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가 여태까지 남자들에게 가지고 있던 거만한 거리의 추위는
준호에 의해 보상되었다.
그처럼 어렵게 만들어지고 그처럼 완강하게 지켜진 연희의 고독이 증발되고
온갖 생기가 찾아왔다.
연희는 준호 앞에 명랑한 소녀 같은 모습이 어느덧 되어 있었다.
상대방에게 자기의 감정을 100% 다 드러낸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러나 연희는 봉인해제를 했다.
연희는 남김없이, 숨김없이 모든 것을 표현했다.
어느 때는 순진한 여고생 같았고, 어느 때는 귀여운 수다쟁이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거의 매일 밤, 와인 한 병을 나누어 마시며 대화하길 즐겨했다.
준호는 연희가 와인에 취한 발그스레한 얼굴로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 때,
그처럼 까만 눈동자가 생에 대한 호기심으로 빛나는 순간을 탐구하길 좋아했다.
연희는 처음으로 사랑이란 걸 했고 그로부터 오는 충족의 참뜻을 알았다.
두 사람에게 있어 주도권은 연희에게 있는 듯 했으나
준호는 대부분을 더할 나위 없이 자상하고 섬세한 기질을 가지고
연희를 위해 아낌 없이 배려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자기가 원하는 방향 쪽으로 이끄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연희는 이것을 부드러운 카리스마라 느끼며 매료되었지만
겉으로는 이기주의자라 놀리며 핀잔했다.
연희는 그리고 성에 눈을 떴다.
준호와의 육체적 쾌락은 연희에게 신생의 숨결 같은, 그 설렘 같은,
두려움 같은, 무섬증 같은 감동이었다.
준호는 연희의 육체를 언제나 미칠 듯이 목말라했다.
연희를 뜨겁게 안고 돌아간 날이면 준호는 후유증에 시달렸고
그 증세가 사라지기 전에 다시 연희의 육체를 갖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중독되었고
에로스는 심연에 있었다.
어느 날 연희는 준호의 육체에서 흐르는 무른 과즙의 맛에 취해 이렇게 읊조렸다.
-당신의 몸과 마음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 있어요.
나는 지금 천국에 있나요... 나는 지옥으로는 가고 싶지 않아요....
연희의 이 고백이 훗날
두 사람이 느끼는 쾌락의 기쁨이,
모순의 폭발임을 암시하는 복선이 되리라고는 그 순간,
둘 중 누구도 알 수 없었으리라.
준호는 선배정수와 함께 연희를 만나기도 했다.
그것은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라는 정수의 의구심으로 부터 발단된 만남이었다.
준호는 정수의 의혹을 풀어줄 필요성을 느꼈다.
그 만남은 정수로 하여금
이 두 사람은 절대로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정수는 그 날 이후 수긍이 아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더 이상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고 이 사실은 준호에게 만족을 주었다.
이것은 연희의 친구 민숙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세 사람은 정수 보다는 더 여러 번 함께 만났는데
민숙은 급기야 이렇게 고백하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네가 가질 수 없는 남자를 가진 것과 같은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을
용인할 수 없지만..
지금의 너는 그 어느 때 보다 행복해 보이는구나.
나에겐 네가 부도덕해 지는 것을 방지할 책임 보다
너의 행복한 비밀을 지켜줄 의무가 더 있는 것은 아닐까.
넌 정말 나쁜 계집애야. 나 까지 공범자를 만들어버릴 셈이니?
정수와 민숙은 반대에 용기내지 못하고
두 사람이 언젠간 멈춰주길 바라며 관조했던 자신들의 패배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경고음은 하나 둘 씩 꺼져갔다.
처음에 연희를 짓누르던 순리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은 슬그머니 뒷걸음질 했다.
준호는 집으로 돌아가면 성실하기 이를 데 없는 남편이자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아내 소현은 남편이 자랑스러웠고 자기의 결혼생활에 만족했다.
준호는 소현을 기만했지만 불타는 가책을 자기연민으로 서슴없이 껴안았다.
준호는 11월 25일 의사 실기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real cpx를 한 번 다 보았으나
osce는 제대로 손도 대지 못한 상태였다.
준호는 자신이 없었다.
실기시험을 패스한다고 해도 내년 1월에 있을 필기시험은 더더욱 해 낼 자신이 없었다.
설사 실기와 필기 모두에 합격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면 연희를 보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불안함은 준호를 딜레마에 빠트렸다.
준호는 남편을 향한 소현의 비전과 자기와 연희를 지키기 위한 소망의 갈림길에서
두 마음의 그네 줄을 타고 있었다.
준호는 결국 의사면허시험을 패스하지 못했다.
준호는 필기시험에 응시는 했지만 시험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실은 준호의 가족을 실망시켰고 정수를 화나게 했고 연희를 충격에 빠트렸다.
그러나 준호에게는 일종의 공허한 평화 같은 것이 찾아왔다.
(나는 나를 포기하고 대수롭지 않은 한 여자와 결혼했다.
나는 소현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다만 상처주기 싫어서 소현과 결혼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지금은 더 큰 상처를 줄지도 모를 상황에 직면해 있다.
나는 순간을 모면하는 것으로 얼마나 비열한 인간이 되어야만 했는가.
그런데 나는 시험장에 가지 않은 것으로
난생처음 미래를 스스로 결정한 기쁨을 누린다.
나는 내 인생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선생님, 아버지, 아내로부터 해방된 기분이다)
연희는 한 남자가 인생의 큰 관문을 통과하기 바로 직전에 그 남자를 유혹해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에 대한 자기혐오에 빠졌다.
(나는 어쩌면 과거에 하찮게 생각되는 남자들을 손아귀에 쥐고 골탕 먹였던
내면의 그 익숙했던 나쁜 습관대로 놀랍게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준호와 함께 했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려 보면
준호가 시험을 패스한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방관하고 동조까지 했다.
나는 언젠가 준호가 말했던 것처럼 준호의 무모함에 냉소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고
준호가 요구하는 것들 앞에 무력하고 연약했다.
준호는 한 번 실패했던 사람이다. 선생님. 그 여자 때문에.
나는 그 여자와 똑같은 짓을 준호에게 해버렸다.)
큰 환멸이 연희를 춥게 만들었다.
준호는 이러한 연희의 패배의식을 알지 못한 채
연희와의 느긋하고 달콤한 여행에 취해 있었다.
준호는 영동고속도를 쾌적한 속도로 달리며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연희가 좋아하는 엠씨 스나이퍼의 봄이여 오라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연희는 줄곧 말이 없었고 표정은 우울해보였다.
준호는 연희가 화를 낼만도 하다고 생각하며
하지만 이 여행이 주는 낭만이 곧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라 낙담했다.
-라디오 꺼줘요.
연희가 가시 돋친 말투로 말했다.
-이 노래 좋아하잖아요. 난 가사도 다 외워버렸는데..
-가사 외우지 말아요! 그 노래처럼 돼버릴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
연희는 지나치게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그럼 무슨 노래를 듣고 싶어요?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이요.
연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거 곤란하게 됐네요. 내 CD목록엔 없는 곡이라 들려줄 수가..
-상관없어요. 마음속으로 감상할 수 있으니까. 나도 이미 다 외우고 있으니까..
-전부 다?
-네 3악장 전부 다.
-그거 대단한걸요. 굉장히 좋아하는 곡인가봐요.
-무척... 클래식이지만 나에겐 째즈 선율과 같이 느껴져요.
어느 날 들으면 달콤하지만 또 어느 날 들으면 한없이 울적한 기분이 들게 하니까.
-오늘은 어떤 날인데요?
연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준호는 연희의 태도가 처음 자기를 만났을 때와 같은 정도로 냉담해 진 것에 신경이 쓰였지만
이것은 연희가 솔직한 열광을 가지고 자기가 한 일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하며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렸다.
동해의 푸른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자 준호는 속도를 늦추고 창문을 열어
바다의 짠맛이 느껴지는 냉쾌한 바람을 양껏 들이키며 크게 심호흡했다.
청명한 겨울의 하늘이 자기에게 미소를 던져주는 것 같았다.
준호는 핸들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연희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외쳤다.
-아! 연희씨가 알 수 있을까요.
내가 시험을 보지 않은 것으로 위험에 처해진 것이 아니라 위기를 극복한 것이란 것을!
나는 연희씨를 사랑해요. 나는 이것을 의심하지 않아요.
나는 새로운, 보다 밝은 방법으로 다시는 연희씨를 잃을 수 없게 연희씨를 사랑해요!
연희는 준호의 외침을 허공으로 흩으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어른이지만 감정적으로는 17살 소년에 불과하다.
선생님 때문에. 그 여자가 이 남자를 망가뜨렸다.
준호는 보통의 청소년이 거치게 되는 정상적인 과정을 건너 뛴 어른아이에 불과할 뿐이다.
17세에 고장 난 가엾은 소년을 상처투성이인 12살 소녀가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자만이었다.
나는 그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방법으로 이 사람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연희는 차오르는 슬픔에 눈물이 고였다.
연희는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하늘은 얄밉게 푸르렀고 속초의 겨울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우리는 아름답지 않아.
우리는 우리의 이기심에 저항해야만 한다.)
연희와 준호가 속초 해수욕장에 도착했을 때는 황혼이 지고 있었다.
속초의 바다는 멀리 서쪽으로 기우는 태양의 마지막 사랑을 받으며
슬픈 표정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연희와 준호는 저녁을 먹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멀리서 폭죽이 터졌고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려왔다.
준호는 낭만적인 기분에 한껏 취했다.
연희는 슬픔을 내색하지 않았다.
연희의 동작은 조용하고 부드러웠고 준호가 말하는 것을 주의깊게 들었지만 말이 거의 없었다.
연희는 (듣고는 있으나,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고
당신이 모르는 보다 중요한 나라를 방황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준호의 하는 행동을 바라보았다.
-사랑해요.
준호가 옆에 앉은 연희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그 말을 어쩜 그렇게 자주하나요.
-사실이 그러니까요.
-너무 남용하면 사실에서 멀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해요.
-그래도 사랑해요.
-선생님도 사랑했었나요?
준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니요.
-선생님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아름답고 똑똑하고 친구의 아들을 사랑한 음란한 여자.
-원망하나요?
점점 일그러지는 준호의 얼굴을 보며 연희는 준호를 고문하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더 잔인해지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지 않고 계속 파고들었다.
-대학에 떨어졌을 때 꼭 한번 그랬었죠. 하지만 근본적인 건 아니었어요.
-준호씨는 의사시험에도 떨어졌잖아요.
선생님이 준호씨에게 미친 영향력은 생각 보다 큰 것 같아요.
그 여자의 영향력은 준호씨의 인생 전반에 미쳐있는 것 같아요. 어두운 그림자처럼..
난 그 바톤을 이어받은 느낌이에요.
준호가 얼굴을 더욱 찡그렸다.
-이건 연희씨때문이 아니에요. 내가 선택한 것이고 나는 연희씨를 원망하지 않아요.
시험은 매년 돌아와요..
준호는 애써 웃으며 덧붙였다.
-두 가지 정도는 지금도 또렷하게 생각나요.
자기랑 같이 도망갈 수 있겠느냐고 물어봤었죠. 난 대답하지 않았어요.
-싫다고 했었어야죠.
-그때 난 어렸으니까. 싫다고 하면 선생님이 관계를 포기할까봐 두려웠었나봐요.
연희는 17살 소년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
준호의 두 볼을 어루만지며 위로의 키스를 하고 싶은 생각을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누가 너를 마다할 수 있을까.
만일 네가 손만 뻗으면 어떤 여자라도 너에게 매혹 될거야.
연희씨는 나에게 매혹되었나요?
-그래요.
연희는 죄의식을 가지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날 밤 준호는 연희와 사랑을 나누며
자기를 받아들이는 연희의 몸짓에 슬픔이 베여있다는 것을 느꼈다.
준호는 연희가 떠나 온 직후 마치 추워하는 것처럼
움츠린 어깨와 미소 없는 얼굴로 있었던 것이
실은 날씨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하늘은 갑자기 급변해 포악해지고 있었다.
밖에서는 허술하게 걸린 거리의 간판을 흔드는 바람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준호는 낯설어진 연희의 태도에 괴로운 느낌이었지만
급작스럽게 시도된 여행이 주는 피곤함 때문이리라 자기를 타이르며
나른한 잠에 빠져들었다.
준호의 눈이 다시 떠진 건 이른 아침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계는 겨우 7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준호의 옆에 연희는 보이지 않았다.
준호가 몸을 일으켜 정신을 차려보니 연희가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연희는 어젯밤에 잠을 설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아마 어쩌면 한 숨도 못 잔 것인지도 몰랐다.
준호는 무언가를 직감했다. 그것은 매우 불길한 기운이었다.
-오늘 같은 날은 늦잠 좀 자도 되잖아요. 이리와요.
-......
연희는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는 자꾸 머뭇거리며 입을 떼지 못했다.
-비가 와서 울적해요?
-오늘 같은 날에 어울리는데요 뭘.
-왜죠?
준호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 같은 기분으로 연희의 대답을 기다렸다.
연희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준호를 바라보더니
불편한 침묵을 깨며 이윽고 입을 열었다.
-우리 그만뒀으면 좋겠어요.
준호에 의해 보상되었다.
그처럼 어렵게 만들어지고 그처럼 완강하게 지켜진 연희의 고독이 증발되고
온갖 생기가 찾아왔다.
연희는 준호 앞에 명랑한 소녀 같은 모습이 어느덧 되어 있었다.
상대방에게 자기의 감정을 100% 다 드러낸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러나 연희는 봉인해제를 했다.
연희는 남김없이, 숨김없이 모든 것을 표현했다.
어느 때는 순진한 여고생 같았고, 어느 때는 귀여운 수다쟁이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거의 매일 밤, 와인 한 병을 나누어 마시며 대화하길 즐겨했다.
준호는 연희가 와인에 취한 발그스레한 얼굴로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 때,
그처럼 까만 눈동자가 생에 대한 호기심으로 빛나는 순간을 탐구하길 좋아했다.
연희는 처음으로 사랑이란 걸 했고 그로부터 오는 충족의 참뜻을 알았다.
두 사람에게 있어 주도권은 연희에게 있는 듯 했으나
준호는 대부분을 더할 나위 없이 자상하고 섬세한 기질을 가지고
연희를 위해 아낌 없이 배려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자기가 원하는 방향 쪽으로 이끄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연희는 이것을 부드러운 카리스마라 느끼며 매료되었지만
겉으로는 이기주의자라 놀리며 핀잔했다.
연희는 그리고 성에 눈을 떴다.
준호와의 육체적 쾌락은 연희에게 신생의 숨결 같은, 그 설렘 같은,
두려움 같은, 무섬증 같은 감동이었다.
준호는 연희의 육체를 언제나 미칠 듯이 목말라했다.
연희를 뜨겁게 안고 돌아간 날이면 준호는 후유증에 시달렸고
그 증세가 사라지기 전에 다시 연희의 육체를 갖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중독되었고
에로스는 심연에 있었다.
어느 날 연희는 준호의 육체에서 흐르는 무른 과즙의 맛에 취해 이렇게 읊조렸다.
-당신의 몸과 마음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 있어요.
나는 지금 천국에 있나요... 나는 지옥으로는 가고 싶지 않아요....
연희의 이 고백이 훗날
두 사람이 느끼는 쾌락의 기쁨이,
모순의 폭발임을 암시하는 복선이 되리라고는 그 순간,
둘 중 누구도 알 수 없었으리라.
준호는 선배정수와 함께 연희를 만나기도 했다.
그것은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라는 정수의 의구심으로 부터 발단된 만남이었다.
준호는 정수의 의혹을 풀어줄 필요성을 느꼈다.
그 만남은 정수로 하여금
이 두 사람은 절대로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정수는 그 날 이후 수긍이 아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더 이상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고 이 사실은 준호에게 만족을 주었다.
이것은 연희의 친구 민숙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세 사람은 정수 보다는 더 여러 번 함께 만났는데
민숙은 급기야 이렇게 고백하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네가 가질 수 없는 남자를 가진 것과 같은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을
용인할 수 없지만..
지금의 너는 그 어느 때 보다 행복해 보이는구나.
나에겐 네가 부도덕해 지는 것을 방지할 책임 보다
너의 행복한 비밀을 지켜줄 의무가 더 있는 것은 아닐까.
넌 정말 나쁜 계집애야. 나 까지 공범자를 만들어버릴 셈이니?
정수와 민숙은 반대에 용기내지 못하고
두 사람이 언젠간 멈춰주길 바라며 관조했던 자신들의 패배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경고음은 하나 둘 씩 꺼져갔다.
처음에 연희를 짓누르던 순리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은 슬그머니 뒷걸음질 했다.
준호는 집으로 돌아가면 성실하기 이를 데 없는 남편이자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아내 소현은 남편이 자랑스러웠고 자기의 결혼생활에 만족했다.
준호는 소현을 기만했지만 불타는 가책을 자기연민으로 서슴없이 껴안았다.
준호는 11월 25일 의사 실기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real cpx를 한 번 다 보았으나
osce는 제대로 손도 대지 못한 상태였다.
준호는 자신이 없었다.
실기시험을 패스한다고 해도 내년 1월에 있을 필기시험은 더더욱 해 낼 자신이 없었다.
설사 실기와 필기 모두에 합격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면 연희를 보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불안함은 준호를 딜레마에 빠트렸다.
준호는 남편을 향한 소현의 비전과 자기와 연희를 지키기 위한 소망의 갈림길에서
두 마음의 그네 줄을 타고 있었다.
준호는 결국 의사면허시험을 패스하지 못했다.
준호는 필기시험에 응시는 했지만 시험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실은 준호의 가족을 실망시켰고 정수를 화나게 했고 연희를 충격에 빠트렸다.
그러나 준호에게는 일종의 공허한 평화 같은 것이 찾아왔다.
(나는 나를 포기하고 대수롭지 않은 한 여자와 결혼했다.
나는 소현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다만 상처주기 싫어서 소현과 결혼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지금은 더 큰 상처를 줄지도 모를 상황에 직면해 있다.
나는 순간을 모면하는 것으로 얼마나 비열한 인간이 되어야만 했는가.
그런데 나는 시험장에 가지 않은 것으로
난생처음 미래를 스스로 결정한 기쁨을 누린다.
나는 내 인생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선생님, 아버지, 아내로부터 해방된 기분이다)
연희는 한 남자가 인생의 큰 관문을 통과하기 바로 직전에 그 남자를 유혹해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에 대한 자기혐오에 빠졌다.
(나는 어쩌면 과거에 하찮게 생각되는 남자들을 손아귀에 쥐고 골탕 먹였던
내면의 그 익숙했던 나쁜 습관대로 놀랍게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준호와 함께 했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려 보면
준호가 시험을 패스한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방관하고 동조까지 했다.
나는 언젠가 준호가 말했던 것처럼 준호의 무모함에 냉소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고
준호가 요구하는 것들 앞에 무력하고 연약했다.
준호는 한 번 실패했던 사람이다. 선생님. 그 여자 때문에.
나는 그 여자와 똑같은 짓을 준호에게 해버렸다.)
큰 환멸이 연희를 춥게 만들었다.
준호는 이러한 연희의 패배의식을 알지 못한 채
연희와의 느긋하고 달콤한 여행에 취해 있었다.
준호는 영동고속도를 쾌적한 속도로 달리며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연희가 좋아하는 엠씨 스나이퍼의 봄이여 오라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연희는 줄곧 말이 없었고 표정은 우울해보였다.
준호는 연희가 화를 낼만도 하다고 생각하며
하지만 이 여행이 주는 낭만이 곧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라 낙담했다.
-라디오 꺼줘요.
연희가 가시 돋친 말투로 말했다.
-이 노래 좋아하잖아요. 난 가사도 다 외워버렸는데..
-가사 외우지 말아요! 그 노래처럼 돼버릴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
연희는 지나치게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그럼 무슨 노래를 듣고 싶어요?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이요.
연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거 곤란하게 됐네요. 내 CD목록엔 없는 곡이라 들려줄 수가..
-상관없어요. 마음속으로 감상할 수 있으니까. 나도 이미 다 외우고 있으니까..
-전부 다?
-네 3악장 전부 다.
-그거 대단한걸요. 굉장히 좋아하는 곡인가봐요.
-무척... 클래식이지만 나에겐 째즈 선율과 같이 느껴져요.
어느 날 들으면 달콤하지만 또 어느 날 들으면 한없이 울적한 기분이 들게 하니까.
-오늘은 어떤 날인데요?
연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준호는 연희의 태도가 처음 자기를 만났을 때와 같은 정도로 냉담해 진 것에 신경이 쓰였지만
이것은 연희가 솔직한 열광을 가지고 자기가 한 일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하며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렸다.
동해의 푸른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자 준호는 속도를 늦추고 창문을 열어
바다의 짠맛이 느껴지는 냉쾌한 바람을 양껏 들이키며 크게 심호흡했다.
청명한 겨울의 하늘이 자기에게 미소를 던져주는 것 같았다.
준호는 핸들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연희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외쳤다.
-아! 연희씨가 알 수 있을까요.
내가 시험을 보지 않은 것으로 위험에 처해진 것이 아니라 위기를 극복한 것이란 것을!
나는 연희씨를 사랑해요. 나는 이것을 의심하지 않아요.
나는 새로운, 보다 밝은 방법으로 다시는 연희씨를 잃을 수 없게 연희씨를 사랑해요!
연희는 준호의 외침을 허공으로 흩으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어른이지만 감정적으로는 17살 소년에 불과하다.
선생님 때문에. 그 여자가 이 남자를 망가뜨렸다.
준호는 보통의 청소년이 거치게 되는 정상적인 과정을 건너 뛴 어른아이에 불과할 뿐이다.
17세에 고장 난 가엾은 소년을 상처투성이인 12살 소녀가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자만이었다.
나는 그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방법으로 이 사람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연희는 차오르는 슬픔에 눈물이 고였다.
연희는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하늘은 얄밉게 푸르렀고 속초의 겨울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우리는 아름답지 않아.
우리는 우리의 이기심에 저항해야만 한다.)
연희와 준호가 속초 해수욕장에 도착했을 때는 황혼이 지고 있었다.
속초의 바다는 멀리 서쪽으로 기우는 태양의 마지막 사랑을 받으며
슬픈 표정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연희와 준호는 저녁을 먹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멀리서 폭죽이 터졌고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려왔다.
준호는 낭만적인 기분에 한껏 취했다.
연희는 슬픔을 내색하지 않았다.
연희의 동작은 조용하고 부드러웠고 준호가 말하는 것을 주의깊게 들었지만 말이 거의 없었다.
연희는 (듣고는 있으나,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고
당신이 모르는 보다 중요한 나라를 방황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준호의 하는 행동을 바라보았다.
-사랑해요.
준호가 옆에 앉은 연희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그 말을 어쩜 그렇게 자주하나요.
-사실이 그러니까요.
-너무 남용하면 사실에서 멀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해요.
-그래도 사랑해요.
-선생님도 사랑했었나요?
준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니요.
-선생님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아름답고 똑똑하고 친구의 아들을 사랑한 음란한 여자.
-원망하나요?
점점 일그러지는 준호의 얼굴을 보며 연희는 준호를 고문하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더 잔인해지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지 않고 계속 파고들었다.
-대학에 떨어졌을 때 꼭 한번 그랬었죠. 하지만 근본적인 건 아니었어요.
-준호씨는 의사시험에도 떨어졌잖아요.
선생님이 준호씨에게 미친 영향력은 생각 보다 큰 것 같아요.
그 여자의 영향력은 준호씨의 인생 전반에 미쳐있는 것 같아요. 어두운 그림자처럼..
난 그 바톤을 이어받은 느낌이에요.
준호가 얼굴을 더욱 찡그렸다.
-이건 연희씨때문이 아니에요. 내가 선택한 것이고 나는 연희씨를 원망하지 않아요.
시험은 매년 돌아와요..
준호는 애써 웃으며 덧붙였다.
-두 가지 정도는 지금도 또렷하게 생각나요.
자기랑 같이 도망갈 수 있겠느냐고 물어봤었죠. 난 대답하지 않았어요.
-싫다고 했었어야죠.
-그때 난 어렸으니까. 싫다고 하면 선생님이 관계를 포기할까봐 두려웠었나봐요.
연희는 17살 소년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
준호의 두 볼을 어루만지며 위로의 키스를 하고 싶은 생각을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누가 너를 마다할 수 있을까.
만일 네가 손만 뻗으면 어떤 여자라도 너에게 매혹 될거야.
연희씨는 나에게 매혹되었나요?
-그래요.
연희는 죄의식을 가지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날 밤 준호는 연희와 사랑을 나누며
자기를 받아들이는 연희의 몸짓에 슬픔이 베여있다는 것을 느꼈다.
준호는 연희가 떠나 온 직후 마치 추워하는 것처럼
움츠린 어깨와 미소 없는 얼굴로 있었던 것이
실은 날씨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하늘은 갑자기 급변해 포악해지고 있었다.
밖에서는 허술하게 걸린 거리의 간판을 흔드는 바람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준호는 낯설어진 연희의 태도에 괴로운 느낌이었지만
급작스럽게 시도된 여행이 주는 피곤함 때문이리라 자기를 타이르며
나른한 잠에 빠져들었다.
준호의 눈이 다시 떠진 건 이른 아침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계는 겨우 7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준호의 옆에 연희는 보이지 않았다.
준호가 몸을 일으켜 정신을 차려보니 연희가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연희는 어젯밤에 잠을 설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아마 어쩌면 한 숨도 못 잔 것인지도 몰랐다.
준호는 무언가를 직감했다. 그것은 매우 불길한 기운이었다.
-오늘 같은 날은 늦잠 좀 자도 되잖아요. 이리와요.
-......
연희는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는 자꾸 머뭇거리며 입을 떼지 못했다.
-비가 와서 울적해요?
-오늘 같은 날에 어울리는데요 뭘.
-왜죠?
준호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 같은 기분으로 연희의 대답을 기다렸다.
연희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준호를 바라보더니
불편한 침묵을 깨며 이윽고 입을 열었다.
-우리 그만뒀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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