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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7:39 1,338회 0건
기억에 남은 여인들 - 달맞이꽃 3장



여자을 한번 안는 걸 골 넣는다고 표현하는 얘기가 있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느냐는 얘기, 남자분들은 한번쯤은 들어 보셨을 거다. 사랑 없는 섹스에 대해서 그것보다 정확한 표현은 없다고 생각한다. 홈런 쳤다느니, 골을 넣었다느니...

골이라... 공격수는 골을 넣는 게 목적이지 그 골대를 지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또, 골 한번 넣었다고 그 골문를 평생 지키는 공격수는 세상에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공격수는 골을 넣고 나면 또 추가골을 노릴 뿐이다. 또, 공격수가 반드시 그 골문에만 골을 또 넣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골을 넣으면 또 넣으려 노력하지만 더 넣으면 좋고, 못 넣어도 그만이다. 다른 대회, 다른 경기, 다른 경기장, 다른 골대... 언제 어디든 기회는 많다.

알고 나서 살짝 놀랐던 사실이지만, 자책골도 그 선수의 골로 인정된다. 아군(?)의 골대에도 넣을 수 있으면 넣는 게 공격수고, 골키퍼 없는 골대라면 더욱 더 넣으려고 달려드는 게 공격수다. 게다가 다른 공격수들과 협조해서 공격하기도 한다. 미드필더나 수비수도 틈만 나면 골을 노린다. 수비를 안 하는 공격수는 있어도 골 넣을 기회를 외면하는 수비수는 없다. 심지어는 골키퍼도 골문을 버리고 나와 다른 골문을 공격하기도 한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고 공격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클럽이나 술집, 휴가철 해수욕장은 좀더 골을 노리기 쉬운 세트플레이 상황이다. 그런 곳처럼 한밤중에도 불을 밝힌 왁자지껄한 경기장(?)에서도, 조용하고 아늑한 자취방 경기장에서도, 그들은 항상 골을 노린다. 그 순간의 한 골, 그저 넣는 것만 노릴 뿐이다. 하룻밤에 한 골, 한 경기당 한 골을 넣는 대단한 공격수도 꽤 있을 거다.

나는 그 당시만 해도 공격수가 아니었다. 한 순간의 골을 위해 기를 쓰는, 소위 말하는 "선수"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나중엔 통산 골 수를 세지 못할 정도로 슈팅을 남발하고 다니던 흔하디 흔한 공격수가 되었지만...

그래도 오해는 마시기 바란다. 공격수들이 가장 골을 많이 넣는 골대는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홈그라운드다. 나도 결혼 후에 다른 골대를 노리는 시도를... 음.. 안 한 건 아니고, 좀 줄였다. 많이 줄였다. -.-;;

......

그렇게 첫경험을 한 후, 수민이는 나에게 더욱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었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섹스를 한 여자는 그 이후에 더 사랑스러워 보인다. 섹스하기 전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다. 첫 섹스 이후에 더 사랑스럽지 않다면 그건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위에서 골과 공격수 얘기를 한 거다.

나랑 섹스한 여자들은 다 그랬다. 섹스하고 나면 마치 목적을 달성한 듯 돌변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런 경우는 겪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나와 사귄 여자들은 섹스하고 나서 더욱 사랑스러워 보였고, 여자들도 섹스하기 전보다 더욱 살갑게 굴었다. 다행히 내가 사귀었던 여자들 대부분이 그랬다.

수민이를 생각하면 웃음이 났고, 하루 종일 뭘 해도 힘들지 않았다. 매일 밤 수민이를 생각하다 잠들곤 했지만,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주말에만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수원 원룸에서 화성으로, 수민이는 K시의 집에서 서울로 출퇴근했었다.

내가 정상적으로 퇴근하면 K시 전철역 근처에서 잠깐 만날 수 있었지만, 하필이면 그때 연수가 몰려서, 정상적으로 퇴근하는 날이 드물었고, 수민이가 나를 만나려면 퇴근길에 두 시간 이상 전철과 버스를 갈아 타고 와서 잠깐 보고 집까지 또 한시간 정도를 돌아가야 했다. 수민이는 그래도 나를 보러 오고 싶어 했지만, 나는 길에서 그렇게 시간을 버리는 게 싫었다.

- 난 그래도 오빠 보고 싶은데...
- 주말에 보면 되지...
- 오늘도 보고 주말에도 또 보면 되잖아요... 오빤 나 안 보고 싶어요?
- 보고 싶지, 왜 안 보고 싶겠어..
- 그러니까 간다구요... 히잉~
- 너무 멀잖아... 왜 길에다 시간을 버려...
- 그래도... 네...?
- 그럴 시간 있으면 차라리 잠을 좀더 자고, 주말에 많이많이 보자. 응?
- 치~ 오빠, 나 안 사랑해요?
- 하, 이런 바보 아가씨...

수민이는 계속 투정했지만, 학생 가르치듯 한참을 타이르면 아쉬워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더 수민이를 보고 싶어 했다. 잠깐이라도 오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굴뚝 같았고, 내가 먼저 달려가고 싶기도 했지만, 잠깐 보고 헤어지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수민이는 시간 아까운 것보다 나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고 했고,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작아서라고 투정하기도 했다. 허허, 참...

수민이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난 다음 주말, 보고 싶다고 그렇게 투정하던 수민이를 한 주만에 만났는데 얼굴이 창백하고 핼쓱했다. 찌푸린 얼굴을 좀처럼 펴지 못하고 아파했다. 그리고 자꾸 몸을 수그리며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밥도 먹지 못하고, 차도 마시지 못하고, 만나자마자 내 원룸으로 데려와 침대에 눕혔다. 그저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다.

- 아픈데 왜 나왔어...? 그냥 집에 누워 있지...
- 아후... 오늘은 야한 짓 하려고 하면 안돼요. 알았죠?
- 아픈 사람한테 욕심 부릴만큼 짐승 아니야... 많이 아파?
- 아... 말도 못 해요.
- 그래? 어디가 아픈 건데...?
- 저... 그게...
- ......?

수민이가 눈치를 보면서 대답을 못 하자 겁이 덜컥 났다. 아무 생각도 없이 수민이의 몸 안에 그냥 사정한 게 생각나서였다. 핼쓱한 얼굴, 아파하던 수민이... 혹시? 내가 생각한 단어는 임신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별의 별 생각이 다 났다.

- 나, 그거 할 때마다 이렇게 아파요.
- 그거?
- 아이, 여자들 매달 하는 거...
- 아... 미안, 몰랐어.
- 킥~ 오빠가 왜 미안해...?

그러나 수민이 입에서 나온 단어로 내가 미루어 짐작한 건 생리통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도 모르게 웃었다.

- 그랬구나... 후우~ 후후...
- 오빠...?
- 응?
- 오빤... 사람이 아프다는데 웃음이 나요?
- 어... 수민아, 그게 아니고...

수민이는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야속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오뉴월에도 서리를 부르는, 한 서린 여자의 표정이 어떤 건지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본 적이 있다. 그날 분명히 봤다. 수민이에게 한을 심어줄 수는 없어서, 사실 그대로 자백했다. 그 전 주에 수민이 몸 안에 사정한 게 자꾸 신경쓰였는데, 수민이 안색과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 임신을 생각했었다고.

- 오빠가... 그냥 수민이 몸 안에 뿜어 버렸잖아...?
- ......
- 너무 흥분해서 조심할 생각도 못하고 그랬어.
- ......
- 그래서 걱정했었어. 혹시 임신하면 어떡하나...
- 그걸... 걱정했다구요?
- 응... 그런데 수민이가 생리통이라고 하니까...
- 그래서, 안심했어요?
- 안심은 아니고... 뭐랄까... 긴장이 확 풀려서...
- 그랬던... 거예요?

안심이라는 말보다 긴장이 풀렸다는 말을 선택한 건 참 잘한 일이었다. 걱정했느냐고 물을 때까지도 화난 표정이었고, 안심했느냐고 물을 때에도 굳어 있던 수민이 표정이 내 대답을 듣고 나서부터 풀렸으니까. 수민이의 손을 잡고 한번 더 사과했다.

- 잘못했어... 미안해.
- ......
- 그... 많이 아파...?
- 오빤 아무리 말해도 몰라요...
- 그래...? 그렇구나...
- 그... 밑이 빠지는 듯하다는 말 들어 봤어요?
- 하~... 그 정도야?
-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 느낌... 아, 말로 표현이 안 돼...
- 그래? 무지 아픈 거구나... 내가 배 쓸어 줄까?
- 뭐예요...? 나 이렇게 아픈데도 만지구 싶어요? 오빠 정말 나쁘다... 씨이~
- 아~니야, 그런 거... 배 아플 땐 원래 약손으로 쓸어줘야 낫는 거야.
- 오빠 손이 뭐, 엄마 손이예요?
- 아빠 하면 되지... 아빠 손도 약손...
- 킥~
- 화... 풀렸어?
- 으으으응~ (도리도리)
- ??
- 배 한번 쓸어 줘 봐요. 화가 풀리나, 안 풀리나..

배꼽 위에 두 손을 얹고 누운 수민이의 바지 단추와 지퍼를 풀고 팬티도 좀 내렸다. 웃옷은 그 다음에야 살짝 걷어올렸다.

- 아이, 뭐예요? 배 쓸어준다더니...
- 아랫배 아프다며? 아픈 데를 쓸어 줘야지...
- 아이, 차암...

수민이는 투정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 끌어내린 팬티라인 위로 음모를 살짝 드러낸 수민이의 매끈한 아랫배를 쓰다듬으면서도 아랫도리는 주책없이 불끈거리지 않았다. 진짜로 성적인 욕심은 눈꼽만큼도 없이, 그저 수민이가 아프지 않기만 바라면서 쓸어 주었다.

- 이렇게 아프면서... 집에서 쉬지 왜 나와서...
- 치, 나 안 보고 싶었구나? 난 보고 싶어서 왔는데...
- 나도 수민이 보고 싶었지, 그래도 이렇게 아픈데...
- 나올 땐 안 아팠는데, 이게 원래 갑자기 이래요.
- 그래...?
- 오늘쯤 시작할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하고 나오긴 했는데...
- 준비?
- 아잇, 몰라도 돼요. 그만 물어봐요.

월경이라는 게, 여자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남자에게 말하기는 좀 부끄러운 얘기였던 모양이다. 준비한다는 게 위생용품을 챙기는 거겠지... 라고 생각만 했다.

내 손은 약손이 아니라서였는지 별 효과가 없었고, 스팀타월로 배를 따뜻하게 덮어준 게 그나마 효과가 좀 있었다. 전자레인지에 있던 스팀타월 메뉴 버튼을 처음 써 봤었다.

- 아, 따뜻하니까 좀 괜찮은 거 같아요.
- 그래? 다행이다... 뜨겁진 않고?
- 첨엔 좀 뜨거웠는데, 하다 보니까 따뜻해서 좋아요.
- 좋아? 후후...
- 오빠.
- 응?
- 귀 좀...
- 그냥 말해. 아무도 없는데...
- 아이, 귀 좀 줘 봐요.
- 응?......
- 쪽~ 덜 아프게 해 준 상이예요. 헤헷~
- 오... 좋은데...? 이거 계속 해야 되겠네...

수민이는 귓속말하는 대신 내 볼에 뽀뽀했다. 다행히도 아픈 게 좀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수민이는 하루종일 내 침대에 누워서 대화하다가 돌아갔다. 나는 수건을 갈아대며 착하게 굴어서 푸짐하고 큼직한 상을 계속 받았다.

볼에 입맞추는 것만으로도 젊은 남자의 신체 중심부는 불끈 치솟았다. 수민이의 입맞춤. 첫 키스를 나에게 준 여인의 부드러운 입술... 게다가 여인의 풍만하고 탄탄한 가슴이 바로 손 앞에 있었지만 욕심을 낼 수는 없었다. 짐승이 아니라고 수민이에게 말해 놨으면서 짐승에다가 거짓말장이까지 될 수는 없었다.

......

평일엔 저녁마다 통화하고, 주말이면 만나서 데이트하고, 그리고 가끔 뜨겁게 섹스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업무시간에도 멍하니 수민이를 생각할 정도였고, 금요일이면 다음날 만난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서 일손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수민이와 섹스만 한 건 아니지만, 야설이랍시고 쓰다 보니 그런 기억 위주로 쓰게 된다.

첫 키스를 한 날부터 수민이에게 헤비페팅까지 했던 나는, 섹스까지 하고 나서는 틈만 나면 수민이를 어루만졌다. 둘만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키스하게 되었고, 이마나 볼에 가볍게 입맞추는 건 사람들이 있어도 상관하지 않고 했다. 수민이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내 팔을 잡아끌고 그 자리를 벗어나곤 했지만, 나중엔 내가 입맞추어도 그냥 쑥스러워하기만 했다.

주말에 시내에서 만나서 데이트하다가 키스하고 싶어지면 어두운 곳을 찾았다. 수민이네 집 건물 틈과 비슷한 곳은 시내 유흥가에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주로 카페 구석에서 몰래몰래 키스했고, 그러다가 참기 힘들게 되면 가까운 모텔로 급히 달려가 섹스한 적도 있었다.

흥분했어도 조금 참아 가며 모텔 대신 내 원룸으로 온 적도 있었다. 몇 번을 그러다가 나중에는 영화를 보고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고 나면 아예 내 원룸으로 향했다. 수민이는 사랑을 나눌 때 처음 몇 번은 고통을 호소했지만, 그러면서도 내가 욕심부리면 대부분 다 허락하고 받아 주었다. 누구나 그렇듯, 섹스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자기 몸의 반응도 알게 되고, 좋은 느낌도 알게 되었다.

밖에서 사람들 눈을 피해 키스하고 서로의 몸을 터치하면서 잔뜩 흥분해서 원룸에 들어온 날에는 아래 옷만 후다닥 벗고 섹스하기도 했었다. 물론, 환상적인 수민이의 가슴을 빼놓을 수는 없어서, 급한 대로 일단 서로의 성기를 결합한 다음, 웃옷을 벗겨 수민이의 가슴을 주무르고 빨았다.

누워서 할 때는 목을 아무리 꺾어도 수민이의 가슴을 빨기가 힘들었다. 수민이가 나보다 많이 작은 것도 아닌데 성기를 결합한 상태로 가슴을 빨려고 기를 쓰면 무엇보다도 삽입이 얕아졌고, 내가 잔뜩 등허리를 굽히고 혀를 내밀어 낑낑대면 수민이가 킥킥거리며 웃어서 흥분이 식곤 했다.

그래서 깊이 삽입하고 껴안은 채 가슴도 빨려면 수민이를 안아 일으켜 좌위로 섹스해야 했다. 수민이를 내 위에 앉히면 가슴을 빨기 수월했다. 물론, 수민이도 가슴을 빨아줄 때 더 흥분했다. 내 위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자기가 좋은 느낌을 찾으려 할 정도가 되었다.

수민이와 할 때마다 짜릿하고 만족스런 섹스였지만 그동안 아쉬운 점도 있었다. 수민이의 은밀한 부분을 보고 싶었는데, 내가 볼 수 있는 건 처음 삽입할 때 잠깐 뿐이었고, 그것도 수민이가 눈을 감고 자기 느낌에 집중할 때에만 가능했다.

후배위도 짐승 같다며 싫어하고, 서로의 성기를 입으로 애무하는 것도 못했었다. 한번 그런 얘기를 꺼냈다가 수민이가 질색하는 바람에, 흥분을 깨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일부러 얘기를 꺼낼 필요가 없었다. 오럴 섹스를 할 수 있게 된 건, 둘이 첫 섹스를 하고 나서 두 달도 넘게 지나서였다. 날짜 세기는 쉬웠다. 처음 키스한 날이 20xx년 10월 31일, 처음 사랑을 나눈 날이 11월 1일이었으니까.

연말... 연인들에겐 이유없이 특별한 시기다. 한 해를 함께 마무리하고, 또 새 해를 함께 맞이한다는 것, 굳이 따지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 해의 마지막 밤이 아니라도, 어느 날 밤이든 함께 지내고 다음날 아침을 함께 맞으면 그게 특별한 밤인 거다. 연인들에겐 뭐든지 특별한 거다. 특별한 게 따로 있나? 특별하게 생각하면 특별한 거지.

그 해의 마지막 날, 수민이는 두꺼운 양장 표지에 상자 케이스까지 딸린 팬시 브랜드 일기장을 선물했다. 두어 달 전, 수민이가 다이어리를 사달라고 할 때는 부담스러웠지만, 그때는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될 거라는 생각을 못 했던 때였다. 사랑하는 수민이가 사 주는 일기장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 와, 이런 좋은 일기장을...
- 오빠, 내 얘기 많이 써야 돼요?
- 후후. 그럴게. 꼭...
- 헤헤... 쪽~
- 내 일기가 아니라 우리 일기가 되는 건가? 훗~
- 하아...

꿈꾸는 듯 몽롱해진 수민이 눈빛... 수민이가 내 말이나 행동에 감격하거나 즐거운 상상을 할 때면 그런 눈빛을 보이곤 했었다. 키스를 부르는 눈빛...

- 우리 일기면, 나도 보여줄 거예요?
- 뭐, 책꽂이에 있으니까 맘대로 꺼내 볼 수는 있겠지.
- 오빠 몰래? 보여주진 않을 거구요?
- 아무리 수민이라도, 일기는 개인적인 거잖아...
- 알아요. 보여 달라고 안 할게.
- 수민이 못생겼다고 쓸 거라서 그래... 크크크...
- 깔깔깔... 치~...
- 근데 어떻게 일기장 살 생각을 했어?
- 바보... 일기장 다 써 간다고, 사야겠다고 했었잖아요.
- 내가 그런 얘기도 했었나?
- 그런 얘기도? 치, 나한테 못 할 얘기 있어요?
- 후후... 아니야. 다 하잖아...

고등학교 때부터 쓴 일기였다. 일기라기보다는 그냥 자기 전에 생각나는 것들을 끼적이는 잡스런 글이었다. 그래도 매일 꼬박꼬박 썼고, 생각나는 게 없을 때에는 날짜와 요일만이라도 간단히 기록했던 일기였다.

- 오빠 일기 쓴 지 십년 넘어요?
- 그쯤... 되지, 아마?
- 어디서 이런 얘기 읽은 적 있어요. 일기를 십년 쓴 사람은 뭔가를 이룰 사람이고, 이십년 쓴 사람은 이미 뭔가를 이룬 사람이라고.
- 후후, 그래?
- 오빠는 뭔가 큰 걸 이룰 사람인가 봐요.
- 일기 이십년 쓰겠지, 뭐...
- 아이, 그거 말구..
- 그게 그 얘기야. 20년은 뭔가 이룬 거라며?
- 치이...
- 후후후... 고마워, 일기 꼬박꼬박 쓸게.
- 꼬박꼬박 쓰기만?
- 일기 쓸 때마다 수민이 생각할 거야. 쪽~
- 헤헤~...

그날 밤, 그 해의 마지막 밤에 수민이는 나와 함께 늦게까지 있고 싶어 했지만, 나는 가족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수민이를 설득해서 일찌감치 들여보냈다.

나는 주말에는 항상 서울 집에 갔었지만 수민이와 만나기 시작한 이후로는 주말마다 수민이를 만나느라 집에 거의 가지 못했었다. 그날, 오랜만에 모처럼 가족이 다 모여 저녁도 같이 먹고 술도 한 잔 하고... 한 해의 마지막 밤을 한 공간에서 같이 지냈다. 아버지, 엄마, 형, 나...

......

휴일이 끝나고 새해에 첫 출근하던 날, 시무식 날부터 눈이 펑펑 내렸다. 함박눈이 소복소복 잘도 쌓였다. 눈이 내리면... 예전엔 감상에 빠졌었는데 그날은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었다. 눈길에 차가 밀리고 거북이걸음을 하는 것 따위는 걱정도 되지 않았다. 그저 수민이가 보고 싶어서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수민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전화가 왔다.

- 오빠...
- 어, 수민아... 안 그래도 수민이 보고 싶었는데...
- 진짜? 우왕~
- 후후... 그렇게 좋아?
- 오빠, 눈 와요. 거기도 오죠?
- 그래, 여기도 와. 아주 많이 와...
- 눈 오니까 오빠 더 보고 싶어...
- 후후... 나도.
- 오빠도 나 보고 싶은 거 맞죠?
- 말했잖아. 보고 싶다고.
- 또 듣고 싶어서... 헤헤...

밥 먹고 또 전화를 걸어 점심시간 내내 통화했다. 수민이는 쉬지 않고 재잘재잘 떠들었고, 깔깔대고 웃었다. 전화를 하다 보니 더 보고 싶었고, 퇴근시간 땡 하자마자 달려나가 전철역으로 향했다. 대리님이 뒤통수에 대고 뭐라고 소리쳤지만 그냥 인사하고 뛰었다.

아, 형님... 이런 날은 좀 봐 줘요. 형님은 예비 형수랑 맨날 같은 사무실에서 보지만 난 아니잖아요. 오늘 같은 날 분위기 있게 데이트도 하고 좀 그러세요. 나 없을 때 사무실에서 키스도 한번 하시고... 속으로만 하소연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때만큼은 길에 버리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K 역에 내렸을 때, 수민이는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다가오는 수민이... 둘이서 손을 꼬옥 잡고 눈 쌓인 길을 걸었다.

......

남들이 안 밟은 눈을 골라 밟으며 돌아다니다가 안 밟은 눈을 찾아 수민이네 동네 학교에까지 들어갔다. 수민이는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 쌓인 운동장에서 아이처럼, 강아지처럼 뛰어다녔다. 말 그대로 순백의 눈밭에서 팔짝팔짝 뛰어다니다가 나에게 달려와 안겨 입맞추고, 또 뛰어다니고...

- 아... 예쁘다...
- 그렇게 좋아? 발 다 젖겠다.
- 괜찮아요. 예쁘잖아요... 오빠, 디게 이쁘죠?
- 수민이가 더 예뻐.
- 아이, 뭐예요...
- 뭘? 예쁜 걸 예쁘다는데...
- 치~... 이얍~
- 엇, 차거..
- 깔깔깔...
- 에잇~
- 꺄아....
- 크크크... 그러게 왜 덤벼?
- 히잉~...

수민이는 잡히는 대로 눈을 뿌렸지만 나는 눈을 한 움큼 쥐어 수민이의 목덜미에 갖다 댔다. 수민이가 움츠렸고, 나는 아차 싶어서 바로 손을 떼었지만 그래도 무지 차가왔을 거다. 수민이는 입술을 삐죽이며 귀엽게 눈을 흘겼고, 나는 삐죽이는 그 입술에 자석처럼 끌려가 뽀뽀했다.

수민이는 그리고도 또 눈밭에 발자국을 만들며 뛰어다녔다. 그리고 다시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서 웃으며 수민이를 바라보다가 나도 수민이와 같이 팔짝팔짝 뛰며 눈밭에 발자국을 남겼다. 누가 봤으면 참 철없다고 흉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눈이 하얗게 쌓인 운동장에서 노오란 가로등이 듬성듬성 비추는 눈밭에 빨간 코트를 입은 수민이가 뛰놀던 모습은 지금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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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일 202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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