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신유나
신유나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 신유나의 부모님은 사이가 좋았었는데, 신혼 부부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알콩달콩하게 지내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이 좋았던 두분은 신유나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결혼기념일을 맞이해 함께 여행을 떠났고 함께 돌아가셨다. 졸음 운전을 하던 대형 트럭과 정면 추돌이었다. 순식간에 천아 고아가 되어버린 신유나는 슬퍼했지만 그런 그녀를 작은 아버지, 어머니가 보살펴주었다.
작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이 없었다. 낳을 수 없는 것인지 낳지 않는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두분은 신유나를 친자식처럼 키웠다. 가끔 친부모님의 생각이나며 울적하기는 했지만, 이전만큼 아름다운 나날이었다. 작은 아버지는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좀 더 유복한 생활을 했다. 작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느새 유나의 마음 속에서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진실된 아빠, 엄마가 되어있었다. 유나는 자신의 행운에 감사했다. 유나는 양쪽의 부모님, 그러니까 친부모님과 양부모님을 모두 진심으로 사랑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며 유나는 독립을 했다.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고 유산은 정상적으로 상속받았다. 아빠의 사업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지만, 두분은 유나에게 걱정끼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아무런 말도 하지않았다. 상황은 급격하게 악화되어갔고 유나가 깨달았을 때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되어있었다. 유나는 부모님이 야속했다. 자신에게는 친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과 보험금이 있는데. 유나는 백방으로 뛰며 상황을 해결해보려고 했고, 쓰러저가는 그녀의 아빠에게서 돈 나올 구석을 찾던 하이에나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돈냄새를 기가막히게 맡아냈고, 그녀를 달콤한 말로 꾀어냈다. 유나는 그들의 여러가지 조언속에서 부모의 위기를 자신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몇억쯤 되던 돈은 순식간에 증발했다. 기업간의 잔혹한 마찰 속에서 유나가 느끼기에는 어마어마 했던 재산은 윤활유조차 되지 못할 금액이었다. 아빠의 회사는 순식간에 부도가 났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유나의 아빠, 엄마는 먼저가신 형님 부부와 유나에 대한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다. 유나 역시 눈물을 흘렸다. 친부모의 흔적도 모두 타인에게 삼켜지고, 양부모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난했지만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선의는 아무런 행복도 낳지 못했다. 유나에게는 참으로 잔혹한 일이었다. 그때부터 한순간도 겪어보지 못한 생활고가 유나를 덮쳐왔다. 신학기가 시작되자 당장 교제 살 돈도 등록금도 없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유나는 대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아까울만한 학교였지만 이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빠와 엄마는 자퇴를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아빠는 막노동에, 엄마는 식당에 나가고 있었다. 유나는 두분을 더 힘들게 하고싶지 않았다. 유나의 결심은 실행되었다.
취직 자리를 알아보며 유나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였다. 문자가 왔다. 대부분의 게임 참가자들은 별생각 없이, 혹은 피식거리며 장난스럽게 문자에 답을 입력했지만 유나는 달랐다. 문자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혼자 골똘이 생각했던 것이다. 돈? 돈이 더 있었다면 이런 상황을 타파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필요했다면? 애초에 돈과 친부모의 죽음은 연관이 없다. 오랜 고민 끝에 자신은 앞날을 내다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고민거리를 던저 준 문자에 대한 보답으로 정성스럽게 단어를 입력했다. [미래]. 유나는 이제 미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근데요.”
[말해라, 벌래같은 주군아.]
유나가 말하자, 오만의 군주 라크샤가 말했다. 유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를 주군으로 모신다느니 뭐라느니 해놓고 맨날 바보취급하고.”
[푸하하하, 네가 멍청하고 한심한 인간이기 때문이겠지? 주인을 잘못골랐어 진짜.]
이번에는 조롱의 악마 레쉬가 말했다. 유나의 입은 점점 더 튀어나온다.
“그러면 다른 사람한테 가던가.”
[불가능하다, 벌레같은 인간들이나 맹약을 하찮게 여기지. 우리에게는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하하하, 놀려먹기 좋은 주군이라 가능해도 다른놈한테는 안 갈거 같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라크샤도 레쉬도 신유나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한심하고 악마와는 거리가 멀게 착했지만, 그런 점이 두 악마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두 악마는 진심으로 유나를 악마왕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녀가 악마왕인 마계도 참으로 재밌으리라.
“여기에 진짜 다른 참가자가 있는거죠?”
[음, 아주 가까운 곳이다. 다른 악마가 있나보군. 방해 때문에 자세한 위치까지는 모르겠어.]
라크샤는 누군지 몰라도 강대한 악마일거라 예상했다. 자신의 탐지를 이정도로 방해할 수 있는 악마는 흔치 않다.
“윽.”
순간 유나의 머리에 두통이 일었다. 영상이 보였다. 카타나를 든 여자가 달리는 기차 지붕에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악마는 유나가 미래를 읽었음을 직감했다.
미래 관조. 유나가 악마왕 게임에 참가했을 때 유일하게 존재했던 스킬이다. 무작위로 미래의 영상이 자신의 시점으로 나타난다. 영상이 일어나는 시간은 자동으로 유나의 머리속에 입력이 되고, 보았던 영상을 예고된 그 시간에 무조건 자신의 눈으로 똑같이 보게 된다.
[어디?]
“여기 지붕이군요. 으… 올라가야해요? 기차가 달리고 있었는데 난 어떻게 거기있는거야!”
[어떻게든 올라가게 될거다. 어차피 그 여자와 마주친 장면을 보았잖나. 언제였지?]
유나가 두려워하며 묻자 라크샤가 말했다.
“10초 뒤요!”
유나는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하하하! 뭘 무서워해, 등신아! 넌 일주일 뒤에 살아있잖아!]
레쉬가 말은 사실이었다. 유나는 이미 일주일 뒤의 미래를 보았다. 어떤 여자아이가 자신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숨을 가쁘게 쉬며 뭔가 말하는 장면이었다. 유나는 용기를 가지며 변기 위에서 일어났다. 그때 화장실 창문이 깨지며 거센 바람이 불었다. 유나의 몸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휙 들렸다. 바닥에 던져진듯했다. 유나는 강한 통증과 추위에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일으켰다. 몇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 카타나를 든 여자가 서 있었다. 영상과 똑같은 장면이었다. 여자가 말했다.
“찾았다.”
[깔깔깔, 누군가 했네! 라크샤! 레쉬! 오랜만에 만나기에 좋은 날씨야!]
유나는 벌벌 떨며 물었다.
“아는 사이에요?”
[미친 악마다. 폴리가 저기에 붙었군.]
[폴리! 하하하, 꼴이 그게 뭐야! 아주 칼처럼 변했는데? 병신같은 꼴이 볼만해!]
“왜 도발하는 거에요! 엄청 무서워보이는데!”
[어차피 넌 살아남는다.]
유나 일행의 대화에 폴리는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딱봐도 전투능력이 전무해보이는데, 키킥! 너희들 내가 안보는 사이에 나보다 더 미쳐버렸나본데!]
“죽일까?”
[당연하지, 이 무식쟁이야!]
폴리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태세였다. 유나가 공포에 질려 벌벌떨었지만 두악마는 별다른 조언을 하지않았다. 해봐야 이런 전투에서 유나가 뭘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두악마는 유나의 능력을 믿을 뿐이었다. 무슨일이 있어도 유나는 일주일 뒤까지는 살아남는다.
갑작스레 강풍이 불었다. 카타나 여자는 몸을 숙이며 균형을 잡았지만 유나는 몸을 비틀거리다 기차에서 떨어졌다. 꺄아 하는 비명과 함께 유나가 떨어지는 모습을 여자는 보았다. 기차의 속도에 맞춰 모습이 멀어졌다.
“뛰어내려서 죽일까?”
[이 기차 따라잡을 자신 있냐? 빌어먹을, 제법 강해보였는데. 일단 서울로 가기나 하자고. 살아있으면 또 만나겠지!]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업드려 기차에 바짝 붙었다.
***
유나는 공포에 떨며 미친 듯이 소리질렀다. 두악마는 유나가 떨어지는 곳이 강 위라는 것을 깨닫고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알아서 살아남겠지. 약간은 무책임한 마음을 품으며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에는 조금 다른 이유도 있었다. 유나가 떨어지고 있는 강물 근처에 게임 참가자와 동족의 느낌이 왔기 때문이다. 적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일부러 모습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그때 유나의 등에 무언가 톡 하고 맞는 느낌이 나더니 떨어지는 속도가 줄었다. 느리게 떨어지는 자신의 몸에 당황하며 유나는 아래를 보았다.
예린은 사람의 고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기차에서 떨어진 듯한 어떤 여자를 보고 당황하며 카드덱을 꺼내들었다. 다행히 적당한 카드를 뽑은 예린은 서둘러 여자에게 날렸다. 카드는 명중했다.
[힘든 시간!
괴롭고 힘든 시간은 언제나 느리게 가는 법. 시간의 흐름은 공평치 않습니다!
맞은 대상의 시간이 느려집니다.]
떨어지는 여자의 속도가 줄었다. 예린은 덱을 확인하며 바로 다음 카드를 꺼내 든다.
[시계바늘 돌리기!
시간은 마음대로 돌릴 수 없어도 시계바늘은 마음대로 돌릴 수 있다!
맞은 대상의 위치를 지정하면 1분 뒤 대상이 이동합니다.]
카드 맞추기라면 수없이 연습한 예린이었다. 천천히 떨어지는 여자, 유나는 등에 또 한번 카드를 맞았다. 느리게 떨어지는 유나의 몸이 강물에 닿기 직전 예린의 옆으로 순간이동 했다.
“꺅!”
갑작스럽게 나타났지만 자신이 의도한 위치였기에 예린은 유나를 받는게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힘든 시간으로 느리게 떨어지고는 있었다해도 정상적인 상황으로 떨어질 때만큼의 운동에너지를 유나의 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예린이 무릎을 굽히며 충격을 줄여보고자 했지만 두사람은 결국 사이좋게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끙끙대며 신음을 내뱉던 두사람이 거의 비슷한 시간에 일어났다. 유나는 청바지가 몇군데 찢어진 것을 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옷 살 돈 없는데… 하지만 곧 씩씩한 표정을 짓고
몸을 털고있는 예린에게 다가갔다.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예린이 구해줬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신기한 능력을 쓴 것을 보니 아마도 참가자일거라 예상했다. 라크샤와 레쉬는 다른 참가자를 조심하라고 했었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자신을 구해줬으니 분명히 좋은 사람일 것이라 유나는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라크샤와 레쉬의 느낌이 사라졌다. 유나는 어리둥절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괜찮으세요? 저… 많이 놀라셨죠?”
예린은 이 사람에게 자신이 어떻게 구해준건지 설명을 해줘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대충 초능력자라고 둘러댈까? 미친 사람으로 보면 어쩌지? 그러고 있는데 자신의 말에 화들짝 놀란 유나가 자신에게 달려와 손을 꽉 잡았다.
“살려줘서 고마워! 넌 생명의 은인이야!”
“네? 아, 네 네.”
“답례로 뭔가를 주고 싶지만 돈이없구나!”
“아, 저, 그런 건 됐어요.”
조금 이상한 여자였지만 자신의 능력을 묻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행이라 여긴 예린이었다.
“넌 악마왕 게임을 하고 있니?”
그말에 예린은 화들짝 놀라며 유나의 손을 밀어 버리고 몇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유나를 경계하며 바라보는데 그녀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유나는 자신을 구해준 소녀가 왜 자신을 경계하는 지는 이해했지만 서로 경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가슴 아팠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 순수하게 감사인사를 해도 상대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난 싸우고 싶은게 아니야. 그냥 구해줘서 고맙다고…”
“아, 네. 그래도 접근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하네요.”
예린은 여전히 경계했다. 게임 참가자인 이상 위협적인 인물이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저 모습이 진심으로 짓는 표정인지 알 수도 없다. 실제로 자신은 주인에게 철저히 농락당하지 않았는가. 만약 유나가 주인과 같은 부류의 사람인데 그것도 모르고 대하다보면 괜히 자신의 주인에게 해를 끼치게 될 지도 몰랐다. 예린은 성태의 짐이 되는 것만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그래. 어쨌건 구해줘서 고맙다는 건 정말 진심이야. 아 혹시나 말해주는 건데 카타나를 들고다니는 여자를 보게되면 조심해. 정말 강한 참가자니까.”
유나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걸어가는 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언니! 가지마세요. 예린이 너도 그렇게 경계할 건 없잖아.”
뒤를 돌아보니 생글거리며 웃고있는 귀여운 원피스의 여자가 서 있었다. 예린은 쾌활하게 말하는 소녀를 보며 약간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소녀가 성태였기 때문이다.
***
작가의 말
내용이 좀 짧네요. 아무래도 마치고 시간이 별로 없어서... 곧 자야하기도 하구요.
어제 올렸던 외전 욕망과 카드는 여러모로 반성이 많이 되는 글이었습니다.
끝이 이상하다는 지적이 있으셨는데 사실 스스로도 느끼는 바였습니다.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서 출근은 해야하는데 글은 계속 길어지고 끝내야겠다는 압박감을 느끼다보니
이상하게 마무리지어졌습니다. 다시 손대서 여러모로 수정을 하고싶긴 하지만 좀 힘들것같네요.
당분간 악마왕 쓰기도 시간이 빠듯할 거라 예상되는 상황이라서요. 여러모로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익은 밥을 내놓은 기분이에요. 부디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ㅜㅜ;
앞으로 어떻게 글을 쓰게 될지 좀 고민이 되는 중입니다.
퇴근시간이 밤 아홉시에서 열한시 정도로 한동안 고정될 것 같은데, 짧더라도 매일 보는것이 좋으신지 아니면 며칠에 한번씩 올리더라도 평소 분량이 좋으신지 참고할 수 있게 꾸준히 보시는 분들께서는 댓글로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음, 선택하는데 참고 좀 하게요. 무조건 요구하신대로 따르지는 않지만 긍정적으로 검토할 생각입니다.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악마왕이 되자 중에서 최초로 섹스신이 없는 화였네요.
신유나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 신유나의 부모님은 사이가 좋았었는데, 신혼 부부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알콩달콩하게 지내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이 좋았던 두분은 신유나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결혼기념일을 맞이해 함께 여행을 떠났고 함께 돌아가셨다. 졸음 운전을 하던 대형 트럭과 정면 추돌이었다. 순식간에 천아 고아가 되어버린 신유나는 슬퍼했지만 그런 그녀를 작은 아버지, 어머니가 보살펴주었다.
작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이 없었다. 낳을 수 없는 것인지 낳지 않는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두분은 신유나를 친자식처럼 키웠다. 가끔 친부모님의 생각이나며 울적하기는 했지만, 이전만큼 아름다운 나날이었다. 작은 아버지는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좀 더 유복한 생활을 했다. 작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느새 유나의 마음 속에서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진실된 아빠, 엄마가 되어있었다. 유나는 자신의 행운에 감사했다. 유나는 양쪽의 부모님, 그러니까 친부모님과 양부모님을 모두 진심으로 사랑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며 유나는 독립을 했다.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고 유산은 정상적으로 상속받았다. 아빠의 사업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지만, 두분은 유나에게 걱정끼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아무런 말도 하지않았다. 상황은 급격하게 악화되어갔고 유나가 깨달았을 때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되어있었다. 유나는 부모님이 야속했다. 자신에게는 친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과 보험금이 있는데. 유나는 백방으로 뛰며 상황을 해결해보려고 했고, 쓰러저가는 그녀의 아빠에게서 돈 나올 구석을 찾던 하이에나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돈냄새를 기가막히게 맡아냈고, 그녀를 달콤한 말로 꾀어냈다. 유나는 그들의 여러가지 조언속에서 부모의 위기를 자신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몇억쯤 되던 돈은 순식간에 증발했다. 기업간의 잔혹한 마찰 속에서 유나가 느끼기에는 어마어마 했던 재산은 윤활유조차 되지 못할 금액이었다. 아빠의 회사는 순식간에 부도가 났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유나의 아빠, 엄마는 먼저가신 형님 부부와 유나에 대한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다. 유나 역시 눈물을 흘렸다. 친부모의 흔적도 모두 타인에게 삼켜지고, 양부모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난했지만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선의는 아무런 행복도 낳지 못했다. 유나에게는 참으로 잔혹한 일이었다. 그때부터 한순간도 겪어보지 못한 생활고가 유나를 덮쳐왔다. 신학기가 시작되자 당장 교제 살 돈도 등록금도 없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유나는 대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아까울만한 학교였지만 이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빠와 엄마는 자퇴를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아빠는 막노동에, 엄마는 식당에 나가고 있었다. 유나는 두분을 더 힘들게 하고싶지 않았다. 유나의 결심은 실행되었다.
취직 자리를 알아보며 유나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였다. 문자가 왔다. 대부분의 게임 참가자들은 별생각 없이, 혹은 피식거리며 장난스럽게 문자에 답을 입력했지만 유나는 달랐다. 문자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혼자 골똘이 생각했던 것이다. 돈? 돈이 더 있었다면 이런 상황을 타파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필요했다면? 애초에 돈과 친부모의 죽음은 연관이 없다. 오랜 고민 끝에 자신은 앞날을 내다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고민거리를 던저 준 문자에 대한 보답으로 정성스럽게 단어를 입력했다. [미래]. 유나는 이제 미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근데요.”
[말해라, 벌래같은 주군아.]
유나가 말하자, 오만의 군주 라크샤가 말했다. 유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를 주군으로 모신다느니 뭐라느니 해놓고 맨날 바보취급하고.”
[푸하하하, 네가 멍청하고 한심한 인간이기 때문이겠지? 주인을 잘못골랐어 진짜.]
이번에는 조롱의 악마 레쉬가 말했다. 유나의 입은 점점 더 튀어나온다.
“그러면 다른 사람한테 가던가.”
[불가능하다, 벌레같은 인간들이나 맹약을 하찮게 여기지. 우리에게는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하하하, 놀려먹기 좋은 주군이라 가능해도 다른놈한테는 안 갈거 같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라크샤도 레쉬도 신유나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한심하고 악마와는 거리가 멀게 착했지만, 그런 점이 두 악마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두 악마는 진심으로 유나를 악마왕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녀가 악마왕인 마계도 참으로 재밌으리라.
“여기에 진짜 다른 참가자가 있는거죠?”
[음, 아주 가까운 곳이다. 다른 악마가 있나보군. 방해 때문에 자세한 위치까지는 모르겠어.]
라크샤는 누군지 몰라도 강대한 악마일거라 예상했다. 자신의 탐지를 이정도로 방해할 수 있는 악마는 흔치 않다.
“윽.”
순간 유나의 머리에 두통이 일었다. 영상이 보였다. 카타나를 든 여자가 달리는 기차 지붕에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악마는 유나가 미래를 읽었음을 직감했다.
미래 관조. 유나가 악마왕 게임에 참가했을 때 유일하게 존재했던 스킬이다. 무작위로 미래의 영상이 자신의 시점으로 나타난다. 영상이 일어나는 시간은 자동으로 유나의 머리속에 입력이 되고, 보았던 영상을 예고된 그 시간에 무조건 자신의 눈으로 똑같이 보게 된다.
[어디?]
“여기 지붕이군요. 으… 올라가야해요? 기차가 달리고 있었는데 난 어떻게 거기있는거야!”
[어떻게든 올라가게 될거다. 어차피 그 여자와 마주친 장면을 보았잖나. 언제였지?]
유나가 두려워하며 묻자 라크샤가 말했다.
“10초 뒤요!”
유나는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하하하! 뭘 무서워해, 등신아! 넌 일주일 뒤에 살아있잖아!]
레쉬가 말은 사실이었다. 유나는 이미 일주일 뒤의 미래를 보았다. 어떤 여자아이가 자신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숨을 가쁘게 쉬며 뭔가 말하는 장면이었다. 유나는 용기를 가지며 변기 위에서 일어났다. 그때 화장실 창문이 깨지며 거센 바람이 불었다. 유나의 몸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휙 들렸다. 바닥에 던져진듯했다. 유나는 강한 통증과 추위에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일으켰다. 몇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 카타나를 든 여자가 서 있었다. 영상과 똑같은 장면이었다. 여자가 말했다.
“찾았다.”
[깔깔깔, 누군가 했네! 라크샤! 레쉬! 오랜만에 만나기에 좋은 날씨야!]
유나는 벌벌 떨며 물었다.
“아는 사이에요?”
[미친 악마다. 폴리가 저기에 붙었군.]
[폴리! 하하하, 꼴이 그게 뭐야! 아주 칼처럼 변했는데? 병신같은 꼴이 볼만해!]
“왜 도발하는 거에요! 엄청 무서워보이는데!”
[어차피 넌 살아남는다.]
유나 일행의 대화에 폴리는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딱봐도 전투능력이 전무해보이는데, 키킥! 너희들 내가 안보는 사이에 나보다 더 미쳐버렸나본데!]
“죽일까?”
[당연하지, 이 무식쟁이야!]
폴리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태세였다. 유나가 공포에 질려 벌벌떨었지만 두악마는 별다른 조언을 하지않았다. 해봐야 이런 전투에서 유나가 뭘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두악마는 유나의 능력을 믿을 뿐이었다. 무슨일이 있어도 유나는 일주일 뒤까지는 살아남는다.
갑작스레 강풍이 불었다. 카타나 여자는 몸을 숙이며 균형을 잡았지만 유나는 몸을 비틀거리다 기차에서 떨어졌다. 꺄아 하는 비명과 함께 유나가 떨어지는 모습을 여자는 보았다. 기차의 속도에 맞춰 모습이 멀어졌다.
“뛰어내려서 죽일까?”
[이 기차 따라잡을 자신 있냐? 빌어먹을, 제법 강해보였는데. 일단 서울로 가기나 하자고. 살아있으면 또 만나겠지!]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업드려 기차에 바짝 붙었다.
***
유나는 공포에 떨며 미친 듯이 소리질렀다. 두악마는 유나가 떨어지는 곳이 강 위라는 것을 깨닫고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알아서 살아남겠지. 약간은 무책임한 마음을 품으며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에는 조금 다른 이유도 있었다. 유나가 떨어지고 있는 강물 근처에 게임 참가자와 동족의 느낌이 왔기 때문이다. 적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일부러 모습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그때 유나의 등에 무언가 톡 하고 맞는 느낌이 나더니 떨어지는 속도가 줄었다. 느리게 떨어지는 자신의 몸에 당황하며 유나는 아래를 보았다.
예린은 사람의 고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기차에서 떨어진 듯한 어떤 여자를 보고 당황하며 카드덱을 꺼내들었다. 다행히 적당한 카드를 뽑은 예린은 서둘러 여자에게 날렸다. 카드는 명중했다.
[힘든 시간!
괴롭고 힘든 시간은 언제나 느리게 가는 법. 시간의 흐름은 공평치 않습니다!
맞은 대상의 시간이 느려집니다.]
떨어지는 여자의 속도가 줄었다. 예린은 덱을 확인하며 바로 다음 카드를 꺼내 든다.
[시계바늘 돌리기!
시간은 마음대로 돌릴 수 없어도 시계바늘은 마음대로 돌릴 수 있다!
맞은 대상의 위치를 지정하면 1분 뒤 대상이 이동합니다.]
카드 맞추기라면 수없이 연습한 예린이었다. 천천히 떨어지는 여자, 유나는 등에 또 한번 카드를 맞았다. 느리게 떨어지는 유나의 몸이 강물에 닿기 직전 예린의 옆으로 순간이동 했다.
“꺅!”
갑작스럽게 나타났지만 자신이 의도한 위치였기에 예린은 유나를 받는게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힘든 시간으로 느리게 떨어지고는 있었다해도 정상적인 상황으로 떨어질 때만큼의 운동에너지를 유나의 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예린이 무릎을 굽히며 충격을 줄여보고자 했지만 두사람은 결국 사이좋게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끙끙대며 신음을 내뱉던 두사람이 거의 비슷한 시간에 일어났다. 유나는 청바지가 몇군데 찢어진 것을 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옷 살 돈 없는데… 하지만 곧 씩씩한 표정을 짓고
몸을 털고있는 예린에게 다가갔다.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예린이 구해줬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신기한 능력을 쓴 것을 보니 아마도 참가자일거라 예상했다. 라크샤와 레쉬는 다른 참가자를 조심하라고 했었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자신을 구해줬으니 분명히 좋은 사람일 것이라 유나는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라크샤와 레쉬의 느낌이 사라졌다. 유나는 어리둥절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괜찮으세요? 저… 많이 놀라셨죠?”
예린은 이 사람에게 자신이 어떻게 구해준건지 설명을 해줘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대충 초능력자라고 둘러댈까? 미친 사람으로 보면 어쩌지? 그러고 있는데 자신의 말에 화들짝 놀란 유나가 자신에게 달려와 손을 꽉 잡았다.
“살려줘서 고마워! 넌 생명의 은인이야!”
“네? 아, 네 네.”
“답례로 뭔가를 주고 싶지만 돈이없구나!”
“아, 저, 그런 건 됐어요.”
조금 이상한 여자였지만 자신의 능력을 묻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행이라 여긴 예린이었다.
“넌 악마왕 게임을 하고 있니?”
그말에 예린은 화들짝 놀라며 유나의 손을 밀어 버리고 몇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유나를 경계하며 바라보는데 그녀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유나는 자신을 구해준 소녀가 왜 자신을 경계하는 지는 이해했지만 서로 경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가슴 아팠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 순수하게 감사인사를 해도 상대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난 싸우고 싶은게 아니야. 그냥 구해줘서 고맙다고…”
“아, 네. 그래도 접근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하네요.”
예린은 여전히 경계했다. 게임 참가자인 이상 위협적인 인물이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저 모습이 진심으로 짓는 표정인지 알 수도 없다. 실제로 자신은 주인에게 철저히 농락당하지 않았는가. 만약 유나가 주인과 같은 부류의 사람인데 그것도 모르고 대하다보면 괜히 자신의 주인에게 해를 끼치게 될 지도 몰랐다. 예린은 성태의 짐이 되는 것만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그래. 어쨌건 구해줘서 고맙다는 건 정말 진심이야. 아 혹시나 말해주는 건데 카타나를 들고다니는 여자를 보게되면 조심해. 정말 강한 참가자니까.”
유나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걸어가는 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언니! 가지마세요. 예린이 너도 그렇게 경계할 건 없잖아.”
뒤를 돌아보니 생글거리며 웃고있는 귀여운 원피스의 여자가 서 있었다. 예린은 쾌활하게 말하는 소녀를 보며 약간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소녀가 성태였기 때문이다.
***
작가의 말
내용이 좀 짧네요. 아무래도 마치고 시간이 별로 없어서... 곧 자야하기도 하구요.
어제 올렸던 외전 욕망과 카드는 여러모로 반성이 많이 되는 글이었습니다.
끝이 이상하다는 지적이 있으셨는데 사실 스스로도 느끼는 바였습니다.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서 출근은 해야하는데 글은 계속 길어지고 끝내야겠다는 압박감을 느끼다보니
이상하게 마무리지어졌습니다. 다시 손대서 여러모로 수정을 하고싶긴 하지만 좀 힘들것같네요.
당분간 악마왕 쓰기도 시간이 빠듯할 거라 예상되는 상황이라서요. 여러모로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익은 밥을 내놓은 기분이에요. 부디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ㅜㅜ;
앞으로 어떻게 글을 쓰게 될지 좀 고민이 되는 중입니다.
퇴근시간이 밤 아홉시에서 열한시 정도로 한동안 고정될 것 같은데, 짧더라도 매일 보는것이 좋으신지 아니면 며칠에 한번씩 올리더라도 평소 분량이 좋으신지 참고할 수 있게 꾸준히 보시는 분들께서는 댓글로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음, 선택하는데 참고 좀 하게요. 무조건 요구하신대로 따르지는 않지만 긍정적으로 검토할 생각입니다.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악마왕이 되자 중에서 최초로 섹스신이 없는 화였네요.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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