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순>
하이네켄이 아니었다면 연희는 준호를 언제까지나 자기를 쫓아다니는 남자들 중 한 명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연희는 대학에 입학해 처음 가 본 웨스턴바에서 하이네켄을 알았다.
맥주의 맛을 구별하기는커녕 생맥주 500cc에도 취기가 오르던 시절,
단지 하이네켄의 초록색에 반해 그때부터 줄곧 하이네켄만 찾는 연희였다.
연희는 매사가 그러했다.
두루두루 경험하기 보다는 뭐 하나에 마음을 주면 오로지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
물건이든, 장소든, 사람이든..
연희가 하이네켄의 씁쓸한 뒷맛을 알아가기 시작했을 때 떠올린 건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의 나가사와 선배가 와타나베에게 한 말이었다.
-위대한 게츠비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은 나의 친구가 될 자격이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드와이저의 대중적인 맛이나 미켈럽의 유행을 좇아갈 때
연희는 갈색병에 담긴 수많은 종류의 맥주들 사이 초록색이 자기의 외로움과 닮아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거친 게츠비의 투쟁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연희는 줄곧 나가사와를 흉내내곤 했다.
-하이네켄의 씁쓸한 맛을 나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나의 친구가 될 자격이 있어
연희가 무생물일 뿐인 하이네켄에게 갖는 애정은 어쩌면 지나친 것인지도 모르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고 듣지 못하는 먼 곳의 소리를 듣게 되는 연희의 감수성은
그만큼 섬세하고 독창적인 것이어서 아무나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못 되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연희가 문학카페에서 하루에 한 편씩 꾸준히 글을 올릴 때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였고
그 중 한 사람이 준호라는 걸 연희는 익히 알고 있었다.
아주 가끔 멋쩍은 표정이 연상되는 댓글을 달기도 했지만
쪽지를 보내오기 시작한 건 3개월쯤 되었고 연희는 여느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준호에게 역시 냉담했다.
그런데 준호가 하이네켄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연희는 이것을 일종의 암호의 해독으로 받아들였다.
사랑받는 것 보다 이해받는 것에 늘 목말라 있던 연희는
어쩌면 이 사람과는 이해를 초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희망을 가져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7월 중순 한낮의 열기가 식은 번화가의 밤 9시는 걷기에 쾌적한 온도와 활기를 입고 있었다.
약속시간에 20분이나 미리 도착한 준호는 초조한 마음으로 시계와 주변을 번갈아 가며 살폈다.
사거리 대형서점의 모퉁이를 돌아 하늘색 스커트에 흰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또박또박 걸어온다.
미조조차 머금은 채로...
연희가 모습을 드러낸 모퉁이에서 준호가 서 있는 곳 까지는 불과 20미터도 안 되는 짧은 거리였지만
연희가 다가와 말을 걸기 까지 준호에게 든 생각은 물리적 시간개념을 위배하는 보다 복잡하고 깊은 방황이었다.
- 아.. 나는 이 여자를 쉽게 놓을 수 없겠구나.
평생에 거쳐 자라게 될 식물의 새순이 막 돋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실례지만 준호씨인가요?
-네 제가 서준호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가능한 조용한 곳이면 좋겠는데... 대화에 집중할 수 있게요...
마침 근처에 적당한 곳이 있었다.
비교적 푹신한 소파에 너무 폐쇄적이지 않은 칸막이로 테이블이 분리가 되어 있는
모던한 분위기의 카페 2층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먼저 말을 꺼낸 건 연희였다.
-준호씨 목소리가 참 좋아요.
-다행이네요. 세련된 연희씨에 비해 전 너무 평범해서 실망만 안겨드리면 어쩌나 했는데...
-보조개도 있네요. 그것도 왼쪽에만... 그런 보조개를 가진 사람은 바람둥이라고 하던데...
연희는 그렇게 말하곤 준호의 얼굴을 더 자세히 봐야겠다는 듯 테이블 위에 턱을 고이며 생긋 웃었다.
준호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엄연히 유부남인 자기가 아가씨를 좋아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곤
금새 다시 우울해졌다.
-거짓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네. 전 유부남이 맞습니다.
연희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조금의 침묵이 흐른 뒤 퉁명스럽고 단호한 말투로 연희가 내뱉듯 말했다.
-섹스 잘 하세요?
허리하학만 밝히는 남자를 경멸할 것 같이 고상해 보이는 여자가 할 말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느닷없고 황당하기 까지 한 질문에 준호는 지체하지 않고 놀란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거라면 제일 자신 없는데요... 하지만 뭐 섹스 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으니까.. 뭘 원하세요?
-이미 가정이 있는 분에게 바랄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친구라면 몰라도..
-저는 연희씨랑 친구하기 싫은데요... 섹스를 좋아하시나요?
-섹스 못하는 남자를 싫어하죠.
연희는 준호의 고백에 맥이 빠진 느낌으로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연희가 그런 질문을 한 건 정말 그것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반응을 살피고 싶은 데에서 기인한 다분히 심리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예상을 빗나간 대답에 연희는 속으로 놀라면서 준호가 어떤 남자인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유부남임에도 불구하고 라는 명제와 함께 하는 강한 호기심이었다.
만일 섹스라면 자신 있다거나 최선을 다하겠다는 식의 대답이었다면
연희는 정색을 하며 자리에서 당장 일어나 나가버렸을 것이다.
즉흥적인 도발이었지만 연희는 자신의 영리한 순발력에 감탄을 하면서
순식간에 생겨버린 준호에 대한 호감에 퀘스천 마크를 던졌다.
연희와 준호의 만남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건너 평지에 이르렀다.
그것이 더 위험한 곡예를 앞 둔 잠깐의 쉬는 시간임을 둘 다 알지 못한 채...
연희는 점점 발랄해졌고 그만큼 말도 많아졌는데 그것은 경청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준호의 기실 덕분이었다.
준호는 연희의 그런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요?
-자신의 외모 중 어디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글쎄요. 마음에 드는 곳 보다는 안 드는 곳을 말하는 편이 더 쉽겠어요.
저는 제 손가락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요. 좀 더 섬세하게 생겼으면 좋으련만...
-충분히 예쁜 분이 욕심이 지나치시네요. 제 생각에는 눈동자에요.
-네?
-까만 눈동자요.
-눈매도 아니고 눈동자라니 재미있네요. 저는 제 눈동자가 까만색인 줄 모르고 있었는데 정말 그런가요?
연희의 까만 눈동자 속 발광채가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하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네 연희씨처럼 새까맣고 큰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처음 봐요.
그때 종업원이 올라와 폐점시간임을 알렸다.
시계는 벌써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빈 병이 되어 줄지어 선 초록색 하이네켄 여덟 개가 나쁘지 않았던 시간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연희와 준호는 헤어지기엔 뭔가 아직 아쉬웠다.
자리를 옮겨 심야카페로 갔고 거기서도 대화는 맛있게 무르익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심야카페 마저도 폐점할 새벽 4시가 되어서도 준호는 연희를 보내기 싫었다.
-좀 걸을까요. 산책이라 생각하고 잠깐만..
-음.. 나쁘지 않아요...
처음 만난 남자와 그것도 유부남과 이래도 되는 걸까 생각했지만 연희는 준호와 이야기하는게 좋았다.
번화가였지만 광장 가운데 작은 녹지로 조성되어 있는 공원이 있었다.
벤치에 앉았을 때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이마를 씻었다.
연희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히며 심호흡을 했다.
준호는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큼 매력적인 여자가 어제 까지는 자기를 시시한 남자취급 하며 냉랭하게 굴다가
지금은 이렇게 상냥한 모습으로 밤이 새도록 함께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준호가 오른 손을 들어 연희의 왼 볼에 손등을 살며시 갖다 댔다.
연희는 놀라고 당황했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준호의 손길이 왼 볼을 거쳐 관자놀이와 이마, 콧등에 이르기 까지
연희는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준호의 행동은 익숙하고 뻔뻔한 무엇이었다.
마치 오래된 연인에게 하듯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그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오렌지 껍질을 씹은 듯한 신선한 충격이었다.
준호의 엄지 끝이 연희의 윗입술에 닿았을 때
연희는 준호의 따뜻한 체온에 온 몸이 더워지는 듯 전율하며 주먹을 꼭 쥐었다.
준호는 어른아이처럼 순수하고 순진하게 말하고 행동할 뿐이었고
연희는 루비콘 강 앞에 서 있는 자기를 타인의 눈으로 바라보며
설레이는 시름으로 강 건너편 먼 데로 배 띄울 채비를 하는 사람의 심정으로 고요히 잦아들고 있었다.
하이네켄이 아니었다면 연희는 준호를 언제까지나 자기를 쫓아다니는 남자들 중 한 명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연희는 대학에 입학해 처음 가 본 웨스턴바에서 하이네켄을 알았다.
맥주의 맛을 구별하기는커녕 생맥주 500cc에도 취기가 오르던 시절,
단지 하이네켄의 초록색에 반해 그때부터 줄곧 하이네켄만 찾는 연희였다.
연희는 매사가 그러했다.
두루두루 경험하기 보다는 뭐 하나에 마음을 주면 오로지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
물건이든, 장소든, 사람이든..
연희가 하이네켄의 씁쓸한 뒷맛을 알아가기 시작했을 때 떠올린 건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의 나가사와 선배가 와타나베에게 한 말이었다.
-위대한 게츠비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은 나의 친구가 될 자격이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드와이저의 대중적인 맛이나 미켈럽의 유행을 좇아갈 때
연희는 갈색병에 담긴 수많은 종류의 맥주들 사이 초록색이 자기의 외로움과 닮아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거친 게츠비의 투쟁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연희는 줄곧 나가사와를 흉내내곤 했다.
-하이네켄의 씁쓸한 맛을 나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나의 친구가 될 자격이 있어
연희가 무생물일 뿐인 하이네켄에게 갖는 애정은 어쩌면 지나친 것인지도 모르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고 듣지 못하는 먼 곳의 소리를 듣게 되는 연희의 감수성은
그만큼 섬세하고 독창적인 것이어서 아무나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못 되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연희가 문학카페에서 하루에 한 편씩 꾸준히 글을 올릴 때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였고
그 중 한 사람이 준호라는 걸 연희는 익히 알고 있었다.
아주 가끔 멋쩍은 표정이 연상되는 댓글을 달기도 했지만
쪽지를 보내오기 시작한 건 3개월쯤 되었고 연희는 여느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준호에게 역시 냉담했다.
그런데 준호가 하이네켄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연희는 이것을 일종의 암호의 해독으로 받아들였다.
사랑받는 것 보다 이해받는 것에 늘 목말라 있던 연희는
어쩌면 이 사람과는 이해를 초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희망을 가져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7월 중순 한낮의 열기가 식은 번화가의 밤 9시는 걷기에 쾌적한 온도와 활기를 입고 있었다.
약속시간에 20분이나 미리 도착한 준호는 초조한 마음으로 시계와 주변을 번갈아 가며 살폈다.
사거리 대형서점의 모퉁이를 돌아 하늘색 스커트에 흰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또박또박 걸어온다.
미조조차 머금은 채로...
연희가 모습을 드러낸 모퉁이에서 준호가 서 있는 곳 까지는 불과 20미터도 안 되는 짧은 거리였지만
연희가 다가와 말을 걸기 까지 준호에게 든 생각은 물리적 시간개념을 위배하는 보다 복잡하고 깊은 방황이었다.
- 아.. 나는 이 여자를 쉽게 놓을 수 없겠구나.
평생에 거쳐 자라게 될 식물의 새순이 막 돋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실례지만 준호씨인가요?
-네 제가 서준호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가능한 조용한 곳이면 좋겠는데... 대화에 집중할 수 있게요...
마침 근처에 적당한 곳이 있었다.
비교적 푹신한 소파에 너무 폐쇄적이지 않은 칸막이로 테이블이 분리가 되어 있는
모던한 분위기의 카페 2층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먼저 말을 꺼낸 건 연희였다.
-준호씨 목소리가 참 좋아요.
-다행이네요. 세련된 연희씨에 비해 전 너무 평범해서 실망만 안겨드리면 어쩌나 했는데...
-보조개도 있네요. 그것도 왼쪽에만... 그런 보조개를 가진 사람은 바람둥이라고 하던데...
연희는 그렇게 말하곤 준호의 얼굴을 더 자세히 봐야겠다는 듯 테이블 위에 턱을 고이며 생긋 웃었다.
준호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엄연히 유부남인 자기가 아가씨를 좋아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곤
금새 다시 우울해졌다.
-거짓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네. 전 유부남이 맞습니다.
연희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조금의 침묵이 흐른 뒤 퉁명스럽고 단호한 말투로 연희가 내뱉듯 말했다.
-섹스 잘 하세요?
허리하학만 밝히는 남자를 경멸할 것 같이 고상해 보이는 여자가 할 말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느닷없고 황당하기 까지 한 질문에 준호는 지체하지 않고 놀란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거라면 제일 자신 없는데요... 하지만 뭐 섹스 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으니까.. 뭘 원하세요?
-이미 가정이 있는 분에게 바랄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친구라면 몰라도..
-저는 연희씨랑 친구하기 싫은데요... 섹스를 좋아하시나요?
-섹스 못하는 남자를 싫어하죠.
연희는 준호의 고백에 맥이 빠진 느낌으로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연희가 그런 질문을 한 건 정말 그것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반응을 살피고 싶은 데에서 기인한 다분히 심리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예상을 빗나간 대답에 연희는 속으로 놀라면서 준호가 어떤 남자인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유부남임에도 불구하고 라는 명제와 함께 하는 강한 호기심이었다.
만일 섹스라면 자신 있다거나 최선을 다하겠다는 식의 대답이었다면
연희는 정색을 하며 자리에서 당장 일어나 나가버렸을 것이다.
즉흥적인 도발이었지만 연희는 자신의 영리한 순발력에 감탄을 하면서
순식간에 생겨버린 준호에 대한 호감에 퀘스천 마크를 던졌다.
연희와 준호의 만남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건너 평지에 이르렀다.
그것이 더 위험한 곡예를 앞 둔 잠깐의 쉬는 시간임을 둘 다 알지 못한 채...
연희는 점점 발랄해졌고 그만큼 말도 많아졌는데 그것은 경청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준호의 기실 덕분이었다.
준호는 연희의 그런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요?
-자신의 외모 중 어디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글쎄요. 마음에 드는 곳 보다는 안 드는 곳을 말하는 편이 더 쉽겠어요.
저는 제 손가락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요. 좀 더 섬세하게 생겼으면 좋으련만...
-충분히 예쁜 분이 욕심이 지나치시네요. 제 생각에는 눈동자에요.
-네?
-까만 눈동자요.
-눈매도 아니고 눈동자라니 재미있네요. 저는 제 눈동자가 까만색인 줄 모르고 있었는데 정말 그런가요?
연희의 까만 눈동자 속 발광채가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하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네 연희씨처럼 새까맣고 큰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처음 봐요.
그때 종업원이 올라와 폐점시간임을 알렸다.
시계는 벌써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빈 병이 되어 줄지어 선 초록색 하이네켄 여덟 개가 나쁘지 않았던 시간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연희와 준호는 헤어지기엔 뭔가 아직 아쉬웠다.
자리를 옮겨 심야카페로 갔고 거기서도 대화는 맛있게 무르익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심야카페 마저도 폐점할 새벽 4시가 되어서도 준호는 연희를 보내기 싫었다.
-좀 걸을까요. 산책이라 생각하고 잠깐만..
-음.. 나쁘지 않아요...
처음 만난 남자와 그것도 유부남과 이래도 되는 걸까 생각했지만 연희는 준호와 이야기하는게 좋았다.
번화가였지만 광장 가운데 작은 녹지로 조성되어 있는 공원이 있었다.
벤치에 앉았을 때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이마를 씻었다.
연희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히며 심호흡을 했다.
준호는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큼 매력적인 여자가 어제 까지는 자기를 시시한 남자취급 하며 냉랭하게 굴다가
지금은 이렇게 상냥한 모습으로 밤이 새도록 함께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준호가 오른 손을 들어 연희의 왼 볼에 손등을 살며시 갖다 댔다.
연희는 놀라고 당황했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준호의 손길이 왼 볼을 거쳐 관자놀이와 이마, 콧등에 이르기 까지
연희는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준호의 행동은 익숙하고 뻔뻔한 무엇이었다.
마치 오래된 연인에게 하듯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그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오렌지 껍질을 씹은 듯한 신선한 충격이었다.
준호의 엄지 끝이 연희의 윗입술에 닿았을 때
연희는 준호의 따뜻한 체온에 온 몸이 더워지는 듯 전율하며 주먹을 꼭 쥐었다.
준호는 어른아이처럼 순수하고 순진하게 말하고 행동할 뿐이었고
연희는 루비콘 강 앞에 서 있는 자기를 타인의 눈으로 바라보며
설레이는 시름으로 강 건너편 먼 데로 배 띄울 채비를 하는 사람의 심정으로 고요히 잦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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