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다가왔고 가을은 깊어졌다.
축축한 회색 베일이 도시에 덮였다.
도로에 괴인 흐린 물속에 누런 꽃잎이 떠 있었고
거리는 잿빛 속에서 검은 금속처럼 빛나고 있었다.
연희는 카페창가에 앉아 가을의 회색빛깔에 마취된 것 같은 상태 속에서
상념에 젖어 있었다.
풍경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열리고 검정색 바바리코트를 입은 남자가 두리번거렸다.
연희가 지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래 기다렸니?
지훈이 환한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나도 조금 전에 왔어.
그런데 우리 사이에 이런 비스니스적인 절차는 생략해도 되지 않을까?
연희가 지훈의 손을 잡으며 악의 없는 핀잔을 했다.
-습관이 돼서 말이야.
-점심해야지?
-아니 그럴 시간은 안 될 것 같고 차나 한 잔 마시자.
30분 후에 대전으로 출발해야 해서.
-일 때문에?
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을 불렀다.
-나는 아메리카노. 너는?
-같은 걸로.
주문이 끝나자 지훈은 비로소 앞에 앉은 사람에게 집중할 순간이 온 것처럼
연희를 지극히 응시했다.
지훈은 늘 이런 식이었다.
항상 바빴고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판단했으며 정확한 사람이었다.
만남을 제의하는 쪽은 언제나 지훈이었지만
대전에서 서울 까지 쏜살같이 달려와 오래 시간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연희는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서 쓰는 것 같은 지훈을 대단하다 생각하면서도
이러한 지훈의 질서정연함에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동안 얼마나 공사다망 했길래 전화 한번 없었던 거야 여전사?
-여전사라는 말 좀 안 할 수 없니?
연희가 뾰로통해져서 대꾸했다.
-네가 나더러 일중독자란 말을 안 하겠다고 약속한다면 고려해보지.
지훈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끼니는 제때에 챙겨가며 일하는거니? 잠은 잘 자구?
안그래도 샤프한 애가 더 샤프해 진 것 같아.
-우리가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기여는 불면증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걸.
사실이 그랬다.
지훈은 대학 동창이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모범적인 인간형이었다.
명석한 두뇌와 폭넓게 아우르는 인간관계는 일찍부터 지훈을 성공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지훈은 겸손했고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바르고 친절했으며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지훈은 적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지훈의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고민이나 문제를 지훈에게 털어놓고 상담받길 좋아했다.
학창시절 연희와 지훈은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졸업 후 학원경영의 경험이 있던 지훈에게 연희가 도움을 구하면서부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연희는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지훈에게 종종 전화를 걸었고
두 사람의 수다는 새벽 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연희와 지훈에게는 교집합이 많았고 곧 잘 통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심지어 스스럼 없이 누군가의 흉을 보며
이것은 폭로의 위험이 절대적으로 없는 미수의 미학적 뒷담화라며 농담을 할 정도로
두 사람은 돈독해졌다.
-남자친구 생겼니?
지훈이 대뜸 화제를 바꾸며 이렇게 묻자
연희는 도둑질 하다 들킨 사람처럼 흠칫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 보이니?
연희는 본능적으로 머그잔을 입으로 가져다 대고 표정을 감추며 말했다.
-아니라면 네가 몇 달 동안 나를 모른 척 할 리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
지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에는 쓸쓸함이 베어 있었다.
지훈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덧붙여 물었다.
-어떤 사람이니?
-좋은 사람.
연희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겨우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연희는 더 이상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훈도 더는 묻지 않기로 작정했고 연희는 그것이 고마웠다.
정해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그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몹시 흐믓한 시간이었다.
연희는 아쉬운 마음으로 지훈을 배웅했다.
지훈은 연희의 슬픔이나 외로움을 자주 신속하게 구제하고
홀연히 떠나버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남자였지만
오늘 만은 돌아서는 뒷모습에 평소와는 다른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연희가 카페에서 막 일어서기 전에 핸드폰을 보는데 준호의 문자가 있었다.
-수업에 방해가 안 된다면 잠깐 얼굴 보여줘요.
연희씨 아파트로 가고 있어요. 멋대로 굴어서 미안해요.
연희는 준호의 메시지 속에서 뭔가 불길하고 석연찮은 기운을 기민하게 감지했다.
시계를 보니 다음 수업 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연희는 준호에게 카페의 위치를 알려주고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20분도 안 되어 준호가 검게 굳어진 얼굴로 연희 앞에 앉았다.
준호는 문자를 보낸 뒤 답장도 기다리지 않고 출발했던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연희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준호는 대답 없이 더욱 참담한 얼굴이 되었다.
-왜 그래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얼굴이...
연희가 다시 다급하게 물었다.
-형이.. 정수 형이..
준호는 겨우 이렇게 말을 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이를 악 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심각한 일이었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형인데...
-.......
-연희씨와 헤어지라고...
-.......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럴 만도 했다.
연희를 만나기 시작한 이후 준호의 생활패턴은
정수가 보기에 너무도 위태로워 보였던 것이다.
준호는 연희의 스케줄에 맞추어 자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연희를 만나러 나갔고 나가서는 새벽에 돌아오기 일쑤였다.
졸업반이라 수업이 느슨하다곤 해도 얼마 있으면 의사실기 시험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동기생들은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연희를 만나고 돌아온 학교에서의 준호는
언제나 방전된 상태로 시체처럼 침대에 쓰러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면
다시 연희에게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이런 것들은 그동안 정수가 보아 온 준호의 건조한 연애방식에 완전히 위배되는 일이었고
한 남자를 홀려서 단숨에 딴 사람으로 뒤바꿔버린 연희라는 존재가
정수에게는 곱게 생각 될 리 없었다.
정수는 오래 숙고한 끝에 급기야 엄격한 재판관처럼 준호에게 충고했고
그 어떤 해명도 준호에게서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준호는 연희의 손을 덥석 낚아채더니 끌고 가다시피 급하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연희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
강압적으로 연희를 자기의 차에 태웠다.
연희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웠지만
그 두려움은 준호가 받은 상처를 염려하는 것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연희는 잠자코 준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싶었다.
준호는 몇 블록 정도의 거리를 느린 속도로 달리며 무언가를 찾아 두리번거리더니
선택의 여지없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모델 주차장으로 망설이지 않고 들어갔다.
그곳은 꽤 낙후한 오래된 모텔이었다.
서너 평 밖에 안 되는 좁은 룸은 구식 침대와 화장대가 가구의 전부였다.
화장대 위에는 싸구려 비품들이 조잡스럽게 나열되어 있었고
알루미늄 틀로 만들어진 작은 창문에는 짙은 자주색 커튼이 쳐 있었다.
준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연희를 침대 위에 쓰러뜨렸다.
연희는 준호의 체중을 고스란히 실은 몸으로 답답하게 겨우 숨쉬며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준호를 올려다보았다.
준호도 핏발이 선 눈으로 부르르 떨며 연희를 응시했다.
그리고 정수에 대한 분노를 담아 되 뇌였다.
(나는 사랑을 이해할 수 있기에는 너무나 사랑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내가 고통과 비애와 불쾌와 질투와 기타의 이미 초극한 것으로 생각했던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나는 소름끼치는 매혹을 느끼면서 연희가 나의 운명임을 다시 확신한다.
나는 연희를 축복하고 동시에 저주한다)
드리워진 커튼의 살짝 벌어진 틈새로 한 낮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것은 좁고 어두운 방을 조명하는 전부였다.
그 한 줄기의 햇살 속에서 연희 가슴이 씰룩거리며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다.
준호가 그곳에 얼굴을 파묻고 몸서리를 쳤다.
연희는 두 손으로 준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준호가 연희의 옷을 급하고 서투르게 파헤쳤다.
연희는 준호를 진정시키고 스스로 잠잠히 옷을 벗었다.
가난한 준호의 마음이 연희의 마음 안으로 들어갔다.
여린 연희의 육체 안에서 준호의 육체가 신음하고 비명 지르며 몸부림쳤다.
연희는 감미롭게 고통스러웠다.
준호의 얼굴에서 굵은 땀방울이 쉴 새 없이 연희의 얼굴로, 목으로, 가슴으로 떨어졌다.
두 사람이 결합되었을 때 분노는 파괴되었다.
그것은 약간의 삐그덕거리는 일촉즉발의 평화와도 같은 것이었다.
연희는 오후 수업을 모두 주말로 미루고 준호와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준호는 연희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준호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싶은 연희의 깊은 집중은
마치 이제는 순서가 온 것처럼 자기 이야기를 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준호씨에게서 평생 잊지 못할 소리를 들었어요.
그것은 내가 사랑받는데 서툰 여자란 말 이였어요.
나는 가장 사랑받기 원한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았어요.
엄마는 나를 좋아하지 않아요.
엄마에게 나는 말 안 듣는 못된 계집아이였고 그래서 난 벌을 자주 받았어요.
어느 겨울 날 내가 몹시 반항했을 때,
엄마는 나를 냉골의 방에 가두고 반성할 때 까지 꺼내주지 않았어요.
나는 오랜 시간을 추위에 떨며 누워서
앉은뱅이 나무 책상의 바닥에 연필깍이 칼로 글자를 새겨넣었어요.
(이다음에 자라서 복수할거야!) 라고..
그때 나는 고작 열 두 살이었어요.
나는 내가 어쩌면 원치 않는 상황에서 할 수 없이 키우게 된
다리 밑에서 주워온 거지아이일지 모른다는 상상을 자주 했어요.
차라리 정말 그랬다면 나는 덜 불행했을 텐데....
연희는 여기 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 떨리는 숨소리가 얼마나 절망적으로 들렸는지 준호의 가슴은 에는 것 같이 아팠다.
-나를 불행 속에서 유일하게 위로해 준 것은 문학이었어요.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왠만한 고전을 모조리 읽어치웠어요.
그리고 고등학교 부터는 철학에 심취했죠.
내가 라스니꼴리니코프나 뫼르소나 히드클리프 혹은 버지니아 울프의
삭막한 열정을 사모하게 된 것은 나의 불행한 시절과 무관하지 않을 거에요.
엄마는 내가 대학에 가는 걸 원치 않았어요.
가난하기 때문에 동생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고 자랐지만
나는 끝내 거부했어요.
나는 고모를 찾아가 무릎 끓고 빌면서 도와달라고 애원했어요.
다행히 고모가 등록금을 주었고 이후론 장학금이나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해결했어요.
이런 나의 불순종에 엄마는 치를 떨었죠.
엄마와 나는 결코 좁혀질 수 없는 평행선과 같은 사이가 되었어요.
지금까지도...
나는 그래서 사랑에 관해 절망적인 불신을 가지고 있었어요.
내가 준호씨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연 건 준호씨의 결핍을 듣게 됐을 때였어요.
나는 완전해 보이는 인간들로 부터는 도무지 어떤 애정도 느낄 수가 없어요.
그런 사람들은 내가 건너갈 수 없는, 하나의 전혀 다른 세계와 같아요.
나는 외부로부터의 입구가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었나봐요.
내가 만일 누군가 나의 세계에 들어올 것을 허락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준호씨 일거에요.
결핍은 결핍으로 치료되어 진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사랑받는데 서툰 여자가 맞지만
준호씨에게 사랑받는 것이 좋아요.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준호는 감히 연희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준호는 연희가 울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희는 울지 않았다.
창백한 어두운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을 뿐이었다.
준호는 무어라고 말을 하지 못하고 연희를 끌어안은 채 잠자코 있었다.
연희를 안고 있으면서 준호는 그동안 연희의 속에 뭔가 잘 어울리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이물과도 같은 의문들이 녹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연희가 준호의 품을 빠져 나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감동하게 말했다.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연희는 준호로부터 등을 돌리고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연희씨를 이렇게 누추한 곳으로 데리고 와서 미안해요.
연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배고프지 않아요?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 먹을까요?
준호가 또 말했지만
연희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창밖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준호는 연희가 울음을 참고 있음을 알았다.
준호는 연희를 돌려세워 자기의 무릎 위에 앉혔다.
연희는 가만히 준호가 하는 대로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울음을 터트렸다.
연희는 오래오래 울었다.
그러나 갑자기 울음을 그치더니 마치 어린애처럼 손잔등으로 눈물을 닦고
수줍은 듯이 웃었다.
-이렇게 바보 같은 꼴을 보이다니. 여기 앉아서 통곡을 하다니..
연희가 이렇게 말하자
-행복해요.
라고 준호는 대답했다.
-연희씨가 내 앞에서 운다는 것이....
축축한 회색 베일이 도시에 덮였다.
도로에 괴인 흐린 물속에 누런 꽃잎이 떠 있었고
거리는 잿빛 속에서 검은 금속처럼 빛나고 있었다.
연희는 카페창가에 앉아 가을의 회색빛깔에 마취된 것 같은 상태 속에서
상념에 젖어 있었다.
풍경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열리고 검정색 바바리코트를 입은 남자가 두리번거렸다.
연희가 지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래 기다렸니?
지훈이 환한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나도 조금 전에 왔어.
그런데 우리 사이에 이런 비스니스적인 절차는 생략해도 되지 않을까?
연희가 지훈의 손을 잡으며 악의 없는 핀잔을 했다.
-습관이 돼서 말이야.
-점심해야지?
-아니 그럴 시간은 안 될 것 같고 차나 한 잔 마시자.
30분 후에 대전으로 출발해야 해서.
-일 때문에?
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을 불렀다.
-나는 아메리카노. 너는?
-같은 걸로.
주문이 끝나자 지훈은 비로소 앞에 앉은 사람에게 집중할 순간이 온 것처럼
연희를 지극히 응시했다.
지훈은 늘 이런 식이었다.
항상 바빴고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판단했으며 정확한 사람이었다.
만남을 제의하는 쪽은 언제나 지훈이었지만
대전에서 서울 까지 쏜살같이 달려와 오래 시간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연희는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서 쓰는 것 같은 지훈을 대단하다 생각하면서도
이러한 지훈의 질서정연함에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동안 얼마나 공사다망 했길래 전화 한번 없었던 거야 여전사?
-여전사라는 말 좀 안 할 수 없니?
연희가 뾰로통해져서 대꾸했다.
-네가 나더러 일중독자란 말을 안 하겠다고 약속한다면 고려해보지.
지훈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끼니는 제때에 챙겨가며 일하는거니? 잠은 잘 자구?
안그래도 샤프한 애가 더 샤프해 진 것 같아.
-우리가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기여는 불면증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걸.
사실이 그랬다.
지훈은 대학 동창이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모범적인 인간형이었다.
명석한 두뇌와 폭넓게 아우르는 인간관계는 일찍부터 지훈을 성공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지훈은 겸손했고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바르고 친절했으며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지훈은 적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지훈의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고민이나 문제를 지훈에게 털어놓고 상담받길 좋아했다.
학창시절 연희와 지훈은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졸업 후 학원경영의 경험이 있던 지훈에게 연희가 도움을 구하면서부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연희는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지훈에게 종종 전화를 걸었고
두 사람의 수다는 새벽 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연희와 지훈에게는 교집합이 많았고 곧 잘 통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심지어 스스럼 없이 누군가의 흉을 보며
이것은 폭로의 위험이 절대적으로 없는 미수의 미학적 뒷담화라며 농담을 할 정도로
두 사람은 돈독해졌다.
-남자친구 생겼니?
지훈이 대뜸 화제를 바꾸며 이렇게 묻자
연희는 도둑질 하다 들킨 사람처럼 흠칫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 보이니?
연희는 본능적으로 머그잔을 입으로 가져다 대고 표정을 감추며 말했다.
-아니라면 네가 몇 달 동안 나를 모른 척 할 리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
지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에는 쓸쓸함이 베어 있었다.
지훈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덧붙여 물었다.
-어떤 사람이니?
-좋은 사람.
연희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겨우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연희는 더 이상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훈도 더는 묻지 않기로 작정했고 연희는 그것이 고마웠다.
정해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그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몹시 흐믓한 시간이었다.
연희는 아쉬운 마음으로 지훈을 배웅했다.
지훈은 연희의 슬픔이나 외로움을 자주 신속하게 구제하고
홀연히 떠나버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남자였지만
오늘 만은 돌아서는 뒷모습에 평소와는 다른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연희가 카페에서 막 일어서기 전에 핸드폰을 보는데 준호의 문자가 있었다.
-수업에 방해가 안 된다면 잠깐 얼굴 보여줘요.
연희씨 아파트로 가고 있어요. 멋대로 굴어서 미안해요.
연희는 준호의 메시지 속에서 뭔가 불길하고 석연찮은 기운을 기민하게 감지했다.
시계를 보니 다음 수업 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연희는 준호에게 카페의 위치를 알려주고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20분도 안 되어 준호가 검게 굳어진 얼굴로 연희 앞에 앉았다.
준호는 문자를 보낸 뒤 답장도 기다리지 않고 출발했던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연희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준호는 대답 없이 더욱 참담한 얼굴이 되었다.
-왜 그래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얼굴이...
연희가 다시 다급하게 물었다.
-형이.. 정수 형이..
준호는 겨우 이렇게 말을 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이를 악 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심각한 일이었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형인데...
-.......
-연희씨와 헤어지라고...
-.......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럴 만도 했다.
연희를 만나기 시작한 이후 준호의 생활패턴은
정수가 보기에 너무도 위태로워 보였던 것이다.
준호는 연희의 스케줄에 맞추어 자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연희를 만나러 나갔고 나가서는 새벽에 돌아오기 일쑤였다.
졸업반이라 수업이 느슨하다곤 해도 얼마 있으면 의사실기 시험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동기생들은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연희를 만나고 돌아온 학교에서의 준호는
언제나 방전된 상태로 시체처럼 침대에 쓰러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면
다시 연희에게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이런 것들은 그동안 정수가 보아 온 준호의 건조한 연애방식에 완전히 위배되는 일이었고
한 남자를 홀려서 단숨에 딴 사람으로 뒤바꿔버린 연희라는 존재가
정수에게는 곱게 생각 될 리 없었다.
정수는 오래 숙고한 끝에 급기야 엄격한 재판관처럼 준호에게 충고했고
그 어떤 해명도 준호에게서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준호는 연희의 손을 덥석 낚아채더니 끌고 가다시피 급하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연희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
강압적으로 연희를 자기의 차에 태웠다.
연희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웠지만
그 두려움은 준호가 받은 상처를 염려하는 것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연희는 잠자코 준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싶었다.
준호는 몇 블록 정도의 거리를 느린 속도로 달리며 무언가를 찾아 두리번거리더니
선택의 여지없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모델 주차장으로 망설이지 않고 들어갔다.
그곳은 꽤 낙후한 오래된 모텔이었다.
서너 평 밖에 안 되는 좁은 룸은 구식 침대와 화장대가 가구의 전부였다.
화장대 위에는 싸구려 비품들이 조잡스럽게 나열되어 있었고
알루미늄 틀로 만들어진 작은 창문에는 짙은 자주색 커튼이 쳐 있었다.
준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연희를 침대 위에 쓰러뜨렸다.
연희는 준호의 체중을 고스란히 실은 몸으로 답답하게 겨우 숨쉬며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준호를 올려다보았다.
준호도 핏발이 선 눈으로 부르르 떨며 연희를 응시했다.
그리고 정수에 대한 분노를 담아 되 뇌였다.
(나는 사랑을 이해할 수 있기에는 너무나 사랑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내가 고통과 비애와 불쾌와 질투와 기타의 이미 초극한 것으로 생각했던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나는 소름끼치는 매혹을 느끼면서 연희가 나의 운명임을 다시 확신한다.
나는 연희를 축복하고 동시에 저주한다)
드리워진 커튼의 살짝 벌어진 틈새로 한 낮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것은 좁고 어두운 방을 조명하는 전부였다.
그 한 줄기의 햇살 속에서 연희 가슴이 씰룩거리며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다.
준호가 그곳에 얼굴을 파묻고 몸서리를 쳤다.
연희는 두 손으로 준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준호가 연희의 옷을 급하고 서투르게 파헤쳤다.
연희는 준호를 진정시키고 스스로 잠잠히 옷을 벗었다.
가난한 준호의 마음이 연희의 마음 안으로 들어갔다.
여린 연희의 육체 안에서 준호의 육체가 신음하고 비명 지르며 몸부림쳤다.
연희는 감미롭게 고통스러웠다.
준호의 얼굴에서 굵은 땀방울이 쉴 새 없이 연희의 얼굴로, 목으로, 가슴으로 떨어졌다.
두 사람이 결합되었을 때 분노는 파괴되었다.
그것은 약간의 삐그덕거리는 일촉즉발의 평화와도 같은 것이었다.
연희는 오후 수업을 모두 주말로 미루고 준호와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준호는 연희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준호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싶은 연희의 깊은 집중은
마치 이제는 순서가 온 것처럼 자기 이야기를 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준호씨에게서 평생 잊지 못할 소리를 들었어요.
그것은 내가 사랑받는데 서툰 여자란 말 이였어요.
나는 가장 사랑받기 원한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았어요.
엄마는 나를 좋아하지 않아요.
엄마에게 나는 말 안 듣는 못된 계집아이였고 그래서 난 벌을 자주 받았어요.
어느 겨울 날 내가 몹시 반항했을 때,
엄마는 나를 냉골의 방에 가두고 반성할 때 까지 꺼내주지 않았어요.
나는 오랜 시간을 추위에 떨며 누워서
앉은뱅이 나무 책상의 바닥에 연필깍이 칼로 글자를 새겨넣었어요.
(이다음에 자라서 복수할거야!) 라고..
그때 나는 고작 열 두 살이었어요.
나는 내가 어쩌면 원치 않는 상황에서 할 수 없이 키우게 된
다리 밑에서 주워온 거지아이일지 모른다는 상상을 자주 했어요.
차라리 정말 그랬다면 나는 덜 불행했을 텐데....
연희는 여기 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 떨리는 숨소리가 얼마나 절망적으로 들렸는지 준호의 가슴은 에는 것 같이 아팠다.
-나를 불행 속에서 유일하게 위로해 준 것은 문학이었어요.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왠만한 고전을 모조리 읽어치웠어요.
그리고 고등학교 부터는 철학에 심취했죠.
내가 라스니꼴리니코프나 뫼르소나 히드클리프 혹은 버지니아 울프의
삭막한 열정을 사모하게 된 것은 나의 불행한 시절과 무관하지 않을 거에요.
엄마는 내가 대학에 가는 걸 원치 않았어요.
가난하기 때문에 동생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고 자랐지만
나는 끝내 거부했어요.
나는 고모를 찾아가 무릎 끓고 빌면서 도와달라고 애원했어요.
다행히 고모가 등록금을 주었고 이후론 장학금이나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해결했어요.
이런 나의 불순종에 엄마는 치를 떨었죠.
엄마와 나는 결코 좁혀질 수 없는 평행선과 같은 사이가 되었어요.
지금까지도...
나는 그래서 사랑에 관해 절망적인 불신을 가지고 있었어요.
내가 준호씨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연 건 준호씨의 결핍을 듣게 됐을 때였어요.
나는 완전해 보이는 인간들로 부터는 도무지 어떤 애정도 느낄 수가 없어요.
그런 사람들은 내가 건너갈 수 없는, 하나의 전혀 다른 세계와 같아요.
나는 외부로부터의 입구가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었나봐요.
내가 만일 누군가 나의 세계에 들어올 것을 허락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준호씨 일거에요.
결핍은 결핍으로 치료되어 진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사랑받는데 서툰 여자가 맞지만
준호씨에게 사랑받는 것이 좋아요.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준호는 감히 연희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준호는 연희가 울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희는 울지 않았다.
창백한 어두운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을 뿐이었다.
준호는 무어라고 말을 하지 못하고 연희를 끌어안은 채 잠자코 있었다.
연희를 안고 있으면서 준호는 그동안 연희의 속에 뭔가 잘 어울리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이물과도 같은 의문들이 녹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연희가 준호의 품을 빠져 나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감동하게 말했다.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연희는 준호로부터 등을 돌리고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연희씨를 이렇게 누추한 곳으로 데리고 와서 미안해요.
연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배고프지 않아요?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 먹을까요?
준호가 또 말했지만
연희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창밖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준호는 연희가 울음을 참고 있음을 알았다.
준호는 연희를 돌려세워 자기의 무릎 위에 앉혔다.
연희는 가만히 준호가 하는 대로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울음을 터트렸다.
연희는 오래오래 울었다.
그러나 갑자기 울음을 그치더니 마치 어린애처럼 손잔등으로 눈물을 닦고
수줍은 듯이 웃었다.
-이렇게 바보 같은 꼴을 보이다니. 여기 앉아서 통곡을 하다니..
연희가 이렇게 말하자
-행복해요.
라고 준호는 대답했다.
-연희씨가 내 앞에서 운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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