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은 여인들 - 달맞이꽃 19장
또 하릴없이 며칠을 지냈다. 일어나면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하루 딱 한번 나가서 밥을 사먹고, 밥을 먹고 오는 길에 술을 사들고 들어왔다. 술은 소주와 맥주 각 한 병씩, 두 병씩만 샀다. 내 주량은 맥주 한 병이면 적당했고, 소주 한 병을 다 마시면 많이 취했었다.
주량보다 많이 먹고, 술기운에 겨우 잠이 들었다. 처음엔 다음날 토하기도 했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술을 살 때마다 오늘만 먹고 내일부터는 안 먹을 수 있을 거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런 날이 거의 매일 반복되었고, 사 온 술을 다 마시고 또 사러 나갈 때도 있었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듯한 두려움에 시달렸고 어떤 날에는 취해서 정신이 없는데도 더 마셨다.
방 한쪽 벽 밑에 빈 병이 줄지어 서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술병이 많았던 날이 점점 늘어났고, 이따금 거울을 보면 푸석푸석한 얼굴 하나가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맘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어디로 쫓아버릴 수도 없는 녀석이었다.
하루하루가 너무 길었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데 시간을 보내기가 힘들었다. 자는 시간만이 그나마 좀 빨리 흘렀고,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술부터 찾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알콜중독이 되는 게 아닌가 두려웠지만, 낮에 지루한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저물면 나도 모르게 집 앞 수퍼에 가서 술을 사고 있었다.
- 총각...
- 네?
- 저기... 이제 회사 안 다녀??
- 회사요? 계속 다니는데요?
- 아니... 앞집 식당 언니 말로는 씻지도 않은 얼굴로 밥 먹으러 온다던데... 나도 총각 출근하는 걸 통 볼 수가 없어서...
- 아, 집에서 인터넷으로 일하고 그래요.
- 그래? 그래도 전에는 양복 입고 아침 일찍 다녔었잖아...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술만 먹어서 어떡해?
- 그래도 뭐, 할 건 다 해요.
- 뭐, 내가 간섭할 건 아니지만, 젊은 사람이 매일 그렇게 술을 먹으니까 걱정돼서 그래.
- 예... 이거, 얼마죠?
- 응? 어디 보자...
그냥 민망하고 창피해서, 생각나는 대로 거짓말을 했다. 그때 좀 많이 마시긴 마셨던 모양이다. 대화라고는 얼마인가요? 얼마예요... 밖에 안 하던 수퍼 아주머니가 걱정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면서도 또 나한테 술을 파는 걸 보면 진심으로 걱정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말에도 별로 신경쓰지 않고 또 마시고 또 마셨다. 안 그러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지내기를 거의 한 달쯤 했을까... 알콜중독자는 아닐지 몰라도 거의 폐인이 되어 가고 있던 즈음, 학교 후배 하나가 전화를 해 왔다. 학교 다닐 때 나를 잘 따랐던 현경이였다.
- 네...
- 정우 선배? 나 현경이...
- 응...
- 뭐야?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 아니... 웬 일이야?
- 자다 일어났어?
- 아니야.
- 어디야? 집?
- 응. 왜?
- 이 좋은 주말에 방콕이야? 선배도 참...
- 주말? 무슨 요일이지?
- 어? 한정우 선배... 맞아요?
- 맞아.
- 선배, 이상해. 무슨 일 있어?
- 아니야. 왜 전화했어? 세 번째 묻는 거야.
- 별 일 없으면 얼굴이나 보자. 내가 그쪽으로 갈게.
- ......
신영이 동기 현경이... 내가 신영이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했을 뿐만 아니라, 한심하다며 정신 차리라고 다그치던 후배였다.
전공과 상관없이 공무원시험을 준비했고, 졸업하기 전에 시험을 치르고 임용되었던 아이였다. 야무지다는 한 마디로 설명이 끝나는 현경이. 나를 잘 따랐던, 아니, 허물없이 친했던, 후배가 아니라 친구 같았던 현경이. 선배라고 부르는 게 당연하고 오빠라고 부르면 어색할, 그런 후배 현경이였다.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서울 안암동에서 수원까지 내려오겠다는 현경이와 내 원룸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가기도 귀찮았지만 그때 하루에 한번씩 밥을 챙겨 먹었던 식당을 알려 주었다. 밥 먹으러 나가는 김에 만나려고 시간도 그렇게 정했다. 수원 아닌 곳에서 만나자고 했으면 아마 만나지 못했을 게 뻔했다. 그때 그 즈음에는 그 어떤 것도 다 귀찮았으니까.
식당 앞에서 만난 현경이는 세련된 정장 차림이었다. 말굽 모양의 고리 장식이 달린 백도 들고 있었다. 청바지만 입던 학생 때의 후줄근한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쟁이 똥자루 만하던 그 키도 작아 보이지 않았다.
- 허~
- 왔니? 잘 찾아 왔네?
- 선배... 사람 꼴이 이게...
- 피식~
- 정우 선배 맞아?
- 들어가자.
- 그렇게 깔끔 떨던 한정우는 어디 가고...
- 아, 추워. 빨리 들어와.
현경이는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내 몰골을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후줄근한 트레이닝 차림에 감지 않은 까치집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는 늘 가던 식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선배가 요일도 모르고 살아?
- 일은 무슨...
- 혹시... 여자? 맞지? 여자 문제지?
대충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현경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아니...
-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에 다 써 있구만.
- 그냥... 내 문제야.
- 원인 제공자는 여자고?
- ......
- 혹시 내가 아는...?
- 아니.
- 또 속편 찍은 거지? 신영이 때랑 비슷하지?
- ......
그랬나? 생각해 보면 그랬다. 자기가 먼저 좋아하고, 접근하고, 자기를 좋아하게 만들어 놓고, 서로 좋아하다가 자기가 먼저 떠났다. 아니, 자기 혼자 떠났다. 나는 혼자 남아 울었다... 똑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실연은 드문 거 아닌가... 여자지? 라는 질문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질문이었다.
- 선배는 순수하다고 해야 되냐, 멍청하다고 해야 되냐?
- ......
- 학교 다닐 때도 그래, 동아리에 헌신한다고 뭐 있어? 졸업할 때 총장상 하나 받은 거? 그게 뭐 어디 쓸 데나 있어?
현경이는 일장 연설을 했다. 내가 실연을 했는데 그게 왜 동아리 활동과 연관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아리 활동이 도움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무엇 하나 지장을 준 건 없었다. 게다가 그 쓸데없다는 총장상은 현경이 본인도 받았다.
현경이는 그렇게 떠들면서도 밥을 다 먹었다. 체구도 작고 얼굴도 작은데 먹는 건 복스러운 애였다. 밥을 복스럽게 잘 먹는 여자는 참 예쁘다. 현경이도 그날 밥먹는 게 예뻐 보였지만, 그래도 현경이가 여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현경이가 너무 익숙했고, 익숙하다는 건 편안하다는 말이기도 했지만, 별다른 특별한 느낌이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 잘 먹었다. 덕분에...
- 그만 먹게?
- 다 먹었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일어섰다. 현경이는 멀뚱멀뚱 나를 보다가 자기도 주섬주섬 일어섰다. 현경이가 밥값을 내고 금새 따라 나왔다.
- 선배, 차 한 잔 하자.
- 그럴까? 어디... 여기, 찻집이 어딨더라...?
- 선배, 이 근처 살지? 차 한 잔 줘.
- 가 봐야 마실 것도 없을 텐데...
- 커피 사 가자.
후줄근한 트레이닝에 까치집이 된 머리. 누가 봐도 집 앞에 잠깐 나온 아저씨였다. 눈과 턱으로 내가 사는 원룸 건물을 가리켰다. 현경이와 같이 편의점에 가서 커피를 샀다. 내가 사는 곳에 처음 가는 거라며 뭐라도 사 가자는 현경이를 겨우 말렸다. 현경이는 원룸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 헤에... 이걸 다 선배가 마신 거야?
- 어디서 빈 병 주워 왔겠니?
- 허... 술도 못 먹는 사람이...
- 왜? 술 주랴?
- 됐어...
현경은 직접 물을 끓여 자기가 사 온 인스턴트 커피를 탔다.
- 자.
- 응...
- 집안 꼴이 이게 뭐냐? 청소도 좀 하구, 어디 안 나가도 좀 씻구, 옷도 깔끔하게 입구...
- 잔소리할 거면 가라. 후루룩~... 뜨겁네...
- 아유... 정신 좀 차려. 어린애처럼 왜 그래? 이제 좀 철들 때도 되지 않았어?
- 철들었나 보러 왔냐?
- 어떻게 알았대?
- 보러 왔으면 보기나 해. 잔소리하지 말고. 후루룩~
- 참, 커피 안 마셨잖아. 이젠 마시는 거야?
- 삼년치 마신 셈 치지, 뭐.
나는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았다. 어디 가서도 사람들이 커피를 내놓으려 하면, 목마르니 물이나 한 잔 달라고 해서 물을 마시곤 했다. 그런데 그 날은 그 맛없는 인스턴트 커피 한 잔을 다 마셨다. 후루룩거리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 먹었다.
- 선배 그 주변머리에도 늘 여자가 있는 걸 보면 신기해.
- 풋~ 늘 있기는... 네가 봤어?
- 말이 그렇다는 거지...
- 훗~...
- 혹시, 정력이라도 무지 좋은 거야?
- 어쭈? 많이 늘었다? 직접 확인해 볼래?
- 얼씨구? 됐다 그러세요.
- 내가 할 소리거든?
- 근데, 뭐냐고... 신영이도 그렇고.
- 언제 적 얘긴데... 쯧~
- 그럼 설마, 이번이 두 번째야?
- 관심 꺼라. 너 혹시, 나 좋아하냐?
- ......
- 어이, 씨... 그러지 마, 무섭게...
- 무서워? 내가 선배 좋아하면 무서워?
- 어어, 점점...? 짜식이...
- ......
현경이가 얼굴을 코앞에 들이대며 물었다. 진짜라면 부담스러웠고, 농담으로 하기엔... 그 상황에서 그런 농담을 할 기분은 아니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얼버무렸다.
- 에휴~, 사실은... 진짜로 그래서 왔어.
- 진짜라니, 뭐가?
- 결혼은 해야겠는데 맘에 드는 놈이 있어야 말이지.
- 어떤 놈 찾는데?
- 선배 같은 사람이 없어. 몇 놈 만나 봤는데 다 아니야.
- 헐~...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몇 년만에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에 기가 찼다. 나 같은 놈을 찾는데 못 찾았다. 그래서 나를 보러 왔다... 고?
- 근데 와서 보니까, 선배는 더 아니네. 뭐, 아닐 줄 알았지만.
- 알면서 왜 왔냐?
- 혹시나 했지. 철 좀 들었을까 봐. 선배가 철만 들면 딱인데.
- 너도 하나만 고치면 딱이다.
- 뭔데?
- 생각해 봐. 세상 사람들 다, 딱 한 가지가 부족한 거야. 그것만 고치면 딱이지.
- ...
- 근데 그걸 고치고 나면 또 딱 하나 부족한 게 또 보이지.
- 치, 그놈의 말장난.
- 말장난이 아니야. 사실이지. 늘 제일 큰 거 하나밖에 안 보이거든.
- 그래서, 난 뭐가 문제냐니까?
- 너? 넌 나한테 여자가 아니라는 거. 그것만 고치면 돼.
- 죽을래?
- 지금 같아선 뭐, 죽여 주면 고맙고...
- 아익, 정말... 말 그렇게 할래?
- ......
- 선배...
죽는 것도 괜찮겠다는 내 말에 현경이는 눈을 크게 뜨고 안경을 고쳐 썼다.
- 진짜구나? 지금...
- 걱정 마라. 자살할 용기는 없으니까.
- 아, 그런 소리 그만 좀 해, 정말...
- 피식~, 죽인다던 건 너야.
- 어떻게 선배는 나이를 먹고 더 철딱서니가 됐냐?
- 평생 철 안 들 거다.
- 왜? 철들면 내가 결혼하자고 할까 봐?
- 피식~ 됐고, 네가 본 내 장점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커피를 다 마시고 종이컵을 구겨서 휴지통을 향해 던졌다. 컵은 휴지통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방바닥에 떨어졌다. 현경이가 눈을 흘기고는 그걸 주워 휴지통에 넣었다. 동아리방에서도 휴지통 농구 슈팅에 성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생각이 났다. 현경이도 그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 으이그, 여전해.
- 당연하지. 사람이 바뀌니?
- 그래, 선배 장점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근데 뭐?
- 그것도 분명히 나고, 네가 본 철부지도 분명히 나야.
- 그건... 당연한 거 아냐?
- 물론 당연하지. 근데 넌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니까 문제지.
- 내가 언제?
- 단점만 고치라며? 그 단점도 나야. 아니, 단점이 있어서 내가 되는 거야.
-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데... 그래도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고쳐야 되는 거 아니야?
- 그... 장단점이라는 게 말이야, 하나는 살리고 하나는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야.
- 아니라구?
- 일하다 보면 그런 사람 있지? 쟤가 좀 덜렁대지만 않으면 참 좋은데... 쟤가 좀 숫기만 있으면 좋겠는데... 쟤가 이거 하나만 좀... 그러면 딱인데...
- 그지. 지금 우리 부서에도 딱 그런 애 있어. 걔가 일은 잘 하는데...
- 다 잘하는데 꼭 하나가 아쉬워, 그지?
- 응. 맞아.
- 근데 걔가 뭔가를 잘하는 건 그 아쉬운 점이랑 관련이 있을 수도 있어.
- 단점 때문에 장점이 있다는 말이야?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 음... 정확하지는 않은데... 뭐, 비슷해.
- 좀 쉽게 얘기해 봐. 선밴 어떻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냐?
- 쉽게? 음... 뭐랄까... 단점 때문에 장점이 있는 걸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어. 요점은, 그 장점과 단점이 서로 뗄 수 없는 거라는 거야. 이해 됐어?
- 뗄 수 없다?
- 음... 곱슬머리는 고집이 세다... 뭐, 이런 말 들어 봤지?
- 응. 바로 선배 얘기잖아. 근데?
- 이런, 씨... 좋아, 그래. 그렇다 치고. 그건 그 두 형질이 같은 유전자, 같은 염색체에 있는 유전 정보라서 같이 발현되는 거야. 그런데 그 유전자, 그 염색체를 떼어낸다면?
- 그러면?
- 둘 다 없어지거나 둘 다 안 없어지거나... 하여튼 둘 중 하나만 없앨 수는 없겠지? 그지? 유전자를 떼어내도 곱슬머리면서 고집이 안 세거나, 직모에 고집 센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거야.
- 아니, 그런 사람이 왜 없어? 있잖아.
- 아이, 그런 사람도 물론 있지. 근데, 우리가 얘기한 건 그게 아니잖아. 그 유전자, 그 염색체를 가진 사람을 전제로 하는 거잖아. 두 형질 중에 하나만 바뀔 수는 없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 그런가...? 아, 복잡해, 생물학은...
- 이게 왜 생물학이야? 유전자는 예를 든 것 뿐인데...
- 더 쉽게 좀 얘기해 봐.
- 아, 나, 이런... 이걸 어떻게 더 쉽게 해? 아, 그래, 레인맨 알지?
- 레인맨?
- 그래. 탐 크루즈 나오는...
- 응. 봤어.
- 더스틴 호프먼이 카드 숫자를 다 기억하지? 지금까지 나온 게 뭐고 남은 게 뭔지...
- 그렇지, 그런데 자폐증이 있지.
- 맞아. 거기서 자폐증만 없으면 대단한 갬블러가 될 수도 있겠다 싶지?
- 그런데, 그 자폐증을 치료하면...?
- 그렇지. 그 엄청난 기억력도 같이 사라질 수도 있는 거야. 반드시 사라진다는 건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거야. 그 기억력이든 다른 장점이든, 분명히 뭔가 하나는 같이 없어질 거라는 거지.
- 아하~ 알 것 같아. 진작 그렇게 말하지.
- 아까 한 얘기가 훨씬 더 쉬웠어.
- 잘났다. 에이그...
- 피식~ 잘나면 뭐하냐...?
- 근데, 선배 잘난 거, 알긴 알아?
- 네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야. 실제는 아니고.
- 아는 거 남들 가르쳐 주지만 말고 선배 먼저 좀 고쳐.
- 알겠다더니 아직도 이해 못 했구만? 지금까지 헛들었냐?
그 후로도 현경이는 또 뭐라고 주절거리고 잔소리를 했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말한 것들을 되새겨 생각하고 있었다. 현경이는 의미 없는 잡담을 몇 마디 더 하다가 이내 일어섰다.
결혼할 생각을 하고 남자들과 맞선을 보다가 내 생각이 났고,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는 핑계로 혹시나 좀 달라졌는지 보러 왔던 거였다. 잘나 보이기는 했지만 명확한 단점이 맘에 걸렸던 사람. 그 단점을 고쳐서 데리고 살까 생각하고 왔는데, 와서 보니 이 남자가 변한 건 하나도 없고 또 웬 구렁텅이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거였다. 참, 쉽게도 결혼을 생각하는 현경이였다. 내 의사와는 상관 없이...
- 와서 강의만 듣고 가네?
- 수업료 달라 소리 안 한다.
- 치, 줄 생각도 없었네요.
- 공짜 강의 치고는 들을 만하지 않았어?
- 뭐, 생각해볼 만한 꺼리는 있었어.
- 조심해서 잘 가,
- 선배도 잘 지내구. 아, 빨리 좀 떨치고 일어나. 이게 뭐냐? 이게... 응? 천하의 한정우가.
- 피식~
- 갈게. 으이구, 증말...
- 그래, 조심해서 가고.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현경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잘들 사는구나... 다들 잘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현경이가 갑자기 멈추어 서서 다시 돌아보았다.
- 참, 선배.
- 응?
- 그 여자한테도 이렇게 말했어?
- 이렇게라니? 어떻게?
- 나한테처럼 남자 대하듯이 스스럼없이 말했냐구.
그랬었나? 어땠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가 수민이에게... 어떻게 말했었지?
- 안 그랬지? 다정하게 했지? 선배답지 않게... 닭살 돋게 했지?
- 글쎄...? 그랬...나?
- 안 봐도 비디오지. 으이구, 한정우...
- 쩝~...
- 역시...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연애도 해본 놈이나 하는 거네.
- ......
- 선배는 누구한테 잘해주면 안 돼. 알아? 그 순간, 선배 매력이 없어져 버리거든. 선배를 쫓아다니게 만들어야지, 선배가 다가가면 아마 물러설 걸?
- 내가... 다가갔다고?
- 그런 것 같지 않아? 연예인들 봐봐. 연예인이 팬이랑 결혼하면 백이면 백 다 이혼한다~? 그게 왜게?
- ......
- 생각해 봐. 수업료는 퉁치자, 내가 훨씬 비싼 강의였지만.
- ......
현경이는 현경이답게 끝까지 날 이겨 먹으려고 들었다. 내가 나답지 못해서라고?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반박할 말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다가가면 물러선다? 그렇다면 현경이에게는 아주 바짝 다가서서 잘해줘야 하는 건가? 닭살 팍팍 돋게?
현경이가 간 후, 아니, 현경이가 혼자 주절거릴 때부터 나는 내가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장점과 단점 모두 내 모습이다... 그게 나다. 나를 사랑한 것도. 나를 떠난 것도... 그게 수민이다. 그 다정했던 말도, 그 차가운 말도... 그랬다. 그것도 수민이다. 인정해야 했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현경이에게 처음 했던 말도 생각에 오래 남았다. 여자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다... 잘 정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뭔가 깨달음의 실마리가 있었다. 그 말이 맞았다. 내 문제였고, 문제는 나였다.
수민이와 만나지 않은 이후로 가장 말을 많이 한 날이었다. 현경이와 나눈 대화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날로 수민이 생각을 훌훌 털어 버린 건 아니었지만, 그나마 최소한의 해야 할 일을 하기는 했다. 밤이면 일찍 자고 아침엔 일찍 일어났다. 술을 먹지 않고도, 자야겠다는 생각만으로 잠들 수 있었다.
사람 꼴 같지 않았던 머리도 깎고, 수염도 매일 깎았다. 거울 속에 보이는 얼굴도 푸석한 기가 점차 가셨고, 그 자식 눈빛이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전처럼 흐리멍덩하지는 않았다. 방 한쪽 벽 밑에 줄지어 선 술병도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
때마침, 이력서를 등록해 두었던 헤드헌터를 통해 지방의 작은 연수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전화를 받고 업체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대충 네... 네... 하며 끄덕이다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수락했다.
연봉도 아무 조건도 묻지 않았다. 어디든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수민이의 흔적과 체취가 가득한 그 원룸에서 떠나고 싶었다. 수민이가 생각날 때마다 이를 악물고 진저리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랐다. 나를 아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고 싶었다.
헤드헌터와 통화한 지 이틀만에 그 연수원에 가서 면접을 했고, 면접을 본 지 사흘만에 간단히 짐을 싸서 연수원으로 들어갔다.
- 20부에서 계속
또 하릴없이 며칠을 지냈다. 일어나면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하루 딱 한번 나가서 밥을 사먹고, 밥을 먹고 오는 길에 술을 사들고 들어왔다. 술은 소주와 맥주 각 한 병씩, 두 병씩만 샀다. 내 주량은 맥주 한 병이면 적당했고, 소주 한 병을 다 마시면 많이 취했었다.
주량보다 많이 먹고, 술기운에 겨우 잠이 들었다. 처음엔 다음날 토하기도 했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술을 살 때마다 오늘만 먹고 내일부터는 안 먹을 수 있을 거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런 날이 거의 매일 반복되었고, 사 온 술을 다 마시고 또 사러 나갈 때도 있었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듯한 두려움에 시달렸고 어떤 날에는 취해서 정신이 없는데도 더 마셨다.
방 한쪽 벽 밑에 빈 병이 줄지어 서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술병이 많았던 날이 점점 늘어났고, 이따금 거울을 보면 푸석푸석한 얼굴 하나가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맘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어디로 쫓아버릴 수도 없는 녀석이었다.
하루하루가 너무 길었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데 시간을 보내기가 힘들었다. 자는 시간만이 그나마 좀 빨리 흘렀고,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술부터 찾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알콜중독이 되는 게 아닌가 두려웠지만, 낮에 지루한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저물면 나도 모르게 집 앞 수퍼에 가서 술을 사고 있었다.
- 총각...
- 네?
- 저기... 이제 회사 안 다녀??
- 회사요? 계속 다니는데요?
- 아니... 앞집 식당 언니 말로는 씻지도 않은 얼굴로 밥 먹으러 온다던데... 나도 총각 출근하는 걸 통 볼 수가 없어서...
- 아, 집에서 인터넷으로 일하고 그래요.
- 그래? 그래도 전에는 양복 입고 아침 일찍 다녔었잖아...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술만 먹어서 어떡해?
- 그래도 뭐, 할 건 다 해요.
- 뭐, 내가 간섭할 건 아니지만, 젊은 사람이 매일 그렇게 술을 먹으니까 걱정돼서 그래.
- 예... 이거, 얼마죠?
- 응? 어디 보자...
그냥 민망하고 창피해서, 생각나는 대로 거짓말을 했다. 그때 좀 많이 마시긴 마셨던 모양이다. 대화라고는 얼마인가요? 얼마예요... 밖에 안 하던 수퍼 아주머니가 걱정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면서도 또 나한테 술을 파는 걸 보면 진심으로 걱정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말에도 별로 신경쓰지 않고 또 마시고 또 마셨다. 안 그러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지내기를 거의 한 달쯤 했을까... 알콜중독자는 아닐지 몰라도 거의 폐인이 되어 가고 있던 즈음, 학교 후배 하나가 전화를 해 왔다. 학교 다닐 때 나를 잘 따랐던 현경이였다.
- 네...
- 정우 선배? 나 현경이...
- 응...
- 뭐야?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 아니... 웬 일이야?
- 자다 일어났어?
- 아니야.
- 어디야? 집?
- 응. 왜?
- 이 좋은 주말에 방콕이야? 선배도 참...
- 주말? 무슨 요일이지?
- 어? 한정우 선배... 맞아요?
- 맞아.
- 선배, 이상해. 무슨 일 있어?
- 아니야. 왜 전화했어? 세 번째 묻는 거야.
- 별 일 없으면 얼굴이나 보자. 내가 그쪽으로 갈게.
- ......
신영이 동기 현경이... 내가 신영이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했을 뿐만 아니라, 한심하다며 정신 차리라고 다그치던 후배였다.
전공과 상관없이 공무원시험을 준비했고, 졸업하기 전에 시험을 치르고 임용되었던 아이였다. 야무지다는 한 마디로 설명이 끝나는 현경이. 나를 잘 따랐던, 아니, 허물없이 친했던, 후배가 아니라 친구 같았던 현경이. 선배라고 부르는 게 당연하고 오빠라고 부르면 어색할, 그런 후배 현경이였다.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서울 안암동에서 수원까지 내려오겠다는 현경이와 내 원룸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가기도 귀찮았지만 그때 하루에 한번씩 밥을 챙겨 먹었던 식당을 알려 주었다. 밥 먹으러 나가는 김에 만나려고 시간도 그렇게 정했다. 수원 아닌 곳에서 만나자고 했으면 아마 만나지 못했을 게 뻔했다. 그때 그 즈음에는 그 어떤 것도 다 귀찮았으니까.
식당 앞에서 만난 현경이는 세련된 정장 차림이었다. 말굽 모양의 고리 장식이 달린 백도 들고 있었다. 청바지만 입던 학생 때의 후줄근한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쟁이 똥자루 만하던 그 키도 작아 보이지 않았다.
- 허~
- 왔니? 잘 찾아 왔네?
- 선배... 사람 꼴이 이게...
- 피식~
- 정우 선배 맞아?
- 들어가자.
- 그렇게 깔끔 떨던 한정우는 어디 가고...
- 아, 추워. 빨리 들어와.
현경이는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내 몰골을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후줄근한 트레이닝 차림에 감지 않은 까치집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는 늘 가던 식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선배가 요일도 모르고 살아?
- 일은 무슨...
- 혹시... 여자? 맞지? 여자 문제지?
대충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현경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아니...
-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에 다 써 있구만.
- 그냥... 내 문제야.
- 원인 제공자는 여자고?
- ......
- 혹시 내가 아는...?
- 아니.
- 또 속편 찍은 거지? 신영이 때랑 비슷하지?
- ......
그랬나? 생각해 보면 그랬다. 자기가 먼저 좋아하고, 접근하고, 자기를 좋아하게 만들어 놓고, 서로 좋아하다가 자기가 먼저 떠났다. 아니, 자기 혼자 떠났다. 나는 혼자 남아 울었다... 똑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실연은 드문 거 아닌가... 여자지? 라는 질문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질문이었다.
- 선배는 순수하다고 해야 되냐, 멍청하다고 해야 되냐?
- ......
- 학교 다닐 때도 그래, 동아리에 헌신한다고 뭐 있어? 졸업할 때 총장상 하나 받은 거? 그게 뭐 어디 쓸 데나 있어?
현경이는 일장 연설을 했다. 내가 실연을 했는데 그게 왜 동아리 활동과 연관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아리 활동이 도움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무엇 하나 지장을 준 건 없었다. 게다가 그 쓸데없다는 총장상은 현경이 본인도 받았다.
현경이는 그렇게 떠들면서도 밥을 다 먹었다. 체구도 작고 얼굴도 작은데 먹는 건 복스러운 애였다. 밥을 복스럽게 잘 먹는 여자는 참 예쁘다. 현경이도 그날 밥먹는 게 예뻐 보였지만, 그래도 현경이가 여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현경이가 너무 익숙했고, 익숙하다는 건 편안하다는 말이기도 했지만, 별다른 특별한 느낌이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 잘 먹었다. 덕분에...
- 그만 먹게?
- 다 먹었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일어섰다. 현경이는 멀뚱멀뚱 나를 보다가 자기도 주섬주섬 일어섰다. 현경이가 밥값을 내고 금새 따라 나왔다.
- 선배, 차 한 잔 하자.
- 그럴까? 어디... 여기, 찻집이 어딨더라...?
- 선배, 이 근처 살지? 차 한 잔 줘.
- 가 봐야 마실 것도 없을 텐데...
- 커피 사 가자.
후줄근한 트레이닝에 까치집이 된 머리. 누가 봐도 집 앞에 잠깐 나온 아저씨였다. 눈과 턱으로 내가 사는 원룸 건물을 가리켰다. 현경이와 같이 편의점에 가서 커피를 샀다. 내가 사는 곳에 처음 가는 거라며 뭐라도 사 가자는 현경이를 겨우 말렸다. 현경이는 원룸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 헤에... 이걸 다 선배가 마신 거야?
- 어디서 빈 병 주워 왔겠니?
- 허... 술도 못 먹는 사람이...
- 왜? 술 주랴?
- 됐어...
현경은 직접 물을 끓여 자기가 사 온 인스턴트 커피를 탔다.
- 자.
- 응...
- 집안 꼴이 이게 뭐냐? 청소도 좀 하구, 어디 안 나가도 좀 씻구, 옷도 깔끔하게 입구...
- 잔소리할 거면 가라. 후루룩~... 뜨겁네...
- 아유... 정신 좀 차려. 어린애처럼 왜 그래? 이제 좀 철들 때도 되지 않았어?
- 철들었나 보러 왔냐?
- 어떻게 알았대?
- 보러 왔으면 보기나 해. 잔소리하지 말고. 후루룩~
- 참, 커피 안 마셨잖아. 이젠 마시는 거야?
- 삼년치 마신 셈 치지, 뭐.
나는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았다. 어디 가서도 사람들이 커피를 내놓으려 하면, 목마르니 물이나 한 잔 달라고 해서 물을 마시곤 했다. 그런데 그 날은 그 맛없는 인스턴트 커피 한 잔을 다 마셨다. 후루룩거리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 먹었다.
- 선배 그 주변머리에도 늘 여자가 있는 걸 보면 신기해.
- 풋~ 늘 있기는... 네가 봤어?
- 말이 그렇다는 거지...
- 훗~...
- 혹시, 정력이라도 무지 좋은 거야?
- 어쭈? 많이 늘었다? 직접 확인해 볼래?
- 얼씨구? 됐다 그러세요.
- 내가 할 소리거든?
- 근데, 뭐냐고... 신영이도 그렇고.
- 언제 적 얘긴데... 쯧~
- 그럼 설마, 이번이 두 번째야?
- 관심 꺼라. 너 혹시, 나 좋아하냐?
- ......
- 어이, 씨... 그러지 마, 무섭게...
- 무서워? 내가 선배 좋아하면 무서워?
- 어어, 점점...? 짜식이...
- ......
현경이가 얼굴을 코앞에 들이대며 물었다. 진짜라면 부담스러웠고, 농담으로 하기엔... 그 상황에서 그런 농담을 할 기분은 아니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얼버무렸다.
- 에휴~, 사실은... 진짜로 그래서 왔어.
- 진짜라니, 뭐가?
- 결혼은 해야겠는데 맘에 드는 놈이 있어야 말이지.
- 어떤 놈 찾는데?
- 선배 같은 사람이 없어. 몇 놈 만나 봤는데 다 아니야.
- 헐~...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몇 년만에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에 기가 찼다. 나 같은 놈을 찾는데 못 찾았다. 그래서 나를 보러 왔다... 고?
- 근데 와서 보니까, 선배는 더 아니네. 뭐, 아닐 줄 알았지만.
- 알면서 왜 왔냐?
- 혹시나 했지. 철 좀 들었을까 봐. 선배가 철만 들면 딱인데.
- 너도 하나만 고치면 딱이다.
- 뭔데?
- 생각해 봐. 세상 사람들 다, 딱 한 가지가 부족한 거야. 그것만 고치면 딱이지.
- ...
- 근데 그걸 고치고 나면 또 딱 하나 부족한 게 또 보이지.
- 치, 그놈의 말장난.
- 말장난이 아니야. 사실이지. 늘 제일 큰 거 하나밖에 안 보이거든.
- 그래서, 난 뭐가 문제냐니까?
- 너? 넌 나한테 여자가 아니라는 거. 그것만 고치면 돼.
- 죽을래?
- 지금 같아선 뭐, 죽여 주면 고맙고...
- 아익, 정말... 말 그렇게 할래?
- ......
- 선배...
죽는 것도 괜찮겠다는 내 말에 현경이는 눈을 크게 뜨고 안경을 고쳐 썼다.
- 진짜구나? 지금...
- 걱정 마라. 자살할 용기는 없으니까.
- 아, 그런 소리 그만 좀 해, 정말...
- 피식~, 죽인다던 건 너야.
- 어떻게 선배는 나이를 먹고 더 철딱서니가 됐냐?
- 평생 철 안 들 거다.
- 왜? 철들면 내가 결혼하자고 할까 봐?
- 피식~ 됐고, 네가 본 내 장점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커피를 다 마시고 종이컵을 구겨서 휴지통을 향해 던졌다. 컵은 휴지통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방바닥에 떨어졌다. 현경이가 눈을 흘기고는 그걸 주워 휴지통에 넣었다. 동아리방에서도 휴지통 농구 슈팅에 성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생각이 났다. 현경이도 그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 으이그, 여전해.
- 당연하지. 사람이 바뀌니?
- 그래, 선배 장점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근데 뭐?
- 그것도 분명히 나고, 네가 본 철부지도 분명히 나야.
- 그건... 당연한 거 아냐?
- 물론 당연하지. 근데 넌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니까 문제지.
- 내가 언제?
- 단점만 고치라며? 그 단점도 나야. 아니, 단점이 있어서 내가 되는 거야.
-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데... 그래도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고쳐야 되는 거 아니야?
- 그... 장단점이라는 게 말이야, 하나는 살리고 하나는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야.
- 아니라구?
- 일하다 보면 그런 사람 있지? 쟤가 좀 덜렁대지만 않으면 참 좋은데... 쟤가 좀 숫기만 있으면 좋겠는데... 쟤가 이거 하나만 좀... 그러면 딱인데...
- 그지. 지금 우리 부서에도 딱 그런 애 있어. 걔가 일은 잘 하는데...
- 다 잘하는데 꼭 하나가 아쉬워, 그지?
- 응. 맞아.
- 근데 걔가 뭔가를 잘하는 건 그 아쉬운 점이랑 관련이 있을 수도 있어.
- 단점 때문에 장점이 있다는 말이야?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 음... 정확하지는 않은데... 뭐, 비슷해.
- 좀 쉽게 얘기해 봐. 선밴 어떻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냐?
- 쉽게? 음... 뭐랄까... 단점 때문에 장점이 있는 걸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어. 요점은, 그 장점과 단점이 서로 뗄 수 없는 거라는 거야. 이해 됐어?
- 뗄 수 없다?
- 음... 곱슬머리는 고집이 세다... 뭐, 이런 말 들어 봤지?
- 응. 바로 선배 얘기잖아. 근데?
- 이런, 씨... 좋아, 그래. 그렇다 치고. 그건 그 두 형질이 같은 유전자, 같은 염색체에 있는 유전 정보라서 같이 발현되는 거야. 그런데 그 유전자, 그 염색체를 떼어낸다면?
- 그러면?
- 둘 다 없어지거나 둘 다 안 없어지거나... 하여튼 둘 중 하나만 없앨 수는 없겠지? 그지? 유전자를 떼어내도 곱슬머리면서 고집이 안 세거나, 직모에 고집 센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거야.
- 아니, 그런 사람이 왜 없어? 있잖아.
- 아이, 그런 사람도 물론 있지. 근데, 우리가 얘기한 건 그게 아니잖아. 그 유전자, 그 염색체를 가진 사람을 전제로 하는 거잖아. 두 형질 중에 하나만 바뀔 수는 없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 그런가...? 아, 복잡해, 생물학은...
- 이게 왜 생물학이야? 유전자는 예를 든 것 뿐인데...
- 더 쉽게 좀 얘기해 봐.
- 아, 나, 이런... 이걸 어떻게 더 쉽게 해? 아, 그래, 레인맨 알지?
- 레인맨?
- 그래. 탐 크루즈 나오는...
- 응. 봤어.
- 더스틴 호프먼이 카드 숫자를 다 기억하지? 지금까지 나온 게 뭐고 남은 게 뭔지...
- 그렇지, 그런데 자폐증이 있지.
- 맞아. 거기서 자폐증만 없으면 대단한 갬블러가 될 수도 있겠다 싶지?
- 그런데, 그 자폐증을 치료하면...?
- 그렇지. 그 엄청난 기억력도 같이 사라질 수도 있는 거야. 반드시 사라진다는 건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거야. 그 기억력이든 다른 장점이든, 분명히 뭔가 하나는 같이 없어질 거라는 거지.
- 아하~ 알 것 같아. 진작 그렇게 말하지.
- 아까 한 얘기가 훨씬 더 쉬웠어.
- 잘났다. 에이그...
- 피식~ 잘나면 뭐하냐...?
- 근데, 선배 잘난 거, 알긴 알아?
- 네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야. 실제는 아니고.
- 아는 거 남들 가르쳐 주지만 말고 선배 먼저 좀 고쳐.
- 알겠다더니 아직도 이해 못 했구만? 지금까지 헛들었냐?
그 후로도 현경이는 또 뭐라고 주절거리고 잔소리를 했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말한 것들을 되새겨 생각하고 있었다. 현경이는 의미 없는 잡담을 몇 마디 더 하다가 이내 일어섰다.
결혼할 생각을 하고 남자들과 맞선을 보다가 내 생각이 났고,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는 핑계로 혹시나 좀 달라졌는지 보러 왔던 거였다. 잘나 보이기는 했지만 명확한 단점이 맘에 걸렸던 사람. 그 단점을 고쳐서 데리고 살까 생각하고 왔는데, 와서 보니 이 남자가 변한 건 하나도 없고 또 웬 구렁텅이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거였다. 참, 쉽게도 결혼을 생각하는 현경이였다. 내 의사와는 상관 없이...
- 와서 강의만 듣고 가네?
- 수업료 달라 소리 안 한다.
- 치, 줄 생각도 없었네요.
- 공짜 강의 치고는 들을 만하지 않았어?
- 뭐, 생각해볼 만한 꺼리는 있었어.
- 조심해서 잘 가,
- 선배도 잘 지내구. 아, 빨리 좀 떨치고 일어나. 이게 뭐냐? 이게... 응? 천하의 한정우가.
- 피식~
- 갈게. 으이구, 증말...
- 그래, 조심해서 가고.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현경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잘들 사는구나... 다들 잘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현경이가 갑자기 멈추어 서서 다시 돌아보았다.
- 참, 선배.
- 응?
- 그 여자한테도 이렇게 말했어?
- 이렇게라니? 어떻게?
- 나한테처럼 남자 대하듯이 스스럼없이 말했냐구.
그랬었나? 어땠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가 수민이에게... 어떻게 말했었지?
- 안 그랬지? 다정하게 했지? 선배답지 않게... 닭살 돋게 했지?
- 글쎄...? 그랬...나?
- 안 봐도 비디오지. 으이구, 한정우...
- 쩝~...
- 역시...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연애도 해본 놈이나 하는 거네.
- ......
- 선배는 누구한테 잘해주면 안 돼. 알아? 그 순간, 선배 매력이 없어져 버리거든. 선배를 쫓아다니게 만들어야지, 선배가 다가가면 아마 물러설 걸?
- 내가... 다가갔다고?
- 그런 것 같지 않아? 연예인들 봐봐. 연예인이 팬이랑 결혼하면 백이면 백 다 이혼한다~? 그게 왜게?
- ......
- 생각해 봐. 수업료는 퉁치자, 내가 훨씬 비싼 강의였지만.
- ......
현경이는 현경이답게 끝까지 날 이겨 먹으려고 들었다. 내가 나답지 못해서라고?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반박할 말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다가가면 물러선다? 그렇다면 현경이에게는 아주 바짝 다가서서 잘해줘야 하는 건가? 닭살 팍팍 돋게?
현경이가 간 후, 아니, 현경이가 혼자 주절거릴 때부터 나는 내가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장점과 단점 모두 내 모습이다... 그게 나다. 나를 사랑한 것도. 나를 떠난 것도... 그게 수민이다. 그 다정했던 말도, 그 차가운 말도... 그랬다. 그것도 수민이다. 인정해야 했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현경이에게 처음 했던 말도 생각에 오래 남았다. 여자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다... 잘 정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뭔가 깨달음의 실마리가 있었다. 그 말이 맞았다. 내 문제였고, 문제는 나였다.
수민이와 만나지 않은 이후로 가장 말을 많이 한 날이었다. 현경이와 나눈 대화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날로 수민이 생각을 훌훌 털어 버린 건 아니었지만, 그나마 최소한의 해야 할 일을 하기는 했다. 밤이면 일찍 자고 아침엔 일찍 일어났다. 술을 먹지 않고도, 자야겠다는 생각만으로 잠들 수 있었다.
사람 꼴 같지 않았던 머리도 깎고, 수염도 매일 깎았다. 거울 속에 보이는 얼굴도 푸석한 기가 점차 가셨고, 그 자식 눈빛이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전처럼 흐리멍덩하지는 않았다. 방 한쪽 벽 밑에 줄지어 선 술병도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
때마침, 이력서를 등록해 두었던 헤드헌터를 통해 지방의 작은 연수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전화를 받고 업체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대충 네... 네... 하며 끄덕이다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수락했다.
연봉도 아무 조건도 묻지 않았다. 어디든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수민이의 흔적과 체취가 가득한 그 원룸에서 떠나고 싶었다. 수민이가 생각날 때마다 이를 악물고 진저리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랐다. 나를 아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고 싶었다.
헤드헌터와 통화한 지 이틀만에 그 연수원에 가서 면접을 했고, 면접을 본 지 사흘만에 간단히 짐을 싸서 연수원으로 들어갔다.
- 20부에서 계속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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