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나에게 행복의 눈물을 흘릴 만큼 감동을 주고서
지금은 나를 이처럼 혼란하게 만드는 한 마디를 외쳤다.
-여전사, 나는 독신주의자지만 언젠가 내가 결혼을 한다면
그것은 너와 함께라는 것을 모르겠어?
그 순간에는 나는 그것을 긍정의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지훈과 헤어지고 난 뒤
지훈과 나 사이의 질서를 깨트리는 새로운 종류의 불안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지훈은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이상스럽게 흥분해서 말했던 것이다.
그러면 지훈은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다만 나를 친구로서 좋아하는 것일까?
나에 대한 감정이 어떤 것인지 지훈 자신은 알고 있는 것일까?
지훈은 사랑과 우정을 구별할 수 있을까?
만일 지훈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는 지훈을 나에게 묶어둘 수가 있을까?
지훈이 준호와의 모든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그러나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지훈이 한 말에 매달려 있는 내가 못마땅했다.
그래서 완강하게 의지적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마음이 편해지는 감정을 만들어내기로 했다.
(내가 결혼을 한다면 너와 함께라는 것을 모르겠어?)
이 말은 많은 것을 뜻할 수도 있고 아무 것도 뜻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아무 말도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아주 뚜렷하게 준호와도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생각에 괴롭힘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준호에게 충실하고 싶다.
나는 신의 경고를 듣지 않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보복을 받는다고 해도
내 손에서 그 사람을 놓지 못할 것이다.
준호는 이제까지 내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모든 방식으로 나를 사랑한다.
그 원천의 정서가 이기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무량의 단 샘물가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
나는 한 번의 이별을 경험함으로서 남의 남자를 탐낸다는 것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완전히 상실하는 것보다는, 훨씬 덜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나의 몸과 마음은 그가 하는 방식의 전부를 기억하고 익숙해져 있었다.
에피소드는 쌓여갔다.
우리는 함께 도서관엘 다니고 토론을 했다.
나는 준호를 위해 요리하길 좋아했고, 준호는 멋진 몸을 만들어 나를 감탄시켰다.
바이킹을 타고, 광장에서 포옹하고,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고, 사진을 찍고,
몇 번의 낭만적인 여행을 더 했으며
육체적으로 깊이 탐닉했다.
또 한 번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우리는 허락되지 않는 시간 외에는 떨어져 있지 않았고
서로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고 어두운 배후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준호는 졸업 후 청주인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피스텔을 얻어 머물렀는데
그것은 순전히 나와 함께 있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 사실이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준호를 멀리 보내고 싶지 않다는 욕심때문에 말리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대개 저녁 느지막이 만나 나의 아파트나 준호의 오피스텔에서 오전 까지 함께 보냈다.
준호는 심리적으로 안정됐고 열심히 공부했다.
의사면허에 대한 정열은 꺽이지 않은 것 같이 보였다.
나는 그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나 오늘은 준호에게서 어떤 불안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 보다 말수가 적었고 언제나처럼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미소가 배어있었지만
그 미소는 옅은 색깔의 먼 풍경 같았다.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는 식탁에 마주앉았고 늘 그랬듯 와인을 오픈했다.
-연희씨는 눈동자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맑아서 다른 세계가 비쳐 보일 정도에요.
연희씨의 눈이 얼마나 방황하는 가를 자신은 알고 있어요?
준호가 나의 손을 잡고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모르겠어요? 나는 벌써 오래 전에 단념했어요. 사람들과의 완전한 소통에 대해서.
나의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시각은 분명 축복이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남들이 별로 느끼고 살지 않아도 될 고통도 함께 떠안았어요.
삶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대부분의 일반적인 사람들과 그 분위기로부터 스스로 자기 자신을 떼어놓게 돼요.
그런데 나는 준호씨에게 나를 완전히 드러냈고 발가벗은 느낌인데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준호는 이렇게 말하며 따뜻한 시선을 주었지만
나는 준호의 말에서 잠깐 동안 짧고 어두운 공명 같은 것을 느꼈다.
준호는 눈을 내리떴다.
-무슨 일 있는 거에요?
나는 준호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확신하며 말했다.
그러나 준호가 마치 대답에 막힌 남학생처럼 입술을 굳게 다물면서
긴장한 얼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자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변화가 있는 것 같았다.
이 변화에 나는 숨막히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한잠도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불안의 고통은 나를 완전히 억누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준호를 향한 나의 믿음은
나를 강하게 보호하며 행복감을 주는 요소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순간 순간을
견딜 수 있을 만한 괴로움이 부드럽게 떠 있는 듯한 상태 속에서 보냈다.
이 상태는 며칠 동안도 죽 계속되더니 기다림의 광폭한 고통으로 옮겨졌다.
준호가 주말이 아닌데도 청주 집에 내려가 며칠 동안 연락이 없기 때문이었다.
주말 저녁에 나는 내키지 않는 술자리에 앉아있어야 했다.
프랑스에서 귀국한 친구 태환이의 환영 파티였다.
그것은 새로운 기분전환이 될 수도 있었지만
떠들썩하고 들뜬 분위기는 나를 오히려 피곤한 기분에 몰아넣었다.
나는 조금도 부드러운 빛이 없이 잠자코 있었다.
무리 속에 섞여 있을 때의 나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할지 늘 불분명 했다.
조금 늦게 주인공이 도착하고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도
나는 무슨 말을 할지 망설이고 있었고
유쾌한 연기를 하는 즉흥적인 재능이 나에게는 없었다.
사람들 틈에 섞어 있다는 건 나에게 언제나 스트레스였다.
태환이 나의 침묵을 방해하기 위해 곁으로 와 앉으며 말을 걸었을 때에도
나는 준호에 대한 걱정 때문에 안정되지 않은 기분에 놓여있었고 그 근심의 그늘은
가려지지 않았다.
-어이 채연희! 환영파티 해주러 온 사람 맞는거야?
여기서 인사 안 한 사람은 너 뿐이라구.
-내가 여기 너 때문에 온 줄 아니?
주인공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다곤 생각하지 마.
나는 그냥 불청객으로 기억되길 바래.
나는 너무나 날카로운 의식을 가지고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모욕이라고 느낄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채연희 참석여부는 김지훈 채임이라고 임무를 좀 줬지.
뭐 어쨌든 와줘서 고마워. 불청객 채연희양. 건배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태환은 나의 무례함에도 호쾌하게 웃으며
손도 대지 않고 있는 테이블의 내 술잔에 자기의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나는 태환을 싫어했다. 그러면서 좋아하기도 했다.
태환은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였다.
부유했고 미남이었고 똑똑하고 거만했으며 능수능란했다.
미국 시민권자로 일년의 1/3은 뉴욕에서, 1/3은 프랑스에서,
나머지는 한국에서 보내는 팔자 좋은 남자기도 했고 연애중독자였다.
모든 여자들은 태환의 귀국 소식만 들리면
번호표를 뽑고 줄서서 기다리며 간택되기를 바라는 멍청이들 같았다.
태환은 이것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듯 보였지만
결코 누구와도 진지하게 사귀는 것 같진 않았다.
이런 태환에게서 나는 일종의 위화감을 느꼈지만 호적수로서 적당히 견제하며
경쟁하는 것을 좋아했다.
태환은 자기에게 순순히 따라주지 않는 나의 도발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태환은 일종의 음흉한 쾌락을 즐기는 남자였다.
나는 이러한 태환의 화려한 여성편력의 좌표대로는 움직여주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오만한 우월의식으로 대하고 있었다.
태환과 지훈은 각별한 사이였고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돋보였지만
두 사람이 가진 매력이 성격은 전혀 달랐다.
태환이 수려한 외모와 마초적 기질과 성적인 페로몬 향을 가지고
여자들을 취하게 하는 남자라면
지훈은 볼품 없는 외모를 커버하고도 남을 만한 인격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표가 되고 있는 남자였다.
술자리는 길어졌고 나는 점점 더 지루해졌다.
준호에 대한 생각이 구름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건너편 테이블에서 지훈이 심각하고 침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일순간 육체적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감아버렸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지훈의 문자였다.
-여전사, 오늘 컨디션 엉망이신 모양인데 혹시 샌드백 필요해? 여기서 나갈까?
나는 핸드폰에 시선을 둔 채로 피식 웃었다.
-그래. 도망치자.
나는 거북함과 말없는 우울함 속에서 벗어나 지훈에게로 도피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나를 이처럼 혼란하게 만드는 한 마디를 외쳤다.
-여전사, 나는 독신주의자지만 언젠가 내가 결혼을 한다면
그것은 너와 함께라는 것을 모르겠어?
그 순간에는 나는 그것을 긍정의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지훈과 헤어지고 난 뒤
지훈과 나 사이의 질서를 깨트리는 새로운 종류의 불안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지훈은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이상스럽게 흥분해서 말했던 것이다.
그러면 지훈은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다만 나를 친구로서 좋아하는 것일까?
나에 대한 감정이 어떤 것인지 지훈 자신은 알고 있는 것일까?
지훈은 사랑과 우정을 구별할 수 있을까?
만일 지훈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는 지훈을 나에게 묶어둘 수가 있을까?
지훈이 준호와의 모든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그러나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지훈이 한 말에 매달려 있는 내가 못마땅했다.
그래서 완강하게 의지적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마음이 편해지는 감정을 만들어내기로 했다.
(내가 결혼을 한다면 너와 함께라는 것을 모르겠어?)
이 말은 많은 것을 뜻할 수도 있고 아무 것도 뜻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아무 말도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아주 뚜렷하게 준호와도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생각에 괴롭힘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준호에게 충실하고 싶다.
나는 신의 경고를 듣지 않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보복을 받는다고 해도
내 손에서 그 사람을 놓지 못할 것이다.
준호는 이제까지 내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모든 방식으로 나를 사랑한다.
그 원천의 정서가 이기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무량의 단 샘물가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
나는 한 번의 이별을 경험함으로서 남의 남자를 탐낸다는 것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완전히 상실하는 것보다는, 훨씬 덜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나의 몸과 마음은 그가 하는 방식의 전부를 기억하고 익숙해져 있었다.
에피소드는 쌓여갔다.
우리는 함께 도서관엘 다니고 토론을 했다.
나는 준호를 위해 요리하길 좋아했고, 준호는 멋진 몸을 만들어 나를 감탄시켰다.
바이킹을 타고, 광장에서 포옹하고,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고, 사진을 찍고,
몇 번의 낭만적인 여행을 더 했으며
육체적으로 깊이 탐닉했다.
또 한 번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우리는 허락되지 않는 시간 외에는 떨어져 있지 않았고
서로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고 어두운 배후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준호는 졸업 후 청주인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피스텔을 얻어 머물렀는데
그것은 순전히 나와 함께 있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 사실이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준호를 멀리 보내고 싶지 않다는 욕심때문에 말리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대개 저녁 느지막이 만나 나의 아파트나 준호의 오피스텔에서 오전 까지 함께 보냈다.
준호는 심리적으로 안정됐고 열심히 공부했다.
의사면허에 대한 정열은 꺽이지 않은 것 같이 보였다.
나는 그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나 오늘은 준호에게서 어떤 불안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 보다 말수가 적었고 언제나처럼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미소가 배어있었지만
그 미소는 옅은 색깔의 먼 풍경 같았다.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는 식탁에 마주앉았고 늘 그랬듯 와인을 오픈했다.
-연희씨는 눈동자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맑아서 다른 세계가 비쳐 보일 정도에요.
연희씨의 눈이 얼마나 방황하는 가를 자신은 알고 있어요?
준호가 나의 손을 잡고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모르겠어요? 나는 벌써 오래 전에 단념했어요. 사람들과의 완전한 소통에 대해서.
나의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시각은 분명 축복이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남들이 별로 느끼고 살지 않아도 될 고통도 함께 떠안았어요.
삶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대부분의 일반적인 사람들과 그 분위기로부터 스스로 자기 자신을 떼어놓게 돼요.
그런데 나는 준호씨에게 나를 완전히 드러냈고 발가벗은 느낌인데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준호는 이렇게 말하며 따뜻한 시선을 주었지만
나는 준호의 말에서 잠깐 동안 짧고 어두운 공명 같은 것을 느꼈다.
준호는 눈을 내리떴다.
-무슨 일 있는 거에요?
나는 준호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확신하며 말했다.
그러나 준호가 마치 대답에 막힌 남학생처럼 입술을 굳게 다물면서
긴장한 얼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자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변화가 있는 것 같았다.
이 변화에 나는 숨막히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한잠도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불안의 고통은 나를 완전히 억누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준호를 향한 나의 믿음은
나를 강하게 보호하며 행복감을 주는 요소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순간 순간을
견딜 수 있을 만한 괴로움이 부드럽게 떠 있는 듯한 상태 속에서 보냈다.
이 상태는 며칠 동안도 죽 계속되더니 기다림의 광폭한 고통으로 옮겨졌다.
준호가 주말이 아닌데도 청주 집에 내려가 며칠 동안 연락이 없기 때문이었다.
주말 저녁에 나는 내키지 않는 술자리에 앉아있어야 했다.
프랑스에서 귀국한 친구 태환이의 환영 파티였다.
그것은 새로운 기분전환이 될 수도 있었지만
떠들썩하고 들뜬 분위기는 나를 오히려 피곤한 기분에 몰아넣었다.
나는 조금도 부드러운 빛이 없이 잠자코 있었다.
무리 속에 섞여 있을 때의 나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할지 늘 불분명 했다.
조금 늦게 주인공이 도착하고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도
나는 무슨 말을 할지 망설이고 있었고
유쾌한 연기를 하는 즉흥적인 재능이 나에게는 없었다.
사람들 틈에 섞어 있다는 건 나에게 언제나 스트레스였다.
태환이 나의 침묵을 방해하기 위해 곁으로 와 앉으며 말을 걸었을 때에도
나는 준호에 대한 걱정 때문에 안정되지 않은 기분에 놓여있었고 그 근심의 그늘은
가려지지 않았다.
-어이 채연희! 환영파티 해주러 온 사람 맞는거야?
여기서 인사 안 한 사람은 너 뿐이라구.
-내가 여기 너 때문에 온 줄 아니?
주인공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다곤 생각하지 마.
나는 그냥 불청객으로 기억되길 바래.
나는 너무나 날카로운 의식을 가지고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모욕이라고 느낄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채연희 참석여부는 김지훈 채임이라고 임무를 좀 줬지.
뭐 어쨌든 와줘서 고마워. 불청객 채연희양. 건배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태환은 나의 무례함에도 호쾌하게 웃으며
손도 대지 않고 있는 테이블의 내 술잔에 자기의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나는 태환을 싫어했다. 그러면서 좋아하기도 했다.
태환은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였다.
부유했고 미남이었고 똑똑하고 거만했으며 능수능란했다.
미국 시민권자로 일년의 1/3은 뉴욕에서, 1/3은 프랑스에서,
나머지는 한국에서 보내는 팔자 좋은 남자기도 했고 연애중독자였다.
모든 여자들은 태환의 귀국 소식만 들리면
번호표를 뽑고 줄서서 기다리며 간택되기를 바라는 멍청이들 같았다.
태환은 이것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듯 보였지만
결코 누구와도 진지하게 사귀는 것 같진 않았다.
이런 태환에게서 나는 일종의 위화감을 느꼈지만 호적수로서 적당히 견제하며
경쟁하는 것을 좋아했다.
태환은 자기에게 순순히 따라주지 않는 나의 도발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태환은 일종의 음흉한 쾌락을 즐기는 남자였다.
나는 이러한 태환의 화려한 여성편력의 좌표대로는 움직여주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오만한 우월의식으로 대하고 있었다.
태환과 지훈은 각별한 사이였고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돋보였지만
두 사람이 가진 매력이 성격은 전혀 달랐다.
태환이 수려한 외모와 마초적 기질과 성적인 페로몬 향을 가지고
여자들을 취하게 하는 남자라면
지훈은 볼품 없는 외모를 커버하고도 남을 만한 인격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표가 되고 있는 남자였다.
술자리는 길어졌고 나는 점점 더 지루해졌다.
준호에 대한 생각이 구름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건너편 테이블에서 지훈이 심각하고 침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일순간 육체적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감아버렸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지훈의 문자였다.
-여전사, 오늘 컨디션 엉망이신 모양인데 혹시 샌드백 필요해? 여기서 나갈까?
나는 핸드폰에 시선을 둔 채로 피식 웃었다.
-그래. 도망치자.
나는 거북함과 말없는 우울함 속에서 벗어나 지훈에게로 도피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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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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