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은 여인들 - 달맞이꽃 18장
수민이의 결별 선언에 한 마디 반문도 못 하고 그냥 끄덕이다가 돌아왔지만, 막상 다음날이 되자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전날 있었던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아니,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수민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민이가 산소보다 물보다 중요한 것처럼 하루 종일 수민이와 통화하려고만 했다. 그러나 통화하기는 힘들었다.
수민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일부러 받지 않는 건지, 강의실이나 도서관이라서 받지 못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통화가 안 되니 그저 답답하고 짜증만 났다. 전화를 걸고 또 걸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식은 음식은 몇 번이든 다시 데울 수 있지만 식은 사랑은 다시 뜨거워질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쉬운 판단조차 하지 못했다. 판단은커녕 아무 생각도 없었다. 찌질하게, 다른 어떤 표현도 찾을 수 없이 진짜 찌질하게 수민이에게 매달렸다.
통화를 못해서 짜증나는 건 나 뿐이었을 것이다. 수민이는 오히려 내가 자꾸 전화를 거는 게 짜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생각도 못하고 계속 통화를 시도했고, 저녁 늦게, 수민이가 전화를 받아서 통화할 수 있었다. 수민이가 전화를 받으면서 신호음은 끊어졌지만 전화기 저편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 ......
- 수민아...
- 왜 전화하셨어요?
- ......
세상엔 숨길 수 없는 게 두 가지가 있다. 재채기와 사랑... 사랑하는 건 감추려 해도 감출 수가 없다. 어떻게 해도 티가 나니까. 그러나, 또 한 가지가 있었다.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것, 아니, 감추려 하지도 않는 것... 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감출 수 없었다. 그날 수민이의 목소리도 그랬다.
오빠~ 라고 반갑게 부르던 수민이가 아니었다. 그 차가운 질문에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악명 높았던 모 회사 콜센터 안내원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 듯한 딱딱한 말투에 말문이 막혔다. 말문도 막히고 숨도 턱 막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맞았다. 그냥 끊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찌질한 남자였고, 그 찌질이는 한없이 찌질했다.
- 보고 싶어서...
그건 사실이었다. 보고 싶었다. 정말 너무나 보고 싶었다. 눈물날 정도로 수민이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수민이는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 좀 참아 봐요.
조금만 참아요. 내가 금방 갈게... 수민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그것과는 다른 ‘좀 참아요’ 였다. 혼자 버텨야 한다는 거겠지... 혼자 지내야 한다는 거겠지...
- 못 참겠어...
- 외로워서 그래요. 집에만 혼자 있지 말고 사람들도 만나고 그러면 좀 나을 거예요.
- 싫어...
- 그래도 그래야 돼요.
- 혼자 있기 힘들어. 수민이가 옆에...
- 오빠 !
- .....
수민이가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바로 이어진 수민이의 한 마디에 나는 결국 무너졌다. 아주 차분한, 조금도 감정이 섞이지 않은 듯한, 너무나 차분한 말투로 수민이는 말했다.
- 우리가... 다시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쾅~...
또 무언가가 머리를 때렸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어지러웠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전화기를 든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전화한 것을 후회했지만, 모든 후회가 그렇듯 아무 소용 없었다. 또 바보 같은 짓을 했군...
나를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사람, 자기가 내 첫사랑이 아닌 걸 아쉬워하며 꼭 마지막 사랑이 되리라고 다짐했던 사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듯했던 사람... 그 사람이 내 가슴에 차갑고 날카로운 말을 꽂았다. 그렇지, 자알~ 했어. 꽂을 땐 그렇게 꽂는 거야, 자지도... 비수도... 한번에, 끝까지, 깊숙히...
나는 수민이에게 있어서 이미 과거였다. 정리가 끝난 과거. 잊고 싶은 과거. 그런 하찮은 과거에 불과한 나였다. 현재만이 의미 있고 과거나 미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수민이에게 말했던 내가, 이제는 아무 의미 없는 바로 그 과거였다. 나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수민이에게 사랑을 구걸했지만, 수민이는 그렇게 내 마음의 쪽박을 깼다.
끝이었다.
그러나, 납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수민이라면... 그러나 그런 생각조차 쓸데없었다. 내가 아는 수민이?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나는 수민이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지난 몇 달 동안, 하루 24시간 나와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수민인데... 날 사랑한다고 말했던 수민인데... 날 놓아주지 않겠다고 했던 수민인데... 그 말들이 다 거짓이었단 말인가?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짧은 순간에 식을 수가 있는 건가?
외로워서라고? 내가 외롭다고? 누가 날 외롭게 만들었는데? 수민이가 다가오기 전까지, 나는 외로울 일이 없었다. 혼자라서 힘든 것도 없었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외로워서 그렇다고? 외로움은 결과지 원인이 아니다. 외로움은 상태지 이유가 아니다. 내가 외로울 거라고 생각했다면 왜 외로운지도 알 텐데...
그러나 수민이는 외로워서라고 했다. 외로워서 수민이를 보고 싶어하는 거라고 했다. 사람들을 만나라고? 누구를? 수민이가 없는데 누구를 만나서 뭘 어떻게 하라고... 수민이가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건 그저 누구든 상관 없이 아무나 만나면 되는 거였나? 그랬어? 아무나 만나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서운했다. 섭섭했다. 수민이가 야속했고, 수민이 어머님이 원망스러웠다. 모든 잘못이 수민이 어머님에게 있는 것만 같았다. 왜 나를 싫어하는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겨우 한 번 봤으면서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나를 반대하는지...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몰라도, 왜 그러는지도 말해주지 않고 반대한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건 단지 내 사정일 뿐이었다. 항의하고 따질 수도 없었고, 그래 봐야 소용도 없을 게 뻔했다.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자고... 일어나고... 씻고... 움직이기는 했지만 아무 생각도 없었고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었다. 어렵게 수주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돌아오기 일쑤였다. 작업은 당연히 진행되지 않았다. 뜨거운 여름까지만 해도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던 회사는 갑자기 삐그덕거렸다. 문의전화는 불이 나고 미팅 약속은 밀렸지만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 진전되는 것도 없었다.
그러기를 며칠... 결국 일이고 뭐고 신경도 못 쓰고,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게 멍청하게 지낸 지 대엿새쯤 되었을까... 어느 날 저녁쯤 선배가 전화를 했고, 내가 사는 원룸까지 찾아왔다. 근처 카페에서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내 얼굴을 보고 걱정부터 해 주었다.
- 정우 너, 얼굴이 왜 이래? 무슨 일 있어?
- 아니, 일은 무슨...
-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요전에도 며칠 동안 연락 안 되다가 얼굴이 반쪽 돼 갖구 나타나더니...
- 미안해....
- 전화라도 돼야 말이지, 사람 답답하게... 근데, 몰골이 왜 이래? 어디 아픈 거야?
- 그냥 좀 그래... 근데, 중요하다는 일이 뭐였지?
- 그... H사 건 말이야... 너무 지연돼서 취소하겠대.
- 그래...?
- 뭐, 지난번 PT 이후로 진척이 없었잖아...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내 탓이라는 얘기로 들렸다. 수주 실적과 수주액 규모가 쑥쑥 증가하던 회사는 며칠 전부터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수민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에 얼이 빠져 버린 내가 팀을 깬 셈이었다. H사 프로젝트는 우리가 진행한 일 중에서도 규모가 큰 축에 속했고, 계약한 금액도 그 규모만큼 큰 건이었다.
- 다음주까지 위약금 달라더라. 김과장 그 새끼, 여유 있으니까 걱정 말라더니...
- 미안해, 형...
- 어차피 물 건너간 거, 얘기하면 뭐 해?
- 위약금은 전부 내가 변상할게... 정말 미안해...
위약금은 내가 전부 물겠다고 했다. 계약금은 수익에 포함되어 둘이 나누어 가졌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나 혼자 앞가림만 하면 되었던 나와 달리,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 선배에게는 그 돈이 큰 액수일 수도 있고, 중요했을 수도 있었다. 선배가 나를 탓한다 해도 섭섭한 마음이나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내 잘못이니까.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우리가 언제 내가 번 거, 네가 번 거 따진 적 있어? 위약금도 마찬가지야. 수익도 나눴으니까, 손실도 나누는 게 맞아.
- 아니야, 형. 그러지 마.
- 정우야, 나... 사업자 명의는 나지만, 한번도 난 사장이고 넌 직원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알아? 너도 날 동업자로 생각했다면, 지금 그런 말을...
- 그래도 형, 이건 나 때문에...
- 정우야 !
- ......
- 그만 해. 돈 얘기 하러 온 거 아니야.
그깟 돈 쯤이야... 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런 생각조차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돈이고 뭐고 다 귀찮고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일이 틀어지고 지연된 건 모두 내 탓이었으니까 그렇게 하는 게 나로서는 당연한 거였다. 그냥 그 뿐이었다.
- 그나저나, 너... 진짜 정신 나간 사람 같아. 무슨 일 있어?
- 미안해, 형...
- 미안하단 말 좀 그만 하고... 너 혹시... 애인이랑?
- ......
- 하, 참... 그렇게 좋던 커플이 어떻게 갑자기...
- ......
- 후우...~ 쯧, 그래, 좀 쉬어. 너 괜찮아질 때까지 일단 다른 사람 구해서 쓸게.
- ......
- 기존에 했던 회원사들 관리비용 들어오는 건 예전처럼 분배해 줄 테니까, 가끔 통장 확인해 보고...
- 안 그래도 돼, 형...
- 인심 쓰는 거 아니야. 네가 당연히 받아야 할 거 주는 거야.
- ......
- 그리고, 다시 일할 수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난 네가 빨리 추슬렀으면 좋겠다.
잠시 그렇게 앉아 있다가 선배는 먼저 일어나 나갔다. 선배는 내가 왜 정신나간 사람처럼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지 보러 온 거였다. 빨리 돌아와서 일하자고. 그러나 선배 눈에 비친 나는 도저히 정신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다른 결론을 내린 거였다. 새 인력을 충원하기로.
나는 그렇게 사랑도 잃고 팀 파트너도 잃었다. 정확히 말하면 직장도 잃었다. 선배는 언제든 돌아오라고 했지만 나 스스로가 그럴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않았었다. 낮에는 빨리 밤이 되기를 바랐고, 밤이 되면 술을 먹고 잘 뿐이었다. 실연당해서 충격을 받았다는 이유로 해야 할 일조차 못하고 방황하는 건 무책임한 짓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생각조차 못하고, 아무 것도 못하고 있었다.
선배와 잠깐 대화한 후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딸랑~ 방울이 울렸다. 수민이가 사다 달아놓은 방울이었다. 수민이 생각을 하자 눈물이 났다. 또 수민이가 보고 싶었다. 수민이도 나를 보고 싶어 할까? 웃기지도 않은 생각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치를 떨듯 진저리를 쳤다.
드나들 때마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우드득~... 방울을 잡아 뜯자 양면테이프가 떨어지며 큰 소리가 났다. 늘 하던 대로 무심코 실내화를 신고 들어왔다가 다시 벗어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그 실내화도 수민이가 고른 거였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러나, 방 안 어디를 보아도 수민이의 흔적이 가득했다. 천장에 잔뜩 붙은 야광별이며 아침마다 보는 거울, 베개커버와 이불커버는 물론 냉장고에 옹기종기 붙은 과일 모양 자석까지... 무엇을 보아도 수민이와 함께 산 거였고, 어디를 보아도 수민이가 생각났다. 외면하려 고개를 돌렸지만 그때 시선이 향한 벽에도 수민♡정우라고 수놓은 하트 모양 장식이 걸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 둘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일어나 불을 끄고 다시 누웠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불을 끄고 눈을 감아도 방안의 풍경이 생생했다. 그 한가운데에 수민이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고개를 저어 수민이의 모습을 떨쳐냈다. 천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 속에서 천장에 붙은 옥색 야광별들이 빛났다. 수민이가 사 와서 내 목말을 타고 함께 붙인 거였다. 내 목에 감기던 수민이의 허벅지, 뒷덜미에 느껴지던 수민이 사타구니의 후끈한 열기... 수민이를 내려 주며 그 따뜻한 부분에 얼굴을 파묻었고, 그 열기는 바로 침대로 이어져 수민이와 벌거벗고 뒹굴었었다.
내 냄새만큼 수민이의 체취도 많이 밴 침대, 수민이가 자기 침대보다도 익숙하다던 그 침대. 침대에서는 더욱 더 수민이가 생각나서 도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나, 의자에 앉자마자 불침 맞은 강아지처럼 펄쩍 뛰어 일어나야 했다.
- 아일러뷰~ 아일러뷰~...
엉덩이 밑에서 쿠션이 코맹맹이 소리로 비웃었다. 벌떡 일어나서 쿠션을 집어 던졌다. 쿠션이 벽에 맞고 또 소리를 질렀다. 아일러뷰~ 아일러뷰~....
어지러웠다. 머리에서 박동이 뛰었다. 박동 소리가 점점 커졌다. 머리를 움켜 쥐었다. 나는 분명히 가만히 서 있는데 벽은 빙글빙글 돌았다. 바닥도 돌고 천장도 돌았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비틀거리다가 책상을 짚고 겨우 버티어 섰다.
답답하고 막막했다. 헤어질 거라는 건 막연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헤어지게 되겠구나... 라고 생각하기만 할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수민이... 차라리 아무 연락이 없었더라면... 헤어지자는 통보가 없었더라면... 그냥 수민이를 보고 싶어하며 안타까와하는 게 나았다. 그러나 그런 미련도 잠시, 그 차갑던 목소리가 떠오르며 내 미련을 깼다.
우리가 다시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수민이의 목소리가 마치 옆에서 듣는 듯 생생하게 귀에 울렸다. 수민이의 차갑던 그 목소리는 영화 속 로봇의 기계음처럼 더 차갑게 바뀌었다. 억양 없는 로봇의 목소리가 머리 속에서 계속 들려왔다.
우리가 다시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다시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다.시.잘.될.수.있.을.것.같.아.요? 우.리.가.다.시.잘.될.수.있.을.것.같.아.요? 우.우.리.리.가.가.다.다.시.시.잘.잘.될.될.수.수.있.있.을.을.것.것.같.같.아.아.요.요.?.? 우.우.리.리.가.가.다.다.시.시.잘.잘.될.될.수.수.있.있.을.을.것.것.같.같.아.아.요.요.?.?.
머리 속에서 뭔지 모를 뭔가가 치솟아 뭉쳤다. 가만히 있으면 터질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다. 책상 위에 있던 모든 것들이 날아가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 쿵, 퍽, 쨍그랑, 털썩... 이것저것 어지럽게 널려 있던 책상 위에 남은 게 하나도 없을 때까지 쓸어 던지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하아...
그래도 머릿속의 그 덩어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귓속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팔다리가 저리듯이 머리가 저려 왔다. 눈 안쪽에서 경광등이 번쩍였다. 온 머리가 저릿저릿했다. 행군하는 군화 소리가 울렸다. 저벅... 저벅... 저벅...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 으아아아아아..... 크흐흐흐흐,
고함 끝에 울음이 터져나와 그대로 울부짖었다. 그러나 울음은 그렇게 한번 터지고 나서 거짓말같이 그쳤다. 그 다음, 또 적막이 이어졌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혼자였다. 사이렌도 조용했다. 경광등도 꺼졌다. 머리도 저리지 않았다.
수민이의 체취가 풍길 것 같은 그 방에 나 혼자였고, 이 세상에 철저히 나 혼자였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좋았는데, 내가 이토록 수민이를 바라고 있는데... 그러나 이미 지나간 과거에 불과한 그까짓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에겐 아니었지만, 수민이에게 나는 이미 과거였다.
우리가 다시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든 것을 매듭지은 듯한 말투, 수민이 혼자 결정하고, 마무리하고... 마치 자기 혼자 사랑했던 것처럼, 나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내 의사는 철저히 무시되었고, 수민이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였다. 아니, 무시되기는커녕, 내 생각을 말할 기회조차 없었다. 일방적이었다. 모든 걸 나에게 맞추어 주었던 수민이. 그러나 결정적으로 마지막에는 자기 맘대로 결정해버린 수민이.
보잘 것 없는 자기를 내가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던 수민이. 수민이처럼 예쁘고 날씬하고 풍만한 여자가 자기 자신이 보잘 것 없다니... 자기의 매력을 몰라서 하는 말로 들렸던 그 말도 거짓이었나? 나를 떠나기 위한 핑계를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나? 그래서 나는 그때 그렇게 혼란스러웠었나? 한번 삐져나간 생각은 자꾸자꾸 가지를 쳤고, 그 가지 마디마디에는 불신의 꽃이 피고 의심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장난감... 장난감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얻게 되면 아이는 며칠 동안 그것만 가지고 논다. 눈만 뜨면 그 장난감을 찾고 밥 먹는 것도 잊고 놀고, 심지어는 밥 먹을 때에도 한 손에 잡고 있고, 잘 때도 그걸 껴안고 잔다. 엄마보다도, 밥보다도 좋아하는 것처럼 그 장난감만 가지고 놀고,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 장난감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 그 장난감만 생각하고, 혹시 없어질까, 누가 가져가지나 않을까 불안해한다.
그러나, 장난감이라는 건 싫증이 나게 마련이다. 아이가 장난감을 좋아하는 것도 그때 잠시 뿐, 싫증이 나면 손이 가지 않게 되고, 결국엔 버려진다. 재미가 없어질 수도 있고, 다른 새 장난감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세상에서 제일 좋았던... 그건 절대로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젠 싫증이 난 것도 똑같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제는 좋아하지 않는... 그것도 거짓이 아니었다. 진짜 좋아서 가지고 놀았던 게 거짓이 아니었던 것처럼.
아이가 아무리 장난감을 좋아하해도 그때 잠시 뿐이라는 것을 장난감은 전혀 몰랐다. 아이가 장난감을 좋아하는 것일 뿐, 장난감은 아이를 좋아할 수도 없고, 좋아해서도 안 되는 거였다. ㅋㅋㅋ 장난감 주제에 무슨...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개 장난감에 불과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심하고 못난 생각이었지만 그때는 머릿속에 그런 생각밖에 없었다. 슬픔보다도, 야속함보다도 배신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수민이를 보고 싶어 안타까워했다.
지진이라도 겪은 것처럼, 싸움이라도 벌어졌던 것처럼 난장판이 된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지럼증도 사라지고 빙글빙글 돌던 방도 멈추었다. 그러나 앉을 생각도 못 하고, 다른 어떤 생각도,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 채 방 한가운데에 멍하니 그렇게 서 있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 한가운데에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황홀했던 그 방, 포근했던 그 방, 안식처였던 그 방, 천국 같았던 그 방... 수민이의 자취와 흔적으로 가득한 그 방... 그러나 수민이의 사랑이 없는 그 방은 지금 그 어느 밤거리의 뒷골목보다도 우중충했다. 사랑의 감옥 같은, 추억의 족쇄 같은 그 방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딱히 어디 갈 곳이 없었다. 아무 데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
......
또 술을 먹고... 또 취해서 자고...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눈을 떴는데, 잠을 깨고도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멍하니 누워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내가 집어던진 무언가에 맞아 유리가 깨졌지만 다행히 멀쩡히 돌아가던 벽시계의 바늘은 오후 다섯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한참 동안 샤워를 하고, 수염도 조심스레 말끔히 깎고... 머리에 무스도 신경 써서 바르고, 실크 셔츠에 얇은 여름 자켓까지 차려 입고 거울에 한참 비추어 보며 맵시를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우뚝 멈췄다. 나오긴 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왜 그렇게 갑자기 서둘러 나왔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무 데로나 발걸음을 옮겼다. 보이는 길을 따라 그냥 걸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걸었다. 걷다 보니 익숙한 길이 눈에 들어왔다. 길을 따라 계속 걷다가 문득 멈추었다. 멈춘 곳은 수민이와 자주 가던 카페 앞이었다.
허탈했다. 허무했다. 왜 거기 갔는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 곳이었을 뿐... 김유신을 생각했다. 천관녀와 천관사를 생각했다. 유신의 애마를 생각했다. 그러나 나에겐 베어 버릴 말이 없었고, 칼도 없었다. 칼이 있었다 해도 그곳까지 이끈 내 발목을 자를 만큼 유신에게 감정이 이입되지는 않았었다.
우중충한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듯했다. 날이 흐린 줄도 몰랐고, 우산을 챙길 생각은 당연히 하지 못했다. 달리 갈 곳도 생각나지 않았고, 목조 계단을 올라 이층의 카페에 들어갔다. 말없이 반겨 주는 카페 여주인은 여느 때와 같이 웃는 표정이었다. 이 여자가 알 리가 없지... 픽~ 쓴웃음이 났다. 수민이와 항상 앉던 창가 자리에 앉았다.
- 어머? 정우씨, 오랜만이다아~.
- 네. 안녕하셨어요?
- 수민씨는? 좀 나중에 오나 보네?
- ......
- ??
- 훗~...
대답할 말이 없었다. 또 한번 쓴웃음을 지었던 모양이다. 카페 여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상 주인을 따라 다니던 하얀 강아지가 테이블까지 따라왔다. 수민이가 귀여워하던 강아지였다. 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던 강아지... 우리가 쓰다듬어 주면 꼬리를 흔들며 손을 핥던 콩이... 재즈 앤 클래식이라는 카페 이름보다도 콩이네라고 더 많이 부르던 카페였다. 콩이네 가자... 콩이네서 만나자... 그렇게 귀여웠던 강아지를 봐도 그때는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일년동안 다니면서 단골이 되었던 카페... 그녀와 우리 사이에 다른 말은 필요 없을 정도로 항상 같은 걸 마셨다. 여주인은 금새 맥주 한 병을 가져다 주었다. 그녀는 쟁반을 든 채 잠깐 테이블 옆에 서 있었지만 고맙게도 쓸데없는 걸 물 물어보지 않았다. 옆에 잠깐 앉아 있었던 콩이도 쫄래쫄래 주인을 따라 돌아갔다.
혼자 마시는 맥주도 수민이 옆에서 마실 때만큼 시원하고 구수했다. 수민이는... 지금 수민이가 온다면 커피를 마시겠지? 이미 나를 배려하지 않는 수민이니까. 아니, 가정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의미 없고 우스운 가정이었다. 온다면이라니? 수민이가 올 리가 없잖아...
카페는 변함없이 똑같았다.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도 똑같았고, 맥주 맛도 똑같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도 똑같았고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것도 익숙했다. 카페 안에 조용히 퍼지는 음악도 익숙했고, 항상 비워 두었던 앞자리도 똑같았다. 그러나 여느 때와 달리 텅 빈 옆자리는 마치 텅 비어버린 내 마음처럼 허전했다.
흐리던 날씨는 결국 비를 뿌렸다. 갑자기 내리는 비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대부분은 준비 없이 나온 사람들이었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도 있고, 가까운 건물 처마 밑으로 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급히 택시를 잡아 타는 사람도 있었다. 일부는 우산을 펼쳐 썼지만, 겨우 한두 사람 보일 뿐이었다.
수민이가 즐겨 쓰던 무지개색 우산이 생각났다. 그 작은 우산에 둘이 들어가려면 거의 내 품에 안는 것처럼 수민이 어깨를 껴안아야 했다. 비가 내리면 응큼한 짓을 할 좋은 기회였다. 수민이의 어깨를 끌어안고 우산을 깊이 당겨 쓴 채 걸으며 수민이의 볼에 입맞추고, 수민이 입술에 내 볼을 들이대기도 했었다. 남들이 보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입맞추었다. 우산 속에 숨은 수민이와 내 눈엔 남들의 시선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신경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비만 내릴 뿐, 수민이도 없고 그 알록달록한 우산도 없었다. 혼자 남아 추억의 끝자락을 잡고 매달린 한 남자가 있을 뿐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때에 갑자기 닥친 이별은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만큼 당황스러웠다. 소나기는 우산으로 막거나 처마 밑으로 피할 수 있지만, 이별은 어떻게 막거나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 달랐다.
맥주 한 병을 놓고 창 밖만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빗방울이 맺힌 창 밖으로 사람들이 오고 가는 소리, 다른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 떠드는 소리, 건배하는 소리, 달그락거리는 찻잔 소리, 계단에 울리는 뚜벅뚜벅 발자국 소리, 삐걱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딸그랑거리는 작은 방울소리...
카페에 들어갈 때면 수민이가 와 있는 건 아닌지 구석자리를 먼저 살폈고,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 때면 딸랑거리는 그 소리가 날 때마다 문을 바라보았었다. 수민이의 흔적 투성이였던 내 방을 나왔어도 내가 가는 곳마다 수민이와 갔던 곳이었고, 모든 곳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이 수민이를 생각나게 했다.
그런 소리가 잦아들고, 테이블마다 켜졌던 희미한 조명이 하나 둘 꺼질 때 카페를 나섰다. 수민이와 만날 약속은 없었고, 아무 약속이 없었다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수민이가 아니라면 거기서 약속할 사람은 없었다.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앉았던 테이블에는 맥주병이 꽤 많이 늘어서 있었다.
카페 재즈 앤 클래식... 너무나 익숙했던 그 카페도, 익숙한 카페만큼 친했던 카페 여주인도, 내가 나설 때에도 따라오며 꼬리를 흔들던 강아지 콩이도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수민이와 함께 만난 인연은 수민이와 함께인 동안만 인연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발걸음은 둘이 걸을 때보다 훨씬 빨랐지만 혼자 걷는 길은 둘이서 걸을 때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 19부에서 계속
1.
해피엔딩을 원하시는 독자분들이 꽤 보입니다만, 제 경험담은 대부분 헤어진 이야기들입니다. 끝이 정해진 이야기죠. 제 기억에만 남아 있는 여인들이니만큼 곁에는 없는 게 맞지 않을까요? 쿨한 이별은 있었어도, 해피엔딩은... ^^;
2.
그때를 회상하면서 그때처럼 분위기 추욱 처져 있습니다.
저랑 같이 한잔 마셔주실 분~. ^^;
수민이의 결별 선언에 한 마디 반문도 못 하고 그냥 끄덕이다가 돌아왔지만, 막상 다음날이 되자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전날 있었던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아니,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수민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민이가 산소보다 물보다 중요한 것처럼 하루 종일 수민이와 통화하려고만 했다. 그러나 통화하기는 힘들었다.
수민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일부러 받지 않는 건지, 강의실이나 도서관이라서 받지 못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통화가 안 되니 그저 답답하고 짜증만 났다. 전화를 걸고 또 걸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식은 음식은 몇 번이든 다시 데울 수 있지만 식은 사랑은 다시 뜨거워질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쉬운 판단조차 하지 못했다. 판단은커녕 아무 생각도 없었다. 찌질하게, 다른 어떤 표현도 찾을 수 없이 진짜 찌질하게 수민이에게 매달렸다.
통화를 못해서 짜증나는 건 나 뿐이었을 것이다. 수민이는 오히려 내가 자꾸 전화를 거는 게 짜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생각도 못하고 계속 통화를 시도했고, 저녁 늦게, 수민이가 전화를 받아서 통화할 수 있었다. 수민이가 전화를 받으면서 신호음은 끊어졌지만 전화기 저편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 ......
- 수민아...
- 왜 전화하셨어요?
- ......
세상엔 숨길 수 없는 게 두 가지가 있다. 재채기와 사랑... 사랑하는 건 감추려 해도 감출 수가 없다. 어떻게 해도 티가 나니까. 그러나, 또 한 가지가 있었다.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것, 아니, 감추려 하지도 않는 것... 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감출 수 없었다. 그날 수민이의 목소리도 그랬다.
오빠~ 라고 반갑게 부르던 수민이가 아니었다. 그 차가운 질문에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악명 높았던 모 회사 콜센터 안내원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 듯한 딱딱한 말투에 말문이 막혔다. 말문도 막히고 숨도 턱 막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맞았다. 그냥 끊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찌질한 남자였고, 그 찌질이는 한없이 찌질했다.
- 보고 싶어서...
그건 사실이었다. 보고 싶었다. 정말 너무나 보고 싶었다. 눈물날 정도로 수민이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수민이는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 좀 참아 봐요.
조금만 참아요. 내가 금방 갈게... 수민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그것과는 다른 ‘좀 참아요’ 였다. 혼자 버텨야 한다는 거겠지... 혼자 지내야 한다는 거겠지...
- 못 참겠어...
- 외로워서 그래요. 집에만 혼자 있지 말고 사람들도 만나고 그러면 좀 나을 거예요.
- 싫어...
- 그래도 그래야 돼요.
- 혼자 있기 힘들어. 수민이가 옆에...
- 오빠 !
- .....
수민이가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바로 이어진 수민이의 한 마디에 나는 결국 무너졌다. 아주 차분한, 조금도 감정이 섞이지 않은 듯한, 너무나 차분한 말투로 수민이는 말했다.
- 우리가... 다시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쾅~...
또 무언가가 머리를 때렸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어지러웠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전화기를 든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전화한 것을 후회했지만, 모든 후회가 그렇듯 아무 소용 없었다. 또 바보 같은 짓을 했군...
나를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사람, 자기가 내 첫사랑이 아닌 걸 아쉬워하며 꼭 마지막 사랑이 되리라고 다짐했던 사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듯했던 사람... 그 사람이 내 가슴에 차갑고 날카로운 말을 꽂았다. 그렇지, 자알~ 했어. 꽂을 땐 그렇게 꽂는 거야, 자지도... 비수도... 한번에, 끝까지, 깊숙히...
나는 수민이에게 있어서 이미 과거였다. 정리가 끝난 과거. 잊고 싶은 과거. 그런 하찮은 과거에 불과한 나였다. 현재만이 의미 있고 과거나 미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수민이에게 말했던 내가, 이제는 아무 의미 없는 바로 그 과거였다. 나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수민이에게 사랑을 구걸했지만, 수민이는 그렇게 내 마음의 쪽박을 깼다.
끝이었다.
그러나, 납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수민이라면... 그러나 그런 생각조차 쓸데없었다. 내가 아는 수민이?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나는 수민이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지난 몇 달 동안, 하루 24시간 나와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수민인데... 날 사랑한다고 말했던 수민인데... 날 놓아주지 않겠다고 했던 수민인데... 그 말들이 다 거짓이었단 말인가?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짧은 순간에 식을 수가 있는 건가?
외로워서라고? 내가 외롭다고? 누가 날 외롭게 만들었는데? 수민이가 다가오기 전까지, 나는 외로울 일이 없었다. 혼자라서 힘든 것도 없었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외로워서 그렇다고? 외로움은 결과지 원인이 아니다. 외로움은 상태지 이유가 아니다. 내가 외로울 거라고 생각했다면 왜 외로운지도 알 텐데...
그러나 수민이는 외로워서라고 했다. 외로워서 수민이를 보고 싶어하는 거라고 했다. 사람들을 만나라고? 누구를? 수민이가 없는데 누구를 만나서 뭘 어떻게 하라고... 수민이가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건 그저 누구든 상관 없이 아무나 만나면 되는 거였나? 그랬어? 아무나 만나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서운했다. 섭섭했다. 수민이가 야속했고, 수민이 어머님이 원망스러웠다. 모든 잘못이 수민이 어머님에게 있는 것만 같았다. 왜 나를 싫어하는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겨우 한 번 봤으면서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나를 반대하는지...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몰라도, 왜 그러는지도 말해주지 않고 반대한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건 단지 내 사정일 뿐이었다. 항의하고 따질 수도 없었고, 그래 봐야 소용도 없을 게 뻔했다.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자고... 일어나고... 씻고... 움직이기는 했지만 아무 생각도 없었고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었다. 어렵게 수주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돌아오기 일쑤였다. 작업은 당연히 진행되지 않았다. 뜨거운 여름까지만 해도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던 회사는 갑자기 삐그덕거렸다. 문의전화는 불이 나고 미팅 약속은 밀렸지만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 진전되는 것도 없었다.
그러기를 며칠... 결국 일이고 뭐고 신경도 못 쓰고,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게 멍청하게 지낸 지 대엿새쯤 되었을까... 어느 날 저녁쯤 선배가 전화를 했고, 내가 사는 원룸까지 찾아왔다. 근처 카페에서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내 얼굴을 보고 걱정부터 해 주었다.
- 정우 너, 얼굴이 왜 이래? 무슨 일 있어?
- 아니, 일은 무슨...
-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요전에도 며칠 동안 연락 안 되다가 얼굴이 반쪽 돼 갖구 나타나더니...
- 미안해....
- 전화라도 돼야 말이지, 사람 답답하게... 근데, 몰골이 왜 이래? 어디 아픈 거야?
- 그냥 좀 그래... 근데, 중요하다는 일이 뭐였지?
- 그... H사 건 말이야... 너무 지연돼서 취소하겠대.
- 그래...?
- 뭐, 지난번 PT 이후로 진척이 없었잖아...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내 탓이라는 얘기로 들렸다. 수주 실적과 수주액 규모가 쑥쑥 증가하던 회사는 며칠 전부터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수민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에 얼이 빠져 버린 내가 팀을 깬 셈이었다. H사 프로젝트는 우리가 진행한 일 중에서도 규모가 큰 축에 속했고, 계약한 금액도 그 규모만큼 큰 건이었다.
- 다음주까지 위약금 달라더라. 김과장 그 새끼, 여유 있으니까 걱정 말라더니...
- 미안해, 형...
- 어차피 물 건너간 거, 얘기하면 뭐 해?
- 위약금은 전부 내가 변상할게... 정말 미안해...
위약금은 내가 전부 물겠다고 했다. 계약금은 수익에 포함되어 둘이 나누어 가졌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나 혼자 앞가림만 하면 되었던 나와 달리,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 선배에게는 그 돈이 큰 액수일 수도 있고, 중요했을 수도 있었다. 선배가 나를 탓한다 해도 섭섭한 마음이나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내 잘못이니까.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우리가 언제 내가 번 거, 네가 번 거 따진 적 있어? 위약금도 마찬가지야. 수익도 나눴으니까, 손실도 나누는 게 맞아.
- 아니야, 형. 그러지 마.
- 정우야, 나... 사업자 명의는 나지만, 한번도 난 사장이고 넌 직원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알아? 너도 날 동업자로 생각했다면, 지금 그런 말을...
- 그래도 형, 이건 나 때문에...
- 정우야 !
- ......
- 그만 해. 돈 얘기 하러 온 거 아니야.
그깟 돈 쯤이야... 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런 생각조차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돈이고 뭐고 다 귀찮고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일이 틀어지고 지연된 건 모두 내 탓이었으니까 그렇게 하는 게 나로서는 당연한 거였다. 그냥 그 뿐이었다.
- 그나저나, 너... 진짜 정신 나간 사람 같아. 무슨 일 있어?
- 미안해, 형...
- 미안하단 말 좀 그만 하고... 너 혹시... 애인이랑?
- ......
- 하, 참... 그렇게 좋던 커플이 어떻게 갑자기...
- ......
- 후우...~ 쯧, 그래, 좀 쉬어. 너 괜찮아질 때까지 일단 다른 사람 구해서 쓸게.
- ......
- 기존에 했던 회원사들 관리비용 들어오는 건 예전처럼 분배해 줄 테니까, 가끔 통장 확인해 보고...
- 안 그래도 돼, 형...
- 인심 쓰는 거 아니야. 네가 당연히 받아야 할 거 주는 거야.
- ......
- 그리고, 다시 일할 수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난 네가 빨리 추슬렀으면 좋겠다.
잠시 그렇게 앉아 있다가 선배는 먼저 일어나 나갔다. 선배는 내가 왜 정신나간 사람처럼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지 보러 온 거였다. 빨리 돌아와서 일하자고. 그러나 선배 눈에 비친 나는 도저히 정신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다른 결론을 내린 거였다. 새 인력을 충원하기로.
나는 그렇게 사랑도 잃고 팀 파트너도 잃었다. 정확히 말하면 직장도 잃었다. 선배는 언제든 돌아오라고 했지만 나 스스로가 그럴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않았었다. 낮에는 빨리 밤이 되기를 바랐고, 밤이 되면 술을 먹고 잘 뿐이었다. 실연당해서 충격을 받았다는 이유로 해야 할 일조차 못하고 방황하는 건 무책임한 짓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생각조차 못하고, 아무 것도 못하고 있었다.
선배와 잠깐 대화한 후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딸랑~ 방울이 울렸다. 수민이가 사다 달아놓은 방울이었다. 수민이 생각을 하자 눈물이 났다. 또 수민이가 보고 싶었다. 수민이도 나를 보고 싶어 할까? 웃기지도 않은 생각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치를 떨듯 진저리를 쳤다.
드나들 때마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우드득~... 방울을 잡아 뜯자 양면테이프가 떨어지며 큰 소리가 났다. 늘 하던 대로 무심코 실내화를 신고 들어왔다가 다시 벗어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그 실내화도 수민이가 고른 거였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러나, 방 안 어디를 보아도 수민이의 흔적이 가득했다. 천장에 잔뜩 붙은 야광별이며 아침마다 보는 거울, 베개커버와 이불커버는 물론 냉장고에 옹기종기 붙은 과일 모양 자석까지... 무엇을 보아도 수민이와 함께 산 거였고, 어디를 보아도 수민이가 생각났다. 외면하려 고개를 돌렸지만 그때 시선이 향한 벽에도 수민♡정우라고 수놓은 하트 모양 장식이 걸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 둘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일어나 불을 끄고 다시 누웠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불을 끄고 눈을 감아도 방안의 풍경이 생생했다. 그 한가운데에 수민이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고개를 저어 수민이의 모습을 떨쳐냈다. 천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 속에서 천장에 붙은 옥색 야광별들이 빛났다. 수민이가 사 와서 내 목말을 타고 함께 붙인 거였다. 내 목에 감기던 수민이의 허벅지, 뒷덜미에 느껴지던 수민이 사타구니의 후끈한 열기... 수민이를 내려 주며 그 따뜻한 부분에 얼굴을 파묻었고, 그 열기는 바로 침대로 이어져 수민이와 벌거벗고 뒹굴었었다.
내 냄새만큼 수민이의 체취도 많이 밴 침대, 수민이가 자기 침대보다도 익숙하다던 그 침대. 침대에서는 더욱 더 수민이가 생각나서 도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나, 의자에 앉자마자 불침 맞은 강아지처럼 펄쩍 뛰어 일어나야 했다.
- 아일러뷰~ 아일러뷰~...
엉덩이 밑에서 쿠션이 코맹맹이 소리로 비웃었다. 벌떡 일어나서 쿠션을 집어 던졌다. 쿠션이 벽에 맞고 또 소리를 질렀다. 아일러뷰~ 아일러뷰~....
어지러웠다. 머리에서 박동이 뛰었다. 박동 소리가 점점 커졌다. 머리를 움켜 쥐었다. 나는 분명히 가만히 서 있는데 벽은 빙글빙글 돌았다. 바닥도 돌고 천장도 돌았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비틀거리다가 책상을 짚고 겨우 버티어 섰다.
답답하고 막막했다. 헤어질 거라는 건 막연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헤어지게 되겠구나... 라고 생각하기만 할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수민이... 차라리 아무 연락이 없었더라면... 헤어지자는 통보가 없었더라면... 그냥 수민이를 보고 싶어하며 안타까와하는 게 나았다. 그러나 그런 미련도 잠시, 그 차갑던 목소리가 떠오르며 내 미련을 깼다.
우리가 다시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수민이의 목소리가 마치 옆에서 듣는 듯 생생하게 귀에 울렸다. 수민이의 차갑던 그 목소리는 영화 속 로봇의 기계음처럼 더 차갑게 바뀌었다. 억양 없는 로봇의 목소리가 머리 속에서 계속 들려왔다.
우리가 다시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다시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다.시.잘.될.수.있.을.것.같.아.요? 우.리.가.다.시.잘.될.수.있.을.것.같.아.요? 우.우.리.리.가.가.다.다.시.시.잘.잘.될.될.수.수.있.있.을.을.것.것.같.같.아.아.요.요.?.? 우.우.리.리.가.가.다.다.시.시.잘.잘.될.될.수.수.있.있.을.을.것.것.같.같.아.아.요.요.?.?.
머리 속에서 뭔지 모를 뭔가가 치솟아 뭉쳤다. 가만히 있으면 터질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다. 책상 위에 있던 모든 것들이 날아가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 쿵, 퍽, 쨍그랑, 털썩... 이것저것 어지럽게 널려 있던 책상 위에 남은 게 하나도 없을 때까지 쓸어 던지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하아...
그래도 머릿속의 그 덩어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귓속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팔다리가 저리듯이 머리가 저려 왔다. 눈 안쪽에서 경광등이 번쩍였다. 온 머리가 저릿저릿했다. 행군하는 군화 소리가 울렸다. 저벅... 저벅... 저벅...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 으아아아아아..... 크흐흐흐흐,
고함 끝에 울음이 터져나와 그대로 울부짖었다. 그러나 울음은 그렇게 한번 터지고 나서 거짓말같이 그쳤다. 그 다음, 또 적막이 이어졌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혼자였다. 사이렌도 조용했다. 경광등도 꺼졌다. 머리도 저리지 않았다.
수민이의 체취가 풍길 것 같은 그 방에 나 혼자였고, 이 세상에 철저히 나 혼자였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좋았는데, 내가 이토록 수민이를 바라고 있는데... 그러나 이미 지나간 과거에 불과한 그까짓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에겐 아니었지만, 수민이에게 나는 이미 과거였다.
우리가 다시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든 것을 매듭지은 듯한 말투, 수민이 혼자 결정하고, 마무리하고... 마치 자기 혼자 사랑했던 것처럼, 나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내 의사는 철저히 무시되었고, 수민이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였다. 아니, 무시되기는커녕, 내 생각을 말할 기회조차 없었다. 일방적이었다. 모든 걸 나에게 맞추어 주었던 수민이. 그러나 결정적으로 마지막에는 자기 맘대로 결정해버린 수민이.
보잘 것 없는 자기를 내가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던 수민이. 수민이처럼 예쁘고 날씬하고 풍만한 여자가 자기 자신이 보잘 것 없다니... 자기의 매력을 몰라서 하는 말로 들렸던 그 말도 거짓이었나? 나를 떠나기 위한 핑계를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나? 그래서 나는 그때 그렇게 혼란스러웠었나? 한번 삐져나간 생각은 자꾸자꾸 가지를 쳤고, 그 가지 마디마디에는 불신의 꽃이 피고 의심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장난감... 장난감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얻게 되면 아이는 며칠 동안 그것만 가지고 논다. 눈만 뜨면 그 장난감을 찾고 밥 먹는 것도 잊고 놀고, 심지어는 밥 먹을 때에도 한 손에 잡고 있고, 잘 때도 그걸 껴안고 잔다. 엄마보다도, 밥보다도 좋아하는 것처럼 그 장난감만 가지고 놀고,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 장난감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 그 장난감만 생각하고, 혹시 없어질까, 누가 가져가지나 않을까 불안해한다.
그러나, 장난감이라는 건 싫증이 나게 마련이다. 아이가 장난감을 좋아하는 것도 그때 잠시 뿐, 싫증이 나면 손이 가지 않게 되고, 결국엔 버려진다. 재미가 없어질 수도 있고, 다른 새 장난감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세상에서 제일 좋았던... 그건 절대로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젠 싫증이 난 것도 똑같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제는 좋아하지 않는... 그것도 거짓이 아니었다. 진짜 좋아서 가지고 놀았던 게 거짓이 아니었던 것처럼.
아이가 아무리 장난감을 좋아하해도 그때 잠시 뿐이라는 것을 장난감은 전혀 몰랐다. 아이가 장난감을 좋아하는 것일 뿐, 장난감은 아이를 좋아할 수도 없고, 좋아해서도 안 되는 거였다. ㅋㅋㅋ 장난감 주제에 무슨...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개 장난감에 불과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심하고 못난 생각이었지만 그때는 머릿속에 그런 생각밖에 없었다. 슬픔보다도, 야속함보다도 배신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수민이를 보고 싶어 안타까워했다.
지진이라도 겪은 것처럼, 싸움이라도 벌어졌던 것처럼 난장판이 된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지럼증도 사라지고 빙글빙글 돌던 방도 멈추었다. 그러나 앉을 생각도 못 하고, 다른 어떤 생각도,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 채 방 한가운데에 멍하니 그렇게 서 있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 한가운데에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황홀했던 그 방, 포근했던 그 방, 안식처였던 그 방, 천국 같았던 그 방... 수민이의 자취와 흔적으로 가득한 그 방... 그러나 수민이의 사랑이 없는 그 방은 지금 그 어느 밤거리의 뒷골목보다도 우중충했다. 사랑의 감옥 같은, 추억의 족쇄 같은 그 방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딱히 어디 갈 곳이 없었다. 아무 데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
......
또 술을 먹고... 또 취해서 자고...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눈을 떴는데, 잠을 깨고도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멍하니 누워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내가 집어던진 무언가에 맞아 유리가 깨졌지만 다행히 멀쩡히 돌아가던 벽시계의 바늘은 오후 다섯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한참 동안 샤워를 하고, 수염도 조심스레 말끔히 깎고... 머리에 무스도 신경 써서 바르고, 실크 셔츠에 얇은 여름 자켓까지 차려 입고 거울에 한참 비추어 보며 맵시를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우뚝 멈췄다. 나오긴 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왜 그렇게 갑자기 서둘러 나왔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무 데로나 발걸음을 옮겼다. 보이는 길을 따라 그냥 걸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걸었다. 걷다 보니 익숙한 길이 눈에 들어왔다. 길을 따라 계속 걷다가 문득 멈추었다. 멈춘 곳은 수민이와 자주 가던 카페 앞이었다.
허탈했다. 허무했다. 왜 거기 갔는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 곳이었을 뿐... 김유신을 생각했다. 천관녀와 천관사를 생각했다. 유신의 애마를 생각했다. 그러나 나에겐 베어 버릴 말이 없었고, 칼도 없었다. 칼이 있었다 해도 그곳까지 이끈 내 발목을 자를 만큼 유신에게 감정이 이입되지는 않았었다.
우중충한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듯했다. 날이 흐린 줄도 몰랐고, 우산을 챙길 생각은 당연히 하지 못했다. 달리 갈 곳도 생각나지 않았고, 목조 계단을 올라 이층의 카페에 들어갔다. 말없이 반겨 주는 카페 여주인은 여느 때와 같이 웃는 표정이었다. 이 여자가 알 리가 없지... 픽~ 쓴웃음이 났다. 수민이와 항상 앉던 창가 자리에 앉았다.
- 어머? 정우씨, 오랜만이다아~.
- 네. 안녕하셨어요?
- 수민씨는? 좀 나중에 오나 보네?
- ......
- ??
- 훗~...
대답할 말이 없었다. 또 한번 쓴웃음을 지었던 모양이다. 카페 여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상 주인을 따라 다니던 하얀 강아지가 테이블까지 따라왔다. 수민이가 귀여워하던 강아지였다. 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던 강아지... 우리가 쓰다듬어 주면 꼬리를 흔들며 손을 핥던 콩이... 재즈 앤 클래식이라는 카페 이름보다도 콩이네라고 더 많이 부르던 카페였다. 콩이네 가자... 콩이네서 만나자... 그렇게 귀여웠던 강아지를 봐도 그때는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일년동안 다니면서 단골이 되었던 카페... 그녀와 우리 사이에 다른 말은 필요 없을 정도로 항상 같은 걸 마셨다. 여주인은 금새 맥주 한 병을 가져다 주었다. 그녀는 쟁반을 든 채 잠깐 테이블 옆에 서 있었지만 고맙게도 쓸데없는 걸 물 물어보지 않았다. 옆에 잠깐 앉아 있었던 콩이도 쫄래쫄래 주인을 따라 돌아갔다.
혼자 마시는 맥주도 수민이 옆에서 마실 때만큼 시원하고 구수했다. 수민이는... 지금 수민이가 온다면 커피를 마시겠지? 이미 나를 배려하지 않는 수민이니까. 아니, 가정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의미 없고 우스운 가정이었다. 온다면이라니? 수민이가 올 리가 없잖아...
카페는 변함없이 똑같았다.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도 똑같았고, 맥주 맛도 똑같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도 똑같았고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것도 익숙했다. 카페 안에 조용히 퍼지는 음악도 익숙했고, 항상 비워 두었던 앞자리도 똑같았다. 그러나 여느 때와 달리 텅 빈 옆자리는 마치 텅 비어버린 내 마음처럼 허전했다.
흐리던 날씨는 결국 비를 뿌렸다. 갑자기 내리는 비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대부분은 준비 없이 나온 사람들이었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도 있고, 가까운 건물 처마 밑으로 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급히 택시를 잡아 타는 사람도 있었다. 일부는 우산을 펼쳐 썼지만, 겨우 한두 사람 보일 뿐이었다.
수민이가 즐겨 쓰던 무지개색 우산이 생각났다. 그 작은 우산에 둘이 들어가려면 거의 내 품에 안는 것처럼 수민이 어깨를 껴안아야 했다. 비가 내리면 응큼한 짓을 할 좋은 기회였다. 수민이의 어깨를 끌어안고 우산을 깊이 당겨 쓴 채 걸으며 수민이의 볼에 입맞추고, 수민이 입술에 내 볼을 들이대기도 했었다. 남들이 보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입맞추었다. 우산 속에 숨은 수민이와 내 눈엔 남들의 시선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신경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비만 내릴 뿐, 수민이도 없고 그 알록달록한 우산도 없었다. 혼자 남아 추억의 끝자락을 잡고 매달린 한 남자가 있을 뿐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때에 갑자기 닥친 이별은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만큼 당황스러웠다. 소나기는 우산으로 막거나 처마 밑으로 피할 수 있지만, 이별은 어떻게 막거나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 달랐다.
맥주 한 병을 놓고 창 밖만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빗방울이 맺힌 창 밖으로 사람들이 오고 가는 소리, 다른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 떠드는 소리, 건배하는 소리, 달그락거리는 찻잔 소리, 계단에 울리는 뚜벅뚜벅 발자국 소리, 삐걱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딸그랑거리는 작은 방울소리...
카페에 들어갈 때면 수민이가 와 있는 건 아닌지 구석자리를 먼저 살폈고,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 때면 딸랑거리는 그 소리가 날 때마다 문을 바라보았었다. 수민이의 흔적 투성이였던 내 방을 나왔어도 내가 가는 곳마다 수민이와 갔던 곳이었고, 모든 곳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이 수민이를 생각나게 했다.
그런 소리가 잦아들고, 테이블마다 켜졌던 희미한 조명이 하나 둘 꺼질 때 카페를 나섰다. 수민이와 만날 약속은 없었고, 아무 약속이 없었다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수민이가 아니라면 거기서 약속할 사람은 없었다.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앉았던 테이블에는 맥주병이 꽤 많이 늘어서 있었다.
카페 재즈 앤 클래식... 너무나 익숙했던 그 카페도, 익숙한 카페만큼 친했던 카페 여주인도, 내가 나설 때에도 따라오며 꼬리를 흔들던 강아지 콩이도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수민이와 함께 만난 인연은 수민이와 함께인 동안만 인연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발걸음은 둘이 걸을 때보다 훨씬 빨랐지만 혼자 걷는 길은 둘이서 걸을 때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 19부에서 계속
1.
해피엔딩을 원하시는 독자분들이 꽤 보입니다만, 제 경험담은 대부분 헤어진 이야기들입니다. 끝이 정해진 이야기죠. 제 기억에만 남아 있는 여인들이니만큼 곁에는 없는 게 맞지 않을까요? 쿨한 이별은 있었어도, 해피엔딩은... ^^;
2.
그때를 회상하면서 그때처럼 분위기 추욱 처져 있습니다.
저랑 같이 한잔 마셔주실 분~. ^^;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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