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왜..."
그녀가 울었다는 것은, 잔뜩 갈라지고 메말라버린 목소리를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게요, 왜 그랬을까요."
"왜, 그랬어요..왜..."
"후우~ 미안해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매캐한 담배 연기가 그의 입에서 가득 뿜어져 나온다. 니코틴이 돌았기 때문일까, 기찬은 그녀의 원망을 곧잘 받아쳐낸다.
하지만 그 뿐, 그 정도 건성거림으론 유라를 조금도 납득시킬 순 없었다.
"솔직히 그때보단 유라씨도 즐기는거 같던데, 영 별로였나봐요?"
"무, 무슨 그런..!"
유라는 소스라치며 놀란다.
도대체 무슨 말도 안되는..!
이젠 아예 뻔뻔스럽게 구는 기찬의 행동에 치가 떨린다. 유라는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기억을 더듬어간다.
술김의 실수, 처음엔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술을 조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계속, 계속 자신의 잔만 채웠을 뿐이다.
- 무엇을 위해서?
"에이, 이거 봐봐요. 신음소리도 막 내면서 즐겼다니까요."
- 가지기 위해서지.
그가 내민 휴대폰에 그 모든 이유가 담겨 있었다.
낯 익은 방, 낯 익은 침대, 낯 익은 얼굴, 앨범 속의 사진은 분명한 유라, 자신이었다.
"이, 이건.."
하지만 이건 그때의 모텔이 아닌데...
"아, 방금 전에 찍은 따끈따끈한거에요. 꽤 잘나왔죠?"
기찬은 비열하게 웃으며 휴대폰을 흔든다.
" 이, 이건 강간이에요..!!"
"으응? 이게요?"
기찬은 한번 더 휴대폰을 흔든다.
"..거질말쟁이..지워준다고 해서 그래서 믿고 왔는데..."
"물론 지워줘야죠. 보자..~ 오늘 꽤 재미도 있었고,"
기찬은 연신 턱을 쓰다 듬는다, 그의 표정엔 일말의 고민이 섞여있어 보인다.
유라는 신경의 촉을 세웠다.
기찬에게 배신감을 느끼던 와중에도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눈치를 봐야하다니, 스스로가 밉고 창피할 만큼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사진을 지워줄지도 몰라..."
충분히 늦었지만, 비록 지금이라도 그가 사진을 지워주기만 한다면 ...모든걸 용서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짠, 인심 써서 두장 지웠어요! ..아, 오늘 10장의 사진을 찍었으니 8장 늘었다고 해야하나? 암튼 고분 고분하게 잘 좀 해줘요."
"..."
유라는 눈을 질끈 감는다. 역시는, 역시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젠 더 나올 눈물도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애당초 믿은 자신이 바보였다.
그를 만나지 말았어야했는데...
하지만 후회는 너무 늦었었다. 돌이킬 수 있는건, 언제나 그러하듯 아무 것도 없었다.
"대신 비밀은 잘 지켜줄게요. 괜히 동철이 귀에 들어가면 뭐, 걔가 탈영 밖에 더 하겠어요? 사람은 살리고 봐야죠."
기찬의 눈이 자신의 몸을 벌레처럼 훑는다.
"하지만 나만 견디면, 나만 참으면 돼.."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마 오빠를 본다고해도 해맑게 웃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참아 낸다면, 그래도 스스로가 참아낸다면, 모두가 평소처럼 행동할 수는 있을 것만 같았다.
끔찍했지만 그래서 된다면, 자신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
"...동철 오빠한텐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 말 뜻은 제가 생각하는 것과 같나요?"
"..."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미 충분히 아는데도 기찬은 끝까지 그녀를 물고 늘어진다.
좀 더 확신에 찬 말을 원했다. 말도 안되는 거래에 대해 그녀 스스로가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웬만하면 제대로 듣고 싶은데요, 이런건 서로 이해가 잘못되서 오해가 생기면 큰일 나잖아요."
기찬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라의 가슴으로 손을 뻗는다. 그리곤 아무렇지도 않게 주물러대기 시작했다.
"!!"
차라리 기찬이 웃었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스스로의 성욕에 차서 자신을 깔보고 몸을 탐하는 것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자신의 가슴을 마음 껏 주무르는 와중에서도 조금의 낯설음도 보이질 않았다.
"왜요, 싫어요?"
거대한 벌레가 자신을 씹어먹는 것만 같았다.
"...아뇨."
"뭐 그럼 앞으로 이렇게 종종 이용하는 걸로, 오케이?"
유라는 기찬의 발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곤 눈물을 한껏 머금고 그의 발에 입을 맞춘다.
"네, 알았어요.."
모든건 자신을 손을 떠났다고, 유라는 스스로 생각했다.
괴로움과 힘겨움, 눈물이 앞을 가릴지라도, 설령 자신의 선택이 훗날에 어떠한 결과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저 받아들이고 스스로가 망가지지 않기만을 간절히 빌 수 밖엔 없었다.
06 <201X년 6월 13일 08:45 pm>
"우와~ 완전 미인이신데? 기찬이 이 녀석 어디서 이런 분을.."
"하하~ 그 동안 내가 바빠서 그랬지, 이 형님이 또 능력이 없진 않다니까."
"이 새끼 입은 살아가지고. 아, 얘기 많이 들었어요, 유라씨. 반가워요. 전 기찬이 친구 박석철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한유라라고 합니다."
"목소리도 예쁘시네요. 혹시 여동생이나 주변에 유라씨 같은 괜찮은 분 있으면 소개를 좀.. 이건 제 명함입니다. 하하."
슬쩍 명함을 내밀며 객쩍은 소리를 건내는 석철의 행동에, 기찬은 픽하고 핀잔을 줬다.
"야야, 얼마나 봤다고, 게다가 너한테 여자 소개시켜주면 우리 유라 사람들 한테 얼굴이나 들고 다니겠냐?"
"야, 내가 어때서 그러냐? 이자식이!"
몸이 보통 이상의 크기인 석철이 버럭하자 위압적인 분위기가 흘렀고, 유라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고 만다.
"!"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란건 자신의 어깨를 감싸안은 기찬의 행동이었다.
조금이라도 얼굴의 긴장을 푼다면 엉망진창의 표정이 나올것만 같아, 유라는 혼신의 힘을 다해 표정을 관리한다.
"그만해라~ 우리 유라 놀라잖아. 왜 사람을 겁주고 그래?"
그녀를 옆구리에 낀 기찬은 마치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는 양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아.. 유라씨 이거 장난이에요, 남자끼리 하는 장난. 저 무서운 사람 아닙니다, 하하!"
아차 싶었던 걸까, 석철은 황급히 말투를 바꿔 유라를 진정시켰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남자끼리 있다보면 으레 험한 말이 오가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동철 오빠도 그랬으니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석철아 우리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어디 들어가자. 계속 이러고 있으면 우리 유라 배고파서 쓰러져."
"아아~ 그렇지, 괜히 밖에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자고. 저기 앞에 저기로 가자!"
그가 가리키는 곳은 복고풍의 아기자기한 포차 술집이었다.
"또 술..."
유라는 인상이 어두워졌다.
"...술, 안마시면 안될까요?"
행여나 석철이 들을까, 그녀는 나지막히 기찬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에는 씨알도 안먹힐 단단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유라씨 한잔 받으세요!"
맞은 편에 앉은 석철이 유라에게 잔을 권한다. 하지만 유라는 좀처럼 그 잔을 받아들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 제가 주는 술은 받기 싫으세요?"
"아뇨, 그런게 아니라.."
"그럼 한잔 받으세요, 손 떨어져요!"
호탕하게 웃으며 계속 술을 권하는 석철이 이제는 아예 얄밉게만 느껴졌다.
분명히 그에게선 호의가 느껴졌지만 그녀가 원하는 방향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뭐해, 안받구. 내 친구 무안하게 할 셈이야?"
나지막하지만 심지있는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린다.
기찬이었다.
"바, 받을께요..!"
그는 가부장적인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유라를 걷어찼고, 그녀는 황급히 석철의 술잔을 받아든다.
"이야, 너 내가 아는 그 서기찬 맞냐? 유라씨를 완전 휘어잡고 산다?"
"하하, 그냥 뭐 그런게 있어~"
이럴줄은 몰랐다는 듯이 깜짝 놀라는 석철 앞에서 기찬은 한껏 으스댄다.
그랬다, 정말 그런게 있었다. 아무리 싫더라도 그녀는 기찬의 조그만 반응까지도 거부할 수 없었다.
"하아.."
유라는 원래 술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매력을 느낀 적도 없었다.
학생때까지 살았던 고향은 워낙 시골이라서 그런지 흔한 편의점 하나 없었고, 그나마 주변에서 접하는 술도 소주나 막걸리가 태반이었다.
몰래 술을 구해온 동철의 이끌림에 마지못해 한 두잔 마셔본 적은 있었지만 속이 화끈하고 살짝 어지러울 뿐, 도대체 왜 이걸 마시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곤 했었다.
하지만 스무살이 되서 상경하고나서 알게된 술은 그녀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술에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생전 처음보는 술들과 다양한 컨셉, 경쾌한 음악이 흐르는 흥겨운 분위기, 서로가 서로를 재지 않아도 되는 자리들까지도.
그녀가 처음 겪은 신입생 환영회의 술자리는 그랬었고,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충분한 호감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유라가 꼬박꼬박 술자리에 참석하거나 하진 않았다.
지방에서 상경한 학생의 주머니가 다들 그렇듯, 겨우 먼지나 빗겨갈 수준이었고 그것은 그녀 역시도 포함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술자리가 주는 분위기는 충분히 즐거웠기에, 주머니의 여유가 생기면 가끔씩 마음이 맞는 여자 동기들과 술잔을 기울이곤 했었다. 잘 마시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동철에겐 아직 말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종종 술자리에 참석한다는 걸 안다면 아마 깜짝 놀랐으리라.
"유라씨, 원샷! 원샷!"
유라는 눈치없는 석철이 뭐라고 외치든 말든 단번에 술잔을 꺾었다.
소독용 알콜같은 향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입안에 계속해서 남는 찝찔한 단맛은 덤이다.
하지만 이젠 술이 싫었다, 아니 술 자체가 무서웠다.
처음 기찬을 만난 이후로 매번 술을 마실때마다 꼭 문제가 생기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술을 마셔본 적도 없었기에, 처음에는 필름이 끊겼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알몸으로 기찬과 같은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에 더욱 놀라, 정신을 잃었다는 것쯤은 그녀 스스로가 뒤로 밀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하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필름이 끊기다니..친구들과 술을 마시다보면 어느 순간 어질어질거리는게 강해지는 시점이 오곤 했었다. 그럴때면 항상 술잔을 내려놨었고, 정신을 잃는다던가 하는 문제는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 날 기찬과 함께간 칵테일Bar에서는 기억이 좀처럼 이어지질 않았다.
분명 그와 함께 가게로 들어섰었고 뭔가 세련된 분위기에 살짝 감탄을 했던것까지는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굉장히 예쁜 칵테일 한잔이 자기 앞에 놓였던 그 부분까지도 말이다.
칵테일은 달콤했다. 소주에 비한다면 훨씬 쉬웠기에 처음에는 술이 아닌 쥬스라고 착각하기도 했었다.
그런 칵테일 몇잔을 마셨다고 정신을 놓아버린 스스로가 이해할 수 없었다.
"술이 약해졌나.."
사실 동철이 군대를 가고 씩씩하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심 울적한 유라였다. 더군다나 상경해서 학교를 다니다보니 외로움도 더해지곤 했다.
"유라씨 잘 마시네요. 한잔 더 받으세요!"
아직까진 괜찮았다. 약간 얼굴이 붉어지긴 했지만 어질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유라는 긴장을 풀지 않고 조심스레 석철의 술을 다시 한번 받았고, 술자리의 분위기는 그렇게 무르익어갔다.
유라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자리를 비우자, 석철이 녀석이 의자를 바짝 당겨 다가왔다.
"이 새끼.. 야! 어떻게 된거야??"
그의 말은 주어, 목적어 몽땅 잘라먹은 형태였지만, 석철의 눈에 일렁이는 열기에 그 나머지 모두가 담겨 있었다.
"뭐가?"
하지만 기찬은 짐짓 모르는 일이라는 듯, 심드렁하게 굴었다.
"몰라서 묻냐? 어디서 저런 죽여주는 여자를 구했냐는거지! 얼마나 됐어? 어디서 만난거야? 클럽??"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석철은 한무더기의 궁금증을 토해놓는다.
"흐흐."
그런 그가 재밌었는지 기찬은 말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아 새꺄, 뭐라고 말 좀 해봐."
안절부절을 넘어 애원에 가까운 그의 모습에 기찬은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소주가 달았다.
석철은 그가 연락을 이어오는 몇 안되는 동기 중 한명이었다.
건장한 체격에 외향적인 성격의 그는 동기들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고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선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었다.
고향을 떠나 타향으로 온 기찬이 인맥을 비집기 위해서는 마당발인 석철과 친해질 필요가 있었다.
비록 그런 계산적인 관계로 접근하긴 했지만, 석철은 꽤 괜찮은 녀석이었다. 술도 잘 마셨고 재밌는 구석도 많았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서글서글함이 그레겐 있었기에, 기찬은 내심 석철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으니,
"캬~ 딱 내 스타일인데 말야, 쩝.."
여자에 대해 지나치게 찝적대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학기 초까지는 우호적이었던 석철의 평판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사건도 녀석의 더러운 버릇 때문이었다.
"하필 CC를 건드려서는.."
2학기 중간고사 쯤이었나, 한창 공부로 바쁜 학과 독서실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마침 기찬도 그 자리에 있었던 터라 재미난 구경을 빠짐 없이 관람했었다.
놀랍게도 얽혀있던 두사람 중의 한명이 석철이었고 다른 한명은 학과의 남자 선배였다.
알고 봤더니 석철이 놈이 여기저기 학과의 여자들에게 찝적거리다가 웬 여자 선배랑 몇번 놀아났던 것이었다.
문제는 그 여자 선배가 CC였고, 남자친구도 우리 학과의 선배였다는 점이었다.
꼬리가 너무 길면 잡히는 법, 두 사람의 이상 기후를 감지한 남자선배는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오른 상태로 독서실에 난입해서 석철과 주먹다짐을 벌인 것이었다.
뭐, 그 다음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들리는 소문에는 남자 선배는 폭력사건으로 자퇴를 했고 여자 선배는 유학을 갔다나 뭐라나.
암튼 그렇게 까발려진 석철의 품행은 두고두고 학과의 입에 오르락거렸고, 녀석은 1학년을 채우자마자 도망치듯 입대를 해버렸다.
"진짜 내 스타일인데, 캬!"
"야 야, 아무리 그래도 남자친구가 앞에 있는데 좀."
"흐흐, 그렇긴 그런데. 아 이거 참..~!"
기찬이 피식 웃으며 석철의 행동을 나무랐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본성을 드러냈다.
"근데 어디서 만난거야? 클럽에서 주울 스타일은 아닌거 같은데?"
"뭐, 일하는데서 만났지."
"아, 너 무슨 주점 주방에서 일한다고 했던가. 손님으로 왔었어?"
"응, 뭐 그랬지."
사실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기찬은 석철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짜집기를 해갔다.
"이야~ 저정도면 네가 공 많이 들였겠는데?"
당연히 내쪽에서 껄떡거렸다는 듯이, 석철은 대놓고 자신을 깔고 들어간다.
물론 자신에 비하면 유라가 훨씬 괜찮은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까지 얕잡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별로, 지가 나 좋다고 먼저 접근한거라 난 한거 없지."
"푸하하? 새~끼, 무슨 구라를 그렇게치냐. 저런애가 뭐가 아쉽다고 너를, 킥킥."
"..."
"야, 솔직히 진짜 여자친구 맞긴하냐? 아니 뭐, 널 못믿어서 그런건 아닌데. 요즘 여자친구인 척 해주는 알바도 있다고 하고 뭐..."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강도가 지나치게 세다.
석철은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기찬의 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긁어댔다.
맞아, 저 새끼 저러는거 진짜 싫었었지.
기찬은 비로소 생각이 났다.
석철과는 꽤 자주 다녔다. 일주일에 세번 이상은 함께 밥을 먹었거나 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에겐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석철은 자신을 은근히 아래로 깔고 봤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같이 어울리긴 하지만 자신과 나는 급이 다르다는 식의 행동을 은연중에 보였었고, 그때마다 찝찝하긴 했지만 기찬은 대충 넘기며 관계를 유지해 왔었다.
하도 오랜만에 만나다보니, 그런 감정마저도 까먹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 되게 오랜만에 만났지?"
"뭐, 그렇지. 내가 먼저 군대 갔고, 너도 좀 있다가 입대했잖아. 나는 제대하고 바로 학교 때려쳤으니까 뭐~"
"그럼 거의 3년 가까이 됐네."
"하하, 그런가?"
기찬은 여전히 으스대는 석철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예전이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자신의 곁에는 유라가 있었다.
"3년이면 적잖은 시간인데, 아직 그렇게 날 찌질한 놈으로 생각하고 있었냐?"
"어, 어?"
당당하게 나오는 기찬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석철은 말끝을 흐린다.
"아니 뭐 그냥..."
하지만 석철의 눈은 여전히 도발적으로 기찬을 훑어내리고 있었다.
한번쯤 꺾어줄 필요가 있다, 기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존나 재밌는거 해볼까?"
"..뭘?"
"유라가 나 좋다고 따라다닌다는 증거."
그리곤 기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미쳤어요? 여기서 어떻게 그래요..!"
"못 할건 또 뭐고?"
유라는 기찬이 하는 말이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엔 자신이 너무 취해서 그랬나 싶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도 또렷하게 들렸고 그 의미도 제대로 전달이 되었다. 다만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었다.
그는 강짜를 부리고 있었다.
유라가 뭐라고 하든 말든 기찬은 막무가내로 그녀를 남자 화장실로 끌고 갔다.
"!"
행여 누가 있을까봐 유라는 잔뜩 웅크린다. 하지만 다행히도 남자화장실에는 기찬과 유라를 제외한 그 누구도 없었다.
"하하, 괜찮다니깐~"
아니, 이걸 정말 다행이라고 봐야하는 걸까..
그런 의문에 제대로 사로잡히기도 전에 기찬은 자신을 허름한 칸으로 밀어부쳤다.
"나도 곤란한거 알아. 그치만 지금 하고 싶은데 어떡해?"
어느새 그는 자신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기찬의 행동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유라는 당황할 틈도 없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만다.
"이런 더러운 곳에 우리 유라씨를 엎드리게 하고싶진 않거든."
이상한 악취와 퀘퀘한 담배연기들. 말마따나 화장실은 너무 더럽고, 또 좁았다.
그의 말처럼 이런 곳에서는 도저히 행위가 가능해보이지 않았다.
"혹,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정말 상상이라도 끔찍했다.
"솔직히 이런데서 박히고 싶진 않을텐데 쉽게 가자고."
기회를 주는 듯한 그의 말투에서 유라는 한줄기의 희망을 엿보지만, 불안감은 좀처럼 씻겨내려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입으로 한번 뽑아봐, 지난번 보다 잘하는지 겸사겸사 확인도 할겸 말야."
"..."
입으로? 지난번처럼 이라니?
유라는 어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는다.
차라리 농담이었다고, 그냥 장난친거라고 지금이라도 그렇게 말해준다면, 비록 상대가 기찬이라고해도 해맑게 웃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벨트를 풀어내고 팬티 채로 바지를 내렸다.
"뭐해, 안빨고?"
"..."
화장실 칸은 매우 좁았기에, 꺼덕거리는 기찬의 물건은 자신의 허벅지를 연신 찔러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보채는 것만 같아서 유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기찬의 눈이 뱀의 혓바닥처럼 느껴진다. 그는 시선이 자신의 몸을 까끌까끌하게 핥아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유라에겐 거부할 권리 따윈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오직 하나 뿐이었기에, 유라는 더러운 화장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래, 말은 잘 듣네."
차갑다.
바닥의 물이 그녀의 무릎을 적셔갔다.
누군가의 오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냥 수돗물이길 간절히 빌 수 밖엔 없었다. 자신은 기찬의 허락없이는 제대로 일어날 수도 없는 몸이었기에..
"하읍.."
유라는 조심스레 그의 물건을 입에 물었다. 꼬물거리는 그것은 어느새 자신의 목젖을 찔러대고 있었다.
"흐어..~ 좋은데."
컥컥대는 자신과는 다르게 기찬은 얄밉도록 만족스런 신음을 흘린다.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유라는 목구멍을 더욱 활짝 열었다. 그러면 그는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을 탐하곤 했기에, 그의 물건을 최대한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조치였다.
"으..컥!!"
아니나 다를까, 그의 물건이 힘껏 찔러 들어온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괴로웠다.
하지만 차라리 이게 나았다. 자신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굴지 않더라도, 어차피 그는 허리를 밀어댔을게 분명했다.
그건 너무나도 괴롭고 치욕스러웠기에, 차라리 이쪽에서 먼저 목구멍을 열어주는게 덜 괴로웠다.
"슬슬 나올 것 같으니까 준비하고,"
그런 그의 친절함이 싫었다.
"얼굴에 튀는게 싫다면 그냥 바로 받아서 삼키든가."
기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쓰고 비릿한 정액이 그녀의 입안을 채워간다.
끈적거리고 역겨운 맛이 혀를 지배하기 전에 유라는 그대로 정액을 목구멍 안으로 흘려넣었다.
"켁켁-!"
하지만 삼키는 속도보다도 정액을 쏘아대는 세기가 강했던 탓인지, 유라는 연신 사례들린 기침을 쏟아냈다.
"옳지, 옳지."
기찬으로서는 고분고분하게 자신을 따라준 유라가 대견했기에 그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준다.
"흑..."
유라는 울컥 울음을 터트린다. 이건 어쩔 수 없었던 거였지, 스스로가 원한게 아니었다.
하지만 지친 그녀에겐, 그의 손길마저도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역겨워..."
입 안 가득 퍼지는 정액의 비릿함도, 더러운 화장실의 악취도 아니었다.
"이제 빼도 돼."
그것은 사정이 끝나서 쪼그라든 그의 물건을,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입에 물고 있는 자신에 대한 혐오였다.
남자화장실에 들어왔던 것처럼, 기찬은 유라의 손을 꼭 붙잡고 화장실을 나섰다.
구석 테이블에 앉아있는 석철이 보인다.
"여어~ 나 혼자 놔두고 둘이서 어딜 갔다온거야?"
혼자서 제법 심심한 시간을 보냈을텐데, 석철의 얼굴에는 지루함보다도 초조함이 가득 수를 놓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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