였다.
그 이후에도 모르는 걸 물어보면서 통화는 자주 했지만 통화 뿐, 수민이를 다시 본 건 혜진이와 헤어지고 몇 달이 지났을 때였다. 가을이라지만 낮에는 덥던 9월이었다.
- 연수부 한정웁니다.
- 저, 수민이예요.
- 수민이? 우와... 되게 오랜만이다. 그지?
- 치, 오빠가 오랜만이죠.
- 그런가? 후후...
둘이서 오랜만에 통화하는데 그게 어느 한 사람만 오랜만일 수가 있나? 어떻게 들으면 참 우스운 소리였다. 수민이는 처음엔 꼬박꼬박 한정우씨라고 불렀지만 나중엔 아저씨라고 부르다가, 같이 술 몇 번 먹고 나더니 정우오빠라고 불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점점 친해져서 그렇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 요즘은 어려운 거 없어요?
- 아우, 아직도 하나도 모르지, 뭐...
- 헤헤... 지금 어디예요?
- 으잉? 수민이, 어디에 전화 했지?
- 아, 맞다... 힝~ 나, 바본가 봐.
- 바보... 크크크...
- 치이~ 퇴근 안 하세요?
- 아, 오늘도 연수.
- 우와~ 좋겠다.
- 좋긴 뭐가 좋아? 훗~
- 연수원 좋잖아요. 흐으응... 나, 지금 연수원 가도 돼요?
- 지금?
- 응. 지금...
- 멀잖아. 벌써 저녁 다 됐고...
- 치, 도와달라고 부를 때는 안 멀었나, 뭐?
- 하하, 그런가? 그래, 오면 내가 다방커피 한잔 준다...
수민이는 그 저녁에 진짜 놀러 왔다. 택시비가 꽤 나왔을 텐데... 내가 연수원에서 잔다는 말에 연수원에서 교육받던 게 생각나서 밥도 안 먹고 뛰어왔다나 뭐라나... 그때까지만 해도 이 아가씨가 진짜 예전 생각이 나서 놀러 오는가보다...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 수민아, 여기...
- 아, 오빠. 안녕하세요?
버스 터미널로 마중나가 데리고 들어와서, 저녁식사 시간이 지났지만 식당 아주머니께 부탁해서 간단히 밥을 먹였다. 수민이는 퍽퍽한 연수원 밥도 맛있게 잘 먹었다.
- 커피?
- 오빠는요?
- 난 커피 안 좋아해서...
- 그럼 나도 딴 거 주세요.
- 녹차 있고, 둥굴레차 있어.
- 둥굴레차요.
- 네에, 둥굴레차...
구수한 둥글레차를 한 잔씩 들고 사무실 소파에 마주앉았다.
- 후루룩...
- 아, 따뜻해.
- 흠... 어디 보자... 전보다 예뻐진 건가...?
- 원래 예뻤어요.
- 헐~
- 킥킥...
- 시집갈 때가 됐나?
- 아이, 뭐야...? 오빠나 장가 가요. 나이는 잔뜩 먹구...
- 내가 나이 먹는데 수민이가 보태준 거 있어?
- 피이...
- 말 나온 김에, 주변에 예쁜 언니 있으면 소개 좀 해 줘.
- 킥~...
수민이는 어색하게 킥킥대고는 갑자기 말이 없었다. 난 그때까지도 아무 눈치 없이 멍청하게 굴었었다. 수민이는 한참 동안 컵만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 어떤 사람 좋아해요?
- 응? 뭐, 치마만 걸치면 돼.
- 치마요? 깔깔깔...
- 재밌어? 크크크...
- 그렇게 궁해요? 치마면 돼요?
- 치마입은 남자는 말구.
- 킥~
그러면서 수민이가 긴 머리를 쓸어 넘겼는데, 머리카락 밑으로 드러나는 목선이 희고 예뻤다. 시답잖은 얘기를 하다가 수민이는 바람 쐬러 나가자며 연수원 운동장으로 나를 끌고 나갔다.
연수원 잔디밭에서 보는 밤하늘은 꽤 괜찮았었다. 수도권 치고는 그나마 시골이라 하늘도 맑은 편이었고, 그때 마침 달도 없고 별만 반짝이던 하늘은 더욱 더 새까맣게 맑아 보였다.
- 오빠는 좋겠다. 이런 거 맨날 보구.
- 좋기는...
- 나도 이런 데서 일했으면... 흐응~
화장품인지 향수인지는 몰라도, 업소에서 짙은 화장을 한 여자들의 냄새는 거부감이 먼저 들었는데 그때 수민이에게서 나는 옅은 향기는 꽤 좋은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가까이 신체 일부를 접촉하고 수민이의 향기를 맡고 있으니, 놀러 오라고 할 때까지만 해도 그냥 어린 동생으로만 생각했었던 수민이가 여자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
수민이는 고개를 젖힌 채 밤하늘을 구경하는 자세 그대로 뒤에 있는 나에게 기댔다. 자연스럽게 나는 수민이 어깨에 손을 얹고 뒤에서 수민이를 버티어 주었다. 수민이는 내 손길이 닿자, 불편하다는 반응 대신 아예 나에게 체중을 완전히 기대며 아예 안겨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진짜, 진짜진짜 수민이에게 아무 욕심을 내지 않았었다.
그렇게 수민이는 내 품에서 말없이 한참 동안 밤하늘을 바라보았고, 나는 수민이의 머릿결에 뺨을 댄 채, 수민이에게서 나는 향기에 취해 있었다. 그러다가 수민이의 볼에 내 볼을 댔다. 그러려면 수민이를 좀더 당겨 안아야 했다.
그렇게 수민이의 어깨를 당겨 안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볼에 살짝 입맞추었다. 어떤 욕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그냥 품에 안고 향기를 맡다가 무심결에 한 행동이었다. 내가 해 놓고는 내가 살짝 당황했을 정도로.
수민이가 화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수민이는 가만히 있었고, 나도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민망하지는 않았다. 나는 수민이가 거부하지 않는구나 안심하면서 또 수민이 머리에 볼을 대고 눈을 감은 채 향기만 맡고 있었다. 잠시 후, 수민이가 꼼지락거리며 몸을 떼었다.
- 오빠, 춥지 않아요?
- 응? 그럼... 들어 갈까?
- 네...
- ......
- 응큼쟁이... 칫~
수민이는 걸음을 옮기며 내 팔을 살짝 때렸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무실로 들어올 때, 수민이는 내 손을 잡고 걸었다.
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밤 늦게, 연수원에서 가까운 시내버스 정류장이 아니라 한참을 가야 하는 전철역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수민이의 크고 맑은 눈이 자꾸 생각났다.
그 이후로 수민이는 전보다 훨씬 자주 전화를 했다. 내가 먼저 전화하는 날도 있었다. 내가 전화하면 수민이는 아주아주 좋아했다. 좋아한다거나 보고 싶다고 말은 서로 하지 않았어도, 수민이나 나나 전보다는 개인적인 얘기를 많이 했다.
퇴근하면서 심심하다고 전화도 하고, 밥 먹었느냐고 문자도 보내고... 그러면서도 한 달도 훨씬 더 지나서, 시월 마지막날 금요일 저녁에 수민이와 나는 다시 만났다.
종로 몇 가였나... 큰길에서 좀 안쪽으로 들어간 골목의 무지 큰 분식집에서 수민이와 저녁을 먹었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그 잠깐 사이에 수민이는 예쁘게 포장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 오빠? 선물...
- 어? 웬 선물? 생일도 아닌데...
- 생일에만 선물하나요, 뭐?
- 어... 난 준비를 못했는데.
- 아니예요... 내가 말도 안 했는데, 뭐.
- 이거, 참... 고맙다고 하기도 미안하네.
- 오빠, 로션도 잘 안 바르죠?
- 응?... 뭐, 그냥...
- 이건 아침저녁으로 매일 발라요. 알았죠? 담에 만날 때 얼마나 썼는지 검사할 거예요.
- 그래. 그럴게.
- 자, 약속.
- 응? 응.
- 도장도 꼬옥~ 헤헤, 약속했다, 오빠?
- 그래... 후후~
모 수입 브랜드의 스킨과 로션이었다. 화장품 브랜드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그냥 포장이 고급스러웠다는 기억 뿐. 세수하고 나서 뭘 발라 본 적이 없었다. 직장생활 시작하면서 세트로 사기는 했었지만 며칠이나 발랐을까, 영 익숙해지지 않는 일 중에 하나였다. 그래도 꼭 바르겠다고 착하게 대답을 하고, 손가락 걸어 약속까지 했다.
- 아, 맛있다.
- 그랬어? 다행이네.
- 배불러... 킥~
- 어? 맥주 한 잔 더 하려고 했는데...?
- 오빤 배 안 불러요?
- 뭐, 맥주 배는 따로 있으니까. 크크...
- 치이...
- 참, 수민아.
- 네?
- 나도... 선물 하나 하고 싶은데...
- 아니예요. 그러지 않아도 돼요.
- 그래도, 맨날 도움만 받고 선물도 받고... 나도 뭐 하나 사주고 싶어.
- ......
수민이는 사양하다가 잠시 고민하고는 새 다이어리를 말했다. 다이어리를 선물한다는 게 왠지 꺼려졌지만, 대형서점에서 다이어리를 고르며, 이거 예쁘다, 저거 예쁘다 하면서 아이처럼 우와 우와 감탄사를 연발하는 수민이를 보고는, 다이어리 아니라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사주고 싶었다.
그렇게 선물을 사고 나서 호프를 마시러 갔는데 웬일인지 거의 모든 술집에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 우와... 술집들 대박 나는구나, 그냥...
- 오빠, 그냥 갈까요?
- 아니야, 어딘가는 자리가 있겠지.
- 다 꽉꽉 찬 거 같아요.
- 오늘, 무슨 날인가...? 무슨 날이지?
- 그러게요...
- 조금만 더 다녀 보자. 응?
- 그래요, 그럼...
마침 자리가 있는 어느 호프집에 들어가서 복층식으로 된 이층에 자리를 잡았다. 거품이 풍성한 맥주를 한잔씩 따르고 건배를 하는데 웃으며 마주 보는 수민이가 갑자기 무지무지 예뻐 보였다. 짙은 눈썹과 큰 눈, 오똑한 코, 도톰한 빨간 입술... 맥주로 목을 축이면서도 수민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수민이에게 빠져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첫잔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면서, 수민이의 볼에 손을 대고 살짝 끌어당겨 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그렇게 살짝 키스하고 입술을 떼었는데, 수민이의 얼굴은 그 위치 그대로 있었고, 눈도 감은 채였다. 화난 건 아닐까 가슴이 철렁했는데, 수민이가 감았던 눈을 게슴츠레 뜨며 속삭였다.
- 또... 해줘요...
수민이의 살짝 벌어진 입과 게슴츠레한 눈... 뭔가에 홀린 듯,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다시 손을 내밀어 수민이의 턱을 잡고 다가갔다. 수민이의 입술과 내 입술이 닿자 이번엔 수민이가 먼저 살짝 빨아들였다. 입술을 내주고, 혀를 내주고... 엉덩이를 의자에 겨우 붙인 채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누는 키스...
주변에서 보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부드럽게 빠는 데에만 집중했다. 한참 동안을 그러고 나서 입술을 떼고 자리에 앉았는데, 그제서야 주변을 생각하며 피식피식 웃었다. 수민이도 소리죽여 웃으면서 쑥스럽다는 듯 혀를 살짝 깨물며 주변 눈치를 살폈다.
- 수민아....
- 네?
수민이가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한참을 그렇게 쳐다보다가 눈이 아파서 더 마주보지 못하고, 수민이를 당겨 이마에 입맞추었다.
- 쪽~ 괜찮았어?
- ......
- 응? 싫었어?
- ......
수민이는 입술을 힘주어 오므린 채 이번에는 고개만 저었다. 도리도리... 싫었으면 또 해달라고 할 리가 없었겠지. 그래도 재차 물어봤다. 대답하기 곤란해하면 할수록 짓궂게 더 확인하고 싶었다.
- 말해 봐... 어땠어?
- 아이... 몰라요~...
- 난 좋았는데.
- 나두...
- 응?
- 아니예요.
그쯤이면 됐고, 더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수민이가 바라보면 눈을 맞추어 주었고, 그러면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수민이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바라보면 나도 팔짱낀 팔을 탁자에 얹고 마주보았고, 수민이가 잔을 만지작거리면 잔을 들어 건배했다. 수민이는 호프집에서 나올 때까지 한 잔을 가지고 홀짝거렸고, 나머지 피처를 나 혼자 다 마셨다.
먹으면서 계속 마주보고 웃었다. 키스한 생각이 자꾸 났고, 수민이도 그래서 웃었던 거였다. 아니, 좋아서 웃었다고 하는 게 솔직한 말이겠다. 어쩌면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었는지... 그때는 술집에서 키스한 것만으로도 참 대담하고 뻔뻔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는 더한 짓도 했지만...
그날 먹은 맥주는 진짜 맛있었다. 그렇게 맛있는 맥주를 아쉽지만 다 마시고 나오면서 나는 모텔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 뭘 그렇게 찾아요?
- 응? 편하게 키스할 만한 데 어디 없나...
- 아유~, 진짜 응큼쟁이... 안 돼요. 오늘은 그만.
안돼? 뭐, 안 된다면 할 수 없지만... 오늘은 안 된다니 그럼 다음에는 된다는 건가?
- 잠깐도 안돼?
- 지금 몇 신데요...? 집에 가야지...
수민이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끝을 흐렸다. 시간? 아홉시 반... 밖에 안 되었었다. 아랫도리가 텐트를 치고 쿠퍼액이 팬티를 적시고 있는데 시간이 문젠가?
그런데, 그날 그 근처 술집과 모텔이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텔에도 빈 방이 없었다. 사람들이 술 먹고 섹스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날인지... 모텔도 몇 군데 더 가 보자고 수민이에게 말하기는 왠지 민망했다. 어쩔 수 없이 모텔을 포기하고 전철로 수민이네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수민이는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시는 나를 달래기도 하고, 놀리기도 했지만 전철을 타고 가는 내내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 다리 안 아파?
- 괜찮아요. 맨날 서서 다니는데 뭐...
- 맨날?
- 서서 가는 건 괜찮아요. 늦어서 걱정이지.
- 열시도 안 됐는데, 뭐.
- 그래도, 집에 가면 열한시 넘어요.
- 왜? 부모님 걱정하셔?
- 그럼요. 늦으면 혼나요.
- 아이구, 다 큰 아가씨를...
- 오빤, 내가 늦게 다니는 거 걱정 안 돼요?
수민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도 힐끔거리지도 않았다. 귀는 기울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수민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뾰로통해졌다.
- 걱정 되지.
- 걱정된다면서 그렇게 말해요?
- 수민이 혼자 늦게 다니는 게 걱정이지, 나랑 같이 있는데 뭐...
- 킥~
- 왜?
- 그냥요... 오빠 말이 그냥 웃겨... 킥...
- 크크크...
나도 그랬다. 우스운 말도 아니었는데, 웃음이 났다. 나랑 같이 있어도, 아니, 누구랑 있어도 부모님은 걱정을 하실 텐데, 나는 내 생각만 하고 있었다.
수민이네 집은 전철역에서 좀 걸어야 하는 빌라촌에 있었다. 수민이네 집 앞에서 우리는 또 한참 키스를 나누었다. 정문 앞에서 가볍게 뽀뽀만 하고 들여보낼 생각이었는데, 그늘진 벽 아래 어둠 속에서 뽀뽀하다 보니 입술을 빨게 되고, 입술을 빨다 보니 혀가 오가게 되었다.
한참 그렇게 맛있게 키스를 하다가 수민이를 좀더 어두운 건물 뒤쪽으로 잡아끌었다. 수민이는 안된다는 뜻으로 눈을 크게 뜨고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 오빠... 나, 집 앞이예요...
- 잠깐만...
- 여기서 더 어쩌려고요... 그만, 응?
- 잠깐만, 응? 이리 와 봐.
- ......
조금이라도 더, 일분이라도 더 수민이를 안고 싶었다. 말을 얼버무리며 수민이를 잡아끌었다. 옆집과 구분해 놓은 주차장을 지나 그 집과 뒷집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두 집을 나누는 담장이 있고, 두 사람 지나쳐 가기도 힘들 만한 좁은 공간...
그 가장 구석진 벽에 기대 서서 나는 수민이를 끌어안았다. 수민이도 더 이상 거부하지 않고 안겨 와서 자기가 먼저 입술을 찾았다. 그렇게 얼마간 서로 빨아대다 보니 흥분해서 수민이의 블라우스를 들추고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속살에 내 손길이 닿자 수민이가 몸을 웅크렸다.
- 하암... 으으으음~
- 쫍~ 수민아, 조금만...
- 하아~ 오빠...
수민이는 도리질치며 거부했지만 내가 애원하자 다시 내 목을 껴안고 매달렸다. 수민이가 내 목을 끌어안고 있어서 나는 키스하면서도 자유롭게 수민이를 만질 수 있었다.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등허리와 옆구리를 쓰다듬다가 손을 앞으로 돌려 브라를 젖히고 가슴을 만졌다. 우와...
키스하다가 눈을 번쩍 떴을 정도로 놀랐다. 옷 위로는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았던 수민이의 가슴은 마치 포탄 같았다. 말 그대로 반구형의, 내 한 손에 다 안 들어오는 큰 가슴은 내가 마구 주물러도 모양이 크게 변하지 않을 정도로 탄탄했다. 한 손으로 번갈아 만지다가 아예 두 손을 넣어 양쪽을 동시에 주물렀다. 수민이는 옷 앞섶이 완전히 흐트러질 정도가 되었다.
수민이가 입술을 빨아대면서 몸을 움찔거리고 다리를 배배 꼬았다. 한 손을 내려 수민이의 엉덩이로 손을 옮겼다. 엉덩이도 가슴만큼 탱탱했다. 수민이는 아주 날씬하지는 않고, 통통하게 살이 있는 편이기는 했어도 가슴이며 엉덩이가 그렇게 탱탱할 거라고는 만져보기 전엔 생각하지 못했었다. 수민이는 살짝 도리질쳤지만 그러면서도 입술은 떼지 않고 빨아대었다.
엉덩이를 만지다가 한 손을 바지 안으로 집어 넣어 주물렀다. 팔에 걸리는 바지가 불편해서 아예 수민이의 바지 호크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수민이가 또 몸을 배배 꼬았지만 도리질하지는 않았다. 바지를 내리지는 않고 그 상태에서 팬티 위로 수민이의 엉덩이를 만지면서 한 손은 수민이의 가슴을 만졌다.
쓰다듬다가 주무르고, 문지르다가 살짝, 그러나 힘을 주어 쥐었다가... 한 손이 엉덩이를 그렇게 할 때, 다른 한 손은 가슴에서 똑같이 움직였다. 두 손에 힘이 좀더 가해질 때면, 내 혀를 빠는 수민이의 입에도 힘이 더 가해졌다. 내가 수민이의 엉덩이 골을 문지르자 손 끝에 후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수민이는 엉덩이에 힘을 주어 자극받고 있다는 걸 나에게 알렸다. 수민이는 결국 입술을 떼고 가쁜 호흡을 달랬다.
- 하아~... 그만요...
- ......
나는 대답하지 않고 수민이의 허리를 안으며 무릎을 굽혔다. 수민이와 키스를 멈춘 김에 가슴으로 입술을 옮겼다. 수민이의 브라는 이미 가슴보다 한참 위에 있었다. 입을 크게 벌려 수민이의 크고 탄탄한 가슴을 물었다.
- 하윽~
- 후움~ 쪼옵~
수민이가 신음하며 숨을 삼켰다. 두 손으로 수민이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가슴을 빨았다. 수민이는 내 머리를 안고 상체를 뒤로 젖힌 채 신음했다. 까치발을 하고 상체를 젖힌 불안한 자세였지만, 자세가 자세이니만큼 수민이의 사타구니는 자연스럽게 내 가슴에 밀어붙여지는 자세였다. 수민이의 가슴을 번갈아 빨면서 몸을 움직여 가슴과 배로 수민이의 사타구니를 자극하려 시도했다.
- 하아아... 아흐윽.. 하아...
수민이는 숨도 못 쉬고 소리죽여 신음했다. 내 머리를 안은 두 손은 정신없이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입에 다 들어오지 않는 수민이의 가슴을 핥고 빠는 건 정말 짜릿했지만 힘들기도 했다. 무릎을 굽힌 채 상체를 뒤로 젖힌 수민이가 거의 내 허벅지에 앉아 있는 셈어서, 얼마 가지 않아 다리가 뻐근해 왔다. 그때쯤 수민이가 내 불쌍한 다리를 구해 주었다.
- 하아아... 그만, 그만요...
나는 입술을 떼고 몸을 바로 세워 수민이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수민이는 내 가슴을 짚고 안긴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꼬옥 품어 안은 채 수민이에게 속삭였다.
- 수민이, 춥지?
- ......
수민이는 대답 없이 고개만 저었다. 다행히 날씨는 포근했지만, 아무리 포근하다 해도 시월 밤의 기온은 맨살에는 서늘했다. 수민이의 블라우스를 여며 주고 수민이의 바지를 추켜 올려 호크와 지퍼를 채워 주었다. 수민이는 착한 아기처럼 내가 하는 대로 내 손에 제 몸을 맡겼다.
그리고는 수민이를 안고 어깨부터 등, 허리, 엉덩이까지 오르내리며 쓰다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민이가 내 가슴에서 얼굴을 들며 물었다.
- 오빠...
뭘 묻는 것일까? 수민이의 눈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민이는 입에 힘을 주어 꼭 문 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수민이의 눈에 내 눈을 맞추면서 나는 수민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랐지만, 범하고 싶다는 욕정만 전해질까 봐 살짝 걱정이 되었다. 이내 눈을 내리깔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는 수민이를 꼬옥 안아 주었다.
- 하아~
- ......
다시 고개를 든 수민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결국 모텔로 가자는 건가? 수민이에게 이끌려 그 좁은 틈에서 나와 큰길로 가려는데, 서너 걸음도 가지 못해서 누가 불쑥 나타났다.
- 수민이 누나!
- 엄마야! 히잉~
- 헤헤...
나도 깜짝 놀랐다. 교복을 입은 학생 하나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내 부푼 바지 앞섶을 보지나 않았을까 생각하며 멀뚱멀뚱 서 있는데, 수민이가 인사를 시켰다. 뭐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 오빠, 아래층 사는 동생이예요. YY야, 인사해. 누나 회사 선배님이야.
- 안녕하세요?
- 네, 안녕하세요? 학교에서 이제 오나 봐요?
- 고3이거든요. 헤헤... 근데 누나, 어디 가?
- 선배님 배웅하러. 들어가. 잘 자~?
- 응, 누나 안녕~
음... 오늘은 진짜로 글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웃 동생을 들여보내고, 수민이와 전철역까지 걷는 동안 수민이를 힐끗거리며 한숨만 푸욱푸욱 쉬었다. 그럴 때마다 수민이가 깔깔대며 팔짱낀 내 팔을 툭툭 때렸다. 응큼쟁이~ 라고 속삭이면서.
그러나 그날 헤어지는 걸 더 아쉬워한 건 수민이였다. 전철 개찰구를 사이에 두고 손을 놓지 못하던 수민이는 한참 동안이나 내 손을 잡고 있다가 겨우 돌아갔다. 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하긴, 나도 수민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타는 곳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그렇게 그날, 수민이와 나는 키스하고 페팅하는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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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를 쓰면서 한번씩 소리내어 말해보곤 합니다.
말할 때 어색하면 바꿔야 되니까...
where do I begin to tell the story...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는 추억이 된 영화, ‘러브 스토리’의 주제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도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 * * * * * * * *
신입사원 연수 때, 나도 그 연수원에서 연수를 했었다. 입사 인원은 이백여 명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들어간 회차에 같이 교육받은 인원은 한 사오십 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2주 동안 같이 먹고 자며 같이 교육받은 동기들은 나중에도 많이 생각나곤 했었다. 동기모임을 만들자고 여러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지만, 겨우 한 번 모이고는 흐지부지 되었었다.
그 중, 서울 본사로 배치된 귀여운 여직원이 있었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스물한살이었다. 지수민이라는 그 아가씨는 컴퓨터를 얼마나 잘 다루었는지, 타자가 분당 몇백 타에 엑셀이며 파워포인트며 못하는 게 없었고, 입사 후에야 엑셀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던 나를 꽤나 놀려대곤 했었다.
연수원에서 분반토의 때 나와 같은 조에서 얼굴을 익힌 지수민씨는, 연수하던 2주 동안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해 주었고, 실무에 배치된 후에도 내가 컴퓨터 관련해서 뭔가 모르는 게 있을 때마다 생각이 났다. 물어볼 사람이라고는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선배밖에 없었는데, 선배는 컴퓨터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몰랐다. 결국 생각나는 사람이 수민씨였고, 수민씨에게 전화해야 했다.
처음엔 전화로 물어보기가 민망하고 미안했지만, 나중에는 당연한 듯, 아주 뻔뻔하게 물어보게 되었고, 내가 물어볼 때마다 수민씨는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었다.
- 절대주소, 상대주소... 이제 아시겠죠?
- 아, 나... 그걸 몰라서 참.
- 혼자 공부해서 알긴 어렵죠.
- 아, 고마웠어. 덕분에 해결했어.
- 그럼 맛있는 거 사주에요. 큭~
- 아, 사야지. 한번 아니라 열 번이라도 사야지.
나중엔 사기로 한 밥이 쌓이고 쌓여서, 한달 내내 밥 사야겠다고 농담할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로 만난 건 일년 동안 서너 번이 전부였다. 물론, 밥이 아니라 술을 먹었지만...
내 주변에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워낙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니까 미안하면서도 자꾸 묻게 되었다. 한번은 내가 엑셀 함수 관련해서 주말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한참을 전화로 설명해도 내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자, 황송하게도 직접 연수원까지 행차를 한 적도 있었다.
- 어... 그러면 내가 미안하잖아... 뭐, 그걸로 여기까지...
- 그럼 어떡해요. 보여줄 방법도 없고...
- 화면 캡처해서 메일로 보내면...
- 캡처? 캡처가 뭐예요?
- 아니다, 그것도...
그걸 다 설명하려면 화면을 수십 장은 캡처해야 했다. 화면을 보여줄 방법이 없었다. 영상통화라도 했다면 모를까, 그때까지는 영상통화라는 게 없었다. 영상통화가 되는 휴대폰이 나오기 얼마 전이었다. 지금이야 원격으로 다 처리할 수 있지만 그땐 컴퓨터도 잘 몰랐었다.
수민씨의 집은 수원에서 전철로 삼십분쯤 가야하는 K시였다. 근무하던 서울 본사에서 오는 것보다는 가까웠지만 그래도 일부러 온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 도움받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스럽고 미안한 일이었다.
전화를 끊고 수민씨가 연수원에 도착하기까지는 두어 시간이 걸렸지만, 수민씨가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은 채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 아, 이 함수는 좀 복잡하네... 시프트 누르고 엔터를 치면... 이렇게 되는구나...
- 복잡하긴요. 이건 복잡한 것도 아니예요. 셀에 프로그램을 짜 넣을 수도 있어요.
- 이 안에 프로그램을 넣는다고...? 우와... 허허...
- 뭐, 그러니까 엑셀이죠.
- 가르쳐 줘도 난 못 하겠다.
- 금방 되는 건 아니지만... 해 보세요. 재밌어요...
- 아이구, 머리 아파. 어쨌든, 또 신세졌네? 고마워서 어쩌지?
- 괜찮아요.
- 아니야, 내가 뭐 선물이라도 해 주고 싶은데...
- 선물은요, 무슨...
- 그래도, 이것 때문에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데...
- 아니예요. 자꾸 그러시면 다음에 물어보시기 불편해질 거 같애요.
- 그런가? 그래, 오늘은 찐하게 먹자. 저기 이스턴호텔 뷔페 맛있다던데...
- 뷔페요?
- 응, 끝내 준대. 나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 주말인데... 예약 안 하고 괜찮을까요?
- 가 보지 뭐...
나는 진짜로 시내 유명호텔 뷔페라도 사주고 싶을 정도로 고마웠다. 그러나 그날, 수민씨는 연수원에서 같이 나오다가 눈에 띈 식당의 밥집의 국밥이 먹고 싶다고 졸랐고, 연수원 아랫동네 식당에서 국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고 돌아갔다.
- 아, 맛있다... 맛있죠?
- 응... 맛있긴 한데... 이거, 이걸로 퉁치긴 미안한데...
- 맛있으면 됐죠, 뭐.
- 그래도...
서울과 수원은 그리 멀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가깝지도 않았다. 그렇게 이따금씩 통화하거나, 내가 서울 본사 근처에 가면 한번쯤 얼굴 보곤 했던 아가씨였는데, 내가 혜진이와 사귀게 되면서 거의 얼굴을 못 봤었다.
아, 혜진이와 친해지기 전에 수민씨가 연수원에 찾아와서 만난 적이 한번 있었다. 언젠가 참 쌀쌀했던 날, 수민씨가 전화를 했었다.
- 네...
- 저, 수민이예요...
- 응, 수민씨, 웬일이야? 휴대폰으로 전화를 다 하고...?
- 치... 토요일이니까 휴대폰으로 하죠.
- 나, 지금도 연수원이야.
- 왜요?
- 연수 있어서... 오늘 내일 여기서 자야 돼.
- 그렇구나...
- 그래, 왜?
- 아니... 그냥... 안 바쁘면 얼굴이나 볼까 해서요.
- 그래? 음... 그럼 잠깐 볼까?
- 연수 있다면서요?
- 낮에는 잠깐 나가도 돼.
전철역 부근에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시간에 나갔는데...
- 여기요, 받으세요...
- 이게 다 뭐야? 웬 꽃다발?
- 치이... 꽃다발 아닌데...
- 어라? 이거 뭐지?
그 꽃다발은 초콜렛을 꽃 모양으로 하나하나 포장한 거였다.
- 우와... 이게 다 뭐야?
- 아저씨, 설마...
- 설마, 뭐?
- 아저씨, 오늘 무슨 날인지 모르는 건 아니죠?
- 오늘...? 오늘이 거, 무슨 데이... 뭐 그거야?
- 아유, 아저씨~... 무슨 데이가 뭐예요, 무슨 데이가...
그날이 바로 발랑까진 날이었다. 초콜렛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런 상업적인 마케팅을 위해 일부러 특별한 날처럼 떠들며 어린 소녀들을 부추기는 행태를 싫어했지만, 다행히도, 거기서 수민이를 앞에 두고 그런 얘기를 할 정도로 모자라고 멍청한 놈은 아니었다.
- 아니야, 이거 예쁘다구...
- 아저씨 생각해서 일부러 샀단 말이예요.
- 예쁘네... 이런 건 어디 팔아?
- 예뻐요? 히힛~ 재료만 사서 내가 만든 거예요.
- 그래? 손재주도 좋네. 자, 먹어 봐.
수민이는 초콜렛을 입에 물고 한참을 녹여 먹었고, 나도 하나를 맛보았다.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술병 모양으로 만들어 안에 술을 넣은 초콜렛은 먹을 만했다.
- 음... 맛있네.
- 킥~
- 왜?
- 이제 아저씨가 들고 가야 되잖아.
- 들고 가야지. 근데 왜?
- 나, 전철 타고 오는 동안 얼마나 창피했는데... 다 나만 보는 것 같구...
- 음....
- 버스에서 너무 얼굴 빨개지지 마세요. 킥~
전철역까지 수민씨를 배웅한 후, 그걸 들고 버스를 타고 연수원까지 들어왔었다. 누가 보든지 말든지 신경쓰지 않으려 했지마 자꾸 주위를 돌아보게 되고, 얼굴도 빨개졌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전철을 타고 그걸 집까지 가져갈 생각은 없었다. 초콜렛은 사무실에서 누가 먹었는지, 녹아 버렸는지... 나도 모르게 어느새 다 사라졌다.
그때는 별 생각 없이 그냥 그런 날이라서 왔었나 보다 생각하고 말았었다. 덕분에 뭐 물어볼 때는 좀더 편하게 대해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만 했었다.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던, 바보 같았던 때였다. 여자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물론, 생각조차 없던 때였다.
그 이후에도 모르는 걸 물어보면서 통화는 자주 했지만 통화 뿐, 수민이를 다시 본 건 혜진이와 헤어지고 몇 달이 지났을 때였다. 가을이라지만 낮에는 덥던 9월이었다.
- 연수부 한정웁니다.
- 저, 수민이예요.
- 수민이? 우와... 되게 오랜만이다. 그지?
- 치, 오빠가 오랜만이죠.
- 그런가? 후후...
둘이서 오랜만에 통화하는데 그게 어느 한 사람만 오랜만일 수가 있나? 어떻게 들으면 참 우스운 소리였다. 수민이는 처음엔 꼬박꼬박 한정우씨라고 불렀지만 나중엔 아저씨라고 부르다가, 같이 술 몇 번 먹고 나더니 정우오빠라고 불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점점 친해져서 그렇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 요즘은 어려운 거 없어요?
- 아우, 아직도 하나도 모르지, 뭐...
- 헤헤... 지금 어디예요?
- 으잉? 수민이, 어디에 전화 했지?
- 아, 맞다... 힝~ 나, 바본가 봐.
- 바보... 크크크...
- 치이~ 퇴근 안 하세요?
- 아, 오늘도 연수.
- 우와~ 좋겠다.
- 좋긴 뭐가 좋아? 훗~
- 연수원 좋잖아요. 흐으응... 나, 지금 연수원 가도 돼요?
- 지금?
- 응. 지금...
- 멀잖아. 벌써 저녁 다 됐고...
- 치, 도와달라고 부를 때는 안 멀었나, 뭐?
- 하하, 그런가? 그래, 오면 내가 다방커피 한잔 준다...
수민이는 그 저녁에 진짜 놀러 왔다. 택시비가 꽤 나왔을 텐데... 내가 연수원에서 잔다는 말에 연수원에서 교육받던 게 생각나서 밥도 안 먹고 뛰어왔다나 뭐라나... 그때까지만 해도 이 아가씨가 진짜 예전 생각이 나서 놀러 오는가보다...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 수민아, 여기...
- 아, 오빠. 안녕하세요?
버스 터미널로 마중나가 데리고 들어와서, 저녁식사 시간이 지났지만 식당 아주머니께 부탁해서 간단히 밥을 먹였다. 수민이는 퍽퍽한 연수원 밥도 맛있게 잘 먹었다.
- 커피?
- 오빠는요?
- 난 커피 안 좋아해서...
- 그럼 나도 딴 거 주세요.
- 녹차 있고, 둥굴레차 있어.
- 둥굴레차요.
- 네에, 둥굴레차...
구수한 둥글레차를 한 잔씩 들고 사무실 소파에 마주앉았다.
- 후루룩...
- 아, 따뜻해.
- 흠... 어디 보자... 전보다 예뻐진 건가...?
- 원래 예뻤어요.
- 헐~
- 킥킥...
- 시집갈 때가 됐나?
- 아이, 뭐야...? 오빠나 장가 가요. 나이는 잔뜩 먹구...
- 내가 나이 먹는데 수민이가 보태준 거 있어?
- 피이...
- 말 나온 김에, 주변에 예쁜 언니 있으면 소개 좀 해 줘.
- 킥~...
수민이는 어색하게 킥킥대고는 갑자기 말이 없었다. 난 그때까지도 아무 눈치 없이 멍청하게 굴었었다. 수민이는 한참 동안 컵만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 어떤 사람 좋아해요?
- 응? 뭐, 치마만 걸치면 돼.
- 치마요? 깔깔깔...
- 재밌어? 크크크...
- 그렇게 궁해요? 치마면 돼요?
- 치마입은 남자는 말구.
- 킥~
그러면서 수민이가 긴 머리를 쓸어 넘겼는데, 머리카락 밑으로 드러나는 목선이 희고 예뻤다. 시답잖은 얘기를 하다가 수민이는 바람 쐬러 나가자며 연수원 운동장으로 나를 끌고 나갔다.
연수원 잔디밭에서 보는 밤하늘은 꽤 괜찮았었다. 수도권 치고는 그나마 시골이라 하늘도 맑은 편이었고, 그때 마침 달도 없고 별만 반짝이던 하늘은 더욱 더 새까맣게 맑아 보였다.
- 오빠는 좋겠다. 이런 거 맨날 보구.
- 좋기는...
- 나도 이런 데서 일했으면... 흐응~
화장품인지 향수인지는 몰라도, 업소에서 짙은 화장을 한 여자들의 냄새는 거부감이 먼저 들었는데 그때 수민이에게서 나는 옅은 향기는 꽤 좋은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가까이 신체 일부를 접촉하고 수민이의 향기를 맡고 있으니, 놀러 오라고 할 때까지만 해도 그냥 어린 동생으로만 생각했었던 수민이가 여자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
수민이는 고개를 젖힌 채 밤하늘을 구경하는 자세 그대로 뒤에 있는 나에게 기댔다. 자연스럽게 나는 수민이 어깨에 손을 얹고 뒤에서 수민이를 버티어 주었다. 수민이는 내 손길이 닿자, 불편하다는 반응 대신 아예 나에게 체중을 완전히 기대며 아예 안겨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진짜, 진짜진짜 수민이에게 아무 욕심을 내지 않았었다.
그렇게 수민이는 내 품에서 말없이 한참 동안 밤하늘을 바라보았고, 나는 수민이의 머릿결에 뺨을 댄 채, 수민이에게서 나는 향기에 취해 있었다. 그러다가 수민이의 볼에 내 볼을 댔다. 그러려면 수민이를 좀더 당겨 안아야 했다.
그렇게 수민이의 어깨를 당겨 안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볼에 살짝 입맞추었다. 어떤 욕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그냥 품에 안고 향기를 맡다가 무심결에 한 행동이었다. 내가 해 놓고는 내가 살짝 당황했을 정도로.
수민이가 화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수민이는 가만히 있었고, 나도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민망하지는 않았다. 나는 수민이가 거부하지 않는구나 안심하면서 또 수민이 머리에 볼을 대고 눈을 감은 채 향기만 맡고 있었다. 잠시 후, 수민이가 꼼지락거리며 몸을 떼었다.
- 오빠, 춥지 않아요?
- 응? 그럼... 들어 갈까?
- 네...
- ......
- 응큼쟁이... 칫~
수민이는 걸음을 옮기며 내 팔을 살짝 때렸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무실로 들어올 때, 수민이는 내 손을 잡고 걸었다.
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밤 늦게, 연수원에서 가까운 시내버스 정류장이 아니라 한참을 가야 하는 전철역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수민이의 크고 맑은 눈이 자꾸 생각났다.
그 이후로 수민이는 전보다 훨씬 자주 전화를 했다. 내가 먼저 전화하는 날도 있었다. 내가 전화하면 수민이는 아주아주 좋아했다. 좋아한다거나 보고 싶다고 말은 서로 하지 않았어도, 수민이나 나나 전보다는 개인적인 얘기를 많이 했다.
퇴근하면서 심심하다고 전화도 하고, 밥 먹었느냐고 문자도 보내고... 그러면서도 한 달도 훨씬 더 지나서, 시월 마지막날 금요일 저녁에 수민이와 나는 다시 만났다.
종로 몇 가였나... 큰길에서 좀 안쪽으로 들어간 골목의 무지 큰 분식집에서 수민이와 저녁을 먹었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그 잠깐 사이에 수민이는 예쁘게 포장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 오빠? 선물...
- 어? 웬 선물? 생일도 아닌데...
- 생일에만 선물하나요, 뭐?
- 어... 난 준비를 못했는데.
- 아니예요... 내가 말도 안 했는데, 뭐.
- 이거, 참... 고맙다고 하기도 미안하네.
- 오빠, 로션도 잘 안 바르죠?
- 응?... 뭐, 그냥...
- 이건 아침저녁으로 매일 발라요. 알았죠? 담에 만날 때 얼마나 썼는지 검사할 거예요.
- 그래. 그럴게.
- 자, 약속.
- 응? 응.
- 도장도 꼬옥~ 헤헤, 약속했다, 오빠?
- 그래... 후후~
모 수입 브랜드의 스킨과 로션이었다. 화장품 브랜드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그냥 포장이 고급스러웠다는 기억 뿐. 세수하고 나서 뭘 발라 본 적이 없었다. 직장생활 시작하면서 세트로 사기는 했었지만 며칠이나 발랐을까, 영 익숙해지지 않는 일 중에 하나였다. 그래도 꼭 바르겠다고 착하게 대답을 하고, 손가락 걸어 약속까지 했다.
- 아, 맛있다.
- 그랬어? 다행이네.
- 배불러... 킥~
- 어? 맥주 한 잔 더 하려고 했는데...?
- 오빤 배 안 불러요?
- 뭐, 맥주 배는 따로 있으니까. 크크...
- 치이...
- 참, 수민아.
- 네?
- 나도... 선물 하나 하고 싶은데...
- 아니예요. 그러지 않아도 돼요.
- 그래도, 맨날 도움만 받고 선물도 받고... 나도 뭐 하나 사주고 싶어.
- ......
수민이는 사양하다가 잠시 고민하고는 새 다이어리를 말했다. 다이어리를 선물한다는 게 왠지 꺼려졌지만, 대형서점에서 다이어리를 고르며, 이거 예쁘다, 저거 예쁘다 하면서 아이처럼 우와 우와 감탄사를 연발하는 수민이를 보고는, 다이어리 아니라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사주고 싶었다.
그렇게 선물을 사고 나서 호프를 마시러 갔는데 웬일인지 거의 모든 술집에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 우와... 술집들 대박 나는구나, 그냥...
- 오빠, 그냥 갈까요?
- 아니야, 어딘가는 자리가 있겠지.
- 다 꽉꽉 찬 거 같아요.
- 오늘, 무슨 날인가...? 무슨 날이지?
- 그러게요...
- 조금만 더 다녀 보자. 응?
- 그래요, 그럼...
마침 자리가 있는 어느 호프집에 들어가서 복층식으로 된 이층에 자리를 잡았다. 거품이 풍성한 맥주를 한잔씩 따르고 건배를 하는데 웃으며 마주 보는 수민이가 갑자기 무지무지 예뻐 보였다. 짙은 눈썹과 큰 눈, 오똑한 코, 도톰한 빨간 입술... 맥주로 목을 축이면서도 수민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수민이에게 빠져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첫잔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면서, 수민이의 볼에 손을 대고 살짝 끌어당겨 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그렇게 살짝 키스하고 입술을 떼었는데, 수민이의 얼굴은 그 위치 그대로 있었고, 눈도 감은 채였다. 화난 건 아닐까 가슴이 철렁했는데, 수민이가 감았던 눈을 게슴츠레 뜨며 속삭였다.
- 또... 해줘요...
수민이의 살짝 벌어진 입과 게슴츠레한 눈... 뭔가에 홀린 듯,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다시 손을 내밀어 수민이의 턱을 잡고 다가갔다. 수민이의 입술과 내 입술이 닿자 이번엔 수민이가 먼저 살짝 빨아들였다. 입술을 내주고, 혀를 내주고... 엉덩이를 의자에 겨우 붙인 채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누는 키스...
주변에서 보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부드럽게 빠는 데에만 집중했다. 한참 동안을 그러고 나서 입술을 떼고 자리에 앉았는데, 그제서야 주변을 생각하며 피식피식 웃었다. 수민이도 소리죽여 웃으면서 쑥스럽다는 듯 혀를 살짝 깨물며 주변 눈치를 살폈다.
- 수민아....
- 네?
수민이가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한참을 그렇게 쳐다보다가 눈이 아파서 더 마주보지 못하고, 수민이를 당겨 이마에 입맞추었다.
- 쪽~ 괜찮았어?
- ......
- 응? 싫었어?
- ......
수민이는 입술을 힘주어 오므린 채 이번에는 고개만 저었다. 도리도리... 싫었으면 또 해달라고 할 리가 없었겠지. 그래도 재차 물어봤다. 대답하기 곤란해하면 할수록 짓궂게 더 확인하고 싶었다.
- 말해 봐... 어땠어?
- 아이... 몰라요~...
- 난 좋았는데.
- 나두...
- 응?
- 아니예요.
그쯤이면 됐고, 더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수민이가 바라보면 눈을 맞추어 주었고, 그러면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수민이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바라보면 나도 팔짱낀 팔을 탁자에 얹고 마주보았고, 수민이가 잔을 만지작거리면 잔을 들어 건배했다. 수민이는 호프집에서 나올 때까지 한 잔을 가지고 홀짝거렸고, 나머지 피처를 나 혼자 다 마셨다.
먹으면서 계속 마주보고 웃었다. 키스한 생각이 자꾸 났고, 수민이도 그래서 웃었던 거였다. 아니, 좋아서 웃었다고 하는 게 솔직한 말이겠다. 어쩌면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었는지... 그때는 술집에서 키스한 것만으로도 참 대담하고 뻔뻔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는 더한 짓도 했지만...
그날 먹은 맥주는 진짜 맛있었다. 그렇게 맛있는 맥주를 아쉽지만 다 마시고 나오면서 나는 모텔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 뭘 그렇게 찾아요?
- 응? 편하게 키스할 만한 데 어디 없나...
- 아유~, 진짜 응큼쟁이... 안 돼요. 오늘은 그만.
안돼? 뭐, 안 된다면 할 수 없지만... 오늘은 안 된다니 그럼 다음에는 된다는 건가?
- 잠깐도 안돼?
- 지금 몇 신데요...? 집에 가야지...
수민이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끝을 흐렸다. 시간? 아홉시 반... 밖에 안 되었었다. 아랫도리가 텐트를 치고 쿠퍼액이 팬티를 적시고 있는데 시간이 문젠가?
그런데, 그날 그 근처 술집과 모텔이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텔에도 빈 방이 없었다. 사람들이 술 먹고 섹스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날인지... 모텔도 몇 군데 더 가 보자고 수민이에게 말하기는 왠지 민망했다. 어쩔 수 없이 모텔을 포기하고 전철로 수민이네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수민이는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시는 나를 달래기도 하고, 놀리기도 했지만 전철을 타고 가는 내내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 다리 안 아파?
- 괜찮아요. 맨날 서서 다니는데 뭐...
- 맨날?
- 서서 가는 건 괜찮아요. 늦어서 걱정이지.
- 열시도 안 됐는데, 뭐.
- 그래도, 집에 가면 열한시 넘어요.
- 왜? 부모님 걱정하셔?
- 그럼요. 늦으면 혼나요.
- 아이구, 다 큰 아가씨를...
- 오빤, 내가 늦게 다니는 거 걱정 안 돼요?
수민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도 힐끔거리지도 않았다. 귀는 기울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수민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뾰로통해졌다.
- 걱정 되지.
- 걱정된다면서 그렇게 말해요?
- 수민이 혼자 늦게 다니는 게 걱정이지, 나랑 같이 있는데 뭐...
- 킥~
- 왜?
- 그냥요... 오빠 말이 그냥 웃겨... 킥...
- 크크크...
나도 그랬다. 우스운 말도 아니었는데, 웃음이 났다. 나랑 같이 있어도, 아니, 누구랑 있어도 부모님은 걱정을 하실 텐데, 나는 내 생각만 하고 있었다.
수민이네 집은 전철역에서 좀 걸어야 하는 빌라촌에 있었다. 수민이네 집 앞에서 우리는 또 한참 키스를 나누었다. 정문 앞에서 가볍게 뽀뽀만 하고 들여보낼 생각이었는데, 그늘진 벽 아래 어둠 속에서 뽀뽀하다 보니 입술을 빨게 되고, 입술을 빨다 보니 혀가 오가게 되었다.
한참 그렇게 맛있게 키스를 하다가 수민이를 좀더 어두운 건물 뒤쪽으로 잡아끌었다. 수민이는 안된다는 뜻으로 눈을 크게 뜨고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 오빠... 나, 집 앞이예요...
- 잠깐만...
- 여기서 더 어쩌려고요... 그만, 응?
- 잠깐만, 응? 이리 와 봐.
- ......
조금이라도 더, 일분이라도 더 수민이를 안고 싶었다. 말을 얼버무리며 수민이를 잡아끌었다. 옆집과 구분해 놓은 주차장을 지나 그 집과 뒷집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두 집을 나누는 담장이 있고, 두 사람 지나쳐 가기도 힘들 만한 좁은 공간...
그 가장 구석진 벽에 기대 서서 나는 수민이를 끌어안았다. 수민이도 더 이상 거부하지 않고 안겨 와서 자기가 먼저 입술을 찾았다. 그렇게 얼마간 서로 빨아대다 보니 흥분해서 수민이의 블라우스를 들추고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속살에 내 손길이 닿자 수민이가 몸을 웅크렸다.
- 하암... 으으으음~
- 쫍~ 수민아, 조금만...
- 하아~ 오빠...
수민이는 도리질치며 거부했지만 내가 애원하자 다시 내 목을 껴안고 매달렸다. 수민이가 내 목을 끌어안고 있어서 나는 키스하면서도 자유롭게 수민이를 만질 수 있었다.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등허리와 옆구리를 쓰다듬다가 손을 앞으로 돌려 브라를 젖히고 가슴을 만졌다. 우와...
키스하다가 눈을 번쩍 떴을 정도로 놀랐다. 옷 위로는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았던 수민이의 가슴은 마치 포탄 같았다. 말 그대로 반구형의, 내 한 손에 다 안 들어오는 큰 가슴은 내가 마구 주물러도 모양이 크게 변하지 않을 정도로 탄탄했다. 한 손으로 번갈아 만지다가 아예 두 손을 넣어 양쪽을 동시에 주물렀다. 수민이는 옷 앞섶이 완전히 흐트러질 정도가 되었다.
수민이가 입술을 빨아대면서 몸을 움찔거리고 다리를 배배 꼬았다. 한 손을 내려 수민이의 엉덩이로 손을 옮겼다. 엉덩이도 가슴만큼 탱탱했다. 수민이는 아주 날씬하지는 않고, 통통하게 살이 있는 편이기는 했어도 가슴이며 엉덩이가 그렇게 탱탱할 거라고는 만져보기 전엔 생각하지 못했었다. 수민이는 살짝 도리질쳤지만 그러면서도 입술은 떼지 않고 빨아대었다.
엉덩이를 만지다가 한 손을 바지 안으로 집어 넣어 주물렀다. 팔에 걸리는 바지가 불편해서 아예 수민이의 바지 호크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수민이가 또 몸을 배배 꼬았지만 도리질하지는 않았다. 바지를 내리지는 않고 그 상태에서 팬티 위로 수민이의 엉덩이를 만지면서 한 손은 수민이의 가슴을 만졌다.
쓰다듬다가 주무르고, 문지르다가 살짝, 그러나 힘을 주어 쥐었다가... 한 손이 엉덩이를 그렇게 할 때, 다른 한 손은 가슴에서 똑같이 움직였다. 두 손에 힘이 좀더 가해질 때면, 내 혀를 빠는 수민이의 입에도 힘이 더 가해졌다. 내가 수민이의 엉덩이 골을 문지르자 손 끝에 후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수민이는 엉덩이에 힘을 주어 자극받고 있다는 걸 나에게 알렸다. 수민이는 결국 입술을 떼고 가쁜 호흡을 달랬다.
- 하아~... 그만요...
- ......
나는 대답하지 않고 수민이의 허리를 안으며 무릎을 굽혔다. 수민이와 키스를 멈춘 김에 가슴으로 입술을 옮겼다. 수민이의 브라는 이미 가슴보다 한참 위에 있었다. 입을 크게 벌려 수민이의 크고 탄탄한 가슴을 물었다.
- 하윽~
- 후움~ 쪼옵~
수민이가 신음하며 숨을 삼켰다. 두 손으로 수민이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가슴을 빨았다. 수민이는 내 머리를 안고 상체를 뒤로 젖힌 채 신음했다. 까치발을 하고 상체를 젖힌 불안한 자세였지만, 자세가 자세이니만큼 수민이의 사타구니는 자연스럽게 내 가슴에 밀어붙여지는 자세였다. 수민이의 가슴을 번갈아 빨면서 몸을 움직여 가슴과 배로 수민이의 사타구니를 자극하려 시도했다.
- 하아아... 아흐윽.. 하아...
수민이는 숨도 못 쉬고 소리죽여 신음했다. 내 머리를 안은 두 손은 정신없이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입에 다 들어오지 않는 수민이의 가슴을 핥고 빠는 건 정말 짜릿했지만 힘들기도 했다. 무릎을 굽힌 채 상체를 뒤로 젖힌 수민이가 거의 내 허벅지에 앉아 있는 셈어서, 얼마 가지 않아 다리가 뻐근해 왔다. 그때쯤 수민이가 내 불쌍한 다리를 구해 주었다.
- 하아아... 그만, 그만요...
나는 입술을 떼고 몸을 바로 세워 수민이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수민이는 내 가슴을 짚고 안긴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꼬옥 품어 안은 채 수민이에게 속삭였다.
- 수민이, 춥지?
- ......
수민이는 대답 없이 고개만 저었다. 다행히 날씨는 포근했지만, 아무리 포근하다 해도 시월 밤의 기온은 맨살에는 서늘했다. 수민이의 블라우스를 여며 주고 수민이의 바지를 추켜 올려 호크와 지퍼를 채워 주었다. 수민이는 착한 아기처럼 내가 하는 대로 내 손에 제 몸을 맡겼다.
그리고는 수민이를 안고 어깨부터 등, 허리, 엉덩이까지 오르내리며 쓰다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민이가 내 가슴에서 얼굴을 들며 물었다.
- 오빠...
뭘 묻는 것일까? 수민이의 눈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민이는 입에 힘을 주어 꼭 문 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수민이의 눈에 내 눈을 맞추면서 나는 수민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랐지만, 범하고 싶다는 욕정만 전해질까 봐 살짝 걱정이 되었다. 이내 눈을 내리깔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는 수민이를 꼬옥 안아 주었다.
- 하아~
- ......
다시 고개를 든 수민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결국 모텔로 가자는 건가? 수민이에게 이끌려 그 좁은 틈에서 나와 큰길로 가려는데, 서너 걸음도 가지 못해서 누가 불쑥 나타났다.
- 수민이 누나!
- 엄마야! 히잉~
- 헤헤...
나도 깜짝 놀랐다. 교복을 입은 학생 하나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내 부푼 바지 앞섶을 보지나 않았을까 생각하며 멀뚱멀뚱 서 있는데, 수민이가 인사를 시켰다. 뭐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 오빠, 아래층 사는 동생이예요. YY야, 인사해. 누나 회사 선배님이야.
- 안녕하세요?
- 네, 안녕하세요? 학교에서 이제 오나 봐요?
- 고3이거든요. 헤헤... 근데 누나, 어디 가?
- 선배님 배웅하러. 들어가. 잘 자~?
- 응, 누나 안녕~
음... 오늘은 진짜로 글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웃 동생을 들여보내고, 수민이와 전철역까지 걷는 동안 수민이를 힐끗거리며 한숨만 푸욱푸욱 쉬었다. 그럴 때마다 수민이가 깔깔대며 팔짱낀 내 팔을 툭툭 때렸다. 응큼쟁이~ 라고 속삭이면서.
그러나 그날 헤어지는 걸 더 아쉬워한 건 수민이였다. 전철 개찰구를 사이에 두고 손을 놓지 못하던 수민이는 한참 동안이나 내 손을 잡고 있다가 겨우 돌아갔다. 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하긴, 나도 수민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타는 곳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그렇게 그날, 수민이와 나는 키스하고 페팅하는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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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를 쓰면서 한번씩 소리내어 말해보곤 합니다.
말할 때 어색하면 바꿔야 되니까...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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