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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2 02:57 780회 0건
제2화


역 구내에서 밖으로 나서자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가 파고 들었다. 가죽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셔터가 내려진 거리를 따라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지훈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다녀와…”

작은 소리로 잡지를 들고 침대에 앉아 있던 유미의 작은 등과 홀쭉해진 얼굴, 공허한 눈빛과 윤기를 잃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떠 올랐다. 집에 혼자 남겨진 유미의 모습이 떠올라 지훈은 발 걸음을 멈추었다.

“요새 빠지는 애들이 많아서 오전 중만이라도 좀 도와달라는데?”

아침에 걸려온 레스토랑 점장의 전화였다. 하지만 유미의 태도는 단호했다.

“가지 마!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고 했잖아”

달라붙으며 애원하던 유미를 억지로 떼어놓고 집을 나섰다. 혼자서 그렇게 집을 나선 것도 며칠만의 일이었다.

“아르바이트 같은 거 안가면 안돼? 얼마가 필요해? 돈은 내가 낸다고 했었잖아”

아파트 앞 자판기에 캔 커피를 사러 간다고 해도 유미는 바로 따라 나섰다. 그 뿐만이 아니라 지훈이 방에서 일어서기만 해도 눈으로 그 모습을 쫓고 있었다. 같이 있는 동안 잠시도 떨어져 있으려고 하질 않았다. 멍한 무표정으로 방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 천정만 올려다 보고 있는가 싶으면 갑자기 짜증을 내며 TV를 켜기도 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옷속으로 지훈의 손을 넣게 하고는 섹스를 해달라고 하기도 했었다. 연말부터 계속해서 그렇게 둘이서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 온천여행 이후 유미가 좀 이상해지고 있다는 것은 지훈이도 느끼고 있었다. 망가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유미의 모습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었던 가슴아픔이 무엇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핑계로 집을 나섰던 것이었다.

“지훈아…”

이제 막 도착한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지훈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원했던 대로 유미 선배를 손에 넣은 것 치고는 얼굴색이 안좋은데?”

“더 이상 상관하지 말랬지?”

지혜였다. 지훈이 무서웠지만 결심이라도 굳힌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이제 그만 할 수는 없겠니? 지금이라면 아직.. 더 늦기 전에 이러는 거 그만 두자.. 유미선배를 이제 그만 놓아줘.. 지훈이도 사실은…”

“닥쳐”

“희성오빠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유미선배를 끌어들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 이대로라면 정말 유미선배 망가지고 말 거야.. 뭔가 화를 낼 대상이 필요하다면 내가 선배 대신 받아줄게.. 그러니까…”

철제 문이 울리는 소리가 지혜의 말을 끊었다. 지훈이 발로 문을 차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닥치라고 했지?”

지훈이 으르렁 거리며 지혜의 멱살을 잡았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내가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는 동안, 그 남자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동안 그 자식은… 그 개자식은 아무런 고통도 모르고 그렇게 살아왔었다고… 그게 왜 그자식이어야 했는데? 왜? 나면 안되었는데? 잘들어.. 희성이 그 자식이 가진 건.. 어쩌면 내가 가졌어야 했던 건지도 모르는 거라고. 나한테는 그 자식한테 모든 걸 빼앗을 권리가 있다고. 알아?”

“무..무슨말 하는 거야? 지훈아.. “

“지금도 온몸의 상처가 쑤신다고.. 이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도 않아. 그러니까 그 자식한테도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 한둘쯤은 남겨줘야 공평하지 않겠어? 그 자식 존재를 알고부터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얼마나 다짐해왔는지 알아? 아직 멀었어.. 절대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고.. 그래.. 이번엔 그 자식이 하는 연구인가 뭔가를 아예 망쳐줄까?”

지혜의 멱살을 바짝 틀어쥐고 광기에 가득한 눈빛으로 으르렁거렸다.

“진정해.. 어떻게 하면.. 그 화를 풀 수가 있겠니? 내가 뭐든지 다할게.. 응? 우리 한번 생각해 보자… 이런 짓 계속해봐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원한이 풀릴 리가 없잖아.. 나.. 이제 알 거 같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는 것으로는… 원한이나 고통은 가시질 않는 다는 걸… 복수 같은 거 해봐야.. 아무런 해결도 되지 않는다는 거… 이제 알거 같단 말야”

“뭘 이제 와서 착한척인데? 너도 유미를 가지고 잘도 놀았잖아? 그렇게 착한 척 하는 여자 정말 싫대매? 그래서 내편을 들었던 거 아냐? 너도 나랑 같은 종류라고”

이렇게까지 증오에 사로잡힌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지혜는 지훈의 원한이 이정도일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치 악마 같은 지훈의 모습을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했던 짓이.. 용서 받지 못할 짓이라는 거… 나도 잘 알아.. 그래서 이러는 거야. 평생이 걸려서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거 잘 알기 때문에… 제발 부탁이야 지훈아.. 이제 그만해. 유미 선배를 이제 그만 놓아줘. 한번 생각해 보라고..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건.. 네가 당했던 그 일을 네가 네 손으로 되풀이 하고 있는 거 뿐이잖아”

지훈이 멱살을 틀어쥔채 지혜의 뺨을 후려쳤다. 자신의 분노를 있는 힘껏 뿜어내고 있었다. 지혜가 지훈의 발밑으로 쓰러졌다. 지혜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딴 남자랑 똑같이 만들지 말라고”

분노에 떨고 있는 지훈을 올려다 보았다. 지혜의 눈에 비친 지훈의 모습은 분노도 두려움도 아닌 고통만을 등에 지고 힘들어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제발 그만해… 유미 선배.. 사실은…”

지훈의 발길질이 지혜의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지혜는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아스팔트 위를 구르고 있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게 마지막 경고야.. 잘 들어.. 내 앞을 가로 막을 생각하지 말라고. 앞으로 끼어 든다던가.. 방해를 한다면… 정말 죽여버릴 거니까”

마치 내뱉듯이 말을 마친 지훈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문을 닫은 지훈은 한동안 문에 기대어 서서 움직일 못하고 있었다.

“그딴 남자랑 똑같이 만들지 말라고…”

혼자 남겨진 지혜는 아픔을 참고 몸을 일으켰다. 지훈이 사라진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지영은 자신에게 맡겨두라고 했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어떻게든 해서라도…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포기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자 침대에 앉아 있던 유미의 실루엣이 역광에 비쳐 보였다.

“다녀왔어.. 야?”

유미는 잡지를 손에 꼭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왜그래?”

설마.. 아침에 나갈 때부터 지금까지? 벽에 걸린 시계는12시가 넘어 있었다. 설마 계속 저 자세로…?

“유미야”

당황한 지훈이 안으로 들어가 유미의 어깨를 흔들었다. 마치 죽은 생선 같이 탁한 눈에 약간 생기가 되돌아 오는 듯이 보였다. 천천히 지훈이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쩐 일이야? 뭐 안가지고 간 거라도 있어? 아르바이트 늦겠다…”

“지금 다녀 오는 길이야. 벌써 점심시간이라고”

“아.. 그렇구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유미도 잠깐 놀라는 듯 했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럼.. 점심 먹어야겠네.. 볶음밥 해줄까?”

지훈을 보고 있었지만 지훈을 보고 있지 않았다. 밝았던 표정도 쾌활함도 화려함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생기없는 표정이었다. 지훈의 가슴이 다시한번 아파지는 것 같았다.

“좀 나갔다 오자. 부모님 내일 돌아오지? 집에 가기 전에 외식이라도 하고 오자”

“응.. 바로 준비할게”


“연초라서 그런가? 제법 막히는데?”

“…그러네…”

“세일이라도 하나보지?”


“그러네…”

“그렇군…”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복잡한 거리였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사이 좋은 연인사이로 보여질 것이었다. 유미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지훈이에게 달라붙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오고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화려해 보이는 쇼윈도우의 장식도, 복잡한 거리의 풍경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훈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거..너 한테 잘 어울릴 거 같은데?”

크림색 바탕에 꽃무늬가 들어간 긴 원피스가 쇼 윈도우에 걸려 있었다. 유미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 고개도 들지 않았다. 지훈이 어떤 옷을 보고 얘기하고 있는지 보려고조차도 하지 않았다.

“한번 입어 볼래?”

“시착?”

“싫어?”

“아니.. 지훈이가 입으라면 어떤 옷이든 괜찮아”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였다.

“어머 정말 예쁘세요..”

탈의실의 문이 열리고 유미가 나오자 마자 여자 점원이 탄성을 질렀다.

“정말 잘 어울리시는데요?”

차분한 색상의 원피스는 비록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지만 유미가 본래 가지고 있던 청초하면서도 가녀린 분위기를 더욱 더 잘 드러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미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흥미 없는 듯한 눈으로 앞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미야..’

유미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후배들을 챙겨주던 유미의 모습이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부드러움을 가르쳐 준 여자..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같은 모습이었지만 혼이 빠져 있는 인형일 뿐이었다. 자신이 원했던 것이 이것이었나…

“자.. 포장해 주세요”

지훈은 그렇게 말을 하고 가죽점퍼 주머니에서 꼬깃하게 접혀 있는 지폐를 꺼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손끝으로 주름을 펴고 있는 모습을 유미가 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지훈이 입을 열었다.

“아 이거? 아르바이트 월급.. 신경 안써도 돼”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도 유미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듯 굳은 표정이었다.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유미의 태도에 점원도 이상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이었다. 지훈이 일방적으로 말을 걸었고, 유미가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조용한 식사였다.

“…가능한 빨리.. 가능하면 내일이라도 돌아올게”

눈을 내려깔고 쇼핑백을 들고 걸어가는 유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 틈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지훈은 그 자리에 서서 그렇게 보고만 있었다.


“아. 긴장된다.. 아.. 긴장 돼”

“야야.. 진정해.. 이제와서 아무리 긴장해봐야 결과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유미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교복 위에 코트를 입은 유미가 희성의 왼쪽에서 팔짝팔짝 뛰어가듯이 걷고 있었다. 저만치 보이는 게시판 앞에는 사람들이 웅성이며 모여 있었다. 환성을 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깨를 떨어트리고 친구들에게 위로를 받으며 걸어오는 여자 아이와 스쳐 지나갔다.

“뭐야.. 자기는 합격 했다 이거지? 지 혼자 여유 만만해서는… 조금은 내 긴장을 풀어주는 척이라도 좀 해 보란 말이야.. 남자가 어째 그러니? 세심하지 못해서는…”

“아.. 알았어 알았어…여튼 뭐.. 1년 정도 재수하는 거.. 아무것도 아냐.. 그러니까… 아얏!!”

유미의 주먹이 제대로 꽃혔다. 희성은 옆구리를 잡고 뒹굴었다.

“아..야야야.. 너 이자식.. 정말 아프단 말야”

“네가 맞을 소리 했잖아.. 나쁜 놈”

빨간 리본을 팔랑거리며 유미가 저만치로 뛰어 가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희성이도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 잘못했어.. 같이 가…”

W대학의 영문과 합격발표 장소였다. 희성은 물론 합격이 결정되어 있었다. 합격일 뿐만 아니라 장학생이었다. 의지할 곳 없는 희성이로써는 무엇보다도 잘된 일이었다. 유미도 유미의 부모님도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었다.

“유미야.. 요새 누가 합격 발표를 일부러 보러가.. 그냥 인터넷으로 보면 되지.. 이 추운데.. 너 추운 거 싫어하잖아”

“분위기도 몰라? 분위기? 이건 일종의 이벤트 같은 거란 말야. 잔소리 말고 따라 오기나 해”

“하여간에.. 이벤트는 무척 좋아한다니까.. 무슨 기념일 같은 건 꼭 챙겨요..어? 뭐야? 긴장 다 풀렸네?”

“뭐.. 할 건 다 했으니까.. “

그러니까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니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마지막 대회에서 결승을 눈 앞에 두고 졌을 때만 해도 최선을 다 했다는 생각에 억울 했지만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다리가 땅에 닿아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옆에 있는 느긋한 소꿉친구는 아무 것도 몰랐다. 합격하면… 희성이에게… 마음을 그렇게 굳히고 있던 유미가 희성의 얼굴을 흘깃 쳐다 보았다.

“유미야.. 수험번호 몇번이었지?”

“아냐.. 내가 볼래”

물론 수험번호 따위는 외우고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작은 글씨의 숫자들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畇? 다리가 떨려왔다.

“아..!”

“왜..왜 그래?”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는 희성을 무시하고 유미는 입을 반쯤 벌린채 게시판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유미야”

“있다!”

“응?”

“있어.. 있다구..”

“붙은 거야? 합격인 거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모습으로 유미는 게시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고개만을 끄덕이고 있었다. 합격한 기쁨을 폭발시키며 잔뜩 자랑을 늘어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희성의 예상은 어긋났다. 유미는 진심으로 안심한 듯한 표정으로 그저..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잘됐다.. 정말 잘 됐다…”

“축하해”

유미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 대신 희성이 쪽을 돌아보며 드디어 평소의 눈부신 미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걸로 또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야”


집앞에 있는 작은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희성이가 사온 따뜻한 캔커피를 유미에게 건네 주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응 고마워.. 아아.. 뭔가 허탈해”

그렇게 말을 하며 유미가 뚜껑을 땄다.

“축하해.. 하지만 정말 W대학으로 괜찮겠어? 영문학이면 F여대가 더 낫지 않니? 유명한 교수들도 많은 것 같던데”

“뭐야… 그 말투는.. 내가 같이 가는 게 싫어? 같이 있으면 뭐 안될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뭐.. 그건 아니지만…”

“아.. 알았다. 내 눈치 안보이는 곳에서 여자애들이랑 놀려고 그러지? 무리지 그건.. 포기해.. 희성이 너 같이 평범한 얼굴로 여자친구가 왠 말이니… 게다가 희성이 넌 여자가 어떤 걸 좋아하는 줄도 모르잖아.. 옷도 잘 못입고.. 또.,..”

“아.. 네~ 네~ 충고 아주 고맙네요”

평소대로의 잡답이었다. 평소대로라면 거기서 끝이었다. 한마디 더 덧붙이려는 유미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는 희성이. 대게는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자.. 넌 어떤데? 왜 굳이 W대학인 건데? 내가 있어서 그런 거 아냐? 내가 있으니까 W대학을 고집하는거 아니냐고..”

“뭐.. 뭐야..”

“대학까지 날 따라와서.. 말야.. 내 기분 같은 것도 좀 생각해 달라고”

여느 때와는 다른 말투에 당황스러웠다.

“뭐. 뭐라고?”

“아.. 유미 너 혹시.. 나한테 반해서 그런 거 아냐? 그런 거야? 그렇구나… 여태 모르고 있었네”

놀리는 듯한 말투에 드디어 유미가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뭐라고? 뭘 잘난척이야? 그럴 리가.. 그럴 리가…”

하지만 거기까지 얘기한 유미가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뭐야~”

고개를 숙인 유미를 들여다 보기라도 하듯이 희성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시선을 피하고 있어도 희성의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다.

“…없잖아…”

“… 그치? 우린 그저 소꿉친구일 뿐인데 뭐”

간신히.. 드디어.. 합격을 했다. 필사적이었다. 유미가 W대학을 가겠다고 나서자 담임선생조차 말리고 나설 지경이었다. 희성이쪽은 문제 없었다. 가장 어렵다는 의대조차도 합격하고도 남을 실력이었다. 같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지금처럼 함께 다니기 위해서 정말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그랬는데… 어째서.. 이런 식으로… 평소라면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을 희성이가 왜 오늘은 이런식으로 나오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유미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차피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잖아’ 라던가 ‘어쩔 수 없으니까 같이 다녀줄게’ 정도잖아 유미 네 기분은”

“당연한거…… 아냐?”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고 하는 자신의 성격탓에 솔직해 지지 못하는 자신의 성격이 원망스러웠다.

“그런 거라면 W대학에 오지 말고 F여대를 가”

벤치 위에 올려 두었던 가방을 들며 희성이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 기다려.. 희성아.. 기다려…”

“난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아. 대학에 가서까지도.. 지금처럼 마찬가지인 거 싫어. 유미 너랑 소꿉친구인 거 이제 그만하고 싶어”

당황스러워서 따라 일어섰다. 희성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합격하면.. 합격만 하면 희성이에게 말하려고 했었다. 그럴 생각으로 희성을 달래서 합격발표장까지 같이 왔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원에 잠시 들르자고 한 것도 유미였다. 그랬는데.. 어쩌면.. 어쩌면 좋을지 몰랐다.

“미안.. 사과할게… 희성이 놀린 거.. 그러니까.. 대학에 가면,,, 희성이 너 방해 안할게.. 귀찮게 안할 테니까… 그러니까.. 다른학교 가라는 말 같은 건.. 하지 마”

“그게 아니란 말야”

“꺄악~!”

갑자기 돌아선 희성이 유미를 끌어 안고 말았다. 있는 힘껏 유미를 안고 있었다.

“나 유미 너,, 사랑한단 말야”

‘뭐..??’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계속.. 좋아했었어. 이제 더 이상 유미 너랑 소꿉친구로만 남아 있기 싫단 말야. 대학에 가서는 내 여자친구가 되어줬으면 해”

희성의 말이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마음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희성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그동안 그렇게 생각해 오고 있었다. 희성이도 그럴 것이라는 엷은 기대를 한 적은 있었지만 같은 마음일 줄은 몰랐었다. 관계가 깨어지느니 차리라 소꿉친구인 채로 남아 있을 수만 있어도 좋았다. 그랬었는데.. 이렇게 자신을 안아주고 더구나 고백이라니… 희성이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다. 마치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인 것만 같았다. 고개를 들었다. 빨개진 희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한번 확실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사랑해 유미야…”

“희성아..”

말보다 먼저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서로를 얼마나 바라보고 있었는지 몰랐다.

“나도.. 사랑해 희성아.. 사랑해…”

라는 대답을 할 수 있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유미는 희성의 등을 마주 안았다. 따뜻했다. 포근한 느낌이었다. 그동안 느끼고 싶었던 온기를 온몸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긴다는 행복을 유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꼈던 것이었다. 그렇게 오랬동안 서로를 아끼고 생각하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을 축복이라도 하듯이 조용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유미를… 놓쳤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에 등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점심 먹자. 어서 들어와. 요리는 그렇게 해본 적이 없어서.. 지영이 보다는 별로겠지만…말야. 뭐해? 안들어오고? 춥지 않아?”

“아.. 아뇨.. 들어갈게요”


집앞에 이사짐 트럭이 서 있는 것을 흘려 보았다. 엘리베이터를 내려서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가다가 문득 그의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설마.. 희성이가 집에…?
뒷모습만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과 이제와서 무슨 얼굴로 그를 마주할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이 복잡하게 뒤엉키고 있어서 발걸음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머뭇거리다가는… 어서 그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다.

“대충 큰 짐은 다 옮긴 거 같으니까 좀 더 서두르자고”

현관 앞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란 작업복을 입은 흰머리가 섞인 나이 지긋한 남자가 팔짱을 끼고 젊은 작업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서.. 설마…?’

“집 넓이에 비해서는 짐도 얼마 없잖아? 이래서는 2톤트럭 하나면 충분 했겠는데?”

“저기.. 지금 뭐 하시는 거에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미는 그 남자에게 상황을 묻고 있었다.

“응? 보면 모르쇼? 이사짐 나르잖아 이사짐…”

“이사요?”

갑자기 집으로 들어온 젊은 여자를 지시를 내리던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 보았다. 쭉 뻗은 날씬한 다리에 진한 화장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댁은 누구슈?”

“아.. 저.. 전.. 옆집에 사는 사람인데요.. 정말 이사하는 거 맞아요?”

“뭐.. 보시는대로”

실내엔 잔뜩 종이 박스들이 쌓여져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남자친구와 자신의 그릇들이 놓여져 있던 찬장도, 어려운 생명공학 분야의 전문서들과, 유미가 즐겨 읽던 책들이 나린히 꽃혀 있던 책장도 전부 비워져 있었다. 살풍경한 부엌에는 테이블만이 남겨져 있었다.

“원래는 5일날 이사인데… 바쁠 것 같아서 미리 좀 준비를 하는 중이라우… 아 그런데.. 아가씨.. 아무리 옆집 사람이라고는 해도.. 멋대로 들어오면 곤란하지.. 방해하지 말고.. 볼일 보쇼”

남자의 말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도 않았다.

“거짓말.. 이사라니… 거짓말이야… 내게 말도 없이… 그럴 리가 없어…”

유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비틀 거리며 남자쪽으로 다가 갔다.

더 이상 희성이랑 만날 수 없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어.. 어디로 이사한대요? 어디로…?”

“미안하지만 그건 얘기해 줄 수 없지..아가씨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말야.. “

“가르쳐 주세요.. 어디죠? 어디로 가는 거죠? 그것만 가르쳐 주시면.. 뭐든지 다 해드릴게요.. 그러니까…”

“이봐 아가씨”

마치 제정신이 아닌 것만 같은 유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남자가 유미를 피하며 입을 열었다.

“이봐 아가씨..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미친 거 아냐?”

“저기.. 반장님.. 잠시만요..”

하지만 뒤에서 들리는 작업자의 목소리에 둘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가 않았다. 남자는 마치 잘 되었다는 듯이 유미를 피해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런 게 쓰레기통에서 나왔는데요.. 어떻게 하죠?”

“필요 없으니까 버린 거 아냐?”

젊은 남자는 손에 든 파란색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그런데 그게…”

“뭔데 그래?”

상자에는 유명 보석 브랜드l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남자는 뚜껑을 열었다.

“응? 이거.. 이거 진짜인 거야?”

상자 안에서는 형광등 불빛을 받아 다이아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미테이션이 아니라는 것쯤은 사내들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어떻게 하죠?”

“왜 이게 상자채 버려져 있는 거야…?”

당황스런 표정으로 얼굴만 마주 본 채 서 있는 남자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유미의 손이 남자의 손에서 반지를 빼앗아 들었다.

“이봐 아가씨.. 멋대로 만지지 말라고”

“…희성아..”

반지 안쪽에는 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희성이가 준비한 것이 틀림 없었다. 희성이 자신을 위해서 준비한 반지. 유미가 받았어야 될 반지였다. 이게 왜 이곳에.. 구체적인 것까지는 알 수 없어도 대충 짐작은 되었다. 자신의 탓이었다. 여름방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이 이 반지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쁘던 연구 중에서 짬을 내어서 돈을 모았던 것이 이 반지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틀림없이 빨개진 얼굴로 샵에 가서.. 고르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던 것임을 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 그랬는데… 자신은 희성을… 희성이가 그 사실을 깨닫고… 그래서… 쓸모가 없어졌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떨리는 손에서 반지가 굴러 떨어졌다. 건조한 소리를 내며 마루 바닥을 반지가 굴러가고 있었다.

“나.. 어떻게 해… 어떻게 하면…”

유미는 반지가 그렇게 굴러가는 것도 비틀비틀 문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윤기를 잃은 갈색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렇게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밖으로 나섰다.

“이봐 아가씨.. 혹시.. 이 집… 이 반지.. 혹시… 아가씨 거야?”

뒤에서 소리치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마치 몽유병자가 된 것만 같은 걸음이었다. 그렇게 유미는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저기.. 이 반지 이거.. 어떻게 하죠?”

“일단 짐 안에 넣어 두자고.. 오늘 작업은 이걸로 끝내고.. 정리하자고 자.. 서둘러”


‘희성아…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이제 와서… 내가… 그러지 않았으면… 이렇게… 안되었겠지?’


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곳은.. 이제 유미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희성이와의 연결점이 있는 곳은 이곳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끊어질 듯한 가는 실낱 같은 연결점이었지만 이곳 밖에 없어서 였다. 몇번이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던 집이 없어지고 있었기에 더더욱 이제 여기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얼굴을 볼 용기조차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좋았다. 그리운 온기의 흔적만이라도 느낄 수만 있다만… 만져 볼 수 있다면… 그저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렇게 멍한 생각으로 겨우 도착한 곳이 이 곳이었다.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연구실에서 희미하지만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누군가 안에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손잡이를 잡은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네?”

뒤를 돌아 보니 언젠가 본 적이 있던 연구원이 서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차림은 아니었지만 얼굴을 본 적이 있는 남자였다.

“다들 집에 가서 아무도 없어요.. 연말이다 보니.. 누가 이런 연구실에… 어? 당신은… 설마…?”

희미한 복도의 불빛 아래서 유미의 얼굴을 본 남자의 표정이 갈수록 일그러졌다.

“당신은.. 희성이…”

목소리도 적의에 차 있었다. 강한 적의가 느껴지는 눈초리였다.

“당신이 여길 왜 왔어? 여길 어떻게… 당신도 자격 없는 거 잘 알지? 뭐야? 이제와서 희성이가 잘 나갈 거 같으니까 그 꼬라지를 하고 다시 시작해 보자는 거야? 그렇게 몸을 내 굴리고서?”

“… 그런… 전… 그런 게…”

“따라와 봐.. 보여줄 게 있으니까”

혀를 차던 남자가 유미의 가는 팔목을 잡아 끌고 연구실 안으로 들어섰다. 망설이지도 않고 희성의 책상 앞으로 유미를 끌고 갔다.

“당신 무슨 생각으로 희성이랑 사겼던 거야? 양다리 걸치면서.. 희성이 같이 착한 자식을.. 잘도 가지고 놀았더군”

“아.. 아니에요.. 그런 적 없어요…”

남자가 희성이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없긴 뭐가 없는데? 내가 똑똑히 봤다고… 키 큰 남자애와 팔짱을 끼고 호텔로 들어가는 걸.. 빨간 리본에 긴 머리를 하고 다녔으니 내가 잘못 봤을리가 없지.. 암 틀림없이 당신이었다고”

“그.. 그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지훈이와 러브호텔에 갔던 건 셀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마음에 걸리는 게 너무 많아서 언제 그가 자신을 봤는지 자신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유미가 입을 다물고 있자 자신의 말을 긍정이라고 생각한 남자는 거칠게 유미를 밀어젖혔다.

“지금 이꼴은 도대체 또 뭐야?”

그의 시선은 유미의 미니스커트 차림을 훑어내리고 있었다.

“희성이를 유혹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나본데.. 안됐군.. 희성인 더 이상 이곳에 없어”

“어.. 없어요?”

“새해부터 희성이 연구를 기반으로 시작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출범하거든. 당연히 그 녀석도 중심 멤버 중 한사람이라고.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 그런…”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실낱 같은 연결고리도 끊어지고 말았다.

“희성이 한테는 해외 유명 연구소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도 와 있는 상황이라고. 알기나 해? 그 자식은 이제 연구자로써 장래가 확실해져 있는 남자야. 우리랑은 다르다고. 그런데 당신 같은 여자가 가당키나 한 거 같아?”

컴퓨터가 커졌다. 남자는 모니터를 가르켰다. 남자의 손을 따라 눈을 돌린 유미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이 사진… 이걸.. 희성이가… 지금껏…?”

유미의 사진이 바탕화면으로 되어 있었다. 뺨을 맞대고 어깨를 감싸안고 V자를 그려보이고 있는 사진. 빨간 얼굴에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띄우고 있는 두 사람의 사진. 이제 막 연인이 되었을 무렵의 두사람의 사진이었다. 대학 입학식 직전, 소꿉친구가 아닌 연인으로써 첫 데이트를 했던 날 찍은 사진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기쁨에 넘치는 유미와 희성이의 웃는 얼굴이 화멱 가득히 펼쳐져 있었다.

“… 당신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 녀석이 얼마나 힘이 없었는지 당신이 알기나 해? 우리가 걱정을 해도 괜찮다고 웃기만 하고.. 무리하고 있다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도저히 봐 줄 수가 없었다고… 그랬는데도.. 그 자식 해 낸 거라고…”

자신이 그렇게 심한 짓을 했는데도… 그랬는데도 희성이는 자신을… 끝까지 자신을… 그랬는데… 결국 자신은 희성이에게… 상처만 주었을 뿐이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유미에게 남자는 덧붙였다.

“그 바쁜 연구 중에도 틈만 나면 그 자식.. 이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고. 그 녀석이 어떤 기분으로 이 사진을 보고 있었을지 알기나 해?”

드디어 남자의 분노가 폭발했다.

“꺼져버려. 지금 당장 여기서 꺼져버리라고.. 그리고 잘 들어! 이제 두번 다시 희성이 앞에 나타나지 마! 너 같은 게 얼쩡거리면 희성이 경력에도 흠이 될 뿐이야. 알아들었으면 어서 꺼져버리라고!”

신기하게도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희성이 가버렸다. 이제 만날 수도 없었다. 더 이상.. 어디를 가도 만날 수가 없었다. 유미는 비틀거리듯 복도를 나왔다.

“어떻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희성이에게 어떻게 하면…”

유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복도를 걸어갔다.

문이 닫히고 유미가 나가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짜증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흐트러트린 후 전화기를 꺼냈다.

“아.. 선생님.. 접니다.. 실은.. 네… 연구실에.. 네.. 왔었어요… 그런데.. 울컥해서.. 그만… 네.. 알겠습니다…”


“저기.. 채원씨.. 선생님은요? 아침부터 안계시던데…”

“아. 본가에 갔어.. 정초잖아.. 오늘 늦게 돌아온다고는 했는데.. 왜? 볼 일 있어?”

침대에 엎드린 채 뒹굴거리던 채원은 다리를 흔들면서 잡지를 보거나 하며 오랜만의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급한 일이면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보던가”

하지만 여전히 잡지에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 그렇군요.. 아 저.. 잠깐 편의점에 좀 다녀올게요”

“그건 안돼”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화장을 하지 않고 있어서인가 TV에서 볼 때 보다는 훨씬 더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말투는 딱딱했다.

“아.. 왜.. 왜 그러세요? 잠깐만 다녀온다는데…”

“뻥치시네. 그래놓고 유미한테 가 볼 생각이잖아”

“아..아니에요”

“뭐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니까. 지영이가 그랬거든. 널 이방에서 한발도 못나가게 하라고”

“거의 간수군요”

유미가 있을 것만 같은 지훈의 아파트에 가 볼 생각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읽어낸 채원에게 아무리 빈정거려 보아도 채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 가고 싶어도 어쩔 수 없단다.. 저 열쇠는 안에서는 안열리거든”

“그런 게 어딨어요”

하지만 채원은 여전히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잠시 후 포기한 듯한 얼굴로 현관을 확인하고 돌아온 희성이 힘 없이 침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봐 이봐.. 뭘 그런 일로 남자가… 정말 너란 애는 알기 쉬운 거 같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네 여자친구라면.. 지금쯤 지영이가 손을 써 놓았을 테니까.. 더 이상 심한 일을 당하거나 하진 않을 거야.. 지영이를 믿으라고.. 지영이만 믿고 있으면 다 잘될 테니까.. 지영이가 널 도와주겠다고 했다면서… ? 그럼 아무 걱정 안해도 된다니까”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까지 되는 거죠? 선생님이 괜찮아.. 그러면 모든 게 다 괜찮은 일인 거에요?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선생님이 그랬으니까.. 그냥 믿으라구요? 그럼 채원씨는 선생님이 ‘내일 지구가 멸망해..’라고 하시면 그대로 믿을 거에요?”

“응 믿어”

채원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을 하고는 또 다시 페이지만을 넘기고 있었다.

“어머? 이 가방 괜찮네.. 까르띠에 신상?”

가끔씩 그렇게 혼자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커다랗고 넓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저녁 햇살이 채원의 새하얀 블라우스를 노을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 방에서 지내는 동안 희성은 지영과 채원을 보면서 두 사람이 강한 믿음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채원은 지영이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고 지영은 채원을 감싸안듯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주고 있었다. 주고 받는 말과 눈빛, 작은 손짓 하나하나까지 서로의 모든 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로의 존재가 있음으로 해서 모든 것이 채워지고 있다는 듯이…. 서로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없었다. 이해관계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존재만이 모든 것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순수한 관계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희성이로써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채원씨는 선생님을 믿을 수 있는 거죠?”

단순하고도 소박한 의문이었다. 희성의 물음에 채원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한마디로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지영이를 사랑하니까.. 물론 지영이도 날 사랑하고”

대답을 짧았지만 그렇게 얘기하는 채원의 표정은 한없이 기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랑이라구요? 그것뿐이에요?”

“응 그것 뿐이야.. 그래서 지영의 모든 걸 믿을 수 있어.. 지영이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버릴 수도 있도.. 왜? 이상해 보여?”

“이상하진 않아요.. 하지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직선적인 채원의 말을 지금의 희성이로써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뭐야.. 못믿겠다는 표정이잖아.. 하지만 사실인걸? 난 지영이를 사랑해. 내 모든 건 지영이와 함께 있으니까… 뭘 그런 구린 표정으로 고민하는 거야? 네 바로 옆에도 있지 않았어? 언제나 가슴에 품고 있던 그런 사람이… 좋아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게 난 하나도 안이상해 보이는데…?”

“… 전.. 이해할 수 없어요.. 사랑한다고.. 누군가를 무조건적으로 전부 믿을 수 있다는 게.. 그렇게 믿어도.. 결국 배신 당하고… 상처 입고… 그런 거라면 차라리 사랑 따위는…”

“뭐어~?”

채원이 커다란 눈동자와 사랑스러운 입술을 놀란 듯이 벌리며 희성의 쳐진 어깨를 바라 보았다.

“그럼 넌 상처입기 싫어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거야? 그러면 또 어때? 상처입고 배신당한다고 해도…. 난 지영이한테 얼마든지 상처 받아도 좋아. 날 배신한다고 해도..괜찮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내가 될 수만 있다면 그런 거 하나도 안힘들 거 같은데? 그 이상 행복한 게 또 어디 있었어? 오히려..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게 훨씬 더 힘들 거 같아”

하지만 채원은 ‘그 옛날.. 죽어 있었던 때 처럼….’ 이라는 마지막 말은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네 여자친구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여자랑 남자는 생각이 좀 다르려나? 난 남자는 현우밖에 모르니까.. 남자 생각은 잘 모르지만…”

채원은 상태라도 살피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깨를 떨어트리고 있는 희성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아.. 그럼 내 질문에 대답좀 해봐.. 계속 신경 쓰이던 게 있었어”

채원은 잡지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랑거리는 밤색 머리카락이 윤기를 머금고 흔들리며 가슴께로 쏟아져 내렸다.

“요전에 얘기했던.. 그 지훈인가 뭔가 하는 애.. 너.. 옛날부터 걔를 알고 있었지? 지금보다 훨씬 더 옛날부터 말야..”

희성이 대답이 나오기까지 30분 정도를 채원은 말없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채원씨는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간단하지 뭐. 너.. 알지도 못하는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여자친구를 뺏으려고 해도 입다물고 뺏길정도로 맹탕은 아닐 거 아냐. 보통은 그 남자를 죽여서라도 여자친구를 지키려고 하지 않겠어? 그런데.. 넌 그러지 못했잖아.. 아마도.. 너한테 그러지 못하는 무슨 이유가 있지 싶었어. 그 지훈인가 뭔가 하는 애한테 꼼짝도 못하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말야”

“… 전부 말씀드릴게요”

희성은 고개를 숙인채 침대에 앉아 있는 채원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그 자식을.. 지훈이를 처음 알았던 건… 아마..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 때 였을 거에요. 밤에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났는데.. 거실에서 엄마가 울면서 하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그 아이는 지금쯤 어쩌고 있을지…’ ‘그 아이가 불쌍하다’고 하시면서 아버지를 안고서… 그 때는 무슨 일인지 ‘그 아이’가 도대체 누구인지 물론 몰랐었죠.. 그리고는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걔가 누구인지 알게 된 건.. 중학교 2학년 가을이었어요.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까 엄마 일기장이 나왔거든요… 그걸 읽었어요… 일기장에 구체적인 건 쓰여 있지 않았지만.. 이해가 되더라구요. ‘그 아이’가 누구인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어디선가 멀리서 혼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나도 어린아이였어요.. 그래서 어떻게 할 수도 없었거든요… 누구한테 얘기할 사람도 없었고… 그런데 채원씨.. 나.. 그 자식의 존재를 알고서 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

채원을 올려다 보고 있는 희성의 시선이 진지한 표정으로 희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채원의 시선과 부딪혔다.

“나… 그 자식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차라리 죽었으면… 혹시 살아 있다면 죽어버리라고.. 빌었어요. 나 혼자서 충족한 삶을 살았고.. 그 자식은 혼자서.. 틀림없이 그 자식은 날.. 증오하고 있을 거라고.. 나라는 존재를 알면 날 증오할 게 틀림없을 거라고… 그런 생각으로 무서웠어요.. 나와 그 자식은 정말 입장이 살짝 다를 뿐이었거든요. 하지만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된 거에요.. 나 혼자서만 행복했으니까… 난 걔가 날 증오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무서웠어요… 나한테는 걔한테 보상해줄 방법이 없더라구요… 만약에 그 자식이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내 남은 인생을 걔하고 바꿔주는 수 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다라구요.. 그게 무서웠던 거에요.. 난 그런 인간이에요.. 그 자식은 나한테 하나 밖에 없는… 그런데도.. 버린 거에요.. 그것도 죽으라고 죽어버리라고 빌 정도로… 그랬는데.. 그렇게 무서워하던 일이 일어나 버린 거죠. 그 자식이 내 앞에 나타나고.. 내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던 사람을 내 놓으라고 했어요… 어쩔 수가 없더라구요… 난… 난 그런 자식이에요… 경멸스럽죠? 더구나 유미도… 연구를 통해..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고는 했어도… 사실은 아니에요. 유미는 내게 아까울 정도로 예쁘기도 하고.. 총명하고.. 밝고.. 착하거든요.. 옛날부터 유미 주변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어요. 남자도 여자도… 인기도 많았거든요… 언젠가는 나 같은 거 돌아보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불안했어요.. 그래서… 뭐라도 좋으니까… 나한테… 남들보다 뛰어난 뭐라도 하나 있으면… 유미를 내 곁에 붙들어 둘 수 있을 거 같아서… 그거 뿐이에요.. 사실은.. 그런 놈이에요.. 난…. 내가 연구에 빠져들게 동기는 그게 전부였어요… 채원씨… 난 그런 자식이에요… 비겁하고… 추한…”

“흐음… 뭐 별로 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뭐라 그럴까.. 너한테 그런 점이 있다니까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지는데? 그랬구나… 지영이가 마음에 들어할만 했네.. 역시 그냥 공부벌레인 건 아니었어”

놀라지도 않았고, 위로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평소의 대화를 하는 듯한 채원이었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

“거짓말 하는 거 아닌데? 인간이잖아? 원래 인간은 그런 거야.. 자기 멋대로고.. 약하고.. 약삭빠르고.. 원래 그런 게 사람이야.. 성인군자인척 해도.. 다들 그러고들 사는 거라고”

채원은 부드러운 웃음을 띈 얼굴로 떨리고 있는 희성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란 말이지…”

“…채원씨가 그랬잖아요… 내가 그 자식한테 유미를 내던진 거라구요… 두 사람이 나 몰래.. 사겼고… 유미는 그 자식이 시키는대로… 난 어쩔 수도 없이… 그 자식도 유미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걸 보고… 그래서.. 난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선… 유미를 줘버리고… 제물로 삼아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아이가 어땠는지.. 그 지훈인가 하는 애가 어땠는지 하는 것보다 소중한 건 네 생각과 마음이라고 난 생각해..”

“나는요… 난.. 유미를…”

“응 알아. 그 아이를 사랑하는 거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네 마음으로부터는 도망치지 못하는 걸… 만약 다른 남자가 그녀를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라면.. 그 정도 마음 밖에 안된다면.. 그 아이도.. 네 사랑을 받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 마음을 지켜나가라고… 후회는 그 다음에 해도 돼. 알겠니? … 어쨌든 지금은 지영이를 믿어보렴”

채원이 그렇게 희성을 감싸주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아.. 추워… 꼭 눈이라도 올 것 같아..”

가지고 다니는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갑자기 유미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뭐야~ 맨날 그런 것만 먹으면 몸에 안좋다니까.. 잠깐만 한눈 팔면 꼭 이런다니까.. 에휴~”

유미는 두 손에 들고 있던 비닐 봉투를 부엌에 두고 방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이건 압수”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컵라면을 빼앗아 들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지훈의 ‘집에 간 것이 아니었냐’는 질문도 무시해 버리고 있었다.

“잠깜만 기다려봐 금방 밥해줄게”

지훈은 유미가 돌아왔다는 사실보다 구김살 없는 태도가 더 당황스러웠다. 덫에 빠지기 전에 보여주었던 그 얼굴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부모님은?”

“괜찮아 괜찮아.. 그런 거 신경 안써도 돼”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 형광등만이 밝혀진 좁은 방은 어둑어둑했다. 유미는 부엌의 알전구를 켰다.

“지훈아.. 오늘은 냄비요리 해 먹자. 재료도 잔뜩 사왔으니까… 처음엔 다시마로 맛을 내고.. 도중에 김치도 넣고.. 마지막엔 우동 어때? 아.. 지훈이 너 매운 거 괜찮지?”

꽃무늬 원피스에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 선 유미는 발랄해 보였다. 지훈이에게 등을 돌린 채 봉투에서 재료를 꺼내 냄비에 올려놓고 배추를 씻고 손맵시 좋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쨔잔~ 맥주도 사왔어. 물론 다 내가 사는 거니까 돈 걱정은 안해도 돼. 이 집에 계속 있게 해준 보답이니까..”

“정말 괜찮은 거야? 여기 있어도?”

부엌까지 나온 지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유미는 씩씩하게 말을 받았다.

“뭐해~ 조오기 앉아서 테레비라도 보고 있어. 지훈이는 아무것도 안해도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금방 만들어 줄게”

지훈의 등을 떠밀어 방으로 들여 보낸 후 유미가 식사를 준비하며 말을 꺼냈다.

“그리고.. 지훈아.. 밥 먹고 나서는… 하자.. 많이 해줘.. 섹스… 평소처럼… 기분 좋게 만들어줘.. 꼭 안아줘야 해…”

요염한 표정까지 만들면서 유미가 애교를 부렸다.

“그러지 뭐”

유미는 또 다시 부엌에 서서 배추를 다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미가 속삭이던 마지막 말은 지훈이 들을 수가 없었다.

“이게 마지막이니까…”


아프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를 감싸고 몸을 둥글게 만채 이를 악물고 그저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 망할 자식.. 도무지 마음에 안든다니까.. 오늘 밥은 없어”

지금 등을 때리고 있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평소에 맞던 매가 아니었다. 벨트도 먼지떨이도 아니었다. 아프지 않았다. 그저 뜨거울 뿐이었다. 등뼈까지 파고들어 살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어딜 건방지게 학교를 가. 넌 인간이 아냐.. 쓰레기라고. 개쓰레기.. 쓰레기 따위가 학교를 왜 가는데? 가지 말라고 얘기 했었지? 그런 데 갈 시간 있으면 어디가서 술이나 구해와”

어제의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날도 있는 법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평소보다 더 거칠었다. 상처가 따가우니까.. 오늘은 물에 빠지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도 참기 힘든 아픔은 때로는 그 아픔을 견디는 사람에게서 현실감을 빼앗아 가는 법이다.

“이래도 말을 안해? 이게 열받게 스리…”

‘말을 하면 한다고 화를 내는 주제에…’

“..선생님 한테.. 전화가.. 와서.. 학교에 오라고…”

“어디서 말대답이야? 건방진 새끼가.. 뭐야? 그 눈은? 개기는 거야?”

역시 그랬다. 대답을 하면 대답을 한다고 이 모양이었다. 코피까지 나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방을 닦지 않으면 핏자국 때문에 또 혼이날 판이었다.

“이 을 새끼가.. 집구석에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 이 섞을 갈보 새끼야”

비쩍 말라 뼈가 들어난 등에는 온통 피투성이었다. 벽과 바닥에도 핏자국이 튀어 있었다. 발가벗고 기어가는 소년을 미친 듯한 남자가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발 밑에는 술병이 굴러다니고, 술냄새 가득한 숨소리를 내 뱉으며 눈이 풀려 있었다.

“아 씨발놈 이렇게 패도 뒤지질 않아”

남자의 발길질이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작은 몸이 공중에 떠올라 벽에 부딪혔다.

“아으으…. 으… 아…”

작은 신음소리가 아이가 살아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눈동자를 까 뒤집은 소년의 얼굴을 남자가 인정사정 없이 짓밟고 있었다.

“… 점점 그년을 닮아가.. 그 갈보년을 쏙 빼닯았다고…”

“아.. 아…파요..”

“뭐라고? 당연하지. 아프라고 패는 거야”

조금은 살살 했으면 하고 바랐다. 덤비고 싶어도 덤빌만한 힘이 없었다. 삼일이나 굶겨 놓고서…

“엎드려.. 엎드려 이자식아… 엎드려서 엉덩이 내밀어.. 그 갈보년 대신에 써먹어 줄게.. 밥 쳐먹고 싶으면.. 뒤지고 싶지 않으면 이렇게라도 써먹어야 할 거 아냐”

사내가 소년의 등 뒤에서 무릎을 꿇었다.

“더러운 새끼.. 그 갈보년의 피를 타고난 주제에.. 카악 퉤! 이 쓰레기 같은 새끼.. 갖다 버려야지”

소년의 마음은 닫혀버린지 오래였다.

“으… 으윽.. 으윽…”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이전에 비한다면 어느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참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고 그 얼굴을 떠 올렸다. 그 사람의 얼굴을… 태어나서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사람의 얼굴을..

매력적인 큰 눈에 긴 속눈썹. 갸름한 얼굴에 조그만 입술. 그리고 들여다 보일 듯이 투명한 피부. 빨려들것만 같은 눈부신 웃는 얼굴이었다. 사진도 남아 있지 않았다. 때문에 어떤 얼굴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떠 올릴 수 있었다.

‘엄마…’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 틀림 없었다. 만나고 싶었다. 만약 만나게 된다면 꼭 묻고 싶었다.
왜.. 왜 자신을 낳았냐고… 버릴 거면 차리라 낳지 말지…

지겨웠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흐려가는 얼굴에 의식을 집중하고 지워지지 않도록 애를 썼다.

매력적인 큰 눈에 긴 속눈썹. 갸름한 얼굴에 조그만 입술. 그리고 들여다 보일 듯이 투명한 피부. 빨려들것만 같은 눈부신 웃는 얼굴. 유미와 닮은 얼굴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지훈아…”

“엄마…”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막 닿으려는 순간 부드럽던 미소가.. 음란하게.. 비뚤어지며 일그러졌다.

“지훈아.. 안아줘..”

“유미야!”

벌떡 일어났다. 악몽이었다. 지훈의 이불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지옥 같은.. 아니 지옥 그 자체였던 날들이 마치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 올랐다. 떠나온지 아직 10년도 지나지 않았다. 받지도 못하고, 채워지지도 않던 그런 나날들. 살아 있음에도 아무런 희망이 없던, 살고 싶지 않아도 살게 되던 그런 나날들. 공포와 절망만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런 날들 속에서도 버릴 수 없었던 단 하나의 희망. 엄마가 없다면 엄마와 같은 사람을…. 그것만 손에 넣는다면 갖고 싶다고 바라마지 않던 그것만을 손에 넣는다면 나쁜 꿈은 꾸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빼앗아 가졌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었다. 그 곳에 있어야 할 온기가 없었다. 닿지 않았다.

“… 없어?”

시트엔 아직 사람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어디 갔지?”

가느다란 빛이 욕실 창에서 새어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뭐하는 거야?”

욕조안에 웅크리고 있는 유미를 돌려 세웠다. 멍하니 열려 있는 유미의 눈동자에 지훈이 얼굴이 비쳐지고 있었다. 뛰어 들어 끌어안듯이 유미를 멈추게 했다. 오른 손목을 강하게 잡아 차가운 바닥에 대고 눌렀다.

“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야!”

“그만해.. 정신차려.. 정신 차리란 말야!”

단단한 몸 아래서 유미가 버둥거리고 있었다. 지훈의 팔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자유로운 왼손으로 지훈의 어깨를 치고 밀어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용서 받아야 해.. 이렇게 해서라도.. 용서 받아야 해..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

“그만 좀 하라니까!”

“제발.. 놓아줘.. 제발…”

“유미야!”

“더 이상 못견디겠어.. 제발… 제발 부탁이야…”

네가 당했던 거.. 그 증오스럽던 일을.. 네가 반복하고 있는 것 뿐이라던… 지혜의 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

울먹이며 발버둥치던 유미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부탁이야.. 죽게 해줘…”

유미의 손에서 과도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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