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의 영혼이 남몰래 길가에 버려진 갓난애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상하게 들릴까.
연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해서 성장배경을 제대로 추측해 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예쁘장한 얼굴이나 하얀 피부, 차갑다기 보다는 거만으로 오해받기 쉬운 분위기를 보면
부모님의 사랑과 후원 속에서 어려움 없이 곱게 자란 부잣집 딸래미 정도를 연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연희가 노력 없이 얻게 된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외모뿐이었다.
세련된 말투나 옷차림, 우아함, 꼼꼼한 성격 같은 것들은
순전히 연희 스스로 가꾸어 다듬어진 페르조나였고
이런 분위기는 많은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고 오해하게도 만들었다.
그러나 연희를 진정 빛나게 해주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합한 것 보다 큰,
열정적인 영혼으로부터 쉼 없이 발산되는 에너지였다.
이것이 실은 결핍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으려니와
이로 인해 발산되는 열정 속 또 다른 결핍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희의 부모님은,
평소에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그녀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사람들이었다.
가난했으며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부모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것 같은 첫 딸에 대한 애정이나 집착이 많은 사람들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한 직장에서 일 년을 버티는 법이 없었고,
체질이 약해 병을 달고 살았으며 귀가 얇아 여기저기에서 사기를 잘 당했다.
이런 아버지의 무능함을 짊어져야 할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러나 실직한 남편 대신 직장을 다니고, 부업을 하고, 허리띠를 졸라매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꽃 같은 나이에 시집와 희망 없이 이어지는 고단한 삶은
어머니를 점점 생활력 강한 독한 아줌마의 모습으로 바꿔놓았고,
이에 대한 불똥은 고스란히 연희에게로 튀었다.
연희는 공부를 곧 잘 하는 편이었지만 어머니는 이것이 못마땅했고
뛰어난 성적표를 보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칭찬하는 것 대신
"밑으로 남동생이 있는데 계집애가 공부 잘 해봐야 무슨 소용이람.
가랑이 찢어지는 우리 형편에 둘이나 대학을 보낼 수는 없지."
라고 말하는 것으로 어린 딸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연희가 또래 보다 조숙했던 것은 태생이 아니라
자기를 외톨이로 생각하여 결핍을 극복할 방법을 일찍부터 스스로 찾아 나섰기 때문이었다.
연희는 책읽기를 좋아했다.
연희가 7살이 되던 해에 출판사 외판원이었던 삼촌이 선물한 그림동화 시리즈는
어린 영혼을 구원한 손길과 같은 것이었다.
꼬맹이 연희는 다락방에 엎드려서 손바닥 만한 쪽문을 열고
그 사이에서 인사하는 햇님을 벗삼아 동화책을 읽으며
저주로 탑에 갇혀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기를 기다리는 라푼젤이 된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런데 머잖아 연희를 정작 독서광으로 이끈 것은 샤롯트 브론테의 제인 에어였다.
로체스타와 제인 에어의 결핍을 초월한 사랑의 승화는
고작 열두 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녀의 머리에 한 그루 나무로 심어지더니
이윽고 가슴으로 까지 뿌리내려 견고히 자라났다.
그 후로 고전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오만과 편견을 극복한 사랑, 페스트가 전하는 패배를 끌어안는 방법,
라스꼴리니코프의 고뇌와 두나의 승리, 인간실격에서의 순수한 영혼의 투쟁,
게츠비의 희망에 관한 능력, 인구론의 불평등한 자연법칙,
리영희 선생님이 말하는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종의 기원에서의 인간은 왜 이기적인 존재인가,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의 슬픔도 힘이 될까 등등.
이러한 쉽지 않은 명제들은 연희에게 일종의 불편한 즐거움임과 동시에
염세주의를 낭만으로 긍정하기 위한 가혹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을 따로 떼어놓고서는
연희라는 한 사람이 가지게 된 보통의 사람과 구분되는 초이성적 세계관을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
친구들이 떡볶기를 사 먹으며 새로 사고 싶은 신발이야기를 한다든지,
여드름 걱정이나 반찬투정 따위로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릴 때
연희는 점점 어두워져 가는 제 방의 불을 켜려고 일어서는 잠깐의 시간도 아까워
눈을 비벼가며 책장을 넘기고,
그 속에서 시대의 우울로 초대되어 아이에서 어른으로 몸도 마음도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9시에 알람을 맞춰놓았지만 연희는 조금 더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반투명한 연두빛 커튼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연희는 아직은 졸린 눈을 비비며 누운 채로 생각했다.
"난 내 집이 참 좋아."
이 집의 현관문을 처음 열고 들어섰을 때 연희는 대번에 알았다. 여기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교통도 불편하고 그리 현대적이랄 수 없는 구조나 인테리어의 아파트였지만
망설임 없이 곧바로 계약할 수 있었다.
첫눈에 반했다기 보다는 인연이라고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이 준호와의 첫 만남도 그랬다는 것으로 연결되자
양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용수철처럼 튕겨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문을 신경질 적으로 열고 물 한 컵을 단숨에 들이켰다.
엉키기 시작한 실타래를 더 이상은 망가뜨리면 안 된다는 다짐 같은 것으로
머리를 절래절래 흔드는데 문자도착 알람이 울린다.
준호였다.
-잘 들어가셨나요. 저는 주말이라 집에 가요.
연희는 답장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어제의 행동을 승인하는 꼴이 되는 것만 같았다.
연희는 준호의 어떤 면에 자력 같은 것이 있어서
자석이 쇠를 당기듯이 자기를 끌어당기는 것일까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자석에 바늘이 달려오는 일은 신기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바늘은 자기 자신의 의사로선 행동할 수가 없는 물건인데도
어떤 조건 아래에선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젯밤 일어난 일들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다고 책임회피를 하고 싶었다.
연희는 준호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어린아이처럼 막 울음보를 터트릴 것 같았던 그의 표정,
슬프도록 반가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같이...
연희는 답장은 보내지 않으면서도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3일 후.
연희는 바쁜 수업일정을 소화하느라 준호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방학이면 더 특강에 열을 올리는 우리나라 입시생 부모들의 학구열 덕분이었다.
연희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준호는 자기의 의식 속에서 점점 희미해질 것이었다.
오전 그룹과외를 마치고 점심시간이었지만 긴 이동거리 때문에 시간 맞춰 움직여야했으므로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두유를 샀다.
바쁜 걸음으로 차에 타 시동을 걸고 샌드위치 봉지를 뜯었다.
에어콘의 냉쾌한 바람이 한 여름 낮의 무더위를 씻어준다.
라이오에선 엠씨 스나이퍼의 봄이여 오라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연희는 이 노래가 괜히 좋다.
천천히 샌드위치를 씹으며 가사를 읊조리는데
"나의 삶은 겨울을 지나 봄이 없이 여름에 와 있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준호가 떠올랐다.
"유부남인 그 사람이 나의 봄이 될 수는 없어" 라고 되뇌면서도
핸드폰을 꺼내 준호에게 문자를 보낸다.
-엠씨 스나이퍼의 봄이여 오라라는 노래를 아시나요
이런 이율배반적 충동은 한 번의 에피소드로 끝내겠다는 의지적 다짐을 일시에 무너뜨리며
밤 11시 모든 수업이 끝날 때 까지 연희의 정신을 점령하고 괴롭혔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하면서도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자기가 싫었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자 낯익은 풍경들이 주인을 위로한다.
초록색 벽지와 빨간색 페브릭 소파, 검정색 세로 물결 패턴이 수놓인 겨자 색 커튼은
서로 대비를 이루면서도 어울린다.
연희가 커튼을 젖히고 베란다 문을 활짝 열자 회오리 바람소리가 할퀴려는 듯 귓전으로 달려들었다.
연희의 아파트는 도심 한복판임에도 산기슭과 마주한 흔치 않은 환경이었는데
깍아지른 듯한 산과 아파트 사이의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 회오리 바람소리가 자주 들렸다.
연희는 괴기스럽기 까지 한 바람소리가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바람소리를 들을 때면 불모의 땅에서 일궈낸 자기의 안식처가 더욱 감사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연희는 옷을 벗었다.
겨드랑이부터 힙선으로 연결된 지퍼를 내리자 주홍색 쉬폰 원피스는 허물처럼 흘러 연희의 몸을 떠났다.
연희는 알몸인 채로 베란다에 서서 난간에 팔을 고이고 바람소리를 들었다.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레퀴엠을 감상하듯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진동한다.
준호의 문자다.
-하루 종일 이 노래만 들었어요. 한 오십번 정도. 나를 봄이라고 불러줘요. 새 봄이라고 불러줘요.
연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해서 성장배경을 제대로 추측해 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예쁘장한 얼굴이나 하얀 피부, 차갑다기 보다는 거만으로 오해받기 쉬운 분위기를 보면
부모님의 사랑과 후원 속에서 어려움 없이 곱게 자란 부잣집 딸래미 정도를 연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연희가 노력 없이 얻게 된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외모뿐이었다.
세련된 말투나 옷차림, 우아함, 꼼꼼한 성격 같은 것들은
순전히 연희 스스로 가꾸어 다듬어진 페르조나였고
이런 분위기는 많은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고 오해하게도 만들었다.
그러나 연희를 진정 빛나게 해주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합한 것 보다 큰,
열정적인 영혼으로부터 쉼 없이 발산되는 에너지였다.
이것이 실은 결핍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으려니와
이로 인해 발산되는 열정 속 또 다른 결핍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희의 부모님은,
평소에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그녀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사람들이었다.
가난했으며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부모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것 같은 첫 딸에 대한 애정이나 집착이 많은 사람들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한 직장에서 일 년을 버티는 법이 없었고,
체질이 약해 병을 달고 살았으며 귀가 얇아 여기저기에서 사기를 잘 당했다.
이런 아버지의 무능함을 짊어져야 할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러나 실직한 남편 대신 직장을 다니고, 부업을 하고, 허리띠를 졸라매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꽃 같은 나이에 시집와 희망 없이 이어지는 고단한 삶은
어머니를 점점 생활력 강한 독한 아줌마의 모습으로 바꿔놓았고,
이에 대한 불똥은 고스란히 연희에게로 튀었다.
연희는 공부를 곧 잘 하는 편이었지만 어머니는 이것이 못마땅했고
뛰어난 성적표를 보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칭찬하는 것 대신
"밑으로 남동생이 있는데 계집애가 공부 잘 해봐야 무슨 소용이람.
가랑이 찢어지는 우리 형편에 둘이나 대학을 보낼 수는 없지."
라고 말하는 것으로 어린 딸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연희가 또래 보다 조숙했던 것은 태생이 아니라
자기를 외톨이로 생각하여 결핍을 극복할 방법을 일찍부터 스스로 찾아 나섰기 때문이었다.
연희는 책읽기를 좋아했다.
연희가 7살이 되던 해에 출판사 외판원이었던 삼촌이 선물한 그림동화 시리즈는
어린 영혼을 구원한 손길과 같은 것이었다.
꼬맹이 연희는 다락방에 엎드려서 손바닥 만한 쪽문을 열고
그 사이에서 인사하는 햇님을 벗삼아 동화책을 읽으며
저주로 탑에 갇혀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기를 기다리는 라푼젤이 된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런데 머잖아 연희를 정작 독서광으로 이끈 것은 샤롯트 브론테의 제인 에어였다.
로체스타와 제인 에어의 결핍을 초월한 사랑의 승화는
고작 열두 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녀의 머리에 한 그루 나무로 심어지더니
이윽고 가슴으로 까지 뿌리내려 견고히 자라났다.
그 후로 고전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오만과 편견을 극복한 사랑, 페스트가 전하는 패배를 끌어안는 방법,
라스꼴리니코프의 고뇌와 두나의 승리, 인간실격에서의 순수한 영혼의 투쟁,
게츠비의 희망에 관한 능력, 인구론의 불평등한 자연법칙,
리영희 선생님이 말하는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종의 기원에서의 인간은 왜 이기적인 존재인가,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의 슬픔도 힘이 될까 등등.
이러한 쉽지 않은 명제들은 연희에게 일종의 불편한 즐거움임과 동시에
염세주의를 낭만으로 긍정하기 위한 가혹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을 따로 떼어놓고서는
연희라는 한 사람이 가지게 된 보통의 사람과 구분되는 초이성적 세계관을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
친구들이 떡볶기를 사 먹으며 새로 사고 싶은 신발이야기를 한다든지,
여드름 걱정이나 반찬투정 따위로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릴 때
연희는 점점 어두워져 가는 제 방의 불을 켜려고 일어서는 잠깐의 시간도 아까워
눈을 비벼가며 책장을 넘기고,
그 속에서 시대의 우울로 초대되어 아이에서 어른으로 몸도 마음도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9시에 알람을 맞춰놓았지만 연희는 조금 더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반투명한 연두빛 커튼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연희는 아직은 졸린 눈을 비비며 누운 채로 생각했다.
"난 내 집이 참 좋아."
이 집의 현관문을 처음 열고 들어섰을 때 연희는 대번에 알았다. 여기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교통도 불편하고 그리 현대적이랄 수 없는 구조나 인테리어의 아파트였지만
망설임 없이 곧바로 계약할 수 있었다.
첫눈에 반했다기 보다는 인연이라고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이 준호와의 첫 만남도 그랬다는 것으로 연결되자
양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용수철처럼 튕겨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문을 신경질 적으로 열고 물 한 컵을 단숨에 들이켰다.
엉키기 시작한 실타래를 더 이상은 망가뜨리면 안 된다는 다짐 같은 것으로
머리를 절래절래 흔드는데 문자도착 알람이 울린다.
준호였다.
-잘 들어가셨나요. 저는 주말이라 집에 가요.
연희는 답장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어제의 행동을 승인하는 꼴이 되는 것만 같았다.
연희는 준호의 어떤 면에 자력 같은 것이 있어서
자석이 쇠를 당기듯이 자기를 끌어당기는 것일까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자석에 바늘이 달려오는 일은 신기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바늘은 자기 자신의 의사로선 행동할 수가 없는 물건인데도
어떤 조건 아래에선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젯밤 일어난 일들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다고 책임회피를 하고 싶었다.
연희는 준호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어린아이처럼 막 울음보를 터트릴 것 같았던 그의 표정,
슬프도록 반가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같이...
연희는 답장은 보내지 않으면서도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3일 후.
연희는 바쁜 수업일정을 소화하느라 준호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방학이면 더 특강에 열을 올리는 우리나라 입시생 부모들의 학구열 덕분이었다.
연희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준호는 자기의 의식 속에서 점점 희미해질 것이었다.
오전 그룹과외를 마치고 점심시간이었지만 긴 이동거리 때문에 시간 맞춰 움직여야했으므로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두유를 샀다.
바쁜 걸음으로 차에 타 시동을 걸고 샌드위치 봉지를 뜯었다.
에어콘의 냉쾌한 바람이 한 여름 낮의 무더위를 씻어준다.
라이오에선 엠씨 스나이퍼의 봄이여 오라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연희는 이 노래가 괜히 좋다.
천천히 샌드위치를 씹으며 가사를 읊조리는데
"나의 삶은 겨울을 지나 봄이 없이 여름에 와 있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준호가 떠올랐다.
"유부남인 그 사람이 나의 봄이 될 수는 없어" 라고 되뇌면서도
핸드폰을 꺼내 준호에게 문자를 보낸다.
-엠씨 스나이퍼의 봄이여 오라라는 노래를 아시나요
이런 이율배반적 충동은 한 번의 에피소드로 끝내겠다는 의지적 다짐을 일시에 무너뜨리며
밤 11시 모든 수업이 끝날 때 까지 연희의 정신을 점령하고 괴롭혔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하면서도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자기가 싫었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자 낯익은 풍경들이 주인을 위로한다.
초록색 벽지와 빨간색 페브릭 소파, 검정색 세로 물결 패턴이 수놓인 겨자 색 커튼은
서로 대비를 이루면서도 어울린다.
연희가 커튼을 젖히고 베란다 문을 활짝 열자 회오리 바람소리가 할퀴려는 듯 귓전으로 달려들었다.
연희의 아파트는 도심 한복판임에도 산기슭과 마주한 흔치 않은 환경이었는데
깍아지른 듯한 산과 아파트 사이의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 회오리 바람소리가 자주 들렸다.
연희는 괴기스럽기 까지 한 바람소리가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바람소리를 들을 때면 불모의 땅에서 일궈낸 자기의 안식처가 더욱 감사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연희는 옷을 벗었다.
겨드랑이부터 힙선으로 연결된 지퍼를 내리자 주홍색 쉬폰 원피스는 허물처럼 흘러 연희의 몸을 떠났다.
연희는 알몸인 채로 베란다에 서서 난간에 팔을 고이고 바람소리를 들었다.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레퀴엠을 감상하듯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진동한다.
준호의 문자다.
-하루 종일 이 노래만 들었어요. 한 오십번 정도. 나를 봄이라고 불러줘요. 새 봄이라고 불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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