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아따... 고년 진짜 맛나게 생겼는데...”
“진정해라..”
“너나 진정해! 금방 흥분해가지고 다된 밥에 초를 치려고 작정을 했냐!? 너 때문에 줘도 못 먹는 놈이 됐잖아..”
“....”
“미지 저 년 믿을 만 한 거야?”
“아니.. 못 믿어..”
“그런데 이렇게 다시 보내도 괜찮은 거야?”
“그러니까 다시 보낸 거지..”
“뭐? 그건 뭔 소리야?”
“아까 전화했을 때.. 강한상이 옆에 듣고 있었던 게 분명한데.. 내가 불렀을 때 가도 되냐고 물어봤다면 말이야. 만약이지만 일부러 보냈을 경우의 수도 읽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럼 왜 왔을까? 널 확인하려고? 그게 다는 아닐 거야.. 그렇다면... 왜 보냈을까..라는 질문에 답은 몇 가지가 안 되지 않을까??”
“그럼.. 미지씨 말이 전부 거짓말이라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잖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럼 뭐가 문젠데?”
“뭐긴 뭐냐.. 오늘 낮에 내가 했던 행동이 문제지.. 신이가 이 게임이란 게 내가 이길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했잖아.. 그걸 뒤엎으려고.. 우리가 이런 치밀한 계획까지 세웠던 거고..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만약 이 모든 계획을 준비하고.. 실행하는데... 그 계획조차 다 실행하기 전에 신이가 날 선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잃어버리면...”
“....그럼.. 아까 그게 다 연극이라고?”
“아니.. 정말 네가 말리지 않았으면 뛰어 나갈 뻔 했다.. 하지만 이 호프집을 나가서 또 다시 돌아왔겠지.”
“와.. 오싹하네.. 아니.. 나 지금 소름 돋았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냐? 내가 알던 진태규가 맞냐? 순진하고.. 얼빠진 놈은 어디 갔냐..”
“네 앞에서 묶인 마누라가 농락당하는 경험을 해봐라... 자지도.. 안 서는데.. 그걸 보고 마누라 바로 앞에서 웃는 놈의 얼굴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는 매일, 몇 번이나 떠오르고.. 떠나질 않는데.. 너 같으면.. 아까 같은 일이 또 흥분을 하겠냐?”
“진심 무섭다.. 사람이 너무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던데..”
“미친놈...”
“그럼.. 내가 괜한 얘길 한 거 아니야? 내 딴에는 미지씨라도 확실히 우리 편으로 만들려고 한 건데..”
“상관없어.. 미지란 여잔.. 어차피 자신한테 이득이 될 일에만 움직일 테니까.. 처음엔 아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쾌락과 돈의 마력에 완전히 빠져버린 거 같아서 좀 안타깝기도 하더라..”
“그럼 아까 같은 얘길 하면 더 안 되는 거잖아..계획이란 게..”
“그게 좀 걸리긴 했는데.. 은행 일이 아닌.. 신이에 대한 얘기만 했으니까.. 상관없다. 그대로 전하면 오히려 나한테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그리고.. 네 존재는 이미 한상이 새끼도 다 알고 있을 게 뻔하다..”
“어떻게 알아? 졸라 조심했는데.”
“그건 내 실수인 거 같아... 그때 욱해서 한상이 놈한테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 널 계속 주시하는 거 같더라고.. 뭐.. 그것도 상관없지만.. 내 지시대로 내가 준 전화로 계속 움직였지? 직접 만나는 것도 자제하고..”
“그럼! 당연하지!”
“그럼 됐어... 남은.. 술이나 마시자...”
“신이씨는.. 정말 괜찮은 거야?”
“안 괜찮으면....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만 생각하고.. 부정한 생각은 그만하자..”
“그래... 아쉽긴 하지만 마시자! 먹다 죽은 귀신이 땟갈도 곱다더라.”
“진차장님 오후 미팅은 말씀하신대로 내일로 미뤘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존대는 좀... 핫바지 차장인데 존댓말까지는 어색합니다. 과장님보다 한참 어린데...”
“아닙니다. 전 제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럼.. ”
“수고하셨습니다.. 전 오늘 사적인 미팅이 있어서 먼저 퇴근할게요.”
“네.. 마음대로 하십쇼.”
이런 떨떠름한 관계야 말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분위기였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경력도 나이도 한 참 모자란 놈이 갑자기 차장이란 직급으로 떡하니 자릴 잡고 앉았는데.. 그걸 좋게 볼 과장이 어디 있겠냔 말이다...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3시 30분이란 이른 시간에 회사 문을 나서게 된다.
“왔냐?”
“응.. 괜찮냐?”
“괜찮지! 조금 떨리긴 하네..”
“휴... 미안하다.. 이런 짓이나 시키고..”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못 먹어도 고지!”
“점검시간이 10분이라고 해도 사실 7분정도 밖에 시간이 없으니까.. 잘 해야 된다. 6969... 한상이 놈이 금고에 왔을 때 박과장이 어렵게 알아낸 번호니까.. 꼭 기억해 둬!”
“알았다니까.. 후~~~... 그럼 다녀오마..”
“아!! 야 이거!!.”
“응?”
“위조 면허증!!”
“아!!...후~~.. 이건 최대한 꺼내지 말라는 거지?”
“그래!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들어가서 여직원들 말고,.. 대출 쪽 가면 박과장을 찾아야 돼! 꼭이다. 가서 자연스럽게 앉고. 그리고 금고 얘기를 해라. 알았지!?”
“그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은행 안으로 들어가자 경찰복장과도 같은 경비원복을 입은 남자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온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빠져나가는 사람들은 많아도 들어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닙니다. 대출 상담으로 왔습니다.”
“그럼 저쪽으로..”
“네..감사합니다.”
친절하게도 상담창구 앞에 사진과 함께 이름이 걸려있는 이름표를 확인하며 어렵지 않게 박과장을 찾을 수 있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의 고동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도 최대한 태연한 척 박과장이 퇴근준비를 하고 있는 바로 그 데스크 앞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는다.
흰 머리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50대를 갓 넘어 보이는 남자의 인상은 오히려 깐깐해 보이는 스타일로 이런 무리한 부탁에 쉽사리 동참할 인물로는 보이질 않았기에 다시 한 번 박과장이 맞는 질 확인하고 나서야 날 빤히 쳐다보는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금고.. 때문에 왔습니다.”
“.....네?.. 아!....”
나처럼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의 시선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는 박과장의 모습에 오히려 조금이나마 안도를 하게 된다. 아니.. 위로를 받았다고 표현을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잠..시만요. 아직 시간이....”
4시 28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전 제대로 된 절차대로.. 금고 앞에만 안내를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10분 안에 모든 걸 확인하시고 나오셔야 합니다.. 절대로 물건을 꺼내 오시거나... 훔치시면.. 안 됩니다!”
몇 번이나 강조를 하는 박과장의 모습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짓이 도둑질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네.. 알겠습니다.”
“정말..로요. 물건이 하나라도 사라지면...”
“저도 그럴 생각은 결코,.. 없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받을 입장이 아닙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한방애란 조직한테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확실한 거죠?”
“....네. 그럴 각오가 없었다면 이런 모험을 할 필요도 없죠.”
“...........가시죠.”
박과장은 시계를 몇 번이나 확인한 후에야 날 지하 2층으로 안내를 한다.
커다란 금고가 있는 지하 1층을 지나 커다란 쇠창살로 된 문이 벽면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지하 2층에 내려올 수 있었다. 마감시간의 절묘한 타이밍 때문인지 창고에 물건을 정리하는 직원을 제외하곤 지하 2층까지 내려오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323번입니다. 그럼..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열린 쇠창살문을 통과하자마자 난 황급히 번호부터 확인하며 옆걸음질을 하기 시작했다. 삭막하기까지 한 은색 빛 작은 서랍장들이 즐비한 그 곳에서 번호들을 차례로 확인하며 뛰다시피 걸어간 난 가장 안쪽 구석에 323번이란 번호를 확인했고 만들어온 열쇠를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하며 끼워 넣기 시작했다.
‘티..틱... 탁..... 기기기... 철컹.’
작은 쇳소리의 마찰음과 뭔가가 걸리는 둔탁한 소리, 그리고 손에 느껴지는 걸림이 참았던 긴 호흡의 멈춤까지도 풀게 만든다.
‘끼익~~.....틱....’
옆으로 문을 열고 안에 들어있는 스테인리스로 된 기다란 상자를 꺼내 개인금고 중앙에 있는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는 그 상자에 있는 다이얼식 번호를 맞추기 시작하는데...
손가락이 내 말을 안 듣는다.
떨림에 자꾸 안돌아가는 다이얼식 번호를 몇 번이나 힘을 줘 맞추길 반복하는데.. 벌써 테이블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7분 12..11...10초를 향해 카운트 되고 있다.
격렬한 운동을 한 것도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을 느끼며 깊은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손가락들을 공중에서 털어내듯 움직인 후에야 현민이가 가르쳐 준 6969란 번호를 맞출 수 있었다. 자전거 자물쇠라면 무의식중에도 눈감고 풀 수 있었을 텐데...
‘탁!~’
작은 소리와 함께 튕겨지듯 반이 열린 상자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 한 놀람을 겪으며 쇠창살 밖에서 등 돌리고 서 있는 박과장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너무 긴장을 해서인지.. 현민이가 어렵게 알아낸 이 번호를 푸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하게 되었다. 사실 이 이중 장치인 번호는 며칠전까진 예정에도 없었던 것이었기에 더 긴장을 하게 된지도 모른다.
상자의 뚜껑을 완전히 젖히곤 안을 확인한다..
500달러짜리 지폐 더미, 서류뭉치, 누렇게 바랜 낡은 신이의 사진.. 장부로 보이는 검은색 책.. 그리고 여권과 하얀색 서류봉투..
처음 보는 낯선 500달러짜리 지폐를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를 평소라면 궁금해 뚫어져라 확인했겠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핸드폰을 들어 카메라모드로 바꿔선 우선 보이는 검은색 책자를 열어 대충 펼쳐진 장들을 찍기 시작했다. 20여장의 사진을 찍은 후 내가 이곳에 이런 모험까지 하며 오게 된 목적인 서류뭉치들을 빠르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등기부등본들과 토지대장들.. 건물소유권과도 같은 여러 가지가 잘 정리된 서류들도 대충 사진을 찍어놓고는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는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대충 소매로 닦아내며 핸드폰 카메라 어풀을 잠시 화면에서 내리곤 스탑워치를 확인하는데.. 벌써 화면에 찍힌 시간이 4분 29초를 넘어가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더 빠르게 움직여 남은 서류들을 확인하는데..
통장 복사본들로 보이는 거래 내역들 중 대충 몇 장을 카메라에 담은 후 이마의 땀을 몇 번이나 닦으며 서류들을 뒤져보지만.. 내가 원하는 그 서류가 존재하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떨리는 답답함을 뒤로하고 마지막 남은 흰색 서류봉투를 깊은 심호흡과 함께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 DNA 비교 검사표..
- 정자 제공 동의서..
- 난자 제공 동의서.....
"이거다!!"
OO종합병원의 마크가 선명히 찍혀 있는 서류들을 카메라에 급하게 담고.. 마지막으로 가장 안쪽에 있는 서류들까지 다 꺼낸다.
계약서..
중국어와 한국어가 병행되어 작성된 계약서란 문구를 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난.. 얼음처럼 굳어지게 된다.
조사를 했고 예상했던 문구들인데도.. 막상 실물을 내 눈으로 보게 되자.. 그제야.. 사실처럼, 현실처럼 내 눈앞에 놓인 서류들에,, 선명히 박혀있는 문구들에.. 내 시선이 얼어붙은 몸처럼 다시 굳어져 움직이질 않는다.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10개월 후에 어떠한 권리 주장도 하지 않는 다는 조건으로 선수금 1억과 잔금 2억을 지불한다는 내용..
“이봐요! 시간 다 됐어요!”
“...”
“이봐요!!!”
“네..네???.. 아!!!”
서둘러 카메라에 마지막 계약서까지 담고는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는데....
정리를 하며 집어넣던 서류 중 불연 듯 난자 제공자와 정자 제공자란 서류에 눈길이 다시 가게 된다. 너무나 익숙했던 그.. 서류들의 잔뿌리처럼 남아 있는 기억들의 되새김에.....
난 순간 멎어버린 심장소리처럼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충격을 받으며 정자 제공 동어서란, 계약서와도 같은 서류에 눈을 못 떼게 된 나였다.
정자 제공자 : 진태규.....
엉뚱하게도 내 이름이 적혀 있는 서류..
이..혼 하기 직전.. OO종합병원에서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제공했던 내 분신들... 난소기능이 너무나 미약해 과배란 주사까지 맞아야 했고 그것도 자궁 내 착상이 불가능 하다는 말로 마지막 희망까지 내 아내였던 신이에게서 뿌리까지 앗아갔던.. 그 병원에서의 고통스러웠던 기억과 함께 정액을 제공했던 내 기억이 같이 떠오르게 된다..
왜??
강한상의 것이 아닌 내 이름이.. 진태규란 이름이 정액 제공자란 란에 적혀 있는 서류가 왜 여기에..
불연 듯 그냥 지나쳤던 여권을 황급히 다시 꺼내 펼쳐본다.
사진조차 박혀 있지 않은 빈 여권.. 그리고 선명히 찍혀 있는 이름은 진해빈이었다...
분명 강해빈이라고 적혀 있어야 할 이름에 란에 내 눈을 의심하게 한 진해빈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예전에 현민이가 중국식 이름이라며 알려줬던 하에이빈이라는 ‘海彬’ 한문이 적혀 있는 여권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머리를 애써 굴려보려 노력해 보지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이름까지 만들어놓은 이 치밀함은 분명 강한상의 소행이 맞을텐데..... 아니!! 이 여권은 강한상이 만들었을 진 모르겠지만.. 이 해빈이라는 이름은 강한상의 것이 아닐 것이다.
신이가 지은 이름이 확실했다.
海彬(해빈)
연결고리와도 같은 OO병원의 얘길 듣고 그 곳을 더 파보라는 내 부탁에 현민이가 어렵게 알아 낸 해빈이라는 이름..
혜빈이와 이름이 비슷해서 너무 놀랐던 해빈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후 신이가 왜 혜빈이를 그렇게 안쓰러워했고.. 더 안타까워했는 질.. 그리고 왜 그렇게 처절하게 망가질 수 밖에 없었는 지를 알 수 있었는데.....
난 해빈이란 이름을 처음 듣고 강한상이란 놈과 아이까지 준비를 했다는 분노를 뒤로 하고 해빈이란 이름으로 왜 지었는지를 알고 싶어 그 뜻을 인터넷을 찾아봤었다.
사전에서는 ‘해안선을 따라서 해파와 연안류가 모래나 자갈을 쌓아 올려서 만들어 놓은 퇴적지대’...를 해빈이라 한다.
도대체 왜 이런 이름으로 지었을까...
라고 고민을 하며 생각에 잠기길 며칠.. 비록 내 씨가 섞인 아이는 아니었지만 이 이름의 의미가 왜 자꾸 내 마음을 간질이며 애타게 했을 질.. 이제야 알게 된 이 순간에 더 눈물이 난다. 그리고 작명소까지 찾아가 알게 된 海彬(해빈)이란 한자어의 뜻대로의 풀이로.. 바다처럼 반짝이고 빛나게 자라라는 뜻도 있다는 그 말을 이제야 확신하게 되며 바다의 반짝임이 어느 무엇보다도 좋다는 신이의 말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
신이는...
나와 이혼까지 하고서도..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나보다.
고통스러운 모습조차 내게 숨기며.. 혼자서 이 무거운 짐을 이고서 어떻게든 자신의 몸을 치유해보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고.. 이런 방법까지 찾아낸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자신을 더럽다고 했었다.
자신의 몸이 너무나 더럽다고.. 창녀 같다고 내게 무덤덤하게 스스로 말을 했었다.
조금만 더 예전의 신이의 모습과 행동을 떠올렸더라면..
“이봐요!! 빨리 나와요!”
“.....”
“진짜 뭐하는 겁니까! 누구 목 날아가는 꼴 보려고 이러십니까!”
“..죄...죄송합니다.”
“빨리.. 다 집어넣고..”
서둘러 다시 원상태를 시키는 날 얼마나 긴박한 상황인지를 알려주듯 박과장이란 남자가 쇠창살 안까지 들어와 정리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빨리 집어 넣... ”
“.....왜.. 그러십니까?”
“울어요?”
“..네?......”
눈물이 줄기를 이루고 턱까지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박과장을 통해 그제야 알게 된다.
“아..닙니다.. 빨리..”
[덜컹!!! 키키키잉~~]
우리가 내려올 때 열었던 계단 철문이 열린다.
“헉! 빨..빨리....”
쏜살같이 물건을 집어넣고 황급히 상자의 문을 닫고는 열려 있는 금고에 밀어 넣는데...
“뭐..하십니까?”
“아.. 김대리.. ”
“문 닫아야 하....”
“알잖아.. VIP회원님한테 그런 말을 못 한다는 거..”
“아무리 그래도 규칙이 있는데.. 벌써 4시 37분이에요. 1분이라도 지났는데 금고에 사람이 남아있는 걸 지점장님이라도 아시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지금 나갈 거야 이 친구야. 깐깐하게 굴긴...”
“.....”
“다 확인하셨죠? 김대리 말처럼 저희가 규율이 워낙 철저해서요....”
식은땀이 목덜미를 지나 등까지 적시기 시작했다.
“내일 다시 오시죠..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네. 그럼..”
“확인했어?”
“......”
“걸어 나온 걸 보면 걸리진 않은 거 같은데.. 아직도 뭔 놈의 땀을 이리 흘리냐?”
“우선.. 이 사진들 좀 더 확인해줘...”
난 핸드폰 뒤에서 SD메모리카드를 꺼내 현민이에게 넘긴다.
“뭐가 있었냐? 그 서류는 찾았어?”
“.....응. 역시 거기에 있더라.”
“집에 없었으니까 당연히 여기에 있었겠지.. 그래서? 어디에 있는지도 혹시 나와있냐?”
“그것보다...... 그 아이가 내 아이인 거 같아.”
“뭐?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제공 된 정자가.. 내꺼 같다고.....”
“......정자가 네 거라니?”
“....더.. 더 확인 좀 해줘.. 아니.. 지금이라도 나랑 같이 중국에 가자..”
“아직 어디 있는 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어떻게 가냐고 이 답답아!”
“여권.. 네가 조사한대로 벌써 여권이 금고에 있더라.... 거기에 현지 주소도 있던데.. 거기에 가면 만날 수 있겠지..”
"그래서 중국에 들어가자고? 넌 중국 비자 있냐?"
"비자??"
"그래 비자! 그냥 들어가면 되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가서 어떻게 하려고?"
"당연히 달라고..."
“야이 미친놈아! 가서!? 내 자식이니까 나한테 넘겨라! 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라고 넘겨주겠냐!? 그것도 아직 뱃속에 있는 태아를!!”
“....”
“아니면 그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죽치고 중국에서 기다릴래? 그동안 강한상이 그 꼴을 보고 가만히 보겠냐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
“내 아이래.. 신이랑... 내 분신이 만나서.... 생겨난 아이라는데.....”
“정말 맞아? 한상이 놈의 자식이 아니라는 확신이나 증거가 있냐?”
“그 서류... 정자제공서류.. 내가 OO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내 손으로 작성 한 거야.. 확실해...”
“.....”
“신이도.. 시험관 아기라도 한 번 해보겠다고... 마지막으로 엄청난 고통을 느끼면서도 단 한 번도 우는 소리 안하고 작성했던.. 서류가 확실하고...”
“그래.. 그럼 그렇다고 치자고.. 이 게임을 이기면 다 끝나는 거 아니냐?”
“....뭐?”
“네가 이 게임에서 이기면! 그럼 모든 걸 네가 차지하면 되는 거잖아! 그게 룰 아니야!?”
“....”
“원래 우리 계획도 신이가 한상이 놈을 택할 수밖에 없는 그 원이를 싹까지 제거하자는 거였잖아.. 단지 제거가 아니라... 구출로 바뀐 거지만.. 뭐가 달라졌냐? 제거나 구출이나.. 어차피 사생결단을 내려야 되는 건 매한가진데..”
“그럼...”
“어차피 각오 한 거잖아. 끝까지 가야지.. 끝까지 가서.. 당당하게 뺏어오면 되는 거 아니냐!?”
“만약에... 강한상이 놈이 헛짓거리를 하면.. 그럼....”
“그러니까 우리가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야지..이 게임이란 걸 계속 하는 척하면서... 그 여자를 빼돌릴 수 있는 방법부터 찾아보자.. 아니지.. 우선 이 서류부터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그 여권의 주소부터 찾아봐야지..”
“..... 돈...이 필요한데.. 집도 가압류가 잡혀 있더라..”
“가압류?”
“베팅이란 거 하고... 통보가 왔어.. 가압류처리 됐다고..”
“하...하하하하하하.. 기막학혀서 웃음이 다 나온다... 이 또라이 새끼... 진짜 무서운 새끼네..”
“어떻게든 구해볼게.. 우선 조사부터 해줘라..”
“돈도 없다며.”
“내가 어떻게든.... 구해 볼게..”
“대출이라도 받게? 가압류까지 당한 놈이 대출은 쉽게 받겠다.. 참나..”
“.....”
“알았어.. 우선 조사부터 빨리 시작하자.... 돈은.... 마누라가 나보고 걱정하지 말라고.. 나같이 남의 돈으로 먹고 사는 사람을 못 믿겠다면서 장사라도 시작하자고 꿍쳐 둔 게 있다니까... 그걸로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제..수씨 돈?”
“아!! 시벌 몰라! 빚이나 좀 갚을 까 했는데.. 역시 내 돈이 아닌가보다.. 알았으니까!! 넌 빨리 들어가서 미팅 알리바이나 만들어!”
“...으..응..”
“신이씨한테 잘 해 새끼야!!!”
“..응?”
“신이씨...... 아무리 생각해봐도 진짜 불쌍한 여자네.. 자식 때문에 이혼까지 하더니... 어떻게든 아이를 갖으려고 그 고생까지 하고... 네 아이라며?? 그럼 작정하고 몸 버린 거잖아... 난 또.. 한상이 새끼랑 눈 맞아서... 어라.....”
“...왜?”
“그... 서류가 거기 있다는 건... 강한상이도 알고 있다는 거잖아..”
“.....그...렇지.”
“그럼??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뭐야? 아니.. 알고 있던 건 맞나? 아니면 모르고서 신이씨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다가 나중에 알게 된 건가??.”
“....”
“아!! 진짜 그 새끼 정체가 뭐야!! 이건 까도까도 사람 헷갈리게만 만들고... 에잇!! 나 먼저 간다!! 너도 빨리 움직여!”
“....”
“불도 안 켜놓고.... 뭐해요?”
“.....왔니?”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응... 몸이 조금..”
신이가 켠 형광등 불빛에 눈동자가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낀다.
“무..뭐에요? 아프면 병원이라도 갈 것이지.. 혼자서 이게.. ”
“....”
“안되겠어요.. 병원부터...헉!!”
내 손을 잡고 날 일으키려던 신이를 반대로 힘을 줘 잡아당긴다.
그리고.. 있는 힘껏 꽉 끌어안는다.......
“조금만.... 이렇게 있자.”
“.......”
“...”
침묵이 이어진 안방에서 침대에 포개고 누운 신이가 머뭇거리다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그리곤 속삭이듯 조용히... 말을 한다.
“미안해요.. 이렇게 힘들 게 해서...”
“...”
“태규씨.. 우선 병원부터 가요. 옷이 땀으로 다 젖었어요.. 열도 많이 나고... 병원에 가서..”
“아니야. 조금만 더...”
“.....”
신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조용히 숨을 몰아쉰다.
강한상의 손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슴에도.. 신이의 심장소리가 변함없이 내 귀에 전해지며 내 눈을 또 감게 만든다.
“에휴.... 많이.. 힘들면.. 지금.”
“아니야.. 쉿..”
“.....왜.. 이렇게 힘들 게 살아요. 그냥... 즐기자고 말했잖아요. 바보 같이... 진짜 바보같아...”
‘누가 바보냐.....’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목소리가 무음처럼 내 귀에만 맴돈다.
해빈이라는 존재에 대해 처음 알았을 때..
이 게임에서 내가 질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신이의 말에 여전히 변함없는 신이를 확인했었다. 바보 같은 놈이라고 불려도 그럴 수밖에 없는 신이라면 해볼 만한 게임이라고 생각했었고..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거란 각오를 난 몇 번이나 했었다.
우연찮게 비슷한 이름의 혜빈이를 대하는 신이의 태도에 그 각오가 확신으로 변해갔을 때..
오히려 확신은 불안감이란 단어로 찾아왔고.. 그 불안감은 은행 금고에서 내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찾고 난 후 더 큰 불안감으로 내게 다가오게 된다.
내 아이인데도.. 신이는 나보고 게임을 포기하라고 한다.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내게 하나도 비추지 않고 혼자 삭히며.. 모든 걸 혼자 감수하려 했고 내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신이는 그런 여자다..
아무리 나와 자신만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더렵혀진 몸뚱이로 날 찾을 수 없다고.. 내게 미안하다 말을 하면서도 게임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 그런 여자였다.
“태규씨...”
“.........응.”
“이대로.. 차라리 이대로 끝이 난다면... 어떨까요?”
“.....?”
“그냥.. 우리 둘만.. 이렇게 자면서 조용히 모든 걸 포기한다면...... 나도 태규씨랑 천국에 같이 갈 수 있을까??”
“...바보냐?... 어떻게 우리가 천국에 가냐?”
“......그렇죠?”
“..”
“하긴.. 교회도 안 다니면서.. 천국에 갈 수 있지 않을까..란 희망이나 말하고... 나 진짜 바보 같네..”
“이제 알았냐.. 바보야. 그리고 자살하면.. 천국엔 못 간다더라..”
“.......그렇구나.”
“에잇!! 일어나요! 말 하는 거 보니까 몸은 멀쩡한가 보네!”
‘탁!!’
“아프다..”
“세수 좀 하고.. 수염도 깎고.. 그 꼴이 뭐에요.”
“....알았.... 너 팔이 왜 그래?”
“..네?...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이가 긴 소매 아래로 보인 붉은 멍자국을 황급히 감춘다.
언뜻 봐서 확실하진 않았지만.. 수갑.. 같은 두 개의 선명한 자국이 내 시선에 분명 보였었다.
“한..상이 새끼가 그런 거야?”
“...알잖아요. 속박 플레이.. 별거 아니에요.”
“.....”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요. 빨리 밥 먹어요. 오다가 당신 좋아하는 안동찜닭 사왔어요.”
“.......그래. 먹자.. 먹고 힘내서 싸워야지.”
“....”
날 안타까운 시선으로 신이가 바라본다.
그 시선의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순간엔 입을 굳게 다물게 된다.
신이를 우선 안심시키고 작은 기쁨이라도 주고 싶다는 충동을 겨우 억누르며 그런 신이의 시선에 멀쑥한 미소만 짓는다.
지금은..
신이에게도 알려선 안 된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몇 번이나 되새기며.. 상을 피는 신이의 모습만을 쳐다본다.
“아!..”
“....왜?”
“도착하면.. 한상씨가 태규씨보고 전화 좀 하라고 했는데.....”
“전화?”
“....네.”
“지가 하면 될 것이지.....”
“.....”
“어...핸드폰.. 배터리 나갔었네.... 한상이가 갑자기 왜 날 찾는데?”
“그게....”
뭔가를 알고 있는 지 신이가 말하길 망설인다..
또 어처구니없는 토요일의 모임 때문이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핸드폰의 배터리를 갈아 끼우곤 부재중 전화로 찍힌 강한상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른다.
--계속--
금요일입니다.
뜨겁고 화끈한 불금들 보내세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따... 고년 진짜 맛나게 생겼는데...”
“진정해라..”
“너나 진정해! 금방 흥분해가지고 다된 밥에 초를 치려고 작정을 했냐!? 너 때문에 줘도 못 먹는 놈이 됐잖아..”
“....”
“미지 저 년 믿을 만 한 거야?”
“아니.. 못 믿어..”
“그런데 이렇게 다시 보내도 괜찮은 거야?”
“그러니까 다시 보낸 거지..”
“뭐? 그건 뭔 소리야?”
“아까 전화했을 때.. 강한상이 옆에 듣고 있었던 게 분명한데.. 내가 불렀을 때 가도 되냐고 물어봤다면 말이야. 만약이지만 일부러 보냈을 경우의 수도 읽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럼 왜 왔을까? 널 확인하려고? 그게 다는 아닐 거야.. 그렇다면... 왜 보냈을까..라는 질문에 답은 몇 가지가 안 되지 않을까??”
“그럼.. 미지씨 말이 전부 거짓말이라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잖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럼 뭐가 문젠데?”
“뭐긴 뭐냐.. 오늘 낮에 내가 했던 행동이 문제지.. 신이가 이 게임이란 게 내가 이길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했잖아.. 그걸 뒤엎으려고.. 우리가 이런 치밀한 계획까지 세웠던 거고..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만약 이 모든 계획을 준비하고.. 실행하는데... 그 계획조차 다 실행하기 전에 신이가 날 선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잃어버리면...”
“....그럼.. 아까 그게 다 연극이라고?”
“아니.. 정말 네가 말리지 않았으면 뛰어 나갈 뻔 했다.. 하지만 이 호프집을 나가서 또 다시 돌아왔겠지.”
“와.. 오싹하네.. 아니.. 나 지금 소름 돋았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냐? 내가 알던 진태규가 맞냐? 순진하고.. 얼빠진 놈은 어디 갔냐..”
“네 앞에서 묶인 마누라가 농락당하는 경험을 해봐라... 자지도.. 안 서는데.. 그걸 보고 마누라 바로 앞에서 웃는 놈의 얼굴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는 매일, 몇 번이나 떠오르고.. 떠나질 않는데.. 너 같으면.. 아까 같은 일이 또 흥분을 하겠냐?”
“진심 무섭다.. 사람이 너무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던데..”
“미친놈...”
“그럼.. 내가 괜한 얘길 한 거 아니야? 내 딴에는 미지씨라도 확실히 우리 편으로 만들려고 한 건데..”
“상관없어.. 미지란 여잔.. 어차피 자신한테 이득이 될 일에만 움직일 테니까.. 처음엔 아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쾌락과 돈의 마력에 완전히 빠져버린 거 같아서 좀 안타깝기도 하더라..”
“그럼 아까 같은 얘길 하면 더 안 되는 거잖아..계획이란 게..”
“그게 좀 걸리긴 했는데.. 은행 일이 아닌.. 신이에 대한 얘기만 했으니까.. 상관없다. 그대로 전하면 오히려 나한테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그리고.. 네 존재는 이미 한상이 새끼도 다 알고 있을 게 뻔하다..”
“어떻게 알아? 졸라 조심했는데.”
“그건 내 실수인 거 같아... 그때 욱해서 한상이 놈한테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 널 계속 주시하는 거 같더라고.. 뭐.. 그것도 상관없지만.. 내 지시대로 내가 준 전화로 계속 움직였지? 직접 만나는 것도 자제하고..”
“그럼! 당연하지!”
“그럼 됐어... 남은.. 술이나 마시자...”
“신이씨는.. 정말 괜찮은 거야?”
“안 괜찮으면....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만 생각하고.. 부정한 생각은 그만하자..”
“그래... 아쉽긴 하지만 마시자! 먹다 죽은 귀신이 땟갈도 곱다더라.”
“진차장님 오후 미팅은 말씀하신대로 내일로 미뤘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존대는 좀... 핫바지 차장인데 존댓말까지는 어색합니다. 과장님보다 한참 어린데...”
“아닙니다. 전 제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럼.. ”
“수고하셨습니다.. 전 오늘 사적인 미팅이 있어서 먼저 퇴근할게요.”
“네.. 마음대로 하십쇼.”
이런 떨떠름한 관계야 말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분위기였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경력도 나이도 한 참 모자란 놈이 갑자기 차장이란 직급으로 떡하니 자릴 잡고 앉았는데.. 그걸 좋게 볼 과장이 어디 있겠냔 말이다...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3시 30분이란 이른 시간에 회사 문을 나서게 된다.
“왔냐?”
“응.. 괜찮냐?”
“괜찮지! 조금 떨리긴 하네..”
“휴... 미안하다.. 이런 짓이나 시키고..”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못 먹어도 고지!”
“점검시간이 10분이라고 해도 사실 7분정도 밖에 시간이 없으니까.. 잘 해야 된다. 6969... 한상이 놈이 금고에 왔을 때 박과장이 어렵게 알아낸 번호니까.. 꼭 기억해 둬!”
“알았다니까.. 후~~~... 그럼 다녀오마..”
“아!! 야 이거!!.”
“응?”
“위조 면허증!!”
“아!!...후~~.. 이건 최대한 꺼내지 말라는 거지?”
“그래!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들어가서 여직원들 말고,.. 대출 쪽 가면 박과장을 찾아야 돼! 꼭이다. 가서 자연스럽게 앉고. 그리고 금고 얘기를 해라. 알았지!?”
“그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은행 안으로 들어가자 경찰복장과도 같은 경비원복을 입은 남자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온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빠져나가는 사람들은 많아도 들어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닙니다. 대출 상담으로 왔습니다.”
“그럼 저쪽으로..”
“네..감사합니다.”
친절하게도 상담창구 앞에 사진과 함께 이름이 걸려있는 이름표를 확인하며 어렵지 않게 박과장을 찾을 수 있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의 고동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도 최대한 태연한 척 박과장이 퇴근준비를 하고 있는 바로 그 데스크 앞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는다.
흰 머리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50대를 갓 넘어 보이는 남자의 인상은 오히려 깐깐해 보이는 스타일로 이런 무리한 부탁에 쉽사리 동참할 인물로는 보이질 않았기에 다시 한 번 박과장이 맞는 질 확인하고 나서야 날 빤히 쳐다보는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금고.. 때문에 왔습니다.”
“.....네?.. 아!....”
나처럼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의 시선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는 박과장의 모습에 오히려 조금이나마 안도를 하게 된다. 아니.. 위로를 받았다고 표현을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잠..시만요. 아직 시간이....”
4시 28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전 제대로 된 절차대로.. 금고 앞에만 안내를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10분 안에 모든 걸 확인하시고 나오셔야 합니다.. 절대로 물건을 꺼내 오시거나... 훔치시면.. 안 됩니다!”
몇 번이나 강조를 하는 박과장의 모습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짓이 도둑질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네.. 알겠습니다.”
“정말..로요. 물건이 하나라도 사라지면...”
“저도 그럴 생각은 결코,.. 없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받을 입장이 아닙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한방애란 조직한테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확실한 거죠?”
“....네. 그럴 각오가 없었다면 이런 모험을 할 필요도 없죠.”
“...........가시죠.”
박과장은 시계를 몇 번이나 확인한 후에야 날 지하 2층으로 안내를 한다.
커다란 금고가 있는 지하 1층을 지나 커다란 쇠창살로 된 문이 벽면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지하 2층에 내려올 수 있었다. 마감시간의 절묘한 타이밍 때문인지 창고에 물건을 정리하는 직원을 제외하곤 지하 2층까지 내려오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323번입니다. 그럼..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열린 쇠창살문을 통과하자마자 난 황급히 번호부터 확인하며 옆걸음질을 하기 시작했다. 삭막하기까지 한 은색 빛 작은 서랍장들이 즐비한 그 곳에서 번호들을 차례로 확인하며 뛰다시피 걸어간 난 가장 안쪽 구석에 323번이란 번호를 확인했고 만들어온 열쇠를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하며 끼워 넣기 시작했다.
‘티..틱... 탁..... 기기기... 철컹.’
작은 쇳소리의 마찰음과 뭔가가 걸리는 둔탁한 소리, 그리고 손에 느껴지는 걸림이 참았던 긴 호흡의 멈춤까지도 풀게 만든다.
‘끼익~~.....틱....’
옆으로 문을 열고 안에 들어있는 스테인리스로 된 기다란 상자를 꺼내 개인금고 중앙에 있는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는 그 상자에 있는 다이얼식 번호를 맞추기 시작하는데...
손가락이 내 말을 안 듣는다.
떨림에 자꾸 안돌아가는 다이얼식 번호를 몇 번이나 힘을 줘 맞추길 반복하는데.. 벌써 테이블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7분 12..11...10초를 향해 카운트 되고 있다.
격렬한 운동을 한 것도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을 느끼며 깊은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손가락들을 공중에서 털어내듯 움직인 후에야 현민이가 가르쳐 준 6969란 번호를 맞출 수 있었다. 자전거 자물쇠라면 무의식중에도 눈감고 풀 수 있었을 텐데...
‘탁!~’
작은 소리와 함께 튕겨지듯 반이 열린 상자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 한 놀람을 겪으며 쇠창살 밖에서 등 돌리고 서 있는 박과장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너무 긴장을 해서인지.. 현민이가 어렵게 알아낸 이 번호를 푸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하게 되었다. 사실 이 이중 장치인 번호는 며칠전까진 예정에도 없었던 것이었기에 더 긴장을 하게 된지도 모른다.
상자의 뚜껑을 완전히 젖히곤 안을 확인한다..
500달러짜리 지폐 더미, 서류뭉치, 누렇게 바랜 낡은 신이의 사진.. 장부로 보이는 검은색 책.. 그리고 여권과 하얀색 서류봉투..
처음 보는 낯선 500달러짜리 지폐를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를 평소라면 궁금해 뚫어져라 확인했겠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핸드폰을 들어 카메라모드로 바꿔선 우선 보이는 검은색 책자를 열어 대충 펼쳐진 장들을 찍기 시작했다. 20여장의 사진을 찍은 후 내가 이곳에 이런 모험까지 하며 오게 된 목적인 서류뭉치들을 빠르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등기부등본들과 토지대장들.. 건물소유권과도 같은 여러 가지가 잘 정리된 서류들도 대충 사진을 찍어놓고는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는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대충 소매로 닦아내며 핸드폰 카메라 어풀을 잠시 화면에서 내리곤 스탑워치를 확인하는데.. 벌써 화면에 찍힌 시간이 4분 29초를 넘어가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더 빠르게 움직여 남은 서류들을 확인하는데..
통장 복사본들로 보이는 거래 내역들 중 대충 몇 장을 카메라에 담은 후 이마의 땀을 몇 번이나 닦으며 서류들을 뒤져보지만.. 내가 원하는 그 서류가 존재하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떨리는 답답함을 뒤로하고 마지막 남은 흰색 서류봉투를 깊은 심호흡과 함께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 DNA 비교 검사표..
- 정자 제공 동의서..
- 난자 제공 동의서.....
"이거다!!"
OO종합병원의 마크가 선명히 찍혀 있는 서류들을 카메라에 급하게 담고.. 마지막으로 가장 안쪽에 있는 서류들까지 다 꺼낸다.
계약서..
중국어와 한국어가 병행되어 작성된 계약서란 문구를 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난.. 얼음처럼 굳어지게 된다.
조사를 했고 예상했던 문구들인데도.. 막상 실물을 내 눈으로 보게 되자.. 그제야.. 사실처럼, 현실처럼 내 눈앞에 놓인 서류들에,, 선명히 박혀있는 문구들에.. 내 시선이 얼어붙은 몸처럼 다시 굳어져 움직이질 않는다.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10개월 후에 어떠한 권리 주장도 하지 않는 다는 조건으로 선수금 1억과 잔금 2억을 지불한다는 내용..
“이봐요! 시간 다 됐어요!”
“...”
“이봐요!!!”
“네..네???.. 아!!!”
서둘러 카메라에 마지막 계약서까지 담고는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는데....
정리를 하며 집어넣던 서류 중 불연 듯 난자 제공자와 정자 제공자란 서류에 눈길이 다시 가게 된다. 너무나 익숙했던 그.. 서류들의 잔뿌리처럼 남아 있는 기억들의 되새김에.....
난 순간 멎어버린 심장소리처럼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충격을 받으며 정자 제공 동어서란, 계약서와도 같은 서류에 눈을 못 떼게 된 나였다.
정자 제공자 : 진태규.....
엉뚱하게도 내 이름이 적혀 있는 서류..
이..혼 하기 직전.. OO종합병원에서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제공했던 내 분신들... 난소기능이 너무나 미약해 과배란 주사까지 맞아야 했고 그것도 자궁 내 착상이 불가능 하다는 말로 마지막 희망까지 내 아내였던 신이에게서 뿌리까지 앗아갔던.. 그 병원에서의 고통스러웠던 기억과 함께 정액을 제공했던 내 기억이 같이 떠오르게 된다..
왜??
강한상의 것이 아닌 내 이름이.. 진태규란 이름이 정액 제공자란 란에 적혀 있는 서류가 왜 여기에..
불연 듯 그냥 지나쳤던 여권을 황급히 다시 꺼내 펼쳐본다.
사진조차 박혀 있지 않은 빈 여권.. 그리고 선명히 찍혀 있는 이름은 진해빈이었다...
분명 강해빈이라고 적혀 있어야 할 이름에 란에 내 눈을 의심하게 한 진해빈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예전에 현민이가 중국식 이름이라며 알려줬던 하에이빈이라는 ‘海彬’ 한문이 적혀 있는 여권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머리를 애써 굴려보려 노력해 보지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이름까지 만들어놓은 이 치밀함은 분명 강한상의 소행이 맞을텐데..... 아니!! 이 여권은 강한상이 만들었을 진 모르겠지만.. 이 해빈이라는 이름은 강한상의 것이 아닐 것이다.
신이가 지은 이름이 확실했다.
海彬(해빈)
연결고리와도 같은 OO병원의 얘길 듣고 그 곳을 더 파보라는 내 부탁에 현민이가 어렵게 알아 낸 해빈이라는 이름..
혜빈이와 이름이 비슷해서 너무 놀랐던 해빈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후 신이가 왜 혜빈이를 그렇게 안쓰러워했고.. 더 안타까워했는 질.. 그리고 왜 그렇게 처절하게 망가질 수 밖에 없었는 지를 알 수 있었는데.....
난 해빈이란 이름을 처음 듣고 강한상이란 놈과 아이까지 준비를 했다는 분노를 뒤로 하고 해빈이란 이름으로 왜 지었는지를 알고 싶어 그 뜻을 인터넷을 찾아봤었다.
사전에서는 ‘해안선을 따라서 해파와 연안류가 모래나 자갈을 쌓아 올려서 만들어 놓은 퇴적지대’...를 해빈이라 한다.
도대체 왜 이런 이름으로 지었을까...
라고 고민을 하며 생각에 잠기길 며칠.. 비록 내 씨가 섞인 아이는 아니었지만 이 이름의 의미가 왜 자꾸 내 마음을 간질이며 애타게 했을 질.. 이제야 알게 된 이 순간에 더 눈물이 난다. 그리고 작명소까지 찾아가 알게 된 海彬(해빈)이란 한자어의 뜻대로의 풀이로.. 바다처럼 반짝이고 빛나게 자라라는 뜻도 있다는 그 말을 이제야 확신하게 되며 바다의 반짝임이 어느 무엇보다도 좋다는 신이의 말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
신이는...
나와 이혼까지 하고서도..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나보다.
고통스러운 모습조차 내게 숨기며.. 혼자서 이 무거운 짐을 이고서 어떻게든 자신의 몸을 치유해보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고.. 이런 방법까지 찾아낸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자신을 더럽다고 했었다.
자신의 몸이 너무나 더럽다고.. 창녀 같다고 내게 무덤덤하게 스스로 말을 했었다.
조금만 더 예전의 신이의 모습과 행동을 떠올렸더라면..
“이봐요!! 빨리 나와요!”
“.....”
“진짜 뭐하는 겁니까! 누구 목 날아가는 꼴 보려고 이러십니까!”
“..죄...죄송합니다.”
“빨리.. 다 집어넣고..”
서둘러 다시 원상태를 시키는 날 얼마나 긴박한 상황인지를 알려주듯 박과장이란 남자가 쇠창살 안까지 들어와 정리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빨리 집어 넣... ”
“.....왜.. 그러십니까?”
“울어요?”
“..네?......”
눈물이 줄기를 이루고 턱까지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박과장을 통해 그제야 알게 된다.
“아..닙니다.. 빨리..”
[덜컹!!! 키키키잉~~]
우리가 내려올 때 열었던 계단 철문이 열린다.
“헉! 빨..빨리....”
쏜살같이 물건을 집어넣고 황급히 상자의 문을 닫고는 열려 있는 금고에 밀어 넣는데...
“뭐..하십니까?”
“아.. 김대리.. ”
“문 닫아야 하....”
“알잖아.. VIP회원님한테 그런 말을 못 한다는 거..”
“아무리 그래도 규칙이 있는데.. 벌써 4시 37분이에요. 1분이라도 지났는데 금고에 사람이 남아있는 걸 지점장님이라도 아시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지금 나갈 거야 이 친구야. 깐깐하게 굴긴...”
“.....”
“다 확인하셨죠? 김대리 말처럼 저희가 규율이 워낙 철저해서요....”
식은땀이 목덜미를 지나 등까지 적시기 시작했다.
“내일 다시 오시죠..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네. 그럼..”
“확인했어?”
“......”
“걸어 나온 걸 보면 걸리진 않은 거 같은데.. 아직도 뭔 놈의 땀을 이리 흘리냐?”
“우선.. 이 사진들 좀 더 확인해줘...”
난 핸드폰 뒤에서 SD메모리카드를 꺼내 현민이에게 넘긴다.
“뭐가 있었냐? 그 서류는 찾았어?”
“.....응. 역시 거기에 있더라.”
“집에 없었으니까 당연히 여기에 있었겠지.. 그래서? 어디에 있는지도 혹시 나와있냐?”
“그것보다...... 그 아이가 내 아이인 거 같아.”
“뭐?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제공 된 정자가.. 내꺼 같다고.....”
“......정자가 네 거라니?”
“....더.. 더 확인 좀 해줘.. 아니.. 지금이라도 나랑 같이 중국에 가자..”
“아직 어디 있는 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어떻게 가냐고 이 답답아!”
“여권.. 네가 조사한대로 벌써 여권이 금고에 있더라.... 거기에 현지 주소도 있던데.. 거기에 가면 만날 수 있겠지..”
"그래서 중국에 들어가자고? 넌 중국 비자 있냐?"
"비자??"
"그래 비자! 그냥 들어가면 되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가서 어떻게 하려고?"
"당연히 달라고..."
“야이 미친놈아! 가서!? 내 자식이니까 나한테 넘겨라! 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라고 넘겨주겠냐!? 그것도 아직 뱃속에 있는 태아를!!”
“....”
“아니면 그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죽치고 중국에서 기다릴래? 그동안 강한상이 그 꼴을 보고 가만히 보겠냐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
“내 아이래.. 신이랑... 내 분신이 만나서.... 생겨난 아이라는데.....”
“정말 맞아? 한상이 놈의 자식이 아니라는 확신이나 증거가 있냐?”
“그 서류... 정자제공서류.. 내가 OO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내 손으로 작성 한 거야.. 확실해...”
“.....”
“신이도.. 시험관 아기라도 한 번 해보겠다고... 마지막으로 엄청난 고통을 느끼면서도 단 한 번도 우는 소리 안하고 작성했던.. 서류가 확실하고...”
“그래.. 그럼 그렇다고 치자고.. 이 게임을 이기면 다 끝나는 거 아니냐?”
“....뭐?”
“네가 이 게임에서 이기면! 그럼 모든 걸 네가 차지하면 되는 거잖아! 그게 룰 아니야!?”
“....”
“원래 우리 계획도 신이가 한상이 놈을 택할 수밖에 없는 그 원이를 싹까지 제거하자는 거였잖아.. 단지 제거가 아니라... 구출로 바뀐 거지만.. 뭐가 달라졌냐? 제거나 구출이나.. 어차피 사생결단을 내려야 되는 건 매한가진데..”
“그럼...”
“어차피 각오 한 거잖아. 끝까지 가야지.. 끝까지 가서.. 당당하게 뺏어오면 되는 거 아니냐!?”
“만약에... 강한상이 놈이 헛짓거리를 하면.. 그럼....”
“그러니까 우리가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야지..이 게임이란 걸 계속 하는 척하면서... 그 여자를 빼돌릴 수 있는 방법부터 찾아보자.. 아니지.. 우선 이 서류부터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그 여권의 주소부터 찾아봐야지..”
“..... 돈...이 필요한데.. 집도 가압류가 잡혀 있더라..”
“가압류?”
“베팅이란 거 하고... 통보가 왔어.. 가압류처리 됐다고..”
“하...하하하하하하.. 기막학혀서 웃음이 다 나온다... 이 또라이 새끼... 진짜 무서운 새끼네..”
“어떻게든 구해볼게.. 우선 조사부터 해줘라..”
“돈도 없다며.”
“내가 어떻게든.... 구해 볼게..”
“대출이라도 받게? 가압류까지 당한 놈이 대출은 쉽게 받겠다.. 참나..”
“.....”
“알았어.. 우선 조사부터 빨리 시작하자.... 돈은.... 마누라가 나보고 걱정하지 말라고.. 나같이 남의 돈으로 먹고 사는 사람을 못 믿겠다면서 장사라도 시작하자고 꿍쳐 둔 게 있다니까... 그걸로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제..수씨 돈?”
“아!! 시벌 몰라! 빚이나 좀 갚을 까 했는데.. 역시 내 돈이 아닌가보다.. 알았으니까!! 넌 빨리 들어가서 미팅 알리바이나 만들어!”
“...으..응..”
“신이씨한테 잘 해 새끼야!!!”
“..응?”
“신이씨...... 아무리 생각해봐도 진짜 불쌍한 여자네.. 자식 때문에 이혼까지 하더니... 어떻게든 아이를 갖으려고 그 고생까지 하고... 네 아이라며?? 그럼 작정하고 몸 버린 거잖아... 난 또.. 한상이 새끼랑 눈 맞아서... 어라.....”
“...왜?”
“그... 서류가 거기 있다는 건... 강한상이도 알고 있다는 거잖아..”
“.....그...렇지.”
“그럼??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뭐야? 아니.. 알고 있던 건 맞나? 아니면 모르고서 신이씨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다가 나중에 알게 된 건가??.”
“....”
“아!! 진짜 그 새끼 정체가 뭐야!! 이건 까도까도 사람 헷갈리게만 만들고... 에잇!! 나 먼저 간다!! 너도 빨리 움직여!”
“....”
“불도 안 켜놓고.... 뭐해요?”
“.....왔니?”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응... 몸이 조금..”
신이가 켠 형광등 불빛에 눈동자가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낀다.
“무..뭐에요? 아프면 병원이라도 갈 것이지.. 혼자서 이게.. ”
“....”
“안되겠어요.. 병원부터...헉!!”
내 손을 잡고 날 일으키려던 신이를 반대로 힘을 줘 잡아당긴다.
그리고.. 있는 힘껏 꽉 끌어안는다.......
“조금만.... 이렇게 있자.”
“.......”
“...”
침묵이 이어진 안방에서 침대에 포개고 누운 신이가 머뭇거리다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그리곤 속삭이듯 조용히... 말을 한다.
“미안해요.. 이렇게 힘들 게 해서...”
“...”
“태규씨.. 우선 병원부터 가요. 옷이 땀으로 다 젖었어요.. 열도 많이 나고... 병원에 가서..”
“아니야. 조금만 더...”
“.....”
신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조용히 숨을 몰아쉰다.
강한상의 손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슴에도.. 신이의 심장소리가 변함없이 내 귀에 전해지며 내 눈을 또 감게 만든다.
“에휴.... 많이.. 힘들면.. 지금.”
“아니야.. 쉿..”
“.....왜.. 이렇게 힘들 게 살아요. 그냥... 즐기자고 말했잖아요. 바보 같이... 진짜 바보같아...”
‘누가 바보냐.....’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목소리가 무음처럼 내 귀에만 맴돈다.
해빈이라는 존재에 대해 처음 알았을 때..
이 게임에서 내가 질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신이의 말에 여전히 변함없는 신이를 확인했었다. 바보 같은 놈이라고 불려도 그럴 수밖에 없는 신이라면 해볼 만한 게임이라고 생각했었고..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거란 각오를 난 몇 번이나 했었다.
우연찮게 비슷한 이름의 혜빈이를 대하는 신이의 태도에 그 각오가 확신으로 변해갔을 때..
오히려 확신은 불안감이란 단어로 찾아왔고.. 그 불안감은 은행 금고에서 내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찾고 난 후 더 큰 불안감으로 내게 다가오게 된다.
내 아이인데도.. 신이는 나보고 게임을 포기하라고 한다.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내게 하나도 비추지 않고 혼자 삭히며.. 모든 걸 혼자 감수하려 했고 내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신이는 그런 여자다..
아무리 나와 자신만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더렵혀진 몸뚱이로 날 찾을 수 없다고.. 내게 미안하다 말을 하면서도 게임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 그런 여자였다.
“태규씨...”
“.........응.”
“이대로.. 차라리 이대로 끝이 난다면... 어떨까요?”
“.....?”
“그냥.. 우리 둘만.. 이렇게 자면서 조용히 모든 걸 포기한다면...... 나도 태규씨랑 천국에 같이 갈 수 있을까??”
“...바보냐?... 어떻게 우리가 천국에 가냐?”
“......그렇죠?”
“..”
“하긴.. 교회도 안 다니면서.. 천국에 갈 수 있지 않을까..란 희망이나 말하고... 나 진짜 바보 같네..”
“이제 알았냐.. 바보야. 그리고 자살하면.. 천국엔 못 간다더라..”
“.......그렇구나.”
“에잇!! 일어나요! 말 하는 거 보니까 몸은 멀쩡한가 보네!”
‘탁!!’
“아프다..”
“세수 좀 하고.. 수염도 깎고.. 그 꼴이 뭐에요.”
“....알았.... 너 팔이 왜 그래?”
“..네?...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이가 긴 소매 아래로 보인 붉은 멍자국을 황급히 감춘다.
언뜻 봐서 확실하진 않았지만.. 수갑.. 같은 두 개의 선명한 자국이 내 시선에 분명 보였었다.
“한..상이 새끼가 그런 거야?”
“...알잖아요. 속박 플레이.. 별거 아니에요.”
“.....”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요. 빨리 밥 먹어요. 오다가 당신 좋아하는 안동찜닭 사왔어요.”
“.......그래. 먹자.. 먹고 힘내서 싸워야지.”
“....”
날 안타까운 시선으로 신이가 바라본다.
그 시선의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순간엔 입을 굳게 다물게 된다.
신이를 우선 안심시키고 작은 기쁨이라도 주고 싶다는 충동을 겨우 억누르며 그런 신이의 시선에 멀쑥한 미소만 짓는다.
지금은..
신이에게도 알려선 안 된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몇 번이나 되새기며.. 상을 피는 신이의 모습만을 쳐다본다.
“아!..”
“....왜?”
“도착하면.. 한상씨가 태규씨보고 전화 좀 하라고 했는데.....”
“전화?”
“....네.”
“지가 하면 될 것이지.....”
“.....”
“어...핸드폰.. 배터리 나갔었네.... 한상이가 갑자기 왜 날 찾는데?”
“그게....”
뭔가를 알고 있는 지 신이가 말하길 망설인다..
또 어처구니없는 토요일의 모임 때문이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핸드폰의 배터리를 갈아 끼우곤 부재중 전화로 찍힌 강한상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른다.
--계속--
금요일입니다.
뜨겁고 화끈한 불금들 보내세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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