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emory - 프롤로그 >
형!
그래, 형 아주 오랜만이야. 얼마 전에 케케묵은 앨범을 열어봤지.
아직도 형이 내게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를 간직하고 있어요. 형이랑 찍은 흑백사진 몇 장과 함께...
꿀밤나무 마른 이파리에 형이 흰 물감으로 쓴 글귀. 30 여 년이 훌쩍 지났건만 아직도 선명하더군.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
- 앙드레 지드 -
전에도 얘기했지만...
내 젊은 날, 내 감성의 원천은 형을 숭앙하고 흠모한데서부터 출발했을 거야.
미술부 선배인 형에게서... 화가 지망생이면서도 문학적이던 형의 그 예술적 감수성.
그래 맞아요. 그러니까 바로 그 무렵이었어요.
형의 형상(形象)이...
아니, 神의 형상(形象)이 내 영혼을 지배했죠.
내가 神의 형상(形象)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느 날, 바로 형의 다락방 온 벽을 채우고 있던 수많은 책들 중에서
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고, 그 책을 펼쳤을 때 쉬르리얼리스틱한 그림들...
막스 에른스트의 화집. 마치 형의 내면을 보는 듯 했어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형을 만나서부터 줄곧 내가 형에게서 느낀 영감이 그 그림들 속에 들어있었죠.
충격적이었어요. 정말 형이야말로 내가 막연히 찾고 있던 <神>이었을까. 형이 나의 <아브락삭스>였을까.
나를 압도하고 지배하던, 딱히 형용하기도 힘든 형의 영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래서 왜, 그 화집의 제목과 초현실주의 그림의 이미지가 형의 이미지와 동일시되었는지...
그래서 이제, 형이라는 존재가 구체화되지 않는 막연한 槪念으로만 맴돌다 드디어 쉬르리얼리스틱 그림과 동일
이미지로 형상화 된 것이죠.
그렇지만 늘 말이야.
전에도 얘기했지만 말이야. 모르겠어, 형의 영혼이 왜 내게 왔는지.
맞아, 사실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정말로 막스 에른스트의 그 그림으로부터 왔는지, 형의 섬세한 손가락 끝에서 탄생되던
<청년 부르터스> 석고 데생으로부터 왔는지 모르겠어.
하여간 형의 영혼은 그 시절 내가 다니던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그 뿐만 아니라 학교의 미술실에서도, 내 방의 봉창으로 밀려오던 밤공기에서,
형의 다락방 책꽂이에 꽂혀있던 그 수많은 책들의 제목들 사이에서도...
더 나아가 내게 보여 지고 느껴지던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에게서도 형의 영혼이 살아있어
그렇게 날 불렀어요.
형은 내 영혼의 근원이었어요. 모든 면에 있어서 날 지배하고 있었죠. 아주 사소한 것에도...
형을 닮으려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형의 모든 것을 따라하려고 애썼죠.
아니, 어쩌면... 흠... 맞아요.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형을 시기하고 모함하고 질투했던 것 같아요.
형의 여자. 읍내 극장 앞 <내일양행>집 딸 말이야. 형의 베아트리체,
나랑 동갑이었지. 내 친구였잖아.
그러나 내게도 나의 베아트리체였지.
언젠가 형이 내게 편지를 전해주고 오라고 심부름 보냈잖아요?
형, 정말 미안해요.
그 편지 내가 뜯어봤어. 도루코로 감쪽같이 뜯었지.
나중에 형이 그 사실을 알았을지 몰랐을지 지금도 궁금해요.
형이 그녀 곁을 떠났을 때
아니, 그녀가 형을 배신했을 때
그 때... 형이 <카인> 얘기를 했어.
내게...
나의 <아브락삭스>
나의 지드 형!
언젠가는 모두 다 얘기하게 될 줄 알았어.
흠.
< memory - 형의 여자를 좋아했어.>
형! 어제 얘기했듯 난 형을 닮으려고 했어.
형의 모든 것을 따라하려고 했지. 아주 사소한 것에도...
심지어 크로키북조차도 똑같은 걸 샀잖아요.
기억나요? 무슨 미술대회 참가하러 가던 기차 안에서 형이 건너편 사람들을 모델로 크로키 시작할 때
나도 크로키북을 꺼냈잖아요.
그때, 형은 씨~익 웃으며 그랬죠.
“너도 거기서 샀구나? 수미 화방에서?”
다행이었어요. 형은 단지 같은 화방에서 샀기에 똑같은 거라고 단정했으니까 말이야.
나는 형이 "너, 크로키북, 나랑 똑같은 거네?" 라고 할 줄 알았어요.
그랬으면 " 너 왜 내가 하는 것마다 따라해!" 라고 형이 날 질책하는 뜻으로 받아들을 텐데 말이야.
그 여름, 형은 떠났어.
형이 꿀밤 나무 바싹 마른잎에 써 보내준 <좁은 문>의 글귀처럼...
그래, 형은 <알리사>처럼 그렇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 버렸던 거야?
스물 넷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형이 선택한 그 <좁은 문>이 정녕 생명에 이르는 문이었을까?
형이 저 세상으로 떠나고 그 뒤로 <좁은 문>은 잊었지. 기껏 소설 속의 얘기니까.
그런데 군에서 첫 휴가 나왔을 때 형이 내게 준 책 <데미안>을 읽었지.
그때... 고등학교 때, 형이 읽어보라고 줘서 바로 읽었던 거지만 휴가 나와서 우연히 다시 읽었어.
책 표지 안에 형의 싸인이 있었지.
형. 형은 나빴어. 데미안은 바로 형이더군.
바로 그거였어. 그랬어. 난 늘 형이 부러웠어.
형의 그 카리스마가 좋았어. 남자다웠지. 데미안처럼...
거기에 비해 난, 섬약했었어. 그럼 난 싱클레어였을까.
...
그리고 우리 둘에게 잊을 수 없는 베아트리체.
그녀는 늘 그런 형의 편이었어.
그랬어. 그녀...
내 친구였지만 형의 여자
베아트리체.
이제야 고백하는데, 형의 여자를 좋아했어.
베아트리체여서가 아니라 형의 여자였기에 탐하고 싶었지.
베아트리체.
근친상간.
형의 여자를 좋아했어. 근친상간이지.
그래. 아직도 나는 내적분열에 빠져있어. 지금껏.
형이 내게 베아트리체를 보내 준 이후로... 지금껏.
형이 사는 하늘나라도 겨울이 오고 있어? 벌써 겨울이라고?
형, 요번 월요일에 잠깐 내려올래? 나, 생일이잖아...
올만에 술 한 잔 하고 용미목에서 늪안으로 가는 그 길로 산책 안할래?
응? 자전거 탈까?
형. 보고 싶다.
많이.
형이 살다간 스물넷, 그 스물넷에서 배 이상이나 더 살아왔군요.
수많은 세월 넘어 형은 아직도 사진에서처럼 스물 넷 청년으로 있는데
나는...
그래, 어떻게 살아왔던가.
형이 떠난 그 젊은 날.
세상은 철저히 나를 향해 돌팔매질을 해댔고 <나?>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혹은, 현실과 비현실의 틈바구니에서 스스로도 못 알아볼 논리적이지 못한 반추상 자화상 얼굴을 한 채
쥐약 먹은 개처럼 골목골목 깩깩 부르짖으면서 <나?>의 평범하지 않음의 광기를 표출해야했는데...
그 평범하지 않음의 그림 한 폭,
그 한 폭의 예술,
그림 한 폭의 생각,
그 한 폭의 희망...
그 한 폭만큼의 위안을 하고
그 희망의 부피만큼 발악해야 했는데...
그 시절 형이 내 곁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윤택했을까.
...
형. 결국 화가의 길은 접었어.
두 번의 개인전 그림 한 점 못 팔았거든.
그렇다고 내 예술을 헐값에 팔수는 없잖아? 때려 치는 거지 뭐.
형은 아직도 그림 그려?
각설하고,
형, 그때...
글쎄 아마도 초여름이었을 거야. 봄이었나? 교육청 뒷마당에 분수대를 낀 작은 연못 있었잖아. 거기 우리 셋이 갔던 적 있었지. 형의 여자 베아트리체. 아니, 형과 나의 여자 베아트리체.
잔잔한 수면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지. 하얀 윗도리에 까만 교복치마의 매무새 단아한 모습. 하얀 종아리.
그 자태를 바라보다 언뜻 형의 눈과 마주쳤지. 아니, 내가 형의 눈길을 의식했어. 이상했지.
형의 눈빛에서 잠시 형이 나를 경멸하는 시선을 느꼈어.
흠. 경멸이라...
경멸? 확실히 말보다 글이 더 힘들어.
어떻던 형...
나 있잖아요. 그때.
그녀... 베아트리체 눈을 보기 힘들었어. 그래서 물에 투영된 그녀의 자태를 본거야.
그 무렵... 점점 그녀 눈길과 마주칠 용기가 없었거든.
알어? 그 눈길을 어떻게 마주 보겠어? 그럼 내 마음... 금방 들킬 것 같은데...
...
그래 형,
미안해.
그리고 베아트리체 사진 형 책상서랍 속에 있었지 다른 여러 사진들이랑...
내가 훔쳤어요. 독사진을 갖고 싶었는데 그럼 형이 금방 알 것 같아서 단체사진 한장 훔쳤지.
이제 돌려줄게.
메일로 보내줄게요.
하늘나라에도 메일은 받을 수 있지?.
형. 오늘 날씨가 흐리네요.
눈이 오려는지 원. 내일 또 쓸게...
안녕.
< memory - 부끄러운 짓을... >
형! 나는 형에게 빚이 많아.
돌이켜보면... 형에게서 배운 것이 너무 많았는데 나는 어떡하면 형의 그늘에서 벗어날까 그 생각만 한 것 같아.
바보처럼... 형에게 부끄러운 짓을 많이 했어.
언제던가? 내가 2학년일 때니까 형은 3학년이었군.
서울 중앙대학교 축제 때 미술실기대회 참가하느라 올라왔었잖아
생각나지? 형이 중학교 아이들까지 합쳐서 인솔자로 왔었지. 형이 미술부 부장이었으니까.
낮에 도착해서 중앙대학교 교정을 답사하고 난 뒤 다 같이 중곡동 어린이대공원에 놀러가자고 했는데
버스 정류장 앞에서... 대준이 녀석이랑 내가 영화나 보자고 한참동안이나 우겼잖아?
느닷없이 형이 우리 둘 뺨을 아주 힘껏 때렸어.
놀랐지.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던 형이었는데... 그동안 다른 형들처럼, 욕이라도 한 번 했었다면...
그랬다면 몰라.
그런 형이었기에 나는 충격이었어. 미웠지. 후배들 앞에서 따귀를 맞았으니...
그 다음 날 대회 끝날 때까지 인상 쓰고 있었지.
형, 형이 저 세상으로 떠난 뒤로 나는 그게 두고두고 미안했어.
나는 겨우 뺨이 아팠겠지만 때린 형은 가슴이 아팠을 거 아냐.
내가 대학시험에 떨어져 집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형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안 사정으로
대학을 포기하고 미술학원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지.
칼바람 몰아치던 시골의 그 겨울 밤 밤늦게 10리길을 걸어서 날 위로하러 왔잖아요.
나는 당당하게 보란 듯 합격해서 형에게 우쭐대고 싶었어. 형보다 나은 거라고는 내 집안 사정 밖에 없었거든...
형보다 나은 거라고는 젠장, 그것뿐이었어.
그랬어.
형!
늘 미안했어요. 그리고 너무나 부끄러웠어.
그래서 형이 없는 세상에서 여태껏 살아온 내 삶에서,
내 삶의 정점마다...
대학을 졸업할 때,
결혼을 했을 때,
아이를 낳았을 때나
두 번의 개인전을 열었을 때 등,
내 삶의 정점 마다 꼭 뭔가가 허전했는데
그 허전함의 실팍한 언저리에 쌓인 먼지를 툭툭 털고 닦아내 보면
거기엔 바로 형이 묻어 있었어요.
내 청년시절의 객기.
무모함 끝에 입은 상처투성이 내 영혼을 달래주고 이유 없이 방황하던 나에게 예술적 영감을 갖게 해주던,
자신의 상처는 접어두고 내 영혼을 자신의 아픔처럼 매만져 준 형이 스물 네 살의 형이...
처연히 서 있는 것이었어.
그래서 아무리 떼어내고 싶어도 영원히 떼어 낼 수 없는
부끄러운 기억으로 내 인생에 묻어있는 거예요.
그리고...
베아트리체 그녀.
< memory - 내가 무심했어...>
형! 세월 참 빠른 것 같아. 그죠?
79년 3월 초, 30 여년 전 일이네요.
형이 고등학교 졸업한 뒤 4년이나 일해 번 돈을 밑천으로 스물넷에 이르러서야 대학 입학한다고...
그래서 내가 축하해 준다며 꽃 사들고 경산 형네 학교에 갔잖아. 그때 겨우 나 혼자 왔더군.
하긴 뭐 다들 군대 가고... 몇몇은 학교 가고...
그 학교는 무슨 꽃샘추위에 입학식을 바깥에서 해? 순 허허벌판에 있는 학교가?
추워 가지고 혼났잖아. 입학식 끝나고서 75번 버스를 타고 대구시내로 들어와 대명동 미도극장 앞에서 내렸지.
생각나요? 한사대 후문 쪽에 있던 남영전당포 옆 합천식당에서 그 날 막걸리 엄청 마셨지.
그 때, 형이 베아트리체 얘기를 꺼냈어. 몇 년간 아무런 말도 않더니... 날 용서해 주려고...
그렇게 술의 힘을 빌어서? 그랬던 것 같아.
결국은 그 날, 둘 다 술에 맛이 가서 그 뒤쪽 원항여인숙에서 같이 잤던거 기억해?
사실 형이 그렇게 술이 센지 몰랐어.
그래.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형의 음주습관에 대해 제동을 걸었어야 했어. 막걸리 한두 잔으로 얘기를 꺼내기 힘들어서 그랬거니 했지. 내가 무심했어, 형.
그 다음 날 형은 학교로 가고 나는 시골로 내려오고... 며칠 뒤 4월 2일에 난 군에 입대했지.
그것이 우리들의 마지막이었군.
...
그래 형! 고등학교 때 말이지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사 모았어요. 순전히 형 때문이었어.
형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형네 형편에도 불구하고 형의 작은 다락방은 온 방이 책으로 가득했잖아요.
대단했지. 그냥 장식용으로 모아놓은 게 아니었어.
그래서 형은 그 많은 책들을 다 읽어서인지 고등학생이었지만 무슨 철학자 같았어.
거기다 머리까지 좋았다니... 우리 학교 통틀어 IQ도 제일 높았다고 했지.
그런 형이 보는 책은 뭘까? 난 형네 놀러갈 때마다 책들의 제목을 외우기 바빴지요. 형의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 펼쳐보면 어떤 책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거나 그 아래 여백에는 또, 자신의 소감을 꼼꼼히 메모한 것도 있었어.
그 당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작은 문고판이 유행이었는데 형은 큰 책이 있음에도 어떤 책은 그 문고판도 있었지. 그래서 어디 미술대회 가느라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면 형은 항상 교복 호주머니에서 그 문고판 책을 슬며시 꺼내 읽었잖아요. 멋스러웠지.
나도 책을 사 모았지요. 정말이지 그랬어요. 책뿐만 아니라 형을 쫓아 뭐든 형과 같은 것을 가지고 싶어 했다는 거
며칠 전에 고백했잖아요. 흉내를 내고 싶었지. 내가 모은 책이 한 800 여권, 책꽂이에도 모자라 내방 구석에 겹겹으로 쌓여 있었지요. 형을 쫓아 사다보니 점점 욕심이 나서 헌책방을 뒤져 닥치는 대로 사긴 했지만 어려워서 읽다가 만 것도 있고... 정독을 못하고 겉핥기를 했네요. 하지만 그 중 마음에 와 닿는 책은 형처럼 밑줄을 그어가며 읽은 것도 있어요.
그렇게... 형을 쫓아하다가 문학을 좋아하게 되었고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고픈 그런 꿈도 꾸기에 이르렀지.
그 얘기하니까 생각나네요. 고등학교 때 백일장에 나가서 몇 번 당선된 적도 있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형은 분명히 나보담 능력이 있었을 텐데 나서지를 않더군.
나는 내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포장을 하여 내보이는데 형은 그저 그런 나를 보며 빙그레 웃기만 했잖아.
형! 왜 그랬어?
나는 형과 문학적인 얘기를 주고받으려 했는데 형은 내게 그런 기회를 안 줬어.
백일장에서 입상했노라 자랑을 할라치면 형은 또 그런 나를 보며 빙그레 웃기만 하는 것이었어.
오히려 그래서 나는 늘 형 앞에서 괜히 주눅이 들곤 했던 거야, 알어?
글쎄, 형이 왜 그랬을까. 지금도 나는 이해가 안 되거든. 젠장.
그래 맞아. 나쁜 형이었어. 그렇게 일찍 가버릴 거였으면 날 좀 상대나 해줄 것이지.
글쎄... 내가 안으로 성숙하기를 기대했던 거였을까?
그래요. 형! 지금 영혼이라도 내려와서 이젠 내 얘기 좀 들어줬으면 좋겠어.
흠.
우선 탁구나 한 게임 하자고?
그러지 뭐 우리 잘 가던 남진탁구장에서?
5점 접어준다는 말은 하지 말고... 죽어도 내가 못 이길 거라고?
그래 붙어보자구... 먼저 가서 기다릴게.
< memory - 그 여름 밤... >
그래요, 형.
우리 고향은 강이 있어 좋지요.
낙동강 줄기가 동네를 크게 돌아 흐르잖아요.
그 여름. 해거름 내리는 태문동 둑길.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일거예요. 베아트리체를 읍내 문화원 앞에서 만났거든요.
내 자전거 뒤에 태워서 다리를 건너 둑길로 갔지요.
솔밭이 있는 현내리 쪽 보다는 비닐하우스가 즐비한 상포 쪽을 좋아했지요.
네, 맞아요. 형네 집과는 반대쪽이죠.
오히려 나는 상포 쪽 풍경이 좋더라고요. 건너편 종루산으로 해가 넘어갈 때의 풍경... 붉디붉은 해가 넘어갈 때... 그 저녁 어스름이 빚어내는 그 풍경... 격자무늬로 늘어선 비닐하우스 밭들과 복숭아밭들 그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 이 쪽 저 쪽 민가에 모깃불 연기 올라가는 풍경, 그 하늘가엔 잠자리들 떼 지어 떠다니고... 너무나 아름다웠잖아요?
...
그래요.
그런 여름날이었지요.
해거름 내린 뒤 어둠이 짙어지면서 우리는 자전거를 세우고 둑길 풀밭에 앉았지요.
아마도 달빛이 있었을 테지만, 이따금 사람들도 지나다니고 있었고 그래서 마음을 놓았지요.
나란히 앉으니 제법 서늘한 강바람이 불어오면서 그 결에는 낮의 땡볕에 데워진 풀 냄새도 스며오고...
그 정감이 참, 가슴을 알싸하게 만들었지요.
"형이나 너나 닮은 게 많아..."
"닮은 거... 어떤?"
달빛 스민 베아트리체 눈망울... 매혹적이었어요.
"그림 잘 그리고, 책도 많이 읽고..."
"그림은 형이 훨씬 더 잘 그리지 도저히 못 따라가지 내가..."
"성격도..."
"형은 차분하고... 난 덤벙거리지 뭐?"
훅, 강물에 목을 축인 바람... 그 안 베아트리체의 향기... 내 가슴으로 베여왔어요.
"형은 카리스마가 있지만 난..."
"형... 그늘진 웃음.."
"그늘진 웃음?"
"활짝 웃는 거 한 번도 못 봤거든?"
그늘진 웃음이라...
...
그랬어요.
어느덧 밤이 깊어지고 별빛이... 그 여름 밤 별빛이... 바로 우리들 머리 위에서 빛나던 별빛이...
그래요. 우리 고향 여름 밤 별은 늘 낮게 떠있지요. 그 여름 밤 별빛이... 그 별빛마저 가슴에 젖어드는데,
그 때 불쑥 내리는 그 별빛 가로막으며... 세 녀석이 둑 아래에서부터 나타났지요.
"짜식, 공부 안하고 연애질이냐?"
- 다음에 계속...
형!
그래, 형 아주 오랜만이야. 얼마 전에 케케묵은 앨범을 열어봤지.
아직도 형이 내게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를 간직하고 있어요. 형이랑 찍은 흑백사진 몇 장과 함께...
꿀밤나무 마른 이파리에 형이 흰 물감으로 쓴 글귀. 30 여 년이 훌쩍 지났건만 아직도 선명하더군.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
- 앙드레 지드 -
전에도 얘기했지만...
내 젊은 날, 내 감성의 원천은 형을 숭앙하고 흠모한데서부터 출발했을 거야.
미술부 선배인 형에게서... 화가 지망생이면서도 문학적이던 형의 그 예술적 감수성.
그래 맞아요. 그러니까 바로 그 무렵이었어요.
형의 형상(形象)이...
아니, 神의 형상(形象)이 내 영혼을 지배했죠.
내가 神의 형상(形象)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느 날, 바로 형의 다락방 온 벽을 채우고 있던 수많은 책들 중에서
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고, 그 책을 펼쳤을 때 쉬르리얼리스틱한 그림들...
막스 에른스트의 화집. 마치 형의 내면을 보는 듯 했어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형을 만나서부터 줄곧 내가 형에게서 느낀 영감이 그 그림들 속에 들어있었죠.
충격적이었어요. 정말 형이야말로 내가 막연히 찾고 있던 <神>이었을까. 형이 나의 <아브락삭스>였을까.
나를 압도하고 지배하던, 딱히 형용하기도 힘든 형의 영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래서 왜, 그 화집의 제목과 초현실주의 그림의 이미지가 형의 이미지와 동일시되었는지...
그래서 이제, 형이라는 존재가 구체화되지 않는 막연한 槪念으로만 맴돌다 드디어 쉬르리얼리스틱 그림과 동일
이미지로 형상화 된 것이죠.
그렇지만 늘 말이야.
전에도 얘기했지만 말이야. 모르겠어, 형의 영혼이 왜 내게 왔는지.
맞아, 사실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정말로 막스 에른스트의 그 그림으로부터 왔는지, 형의 섬세한 손가락 끝에서 탄생되던
<청년 부르터스> 석고 데생으로부터 왔는지 모르겠어.
하여간 형의 영혼은 그 시절 내가 다니던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그 뿐만 아니라 학교의 미술실에서도, 내 방의 봉창으로 밀려오던 밤공기에서,
형의 다락방 책꽂이에 꽂혀있던 그 수많은 책들의 제목들 사이에서도...
더 나아가 내게 보여 지고 느껴지던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에게서도 형의 영혼이 살아있어
그렇게 날 불렀어요.
형은 내 영혼의 근원이었어요. 모든 면에 있어서 날 지배하고 있었죠. 아주 사소한 것에도...
형을 닮으려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형의 모든 것을 따라하려고 애썼죠.
아니, 어쩌면... 흠... 맞아요.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형을 시기하고 모함하고 질투했던 것 같아요.
형의 여자. 읍내 극장 앞 <내일양행>집 딸 말이야. 형의 베아트리체,
나랑 동갑이었지. 내 친구였잖아.
그러나 내게도 나의 베아트리체였지.
언젠가 형이 내게 편지를 전해주고 오라고 심부름 보냈잖아요?
형, 정말 미안해요.
그 편지 내가 뜯어봤어. 도루코로 감쪽같이 뜯었지.
나중에 형이 그 사실을 알았을지 몰랐을지 지금도 궁금해요.
형이 그녀 곁을 떠났을 때
아니, 그녀가 형을 배신했을 때
그 때... 형이 <카인> 얘기를 했어.
내게...
나의 <아브락삭스>
나의 지드 형!
언젠가는 모두 다 얘기하게 될 줄 알았어.
흠.
< memory - 형의 여자를 좋아했어.>
형! 어제 얘기했듯 난 형을 닮으려고 했어.
형의 모든 것을 따라하려고 했지. 아주 사소한 것에도...
심지어 크로키북조차도 똑같은 걸 샀잖아요.
기억나요? 무슨 미술대회 참가하러 가던 기차 안에서 형이 건너편 사람들을 모델로 크로키 시작할 때
나도 크로키북을 꺼냈잖아요.
그때, 형은 씨~익 웃으며 그랬죠.
“너도 거기서 샀구나? 수미 화방에서?”
다행이었어요. 형은 단지 같은 화방에서 샀기에 똑같은 거라고 단정했으니까 말이야.
나는 형이 "너, 크로키북, 나랑 똑같은 거네?" 라고 할 줄 알았어요.
그랬으면 " 너 왜 내가 하는 것마다 따라해!" 라고 형이 날 질책하는 뜻으로 받아들을 텐데 말이야.
그 여름, 형은 떠났어.
형이 꿀밤 나무 바싹 마른잎에 써 보내준 <좁은 문>의 글귀처럼...
그래, 형은 <알리사>처럼 그렇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 버렸던 거야?
스물 넷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형이 선택한 그 <좁은 문>이 정녕 생명에 이르는 문이었을까?
형이 저 세상으로 떠나고 그 뒤로 <좁은 문>은 잊었지. 기껏 소설 속의 얘기니까.
그런데 군에서 첫 휴가 나왔을 때 형이 내게 준 책 <데미안>을 읽었지.
그때... 고등학교 때, 형이 읽어보라고 줘서 바로 읽었던 거지만 휴가 나와서 우연히 다시 읽었어.
책 표지 안에 형의 싸인이 있었지.
형. 형은 나빴어. 데미안은 바로 형이더군.
바로 그거였어. 그랬어. 난 늘 형이 부러웠어.
형의 그 카리스마가 좋았어. 남자다웠지. 데미안처럼...
거기에 비해 난, 섬약했었어. 그럼 난 싱클레어였을까.
...
그리고 우리 둘에게 잊을 수 없는 베아트리체.
그녀는 늘 그런 형의 편이었어.
그랬어. 그녀...
내 친구였지만 형의 여자
베아트리체.
이제야 고백하는데, 형의 여자를 좋아했어.
베아트리체여서가 아니라 형의 여자였기에 탐하고 싶었지.
베아트리체.
근친상간.
형의 여자를 좋아했어. 근친상간이지.
그래. 아직도 나는 내적분열에 빠져있어. 지금껏.
형이 내게 베아트리체를 보내 준 이후로... 지금껏.
형이 사는 하늘나라도 겨울이 오고 있어? 벌써 겨울이라고?
형, 요번 월요일에 잠깐 내려올래? 나, 생일이잖아...
올만에 술 한 잔 하고 용미목에서 늪안으로 가는 그 길로 산책 안할래?
응? 자전거 탈까?
형. 보고 싶다.
많이.
형이 살다간 스물넷, 그 스물넷에서 배 이상이나 더 살아왔군요.
수많은 세월 넘어 형은 아직도 사진에서처럼 스물 넷 청년으로 있는데
나는...
그래, 어떻게 살아왔던가.
형이 떠난 그 젊은 날.
세상은 철저히 나를 향해 돌팔매질을 해댔고 <나?>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혹은, 현실과 비현실의 틈바구니에서 스스로도 못 알아볼 논리적이지 못한 반추상 자화상 얼굴을 한 채
쥐약 먹은 개처럼 골목골목 깩깩 부르짖으면서 <나?>의 평범하지 않음의 광기를 표출해야했는데...
그 평범하지 않음의 그림 한 폭,
그 한 폭의 예술,
그림 한 폭의 생각,
그 한 폭의 희망...
그 한 폭만큼의 위안을 하고
그 희망의 부피만큼 발악해야 했는데...
그 시절 형이 내 곁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윤택했을까.
...
형. 결국 화가의 길은 접었어.
두 번의 개인전 그림 한 점 못 팔았거든.
그렇다고 내 예술을 헐값에 팔수는 없잖아? 때려 치는 거지 뭐.
형은 아직도 그림 그려?
각설하고,
형, 그때...
글쎄 아마도 초여름이었을 거야. 봄이었나? 교육청 뒷마당에 분수대를 낀 작은 연못 있었잖아. 거기 우리 셋이 갔던 적 있었지. 형의 여자 베아트리체. 아니, 형과 나의 여자 베아트리체.
잔잔한 수면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지. 하얀 윗도리에 까만 교복치마의 매무새 단아한 모습. 하얀 종아리.
그 자태를 바라보다 언뜻 형의 눈과 마주쳤지. 아니, 내가 형의 눈길을 의식했어. 이상했지.
형의 눈빛에서 잠시 형이 나를 경멸하는 시선을 느꼈어.
흠. 경멸이라...
경멸? 확실히 말보다 글이 더 힘들어.
어떻던 형...
나 있잖아요. 그때.
그녀... 베아트리체 눈을 보기 힘들었어. 그래서 물에 투영된 그녀의 자태를 본거야.
그 무렵... 점점 그녀 눈길과 마주칠 용기가 없었거든.
알어? 그 눈길을 어떻게 마주 보겠어? 그럼 내 마음... 금방 들킬 것 같은데...
...
그래 형,
미안해.
그리고 베아트리체 사진 형 책상서랍 속에 있었지 다른 여러 사진들이랑...
내가 훔쳤어요. 독사진을 갖고 싶었는데 그럼 형이 금방 알 것 같아서 단체사진 한장 훔쳤지.
이제 돌려줄게.
메일로 보내줄게요.
하늘나라에도 메일은 받을 수 있지?.
형. 오늘 날씨가 흐리네요.
눈이 오려는지 원. 내일 또 쓸게...
안녕.
< memory - 부끄러운 짓을... >
형! 나는 형에게 빚이 많아.
돌이켜보면... 형에게서 배운 것이 너무 많았는데 나는 어떡하면 형의 그늘에서 벗어날까 그 생각만 한 것 같아.
바보처럼... 형에게 부끄러운 짓을 많이 했어.
언제던가? 내가 2학년일 때니까 형은 3학년이었군.
서울 중앙대학교 축제 때 미술실기대회 참가하느라 올라왔었잖아
생각나지? 형이 중학교 아이들까지 합쳐서 인솔자로 왔었지. 형이 미술부 부장이었으니까.
낮에 도착해서 중앙대학교 교정을 답사하고 난 뒤 다 같이 중곡동 어린이대공원에 놀러가자고 했는데
버스 정류장 앞에서... 대준이 녀석이랑 내가 영화나 보자고 한참동안이나 우겼잖아?
느닷없이 형이 우리 둘 뺨을 아주 힘껏 때렸어.
놀랐지.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던 형이었는데... 그동안 다른 형들처럼, 욕이라도 한 번 했었다면...
그랬다면 몰라.
그런 형이었기에 나는 충격이었어. 미웠지. 후배들 앞에서 따귀를 맞았으니...
그 다음 날 대회 끝날 때까지 인상 쓰고 있었지.
형, 형이 저 세상으로 떠난 뒤로 나는 그게 두고두고 미안했어.
나는 겨우 뺨이 아팠겠지만 때린 형은 가슴이 아팠을 거 아냐.
내가 대학시험에 떨어져 집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형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안 사정으로
대학을 포기하고 미술학원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지.
칼바람 몰아치던 시골의 그 겨울 밤 밤늦게 10리길을 걸어서 날 위로하러 왔잖아요.
나는 당당하게 보란 듯 합격해서 형에게 우쭐대고 싶었어. 형보다 나은 거라고는 내 집안 사정 밖에 없었거든...
형보다 나은 거라고는 젠장, 그것뿐이었어.
그랬어.
형!
늘 미안했어요. 그리고 너무나 부끄러웠어.
그래서 형이 없는 세상에서 여태껏 살아온 내 삶에서,
내 삶의 정점마다...
대학을 졸업할 때,
결혼을 했을 때,
아이를 낳았을 때나
두 번의 개인전을 열었을 때 등,
내 삶의 정점 마다 꼭 뭔가가 허전했는데
그 허전함의 실팍한 언저리에 쌓인 먼지를 툭툭 털고 닦아내 보면
거기엔 바로 형이 묻어 있었어요.
내 청년시절의 객기.
무모함 끝에 입은 상처투성이 내 영혼을 달래주고 이유 없이 방황하던 나에게 예술적 영감을 갖게 해주던,
자신의 상처는 접어두고 내 영혼을 자신의 아픔처럼 매만져 준 형이 스물 네 살의 형이...
처연히 서 있는 것이었어.
그래서 아무리 떼어내고 싶어도 영원히 떼어 낼 수 없는
부끄러운 기억으로 내 인생에 묻어있는 거예요.
그리고...
베아트리체 그녀.
< memory - 내가 무심했어...>
형! 세월 참 빠른 것 같아. 그죠?
79년 3월 초, 30 여년 전 일이네요.
형이 고등학교 졸업한 뒤 4년이나 일해 번 돈을 밑천으로 스물넷에 이르러서야 대학 입학한다고...
그래서 내가 축하해 준다며 꽃 사들고 경산 형네 학교에 갔잖아. 그때 겨우 나 혼자 왔더군.
하긴 뭐 다들 군대 가고... 몇몇은 학교 가고...
그 학교는 무슨 꽃샘추위에 입학식을 바깥에서 해? 순 허허벌판에 있는 학교가?
추워 가지고 혼났잖아. 입학식 끝나고서 75번 버스를 타고 대구시내로 들어와 대명동 미도극장 앞에서 내렸지.
생각나요? 한사대 후문 쪽에 있던 남영전당포 옆 합천식당에서 그 날 막걸리 엄청 마셨지.
그 때, 형이 베아트리체 얘기를 꺼냈어. 몇 년간 아무런 말도 않더니... 날 용서해 주려고...
그렇게 술의 힘을 빌어서? 그랬던 것 같아.
결국은 그 날, 둘 다 술에 맛이 가서 그 뒤쪽 원항여인숙에서 같이 잤던거 기억해?
사실 형이 그렇게 술이 센지 몰랐어.
그래.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형의 음주습관에 대해 제동을 걸었어야 했어. 막걸리 한두 잔으로 얘기를 꺼내기 힘들어서 그랬거니 했지. 내가 무심했어, 형.
그 다음 날 형은 학교로 가고 나는 시골로 내려오고... 며칠 뒤 4월 2일에 난 군에 입대했지.
그것이 우리들의 마지막이었군.
...
그래 형! 고등학교 때 말이지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사 모았어요. 순전히 형 때문이었어.
형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형네 형편에도 불구하고 형의 작은 다락방은 온 방이 책으로 가득했잖아요.
대단했지. 그냥 장식용으로 모아놓은 게 아니었어.
그래서 형은 그 많은 책들을 다 읽어서인지 고등학생이었지만 무슨 철학자 같았어.
거기다 머리까지 좋았다니... 우리 학교 통틀어 IQ도 제일 높았다고 했지.
그런 형이 보는 책은 뭘까? 난 형네 놀러갈 때마다 책들의 제목을 외우기 바빴지요. 형의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 펼쳐보면 어떤 책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거나 그 아래 여백에는 또, 자신의 소감을 꼼꼼히 메모한 것도 있었어.
그 당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작은 문고판이 유행이었는데 형은 큰 책이 있음에도 어떤 책은 그 문고판도 있었지. 그래서 어디 미술대회 가느라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면 형은 항상 교복 호주머니에서 그 문고판 책을 슬며시 꺼내 읽었잖아요. 멋스러웠지.
나도 책을 사 모았지요. 정말이지 그랬어요. 책뿐만 아니라 형을 쫓아 뭐든 형과 같은 것을 가지고 싶어 했다는 거
며칠 전에 고백했잖아요. 흉내를 내고 싶었지. 내가 모은 책이 한 800 여권, 책꽂이에도 모자라 내방 구석에 겹겹으로 쌓여 있었지요. 형을 쫓아 사다보니 점점 욕심이 나서 헌책방을 뒤져 닥치는 대로 사긴 했지만 어려워서 읽다가 만 것도 있고... 정독을 못하고 겉핥기를 했네요. 하지만 그 중 마음에 와 닿는 책은 형처럼 밑줄을 그어가며 읽은 것도 있어요.
그렇게... 형을 쫓아하다가 문학을 좋아하게 되었고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고픈 그런 꿈도 꾸기에 이르렀지.
그 얘기하니까 생각나네요. 고등학교 때 백일장에 나가서 몇 번 당선된 적도 있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형은 분명히 나보담 능력이 있었을 텐데 나서지를 않더군.
나는 내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포장을 하여 내보이는데 형은 그저 그런 나를 보며 빙그레 웃기만 했잖아.
형! 왜 그랬어?
나는 형과 문학적인 얘기를 주고받으려 했는데 형은 내게 그런 기회를 안 줬어.
백일장에서 입상했노라 자랑을 할라치면 형은 또 그런 나를 보며 빙그레 웃기만 하는 것이었어.
오히려 그래서 나는 늘 형 앞에서 괜히 주눅이 들곤 했던 거야, 알어?
글쎄, 형이 왜 그랬을까. 지금도 나는 이해가 안 되거든. 젠장.
그래 맞아. 나쁜 형이었어. 그렇게 일찍 가버릴 거였으면 날 좀 상대나 해줄 것이지.
글쎄... 내가 안으로 성숙하기를 기대했던 거였을까?
그래요. 형! 지금 영혼이라도 내려와서 이젠 내 얘기 좀 들어줬으면 좋겠어.
흠.
우선 탁구나 한 게임 하자고?
그러지 뭐 우리 잘 가던 남진탁구장에서?
5점 접어준다는 말은 하지 말고... 죽어도 내가 못 이길 거라고?
그래 붙어보자구... 먼저 가서 기다릴게.
< memory - 그 여름 밤... >
그래요, 형.
우리 고향은 강이 있어 좋지요.
낙동강 줄기가 동네를 크게 돌아 흐르잖아요.
그 여름. 해거름 내리는 태문동 둑길.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일거예요. 베아트리체를 읍내 문화원 앞에서 만났거든요.
내 자전거 뒤에 태워서 다리를 건너 둑길로 갔지요.
솔밭이 있는 현내리 쪽 보다는 비닐하우스가 즐비한 상포 쪽을 좋아했지요.
네, 맞아요. 형네 집과는 반대쪽이죠.
오히려 나는 상포 쪽 풍경이 좋더라고요. 건너편 종루산으로 해가 넘어갈 때의 풍경... 붉디붉은 해가 넘어갈 때... 그 저녁 어스름이 빚어내는 그 풍경... 격자무늬로 늘어선 비닐하우스 밭들과 복숭아밭들 그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 이 쪽 저 쪽 민가에 모깃불 연기 올라가는 풍경, 그 하늘가엔 잠자리들 떼 지어 떠다니고... 너무나 아름다웠잖아요?
...
그래요.
그런 여름날이었지요.
해거름 내린 뒤 어둠이 짙어지면서 우리는 자전거를 세우고 둑길 풀밭에 앉았지요.
아마도 달빛이 있었을 테지만, 이따금 사람들도 지나다니고 있었고 그래서 마음을 놓았지요.
나란히 앉으니 제법 서늘한 강바람이 불어오면서 그 결에는 낮의 땡볕에 데워진 풀 냄새도 스며오고...
그 정감이 참, 가슴을 알싸하게 만들었지요.
"형이나 너나 닮은 게 많아..."
"닮은 거... 어떤?"
달빛 스민 베아트리체 눈망울... 매혹적이었어요.
"그림 잘 그리고, 책도 많이 읽고..."
"그림은 형이 훨씬 더 잘 그리지 도저히 못 따라가지 내가..."
"성격도..."
"형은 차분하고... 난 덤벙거리지 뭐?"
훅, 강물에 목을 축인 바람... 그 안 베아트리체의 향기... 내 가슴으로 베여왔어요.
"형은 카리스마가 있지만 난..."
"형... 그늘진 웃음.."
"그늘진 웃음?"
"활짝 웃는 거 한 번도 못 봤거든?"
그늘진 웃음이라...
...
그랬어요.
어느덧 밤이 깊어지고 별빛이... 그 여름 밤 별빛이... 바로 우리들 머리 위에서 빛나던 별빛이...
그래요. 우리 고향 여름 밤 별은 늘 낮게 떠있지요. 그 여름 밤 별빛이... 그 별빛마저 가슴에 젖어드는데,
그 때 불쑥 내리는 그 별빛 가로막으며... 세 녀석이 둑 아래에서부터 나타났지요.
"짜식, 공부 안하고 연애질이냐?"
- 다음에 계속...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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