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돋은 꽃, 장미
<1>
퇴근 후 소파에 드러누워 티비를 켠다. 무료한 주말이다. 자그마한 유통회사를 운영하고 있
지만 잘나가던 초반과는 달리 돈벌이는 그닥 쏠쏠하지 않다. 현상유지를 그런대로 하는 편
이라고 볼 정도의 작은 규모의 사업체이다.
티비에선 뭐가 그리 재미난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난리다. 예능프로그램에선 뛰거나 도
전하거나 전국방방곡곡 여행을 다닌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그런 소소함에도 쉽사리 웃지
않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이제와서 누군가를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의 웃음을 앗아간 사
람이 누굴까 하는 의구심이 갑자기 들어온다. 예전에는 날아가는 참새의 똥구멍만 쳐다봐도
자지러지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무미건조한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가만히 누워있자니 세상에 혼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왜 무미건조한 인간이 되어버렸는지에
대한 해답도 찾아내었다.
이.미.란.
5년간 사랑했던 그녀.
아직도 가끔씩 마음에 찾아와 정리된 추억을 흐트려놓는 여자.
슬픔이라는 감정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던 나의 옛사랑.
그녀가 떠나면서 나는 한동안 죽은 사람처럼 지내야만 했다. 이제는 그녀를 만났던 기간과
도 같은 5년이 흐르고 있다. 산수처럼 5년 빼기 5년을 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0"이 되면
좋으련만 여전히 그녀는 나를 향해 웃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그녀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
고 생각한다. 그녀가 다치고 아프면 치료를 해줘야 할 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녀
의 마음이 아프면 힘껏 안아줘야 할 한 사람이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슬픈 이별 노
래의 가사처럼 그녀가 돌아올까 차마 죽지도 못하는 내가 되어버렸다. 그렇다. 그녀는 나의
목숨보다도 귀하게 아껴주었던 여자였다.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어도 그녀가 원한다
면 다시 그녀의 남자가 될 수 있다고 확언하고 확신했다. 그래서인지 전화기엔 여전히 그녀
의 전화번호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몇 번이고 지우려했던 그 전화번호. 몇 번이고 전화기에
서는 삭제를 했었지만 머릿속에서는 지워지지 않는 번호가 되어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이런 나를 두고 왜 결혼을 안 하느냐 묻지만 나는 그 물음에 시원하게 대답
을 한 적이 거의 없다. 그저 때가 되면 하겠죠 라는 말로 더 이상의 추가 질문을 원천봉쇄
해 버렸다.
서른 여덟,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있다. 결혼을 일찍한 친구 중에는 아들놈이
벌써 고등학생이 된 경우도 있다. 한 여자에게 빼앗겨버린 마음을 좀처럼 추스를 방법이 없
었다. 처음 1~2년간은 꿈에서 조차 만날 수 없음에 안타까워했고 거의 매일 밤을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180cm의 키, 현재 몸무게는 60kg을 겨우 넘을 정도이다. 미란이를 만날
때 까지만 해도 80kg에 육박하던 몸무게는 줄고 줄어 이제는 아예 복구가 되질 않는다.
그녀를 잊어보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었다. 미친듯이 술을 먹어도 보고 기회만 되면 여자를
만났다. 소위 말하는 술집 여자와 동거도 해봤고 어울리지도 않는 명품이란 명품을 질러대
며 엄청난 돈도 써봤다. 그러나 결국 내게 남은 건 엄청난 빚과 또 다른 상처뿐이었다. 그
렇게 2년여를 머저리처럼 살아보니 이별의 상처는 아물어 있었지만 그리움이라는 녀석은
더욱 숙성되어 나쁜 기억보단 좋은 기억들만 기억되게 되었다.
담배를 찾아 물고 버릇처럼 스마트폰을 집어 든다. 하루의 시작과 끝에는 버릇처럼 하는 일
과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는 것. 카카오스토리라고 하는 일종의 미니
사진첩이거나 작은 일기장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어플안의 그녀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이
단 하나 있는 삶의 낙으로 되어버렸다. 미란의 스토리는 언제나 행복함만이 깃들여져 있다.
항상 말로는 그녀의 행복을 비는 나였지만 진짜 속마음은 그녀의 불행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와 함께, 잘생기고 멋져 보이는 남편과 함께, 때로는 그녀 혼자. 그녀의
행복을 옅보고 나면 속이 뒤집어질 듯 짜증이 밀려온다. 어쩔 땐 너무 화가 나 속이 울렁거
리며 토가 나올 때도 있었다.
그녀는 현재의 감정에 충실한 여자였다. 나를 만날 때, 그녀의 미니홈피의 기분은 언제나
우울, 짜증, 슬픔이란 단어로 채워져 있었다. 기분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감정의 아이콘
은 모습을 바꿨고 간혹 행복이나 기쁨이라는 아이콘이 있을 때면 나 자신마저도 기쁨을 느
낄 때도 있었다. 오롯이 그녀의 감정 상태에 따라 나도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 했다.
여전히 행복함이 깃든 옛 애인의 얼굴을 보고 또 본다. 여전히 예쁜 외모이다. 그녀에게만
큼 시간의 세월이 비껴간 듯 나를 만날 때의 모습 그대로이다. 아니 더욱 미모가 무르익은
모습이다. 어렸을 적엔 없던 풍부한 농염함이 묻어난다. 10년이나 지났는데도 말이다.
결국 버릇처럼 찾아본 그녀의 모습에 나는 또 다시 더러운 기분으로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그녀와 헤어지고 정신을 차렸을 땐 나는 폐인이 되어있었다. 혈색은 물론이고 몸도 꽤나 망
가졌다. 군대시절, 사회에 나가면 끝내주는 여자를 만나겠다는 의지의 산물이었던 가슴근육
과 식스팩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피부는 말라붙은 고목의 껍데기처럼 거칠어져 있
었다. 가끔씩 보는 부모님 역시 이별로 인한 상처라는 걸 알 리 만무했다. 억지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몇 군데의 병원엘 찾아가보기도 했다. 이별의 상처와 그녀를 잊지 못하는 상사
병에 걸린 채였으니 의사라는 양반도 영양부실이나 만성피로와 같은 같잖은 진료결과를 내
놓았다. 그 때 내과와 같은 껍데기 진료실이 아닌 정신과를 찾아갔다면 지금 나의 인생도
바뀌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극복했다.
이제는 추억이라는 글씨로 남길 수 있을 만큼 내안의 그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말이
다. 비록 만질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미란이지만 그녀는 충분히 내 안에서 친구이자 애인이
며, 아내이고 섹스파트너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고 있다.
"씨발년!"
가끔은 이렇게 그녀에게 욕도 한다. 물론 미란이는 들을 수 없겠지만 괘씸하거나 그녀의 행
복이 진하게 느껴질때면 이렇게 넓은 아파트가 울려 퍼질 정도로 힘차게 욕을 한다.
그냥 잠을 잘까하다가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는다. 주말이었고 기분이 더러워졌기 때문이
다.
180cm의 키, 날렵한 몸매, 그리고 피부는 검지만 그래도 봐줄만한 얼굴.
작지만 나름 괜찮은 사업체의 오너, 서울 땅에 융자 없는 45평 아파트 한 채.
검정색 신형 그랜저, 대인관계에서는 잘 웃고 친절한 평범한 남자.
사람들이 묻곤한다. 왜 여자가 없느냐고...
내 마음에서 미란이 나가버리기 전에는 그 물음에 답을 해줄 수가 없을 것 같다. 점점 차오
르는 나이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 밖에 없다.
옷을 차려입고는 아파트에서 도보로 10여분쯤 떨어진 유흥가로 들어선다. 차려 입는다고 해
봐야 면바지에 깔끔하게 다림질 된 남방셔츠가 전부이다. 집을 나선지 10여분, 술집이며 노
래방, 각종음식점의 간판들이 즐비하게 줄 서있다. 젊은 남녀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듣기 좋다. 나도 한때는 저들처럼 에너지 넘치고 한 잔의 술에 좋은 기분을 주체하지 못했
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선한 웃음으로 그들이 길바닥에서 자지러지게 웃는 모습을
바라본다. 저들의 젊음이 부럽다. 저렇게 대학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를 이토록 괴롭히
는 미란이라는 여자를 절대 만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해보지만 현실성 없는 혼자만의 착각에
잠시 빠졌다가 정신을 차린다.
피워내던 담배의 불똥을 튕기며 지하의 작은 룸으로 들어선다. 가게의 이름은 드림걸이다.
한번은 가게의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는지 마담에게 물은 적이 있다. 마담은 놀고 간 손님
들이 꿈에서도 잊지 못 할 만큼의 서비스를 해주기 위한 뜻이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마담
의 영업마인드와 상호명이 일치하는지 룸 수가 5개인 그닥 크지 않은 규모임에도 제법 단
골들이 많이 있다. 나 역시 그 단골이라는 손님들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어이구~ 형님.. 왜 이리 간만이세요~"
웨이터 실장이 CCTV를 확인했는지 채 계단을 내려서지도 못했는데 뛰어나와서는 반갑게
반겨준다. 솔직히 남자들이 술집에 가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집에서건 회사에
서건 병신취급을 받건 바보취급을 받건 간에 이런 술집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왕이 된다.
웨이터의 마중을 받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검은색의 시스루 원피스를 입은 마담이 빨간
입술을 오물거리며 반갑게 다가선다.
"어머~ 사장니~임...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쪼르르 달려와서는 팔짱부터 끼운다. 일부러 그러는지는 몰라도 두툼한 가슴까지 팔뚝에 비
벼댄다. 워낙 가슴이 커서 그런 거리라 생각하며 그저 아무렇지 않게 반응도 하지 않는다.
분명 미인인 편에 속하는 그녀이지만 내 타입은 아니다. 여자는 고양이 상과 강아지 상으로
나뉜다고 했던가? 분명 마담은 심한 고양이 상에 속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은 백치미가 있
는 강아지 상을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지하의 퀴퀴한 냄새를 지우기 위해 설치해 둔 대형
방향제에서 칙하는 소리와 함께 허브향 가득한 액체가 분사된다. 그리고 동시에 진한 향수
냄새가 풍겨져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손님 많네~ 나 없어도 잘 먹고 잘 사는구만!"
"어머? 많긴... 요즘 단속에 뭐에... 아주 정신 없구만. 손님도 반토막 났다고"
"왜? 무슨 일 있었어?"
"우리 그이가 화를 못 참아서 손님 하나를 아주 아작을 내버렸잖아"
"형님이?"
"응.. 그나마 증인들이 많이 도와줘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음 쇠고랑 찼을거야"
마담. 정은희.
서른 아홉살의 나보다 한 살 많은 여자로 그녀의 남편은 주먹깨나 쓰는 건달이었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정신 차리고 시작한 일이 바로 드림걸이라는 룸
방이었는데 얼굴만 봐서는 아주 착고 선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그런 그가 사람을 때렸다
니 믿기지 않는다. 과거엔 무시무시한 건달이었다고 하나 내가 아는 그 사람은 항상 친절하
고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액땜했다 쳐. 그래, 형님은 괜찮고?"
"우리 그이야 뭐... 쌈박질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니까"
"다행이네!"
"아! 근데 우리 미란이 언제 데려갈거야~"
"무슨 소리야?"
"아무튼 남자들이란.... 으이그..."
"무슨 소리냐니까? 알아듣게 말을 해야지"
"그랬다며. 자기가 같이 살자고 했다며?"
마담과의 일상다반사적인 대화를 나누다가는 그녀의 말에 잠시 멈칫한다.
그랬던 것 같다. 정확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기억을 해낼 수는 없지만 그랬던 것 같다.
미란이라는 가명도 내가 붙여준 이름이다. 원래 그녀의 본명은 홍지숙이라고 했던 것 같다.
우연찮게 이 가게를 처음 온 날, 나는 미란이와 너무도 흡사했던 그녀에게 눈을 뗄 수 없었
다. 키며 이목구비가 나를 힘들게 하던 미란이와 너무 닮아 민서라고 소개하는 그녀에게 이
름을 바꾸길 권유했다. 가게의 에이스는 아니었지만 미란이 생각나고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
싶은 날은 언제나 이곳을 들러 미란이를 만났다. 오늘도 그녀가 무척이나 밉고 씨발년스러
워 찾아 온 것이다.
다섯 번째였나 여섯 번째였나? 그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진짜 미란이의 생일날 그녀를 지
목하고 처음으로 2차를 나갔다. 그리고 그날 그녀를 품에 안으며 첫마디로 같이 살자고 했
던 게 생각났다.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것 같다.
"그걸 기억하고 있대?"
"어머? 완전 나쁜 남자네? 여자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내가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때 내가 그녀에게 했던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던 것 같다.
"책임?"
"1년 전쯤인가? 하도 2차를 안 나간다고 하길래.. 빚도 많은 년이 왜 그러나 물었더니 자기
얘길하더라~ 그년 스물 일곱이나 쳐 먹고 꽤나 순진해"
순진한 여자.
과연 2차까지 뛰는 화냥년에게 순진함을 논할 수 있을까? 나는 단 한 번도 몸을 파는 여자
를 불쌍하거나 가엾게 여긴 적이 없다. 예전은 모르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자신의 의지없이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불쌍하게 볼 것도 동정을 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그
녀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그따위로 만들어버린 거니까.
"어떻게 하면 데리고 갈 수 있는데?"
내가 왜 그런 물음을 한 지 모르겠다. 내가 내뱉은 말에 대한 수습책임 반, 미란이라고 부
르는 술집 여자에 대한 관심 반 정도라고 생각한다.
"정말, 같이 살 거야?"
마담은 아주 흥미롭다는 듯 말하며 나를 올려다본다. 날카로워 보이는 턱이 나의 목을 힘껏
찌를 듯하다.
"아~ 몰라, 방부터 안내해~"
"이 천 만원이면 마이킹 끝이야"
"이 천?"
"왜? 많아? 자기니까 원금만 받는건데..."
이 천 만원이라는 금액이 작거나 커서 놀란 게 아니다.
고작 이 천 만원이라는 돈 때문에 그렇게 몸을 굴린다는 게 황당할 뿐이었다. 이 천 만원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회사를 다니고 일을 한다면 충분히 빌릴 수
도, 벌수도 있는 금액이라는 거다. 도저히 내 선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금액임엔 틀림없
었다.
안내된 구석의 작은 골방. 엄연히 따지면 이 방은 손님을 받는 룸이 아니다. 노래방기계와
테이블, 소파, 그리고 작은 화장실이 딸려있긴 하지만 이 공간은 마담의 남편인 사람의 휴
게실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나도 그 형님을 따라 두어번 들어와 양주 몇 잔을 깔짝이긴 했지
만 그 형님 없이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다. 결국 대기실도, 손님이 순번을 기다리는 곳도, 그
렇다고 성미 급한 사람들을 위한 떡치는 장소도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일반 룸에 비해 절반이나 될 법한 공간을 두리번거리는데 작은 노크소리와 함께 술이 들어
오고 그 뒤로 안주가 들어온다. 처음 보는 막내 웨이터이다. 키는 작은데 몸집이 꽤나 단단
해 보이는 녀석의 얼굴은 남자치고 너무 귀여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새로 왔나보네?”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물며 나긋하게 묻자 녀석이 허리를 90도로 구부리며 인사를 한다.
“인사 올립니다. 양배추라고 합니다.”
그 녀석의 인사를 들으니 그제서야 개그맨 양배추와 흡사한 외모라는 걸 알게 된다. 다시
봐도 양배추와 너무 닮은 얼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웃어서 미안.. 양배추보다 훨씬 낫구만...”
나는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내 그 중 3만원을 팁으로 건넨다. 원래 지갑을 가지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라 그 모습이 마치 품삯 받은 노가다 꾼으로 비쳐질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갑만 가지고 다니면 흘리는지 버리는지 잃어버리는 습관을 가진 놈이기 때문
이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한 잔 올리겠습니다.”
“사장님은... 그냥 형이라고 불러!”
사장이 맞긴 했다. 작은 사업을 하고 있으니. 하지만 왠지 사장이라는 말은 아직까지 거부
감이 든다. 녀석이 권하는 양주를 스트레이트 잔에 받으며 나머지 한 손으로는 담배를 비벼
끈다.
“언제부터 일 한 거야?”
“오늘이 딱 4일째입니다.”
“할 만 하고?”
“예, 재밌습니다.”
한 잔을 깨끗이 비우고 잔을 녀석에게 건네자 여전히 구부린 허리를 펴지 않고 잔을 받는
다.
“몇 살?”
“스물 넷입니다.”
“좋은 나이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돌려 잔을 비운 녀석이 다시 잔을 건넨다.
“돈 많이 벌어... 허튼데 쓰지 말고... 알았지?”
“예.”
분명 이 녀석은 돈을 모으라는 내 말을 이해 못하거나 쓸데없는 꼰대의 잔소리로 치부할거
라고 확신했다. 물론 생각외로 정신머리가 똑똑히 박혀 있는 녀석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초짜 웨이터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노크소리와 함께 미란이 들어선다. 그러나
평상시에 보던 홀복 차림이 아닌 조금 전 길거리에서 시끌벅적 웃어대던 대학생처럼 수수한
옷차림이다. 성조기가 가슴에 작다랗게 박힌 하얀 면티셔츠와 하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스
키니 청바지, 깔끔하고 수수하지만 나름 섹시미가 풍겨진다.
“오빠~”
의외의 복장에 내가 잠시 말을 잃고 있었다. 초짜 웨이터 역시 그런 그녀의 옷차림이 생소
한지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 빠져나간다.
“오... 옷이...”
그렇게 입혀 놓으니 더욱 미란이 다운 미란이다. 검은색 긴 생머리, 오늘은 예전의 그녀처
럼 동그랗게 올려 고무줄로 고정되어 있었고 발가락이 예쁘게 드러나는 샌들도 그녀의 취향
에 가까운 그녀이다.
“왜... 이상해요?”
이상할 것까지야 있겠냐만은 생소한 느낌 때문인지 전혀 술집여자 같지 않은 모습의 그녀이
다. 그녀 역시 그런 모습이 쑥스러운가보다. 연신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하며 안절부절
다가오지도 못하고 있다. 조금도 술집 접대부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기가 힘들다.
“마담한테 안 혼나?”
“원래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쉬려고 했는데 오빠왔다고 해서... 이제 출근하는 길이예요”
미란의 말을 듣고 나니 평범한 복장의 이유를 알 것 같다. 지명손님에 대한 예의 때문인지
아니면 마담이 얘기한 것처럼 내가 저질러 놓은 말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있는건지 그녀는
좋지 않은 몸을 이끌고 내 앞에 서있다.
“오빠 잠시만요.. 옷 갈아입고 다시 올게요~”
미란이 이마 귀 옆으로 흐르는 귓밑머리를 넘기며 말한다. 그리고 은은한 조명탓에 보지 못
했던 그녀의 피부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정말 몸이 안 좋은지 혈색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평소 진한 화장의 그녀만 봐왔던터라 화장기 옅은 얼굴이 낯설지만 보기 좋다.
“됐어... 그냥 와~”
“나 화장도 안 했어요...”
누군가 그러더라 화장 안 한 생얼은 벌거벗은 느낌이라고. 하지만 진한 화장에 감춰져 있는
그녀보다 자연스럽고 진솔해 보인다.
“예뻐! 그러니까 그냥 와”
예쁘다는 말에 미란이 발그라진 볼을 양손으로 감싼다. 그리고는 총총대며 달랑 네 명이 앉
을 수 있는 길다란 소파로 다가와 앉는다. 역시 여자는 여자였다. 나란히 놓인 나의 무릎과
미란의 무릎을 비교해보니 두께부터가 확연히 차이난다. 무릎부터 이어지는 허벅지까지 그
두께감은 더욱 비교가 된다.
“많이 안마신거 같은데?”
술병을 들고 잔에 따르며 말하는 미란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본 그녀
는 과일이 담긴 접시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다가 오렌지며 파인애플 같은 안주거리를 적당한
크기로 나누거나 잘라놓는다. 그 손길이 분주하면서도 숙달되어 보인다.
“많이 아파?”
술잔을 들어 미적지근한 양주를 입에 털어 넣으니 독하면서도 풍부한 달콤함이 몸서리쳐지
게 한다. 삼키지 않고 소파 뒤로 몸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조금씩 천천히 화끈한
느낌의 물을 흘려 넣었다.
“괜찮아요...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먹었나봐요”
몰랐는데 그렇게 술을 먹는 게 내 버릇이란다. 바로 옆에 앉은 미란이 그랬었다. 손가락으
로 세기 힘든 만큼 나를 접대했던 여자가 그렇다면 그런 것 같다. 한 템포 늦은 물음과 대
답. 우리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다. 급하기는커녕 여유 있고 느리다. 입가에 향긋하면서도
톡 쏘는 상큼함이 느껴지는 것이 파인애플을 안주로 준비한 것 같다.
“오늘도 언니 생각나서 왔구나? 오늘은 또 무슨 씨발스러운 일이 있으셨대?”
팔짱을 끼우며 거친 내 손엔 촉촉한 작은 손이 들어온다. 그리고 어깨엔 약간의 무게감이
느껴져 온다. 미란이 언제나 기대어오던 그 자세로, 그 느낌으로 다가온다. 향 좋은 샴푸 냄
새가 훅하고 코안을 통해 뇌까지 쳐들어온다. 이제 막 씻고 나온 싱그러운 향기가.
“아냐.. 그런 거...”
“정말 아니야? 내가 보기엔 오늘도 언니 생각나서 온 게 맞는데?”
눈을 감고 있으면 예전처럼 진짜 미란이 내 옆에서 속삭이는 느낌이다. 목소리도 비슷하고
내가 선물했던 익숙한 향수냄새도 비슷하다. 나의 이런 독특한 취미이거나 대리만족을 아무
렇지 않게 받아줄 여자가 또 누가 있겠는가? 술집 여자라서가 아닌 미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다.
“귀신같은 기지배... 그래 오늘도 기분이 씨발스러워서 왔다!”
자포자기 하듯 약간 힘주어 말하자 미란의 손이 나의 코를 잡아 아프지 않게 흔든다. 그러
더니 까칠하고 올라온 수염자리를 부드럽게 훑어준다.
“거 봐... 오빤 나 못 속인다니까? 한 잔 더 하세요. 그리고 더러운 기분 확 날려버리세요.”
잠시 어깨가 가벼워지는가 싶더니 다시 무거워진다. 입술에는 미끈하면서도 차가운 유리 느
낌이 들고 자연스레 입술은 벌어진다. 또 미적지근한 독한 알콜이 들어오고 천천히 목을 축
이고 나면 상큼한 안주가 뒤이어 들어온다.
노래도, 그렇다고 시끌시끌한 게임도, 그렇다고 본전을 뽑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더듬지도
않은 채 연인처럼 붙어 앉아 시간을 보낸다. 가끔씩 술을 먹여주고 안주를 먹여주며 내 얘
기를 들어주다가 웃거나, 욕하거나, 또는 울음을 흘리는 그녀가 이젠 익숙하다.
그렇게 편안한 자세에서 편안하게 술을 마신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미란은 그저
편히 쉬고 있는 나를 귀찮게 하거나 쓸데없는 직업정신으로 괴롭히지 않는다.
“미란아~”
“응?”
“이젠 니가 너무 익숙해졌다!”
“응? 그게 무슨 뜻이야? 좋은거야? 나쁜거야?”
존대와 반말을 적절히 섞는 그녀이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그런 절제된 관계가
실수를 줄이고 서로에 대한 예의를 더욱 잘 지키는 방법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글세... 좋은걸까 나쁜걸까?”
“왜, 이제 나 질려?”
원래 여자들은 그런가보다. 대화의 흐름이 아닌 단어의 본질만을 들추고 따져오는.
“사람들이 왜 이별을 할까?”
“오빠 또 시작이네... 취하셨어요?”
“익숙해지니까... 재미없으니까... 따분하니까... 그럼 오래된 부부는 왜 같이 살까?”
“익숙하니까...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졌으니까? 맞지?”
꽤나 놀아봤다고 이젠 나의 질문에 척척 대답도 잘하는 그녀이다. 미란을 대신해서 만나는
거라고는 하지만 성향이 맞지 않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 껍데기만 닮은 여자였다면 나는 두
번 다시 그녀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첫 만남부터 느낌이 좋았다. 진짜 미란이처럼
대화가 잘 통했고 유머코드도 잘 맞았다. 미란과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즐겁고
편안했다. 그리고 행복함이 느껴졌다.
눈을 뜨고 소파에서 등을 떼어 자세를 바르게 잡는다. 그러자 자연스레 미란도 자세를 바르
게 고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너, 오늘은 술 먹지 마~”
“어떻게 그래...”
볼이 부푼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매출에 신경을 쓰지 않으
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말 안 들을거야?”
“알았어... 안 마실게...”
어쩔 수 없다는 듯 미란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한다.
따라져 있던 술잔을 들어 단숨에 넘기자 목젖이 타는 느낌이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느낌이
확연히 느껴진다. 미란은 재빠르게 과일을 뒤적거리며 적당한 녀석을 골라 내게 권해온다.
나는 미란의 손을 잡고 알맹이만 있는 바나나 조각을 뺏어들었다.
“미란아! 이제 이런 거 하지 마.”
“응?”
그녀의 눈이 동그라진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마저 갸웃거리기 일보직전으로 보
였다.
“익숙해져서, 이제 따분하고 재미없어”
“피~ 무슨 그런 말을 대놓고 하냐? 담에 와서 다른 여자랑 놀거나 다른 가게 가지! 사람
마음 아프게... 오빠 못됐어!”
미란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린다. 자존심이 무지 상한 표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애써 그런
모습을 숨기기 위해 정신없이 테이블을 준비하는 모습이 더 안쓰럽다.
“나 이제 여기 안 올거야.”
“.................”
“근데,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미란이는 필요하거든?”
“....”
미란이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본다. 금세 눈물이 흘러내릴 듯 눈망울이 촉
촉이 젖어있는 모습에 기분이 이상하다. 그녀가 거절할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나 역시 마담의 언질 때문이 아닌 심사숙고한 생각의 결론이었다.
“알다시피 내가 못난 찌질이라, 옛 여자 못 잊고 있다는 걸 이해해줄 수 있겠어?”
“..............”
“언제라도 떠나려면 떠나, 그게 싫다면... 근데 당분간만이라도 같이 있어줘”
“..................”
결국 미란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 눈물에 담긴 뜻은 알 수가 없다. 기쁨인지 아니
면 덫에 걸린 사냥감에 대한 희열인지.
“같이.......... 살래?”
마지막 물음에 미란은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쳐낸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연다.
“이해할게, 오빠 마음에 그 언니가 너무 강하게 자리 잡은 거 아니까... 내가 힘든만큼 오빠
도 힘들테니까. 근데 그것 때문에 힘들 것 같아. 하지만 참을 수 있어. 아니 이해하려고 노
력할게요. 나는 오빠한테 이런 곳에서 일했던 여자라는 거 이해해달라고 차마 못하겠어요.
다만 너무 편견만 갖지 말아주세요.”
미란은 내가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것보다, 옛 여자를 마음속에 담고 있는 것보다 자
신이 술집 접대부라는 사실이 더욱 마음에 걸렸었나보다. 이전에 잠시 잠깐 동거를 했던 그
여자와는 또 다른 여자이다. 그 여자는 자신이 술집 접대부였다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여겼던 여자였다. 마담의 말대로 아직까지 순수함을 간직한 여자라는 생각이 물씬
들어온다.
“그렇게 할게, 미란아... 마담 좀 불러주겠어?”
얼굴에 번진 눈물 자욱을 닦는 모습엔 생기가 묻어난다. 이 여자, 그동안 얼마나 아프고 힘
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강한 척을 해도, 아무리 센 척을 해도 여자는 여자일
뿐이다. 제 아무리 남녀평등을 외치고 남성우월사상을 경멸하는 여자도 결국 여자는 여자일
뿐이라는 거다. 왠일인지 가슴이 떨린다. 마담을 부르러 간 미란이 오기 전 마치 그녀의 부
모를 기다리는 심정처럼 떨려온다. 그리고 그 떨림을 마음껏 느낄 새도 없이 조용히 문이
열리며 마담이 들어오고 뒤이어 미란이 들어선다.
“왜? 무슨 일이야?”
“계산해 줘...”
“벌써? 왜? 오늘은 데리고 안 가?”
“갈거야... 데리고...”
“벌써? 으그... 오래 굶었구나?”
“.............”
마담은 혹여 미란이 기분이라도 나빠할까 들릴 듯 말 듯 조용하고 조심히 말했다. 미란은
두 손을 모아 가지런히 서서 나와 마담을 바라보고 있는데 표정은 맑아 보인다.
“오늘 술은 내가 쏠게... 2차비만 이따 나갈 때....”
“아니, 미란이 데리고 간다고...”
마담이 슬그머니 미란을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나를 쳐다본다. 자신이 했던 말이지만 도저
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그... 그러니까... 아까 한 말 진짜...”
“입 아퍼... 입 아퍼... 계산이나 해 줘... 얼른 가서 자게!”
“그... 그래... 잠깐만...”
“빨리~”
마담이 다시 나가고 미란이 다가와 안긴다.
잠시 후 마담은 깨알같은 글씨가 빼곡이 적힌 수첩과 노트 두 권을 가져오더니 미란에게 보
이며 확인을 시킨다. 마이킹이라고 하는 일종의 빚을 확인시키는 절차였다. 미란이 결국 시
무룩해진 표정을 해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의 빚까지 청산해주려는 내게 결국 다시 눈
시울이 붉어지고 있다.
“미란아... 물건 챙겨 와”
그녀의 마음을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술집접
대부의 화려한 외모 뒤에 숨겨진 자존심. 빚이라는 것에 상처받았을 그녀의 심정은 복잡했
을 것이다. 혹여 자신의 어마어마한 빚을 보고 나라는 남자의 마음이 변하지는 않을까 노심
초사 했을 것이고, 어쩌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빚을 나라는 남자가 탕감해주는 것 자체를
바라지도 않았을 수도 있다. 아직 그녀와 나 사이엔 믿음이라는 연결고리가 형성되기 이전
이었기 때문이다.
“얼마야?”
“그래도 많이 깠네... 1,730”
원래 얼마의 빚을 지고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몸값이 아닌 결혼식
비용으로 지불해야 할 돈을 지불하는 것이라고 여길 뿐이다.
“계좌번호 줘”
“근데... 정말이야?”
“정말이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예전여자하고 비슷하다는 거 하나만 보고...”
“괜찮겠어? 근데 애는 참 괜찮아~ 지 엄마 수술비 벌겠다고 온 애라...”
“수술?”
“응. 위암 말기에 발견해서... 결국 돌아가시긴 했지만...”
“그랬구나......”
“잘해 줘~ 착하고 좋은애야... 기본적으로 이런데서 일하는 애들하고는 싹수부터 달라”
나는 휴대폰을 꺼내 그 자리에서 그녀의 빚을 청산했다. 돈을 보내고 나니 내가 지금 뭘하
고 있는 짓인가 하는 후회감도 조금 들어왔지만 그런 기분은 곧 사라져버린다. 크지도 작지
도 않은 가죽가방과 쇼핑백 두어개를 들고 다시 들어온 미란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
진다.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걱정도 된다.
미란의 가방을 들고 가게를 빠져나온다. 그런 소문은 어찌나 빠르게 퍼지는지 손님들 옆에
서 엉덩이를 흔들고 노래를 불러야 할 접대부들이 구경난 듯 모두 나와 있는 듯하다. 그 중
한 명은 친하게 지내던 사이인지 미란을 부둥켜안고 행복하라고, 잘 살라고 작별의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녀들도 그녀들의 위치로 돌아가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작별의 인사가 끝나고 나서 우리는 번화가의 중심에 서 있었다.
“오빠~”
“응?”
“나 오빠한테 지~인짜 잘 할거야~”
“난 잘 못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미워하지만 말아줘요”
“그건 모르는거지~”
가방은 내가, 쇼핑백은 미란이 어깨에 메고 밤거리를 걷는다. 술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분간도 못 할 정도로 정신은 맑다. 약간은 서늘한 밤공기가 기분 좋은 가을하늘이었다.
“오빠! 우리 떡볶이 먹자!”
“떡볶이?”
아마도 저녁을 안 먹었을 것이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미란이 그리워 미란을 찾은 날 밥은
먹었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한국사람이라면 버릇처럼 묻는 그 말, 밥은 먹었어? 라는 물음에
잠만 자기에도 부족하다고 했던 미란이다. 출근을 해서 술과 함께하는 안주 조금이 그녀의
요깃거리이자 식사였을 터, 결국 미란은 반나절이나 넘게 공복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전날
은 술을 많이 먹었다는 그녀였기에 어쩌면 밥을 먹은 지 만 하루가 지났을 수도 있다.
“이것 갖고 되겠어?”
“응! 맛있어... 맛있어...”
좋은 걸 사주고 싶어 미란의 팔을 잡아 끌었지만 극구 그녀는 떡볶이가 좋다며 포장마차 앞
에 앉는다. 떡볶이와 순대 1인분씩을 시키자 어묵국물은 서비스로 딸려 나온다. 시원한 국
물과 매콤한 양념의 떡볶이는 군침이 돌 만큼 색감이 좋다. 그녀가 집어주는 떡볶이 한 개
를 입에 넣어보니 보기만큼이나 맛이 좋은 그것이었다. 나 역시 저녁을 건너 뛴 것이 문득
생각났다. 식욕을 자극하는 딱 좋은 매운맛에 결국 나와 미란은 떡볶이와 순대 1인분씩을
더 비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 잘 먹었다!”
볼록해진 배를 통통 두드리는 모습이 흡사 미란이와 같다. 먹을 것을 좋아하던 미란이도 항
상 만족할 만큼 먹고 나면 배를 두드리며 잘 먹었다는 표시를 잊지 않았다.
“잘 먹었어?”
“응. 여기 떡볶이 진짜 맛있네?”
“그러게...”
“우리 이렇게 다니니까, 꼭 오래 사귄 연인 같다. 그치?”
그랬다. 그녀의 말처럼 우리는 오래된 연인이거나 사이좋은 신혼부부의 모습처럼 밤거리를
헤메이고 있었다. 접대부라는 타이틀을 지운 미란은 더욱 밝고 활달한 모습으로 변해있었
다. 그간 해왔던 일이 그녀에겐 커다란 무게의 짐짝이었다는 걸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
큼 말이다.
“앞으로도 이렇게 잘 지내자~”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행복해하니 나 역시 행복하다.
그녀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쉽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사랑받을 여자이고
사랑해도 괜찮을 여자인 것 같다.
그녀가 머물던 원룸으로 향한다. 택시를 잡아타고 달리니 10분도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의
곳이었다. 아마도 함께 살던 룸메이트가 끌어안고 작별인사를 하던 해리라는 이름을 쓰는
접대부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를 따라 2층의 방으로 들어서자 섬유유연제 향이 그득하다. 방금 빨래를 널었는지 여자
특유의 분냄새와 함께 퍼지는 섬유유연제 향에 취할 지경이다. 더블 침대 하나와 티비, 냉
장고와 씽크대. 둘이 생활하기엔 협소한 공간인지라 그녀의 짐 역시 옷 몇 벌과 속옷, 그리
고 운동화와 슬리퍼, 구두 서너 켤레가 전부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챙기는데 걸린 시간도
1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안 서운해?”
“서운하지... 제대로 인사도 못했는데...”
그녀가 덩그러니 침대에 앉아 쓸데없이 이불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아쉬움이 묻어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술집 생활이 아닌 그녀와 함께 지내던 해리와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하지
못한 게 조금 마음에 남는 듯하다.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 창을 띄우고 미란에게 문자를 보
내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집 주소였다.
“오늘 여기서 자고, 얘기도 많이 하고... 내일 저녁때까지는 꼭 와”
“그래도 돼?”
아이처럼 좋아하는 그녀인데 나의 마음은 괜스레 아파온다. 어찌되었건 나는 그녀의 빚을
갚아준 사람이었고 그녀는 내게 신세를 진 여자라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그런 작은 일에도
내 마음이 변할까, 혹은 내가 싫어할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미란아, 내가 너 산거 아니야.. 그렇다고 내가 너를 고용하고 있는 사장도 아니고 우린 똑
같이 동등한 위치잖아... 내 눈치 보지 마.”
“그래도, 오빠가 싫어하는 짓 하기 싫단 말이야...”
“난 괜찮아. 그리고 싫은 건 싫다고 분명히 말할테니까”
“오빠... 오빠 정말 좋은 남자야”
미란이 달려와 품에 안긴다. 향긋한 샴푸냄새가 콧속으로 빨려 들어오고 곧 그녀의 좋은 체
취가 풍겨진다. 누구나 각기 다른 체취를 가지고 있듯 미란에게 풍기는 체취는 마음이 평안
해지는 느낌이다.
“음~ 냄새 좋다!”
“으~윽! 오빤 담배냄새 밖에 안 나~”
“놀고 와. 짐은 내가 가져갈게~”
“고마워요, 정말 정말정말 잘 할게요.”
더 있다 가라는 말을 뒤로한 채 나는 원룸을 빠져나온다. 미란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굴
뚝같지만, 나도 시간이 필요했다. 몇 시간 만에 나와 함께 하게 될 여자를 만든 것에 대한
정리도 필요했고 뒤죽박죽 엉켜버린 머리도 풀어내야 할 숙제를 안고 집으로 향한다.
<1>
퇴근 후 소파에 드러누워 티비를 켠다. 무료한 주말이다. 자그마한 유통회사를 운영하고 있
지만 잘나가던 초반과는 달리 돈벌이는 그닥 쏠쏠하지 않다. 현상유지를 그런대로 하는 편
이라고 볼 정도의 작은 규모의 사업체이다.
티비에선 뭐가 그리 재미난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난리다. 예능프로그램에선 뛰거나 도
전하거나 전국방방곡곡 여행을 다닌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그런 소소함에도 쉽사리 웃지
않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이제와서 누군가를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의 웃음을 앗아간 사
람이 누굴까 하는 의구심이 갑자기 들어온다. 예전에는 날아가는 참새의 똥구멍만 쳐다봐도
자지러지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무미건조한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가만히 누워있자니 세상에 혼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왜 무미건조한 인간이 되어버렸는지에
대한 해답도 찾아내었다.
이.미.란.
5년간 사랑했던 그녀.
아직도 가끔씩 마음에 찾아와 정리된 추억을 흐트려놓는 여자.
슬픔이라는 감정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던 나의 옛사랑.
그녀가 떠나면서 나는 한동안 죽은 사람처럼 지내야만 했다. 이제는 그녀를 만났던 기간과
도 같은 5년이 흐르고 있다. 산수처럼 5년 빼기 5년을 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0"이 되면
좋으련만 여전히 그녀는 나를 향해 웃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그녀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
고 생각한다. 그녀가 다치고 아프면 치료를 해줘야 할 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녀
의 마음이 아프면 힘껏 안아줘야 할 한 사람이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슬픈 이별 노
래의 가사처럼 그녀가 돌아올까 차마 죽지도 못하는 내가 되어버렸다. 그렇다. 그녀는 나의
목숨보다도 귀하게 아껴주었던 여자였다.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어도 그녀가 원한다
면 다시 그녀의 남자가 될 수 있다고 확언하고 확신했다. 그래서인지 전화기엔 여전히 그녀
의 전화번호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몇 번이고 지우려했던 그 전화번호. 몇 번이고 전화기에
서는 삭제를 했었지만 머릿속에서는 지워지지 않는 번호가 되어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이런 나를 두고 왜 결혼을 안 하느냐 묻지만 나는 그 물음에 시원하게 대답
을 한 적이 거의 없다. 그저 때가 되면 하겠죠 라는 말로 더 이상의 추가 질문을 원천봉쇄
해 버렸다.
서른 여덟,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있다. 결혼을 일찍한 친구 중에는 아들놈이
벌써 고등학생이 된 경우도 있다. 한 여자에게 빼앗겨버린 마음을 좀처럼 추스를 방법이 없
었다. 처음 1~2년간은 꿈에서 조차 만날 수 없음에 안타까워했고 거의 매일 밤을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180cm의 키, 현재 몸무게는 60kg을 겨우 넘을 정도이다. 미란이를 만날
때 까지만 해도 80kg에 육박하던 몸무게는 줄고 줄어 이제는 아예 복구가 되질 않는다.
그녀를 잊어보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었다. 미친듯이 술을 먹어도 보고 기회만 되면 여자를
만났다. 소위 말하는 술집 여자와 동거도 해봤고 어울리지도 않는 명품이란 명품을 질러대
며 엄청난 돈도 써봤다. 그러나 결국 내게 남은 건 엄청난 빚과 또 다른 상처뿐이었다. 그
렇게 2년여를 머저리처럼 살아보니 이별의 상처는 아물어 있었지만 그리움이라는 녀석은
더욱 숙성되어 나쁜 기억보단 좋은 기억들만 기억되게 되었다.
담배를 찾아 물고 버릇처럼 스마트폰을 집어 든다. 하루의 시작과 끝에는 버릇처럼 하는 일
과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는 것. 카카오스토리라고 하는 일종의 미니
사진첩이거나 작은 일기장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어플안의 그녀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이
단 하나 있는 삶의 낙으로 되어버렸다. 미란의 스토리는 언제나 행복함만이 깃들여져 있다.
항상 말로는 그녀의 행복을 비는 나였지만 진짜 속마음은 그녀의 불행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와 함께, 잘생기고 멋져 보이는 남편과 함께, 때로는 그녀 혼자. 그녀의
행복을 옅보고 나면 속이 뒤집어질 듯 짜증이 밀려온다. 어쩔 땐 너무 화가 나 속이 울렁거
리며 토가 나올 때도 있었다.
그녀는 현재의 감정에 충실한 여자였다. 나를 만날 때, 그녀의 미니홈피의 기분은 언제나
우울, 짜증, 슬픔이란 단어로 채워져 있었다. 기분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감정의 아이콘
은 모습을 바꿨고 간혹 행복이나 기쁨이라는 아이콘이 있을 때면 나 자신마저도 기쁨을 느
낄 때도 있었다. 오롯이 그녀의 감정 상태에 따라 나도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 했다.
여전히 행복함이 깃든 옛 애인의 얼굴을 보고 또 본다. 여전히 예쁜 외모이다. 그녀에게만
큼 시간의 세월이 비껴간 듯 나를 만날 때의 모습 그대로이다. 아니 더욱 미모가 무르익은
모습이다. 어렸을 적엔 없던 풍부한 농염함이 묻어난다. 10년이나 지났는데도 말이다.
결국 버릇처럼 찾아본 그녀의 모습에 나는 또 다시 더러운 기분으로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그녀와 헤어지고 정신을 차렸을 땐 나는 폐인이 되어있었다. 혈색은 물론이고 몸도 꽤나 망
가졌다. 군대시절, 사회에 나가면 끝내주는 여자를 만나겠다는 의지의 산물이었던 가슴근육
과 식스팩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피부는 말라붙은 고목의 껍데기처럼 거칠어져 있
었다. 가끔씩 보는 부모님 역시 이별로 인한 상처라는 걸 알 리 만무했다. 억지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몇 군데의 병원엘 찾아가보기도 했다. 이별의 상처와 그녀를 잊지 못하는 상사
병에 걸린 채였으니 의사라는 양반도 영양부실이나 만성피로와 같은 같잖은 진료결과를 내
놓았다. 그 때 내과와 같은 껍데기 진료실이 아닌 정신과를 찾아갔다면 지금 나의 인생도
바뀌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극복했다.
이제는 추억이라는 글씨로 남길 수 있을 만큼 내안의 그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말이
다. 비록 만질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미란이지만 그녀는 충분히 내 안에서 친구이자 애인이
며, 아내이고 섹스파트너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고 있다.
"씨발년!"
가끔은 이렇게 그녀에게 욕도 한다. 물론 미란이는 들을 수 없겠지만 괘씸하거나 그녀의 행
복이 진하게 느껴질때면 이렇게 넓은 아파트가 울려 퍼질 정도로 힘차게 욕을 한다.
그냥 잠을 잘까하다가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는다. 주말이었고 기분이 더러워졌기 때문이
다.
180cm의 키, 날렵한 몸매, 그리고 피부는 검지만 그래도 봐줄만한 얼굴.
작지만 나름 괜찮은 사업체의 오너, 서울 땅에 융자 없는 45평 아파트 한 채.
검정색 신형 그랜저, 대인관계에서는 잘 웃고 친절한 평범한 남자.
사람들이 묻곤한다. 왜 여자가 없느냐고...
내 마음에서 미란이 나가버리기 전에는 그 물음에 답을 해줄 수가 없을 것 같다. 점점 차오
르는 나이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 밖에 없다.
옷을 차려입고는 아파트에서 도보로 10여분쯤 떨어진 유흥가로 들어선다. 차려 입는다고 해
봐야 면바지에 깔끔하게 다림질 된 남방셔츠가 전부이다. 집을 나선지 10여분, 술집이며 노
래방, 각종음식점의 간판들이 즐비하게 줄 서있다. 젊은 남녀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듣기 좋다. 나도 한때는 저들처럼 에너지 넘치고 한 잔의 술에 좋은 기분을 주체하지 못했
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선한 웃음으로 그들이 길바닥에서 자지러지게 웃는 모습을
바라본다. 저들의 젊음이 부럽다. 저렇게 대학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를 이토록 괴롭히
는 미란이라는 여자를 절대 만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해보지만 현실성 없는 혼자만의 착각에
잠시 빠졌다가 정신을 차린다.
피워내던 담배의 불똥을 튕기며 지하의 작은 룸으로 들어선다. 가게의 이름은 드림걸이다.
한번은 가게의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는지 마담에게 물은 적이 있다. 마담은 놀고 간 손님
들이 꿈에서도 잊지 못 할 만큼의 서비스를 해주기 위한 뜻이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마담
의 영업마인드와 상호명이 일치하는지 룸 수가 5개인 그닥 크지 않은 규모임에도 제법 단
골들이 많이 있다. 나 역시 그 단골이라는 손님들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어이구~ 형님.. 왜 이리 간만이세요~"
웨이터 실장이 CCTV를 확인했는지 채 계단을 내려서지도 못했는데 뛰어나와서는 반갑게
반겨준다. 솔직히 남자들이 술집에 가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집에서건 회사에
서건 병신취급을 받건 바보취급을 받건 간에 이런 술집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왕이 된다.
웨이터의 마중을 받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검은색의 시스루 원피스를 입은 마담이 빨간
입술을 오물거리며 반갑게 다가선다.
"어머~ 사장니~임...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쪼르르 달려와서는 팔짱부터 끼운다. 일부러 그러는지는 몰라도 두툼한 가슴까지 팔뚝에 비
벼댄다. 워낙 가슴이 커서 그런 거리라 생각하며 그저 아무렇지 않게 반응도 하지 않는다.
분명 미인인 편에 속하는 그녀이지만 내 타입은 아니다. 여자는 고양이 상과 강아지 상으로
나뉜다고 했던가? 분명 마담은 심한 고양이 상에 속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은 백치미가 있
는 강아지 상을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지하의 퀴퀴한 냄새를 지우기 위해 설치해 둔 대형
방향제에서 칙하는 소리와 함께 허브향 가득한 액체가 분사된다. 그리고 동시에 진한 향수
냄새가 풍겨져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손님 많네~ 나 없어도 잘 먹고 잘 사는구만!"
"어머? 많긴... 요즘 단속에 뭐에... 아주 정신 없구만. 손님도 반토막 났다고"
"왜? 무슨 일 있었어?"
"우리 그이가 화를 못 참아서 손님 하나를 아주 아작을 내버렸잖아"
"형님이?"
"응.. 그나마 증인들이 많이 도와줘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음 쇠고랑 찼을거야"
마담. 정은희.
서른 아홉살의 나보다 한 살 많은 여자로 그녀의 남편은 주먹깨나 쓰는 건달이었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정신 차리고 시작한 일이 바로 드림걸이라는 룸
방이었는데 얼굴만 봐서는 아주 착고 선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그런 그가 사람을 때렸다
니 믿기지 않는다. 과거엔 무시무시한 건달이었다고 하나 내가 아는 그 사람은 항상 친절하
고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액땜했다 쳐. 그래, 형님은 괜찮고?"
"우리 그이야 뭐... 쌈박질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니까"
"다행이네!"
"아! 근데 우리 미란이 언제 데려갈거야~"
"무슨 소리야?"
"아무튼 남자들이란.... 으이그..."
"무슨 소리냐니까? 알아듣게 말을 해야지"
"그랬다며. 자기가 같이 살자고 했다며?"
마담과의 일상다반사적인 대화를 나누다가는 그녀의 말에 잠시 멈칫한다.
그랬던 것 같다. 정확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기억을 해낼 수는 없지만 그랬던 것 같다.
미란이라는 가명도 내가 붙여준 이름이다. 원래 그녀의 본명은 홍지숙이라고 했던 것 같다.
우연찮게 이 가게를 처음 온 날, 나는 미란이와 너무도 흡사했던 그녀에게 눈을 뗄 수 없었
다. 키며 이목구비가 나를 힘들게 하던 미란이와 너무 닮아 민서라고 소개하는 그녀에게 이
름을 바꾸길 권유했다. 가게의 에이스는 아니었지만 미란이 생각나고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
싶은 날은 언제나 이곳을 들러 미란이를 만났다. 오늘도 그녀가 무척이나 밉고 씨발년스러
워 찾아 온 것이다.
다섯 번째였나 여섯 번째였나? 그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진짜 미란이의 생일날 그녀를 지
목하고 처음으로 2차를 나갔다. 그리고 그날 그녀를 품에 안으며 첫마디로 같이 살자고 했
던 게 생각났다.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것 같다.
"그걸 기억하고 있대?"
"어머? 완전 나쁜 남자네? 여자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내가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때 내가 그녀에게 했던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던 것 같다.
"책임?"
"1년 전쯤인가? 하도 2차를 안 나간다고 하길래.. 빚도 많은 년이 왜 그러나 물었더니 자기
얘길하더라~ 그년 스물 일곱이나 쳐 먹고 꽤나 순진해"
순진한 여자.
과연 2차까지 뛰는 화냥년에게 순진함을 논할 수 있을까? 나는 단 한 번도 몸을 파는 여자
를 불쌍하거나 가엾게 여긴 적이 없다. 예전은 모르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자신의 의지없이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불쌍하게 볼 것도 동정을 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그
녀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그따위로 만들어버린 거니까.
"어떻게 하면 데리고 갈 수 있는데?"
내가 왜 그런 물음을 한 지 모르겠다. 내가 내뱉은 말에 대한 수습책임 반, 미란이라고 부
르는 술집 여자에 대한 관심 반 정도라고 생각한다.
"정말, 같이 살 거야?"
마담은 아주 흥미롭다는 듯 말하며 나를 올려다본다. 날카로워 보이는 턱이 나의 목을 힘껏
찌를 듯하다.
"아~ 몰라, 방부터 안내해~"
"이 천 만원이면 마이킹 끝이야"
"이 천?"
"왜? 많아? 자기니까 원금만 받는건데..."
이 천 만원이라는 금액이 작거나 커서 놀란 게 아니다.
고작 이 천 만원이라는 돈 때문에 그렇게 몸을 굴린다는 게 황당할 뿐이었다. 이 천 만원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회사를 다니고 일을 한다면 충분히 빌릴 수
도, 벌수도 있는 금액이라는 거다. 도저히 내 선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금액임엔 틀림없
었다.
안내된 구석의 작은 골방. 엄연히 따지면 이 방은 손님을 받는 룸이 아니다. 노래방기계와
테이블, 소파, 그리고 작은 화장실이 딸려있긴 하지만 이 공간은 마담의 남편인 사람의 휴
게실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나도 그 형님을 따라 두어번 들어와 양주 몇 잔을 깔짝이긴 했지
만 그 형님 없이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다. 결국 대기실도, 손님이 순번을 기다리는 곳도, 그
렇다고 성미 급한 사람들을 위한 떡치는 장소도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일반 룸에 비해 절반이나 될 법한 공간을 두리번거리는데 작은 노크소리와 함께 술이 들어
오고 그 뒤로 안주가 들어온다. 처음 보는 막내 웨이터이다. 키는 작은데 몸집이 꽤나 단단
해 보이는 녀석의 얼굴은 남자치고 너무 귀여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새로 왔나보네?”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물며 나긋하게 묻자 녀석이 허리를 90도로 구부리며 인사를 한다.
“인사 올립니다. 양배추라고 합니다.”
그 녀석의 인사를 들으니 그제서야 개그맨 양배추와 흡사한 외모라는 걸 알게 된다. 다시
봐도 양배추와 너무 닮은 얼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웃어서 미안.. 양배추보다 훨씬 낫구만...”
나는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내 그 중 3만원을 팁으로 건넨다. 원래 지갑을 가지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라 그 모습이 마치 품삯 받은 노가다 꾼으로 비쳐질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갑만 가지고 다니면 흘리는지 버리는지 잃어버리는 습관을 가진 놈이기 때문
이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한 잔 올리겠습니다.”
“사장님은... 그냥 형이라고 불러!”
사장이 맞긴 했다. 작은 사업을 하고 있으니. 하지만 왠지 사장이라는 말은 아직까지 거부
감이 든다. 녀석이 권하는 양주를 스트레이트 잔에 받으며 나머지 한 손으로는 담배를 비벼
끈다.
“언제부터 일 한 거야?”
“오늘이 딱 4일째입니다.”
“할 만 하고?”
“예, 재밌습니다.”
한 잔을 깨끗이 비우고 잔을 녀석에게 건네자 여전히 구부린 허리를 펴지 않고 잔을 받는
다.
“몇 살?”
“스물 넷입니다.”
“좋은 나이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돌려 잔을 비운 녀석이 다시 잔을 건넨다.
“돈 많이 벌어... 허튼데 쓰지 말고... 알았지?”
“예.”
분명 이 녀석은 돈을 모으라는 내 말을 이해 못하거나 쓸데없는 꼰대의 잔소리로 치부할거
라고 확신했다. 물론 생각외로 정신머리가 똑똑히 박혀 있는 녀석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초짜 웨이터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노크소리와 함께 미란이 들어선다. 그러나
평상시에 보던 홀복 차림이 아닌 조금 전 길거리에서 시끌벅적 웃어대던 대학생처럼 수수한
옷차림이다. 성조기가 가슴에 작다랗게 박힌 하얀 면티셔츠와 하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스
키니 청바지, 깔끔하고 수수하지만 나름 섹시미가 풍겨진다.
“오빠~”
의외의 복장에 내가 잠시 말을 잃고 있었다. 초짜 웨이터 역시 그런 그녀의 옷차림이 생소
한지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 빠져나간다.
“오... 옷이...”
그렇게 입혀 놓으니 더욱 미란이 다운 미란이다. 검은색 긴 생머리, 오늘은 예전의 그녀처
럼 동그랗게 올려 고무줄로 고정되어 있었고 발가락이 예쁘게 드러나는 샌들도 그녀의 취향
에 가까운 그녀이다.
“왜... 이상해요?”
이상할 것까지야 있겠냐만은 생소한 느낌 때문인지 전혀 술집여자 같지 않은 모습의 그녀이
다. 그녀 역시 그런 모습이 쑥스러운가보다. 연신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하며 안절부절
다가오지도 못하고 있다. 조금도 술집 접대부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기가 힘들다.
“마담한테 안 혼나?”
“원래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쉬려고 했는데 오빠왔다고 해서... 이제 출근하는 길이예요”
미란의 말을 듣고 나니 평범한 복장의 이유를 알 것 같다. 지명손님에 대한 예의 때문인지
아니면 마담이 얘기한 것처럼 내가 저질러 놓은 말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있는건지 그녀는
좋지 않은 몸을 이끌고 내 앞에 서있다.
“오빠 잠시만요.. 옷 갈아입고 다시 올게요~”
미란이 이마 귀 옆으로 흐르는 귓밑머리를 넘기며 말한다. 그리고 은은한 조명탓에 보지 못
했던 그녀의 피부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정말 몸이 안 좋은지 혈색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평소 진한 화장의 그녀만 봐왔던터라 화장기 옅은 얼굴이 낯설지만 보기 좋다.
“됐어... 그냥 와~”
“나 화장도 안 했어요...”
누군가 그러더라 화장 안 한 생얼은 벌거벗은 느낌이라고. 하지만 진한 화장에 감춰져 있는
그녀보다 자연스럽고 진솔해 보인다.
“예뻐! 그러니까 그냥 와”
예쁘다는 말에 미란이 발그라진 볼을 양손으로 감싼다. 그리고는 총총대며 달랑 네 명이 앉
을 수 있는 길다란 소파로 다가와 앉는다. 역시 여자는 여자였다. 나란히 놓인 나의 무릎과
미란의 무릎을 비교해보니 두께부터가 확연히 차이난다. 무릎부터 이어지는 허벅지까지 그
두께감은 더욱 비교가 된다.
“많이 안마신거 같은데?”
술병을 들고 잔에 따르며 말하는 미란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본 그녀
는 과일이 담긴 접시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다가 오렌지며 파인애플 같은 안주거리를 적당한
크기로 나누거나 잘라놓는다. 그 손길이 분주하면서도 숙달되어 보인다.
“많이 아파?”
술잔을 들어 미적지근한 양주를 입에 털어 넣으니 독하면서도 풍부한 달콤함이 몸서리쳐지
게 한다. 삼키지 않고 소파 뒤로 몸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조금씩 천천히 화끈한
느낌의 물을 흘려 넣었다.
“괜찮아요...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먹었나봐요”
몰랐는데 그렇게 술을 먹는 게 내 버릇이란다. 바로 옆에 앉은 미란이 그랬었다. 손가락으
로 세기 힘든 만큼 나를 접대했던 여자가 그렇다면 그런 것 같다. 한 템포 늦은 물음과 대
답. 우리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다. 급하기는커녕 여유 있고 느리다. 입가에 향긋하면서도
톡 쏘는 상큼함이 느껴지는 것이 파인애플을 안주로 준비한 것 같다.
“오늘도 언니 생각나서 왔구나? 오늘은 또 무슨 씨발스러운 일이 있으셨대?”
팔짱을 끼우며 거친 내 손엔 촉촉한 작은 손이 들어온다. 그리고 어깨엔 약간의 무게감이
느껴져 온다. 미란이 언제나 기대어오던 그 자세로, 그 느낌으로 다가온다. 향 좋은 샴푸 냄
새가 훅하고 코안을 통해 뇌까지 쳐들어온다. 이제 막 씻고 나온 싱그러운 향기가.
“아냐.. 그런 거...”
“정말 아니야? 내가 보기엔 오늘도 언니 생각나서 온 게 맞는데?”
눈을 감고 있으면 예전처럼 진짜 미란이 내 옆에서 속삭이는 느낌이다. 목소리도 비슷하고
내가 선물했던 익숙한 향수냄새도 비슷하다. 나의 이런 독특한 취미이거나 대리만족을 아무
렇지 않게 받아줄 여자가 또 누가 있겠는가? 술집 여자라서가 아닌 미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다.
“귀신같은 기지배... 그래 오늘도 기분이 씨발스러워서 왔다!”
자포자기 하듯 약간 힘주어 말하자 미란의 손이 나의 코를 잡아 아프지 않게 흔든다. 그러
더니 까칠하고 올라온 수염자리를 부드럽게 훑어준다.
“거 봐... 오빤 나 못 속인다니까? 한 잔 더 하세요. 그리고 더러운 기분 확 날려버리세요.”
잠시 어깨가 가벼워지는가 싶더니 다시 무거워진다. 입술에는 미끈하면서도 차가운 유리 느
낌이 들고 자연스레 입술은 벌어진다. 또 미적지근한 독한 알콜이 들어오고 천천히 목을 축
이고 나면 상큼한 안주가 뒤이어 들어온다.
노래도, 그렇다고 시끌시끌한 게임도, 그렇다고 본전을 뽑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더듬지도
않은 채 연인처럼 붙어 앉아 시간을 보낸다. 가끔씩 술을 먹여주고 안주를 먹여주며 내 얘
기를 들어주다가 웃거나, 욕하거나, 또는 울음을 흘리는 그녀가 이젠 익숙하다.
그렇게 편안한 자세에서 편안하게 술을 마신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미란은 그저
편히 쉬고 있는 나를 귀찮게 하거나 쓸데없는 직업정신으로 괴롭히지 않는다.
“미란아~”
“응?”
“이젠 니가 너무 익숙해졌다!”
“응? 그게 무슨 뜻이야? 좋은거야? 나쁜거야?”
존대와 반말을 적절히 섞는 그녀이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그런 절제된 관계가
실수를 줄이고 서로에 대한 예의를 더욱 잘 지키는 방법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글세... 좋은걸까 나쁜걸까?”
“왜, 이제 나 질려?”
원래 여자들은 그런가보다. 대화의 흐름이 아닌 단어의 본질만을 들추고 따져오는.
“사람들이 왜 이별을 할까?”
“오빠 또 시작이네... 취하셨어요?”
“익숙해지니까... 재미없으니까... 따분하니까... 그럼 오래된 부부는 왜 같이 살까?”
“익숙하니까...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졌으니까? 맞지?”
꽤나 놀아봤다고 이젠 나의 질문에 척척 대답도 잘하는 그녀이다. 미란을 대신해서 만나는
거라고는 하지만 성향이 맞지 않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 껍데기만 닮은 여자였다면 나는 두
번 다시 그녀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첫 만남부터 느낌이 좋았다. 진짜 미란이처럼
대화가 잘 통했고 유머코드도 잘 맞았다. 미란과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즐겁고
편안했다. 그리고 행복함이 느껴졌다.
눈을 뜨고 소파에서 등을 떼어 자세를 바르게 잡는다. 그러자 자연스레 미란도 자세를 바르
게 고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너, 오늘은 술 먹지 마~”
“어떻게 그래...”
볼이 부푼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매출에 신경을 쓰지 않으
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말 안 들을거야?”
“알았어... 안 마실게...”
어쩔 수 없다는 듯 미란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한다.
따라져 있던 술잔을 들어 단숨에 넘기자 목젖이 타는 느낌이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느낌이
확연히 느껴진다. 미란은 재빠르게 과일을 뒤적거리며 적당한 녀석을 골라 내게 권해온다.
나는 미란의 손을 잡고 알맹이만 있는 바나나 조각을 뺏어들었다.
“미란아! 이제 이런 거 하지 마.”
“응?”
그녀의 눈이 동그라진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마저 갸웃거리기 일보직전으로 보
였다.
“익숙해져서, 이제 따분하고 재미없어”
“피~ 무슨 그런 말을 대놓고 하냐? 담에 와서 다른 여자랑 놀거나 다른 가게 가지! 사람
마음 아프게... 오빠 못됐어!”
미란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린다. 자존심이 무지 상한 표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애써 그런
모습을 숨기기 위해 정신없이 테이블을 준비하는 모습이 더 안쓰럽다.
“나 이제 여기 안 올거야.”
“.................”
“근데,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미란이는 필요하거든?”
“....”
미란이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본다. 금세 눈물이 흘러내릴 듯 눈망울이 촉
촉이 젖어있는 모습에 기분이 이상하다. 그녀가 거절할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나 역시 마담의 언질 때문이 아닌 심사숙고한 생각의 결론이었다.
“알다시피 내가 못난 찌질이라, 옛 여자 못 잊고 있다는 걸 이해해줄 수 있겠어?”
“..............”
“언제라도 떠나려면 떠나, 그게 싫다면... 근데 당분간만이라도 같이 있어줘”
“..................”
결국 미란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 눈물에 담긴 뜻은 알 수가 없다. 기쁨인지 아니
면 덫에 걸린 사냥감에 대한 희열인지.
“같이.......... 살래?”
마지막 물음에 미란은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쳐낸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연다.
“이해할게, 오빠 마음에 그 언니가 너무 강하게 자리 잡은 거 아니까... 내가 힘든만큼 오빠
도 힘들테니까. 근데 그것 때문에 힘들 것 같아. 하지만 참을 수 있어. 아니 이해하려고 노
력할게요. 나는 오빠한테 이런 곳에서 일했던 여자라는 거 이해해달라고 차마 못하겠어요.
다만 너무 편견만 갖지 말아주세요.”
미란은 내가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것보다, 옛 여자를 마음속에 담고 있는 것보다 자
신이 술집 접대부라는 사실이 더욱 마음에 걸렸었나보다. 이전에 잠시 잠깐 동거를 했던 그
여자와는 또 다른 여자이다. 그 여자는 자신이 술집 접대부였다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여겼던 여자였다. 마담의 말대로 아직까지 순수함을 간직한 여자라는 생각이 물씬
들어온다.
“그렇게 할게, 미란아... 마담 좀 불러주겠어?”
얼굴에 번진 눈물 자욱을 닦는 모습엔 생기가 묻어난다. 이 여자, 그동안 얼마나 아프고 힘
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강한 척을 해도, 아무리 센 척을 해도 여자는 여자일
뿐이다. 제 아무리 남녀평등을 외치고 남성우월사상을 경멸하는 여자도 결국 여자는 여자일
뿐이라는 거다. 왠일인지 가슴이 떨린다. 마담을 부르러 간 미란이 오기 전 마치 그녀의 부
모를 기다리는 심정처럼 떨려온다. 그리고 그 떨림을 마음껏 느낄 새도 없이 조용히 문이
열리며 마담이 들어오고 뒤이어 미란이 들어선다.
“왜? 무슨 일이야?”
“계산해 줘...”
“벌써? 왜? 오늘은 데리고 안 가?”
“갈거야... 데리고...”
“벌써? 으그... 오래 굶었구나?”
“.............”
마담은 혹여 미란이 기분이라도 나빠할까 들릴 듯 말 듯 조용하고 조심히 말했다. 미란은
두 손을 모아 가지런히 서서 나와 마담을 바라보고 있는데 표정은 맑아 보인다.
“오늘 술은 내가 쏠게... 2차비만 이따 나갈 때....”
“아니, 미란이 데리고 간다고...”
마담이 슬그머니 미란을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나를 쳐다본다. 자신이 했던 말이지만 도저
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그... 그러니까... 아까 한 말 진짜...”
“입 아퍼... 입 아퍼... 계산이나 해 줘... 얼른 가서 자게!”
“그... 그래... 잠깐만...”
“빨리~”
마담이 다시 나가고 미란이 다가와 안긴다.
잠시 후 마담은 깨알같은 글씨가 빼곡이 적힌 수첩과 노트 두 권을 가져오더니 미란에게 보
이며 확인을 시킨다. 마이킹이라고 하는 일종의 빚을 확인시키는 절차였다. 미란이 결국 시
무룩해진 표정을 해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의 빚까지 청산해주려는 내게 결국 다시 눈
시울이 붉어지고 있다.
“미란아... 물건 챙겨 와”
그녀의 마음을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술집접
대부의 화려한 외모 뒤에 숨겨진 자존심. 빚이라는 것에 상처받았을 그녀의 심정은 복잡했
을 것이다. 혹여 자신의 어마어마한 빚을 보고 나라는 남자의 마음이 변하지는 않을까 노심
초사 했을 것이고, 어쩌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빚을 나라는 남자가 탕감해주는 것 자체를
바라지도 않았을 수도 있다. 아직 그녀와 나 사이엔 믿음이라는 연결고리가 형성되기 이전
이었기 때문이다.
“얼마야?”
“그래도 많이 깠네... 1,730”
원래 얼마의 빚을 지고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몸값이 아닌 결혼식
비용으로 지불해야 할 돈을 지불하는 것이라고 여길 뿐이다.
“계좌번호 줘”
“근데... 정말이야?”
“정말이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예전여자하고 비슷하다는 거 하나만 보고...”
“괜찮겠어? 근데 애는 참 괜찮아~ 지 엄마 수술비 벌겠다고 온 애라...”
“수술?”
“응. 위암 말기에 발견해서... 결국 돌아가시긴 했지만...”
“그랬구나......”
“잘해 줘~ 착하고 좋은애야... 기본적으로 이런데서 일하는 애들하고는 싹수부터 달라”
나는 휴대폰을 꺼내 그 자리에서 그녀의 빚을 청산했다. 돈을 보내고 나니 내가 지금 뭘하
고 있는 짓인가 하는 후회감도 조금 들어왔지만 그런 기분은 곧 사라져버린다. 크지도 작지
도 않은 가죽가방과 쇼핑백 두어개를 들고 다시 들어온 미란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
진다.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걱정도 된다.
미란의 가방을 들고 가게를 빠져나온다. 그런 소문은 어찌나 빠르게 퍼지는지 손님들 옆에
서 엉덩이를 흔들고 노래를 불러야 할 접대부들이 구경난 듯 모두 나와 있는 듯하다. 그 중
한 명은 친하게 지내던 사이인지 미란을 부둥켜안고 행복하라고, 잘 살라고 작별의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녀들도 그녀들의 위치로 돌아가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작별의 인사가 끝나고 나서 우리는 번화가의 중심에 서 있었다.
“오빠~”
“응?”
“나 오빠한테 지~인짜 잘 할거야~”
“난 잘 못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미워하지만 말아줘요”
“그건 모르는거지~”
가방은 내가, 쇼핑백은 미란이 어깨에 메고 밤거리를 걷는다. 술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분간도 못 할 정도로 정신은 맑다. 약간은 서늘한 밤공기가 기분 좋은 가을하늘이었다.
“오빠! 우리 떡볶이 먹자!”
“떡볶이?”
아마도 저녁을 안 먹었을 것이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미란이 그리워 미란을 찾은 날 밥은
먹었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한국사람이라면 버릇처럼 묻는 그 말, 밥은 먹었어? 라는 물음에
잠만 자기에도 부족하다고 했던 미란이다. 출근을 해서 술과 함께하는 안주 조금이 그녀의
요깃거리이자 식사였을 터, 결국 미란은 반나절이나 넘게 공복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전날
은 술을 많이 먹었다는 그녀였기에 어쩌면 밥을 먹은 지 만 하루가 지났을 수도 있다.
“이것 갖고 되겠어?”
“응! 맛있어... 맛있어...”
좋은 걸 사주고 싶어 미란의 팔을 잡아 끌었지만 극구 그녀는 떡볶이가 좋다며 포장마차 앞
에 앉는다. 떡볶이와 순대 1인분씩을 시키자 어묵국물은 서비스로 딸려 나온다. 시원한 국
물과 매콤한 양념의 떡볶이는 군침이 돌 만큼 색감이 좋다. 그녀가 집어주는 떡볶이 한 개
를 입에 넣어보니 보기만큼이나 맛이 좋은 그것이었다. 나 역시 저녁을 건너 뛴 것이 문득
생각났다. 식욕을 자극하는 딱 좋은 매운맛에 결국 나와 미란은 떡볶이와 순대 1인분씩을
더 비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 잘 먹었다!”
볼록해진 배를 통통 두드리는 모습이 흡사 미란이와 같다. 먹을 것을 좋아하던 미란이도 항
상 만족할 만큼 먹고 나면 배를 두드리며 잘 먹었다는 표시를 잊지 않았다.
“잘 먹었어?”
“응. 여기 떡볶이 진짜 맛있네?”
“그러게...”
“우리 이렇게 다니니까, 꼭 오래 사귄 연인 같다. 그치?”
그랬다. 그녀의 말처럼 우리는 오래된 연인이거나 사이좋은 신혼부부의 모습처럼 밤거리를
헤메이고 있었다. 접대부라는 타이틀을 지운 미란은 더욱 밝고 활달한 모습으로 변해있었
다. 그간 해왔던 일이 그녀에겐 커다란 무게의 짐짝이었다는 걸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
큼 말이다.
“앞으로도 이렇게 잘 지내자~”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행복해하니 나 역시 행복하다.
그녀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쉽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사랑받을 여자이고
사랑해도 괜찮을 여자인 것 같다.
그녀가 머물던 원룸으로 향한다. 택시를 잡아타고 달리니 10분도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의
곳이었다. 아마도 함께 살던 룸메이트가 끌어안고 작별인사를 하던 해리라는 이름을 쓰는
접대부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를 따라 2층의 방으로 들어서자 섬유유연제 향이 그득하다. 방금 빨래를 널었는지 여자
특유의 분냄새와 함께 퍼지는 섬유유연제 향에 취할 지경이다. 더블 침대 하나와 티비, 냉
장고와 씽크대. 둘이 생활하기엔 협소한 공간인지라 그녀의 짐 역시 옷 몇 벌과 속옷, 그리
고 운동화와 슬리퍼, 구두 서너 켤레가 전부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챙기는데 걸린 시간도
1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안 서운해?”
“서운하지... 제대로 인사도 못했는데...”
그녀가 덩그러니 침대에 앉아 쓸데없이 이불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아쉬움이 묻어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술집 생활이 아닌 그녀와 함께 지내던 해리와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하지
못한 게 조금 마음에 남는 듯하다.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 창을 띄우고 미란에게 문자를 보
내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집 주소였다.
“오늘 여기서 자고, 얘기도 많이 하고... 내일 저녁때까지는 꼭 와”
“그래도 돼?”
아이처럼 좋아하는 그녀인데 나의 마음은 괜스레 아파온다. 어찌되었건 나는 그녀의 빚을
갚아준 사람이었고 그녀는 내게 신세를 진 여자라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그런 작은 일에도
내 마음이 변할까, 혹은 내가 싫어할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미란아, 내가 너 산거 아니야.. 그렇다고 내가 너를 고용하고 있는 사장도 아니고 우린 똑
같이 동등한 위치잖아... 내 눈치 보지 마.”
“그래도, 오빠가 싫어하는 짓 하기 싫단 말이야...”
“난 괜찮아. 그리고 싫은 건 싫다고 분명히 말할테니까”
“오빠... 오빠 정말 좋은 남자야”
미란이 달려와 품에 안긴다. 향긋한 샴푸냄새가 콧속으로 빨려 들어오고 곧 그녀의 좋은 체
취가 풍겨진다. 누구나 각기 다른 체취를 가지고 있듯 미란에게 풍기는 체취는 마음이 평안
해지는 느낌이다.
“음~ 냄새 좋다!”
“으~윽! 오빤 담배냄새 밖에 안 나~”
“놀고 와. 짐은 내가 가져갈게~”
“고마워요, 정말 정말정말 잘 할게요.”
더 있다 가라는 말을 뒤로한 채 나는 원룸을 빠져나온다. 미란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굴
뚝같지만, 나도 시간이 필요했다. 몇 시간 만에 나와 함께 하게 될 여자를 만든 것에 대한
정리도 필요했고 뒤죽박죽 엉켜버린 머리도 풀어내야 할 숙제를 안고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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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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