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년!
연희가 준호 이야기를 꺼냈을 때, 민숙이의 반응은 짧고 명쾌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연희는 극단적인 용감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했고
참고 견디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연희가 변론의 기회도 없이 즉결심판으로 총살당한 것 같은 기분에
우울한 반감이 생긴 건
준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안 직후로는
민숙이가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 하나를 정죄하는 일이 이렇게 간단해도 되는 거니?
-얘, 하고많던 남자들 다 싫다고 걷어차더니
이제 와서 유부남이랑 정분이 날지도 모른다는데 어떤 친구가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겠어?
연희는 더 이상 아무 말 안 하고 잠자코 있었다.
연희는 피로해 있었고 아무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을 깨닫고
지금은 이해시키기를 포기했으므로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날 밤 연희는 놓친 잠을 자려고 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연희는 깨어 일어나 책을 조금 읽다가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화는 다음에 봐야겠어요.
-아예 안 보겠다는 게 아니라 다행이에요.
하지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걱정이 돼요.
연희는 잠시 고민하다 사실을 말해주기로 했다.
-친구에게 준호씨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그래서 기분 나쁜가요?
그것은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서
판단을 두 사람에게 떠밀고 싶어 하는 비겁함이 묻어있는 고백이었다.
-고마운걸요.
-트러블이 좀 있었고.. 이 일로 피곤하네요.
3일 후에 이리로 온다는데 오게 되면 얼마간 머물거에요.
그래서 수업 스케줄 조정도 해야 하고. 당분간은 짬이 안 날 것 같아요.
준호는 민숙이가 자기를 꽤 싫어한다는 말에 별로 동요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설렘과 기대에 찬 어조로 함께 마중을 나가겠다고
어린아이와 같은 말투로 떼를 쓰는 것이었다.
준호는 상황에서 회피할 의향이 없어보였고 비정치적이었고 무해한 투정쟁이였다.
그런데 준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나쁜 뉴스를 통보하고 있는 사무적인 연희의 어조에
실은 절망스러움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짜릿한 공감은 준호를 사랑하고 싶은 기분에 빠지도록 만들었고,
무서울 정도로 단단하게 발기시켰다.
준호는 당장 연희를 안으며 설명해주고 싶었다.
(나는 지금 너와 섹스를 하고 있다. 나는 네 몸 속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이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다만 육체의 뒤섞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불완전한 육체를 맞댐으로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우린 다만 서로의 불완전함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지만 물론 그런 것들은 말로서 잘 설명할 수 없었다.
준호는 다만, 그렇게도 어리숙해 보이는 껍질 속에
탄력과 힘을 가지고 인생을 잡는 폭풍적 성격의 알맹이를 품고 있는 남자였다.
3일 후 민숙이를 태운 KTX는 저녁 7시 20분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연희는 다정하게, 그러나 따스함은 없고 초조의 빛을 보이면서 민숙이를 맞았다.
준호는 긴장 속에서 연희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세련된 연출이라고는 없는
촌티 나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민숙이에게 인사했다.
민숙이는 생면부지의 남자 앞에서 당장에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며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그 옆을 지나쳐버렸다.
준호가 식당을 예약했지만 민숙이가 술을 더 마시고 싶어 했기 때문에
세 사람은 종로의 자그마한 지하 bar로 갔다.
연희가 하이네켄 세 병과 과일안주를 주문하는 동안
준호는 두 여자를 테이블 건너편에 두고
마치 면접을 보러 온 수험생과 같은 정자세로 앉아있었다.
연희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로 여전히 준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민숙이의 거만함이 못마땅했다.
준호가 쑥스럽게 웃으며 어떻게라도 민숙이의 기분을 맞춰주려 이런저런 농담을 하는데
민숙이가 다짜고짜 준호를 향해 질문을 했다.
-연희 사랑해요?
준호가 착한 아이 같은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숙이는 담배 한 가치를 꺼내 입에 물더니 빈정거렸다.
-그렇다면 증명 해볼래요?
민숙이가 불을 당기자 준호가 재떨이를 민숙이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에 민숙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준호의 손목을 재빠르게 잡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 담뱃불을 당신 손등에 가져다 댈 건데,
사랑한다는 거 진심이면 피하지 말아요.
(이 무슨 기막힌 무례함인지!)
연희는 경악했다.
준호는 피하지 않았다.
그 짧고 깊은 참을성은 미리 각오했던 것처럼 고요하기까지 했다.
준호가 가만히 있자 민숙은 당황했지만 얼른 태연한척 담뱃불을 떼어내고
화풀이 하듯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껐다.
준호의 섬세한 손가락 다섯 개를 지탱하고 있는 손등이 상처를 입는 동안
연희는 그 장면이 현실로는 여겨지지 않았고 이상하고 섬뜩한 꿈처럼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민숙의 하잘 것 없는 일을 중대시하는 꼴에 참을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연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면서 반사적으로 일으켜 세워지더니
격렬한 어조로 퍼붓듯이 말했다.
-아! 내가 어리석은 짓을 한 것 같구나!
제 삼자가 개입할 수 없는 일을 너에게 말하는 것으로 모욕을 자초했으니...
함정에 빠져서 악의에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보여줄게 없어!
너는 저 사람이 달걀 위에서 춤을 추어도 믿지 않고 멸시하고 욕할 거잖니?
연희가 공포스러운 얼굴로 몹시 흥분해서 말했기 때문에 민숙은 깜짝 놀랐다.
연희는 준호에게 고통에 넘친 시선을 던졌다.
준호는 잠자코 있었으나 통증과 함께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준호의 손등에 난 상처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연희는 어지러웠다.
온 몸이 저려 오고 식은땀이 흘렀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연희는 가뿐 숨을 몰아 쉬며 균형을 유지하려고 소파의 팔걸이를 붙잡았다.
증상은 빠른 속도로 심해지면서 심장 쪽으로 집중되는 것 같았다.
연희는 비틀거리다가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곤 점점 의식이 희미해졌다.
연희가 깨어났을 때는 응급실 침대 위였다.
오른팔에는 닝거 바늘이 꽂혀 있었고
왼편 간이 의자에 민숙이가 앉아 있었는데 준호는 보이지 않았다.
연희가 의식이 돌아온 즉시로 몸을 일으켜 두리번거리자 그것이 준호를 찾는 것임을 알고
민숙이가 안쓰러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곧 돌아올 거야. 담배 피우러 나가는 것 같더라.
연희가 벌어진 상황에 무안해 하며 말했다.
-나 얼마나 기절해 있었던 거니?
-두 시간 다 돼 가.
-응급실 까지 올 일은 아니었는데.. 너도 알잖아 가끔 이러는 거.
-내가 무호흡 증후군 발병한거라고,
좀 쉬면 괜찮아질거라고 설명해줬지만 막무가내였어.
그 사람이 너 업고 뛰는데 무슨 수퍼맨 같더라. 여기까지 오는데 십분 밖에 안 걸렸어.
맨 몸으로 따라 뛰는 내가 더 힘들었다구.
그러면서 뮤지컬 배우가 무대에서 하는 것과 같이
과장된 제스추어와 함께 작은 소리로 그러나 소리치는 것처럼 말했다.
-아! 위대한 사랑이여!
빈정거리는 말투였지만 그 속엔
자기가 저지른 행동의 결과에 대한 무안함과 미안함이 섞여있었다.
준호가 돌아와 바늘이 꽂혀 있는 연희의 손을 깍지 끼어 다정하게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준호의 눈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연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숙이 엉망이 된 분위기를 쇄신해야 할 책임을 느끼고
일부러 생기를 불어넣어 가며 말했다.
-중학교 생물시간에 일회용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
자기의 혈액형 검사를 하는 실험을 했던 적이 있어요.
모두가 자기 손을 스스로 찌르거나 조를 이룬 친구의 손을 찔러주는 동안
연희는 겁에 질려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에요.
찌르지 못한 사람이 연희 한 명밖에 남지 않게 됐을 때,
보다 못한 선생님이 연희의 손가락을 찔렀는데, 기절해 버리더라구요.
세상에! 자기 피를 보고 기절한다면 믿겠어요?
나중에야 알았죠. 연희에게 심리적 무호흡 증후군이 있다는 걸.
준호는 굉장히 부드러운 피곤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준호가 여태까지 몰랐던 놀라운 긴장의 회복이고,
사지와 감각의 달콤한 해체와도 같은 피곤이었다.
가장 어두워지고 나서야 여명은 오는 것처럼
준호는 민숙이가 자기 편이 되어줄 것임을
민숙이의 부드럽게 표변하는 태도로 예감했다.
준호는 다짐했다.
연희가 나를 사랑하게 될 때 까지 오래라도 기다리며 황무지 돌밭을 갈아 일구겠다고.
진종일 연희를 가슴에 담아 넣고 둘의 가난을 남몰래 어루만지겠다고..
연희가 준호 이야기를 꺼냈을 때, 민숙이의 반응은 짧고 명쾌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연희는 극단적인 용감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했고
참고 견디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연희가 변론의 기회도 없이 즉결심판으로 총살당한 것 같은 기분에
우울한 반감이 생긴 건
준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안 직후로는
민숙이가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 하나를 정죄하는 일이 이렇게 간단해도 되는 거니?
-얘, 하고많던 남자들 다 싫다고 걷어차더니
이제 와서 유부남이랑 정분이 날지도 모른다는데 어떤 친구가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겠어?
연희는 더 이상 아무 말 안 하고 잠자코 있었다.
연희는 피로해 있었고 아무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을 깨닫고
지금은 이해시키기를 포기했으므로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날 밤 연희는 놓친 잠을 자려고 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연희는 깨어 일어나 책을 조금 읽다가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화는 다음에 봐야겠어요.
-아예 안 보겠다는 게 아니라 다행이에요.
하지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걱정이 돼요.
연희는 잠시 고민하다 사실을 말해주기로 했다.
-친구에게 준호씨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그래서 기분 나쁜가요?
그것은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서
판단을 두 사람에게 떠밀고 싶어 하는 비겁함이 묻어있는 고백이었다.
-고마운걸요.
-트러블이 좀 있었고.. 이 일로 피곤하네요.
3일 후에 이리로 온다는데 오게 되면 얼마간 머물거에요.
그래서 수업 스케줄 조정도 해야 하고. 당분간은 짬이 안 날 것 같아요.
준호는 민숙이가 자기를 꽤 싫어한다는 말에 별로 동요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설렘과 기대에 찬 어조로 함께 마중을 나가겠다고
어린아이와 같은 말투로 떼를 쓰는 것이었다.
준호는 상황에서 회피할 의향이 없어보였고 비정치적이었고 무해한 투정쟁이였다.
그런데 준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나쁜 뉴스를 통보하고 있는 사무적인 연희의 어조에
실은 절망스러움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짜릿한 공감은 준호를 사랑하고 싶은 기분에 빠지도록 만들었고,
무서울 정도로 단단하게 발기시켰다.
준호는 당장 연희를 안으며 설명해주고 싶었다.
(나는 지금 너와 섹스를 하고 있다. 나는 네 몸 속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이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다만 육체의 뒤섞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불완전한 육체를 맞댐으로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우린 다만 서로의 불완전함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지만 물론 그런 것들은 말로서 잘 설명할 수 없었다.
준호는 다만, 그렇게도 어리숙해 보이는 껍질 속에
탄력과 힘을 가지고 인생을 잡는 폭풍적 성격의 알맹이를 품고 있는 남자였다.
3일 후 민숙이를 태운 KTX는 저녁 7시 20분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연희는 다정하게, 그러나 따스함은 없고 초조의 빛을 보이면서 민숙이를 맞았다.
준호는 긴장 속에서 연희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세련된 연출이라고는 없는
촌티 나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민숙이에게 인사했다.
민숙이는 생면부지의 남자 앞에서 당장에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며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그 옆을 지나쳐버렸다.
준호가 식당을 예약했지만 민숙이가 술을 더 마시고 싶어 했기 때문에
세 사람은 종로의 자그마한 지하 bar로 갔다.
연희가 하이네켄 세 병과 과일안주를 주문하는 동안
준호는 두 여자를 테이블 건너편에 두고
마치 면접을 보러 온 수험생과 같은 정자세로 앉아있었다.
연희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로 여전히 준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민숙이의 거만함이 못마땅했다.
준호가 쑥스럽게 웃으며 어떻게라도 민숙이의 기분을 맞춰주려 이런저런 농담을 하는데
민숙이가 다짜고짜 준호를 향해 질문을 했다.
-연희 사랑해요?
준호가 착한 아이 같은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숙이는 담배 한 가치를 꺼내 입에 물더니 빈정거렸다.
-그렇다면 증명 해볼래요?
민숙이가 불을 당기자 준호가 재떨이를 민숙이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에 민숙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준호의 손목을 재빠르게 잡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 담뱃불을 당신 손등에 가져다 댈 건데,
사랑한다는 거 진심이면 피하지 말아요.
(이 무슨 기막힌 무례함인지!)
연희는 경악했다.
준호는 피하지 않았다.
그 짧고 깊은 참을성은 미리 각오했던 것처럼 고요하기까지 했다.
준호가 가만히 있자 민숙은 당황했지만 얼른 태연한척 담뱃불을 떼어내고
화풀이 하듯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껐다.
준호의 섬세한 손가락 다섯 개를 지탱하고 있는 손등이 상처를 입는 동안
연희는 그 장면이 현실로는 여겨지지 않았고 이상하고 섬뜩한 꿈처럼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민숙의 하잘 것 없는 일을 중대시하는 꼴에 참을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연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면서 반사적으로 일으켜 세워지더니
격렬한 어조로 퍼붓듯이 말했다.
-아! 내가 어리석은 짓을 한 것 같구나!
제 삼자가 개입할 수 없는 일을 너에게 말하는 것으로 모욕을 자초했으니...
함정에 빠져서 악의에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보여줄게 없어!
너는 저 사람이 달걀 위에서 춤을 추어도 믿지 않고 멸시하고 욕할 거잖니?
연희가 공포스러운 얼굴로 몹시 흥분해서 말했기 때문에 민숙은 깜짝 놀랐다.
연희는 준호에게 고통에 넘친 시선을 던졌다.
준호는 잠자코 있었으나 통증과 함께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준호의 손등에 난 상처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연희는 어지러웠다.
온 몸이 저려 오고 식은땀이 흘렀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연희는 가뿐 숨을 몰아 쉬며 균형을 유지하려고 소파의 팔걸이를 붙잡았다.
증상은 빠른 속도로 심해지면서 심장 쪽으로 집중되는 것 같았다.
연희는 비틀거리다가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곤 점점 의식이 희미해졌다.
연희가 깨어났을 때는 응급실 침대 위였다.
오른팔에는 닝거 바늘이 꽂혀 있었고
왼편 간이 의자에 민숙이가 앉아 있었는데 준호는 보이지 않았다.
연희가 의식이 돌아온 즉시로 몸을 일으켜 두리번거리자 그것이 준호를 찾는 것임을 알고
민숙이가 안쓰러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곧 돌아올 거야. 담배 피우러 나가는 것 같더라.
연희가 벌어진 상황에 무안해 하며 말했다.
-나 얼마나 기절해 있었던 거니?
-두 시간 다 돼 가.
-응급실 까지 올 일은 아니었는데.. 너도 알잖아 가끔 이러는 거.
-내가 무호흡 증후군 발병한거라고,
좀 쉬면 괜찮아질거라고 설명해줬지만 막무가내였어.
그 사람이 너 업고 뛰는데 무슨 수퍼맨 같더라. 여기까지 오는데 십분 밖에 안 걸렸어.
맨 몸으로 따라 뛰는 내가 더 힘들었다구.
그러면서 뮤지컬 배우가 무대에서 하는 것과 같이
과장된 제스추어와 함께 작은 소리로 그러나 소리치는 것처럼 말했다.
-아! 위대한 사랑이여!
빈정거리는 말투였지만 그 속엔
자기가 저지른 행동의 결과에 대한 무안함과 미안함이 섞여있었다.
준호가 돌아와 바늘이 꽂혀 있는 연희의 손을 깍지 끼어 다정하게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준호의 눈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연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숙이 엉망이 된 분위기를 쇄신해야 할 책임을 느끼고
일부러 생기를 불어넣어 가며 말했다.
-중학교 생물시간에 일회용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
자기의 혈액형 검사를 하는 실험을 했던 적이 있어요.
모두가 자기 손을 스스로 찌르거나 조를 이룬 친구의 손을 찔러주는 동안
연희는 겁에 질려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에요.
찌르지 못한 사람이 연희 한 명밖에 남지 않게 됐을 때,
보다 못한 선생님이 연희의 손가락을 찔렀는데, 기절해 버리더라구요.
세상에! 자기 피를 보고 기절한다면 믿겠어요?
나중에야 알았죠. 연희에게 심리적 무호흡 증후군이 있다는 걸.
준호는 굉장히 부드러운 피곤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준호가 여태까지 몰랐던 놀라운 긴장의 회복이고,
사지와 감각의 달콤한 해체와도 같은 피곤이었다.
가장 어두워지고 나서야 여명은 오는 것처럼
준호는 민숙이가 자기 편이 되어줄 것임을
민숙이의 부드럽게 표변하는 태도로 예감했다.
준호는 다짐했다.
연희가 나를 사랑하게 될 때 까지 오래라도 기다리며 황무지 돌밭을 갈아 일구겠다고.
진종일 연희를 가슴에 담아 넣고 둘의 가난을 남몰래 어루만지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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